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6 적그리스도의 인품과 성품 본질에 관한 정리(3)
3.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
1) 사악하다
(2)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을 겨냥해 하는 행동
지난번 예배 때는 주로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에 관해 교제하고 종합하였다. 패괴된 인류의 여섯 가지 성품 가운데 세 가지를 선택해 해부했는데, 그 세 가지는 각각 진리를 싫어하는 것, 흉악함, 사악함이었다. 지난 시간에는 사악함에 대해 교제하며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모습을 해부함으로써, 즉 온종일 악한 것만 생각하는 이 부류 사람의 모습을 대조해 봄으로써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 본질을 실증하였다. 적그리스도는 온종일 악한 것만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부하였다. 한 가지 측면은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대할 때 그의 사상 안에 자리 잡은 생각은 무엇인가, 그의 패괴 본질 안에서 어떤 행동과 모습이 표출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측면은 하나님에 대해 그의 사상 안에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측면의 교제를 마친 다음에는 하나님을 대하는 측면에서 적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생각과 관념, 관점, 속셈, 나아가 그의 생각 속 자신이 하려고 마음먹은 일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일부 교제하였다. 예를 들자면 의혹을 품고, 연구하는 것이 있었다. 또 무엇이 있었느냐? (추측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의혹을 품고, 연구하고, 추측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었다. 그럼 이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⑤ 시험한다
시험하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행동, 혹은 어떤 사상이 드러내는 내적 상태와 본질이 시험이냐? (어떤 과오를 저지르거나 악을 행하면 늘 하나님에게서 내막을 알려고 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고 하며, 자기가 과연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을 수 있을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생각하는 것의 측면이다. 그럼 통상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 혹은 일이 닥쳤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시험이겠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과오를 저지른 후 하나님이 그 과오를 기억하고 정죄할 것 같고, 그 본인도 확신이 없고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정죄할지 알 수 없다면, 그는 테스트할 방법을 생각할 것이고, 하나님이 과연 어떤 태도인지 볼 것이다. 먼저 그는 기도를 한다. 그러면서 아무 깨우침도 빛 비춤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때까지 추구해 온 방식을 철저히 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어떤 일을 하든 대충 건성으로 임하며, 5의 힘을 쓸 수 있는데도 3만 쓰고, 3의 힘을 쓸 수 있는데도 1만 썼다면, 이제 5의 힘을 쓸 수 있으면 5를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도 자기가 하고, 늘 앞다투어 남 앞에 나서서 많은 형제자매가 그 모습을 보게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과연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가 저지른 그 과오를 만회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나 평범한 사람들이 이겨 내지 못하는 일이 닥치면 그는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하는지, 그를 깨우치고 인도하는지 살핀다.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느끼면 그는 하나님이 기억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고, 그 과오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반면, 그렇게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며, 그렇게 큰 태도 변화를 보였는데도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지 못하고, 나아가 예전과 뭔가 다른 점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예전의 그 과오를 정죄하고 그를 원치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를 원치 않으니, 그 후로는 본분을 이행해도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그래도 그를 원하고 정죄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아직 복받을 희망이 있다면 얼마간 진심을 바쳐 본분을 이행할 것이다. 이런 모습과 생각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는 구체적인 행동 방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방금 너희는 한 가지 측면의 이론만을 이야기했을 뿐, 하나님을 시험하는 구체적인 모습이나 이러한 일에 대한 사상 속 구체적 행동 방식,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이런 일을 할 때 적그리스도 부류의 관점과 내적 상태에 대해서도 폭로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 일에 대해 어떤 인식이나 체험도 없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진실로 느끼는 바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그 일에 대해 의혹으로 가득할 것이다. 비록 그가 주관적인 바람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더라도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그는 마음속에서 몇 가지 일을 계획하는 동시에 집행하고 시행하기 시작한다. 시행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이 과연 알고 있을지, 그 일을 들킬지, 그가 말하지 않으면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지, 하나님이 어떤 환경을 통해 드러내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관찰한다. 물론, 평범한 사람도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는 단순히 확신하지 못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의혹으로 가득하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경계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시험하는 많은 행동 방식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에 의혹을 품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늘 마음속으로 어떤 일들을 생각한 후 두려움이나 알 수 없는 공포감을 품고 몰래 뒤에서 이런 생각을 퍼트려 사람들을 미혹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과연 그 일을 막을지, 폭로할지 살핀다. 만약 폭로하고 규정한다면, 급히 꼬리를 말고 다른 방법을 쓴다. 만약 그가 보기에 아무도 그 일에 대해 모르고, 그를 간파하거나 꿰뚫어 보지도 못하는 것 같다면, 마음속으로 자기 직감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옳다고 100% 믿으며,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된다. 이는 어떤 행동 방식이겠느냐? 이런 행동 방식이 바로 시험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천성적으로 성품이 사악해서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정직한 태도,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또 정직한 말로 얘기하지 않고 성실한 태도로 임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떳떳한 게 아니라 우회적이고 수상쩍으며, 자기 생각이나 속셈을 바로 말하는 법이 없다. 그것을 말했다가 남들이 자기를 파악하고 간파하면 그의 야심과 욕망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사람들 사이에서 존귀하고 대단하게 보일 방법이 없다고, 앙망받고 숭배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그 떳떳하지 못한 속셈과 욕망을 늘 숨기고 가린다. 그럼 그는 말하고 행동할 때 어떤 방식을 쓰겠느냐? 다양한 방식을 쓴다. 이방인들 말에 ‘미끼를 던지고 속을 떠본다’는 구절이 있는데, 적그리스도도 이런 행동을 한다. 그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에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다. 몇몇 방식, 예컨대 완곡한 방식, 수소문하는 방식, 혹은 떠보는 방식을 써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성품이 사악해서 진리를 구하는 법이 없고, 진리를 깨달으려 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명리와 지위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명리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일이면 하고, 명리와 지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면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명예와 지위와 관련이 있고 남들 앞에 나서고 체면이 서는 일이라면 앞다투어 하지만, 교회 사역을 지키고 사람들에게 원망 사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적그리스도는 어떤 일이든 구하려는 태도로 대하지 않으며, 시험하는 방식으로 미끼를 던지고 속을 떠본 후 할지 말지 결정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교활하고 사악하다. 예를 들어, 그는 자기 같은 부류가 하나님 눈에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대조하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수소문하고 말의 속내를 알아내려 하며, 리더와 상부가 자신에게 말할 때의 말투와 태도를 살피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자기 같은 부류의 결말이 어떻게 규정되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이런 수법과 방식으로 자기가 하나님 집에서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앞으로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살피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험하는 성질이 있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책망받은 후 자기가 왜 책망받았는지, 그 일을 할 때 어떤 패괴 성품을 표출하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 어떤 측면에서 진리를 구해 자신을 인식하고 지난 과오를 만회해야 할지 성찰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에게 거짓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자신에 대한 상부의 진짜 태도를 빙빙 돌려 수소문한다. 예를 들어, 책망받은 후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갖고 바로 상부에 구하며 자신에 대한 상부의 어조가 어떤지, 인내심이 있는지, 자신이 구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지, 자신에 대한 태도가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는지, 자신에게 계속 일을 맡길 것인지, 자신을 높이 볼 것인지, 자신이 전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상부에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핀다. 이러한 행동이 바로 시험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일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 사람은 속으로 다 알고 있지 않느냐? (압니다.) 그럼 알고 있을 때, 이렇게 행동하고 싶어질 때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이냐? 먼저, 가장 간단한 부분이다. 너는 자신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저버려야 할 때 무척 힘들어하며 생각한다. ‘관두자. 이번 일은 내 복이나 종착지와 관계돼서 자신을 저버릴 수는 없어. 다음번에 다시 보자.’ 다음번에 또 자신의 복이나 결말과 관계되는 문제가 닥치면 그때도 자신을 저버리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양심과 지각이 있다. 비록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을 지니지는 않았어도 문제가 되고 무척 위험하다. 반면, 적그리스도 부류는 늘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내적 상태로 살면서 자신을 저버리지 못한다. 양심과 지각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누군가가 그를 폭로하고 책망하며 그의 내적 상태를 지적한다고 해도 끝까지 버틴다. 그는 절대 자신을 저버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일도, 자신의 그런 내적 상태를 내려놓거나 해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어떤 적그리스도들은 교체된 후 이렇게 생각한다. ‘교체된 것은 정상적인 일 같지만, 영 체면이 서지 않아. 큰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딱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만은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겠어. 교체되면 앞으로 하나님 집에서 양성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럼 하나님 마음속에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나한테 아직 희망이 있을까? 나는 하나님 집에서 쓸모가 있을까?’ 그는 궁리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내 손에 1만 위안이 있으니 이럴 때 유용하게 써야겠다. 그 돈을 봉헌한 다음 나에 대한 상부의 태도가 달라지는지, 내게 호감이 생기는지 지켜보겠어. 만약 하나님 집에서 그 돈을 받는다면 나한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이야.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그 돈을 받지 않는다면, 나한테는 희망이 없다는 뜻이니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해.’ 이는 어떤 행동이냐? 이것을 가리켜 시험한다고 한다. 요컨대, 시험하는 것은 사악한 성품 본질 중 비교적 눈에 띄는 모습이다. 사람은 갖가지 방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얻고 확실한 소식을 알아낸 후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얻는다. 시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자는 말로 떠보고, 어떤 자는 물건으로 시험하며, 또 어떤 자는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방법을 꾀한다. 너희가 하나님을 시험할 때 가장 흔히 쓰는 방식은 무엇이냐? (가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떤지, 제 마음이 평안한지 살핍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런 방식은 무척 자주 사용된다. 또 한 가지는 예배 때 교제하면서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지, 하나님이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는지 보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는지, 자기를 사랑하는지 테스트한다. 이 밖에도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깨우치고 인도해 주는지, 자신에게 특별한 생각이나 방법, 아이디어가 떠오르는지 살핀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테스트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모두 흔히 사용되는 것들이다. 또 있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짐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제가 맹세한 대로 저를 대하시는지 관찰합니다.) 그런 것도 해당한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든, 만약 그렇게 해서 양심에 참소를 받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그런 행동과 성품을 인식하고 바로 뉘우칠 수 있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상적인 패괴 성품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관되게, 한결같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런 행동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고수하며 저버리지도 내려놓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 그는 자신을 반성하는 법이 없고, 진리를 구하는 법도 없다. 그저 일관되게, 한결같이 갖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에 대한 규정, 그리고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인지 시험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법도, 진리를 구하는 법도 없고, 나아가 어떻게 해야 진리에 순종하고 성품 변화를 이룰지 구하는 법도 없다. 그가 그 모든 일을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 뜻을 간파하기 위함이다. 이런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성품은 분명히 사악하다. 그는 이런 짓을 하고 이런 모습을 보일 때 어떤 참소도 받지 않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설사 대조해 보더라도 후회하거나 그만둘 뜻이 없고 여전히 똑같이 행동하려 한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하고, 이런 태도와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을 반대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의 사상 관점 속에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고, 경외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그런 생각과 태도가 없다.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원하는 정보들을 얻고 자신의 방식과 수단으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태도와 정의를 알아내려는 것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이런 행동을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과 대조해 볼지라도, 그런 행동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고 사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조금이나마 있을지라도 전혀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하나님 집에는 한 가지 규정이 있었다. 제명되고 출교된 사람이 나중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꾸준히 하나님 말씀을 읽고, 꾸준히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고, 또 진실로 회개한다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받아주는 규정이었다. 마침 제명된 사람 한 명이 이 조건에 부합하기에 교회에서는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아가 교제한 후 교회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정말 나를 돌아오게 하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걸까? 하나님께서 정말 내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셨을까? 정말 나를 긍휼히 여기고 관용을 베풀어 주시는 걸까? 정말 예전에 내가 저지른 그 일들을 문제 삼지 않으시는 걸까?’ 그는 믿지 못하고 궁리했다. ‘돌아오라고 했지만, 점잔을 좀 빼야지, 바로 그러겠다고 하면 안 돼. 제명되었던 몇 년 동안 외부에서 무척 고통스럽고 가련하게 산 것처럼 말이야. 자중해야지, 돌아오라고 했다고 바로 어디에서 교회 생활을 하고 어떤 본분을 이행할지 알아봐서는 안 되는 거야. 그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물론 기분은 아주 좋지만 차분해져야 해. 하나님 집에서 진심으로 나를 돌아오게 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나를 돌아오게 한 다음 나를 이용해서 일을 처리하려는 건지 알아보자.’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출교되고 나서 그동안 자신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 크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너무 큰 손해를 끼쳐서 평생 만회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저는 마귀 사탄이고,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충분히 반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돌아오라고 한 이상, 하나님 말씀을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자신을 더 많이 반성하고 인식해야겠죠. 지금 저는 아직 하나님 집에 돌아갈 자격도,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없습니다. 형제자매들과 만날 자격도 없고, 하나님을 뵐 낯은 더더욱 없지요. 제가 충분히 인식하고 반성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교회로 돌아가겠습니다. 모두가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도록요.” 그는 이렇게 말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나는 그냥 거짓으로 이렇게 말한 건데, 만에 하나 내가 돌아가지 않는 것에 리더가 동의하면 끝장 아닌가?’ 사실 속으로는 무척 걱정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교회에 그다지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척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 말을 했겠느냐? (교회에서 정말 그가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일지 시험한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이는 사탄 마귀의 행동 아니겠느냐? 정상적인 사람이 이렇게 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정상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는데도 이런 수를 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받아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자 긍휼이니 너는 마땅히 자신의 패괴와 부족함을 반성하고 인식한 후, 지난 잘못을 만회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만약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이렇게 대한다면, 이는 은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이런 생각과 행동은 바로 사악한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모습과 표출은 이론적으로 말하면, 늘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 정의 등을 테스트해 보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이런 행동을 저버리고 내려놓으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성품 본질을 지닌 부류는 이런 행동을 내려놓지 못하고, 이런 행동에 염증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자신에게 그런 수단과 방식,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긴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라고. 내가 어디 당신들처럼 바보같이 하나님과 진리를 대할 때 순종하고 말을 듣겠어? 난 당신들처럼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방법을 생각해서 몇 가지 방식과 수단으로 이 일에 대해 알아낼 거야. 순종하고 말을 듣는다 해도 그 내막은 알아야지. 무슨 일이든 나를 속이거나 기만하거나 우롱할 생각은 말라고.’ 그는 이런 사상 관점을 지니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성육신한 하나님을 대할 때 순종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진심도 없으며, 나아가 충성심도 없다. 시험하는 것과 관련된 모습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⑥ 요구한다
다음 항목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요구하는 것의 세부 모습은 더욱 다양하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이방인들의 말마따나 ‘이익이 없이 움직이지 않는’ 자들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확실한 이익이 보이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확실한 이익이 보이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이익이 있으면 행동하고, 이익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 이렇게 가늠할 것이다. ‘이 일을 하면 내가 얼마나 잇속을 차릴 수 있고 얼마나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지? 그 정도의 이익을 얻기 위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을까? 만약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아주 큰 대가를 치렀는데,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만 잇속을 차리고 나를 과시하지 못한다면, 절대 이 일을 하지 않을 거야!’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부탁과 요구를 대할 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느냐? 만약 그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간 대가를 치렀는데 이익을 얻지 못하고, 고생을 좀 했는데 은혜를 얻지 못했다면, 그의 마음속에서는 바로 반응이 올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많은 대가를 치렀는데 왜 이익을 얻지 못한 거지? 우리 집 장사가 과연 이윤을 본 걸까?’ 만약 계산해 봐서 수입이 지난달보다 많다면, 그는 계속 밖에 나가 복음을 전할 것이며, 설령 위험이 있더라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 장사에 문제가 생기고 이윤이 지난달보다 눈에 띄게 줄어드는 순간, 그는 그 즉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의혹을 품는다. ‘하나님,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게으름 피우거나 교활하게 굴지 않았고, 건성으로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번 달에 제가 뛰어다니며 행한 사역은 지난달보다도 많고요. 그런데 왜 저희 집을 축복해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희 집 장사가 왜 잘 안되는 겁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탁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곧바로 달라진다. ‘당신께서 저희 집을 축복해 주지 않으셨으니, 제가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다음 달에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5시에 일어나야 하면 6시에 일어날 거고, 8시에 집에서 나가야 하면 10시에 나갈 겁니다. 저는 보통 한 달에 5명의 복음 대상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이번에는 2명에게만 전할 거예요. 그 정도면 되겠죠!’ 그가 계산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는 자기가 기여하고 지불한 것과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 준 것이 등가를 이루어야 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그가 구하고 원하는 것의 몇 배가 되어야 수지가 맞다고, 그것을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 집에서 그에게 어떤 사역과 본분을 맡기든, 그는 한 가지 방식으로 대할 것이다. 바로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것이다. 대충 할 수 있으면 대충 하고, 건성으로 임할 수 있으면 건성으로 임하면서 절대 일말의 진심도 바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요구하는 것이고 거래하는 것이다. 거래하려는 생각이 있기에 요구하는 것이며, 거래하려는 생각이 없다면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의 부탁과 하나님 집의 사역을 대하고, 자신의 본분을 대할 때 마음속에 일말의 진심이나 충성심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머리와 에너지, 시간, 그리고 육적으로 받은 고통과 치른 대가로 복받으려는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상을 얻어 내고자 한다. 물론, 이번 생에 육적인 평안과 기쁨, 내면의 충실함, 가정의 행복, 나아가 순조로운 주변 환경을 얻어 내고, 이와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우러름과 앙망,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한다. 요컨대,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에서 절대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며, 절대 일말의 충성심도 바치지 않는다.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든 대충 건성으로 임하든, 그들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구해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류는 일이 안 풀리고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 혹은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과 일, 사물이 닥칠 때, 바로 생각한다. ‘내게 닥친 이 일들이 내 이익과 뭔가 충돌하지는 않을까? 내 명망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내 앞날과 훗날의 성장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본분 이행 과정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든, 그들은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법이 없고, 내면이 거래 심리로 점철되어 있다. 장사꾼의 눈빛으로 자신이 지불하고 바친 것들이 가치가 있는지, 자신이 제공한 자본으로 얼마나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지 가늠하는 것이다. 혹자는 “저희는 진리와 생명을 얻고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는 ‘구원받는 게 얼마나 값어치가 있지? 진리를 깨닫는 건 또 몇 푼이나 된다고? 그런 것들은 값어치가 없어. 정말 값어치가 있는 건 이번 생에 백배를 얻고 내세에는 영생을 얻는 거지. 이번 생에 모든 사람에게 떠받들어지고 우러름을 받으며 하나님 집에서 크게 높임 받고, 내세에는 만국을 다스려야지. 그거야말로 진짜 실속 있는 이윤이라고.’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야심이고, 그들이 본분 이행 이면에,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는 장부이다. 이 장부는 거래 내역과 요구 사항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자신의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할 때 보이는 그 알량한 ‘진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생을 얻고 재난을 피하도록 보호받으며, 축복과 은혜를 받고, 그의 모든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 부류는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갖가지 바람이 가득하다. 그 바람들을 통틀어 ‘요구’라고 한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원하지 않지만, 그 밖의 모든 물질적, 비물질적인 것들은 전부 원한다.
한때 형제자매와 교회를 위해 어느 정도 기여를 한 적그리스도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위험한 사역을 맡은 적이 있다거나 집에 돌아가기 힘든 형제자매들을 접대한 적이 있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햇수도 많은 편이라 대부분 사람에게 공로와 자격이 있는 자로 여겨진다. 그들 자신도 그런 우월감과 우위를 느끼며 나이를 내세워 거만하게 군다. ‘나는 이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집을 위해 여러 기여를 했어. 그러니 하나님이 특별 대우를 해 주시지 않을까? 예를 들어, 해외에 가게 해 주시는 게 있지. 그건 복을 누리는 일이잖아. 만약 자격을 논한다면 내가 우선 아니겠어? 나는 하나님 집을 위해 기여를 한 적이 있으니 우선순위에 오르고 특별 대우를 받아야지. 나를 원칙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한때 감옥살이를 해서 출옥 후 돌아갈 집이 없어지자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특별히 보살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돈을 좀 내줘서 집을 사 준다든가, 자신의 남은 삶을 책임져 준다든가, 자신이 제시하는 모든 물질적 수요를 충족해 준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 그가 필요로 한다면 하나님 집에서 차를 줘야 하고, 그가 병에 걸리면 하나님 집에서 영양제를 사 줘서 몸보신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이를 내세워 거만하게 구는 것이고, 자격을 논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 사람들은 자기에게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서 뻔뻔하게도 공개적으로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집과 차, 사치스러운 삶을 원한다. 심지어 형제자매들이 무상으로 그를 위해 일을 처리하고 뛰어다니게 하는 등 그의 피고용인, 노예가 되게 한다. 이는 교회에 얹혀사는 자가 된 것 아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실 너 자신을 위한 것이고, 감옥살이를 하는 것도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다.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은 전부 네 책임이다. 또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얻는 것은 모두 너 자신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 역시 네가 스스로 원한 것이다. 아무도 너에게 강요한 적이 없다. 네가 생명을 얻는 것 또한 너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설사 네가 한때 하나님 집과 교회를 위해 위험한 사역을 맡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공로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공로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는 하나님이 너를 높여 준 것이다. 네게 그런 기회를 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지 교회에 얹혀살 밑천을 준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부류는 적그리스도 아니겠느냐? 특히 이 부류는 어떤 진리 실제도 교제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고 젊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의 지난 역사를 교제하고 자격을 내세울 뿐, 가치 있는 생명 체험의 교제나 인식은 하나도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저 허세를 부리고 거드름을 피울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어떤 실질적인 사역도 맡지 못하고, 어떤 진정한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교회에 얹혀살고 하나님에게 손을 내밀어 요구하니 이는 후안무치한 것 아니겠느냐? 만약 자격을 논한다면 내가 너희보다 자격이 있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허세를 부리더냐? 내가 너희에게 물건을 요구하더냐?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럼 적그리스도 부류는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 후안무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본분을 받아들일 때 마음속이 거래 심리로 점철되어 있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올바른 관점이 없으며, 그것을 자신의 본분과 의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얼마간 본분을 이행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 사역은 아무도 하지 못해. 그러니 내가 한다면 하나님 집에서 이름이 나고 어디를 가든 우러름을 받겠지. 또 어디를 가든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생길 거야. 하나님 집에서 우두머리가 될 테니까 무엇을 원하든 갖게 되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테지. 나는 자격이 있으니까!’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인품을 고려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 집의 사역을 대할 때, 조금의 진심도, 기꺼운 마음도 품지 않을 것이다. 설령 표면적으로는 기꺼이 원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곧 하나님에게 손을 내밀어 상을 달라고 요구할 것이고, 곳곳에서 교회에 얹혀살며 잇속을 차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행동을 볼 때, 그의 적그리스도 성품 본질을 ‘사악함’으로 정의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 본분과 하나님의 부탁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상 관점은 사악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양심의 기준에는 더더욱 맞지 않는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자기 뜻대로 하고, 자신을 위해 명예와 지위를 도모하며, 진리를 구하거나 스스로를 반성하는 법이 없다. 사역 과정에서 어떤 실수와 문제가 생기든 그는 진리를 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늘 진상을 덮고 자신의 체면과 허영을 지키며 언제나 스스로를 내세워 사람들에게 우러름 받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요컨대, 그의 마음속은 사악함과 사탄 철학,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점철되어 있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진리를 구하는 법이 없고,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순종할 생각도 없다. 항상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자기 뜻에 따라 원하는 대로 한다. 어떤 일을 하든, 그는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이로울지, 어떤 본분을 이행해야 명리와 지위,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고 영예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속으로 계산한다. 그는 이런 것들만 가늠한다. 일단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의 기록부에 자신의 공이 기록되기를 바라며, 이와 동시에 자기 마음속에서도 그런 장부를 만든다. 자신의 공로를 절대 한 건도 빼놓지 않고 확실히 적어 두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는 사역이 많아지고 공로가 커질수록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상과 면류관을 받을 희망이 커진다고 생각한다. 본분을 대하는 적그리스도 부류의 태도와 관점은 이러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거래하고 요구하는 심리가 가득하다. 이는 그의 본성 본질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그의 마음속은 왜 하나님에게 거래하고 요구하는 심리로 점철되어 있겠느냐? 이 부류 사람의 성품 본질이 틀림없이 사악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분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생각과 관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여기에서 그들의 성품 본질이 사악하다는 사실이 완전히 실증된다. 얼마나 많은 진리를 교제하든, 사람의 패괴 성품을 어떻게 폭로하고 해부하든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성품 본질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뿐더러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는다. 복과 상을 받을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이 사람을 속였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폭로하고 해부하는 것은 상을 주기 싫어서라고, 사람이 공짜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게 해서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할 거라고 여긴다. 그는 마음속으로 진리와 하나님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념과 오해를 품고 하나님에게 더더욱 반발한다. 그래서 패괴된 인류의 사탄 성품과 본질을 해부하면 할수록, 사탄의 간계와 속셈, 목적을 폭로하면 할수록 적그리스도 부류는 더더욱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진리를 교제하면 할수록 자기가 복받을 희망이 요원해진다고, 진리를 교제하면 할수록 고생하고 대가를 치름으로써 상과 면류관을 얻어 내는 방법이 통하지 않고 복받을 희망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진리를 교제할수록, 그렇게 폭로할수록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점점 더 흥미를 잃는다. 그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에 사람이 얼마나 고통받고 대가를 치르면 어느 정도의 상을 얻을 수 있는지가 한마디도 나와 있지 않으며, 고생하며 사역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말씀도 전혀 없다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길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느낀다. 이와 동시에 그와 같은 부류는 하나님이 징벌할 대상임을 느끼고 마음이 두렵고 불안해진다. 자신의 날이 끝에 이르렀다고, 마지막 날이 온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희는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는 설교를 한 편 또 한 편 들을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드느냐? 너희가 모두 머리를 푹 숙인 것을 보았는데,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드느냐? 너희가 걸어온 길 역시 적그리스도의 길이었음을 의식한 것이냐? 너희의 머릿속에도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사악한 생각이 가득한 것이냐? 이제 지각했느냐? 얼른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 (얼른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 이렇게 적그리스도 성품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비록 너희가 모두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니고, 하나님과 거래하며 복받으려는 속셈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적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러니 얼른 진리를 구해 해결하고, 낭떠러지 앞에서 멈춰서서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올라야 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니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문제는 사실 해결하기 쉽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문제의 본질을 인식한 후 그 잘못된 추구 방식과 하나님을 믿는 그릇된 관점, 복받으려는 속셈을 버린다면, 오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고, 사람을 숭배하거나 따르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배한다면 너는 내적 상태가 점차 정상이 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오르게 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두려운 것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옳지 않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한사코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너는 적그리스도 본성 본질을 가졌으니 도태될 수밖에 없다. 만약 많은 악을 행한다면 징벌까지 받게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평범한 패괴된 사람과 다른 점은 명리와 지위, 복받기를 추구하며 하나님과 거래하는 모습이 어쩌다 한 번, 가끔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 것들로 살아가며, 그가 걷는 길에는 오직 한 가지 선택만 존재한다. 즉,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적그리스도의 본성과 사탄 철학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평범한 패괴된 인류는 두 번째 선택을 할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을 수 있지만,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내면에 그런 필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본성이 사탄 철학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 적그리스도는 영원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 번 잘못하면 끝까지 잘못하며, 영원히 바로잡지도, 회개하지도 못한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에 대한 거래 심리로 가득하며, 언제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적대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는 ‘그게 뭐 어때서? 하나님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요구하고 지위의 복을 누리는 것쯤은 부끄러운 일 아니야. 사람을 죽이거나 불을 지른 것도 아니잖아.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도 아니고. 독립 왕국을 세우고 내 멋대로 결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못살게 굴지도 않았어. 하나님 집 사역에 어떤 영향이나 손실을 준 것도 아니고.’라고 생각한다. 이는 구제 불능 아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진리를 교제하고 아무리 폭로하고 책망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구제 불능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네가 그에게 사악하다고 해도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 그 사악함을 고집한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는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너는 이 부류의 사람과 진리를 교제하겠느냐?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그와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할 말이 없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사악한 성품 본질로 점철되어 사악한 성품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은 그의 천성으로, 누구도 그를 바꿔 놓지 못한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어째서 변하지 않겠느냐? 얼마나 많은 진리를 교제하든, 얼마나 분명히 이야기하고 확실히 폭로하든 그는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하며,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른다.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많은 일에서 하나님과 거래하고 하나님에게 요구한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들 또한 무척 많다. 형체가 있는 것과 형체가 없는 것,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 등 그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이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욕망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전혀 사양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요구하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그가 어떤 본분을 이행한다고 해 보자.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뛰어난 인물이 되기 위해서, 얼굴을 알릴 기회를 얻고 자기가 원하는 지위를 손에 넣기 위해서, 또 더 많은 사람에게 우러름을 받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특별한 기술을 얻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하나님, 저는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고자 합니다. 당신에게서 이 본분을 받아들인 후 매일 어떻게 해야 이 본분을 잘 이행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분을 위해 제 필생의 정력을 바치고자 합니다. 또한, 당신을 위해 제 청춘과 전부를 바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고난을 겪으려 합니다. 그러니 제가 해야 할 말을 알려 주시고, 제게 총명과 재지를 주십시오. 제가 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업무 수준을 끌어올리게 하시고, 제 기술을 더욱 높여 주십시오.’ 적그리스도는 충심을 드러내고 자신의 관점을 표명한 후 하나님에게 손을 내밀어 요구한다. 이러한 것들은 형태가 없고, 사람은 하나님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상식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거래나 요구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거래의 초점은 무엇이냐? 우리가 해부하는 본질은 무엇이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부탁한 본분에 전혀 진심을 다하지 않고, 그 일을 위해 충심을 다할 계획도 없다. 그가 그 일을 하기 전에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해야 그 기회를 잡아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명성을 날리고 얼굴을 알리느냐 하는 것이지,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그 본분을 이행하는 기간에 자기가 깨달아야 할 진리와 구해야 할 원칙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자마자 먼저 하나님에게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명망과 지위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총명과 재지니, 독특한 견해니,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이니, 영적 눈을 뜨는 것이니 등을 말이다. 그가 이런 것들을 원하는 이유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도, 진심을 바치고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분명히 그 안에는 거래 심리와 요구 사항이 가득하다. 그러고도 사람 스스로는 그것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아 마음 편안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설령 사람이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얼마간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이런 기도, 이런 거래를 하나님이 열납하겠느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절대 그런 본분 이행을 열납하지 않는다. 네 내면에 진심과 충심이 없으며, 진실한 순종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네가 주관적 바람으로 추구한 것은 지위와 명망이고, 너에 대한 사람들의 우러름과 앙망이다. 하지만 그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네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는 어떤 개선도 이뤄지지 않았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일이 닥쳤을 때 마음속으로 수판을 놓기 시작하고, 계획하고 계산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회계사처럼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거래하는데, 원하는 것도 많고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도 많다. 어쨌든 이러한 것은 하나님 눈에 전부 무리한 요구로 보일 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얻어야 할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이 성품 변화를 이루고 구원받고자 추구하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하나님이 네 본분 이행 과정에서 네게 빛 비춤을 주고, 업무 측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네 인지도를 높여 주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네 명망을 높여 주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빛 비춤과 깨우침을 받아들인 후 그것을 본분에 활용해서 본분을 더 잘 이행하고, 원칙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며, 이와 동시에 본분 이행 과정에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온 깨우침과 빛 비춤, 은총을 많이 얻었음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사임을 점차 깨닫게 된다. 또 사람은 체험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행사가 더없이 좋다고, 사람이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으며 전부 하나님의 은총이자 인도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이 느끼고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든 그는 그 공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그러다가 언젠가 자기 공로를 계산해서 하나님에게 손을 내밀어 상을 요구할 때, 하나님에게 정산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깨우침과 빛 비춤을 철회하면 적그리스도는 드러날 것이다. 여태까지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성령 역사이자 하나님의 인도이며,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이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지 않으면 그의 은사와 총명함, 지혜는 사라지고, 좋은 아이디어와 생각도 사라진다. 그러면 그는 한 명의 바보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이런 일이 닥쳐 이 지경에 이르러도 자기가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음을, 자신은 줄곧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무리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해 왔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괜찮다고, 뭐든 할 수 있다고, 사람들 사이에서 우러름 받고 앙망받아야 한다고, 사람들의 존중과 옹호를 얻어야 한다고,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모든 것을 얻지 못하면 자포자기하면서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에게 원한을 가득 품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하면서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또 형제자매들을 가리켜 양심이 없고 배은망덕하다고 욕할 것이며, 심지어는 하나님 집이 토사구팽한다고 원망할 것이다. 이는 어떤 존재겠느냐? 몰염치한 작자이다! 적그리스도는 모두 이런 부류 아니겠느냐? 그들이 자주 하는 말은 이런 것 아니겠느냐? “내가 쓸모 있을 때, 중용될 때는 모두 나를 위주로 돌아가더니 이제 중용되지 않으니까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는군요. 나랑 얘기할 때는 표정도 좋지 않고요.” 이 말은 어떻게 나온 것이냐? 그 근원은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악한 성품 아니겠느냐? 그의 사악한 성품 속에는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한 거래 심리로 가득하다. 그는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요구를 한다. 그 뜻인즉슨, ‘내가 당신들을 위해 일하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고 마음을 졸였으니까 당신들은 공손한 태도로 내 앞에 와서 예의를 갖춰 말해야 해. 내게 지위가 있든 없든 당신들은 모두 내가 훌륭하다고 기리며 영원히 마음속으로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나를 잊는 건 양심이 없는 거야. 당신들이 어떤 맛있는 것을 먹고 어떤 좋은 것을 쓰든 다 나를 생각해야 해. 내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라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늘 이런 요구를 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보는 하나님 말씀 서적은 누가 인쇄한 겁니까? 누가 당신들에게 갖다준 겁니까? 만약 제가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더라면, 옥살이하고 사형당할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더라면 당신들이 책을 볼 수 있었을까요? 만약 제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양육해 주지 않았더라면 당신들이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제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교회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제가 온종일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지 않았더라면 당신들이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만약 제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당신들을 뒤에서 지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당신들이 마음 편히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제가 앞장서서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교회 사역이 지금 이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너희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느냐? 이런 말을 들으면 하나님 집이 그들 없이는 사역의 진전을 이룰 수 없는 것 같고, 그들 없이는 지구가 돌지 않는 것 같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가 이 말을 외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공을 가로채려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억울함과 괴로움을 호소하려는 것이겠느냐? 그는 하나님 집에서 지금 자기를 쓰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자기를 냉대한다고, 하나님 집은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하나님 집은 그를 공경하지 않고 그의 노후를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가 외치는 이 말에는 사람들을 욕하는 의미도 있지 않겠느냐? 그는 사람들이 양심이 없다고 욕하고 있다. 적그리스도가 과연 어떤 봉사를 하겠느냐? 적그리스도의 행동은 전부 교란하고 방해하는 짓이고, 적그리스도의 말은 전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는 인성이 없는 마귀인데, 무슨 근거로 그에게 양심을 논하겠느냐? 그에게 양심을 논하는 것이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를 따르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얻겠느냐? 그와 함께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가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몰염치한 생각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양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양심을 가지라는 요구를 한 적이 없다. 그저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여 구원받으라고, 합격한 피조물이 되면 그만이라고 요구할 뿐이다. 내가 언제 너희에게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나를 생각해 남겨 놓으라고, 좋은 곳에 머물면 나를 생각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더냐? 너희가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 머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언제 질투를 하더냐? 내가 언제 너희에게 양심이 없다고 하더냐?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양심이 없다고 사람들을 욕한다. 이는 후안무치한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그를 교체할 때, 형제자매들이 더는 그를 예전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을 때 그는 이런 말을 내뱉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사람들과 하나님을 욕하고, 무슨 말이든 다 지껄이는 등 마귀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이 드러내는 갖가지 모습이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거래 심리로 가득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갖가지 요구와 바람이 생겨나는 것이다. 발탁되거나 교체될 때, 하나님 집에서 중용되거나 중용되지 않을 때, 적그리스도 부류에게 생겨나는 갖가지 모습은 전부 사악한 본질로 귀결해야 한다. 이는 조금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다.
⑦ 부정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모독한다
이어서 ‘부정’, ‘정죄’, ‘판단’, ‘모독’ 등 몇 가지 단어에 관해 교제하겠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의혹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에 흥미를 느끼지 않으며, 마음에는 혐오감과 증오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가 진리임을 인정한 적이 없으니, 말할 필요도 없이 순종하는 태도가 전혀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늘 하나님을 의심하고 추측하며, 또 언제나 하나님의 행사에 관념과 갖가지 생각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수시로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저울질한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지식의 관점으로, 또 도리적으로 따져 본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은 무슨 의미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무슨 의미로 이 단어를 쓰셨을까? 누구를 대상으로 말씀하신 걸까?’ 그는 이렇게 저렇게 수년을 연구하지만,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과 행한 사역 속에서 하나님이 진리이자 생명이자 길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는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은 다 진리라고 하면 적그리스도는 궁리한다. ‘다 진리라고? 그냥 평범한 말 아닌가? 흔하게 하는 말 아냐? 별로 심오할 것 없어 보이는데.’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행사를 보며 생각한다. ‘하나님이 교회와 하나님의 선민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어. 하나님은 만유를 주재하신다고 하지만, 모르겠는걸. 돋보기나 천체 망원경으로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의 행사를 발견할 수도 없잖아. 그러니 아직은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100%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니, 세상에는 기이한 일, 신비로운 사건들도 있다고 하잖아. 그러니 하나님은 분명 존재할 거야.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생기셨을까? 과연 어떻게 행사하실까? 모르겠어.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하나님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일을 하시고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보는 거겠지.’ 관찰을 통해, 그는 하나님 집에서 수시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며 자주 사람들을 발탁하고 교체한다는 사실을, 또 수시로 갖가지 본분이나 업무 관련 사역에서 사람들과 교제하고 토론하고 교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 그는 생각한다. ‘이런 건 다 사람이 하는 일 아닌가? 초자연적이지 않고 전부 무척 정상적이잖아.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느낄 수 없다면 성령 역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런 건 다 사람이 의식 속에서, 머릿속에서 상상해 낸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성령 역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은 과연 존재할까?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네. 만약 하나님의 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실까? 말하기 어려워.’ 5년을 체험해도 확신을 못 하고, 10년, 심지어 15년을 체험해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들이 불신파임이 드러났다. 이 불신파는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섞여 지내며 대세를 따른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면 그도 전하고,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면 그도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발탁될 기회가 오면 그는 하나님 집에서 ‘관직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위를 위해 억지로 힘을 좀 들이지만, 이와 동시에 나쁜 짓을 저지르고 방해하고 교란한다. 평범한 일원으로서 지위가 없다면, 그는 몸을 사리면서 체면이 서는 일만 좀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루하루 되는대로 지내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부정하며,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집에서 마지못해 본분을 이행한다. 또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한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일해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몇몇 젊은이들은 자신을 바쳐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까지 하는데, 그래서 뭘 얻을 수 있지? 그러니까 먼저 관찰하자. 정말 그 내막을 알아낼 수 있고 복받을 희망이 보인다면, 힘을 들이고 헌신해도 헛수고는 아닐 거야. 만약 정확한 하나님 말씀을 얻지 못하고 내막을 알아낼 수 없다면, 이렇게 하루하루 때우는 것도 손해는 아니야. 어쨌든 힘들지 않고, 그렇게 많은 걸 바친 것도 아니잖아.’ 이는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무슨 일을 하든 진심을 다하지 않고, 오래 지속하지 못하며, 제대로 해내지도 못하고, 진실로 대가를 치르지도 못하니, 이것이 바로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되는대로 살아간다고는 하나, 그의 머릿속은 쉬지 않고 매우 바쁘게 돌아간다. 그는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에 대해 관념과 생각으로 가득하며, 자기 관념에 맞지 않는 많은 일을 마음속에서 지식과 법률, 사회도덕, 전통문화 등으로 따져 본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 보는데, 진리를 알아내거나 진리 실행의 원칙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한 사역에 대해 각종 정죄와 판단, 심지어는 모독까지 한다. 적그리스도는 먼저 무엇을 판단하겠느냐? 그는 “하나님 집의 사역은 전부 사람이 결정하고, 사람이 행해. 뭐가 하나님이 사역하시고 성령이 이끌며 인도하신다는 거야? 나한테는 안 보이는데.”라고 말한다. 이는 불신파의 말 아니겠느냐? 사람이 행한다고 하면 문제가 많아진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누군가를 뽑고 양성하는 게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그는 마음속으로 불복한다. 적그리스도가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그는 어떤 일들을 하겠느냐? 그는 상대를 실각시킬 것이다. 만약 실각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형제자매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죄할 것이다. ‘하나님 집은 불공평해.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대할 때 원칙이 없고. 세상에 천리마는 많지만 백락은 흔치 않아.’라고 말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냐? 자기는 천리마인데, 안타깝게도 하나님 집에 백락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자기 관념에 맞지 않게 처리한 그 일을 정죄한 후 뒤에서 이것저것 퍼트린다.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관념을 퍼트리고, 소극적인 기운을 퍼트리는 것이다. 물론 그가 하는 말들은 다 무척이나 귀에 거슬린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은 문화적 소양이 있고, 외모도 괜찮은 데다가 외모 관리도 할 줄 압니다. 게다가 도시 사람이고요. 우리는 시골 사람이라서 재능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고, 상부와 소통도 하지 못해 발탁되기가 쉽지 않죠. 하나님 집에서 발탁되는 사람은 모두 말재간이 있고 아부할 줄 알고 수완이 좋은 자들입니다. 반면 우리는 말재간이 없죠. 드러나지 않는 재능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집에서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천리마는 많지만 백락은 흔치 않다.”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판단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 집의 사역을 판단하고, 뒤에서 그것을 퍼트리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선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 방식을 지식과 철학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연구하고 추리하여 마지막에 잘못된 결론을 도출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깨닫거나 묵상하는 법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하나의 이론과 좋은 어구로 삼는다. 또 일이 닥쳤을 때,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기초로 삼거나 원칙으로 하여 그 각각의 일을 바라보거나 정의하거나 가늠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시선과 사탄의 철학, 이론으로 판단한다. 이렇게 도출한 결론은 바로 모든 일이 그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이 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적그리스도의 눈에 정죄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에서 늘 권력을 잡고 싶어 하지만, 이렇다 할 자질도 특기도 없어 하나님 집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역만 맡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청소나 물건 전달 등 간단한 사무 일을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부류의 사람은 교회 리더나 설교원 등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류의 사람은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못하며, 자기 눈에 평범해 보이는 사역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야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야심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겠느냐? 하나님 집의 크고 작은 일을 전부 물어보고 알아보고 내막을 알고자 하며, 나아가 개입하려고 한다. 힘쓰는 일을 좀 하라고 하면 그는 늘 이런저런 것을 알아본다. “우리 하나님 집의 서적 인쇄 상황이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영상 감독으로 뽑힌 사람은 어떤가요? 지금 누가 감독을 하고 있죠? 각본은 누가 쓰나요? 누가 우리 지역 리더인가요? 그 리더는 어떻죠?” 그가 왜 이런 일들을 알아보겠느냐? 그가 이런 일들에 대해 묻고 신경 써야겠느냐?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그것들은 전부 사무적인 일로, 진리와는 무관하다. 그럼 이 ‘마음씨 좋은 사람’은 왜 늘 이런 것들을 알아보겠느냐? 걱정하기를 좋아하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힘이 남아도는 것이겠느냐? 전부 아니다. 위로 올라가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야심이 있어서이다. 그럼 그는 그것이 야심이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것임을 의식하겠느냐? 의식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그런 이성이 없다. 그는 인성이 악랄하고 자질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간단한 본분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늘 나쁜 모습을 보이며,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일하기는 싫어하고 편한 것만 좋아한다. 심지어는 여기저기에서 온갖 정보를 알아내다가 결국 그런 모습 때문에 제명된다. 하나님 집에서 그를 제명한 것은 옳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걱정하기를 좋아하고 온갖 정보를 알아내기를 좋아해서 제명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바른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늘 공밥을 먹기에 여기에서 되는대로 살지 말라고 내보낸 것이다. 무슨 일을 시키든 제대로 하지 못하니, 그를 썼다간 득보다 실이 클 것이다. 이는 불신파 아니겠느냐? 이런 자는 제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명될 위기에 처하자 조급해진 그는 그제야 진리 원칙을 구하며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제명하고 출교하는 원칙이 과연 뭔지 찾아야겠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저를 제명하는 거죠?” 그럼 너는 이렇게 대답해라. “당신처럼 그렇게 편한 것만 좋아하고 일하기는 싫어하며, 무슨 일을 하든 교란하고 망쳐 놓는 사람은 제명의 원칙에 100% 부합합니다.” 그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러 놓고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사람을 제명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찾으려 드니, 참 가소롭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 중 일부는 제명당하고, 일부는 일반 교회로 보내진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기에 어울리지 않으며, 본분 이행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 이런 부류의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가 진리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겠느냐? 단언컨대, 적그리스도 부류는 영원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불신파이며, 진리에 부합하는 어떤 긍정적인 사물도 적그리스도에게 판단되고 정죄되기 때문이다. 내막을 알아내기를 좋아하고 야심만만해서 늘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자신의 본분에는 전혀 진심과 충성심을 다하지 않던 적그리스도는 쫓겨날 때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며 말한다. “제 선의와 진실한 충성심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군요. 왜 저를 쫓아내는 겁니까? 억울합니다. 내키지 않아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위해 저처럼 이렇게 마음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 누구도 하나님 집에서 저처럼 이렇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이 크나큰 열정과 선의가 하등 값어치 없는 것이 되다니, 하나님도 불공평하십니다!” 이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의 이 말에 사람다운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실상에 부합하는 게 한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전부 거친 말이고 터무니없는 말이며 불신파의 말이다. 또 전부 불평이고 원망이며 정죄의 말이다. 이것이 바로 드러난 것이다. 만약 그를 쫓아내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 위장하면서 하나님 집의 주인이 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주인 노릇을 하는 자가 있겠느냐? 주인이 이렇게 떼를 쓰며 행패를 부리겠느냐? 이렇게 하나님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에게 청소를 시키면 여기저기 제멋대로 싸돌아다니며 일을 하지 않고, 그에게 주방 일을 시키면 두 사람 몫의 밥도 하기 싫어하면서 힘들어질까 봐 걱정하고, 그것은 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리더가 되어 명령을 내릴 줄만 아느냐? 하나님 집에서 이런 사람을 제명하여 내보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으냐? (합리적입니다.) 이렇게 합리적인데도 그들은 뒤에서 욕하고, 떼쓰고 행패를 부리며, 막돼먹은 여자처럼 행동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입맛에 맞지 않는 일이 닥치거나 자기 욕망과 바람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일이 닥쳤을 때, 그가 조금이라도 순종하겠느냐? 진리를 구하겠느냐? 마음을 가라앉히고 죄를 인정하며 회개하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그의 첫 번째 반응은 일어나 하나님에게 아우성치는 것이다. 그의 입에서는 정죄하고 판단하고 모독하고 욕하는 말만 나온다. 그는 상황을 보고 ‘하나님 집에서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좋아. 먼저 나한테 각박하게 굴었으니, 내가 너그럽지 않게 굴어도 원망하지 마. 우리 끝장을 보자고. 누가 더 독한지 어디 지켜보잔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모습이 진리를 구하는 것이겠느냐? 정상적인 피조물이 지녀야 할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는 어떤 모습이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반드시 진실로, 무조건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와 사탄만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모독하고 욕할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 아우성치고 대항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지금 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또 하나님 집에서 네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할 만한 100가지 이유가 있을지라도, 만약 네게 이성과 인성, 하나님에 대해 일말의 경외심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을 그렇게 대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럼 그렇게 행동하는 그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겠느냐? 일말의 인성이라도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일말의 경외심이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양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여긴 적이 없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대한 적도 없다.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원수지 그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적그리스도이고 사탄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원수이자 사탄, 마귀이다. 적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이 행한 어떤 일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도 ‘아멘’을 외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본질이고, 적그리스도의 타고난 본질이다. 이유 없이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정죄하는 것은 사악함 아니겠느냐? 이는 극도로 사악한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성품은 정도는 달라도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성품의 표출과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선택하는 길을 통해 어떤 부류가 적그리스도이고 어떤 부류가 힘쓰는 자이며 어떤 부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민인지 판단할 수 있겠느냐? (모두 똑같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표출하지만, 어떤 이는 양심의 지각이 있어 패괴 성품을 표출한 후 죄책감을 느끼고 회개하며 진리를 실행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지각이 없어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기가 옳다고 여기며 죽어도 회개하지 않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적그리스도로, 구원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옳으냐? (옳습니다.) 방금 말한 것은 기본적으로 옳지만, 충분히 구체적이지는 않다. 똑같이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니고 있지만,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해 육을 저버리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한 후 후회하는 사람, 죄책감을 느끼고 뉘우칠 수 있는 사람,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고 올바른 길과 진리 실행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 마지막에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 선민이다. 또 한 부류는 자신에게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일이 닥쳐도 성찰하지 않고,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도 이렇다 할 진실한 인식이 없으며, 마음속으로 강렬한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회개니 뉘우침이니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진리나 구원받는 일에 관해서도 흐리멍덩하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기꺼이 힘을 쓰고자 하고, 뭘 시키든 하지만, 일을 참답게 대하지 않고 때로는 방해하고 교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악인은 아니다. 그는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만, 일을 처리할 때면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법이 없고, 진리 원칙대로 처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이나 진리에도 흥미가 없다. 본분을 이행하고 힘쓰는 일은 그래도 넘어갈 수 있지만, 진리 추구에 대해 말하면 바로 힘을 잃고,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본분 이행에 충성을 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원하는 편이고 얼마간 진심을 보인다. 또한, 각종 패괴 성품에 대해 인식할 수 있지만, 일이 닥쳤을 때 반성하는 법이 없으며,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은 힘쓰는 자이다. 마지막 한 가지 부류는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며, 마음속이 사악함으로 가득하고, 늘 하나님에게 아우성치고 대항한다. 또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 진리에 대한 정죄, 판단, 모독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밖에도 스스로를 인식하는 법이 없고, 아무리 많은 잘못과 과오를 저질러도 인정하거나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않고, 마음속에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으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는지 여부로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확하다. 너희는 어떤 부류에 속하느냐?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 선민이냐, 아니면 적그리스도냐, 그것도 아니면 힘쓰는 자 부류냐? 지금 첫 번째 부류를 향해 가는 과도기를 겪고 있느냐, 아니면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느냐?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이 세 가지 부류 중 하나에 속한다. 인성이 없는 악인은 적그리스도 본질을 지닌 사람이고, 얼마간 인성이 있고 양심과 이성이 있으며, 인품이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 부류로, 하나님의 선민이다. 한편, 인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쁜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 진리에 아무 흥미도 없고 진리 추구를 전혀 원하지 않지만, 본분을 이행할 때 얼마간 진심을 보이는 부류는 힘쓰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판단 기준이다. 적그리스도가 힘쓰는 자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힘쓰는 자 부류에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느냐? (있습니다.) 여기에서 변화의 여지는 어디에 있느냐?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은 후 경험과 체험, 깨달은 진리가 많아지면 조금씩 힘쓰는 자 단계에서 하나님의 선민 단계로 옮겨갈지도 모른다. 지금은 깨닫는 진리가 적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매우 작기 때문에 본분 이행과 진리 실행에 대한 흥미가 크지 않다. 또 진리를 추구하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등 육적인 각종 필요를 내려놓을 만한 분량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힘쓰는 자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부류는 상대적으로 양심이 있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한다. 점차 진리를 깨달음에 따라, 환경이 바뀌고 하나님을 믿는 햇수가 늘어나고 체험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생겨난 후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서도 조금씩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자신이 추구해야 할 길 역시 점점 더 명확해질 것이다. 또 진리에 흥미가 생기고, 갈수록 진리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차츰 구원받는 길에 오를 수 있고,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진보하고 변화할 여지가 있다. 반면, 적그리스도 본질을 지닌 사람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마귀이자 하나님의 원수이며, 그는 영원히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금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에 대해 적그리스도가 표출하는 사악한 성품과 본질 속 부정, 정죄, 판단, 모독에 관해 교제하였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관념에 맞지 않고 자기 이익에 해가 되는 일이 닥치면 즉시 일어나 반항하며, 이와 동시에 정죄한다. ‘그것은 옳지 않아. 그것은 사람이 한 일이니, 나는 인정하지 않을 거야. 고발해야겠어. 증거를 찾아 그 일을 명백히 밝힐 거라고. 나는 해명하고 변호할 거고, 그 일의 전말을 정리할 거야. 대체 누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고 내 명성에 먹칠을 하였는지, 내 일을 망쳐 놓았는지 보겠어.’ ‘닥친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는 말은 적그리스도 부류의 마음속에서 빈말이 되며, 그의 일 처리 방식과 방법, 원칙을 지도하거나 바꿔 놓지 못한다. 반대로 그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에서 천연적인 것에 의존하고, 온갖 방법을 생각해 내며, 자신의 모든 능력과 수법을 이용해 행동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행하는 일들은 하나님에 대한 정죄이고 판단이고 모독이다. 사람의 사상을 채우고 있는 것은 사탄의 논리와 사상으로,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적그리스도가 보여 주는 모습이 사탄과 같은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사탄이 하나님을 대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또 사탄이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과 어투로 하나님을 대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악한 본질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하나님을 믿은 지 하루 이틀밖에 안 된 사람이라고 해서 정상 인성의 사유와 이성을 통해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느냐? (알 것입니다.) 그럼 정상 인성을 지닌 성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모르겠느냐? (알 것입니다.) 사람들이 숭배하는 자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고 좋은지, 사람의 이성 안에 기준이 없겠느냐?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굽실거리고 비위를 맞추며 아부할 줄 안다. 설령 상대가 너를 때리고 욕할지라도 온갖 방법을 생각해 그에게 맞추고 순종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존중이고 사랑인지, 어떻게 대하는 것이 상처이고 증오인지 사람이 모르겠느냐? 판단 기준이 없겠느냐? (있을 것입니다.) 이는 사람, 그러니까 인두겁을 뒤집어쓴 이 생명체가 동물과는 차이가 있고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존중이고 사랑인지 아는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왜 모르느냐? 하나님을 어떻게 그렇게 대할 수 있단 말이냐? 입만 열었다 하면 정죄하고 판단하고 감히 모독하고 욕하는데, 이것이 정상인이 할 일이겠느냐? (아닙니다.) 동물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사람이 동물을 키울 때, 설사 그것이 야생동물일지라도 한동안 함께 살면서 주인이 누구인지 인식시켜 주면, 그 녀석은 주인을 영원히 공경하며, 가족이나 일족의 구성원처럼 대한다. 다른 동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다르다. 네가 한때 그 녀석의 주인이었다면, 그 녀석이 두세 집을 전전했다고 할지라도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네 냄새만 맡아도 즉시 정이 들 것이다. 또한, 그 녀석이 사나운 동물이라고 할지라도 너를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동물의 사나움은 천성이다. 그 천성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생존 본능이지, 흉악한 성품도, 사악한 성품도 아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악함과 차이가 있다. 새끼 사자를 데려다 기른 두 사람이 있었다. 얼마 후 사자가 점점 커지자 그들은 계속 먹이를 주기가 힘들어졌고, 녀석이 1살이 됐을 때 다시 자연으로 방생했다. 그리고 3년 후, 그들은 다시 그 사자를 만났다. 사자는 멀리서 그들 둘을 보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처음에는 그들도 걱정했다. ‘우리를 잡아먹지 말았으면. 저건 사자잖아.’ 하지만 사자는 그들을 형제처럼 끌어안았고, 그들은 사자를 끌어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사자는 그들에게 자기 가족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또 헤어질 때가 되자 매우 아쉬워했다. 보아라, 사자는 야생동물 중 가장 사나운 동물이다. 육식동물이 사람과 함께하는데 이런 장면을 보여 준다. 무척 감동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나운 동물에게서도 정과 의리를 찾아볼 수 있지만, 적그리스도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적그리스도는 사탄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사탄의 성품 본질을 가진 부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거나 모독할 수 있다. 그런 태도가 있으면 그런 모습이 생기고, 나아가 그런 행동 방식이 생긴다. 이는 동물보다 못한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자기가 숭배하는 사람, 자신의 육친이나 부모를 대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존중이고 사랑과 보호인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가져다주게 되는지 알고 있다. 이런 것을 전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을 대할 때 이런 행동을 보여 치가 떨리게 한다. 그러니 이 부류의 사람은 천성적으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지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 말해서, 이 부류의 사람은 사탄의 화신이고 살아 있는 사탄이며, 마귀에 속하지, 하나님의 양이 아니다. 하나님의 양이 하나님을 욕하겠느냐? 하나님의 양이 하나님을 정죄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핵심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본질을 진실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고 무엇을 하든, 심지어 그것이 네게 상처가 된다고 할지라도 너는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피조물의 위치에 놓고 언제까지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경멸, 대항, 아우성에 관해서는 예전에 교제한 바 있다. 어떤 자는 공개적으로 대항하고, 따로 자기 근거지를 만들며, 패거리를 짓고, 독립 왕국을 세운다. 또 어떤 자는 뒤에서 몰래 욕하고, 어떤 자는 마음속으로 욕하며 대항하고 아우성친다. 공개적으로 욕하든, 몰래 욕하든 전부 적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 사탄에게 속하는 부류이다. 그들은 분명 정상인이 아니며,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나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닥칠 때 마음속으로만 괴로워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또 받아들이지 못하며 원망하고, 강퍅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소극적으로 변해 태만하게 굴기도 하지만, 대항하거나 아우성치는 수준까지 가지는 못한다. 또 한동안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고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 징계를 받으면 조금씩 뉘우치게 된다. 이는 평범한, 패괴된 인류가 일이 닥쳤을 때 보이는 모습이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뉘우치지도 않는다. 어떤 일이 그의 뜻에 맞지 않으면 그 일로 욕하고, 다음 일이 그의 뜻에 맞지 않으면 또 욕한다. 욕하는 동시에 대항하고 아우성친다. 심지어 어떤 적그리스도는 “저 같은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큰소리치는 것 아니겠느냐? 대항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항하는 것이다. 전혀 순종하지 않고, 감히 하나님에게 아우성치고 대항하는 이런 존재가 바로 사탄이다. 사악한 성품의 갖가지 모습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2) 진리를 싫어한다
이어서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 제2조, ‘진리를 싫어한다’에 관해 교제하겠다. 진리를 싫어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예전에 세부 내용을 적잖이 교제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주로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을 해부함으로써 적그리스도 부류를 규정하도록 하겠다. 진리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주된 성품 특징은 단순히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싫어한다는 것이다.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진리를 대하는 태도 중 정도가 비교적 낮은 것일 뿐, 적대시하고 정죄하고 대항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저 흥미를 느끼지 않고 신경을 안 쓰려 하며, “긍정적인 사물이니, 진리니 하는 게 다 뭐야? 그런 걸 얻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런 걸 얻으면 잘살고 능력을 키울 수 있나?”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지, 싫어한다고는 할 수 없다. 싫어한다는 것은 일종의 태도 표명이다. 어떤 태도겠느냐?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듣는 순간 마음속으로 증오하고 반감을 느끼고 거부하며 듣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증거를 찾아 진리를 정죄하고 폄하하려고도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한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한 사역을 체험할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역시 지면상으로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말씀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그 말씀들은 다 사람이 옳은 길에 오르고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론에만 머무른다. 이론에 머무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예컨대, 어떤 사람은 책에 나온 이론을 보고 좋다고 생각하지만, 실생활과 대조하고는 이 사악한 흐름, 인류의 패괴, 그리고 전 인류의 각종 필요를 보며 그 말들이 비현실적이고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다고, 사람이 이 사악한 흐름과 사악한 사회에 적응하거나 순응하게 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 말들이 좋기는 하지만 그저 입으로 말하는 데 그친다고,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인류의 바람이나 환상을 만족시켜 주는 데 그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만약 사람이 지위를 좋아하여 고위 공무원이 되고 싶고, 사람들 사이에서 떠받들어지고 숭배받고 싶다면,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뽐내고 다른 사람을 짓밟는 등 비정상적인 수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진리는 딱 그러한 사물을 정죄하며, 사람의 그런 욕망과 야심을 정죄하고 부정한다. 실생활 속에서 사람은 두각을 드러내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요구는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모두 정죄된다. 그래서 사람의 그런 요구는 하나님 집에서 통하지 않고, 발휘될 여지가 없으며, 실현될 공간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가 포기하겠느냐?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해했어. 이제 보니 진리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잊고 버리게 하고, 관용과 아량을 갖게 하는 거였어. 자기 자신은 없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진리야.’라고 정의한다. 진리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 후 그가 진리에 흥미를 보이겠느냐, 아니면 반감을 보이겠느냐? 그는 진리에도, 하나님에게도 반감을 보인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늘 진리를 얘기하시고, 사람의 욕망과 야심 등 정결치 않은 것들을 드러내셔. 또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시고. 아무래도 하나님이 진리를 교제하시는 목적은 지위와 욕망, 야심에 대한 사람의 추구를 박탈하는 데 있는 것 같아. 처음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시고, 사람의 바람과 꿈을 이뤄 주실 수 있다고, 사람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이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실 줄은 몰랐어. 아무래도 별로인 것 같아. 내 안에 야심과 욕망이 가득한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실까? 여태까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하나님 말씀의 행간을 보면,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과 맞지 않으셔. 나는 이런 실제 하나님과 맞지 않는 것 같고. 그분이 하신 말씀과 사역, 그분의 일 처리 원칙, 그리고 그분의 성품이 나는 왜 마음에 거슬리는 걸까? 정직한 사람이 되고 양심을 갖추는 것, 일이 닥쳤을 때 구하고 순종하며 하나님께 경외심을 갖는 것,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 등 이런 것을 나는 못 해!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지상정도 아니야. 그러니 어떻게 믿겠어?’ 이렇게 생각한 그가 하나님에게 호감을 갖겠느냐, 아니면 거리감을 느끼겠느냐? (거리감을 느낄 것입니다.) 한동안 체험한 적그리스도는 점점 더 자기처럼 야심과 욕망이 있고 포부가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쓰일 곳이 없다고, 포부를 펼칠 수 없다고 여긴다. ‘하나님 집에서는 어떻게 해도 두각을 드러낼 수가 없어. 빛 볼 날이 없다고. 그러면서 나더러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느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느니,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다느니 그러잖아. 발탁해서 중용하기는커녕 정죄한다고. 내가 독립 왕국을 세우면 그게 뭐? 사람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면 그게 또 뭐? 나한테는 권력이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력이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어? 선거 때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속임수를 쓰면 그게 뭐? 이방인들은 다 그러지 않나? 하나님 집에서는 왜 안 되는 거야? 그건 몰염치한 행동이라느니 그러는데, 그게 왜 몰염치한 행동이야?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도 있잖아. 그건 정당한 거라고! 하나님 집은 재미없어.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너무 흉악해서 함께 지내기가 힘들단 말이지. 하나님 집 사람들은 그래도 솔직하잖아. 여기에 섞여 있는데 하나님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이 없고 사람을 다스리는 진리가 없다면, 내가 하나님 집에서 대장이고 주인이고 왕일 텐데.’ 그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부단히 갖가지 일을 겪고, 책망과 훈계를 받으며, 여러 본분에서 교체되다가 마지막에 한 가지를 깨닫는다. ‘하나님 집에서는 어떤 일이 닥치든 진리로 판단하고 해결해. 모두 진리를 강조한다고. 하나님도 한결같이 진리를 얘기하시잖아. 나는 여기에서 포부를 펼칠 수 없어!’ 여기까지 체험한 그는 진리, 진리가 권세를 잡는 것,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진리라는 것, 진리를 구하는 것 등을 점점 더 싫어하게 된다. 어느 정도로 싫어하겠느냐? 제일 처음, 자기가 인정한 진리의 도리적인 측면조차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극도의 반감을 보인다. 그래서 그는 예배만 했다 하면 졸고 걱정한다.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서너 시간이야. 언제쯤 끝이 날까? 듣기 싫다!’ 그의 마음을 형용하는 말이 있으니, 바로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진리가 권세를 잡는 한 자기가 빛 볼 날은 영원히 없을 거라고, 언제까지고 제한받고 정죄되며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대상이 될 거라고, 아무리 큰 능력이 있어도 중용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진리와 하나님을 점점 더 혐오하게 된다. 그가 왜 처음에는 혐오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는 처음에도 혐오했다. 다만 그때는 하나님 집의 모든 것이 낯설고 개념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혐오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그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그때도 본성 본질 속에서 진리를 싫어했다. 이 사람들의 본성 본질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천성적으로 불의와 사악한 것, 권세, 사악한 흐름, 권력을 잡는 것, 남을 통제하는 것 등 모든 부정적인 사물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볼 때, 적그리스도 부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존재이다. 이 밖에, 그의 추구를 볼 때, 그는 지위를 추구하고, 두각을 드러내기를 추구하고, 자기한테 후광이 나기를 추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자가 되며 위엄과 권세를 갖는 것, 어디에서 말하고 일하든 위신과 힘을 갖고 남들을 통제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데, 이 또한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이다. 또한, 진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볼 때,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진리를 들어도 소용이 없다. 혹자는 “그건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 걸까요?”라고 묻는데 그렇지 않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기억력이 좋고 말재간이 뛰어나서 배운 것을 바로 써먹는데,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 부류가 자질이 좋고 성령 역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것은 전부 도리이고 빈말로, 진리 실제가 전혀 없으며 사람을 미혹하는 말임을 깨닫는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부류로, 높은 도를 말하기 좋아하고, 영적인 이론을 의미 없이 떠들며, 말이 청산유수 같다. 말만 했다 하면 종잡을 수가 없어 많은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그는 “이것은 셋째 하늘의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싫어하는 가장 주된 모습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물론 그들의 일상생활이나 일 처리, 특히 본분 이행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모습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진리를 구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구하지 않는다. 이 밖에, 진리를 실행하는 법이 없다.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실행할 수 있겠느냐? 구해야 깨달을 수 있고, 깨달아야 실행할 수 있다. 그는 구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며, 심지어는 경멸하고 싫어하고 적대시하기에 결코 진리 실행과 연결되지 않는다. 설령 가끔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실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닥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말하면 그는 “뭐가 좋죠? 그렇게 하면 제 생각은 수포가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한다. 상대가 “당신 생각대로 따르면 하나님 집에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우리는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해요.”라고 말하면 그는 “무슨 원칙이요? 제가 이렇게 하는 게 원칙입니다. 제 생각이 바로 원칙이라고요!”라고 말한다. 이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의 가장 주된 모습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큐티 생활을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역으로 정신이 없어 하나님 말씀을 읽을 틈이 나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묵상하거나 찬양을 부른다. 또 며칠간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으면 마음속이 공허해진 것 같아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한 단락 읽음으로써 마음을 충실하게 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는데, 그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많이 멀어진 게 아니다. 반면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 말씀을 하루 안 읽어도 괴로워하지 않고, 열흘 안 읽어도 아무 지각이 없으며, 1년 안 읽어도 마찬가지로 잘 살아간다. 심지어 3년 동안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아도 지각이 없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거나 공허함을 느끼지 않은 채 언제나처럼 편하게 잘 살아간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의 혐오가 얼마나 심각하냐!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하루 읽지 않았다면 바쁘기 때문이고, 열흘 읽지 않았다면 이 역시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한 달 동안 읽지 않았는데 마음속에 아무 느낌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1년 동안 읽지 않았다면 이는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 부류의 또 다른 모습은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예전에 교제한 바 있다. 그럼 그는 그리스도가 뭘 했다고 멸시하겠느냐? 그를 괴롭히고 해쳤느냐, 아니면 그의 뜻에 맞지 않는 무슨 일을 했느냐? 그의 어떤 이익에 손해를 끼쳤느냐?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와 사적인 원한이 없으며, 심지어 아예 일면식도 없다. 그럼 그가 왜 멸시하겠느냐? 근본 원인은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에 있다.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 중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를 멸시하는 것이다.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가 포괄하는 범위는 무척 넓다. 하나님이 지은 만물과 만물의 법칙, 각종 생명체와 그들의 생활 법칙 같은 것이 있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라는 생명체의 각종 생활 법칙이 있다. 일례로, 사람의 삶과 가장 가까운 생로병사를 들 수 있다. 정상인은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가 불편해지고 몸이 약해진다. 눈이 침침해지고 귀도 잘 안 들리며 치아도 헐거워져서 노화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주재하며, 그 누구도 이 자연법칙을 어길 수 없다. 정상인은 누구나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람이 몇 살까지 살든, 몸 상태가 어떻든, 사람의 본분 이행 방식이나 태도, 사람이 서야 할 자리 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그리스도 부류는 불복하며 말한다. “제가 누구입니까? 저는 늙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언제까지고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겁니다. 제가 늙어 보이나요? 당신들이 이 나이가 되면 하지 못할 일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50살만 돼도 다리를 잘 못 쓰겠지만, 제 다리는 여전히 팔팔하다고요. 저는 담을 뛰어넘고 벽을 타는 훈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이 정해 놓은 정상적인 법칙에 도전하려 하고, 그 법칙들을 깨서 자신은 남들과 다르고 비범한 초인적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한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도전하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밖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적그리스도는 사악한 흐름과 흑암 권세를 숭배한다. 이는 그가 진리를 적대한다는 사실을 더더욱 실증한다. 적그리스도는 사탄 정권과 전설 속 각종 악령의 능력, 재주, 소행, 그리고 사악한 흐름과 흑암 권세를 엎드려 절할 정도로 숭배하고 탄복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굳게 믿으며, 한 번도 의혹을 품은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싫어하기는커녕 앙모와 숭배, 부러움으로 가득하며, 심지어 내면 깊이 그런 것들을 바짝 뒤따르고 있다. 이 사악하고 어두운 것들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마음속 깊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 그는 진리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 사악하고 어두운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 중 진리를 좋아하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이런 자는 사악한 세력과 사탄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탄의 것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굳게 믿는다. 반면,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마음속에 반감과 멸시가 가득하다. 진리를 싫어하는 항목은 대략 이 정도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3) 흉악하다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에는 ‘흉악함’도 있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한마디로 악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부류의 사람이 지위를 가지면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럼 지위가 없을 때는 그들이 적그리스도인지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인성이 어떤지를 보면 된다. 인성이 악독하고 음험하고 악랄하다면 100% 적그리스도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 번도 지위를 가져 본 적이 없고, 리더를 해 본 적도 없는데, 인성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인다면, 그가 적그리스도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느냐? 악랄한 인성을 지녔는지, 악인인지를 보면 된다. 만약 그가 악인이라면 지위를 가질 필요도 없이 100% 적그리스도일 것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 부류의 다른 한 가지 전형적인 성품 본질은 바로 흉악함이다. 적그리스도의 흉악한 성품이 사자나 호랑이 등 먹이 사냥을 하는 맹수의 흉악함과 같겠느냐? (같지 않습니다.) 육식동물이 먹이 사냥을 하는 것은 배가 고파서이다. 그것은 육체의 수요이자 본능이다. 하지만 그 동물들은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하지 않는다. 그럼 적그리스도의 흉악함은 이 동물들과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네가 건드리지 않으면 사납게 굴지 않고, 꼭 건드려야만 사납게 굴더냐? 또는 네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통제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들으면 통제하더냐? 네가 그의 말을 들으면 너를 괴롭히지 않고,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괴롭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적그리스도의 흉악함은 일종의 성품이자 본질이다. 그것은 영락없는 사탄의 본질로, 본능도, 육체의 수요도 아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 성품의 한 가지 모습이자 특징이다. 그럼 적그리스도의 흉악한 성품은 어떤 모습과 표출, 행동으로 드러나겠느냐? 그가 하는 어떤 일이 그의 흉악한 성품과 악인의 본질을 대표하겠느냐? 말해 보아라. (사람을 혼내고 괴롭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함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패거리를 짓고 이간질하는 것이 있습니다.) 패거리를 짓고 이간질하는 것은 좀 음험하다. 그것은 사악한 성품에 속하는 모습으로, 아직 흉악한 수준은 아니다. 관념을 퍼뜨리고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은 흉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역지침에 대항하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교란하며 하나님의 제물을 강점하고 하나님에게 직접 대항하는 것은 흉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제물을 강점하는 것은 탐욕일 뿐 아니라 흉악한 성품의 모습이기도 하다. 제물을 강점할 수 있는 자는 성품이 너무도 흉악해서 비적과 같다. 방금 종합한 그 몇 가지를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사람을 혼내고 괴롭히는 것,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함하는 것,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 관념을 퍼뜨리는 것,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 사역지침에 대항하는 것,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 제물을 강점하는 것입니다.) 총 아홉 가지다. 적그리스도의 흉악한 성품의 모습에는 기본적으로 이런 것들이 있다. 사실 구체적인 모습들은 더 있지만, 앞서 말한 것들과 유사하니 더 이상 구체적으로 열거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이런 행동과 수법을 보이는 부류가 바로 악인이다. 그의 행동이 음험한 것이 한 측면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함하는 것, 관념을 퍼뜨리는 것 등은 비교적 음험한 행동이다. 이 밖에, 그는 수법이 악랄하고 흉악한 편이다. 이는 성품이 흉악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이 세 가지 측면의 성품 본질로 볼 때, 적그리스도 부류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가 기꺼이 하나님 집에서 힘을 쓰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거나 좋아하지 않으며, 마음속에 하나님과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하다. 하나님 집에서 힘쓰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그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도 하지 못한다. 또 적그리스도는 그것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정상적인 본분 이행의 질서와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방해하고 망치려 들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 집 사역과 사람들의 정상적인 생명 진입,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상적인 사역을 교란하려 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 하나님 집에서 왕권을 잡고자 하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회유하고 통제하려 하며,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독립 왕국을 세우고 자기 파벌을 만들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철저히 그의 추종자로 바꿔 놓음으로써 권력을 잡고 하나님의 선민들을 통제하여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야심과 욕망을 충족하려는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 부류가 하나님 집에서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겠느냐? 조금이라도 좋은 역할을 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인성에서 추구까지, 그들의 야심과 욕망에서 그들이 걷는 길, 그리고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까지 보면 이 부류는 하나님 집에서 그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망치는 역할만 할 뿐, 조금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법이 없고, 그들의 본성 본질은 진리를 싫어하며,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오늘까지, 적그리스도의 갖가지 모습에 대해 완전히 교제를 마쳤다. 너희는 오늘 교제한 내용을 통해 적그리스도 부류를 분별할 수 있겠느냐? 가장 간단한 한마디 말로 종합하자면, 악인이 바로 적그리스도이고, 적그리스도가 바로 악인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너희는 훨씬 더 명확해졌느냐? 이해하기가 쉬워졌느냐? 최근 몇 년간 계속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해부했고, 너희도 숱한 연단을 겪으며 자신이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걱정하다가 오늘 마침내 결과가 나왔다. 그 과정은 무척 힘들었지만, 마지막 결과는 좋은 것이었다. 즉, 너희가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녔지만 적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이해한 것이냐? 내가 교제한 어떤 말이 너희를 일깨워 주었느냐?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의 인품과 성품 본질의 차이를 교제해 주신 덕에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악을 행해도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성품 본질을 지닌 사람은 죽어도 회개하지 않고, 아무리 많은 악을 행해도 전혀 지각이 없습니다.) 사람이 얼마간 적그리스도 성품을 표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바람으로 생긴 일이 아니다. 발견한 후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고통받고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면 조금씩 뉘우칠 수 있다. 이 점을 인식하면 마음이 한결 놓일 것이며, 자신은 아직 만회할 여지가 있고, 적그리스도는 아니고, 적그리스도 성품과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악인만 아니라면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에게 적그리스도 성품이 없다는 의미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은 누구나 적그리스도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 마음속으로 거부감이 드느냐?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성품 본질의 모습에 대해 너희가 종합해 보아라.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며, 영원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본질을 짚었구나. 적그리스도는 영원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진리를 싫어하고 적대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지만, 적대시하지는 않는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옳고 좋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앙모하고 추구하려고 한다. 다만 자질이 떨어져서 길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적대시하지도 않는다. 이는 미지근한 부류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는 진리를 싫어하고 적대시한다.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만 하면 증오심을 느끼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면 태도를 바꿔 마음속으로 반감을 느끼며,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든 죽어도 회개하지 않으며, 영원히 진리를 실행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죽어도 회개하지 않으며,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진리이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도 않는데 무슨 진리 실행을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그는 절대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는 인성이 없으며, 사람이 아니라 마귀 사탄이자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