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7)

2. 적그리스도의 이익

4) 앞날과 운명

지난 시간에는 적그리스도의 이익 중 네 번째, ‘앞날과 운명’을 교제하면서 이 항목을 다시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먼저 이 다섯 가지를 복습해 보아라. (첫 번째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였고, 두 번째는 ‘어떻게 본분을 대하는가’였으며, 세 번째는 ‘책망과 훈계를 어떻게 대하는가’였고, 네 번째는 ‘봉사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교회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대하는가’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 항목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해 교제하였다. 우리는 먼저 ‘깊이 파고들다’라는 말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주된 태도를 폭로했다. ‘깊이 파고들다’는 적그리스도 부류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주로 보이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연구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道)로 여겨 받아들이거나 대하지 않는다.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게 아니라 늘 자신의 욕망과 야심, 앞날과 운명을 목표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종착지와 앞날, 운명을 찾는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주된 태도는 항상 자신의 앞날, 운명과 연결 짓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로 볼 때, 이 부류 사람의 본성 본질은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믿고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분석하며, 하나님 말씀 속에서 축복과 이득을 찾고 크게 잇속을 차리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믿을 것 같으냐? 그들이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겠느냐? 본질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다. 그럼 그들은 왜 하나님 말씀을 받들고 읽겠느냐? 그들의 본성 본질, 속셈, 욕망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진리를 얻고, 성품 변화의 길을 얻어 구원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을 찾겠느냐? 비밀과 천기(天機), 대단한 도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묘한 지식을 찾는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이 부류의 태도와 본성 본질로 볼 때, 그들은 부정할 여지 없는 불신파임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좋은 종착지와 앞날, 운명뿐임을,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갖가지 기회와 길을 찾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복받으려는 욕망과 야심을 충족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류는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거나 그들이 지켜야 하는 도로 여기지 못한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이런 태도를 보인다. 그럼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요구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또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오늘 우리는 두 번째 항목인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본분을 대하는가’에 관해 교제함으로써 적그리스도가 본분 이행 측면에서 어떤 모습과 태도를 보이는지 폭로하도록 하겠다.

(2)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본분을 대하는가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로 대하지 않기에 하나님 말씀 중 인류에게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라고 요구한 항목도 당연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부탁한 본분을 거부하면서 이행하지 않으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복받을 기회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렇게 일종의 거래가 생성된다. 어떤 거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으며,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진리를 얻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앞으로 천국에서의 복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복받을 기회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여러 차례의 교제와 설교를 통해 이런 정보를 얻은 후, 마음속 깊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심을 갖는다. 이런 욕망과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할 수 있다는 의미겠느냐? 적그리스도 부류의 본성 본질을 볼 때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럼 그들은 또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다하겠느냐? 이와 관련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장부가 하나씩 있을 것이고, 그 장부 안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마음속 장부에 어떻게 계산해 놓겠느냐? 그들은 아주 자세히, 정확하게, 제대로, 열심히 계산한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장부가 아니다. 본분을 이행하기로 결정할 때 그들은 먼저 이렇게 계산한다. ‘지금 내가 본분을 이행하려면 가정에서 가족들과 누리는 즐거움을 버려야 해. 속세에서의 앞날과 일자리도 버려야 하고. 내가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고 본분을 이행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말세에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들은 모두 큰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어. 그렇게 말씀하신 이상,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행하고 이루실 거야. 이 밖에도 하나님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약속을 하셨어!’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든 뒤, 그는 그 말씀 중 말세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것들을 적잖이 분석하는데, 거기에 자신의 개인적인 상상과 그 말씀에 대한 분석, 연구를 통해 생긴 관념이 더해져 본분 이행에 깊은 관심과 충동을 느낀다. 그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하겠노라고, 이 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겠노라고, 모든 육적인 즐거움과 앞날을 내려놓겠노라고 철석같이 맹세하고 다짐한다. 이렇게 기도했고 말만 봐서는 다 옳은 것 같지만, 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오직 그와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그의 다짐과 기도한 말을 들으면 불순물이 없는 것 같고, 오직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본분을 다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려는 생각뿐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해야 본분 이행을 통해 복을 받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에게 자기가 치른 대가를 보여 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자기가 치른 대가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하나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의 행동을 기억하고 마지막에 그가 원하는 앞날과 복을 줄지 계산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앞날이나 복받는 것, 좋은 종착지, 나아가 면류관에 마음속 깊이 한껏 기대를 품고, 큰 믿음을 갖는다. 또 그들은 이런 속셈과 포부를 갖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한다. 그러니 그들이 이행하는 그 본분에 하나님이 바라는 진심과 참된 믿음, 충심이 있겠느냐? 이때는 참된 충심이나 믿음, 진심을 찾아볼 수 없다. 본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그는 거래하겠다는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익에 이끌리고 야심과 욕망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본분을 이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은 무엇이겠느냐? 거래와 교환을 하려는 것이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전제 조건은 ‘본분을 이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인류에게 예비된 모든 복과 이점들을 다 얻어야 한다고.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 거야.’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속셈과 야심, 욕망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하는데, 얼마간 진심이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이제 막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열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진실한 믿음과 충심이 없다. 그저 그 정도의 열정이 있을 뿐, 진심을 이야기할 것은 못 된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본분 이행 태도를 통해 볼 때, 그의 내면은 거래 심리로 점철되어 있으며,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고 면류관을 얻고 상을 받는 등 이점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출교되기 전까지 본분을 이행한다. 심지어는 그들이 버린 것, 고생한 것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많을 때도 있다. 그들의 헌신과 그들이 치른 대가, 그들이 뛰어다닌 길은 바울보다 부족하지 않다. 이는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의 행위나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는 다짐에 관해 논한다면 그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과 성품, 그 사람이 표출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일의 성질과 본질에 근거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거나 대할 때, 상대의 표면적인 행위와 상대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 얼마나 되는지에 근거하여 그를 규정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대하는 태도는 처음부터 이러했다. 그들은 야심과 욕망, 거래 심리를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한다. 이는 그들이 본분 이행 전에 마음속 깊이 계산하고 계획한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계산한 핵심과 중점은 무엇이겠느냐? 복받는 것과 좋은 종착지에 목적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재난을 피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들의 속셈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연구하는데, 아무리 연구해도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 말씀 가운데 실행의 길이 있으며, 하나님 말씀은 사람을 정결케 하여 성품 변화를 이루고 구원받게 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들은 도무지 이러한 것들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읽든 그들이 가장 관심 갖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은 그저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과 약속을 준다는 것뿐이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중점적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찾은 후, 그들은 구명줄을 찾은 것 같고, 또 자기가 큰 복을 받을 것 같아 스스로 이 시대의 가장 복받은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몰래 기뻐한다. ‘나는 때를 잘 맞춰 태어났어. 역대의 사도나 선지자들도 말세 그리스도를 뵙지는 못했잖아. 하지만 지금 나는 말세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 나는 큰 복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이건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을 기회라고! 이방인들한테는 이런 복이 없어. 그들이 이번 생에 아무리 잘 누리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대재난이 닥치면 모두 사라지겠지. 그러니까 반드시 속세의 육적인 누림을 내려놓아야 해. 그런 것들은 아무리 잘 누려 봤자 잠깐이고, 뜬구름 같은 거니까. 멀리 보자고. 앞으로 더 큰 축복과 상, 면류관을 얻어야지!’ 그래서 그들은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경고한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아무리 많은 고생을 하고 아무리 많은 길을 뛰어다닐지라도, 설령 감옥살이를 하거나 고문을 받을지라도, 어떤 난관에 부딪힐지라도 반드시 버티고 버티고 버텨야 해! 낙담하지 말자.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는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면 ‘끝까지 따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하나님 말씀이 반드시 내게서 이루어질 거야.’ 그들이 마음속으로 품고 믿는 모든 견해와 생각 중에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진리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전부 개인의 앞날과 운명을 위해 계산하고 계획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 말씀이 인류에게 어떤 요구를 하는지 관심이 없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또 인류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요구에 대해서는 마음속 깊이 반감과 거부감을 느끼며, 심지어는 관념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말씀을 볼 때 마음속으로 반발하고 괴로워하다가 보지 않고 넘겨 버린다. 또 인류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드러내고 긍휼히 여기고 이해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지겨워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 말씀들이 너무 거짓되다고 생각한다. 이 밖에도 심판과 형벌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이 사람들 사이에서 행한 시련 사역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반감과 거부감을 느끼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며 회피한다. 그들은 오로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나 축복과 관련된 말씀에만 큰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는 그것을 수시로 들고 다니며 읽으면서 한시바삐 복받으려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지금 당장 천국으로 들림 받아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그들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기가 복을 받을 수 있을지 의심을 품으며 ‘믿음’이 흔들리는데, 의지가 약해져서 움츠러들려고 할 때면 이 말씀들을 꺼내 읽으면서 본분 이행의 동력으로 삼는다. 어떤 편, 어떤 단락의 말씀이든 그들은 하나님 말씀 속 진리를 묵상하는 법이 없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을 체험하려는 마음도 전혀 없으며, 나아가 인류의 패괴 본질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깊이 패괴된 인류의 진상을 꿰뚫어 보고자 하지도 않는다. 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요구, 권면을 모두 흘려들으면서 개의치 않고, 경시하고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대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이런 말씀과 행사는 형식에 불과해. 이걸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어? 누가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할 수 있겠냐고. 하나님의 이 말씀들은 쓸데없는 것들이야. 사람이 본분 이행을 통해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이 가장 실질적이지. 그 무엇도 이것만큼 실질적이지는 않다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말씀 속에서 이리저리 찾다가 그 길을 찾은 후, 본분 이행을 복받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여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 부류가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이자 목적이며, 그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속으로 계산하는 내용이다. 그럼 그들의 본분 이행 과정에서 또 어떤 모습과 표출을 통해 이 부류의 본질이 부정할 여지 없는 적그리스도 본질임을 알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순전히 자기만의 속셈과 목적, 복받으려는 욕망을 갖고 본분을 이행한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들의 목적과 태도는 당연히 그들이 밤낮으로 생각하는 복받는 것, 좋은 종착지, 좋은 앞날과 운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장사하는 상인과 딱 세 마디만 해 봐도 직업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일을 하든 다 명리나 지위와 연관되며, 복받는 것, 앞날, 운명과 관계가 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은 이러한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 부류의 본성 본질이다. 그들이 이런 본성 본질을 지니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들이 도태되는 최후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각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있고, 각 부류의 본분과 사역에도 요구와 명확한 가르침이 있다. 이러한 말씀은 전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며, 이 요구들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 실행하고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과 요구에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그들이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겠느냐?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겠느냐?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볼 때 그들이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 집의 안배대로 본분을 잘 이행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그러지 못한다.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본분 이행에 어떤 원칙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지, 하나님 집의 규정은 무엇인지 등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먼저 그 본분을 이행하면서 복과 상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본다. 만약 복과 상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면, 그들은 그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설령 이행할지라도 대충 건성으로 임한다. 적그리스도는 복을 받기 위해 억지로 얼마간 본분을 이행한다. 또 그 본분을 이행하면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지,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지, 상부와 하나님이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신경 쓰는 것은 전부 이런 것들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먼저 어떤 이득을 볼 수 있는지,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확실히 해 두려고 한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행복할 수 있을지 등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달으려고, 패괴 성품을 해결해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려고 구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런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복을 받고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교회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어떻게 지위를 얻고 남들의 우러름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떻게 두각을 드러내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만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결코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되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 반면 그들은 늘 교회에서 첫자리를 차지하여 무엇이든 자기가 결정하려고 하고, 지도자가 되어 남들이 자기 말을 듣게 하려 한다. 그래야 만족한다. 너희들이 보아라. 적그리스도의 마음에는 오직 이런 것뿐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느냐? 진심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려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감투를 쓰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들은 ‘나는 세상에 있을 때부터 승부욕이 강했지.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든 첫 번째가 될 거라고. 나는 두 번째를 원하지 않아. 누구든 나를 부하가 되게 하려는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어떤 사람들 속에 있든 대장이 되고 싶어. 뭐든 내가 결정하고 싶다고.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설득시켜 나를 우러러보게 만들고, 나를 리더로 뽑게 할 거야. 지위가 생기면 뭐든 내가 결정할 거야. 모두 내 말을 듣고 내 뜻을 따라야 할 거고. 모두 내가 통제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높은 지위와 첫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될 마음은 절대 가질 수 없다. 그들이 가장 열중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명령을 내리고 훈계하여 자기 말을 듣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할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아가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 진리 원칙을 구하여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두각을 나타내 리더에게 우러름을 받고 발탁될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며 궁리한다. 리더 일꾼이 되어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그가 종일 생각하며 바라는 것이다. 그는 남의 지도를 받거나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며, 묵묵히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더더욱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두각을 나타내거나 사람들 위에서 그들을 지도할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소극적으로 변하고 태만해진다. 아무도 그를 칭찬하거나 숭배하지 않으면 더더욱 의미가 없다고 느끼고, 본분을 더더욱 이행하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본분을 이행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뭐든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면, 그는 기운이 넘치고 어떤 고생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개인의 속셈을 갖고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승부욕과 자신의 욕망, 야심을 충족시키려 한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항상 남을 이기려고 하며 매사에 자신을 내세우고 남들 앞에 나서고 남들 위에 서려고 한다. 이 밖에도 어떻게 해야 지금의 지위와 명예, 명성을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의 지위나 명망을 위협하는 자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상대를 무너뜨리고 제거하며, 심지어는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 이행에 충성심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을 비열한 수단으로 억누른다. 본분 이행에서 남다른 성과를 보이는 형제자매들한테는 질투와 증오를 가득 품는다. 특히 형제자매들의 옹호와 지지를 받는 사람들은 더더욱 증오한다. 그는 이들이 자기의 추구와 명예, 지위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맹세한다. ‘네가 있는 한 내가 없고, 내가 있는 한 네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공존할 수 없다. 맹세컨대 너를 쓰러뜨리고 제거하지 못하면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고 자신을 폭로하거나 자기 지위에 위협이 되는 형제자매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약점을 잡아 판단하고 정죄하여 철저히 꺾어 놓고 쓰러뜨린 후에야 손을 멈춘다. 누구를 대하든 그들은 똑같은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기만 하면 상대를 무너뜨리고 제거하려 한다. 그들에게 아첨하고 알랑거리는 사람은 다 그들의 골수 지지자들이다. 그 사람들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든,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에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오든 그들은 전부 감싸고 보호해 준다.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늘 자신의 명리와 지위를 경영하고, 자신의 독립 왕국을 경영한다. 적그리스도의 본분 이행의 본질은 자신의 독립 왕국과 앞날, 운명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한 팀에서 십여 명을 이끌고, 어떤 적그리스도는 한 교회나 더 많은 사람들을 이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끌든, 그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이미 그 사람들을 통제하며, 그들 사이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런 일을 어떻게 정죄하고 혐오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손안의 권력을 단단히 움켜쥐고 자기 수하의 통제 가능한 사람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데 신경 쓸 뿐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이나 동기를 통해, 그들의 본질이 흉악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본분을 이행하는 모습에서 보면 그들은 어떤 성품을 표출하느냐? 마찬가지로 흉악한 성품을 표출한다. 이 흉악한 성품은 어떻게 규정된 것이냐?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을 하고 대가를 치르기는 하지만, 그들이 이행하는 본분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역지침을 전혀 실시하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 집이 각 사역에 정해 놓은 원칙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의 개인적인 기호와 권력욕, 뭔가를 하고자 하는 그들의 개인적 바람을 충족시킬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은 적그리스도의 부류가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조건이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하기만 하면, 이렇게 대가를 치르고 버리고 헌신하기만 하면 마지막에 하나님은 반드시 나한테 면류관을 주시고 상을 주실 거야!’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이 강조하고 인류에게 거듭 제시하는 요구와 원칙에 대해 그들은 신경 쓰는 법도, 중요하게 여기는 법도 없다. 그들은 그것을 그저 하나의 수식어로 여기고, 이런 마음을 가질 뿐이다. ‘당신이 어떻게 요구하시든 저는 제 권력이나 제가 추구하는 바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고, 제 소원이나 야심을 내려놓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본분을 이행할 맛이 나겠습니까? 무슨 힘이 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할 때 보이는 태도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상부에서 각 유형의 사역에 어떤 요구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있든, 적그리스도는 듣지 않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또 상부에서 아무리 구체적으로 말해도, 그 부분의 사역에 대해 아무리 엄격하게 요구해도, 그는 듣지 못한 척, 못 알아들은 척하며, 아래에서 여전히 제멋대로 굴면서 나쁜 짓을 저지르며 자기 뜻대로 행동한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나 상부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행동하면 자신의 지위가 없어질 것이고, 손에 쥔 권력도 내려놓게 될 거고, 권력이 산산조각 날 거라고 생각한다. 또 진리와 하나님 말씀의 요구대로 행동하는 것은 은연중에 자신의 권력을 공격하고 박탈하는 것이며 자신의 명성을 타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만약 내가 당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나라는 사람이 무능하고 리더십이 부족해 보이지 않겠어? 만약 당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내 잘못을 인정한다면 형제자매들이 앞으로 내 말을 듣겠어? 위신이 서겠어? 상부의 요구대로 행동한다면 나를 뽐낼 기회가 사라지겠지. 그래도 형제자매들이 나를 숭배할까? 내 말을 들을까? 사람들이 모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본분을 이행하는 의미가 있나? 이 사역은 또 어떻게 하겠어? 사람들 사이에서 내 권위가 사라지고 위신이 땅에 떨어질 거야.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면, 나라는 리더는 실권을 잃게 되지 않겠어? 허수아비가 되지 않겠냐고. 그럼 내가 일할 맛이 나겠어? 나라는 리더가 실권을 잃고 뭘 하든 의미가 없다면 그런 나한테 앞날이 있을까?’ 적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든 모두의 위에 서서 훗날의 면류관과 상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선민들 사이에서 뛰어난 사람, 남들의 지도자가 되기만 하면 훗날의 면류관과 큰 복을 얻을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언제든 손안의 권력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자칫 잘못했다가 자신의 손에 쥔 권력을 빼앗기거나 권력이 약해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본연의 위치에서 자기 능력을 다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거나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기회를 틈타 자신이 곧 얻으리라 생각하는 면류관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설사 몇몇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집의 요구를 규례로 여겨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임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일부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늘 권력을 잡고 권력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며, 지위를 가지고 그 지위에 올라서서 사람들을 꾸짖고 호령하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적그리스도도 있다. 그들은 이런 걱정을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앞에 나서다 잘못하면 화를 입는 법이야. 나는 그런 멍청이가 될 수 없어. 내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3할만 보여 주는 거야. 나머지 7할은 뒷일을 위해 남겨 두자고. 하나님 집에서 뭐라 하든, 어떤 요구를 하든, 겉으로는 다 그러겠노라 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 누가 이끌든 따르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찬성하는 거야. 상부에서 준 규례를 지키면서 거스르지 않으면 돼.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해봤자 소용없어. 본분은 힘만 좀 쓰고 어지간하게만 이행하면 되지. 바보가 되지는 말자고. 무슨 일을 하든 여지를 남겨 둬야 아무것도 못 얻고 게도 구럭도 다 잃는 신세를 면할 수 있지.’ 이런 부류의 적그리스도는 책임감 있게 본분을 이행하고 늘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자기는 그런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지위를 추구하고 자신의 권력을 경영하면 언젠가는 폭로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진리를 실행하려면 대가를 치르고 공을 들여야 하며 진심을 바치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럼 많은 고생을 해야 하기에 그들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절충안을 찾아 앞에 나서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 중용의 길을 걸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하라는 대로 하자. 형식적으로만 하면 그만이지. 더 잘 하라고 하면 안 할 거야. 더 잘 하려면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자료도 많이 찾아야 하는데, 얼마나 피곤하겠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추가로 상을 주신다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추가로 상을 준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 것 같단 말이야. 그렇다면 굳이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쉬엄쉬엄 하면 그만이지.’ 이런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향해 노력하지는 않고 오히려 건성으로 임하거나 소극적으로 태만하게 구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적그리스도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이냐? 먼저,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건의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책망과 훈계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만약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적그리스도가 아닐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왜 본분을 이행하려 하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는 전적으로 ‘현세에 백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말에 따라 본분을 이행한다. 이것은 하나의 거래가 아니겠느냐? 이는 전적으로 거래이다. 거래의 성질을 볼 때, 그것은 일종의 사악한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의 어떤 점이 사악하냐? 누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선포하신 수많은 진리를 들어도 추구하는 법이 없으며, 지위를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개인의 이익을 얻고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을 잡는 데 목적을 둡니다.) 그 말도 맞다. 그런 의미가 있지만, 충분히 구체적이지는 않구나. 만약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잘못인 줄 분명히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지금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려는 심산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 이행을 통해 상과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면서 본분 이행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정확히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럼 먼저 사람의 본분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은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기 위해 사역한다. 물론 하나님은 인류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그 요구들이 바로 사람의 본분이다. 이를 통해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의 사역과 인류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은 가장 정당한 일이다. 이는 인류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정의로운 일이다.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창조주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권세하에 살면서 하나님의 모든 공급과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므로 마땅히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행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고상한 일이다. 인류 가운데 어떤 일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없으며, 지음 받은 사람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없다. 땅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창조주께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의 조류를 좇지 않고, 하나님의 인솔과 인도에 순종하며, 오로지 창조주의 말씀을 듣고, 창조주가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말씀대로 살아갈 뿐이다. 이는 가장 진실되고 힘 있는 증거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훌륭한 증거다. 한 피조물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창조주를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인류 가운데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져야 할 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맡기든, 피조물은 마땅히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인류에게 행복한 일이자 영광스러운 일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기념할 만한 일로, 긍정적인 사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에게 어떤 약속을 주는지는 창조주의 일로, 피조된 인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으로, 사람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뭔가를 주면 너는 뭔가를 얻는 것이고,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네가 할 말은 없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창조주에게 협력하여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능력을 다하는 것은 본래 거래가 아니고 교환도 아니다. 사람은 태도나 행위, 행동 방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어떤 약속이나 축복도 맞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가 너희에게 이런 일을 맡겼으니 피조물로서 마땅히 그 본분과 부탁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 거래가 있느냐? (없습니다.) 창조주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당연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너희 각자에게 맡기기를 원하는 것이고, 피조된 인류 입장에서 보면 기꺼운 마음으로 그 본분을 받아들여 이생에 다해야 할 의무와 살아 내야 할 가치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거래는 없다. 이것은 등가 교환이 아니며, 어떤 상이나 사람이 상상하는 다른 설명과는 더더욱 무관하다. 그것은 절대 교환이 아니며, 본분 이행을 위해 바친 대가나 노동력으로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고 사람도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는 인류에게 부탁을 맡기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하나님이 준 부탁을 받아들인 후 자기 본분을 이행한다. 이 일, 이 과정에는 거래가 없으며, 이는 그저 단순하고 아주 정당한 일이다. 부모가 자녀를 낳은 후 무조건 불평 없이 키울 뿐, 자녀가 앞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느냐 안 하느냐에 관해서는 자녀를 낳은 그날부터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낳은 후 “저는 이 아이가 커서 저를 보살피고 효도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키우는 거예요. 만약 이 아이가 나중에 효도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목을 졸라 죽여 버릴 겁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부모는 없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녀가 효도할 수 있든 없든 부모는 그렇게 계속 자녀를 키운다. 아무리 고생스럽고 힘들어도 자녀를 성인으로 키우며 자녀가 잘되기만 바란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과 의무에는 조건도, 거래도 없다. 이 점은 경험 있는 사람은 모두 이해할 것이다. 많은 부모가 자녀의 효도 여부에 대해 어떤 요구 기준이 없다. 자녀가 효도하면 기뻐하며 말년을 조금 즐겁게 보내고, 자녀가 효도하지 않아도 그냥 흐름에 맡긴다. 비교적 생각이 트인 부모라면 다수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이든,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든 다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고, 사람의 소임 안에 있는 일이다. 물론,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런 것은 작은 일이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비교적 아름답고 정의로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 왔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올바른 일이며, 사람이 이행해야 할 책임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이런 전제하에 인류 가운데서 더 큰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한층 더 깊은 사역을 했다. 그것은 어떤 사역이겠느냐? 바로 인류에게 진리를 공급하여 인류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더는 사탄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완전히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여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성과이다. 그러므로 본분 이행 과정에서 하나님은 너에게 한 가지 일만 꿰뚫어 보거나 일부 진리만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여 얻게 되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하는 데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네가 정결케 되고 구원받아 마지막에는 창조주의 얼굴빛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이 ‘얼굴빛’에는 많은 파생 의미와 파생 내용이 있는데, 오늘은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 이런 사람에게 약속을 주고 축복을 주며 그들에 대해 다른 말씀을 할 텐데, 이는 아주 먼 일이다. 현재를 보면 하나님 앞에 와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은 무엇이냐? 진리이자 생명이며, 그것은 모두 인류 가운데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인류 가운데 아무 피조물이나 쉽게 창조주의 손에서 그런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 이렇게 위대한 일이 적그리스도 부류에 의해 왜곡되어 거래로 변했고, 그들이 하나님 손에서 면류관을 받아 내고 상을 받아 내는 거래로 변했다. 이런 거래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의로운 일을 가장 추하고 가장 사악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한 짓이 아니냐? 이런 점을 보면 적그리스도는 사악하지 않으냐? 적그리스도는 너무 사악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악함 중 한 측면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말세에 육신을 입고 사역하며 수많은 진리를 선포해 인류에게 하나님 경륜의 모든 비밀을 밝혔고,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알고 진입해야 할 모든 진리도 공급했다. 이러한 진리, 이러한 하나님 말씀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배와 같다. 진리는 패괴된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이자 인류의 가장 귀한 보물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요구, 뜻은 인류가 알고 파악해야 하는 것,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얻어야 할 진리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이러한 말씀을 이론이나 구호, 심지어는 마이동풍으로 여기며, 더 심하게는 멸시하고 부정한다. 그들은 인류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을 사기꾼의 거짓말로 여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름다운 것이나 이익은 뭐든 다 사람의 손으로 쟁취하고 사람의 노력으로 빼앗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 그들은 야심과 꿈이 없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마음속으로 극도로 싫어하고 증오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이론이나 구호로만 치부하면서 권력, 이익, 야심, 욕망 등은 정의로운 사업으로 여겨 경영하고 추구한다. 또 은사를 통해 힘쓰는 것을 빌미로 하나님과 거래하며 천국에 들어가고 면류관을 얻어 더 큰 복을 누리고자 한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이 헌신하고 고난을 겪은 자, 가장 큰 대가를 치른 자가 윗자리에 앉게 되고,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는 자, 말재간이 좋은 자, 강도와 같은 정신으로 폭력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 보세요. 마치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는 바울의 말처럼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바울의 이 말을 신봉하며,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와 가르침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건 싸워야 할 싸움을 마치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리면 마지막에 면류관을 얻는 거야. 이건 진실이라고. 하나님의 뜻도 이런 것 아니겠어?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말씀을 하시고 수없이 많은 설교도 하셨지만, 결국 그 뜻은 면류관을 얻고 상을 받고 싶다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고 싸우고 강탈하고 빼앗아야 한다고 인류에게 알려 주시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논리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사역을 늘 이렇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경륜을 이렇게 해석한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사악하지 않으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진리를 왜곡하며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왜곡한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하나의 적나라한 거래로 여기며, 창조주가 인류에게 이행하라고 요구한 본분 역시 하나의 적나라한 박탈, 침략, 기만, 거래로 생각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래의 수법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그것이야말로 공평하고 합리적이며 가장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악한 논리 아니겠느냐? 사탄의 논리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마음 깊은 곳에 늘 이러한 관점과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너무도 사악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한다!

방금 교제한 몇 가지 내용에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을 간파할 수 있겠느냐? (네.) 첫 번째는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으냐?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을 거래로 여겨 종착지와 이익을 얻어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하시고, 아무리 많은 말씀을 하시며, 아무리 많은 진리를 선포하셔도 그는 개의치 않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심산으로 본분을 이행합니다.)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을 거래로 여긴다. 그는 거래하고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본분을 이행하고 복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분 이행이라는 긍정적인 것을 왜곡하고, 피조물의 본분 이행의 가치와 의미를 훼손하며, 피조물의 본분 이행의 정당성을 비방한다. 또 그는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거래로 변질시킨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사악함이다. 두 번째, 적그리스도는 긍정적인 사물이 있다는 것,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디가 사악하냐? 하나님 말씀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인데 적그리스도는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구호나 이론으로 여기며,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왜곡한다. 여기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이 말씀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며, 인류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 정결케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자 진리이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약속을 적그리스도는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구원받는다고요? 정결케 된다고요? 그게 무슨 소용이죠?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정결케 되면 정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나요? 제가 보기엔 꼭 그러리란 법은 없는 것 같은데요!”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고, 그저 하나의 가르침, 도리로 여긴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지난날 하나님이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자’라고 정의한 말씀은 진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말을 했겠느냐? 어떤 근거가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살피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을 보고 이를 근거로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자’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을 하루 이틀 살핀 것이 아니다. 욥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모습을 하루 이틀 보인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런 모습을 한두 가지 일에서만 보인 것도 아니다. 그럼 사탄은 이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겠느냐? (의심하고 의구심을 품습니다.) 사탄은 의심할 뿐만 아니라 부정한다. 사탄의 그 말을 까놓고 말하면 “당신은 욥에게 더없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소와 양, 수많은 재산을 주셨지요. 그가 당신을 경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욥을 순전한 자라고 하시지만, 그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은 진리가 아니고 진실하지 않으며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 말을 부정합니다.”라는 것이다. 사탄은 이런 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자이다.”라고 했을 때, 사탄이 뭐라고 했느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틀렸습니다. 그는 순전한 자가 아니에요! 그는 당신에게서 이득과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축복과 이득을 모두 거두어 가신다면 그는 당신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순전한 자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물음표나 가위표를 붙인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고, 모든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定義)와 가르침을 부정한다. 이는 사탄이 진리를 부정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실상은 이런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인류를 폭로하고 형벌하고 심판하며 인류에게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인정하고 ‘아멘’을 외치겠느냐? 준행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말씀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대놓고 ‘틀렸어! 그렇게 된 거라고? 왜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다라는 거지?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내 생각은 달라. 당신이 하는 말은 왜 이렇게 귀에 거슬리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 만약 나한테 말하라고 했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태도를 볼 때,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지키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두 번째 사악한 점이다. 세 번째,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여 인류가 사탄의 패괴 성품과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받게 하려는 하나님 경륜의 취지를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왜 그들의 성품을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그들은 이것을 하나의 거래로 여기는 것도 모자라 그냥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누구와 누구의 게임이겠느냐? 전설 속 하나님과 인간 세상의 고뇌에서 벗어나 천국에 들어가려는 무지몽매한 사람들 사이의 게임이자 거래이다. 한쪽은 때리려고 하고 한쪽은 맞으려고 하며, 한쪽은 주려고 하고 한쪽은 받으려고 하는 게임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렇게 바라본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이 표출된 것이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마음에 가득 찬 야심과 종착지를 얻고 복을 받으려는 욕망 때문에 인류 중 가장 아름다운 사업과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하나의 게임이나 거래로 왜곡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이다. 이 밖에, 적그리스도에게는 가소롭고 웃기게 들리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무엇이 웃기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이며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거래에 박차를 가해 성사시키고자 한다. 웃기지 않느냐? 물론, 이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점이 아니라 어리석은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경륜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과 경륜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 모든 사실의 존재를 믿지 않고, 더욱이 이 모든 사실의 진실성도 믿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이득을 얻고 덕을 보려고 하고, 기회를 틈타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무척 똑똑하다고 생각하니, 웃기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니, 어리석기 그지없다.

방금 우리는 세 가지 모습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을 해부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보충하였다. 바로 적그리스도는 심각하게 어리석어 보는 이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세 가지는 무엇이었느냐? (첫째,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을 거래로 여깁니다. 둘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긍정적인 사물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이론이나 구호로 여깁니다. 셋째, 적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하나의 적나라한 거래나 게임으로 여깁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 (적그리스도는 우습고 심각하게 어리석습니다.) 무척 구체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성품을 지닌 부류는 이성과 정신이 좀 비정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디가 비정상이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거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앞날과 운명을 얻어 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습니다. 그의 사상은 모순적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부정하는 것이니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요. 그래서 그는 이성이 비정상적이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상 인성에 결핍된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생각과 계산이 제 뺨을 때리는 것임을 모른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결코 진리를 받아들이는 법이 없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늘 그릇된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럼 그는 자신이 걷는 길이 그릇된 길임을 알겠느냐? 분명 모를 것이다. 만약 안다면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잇속을 챙기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라고. 당신들은 모두 간파하지 못했으니 바보야. 왜 그렇게 우직한 거야? 하나님이 어디에 있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잖아. 하나님의 약속이 꼭 이뤄진다는 법은 없다고! 내가 얼마나 영민한지 보란 말이야. 나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열 걸음을 내다보는데, 당신들은 한 걸음도 계산하지 않잖아.’ 그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2~3년간 본분을 이행한 후 생각한다. ‘나는 지난 몇 년간 본분을 이행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뭔가 이적을 보거나 특이한 현상을 목격하지도 못했고. 예전처럼 지금도 하루에 세끼 밥을 먹고,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프지. 밤에 한두 시간 덜 자면 다음 날 졸리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니야! 모두들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존재라고, 본분을 이행하면 큰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몇 년이나 본분을 이행했지만 뭔가 달라진 게 없어. 여전히 똑같잖아? 수시로 연약해지고 소극적 상태에 빠지고 원망하지. 또 모두들 진리와 하나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마음속으로 늘 부모님과 아이들을 생각하고, 심지어는 예전에 속세에서 살던 날들이 그립기까지 해. 그럼 하나님은 사람에게 대체 무슨 사역을 하신 걸까? 나는 뭘 얻은 거지? 모두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얻으면 얻어진다고 하는데 얻어졌다면 남들과 달라져야 하는 거 아냐? 지금 나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고,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얼굴의 주름도 많아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점점 젊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왜 젊어지기는커녕 늙고 있는 거지? 하나님 말씀도 정확하지가 않으니 나 자신을 위해 따져 봐야겠어. 내가 보기에 하나님을 믿는 건 이런 거야.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배하고 찬송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바쁘게 지내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 옛날과 뭔가 달라진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심각해지지 않겠느냐? 그는 골똘히 생각한다. ‘지금 나는 본분을 이행하는 게 너무 고생스러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아주 멀리 있는 것 같고. 게다가 하나님을 믿는 몇몇 사람들도 재난 속에서 죽잖아. 하나님은 정말 사람을 지켜 주시는 걸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가장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드러내 목숨을 구해 주셨다는 간증 글은 사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본분 이행에 힘과 열정을 잃고 적극적인 모습이 사라진다. 늘 뒤로 물러서면서 대충 건성으로 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계산하겠느냐? ‘만약 복을 얻지 못하고 늘 이래야 한다면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해. 이 본분을 이행할지 말지, 앞으로 어떻게 이행할지 다시 계획하자고. 계속 이렇게 바보처럼 굴 수는 없지. 세상에서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했는데 이러다가 나중에 앞날과 운명,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전부 다 헛수고가 되는 것 아니겠어? 지금처럼 이렇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예전이 더 나아. 일하면서 세상을 추구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목만 내세우는 거지. 만약 하나님이 언제쯤 사역이 끝날지, 언제쯤 사람에게 상을 주실지, 언제쯤 본분 이행이 끝날지, 언제쯤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현현하실지 계속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항상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면, 내가 여기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속세에 돌아가 돈을 벌고 인간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게 낫지. 그럼 적어도 이번 삶은 헛산 게 아니잖아. 내세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그건 다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먼저 이번 생을 잘 보낸 다음에 생각하자.’라고 계산한다. 그의 마음속에 변화가 생기지 않았느냐? 이렇게 계산하고 그릇된 길을 택하는데, 그가 수중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혹자는 “적그리스도는 지위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지위를 주면 하나님 집에 남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이럴 때 적그리스도가 지위를 필요로 하겠느냐? 이때 지위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분명한 한마디를 해 주는 것이다. 복을 얻을 수 없다면 그는 떠날 것이다. 먼저, 만약 그가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계속 중용되지 못한다면 그는 앞날이 막연하고 암담하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계속 그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는 날 하나님이 영광을 얻어 강림하는 것을 직접 목도하거나 하나님이 그에게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현현할 것인지, 하나님의 사역이 언제 끝나고 대재난은 언제 내릴지 분명하게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을 명확한 말로 그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 깊은 곳은 안정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착실히 본분을 이행하거나 이런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결과이며, 하나님이 정확한 말 한마디로 그가 원하는 것을 과연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다. 만약 계속 기다려도 그 말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마음속으로 다른 계산을 할 것이다. 어떤 계산이겠느냐? 누가 그에게 그가 원하는 것과 복을 줄 수 있을지 계산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세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번 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이 세상, 이 인류가 그에게 이번 생의 복을 주고 육적인 안락함과 즐거움, 명예와 지위를 줄 수 있다면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호시절을 보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계산이다. 하나님 집에서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본분을 내려놓을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수중의 사역을 내팽개치고 속세의 기쁨과 앞날을 추구하러 갈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이익과 미래를 얻기 위해 형제자매와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먹고 하나님을 배반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적그리스도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아무리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아무리 승부욕이 강해도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본분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배신하며 하나님 집을 떠날 수 있고, 또 언제 어디서나 유다가 되어 하나님 집을 팔아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한다면 반드시 본분 이행을 빌미로 단기간 안에 복받으려는 욕망을 충족하려고 할 것이며, 적어도 먼저 지위의 복을 얻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그 후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들의 본분 이행 기한은 3년일 수도 있고, 5년일 수도 있으며, 나아가 10년, 20년일 수도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에게 준 기한이자, 스스로 정한 본분 이행의 최장 기한이다. 이 기한이 지나면 그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른다. 그가 복받으려는 욕망과 아름다운 종착지, 면류관, 상을 위해 몸을 굽히고, 하나님 집에서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지라도, 마음속 깊은 곳 앞날과 운명, 개인에 대한 야심과 욕망은 결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히거나 내려놓아지거나 나아가 변하거나 옅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통해 그들은 부정할 여지 없는 불신파이며, 긍정적인 사물은 싫어하고 부정적인 사물만을 좋아하는 부정할 여지 없는 투기꾼임을, 하나님 집에서 속여서 넘어가려는 인간 말종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수치스럽다.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대하는 주된 속셈과 태도는 바로 본분 이행의 기회를 이용해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자신이 원하는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가정을 버리고, 세상에서의 앞날을 포기한 채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데 당연히 뭔가 얻고 받는 게 있어야지. 그래야 공평하고 합리적인 거야. 만약 본분을 이행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진리를 좀 얻었다고 할지라도 수지가 맞지 않아. 성품 변화를 이뤘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실속은 없고.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누가 확인할 수 있겠어!’ 이런 불신파들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본체만체하고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으며,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본분을 대하는 적그리스도 부류의 태도와 속셈을 볼 때, 그들은 분명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신파, 투기꾼이며, 사탄에 속하는 존재이다. 너희는 사탄이 충심을 다해 본분을 이행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만약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다한다면, 그 본분에는 따옴표가 붙어 있을 것이다.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고, 하나님에게 배치되고 이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 부류는 적그리스도 본질이 있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싫어하기 때문에, 더욱이 사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피조물의 본분을 무상으로, 무조건 이행하지 않고, 또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추구할 수도 얻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 말씀의 요구대로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이런 본성과 본분을 대하는 이런 태도, 그리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나타내는 갖가지 모습을 보면 적그리스도 부류는 본분을 소홀히 대하며, 본분 이행 과정에서 언제 어디서나 악을 저지를 수 있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본분 이행 기간에 보이는 두드러지고 주된 특징은 무엇이냐? 고집을 부리고 자기 멋대로 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을 할 때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며, 뒷일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본분 이행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더 많은 사람을 통제할지만 궁리한다. 또, 자신들이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고, 자신들은 하나님에게 상과 면류관을 요구할 밑천과 자격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알려 줄 생각뿐이다. 자신들의 야심과 욕망, 그리고 복받으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위해 계산한다. 여태까지 자기가 몇 년 동안 본분을 이행하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버리고 대가를 치렀는지, 얼마나 많은 정력을 소모하고 몇 해의 청춘을 바쳤는지, 이제 상과 면류관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 등을 계산하는 것이다. 또 지난 몇 년간 본분을 이행했는데 밑천을 충분히 쌓은 건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눈에 든 총아라고 할 수 있는지, 자신이 하나님에게 상과 면류관을 얻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등을 계산한다. 그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끊임없이 그렇게 가늠하고 계산하고 계획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자신에 대한 형제자매의 평가와 말을 관찰한다. 물론, 그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상부에서 그라는 사람의 존재를 아는지, 그가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등이다. 이 밖에, 그가 더더욱 관심을 갖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에 대한 상부의 시선과 말, 평가이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그의 ‘심혈’에 대해 상부에서 이해하는지, 그가 오랜 세월 따르면서 겪은 고통과 환난에 대해 모두 알고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은 그가 행한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이다. 그들은 수중의 본분을 바쁘게 이행하는 한편,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계산하며, 이와 동시에 자신이 재난을 피할 수 있을지,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미지의 그 면류관과 복을 얻을 수 있을지 다방면으로 정보를 얻어 가늠한다. 이는 그들이 마음속 깊이 늘 계산하는 것이자, 매일 매 순간 계산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 자신이 과연 얼마나 많은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진리 가운데서 얼마나 실행할 수 있는지, 자신이 진실한 성품 변화를 이뤘는지, 하나님을 위한 모든 행동에 진심이 있는지, 불순물은 없는지, 거래하고 요구하는 마음은 없는지,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냈는지, 매일 이행하는 모든 본분과 하는 사역이 진리 원칙을 따른 것인지, 본분 이행이 합격 기준에 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했는지 등을 묵상하거나 돌아보는 법이 전혀 없다. 그들은 오직 자기가 미래에 복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떤 종착지를 맞이할지만 계산하고, 자신의 이익과 득실만 계산할 뿐, 진리와 성품 변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데에는 어떤 정력이나 공도 들이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패괴 성품과 자신이 걷는 그릇된 길을 결코 반성하거나 인식하거나 해부하지 않으며, 또 어떻게 자신의 그릇된 관점을 바꿀지 고민하는 일도 없다. 그들은 자신이 진리를 위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숱한 악행을 저지른 것 때문에 증오를 느끼지 않고, 패괴 성품으로 사는 것 때문에 스스로를 증오하지도 않으며, 자기가 지난날 걸었던 잘못된 길과 행했던 방해와 교란 때문에 후회하는 법도 없다. 그들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자신의 결점과 연약한 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부분, 패괴 성품을 극력으로 감추는 것 외에, 온 힘을 다해 스스로를 과시함으로써 두각을 드러내려고 하고,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 선민들에게 그의 재능과 은사, 능력을 보여 준다.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자기는 면류관과 상을 얻을 수 있는 밑천과 자신이 있다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 부류의 이성은 건전하지 않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아무리 분명하게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바른길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사악한 성품과 본성, 그리고 이 부류의 본성 본질 때문에 그들은 마음속 깊이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도대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해 내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죽어라 붙잡고, 이러한 것들을 진리로,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가장 정의로운 사업으로 여긴다. 그들은 사람이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복은 어떤 것인지 모른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대할 때는 그의 자질이나 은사, 재능, 밑천을 보는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실행하고 얻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본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로, 적그리스도는 절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가장 어리석은 면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분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태도는 무엇이냐? 그들은 본분 이행을 하나의 거래로 여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은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 집을 위해 큰 기여를 하며, 하나님 집에서 오래 고생한 사람은 마지막에 복과 면류관을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논리이다. 이 논리가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을 바로잡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으며, 그릇된 길을 걷는다. 그래서 하나님과 거래하는 그의 관점은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결국,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진리임을 믿지 않는다. 그는 불신파이고, 복을 받으려고 투기하는 자이다. 불신파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이는 황당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름으로써 하나님과 거래하여 복을 얻어 내려고 하니, 더더욱 황당한 일이다.

적그리스도는 오직 복과 면류관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그가 이런 길을 걷는 것은 누가 압박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 말씀이 그를 잘못 이끌어서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약속을 주었지만, 이와 동시에 많은 진리도 베풀어 주고 많은 요구도 했다.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상 인성과 이성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런 복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고 올바른 길을 걸어야지, 바울의 길을 걸어선 안 돼. 사람이 바울의 길을 걷는다면 철저히 끝난 거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모든 약속과 축복, 앞날, 운명과 관련이 있는 거야.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거기에 순종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축복은 사람과 무관한 거라고.’ 정상 인성과 이성을 지닌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왜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사탄이고 마귀이며, 정상 인성의 이성이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로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지 않는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한다.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따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늑대더러 양처럼 풀을 뜯어 먹으라는 것과 같다. 늑대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먹잇감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일 때 어쩔 수 없이 한두 입 풀을 뜯어 먹을 수는 있겠지만, 먹잇감이 생기는 순간 늑대의 첫 번째 선택지는 분명 고기가 될 것이다. 이는 늑대의 본성이 결정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이익에 휘둘려 일부 좋은 행위를 보이고 대가를 치르며 좋은 태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이익에 대한 추구와 욕망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익이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본분 이행을 복받는 밑천으로 삼는 방법이다. 일단 그 희망이 사라지고 그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순간, 그들은 언제 어디에서든 본분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럴 때 네가 그에게 본분 이행이 얼마나 좋은 일이고, 얼마나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라고 말해도 그가 듣겠느냐?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포기하고 떠나기로 결정할 때, 사람들은 그에게 “떠나지 마세요. 본분을 이행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으로 돌아가면 고통스러워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요. 괴롭힘과 고통만 받게 되고 진리를 얻을 수 없어요. 구원받을 기회도 사라지고요.”라고 권유한다. 이 말에 그는 떠날 뿐만 아니라 난처함에 울기까지 했다. 왜 울겠느냐? (억울한 것입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럼 무엇이 억울하겠느냐? (자기가 무척 많이 고생하고 무척 많은 대가를 치렀는데도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억울한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억울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큰 사역을 행했는데도 그는 한 번도 감동받은 적이 없고, 그것 때문에 눈물 흘려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권유를 듣고 울기 시작한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 왜 말하지 않겠느냐? 똑바로 말하면 되지 않겠느냐? 왜 울겠느냐?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겠느냐? 그의 생각은 입에 올리기 민망하며, 그 자신조차도 부끄러워서 차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날, 그가 하나님에게 한 맹세는 경천동지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하냐? ‘그때 그러지 말걸. 나는 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는 건데!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게 좋다고 하니까 믿었지. 게다가 가정과 일자리까지 버리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숱한 고생을 했어. 핍박받기도 하고 잡히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몇 년간 본분을 이행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 그는 억울하고 괴로운 마음이 들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사기당하고 기만당했다고, 속아 넘어갔다고 말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은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한시바삐 내보내야 합니다.) 더 권유해야겠느냐? (아닙니다.) 더 권유했다간 땅바닥에 주저앉아 떼를 쓰며 행패를 부릴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절대 권유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집은 아름다운 가나안 땅이고, 깨끗한 땅이다. 사람은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말씀의 심판,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공급과 도움, 인도와 축복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친히 사역하고 목양하며, 사람이 대가를 좀 치르고 고생을 좀 한다고 할지라도 가치가 있다. 이 사악한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품 변화를 이루고 구원받기 위해 사람이 행하는 그 모든 일은 다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볼 때, 만약 복과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면류관과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행위이자 속아넘어간 모습이다. 지난날 얼마나 큰 다짐을 하고 얼마나 대단한 맹세를 했든 전부 무효이며, 소용이 없다. 이렇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본분을 이행했는데 마지막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일찌감치 이 ‘분쟁의 땅’을 떠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을 부득이한 일, 밑천을 얻어 내고 면류관과 상을 받아 낼 조건으로 여긴다. 출발점 자체가 잘못되었으니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흐지부지되고, 힘을 써도 끝까지 쓰지 못한다. 이와 동시에 이 부류의 본성 본질 때문에 그들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끊임없이 진리 원칙을 위배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만 저지른다. 그럼 그들이 이행하는 본분은 무엇이 되겠느냐? 하나님의 눈에 그것은 선행이 아니라 악행, 심지어 끝없는 악행이다. 이런 결과에는 근본 원인이 있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결코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을 뽐내고, 권력을 잡으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사람들의 행위와 생각을 통제하고 심지어 사람들의 모든 것을 통제해 이용할 기회를 찾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부류 중 일부는 숱한 악행을 저질러 출교되었지만, 비교적 간사하고 위장에 능한 일부는 여전히 하나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들이 하나님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겠느냐? 이들은 눈에 띄는 악을 저지르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는 자기 분수를 지키며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 시키는 대로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허비하고 때우고 있다. 그러면서 끝까지 시간을 때우면 이기는 거라고, 마지막에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부류겠느냐? 이는 투기꾼이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 집 행정 법령에 따라 제명되고 출교될 정도는 아니다. 그들은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데, 사실 그들 자신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하나님 집에서 그들을 제명하거나 출교시키지 않은 이유가 하나님 집에서 그들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들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여러 이유 때문에 출교시키지 않았을 뿐이다. 출교되지 않은 이들 중 일부는 적그리스도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이 사람들은 아직 기회가 없었을 뿐, 그 본성 본질을 볼 때 지위와 권력이 생기는 순간 바로 수많은 악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 하나님 집에서 제명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이 이행하는 본분은 항상 득보다 실이 많다. 그들은 수시로 나쁜 짓, 하나님 집의 이익에 피해를 주는 짓을 저지른다. 이 사실은 그들 자신도 알고 있지만, 결코 뉘우치지 않고, 자신이 틀렸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후회하는 건 고사하고, 마음속으로 어떤 내적 상태가 생기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출교시키지 않는 한 나는 여기 눌어붙어 있을 거야. 마지막까지 되는대로 살아가야지.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을 거야. 나한테 뭘 시키든 나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거야. 기분이 좋으면 좀 더 하고 기분이 안 좋으면 좀 적게 해야지. 그리고 남들의 발목을 잡고, 소극적인 것과 관념, 판단하는 말을 유포할 거야. 언젠가 내가 제명되고 출교되면 복을 받을 수 없을 테니, 희생양 몇 명을 찾아서 물고 늘어져야지.’ 이는 악인 아니겠느냐? 그는 분별력이 없는 사람, 수시로 연약해지고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는 사람,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 음란한 짓을 좋아하는 사람, 이방인 같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끌어들이고, 뒤에서 소극적인 것을 퍼뜨린다. 이런 행동이 어떤 성질인지 그가 모르겠느냐?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겠느냐? (본성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이다. 실질적으로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물귀신 작전을 펴서 다른 사람들과 동귀어진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수하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악독한 심리를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날이 길지 않음을, 언젠가는 제명될 것임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의 성질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돌이키거나 회개하거나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기는커녕 갈수록 더 심해져서 더 많은 악인을 끌어들여 함께 악을 행하려 한다. 심지어는 소극적인 것과 관념을 유포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본분을 포기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치게 한다. 이것은 복수의 성질을 띠고 있다. 그 의미인즉슨, ‘나는 더 이상 못 하겠어. 언젠가 하나님 집에서 제명될 거야. 그러니 당신들만 잘 살게 둘 수는 없지. 하나님 집이 잘되게 둘 수도 없고!’라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그에 대한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았는데 그는 먼저 선수를 치기 시작한다. 이는 악인이 하는 짓 아니겠느냐? 그는 ‘나는 복받으려는 희망을 잃었어. 예전에 내가 한 일들에 대해 당신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당신들이 출교시키지 않아도 나는 알아서 포기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게 자기 객관화가 되는 것이고 이성적인 행동이며 현명한 처사라고 여긴다. 그는 “제가 복을 받게 해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제가 복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회개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뒤에서 당신의 발목을 잡고 소극적인 것과 관념, 궤변을 퍼뜨릴 거예요. 내가 복을 받지 못했으니 다른 누구도 복받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악독하지 않으냐? 어떤 적그리스도는 심지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 집에서 이용당하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너무 어리석었어요!”라는 말을 퍼뜨리기도 한다. 자신이 복을 받지 못할 것 같자 소극적이고 어리석으며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만 찾아 이런 것들을 퍼뜨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교란하는 성질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집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하며 언젠가 제명될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죄를 자백하며 회개하거나 진심으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지난 과오를 메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게 하나님 집에서 소극적인 것을 퍼뜨리고 다른 사람들의 본분 이행을 교란하며, 하나님 집 사역을 망치고 교란한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처럼 악을 행하고 소극적으로 변해 물러나며 본분 이행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복수하려는 목적을 달성한다. 이는 악인이 하는 짓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이다. 그는 사람의 눈에 보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역하는 지상의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늘 막연한 하나님을 믿지만, 결국에는 그가 숭배하는 사람을 하나님으로 여겨 순종한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그 사람에게 순종한다.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막연한 하나님을 믿을 때, 그는 그 막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줄 수 있다고, 그를 다음 시대로 이끌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그에게 상과 면류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지상에 있는 실제의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봐도 하나님 같지가 않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오직 하늘의 하나님만이 참하나님이라고 믿고, 눈에 보이는 이 실제의 하나님은 너무 보잘것없고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믿을 만한 대상으로 보이지 않기에 이런 하나님을 사람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기면서 어려움이 생겨난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와 약속을 주는 것 말고 또 뭘 할 수 있지? 아무리 봐도 하나님 같지가 않단 말이야. 또 아무리 봐도 사람에게 뭔가 이득이나 이익을 가져다줄 것 같지가 않고. 그는 사람이야. 이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간 기대하는 바가 있고,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부분도 있지. 하지만 만약 사람을 믿는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이득과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겠어? 사람의 기대와 의지가 그에게서 이루어질까?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그는 한 명의 사람이니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그의 앞에서 나는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을 모두 할 수 있다고.’ 악인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때, 그는 마음속으로 더없이 위대하고 신성하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을 상상한다. 하지만 지상의 하나님을 볼 때, 그의 상상과 관념은 무너진다. 그럴 때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을 사람으로 대한다. 그리고 그 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일말의 존중마저 사라진다. 그러니 두려움이나 경외심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 없어지면 간이 커진다. 악인의 마음속 방어선, 경계심까지 사라지니, 어떤 일이든 다 저지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끝까지 믿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적그리스도는 하늘의 하나님을 믿기는 쉬워도 땅의 하나님을 믿기는 무척 힘들다. 바울이 그 산증인이다.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은 그는 어떤 결과를 맞이했느냐? 그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추구한 목표는 마지막에 무엇으로 변했느냐? 그는 그리스도가 되고자 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고자 했다. 또 지상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면류관과 복을 얻고자 했다. 그 적그리스도들은 바울과 완전히 똑같다. 그들은 지상의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기는 한편, 하늘의 보이지 않는 막연한 하나님은 기만해도 되는 존재, 함부로 우롱하고 해석하고 관념을 갖고 대적해도 되는, 마음속 가장 위대한 하나님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불신파, 적그리스도가 하늘의 하나님과 지상의 하나님을 대하는 차이이다. 그들은 지상의 하나님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기에 본분을 대할 때 다른 모습을 갖게 된다. 이 모습에는 그들이 지상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본분 이행의 흥미가 점점 줄어들고,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염원도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포함된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데 흥미를 잃고, 소극적인 생각과 모습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 부류는 마지막에 굳게 서지 못한다. 교회에서 그들을 제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떠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본 적그리스도는 무척 제멋대로였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며 참답게 대하지 않고, 업무에 몰입하지도 않는 등 매우 게으르게 굴었지요.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고요. 매일 먹는 것, 입는 것만 신경 쓰고, 음란한 짓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출교될 때, 그는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후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본분 이행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나아가 자신의 본분을 존중하지도, 아끼지도 않은 채 대충 건성으로 일하고 시간만 때운다. 그럼 그에게 그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안 된다고 교제해 준 사람은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저도 그에게 교제한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말해 보아라. (예전에 계속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 감독이 있었습니다. 촬영한 장면 대부분이 적절하지 않았지요. 게다가 교란하고 방해하기까지 했습니다. 얼마 후, B팀으로 보내진 그는 본분을 이행하지는 않고 매일 일해서 돈을 버느라 바빴고 이방인들과 몰려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제명되었지요. 사실, 교회에서 그를 제명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알아서 나갔을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발붙이고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 적그리스도들의 성품 본질은 동일하다. 모두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하고 불의를 좋아하며 야심과 욕망이 무척 크고, 본분을 놀이처럼 대하면서 건성으로 임한다. 또 행동이나 품행이 부정하고 바르지 않으며 본성이 사악하고 흉악하다. 그들이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복을 받기 위해서이다. 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이방인과 전혀 다른 점이 없는, 영락없는 불신파이자 이방인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본질이다. 그로 하여금 이방인처럼 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본분을 이행하게 하면 그는 매일 형벌이라도 받는 양 괴롭게 살아갈 것이다. 그는 성실하고 착실하게 하나님 집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러느니 속세에서 이방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게 낫다고, 그런 삶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득이한 결정이다. 그것은 복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된 것이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본성 본질을 볼 때, 그들은 결코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부정할 여지 없는 불신파이자 투기꾼이다. 그들이 어디 본분을 이행하러 온 자들이겠느냐. 그들은 악을 행하고 교란하며 거래하러 온 자들이다. 그러니,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종합해 볼 때, 이들이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집 사역에 이롭겠느냐, 아니면 해롭겠느냐? (해롭습니다.) 적그리스도 본질을 지닌 사람이 약간의 은사와 재능을 갖추고, 하나님 집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거나 방해하지 않으며 착실히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만약 네가 적그리스도에게 “당신같이 예전에 악을 저지른 사람은 향후 반드시 앞날과 운명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에게는 은사가 있으니 하나님 집에서 열심히 힘쓰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가 화복을 따지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힘을 쓰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인성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그런 인성을 지녔겠느냐? (아닙니다.) 그들의 성품은 흉악하다. 그는 ‘나한테 이득과 약속, 허락을 주지 않는데 내가 당신을 위해 힘을 쓸 것 같아? 꿈도 꾸지 마. 어림도 없으니까!’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흉악한 성품이다. 이는 적그리스도 부류가 본분과 하나님, 하나님의 요구를 대할 때의 종합적인 모습이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저를 높여 주셔서 이 은사를 주셨으니 저는 하나님을 위해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적그리스도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저를 이용하고 싶나요? 제 은사와 재능이 마음에 들었겠죠. 당신이 저에게서 잇속을 차리겠다면 저한테 이득 되는 것을 줘야 합니다. 저를 이용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높여 줌이고 하나님이 준 기회이니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이용하는 거라고 여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때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방해하고 교란하며 나쁜 일을 좀 저지른 후 격리되어 반성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한동안 반성한 후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겁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순종하는 법,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법,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법을 배우고, 악을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교회에서 본분을 안배하면 그는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마음속 깊이 하나님이 준 그 기회를 소중히 여긴다. 다시금 본분 이행의 기회를 얻은 데 대해 영광이라고, 소중히 여기겠다고,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예전보다 더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고 얼마간 변화를 이룬다. 비록 또다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수 있고, 소극적 상태에 빠지고 연약해지며 본분을 팽개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마음가짐과 태도를 볼 때, 그는 이미 변화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들을 증오하고, 그 일에서 얼마간 인식을 얻었으며, 진리를 받아들이고 또 어느 정도 순종하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집에서 다시 그에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했을 때 거부하거나 미루거나 반항하지 않고, 더욱이 안 좋은 말을 하지도 않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기회가 다시 생겼으니 소중히 해야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는 태도 면에서 이미 큰 변화를 이뤘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이다.

적그리스도는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한다. 그는 권력과 이익을 얻으려고 추구하고,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한다. 만약 권력과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 후 하나님 집에서 교체되고 격리되거나 제명되면 그가 진실로 회개하겠느냐? 그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저를 회개시키면 이용하기 좋은가 보죠? 이용할 수 있으면 데려가고, 이용할 수 없으면 차 버리는 거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차 버린다니? 네가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하나님 집에서 네게 처분을 내리겠느냐? 네가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하는데, 하나님 집에서 함부로 네게 처분을 내리겠느냐? 방해하고 교란하며 악을 행해 교회 사역에 손실을 주었기에 하나님 집에서 처분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거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인식하기는커녕 원한을 가득 품은 채 자기는 이득을 못 보고 권력을 얻지도 못했다고, 괴롭힘당하고 학대받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본분 이행의 기회를 주면, 그는 마음속으로 감격하고 그 기회를 소중히 여기기는 고사하고 하나님 집이 자신을 이용한다고 반박한다. 하나님 집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커녕 사람들이 자기를 괴롭히고 차 버렸다고, 학대했다고 여기며 원한으로 가득 차 더는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더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 또 그는 본분을 이행하는 모두가 하나님 집에서 이용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그릇된 말이냐! 여기에 진리와 인성, 이성에 부합하는 말이 한 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의 마음은 혈기와 흉악함, 원망, 거래 심리, 나아가 개인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나님 집이 그에게 내리는 모든 처분과 하나님이 그에게 배치한 모든 환경에 대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혈기로 대한다. 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태도로, 또 사탄의 방식과 논리로 이 모든 것을 대하기에 마지막에 진리를 얻지 못하고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체되고 본분이 조정되고, 심지어 격리되고 제명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진정으로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행을 통한하지만,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커녕 마음이 증오로 가득 찬다. 이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원한과 비방, 판단, 정죄가 생겨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모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결말의 근원으로, 그들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하는 것을 다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이번 생에는 하나님 집에서 제명될 테고 내세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이런 일을 간파할 수 있겠느냐?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발견한다면, 내가 한 말에 근거하여 대조할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이냐? 그들은 진리를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일이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잘못을 저지르든 인정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분명 사탄에게 속하는 자, 멸망의 대상이다.

너희는 내가 폭로한 적그리스도의 각종 표출, 특징, 행동을 대조해 보아야 한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 너희 또한 당연히 이런 특징이나 표출, 행동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적그리스도와 다른 부분은 무엇이냐? 너희는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귀한 점이다. 너희는 길을 잘못 가고, 그릇된 일, 어리석은 일을 했을 때, 과오를 뉘우칠 수 있느냐? 회개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회개하고 뉘우칠 수 있는 것은 가장 소중하고 귀한 점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하필 이 점을 갖추지 못했다. 오직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사람만이 이런 점을 갖추고 있다. 어떤 점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느냐? 첫째, 하나님이 진리임을 믿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너희는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네.) 이 가장 기본적인 것을 적그리스도는 갖추지 못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너희는 여기에서부터 어려워질 것이다. 넷째,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되, 논쟁하거나 변명하거나 변호하지 않고 이유를 대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절대 이렇게 할 수 없다. 다섯째, 거역하거나 과오를 저지른 후 회개하는 것이다. 너희에게 이 항목은 약간의 난이도만 있을 뿐이다. 사람은 과오를 저지른 후 한동안 반성하고 구하며, 괴로워하고 소극적 상태에 빠지고 연약해진 후에 자신의 패괴 성품을 조금씩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1~2년이 걸릴 수도 있고,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사람은 마음속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신복해야 진실로 회개할 수 있다. 이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이 점을 갖추지 못했다. 악행을 저지르고 3~5년, 10~20년이 지난 후 옛날 일을 들먹이지 않는 적그리스도가 있더냐?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네가 그를 만난 이후로 그는 항상 자신의 논리를 펼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의 악행을 인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전혀 뉘우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와 패괴된 보통 사람의 차이이다. 적그리스도는 왜 뉘우치지 않겠느냐? 그 근원은 어디에 있겠느냐? 그는 하나님이 진리임을 믿지 않기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는 구제할 수가 없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적그리스도의 갖가지 모습을 해부하는 것을 듣고 ‘끝장이야. 나한테도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잖아. 그럼 나도 적그리스도인 것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별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너에게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네가 적그리스도와 다른 점은 너에게는 그래도 긍정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너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수 있으며, 변화할 수 있다. 이렇게 긍정적인 것들이 너로 하여금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벗어 버리고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어 구원받게 한다. 이는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희망이 있는 것이다!

너희는 체험 간증문을 쓰면서 무척 힘들어하고, 제대로 써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체험한 후에야 체험 간증문 한 편을 써내고, 어떤 사람은 10~20년간 믿은 후에야 체험 간증문 한 편을 써내는데, 그것도 그간 겪은 일들의 정수를 종합한다. 한편, 하나님을 30년 동안 믿고도 어떤 진실한 체험적 인식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이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해야겠느냐? 내가 입이 닳도록 여러 번 말하고 이야기하고 되풀이하면 너희는 인내심을 갖고 내 교제를 많이, 열심히 듣고 분별력을 키우며, 각 진리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여라.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적그리스도 본질이 있는 사람은 또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이 둘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면 실행의 길이 생길 것이며, 이와 동시에 분별력이 생길 것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분별하고 적그리스도 본질을 분별할 수 있으면, 적그리스도 부류를 만났을 때 바로 분별하여 폭로하는 한편, 함부로 구는 행위와 행동을 제지하고 제약할 수 있으며, 적그리스도의 악행이 교회 사역에 주는 손실을 피하거나 줄일 수 있다. 그러지 않고, 깨닫는 능력이 떨어지고 분별력이 없다면, 진리를 참답게 대하지 않고 늘 도리만 이해할 뿐 사람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주변의 적그리스도를 분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좋은 리더로 여겨 따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자세히 따져 보아라. 적그리스도의 행동이 하나님 집에 가져다준 것은 이익이 크냐, 아니면 피해가 크냐? 자세히 따져 보아라. 그 적그리스도들이 하나님 집에서 일하면서 표면적으로 몇 가지 좋은 일도 했겠지만, 전부 피해가 이익보다 많고 득보다 실이 크다. 그들이 한 좋은 일은 사실 더 큰 우환으로 이어지며, 이는 교회 사역에 득보다 실이 된다. 이들은 하나님 집에서 사탄의 심부름꾼 역할을 맡는다.

2020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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