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2)
참고 정상 인성의 세 가지 측면을 간단히 다루다
이번 교제에서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자주 언급되는 ‘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먼저 다루겠다. 이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주 다루는 주제이자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직면해야 하는 문제이며 매일 접하고 체험하는 주제이다. ‘인성이란 무엇인가’는 바로 그런 주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성 안에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포함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인성은 흔히 어떤 것들을 드러내겠느냐? (인격과 존엄을 드러냅니다.) 또 어떤 것들을 드러내겠느냐? 양심과 이성을 드러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주 다루는 것들이다. 그러면 너희가 평소에 인성을 다룰 때 기본적으로 이 주제와 관련 없고 자주 다루지 않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 인격과 존엄 같은 것은 평소에 늘 다루는 주제이고 자주 접할 수 있다. 너희가 자주 다루는 양심과 이성, 인격과 존엄은 너희의 실생활과 얼마나 관련 있겠느냐? 이런 내용들은 너희의 실생활 속 실행과 진입에 어떻게 이롭고 도움이 되며 얼마나 유익하겠느냐? 너희 정상 인성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로는 또 무엇이 있겠느냐? 내가 몇 가지 측면을 말해 볼 테니 너희가 평소에 이런 주제를 접하는지 한번 살펴보거라. 인성에 관한 내용은 일단 긍정적인지 아니면 부정적인지, 정상 인성인지 아니면 비정상 인성인지는 차치하고 방금 말한 그 몇 가지 측면 외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라는 측면도 있다. 이런 측면도 있지 않겠느냐? 이는 인성과 관련 있지 않겠느냐? (관련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일상생활 속 개인 주변 환경에 대한 관리라는 측면과 이성을 접할 때의 태도와 모습이라는 측면도 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인성과 관련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모두 인성과 관련 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지, 여러 원칙을 어떻게 지키는지, 이런 내용은 제쳐두고 인성이라는 주제만 다루려고 한다. 그럼 이 세 가지 측면은 인성과 관련이 크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무엇이냐? 너희가 다시 한번 얘기해 보거라. (첫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두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 개인 주변 환경에 대한 관리입니다. 세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성을 접할 때의 태도와 모습입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다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인성과 관련 있습니다.) 왜 이 세 가지 측면이 모두 인성과 연관되어 있고 관련 있다고 하겠느냐? 왜 이 세 가지 측면을 나열하겠느냐? 양심과 이성 같은 측면은 왜 다루지 않겠느냐? 왜 우리가 자주 다루는 그 몇 가지 측면은 내던지고 이 세 가지 측면을 다루겠느냐? 이 세 가지 측면은 예전에 다루었던 인성과 관련된 측면인 양심과 이성, 인격과 존엄보다 수준이 더 높겠느냐, 아니면 낮겠느냐? (낮습니다.) 그럼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너희를 폄하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이런 얘기를 하겠느냐? (실제적이기 때문입니다.) 더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이게 너희의 이유이냐? 왜 이런 얘기를 하겠느냐?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현실 상황과 일상생활 속의 여러 모습에서 사람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문제를 찾았기 때문에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교제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실생활과 정상 인성, 일상생활 속의 여러 모습은 제쳐두고 오로지 진리만 추구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등 심오한 진리만 추구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느냐? 사람은 어떤 기본적인 조건하에서 진리를 추구해야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실생활 속에서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조건이 있겠느냐? (정상 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다. 사람은 반드시 정상 인성을 갖추어야 한다. 정상 인성에는 양심, 이성, 인격, 존엄 이외에 방금 말한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람이 인성에 관한 이 세 가지 측면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정상에 이르지 못한 채 말로만 진리를 추구하거나 구한다면 아마 다소 공허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는 것,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정상 인성을 갖춘 소수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정상 인성이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정상 인성이 일부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진리 추구에서 성과를 이룰 수 있겠느냐? 아마 이룰 수 없을 것이다.
1)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
우선 인성에 관련된 첫 번째 측면인 일상생활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여기서 말하는 일상생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다. 그럼 인성과 관련 있는 사람과 일, 사물에는 주로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정상 인성이라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정상 인성이라는 범위와 관련되며 정상 인성과 연관된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대인관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 측면이다. 그 밖에 배워야 할 지식이나 업무, 일상생활 속 상식도 모두 정상 인성이 이해하고 갖추어야 할 것들이다. 예를 들어, 목공이나 미장일을 배우는 사람도 있고 운전이나 자동차 정비를 배우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기술이자 재주인데 그런 재주를 발휘할 줄 알면 그 재주에 관한 업무 지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 대체 어느 정도까지 배우고 어느 기준에 이르러야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최소한 완제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검수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일을 아주 어설프게 해서 결과물이 형편없고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무엇이 문제겠느냐? 이는 이 기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떤가와 관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이렇게 생각한다. ‘만들어 낸 물건은 그럭저럭 쓸 수만 있으면 돼. 3~5년 대충 쓰다가 망가지면 다시 고치면 되지.’ 이런 관점이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할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적당히 하면 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그렇게 경솔하고 오만하며 무책임하게 모든 일을 대하는 것은 패괴 성품에 속한다. 그것은 사람이 흔히 말하는 불량 습성이다. 모든 일에서 “대충 맞는 것 같아.”, “그 정도면 충분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마도’, ‘십중팔구’ 식의 태도이다. 형식적으로 일을 하며, 얼렁뚱땅 넘어가고, 할 수 있는 한 일을 대충 해 나가는 수준에서 만족한다. 일을 진지하게 대하거나 세심하게 할 필요도 없으며 진리 원칙을 구하는 것은 더욱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패괴 성품에 속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를 교만함이라 해도 옳고, 방종함이라 해도 아주 적합하지만, 가장 알맞게 표현하는 어휘는 ‘불량함’이다. 불량 습성은 대다수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데, 그저 경중 정도가 다를 뿐이다. 모든 일에서 대충 건성으로 하려 하고, 기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요령을 피우며, 시간을 적게 들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발각되지 않고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책임질 일이 없다면 얼렁뚱땅 넘어가면 돼. 일을 굳이 잘할 필요가 없어. 그러면 너무 번거롭잖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무엇이든 숙달하는 경지까지 배우는 일이 없으며 배우는 일에 전념하거나 고생하거나 대가를 지불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피상적으로만 배워 전문가 행세를 하고 다 배웠다고 생각하고 그걸로 때우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냐? 이것이 좋은 태도겠느냐? 아니다. 한 마디로 묘사하면 ‘때우는 것’이다. 그러한 불량 습성은 패괴된 인류에게 다 존재한다. 인성에 불량 습성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어물쩍 때우면 된다는 관점과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지 않고 얼렁뚱땅 건성으로 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운전을 배우면서 운전할 때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운전하면 차량에 손상이 가해지는지 경험 많은 운전자에게 묻지도 않고 바로 운전을 시작한다. 그 결과 차를 망가뜨리고는 발로 차며 이렇게 말한다. “차가 뭐 이 따위야? 벤츠나 BMW를 몰아야지. 이런 고물차는 안 되겠어. 폐차해야 되겠군!” 이는 무슨 태도겠느냐? 물질적인 것을 대할 때 소중히 여기지도, 관리하지도 않는 데다가 일부러 부수고 망가뜨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칠칠치 못하고 부주의하게 생활하며,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든 신중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거친 사람입니다.) 듣기 좋게 말하면 거친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막돼먹은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 말이 과하겠느냐? 사람의 귀천을 어떻게 구분하겠느냐? 본분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봐야 한다. 즉, 일이 닥쳤을 때 그가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격과 존엄이 있는 사람들은 일할 때 세심하고 진지하며 마음을 쓰며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 인격과 존엄이 없는 사람들은 일을 할 때 대충대충 하고 무성의하며 항상 속임수를 쓰려 하고 항상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 어떤 기술을 배우든 마음을 다하지 않고 배우지 못하며, 아무리 오래 배워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사람은 인격이 비천한 사람이다. 대다수 사람이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데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불량 습성입니다.) 불량 습성이 있는 사람은 본분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본분을 대할 때 절대 올바른 태도를 보이지 않고 건성으로 대충 이행한다. 이게 바로 정상 인성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불량 습성이 심한 사람은 동물이나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집에서 개를 기를 때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개가 물건을 함부로 물어뜯고 가구나 도구를 다 망가뜨린다. 이러면 손해이다. 개는 동물이기 때문에 물건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너는 개와 실랑이할 게 아니라 개를 관리해야 한다. 네가 관리를 잘 못해 동물이 제멋대로 행동하며 네 생활을 교란하게 둔다면 이는 네 인성 안에 무언가 부족한 게 있다는 뜻이다. 그럼 너는 지능이 떨어지는 동물과 별 차이가 없고 무능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개를 잘 관리할 수 있겠느냐? 개를 특정한 범위 내에서, 또는 우리에 가둬 놓고 기르고 매일 고정된 시간에 두세 번 풀어 주어 충분히 활동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제멋대로 물건을 물어뜯는 개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운동을 통해 개의 건강도 유지시킬 수 있다. 그러면 개도 잘 관리할 수 있고 환경도 지킬 수 있다. 자신이 접하는 사물을 관리할 줄 모르고 올바른 태도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성 안에 무언가 부족한 게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상 인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볶음 요리를 할 때 보통 사람은 기름을 조금만 붓는데 어떤 여자는 유독 기름을 많이 붓는다.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기름을 낭비하지 말고 적당히 사용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기름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볶음 요리를 할 때 실수로 기름을 많이 부으면 그냥 퍼서 땅에 버린다. 이는 낭비가 아니겠느냐? 물질적인 것을 이렇게 대하는 태도를 속된 말로 뭐라고 하겠느냐? 먹을 걸 길에 뿌린다고 하고 욕하는 말로 ‘집안을 말아먹는 여자’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물질적인 것들은 다 어디서 났겠느냐? 하나님이 베풀어 주었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주지 않았다면 네가 얼마나 얻을 수 있었겠느냐? 네 생명도 하나님이 준 것이다. 하나님이 주지 않았다면 네게는 아무것도 없고 넌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러면 네가 이런 물질적인 것들을 가질 수 있었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보통 가정보다 더 많이 주었지만 그렇다고 네가 제멋대로 낭비한다면 그런 태도나 관점이 과연 옳겠느냐? 인성적인 측면에서는 이를 어떻게 정의해야겠느냐? 이런 사람은 인성이 좋지 않다. 먹을 걸 길에 뿌리고 물건을 망가뜨리며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정상 인성이 없다. 하나님 집의 물건을 대할 때도 소중히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 집의 물건이 비가 와서 젖을 것 같으면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비에 젖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 물건도 아니니까 내 알 바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가 버린다. 이게 대체 무슨 태도란 말이냐? 이기적인 것이다. 마음이 바른 것이겠느냐, 바르지 않은 것이겠느냐?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을 뭐라고 하겠느냐? (비뚤어졌다고 합니다.) 바르지 않으면 비뚤어진 것이 아니겠느냐? 위에는 ‘아닐 불(不)’, 아래에는 ‘바를 정(正)’이 있으면 ‘기울 왜(歪)’ 자이다. 마음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 정상 인성을 갖추었겠느냐? 그럴 리 없다. 우리는 첫 번째 측면인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 중 총 몇 가지를 다루었느냐? 불량 습성, 불량함 외에 또 뭐가 있느냐? (천함과 비뚤어짐이 있습니다.) 너희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거나 분석할 때 이런 속된 말들을 쓰느냐? (쓰지 않습니다.) 아무도 쓰지 않는다. 너희는 무슨 말을 쓰느냐? 거창한 말만 쓰지 이런 보잘것없는 말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무척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기술이나 업무 관련 지식, 학위를 보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흐뭇해한다. ‘세상의 철밥통은 필요 없어. 난 빈둥빈둥 놀고먹으려고 하나님 집에 온 게 아니야. 나처럼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인재가 하나님 집에서 봉헌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을 견디며 이런 보통 사람들과 같이 먹고 살며 함께 생활하다니, 이 얼마나 고귀한 인품인지!’ 그는 자신의 인격이 특히 존귀하고 다른 사람보다 고상하다고 생각하며 늘 이런 것들을 즐긴다. 사실 그의 인성에는 부족한 것들이 너무도 많지만 그 자신은 알지 못한 채 우쭐거린다. 게다가 자신은 꽤 괜찮은 사람이고 자신의 인품이 보통 사람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상 어떤 측면을 보더라도 그는 ‘정상 인성’의 정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그것과 거리가 멀다. 양심을 논하자니 양심이 없고, 인품을 논하자니 그것도 별로이고, 인격과 품성을 논하자니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여럿이 같이 살면 일부 귀중한 물건은 감히 내놓지 못하는데, 왜 그러겠느냐? 남을 믿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또 사람이 많으면 못 믿을 사람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손버릇이 나빠서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인품이 나쁜 것이다. 밥 먹을 때 뒤에 아직 먹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든 상관하지 않고 일부러 제일 맛있는 음식만 끝까지 골라 먹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너무도 이기적이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남을 고려하고 배려하는데, 이는 어떤 문제를 설명하겠느냐? 그 사람은 이성적이고 마음속으로 남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좀 덜 먹고 남을 위해 남겨 두는 것이 바로 인품이다. 하나님 집에는 인성을 갖춘 사람도 있고 정상 인성의 기준에도 이르지 못할 정도로 인성이 나쁜 사람도 있다. 내가 말한 이런 모습들로 살펴보면 너희 가운데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너희는 평소에 이런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이 문제라는 점을 의식할 수 있겠느냐? 네가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알아차리고 느낄 수 있으며 스스로 고치려고 한다면 이는 어느 정도 인성을 갖춘 것이다. 다만 정상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의식하지도 못한다면 인성에 이를 수 있겠느냐? 이를 수 없다. 그러면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논할 수도 없다. 바로 인성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할 때 어떤 사람은 돼지고기 볶음 한 접시가 차려진 것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비계든 살코기든 가리지 않고 없어질 때까지 먹는다. 너희는 동물이 먹이를 빼앗는 것을 본 적 있느냐? (본 적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다. 하지만 그건 동물의 경우이다. 만약 사람이 그런다면 그렇게 빼앗는 것이 정상 인성에 속하겠느냐? (정상 인성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정상 인성이겠느냐? (만족할 줄 알고 욕심을 많이 부리지 않아야 합니다.) 참으로 현실적인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욕심을 많이 부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마음속으로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는 것이 정상 인성이 가져야 할 생각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그런 다음 이런 생각을 통해 다시 일을 처리한다면 더 정확하지 않겠느냐? 우선 네 생각이 올발라야 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돼지고기 볶음이 꽤 많네. 좀 더 먹고 싶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형제들만 있는 것 같아서 좀 민망하네. 어떡하지? 사람들이 먹기 시작하면 그때 먹어야지. 여자가 너무 게걸스러워 보이면 창피하잖아!’ 여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는 보통 부끄러움을 잘 탄다. 반면 남자는 대부분 ‘돼지고기 볶음이 참 맛있네. 배고프니까 일단 먹고 보자.’라고 생각하고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젓가락을 뻗는다. 하지만 비교적 이성적인 남자는 한 입 먹고 나서 이렇게 생각한다. ‘뒤에 아직 못 먹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만 먹자. 다른 사람 것도 남겨 둬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건 그가 이성적인 사람이며 천성적으로 정상 인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황당하게 우기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돼지고기 볶음을 먹지 않길 바라신다면 저는 입도 대지 않겠습니다. 그게 더 인성을 갖춘 거 아닌가요?”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내가 이런 예를 들었다는 건 무슨 뜻이겠느냐?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든 사람은 올바른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올바른 태도는 인성의 이성과 양심, 인격과 존엄의 관점에 서서 생각을 거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네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실행한다면 대체로 정상 인성에 부합할 것이다.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일상생활 속의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나타내는 모습을 말한다. 그런 모습은 너의 본직 사역과 관련이 크지 않거나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공허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살아가며 실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 업무나 기술을 대하든, 아니면 상식이나 지식을 대하든 사람은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갖추어야겠느냐? 늘 되는대로 살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게 과연 옳겠느냐? 마음속으로 이런 일들을 건성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서야 되겠느냐? 이는 관점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관점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인품과도 관련 있다. 큰 붉은 용은 지난 몇 천 년간 중국을 통치하면서 운동이나 투쟁만 벌였지 경제는 발전시키지 않고 백성들의 삶은 신경도 쓰지 않아 결국 사람들은 되는대로 살아가는 불량 습성을 갖게 됐다. 무슨 일이든 대충 처리하고 관점도 수시로 바뀌며 무엇을 배우든 제대로 배울 생각도 없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다. 늘 관점이 바뀌어서 시장에 필요한 물건을 발견하면 바로 생산해 일단 큰돈을 벌 생각부터 할 뿐 그것을 기반으로 더 발전시키거나 연구하거나 한 단계 더 도약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중국은 경공업과 중공업, 어느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첨단 제품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중국인은 “우리 중국은 5천 년 역사의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고 중국인은 선량하고 부지런하다”며 큰소리친다. 정말 그렇다면 중국은 왜 모조품만 만들어서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냐? 왜 글로벌 시장에 가져다 팔 만한 물건이 거의 없는 것이냐? 이게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중국에 첨단 제품이 있느냐? 물론 중국인에게도 ‘최첨단’의 것이 있긴 하다. 바로 모방하고 모조품을 만드는 데 누구보다 능하고 사기를 잘 치는 것이다. 이 안에는 불량 습성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를 왜 그렇게 묘사하죠? 우리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으냐? 중국인의 일부 행동을 보면 이런 묘사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에서 보든 민간에서 보든 중국인이 본연의 일을 제대로 하더냐?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설령 본연의 일을 좀 하다가도 사회 환경이 열악해서 제대로 일해도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면 일하려는 마음이 사라져서 손을 놓아 버린다.
인성과 관련된 것들, 즉 사람이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드러내는 태도, 사상, 관점이 문제를 말해 준다. 어떤 문제를 말해 주느냐? 그 사람의 인품을 보여 주고, 그 사람이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인지 보여 준다. 단정하고 올바른 게 무엇이겠느냐? 전통이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겠느냐? 소양을 갖추고 예의가 바르면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낡은 관습을 고수하면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럼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란 무엇이겠느냐?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 이런 마음 자세를 갖는다. ‘이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든 싫어하는 일이든, 내 흥미 범위 내에 있는 일이든 별 흥미가 없는 일이든, 기왕 내게 맡겨진 일이니 잘 해내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서부터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하면 마지막에 어느 수준까지 해내든 나는 최선을 다한 거야.’ 갖춰야 할 최소한의 마음 자세와 태도는 ‘착실히 하자’이다. 어떤 일을 맡은 순간부터 대충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자료를 찾지도 않고, 세심히 준비하지도 않고, 구하거나 묻지도 않는다면, 더 잘하기 위해, 그 분야의 기술이나 업무를 습득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배우려 하지 않고, 얕보는 태도, 되는대로 살자는 태도로 대한다면, 이것은 인성의 문제다. 이는 어영부영하는 게 아니냐? 어떤 사람은 “저한테 맡긴 본분이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말한다. 마음에 안 들면 받아들이지 말고, 받아들였다면 진지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이런 태도를 갖춰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이 마땅히 갖춰야 할 것이 아니냐? 이를 단정하고 올바르다고 말한다. 이 부분의 정상 인성은 최소한 마음을 쓰고, 진지하게 대하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태도, 그리고 착실하고 진지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이런 것들을 갖추면 충분하다.
교회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인성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고 패괴 성품을 드러내더라도 쉽게 바로잡을 수 있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성이 형편없다. 하나님이 맡긴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신용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인성은 가치도 없고 귀중하지 않으며 비천하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이 네게 맡긴 일이든, 아니면 교회에서 네게 맡긴 일이든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대한다면 이것이 정상 인성이 가져야 할 태도이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저는 형제자매가 맡긴 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반드시 해낼 수 있고 잘 대할 수 있어요.”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겠느냐? 신용이 없고 부도덕하며 인성에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어느 누구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대할 수 없다. 그 자신의 일도 속이고 건성으로 대한다면 이 사람은 몹시 비천하고 가치 없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이 부탁한 일에도 마음을 쓰고 책임을 다하며 신용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일 때 큰 차이가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비슷할 것이다. 분명 양심 없고 부도덕한 사람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품의 차이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제게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동물을 돌보라고 한다면 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집의 큰일을 처리하라고 한다면 반드시 잘 처리할 수 있어요.” 이 말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 성립하지 않겠느냐?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무슨 일을 맡기든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고 마음이 바르며 인품이 고귀하고 인격과 신용, 덕행을 가지고 있다면 귀중하고 특별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이든 그의 덕행과 신용으로 대할 것이다. 덕과 신용은 없으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직접 이 일을 맡기시면 전 분명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진실하겠느냐? 이는 다소 허풍 떨며 남을 속이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않고서 어떻게 믿음직해질 수 있겠느냐? 이는 빈말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 집에서 기르는 집 지키는 개 두 마리를 어떤 사람에게 보살피도록 했는데 그는 자기 집 개처럼 보살피고 관리했다. 그도 개 기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개를 꽤 잘 보살폈다. 개가 병에 걸리면 병을 치료해 주었고 씻겨 주었으며 제시간에 먹이도 주었다. 그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개를 보살피는 것을 하나의 부탁이자 책임으로 여기고 보살폈다. 이는 인성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그는 그런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그 두 마리 개를 보살피게 됐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개가 불쌍할 정도로 말라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병에 걸렸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신경 쓰지 않았고 나쁜 기분이 식욕에도 영향을 끼치는 바람에 개가 결국 그렇게 말라 버린 것이다. 그 사람은 개들을 그렇게 대했다. 두 사람이 다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무엇이 다르겠느냐? (인성이 다릅니다.) 개를 잘 보살피던 그 사람이 진리를 많이 깨달았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잘 보살피지 않던 그 사람도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짧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 그 둘은 왜 그렇게 많이 다르겠느냐? 인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신용이 있어서 남에게 약속한 일은 자신이 좋든 싫든 결국 해내고 만다. 어떤 일을 넘겨받든 반드시 착실하게 완성하여 그에 대한 남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도 떳떳하다. 그는 양심이 있어서 모든 일을 양심으로 평가한다. 반면 양심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약속하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한다. 그는 “상대방이 저를 믿어 줬으니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잘해야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마음이 없고 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는 인성의 차이가 아니겠느냐? 과연 개를 잘 보살핀 사람이 힘들다고 생각했겠느냐? 그는 지치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떻게 일을 잘 처리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골머리 빠지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 일 때문에 자주 기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게 적절한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담을 짊어진 것이다. 부담을 짊어지려 하지 않은 그 사람은 같은 본분을 받았지만 받고 나서 짐이라고 생각했고 개가 짖기만 하면 그는 짜증이 나서 이렇게 꾸짖었다. “짖긴 뭘 짖어! 또 짖으면 발로 차서 죽여 버릴 거야!” 이는 인성에 차이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차이가 상당히 크다. 어떤 사람은 네가 한 가지 일을 부탁하면 성가시고 귀찮은 데다가 그의 자유를 속박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바쁜데 일을 또 주다니,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각종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고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을 변명한다. 그는 양심과 이성이 없고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유와 핑계를 대며 자신의 인성이 나쁘다는 사실을 변명한다. 인성이 나쁜 사람은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럼 그런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럴 수 없겠느냐? 그런 사람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는 정상 인성과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를 갖추고 있지 않다. 내면에 그런 본질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 진리와 정상 인성은 어떤 관계이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실행하려면 인성 안에 무엇을 갖춰야겠느냐? 우선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올바른 태도와 올바른 사상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갖춰야만 정상 인성이 있는 것이고, 정상 인성을 갖춰야만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다.
2) 개인 주변 환경에 대한 관리
두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 개인 주변 환경에 대한 관리이다. 이는 어느 측면의 정상 인성과 관련 있겠느냐? (생활 환경 측면과 관련 있습니다.) 생활 환경은 무엇을 포함하겠느냐? 주로 개인의 생활 범위 내의 생활 환경과 자주 접하는 공공 환경, 이 두 가지를 포함한다. 이 두 가지 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포함돼 있겠느냐? 생활 방식, 위생 관리, 환경 관리가 포함돼 있다. 생활 방식을 더 세분하면 무엇을 포함하겠느냐? 일과 휴식, 음식, 일상 보건, 생활 상식 등을 포함한다. 우선 첫 번째인 일과 휴식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일과 휴식은 보통 규칙이나 시간을 따르면 된다. 밤을 새워 일해야 하거나 초과 근무를 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 규칙이나 시간을 따르는 게 옳다. 밤을 새우는 것을 유독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밤에는 자지 않고 분주하게 일하다가 아침에 남들이 일을 시작할 때가 되면 그제야 잠을 자고, 밤에 남들이 잘 때 일어나서 일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늘 남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유별나게 구는 이런 사람은 이성이 그다지 건전하지 못하다. 특수한 상황을 제외한 정상적인 상황에서 다들 대체로 보조를 맞춘다. 다음 생활 방식은 무엇이냐? (음식입니다.) 음식이라는 측면에서 정상 인성의 요구는 충족하기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충족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은 음식이라는 측면에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 않으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어요. 배탈 날 일은 없으니 먹고 싶은 걸 자유롭게 먹으면 돼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테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이는 다소 치우치지 않았느냐? 이렇게 이해하면 비정상이고,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일부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 상식과 육을 좇는 것을 동일시하면서 생활 속의 일부 상식에 주의하는 게 육을 좇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위가 좋지 않아서 맵거나 너무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않는 걸 보고 “그건 식욕이고 육을 좇는 거예요. 당신은 그걸 배반해야 해요. 어디에 갔는데 그런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먹어야 해요. 안 먹어서야 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도 육을 저버리기 위해 기어코 먹고는 매우 힘들어한다. 내가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요. 안 먹는다고 누가 정죄하지는 않아요.”라고 말해도 그는 “안 돼요. 먹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는 먹고 나서 괴로워해도 싸다. 그건 자업자득이다. 자신이 정한 규례이니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럼 먹지 않는 것을 잘못됐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몸에 특수한 질환이 있어서 특정 음식을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그런 경우에는 그런 음식을 먹지 말고 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고추를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는데, 기어코 무작정 먹고는 육을 저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는 치우치게 이해한 것 아니겠느냐? 이는 치우친 것이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은 먹지 마라. 몸과 싸워서 뭐 하겠느냐? 무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런 규례를 지킬 필요도, 그렇게 육을 저버릴 필요도 없다. 사람마다 몸 상태가 다르다. 위가 좋지 않은 사람도 있고 심장이 좀 약한 사람도 있으며 시력이 좀 나쁜 사람도 있다.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도 있고 땀이라고는 절대 흘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 따라 몸을 돌봐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한 마디 말로 표현하자면, 생활 상식을 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식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어떤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해롭고 어떤 음식을 먹으면 몸에 이로운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음식이 맛은 없지만 몸에 이롭다면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한다. 반면 맛은 있지만 먹은 뒤 병이 도지는 음식이라면 먹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게 바로 상식이다. 그 밖에 보건 상식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일 년 사계절 동안 시간과 기후, 계절별로 적절한 음식을 먹는 게 대원칙이다. 몸과 싸우지 않는 것이 정상 인성이 가져야 할 사고이자 이해이다. 장염에 걸려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설사하는 사람은 그런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전 두렵지 않아요.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까요.”라고 말하는데, 결국 먹고 나서 끊임없이 설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과 연단을 준 것이라고 말한다. 터무니없는 사람이 아니냐?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면 식탐이 너무 강한 것이다.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주 골치 아프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입을 통제하지 못하고 “전 두렵지 않아요.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건 어떤 것이냐? 치우친 것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서 함부로 규례에 맞추는 것이다. 원래 장염이 있었는데도 음식을 함부로 먹어서 결국 설사를 하고는 하나님이 시련과 연단을 준 것이라고 말하니 이는 함부로 규례에 맞추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그릇된 인간이 이런 헛소리를 내뱉다니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아니겠느냐? 성령이 이런 그릇된 인간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함부로 규례에 맞춰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시련을 주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럴 자격도 부족하고 분량도 부족한 네게 하나님이 시련을 줄 리 없다. 자신이 어떤 음식을 먹으면 병이 도지는지도 모르는 것은 바보이고 지능이 건전하지 않은 것이다. 지능과 이성이 건전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이런 사람에게 시련을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는 비이성적인 것이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줄 때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이 쓰려 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련을 준다. 안일과 누림만 탐내고 진리는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 특히 그릇되게 이해하는 사람은 모두 성령 역사가 없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시련을 줄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한약이나 몸에 좋은 식품을 접할 수 있으면 아무 때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 어떤 여자는 피부 관리를 위한 미백 및 주름 개선 제품을 보면 아무 때나 닥치는 대로 얼굴에 바르지만, 매일 두 시간 동안 화장하고 세 시간 동안 화장을 지우다가 결국 보기 흉하게 피부를 망친다. 그러고는 “나이 들어 생기를 잃는 자연법칙을 그 누가 당해 낼 수 있겠어요. 이 피부 늙은 것 좀 보세요!”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함부로 손대지 않았으면 그다지 늙어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얼굴에 닥치는 대로 바르다 보니 오히려 늙어 보이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뭐라고 하겠느냐? (자업자득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싸다! 정상 인성은 생활 측면의 상식을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발이 차면 허리가 쉽게 아프다는 것, 노안이 빨리 시작되면 어떻게 눈을 보호해야 하는지, 컴퓨터 앞에 자주 앉아 있으면 어떤 폐단이 생기는지 등 어떻게 건강을 지키고 관리하는지에 관한 보건 상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으면 하나님의 말씀만 읽으면 되지 그런 보건 상식은 배워서 뭐 하죠?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기 때문에 보건 지식을 아무리 많이 배워 봤자 소용없어요. 죽을 때가 되면 아무도 구해 주지 못하죠.” 겉으로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다소 터무니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나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상투적인 글귀와 도리만 말할 줄 안다. 마치 꽤나 영적인 것처럼 굴지만 사실 조금도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일이 닥치면 함부로 규례에 맞추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 진리는 조금도 실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람들이 옥수수 미음을 자주 마시면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몸에 좋다고 말해도 귀 기울이지 않다가 누가 돼지고기 볶음을 먹는 게 건강에 좋다고 얘기하면 돼지고기 볶음을 볼 때마다 끊임없이 먹는다. 먹으면서 입으로는 “어쩔 수 없이 좀 먹어야겠네요. 이건 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요!”라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거짓말이다. 정상 인성 안에 갖춰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어떤 나이에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정상 인성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20대 때 음식을 아무렇게나 먹는다. 추운 날에 얼음을 먹는 걸 보고 나이 많은 사람이 겁에 질려서 먹지 말라고,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고 타이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프긴 뭐가 아파요. 제 몸 튼튼한 거 안 보이세요?” 그 나이에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가 40대가 되었을 때 얼음을 먹으라고 주면 그가 먹을 수 있겠느냐? (먹지 않습니다.) 60대가 되면 먹는 것은 고사하고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할 것이다. 찬 기운이 너무 강해서 몸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경험이라고 하고, 삶의 경력이라고 한다. 60세가 넘도록 살고도 얼음을 많이 먹으면 위나 몸이 견디지 못해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이는 정상 인성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이는 견문이 부족한 것이다. 60대인데도 허리에는 한기가 들면 안 되고 다리에 한기가 들면 허리가 아프다는 사실도 모른다면 그는 60여 년 동안 어떻게 살아온 것이겠느냐? 되는대로 산 것이다. 어떤 사람은 40대가 되면 보건 상식 같은 생활 상식을 많이 알게 된다. 또한 물질과 금전, 일, 혈육, 세상사, 인생 등을 대할 때도 어느 정도 올바른 관점과 순수한 이해를 가지게 되며 설사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젊은이보다 아는 게 많아진다. 이게 바로 분별력과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20년을 더 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는데, 그중에는 진리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이를 통해 그가 깨닫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자질도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리 실제에 훨씬 더 빨리 진입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난 20년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것을 얻었고, 그런 경력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진리 실제의 측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네 인성 안에 부족한 게 너무 많고, 생활을 대하거나 지난 20년 동안 발생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올바른 관점이나 정상 인성의 사고, 더욱이 정상 인성의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너는 그 20년을 헛산 것이다. 내가 예전에 몇 곳을 방문했을 때 나이 든 자매 여럿이 밥도 할 줄 모르고 반찬도 못 만들어서 찌개로 끓여야 할 것을 볶고 볶아야 할 것을 찌개로 끓이는 것을 봤다. 계절마다 나는 채소가 다른데 식탁 위에는 늘 같은 채소 몇 가지만 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이는 지능이 몹시 떨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배추나 감자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여러 식재료조차 요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걸 보면 지난 오륙십 년을 얼마나 대충 살아온 것이겠느냐? 설마 마음속에 아무런 요구도 없는 것이겠느냐? 무슨 일을 해도 경험을 도출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을 쓰고 한동안 연습하면 배울 수 있는데, 몇 년을 배웠는데도 할 줄 모른다면 지능과 자질이 너무도 떨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위생 관리라는 측면에 대해 말해 보겠다. 최근 나는 두 곳에 갔었는데 건물 주위가 아수라장이었다. 그곳은 원래 상당히 잘 계획돼 있었는데 어째서 결국 ‘돼지우리’로 변했겠느냐? 사람들이 관리할 줄 모르고 정상 인성의 위생 의식과 요구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게으를 뿐 아니라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는 게 습관이 되어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고 손이 가는 대로 물건을 방치한 것이다. 규율이나 제한도 없어서 한 곳을 정리해도 하루 이틀 동안만 유지되고 며칠 지나면 다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다. 이 대체 무슨 환경이란 말이냐? 이런 환경에서도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겠느냐? 돼지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들은 위생이나 환경, 구도, 관리에 대해 아무런 의식도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리 더럽고 어수선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 괴로워하지도, 조급해하지도 않고 변함없이 생활하며 별로 신경 쓰거나 요구하는 것도 없다. 어떤 곳은 위생이나 환경을 괜찮게 관리하길래 그곳 사람들이 위생을 중시하고 환경을 관리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기습적으로 검사해 보니 일손을 불러 미리 정리한 것이었다. 갈 거라고 미리 알리면 분명 깨끗하게 정리해 놓을 것이다. 하지만 미리 알리지 않고 가면 환경이 다를 것이다. 분명 더럽고 어수선할 것이다. 어떤 여자아이의 방에는 옷과 신발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밖에서 쓰는 호미나 괭이 같은 작업 도구도 옷과 함께 쌓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정리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 정도로 바쁘겠느냐? 한숨 돌릴 시간도 없느냐? 한숨 돌릴 시간도 없다면 그건 정말 바쁜 거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으냐? 환경을 관리하는 게 어째서 그렇게 어려우냐? 깨끗하고 말끔한 환경을 유지하는 게 어째서 그렇게 힘드냐? 이는 인성과 관련이 있지 않으냐? 사람은 왜 그렇게 ‘돼지우리’ 안에서 생활하는 걸 좋아하는 것이냐? 어째서 그런 환경에 만족하는 것이냐? 어째서 그런 환경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이냐?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무엇 때문에 환경을 잘 관리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내가 가끔 어디를 가기 전에 간다고 미리 알리면 그들은 깨끗하게 정리해 놓지만, 자주 가면 정리도 하지 않고 “자주 오시니까 편하게 대할게요. 저희는 원래 이래요. 항상 정리하면 얼마나 힘들어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일하느라 하루 종일 바빠서 머리 빗을 시간도 없는걸요.”라며 핑계를 댄다. 또 어떤 핑계를 대겠느냐? “이건 다 가건물이니까 너무 잘 정리할 필요 없어요. 이 정도면 돼요.” 그렇다. 모두 가건물이다. 하지만 설사 텐트에서 살더라도 관리는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정상 인성이다. 만약 이 정도 정상 인성도 없다면 짐승과 뭐가 다르겠느냐?
하나님 집에는 지리적 환경이 꽤 좋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산도 있고 물도 있으며 길도 잘 정비돼 있다. 강가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고 정자도 하나 있으며 옆에는 조경석도 놓여 있어서 상당히 아름답다. 어느 날 멀리 보이는 깨끗한 오솔길 위에 노란색 물건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앞으로 걸어가 보니 귤껍질이었다. 누가 쓰레기를 그렇게 함부로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 원래는 깨끗했던 정자에도 누가 해바라기씨를 까먹었는지 바닥에 해바라기씨 껍질이 가득 버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규율을 이해하겠느냐? 정상 인성 안에서 사람은 위생이나 환경에 대해 요구 기준이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제가 요구 기준이 없다니요? 저는 매일 밤 발을 씻어요. 어떤 사람은 발도 씻지 않아요.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조차 안 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너는 발은 깨끗이 씻는구나. 그런데 왜 네가 사역하는 환경은 돼지우리 같은 것이냐? 네가 그 정도 깨끗한 것이 대수겠느냐? 기껏해야 네가 몹시 이기적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너는 만물을 관리하고 싶어 하는데, 정원 하나를 주어도 잘 관리하지 못하는 네가 어떻게 만물의 주인이 되겠느냐? 부끄러움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이런 사람은 환경뿐 아니라 개인의 위생도 관리하지 못하고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기도 한다. 이런 습관은 어떻게 생겼겠느냐? 아무 데나 과일 껍질을 버려 놓고도 거름을 만들려고 남겨 두었다고 핑계를 댄다. 그럼 왜 거름더미나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길 위와 정자에 버렸느냐? 정자가 거름을 만드는 곳이냐? 이는 규율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인성과 이성, 품성이 모자란 천한 사람이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어떻게 제지할 수 있겠느냐? 관리 감독하면 되겠느냐? 누가 감시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겠느냐?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 방법을 써야 한다. 적절한 제도를 만들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불량기가 가득해서 몇 번이나 타일러도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낡은 종이 상자와 부서진 나무판자, 종이 쪼가리를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늘어놓고는 나중에 쓰려고 남겨 놨다고 말한다. 기왕 쓸모 있는 물건이라면 어째서 유형별로 정리하여 가지런히 놓아두지 않는 것이냐? 그러면 더 보기 좋고 공간도 덜 차지하지 않겠느냐? 대부분의 사람이 관리를 할 줄 몰라서 생활하는 환경에 아무렇게나 물건을 쌓아 두고 늘어놓는 바람에 빈자리도 하나 없다. 쌓아 둘수록 어수선해지고 어수선해질수록 더러워져서 결국 누가 보기에도 불편한 쓰레기장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정상 인성을 갖추고 있겠느냐? 자신이 생활하는 환경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질을 갖추었겠느냐? 그런 사람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생활하는 환경을 관리하지 못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원래 위생 의식도 없고 환경을 관리할 줄도 모르며 마음속에 그런 일들을 품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의 생활 환경이 어때야 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동물과 마찬가지로 어떤 환경에서 생활해야 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관리자가 관리할 줄 모르는 것과 관련 있다. 관리자는 관리할 줄 모르고 관리받는 사람은 스스로 깨닫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해서 결국 모두가 이런 식으로 ‘협력’하다 보니 ‘돼지우리’가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문 곳에 가 보면 나는 이런 느낌을 받는다. ‘여기는 왜 늘 깨끗하지 않고 집 같은 느낌이 안 들지?’ 이런 걸 보고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는 그런 곳에 가면 기분이 좋겠느냐? (별 느낌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별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이 너희의 진실한 느낌이다. 내가 몇 군데를 골라 계획을 세우고 일을 마치고 정리를 끝내자 다들 보면서 즐겼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아수라장이 되는 바람에 위생을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사람을 찾아 관리시켜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몹시 더럽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보기 흉하다. 어떤 사람은 채소를 뽑아 오고 나서 어디에서 씻어야 좋을지 모르고 반드시 깨끗한 곳에서 씻으려고 해서 결국 깨끗한 곳을 또 더럽혔다. 그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이는 짐승 무리가 아니겠느냐? 인성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위생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환경을 관리할 줄도 모르는 걸 보면 조급해지고 화가 치민다!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생활 환경을 마련해 주고 잘 꾸며 주어 봄에는 여러 꽃나무가 자라고 산과 물, 정자도 있으며 일하고 생활할 곳도 있고 각종 시설도 갖추어져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감사히 여기지도 않는 채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는 환경이 좀 낫네. 하지만 여전히 농촌과 별 차이가 없어. 땅에는 온통 잡초랑 진흙뿐이라고.’ 그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환경을 함부로 망가뜨리고 관리할 줄도 모른다. 인성에 부족한 것이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이냐! 인성 안에 갖추어야 할 것조차 갖추지 못하고 최소한의 생활 환경과 관련된 여러 측면도 스스로 잘 돌보지 못한다. 사람은 그렇게 좋은 환경을 누리면서도 어째서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것이겠느냐? 어째서 그 환경을 잘 관리할 줄 모르는 것이겠느냐? 왜 그렇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왜 그런 것이겠느냐? 본분으로 바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너희들보다 생활 환경이 좋지 않지만 관리를 상당히 잘해서 남들은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고 마음속으로 탄복하고 우러러본다. 반면 너희의 생활 환경은 남들이 들어가 보지 않고 겉만 보고도 무시한다. 이는 너희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가 아니겠느냐? 네 자신의 행동이 네가 생존하는 그 형편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남들이 네 생활 환경을 보는 것은 네 본질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남들이 너를 무시한다고 비난해서야 되겠느냐? 사람의 고귀함과 비천함은 남들의 평가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살아 내는 것이다. 정상 인성의 것들을 갖추고 있다면 너는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고 네 고귀한 인품을 드러낼 수 있으며 사람들도 자연스레 너를 중요시하고 우러러볼 것이다. 반면, 네가 정상 인성의 측면들을 갖추고 있지 않고 위생 상식도 모르며 환경을 관리할 줄도 모르고 매일 ‘돼지우리’ 안에서 살면서도 스스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짐승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럼 너는 비천한 것이다. 그토록 비천한 사람, 그토록 비천한 인성은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하는 여러 사상과 관점, 요구, 추구 같은 것들은 전혀 갖추지 않았는데 과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왜 불가능하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저희는 지난 몇 년간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그런 세속적인 일들은 깨끗이 버린 지 오래예요. 저희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삶의 질 같은 건 세속적이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그럼 네가 호흡하는 공기도 세속적이지 않겠느냐? 네가 입는 옷과 쓰는 물품도 전부 세속적이지 않겠느냐? 너는 어째서 야외 아무 곳에서나 예배하지 않고 실내에서 예배하는 것이냐? 이런 사람은 터무니없지 않으냐?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사람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어렵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정상 인성을 먼저 갖춰야 할 뿐 아니라 나쁜 생활 습관을 벗어던지고 품위와 교양, 품성을 갖춘 생활 방식과 생활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적절하지 않겠느냐? 그럼 이런 문제는 바로잡기 쉽겠느냐? 생활 방식을 바꾸고 나쁜 생활 습관을 벗어던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어떤 방법을 써야 빠르게 진입할 수 있겠느냐? 처벌하는 것 외에 또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 (서로 감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서로 감독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핵심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이다. 내가 보기에 벌금을 물리는 방법은 상당히 훌륭하고 매우 유용하다. 벌금을 물리는 것과 관련되면 사람의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손해가 갈까 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른다. 벌금을 물리면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그럼 그런 사람들에게 진리를 교제하면 왜 성과를 이룰 수 없겠느냐? 그런 사람들은 정상 인성도, 진리를 받아들일 조건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를 교제하는 방법이 그들에게 효과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역 환경에서든 첫 번째로 분류하는 법을 배우고, 두 번째로 말끔한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 세 번째로 위생적이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 다음, 이에 더해 쓰레기를 치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정상 인성은 이런 것들을 갖춰야 한다.
어떤 여자는 매일 머리를 빗고 나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고 집을 나선다. 이런 습관을 고칠 수 있겠느냐? 머리를 빗고 나면 서둘러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정리하게 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환경을 잘 관리해야 한다. 환경을 잘 관리하고 싶다면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자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야 하고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공공 환경에 대해서도 공중도덕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여럿이 생활하고 휴식하는 곳은 모두가 책임을 지고 잘 관리해야 한다. 바닥에 귤껍질 몇 조각이 떨어져 있는 걸 보면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 일부 사역 장소에서는 일을 마치고 나면 나무 조각, 톱밥, 철근, 못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바람에 걸어가다가 실수로 못을 밟기 쉬워서 몹시 위험하다. 왜 일을 마치고 나서 정리를 하지 않는 것이냐? 이 무슨 나쁜 습관이란 말이냐? 그래서야 되겠느냐? 사역 현장이 그렇게 더럽고 어수선한 걸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건 짐승이나 하는 짓이 아니겠느냐?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일을 다하고 나서 깨끗이 정리해서 남들이 보기에 사람이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 짐승은 일을 다 하고 나서도 마치 청소는 그의 일이 아니고 그와 무관하기라도 한 듯 청소를 하지 않는다. 이 무슨 논리란 말이냐? 난 일을 다 하고 나서 청소하지 않는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을 많이 봤다. 난 그들에게 매일 일을 마치고 나면 사람을 안배해 쓰레기를 전부 치우도록 해야 한다고, 매일 청소해야 현장이 깨끗해지기 때문에 그런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생활 습관을 기르려면 먼저 특정한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환경에 적응한 다음에는 언젠가 그 환경이 변하면 깨끗하지 않은 곳을 보고 스스로도 불편해할 것이다. 마치 해외에서 3년, 5년 생활한 사람이 해외는 모든 게 다 좋다고 생각해서 언젠가 고향에 돌아오면 자신이 갑자기 고귀해진 것처럼 느끼고, 남들이 위생을 중시하지 않거나 누군가의 집이 깨끗하지 않으면 무시하며 며칠 씻지 않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생활 환경 때문이 아니겠느냐?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위생이나 환경을 잘 관리해야만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역시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하는 측면이다. 나는 몇몇 곳에 방문했을 때 일부 여자아이들이 사는 방이 말끔하지 않고 아수라장인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말끔하게 하라는 건 꼭 군대 같지 않나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매일 침대와 방 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매일 이런 일들을 하는 게 습관이자 정상 상태,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 된다면 이런 생활 습관을 기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환경에 대한 네 요구가 한 단계 높아질 것이다. 그 단계가 높아지면 너라는 사람 자체의 기질과 정신 면모, 격조와 인성, 존엄성도 향상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돼지우리’ 안에서 생활한다면, 짐승 우리처럼 사람이 머물 만하지 않은 곳에서 산다면 너는 사람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똑같이 집에 들어가더라도 어떤 사람은 집 안과 바닥이 모두 깨끗한 걸 보고 문밖에서 계속 신발을 문지르는데, 그러고도 여전히 깨끗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예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간다. 주인은 꽤나 깨끗하고 그를 존중하는 네 모습을 보고 너를 존중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발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집에 들어가고 바닥에 진흙이 묻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주인은 천성적으로 규율을 모르는 네 모습을 보고 너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무시하며 앞으로는 너를 집 안으로 들이지 않고 문밖에서 기다리게 할 것이다. 이는 ‘당신은 이 집에 들어올 자격 없어. 당신이 들어오면 이 집을 망치는 거야. 당신이 집에 들어오면 내가 청소를 얼마나 오래 해야겠어?’라는 뜻이다. 그는 너를 존중하지 않는다. 네게 사람다운 모습이 없는 걸 보고 그는 너를 더 이상 존중하지 않게 된다. 살다가 그 지경에 이르면 그게 과연 사람이겠느냐? 그런 사람은 반려동물만도 못하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고, 정상 인성을 갖춰야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어디에서 생활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사람은 규율을 잘 지켜야 하고 환경과 위생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하며 책임감과 좋은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한다. 무슨 일을 해도 잘할 수 있게 되고 기준에 이르게 될 때까지 마음을 쓰고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본분을 이행하거나 처신할 때 남들은 네가 단정하고 올바른 좋은 사람인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탄복하며 자연스레 너를 존중할 것이다. 또한 너를 우러러보고 중요시하며 희롱하지도,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고, 너와 말할 때도 진지한 태도를 취하며 네 말을 비웃거나 멸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내 외모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한 가지 느끼는 점이 있다. 나와 접촉하는 보통 사람 중 내게 농담을 하거나 가벼운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지만 아마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든 너무 진지해. 말과 행동이 모두 진지한 올바른 사람이야. 당신과 어울릴 때는 농담을 못 하겠어. 당신은 딱 봐도 농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어떤 곳에 가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귈 때 사람들은 네 인성과 품성 안에 무언가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지 못하지만 너는 스스로 알 것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일을 바라보고 어떻게 사람과 접촉하는지에 대해 항상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과 접촉하고 어울리면 사람들은 네가 너무 엄숙하다고, 무슨 일을 처리하든 너무 진지하고 엄숙한 데다가 너무 원칙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겠느냐?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처신할 때 정상 인성 안에 갖춰야 할 이런 측면들을 갖췄다면, 사람들이 뒤에서 너를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그들이 마음속으로 네가 올바르고 엄숙하며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가지는 사람이고 네 품성은 고귀하다고 생각한다면, 너와 접촉하고 사귀는 동안 그는 너를 칭찬하고 우러러볼 것이다. 그러면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만약 한동안 접촉해 보고 네가 무슨 일을 해도 잘 못하고 게으르고 게걸스러우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능력은 없는데 눈만 높은 데다가 너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는 것, 위생도 중시하지 않고 환경을 관리할 줄도 모르며 무슨 일을 하든 요령을 찾아내지 못하는 데다가 자질도 몹시 떨어진다는 것, 신용도 없고 무슨 일을 맡기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는 사람 마음속에서 분량이 조금도 없게 되고 폐기 처분될 것이다. 사람 마음속에서 분량이 조금도 없는 것은 별거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 마음속에서도 그렇게 비천하고 가치 없으며 짐승처럼 마음과 영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너는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너는 구원받으려면 멀었다! 인품이 합격하지 못하고 말과 행동에 규율이 조금도 없는 짐승 같은 사람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내가 보기에 그런 사람은 매우 위험하고 조만간 도태될 것이다.
3) 이성을 접할 때의 태도와 모습
세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성을 접할 때의 태도와 모습이다. 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는 인성의 어느 측면과 관련 있겠느냐? 존엄, 염치, 품행과 관련 있다. 어떤 사람은 이성을 접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 ‘일을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생각이 좀 들거나 삿된 욕정과 사욕을 드러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상 인성으로 가져야 할 생각이냐? 정상 인성의 표징이냐? 네가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이성과 만나 연애하고 싶으면 정상적으로 해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연애를 하지 않고 눈에 드는 상대를 보면 며칠 시시덕거리고, 마음에 들거나 마음이 맞는 이성을 보면 바로 자기를 과시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과시하느냐? 추파를 던지거나 말할 때 말투를 바꾸거나 어떤 몸짓을 하거나 우스갯소리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이것이 바로 과시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은데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면 장담하건대 곁에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품행이 좋지 않고, 남녀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하자니,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경박하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중하지 않는 것이다. 경박한 사람은 자애를 모른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만,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을 완수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를 문제라고 할 수 있느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 추구에 지장을 주지 않았으면 됐지. 이 일에 대해 뭐 말할 게 있어요?” 이것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인성의 염치, 그리고 존엄과 관련되어 있다. 인성에 이 두 가지가 빠지면 안 된다. 정상 인성에 이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신용도 꽤 있고, 일도 꽤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열심히 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이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네가 이성과 시시덕거리는 것이 상대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피해가 되겠느냐? 만일 상대가 너를 사랑하게 되면, 넌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는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고 말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면서 시시덕거리다니 그건 사람을 농락한 것이 아니냐? 이것은 사람을 해치는 짓이다! 이는 좀 부덕하다! 이런 사람은 인품이 나쁘다. 그 밖에, 연애할 생각도 아니고, 진지하게 결혼을 전제로 교제할 생각도 없으면서 이성에게 추파를 던지고 위트와 유머를 뽐내며 네 풍격과 멋,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이런 것을 과시하는 건 무슨 의미이냐? (사람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뜻이 좀 있다. 유혹이라는 행위는 고상하냐, 악랄하냐? (악랄합니다.) 이러면 존엄이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이 남을 유혹할 수 있겠느냐? 창녀, 음탕한 여인, 불량배 같은 사람은 염치를 모른다. 염치를 모른다는 건 어떤 것이겠느냐? 뻔뻔스러운 것이다. 명예와 절조, 수치, 영예, 존엄, 명성 같은 것들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가는 곳마다 과시하고 시시덕거리는데, 그는 한두 명과 시시덕거리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여덟이나 열 명과 시시덕거려도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천, 수만 명과 시시덕거릴 수 있어야 기뻐한다. 어떤 여자는 결혼해서 아이가 둘 있는데도 남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왜 남들에게 알리지 않겠느냐? 그녀는 자신이 결혼했고 임자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남과 시시덕거리지 못하고 남을 꾀거나 유혹할 수 없게 될 것이 두려워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뻔뻔스럽지 않으냐? 인성 안에 이런 것들이 있다면 정상 인성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정상 인성이 아니다. 이 말은 네가 그런 인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네 정상 인성 안에는 무언가가 부족하고 염치와 존엄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이성 곁에만 가면 머리를 매만지고 옷을 정돈하거나 화장을 하는 등 치장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유혹하는 것이다. 이는 정상 인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유혹하면서도 아무 느낌 없고 그것이 정상적이고 흔하며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염치없는 것이자 무슨 일을 해야 하고 무슨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여자는 만 위안을 주고 나체로 길거리에서 한 바퀴 돌라고 하면 기꺼이 그렇게 한다. 이건 어떤 인간이겠느냐? 염치가 없는 인간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염치를 모르는 인간으로, 그녀가 보기에 명예와 절조, 인품, 염치, 존엄은 별것도 아니고 가치도 없다. 그녀는 과시하고 유혹하는 것이야말로 능력이고, 더 많은 사람이 그녀를 주목하고 쫓아다녀야 즐거우며, 이는 여자의 최고 영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존엄이나 염치, 인품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이게 좋은 인성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지 않으냐?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럼 절제할 수 있느냐? 절제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냐, 아니면 드무냐? 자신을 단속할 능력은 있느냐? 자기 단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염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시적으로 충동을 느끼거나 제멋대로 행동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고 창피하며 서둘러 뉘우쳐야 한다고, 다시는 그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을 마주했을 때 자신을 단속할 수 있다. 네 인성 안에 이 정도 자기 구속력조차 없다면 네게 진리를 실행하라고 했을 때 네가 무엇을 배반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외모가 조금 괜찮아서 이성이 쫓아다닌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에게 과시할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위험한 것이 아니냐? 그럼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겠느냐? (화를 보면 피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화이니 피해야 한다. 피하지 않으면 누가 네게 달라붙을지도 모른다. 네게 달라붙기 전에 피해야 하며, 이를 자기 단속이라 한다. 자기 단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염치와 존엄이 있다. 자기 단속을 못 하는 사람은 누가 유혹하면 유혹에 넘어가고, 누가 쫓아다니면 걸려드는데 그럼 골치 아파지는 것이다. 한편, 어떤 사람은 일부러 과시하고 치장하고, 입었을 때 훨씬 멋있고, 잘생기고, 예쁘게 보이는 옷을 골라 일부러 매일 그것만 입고 다니는데, 이는 위험하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행위다. 그 옷을 입었을 때 너무 눈에 띄고 너무 유혹적이면, 너는 육을 저버리고 그런 옷을 포기해야 한다. 네게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만약 네게 그럴 의지가 없고 배우자를 찾을 생각이라면, 둘이서 정상적으로 사귀되 다른 사람은 유혹하지 마라. 네가 배우자를 찾을 생각이 없으면서 계속 다른 사람을 유혹하면, 그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너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원칙을 지킬 수 있느냐? (그럴 의지가 있습니다.) 그럴 의지가 있다면 그럴 힘과 동력이 있으니 쉽게 지킬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단정한 사람인 데다 하나님을 믿은 후 진리를 추구하며 올바른 길을 걷느라 그럴 마음이 없어서 누가 유혹해도 상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일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사람은 그런 의지도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있는지 없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 너는 이성 교제라는 일을 올바르게 대하고, 다시 살펴보며, 이 일을 정상 인성의 존엄과 염치에 포함시켜야 한다. 염치가 없는 것과 인성이 없는 것은 어떤 관련이 있겠느냐? 염치가 없는 것은 인성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인성이 없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왜 사람이 인성을 갖추면 진리 추구에 이를 수 있다고 하겠느냐? 염치가 없는 사람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겠느냐? (알지 못합니다.) 그럼 그는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거나 진리를 위배했을 때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끼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가 올바른 길에 오를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사람은 무감각해서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과 혐오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거짓말 좀 하는 게 뭐 어때서요? 거짓말하는 게 창피한 것도 아니잖아요!” 염치없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염치 있는 사람은 만약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을 남들에게 들키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반면 염치없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그는 ‘무슨 정직한 사람이 되느니,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니, 남들 마음속에 내 가치와 분량이 어떠니, 그런 건 다 상관없어!’라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런 그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거짓말을 하고 난 그에게 마음이 평안한지, 참소가 있지는 않은지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안한 게 뭐예요? 참소가 뭐죠? 뭔 일이 그렇게 많은지!” 그는 그런 지각이 없다. 이렇게 이성이 건전하지 않은데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는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 진리와 진리에 위배되는 것 사이에 경계가 없고, 그것들 모두 똑같으며 어차피 모두가 힘을 들이고 본분을 이행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으니 그거면 됐고 그런 일들 간에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더라도,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하더라도, 남의 이익을 해치는 일을 하더라도,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일을 하더라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면 이는 염치없는 것 아니겠느냐? 염치없는 사람은 이런 일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고 진리로 평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염치없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거나 실행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염치가 없는 것과 인성이 없는 것의 관계이다. 그럼 너희는 어째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들은 진리와 큰 관련도 없고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우리가 평소에도 분명히 알고 있던 그런 일들을 당신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요?’ 너희는 그런 것들이 진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너희는 진리 실제에 얼마나 진입했느냐? 너희는 정상 인성을 살아 냈느냐? 너희가 정말로 진리와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었느냐? 분량이 너무도 작아서 그런 일들을 명확히 분별하지도 못하는 너희에게 무슨 진리 실제가 있겠느냐?
하나님 집의 10가지 행정 법령 중 하나는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은 물론, 감정까지 있다. 그러므로 서로 협력하며 섬길 때 남녀가 단둘이 함께하는 것은 일률적으로 금지한다. 이를 위반한 사실이 발견되면 누구도 예외 없이 출교한다.’이다. 사람은 이 행정 법령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한 남자가 여자 30여 명과 부당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듣자마자 놀라고 경악하며 “세상에, 그렇게나 많다니! 역겹지도 않나?”라고 할 것이다. 그 남자는 그런 말을 할 때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흔히 있는 일처럼 대한다. 그에게 오늘 무엇을 먹었냐고 물으면 그는 “쌀밥이요.”라고 답하고, 여자 몇 명과 놀아났냐고 물으면 “30여 명이요.”라고 답하는데 답하는 말투나 마음가짐이 완전히 똑같다. 이런 인성이 구제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더라도 구제될 수 없다.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다니 어쩜 그리 부끄러운 줄 모른단 말이냐?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그럼 그는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그에게 아직 염치가 있겠느냐? 없어졌다. 인성 안의 양심과 지각이 모두 무감각해졌다. 지각이 없어졌다. 이는 단지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염치도, 존엄도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 같지만 막상 일을 처리하면 엉망이다. 못하는 짓이 없고 염치를 모른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이 일은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오늘 다룬 정상 인성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이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으냐? 정상 인성 안의 그런 것들이 진리 추구와 관련 있느냐, 없느냐? (관련 있습니다.) 그럼 그런 것들이 진리 추구와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인성 안에 세심하게 행동하고 책임감 있고 심혈을 기울이는 면모를 갖추지 않았다면, 이런 인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그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요 몇 년간 다양한 측면의 진리를 적지 않게 교제했는데, 만약 사람이 심혈을 기울이지도,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대하지도 않고 모든 일을 대충 처리하고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과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진리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런 도리나 용어만 기억하면 되지 않나요?” 그러면 최종적으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그런 정상 인성을 갖추지 않고 네 인성 안에 그런 것들을 갖추지 않았다면, 사물을 대할 때 진지하고 세밀하며 착실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진리는 너에게 도리와 구호, 규례가 될 뿐이며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생활 환경, 규칙, 방식 같은 것들도 잘 관리하지 못하는 네가 진리에 관한 여러 측면의 원칙과 가르침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진입할 수 없다. 그 밖에, 사람은 살아가면서 긍정적인 사물을 대할 때는 사랑해야 하고 부정적이거나 사악한 사물을 대할 때는 마음속으로 혐오하거나 반감을 갖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일부 진리에 진입할 수 있다. 즉, 너는 진리를 추구할 때 올바른 태도와 단정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너는 올바르고 진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만약 사람이 염치가 없어서 사악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 마음속으로 무감각하고 지각이 없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진리가 네게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 소용도 없다. 진리가 네게서 아무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여 너를 구속하지도, 책망하지도, 주도하지도 못하며 네게 방향이나 길을 제시하지도 못한다면 너는 곤란해진다. 염치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달으려면 마음속으로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민감해야 한다. 부정적이거나 사악한 사물을 듣거나 접촉하면 마음속에 반감을 가져야 하고, 스스로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부끄럽고 불안해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진리로 자신을 단속하고 자신의 옳지 않은 내적 상태를 바로잡을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을 갖추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기가 쉬워지지 않겠느냐?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고도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빈말이다.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이 부족한데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정상 인성 안에 이런 것들을 갖춰야만 진리가 네 안에서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비로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진리를 깨달으면 네 사상을 바꾸고 행동을 단속할 수 있으며 패괴된 생각도 점점 줄어든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변화이다.
너희는 오늘 다룬 정상 인성의 모습들을 얼마나 갖추었느냐? 얼마나 부족하냐? 너희는 무엇을 갖추고 있느냐? (염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염치를 갖추고 있다니 좋은 일이다. 염치는 최소한 갖춰야 하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너희는 진지하고 세밀하게 대하는 심리와 태도를 갖추고 있느냐? 너희는 무슨 일을 하든 빈둥거리고 게으르고 꾸물거려서 너희가 처리한 일을 보면 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민다. 너희는 스스로 이런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이런 문제를 알아차렸을 때 마음속으로 걱정되지 않겠느냐? (걱정됩니다.) 어떤 식으로 걱정되었느냐? 말해 보아라. (방금 하나님의 교제를 다 듣고 나니 자신이 인성이 없고, 본분이나 생활 속의 일을 대할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조금 두렵습니다.) 인성이 너무도 부족하지 않으냐?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인성의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 갖추고 있지 않으니 마음속으로 걱정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기술은 좀 알지만 무엇을 만들든 촌스럽고 질이 낮으며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선진적이거나 기준에 맞는 방법은 살펴보지 않으니 생각이 너무 뒤떨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문을 설치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지역에서는 대부분 문을 한 짝만 달아요.” 네가 살던 그 작은 지역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대도시의 상업건축이나 주택의 문은 어떤 형태인지 살펴보고 실제 상황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지역에서는 문을 두 짝 달지 않아요. 여기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잖아요. 사람이 많아도 상관없어요. 비집고 들어가면 되니까요.” 누가 “비집고 들어가면 나중에는 문틀이 다 망가질 거예요. 우리 상의 좀 해 봐요. 이번에는 특별히 문을 두 짝 달면 안 될까요?”라고 하면 그는 “안 돼요! 문은 한 짝만 달아야 해요. 두 짝은 안 돼요. 기술을 제가 알지 당신이 알아요? 기술을 아는 건 저인데 왜 제 말을 듣지 않죠? 제 말을 따라야죠!”라고 한다. 상황에 맞게 만들라고 해도 그는 따르지 않고 기어코 문을 작게 달겠다고 하니 이는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에게 안에 있는 방과 밖에 있는 방 사이에 빛이 통하면서도 공간이 작아지지 않게 유리 칸막이를 설치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리를 설치하다니요? 유리를 설치하면 보안상 위험하지 않겠어요? 유리는 설치하지 말고 이 여닫이문 하나만 달면 돼요. 우리 지역에서는 전부 이런 문을 달아요.” 그는 늘 “우리 지역”, “제 고향”, “저는 기술을 배웠어요”라는 말들로 남을 압박하는데, 그게 진리냐? (아닙니다.) 외부의 일을 이런 태도로 대하는 건 인성 안에 무엇이 부족한 것이냐? 이성이 부족한 것이다. 이성 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부족하겠느냐? 견문이 부족하다. 그는 늘 자신이 살던 지역의 것이라면 뭐든 옳고 뭐든 가장 뛰어나며 뭐든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성이 모자라는 것 아니겠느냐? 정상적인 이성이라면 어때야겠느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몇 년간 이 일을 하면서 본 게 많진 않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이런 문을 만들어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문을 얼마나 크게 만드는지 살펴보고 거기에 맞게 만들게요. 지역이 달라졌으니 일하는 방식도 바뀌어야죠.” 이성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가 이렇게 이성적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비이성적이다.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다시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만들면 손실을 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손실을 본다. 이런 일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이 사람은 심하게 고집을 부리는데, 어느 정도로 고집을 부리겠느냐?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고 내 말조차 따르지 않으며 내게 대들기까지 한다. 내가 “너는 반드시 바꿔야 해. 바꾸지 않으면 너를 쓰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 그는 감히 “저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이 크기로 만들 거예요!”라고 한다. 이는 무슨 성품이란 말이냐? 이게 정상 인성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정상 인성이 아니다. 그럼 무슨 인성이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짐승과 조금 비슷하다. 이는 마치 목마른 소가 수레에 물건이나 사람을 얼마나 싣고 있든 물웅덩이나 강을 보기만 하면 수레를 끌고 그대로 돌진해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잡아당겨도 막지 못하는 것과 같다. 동물은 이러한데, 사람에게도 이런 성품이 있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이런 성품이 있으면 그것은 정상 인성이 아니고 아주 위험하다. 그는 이유를 찾아 너의 것을 부정하고 네 말을 따르지 않는데, 특히 우완하다. 일상생활 속의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겸허하게 받아들이거나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태도가 없는데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다들 문을 두 짝 설치하는 게 적절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조차도 하지 못한다. 이는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올바른 제안일 뿐인데도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진리에 관한 것을 따를 수 있겠느냐? 마찬가지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성품을 갖추고 있으면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면 아주 곤란하다. 인성 안에 이 정도 이성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데 무슨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매일 누구를 위해 그런 사소한 일을 바쁘게 처리하는 것이겠느냐? 모두 자신의 기호나 사욕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이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믿는 대로 한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하루 종일 악만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속이 그토록 악한데, 하는 일은 어떻겠느냐? 생각이 전부 악한데 하는 일이 모두 진리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건 모순이다. 생각이 전부 악하고 출발점이 모두 악하다면 하는 일은 최소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기억되지 못하는 일 중에는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도 있고 파괴적인 것도 있고 그런대로 괜찮은 것도 있다. 진지하게 따진다면 정죄받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잘못된 관점을 갖고 있는데, 이는 역겨운 느낌이 들게 한다. 은사나 특기, 혹은 솜씨나 재주가 좀 있거나 특수한 기술을 부릴 줄 아는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자신이 고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가 옳으냐? 이런 관점은 어떠냐? 이게 정상 인성의 사유 속에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럼 이는 어떤 생각이겠느냐? 이는 비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런 솜씨가 있으니까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하나님 집에서 나는 보통 사람보다 더 낫다고. 나는 남자고 솜씨와 재주를 갖춘 데다가 말도 잘하고 능력도 있으니까 하나님 집에서 출중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야. 아무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거나 어떻게 하라고 나를 지도하거나 지휘할 수 없어. 기술이 있으니까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원칙은 고려할 필요 없어. 내가 어떻게 하든 다 옳고 진리에 부합해.’ 이런 관점은 어떠냐?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이런 사람은 적지 않고, 이들은 하나님 집에 와서 과시한다. 이들이 자신의 특기와 기술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건 괜찮지만 과시하기 위해 그러는 거라면 문제의 성질이 다르다. 왜 과시한다고 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어리석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유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겠느냐? 이는 이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실제로 정말 그렇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바라보겠느냐? 왜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런 생각은 어떻게 생겼겠느냐? 이방인에게서 배우지 않았겠느냐? 그들은 큰 붉은 용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모두 집안일이나 하는 남녀나 농민, 사회 하층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능력도 없고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궁지에 빠지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하나님을 믿으러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능력이 좀 있고 업무를 좀 알고 한 분야의 기술을 다룰 줄 아는 자신이 하나님 집에서 인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겠느냐? 그들은 하나님 집에는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업무를 좀 처리할 줄 아니 권력을 잡고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너희 곁에, 너희가 익숙하거나 알고 있는 사람 중에는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일부 사람은 특정 분야의 기술을 다룰 줄 알아서 그에게 팀장이나 책임자를 맡게 하면 그는 자신이 관직에 올랐고 하나님 집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만큼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고 지키는 사람, 자신만큼 충성심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일에 관여하고 참여하려 하지만 제대로 관여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진리 원칙을 구하지도 않으며 내가 하는 말도 따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 그들은 특정 분야의 기술을 다룰 줄 안다는 명분을 내세워 모두에게 관여하려 하고 관직에 오르려 한다. 예를 들어, 형제자매의 행동이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들 관리 좀 해야겠어. 정말 꼴불견이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진리를 교제해야 한다. 여기는 군사 관제를 실행해야 하는 군대가 아니다. 교회 안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여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책망 훈계하면 된다. 한사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에만 관제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책임자나 리더 일꾼이 되면 분명 자신도 진리 실제가 없으면서 늘 하나님 집에서 권력을 잡고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이런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그는 그저 업무 기술에 대해 좀 알 뿐, 진리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으면서 자신이 쓸모 있고 능력 있으며 하나님 집에서 보통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 교회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혼자서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그는 진리 원칙은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기호대로 행동하려 한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이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추고 있겠느냐? 조금도 갖추고 있지 않다. 정상 인성의 측면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3. 다른 이가 사역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이어서 지난번에 다루었던 주제인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 ‘제8조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를 교제하겠다. 이 조항은 네 가지 소주제로 나뉘는데, 지난번 예배 때 두 가지를 다루었다. 첫 번째는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려는 욕망과 야심을 지닌 것이다. 세 번째는 무엇이겠느냐? 어떤 사역을 맡든 다른 이가 사역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사역을 맡는다는 것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리더 일꾼이 책임지는 여러 사역과 각 팀의 책임자나 팀장이 책임지는 사역이 포함되고 업무적 사역이나 개인적 사역도 포함될 수 있다. 어떤 사역을 맡는 사람은 리더 일꾼일 수도 있고 평범한 형제자매일 수도 있다. 다른 이가 사역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어떤 내적 상태이겠느냐? 어떤 모습이 이 몇 가지와 관련 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모습 제8조 가운데 또 한 측면의 모습이자 또 한 측면의 본질의 표출이다. 여러 가지 본분 가운데 업무 사역에 속하는 것도 있고 생명 진입과 직결된 것도 있다. 업무에는 기술과 지식, 학문, 인사 등 여러 측면과 관련된 것들이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 사역 하나를 맡고 나면 혼자 사역을 시작하고 다른 이와 상의하려 하지 않으며 어려움이 있어도 다른 이의 의견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설사 누가 견해나 의견을 제시하거나 도우려 해도 그가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그는 본분을 이행할 때 다른 이가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이는 어떤 성품에 지배받은 것이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업무도 알고 이 측면의 이론도 알아. 교회에서 이 측면의 사역을 내게 맡겼으니 난 혼자 행할 거야.’ 그는 자신이 업무를 알고 업계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른 이에게 사역에 관한 어떤 정보나 사역 진도를 밝히는 것을 거부한다. 심지어 사역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나 잘못, 실수도 다른 이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다. 누가 알아차려서 관여하고 참견하거나 알아보려 해도 그는 답하길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 사역 범위 내의 일은 제 영역이니 당신에게는 관여할 권한이 없어요. 교회에서도 당신이 아닌 제게 맡겼으니 저는 비밀을 지켜야 해요.” 이게 합리적인 이유겠느냐? 이렇게 비밀을 지키는 게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겠느냐? 사역 상황, 사역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나 문제, 사역의 계획이나 방향을 다른 이에게 교제하는 것이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일부 세부 사항을 말하면 교회의 안전에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이 부적절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제해도 된다. 하지만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의 사역 범위 내의 일을 다른 이에게 알리기를 거부한다면, 평범한 형제자매든 리더 일꾼이든 그들이 관여하고 자문하고 알아보는 것에 반발하거나 그것을 거절한다면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예를 들어, 그가 어떤 일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려 하는데 다른 이가 그에게 “그렇게 처리하면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실을 입고 당신도 시행착오를 겪을 텐데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 말대로 처리하면 남들이 내가 무능하다는 걸 알게 되잖아? 그럼 공로도 당신 게 되잖아? 안 돼. 내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당신 말대로 처리할 순 없어. 내 방식대로 처리할 거야.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실을 입든 말든 내 명예와 지위가 중요해. 내 위신이 중요하다고!’ 그는 일을 잘못했을 때 잘못한 줄 알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고 아무도 개입하지 못하게 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이가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이는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중시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주로 하지 않으며 이런 원칙대로 사역하지 않는다. 대신 그 개인의 이익을 위주로 하고 그의 지위와 위신을 위주로 사역한다. 그는 하나님 집의 사역, 하나님 집의 이익이 그 개인의 지위와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다른 이가 그의 사역에 개입하거나 관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이가 그의 사역에 개입하는 순간 그의 지위와 이익이 위협받고 그의 결함과 부족함, 그가 사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오류가 쉽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이가 그의 사역에 개입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고 그 누구의 협력과 감독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역에 종사하든 상부에서 알아보고 질문할까 봐 두려워한다. 상부에서 사역 상황이나 인사 상황에 대해 질문하면 그들은 그저 얼버무리면서 피상적인 일들이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상부에서 알아도 되는, 알고 나서도 아무 뒤탈이 없을 일들만 말한다. 만약 나머지 일들에 대해 또 질문하면 그들은 자기의 본분이나 ‘내정’에 간섭한다고 생각해서 말을 아끼며 얼렁뚱땅 넘어가거나 속이고 감춘다. 이는 하나님 집의 감독을 거부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누가 그들의 문제를 발견해 그들을 폭로하거나 상부에 보고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저지하고 가로막고 이렇게 위협하기까지 한다. “당신이 말해서 상부에 책망받으면 그 책임은 당신이 질 거예요. 책망을 받아도 당신이 받을 거라고요!” 이는 독립 왕국을 세우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상부에서 알아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들의 사역 범위 내의 일에 대해서는 알 권리도, 자문할 권리도 없으며 제안할 권리는 더더욱 없다. 그들이 한 가지 사역에 개입하면 그 사역 범위 내의 일은 오로지 그 혼자만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으며 오직 그들만이 마음대로 행동하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든 다 자기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누가 물어보면 그들은 어떤 방법을 취하겠느냐? 얼버무리거나 숨긴다. 또 어떻게 하겠느냐? (속입니다.) 그렇다. 속인다. 심지어 허상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 리더나 복음 집사는 분명 그가 책임지는 교회에서 한 달에 세 명밖에 얻지 못했는데, 다른 교회에 비해 훨씬 적어서 그 사실을 상부에 알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사역을 보고할 때 3 뒤에 0을 하나 붙여 30명을 얻었다고 말한다. 누가 알아차리고 그에게 “이건 속이는 거 아닌가요?”라고 따지면 그는 “속이다니요! 다음달에 30명을 얻어서 보충하면 되잖아요?”라며 이유가 당당하다. 누가 이 일을 진지하게 여기고 상부에 실상을 보고하려 하면 그는 그것을 자신을 귀찮게 하고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을 억누르고 처리하며 못살게 군다. 이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 아니겠느냐? 악을 행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사역할 때 절대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는다. 그럼 그가 사역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의 지위와 밥그릇을 지키는 것이다. 그는 어떤 나쁜 일을 하든 일을 하는 속셈이나 동기를 남에게 알리지 않고 엄격하게 비밀을 지킨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는 기밀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가장 민감한 주제는 무엇이겠느냐? 그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요즘 뭐 해요? 본분 이행에 성과는 있나요? 사역 범위 내에서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이 없나요? 어떻게 처리했나요? 사역은 제대로 하고 있나요?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있나요? 사역을 하며 내린 결정이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입히지는 않았나요? 합당하지 않은 리더들을 교체했나요? 자질이 뛰어나고 진리를 추구하는 편인 사람들을 발탁하고 양성하고 있나요? 당신에게 불복하는 사람을 억압한 적은 없나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나요? 당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그들은 이런 주제에 가장 민감하고 이런 주제를 가장 두려워해서 네가 묻기도 전에 서둘러 다른 주제를 찾아 감춘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너를 오도하여 네가 실상이 어떤지 알지 못하게 한다. 늘 네게 분명하지 않은 상태를 알려 주고 그가 어느 정도까지 사역을 했는지 보지 못하게 하는 등 조금도 투명하지 않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절대 자발적으로 사역을 보고하지도, 자신이 사역하다가 저지른 실수를 보고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사역하다가 마주한 어려움이나 곤혹스러움에 대해서도 절대 묻지도, 구하지도, 털어놓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것들을 감추고 가리고 속인다. 적그리스도는 사역할 때 조금도 투명하지 않고 상부에서 그에게 사실대로 보고하고 설명하라고 따져 물어야만 마지못해 말한다. 자신의 명예나 지위에 관한 문제는 죽어도 말하지 않고 한 글자도 내뱉지 않으며 못 알아들은 척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런 문제는 해결하기 쉽겠느냐? 상부에서 사역을 지도하면 그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얼버무린다. 겉으로는 받아들이고 노트나 컴퓨터에 계속 받아 적지만 다 적고 나서 그가 깨닫고 사역을 하겠느냐? (하지 않습니다.) 그는 네게 보여 주려고 폼을 잡고 즉흥적으로 연기하여 너를 미혹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 사역은 어차피 내게 맡긴 거니까 내게 결정권이 있어. 내가 어떻게 하든 아무도 간섭 못 해. 당신 지위가 높다고 해도 실권은 담당자에게 있어. 내게 권한이 있다고. 그렇게 하지 않을 거면 내게 시키지 말고 나를 물러나게 하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아주 골치 아프다. 개입하거나 관여해서도, 자문하거나 알아봐서도 안 된다. 그는 유독 민감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상부에서 내 문제와 사역을 조사하려는 거 아니야? 누가 비밀을 누설했지?’ 그는 당황해서 대체 누가 비밀을 누설했는지 계속 궁리하다가 결국 의심 가는 두 사람을 떠나보낸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은 주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겠느냐? 지위를 독점하고 사람을 통제한다. 그는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지위를 얻으려고 한다. 그는 지위를 얻기만 하면 당당하게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 왜 당당하다고 하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그에게 그 사역을 맡긴 것이고 형제자매가 그를 뽑아서 그가 그 사역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당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그의 자본이 된 것이다. 이는 “당신들이 저를 뽑았잖아요? 저를 뽑았으면 저를 믿어야죠. 이방에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도 있잖아요.”라는 뜻이다. 그는 여기서 사탄의 명언까지 들먹인다. 이 말이 진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은 사탄의 그릇된 주장이자 황당한 이론이다. 그의 사역에 대해 물어보면 그는 이런 이론을 찾아낸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는 말처럼 저를 썼으면 의심하면 안 돼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면, 저를 간파하지 못했다면 쓰지 마세요. 기왕 당신이 저를 썼으니 저는 이 지위에 서야 하고 제가 결정권을 가져야 해요.” 사역에서는 무슨 일이든 그 자신이 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그가 결정하지 못하게 하거나 그에게 파트너를 찾아 주려 하면 안 되며 남이 감독하거나 지도해서도 안 된다. 누가 그의 사역을 캐물으면 그는 답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는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위와 직권을 이용해 사람과 사역 현장, 교회 사역을 당연한 듯 통제한다. 이는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하나님 집은 그 사역을 하고 그 본분을 이행하도록 했지 여기서 권력을 잡아 독재하도록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집의 안배를 오해한 것 아니겠느냐? 그는 왜 늘 지위와 권력만 붙잡고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교회에서 그에게 사역을 안배하는데 그는 왜 오해하겠느냐? 그는 원래부터 사람을 통제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본성 본질을 가졌으며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역을 안배하면 그는 자신에게 권력과 지위가 생겨서 자신의 영역을 통제할 수 있고 네가 그의 영역에 들어가면 그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리더 한 명에게 적그리스도의 사역을 검사하도록 안배했다고 하자. 그와 적그리스도 모두 급이 같은 교회 리더라면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도 교회 리더이고 저도 교회 리더예요. 우리는 급이 같으니까 당신은 제게 간섭하지 마세요. 저도 당신에게 간섭하지 않을게요. 제게 교제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고 싶어 하는데, 상부에서 그러라고 지시했나요? 증거를 대세요.” 그 리더가 “상부에서는 제게 말을 전하라고만 했어요.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보세요.”라고 하면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당신은 무슨 근거로 제게 교제하고 저를 꾸짖는 거죠? 무슨 근거로 제 사역 범위 내의 일에 관여하는 거예요? 당신은 그럴 자격 없어요!” 이런 말들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는 무슨 행동 방식이겠느냐? 오직 적그리스도만이 이렇게 행동한다. 이방인들이 하는 말 중에 “벼슬이 한 단계 높으면 사람을 눌러 죽인다.”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누가 더 관직이 높은지, 세력이 큰지, 능력이 뛰어난지 비교하고, 누가 더 많은 사람을 관리하는지 비교한다. 하나님 집에서 적그리스도는 다른 사람과 이런 것들을 비교한다. 그들은 이곳에 잘못 온 것 아니냐? 패괴 성품은 있지만 적그리스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과 급이 같은 교회 리더를 만나면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표출은 하겠지만 정상적으로 사람과 교제하지 절대 “당신이 제 사역에 대해 물어볼 자격이 있나요?”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상적인 이성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게 교회를 이끌도록 하신 건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자 부탁이고 우리의 본분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이건 아무 관직도 아니라고. 교회 사역, 형제자매의 상황, 내 사역 경험 모두 당신에게 교제할 수 있어.’ 하지만 적그리스도라면 다른 사람과 이런 것들을 교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는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지위와 권력에 대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욕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보다 더 교활하고 음험하다. 교활함과 음험함은 어디에서 드러나겠느냐?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직접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든 다 비밀이고 남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모든 일에서 남을 경계하고 전부 싸매고 감추고 숨긴다. 그러니 그가 사람과 사귈 때 정상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겠느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는 네가 실제 사정을 알 수 없게 표면적이고 원칙적인 말, 듣기 좋은 말만 한다. 너는 그와 한동안 접촉하고 나면 ‘이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악인 같지 않은데 왜 늘 그의 마음은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 왜 그와 접촉하면 이렇게 어색하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느낌이야.’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경계한다. 왜 경계하겠느냐? 그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그의 지위에 위협을 가할 수 있고, 자칫하거나 까딱하면 다른 사람에게 실상이나 내막을 알려서 그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그에게 사역을 하거나 본분을 이행하는 상황과 개인적인 내적 상태를 물어보면 그는 숨길 수 있는 한 숨기고 포장할 수 있는 한 포장한다. 포장하지 못하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원만히 해결하려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아무도 볼 수 없게 숨어 버린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성품이 괴이해서 한 무리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 누구와도 정상적으로 왕래하거나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는 매일 혼자 지내며 식사 때만 나타났다가 식사가 끝나면 다시 자취를 감춰 늘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는 왜 사람과 왕래하지 않겠느냐? 그는 가족에게는 무엇이든 말하면서 왜 형제자매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느냐? 이방인들이 하는 말 중에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이 말을 신봉하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말이 진상을 드러내 자신의 약점을 폭로할지 모르고 어떤 말로 인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실상을 알리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피한다. 그는 무심결에 이렇게 피하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어떤 것이 그를 지배하는 것이겠느냐? 어떤 것이 지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광명정대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떳떳하지 못한 것이겠느냐? (떳떳하지 못한 것입니다.) 떳떳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사람과 소통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왕래하지 못한다. 때로는 그도 유창하게 말을 잘하지만 그가 말하는 일들과 내용들은 다 무엇이겠느냐? 그는 글귀와 도리로 자신을 과시한다. 자신이 실제 사역을 하고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실질적인 능력은 조금도 없다. 그에게 무슨 결함이 있는지, 교만한 성품은 없는지 물으면 그는 “패괴된 인류 중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한다. 보아라. 그는 교만함에도 근거를 댄다. 사람들을 모두 그 안에 포함시켜서 마치 그의 교만함이 정당한 것처럼 말한다. 그는 절대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사역에 무슨 문제나 어려움이 있어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며 그에게서 아무런 실상도 알아낼 수 없다. 그는 할 일이 없으면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말만 했다 하면 밑천을 뽐낸다. 하지만 자기 내면에 어떤 패역과 사치스러운 욕망이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과 거래하는지,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었는지, 사역할 때 어떤 야심이 있는지는 절대 드러내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와 같은 일들은 절대 언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언급해도 관심을 갖지 않으며 심지어 그의 사역 범위에 관한 문제도 그저 건성건성으로 말할 뿐이다. 어쨌든 그와 접촉했던 사람은 접촉한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인사이든 업무이든, 아니면 사역 진도이든 그의 본분 범위 내의 일을 아는 것이 몹시 어렵다. 어떤 각도에 서 있든, 빙빙 돌려 물어보든 직접적으로 묻든, 아니면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든 결과를 얻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 정도로 힘들다. 이는 음험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실상을 좀 얻기가 왜 이렇게나 힘들겠느냐? 그는 왜 이토록 꽁꽁 포장하겠느냐? 그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가지고 있는 지위와 밥그릇을 지키려는 것이다. 그는 ‘간신히 이 지위를 얻고 오늘 이 자리까지 왔는데 한순간의 부주의로 잘못을 저질러서 웃음거리가 되면 골치 아프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저지른 나쁜 일들을 하나님 집에서 알게 되면 나를 처리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잖아.’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라고 한들 그가 귀기울여 듣겠느냐?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그가 가진 신념은 오직 하나뿐이다.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아무 일이나 다 남에게 말하는 건 능력 없고 무능한 것이다!’ 바로 이런 신념이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역이든 다른 이가 개입하고 관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감독하는 것은 더더욱 허락하지 않는데, 그가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주로 하나님 선민을 통제하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려는 것이다.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는 게 주된 목적이다. 리더 일꾼인 너희들은 하나님 집에서 너희 사역을 알아보거나 감독할까 봐 두려우냐? 하나님 집에서 너희 사역의 허점과 오류를 발견하고 너희를 책망할까 봐 두려우냐? 상부에서 너희의 실제 자질과 실제 분량을 파악한 후 너희를 달리 보고 발탁하지 않을까 봐 두려우냐? 만약 네게 이런 두려움이 있다면, 이는 너의 속셈이 교회 사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예와 지위를 위해 사역하는 것임을 의미하며, 너에게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으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적그리스도가 행하는 모든 악을 너 역시 행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 집의 감독 사역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부에서 어떻게 물어보고 알아보든 숨기는 것 없이 아는 그대로 착실하게 보고할 수 있다면, 네가 한 말이 옳든 옳지 않든, 네가 어떤 패괴를 드러냈든, 설령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냈을지라도 너를 적그리스도라고 규정짓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네가 자신의 적그리스도 성품을 인식하는지, 진리를 구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적그리스도 성품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덮고 속이면서 책임을 미루려고 하며,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에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런 사람은 적그리스도와 다를 바가 없다. 어째서 네게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직면하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참된 마음으로 대하면서 “상부에서 제 사역에 관해 물어보면 아는 만큼 대답하겠습니다. 설령 제가 저지른 잘못이 탄로 나 상부에서 더 이상 저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지위를 잃게 된다고 해도 저는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 집에서 사역을 감독하고 알아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진리보다 지위를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 아니겠느냐? 그 무엇보다 지위를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너는 왜 그렇게 지위를 소중히 여기느냐? 지위가 네게 어떤 이점들을 가져다주느냐? 만약 지위가 네게 재앙과 어려움, 난감함과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그래도 지위를 소중히 여기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지위가 가져다주는 이점은 매우 많다. 다른 이의 선망과 존경, 우러름, 아첨 및 다른 이의 감탄과 경모의 눈빛 그리고 지위가 가져다주는 우월감과 우선권은 네 체면을 세워 주고 몸값을 높여 준다. 이 밖에도 다른 이들이 누리지 못하는 지위의 복과 특별 대우를 누릴 수 있는 것 등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네가 감히 상상조차 못 한 것이자 꿈에 그리던 것들이다. 너는 이러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냐? 만약 실속 없는 지위일 뿐이고 어떤 실제적인 의미도 없고 그 지위를 지켜봤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이런 상황에서 지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어리석지 않겠느냐? 네가 육적인 이익과 누림 같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명리와 지위는 너를 옭아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위를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무엇을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지위의 복을 누리기 위해 악을 행하고 기만행위를 하며, 속이고 숨기고 하나님 집의 감독과 질문, 추궁을 거부하는 것이 어떤 성질의 문제인지 파악해야 한다. 이는 공공연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하는 행위가 아니냐? 지위의 복을 누리는 것의 성질과 결과를 꿰뚫어 본다면 지위를 추구하는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지위의 복을 누리는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사역을 하거나 본분을 이행할 때 파트너가 있느냐? 감독을 받아들이느냐? 다른 이가 개입하고 관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적이 있느냐? 누가 질문하면 “당신이 뭔데 제 일에 개입하죠? 저는 당신보다 직위가 한 단계 높아요. 제 일은 제가 결정한다고요. 상부에서도 질문하지 않는데 당신이 뭘 믿고 제게 질문하죠?”라고 반발한다. 이런 일이 있지 않으냐? 적그리스도의 주된 성품은 무엇이냐? 지위를 차지하고 권력을 잡은 채 하나님 집 사역에 이로운 일이나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 건성으로 행하고 속이며 형식만 갖춘다. 그는 겉으로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그가 처리하는 일을 보면, 첫째로는 진도가 나가지 않고, 둘째로는 효율이 떨어지며, 셋째로는 효과가 별로 좋지 않고 엉망진창이다. 그가 포기하지 않는 단 한 가지는 조금이라도 사역할 기회가 주어지면 권력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으로, 그는 권력만 있으면 된다. 그는 업무에 관한 것이든, 외부의 일에 관한 것이든, 기술에 관한 여러 방면에 관한 것이든 그 어떤 사역도 투명하게 하는 경우가 없다. 그가 아무 의도 없이 불투명하게 사역하겠느냐? 아니다. 의도치 않은 것은 성품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자질이 떨어지고 사역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럼 왜 이 성품을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그는 의도적으로 그러기 때문이다. 그는 꿍꿍이를 품고 있다. 즉, 네가 늘 지적하며 관여하거나 실상을 너무 많이 알지 못하게, 네가 그의 본모습을 간파하지 못하게 의식적으로 네게 알리지 않고 너를 피하고 너와 만나지 않으며 너와 말도, 소통도, 교류도 적게 하고 그런 일들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안에 속셈이 있지 않겠느냐? 그의 속셈과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너를 속여 어물쩍 넘어가고 네가 실상을 알지 못하게 허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의 지위가 보전되면 그는 흐믓해한다. 이런 성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속이고 감추고 숨기는데, 모두 의도적으로 하는 일이다. 사람 만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해야 하는 사역이 있겠느냐? 없지 않으냐? 밥 먹고 잘 시간도, 사람 만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사역은 없다. 그 정도로 바쁘진 않다. 그런 시간은 충분히 낼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왜 그럴 시간이 없겠느냐? 그는 너와 만나고 싶지 않고 네가 그의 사역에 관한 일을 그에게 질문하는 게 싫은 것이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불신파가 아니겠느냐? 그가 바로 불신파이다. 적그리스도는 모두 불신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자기가 차지하거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기 권력의 통제 아래에 두는 일을 할 수 없다. 불신파가 보이는 첫 번째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겁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하나의 구호일 뿐 속으로는 하나님을 조금도 경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다른 이가 그의 사역에 개입하고 감독하려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감독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받아들일게요. 질문해도 상관없고요. 그런데 당신이 정말 감독하시겠다면 저는 이 사역을 진행할 수가 없어요. 손발이 묶인다고요. 결정은 늘 당신이 하면서 저한테는 지시만 따르라고만 하면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는 없잖아요.” 이는 일종의 이론이 아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이론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성품은 어떻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는 없다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 상부에서 질문하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상부에서 질문하지 않으면 네 행동이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단 말이냐? 질문하면 네가 잘못을 저지를 것이라는 말이냐? 상부에서 사역을 망치겠느냐? 상부에서 사역을 지도하거나 사역에 대해 질문하고 감독하는 것이 사역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해서겠느냐, 아니면 더 못하게 하기 위해서겠느냐? (더 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어째서 더 좋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에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 때문인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가 책임지는 사역에 대해 질문하면 그는 자신의 이익과 지위, 권력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고 생각해서 언짢아하고 자신의 계획과 절차가 엉클어진다고 생각해서 불편해한다. 그래서야 되겠느냐? 상부에서 그와 협력할 사람을 발탁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난 저 사람을 쓸 생각이 없었는데 상부에서는 저 사람이 좋다고 우기면서 발탁해 버렸어. 마음이 불편한데 어떻게 그와 협력하고 함께 사역하지? 상부에서 그를 쓴다면 난 때려치울 거야!’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그가 정말 실제로 지위를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그는 내려놓지 못하고 맞서는 것이다. 누군가의 사역이 그의 지위를 위협하고 그를 돋보이지 않게 하거나 방해한다면 그가 납득하겠느냐? 납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상부에서 한 사람을 발탁하거나 교체하면 그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내 체면을 너무 안 세워 주네. 내 동의를 구하지도 않다니.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도 직위라는 게 있는데 어떻게 내게 미리 말 한마디 안 할 수가 있지? 나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잖아!’ 네가 뭔데 그러느냐? 그게 네 사역이냐? 첫째, 그건 네 관할이 아니다. 둘째, 그 사람들은 너를 따르는 게 아닌데 왜 굳이 너를 신경 써야 하느냐? 그게 진리에 부합하느냐? 어느 진리에 부합하느냐? 상부에서 사람을 발탁하거나 교체할 때는 원칙이 있다. 왜 사람을 발탁하겠느냐?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 교체하겠느냐?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그 사역을 못 하기 때문이다. 네가 교체하지 않으면서 상부도 교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억지 부리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상부에서 한 사람을 교체한다면 제 체면이 말이 안 되잖아요. 교체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제가 교체할 테니 저한테 귀띔해 주세요. 그건 제 사역이고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제가 교체해서 모두에게 제가 사람을 간파할 수 있고 실제 사역을 할 줄 안다는 걸 보여 주면 얼마나 체면이 서겠어요!”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체면을 차리고 논리를 따지는데 그게 통하겠느냐? 말이 되겠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사역할 때 하나는 진리 원칙을 따르고 다른 하나는 실제 상황을 근거로 삼기 때문에 위계질서를 지켰는지 따질 일이 없다. 특히 상부에서 사람을 발탁하고 교체하거나 특정 사역을 지도하고 지시할 때는 더더욱 위계질서를 따질 일이 없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왜 이런 트집을 잡겠느냐?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사람의 머리와 세상의 절차로 하나님 집의 사역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 그의 주된 목적은 자신을 보호하고 체면을 지키는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주도면밀해서 아랫사람이 그의 어떤 흠이나 결점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어느 정도로 포장하겠느냐? 그는 남들에게 아무런 패괴나 결점이 없고 흠잡을 데 없어서 상부에서 쓰거나 형제자매가 뽑기에 합당한,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그는 그러고 싶은 것 아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방금 우리는 다른 이가 사역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적그리스도의 주된 모습 중 한 가지를 교제했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사람을 배치해 그의 사역을 체크하고 파악하며 감독하든 그는 온갖 방식으로 저지하고 거부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상부에서 그에게 사역 하나를 맡기면 세월아 네월아 조금도 진전이 없다. 도대체 사역을 하고 있는지, 잘 되고는 있는지, 사역하는 과정에 어려움이나 문제는 없는지 상부에 말하지도 않고 아무런 피드백도 주지 않는다. 일부 사역은 지체 없이 급히 해야 하는데 그가 꾸물거리는 통에 시간이 한참 지나도 완수되지 못한다. 이럴 경우 상부에서 물어봐야 한다. 물어보면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반발한다. ‘맡긴 지 열흘 남짓밖에 안 돼서 갈피도 못 잡은 사역에 대해 벌써 물어보다니, 상부에서는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네!’ 이렇듯, 한번 물어보면 그는 트집까지 잡는다. 무엇이 문제겠느냐? 상부에서 물어보는 건 아주 정상이 아니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사역 진행 상황이 어떤지, 해결해야 할 어려움은 없는지 알아보려는 것이고, 다른 한 측면으로는 사역하는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 과연 문제를 해결해 사역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상부에서는 실상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질문하는데 그러면 안 된단 말이냐? 상부에서는 네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사역을 하지 못할까 봐 질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에 반발심이나 반감을 품고 남이 질문하는 것을 싫어한다. 누가 질문하면 그는 반발하고 의심하면서 ‘왜 늘 질문하고 알아보려 하지? 내가 못 미덥고 마음에 안 드나? 나를 못 믿겠으면 쓰지를 말든가!’라는 생각만 한다. 그는 상부에서 질문하고 감독하면 이해하기는커녕 반발심만 갖는다. 이런 사람이 이성적이겠느냐? 왜 상부에서 질문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느냐? 왜 반발심을 갖고 반항하겠느냐? 무슨 문제겠느냐? 자신의 본분 이행에 성과가 있든 없든, 사역 진도에 지장을 주든 말든 그는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사역의 성과와 효율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는 더더욱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본분을 이행할 때 나만의 방법과 전략이 있으니 내게 너무 구체적이고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마. 난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너무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건 질색이야.’ 그는 상부에서 사역에 대해 질문하고 알아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무엇이 부족해서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순종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책임감과 충성심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정말 책임질 수 있고 충성심이 있다면 상부에서 사역에 대해 질문할 때 그가 배척하겠느냐?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그가 본분을 직업이나 밥벌이로 삼아 밑천을 챙길 뿐 아니라, 이행한 본분을 상을 받는 조건이나 카드로 여기면서 체면이 서는 일만 하고 상부를 건성으로 대하며 하나님의 부탁을 결코 자신의 본분이나 의무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상부에서 사역에 대해 질문하거나 감독하면 그는 반감이나 반발심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겠느냐?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겠느냐? 이 사역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잘못됐다. 그는 육적인 안락함과 편안함, 자신의 지위와 체면만 고려하고 사역 성과와 하나님 집의 이익은 고려하지 않으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기를 전혀 구하지 않는다. 만약 그에게 정말로 양심과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상부의 질문과 감독을 이해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상부에서 질문해 줘서 다행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난 계속 내 뜻대로 행동하다가 사역 성과에 지장을 줬을 거야. 어쩌면 사역을 망칠 수도 있겠지. 상부에서 교제도 하고 검사도 하니까 실제 문제가 진짜로 해결됐어. 정말 잘됐어!’ 이는 그가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혼자 사역을 맡았다가 만에 하나 실수나 허점이 생겨서 하나님 집 사역에 메울 수 없는 손실을 입혀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책임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책임감이자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다. 사역하면서 질문을 못 하게 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차피 이 사역은 내게 맡겼으니 내 일이야. 내 일은 내가 결정해. 남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그는 혼자 생각하고 자기 성질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한다. 누구도 물어보거나 실상을 알려고 들지 못하게 한다. “그 일은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으면 그는 “기다려 보세요.”라고 말하고 “진행 상황은 어때요?”라고 다시 물으면 그는 “거의 다 됐어요.”라고 답한다. 그는 묻는 말에 단답형으로만 대답한다. 짧게 한마디만 내뱉을 뿐 한 글자도 더 말하지 않으며 결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과 말하면 역겹지 않으냐? 대놓고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더 물으면 그는 짜증을 내며 이렇게 말한다. “고작 이런 일을 가지고 계속 물어보면 꼭 제가 재목이 아니어서 일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는 남이 물어보는 걸 싫어한다. 계속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를 당나귀나 말처럼 부려먹는 거예요? 저를 못 믿겠으면 쓰지 마시고 쓰실 거면 절 믿으세요. 믿으실 거면 자꾸 물어보지 마시고요!” 그는 이런 태도를 보인다. 그가 이 사역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아 이행하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사역을 본분으로 대하지 않고 복과 상을 받는 조건으로 여긴다. 그는 힘쓰는 데만 만족하면서 복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에 무성의한 태도로 사역한다. 그가 사역할 때 다른 이가 개입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존엄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는 그가 이행하는 본분과 사역이 모두 그 자신에게 귀속되는 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이가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는 만약 사역을 잘하면 공적을 명분으로 상을 기대할 수 있지만, 다른 이가 개입하면 공로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공로를 남에게 뺏길까 봐 걱정돼서 다른 이가 그의 사역에 개입하는 것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는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자신의 사적인 일을 처리하듯 한다. 그리고 자신이 잘하든 못하든 다른 이가 개입하거나 동참하는 것을 싫어해서 잘하면 공로를 독차지한다. 다른 이가 그의 공로나 사역 성과에 한 다리 걸치지 못하도록 말이다. 아주 골치 아프지 않으냐?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것이 바로 사탄의 성품이다. 사탄은 일할 때 누구도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 다 자기가 결정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누가 감독하고 질문하는 것도 안 된다. 누가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일한다. 자기가 어떻게 하든 남이 질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아무리 밀실 공작을 해도 누구도 간섭할 권리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성품이 너무 교만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순종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다른 사람이 그를 감독하거나 자신의 사역을 검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정 정상인의 행동과 아주 다른 마귀의 행동이다. 누구든 사역할 때 파트너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 조언, 협력이 필요하다. 누가 감독하고 관찰한다고 해도 이건 나쁜 일이 아니고, 꼭 필요한 일이다. 만에 하나 어떤 부분에서 실수가 생겼을 때 제삼자가 알아차려 문제를 바로 해결함으로써 사역의 손실을 피하게 된다면, 이는 큰 도움이 아니냐?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은 일할 때 누가 감독하고 지켜보고 질문하는 것을 좋아한다. 만에 하나 자기가 실수했을 때 누가 지적해 주어 제때 바로잡을 수 있으면, 이는 바라 마지않을 일이 아니냐?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폐증이나 우울증을 앓는 사람만이 혼자 있길 좋아하고 다른 사람과 접하거나 소통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폐증이나 우울증에 걸리면 비정상이 되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이 이성도 사고도 모두 정상이지만, 다른 사람과 소통하길 싫어하고, 뭘 하든 남들에게 숨기고 싶어서 몰래 하고, 뒤에서 하고, 밀실 공작을 하고,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해도 듣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냐?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다.
예전에 한 교회의 리더를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형제자매의 본분 이행 상황을 물었다. “아직도 교회 안에 교회 생활을 교란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그저 그래요. 나쁘지 않아요.” 내가 “아무개 자매는 본분을 잘 이행하고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나쁘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내가 또 “그 자매는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됐느냐?”라고 묻자 “그럭저럭요.”라고 했고, “이 책상은 여기랑 안 어울리는 것 같다. 다른 데로 옮겨야겠다.”라고 말하자 “생각해 볼게요.”라고 답했다. “이 밭에 물 좀 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더니 “얘기해 볼게요.”라고 했고 “이 밭에 올해는 이 작물을 심었는데 내년에도 이걸 심는 거냐?”라고 묻자 “우리 의사 결정팀에서 계획이 있어요.”라고 했다. 이게 그의 대답이다. 듣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무엇을 이해했느냐? 무슨 정보를 얻었느냐?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들어 보면 너를 무성의하게 대하고 바보나 제삼자 취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 누가 제삼자인지 그는 모르고 있다. 이방인은 이런 것을 두고 주객전도나 주제 파악도 못 한다고 한다. 내가 “여기에 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방 안에 공기 순환이 잘 안 되는구나. 선풍기를 하나 설치해야겠다. 너무 더우면 더위 먹기 쉬우니 말이다.”라고 했더니 그는 “상의해 볼게요.”라고 답했다. 내가 그에게 무슨 일을 말하든 그는 항상 상의해 보고 얘기해 보고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무슨 일을 안배하고 무슨 말을 하든 그에게는 무의미하다. 내 말이 그에게는 안배도, 명령도 아니라서 그가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그는 내 말을 무엇으로 간주했겠느냐? (참고할 제안으로 간주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참고할 제안을 했느냐? 아니다. 나는 그에게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설마 그가 알아듣지 못했겠느냐?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는 얼간이이고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무슨 본분을 이행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방 안에 에어컨도 없고 통풍도 되지 않는데 선풍기마저 달지 않다니, 지능이 어찌 그 모양이냐? 당장 집으로 돌아가거라. 너는 폐물이다. 하나님 집에 폐물은 필요 없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배울 수는 있다. 나는 모르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제안해 보라며 다른 사람과 상의한다. 누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 나는 “그래. 네 생각대로 하여라. 어차피 나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놓은 것은 없으니 네 생각대로 하려무나.”라고 한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사유가 아니겠느냐? 어울린다는 건 이런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릴 때는 우열을 가리거나 누구의 위신이 서는지, 누가 누구 말을 따르는지 따지지 마라. 그런 걸 따지지 말고 옳은 말,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말을 따라야 한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 않으냐? 적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반드시 자기 말을 따르게 하고야 만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이냐? 다른 사람의 제안이면 안 된다. 아무리 합리적인 제안이라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옳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다른 이가 한 제안이면 따르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제안해야만 만족한다. 고작 이런 일을 가지고도 누가 더 나은지 다투는 것은 무슨 성품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그는 지위와 명망, 체면을 지나치게 중시한다. 어느 정도로 중시하겠느냐?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명망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무슨 사역을 하든 다른 사람이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허락하지 않는다’에도 몇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아예 “내 사역을 간섭하지도, 관여하지도, 감독하지도 마세요. 내가 무슨 사역을 하든 내가 책임져요. 나도 사리 분별이 있다고요. 다른 사람의 간섭 따위 필요 없어요!”라며 거절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직접적인 거절이다. 또 하나는 “좋아요, 사역을 어떻게 할지 우리 교제해 봅시다.”라고 말하며 겉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상대가 자기 사역에 관해 물으며 파악하려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고 건의하려고 하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맞다. 온갖 이유와 핑계를 대며 다른 사람의 건의를 거부하고, 틀린 것은 옳다고, 옳은 것은 틀리다고 말하며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억지고, 허풍이고, 이론이며, 상대가 말한 것만큼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 자기가 틀리고 상대가 옳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상대의 옳은 것을 틀린 것으로, 자기의 틀린 것을 옳은 것으로 바꾸어 계속 실행한다. 그런 자는 옳은 것,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자기 선에서 관철되고 실행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교회 사역을 어린애 장난이나 농담으로 여기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관여와 감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 사역에 개입하지 마세요.”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겉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그의 마음가짐은 그렇다. 그는 겉으로는 꽤나 경건해 보이도록 수완을 발휘해서 “저희도 마침 도움이 필요했는데 기왕 오셨으니 저희에게 교제 좀 해 주세요!”라고 말한다. 윗선 리더는 그가 진심인 줄 알고 그에게 교제하며 실상을 말한다. 그는 듣고 나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그렇게 보는군. 당신과 논쟁을 벌여서 당신의 그런 견해를 반박하고 부정하겠어. 어디 창피 한번 당해 보시지.’ 이게 받아들이는 태도겠느냐? (아닙니다.) 이것은 무슨 태도이냐? 이는 다른 이가 그가 하는 사역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기왕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도 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며 허상을 보여 주겠느냐? 그렇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몹시 교활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남이 그를 간파할까 봐 두려워한다. 특히 이제는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갖춘 사람들도 있어서 그가 다른 이의 감독이나 도움을 직접적으로 거절한다면 사람들이 그를 분별하고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체면과 지위를 잃게 되고 앞으로도 리더 일꾼으로 뽑히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윗선 리더가 사역을 검사할 때 그는 받아들이는 척하고 듣기 좋거나 비위 맞추는 말을 해서 모두가 ‘우리 리더는 정말 경건한 데다가 진리도 열심히 구한다니까! 우리의 생명과 교회 사역을 고려하고 본분도 책임감 있게 이행한다고. 그러니까 다음에도 그를 뽑을 거야.’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윗선 리더가 가고 나면 적그리스도는 또 이런 말을 한다. “사역을 검사하는 사람이 한 말은 다 옳지만 우리 교회의 상황에는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교회마다 상황이 다르니까 우리는 그 사람 말을 완전히 따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실제 상황에 맞게 그 사람 말을 참고해야지 무작정 규례에 맞춰서는 안 돼요!” 다들 듣고 나서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는 미혹된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며 다른 이의 감독을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곧이어 내부에서 미혹하고 세뇌하는 일을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한다. 그는 수완이 좋지 않으냐? 수완이 매우 뛰어나다! 그는 겉으로는 듣기 좋게 말하고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사람들이 그가 꽤나 책임감 있게 사역을 한다고, 자세를 낮추고 지위를 내려놓을 줄 안다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상부나 다른 사람의 감독을 받아들일 줄 안다고 생각하게 한다. 또한 그는 형제자매에게 이해관계나 여러 상황에 대해 ‘분명히 얘기’한다. 그의 목적은 무엇이냐? 다른 사람의 개입과 관여, 감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형제자매들에게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이유가 있고, 옳은 것이고,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부합하는 것이며, 일하는 원칙에 부합하기도 하니 리더로서 원칙을 지켰다고 여기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결국 소수다. 대다수는 확실히 분별력이 없어 그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미혹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특수한 이유로 잠을 못 이루고 밤을 샌다. 똑같이 잠을 못 이뤄도 두 부류의 사람은 서로 다른 두 모습을 보인다. 한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다는 사실을 남이 알지 못하도록 낮에 황급히 기회를 엿봐 잠깐 눈을 붙인다. 그건 하나의 상황이자 실제 사정이고 거기에는 별다른 속셈이 없다. 다른 부류의 사람은 식사 때 계속 졸면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남들이 “왜 못 잤어요?”라고 물으면 그는 “온라인 예배 때 사역에 문제가 좀 있는 걸 발견했는데 문제를 해결하느라 한숨도 못 잤어요.”라고 말하며 자신이 밤을 새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퍼뜨린다. 그가 마지못해 밤을 새웠느냐? 그는 왜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는 것이겠느냐? 그 설명 안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그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혹시라도 남들이 알지 못할까 봐 그 일을 만천하에 알리려 한다. 모든 사람에게 그가 밤새 잠도 못 자고 고생했다고,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기꺼이 대가를 치르며 안일을 누리지 않는다고 알려서 형제자매의 동정과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다. 그는 이 정도 겉치레만으로도 인심을 사서 남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서 위신을 세울 수 있다. 일단 지위가 생기면 말에 권위가 생기는데, 말에 권위가 생기면 지위가 가져오는 특별한 대우를 누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그 기회를 잘 잡지 않았느냐? 너희는 밤새 잠을 못 이루거나 밤을 새우면 남에게 말하느냐?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심결에 말했느냐, 아니면 속셈을 품고 말했느냐? 몇몇 사람에게만 얼떨결에 말했느냐, 아니면 여기저기 떠벌리고 널리 알렸느냐? (얼떨결에 말했습니다.) 얼떨결에 말하는 것에는 속셈이 없고 그것은 성품 문제와도 관련이 없다. 일부러 말하는 것과 무심결에 말하는 것은 분명 그 성질에 차이가 있다. 적그리스도가 행동할 때 다른 이의 개입과 관여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든 아니면 직접적으로 거절하든, 결국 방식이 어떻든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는 무엇이겠느냐? 지위와 권력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이런 동기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 가까스로 얻은 권력과 지위, 위신을 결코 아무렇게나 무심코 사라지게 할 수 없고, 누가 그의 사역에 개입하고 관여하여 그의 세력과 권력을 약화시키게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본분 하나를 이행하거나 사역 하나를 받아들이는 건 별다른 본분도 아니고 별다른 의무를 다할 필요도 없어. 그저 어느 정도 권력을 갖추고 수하에 사람을 좀 두는 거지. 권력이 있으면 누구에게 의견을 구할 필요 없이 스스로에게 결정할 수 있는 기회와 권력이 있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태도로 본분을 바라본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역할 때 상부에서 문의하면 형식적으로 겉치레만 하고 건성으로 몇 가지 일만 물으면서 진리를 구하는 사람인 척한다. 예를 들어, 누가 눈에 띄게 방해하고 교란하는 행동을 하면 그는 그런 사람을 처리해야 하는지 상부에 묻는다. 이는 그의 본분에 속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상부에 묻는다는 건 무슨 뜻이겠느냐? 허상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런 일조차도 묻는다는 것은 자신이 빈둥거리지 않고 사역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는 그저 허상을 만들어 미혹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그의 마음속에도 어떻게 진리를 교제해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실제 문제들이 있고, 어떤 원칙을 실행해야 할지 모르거나 사람을 처리하는 측면과 사무를 처리하는 측면에서 모두 간파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는 절대 묻지도, 구하지도 않는다. 그가 마음속으로도 그런 일들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상부에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간파하지 못했으면서 무작정 하면 결과가 어떻겠느냐? 그가 예측할 수 있겠느냐? 그가 그 책임을 짊어질 수 있겠느냐? 짊어질 수 없다. 그럼 그는 왜 묻지 않겠느냐? 그가 묻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상부에서 발견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일도 처리하지 못하고 물어보면 자질이 형편없는 거야. 그러면 상부에서 나를 간파하지 않겠어?’ 또 다른 이유는 만약 물어봤을 때 상부의 결정이 그의 관점과 충돌하거나 다르면 취사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부를 따르지 않으면 상부에서 그가 사역 원칙을 위배한다고 할 것이고, 상부를 따르면 그 개인의 이익이 손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묻지 않는다. 그가 묻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이유가 있다. 그런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이다. 그가 묻는 것이든 묻지 않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든 그는 진리를 구해 원칙대로 대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한다. 상부에 질문하거나 알릴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상부에 전혀 알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 무엇인지 그는 스스로 마음속에 계획을 세우고 범위를 정해서 두 부류로 나눠 놨다. 눈에 띄지 않고 그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건성건성 말하며 상부에 무성의하게 대응하고, 그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일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만약 상부에서 물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몇 마디 말로 적당히 둘러댄다. “좋아요, 저희가 상의해 볼게요. … 더 찾아볼게요.”라며 두말없이 동의하고 조금도 반항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겉으로는 꽤나 순종적이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다른 궁리를 하고 있다. 상부에서 결정권을 가지게 할 생각도, 상부의 의견을 구해 상부에서 결정하게 하거나 상부에 어떤 길을 구할 생각도 없다. 그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 상부에서 개입하거나 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 상부에서 알게 되는 순간 그에게 어떤 위협이 가해지겠느냐? (지위가 위태로워집니다.) 지위가 위태로워질 뿐 아니라 그의 계획과 목적이 실현되지 못한다. 그럼 그는 더 이상 당당하게 악을 행할 수 없게 되고, 공개적으로, 노골적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계획에 따라 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이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에게 유리한지 그가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그에게는 분명 생각과 계획이 있다. 너희도 이런 일들에 직면하지 않느냐? 그럼 너희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리더를 맡고 나면 우쭐거리면서 남이 그를 우러러보도록 늘 남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그가 잘 아는 이방인이 그에게 돈을 빌리려고 자신에 대해 몹시 불쌍하게 말하면 그는 얼떨결에 흥분해서 동의한다. 동의하고 나서 마음 편히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교회 리더니까 교회의 돈에 대해서는 내게 결정권이 있어. 하나님 집의 것, 교회의 것, 제물 같은 것 모두 관직에 오른 내게 결정권이 있다고. 재무도, 인사도 다 내 소관이야. 전부 내게 결정권이 있어!’ 그래서 하나님 집의 돈을 이방인에게 빌려준다. 그는 그 일을 다 처리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조금 불안해서 상부에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한다. 상부에 말하면 그 일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거짓말을 꾸미고 핑계를 대며 상부를 속인다. 상부에서 그에게 진리 원칙을 교제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제물을 사사로이 유용하는 악행을 저지른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감히 제물에 손댈 궁리를 했겠느냐? 고작 교회 리더가 제물을 관리할 권력을 가지고 있겠느냐? 제물이나 재무에 관한 일에 결정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정상적인 인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제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제물에 관한 일은 상부에 보고해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결정하는지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큰 문제에 대해 상부에서도 알 권리가 있지 않겠느냐? 있다. 이는 네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자 네가 갖춰야 할 이성이다. 재무 측면의 일은 크든 작든 상부에서 알 권리가 있다. 묻지 않는다면 모를까 묻는다면 반드시 사실대로 답해야 하고 상부에서 어떻게 결정하든 순종해야 한다. 이런 이성을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갖춰야 합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와 정상인의 차이다. 만약 상부에서 그 일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확률이 100%이고, 자신의 체면이 깎인다는 생각이 들면 그는 상부에서 알지 못하게 갖은 방법을 동원해 숨기고, 아래에서 하는 사역까지 다 처리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을 폭로하는 사람은 저를 못살게 구는 거니까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혼쭐을 낼 거라고요!” 이렇게 모진 말을 내뱉고 나면 아무도 감히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다. 그는 왜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내 권력 범위 내의 일이야. 내 관할 안의 사람과 돈, 물질을 배치하고 분배할 권리는 내게 있어!’ 그가 배치하고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제멋대로 안배하고 남용하고 남발하며 아무 원칙 없이 임의로 헤프게 쓰고 낭비하며 누구에게도 간섭할 권리가 없고 모두 그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물론 입으로는 그리 명확히 말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분명 그렇게 생각한다. ‘관직에 뭐 하러 오르겠어? 돈 벌고 먹고 입으려고 오르는 거잖아! 이제 나도 관직에 올라 지위가 생겼는데 권력을 이용해 마음껏 해 먹지 않으면 바보 아니겠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그런 성품을 가져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어떤 결과도 고려하지 않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 일을 숨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그 일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해야 적합한지, 원칙이 무엇인지는 따져보지 않는다. 그는 그런 것들은 고려하지 않고 누가 그의 이익을 보장할지만 고려한다. 적그리스도는 음험하고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어느 정도로 비열하겠느냐? 한 마디로 표현하면 뻔뻔하다! 사람도, 물건도 네 것이 아니고 재산은 더더욱 네 것이 아닌데 너는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지배하려 한다. 게다가 남들은 알 권리조차 없고 심지어 네가 마음대로 헤프게 쓰고 낭비해도 남들은 관여할 권리도 없으니 이는 어느 정도에 이른 것이겠느냐? 뻔뻔하다! 뻔뻔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재산에 관해 보통 사람 마음속에 있는,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은 무엇이겠느냐? 이건 하나님의 제물이고, 제물은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에게 바친 것이니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사유 재산이라고 하며 하나님에게 속하지 공공이나 어느 개인에게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주인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다. 그럼 하나님 집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여러 교회의 하나님 선민과 모든 교회 용품, 재물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절대 개인에게 속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점유할 권리가 없다. 적그리스도가 과연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제물은 관리하는 사람 것이자 손에 넣을 기회가 있는 사람 것이며 리더에게는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줄곧 있는 힘을 다해 지위를 추구했고, 지위를 얻고 나서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다. 그는 왜 지위를 추구하겠느냐? 만약 그에게 착실하게 하나님 선민을 이끌고 무슨 일을 하든 원칙을 지키되 교회의 재물과 하나님의 제물에는 손대지 말라고 한다면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위의 상승에 매달릴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는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흘러가는 대로 두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난 뽑히면 할 거야. 본분을 잘 이행할 거라고. 하지만 날 뽑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을 거고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야.’ 적그리스도는 리더가 되면 교회의 모든 재물을 지배하고 누릴 권리가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위를 얻고 지위가 가져오는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 뻔뻔할 정도로 골머리 썩이며 지위의 상승에 매달린다. 뻔뻔한 건 무엇이겠느냐? 파렴치한 일을 하는 게 바로 뻔뻔한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는 건 너무 파렴치해요!”라고 해도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속으로 생각한다. ‘뭐가 파렴치해. 지위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지위를 가진 기분이 어떤지 당신이 알아? 돈을 통제하는 기분이 어떤지 당신이 알아? 그게 얼마나 즐거운지 당신이 알아? 그런 우월감을 당신이 알아? 직접 느껴 봤어?’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 마음속 지위에 대한 견해이다. 적그리스도는 지위를 가지는 순간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 그는 하나님의 제물도 자신의 손에 쥐고 통제하려 하고 교회 사역의 어느 부분에 돈을 쓸지도 자신이 결정하려 한다. 그는 절대 상부에 문의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집 재산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 집은 그의 집이 되어 그에게 결정하고 지배할 권리, 마음대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주고 모든 지출을 지배할 권리가 생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물을 대할 때 결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돈을 물 쓰듯 쓰며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제물을 사사로이 유용했는데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이는 평범한 과오가 아니라 본성 본질의 문제이다. 그는 이방인과 접촉해 일을 처리할 때 끊임없이 과시하여 사람들이 그가 돈과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게 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그는 거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돈을 빌려주겠다고 약속까지 한 다음 하나님 집을 속이는 방법으로 돈을 빌려줬다. 이런 사람은 문제가 심각하다. 그렇게 큰일은 마땅히 상부에 보고해 진상을 설명해야지 개인의 신용과 체면을 위해 하나님의 제물을 가지고 사람에게 응수해선 안 된다. 이성적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런 일을 접하면 그렇게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그렇게 하겠느냐? 왜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하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제멋대로 굴며 하나님, 진리,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히 잊어버린 데다가 하나님에게 조금도 진실로 순종하지 않은 채 개인의 이익과 명리, 지위를 최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속이는 방식으로 교회의 리더 일꾼을 미혹해서 돈을 이방인에게 빌려줬다. 그게 그의 돈이겠느냐? 그는 말 한마디로 돈을 빌려주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제물을 가지고 선물을 준 게 아니겠느냐?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이다. 일부 적그리스도는 정말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 그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건 그의 성품이 대담하고 제멋대로이며 특히 오만하고 상당히 음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몹시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리석어서 자업자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출교시켜야 합니다.) 출교시키면 끝이겠느냐? 손실은 누가 메꾸겠느냐? 그에게 배상하게 한 다음 출교시켜야 한다. 이런 일을 저지르는 적그리스도는 후안무치하지 않으냐? 이는 천사장과 뭐가 다르겠느냐? 천사장은 후안무치하게 “천지만물은 내가 만들었고 인류는 내 소관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천사장은 마음대로 인류를 짓밟고 패괴시킨다. 적그리스도는 권력을 잡으면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다 나를 믿고 따라야 해요. 내가 권력을 잡았고 내게 결정권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찾고 교회의 돈은 내게 가져오세요!” 누가 “왜 당신에게 줘야 하죠?”라고 물으면 그는 “내가 리더니까 내게 이 일을 관장할 권리가 있어요. 난 제물을 포함해서 모든 걸 다 관리해야 한다고요!”라고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관리하려 한다. 그는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에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있는지, 또는 어떤 설교나 하나님 말씀 서적이 부족한지와 같은 일들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의 돈이 누구 손안에 보관되어 있는지, 얼마나 있는지, 그 돈을 어떻게 쓸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상부에서 교회의 재무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 그는 교회의 돈을 상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부에서 실상을 알지 못하게 한다. 왜 상부에서 알지 못하게 하겠느냐? 그는 횡령하고 차지하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물질과 돈, 지위에 몹시 강하게 흥미를 느낀다. 그는 절대 겉으로 말하는 것과 같지 않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난 뒤 세상을 추구하지도 않고 재물을 탐하지도 않아요.”라고 하지만 그의 말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왜 지위를 추구하고 지키려고 용을 쓰겠느냐? 그는 그가 관할하는 모든 것, 특히 돈과 물질을 소유하거나 통제하고 차지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돈과 물질 같은 것을 지위의 복으로 여겨 누린다. 이는 진정한 천사장의 후예이자 명실상부한 사탄의 본성 본질이다. 지위를 추구하고 돈을 중시하는 모든 사람은 성품 본질에 분명 문제가 있는데, 적그리스도의 성품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는 야심이 크고 하나님 집의 돈을 통제하려 한다. 그에게 사역 하나를 책임지게 하면 그는 우선 다른 이가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상부의 질문과 감독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밖에, 그는 어떤 사역의 책임자를 맡든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드러내고 보호하고 추켜세운다. 늘 두각을 나타내어 남을 통치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되려 하고 더 높은 지위를 독점하고 쟁취하려 한다. 심지어 하나님 집의 모든 것, 특히 하나님 집의 재물을 통제하려 한다. 적그리스도는 특히 돈을 좋아해서 돈을 보면 눈이 반짝이고, 늘 돈에 대해 궁리하고 공들인다. 이는 모두 적그리스도의 상징이자 신호이다. 그에게 진리를 교제하거나 형제자매의 내적 상태를 알아보고, 연약하고 소극적인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사람마다 본분 이행의 성과가 어떤지,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등과 같은 문제를 물어봐도 그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제물과 관련된 경우, 재물의 수량과 보관자, 보관 장소, 비밀번호 등에 가장 관심을 갖는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일들에 특히 정통하고 빠삭한데, 이 역시 적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적그리스도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데 가장 능하지만 실제 사역은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늘 하나님의 제물을 누릴 생각을 한다. 적그리스도는 도덕성이 결여되지 않았느냐? 적그리스도는 인성이 조금도 없는 전형적인 마귀이다. 적그리스도는 사역을 할 때 다른 이가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모습 제8조 가운데 세 번째 모습이다.
전에 어떤 나라의 교회에서 건물 하나를 새로 사서 수리를 해야 했는데 마침 그 나라의 교회 리더가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적그리스도였다. 그 적그리스도는 건물을 수리하는 일에서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썼는데, 적그리스도가 그 사람과 대체 어떤 관계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악인이 빈틈을 파고드는 바람에 수리할 때 쓰지 말아야 할 돈을 많이 낭비했다. 그들은 그 건물 안에 원래 쓸 수 있던 설비까지 다 철거하고 새것으로 바꿨고, 철거한 낡은 설비는 다시 돈을 받고 팔았다. 사실 망가지지 않아서 계속 쓸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이 돈을 벌어 이익을 챙기려고 다 새것으로 바꾸는 바람에 돈이 더 들었다. 그런 일들을 그 적그리스도가 알지 못했겠느냐? 알았다. 그럼 왜 그 악인이 그렇게 하도록 눈감아 주었겠느냐? 그 둘의 관계가 분명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알아차린 일부 사람들이 시공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고자 진도를 살피고 검사하러 가려고 했다. 보러 간다고 하자 그 적그리스도는 걱정하고 초조해하며 “안 돼요! 아직 준공이 안 돼서 아무도 보러 갈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 민감하고 격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그 안에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살짝 눈치채고 이렇게 상의했다. “안 되겠어요. 보러 가지 못하게 하는 걸 보니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요. 현장에 가 봐야겠어요.”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마지막 준공 때까지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으냐? 그녀가 보러 가지 못하게 했다는 건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이니 서둘러 상부에 보고하거나 단체로 그녀를 파면해야 했다. 혹은 강제로 보러 가거나 검사하러 가야 했다. 그건 책임이다. 그 책임을 짊어지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이자 멍청이다. 그 몇몇 멍청이는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았다. 제집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 결국 준공 이후 나는 영상을 통해 문제를 발견했다. 무슨 문제를 발견했겠느냐? 한 회의실 중간에 책상을 하나 놓고 주위에 고급 사무용 가죽 의자를 죽 늘어놓았다. 나도 평범한 의자에 앉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그토록 고급스러운 물건을 사용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들이 그런 설비를 설치해서 앉는 사람들은 상당히 흡족해했다. 문제를 발견한 뒤 나는 그 머저리를 불러다가 그 일을 캐내기 시작했다. 방마다 일일이 조사해 보니 하자가 너무 많았고 손실도 상당했다. 그는 아직 쓸 수 있는 기존 설비를 내다팔아 낡은 설비로 돈을 벌었고 고가의 새 설비를 사서 돈을 벌었을 뿐 아니라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될 장치를 설치했다. 그 악인은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그렇게 했는데, 그가 이런 일을 할 때 그 적그리스도가 알지 못했겠느냐?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매일 시공 현장에 가서 봤으면서도 보고하지 않고 그 악인이 그렇게 돈을 헤프게 쓰도록 내버려두었으니 간덩이가 부은 것이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20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그런 꼴을 하고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대체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이냐? 인간도 아니다! 이방의 좋은 사람도 이런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이는 너무도 도덕성이 결여돼 있는 것이다! 상부에서 공사에 관한 일을 물을 때마다 그녀가 얼버무리고 이리저리 숨기는 바람에 결국 그렇게 많은 문제가 생겼다. 그럼 그녀를 출교시키고 일해서 돈을 벌어 손실을 배상하라고 하면 지나친 것이겠느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돈을 갚을 수 있더라도 그 적그리스도가 한평생 마음 편히 살 수 있겠느냐? 잘 살 수 있겠느냐? 아마 한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보낼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에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을 믿은 지 일이 년밖에 되지 않아서 하나님 집의 규칙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충성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여러 해 동안 믿었는데 조금도 변화가 없다. 힘을 좀 쓸 수 있는 정도인데, 그토록 큰 악을 저지르다니 그런 꼴이라면 도태되고 저주받아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사역하는 것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사역을 하든 다른 이가 개입하고 관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늘 숨기고 감추려 하는데, 마음속에 분명 꿍꿍이가 있다. 그의 사역에 존재하는 문제를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행동이 광명정대하고 진리와 원칙에 부합하며 스스로 떳떳하다면 걱정할 게 뭐 있겠느냐? 말 못 할 게 뭐 있겠느냐? 왜 다른 이가 관여하고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느냐? 그는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분명 마음속에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너무도 뻔하다! 적그리스도는 사역할 때 투명하지 않다. 나쁜 일을 저지르면 감추고 엄폐하려 하고, 허상을 만드는 데다가 노골적으로 속이기까지 한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한다. 사람은 비록 잠시 알지 못하고 한동안 미혹되겠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드러내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고 드러나 있어서 네가 하나님이 알지 못하게 하더라도 소용없다. 하나님은 전능하다. 하나님이 너를 드러낼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오직 적그리스도 같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얼간이와 천사장의 본성을 가진 얼간이들만이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꼭꼭 숨기고 당신이 개입하지도 관여하지도 감독하지도 못하게 하기만 하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를 거고 내가 이 교회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이 왕권을 잡으면 국면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도 정말 그렇겠느냐?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오늘 네가 악을 행한 것을 감찰하고도 너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네게 회개할 기회를 준 것이다. 내일 네가 또 악을 행하고도 실토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네게 기회를 주고 네가 회개하길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네가 계속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네게 기회를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역겹게 여기고 혐오하며 마음속에서부터 너를 구원하고 싶지 않아서 너를 철저히 포기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네가 아무리 감추고 저지한들 전혀 소용없다. 네 손이 아무리 크다 한들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느냐? 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하나님의 두 눈을 가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다 사람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나님이 대체 얼마나 전능한지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밖에, 이 인류 가운데 큰 악을 저지르거나 하나님에게 직접 대항한 사람은 모두 여러 가지 징벌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보면 모두 진심으로 탄복하고 보응이라고 인정한다. 이방인조차 하나님의 공의로움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점을 더욱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함과 지혜는 측량할 수 없고 사람이 짐작할 수 없다. 그런 노래 가사도 있지 않으냐?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행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자 하나님 신분 본질의 진실한 표출이다. 너는 억측할 필요도, 짐작할 필요도 없이 그 말을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런 어리석은 일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나뭇잎 하나로 눈을 가린 채 “제가 보이시나요?”라고 말하는데 “난 네가 보일 뿐 아니라 네 마음과 네가 인간 세상에 몇 번 왔는지도 다 알고 있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이 일도, 저 일도 알지 못하셔. 형제자매도 보지 못했으니 아무도 몰라. 내 마음속에 나름의 타산이 있다고. 내가 얼마나 똑똑한데!’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세상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다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 결국 그것은 잘못됐고 진리에 위배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은 오직 한 부류뿐인데, 어떤 부류의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몹시 똑똑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진리에 부합하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똑똑한 사람인지 따질 때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지, 말과 행동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 일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하고 싶어.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내 자신에게 이로우니까. 하지만 이런 속마음은 남에게 말하고 싶지도, 알리고 싶지도 않아.’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는 스스로 따귀를 때리고 자신을 꾸짖어야 한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를 것 같으냐? 사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네 마음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본성 본질을 모두 간파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 일에서 너를 폭로하지 않겠느냐? 그 일을 폭로하지 않더라도 너 스스로 서서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많이 먹고 마셨고 양심과 이성, 사상, 정상 사유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네가 자신이 어리석지는 않은지 천천히 생각하고 살펴보라고 네게 시간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너는 며칠만 생각해 보면 성과를 얻어 자신이 어리석고 멍청하며 하나님에게 그 일을 감추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털어놓고 솔직히 임하는 것, 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유지해야 하는 유일한 양상이자 내적 상태이다. 네가 털어놓지 않는다고 해도 사실 하나님은 네 마음을 전부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네가 털어놓든 그렇지 않든 모두 알고 있다. 이것을 밝히 알지 못한다면 너무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럼 어떻게 해야 총명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바로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무엇이든 다 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나님이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살핀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한다면 총명한 사람은 마땅히 솔직하고 순수해야 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늘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끼고 자신만의 작은 비밀을 간직하며 사생활을 좀 지키고 싶어 하는 생각이 과연 옳겠느냐? 사람과 어울릴 때는 그래도 괜찮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인물도 아니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어느 정도 남겨 둬도 된다. 예를 들어, 네가 누구를 증오하여 뒤에서 그의 험담을 한 적이 있다면 그 일을 그에게 말해도 되겠느냐? 말하지 마라. 앞으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말하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나쁘고 내면이 더럽고 사악하며 남을 질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리를 쟁취하기 위해 뒤에서 남을 험담하고 모함하기만 하니 얼마나 비열하냐! 너는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고 그 일이 잘못됐다는 사실, 자신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에게 ‘하나님, 저는 뒤에서 사악하고 비열한 짓을 저질렀어요. 저의 죄를 사해 주시고 저를 이끌고 꾸짖어 주세요. 앞으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게 노력할게요.’라고 기도하면 된다. 사람과는 방식을 좀 따져도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단순히 털어놓는 게 제일 좋다. 네가 속셈을 품고 방식에 신경 쓰면 문제가 생긴다. 네가 늘 ‘어떻게 말해야 하나님이 나를 대단하게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실까? 어떻게 말하는 게 적절한 거지? 좀 포장하고 돌려 말하자. 방식도 따지고. 그럼 하나님이 날 대단하게 보실지도 모르잖아.’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모를 것 같으냐?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은 전부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얼마나 간단하고 사는 게 홀가분하겠느냐. 그럼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을 정직하고 순수하며 솔직한 마음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이는 더없이 값진 일이다! 솔직한 마음과 정직한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 때로는 너무 지나쳐 어리석은 행동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과오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꿍꿍이를 품고 마음속으로 늘 뭔가 생각하며 가공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적그리스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적그리스도는 조금 다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거나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적그리스도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적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은 아직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회개할 희망과 기회가 있다. 만약 악을 많이 행해 적그리스도로 규정되어 바로 제명되고 출교된다면 회개할 기회가 없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 만약 악을 많이 행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아직은 악인이 아니라는 뜻이고, 만약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한 줄기 희망이 있다. 하지만 한사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설사 악을 많이 행하지 않았더라도 구원받기 매우 어렵다. 왜 적그리스도는 구원받지 못하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드러내고 털어놓아야 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대해야 하며 할 말을 솔직히 하고 간사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교제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늘 정직한 사람이 되면 손해를 보고 진실을 말하면 멍청하다고 생각해서 한사코 정직한 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 만약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건 적그리스도와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모두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고 악을 얼마나 많이 행하든,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얼마나 많이 입히든 그는 시종일관 자신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않고, 책망과 훈계가 임해도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를 악인이자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기껏해야 자신의 행동이 원칙에 위배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만 인정할 뿐 그가 일부러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잘못을 인정할 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중에 또 여전히 악을 행하며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가 시종일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몇 년 믿든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반면 보통 패괴된 인류도 모두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적그리스도와는 차이가 있다. 일부 사람은 심판하고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속에 새기고 반복해서 생각하고 자신을 반성하면서 ‘이게 적그리스도의 성품이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었구나. 이 일이 이렇게나 심각했구나! 내가 이런 내적 상태와 모습, 이런 측면의 본질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구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실로 회개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확고히 의지를 다질 수 있다. 그는 사역하고 생활하면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이 부탁한 일을 대하는 데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줄 알고 자신이 왜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는지, 왜 늘 사탄의 성품에 기대어 살아가는지, 왜 육을 저버리고 사탄을 저버릴 수 없는지 반성할 줄 안다. 그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그에게 그런 의지가 있다는 것은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똑같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제멋대로 행동하지만, 적그리스도는 독립 왕국을 세우려는 야심과 욕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한사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치명적인 부분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할 수 있다면,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으려 할 때 그런 기도와 의지가 그의 생명 진입에 어떤 이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최소한 그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진리로 문제를 해결해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이런 측면의 이로움이 있다. 그 밖에, 본분 이행을 훈련함으로써 그는 진리 추구의 길에 오를 수 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진리를 구할 수 있는 데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을 중시해 점차 사탄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면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때때로 패괴를 드러내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게 명리와 지위를 위해 말하고 행동하거나 제멋대로 사역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패괴 성품을 드러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속으로 후회하며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다. 이로써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사역에 순종하는 사람이며 생명 진입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몇 년을 체험하고 패괴를 얼마나 드러내든 결국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으며, 하나님 사역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참도에 뿌리내렸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그러면 적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쉽지 않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느낌도 없고 개의치 않는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라는 측면의 주제를 교제할 때 자신도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말은 꽤 잘하지만 진리를 실행할 때가 되면 여전히 진리 실행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여전히 적그리스도의 성품에 따라 행동한다. 그에게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낼 때 마음속에 싸움이 있나요? 지위를 지키기 위해 말할 때 마음속으로 자책하나요?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스스로 반성하고 인식하나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나서 후회하는 마음이 드나요? 나중에 조금이라도 회개하고 변화하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분명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체험과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쉬울 리 없다.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기만 해도 마음이 괴롭고 초조하고 속이 타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탄 성품을 왜 벗어 버릴 수 없을까? 왜 늘 패괴 성품을 드러낼까? 패괴 성품은 왜 이렇게 완고하고 다루기 어려울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이로써 그의 생명 체험이 매우 얕고 패괴 성품이 아직 별로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이 닥칠 때 마음속의 싸움이 유독 격렬하고 더욱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는 사탄 성품을 벗어 버리려는 의지는 있지만 마음속에서 사탄 성품과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싸우는 내적 상태는 날로 심각해진다. 그리고 자신을 더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패괴가 너무 깊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는 더욱 진리를 얻는 것을 갈망하고 진리를 소중히 여기게 되며, 자신과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의 분량은 점차 자라게 되고, 그의 생명 성품도 진실로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체험해 나가다 보면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좋아져서 결국 육을 이기고 패괴를 벗어 버릴 수 있고, 자주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생명 진입은 쉽지 않다! 그것은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응급 구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다할 수 있는 책임은 진리를 교제하고 붙들어 주고 공급하거나 책망, 훈계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희망이 있다. 다행히 재난에서 벗어나 죽음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면 위험하다. 일부 적그리스도는 도태되고 나서 일이 년이 되어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생명의 흔적이 조금도 없는 것이며, 이를 통해 구원받을 희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너희는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 그건 좋은 일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구원받으려면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고비란 무엇이겠느냐? 끊임없이 패괴 성품과 싸우는 것, 사탄이나 적그리스도의 패괴 성품과 싸우는 것이다. 패괴 성품은 너를 통제하려 하고 너는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며, 패괴 성품은 너를 미혹하려 하고 너는 그것을 버리려 한다. 너는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나서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며 기도한다. 때로는 한참이 지나도 사탄 성품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체념하지 않고 그렇게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 계속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사람 내면의 반응은 점차 달라진다. 어쨌든 생명이 있으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의 내면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사상 관점과 행위, 행동 방식, 나아가 마음 깊은 곳의 속셈과 의견, 뜻, 생각이 모두 계속 바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은지 그른지, 그런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부합하지 않는지, 그런 행동 원칙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자신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자신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점점 더 명확히 분별할 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점점 더 명확해진다. 그럼 이런 성과에 이르려면 무엇을 토대로 해야겠느냐?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하고 진입하는 것을 토대로 해야 한다. 왜 적그리스도는 절대 변화에 이를 수 없다고 하겠느냐? 그가 진리를 깨달을 수 없겠느냐?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깨달을 수는 있지만 실행하지 않고, 들어도 실행하지 않는다. 그는 깨닫더라도 그저 도리로 깨닫고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깨달을 수 있는 그깟 도리와 규례를 과연 실행해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조금도 실행해 내지 못한다. 그에게 강요하며 그를 몹시 피곤하게 하더라도 그는 실행해 낼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는 진리에 진입하는 것이 영원히 비어 있다. 적그리스도는 정직한 사람이 되겠다고 아무리 말하고 애써도 정직한 말은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기적이고 비열한 속셈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는 늘 이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행동하는데, 좋거나 그에게 이로운 것을 보면 “제게 주세요, 제 거예요!”라고 한다. 자신의 지위에 이롭게 말하고, 자신에게 이롭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순간적으로 영감이 떠올라 진리를 조금 깨달은 느낌이 들면 “저는 실행하고 변화해서 하나님을 흡족게 해야 해요!”라며 열성적으로 구호를 몇 마디 외친다. 하지만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가 되면 그가 과연 실행하겠느냐? 그는 실행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든, 진리와 실상을 얼마나 많이 얘기하든, 사례를 얼마나 많이 들든 그는 감동받지 않고 그의 야심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특징이자 표지이다. 그는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남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자 틀에 박힌 말이며 그에게는 역시 하나의 이론이다. 사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마음속으로 진리를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전에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무엇이라고 했느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 그는 진리를 증오한다. 그는 자신의 사악함, 이기적인 것과 비열함, 교만함, 흉악함, 지위와 재물을 차지하고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최고의 진리이자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지위가 생겨 사람을 통제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어떤 야심과 욕망도 다 이룰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최종 목적이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데,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라고 하는 게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면 소에게 나무에 오르라고 하고 늑대에게 풀을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것들을 힘들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때때로 늑대가 양 무리에 섞여 들어와 양들과 어울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울리는 척하면서 양을 잡아먹을 기회를 기다리는 것일 뿐 늑대의 본성은 영영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에게 진리를 실행하라고 하는 것은 늑대에게 양을 잡아먹는 본능을 버리고 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육식 동물인 늑대가 양과 여러 동물을 먹는 것은 변하지 않는 본성이다. 만약 누가 “저는 제가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진리를 교제하는 걸 듣기만 하면 속이 끓고 증오심이 생겨요. 누가 저를 책망, 훈계하면 저는 그를 더욱 증오하죠.”라고 말한다면 그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누가 “무슨 일이 닥치면 당신은 순종하고 진리를 구해야 해요.”라고 하면 그는 “순종은 무슨! 잠자코 있어요!”라고 한다. 이건 대체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이냐? 성격이 나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조차 못하게 한다. 네가 진리를 교제하자마자 그의 본성이 폭발하고 드러났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라는 말만 하면 그는 듣기 싫어한다. 어느 정도로 듣기 싫어하겠느냐? 그 말을 들으면 갑자기 흥분해서 고상함이고 뭐고 진상이 드러나는 것도 겁내지 않는다. 그 정도로 증오한다. 그럼 그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악인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라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된 것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고 실행하라고 요구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가진,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극도로 적대시하는 사악한 자들은 영원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몇 년 믿든, 설교를 얼마나 듣든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진리를 많이 들으면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모두 사탄에 속하는 부류라서 그들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그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을 배반한 뒤 하나님이 천사장을 구원하려 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다. 그럼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은 그를 반공중으로 내친 뒤 그에게 지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했다. 그가 봉사를 마치고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되어 그를 멸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한마디라도 더 말씀하겠느냐?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 말씀하지 않겠느냐? 한마디로, 소용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라도 더 하는 것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영영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다. 바로 그런 것이다.
적그리스도와 접촉할 때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어떤 리더들은 예전에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로 규정되어 교체되었는데, 한동안 지난 후 형제자매가 그 사람이 아직 사역 능력이 좀 있고 그동안 회개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행위와 태도가 좋다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그럴듯하게 한다는 것인지, 비교적 자신의 역할을 지킨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것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왕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고 일부 사역에 일손이 부족하기도 해서 그에게 사역을 하나 안배했다. 그 결과 두 달도 되지 않아 형제자매가 이렇게 보고했다. “얼른 그를 교체하세요. 그가 저희를 억압해서 너무 괴로워요. 그를 교체하지 않으면 저희는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어요.” 형제자매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쓰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누구를 리더로 뽑더라도 그를 뽑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 모양이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사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본성이 철저히 드러난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형제자매가 모두 그토록 격하게 반응했다는 것은 확실히 그들에게 어느 정도 분별력이 생겼다는 뜻이다. 전에는 그에게 미혹되어 상부에서 그를 처리했더니 그의 편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그가 회개했다고 해서 다시 그를 발탁해 한동안 썼더니 그는 철저히 드러났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그를 간파해 단체로 그를 파면하려 했다. 상부에서는 그 사람들에게 분별력이 생긴 걸 보고는 그들을 양육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기왕 그를 쓰는 것에 다들 동의하지 않으니 그를 교체했다. 이런 분별력은 어디에서 비롯됐겠느냐? (진리를 깨달은 데서 비롯됐습니다.) 그렇다.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분별력은 진리를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 이 역시 진리와 하나님이 권세를 잡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제때 분별해서 그를 교체했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그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됐다. 그는 사람을 억눌러 몹시 괴롭게 했고 인성이 전혀 없었다. 올바른 일을 하지 않으면서 형제자매의 본분 이행을 교란하는 데다가 형제자매를 밟고 올라서서 전횡을 일삼으니 누가 그를 쓰는 데 동의하겠느냐? 바보나 동의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교체되고 나면 느끼는 바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지난번에는 상부에 의해 교체되고 이번에는 형제자매에 의해 파면되어 쫓겨났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원래 지위를 얻으려고 했는데 결국 지위도 얻지 못하고 일순간에 추락하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을 반성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말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단지 패괴 성품이 몹시 심각할 뿐이라면 그 역시 반성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성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어떻게 하든 옳다고 생각하며 사실도, 긍정적인 사물도,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을 가진 사람이다. 오직 적그리스도만이 반성할 줄 모르는데, 그는 무엇을 궁리하겠느냐? ‘흥, 언젠가 내가 재기해서 당신들이 내 손안에 떨어지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어!’ 그럴 기회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럴 기회는 없다. 형제자매가 점점 더 진리를 많이 깨닫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내적 상태, 특히 적그리스도에 대해 분별이 생기면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악을 행할 여지와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고 재기하려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상부에서 분별에 관한 설교를 그만하고 더 이상 그를 분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그런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는 것을 들으면 자신이 끝장났다는 것을 알고 재기할 희망이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폭로하고 분별하는 것은 다 옳아. 모두 내 내적 상태야. 난 어떻게 변해야 할까?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끝장나지 않을까? 버려질 거라고. 천사장의 길을 걸어 하나님을 적대해서 좋을 게 있나?’ 그가 이렇게 고민하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절대 자신을 반성하지도, 인식하지도 않으며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 그게 그의 본성이다. 네가 진리를 어떻게 교제하든 그를 일깨워 회개하게 할 수는 없다. 회개하지 않는데 활로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고 외곬으로 파고들며 스스로 파멸을 초래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결정된다.
요즘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주제를 계속 다루고 있는데,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사람들은 들으면서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예배 시간이 죽을 맛이고 마음속에 반발심이 들 것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패괴 성품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얼른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깨달으려 하고, 깨닫고 나서는 자신이 변화되기를 추구한다.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언젠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걷잡을 수 없이 큰 악을 행할지도 모르고, 구원받을 기회가 사라져 파멸에 이르게 될까 봐 마음속으로 두려워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은 다르다. 그는 그런 분별하는 설교를 아무도 말하지 말고 아무도 듣지 않길 바라고 다들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어 그에게 미혹되길 바란다. 그러면 그는 흡족해한다. 적그리스도의 가장 큰 바람은 무엇이겠느냐? 권력을 잡는 것이다. 너희도 권력을 잡고 싶으냐? (잡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은 잡고 싶지 않겠지만 머리는 잡고 싶을 때도 있을 테니 실은 잡고 싶은 것이다. 마음속에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그런 길을 가지 않기를 갈망하는 주관적인 바람이 있지만, 일이 닥치면 패괴 성품이 너를 좌우하고 부추겨서 너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킬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통제할 수 있을지, 어떻게 말해야 위신과 명망이 생기고 남들이 우러러볼지 머리를 쥐어짠다. 늘 이런 것들만 생각하면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 무엇에 통제된 것이겠느냐? (패괴 성품에 통제된 것입니다.) 그렇다. 사탄의 패괴 성품에 통제된 것이다. 하루 종일 육적인 이익에 관한 일만 생각하고, 항상 남과 싸우고, 싸움 끝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육체와 사탄만을 위해 사니까 특히 괴로워한다. 그래서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의지를 다지지만 결국 일이 닥치면 또 지위와 이익을 다투고, 다툼 끝에는 기진맥진하여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겠느냐? (피곤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어느새 수십년이 지났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일이십 년 믿었지만 진리를 얼마나 얻었겠느냐? 패괴 성품이 얼마나 변화했겠느냐? 매일 누구를 위해 살겠느냐? 무슨 일 때문에 바쁘겠느냐? 무슨 일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겠느냐? 전부 다 육체를 위해서다. “사람 마음의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지 않겠느냐? 이 말을 직접 경험하고 자세히 음미해 보아라. 이 말이 생각날 때, 이 말을 체험할 때 너는 두렵지 않으냐? 너는 “속으로 좀 두려워요. 저는 겉으로는 하루 종일 노력하고,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해요. 육체는 그렇게 하지만 마음속 생각은 전부 악하고 진리에 위배돼요. 제가 하는 많은 일의 출발점이라든가 동기, 목적은 순전히 제가 생각하는 악을 행하는 거죠.”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악행을 저지른다. 그래서야 하나님이 기억하겠느냐? “저는 하나님을 20년 믿으면서 전부 다 버렸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않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고통스러울 게 뭐 있느냐? 하나님이 정말로 사람에게 진지하게 따진다면 사람은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다. 그건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자 긍휼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몹시 관대하다. 생각해 보아라, 그토록 거룩하고 공의롭고 전능한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이 하루 종일 악하고 진리에 위배되는 것만, 자신의 지위와 명리를 고려하는 일만 생각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그렇게 그를 대적하고 배반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사람은 그런 생각과 속셈, 동기의 지배를 받아 대놓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내하겠느냐? 진리를 공급하고 양육하고 일깨운다. 또한 깨우쳐 주고, 빛 비춰 주고, 인도하고, 채찍질하고, 징계한다. 징계가 심할 때는 위로까지 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 것이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온갖 패괴 성품과 여러 표출, 행위, 생각이 모두 악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인내할 수 있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인내도 진실하긴 하나 더는 참을 수 없게 되면 포기하거나 심지어 관계를 끊기도 한다. 그럼 하나님이 한 사람을 인내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매일매일 인내할 정도로 크나큰 인내심을 갖고 있다. 그 인내 안에는 무엇이 있겠느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뿐 아니라 너에 대한 기대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대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게 하는 성과와 수확을 보려는 것이다. 사람에게 그런 사랑이 있겠느냐? 없다. 사람은 지식이나 소양, 한 측면의 은사나 특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신이 남보다 신분이 고귀하고 보통 사람은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런 꼴을 보인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더럽기 그지없고 깊이 패괴된 인류를 구원할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얼굴을 맞댄 채 대화하고 붙들어 준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어서 다른 문제를 교제하겠다. 어떤 사람은 증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감동받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 않게 돼요.” 이 말이 좋다고 느끼고 패괴를 드러내는 문제를 정말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말이 정말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함,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포용과 사람에게 하는 모든 것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의 인성과 양심, 이성과 같은 측면을 감동시킬 수는 있지만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는 없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을 바꿀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세 심판 사역을 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공급해 사람의 패괴 성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선포하고 공급하며,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것이다. 그는 행동이나 어떤 일을 통해 너를 감동시키거나 너의 추구 방향과 목표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인내한다고 하든,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고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른다고 하든, 어떻게 말씀하든 하나님은 그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일 뿐이지 사람이 듣고 나서 감동받아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왜 그렇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은 사람의 본성 본질이다. 그 본성 본질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토대이지 타이른다고 바뀌는 나쁜 습관이나 나쁜 버릇이 아니다. 혹은 사람이 기쁘다고 해서 또는 지식을 많이 배우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사람의 본성은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얻어야만 변화할 수 있고, 오직 진리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생명 성품의 변화를 얻으려면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려면 우선 하나님이 말씀하는 여러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도리를 깨닫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완전히 틀렸다. 하나님을 믿는 도리를 깨닫고 영적 이론을 좀 이야기할 줄 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은 게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진리란 대체 무엇이냐?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자주 말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진리를 깨달은 거야.’, ‘하나님 말씀은 모두 옳고 전부 마음에 와닿아. 그건 우리의 공통어야.’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런 주장이 과연 옳겠느냐? 진리를 깨닫는다는 게 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왜 그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하겠느냐? 우선 진리란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진리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다. 그럼 그런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가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 제가 이해한 바로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하든 원칙이 있고 어떻게 대할지 알며 실행의 길이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생활 속 실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방금 사람이 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하셨는데, 사람은 스스로가 진리를 깨달은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생활 속 자신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은 해결하지 못하고 길도 없고 진리와 결부시키지도 못합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방금 한 말들 중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진리란 무엇이냐? (진리는 사람이 실행의 길을 갖게 하고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게 하며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해 줍니다.) 그렇다. 진리 원칙에 따라 비춰 보고 실행하면 그게 바로 길이고,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만약 도리만 깨닫고 일이 생겼을 때 운용할 줄 모르며 원칙을 찾지 못한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리란 무엇이냐? 진리란 모든 일을 하는 원칙이자 준칙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너희가 설교를 듣고 나서 도리만 알고 그 안에 있는 진리의 원칙과 준칙이 무엇인지, 생긴 일 중 어떤 일이 그 측면의 진리와 관련 있는지, 어떤 내적 상태가 그 측면의 진리와 관련 있는지, 그 측면의 진리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다 모른다. 예를 들어, 너희가 어떤 문제에 대해 묻는다면, 그 문제에 대해 물을 수 있다는 것은 너희가 그 측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인데, 교제하고 나면 깨닫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교제하고 나서 조금 깨닫더라도 그런 일이 다시 생겼을 때 또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로 깨달은 게 아니다. 너는 그 측면의 진리의 원칙과 준칙을 알지도, 파악하지도 못한 것이다. 네가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데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너는 그 측면의 진리가 어떤 실제를 가리키는지, 어떤 내적 상태를 겨냥하는지 자신의 내적 상태와 비춰 볼 수 있느냐? 만약 비춰 보지 못하고 늘 자신의 진실한 내적 상태를 알지 못한다면 그게 진리를 깨달은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진리를 깨달은 게 아니다. 한 측면의 진리나 원칙에 대해 말했을 때 어떤 일과 내적 상태가 그 측면의 진리와 관련 있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 혹은 자신의 어떤 내적 상태가 그 측면의 진리와 관련 있는지 알고 그 측면의 진리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설교를 들을 때는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더라도 교제하라고 했을 때는 원래 말을 그대로 옮길 뿐 내적 상태나 실제 상황을 활용해 말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게 진리를 깨달은 것이겠느냐? 그건 진리를 깨달은 게 아니다. 그럼 대부분의 경우 너희는 진리를 깨달았느냐, 아니면 깨닫지 못했느냐?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너희는 대부분의 진리를 듣고 나서 도리나 깨닫고 규례만 지킬 뿐 유연하게 운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이 생기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네가 깨달은 얼마 되지도 않는 도리조차 유용하게 쓰지 못하며 그것의 도움을 받지도 못한다. 이게 깨달은 것이겠느냐, 아니면 깨닫지 못한 것이겠느냐?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계속 노력하고 공들여 고민해야 한다. 너의 인성 안에 갖춰야 할 것들이 있다. 무언가를 배우거나 할 때는 진지하고 꼼꼼하게 대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싶더라도 정상인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너는 영영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엉터리로 믿는 것이다. 네 자질의 높고 낮음은 보지 않고 네가 그런 인성을 갖추었는지만 본다. 네가 그런 인성을 갖추었다면 자질이 평범하더라도 얕은 진리는 깨달을 수 있으니 최소한 진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네 자질이 뛰어나다면 너는 진리의 심층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더욱 깊이 진입할 수 있다. 이는 자질과 관련 있다. 그러나 네 인성 안에 진지하고 꼼꼼하게 대하는 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고 늘 대충대충 되는대로 하며 흐릿한 상태로 있다면, 어떤 일을 대하든 흐릿하고 모호하고 건성으로 대한다면 진리는 네게 영원히 규례이자 도리이고, 너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진리 추구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조금 어렵긴 하지만 어려운 정도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네가 신경 쓰고 공들이면 그 어려움은 줄어들 것이고 너는 어느 정도 얻을 것이다. 반면 네가 진리에 전혀 공들이지 않고 그저 도리와 표면적인 행동 방식에만 공들인다면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진리를 체계적으로 교제하니 너희는 요령을 좀 알아내지 않았느냐? 뭔가 깨닫지 않았느냐? 여러 진리 안에 있는 것이 대학에서 배운 그 어떤 지식보다도 더 세세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몹시 세세하다. 지식 같은 것들은 사람이 기억하고 이해할 수만 있으면 끊임없는 실습과 실천을 통해 몇 년 안에 숙달할 수 있다. 학문 하나를 배울 때도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신경을 좀 쓰기만 하면 서서히 숙달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으려면 단지 머리만 써서는 안 되고 마음을 써야 한다. 마음을 써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거나 체험하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착실하며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자질이 떨어지며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진리에 이를 수 없다. 너희는 경솔한 사람이냐, 아니면 세심한 사람이냐? (경솔한 사람입니다.) 그럼 위험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세심하게 행동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걸 좋아한다. 할 수 없다는 말은 그만해라. 시도도 안 해 보고 할 수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너희가 추구하는 의지와 태도로 보면 기초적인 진리를 깨달을 희망은 있다. 그건 가능하다. 사람이 기꺼이 마음을 쓰고 대가를 지불하며 마음속으로 진리에 힘쓰면 성령은 역사하고 온전케 하지만, 마음속으로 진리에 힘쓰지 않으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기억해라. 진리를 깨달으려면 주관적으로 공들이고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도 단지 절반의 성과만 이룰 수 있고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부분만 이룰 수 있다. 나머지 절반은 진리를 깨닫는 데 핵심적인 부분으로, 사람이 닿을 수 없는 것인데, 이는 성령 역사에 기대어 이룰 수밖에 없다. 지식이나 과학을 배우는 것은 사람이 공을 들이면 되지만 진리를 깨닫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라. 머리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소용없고 마음을 쓰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대가를 지불하여 이루는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성령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 역사의 기초는 무엇이겠느냐? 생각은 상당히 섬세하고 마음은 충분히 조용하고 편안해야 하며 솔직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한다. 성령 역사는 아주 미묘하다. 겪어 본 사람은 안다. 진리 측면에 자주 공들이는 사람은 항상 성령의 깨우침을 느끼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실행의 길이 순조로우며 마음이 점점 더 환해진다. 반면 체험이 없는 사람은 성령 역사를 느끼지 못하고 늘 정확한 길을 보지 못하며 어떤 일을 대하든 모호하고 무엇이 바른길인지 모른다. 진리를 깨닫고 실행의 길을 분명히 아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사람이 마음에 그 몇 가지 상태를 갖추면 성령은 역사한다. 그러나 네 마음이 그 몇 가지 상태에서 벗어나면 너는 성령 역사를 느낄 수 없다. 이는 추상적이지도, 막연하지도 않다. 네가 그 몇 가지 내적 상태 안에 있고 네 마음이 그 몇 가지 상태 안에 있는 채로 구하고 공들이고 묵상하고 기도한다면 성령은 네게 역사한다. 그러나 네가 정신을 딴 데 팔고 늘 지위를 추구하고 명리를 다투며 항상 행동 방식에나 관심을 쏟고 공들인다면, 하나님을 대할 때 늘 피하고 숨기고 회피하고 거절하며, 솔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고 너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며 꾸짖지도 않을 것이다. 성령의 꾸짖음조차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진리를 얼마나 깨달을 수 있겠느냐? 때때로 성령이 너를 꾸짖는 것은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옳고 어떻게 하면 그른지 네게 알려 주려는 것이고, 네게 그런 느낌을 주려는 것이다. 결국 너는 무엇을 얻게 되느냐? 너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 일을 한눈에 명확히 알게 된다. ‘그렇게 하는 건 옳지 않아. 원칙에 부합하지 않아.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그 일에서 너는 원칙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리란 대체 무엇인지 명확히 알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된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너를 그렇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런 일에서 영영 무지한 상태로 남아 명확히 알지 못할 것이고, 그런 일이 닥치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영문을 몰라 마음은 항상 곤죽이 된 듯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조급하고 속이 끓는데 성령은 왜 역사하지 않겠느냐? 아마 네 내면의 어떤 내적 상태가 옳지 않고 네가 반항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으로 반항하겠느냐? 네가 그릇된 관점이나 관념을 고집하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네가 그 관념이나 관점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제서야 성령은 그것을 토대로 역사한다. 성령은 역사할 때 단지 네가 의식적으로 옳고 그름만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길과 방향, 목표가 무엇인지, 네가 깨달은 것이 진리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명확히 알게 한다. 너희는 이런 경험이 있지 않으냐? 만약 누군가 하나님을 십 년, 이십 년 믿었는데도 이런 세세한 경험이나 체험이 없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경솔한 사람이다. 상투적으로 입에 발린 도리나 구호만 외치고 문제를 해결할 때도 몇 가지 수법이나 간단한 방법만 쓴다면 발전이 없을 수밖에 없고 영영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성령도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솔한 사람은 진리에 조금도 닿지 못한다. 성령이 그를 깨우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왜 역사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이겠느냐?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의 자질이 몹시 떨어져서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역사해도 그는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원칙이라고 그에게 알려 준들 그에게 이해할 능력이 있겠느냐? 없다, 그러니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너희는 이런 경험이 있느냐? 진리는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 네가 추구하고 깨달으려고 할 때 성령은 역사하고 너는 얻을 수 있다. 반면 네가 게으르고 안일을 탐하며 진리에 공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고 네가 누구든 얻을 수 없다. 알겠느냐? 너희는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있느냐? 추구하는 사람은 얻을 수 있고, 결국에는 진리를 얻는 사람이 보배가 된다.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부러워해도 소용없다.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진리를 추구할 가장 좋은 시기는 언제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해 역사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 하나님은 너와 얼굴을 맞대고 말하고 교제하며, 너를 지도하고 돕는다. 왜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겠느냐? 육신이 역사하고 말하면 네게 성령의 뜻을 깨닫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알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 역사의 원칙과 규칙, 방식과 방법을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그가 네게 알려 주면 너는 스스로 모색할 필요 없이 지름길로 가서 곧장 이를 수 있다. 육신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사역을 마치면 너는 스스로 모색해야 한다. 누구도 이 육신을 대신해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네게 명확히 알려 주지 못한다. 누구도 네게 알려 주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도 안 된다. 여기에는 실제 사례가 있다. 이는 마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천 년을 믿고도 지금 일부는 다시 구약 성경을 보며 율법을 지키고, 일부는 십자가를 지고 집 안에 십계명을 걸어 놓은 채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과 같다. 결국 그들은 무엇을 얻었느냐? 성령도 역사하긴 하지만 명확히 말하지 않아서 사람은 계속 모색하고 있다.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이 모색하고 얻은 것에 결론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도 네게 이렇게 하면 옳고 저렇게 하면 틀리다고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없다. 아무도 네게 그렇게 알려 주지 않는다. 성령이 너를 깨우쳐 줘서 네가 옳다고 생각한들 하나님이 칭찬하겠느냐? 너도 불확실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2천 년 전 주 예수가 남긴 말들은 성경에 기재됐다. 2천 년이 지난 뒤 주를 믿는 사람들은 주의 재림에 대해 가지각색으로 해석하는데, 정확한 해석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힘을 들인다. 이는 무슨 뜻이겠느냐? 애매모호하고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말들에 대해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가지로 해석하고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각자 이유와 주장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해석이 정확하겠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거나 규정하지 않은 것이라면 사람이 말해 봤자 소용없다. 네 파벌이 아무리 크고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하나님이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네 세력을 보지 않는다. 설사 전 세계에서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옳고 진리다. 이는 영원불변의 사실이다! 각 종파가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해도 결국에는 어떻겠느냐? 네가 해석해 봤자 소용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마디로 부정한다. 네가 어떻게 해석한들 하나님이 너를 거들떠보겠느냐?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거들떠보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따로 시작해 새 사역을 한 지 이제 삼십 년 가까이 되었다. 그 사람들이 아무리 교만하게 떠든다 한들 하나님이 거들떠보겠느냐?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신경도 쓰지 않는다. 종교계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구원을 못 받나요?”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진작에 알아듣게 말했다. 종교계의 세력이 아무리 커도 소용없고,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한들 그들에게 진리가 있다고 증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해야 할 일을 하고 시작해야 할 곳에서 시작하며 택해야 할 자를 택하는데, 종교계의 영향을 받거나 종교계에 휘둘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런데 패괴된 인류는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고 하루 종일 하나님에게 설명하려 하는데, 소용이 있겠느냐? 게다가 성경 속의 말을 물고 늘어져 제멋대로 해석하고 일부분만 취해 제멋대로 한 해석임이 틀림없어도 평생 고수하면서 하나님이 와서 이루어 주길 기다리니, 꿈도 야무지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늘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려 한다면 그게 이성적인 것이겠느냐? 사람은 무엇을 하려는 것이겠느냐? 반항하려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과 겨루려는 것 아니겠느냐? 대재난이 내려서 사람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소용없지 않겠느냐?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이 시기를 놓치게 될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때 가서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그 말씀이 무슨 뜻일까? 그때 물어볼걸 그랬어. 이제 묻지도 못하네. 그럼 기도나 하자. 성령도 역사하잖아. 다 똑같지 뭐.’ 똑같겠느냐? (다릅니다.) 똑같다면 2천 년 동안 주를 믿은 사람들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십 몇 세기에 소위 성도들이 쓴 말들은 너무도 미숙하고 볼품없다! 지금 각 종파의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은 두꺼운 책 한 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받는 것, 이 두 가지에 대한 것뿐이다. 이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겠느냐?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안에 진리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한마디,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만 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내치고 도태시켰는데도,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이겠느냐? 그들이 보기에는 사랑이 아니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정죄했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이는 가장 불쌍한 일이다. 지금,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진리를 선포하고 직접 사람을 구원하는 좋은 기회가 있는데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그건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추구하고 노력했는데도 결국 깨닫지 못한다면 양심에 거리낌은 없고 최소한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다. 너희는 이제 추구하기 시작했느냐? 본분 이행을 진리 추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건 일종의 협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리 추구에 이를 수 있다거나 진리 추구에 미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건 그저 일종의 행위나 행동이며 진리를 추구할 태도를 갖춘 것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리 추구에 미칠 수 있겠느냐? 우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떤 일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고 본분도 엉터리로 이행하며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바보다. 그럼 진리는 어떻게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우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는 게 힘들겠느냐? 힘들지 않다. 우선 자신이 접할 수 있는 환경과 이행하는 본분에서부터 시작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고 훈련한다면 진리 추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선 이런 원칙에서부터 시작해 구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면 조금씩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네가 얻은 깨우침이야말로 네가 깨달아야 하는 진리이다. 우선 본분 이행에서부터 시작해 진리를 구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실생활을 떼려야 뗄 수 없다. 생활 속에서 접하는 사람과 일, 사물, 그리고 본분 범위 내의 일, 이런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진리 원칙을 깨달으면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있다.
2019년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