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알아 가기[5]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6)

너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기 위해 무엇을 중점적으로 알아야 하는지 아느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아 갈 때는 체험 측면의 내용이 아주 많지만, 먼저 몇 가지 중점을 알려 주겠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증오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들에게 관용과 긍휼을 베푸는지,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든, 얼마나 많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든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하나님의 존엄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총애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 관용을 베풀지만 한 번도 지나치게 사랑한 적은 없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원칙과 범위가 있다. 네가 느낀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크고 깊어도 절대 하나님을 사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긴다면, 피조물과 동등한 한 사람이나 친구, 혹은 숭상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얼굴을 감추고 너를 버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니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해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자주 볼 수 있다. “네가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다면 하나님은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을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친척이나 친구로 여기거나 단짝 대하듯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네가 느낀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이 얼마나 크든 너는 영원히 하나님을 너의 친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알겠느냐? 이에 대해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너희는 예전에 이것을 깨달은 적이 있느냐? 도리적으로 알았다고 해도 좋고,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좋다. 어쨌든 이는 사람이 가장 쉽게 범하는 잘못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르게 되는 이유는 말 한 마디,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어떤 태도나 내적 상태 때문일 수 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조금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또한 자신이 한 일로 하나님을 어느 정도 만족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과 동등해져야 하고 하나님께 허물없이 굴어도 된다고 여긴다. 이는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여기에 대한 분명하고 깊은 인식이 없다면 너는 아주 쉽게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거스르게 될 것이다. 잘 알겠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유일무이한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성격이나 인품과 동일시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명심해라.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든, 사람을 어떤 존재로 여기든, 하나님의 지위와 권병, 신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신분은 영원히 만유를 주재하는 그분, 바로 창조주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7>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7)

이야기 1. 씨앗, 대지, 나무, 햇빛, 새, 그리고 사람

한 톨의 씨앗이 땅에 떨어졌다. 큰비가 지나간 후 씨앗은 새싹을 틔웠고, 천천히 땅에 뿌리를 내렸다. 새싹은 비바람을 견디고 맑고 흐린 날씨를 견디며 점점 자라났다. 여름에는 대지가 수분을 공급해 주며 뜨거운 날씨를 견디게 해 주었다. 대지 덕에 새싹은 뜨거움을 느끼지 않고 무더위를 넘겼다. 겨울이 되자 대지는 따뜻한 품으로 새싹을 꼭 껴안으며 따뜻한 기운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새싹은 혹한을 견디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을 넘겼다. 새싹은 대지의 보호로 즐거워졌고, 용감해졌다. 또한 대지의 아낌없는 공급으로 튼튼해졌다. 새싹은 빗속에서 기뻐 노래하고 바람 속에서 한들거리고 춤을 추었으며, 즐겁게 성장했다. 새싹과 대지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몇 년 후 새싹은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잎은 무성하고 기둥은 굵고 단단했다. 나무는 여전히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뿌리는 땅속 깊이 자리를 잡았다. 다만 원래 새싹을 보호하던 땅이 이제는 나무의 기반이 되었다.

한 줄기 햇빛이 나무를 비췄다. 나무는 몸을 흔들고 팔을 뻗으며 햇빛의 기운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나무 발아래에 있던 땅은 나무의 리듬에 따라 호흡했고, 대지는 상쾌함을 느꼈다. 순식간에 나무에서 신선한 기류가 퍼져 나오면서 나무는 기운 넘치고 생기 있게 변했다. 나무와 햇빛은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는 사람들이 이따금 맑은 향기를 느꼈다. 이 향기는 사람의 심장과 폐를 깨끗하게 하고 피를 깨끗하게 했다. 사람의 몸은 이제 축 처지거나 답답해지지 않았다. 사람과 나무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새들이 지지배배 노래하며 날아와 나무에 앉았다. 어쩌면 천적을 피하기 위해서, 어쩌면 다음 세대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 어쩌면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새와 나무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나무는 땅속 깊이 얼기설기 뒤얽히며 뿌리를 내렸다. 나무는 자신의 몸으로 대지를 위해 바람과 비를 막았고, 팔을 펼쳐 발아래의 대지를 보호했다. 대지는 나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대지는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고 영원히 함께했다….

……

방금 언급한 모든 사물은 너희가 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씨앗은 알고 있을 것이다. 씨앗이 나무로 변하는 과정은 자세히 못 봤겠지만 너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 대지, 햇빛도 알고 있다. 그럼 새가 나무에 앉아 있는 장면은 다들 본 적이 있지 않으냐? 나무 아래서 바람을 쐬는 사람은 본 적이 있느냐? (네.) 그럼 이 몇 가지 사물을 한 장면에 두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조화롭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장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됐으니 하나님은 이 사물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의의와 가치를 알고 있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각각의 사물을 예비하고 만들 때 다 그만의 의도가 있었으며, 하나님이 각각의 사물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모두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이런 생존 환경, 다시 말해 방금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대지와 씨앗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대지는 씨앗을 키워 주고, 씨앗도 대지를 떠날 수 없는 둘 사이의 이런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정해 놓은 것이다. 나무, 햇빛, 새와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도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생존 환경이다. 우선, 나무는 대지를 떠날 수 없고, 햇빛도 떠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무를 창조한 목적은 무엇이냐? 단순히 대지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단순히 새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단순히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아니요.) 그럼 그들의 관계는 어떠하냐?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관계이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다시 말해, 대지, 나무, 햇빛, 새와 사람 사이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공급하는 관계다. 나무는 대지를 보호하고, 대지 또한 나무를 키워 준다. 햇빛은 나무를 비추고, 나무 또한 햇빛에서 신선한 기운을 얻어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햇빛의 열기를 약화시킨다. 최종의 수혜자는 누구냐? 최종의 수혜자는 인류다. 그렇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류의 생존 환경을 만든 원칙이자 초심이다.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정성이 담겨 있다. 사람은 대지를 떠날 수 없고, 나무도 떠날 수 없고, 햇빛과 새도 떠날 수 없다. 그렇지? 이 장면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생존 환경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생존 환경을 만들었다. 먼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말한 핵심은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원칙하에서 인류의 생존 환경이 보존되고 지속되며, 이런 생존 환경이 있기에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은 나무, 대지, 햇빛, 새, 그리고 사람이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하나님이 있느냐? 보지 못했다. 그렇지? 하지만 이 장면 속에서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법칙을 보았고, 이 법칙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과 법칙으로 만물의 생존과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방식으로 만물과 인류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럼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말하려는 주제와 관계가 있느냐? 겉보기에는 무관한 것 같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만물의 법칙을 창조한 것, 더 나아가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불가분의 중대한 관계가 있다. 이제는 조금 느낄 수 있겠지?

하나님은 만유의 운행 법칙과 만물의 생존 법칙을 주관하며, 만유와 만물을 주관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더불어 살며 멸망이나 소멸에 이르지 않게 한다. 그래야 인류는 지속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이런 생존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운행 법칙은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으며, 그 누구도 개입하거나 바꿀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운행 법칙을 알고 있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 법칙을 관리하고 있다. 나무는 언제 싹을 틔울지, 비는 언제 올지, 대지는 식물에 수분과 영양을 얼마나 공급할지, 낙엽은 어느 계절에 질지, 나무는 어느 계절에 열매를 맺을지, 햇빛이 나무에 양분을 얼마나 줄지, 나무가 햇빛에서 양분을 얻은 후 내쉬는 것은 무엇일지,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정한 것이다. 이 법칙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 즉 생명을 지닌 것이든 사람이 봤을 때 생명이 없어 보이는 것이든 모두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고 주재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이 법칙을 바꿀 수도 깨뜨릴 수도 없다. 즉,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이런 법칙을 다 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나무는 대지를 떠나 뿌리를 내릴 수도, 싹을 틔울 수도, 자랄 수도 없다. 대지에 나무가 없다면 대지는 말라 버릴 것이다. 나무는 새의 집이 되고 새가 바람을 피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무에게 햇빛이 없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나무에게 대지만 있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와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인류는 나무로부터 신선한 공기를 얻으며, 나무가 보호하고 있는 이 땅에서 살고 있다. 또한 인류는 햇빛과 여러 가지 생물들을 떠나서 살 수도 없다. 이런 관계가 복잡하지만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이 만유의 법칙을 창조한 것은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각각의 사물은 각자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만든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공급’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나님이 매일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냐? 나무가 호흡하는 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공급’이란 창조 후에 하나님이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법칙을 하나 만들어 그것을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나무의 씨앗을 대지에 심으면 스스로 자라난다. 씨앗이 자랄 여건은 하나님이 미리 만들어 두었다. 햇빛, 수분, 토양, 공기와 주변의 환경, 바람, 서리, 눈, 비, 1년 사계절, 이것은 나무가 필요로 하는 생존 조건으로,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생존 환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매일 가서 나무에 잎이 몇 장 달렸는지 셀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겠지? 하나님이 나무의 호흡을 도울 필요도 없다. 햇빛도 하나님이 매일 가서 깨울 필요도 없고, “나와서 나무를 비춰라”라고 할 필요도 없다. 햇빛은 법칙에 따라 때가 되면 나와서 나무를 비춘다. 나무는 필요할 때 햇빛을 흡수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 역시 법칙 속에서 살아간다. 너희가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사실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만물의 생존 법칙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만물의 생장과 존속이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이 이야기 속에 인류가 말하는 비유가 있었느냐? 그럼 말하는 것이 일종의 의인화 기법이었느냐? (아닙니다.) 내가 말한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후 각 사물은 생명이 있게 되었고, 그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각 사물은 자기 생명의 궤적과 법칙을 스스로 준수하고 있으니 사람이 바꿀 필요도, 도울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알겠느냐? 사람이 이런 것들을 알 필요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말한 이야기가 생물학과 관계있느냐? 지식이나 과학과 관계가 있느냐? 우리는 여기서 생물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생물학을 연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요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만물 속에서 너희는 무엇을 봤느냐? 나무를 봤느냐? 땅을 봤느냐? (네.) 햇빛도 보았다. 그렇지? 새가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봤느냐? (네.) 그럼 사람이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겠느냐?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 통해 인류가 살아가는 터전을 유지하고 보호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인류와 만물에게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7>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8)

이야기 2. 큰 산과 시냇물, 광풍, 거대한 파도

시냇물이 구불구불 천천히 흘러 산자락에 다다랐다. 큰 산이 시냇물의 길을 막자 시냇물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줘. 내 앞길을 막았어. 내가 갈 방향을 막았단 말이야.”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시냇물이 답했다. “내 고향을 찾아갈 거야.” 산이 말했다. “좋다. 내 몸을 넘어가거라!” 하지만 시냇물은 너무 약하고 여려서 아무리 애를 써도 큰 산을 넘어가지 못했고, 결국 산자락을 따라 계속 흐를 수밖에 없었다….

광풍이 모래와 자갈, 잡다한 것들을 휩쓸며 큰 산 앞에 다다라 으르렁댔다. “비켜!”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광풍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난 저 너머로 갈 테다!” 산이 말했다. “좋다! 네가 내 허리를 꺾을 수 있다면 지나가거라!” 광풍은 울부짖으며 한 번 또 한 번 도전했다. 하지만 아무리 울부짖고 애를 써도 큰 산의 허리를 꺾을 수 없었다. 광풍은 지쳐 발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산 저편에서는 미풍이 조금씩 불어왔고 사람들은 쾌적감을 느꼈다. 그것은 큰 산이 사람들에게 건네는 안부 인사였다….

해안가에 포말이 넘실거리며 해변의 암석을 가볍게 때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몰아친 거대한 파도가 포효하며 큰 산 앞에 다다라 외쳤다. “비켜!”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거대한 파도는 계속해서 포효하며 답했다. “난 내 영토를 넓히고 내 팔을 펼칠 거야!” 산이 말했다. “좋다! 네가 내 머리를 넘어갈 수 있다면 길을 내주겠다.” 거대한 파도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큰 산을 넘을 수 없었고, 결국 천천히 물러났다….

수천 년 동안 시냇물은 산자락을 따라 계속 그렇게 조용히 흘렀다. 시냇물은 큰 산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고향에 도착해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큰 산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시냇물은 방향을 잃지 않았다. 시냇물과 큰 산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수천 년 동안 광풍은 으르렁대는 습성을 바꾸지 않았다. 광풍은 모래와 자갈을 휩쓸며 늘 큰 산을 ‘방문’했고 큰 산을 위협했지만 산허리를 꺾지는 못했다. 큰 산과 광풍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수천 년 동안 거대한 파도 또한 쉰 적이 없었다. 거대한 파도는 땅을 넓히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큰 산을 향해 거듭 포효했다. 하지만 큰 산은 거대한 파도의 포효에 눌려 몸을 비키지는 않았다. 산은 계속 바다를 지켜봤고, 바닷속 만물은 그렇게 번식하고 성장했다. 큰 산과 거대한 파도는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우선 내가 한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일단 큰 산이 있었다. 또 시냇물, 광풍, 거대한 파도가 있었다. 그럼 첫 부분에서 시냇물과 큰 산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왜 시냇물과 큰 산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큰 산이 시냇물을 지켜 주었기 때문에 시냇물은 한 번도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산과 시냇물은 서로 의지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냇물 입장에서 큰 산은 보호자냐, 방해꾼이냐? (보호자입니다.) 그럼 방해꾼이 아니란 말이냐? 큰 산과 시냇물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 줬다. 큰 산은 시냇물의 보호자이자 방해꾼이기도 하다. 큰 산은 시냇물이 강으로 흘러들어 갈 수 있게 보호해 줬고, 동시에 곳곳으로 흘러넘치지 않게 막아 주었다. 그래서 그것이 인류에게 재해를 입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아니냐? 큰 산의 보호 덕에, 시냇물의 장벽 역할을 한 큰 산 덕분에 인류의 보금자리도 보호받게 되었다. 시냇물은 산자락을 따라 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 갔다. 이것은 시냇물의 생존 법칙이 아니냐? 시냇물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덕분이냐? 큰 산 덕분이 아니냐? 산의 보호와 방해 덕분이다. 이것이 핵심이 아니냐? 여기서 시냇물에게 큰 산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저 높고 낮은 산을 창조한 데에 목적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는 시냇물과 산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창조한 두 사물의 존재 가치와 의미, 그리고 이 두 사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두 번째 부분에서 언급한 것은 무엇이냐? (광풍과 큰 산입니다.) 바람이 있으면 좋으냐? (네.)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때 바람이 너무 세면 재해가 된다. 네가 광풍 속에 있으면 어떤 느낌이겠느냐? 물론 풍속 등급을 봐야겠지? 만약 3, 4급 정도라면 견딜 만하다. 기껏해야 눈을 못 뜨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 토네이도가 된다면 견딜 수 있겠느냐? 못 견딘다. 그러니 사람의 입장에서 바람이 완전히 좋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고, 완전히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다. 일단 얼마나 센 바람인지 봐야 한다. 그럼 큰 산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바람을 거르는 역할을 하지 않느냐? 큰 산은 불어오는 광풍을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미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대다수 사람이 맞고 느끼는 것은 광풍이냐, 미풍이냐? (미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큰 산을 창조한 목적이자 의도가 아니냐? 광풍이 늘 모래와 자갈을 몰고 와 아무런 방해나 여과 없이 사람에게 불어닥친다면 사람이 사는 곳이 어떻게 되겠느냐?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다닌다면 사람이 이 땅에서 살 수 있겠느냐? 아마도 돌에 맞거나 모래에 눈이 흐려져 앞을 못 볼 것이다. 사람이 바람에 휩쓸려 제대로 서지 못하거나 공중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 집이 파손될 수도 있다. 각종 재난이 닥칠 것이다. 그렇다면 광풍은 존재 가치가 없느냐? 바람이 나쁘다고 말하니 사람들은 바람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미풍으로 변하면 광풍도 가치가 있지 않으냐? 무덥다고 느낄 때, 숨 막히는 공기를 느낄 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가장 필요한 것은 미풍이다. 그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사람의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상쾌해진다. 예를 들어, 너희가 지금 방 안에 앉아 있는데 사람이 많아서 공기가 답답하다면,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미풍입니다.) 공기가 혼탁한 곳에 가면 공기에 들어 있는 더러운 것이 사람의 사고를 느리게 하고 혈액 순환을 늦추고 머리도 흐리게 만든다. 공기가 통하게 환기를 시키면 공기가 신선해질 것이고 사람의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시냇물이나 광풍은 재난이 될 수 있지만, 큰 산의 존재로 인해 이런 재난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으냐?

세 번째 부분에서 언급한 것은 무엇이냐? (큰 산과 거대한 파도입니다.) 큰 산과 거대한 파도이다. 이는 산 아래의 해안가에서 벌어진 장면으로, 우리는 큰 산과 포말, 거대한 파도를 보았다. 거대한 파도의 입장에서 큰 산은 무엇이냐? (보호자이자 장벽입니다.)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큰 산은 보호자이자 장벽이다. 보호의 목적은 바다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바다가 사라지지 않으면 바닷속 만물이 번식하고 생존할 수 있다. 또한 거대한 파도의 장벽으로서 해수가 범람하여 재해가 되지 못하게 하고, 인류의 보금자리를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거대한 파도에게 있어 큰 산은 보호자이자 장벽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큰 산과 시냇물, 큰 산과 광풍, 큰 산과 거대한 파도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사물들은 각자의 생존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행사를 보았느냐?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한 후 그냥 내버려 뒀느냐? 어차피 사물 각각에 법칙과 기능을 정해 줬으니 그만이라는 식으로 그냥 내버려 두었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은 계속 관리했다. 물, 바람, 파도를 관리하며 그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인류의 터전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사람이 이 땅에서 계속 번성하며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만유의 생존 법칙을 정하고, 이들을 인류에게 이롭게 함과 동시에 인류에게 부담을 주거나 재앙을 가져오지 못하게 관리해야 했다. 하나님이 관리하지 않는다면 물이 멋대로 흐르지 않겠느냐? 바람이 멋대로 불지 않겠느냐? 이들에게 법칙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관리하지 않는다면 법칙이 없어 바람은 멋대로 불고, 물은 아무렇게나 흘러 사방으로 범람할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산을 넘는다면 그 바다가 존재할 수 있겠느냐? 그 바다는 존재할 수 없다. 큰 산이 거대한 파도보다 높지 않다면 바다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산도 그 존재 가치와 의미를 잃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7>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9)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했다. 또한 만유를 주재하고 관리하며 만유에게 공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유 속에서 만유의 일거수일투족, 언행 하나하나를 살피고, 인류가 사는 구석구석을 살핀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만유, 모든 사물의 기능과 성질, 생존 법칙, 생존의 의미, 존재 가치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상대로 그 법칙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인류의 지식과 과학을 배워 그것을 연구하고 알 필요가 있겠느냐? (아니요.) 그럼 인류 중에 박학다식하여 하나님처럼 만물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느냐? 없겠지? 진정으로 만물의 생장 법칙을 파악한 천문학자나 생물학자가 있느냐? 그들이 정말로 모든 만물의 존재 가치를 파악할 수 있겠느냐? (아니요.)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아무리 높이 쌓고 아무리 오래 배운다 한들 영원히 만물 창조의 비밀과 목적을 측량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쯤에서 너희는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말의 진정한 함의를 조금 이해했느냐? (네.) 내가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주제를 말하니 많은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은 진리이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사람에게 공급한다’는 차원의 의미만 떠올린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삶, 그리고 일용할 양식과 매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하는 것은 딱히 공급이라고 할 것도 없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인류가 정상적으로 살아가며 생활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했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주 분명하지 않으냐? 하나님은 인류가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인류의 생존 환경을 보호하고, 인류의 생존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을 공급하며,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주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유에게, 인류에게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런 것은 사람이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우린 알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만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맞느냐? (틀립니다.) 어디가 틀렸느냐? 하나님을 앎에 있어, 하나님이 했던 말씀만 알아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만 받아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 성품의 일부와 하나님 권병의 일부만 알면 충분하며, 그러면 하나님을 안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냐?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만유를 창조하면서부터 존재했으며, 게다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없었던 적이 없다. 하나님이 일부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사역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것 외의 일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권병과 신분, 하나님의 행사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뿐이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소위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특정 무리에 국한시키고 있다. 이런 인식이 참된 인식이겠느냐? 이런 식의 인식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주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이 일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는 걸 난 보지도 못했고, 그건 나하고 동떨어진 이야기야. 알고 싶지 않아. 하나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거지 나하고는 관계없어. 난 하나님의 인도와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것에만 신경 쓰고 다른 건 상관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 만유의 법칙을 만들고, 하나님이 어떻게 만유와 인류에게 공급하는지 따위는 나와 관계없어!’ 이것이 무슨 소리냐? 이것은 대역무도한 것이 아니냐? 너희 중에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자가 있느냐? 너희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안다. 너희 중 다수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교조주의자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영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을 대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국한시키고 표면적인 글귀에 국한시킨 채 하나님을 더 많이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른 일에 더 많이 신경 쓰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의 생각은 아주 유치하고 종교적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매우 알기 어렵다. 오늘 두 이야기를 들려줬다. 막 들었을 때, 막 접했을 때 너희는 조금 심오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고, 이해하기도 알아듣기도 어렵고, 하나님의 행사나 하나님 자신과 연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만물과 인류 가운데서 나타낸 모든 행사와 행했던 모든 일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런 앎을 통해 너는 하나님의 참된 존재를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하나님이 만유에게 공급하는 방식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허상이나 전설,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일종의 학설이나 정신적인 지주가 아니라 실재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계속 자신의 방식과 템포로 만유와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에 법칙을 부여했기에 만물은 하나님이 정한 대로 제 몫을 다하고, 제 책임을 다하고, 제 역할을 하면서 인류를 위해, 인류의 생존 공간과 생존 환경을 위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않고, 인류에게 이런 생존 환경이 없었으면 인류가 하나님을 믿거나 따르는 것도 빈말에 그치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7>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0)

우리는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에 대한 주제와 내용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을 공급하고 형벌과 심판의 사역을 하는 것 외에 인류에게 또 어떤 것을 베풀어 주었는지 알고 있느냐? 어떤 이는 “하나님은 저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시고, 징계를 내리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또한, 제게 세심한 관심과 보호를 베풀어 주셨습니다.”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은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라고 하며, 심지어 어떤 이는 “하나님은 저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자신의 육체 생명에 관한 체험 범위 내에서는 어느 정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상에서 필요한 것에만 국한하지 않고, 너희 모두가 멀리 내다보고 거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들에 대해 논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만물의 생명을 어떻게 보호할까? 다시 말해, 하나님은 만물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만물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어 만물의 생존을 보호하고 만물의 생존 법칙을 유지하고 있을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 … 이제 내가 논하고자 하는 주제와 이야기를 그 어떤 지식과 결부하여 생각하지 말고, 그 어떤 인류의 문화나 인류의 연구와도 연관시키지 말며, 오로지 하나님의 행사와 결부시키기를 바란다. 미리 일러두지만, 나는 오로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 자신과 관련된 것만 언급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하나님은 인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다. 먼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부터 이야기하겠다. 이는 사람이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공급했는지, 물질적인 것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자.

첫째, 공기

먼저, 하나님은 공기를 만들어 사람이 숨 쉴 수 있도록 하였다. 공기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자, 또한 모든 순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공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으며, 호흡하고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공기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가장 먼저 베풀어 준 것이다. 그럼 공기가 간단하게 만들어졌겠느냐? 하나님이 공기를 만들 때, 공기의 밀도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겠느냐? 공기의 함량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겠느냐? (고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생각으로 공기를 만들었겠느냐? 왜 공기를 만들려 하였고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공기가 필요했고 숨을 쉬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공기의 밀도는 사람의 폐에 적합해야 한다. 공기의 밀도에 대해 아는 이가 있느냐? 이는 사람이 알아야 할 사항이 아니니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수치로 공기의 밀도를 설명할 필요는 없고 우리는 이런 개념을 아는 정도로 충분하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의 밀도는 폐 호흡에 가장 적합하여 사람이 숨을 쉬기에 알맞고, 또한 인체에 해를 주지 않는다. 이것이 공기의 밀도에 관한 내용이다. 그다음 공기의 함량에 대해 말해 보자. 하나님은 공기의 함량이 사람에게 독이 되지 않고, 폐와 몸에 해를 주지 않도록 고려해야 했다. 사람이 원활하게 숨을 쉴 수 있어야 하며, 공기의 성분과 함량은 체내에 들어간 후 혈액을 정상적으로 순환시켜 주고, 체내와 폐 안의 탁한 공기를 밖으로 배출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공기 안에는 유독 성분이 없어야 하는데, 이것도 하나님이 고려해야 했던 사항이다. 이 두 가지 지표를 말하는 것은 어떠한 지식을 주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 있고 또 가장 좋게 만들어졌음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대기 중에 분진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 지구상의 먼지, 모래, 흙 그리고 대기 중에 떠다니는 분진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 하나님께는 해결할 방법, 다시 말해 완전히 제거하거나 해소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대기 중에 먼지가 어느 정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호흡이나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고, 먼지의 입자 크기도 인체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하나님은 다 처리해 두었다. 하나님이 공기를 만든 것에 비밀이 있지 않으냐? 이것이 한 번의 입김으로 끝나는 간단한 일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든 가장 단순한 것에도 비밀이 있고,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실제적이지 않으냐? (실제적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단순한 것을 창조할 때도 인류를 생각하였다. 사람이 숨 쉬는 공기는 깨끗하며, 공기의 함량도 호흡하기에 알맞고 독이 없어 인체에 해가 되지 않는다. 공기의 농도 역시 인류가 숨 쉬기에 적합하며, 공기를 들이마신 후 다시 내쉬는 것은 신체와 육체에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사람은 공기 속에서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으며, 어떠한 방해나 근심 걱정 없이 정상적으로 숨을 쉴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태초에 만든, 인류의 호흡에 반드시 필요한 것, 바로 공기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1)

둘째, 온도

둘째는 온도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온도는 인류 생존에 적합한 환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너무 높게 오르면 사람은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지 않겠느냐? 사람이 사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반대로 기온이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간다면 어떨까? 이 또한 견디기 어렵다. 따라서 하나님은 온도의 범위를 정할 때에도 정성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람이 신체적으로 잘 적응할 수 있는 온도의 범위는 기본적으로 영하 30도에서 영상 40도 사이로, 북방에서 남방까지의 기온이 이 범위 안에 있다. 기온이 영하 50~60도 안팎으로 떨어지는 한랭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거주하도록 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추운 지대가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지혜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런 곳을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지나치게 더운 곳이나 추운 곳은 하나님이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런 곳은 사람이 거주하도록 준비된 곳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예비한 곳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장소가 지구상에 존재할까? 인류가 거주하지 못하고 생활하지 못하도록 한 곳을 왜 만든 것일까?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류가 생존하는 환경의 기본 온도도 합리적으로 조절했다. 여기에도 법칙이 있다. 하나님은 그 온도를 유지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무언가를 창조하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먼저 태양으로 사람을 따뜻하게 하였다. 하지만 너무 뜨거우면 사람이 견딜 수 있겠느냐? 태양에 감히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지구상에 태양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기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왜 태양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일까? 너무 뜨거워 가까이 가면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 태양과 인류의 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기준이 있고,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필요한 일을 했다. 다음으로 지구의 남극과 북극은 빙하로 이루어져 있다. 빙하 지대에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느냐? 빙하는 인류가 살기에 적합하냐? (적합하지 않습니다.)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 가지 말라는 것이다. 남극과 북극에 가지 않으면 빙하가 존재할 수 있고, 제 기능을 발휘하여 온도를 제어할 수 있다. 이해가 되었느냐? 만약 남극과 북극이 없는 상태에서 태양이 계속해서 지구를 비춘다면 사람은 더위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 생존에 적합한 온도 조절을 위해 하나님은 단지 이 두 방법만 사용했을까? 그렇지 않다. 이외에도 초원의 풀, 숲속의 각종 나무, 각종 식물 등 여러 생명체를 두었다. 이들은 태양열을 흡수하고 태양의 열에너지를 적절하게 제거하여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온도를 조절한다. 다음으로는 하천, 호수와 같은 물을 활용하는 것이다. 강, 호수의 면적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의 물의 양, 물이 흐르는 방향, 그리고 물의 속도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지하수와 지상에 있는 하천, 호수 등의 물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 밖에 고산 지대, 평원, 협곡, 습지와 같은 다양한 지형도 있다. 다양한 지형, 그리고 그것들의 면적과 범위도 온도 조절 작용을 한다. 예를 들어, 둘레가 100km인 산이 있다면 그 크기만큼 온도 조절 작용을 한다. 하나님이 지구에 그런 산맥과 협곡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 여기에도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에는 각각 탄생의 이유가 있고,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삼림과 식생의 면적과 생장 범위를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삼림과 식생이 얼마나 많은 수분과 태양열을 흡수하는지 통제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계획한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심혈을 기울여 고려하며 계획하고 배치했기에 사람은 온도가 적절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예를 들어 태양, 흔히 들을 수 있는 남극과 북극, 지상ㆍ지하ㆍ수중 생물들, 삼림과 식생의 면적, 수원(水源)과 여러 가지 물, 해수와 담수의 양, 그리고 다양한 지리적 환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인류 생존에 필요한 정상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사람은 적합한 온도가 있는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추워도, 너무 더워도 안 된다. 몸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지역은 분명히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한 곳이 아니다. 그리고 너무 춥거나 기온이 심하게 낮은 지역에 가게 되면 사람은 몇 분도 채 안 돼 입이 얼어 말을 할 수 없고, 뇌가 경직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바로 질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또한 하나님이 인류에게 예비한 곳이 아니다. 인류가 연구를 하려 하든, 혁신을 이루려 하든, 돌파구를 찾으려 하든, 어떤 생각을 하든, 사람은 육체가 적응 가능한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이 창조한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에 육체가 어떤 온도에서 적응할 수 있는지는 하나님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 스스로는 모른다. 왜 사람이 모른다고 하느냐? 사람은 어떤 어리석은 짓들을 저질렀느냐? 많은 이들이 항상 남극과 북극 정복에 도전하고 싶어 하지 않느냐? 그곳의 땅을 점령하고 하루빨리 터를 잡으려고 하는데, 이는 황당한 행동이다. 남극과 북극을 철저히 연구한들 어쩌겠느냐? 네가 그 온도에 적응하여 거기에서 살 수 있고, 남극과 북극의 생존 환경과 상태를 ‘개선’한다 한들 그것이 인류에게 무슨 득이 되겠느냐? 인류는 생존이 가능한 환경에 가만히 있지 않고 기어코 살 수 없는 그런 지역에 가려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이냐? 이미 너무 많은 복을 누렸기 때문에 적당한 온도에서 지내는 삶이 지겨워졌다는 것이다. 또 정상적인 생존 환경을 거의 다 파괴했으니 남극과 북극에까지 가서 파괴하며 크게 ‘사업’을 하여 ‘유례없는 업적’ 따위를 남기겠다는 것이다.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냐? 인류는 조상인 사탄에게 이끌려 계속해서 황당무계한 일들을 벌이고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아름다운 터전을 조금도 망설임과 거리낌 없이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하는 짓이다. 현재 지구에 닥친 위기를 보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달에 가서 살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 그런데 달에는 산소가 부족하다. 산소가 부족하면 사람이 살 수 있느냐? 달에 산소가 부족하다면 이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늘 달에 가고자 한다. 이는 무슨 행동이냐? 이 또한 자해이다. 그렇지 않으냐? 달에는 공기가 없고, 온도도 인류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예비해 준 곳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2)

셋째, 소리

셋째는 무엇일까? 이 또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환경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반드시 조절해야 할 일이었다. 그 일은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생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육체와 생활에 지장이 생겨 그러한 환경에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모든 생물이 그러한 환경에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소리이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였고, 만유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살아가며, 만물은 하나님의 눈 아래에서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각자 생존 가치가 있고, 존재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존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중에는 모든 것이 다 살아 있는 것이다. 모두가 살아 있기에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게 된다. 예를 들어, 지구는 끊임없이 회전하고, 태양도 달도 끊임없이 회전하며, 만물은 살아 움직임과 동시에 계속해서 소리를 낸다. 지구상의 만물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산의 밑부분은 활동하며 이동하고 있고, 심해의 생물들도 움직이며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생물들, 하나님 안중의 만물들은 끊임없이, 정상적으로,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발생하고 움직이는 이러한 것들로 인해 무엇이 생길까? 바로 강한 소리이다. 지구 밖의 천체들도 계속해서 회전하고, 천체의 생명체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생명이 있든 없든 모두가 하나님의 눈 아래에서 계속 앞으로 움직이면서 소리를 낸다. 하나님은 그 소리를 조절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당연히 알고 있겠지? 비행기에 가까이 갔을 때 들리는 엔진 소리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오래 있으면 귀가 먹먹해질 것이다. 심장이 견딜 수 있느냐? 심장이 약한 사람은 견디기 힘들고, 심장이 강한 사람이라도 오래되면 견디기 힘들다. 소리는 귀나 심장과 같은 인체에 많은 영향을 주며, 너무 큰 소리는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따라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한 후, 움직이는 소리를 적절히 조절하였다. 이 또한 하나님이 인류를 위한 환경을 창조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들 중 하나였다.

첫째, 지구의 지면과 대기층의 거리는 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둘째, 토양의 밀도도 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셋째, 다양한 지리적 환경의 조합도 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소리를 조절하여 사람이 귀와 심장이 견딜 수 있는 환경에서 살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소리로 인해 생존에 커다란 지장을 받게 되고, 삶에 큰 불편을 겪게 된다. 그것은 인류에게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땅과 대기층 그리고 지리적 환경을 창조할 때,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이고 하나님의 지혜를 담았다. 이에 대해 사람이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그저 거기에 하나님의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면 된다. 그럼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행한 일, 즉 소리를 정교하게 조절하여 인류의 생존 환경을 유지시키고, 인류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일이 필요하지 않으냐?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이런 방식을 통해 만물에게 공급해 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안정된 환경을 창조하고 제공하여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고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하는 방식 중 하나가 아니냐? 하나님이 행한 일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매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비록 이것이 하나님의 행사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때 어떻게 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필요성은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지혜와 애쓰심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정도라도 느낄 수 있으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은 만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많은 행사를 느끼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여기에서 내가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단서들을 통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3)

넷째, 빛

넷째는 사람의 눈에 관한 것, 바로 빛이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눈은 강도가 너무 센 빛을 보면 실명할 수 있다. 사람의 눈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눈이기 때문에 자극을 견뎌 내지 못한다. 태양을 계속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시도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쳐다본다면 가능은 하다. 이렇게 도구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도구 없이 사람은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보기 힘들다.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하나님은 태양을 창조하여 사람에게 빛을 주었는데, 그 빛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있다. 하나님은 태양을 만든 후 상관치 않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며, 세부적인 부분까지 신경 쓰고 전반적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눈을 만들어 주어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사물을 볼 수 있는 빛의 범위도 예비해 주었다. 빛이 너무 어두워도 안 된다. 너무 어두워서 손을 내밀어도 볼 수 없을 정도면, 사람의 눈은 제 기능을 잃어 쓸모없게 된다. 또 너무 밝아도 사람의 눈은 견딜 수 없고 사물을 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의 생존 환경에 사람의 눈에 적합한 빛을 제공하였고, 이 빛으로 사람은 눈이 손상되지 않고, 게다가 눈의 기능도 잃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양과 지구 주변에 구름을 추가하였고, 공기의 밀도로 눈이나 피부를 자극하는 빛을 여과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이 만든 대지의 색깔이 태양 빛과 각종 빛을 반사시키기 때문에 눈이 적응하기 힘든 빛의 밝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은 외출할 때나 생활할 때 항상 짙은 선글라스를 낄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눈은 빛의 방해 없이 시야 안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빛은 너무 밝아도, 너무 어두워도 안 된다. 너무 어두우면 눈이 손상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실명하게 되고, 너무 밝으면 눈에 자극이 심하다. 따라서 빛의 밝기는 사람의 눈이 적응할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하나님은 빛이 사람의 눈에 줄 수 있는 자극을 다양한 방식으로 최소화하였다. 빛이 눈에 좋든 해롭든, 하나님은 사람이 죽기 전까지 건강한 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나님이 주도면밀하지 않으냐? 하지만 사탄 마귀는 어떠하냐? 사탄 마귀는 사람에게 어떤 해가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빛을 너무 밝게 하거나 너무 어둡게 한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이런 일들은 시각, 청각, 미각, 호흡, 느낌 등 신체의 여러 부분의 생존 적응력을 최대화시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이러한 생존 환경은 인류에게 가장 적합하고 유익한 환경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별것 아닌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소리, 빛, 공기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누리고 있는 이런 것들의 뒤에는 하나님이 행한 일들이 있다. 너는 이 부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네가 인지의 필요성을 느끼는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소리, 빛, 공기 등을 창조할 때 신경을 썼고,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이 있었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사람을 이러한 환경에 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공해 준 모든 것은 인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행사가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4)

다섯째, 기류

다섯 번째는 무엇일까? 다섯 번째는 모든 사람의 하루하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도 아주 관련이 크다. 사람의 육체가 이 물질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바로 기류이다. ‘기류’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무엇을 기류라고 하느냐? 공기의 흐름을 기류라고 할 수 있다. 기류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이고 기체가 이동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기류는 주로 무엇을 가리킬까? 내가 설명하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지구의 산과 강과 바다를 비롯하여 만물은 모두 회전하며, 회전할 때는 속도가 있다. 사람이 지구의 회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지구는 여전히 회전하고 있다. 지구의 회전은 무엇을 일으키느냐? 달릴 때 귓가에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느냐? 사람이 달릴 때도 바람이 생기는데, 하물며 지구가 회전할 때 어떻게 바람의 힘이 없을 수 있겠느냐? 지구와 만물은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고 운동하며 지구상의 만물은 끊임없이 번식하고 발전한다. 따라서 일정한 속도에서는 자연스럽게 기류가 발생하는데, 그런 기류를 말한다. 이 기류가 어느 정도 사람의 몸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통상적으로 태풍이 기껏해야 얼마나 강하겠느냐? 그런데도 사람들은 똑바로 서 있지 못한다. 또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걸을 때면 걸음을 내딛기조차 힘겨워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바람이 너무 강하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뭔가를 의지해 잡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류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중 하나이다. 만약 지구 전체가 평지라면, 사람의 몸은 지구가 회전하고 만물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기류를 절대 견딜 수 없고 대응하기도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기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 즉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양한 지리적 환경을 조성하여 기류가 약화되도록 하였고 기류의 방향, 속도, 강도를 조절하여 기류 문제를 해결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산천, 산맥, 평원, 구릉, 분지, 협곡, 고원, 하천 등의 다양한 지리적 환경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지리적 환경을 통해 기류의 속도, 방향, 강도를 변화시키고 그런 방식으로 약화시키거나 처리하여 적절한 풍속, 풍향, 풍력을 만들어 주었고, 이로써 사람에게 정상적인 생존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으냐? (필요합니다.) 이는 사람이 보기에 어려운 일 같지만 하나님께는 간단한 일이다. 하나님의 눈이 늘 만물을 감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알맞은 기류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하나님께 매우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한 이 환경 속의 만물 중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 모두 존재의 가치가 있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사탄과 패괴된 인류는 이 원리를 모르고 끊임없이 개발하고 파괴한다. 산천을 평지로 바꾸고, 협곡을 평평하게 메우고, 평원에 고층 건물을 지어 콘크리트 숲을 만들려는 망상에 빠져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예비한 최적화된 환경에서 사람이 매일 행복하게 생활하고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에 인류의 생존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전혀 소홀하지 않았다. 온도에서 공기, 소리에서 빛까지 하나님은 정밀하게 안배하여 인류의 생존 환경과 사람의 몸이 어떤 자연조건 속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번식하고 또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더 나아가 인류에게 공급하는 모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5)

이제는 하나님과 인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도대체 누가 만물의 주인이냐?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만물을 대할 때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고 안배하시고,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누립니다.) 너희는 이 말을 인정하겠지? 하나님과 인류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고 공급하고 있으며, 또 그 모든 것의 근원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을 공급할 때 그것을 누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에게 베푼 생명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만물을 누리는 것이다. 사람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성과를 누리는 자이고, 하나님은 주재자이다. 그렇다면 만물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류는 무엇이 다를까? 하나님은 만물의 성장 법칙을 분명히 알고 있고 이를 주관하고 주재한다. 즉,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안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감찰 범위 안에 있다. 하지만 사람은 만물을 볼 수 있느냐? 사람은 볼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눈앞의 것만 볼 수 있다. 산에 오르면 그 산만 볼 수 있을 뿐, 산 너머의 것은 볼 수 없다. 해변에 가면 바다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바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다. 숲속에 들어가면 주변의 식물만 볼 수 있을 뿐, 더 먼 곳은 볼 수 없다. 사람은 더 높은 곳, 더 먼 곳, 더 깊은 곳은 보지 못하고 눈앞의 것, 시야 내에 있는 것만 볼 수 있다. 사람이 1년 사계절과 만물 성장의 법칙을 안다 하더라도 만물을 관리하고 주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만물을 자신이 손수 만든 기계처럼 다루며, 모든 절차, 원리, 법칙 그리고 용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과학을 연구하고 만물의 법칙을 탐구한다 해도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무한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아주 작은 일을 사람에게 연구하라고 한다면, 평생의 시간을 쏟아도 진정한 성과를 얻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따라서 네가 배운 지식으로 하나님을 연구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진리를 찾는 방식과 하나님께 구하는 방식으로 또 하나님을 알아 가는 측면으로 하나님을 대한다면, 어느 날 하나님의 행사가 어디에나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왜 만물의 주재자라고 하는지, 왜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생길수록 하나님을 만물의 주재자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너를 포함한 만물 모두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만물의 생존을 주재하고 관리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그 본질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생겼을 때, 너는 하나님이 곧 너의 하나님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너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여 너의 하나님이 되게 하고 너의 주재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런 인식이 생기고 생명이 그런 경지에 이르면, 하나님은 두 번 다시 너에게 시련을 주거나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고 관리하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는 하나님의 행사를 인정하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실제적으로 알고, 더 많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6)

곡물류, 채소, 과일, 견과류는 채식에 포함된다. 식물성 식품이지만 영양소가 풍부하여 인체에 필요한 성분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겐 이런 것만 주면 되니 이런 것만 먹게 하자!”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기에 더해 더욱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예비하였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보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각종 고기와 생선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준 고기와 생선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어류는 물속에서 서식하고 육질이 육지 고기와 다르며, 인체에 또 다른 영양소를 공급할 수 있다. 어류의 성질은 인체의 냉열을 조절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몸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도하게 섭취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시기에 따라 알맞은 양을 베풀어 주어 사람이 계절과 시기에 맞춰 음식을 정상적이고 적절하게 섭취하도록 하였다. 조류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조류에는 닭, 메추라기, 비둘기 등이 있고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오리나 거위도 있다. 이런 육류는 하나님이 예비한 것이지만 하나님 선민에 대해서는 요구가 있었고, 율법시대에는 일정한 범위를 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 범위가 이제는 사람들 개개인의 입맛과 제 나름의 이해에 달렸다. 육류는 인체에 다양한 영양소를 공급하는데, 단백질, 철분, 혈액을 보충해 주기도 하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여 기력을 보충해 주기도 한다. 어떤 요리법으로 만들어 먹든 사람의 입맛과 식욕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배를 든든하게 채워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일상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식량을 예비할 때 고려해 둔 것이다. 채식도 있고 육식도 있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이 매우 풍부하지 않으냐?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식량을 예비해 줄 때의 본뜻이 무엇이었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음식을 탐하라는 뜻이었겠느냐?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만 빠져 있으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영양 과잉 상태가 되지 않겠느냐? 영양 과잉이 되면 몸에 각종 질병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에 따라 양을 정해 놓았고, 시기와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식량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면 체내에는 열기와 습하고 건조한 기운이 쌓이는데, 이때 가을철에 나는 과일들을 먹으면 습하고 건조한 기운이 제거된다. 또한 이 시기는 소와 양이 살찌는 계절이기 때문에 육식을 통해 몸보신을 할 수 있다. 다양한 고기로 몸에 에너지와 열량이 축적되면 매서운 추위에도 버틸 수 있고 겨울을 잘 보낼 수 있게 된다. 어떤 시기에 사람에게 무엇을 예비해 줄지, 어떤 시기에 무엇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잘 익도록 할지 이 모두는 하나님이 알고 있고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다. 아주 알맞게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을 예비해 주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다양한 식량을 공급하는 것 외에도 물을 제공한다. 사람은 음식을 다 먹은 후에 물을 마셔야 되는데, 과일만 먹어서야 되겠느냐? 과일만 먹어서는 견딜 수 없다. 게다가 어떤 계절에는 과일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의 식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은 지상과 지하에 호수, 강, 샘물과 같은 다양한 수원을 예비하였다. 이러한 수원은 오염되거나 사람이 변질시키거나 파괴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 마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육체적 생활에 필요한 식량의 근원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정밀하고, 정확하고, 알맞게 예비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그 무엇도 부족함 없게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는 사람의 몸에 상처가 나거나 병이 났을 경우 이를 전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동식물이나 각종 풀들도 있다. 예를 들어, 화상을 입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혹은 뜨거운 물에 데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로 씻어 내면 되느냐? 아무 천으로 감싸면 되느냐? 그러면 곪거나 감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열이 나고 감기에 걸리거나, 일하다 타박상을 입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거나, 혈관 질환, 심리적 질환, 오장육부에 생긴 질병 등 생활 습관 혹은 각종 정서로 인한 병은 그에 맞는 식물로 치료할 수 있다. 이러한 식물에는 어혈을 풀어 혈액 순환을 촉진시키거나 통증을 없애거나, 지혈이 가능한 것도 있고, 마취를 하거나, 피부의 정상적인 회복을 돕는 것도 있으며, 체내의 어혈과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식물 모두는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고 쓸모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위해 예비한, 비상시에 필요한 것들이다. 이들 중에는 사람이 무심코 발견하게 된 것도 있고 또 어떤 특이한 현상이나 사람들을 통해 발견하게 된 것도 있다. 발견한 후 인류에게 전해 내려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만든 식물 또한 가치와 의미가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의 생존 환경을 창조할 때 사람을 위해 마련하고 자라게 한 것으로 모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완벽하지 않으냐? 그렇다면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은 은밀하게 일한다. 사람이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을 때, 인류와 접촉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만들어 놓았고 인류를 위해, 인류의 생존을 위해 고려하였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예비한 풍요로운 물질세계 속에서 인류가 걱정 없이,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류는 계속 번성하며 생존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7)

처음에 우리는 사람의 생존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생존 환경을 주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무엇을 예비했는지, 무엇을 처리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만물 간의 관계는 어떠한지, 그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여 만물이 인류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하나님은 만물이 가져온 여러 요소가 인류 환경에 초래한 부정적인 영향을 해결하여 만물이 각각의 역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 인류에게 유익한 환경과 다양한 요소를 만들어 인류가 이런 환경에 잘 적응하고 정상적인 종족 번식을 이루면서 윤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으로는 인체에 필요한 먹거리, 즉 일상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또한 인류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갖춰져야 할 조건이다. 사람의 육체는 숨만 쉬면서 살 수 없고 햇빛만 보며 살 수 없고 바람만 쐬며 살 수도 없으며 적절한 온도만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다. 배를 채우는 음식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단 하나의 부족함도 없도록 예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식량의 유래이다. 풍부한 산물인 식량의 유래를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하고, 만물에게 공급하는 근원이라 할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나무나 풀만 만들거나 각종 생물만 만들었고, 그 생물과 식물이 오로지 소, 양, 얼룩말, 사슴 같은 동물들의 먹이밖에 되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사자는 얼룩말이나 사슴 등을 잡아먹고 호랑이는 돼지나 양 등을 잡아먹지만 이것들 중 사람이 먹기에 적합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괜찮겠느냐?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의 육체는 살 수 없다. 사람이 나뭇잎만 먹고 살 수 있겠느냐? 양에게 예비한 풀을 사람에게 먹으라고 하면 되겠느냐? 한 번쯤 맛보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계속해서 먹는다면 사람은 위가 견디지 못할 것이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것은 동물이 먹으면 괜찮지만 사람이 먹으면 독이 된다. 동물이 먹었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어도 사람이 먹으면 안 되는 유독 물질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체의 원리와 구조, 인체에 무엇이 필요한지는 하나님이 제일 잘 안다. 하나님은 인체의 성분과 함량, 인체에 어떤 것이 필요한지, 오장육부는 어떻게 활동하는지, 어떻게 흡수하고 배출하며, 신진대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잘 알지 못하면서도 때로는 제멋대로 먹고 제멋대로 관리하는 바람에 지나친 몸보신으로 영양의 균형을 잃기도 한다. 하나님이 예비한 대로 정상적으로 먹고 누린다면 아무 탈도 나지 않는다. 가끔 기분이 상하는 일 때문에 기와 혈이 막히는 일이 생긴다 해도 괜찮다. 한 가지 식물을 먹으면 막혔던 혈이 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예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인류는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도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은 식물을 위해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고, 동물을 위해 먹이와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의 생존 환경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가장 엄격한 잣대로 임했고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류가 정상적인 발전과 종족 번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어쩌면 너는 이미 봤거나 누리고 있지만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것, 혹은 원래부터 있었거나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가치를 느끼기 힘들겠지만 이는 하나님이 뒤에서 혹은 오래전에 너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류에게 불리한 모든 것과 인체에 해를 줄 수 있는 나쁜 요소들을 최대한 제거하고 해결하였다. 이는 무엇을 설명할까? 인류를 창조할 때의 하나님의 태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태도는 어떠하냐? 하나님은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임했으며 하나님 외의 어떤 적대 세력이나 요소, 조건의 간섭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인류를 창조하고 나아가 인류를 경영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냐? 사람이 누리는 생활 환경과 생존 환경, 식량과 일상에 필요한 것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다음 인류를 위해 책임감 있는 태도로 임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결심도 볼 수 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참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기묘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예측 불가능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전능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은 전능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전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고, 나아가 만물에게도 공급하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제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말은 매우 확실하다. 이에 대해 어떠한 의혹도 없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해 주는 일에서,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만물이 생존하고, 성장하고, 번식하며, 지속할 수 있도록 공급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생존 환경이든,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이든,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으며, 심령에 진리를 공급하기까지 한다. 모든 면에서 봤을 때, 하나님의 신분이나 지위로 봤을 때, 인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 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이 물질세계의 주관자이고 주재자이며 공급자이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의 신분이 아니란 말이냐? 이는 거짓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늘을 나는 새를 볼 때, 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생명체는 물속에서 헤엄치며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또 땅에서 사는 나무와 식물은 봄에 싹이 트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며, 겨울에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겨울을 보내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존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각각의 형태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각각의 방식으로 그것의 생명력과 생명의 형태를 나타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 하나님이 각각 다른 생명 형태를 가진 생물과 생명체를 주재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법칙을 주관하고 있는 것은 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생존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8)

하나님은 하나님 선민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지금 네가 하나님을 따른다면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냐?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냐? 하나님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은 아니냐? 하나님은 만물의 하나님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만 사역하고 행사를 보여 주느냐? (아닙니다.) 그 범위는 어떻게 되느냐? 그 범위는 작게 말하면 전 인류와 만물이고 크게 말하면 우주 전체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류 전체에게 사역하고 행사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전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3단계 사역과 하나님이 이전에 행했던 사역의 그런 이야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인식한다면, 하나님을 한 범위에 국한시킨 것이고 하나님을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영향을 초래하게 될까? 하나님의 기묘함과 지고지상함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전능 그리고 권병의 범위를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인식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주고 하나님의 참된 신분과 지위를 인지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인식한다면 그 한정된 만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범위를 넓히고 시야를 확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경영, 하나님이 주재하는 범위, 하나님이 주재하고 관리하는 만물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러한 인식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만물 중에서 만물을 주재하고 관리하며 또 만물에게 공급해 준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너는 자신이 만물 중의 하나이고 만물의 일원임을 진정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공급하고 있고, 너 또한 하나님이 주재하고 공급하는 것을 받고 있다. 이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물에는 만물의 법칙이 있고, 이는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 만물에는 만물 생존의 법칙이 있고, 이 또한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 인류의 운명과 인류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공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주재 속에서 사람과 만물은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아가고,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목적과 만유를 창조한 가치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9)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이래, 만물은 하나님이 정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규칙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눈 아래, 하나님의 주재 아래, 만물은 사람과 함께 생존하며 규칙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무엇도 이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파괴할 수 없다. 만물은 하나님이 주재하기 때문에 번성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재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다. 따라서 만물은 하나님의 주재 아래 규칙적으로 생겨나고 발전하며, 사라지고 윤회하게 된다. 봄이 오면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봄의 기운을 전하고, 대지를 촉촉이 적셔 주며 토양을 녹인다. 그리하여 작은 떡잎이 땅을 뚫고 나와 싹을 틔우기 시작하고, 나무는 점점 더 푸르게 변해 간다. 이 모든 생물들은 대지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것이 바로 만물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모습이다. 온갖 동물들도 동굴에서 나와 따스한 봄기운을 느끼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여름이 되면 만물은 무더위를 즐기고 여름이 가져다주는 따스함을 느끼며 빠르게 성장한다. 나무와 풀, 온갖 식물들이 빠르게 자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인류를 포함한 만물도 여름을 분주히 보낸다. 가을이 되면 가랑비가 내리며 시원한 계절이 왔음을 알리고, 각종 생물도 수확의 계절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만물은 열매를 맺고, 인류는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며 겨울을 위해 식량을 비축한다. 겨울이 오면 만물은 추위 속에서 휴식과 안정을 취하기 시작하며, 사람들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이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고 변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법칙에 의한 것으로,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법칙으로 만물을 이끌고 인류를 인도하며, 인류에게 풍부하고 다채로운 생활 방식을 정해 주었다. 또한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각기 다른 온도와 서로 다른 계절의 생존 환경을 예비해 주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규칙적인 생존 환경에서 인류도 규칙적으로 생존하고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 법칙을 깨뜨릴 수 없다. 상전벽해가 되든 벽해상전이 되든 이 법칙은 항상 존재한다. 이 법칙은 하나님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주재와 관리로 인하여 존재한다. 이러한 규칙적인 대환경이 있으므로, 인류의 생활도 이 법칙과 규칙 속에 이루어진다. 이 법칙은 세대를 이어 가며 사람들을 양육하였고, 사람들은 이 법칙 속에서 대대손손 살아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들을 위해 창조한 만물과 이러한 법칙이 있는 생존 환경을 누리고 있다. 사람이 이런 법칙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라며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 여길지라도, 하나님이 이러한 법칙을 다스리고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줄곧 이 불변의 사역을 해 오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인류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불변의 사역을 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9>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0)

첫째,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산천, 평원, 사막, 구릉, 강, 호수에 모두 경계를 정하였다. 지구에는 산천, 평원, 사막, 구릉과 여러 수원(水源)이 있는데, 이것들은 각종 지리적 형태가 아니냐? 하나님은 이러한 각종 지리적 형태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는 것은 산에는 산의 경계가 있고, 평원에는 평원의 경계가 있으며, 사막에는 사막의 범위가 있고, 구릉에는 구릉의 정해진 면적이 있으며, 강과 호수 같은 수원에도 모두 정해진 양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만물의 경계를 분명하게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산의 둘레가 몇 백 km인지, 그 범위가 얼마나 큰지 이미 정해 놓았고, 이 평원의 둘레가 몇 백 km인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정해 놓았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사막의 범위도 이미 정해 놓았고, 구릉의 범위와 면적, 무엇과 접해 있는지까지 모두 정해 놓았다. 또 강과 호수의 범위도 그것들을 만들 때 다 정해 놓아 모두 경계를 가지고 있다. 이 ‘경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방금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에 대한 법칙을 정하여 만물을 주재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산천의 범위와 경계는 지구의 회전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면적이 작아지거나 커지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고정함’이 하나님의 주재이다. 하나님은 평원의 면적이 얼마이고,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무엇과 접해 있는지까지 이미 정해 놓았다. 여기에는 경계란 게 있기에 평원에 불쑥 언덕이 생겨나거나 그 평원이 갑자기 산으로 변하는 일은 없다. 방금 이야기한 법칙이란 이를 뜻하며, 경계도 이를 의미한다. 사막과 관련하여 여기서는 사막이나 다른 지리적 형태 및 위치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것의 경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하나님의 주재하에 사막 역시 더 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에 법칙과 범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막이 얼마나 큰 면적을 갖고 있을지, 역할은 무엇일지, 무엇과 접해 있을지, 어느 위치에 있을지 이미 다 정해 놓았다. 그러므로 사막은 그 범위를 넘지 않고, 위치를 옮기지 않으며, 마음대로 면적을 넓히지도 않을 것이다. 강과 호수 같은 수역의 물도 비록 질서 있게 끊임없이 흐르고 있지만, 한 번도 그 범위와 경계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한 방향,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따라 흐르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재하는 법칙 속에서 그 어떤 강과 호수도 지구가 회전한다고 해서,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마음대로 물이 말라 버리거나, 흘러가는 방향이 바뀌거나, 물의 양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는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 창조한 만물은 모두 정해진 방향과 면적, 범위가 있다. 즉,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이미 그 경계를 정하였으며, 그 모든 것은 제멋대로 변경되거나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제멋대로’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날씨, 온도 그리고 지구의 회전 속도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고, 확장하고, 자신의 원래 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산을 예로 들어 보면, 그 산의 높이가 얼마일지, 산기슭의 면적이 얼마일지, 해발이 얼마일지, 식물이 얼마나 많을지는 하나님이 모두 계획하고 계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산은 제멋대로 바꿀 수 없다. 인류의 대다수는 평원에서 살고 있다. 평원 역시 기후의 변화에 따라 면적이 바뀌거나 존재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이 창조한 여러 지형과 지리적 환경은 모두 갖고 있는 바를 제멋대로 바꿀 수 없다. 예를 들어 사막의 경우, 사막의 성분, 사막 아래 매장된 자원, 사막의 모래 함량, 사막의 모래 색깔, 사막 모래층의 두께, 이런 것은 모두 제멋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걸까? 바로 하나님이 주재하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제각기 다른 모든 지리적 형태와 환경을 하나님은 계획적이고 규칙적으로 관리한다. 따라서 이 모든 지리적 환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지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존재하며, 여전히 각자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언젠가 화산이 분출하고, 지진이 일어나 땅이 크게 이동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어떤 지리적 형태도 고유의 기능을 절대 잃지 않도록 한다. 하나님의 이런 관리, 그리고 하나님의 이 법칙에 대한 주재와 주관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것과 보는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러한 방식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리적 형태를 관리하는 것일까? 바로 여러 지리적 환경 속에서 생존하는 생물들이 안정적인 환경을 갖고, 그 안에서 번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움직일 수 있거나 움직일 수 없는 모든 만물, 즉 코로 숨을 쉴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모든 만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한 특별한 환경이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환경에서 비로소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들이 양육되고, 대대손손 평안하게 생존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방금 말한 건 좀 큰 이야기였다. 어쩌면 너희는 다소 요원한 이야기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겠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이 법칙이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는 말이다! 만물이 이 법칙 속에서 생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 조건이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주재이다. 하나님의 주재로 인해, 하나님의 주재 아래, 모든 만물은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천은 숲을 양육하고, 숲은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을 양육하고 보호한다. 평원은 인류의 경작과 여러 날짐승, 길짐승을 위해 예비한 장소이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평한 땅에서 살 수 있게 하여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준다. 평원에는 넓은 초원도 포함된다. 초원은 지구의 식생이며, 그것은 토지를 보호하고, 초원에서 자라는 소, 양, 말을 양육한다. 사막도 자신의 기능을 발휘한다. 사막은 사람들이 거주하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사막의 기능은 습한 기후를 건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여러 강과 호수의 물이 흐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을 편하게 마실 수 있다. 물이 흐르는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실 물이 있게 되고 물의 흐름으로 인해 물이 필요한 만물은 물을 쉽게 제공받을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여러 지리적 형태에 정해 놓은 경계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9>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1)

하나님이 이러한 경계를 정했기 때문에 여러 지리적 형태에 따라 다양한 생존 환경이 생겼다. 이러한 생존 환경은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에게 편리함과 생존 공간을 가져다주었다. 이로써 여러 생물들의 생존 환경에 경계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두 번째 내용이다.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 곤충은 어디에서 생활하느냐? 삼림이나 작은 숲에서 생활하지 않느냐? 그곳은 그들의 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 지리적 환경에 경계를 정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 곤충 및 식물을 위해서도 경계를 나누고 법칙을 정하였다. 서로 다른 여러 지리적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종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 곤충 및 식물에게도 역시 다양한 생활 환경이 생겼다. 날짐승과 길짐승, 곤충은 여러 식물 속에서 살아가고, 각종 물고기는 물속에서 생활하며, 각종 식물은 땅에서 자란다. 이 ‘땅’은 큰 산, 평원, 구릉 등 각종 지대를 포함한다. 정해진 자기 집이 생긴 날짐승과 길짐승은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집은 삼림이며, 큰 산이다. 어느 날 그들의 집이 파괴된다면 이 질서는 무너질 것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가장 먼저 누가 피해를 입겠느냐? (인류입니다.)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인류이다. 하나님이 정한 이런 법칙과 범위에서 너희들은 이상한 현상을 본 적이 있느냐? 예를 들어, 코끼리가 사막에서 한가하게 돌아다니는 걸 본 적 있느냐? 정말 본 적이 있다면 매우 이상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코끼리가 생활하는 환경은 숲이기 때문이다. 숲은 하나님이 그에게 예비해 준 생존 환경이다. 코끼리에게 자신의 생존 환경이 있고 정해진 집이 있는데도 이리저리 무턱대고 돌아다니겠느냐? 사자나 호랑이가 해변에서 산책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없겠지? 사자와 호랑이의 집은 삼림 속에, 산속에 있다. 바다에 있던 고래나 상어가 사막에서 노니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없겠지? 고래와 상어의 집은 바다다. 사람의 생활 환경에서 사람과 큰 불곰이 함께 생활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어떤 집이 안과 밖으로 늘 공작새나 온갖 새들로 둘러싸인 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 독수리나 기러기가 원숭이와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것은 특이한 일이다. 내가 이렇게 너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현상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든, 아니면 코로 숨을 쉬는 것이든,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다 자신만의 생존 법칙을 갖고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런 생물들을 창조하기 전 일찌감치 그들의 집과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다. 그 생물들에게는 자신만의 정해진 생존 환경과 먹이가 생겼고, 자신만의 정해진 집이 생겼으며, 생존에 적합한 정해진 장소, 혹은 생존에 적합한 온도를 가진 지역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제멋대로 돌아다니지 않고, 인류의 생존을 파괴하거나 인류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물을 관리하며,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생존 환경을 제공한다. 만물 중의 생물들은 각자의 생존 환경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먹이를 갖고 있다. 이러한 먹이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고유한 생존 환경에 고정되게 된다. 이와 같은 생존 환경에서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만든 법칙에 따라 생존하고 번식하며,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법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것 때문에 만물과 인류는 화목하게 어울려 살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9>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2)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의 경계를 정했으며, 만물 속에서 여러 가지 생물을 양육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다양한 생존 방식도 예비하였다. 따라서 네가 본 인류의 생존 방식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생존 환경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여러 가지 먹거리와 수원(水源)에 대해 얘기하였다. 이 먹거리와 수원은 사람이 육체적 생명을 계속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곡식을 먹고 사는 건 아니다. 각 지리적 환경이 다르고 지리적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인류도 서로 다른 생존 방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경작을 위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사람이 농작물을 경작하여 먹거리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할 세 번째 내용, 즉 인류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으로 인해 경계를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생활 방식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인류 먹거리의 근원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주로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방식’에 대해 다들 알고 있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느냐? (야생 동물로 만든 음식을 먹습니다.) 이들은 숲의 날짐승과 길짐승을 먹는다. ‘야생 동물 요리’라는 말은 현대어로, 사냥꾼들은 그것을 야생 동물 요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먹거리이자 일용할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하자. 그가 잡은 사슴은 농민이 땅에서 얻은 식량 같은 것이다. 땅에서 식량을 얻는 농민은 식량을 보면 기쁘고 든든하다. 먹을 것이 생겨 가족이 배를 곯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놓이고 만족감이 드는 것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도 포획물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고 만족감을 느낀다. 음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다음 끼니에 먹을 것이 생겨 배를 곯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 대다수는 농사를 짓지 않고 산에서 산다. 산에서는 경작지를 얻기 힘들다. 그래서 이들은 각종 생물과 수렵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과 다른 첫 번째 생활 방식이다.

둘째는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땅을 경작하느냐? (경작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들은 무엇을 할까? 이들은 어떻게 생활할까? (주로 소와 양을 방목합니다. 겨울이 되면 소나 양을 잡아먹고, 소고기와 양고기를 주식으로 삼습니다. 또 밀크티를 마십니다. 유목민들은 1년 사계절 늘 바쁘지만 풍족하게 먹습니다. 우유, 유제품, 육류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주로 소고기나 양고기를 먹고, 소젖이나 양젖을 마신다. 그리고 소나 말을 타고 야외에서 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면서 방목한다. 하지만 현대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고, 매일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과 초원을 볼 수 있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초원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의 유목 생활을 대대손손 이어 나갈 수 있다. 초원에서 살면 조금 적막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생활도 아주 행복한 것이다. 괜찮은 생활 방식이다!

셋째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인류 중에 극히 일부만이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섬이나, 바다를 향해 있는 해변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다.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의 먹거리는 어디에서 올까? 여러 가지 생선, 해산물, 해물 요리이다.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매일 물고기를 잡는다. 그들의 주식은 여러 종류의 생선, 해산물이며, 가끔 생선을 쌀, 밀가루, 생필품으로 교환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물가에서 사는 사람들의 또 다른 생활 방식이다.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며, 고기잡이를 생계원이자 먹거리의 근원으로 삼는다.

인류는 농사 외에 주로 위의 세 가지 각기 다른 방식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방목과 고기잡이,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몇몇 부류 외에 대부분의 사람은 땅을 경작하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땅이다.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채소든 과일이든, 아니면 곡식이든 간에, 땅에서 먹거리와 생활필수품을 얻는다.

인류가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여러 가지 생활 환경을 기본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숲을 잃고 날짐승과 길짐승을 잃으면, 그들의 생계원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이런 민족, 이런 사람들의 앞날은 알 수 없게 돼 버리며 아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에 의지하느냐? 이들이 진정으로 의지하는 대상은 소와 양이 아니라 소와 양의 생존 환경인 초원이다. 초원이 사라지면 이들은 어디에 가서 소와 양을 방목하겠느냐? 소와 양은 무엇을 먹겠느냐? 소와 양이 없어지면 유목민들의 생계원이 사라진 것이다. 생계원을 잃은 민족은 어떻게 되겠느냐? 생존하기 힘들어질 것이며, 미래가 사라질 것이다. 수원이 없어지고 강과 호수가 모두 말라 버린다면 물에 의지해 사는 각종 물고기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겠느냐?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물과 물고기에 의지해 생활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 먹거리가 없어지고 생계원이 사라진다면, 이들 민족은 살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 생활과 생존에 문제가 생긴 종족은 지속될 수 없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멸망할지도 모른다. 만약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다면 그들은 각종 식물을 경작할 수 없고, 그 식물로부터 먹거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 양식이 없으면 사람은 굶어 죽지 않겠느냐? 사람이 굶어 죽으면 인류는 다 멸망하지 않겠느냐?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각종 생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환경과 생태계를 유지하고, 각종 환경에서 생활하는 여러 생물을 보호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바로 여러 부류의 인류를 양육하고, 서로 다른 지리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양육하기 위함이다.

만물이 자신의 법칙을 잃게 되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만물의 법칙을 잃게 된다면 만물 중의 생물은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이며, 인류 역시 생존 환경을 잃게 될 것이다. 인류가 이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지금처럼 대대로 번성하며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준 만물이 인류를 양육하고 있고, 하나님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양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양육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까지,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고정적인 생존 환경과 규칙적인 생존 환경이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인류와 종족은 각자 규정된 범위 내에서 생존하고 있다. 이 범위는 그 누구도 넘을 수 없으며, 이 경계 역시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이 구분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구분하였을까? 이는 전 인류에게 있어 중요하고, 또 중요한 문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9>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3)

넷째, 하나님은 인류의 각 종족에게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지구상에는 백인종, 흑인종, 갈색 인종, 황인종이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생활 범위를 정해 주었다. 하나님의 관리 속에서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있어야 할 생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 누구도 이 환경을 넘어설 수 없다. 예를 들어, 백인종은 대부분 어느 지역 범위에서 생활하고 있느냐? 대부분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다. 흑인종의 생활 지역 범위는 주로 아프리카다. 갈색 인종은 주로 태국, 인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등의 나라와 같이 동남아나 남아시아에 살고 있다. 황인종은 주로 중국, 일본,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서로 다른 인종들을 적절하게 배치해 지구 여러 지역에 서로 다른 인종이 분포되어 있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지구상의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서로 다른 인종을 위해 각자에게 적합한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다. 이러한 생활 환경 가운데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토양의 색깔 및 성분을 예비하였다. 즉, 백인의 신체 성분은 흑인의 신체 성분과 다르고, 다른 인종의 신체 성분과도 다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 때 이러한 인종의 생존 환경을 미리 예비해 두었다. 그 목적은 바로 이들이 번식하고 늘어날 때 이들을 정해진 범위 내에 고정해 두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류를 만들기 전에 이미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을 백인종에게 주어 그들이 발전하고 생존하게 하려고 생각해 놓았다. 하나님이 땅을 만들 때 하나님께는 이미 계획이 있었고, 이 땅에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양육할지에 대한 목적과 목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 땅에 어떤 높은 산을 만들고 평원은 얼마나 만들지, 수원은 얼마나 만들고 어떤 날짐승과 길짐승을 만들지, 어떤 물고기를 만들고 어떤 식물을 만들지 하나님은 미리 예비해 둔 것이다. 즉, 하나의 인류, 하나의 인종을 위해 생존 환경을 예비할 때, 하나님은 지리적 환경, 토양의 성분, 날짐승과 길짐승의 종류, 그리고 각종 물고기의 크기와 성분, 수질의 차이, 각종 식물의 유형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고 미리 예비해 두었다. 이러한 환경은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백인종을 위해 예비한 고유의 생존 환경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얼마나 계획적으로 일하였는지를 알겠느냐? (네. 하나님은 각기 다른 부류의 인류를 위해 세심히 고려하셨음을 알게 되었고, 모든 인류의 생존 환경에 어떤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들을 예비할지, 높은 산과 평원을 얼마나 만들지 등 모든 부분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고려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백인종은 대부분 무엇을 주로 먹느냐? 백인이 먹는 음식은 아시아인이 먹는 음식과 큰 차이가 있다. 백인의 주식은 대부분 고기, 달걀, 우유, 가금류이다. 빵이나 밥과 같은 곡물 종류는 접시 한쪽에 두고 먹는 부식에 불과하다. 야채샐러드를 먹더라도 구운 소고기나 닭고기를 넣어 먹는다. 밀가루 음식을 먹더라도 대부분 치즈, 달걀, 육류 등을 곁들여 먹는다. 즉, 이들 주식의 대부분은 밀가루나 쌀이 아니라, 육류나 치즈다. 이들이 먹는 음식은 열량이 매우 높아 종종 얼음물을 함께 마신다. 그래서 백인종은 아주 건장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들에게 예비해 준 생계원이자 생활 환경이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준 이러한 생활 방식은 다른 인종의 생활 방식과 다르다. 이런 생활 방식에는 옳고 그름의 구분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정한 것이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로 인한 것이다. 이 인종이 이런 생활 방식과 생계원을 갖게 된 것은 이들의 인종 때문이며, 하나님이 이들을 위해 예비한 생존 환경 때문이다. 하나님이 백인종을 위해 예비한 생존 환경과 그들이 생존 환경에서 얻는 일용할 양식은 매우 풍족해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인종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다. 다른 인종에는 흑인도 있다. 흑인은 어디에 분포해 있느냐? 이들은 주로 아프리카 중남부에 분포해 있다. 이러한 생활 환경에서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예비하였을까? 열대 우림, 각종 날짐승과 길짐승, 사막, 여러 가지 식물이 이들과 함께한다. 이들에게는 수원이 있고, 생계원과 먹거리의 근원이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이들이 과거에 무엇을 하였든 이들의 생존에는 문제가 없다. 이들은 지구의 한 지역에서 일정한 위치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황인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황인종은 주로 지구의 동방에 분포해 있다. 동방은 환경이나 지리적 위치에 있어 서방과 어떻게 다를까? 이 땅은 대부분 매우 비옥하며, 물질 자원과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 즉, 지상과 지하의 각종 자원이 모두 굉장히 풍부하다. 하나님은 이 일부 사람들, 이 인종을 위해 이들에게 적합한 토양, 기후 그리고 각종 지리적 환경을 예비하였다. 이 지리적 환경은 서방과는 크게 다르지만 하나님은 이곳에 사람에게 필요한 음식, 생계원, 생존의 근원을 예비해 두었다. 다만 서방 백인종의 생활 환경과 다를 뿐이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한 가지 알려 줄 것이 있다. 무엇일까? 동방에 있는 이 인종은 수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곳 땅에 서방과는 다른 성분을 많이 더하였다. 이 땅에 서방과는 다른 경치와 각종 물질을 풍성하게 더하였다. 이 땅은 물산이 풍부하고, 지리적 형태도 천태만상으로 다양하여 방대한 수의 동방 인종을 양육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서방과 다른 점은 동방의 땅은 남에서 북까지, 동에서 서까지 기후가 서방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온도가 적절하며, 물산도 매우 풍부하고, 자연 경치와 다양한 지리적 형태 역시 서방보다 훨씬 더 좋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백인종과 황인종 간 합리적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백인종이 먹고 쓰고 누리는 여러 가지 것들은 황인종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인종도 차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황인종에게 더욱 아름답고 좋은 생존 환경을 주었다. 바로 이렇게 균형을 맞춘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인종이 어느 땅에서 생장할지 정해 놓았다. 사람은 이 범위를 넘어설 수 있느냐? (아니요.) 이는 아주 기묘한 일이다! 서로 다른 시기 혹은 어느 특별한 시기에 전쟁이나 침략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침략과 전쟁은 하나님이 각 인종에게 정해 준 생존 환경을 절대 파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느 인종을 지구의 특정 지역에 고정해 놓으면 그들은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인류가 야심이 생겨 영토를 바꾸거나 늘리고 싶다 하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루기 어렵고, 성공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백인들은 한때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독일인은 다른 국가들을 침략했었고, 영국인도 인도를 점령했었는데, 결국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 결국에는 모두 실패하였다. 이 실패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당신이 정한 일을 사람이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때 당시 영국이 엄청난 기세로 영토를 확장했어도 결국 그들은 철수해야만 했다. 그 땅은 여전히 인도의 것이며, 그 땅에서 자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인도인이지 영국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나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영국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민족은 정복당할 수 없다라든가, 사람의 어떤 원인 때문이라든가 등등 여러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 모두 진짜 이유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 있다. 즉,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느 민족에게 정착하여 생장할 땅을 정해 주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들은 영원히 이동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준 범위 안에서만 생활해야 한다. 그 범위를 벗어날 수도, 뚫고 나갈 수도 없다. 이는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침략자의 세력이 아무리 커도, 침략당하는 자의 세력이 아무리 미약해도, 최종 성공 여부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9>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4)

하나님이 정한 만물의 성장 법칙을 보면, 어떤 부류의 인류이든 모두 하나님의 공급과 양육 아래 생활하고 있지 않으냐? 만약 사람이 이러한 법칙을 깨뜨리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러한 법칙을 정해 주지 않았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떻겠느냐? 인류가 기본적인 생존 환경을 잃으면 인류에게 먹거리의 근원이 있겠느냐? 먹거리의 근원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인류가 먹거리의 근원을 잃으면, 즉 먹거리를 얻지 못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생존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생존, 지속과 번식을 위해 한 모든 일은 다 중요하다. 하나님이 만물 속에서 한 모든 일은 사람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사람의 생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생존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의 경영이 계속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경영이 계속 존재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경영과 하나님이 양육하는 전 인류의 생존은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만물을 위해 예비한 모든 것, 인류를 위해 한 모든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인류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만물을 위해 정한 이 법칙에서 벗어나고, 만물의 법칙이 깨지고 혼란이 오게 된다면, 만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며, 인류의 생존 환경도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류의 일용할 양식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도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모든 일, 모든 내용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너희들은 어쩌면 “당신이 말씀하신 내용은 너무 방대해서 저희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당신이 말씀하신 내용들은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는 잊어서는 안 된다. 너는 만물 가운데 생활하고 있는 일원이며, 하나님이 주재하는 만물 중의 하나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주재를 벗어날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주재를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의 주재를 잃고 하나님의 공급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생명과 육체의 생명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한 인류의 생존 환경이 갖는 중요성이다. 네가 어느 종족이든, 어느 땅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든, 서방에 있든 동방에 있든 너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정한 생존 환경을 벗어날 수 없고, 그 생존 환경의 양육과 공급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네가 어떠한 방식으로 생존하든, 무엇에 의지해 살며 네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든 너는 하나님의 주재와 관리를 떠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농민도 아니고, 경작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니 하늘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정하신 생존 환경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환경에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냐? 너는 경작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양식을 먹지 않느냐? 고기와 달걀을 먹지 않느냐?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느냐? 네가 먹는 것, 네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정한 생존 환경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생존 환경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네가 마시는 물, 입고 있는 옷, 사용하고 있는 여러 물건이 포함된다. 여기서 만물로부터 얻어지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것들은 만물에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플라스틱은 만물 속에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학품이고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냐? 플라스틱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화학품이지만, 플라스틱의 원료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그것의 원재료는 하나님이 창조한 물질에서 얻은 것이다. 네가 누리는 것, 보는 것, 사용하는 것은 그 어떤 물건이든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속에서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가 어떤 인종이든, 어떤 생존 방식을 갖고 있든, 어떤 생활 환경에서 살든 하나님의 공급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9>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5)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인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사람 마음속에서 그만큼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높은 인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도 그만큼 커진다. 네가 아는 하나님이 공허하고 막연하다면 네가 믿는 하나님 역시 공허하고 막연하다. 네가 아는 하나님이 너의 범위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참된 하나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실제 행사를 아는 것,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전능한 면을 아는 것, 하나님 자신의 참된 신분을 아는 것,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아는 것,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서 나타내는 행사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는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지 여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앎이 글귀에만 국한되고, 네 소소한 체험이나 네가 따져 본 하나님의 은혜, 혹은 하나님에 대한 네 보잘것없는 증거에만 국한된다면,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은 애초에 참된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상상 속의 하나님이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참된 하나님은 만유를 주재하고, 만유 가운데서 거닐며, 만유 가운데서 다스리는 분이자, 전 인류의 운명을 주관하고, 만유의 운명을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이 하나님, 그의 사역, 그의 행사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다시 말해 지금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의 행사는 만물 가운데, 만물의 생존 가운데, 만물의 변화 법칙 가운데 뚜렷하게 나타난다.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어떤 행사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너는 하나님의 행사를 조금도 증거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전혀 증거하지 못하면, 너는 예전처럼 계속 네가 안다는 그 보잘것없는 하나님을 논하고, 네 사상과 네 좁은 마음속에 국한된 그 하나님을 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계속 이런 하나님을 논한다면, 하나님은 영원히 너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는지, 어떻게 하나님께 징계와 채찍질을 받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는지 등을 가지고서만 하나님을 증거한다면, 이런 증거는 너무 부족한 탓에 영원히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진정한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행사에서 그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한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권병을 알고, 하나님이 어떻게 전 인류를 공급하는지 알아야 한다. 네 일용할 양식과 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서 만물을 통해 전 인류에게 공급한다는 사실, 그리고 만물을 주재함으로써 전 인류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말들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소홀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말한 주제들이 너희 개인의 생명 진입과 무관하다고 생각해 지식이나 학설로만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너희가 이를 지식이나 학설로만 여긴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모든 주제를 말한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실제 행사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서다.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고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알아야 하나님을 알 기회나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을 알려면 무엇을 보면 되느냐? 그 사람의 외모를 보면 되느냐? 그 사람의 옷차림을 보면 되느냐?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면 되느냐? 그 사람이 풍부한 지식을 가졌는지를 보면 되느냐? (안 됩니다.) 그럼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느냐? 그 사람의 언행과 생각, 그 사람이 나타내고 드러내 보이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을 분별하고, 알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과 진실한 면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이 행한 실제적인 일 하나하나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야 한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자 유일한 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9>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6)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여러 가지 방식과 형식으로 만물의 균형을 이루었고, 산천과 호수의 생존 환경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식물의 생존 상태의 균형을 이루었다. 또한 각종 동물과 조류, 곤충의 생존 상태의 균형도 이루었다. 그 목적은 각종 생물이 하나님이 정한 법칙 속에서 번식하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물은 이런 법칙을 벗어날 수 없고 깨뜨릴 수도 없다. 이런 기본적인 환경 속에서 인류는 비로소 안전하게 대대로 번성할 수 있다. 어떤 생물이든 하나님이 정한 수와 범위를 초과하고 하나님이 주재하는 생장 속도와 생장 빈도와 생장 수를 초과하면 인류의 생존 환경은 각기 다른 정도로 파괴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 된다. 한 종의 생물의 수가 급증하면 그 생물은 인류의 식량을 빼앗고 인류의 수원을 파괴하며 인류의 삶의 터전도 파괴하게 된다. 그러면 인류의 번성과 생존 상황이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을 예로 들어 보자. 물은 만물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하다. 만일 쥐, 개미, 메뚜기, 개구리 등 각종 동물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 그에 따라 그들의 물 섭취량도 증가한다. 그들의 물 섭취량이 증가하면 고정된 식수원과 수역 범위 안에서 사람의 식수량과 수원은 감소하게 되고 인류에게 물이 부족해진다. 인류의 식수가 파괴되고 오염되며, 급증하는 각종 동물로 인해 식수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열악한 생존 환경에서 인류의 생존은 엄청난 위협을 받게 된다. 만일 한 종의 생물이나 몇 종의 생물이 정해진 수를 초과하게 되면 인류가 생존하는 공간의 공기, 온도, 습도, 그리고 공기에 함유된 성분까지 모두 각기 다른 해독을 입고 파괴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태에서 인류의 생존과 운명은 당연히 그런 생태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균형을 잃으면 인류가 호흡하는 공기는 파괴되고 인류가 마시는 물은 오염되며 인류에게 필요한 온도도 각기 다른 정도로 변화를 맞고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인류 고유의 생존 환경은 엄청난 영향과 도전을 받게 된다.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 환경이 파괴된 그런 상황에서 인류의 운명과 앞날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은 만물이 인류를 위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만물이 각기 어떤 역할을 하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인류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지도 알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계산을 하면서 자신이 창조한 만물의 여러 면을 주관하고 있다. 그래서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무척 중요하고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네가 만물 속의 생태 현상을 보았든, 만물 속의 자연법칙을 보았든 너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의 필요성에 대해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무지한 말로 하나님이 만물을 마련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에게 공급하는 것을 멋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법칙에 대해서도 멋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9>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7)

물질세계에 대해, 물질세계의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사람이 알지 못하면 관련 자료를 찾거나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실상과 근원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물질세계 외의 또 다른 세계, 영계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알아볼 방법이나 경로가 전혀 없다. 왜 이렇게 말할까? 인류가 사는 세상에서, 물질세계의 모든 것은 사람의 육의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사람들이 물질세계의 모든 것이 육의 삶과 육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알고 있거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대다수는 영계, 즉 다른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믿지 않는다. 사람은 영계를 볼 수 없고, 영계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또한 영계의 그 어떤 상황도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계는 물질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로서,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이 공개된 것이지만 인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은밀한 것이기에, 사람은 그 영계의 면면을 알아볼 방법을 찾기 어렵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영계의 면면은 하나님의 관리와 주재에만 관련되는 것이다. 나는 비밀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알고 싶어 하는 그 어떤 비밀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재와 관리 및 하나님의 공급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가 꼭 알아야 할 부분만 말해 주겠다.

먼저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생각하는 영계는 무엇이냐? 대략적으로 말하면 물질세계 외의 또 다른 세계로, 사람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런데 너희가 상상하는 영계는 어떤 세계냐? 너희가 볼 수 없는 세계이니 생각해 보기도 어렵겠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들으면 아무래도 생각하게 될 것이며, 자신의 생각을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할까? 많은 사람이 어릴 때 이런 경험들을 했을 것이다. 아주 무서운 이야기, 혹은 귀신이나 혼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너무 무서워했던 적이 있다. 왜 무서워할까? 그런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집 주위나 은밀한 곳 혹은 어두운 곳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서워 혼자 자지도 못하고, 특히 밤이 되면 방 안에 혼자 있지도 못하고 혼자 마당에 나가지도 못했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상상하는 영계이고, 무섭게 느껴지는 세계이다. 사실 누구나 어느 정도 상상하는 바가 있고, 살짝 느낄 수도 있다.

영계란 무엇이냐? 간단히 요약해 설명하자면, 영계는 물질세계와 구별되는 중요한 곳이다. 왜 중요한 곳이라고 말할까?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영계의 존재는 인류가 사는 물질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영계는 하나님이 주재하는 만물 속에서 윤회를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계의 역할이며 그 존재의 중요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의 존재 여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영계의 각종 움직임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히 관련되고, 그로 인해 인류의 생활 질서도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재와 관련이 있지 않으냐? 관련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관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이 볼 수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각종 천상의 규율과 법령, 행정 제도는 물질세계에 있는 그 어떤 국가의 법률과 제도보다 훨씬 엄격하고, 영계에 살고 있는 어떤 생령도 그것을 넘어서거나 범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는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관리와 관련이 있지 않으냐? 영계에는 명확한 행정령과 천상의 규율, 법령이 있고, 각 계층과 영역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본분을 엄격히 지키고 규율을 따른다. 그들은 천상의 규율을 어기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하나님이 어떻게 상선벌악(賞善罰惡)하고, 어떻게 만물을 관리하고 주재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으며, 게다가 하나님이 천상의 규율과 법령을 어떻게 실시하는지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인류가 사는 이 물질세계와 다르지 않으냐? 크게 다르다. 그것은 물질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천상의 규율과 법령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관리와 관련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과도 관련된다. 이런 것들을 듣고 나서, 너희는 이 이야기가 정말 나눌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그 속에 담긴 심오한 비밀을 참으로 알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느냐? (듭니다.) 영계란 이런 개념이다. 그것은 물질세계와 공존하고, 물질세계와 함께 하나님의 관리와 주재를 받고 있으나, 그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리와 주재는 물질세계보다 훨씬 엄격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8)

나는 이 인류를 세 부류로 나눈다. 첫 번째 부류는 이방인이다. 즉, 종교 신앙이 없는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이방인의 절대다수는 돈을 받들고, 이익을 숭상한다. 그들은 유물론자들이다. 물질세계만 믿고 윤회나 신령에 관한 설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이방인으로 분류했으며, 이것이 첫 번째 부류이다. 두 번째 부류는 이방인을 제외한 신앙이 있는 사람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도 나는 몇몇 큰 부류로 나눈다. 첫 번째는 유대교, 두 번째는 천주교, 세 번째는 기독교, 네 번째는 이슬람교, 다섯 번째는 불교다. 이렇게 다섯 가지 부류이다. 이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세 번째 부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이는 너희와 관련된다. 하나님을 믿는 이 부류의 사람은 현재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도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민이고, 하나는 봉사자다. 몇 가지 큰 부류로 명확히 구분했으니, 이제 너희 마음속에 인류의 부류와 등급이 확실히 나뉘었겠지? 먼저 이방인을 보자. 내가 어떤 사람이 이방인인지 말했다. 그럼 하늘을 믿는 사람은 이방인에 해당하느냐? 많은 이방인들은 하늘을 믿는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는 것 등은 다 하늘이 한다고 믿으며,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것도 하늘에 의지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라면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을 신앙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이방인에는 이런 사람도 포함된다. 알겠지? 범위를 혼동하지 마라. 두 번째 부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고, 세 번째 부류는 지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왜 인류를 이 몇 가지로 분류했겠느냐? (각 부류 사람들의 종착지와 결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이유다. 각 인종, 각 부류 사람마다 영계로 돌아갈 때 갈 곳이 다르고, 서로 다른 생사윤회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몇 가지 큰 부류로 나눈 이유다.

이방인의 생사윤회

이방인의 생사윤회부터 이야기해 보자. 사람이 죽으면 영계의 한 일꾼이 와서 데려간다. 데려가는 것이 무엇이냐? 데려가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이 영혼은 어떤 장소로 인도되는데, 이곳은 막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전문적으로 맞이하는 영계의 한 기관이다. [주: 죽은 후 누구나 가게 되는 첫 번째 장소로, 그 영혼에게는 낯선 곳이다.] 이곳에 도착하면 집행관이 첫 번째 관문을 지키는데, 여기서는 이 사람의 이름, 주소, 나이 및 생전에 행한 모든 일을 확인한다. 명부에 기록되어 있는 평생의 행적 사항을 정확하게 대조 확인하는 것이다. 각 항목의 대조 확인이 끝나면 일생의 행실과 한 일에 근거해 이 사람에게 벌을 내릴지 계속 사람으로 환생시킬지를 결정한다. 이것이 첫 관문이다. 첫 관문이 무서우냐? 그렇게 무섭지는 않다. 그저 어두컴컴한 낯선 장소에 간 것뿐이다.

두 번째 관문. 만약 이 사람이 일생 동안 나쁜 짓과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면 벌받는 곳으로 끌려가 처벌받을 것이다. 그곳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전담하는 곳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벌하는지는 이 사람이 생전에 죄와 악행을 얼마나 저질렀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두 번째 관문에서 벌어지는 첫 번째 상황이다. 사람이 생전에 저지른 나쁜 짓과 어떤 악행 때문에 벌을 받은 후 다시 윤회하게 될 때, 즉 다시 환생해서 물질세계로 가게 될 때, 어떤 사람은 계속 사람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동물로 태어난다. 바꿔 말하면, 이 사람이 영계로 돌아간 후 자신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벌을 받고, 또 자신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다음 윤회에서 더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다. 동물의 범위는 소일 수도, 말일 수도, 돼지일 수도, 개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새나 오리, 거위 등으로 환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동물로 환생했다가 죽은 다음 다시 영계로 돌아가면, 영계에서는 또 생전의 행적에 따라 이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환생시킬지의 여부를 결정한다. 대부분은 악행을 너무 많이 저지르고 지은 죄가 너무 심각하여 다시 윤회할 때, 일곱 번에서 열두 번까지 동물로 환생하게 된다. 일곱 번에서 열두 번은 무섭지 않으냐? (무섭습니다.) 무엇이 너희를 무섭게 하느냐? 사람이 동물이 되는 것,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사람에게 있어 동물이 되는 것의 최대 고통은 무엇이냐? 언어가 없고, 단순한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물이 하는 짓만 할 수 있고, 동물의 먹이만 먹을 수 있다. 동물의 단순한 사고와 단순한 몸짓 언어만 있고, 직립 보행하지 못하고, 인류와 소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류와 관련된 모든 활동은 동물과 무관하다. 요컨대, 만물 중에서 동물은 아주 저급한 생물로서, 동물로 사는 것은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이것이 바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행을 저지른, 죄가 너무 심각한 일부 사람에 대한 영계의 처벌이다. 처벌의 경중은 그 사람이 어떤 동물로 환생하는지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돼지로 환생하는 것이 개로 환생하는 것보다 나을까? 돼지로 사는 것이 개로 사는 것보다 편할까? 편치 않다. 그렇지? 소나 말로 사는 것이 돼지로 사는 것보다 편할까? (좀 편합니다.) 고양이가 되면 조금 편안하지 않겠느냐? 똑같이 동물로 살 것이라면 고양이로 사는 것이 소나 말이 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다. 대부분의 시간에 늘어지게 잘 수 있기 때문이다. 소나 말이 되면 비교적 고생스럽다. 그래서 소나 말로 환생하면 고생한다. 보아하니 이 벌은 가볍지 않구나. 개가 되면 소나 말이 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낫다. 개와 주인의 관계는 어쨌든 소, 말과 주인의 관계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많은 사람이 개를 기르고 있고, 기른 지 3년에서 5년이 되면 개가 사람의 말을 많이 알아들을 수 있다. 개가 주인의 말을 많이 알아들을 수 있고 주인을 많이 알게 되면 가끔 주인의 기분이나 요구에 맞춰 줄 수 있으니 주인은 개를 더 잘 대해 준다. 그럼 개는 좀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아플 때 더 많은 보살핌을 받게 되니, 이 개는 호강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개가 되는 것이 소나 말이 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이처럼 처벌의 경중에 따라 동물로 환생하는 횟수와 종류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이 생전에 저지른 죄가 너무 많아 벌을 받고 일곱 번에서 열두 번까지 동물로 환생하게 된다. 그렇게 이 사람이 벌받은 횟수가 다 차게 되면 다시 영계로 돌아와 어떤 곳으로 가게 된다. 그곳의 각종 영혼들은 벌을 다 받고 다시 인간으로 환생할 예정인 영혼들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가정으로 갈 것인지, 사람으로 환생한 후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등등에 따라 모든 영혼을 분류해 놓았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 와서 가수가 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그 부류의 무리에 넣고, 이 세상에 와서 상인이 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상인의 무리에 넣는다. 또 어떤 사람이 사람으로 환생해 과학 연구자가 될 것이라면 그 사람을 과학 연구자 무리에 넣는 것이다. 영혼들을 분류한 다음에는 시기에 맞춰, 결정된 날짜에 맞춰 현대인들이 이메일을 보내듯 하나씩 내보낸다. 이러면 하나의 윤회 과정이 완성된다. 한 사람이 영계에 간 그날부터 벌을 다 받을 때까지, 혹은 여러 차례 동물로 윤회한 후 다시 사람으로 윤회할 준비를 하기까지의 이러한 과정이 바로 하나의 온전한 과정인 것이다.

벌을 다 받은 후 더는 동물로 환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물질세계로 보내져 사람이 되는 걸까? 바꿔 말해서, 그들은 얼마나 있어야 인간 세상에 올 수 있을까? 이 주기는 어떻게 될까? 이 주기에도 시간 제한이 있다. 영계에서 하는 모든 일에는 명확한 시간 제한과 시간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을 숫자로 설명해 주면 너희는 금방 이해할 것이다. 짧은 시간 내에 환생하는 사람의 경우, 이 사람이 죽으면 영계에서는 바로 그를 다시 인간으로 환생시킬 준비를 마친다. 가장 짧게는 3일이지만, 어떤 사람은 3개월, 어떤 사람은 3년, 어떤 사람은 30년, 어떤 사람은 3백 년, 심지어 어떤 사람은 3천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럼 이 시간은 무엇에 따라 정해지겠느냐? 그것은 바로 이 영혼에 대한 물질세계와 인류 세계의 수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가 맡을 역할에 달린 것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환생하는 사람이라면 인간 세상에 이런 평범한 사람이 급히 필요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바로 환생할 수 있다. 3일 후에 바로 전생과 완전히 다른 가정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특별이란 인류 세계에 이런 사람에 대한 수요량이 많지 않아 그 역할을 할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인데, 이럴 경우 3백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즉, 이 영혼은 3백 년에 한 번 환생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영혼은 3천 년에 한 번 환생할 수도 있다. 왜 그럴까? 3백 년 혹은 3천 년 동안 인류 세계에 이 역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영계의 한곳에 가둬 두는 것이다. 공자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사람은 중국 전통문화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의 출현은 그 시대 사람의 문화, 지식, 전통, 그리고 사상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시대마다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영계에 머물러야 하고, 3백 년 혹은 3천 년간 충분히 머문 다음 한 번 윤회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 이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그는 한가롭게 지내야 한다. 그의 역할이 적고 그가 해야 할 일이 적기 때문에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영계의 한곳에 가두어진 채 한가로이 보내다가 인간 세상에 그가 필요할 때 바로 내보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다수 사람의 윤회 주기에 대해 영계에서 정한 시간상의 규정이다. 평범한 사람이든 특별한 사람이든 영계에서는 그들의 윤회를 처리하는 데에 적합한 규정과 정확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규정과 방법은 다 하나님이 지시한 것이다. 이는 어떤 일꾼이나 영계의 어떤 생령이 결정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9)

어떤 영혼이든 그의 윤회, 그가 이번 생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 그의 일생이 어떨지는 그의 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양한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온다. 하지만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고, 맡은 임무도 다르다. 어떤 임무가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빚을 갚으러 온다. 지난 생에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이번 생에 와서 갚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빚을 받으러 온다. 지난 생에 누군가에게 너무 많은 물건과 돈을 뺏겼기 때문에 영계에 돌아간 후 영계에서는 공정함의 차원에서 이번 생에 빚을 받으라고 보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갚으러 온다. 지난 생, 즉 전생에서 누군가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번 생에 다시 윤회할 좋은 기회를 얻어 은혜를 갚으러 환생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번 생의 윤회가 목숨을 뺏기 위해서인 사람도 있다. 누구의 목숨을 뺏겠느냐? 바로 전생에 자신의 목숨을 가져간 사람의 목숨이다. 어쨌든, 모든 사람의 현생은 전생과 엄청난 관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바꿔 말하면, 모든 사람의 현생은 다 전생의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가 생전에 B를 속여 많은 돈을 뺏었다. 그럼 A가 B에게 빚진 것이 아니겠느냐? A는 B에게 빚을 졌으니, B는 당연히 A에게서 빚을 받아 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두 사람이 죽으면 청산할 빚이 남는다. 다시 윤회할 때 A가 사람으로 환생하면 B는 어떻게 빚을 받아 내겠느냐? 한 가지 방식은 B가 A의 아들이 되어 빚을 받아 내는 것이다. A는 돈을 많이 벌고, B는 A의 돈을 흥청망청 쓴다. A가 돈을 얼마나 벌든 그의 아들이 돈을 물 쓰듯 쓰니 A는 늘 돈이 부족하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의 아들은 늘 각종 방식과 수단으로 그의 돈을 헤프게 쓴다. A는 답답해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난 어쩌다 이렇게 재수 없는 아들을 낳았을까? 다른 집 아들은 어쩜 다 그렇게 훌륭할까? 내 아들은 왜 패기도 없고, 재주도 안 배우고, 돈도 벌어 오지 않고 늘 내가 먹여 살려야 할까? 먹여 살리라면 살리겠는데, 왜 얼마를 줘도 부족하다는 걸까? 왜 바른 일은 하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하고 한량 짓에 도박이며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는 걸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고민하다 이렇게 결론 내릴 것이다. ‘아마도 전생에 녀석한테 빚을 졌나 보지. 갚자! 내가 갚아야 되는 건가 보다!’ 그러다 B가 마흔 혹은 쉰이 되고, 어느 날 정말 모든 빚을 받아 낸다면 갑자기 이렇게 깨달을 수 있다. ‘난 이제까지 좋은 일 한 게 없구나! 우리 아버지가 번 돈을 내가 다 헤프게 써 버렸어. 사람 노릇을 해야 해! 마음을 잡고 제대로 된 일을 하면서 잘 살아 보자. 다시는 아버지를 슬프게 하면 안 돼!’ 그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겠느냐? 왜 갑자기 달라졌겠느냐?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 (B는 빚을 다 돌려받았고, A는 빚을 다 갚은 데에 있습니다.) 이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일은 훨씬 전에 그 둘의 전생에서 발생했고, 전생의 일이 현세까지 이어진 것이니 누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A가 아들을 어떻게 가르치든 아들은 A의 말을 듣지 않고 빈둥거렸지만, 빚을 다 갚는 그날이 되면 가르칠 필요도 없이 아들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이것은 간단한 예지만 이런 예가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이 예가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느냐? (선하게 살고, 악행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악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악행에는 응보가 있다! 이방인 중 많은 자가 적잖이 악행을 저질렀고, 그들의 악행은 다 응보를 받았다. 그럼 응보는 아무 이유 없이 내려지는 것이냐? 모든 응보에는 배경이 있고, 원인이 있는 법이다. 네가 남의 돈을 편취하고도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여기느냐? 남을 속여서 돈을 얻어 내고도 결과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느냐? 그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나쁜 결과가 따른다!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이 있다고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고, 자기 행동이 불러온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이 간단한 예에서 A는 벌을 받고, B는 빚을 받아 냈다. 이것이 공평하지 않으냐?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질러서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은 영계의 관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설사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이런 천상의 규율과 법령 아래에서 살고 있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이런 현실을 피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0)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면 존재하는 것이고, 볼 수 없거나 아주 멀리 있는 것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생사윤회’는 없다, ‘벌받는’ 일이란 없다는 주장을 기꺼이 믿는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죄를 지은 다음 결국 벌을 받거나 동물로 윤회한다. 이방인 중 대다수는 모두 이런 악순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영계에서 모든 생령을 엄격히 관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네가 믿든 안 믿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감찰 범위를 벗어날 수 있거나 천상의 규율, 법령의 규정과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과 사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간단한 예는 네가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죄와 악행을 범해서는 안 되며, 범할 경우 응보가 있음을 알려 준다. 단순히 남을 속여 재물을 뺏은 사람이 이런 벌을 받았는데, 이 벌은 합리적이다. 흔히 벌어지는 이런 행위도 영계의 제재를 받고, 하나님의 법령과 천상의 규율의 제재를 받는다. 그래서 강간과 약탈, 기만과 사취, 절도와 강도, 살인과 방화 등등 심각한 범죄와 악행은 더더욱 서로 다른 수위의 처벌을 받게 된다. 서로 다른 수위의 처벌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경우는 시간으로, 어떤 경우는 처벌 방식으로, 또 어떤 경우는 환생하여 가는 곳으로 처벌의 수위를 정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입버릇이 나쁘다. ‘입버릇이 나쁘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늘 저주성 욕설과 악독한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악독한 말은 무엇을 보여 주느냐? 그 사람의 마음이 악독함을 보여 준다. 저주성 악담은 늘 이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고, 그 악담으로 인해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 이런 사람은 죽은 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고, 다시 환생하면 아마 벙어리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철저한 계산으로 늘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얄팍한 이해타산에 강해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을 많이 한다. 이런 사람은 다시 환생할 때 아마도 바보, 멍청이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늘 남의 사생활을 엿본다. 즉, 자신의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지나치게 많이 보고, 알면 안 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다시 환생하면 아마도 장님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살아 있을 때 발놀림이 좋아서 늘 치고받고 싸우며 나쁜 일을 많이 한다. 그러면 다시 환생할 때 아마도 절름발이나 외팔, 꼽추 같은 장애인이 될 것이다. 목이 비뚤어질 수도 있고, 한쪽 다리는 길고 한쪽 다리는 짧아 걸을 때 절름거릴 수도 있다. 이것이 살아 있을 때 저지른 악행의 정도에 따라 받게 되는 다양한 수위의 벌이다. 사시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아느냐? 사시인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지금 봐도 적은 편은 아니다. 사시인 사람들은 지난 생에 눈을 지나치게 써 가며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번 생에 눈이 사시가 된 것이다. 심각한 경우 장님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응보이다! 어떤 사람은 생전에 인간관계가 좋다. 주변의 가족, 친구, 동료, 혹은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배려하고, 혹은 지원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긴다. 이런 사람은 영계로 돌아가면 벌을 받지 않는다.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이방인의 범위에서 아주 좋은 사람인 셈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않고, 그저 하늘을 믿으며 ‘머리를 쳐들면 석 자 위에 신령이 있다’는 신조만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나쁜 짓을 덜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마음이 선하고, 선행을 즐겼다. 그래서 마지막에 영계로 돌아갔을 때 영계에서는 그에게 좋은 처분을 내려 바로 다시 윤회하게 한다. 그럼 다시 환생하여 어떤 가정으로 가겠느냐? 부유하지 않아도 집안이 평안하고, 가족 간에 화목하고, 평온하고, 즐겁게 지내고, 온 가족이 화기애애하여 살기 좋은 그런 가정으로 간다. 그리고 그가 어른이 되면 남은 반평생 동안 자식들이 출세하고 자손도 번성할 것이다. 또한, 집안의 운세가 좋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도 그의 전생과 큰 관계가 있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죽은 다음 환생해서 어디로 갈지, 남자가 될지, 여자가 될지, 사명은 무엇일지, 평생 어떤 일을 겪을지, 어떤 좌절을 겪을지, 얼마만큼의 복을 누릴지,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어떤 일들에 부딪힐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네 삶이 정해진 후 네 삶에서 발생하게 될 일은 네가 어떻게 피하려고 하든지, 네가 어떤 방식으로 피하려고 하든지 하나님이 영계에서 네게 정해 준 삶의 궤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환생할 때 네 삶의 운명이 이미 결정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모든 사람은 맞닥뜨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자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1)

너희는 하나님이 이방인의 생사윤회를 아주 치밀하고 엄격하게 검사하고 관리하는 것을 보았느냐? 우선 하나님은 영계에서 각종 규율과 법령, 제도를 제정하고 반포했다. 이를 반포한 후, 영계의 여러 직위에 있는 생령들은 하나님이 정한 대로 엄격히 집행하며 누구도 감히 이를 위반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세계에서 인류의 생사윤회, 동물 혹은 사람으로 교차 윤회하는 데에는 분명한 법칙이 있다. 이 법칙은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감히 이 법칙을 깨뜨리려는 사람도, 깨뜨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이런 주재가 있고 이런 법칙이 있기에 사람 눈에 보이는 이 물질세계가 일사불란하고 질서 정연한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이런 주재가 있기에 인류는 아예 보지 못하는 다른 세계와 평화롭게 공존하며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한 사람의 육의 생명이 끝난 후 영혼이 아직 살아 있는데, 이 영혼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 영혼은 여기저기 떠돌며 아무 데나 쳐들어가고, 심지어는 인류 세계의 생물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인류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식물과 동물에게도 해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를 입는 것은 인류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즉 이런 영혼이 관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짜 인류에게 해를 끼치고 나쁜 짓을 했다면, 영계에서는 이런 영혼에게 합당한 처분을 내린다. 심각하다면 이 영혼을 머지않아 소멸하여 없앤다. 혹은 가능하다면 이 영혼을 한곳에 두었다가 다시 윤회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영계에서는 각종 영혼을 절차와 규정에 따라 질서 있게 관리하는 것이다. 이런 관리가 있기 때문에 인류의 물질세계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이 물질세계에 사는 인류가 정상적인 사고와 이성이 있고 질서 있는 육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인류가 이런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육체 속에서 사는 사람이 대대로 번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2)

이방인에 대해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은 상선벌악이 아니냐? 이 범위를 벗어났느냐? (아닙니다.) 그럼 너희가 보기에 하나님이 일하는 데에 원칙이 있지 않으냐? 사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도 모르고, 더욱이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더 심각하게는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취하는 태도는 적대적이다. 그들이 이런 태도로 하나님을 대해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리는 하나님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성품에 따라 그들을 이렇게 질서 있게 관리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무엇으로 간주할까? 무지로 간주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즉 이방인 중의 대다수 사람들을 동물로 윤회하게 했다. 그럼 하나님의 눈에 이방인은 어떤 존재이냐? 다 짐승인 것이다. 하나님은 짐승을 관리하고, 인류를 관리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도 하나님은 똑같은 원칙으로 대한다. 이런 사람에 대한 관리와 행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법칙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방금 말한 이방인을 관리하는 하나님의 원칙에서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느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았느냐? (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만물 중의 무엇을 대하든지 하나님 자신의 원칙과 성품에 따라 일을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짐승으로 간주한다고 해서 자신이 정한 천상의 규율과 법령을 함부로 깨지 않는다. 하나님은 일을 할 때 원칙이 있어 절대 함부로 행하지 않으며, 어떤 요인에도 방해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든 자신의 원칙을 고수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하나님 본질의 일면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만물 중 어떤 사물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생물이든 다 진지하고 책임 있는 태도로 처리하고, 대하고, 경영하고, 관리하고, 주재한다. 여태껏 무책임하게 대한 적이 없다. 그리하여 선한 사람은 은혜롭게 후하게 대하고, 악한 사람은 인정사정없이 벌준다. 또한, 모든 생령을 각 시기의 인류 세계의 요구에 맞춰 제때에 정기적으로 적절히 안배한다. 그러면 모든 생령은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규칙적으로 윤회하며, 물질세계와 영계 사이를 규칙적으로 오가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3)

한 생령의 죽음, 육체 생명의 마감은 이 생령이 물질세계에서 영계로 들어감을 의미하고, 새 생명의 탄생은 이 생령이 영계에서 물질세계로 넘어와 자신이 맡고 담당한 역할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모두 영계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사람이 오는 것, 한 사람이 어떤 가정, 어느 시대, 어느 시각에 와서 어떤 역할을 맡는지는 모두 영계에서 하나님이 적절히 안배하고 정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일생,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은 영계의 안배대로 조금도 어긋남 없이 전개된다. 그리고 이 육의 생명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 끝나는지도 영계에서는 분명하게 알고 꿰뚫어 보고 있다.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주재하고 영계도 주재하고 있기 때문에 한 영혼의 정상적인 생사윤회를 그르치지 않고, 한 영혼의 생사윤회를 잘못 안배하지도 않는다. 영계의 각 직위에 있는 일꾼은 하나님의 지시와 하나님의 규정에 따라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며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인류 세계에서 사람에게 보이는 모든 물질 현상이 아무 혼란 없이 질서 정연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법칙에 따라 만물을 주재하기 때문이자 하나님의 권병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재하는 모든 것에는 인류가 살아가는 물질세계는 물론, 인류 뒤에 있는,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인류가 좋은 생활과 좋은 생존 환경을 원한다면 사람이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세계의 공급 외에, 인류를 위해 생령을 관리하는 영계의 질서 있는 공급도 필요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4)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생사윤회

방금 우리는 첫 번째 부류인 이방인의 생사윤회를 이야기했다. 이제 두 번째 부류인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생사윤회를 이야기해 보자.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생사윤회’라는 주제도 아주 중요하고, 너희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이다. 먼저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신앙’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해 보자. 유대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등 5대 종교가 있다. 이방인을 제외하고 이 5대 종교를 믿는 사람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높다. 이 5대 종교에 성직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일반 신도는 많다. 이 각 종교의 신도들은 죽은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간다. 여기서 말한 ‘다른’은 누구와 다르다는 말이냐?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아무 신앙도 없는 이방인과 다른 것이다. 그들은 죽은 후 다른 곳으로, 이방인이 죽은 후 갈 곳과 다른 곳으로 간다. 순서는 똑같다. 영계는 그들이 생전에 한 행위에 따라 그들을 판단하고 각각 달리 처리한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을 다른 곳에 두고 처리하느냐?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예를 들어 설명해 주겠다. 내가 말해 주기 전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이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믿기 때문이겠지! 적어도 완전한 불신자는 아니잖아.’ 그런 이유가 아니다. 여기에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불교를 예로 들어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겠다. 한 불교도가 있다. 일단 그는 불문에 귀의한 자로,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불교도가 삭발하고 승려나 비구니가 되면 그것은 속세를 떠나고 인간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그는 매일 독경ㆍ염불하며, 채식을 하고, 등잔불과 함께하는 청빈한 생활을 하며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살아간다. 그의 육의 생명이 끝날 때 그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해 볼 것이다. 하지만 죽은 후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모른다. 그는 그냥 맹목적으로 한 가지 신앙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고, 또 맹목적인 소망과 이상(理想)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육의 생명은 그렇게 끝난 것이고, 그런 다음 영계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 사람이 환생하여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그 사람의 생전 행위와 수행에 달렸다. 평생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곧 인간 세상으로 보내져 두 번째로 윤회하고, 다시 승려나 비구니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육의 생명은 첫 생과 같은 법칙에 따라 수행을 하고, 육의 생명이 끝나 영계로 돌아가면 영계의 검증을 받는다. 검증 후 문제가 없으면 계속해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 다시 불문에 입문해 수행을 계속한다. 이렇게 세 번에서 일곱 번의 윤회가 끝나고 다시 영계로, 그러니까 육의 생명이 끝날 때마다 갔던 그곳으로 돌아갈 때, 그의 여러 조건과 인간 세상에서의 행위가 영계의 계율에 부합하면 그때부터는 영계에 남는다. 더는 환생하여 인간이 되지도 않고, 인간 세상에 돌아가 나쁜 짓을 하고 벌받을 위험에 노출되지도 않는다. 다시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영계에 남아 그의 상황에 따라 직무를 하나 맡게 된다. 직무를 맡는 것이 바로 불교 쪽 사람들이 말하는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열반에 든다는 것은 주로 영계에서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더는 환생하지 않고, 더는 벌받을 일이 없으며, 환생하여 인간으로 살면서 생기는 번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그들이 또 환생하여 동물이 될 가능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영계에 남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관한 하나의 예이다. 그럼 열반에 들지 못한 사람은 어떻겠느냐? 열반에 들지 못한 사람은 영계에 돌아간 후 영계 일꾼의 검증과 확인을 거친다. 그 사람이 인간 세상에 있을 때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불교에서 규정한 대로 성실히 독경ㆍ염불하지 않고 오히려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면, 영계에서는 그의 악행에 따라 판결을 내릴 것이고, 그는 분명 벌을 받게 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럼 이런 사람은 언제 열반에 들 수 있겠느냐? 어느 생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봐야 한다. 영계에 돌아가 그 사람이 생전에 나쁜 짓을 한 사실이 없음이 확인되면 다시 환생하여 독경ㆍ염불하는 청빈한 삶을 보낸다. 살생하지도 않고, 육식하지도 않고, 세상사에 참견하지도 않고, 인간 세상의 번뇌도 멀리하며, 사람들과 어떤 분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아무런 악행도 저지르지 않고 나중에 영계로 돌아가면, 영계에서는 그가 행한 모든 행실을 검증한 후 다시 인간 세상으로 보낸다. 이렇게 역시 세 번에서 일곱 번의 윤회를 거치게 된다. 중간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그는 아무 지장 없이 열반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생사윤회는 이렇게 특별한 부분이 있다. 그들은 ‘열반에 들’ 수 있고, 영계에서 직무를 맡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과 다른 점이다. 우선, 영계에서 직무를 맡을 수 있는 이런 사람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살인이나 방화를 저지르지 않고, 간음하거나 약탈하지 않아야 한다. 남을 속여 재물을 빼앗고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면 열반에 들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악행에 관련되면 영계에서 내리는 벌을 피할 수 없다. 영계는 열반에 든 불교도를 적절히 배치할 것이다. 어쩌면 불교나 천지신명을 믿는 것 같은 사람을 관리하게 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일정한 범위를 정해 주어 관리하게 한다. 또 어쩌면 이방인만 관리하게 할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일꾼으로 배치할 수도 있다. 이는 각 영혼의 성격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한 예이다.

우리가 말한 다섯 가지 신앙에서 기독교는 좀 특별하다. 기독교는 어떤 점에서 특별하겠느냐? 그들은 참하나님을 믿는다. 참하나님을 믿는데 왜 여기에 분류되었느냐? 기독교를 일종의 신앙이라고 한 이상, 그것은 단순히 신앙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의식만 행하는 것이고, 일종의 종교일 뿐이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신앙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를 5대 종교 범주에 넣은 것은 기독교가 이미 유대교, 불교, 이슬람교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종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속한 대다수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는 더욱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성경으로 신학을 가르치고, 신학으로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고생하고 좋은 일을 하라고 가르치기만 한다. 바로 이런 종교이다. 신학 이론만 중시하는 종교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아무 관련이 없는 종교이다. 하나님을 따르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종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는 데에도 원칙이 있다. 이방인을 대하듯이 임의로 처리하거나 처분하지 않고, 불교도를 대하는 것과 똑같이 대한다. 기독교 신도가 생전에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엄격히 십계명, 율법과 계명에 따라 행하면서 일생을 보내면, 그들도 똑같은 윤회를 거친 후에야 그들이 말하는 소위 ‘휴거’될 수 있는 것이다. ‘휴거’되면 영계에 남아 직무를 맡고 영계의 일꾼이 된다. 마찬가지로, 만약 살아 있을 때 악행을 저지르고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면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징벌이나 처벌을 받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든다’는 것은 극락세계에 간 것이다. 그럼 기독교에서는 뭐라고 말하느냐? ‘천국에 들어간다’, ‘휴거된다’라고 말한다. 진짜 ‘휴거’될 수 있는 사람도 세 번에서 일곱 번의 윤회를 거친 것이다. 죽은 후 잠든 것처럼 영계로 돌아가는데, 합격이면 남아서 직무를 맡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더는 세상 사람들처럼 단순하고 일반적인 윤회를 겪지 않는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결말, 그들이 추구하는 결말은 불교의 열반과 표현만 다를 뿐 다 비슷하다. 하나님은 이 몇 개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엄격히 종교적 규율에 따라 행한 사람에게 적절한 종착지나 갈 곳을 마련해 알맞게 처리한다. 이는 극히 합리적이지만 사람의 상상과는 다르다. 그렇지 않으냐? 기독교인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듣고 나니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그들을 위해 불공평함을 호소하고 싶거나 유감스러운 느낌은 없느냐? (조금 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들도 자업자득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고 실제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은 전 인류, 각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거부하는 것이냐? 왜 미친 듯이 대적하고 박해하는 것이냐?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 정도의 결말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 것이다. 너희는 왜 유감스럽다고 생각하느냐? 그들에게는 이런 처분도 이미 관대한 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정도에 따르자면 그들을 멸해 버려야 마땅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을 평범한 종교로 간주해 처리한다. 그럼 다른 종교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모든 종교의 근본 취지는, 많이 고생하고,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좋은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욕하지 말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시비를 멀리하고, 좋은 일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리가 이러하다. 그러니 신앙을 가진 사람, 즉 모든 종교인들이 엄격히 종교적 규율에 따라 행동하고 사는 동안 과도한 잘못이나 죄를 저지르지 않으며 세 번에서 일곱 번의 윤회를 거치면, 그런 사람들은 거의 다 영계에 남아 직무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이 많으냐? (많지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 많지 않다고 하느냐? 사람이 좋은 일을 하기란 어렵고, 규칙이나 계율을 지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 있다. 너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하면 지킬 수 있겠느냐? 너에게 회색 도포를 입고 온종일 불당에서 독경ㆍ염불하라면 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고 계명과 율법도 있다. 그것들을 지키기 쉬우냐? 쉽지 않겠지? 욕하지 말라는 그 한 가지도 사람은 지키지 못한다. 참지 못하면 욕한다. 뱉은 욕은 주워 담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느냐? 저녁에 죄를 자백하겠지? 가끔 욕을 하고도 마음속에 계속 증오심을 품고 있고, 더 나아가 언젠가 다시 혼내 주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요컨대, 사람이 죽은 교리대로 살면서 죄를 짓지 않고 나쁜 짓을 하지 않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종교에서 수행하여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너는 각 종교에 사람이 그렇게 많으니 영계에 남아 직무를 맡을 수 있는 사람도 너무 많지 않겠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의 생사윤회는 대충 이렇다. 특별한 점은 그들이 ‘수행하여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이방인과 다른 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5)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생사윤회

이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생사윤회를 이야기해 보자. 이는 너희와 관련되는 일이니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을 몇 부류로 나눌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 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선민에 대해 말해 보자. 이 부류의 사람 수는 많지 않다. ‘하나님의 선민’은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가 생겼을 때 하나님을 따를 일부 백성을 택했는데, 그들을 약칭하여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이들을 택할 때는 특별한 범위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범위란 이들은 하나님이 중요한 사역을 할 때마다 반드시 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특수성이다. 그럼 의미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만큼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즉, 하나님은 이들을 만들고, 이들을 온전케 하고, 경영 사역이 끝날 때 이들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 의미가 크지 않으냐? 그래서 이 선민들은 하나님께 아주 중요한 존재다. 이들은 하나님이 얻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 봉사자는 어떠하냐? 우선 운명적으로 정해졌다는 것은 제쳐 두고 봉사자의 유래를 말해 보자. ‘봉사자’는 글자 그대로 봉사하는 자다. 봉사하는 자들은 장기적이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임시로 불러 모아 고용한 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방인 가운데서 택한 것이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봉사자로 정해졌을 때 그들의 전생은 어쩌면 동물일 수도 있고, 이방인일 수도 있다. 이것이 봉사자의 유래이다.

다시 하나님의 선민을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의 선민도 죽은 후에 어떤 곳으로 가게 된다. 이곳은 이방인이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과 완전히 다른 곳이다. 이곳은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곳이다. 하나님의 선민이 이곳에서 직접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이곳은 영계의 그 어떤 곳과도 다른 곳이며, 하나님의 선민이 죽은 다음 가는 곳이다. 그들도 죽으면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을 엄격히 심사한다. 무엇을 심사하겠느냐? 그들이 일생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걸어온 길을 심사한다. 그동안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있는지, 하나님을 욕한 적이 있는지, 심각한 죄나 악행을 저지른 적이 있는지를 심사하는 것이다. 그런 심사를 거친 후 그 사람을 내보낼지 남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내보낸다’는 것과 ‘남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내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를 근거로 그를 하나님의 선민 대열에 계속 남겨 둘지를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남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말세에 만들고자 하는 인류의 범위에 계속 남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남은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특별한 배치를 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각 시기마다 이런 사람을 보내 사도가 되게 하거나 교회를 부흥시키는 사역 혹은 교회를 목양하는 사역을 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방인처럼 한 세대 또 한 세대 빈번하게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필요와 사역 단계에 따라 윤회한다. 이런 사람은 자주 환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 ‘환생’에 법칙이 있느냐? 몇 년에 한 번씩 환생하는 것이냐? 그런 빈도가 있느냐? 역시 없다.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하나님의 사역 단계에 따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환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해진 것은 없다. 유일하게 정해진 것은, 말세에 하나님이 마지막 단계 사역을 할 때 선민들이 모두 환생한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의 환생’은 맨 마지막 윤회를 의미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이 마지막 단계 사역에서 거둘 효과를 놓고 말한 것으로, 하나님은 마지막 단계에서 이 선민들을 완전히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 이들이 마지막 단계에서 만들어지고 온전케 되면 더는 예전처럼 윤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으로 사는 과정, 윤회의 과정이 완전히 끝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남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럼 남지 못한 사람은 어디로 가겠느냐? 남지 못한 사람에게도 적합한 곳이 있다. 우선, 그의 악행, 그가 저지른 잘못과 죄악으로 인해 벌을 받기 마련이다. 그가 벌을 받은 후, 하나님은 적절한 상황에 따라 그를 이방인이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안배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 하나는 벌을 받은 후 다시 윤회하여 어쩌면 어떤 종교를 믿으며 살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이 될 수도 있다. 이방인이 되면 모든 기회가 사라진다. 하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이 되면,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 되면 다시 하나님의 선민 대열로 돌아올 수도 있다. 여기에는 복잡한 관계가 있다. 어쨌든, 하나님의 선민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짓을 하면 마찬가지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언급했던 바울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아직도 벌을 받고 있다. 요점을 알아들었느냐? 하나님 선민에 속한 사람은 고정되어 있느냐? (대부분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이 고정되어 있다. 일부는 왜 고정되어 있지 않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악행을 저지르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 자를 각 인종, 각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더는 희망이 없고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이것이 하나님 선민의 생사윤회에 관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6)

다음은 봉사자의 생사윤회에 관한 것이다. 방금 봉사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얘기했다. 다시 말해서, 봉사자는 전생에 이방인과 동물을 넘나들며 환생했던 자들이다. 마지막 이 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이런 사람을 일부 택했는데, 이는 특수한 무리이다. 이런 사람을 택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봉사’라는 단어가 고상하게 들리지도 않고 모든 사람의 바람에 부합하지도 않겠지만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지 봐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의 존재도 특별한 의미가 있고, 이들이 하는 역할 역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봉사자의 역할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선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주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고 하나님의 선민을 온전케 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다. 이들이 힘을 쓰든, 어떤 사역을 하든, 혹은 어떤 직무를 맡든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냐? 높이 요구를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충성스러운 봉사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봉사자도 충성을 다해야 한다. 네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든 하나님이 어떤 이유로 너를 택했든 너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에 대해, 네가 맡은 사역에 대해, 이행할 본분에 대해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봉사자가 충성을 다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흡족게 한다면, 어떤 결말을 얻을 수 있겠느냐? 살아남을 수 있다. 봉사자에게 있어 살아남는 것은 복이 아니냐? 살아남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 복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지위 면에서 하나님의 선민과 좀 다르고 차이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봉사자가 금생에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민과 같지 않으냐? 최소한 금생에 누리는 것은 같다. 이는 너희도 부인하지 않겠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공급, 축복을 누리지 못한 자가 있느냐? 누구나 풍성하게 누렸다. 봉사자의 신분은 봉사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이들도 피조물의 일원이며, 그저 이들이 맡은 역할이 봉사자일 뿐이다.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봉사자는 하나님의 선민과 차이가 있느냐? 사실상 차이는 없다. 명칭과 본질, 맡은 역할에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불평등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들을 봉사자로 정했겠느냐? 이에 대해 너희는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봉사자는 이방인 가운데서 온 자들이다. 이방인 가운데서 왔으니 이들의 본바탕은 좋지 않다. 이들은 전부 무신론자들이다. 이들의 본바탕을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로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하나님이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들에게는 앞서 말했던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갖췄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이나 인식을 갖췄겠느냐?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봉사자의 유래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봉사하라고 한 이상 이들에 대한 요구 기준이 있다. 결코 이들에게 멸시나 대충 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명도 없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이들을 우대하며 이들에 대한 요구 기준이 있다. 그 요구 기준은 방금 너희도 말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말을 잘 듣고, 제대로 봉사하고, 끝까지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충성스러운 봉사자로서 마지막까지 봉사하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을 완벽히 완수한다면, 너의 금생은 가치 있게 되고, 너는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네가 좀 더 힘을 내고 노력한다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좀 더 힘을 내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좀 얘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좀 깨달을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좀 헤아릴 수 있게 된다면, 봉사자인 너에게 전환점이 있게 된다. 이 전환점은 무엇일까?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네 행위와 개인적인 소망과 추구에 따라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의 선민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환점이다. 이 전환점이 봉사자에게 가져다줄 최고의 이점이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이 된다는 것은 더는 이방인들처럼 사람과 동물을 넘나들며 윤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 좋은 일이고 좋은 소식이다. 바꿔 말하면, 봉사자의 상황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봉사자로 정했다고 해서 그가 영원히 봉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은 개인의 행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우하고 서로 다른 답을 줄 것이다.

하지만 봉사자가 끝까지 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봉사하는 동안 어떤 사람은 중도에 포기한 채 하나님을 저버리고 떠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쁜 일들을 많이 저지를 수도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 상당한 파괴를 초래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히거나 하나님을 욕하는 등등의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악행은 어떤 결과를 의미하느냐? 이 모든 악행은 봉사자의 봉사 중단을 의미한다. 이는 네가 형편없이 봉사한 데다 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네 봉사가 크게 자격 미달이어서 더는 봉사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너의 봉사자 자격을 박탈하고, 너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너는 봉사하기 싫은 것이 아니었느냐? 늘 나쁜 짓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느냐? 늘 충성심이 없지 않았느냐? 그럼 좋다. 이 일은 해결하기 쉽다. 너의 봉사자 자격을 박탈하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봉사자 자격이 박탈되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 봉사자의 결말이 이미 선포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더는 봉사할 자격이 없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봉사를 더는 원치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해도 소용없다. 그 지경에 이르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봉사자는 되돌아올 길이 없다. 그럼 하나님은 그런 봉사자를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단지 그 사람이 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겠느냐? 아니다. 아니면 단지 그 사람이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겠느냐? 아니면 그 사람이 마음을 돌릴 때까지 한쪽에 내버려 두고 기다리겠느냐?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봉사자에 대해 그렇게 큰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있어서 사람의 태도가 이렇다면, 그의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봉사자 자격을 박탈하고, 다시 그를 이방인 가운데로 돌려보낼 것이다. 이방인들 가운데로 보내지면 그 봉사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방인과 똑같이 사람과 동물을 넘나들며 윤회하고, 이방인이 영계에서 받는 벌을 받게 된다. 어떻게 처벌할지는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사역과 아무 관계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삶의 끝일 뿐만 아니라 그의 운명의 끝이자 운명에 대한 판결이다. 그러므로 봉사자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결과 역시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봉사자가 끝까지 봉사하지 못하거나 중도에 봉사자 자격이 박탈되면, 그 봉사자는 이방인들 가운데로 보내지고, 이방인들 가운데로 보내지면 짐승처럼 취급된다. 생각이나 이성이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제는 알겠지?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의 생사윤회에 대한 처리는 이렇다. 듣고 나서 어떤 느낌이 드느냐? 내가 방금 한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에 관한 이야기를 예전에 한 적이 있느냐? 사실 예전에 한 적이 있지만 너희가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를 공의롭게 대한다. 어느 모로 보나 다 공의롭다. 그렇지 않으냐? 흠잡을 만한 부분이 있느냐? “하나님은 왜 선민에게 그토록 관대하게 대하십니까? 왜 봉사자에게는 그 정도의 인내밖에 쓰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자가 있느냐? 봉사자를 위해 불공평을 호소하고 싶은 자가 있느냐? “봉사자에게 좀 더 시간을 주고, 좀 더 인내하고, 좀 더 관대하게 대할 수 없습니까?” 이 말은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봉사자가 되는 것도 사실 저희에게 행운이기 때문입니다.) 봉사자가 된 것은 사실 행운이다! 봉사자라는 호칭이 없고 봉사자의 사역이 없었다면, 봉사자들은 어디에 있겠느냐? 이방인 가운데서 짐승과 생사를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들이 하나님 앞으로 와서, 하나님 집으로 와서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이것은 엄청난 은혜다! 하나님이 네게 봉사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 앞으로 올 기회가 없을 것이다.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자. 네가 불교인 중 열반에 든 사람이 된다 해도 너는 영계에서 기껏해야 심부름꾼밖에 못 한다.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도,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이 네게 주는 사랑과 축복을 느낄 수도,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간단한 직무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저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하기만 한다. 하지만 봉사자가 이 단계 사역에서 얻는 것은 참으로 많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은혜와 축복을 느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말씀과 진리를 누릴 수 있다. 정말이지 얻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네가 봉사자로서 봉사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남겨 둘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남겨 둘 수 없다. 네게 그리 대단한 요구를 하지도 않았는데 무엇 하나 잘 해내지 못하고, 자신의 본직 사역을 지키지 못한다면 분명 하나님은 너를 남겨 둘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하나님은 너를 총애하지 않지만 불공평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으로, 어떤 사람을 대하든, 어떤 피조물을 대하든 하나님은 다 그렇게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7)

영계에 있는 각종 생령들도 잘못을 저지르거나 일을 잘못 수행하면 하나님은 그에 해당하는 천상의 규율과 법령에 따라 그들을 처벌한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수천 년 경영 사역 중에서, 잘못을 저질렀던 일부 일꾼들은 멸망되었고, 어떤 일꾼들은 지금까지도 구금되어 벌을 받고 있다. 이것은 모든 생령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사실이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거나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게 된다. 이 점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민이나 봉사자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계에서든 물질세계에서든 하나님이 일을 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볼 수 있든 없든 하나님이 일을 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일관되게 자신의 원칙에 따라 만물을 대하고 처리한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방인 가운데서 비교적 착하게 사는 사람을 잘 대해 준다. 그리고 각 종교에서 좋은 일을 하고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며, 그들에게 하나님이 다스리는 만물 속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선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에 따라 그 누구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잘 대해 주고 사랑한다. 다만 이방인부터 신앙이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선민까지, 하나님이 각 부류의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방인을 보아라.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을 짐승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만물 속에서 그들은 어느 누구나 먹고 살 수 있고, 머물 자리가 있으며, 정상적인 생사윤회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악을 행한 자는 징벌하고, 선을 행한 자는 하나님이 축복하고 잘 대해 준다. 그렇지 않으냐? 신앙이 있는 사람의 경우, 엄격하게 종교 규칙을 지키며 한 생 한 생 살아가면, 결국 그들의 윤회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공정한 결론을 내린다. 오늘의 너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선민이든 봉사자든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행정 법령과 조례에 따라 이들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이들의 결말을 정한다. 이 몇 부류 사람 중에서, 신앙이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모든 종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생존할 공간을 주지 않았느냐? 유대교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간섭했느냐?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지? 기독교는 어떠냐? 역시 간섭하지 않고, 그들이 자신들의 질서에 따라 그렇게 지키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지도 않고, 계시해 주지도 않으며, 뭔가를 밝히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렇게 믿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믿으라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천주교인은 마리아를 믿고, 마리아를 통해 예수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의 신앙은 이렇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바로잡아 준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도 일정한 생존 공간을 주었다. 이슬람교인과 불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들에게도 일정한 범위를 그들만의 생존 공간으로 정해 주었고, 그들의 신앙도 간섭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질서가 있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권병을 가지고 있지만 권병을 함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만물을 일사불란하고 질서 정연하게 배치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이자 하나님의 전능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8)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는 분이자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했고 또 다스리고 있으며, 동시에 만유를 주재하고 만유에게 공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위이고, 하나님의 신분이다. 만유에게 있어, 또 만물에게 있어 하나님의 진짜 신분은 창조주이자 만물의 주재자이다. 하나님은 이런 신분을 지녔고 하나님은 만물 중에서 유일무이한 분이다. 인류, 그리고 영계의 어떤 피조물도 어떤 방식이나 명목으로든 하나님의 신분과 하나님의 지위를 사칭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신분을 지닌 분, 이런 능력과 권병을 지닌 분, 만물을 주재할 수 있는 분은 만물 가운데에 단 한 분밖에 없으며, 그분이 바로 우리의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만물 가운데서 살고 만물 가운데서 다닌다. 그는 지극히 높이 올라 만물 위에 있을 수도 있고, 자신을 낮춰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의 일원이 되어 사람과 대면하거나 동고동락할 수도 있다. 동시에 그는 만유를 주관하며 만유의 운명과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고, 더욱이 전 인류의 운명과 나아갈 방향을 인도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은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이 경배하고 순종해야 할 분이자 마땅히 알아야 할 분이다. 그러므로 네가 인류 중의 어느 부류에 속하든, 네가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경외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놓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모든 사람,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의 유일한 선택이자 필수 선택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권병과 공의로운 성품,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는 방식이 모두 유일무이함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참된 신분과 하나님 자신의 지위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피조물 중에서, 영계에 있거나 인류 가운데 있는 어떤 생명체라도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사칭하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 자신의 신분, 하나님 자신의 능력, 하나님 자신의 지위를 지닌 창조주이자 주재자가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명확히 알고 명심해야 할 것으로, 하나님에게든 사람에게든 다 매우 중요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99)

하나님을 대하는 인류의 다양한 태도

한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처리 방법도 결정된다. 여기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일부 방식을 열거해 보겠다. 하나님을 대하는 이런 방식과 태도가 옳은지, 틀린지 들어 보거라. 다음 일곱 부류 사람의 태도를 보자.

1)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황당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전설에서 들은 보살이나 성자(聖者)처럼 만나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식사 후 향 하나를 피우길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때 종종 이런 충동을 느낀다. 지금 믿고 있는 하나님이 자신들이 마음속으로 동경하는 그 성자처럼 ‘만나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식사 후 향 하나를 피우는’ 대우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2)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구제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부처’, 자신을 고해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살아 있는 부처’로 여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부처로 여기며 섬긴다. 향을 피우거나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제물을 바치지는 않지만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하나님은 단지 선행하고, 베풀고, 살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욕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성실하게 살고,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 마음속의 하나님이다.

3)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이 숭상하는 위인이나 명사로 여긴다. 예를 들어, 위인이 즐기는 말하기 방식, 말할 때의 어조,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 단어 선택법, 말투, 제스처, 행동거지 등은 모두 그들이 따라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완전히 닮고 싶어 하는 것이다.

4)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통치자로 여기며 그는 지고지상한 분이고, 누구도 감히 거스를 수 없으며, 거스르는 사람은 그의 제재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런 통치자를 숭상하는 이유는 이런 통치자들이 그들 마음속에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사상, 행동 양식, 권세와 본성은 물론 통치자들의 취미와 사생활까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되고, 그들이 관심을 두는 문제이자 일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도 한 명의 통치자로 여기며 숭상한다. 이는 아주 황당한 믿음법이다.

5)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얕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리 많은 체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들의 우상으로 여기며 경배한다. 이 우상이 바로 그들 마음속의 하나님이다. 바로 그들이 무릎 꿇고 절할 대상이자 경외할 대상이다. 또한 그들이 따르고, 본받을 대상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우상으로 삼고, 이 우상을 자신들이 평생 추종할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투를 따라 하고, 겉으로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본받는다. 늘 유치해 보이는 일을 하고, 순수하고 정직해 보이는 일을 한다. 심지어 이 우상을 자신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반려나 친구로 여기며 추종한다. 그들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

6)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도를 들었음에도 속으로는 하나님을 대하는 유일한 방식(직역: 취지)이 아부와 아첨, 혹은 현실에 맞지 않는 자랑이나 찬미를 벗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렇게 대하지 않으면 언제든 하나님의 노여움과 미움을 살 수 있으며, ‘미움을 산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처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마음속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다.

7) 그리고 대다수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정신적 의지처로 삼는다. 세상을 살다 보면 평안하지 않고 즐겁지 않은 데다 위안을 얻을 곳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찾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게 된 후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며 다행이라 여긴다. 그들은 드디어 정신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정신적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따른 후부터 그들의 정신은 즐거워졌고 생활은 충실해졌다.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처럼 흐리멍덩하게 지내지도, 짐승처럼 살지도 않고, 자신의 인생에 희망이 생겼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하나님이 그들의 정신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이런 하나님을, 자신의 정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즐거움을 안겨 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정신적으로 의탁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상 하나님을 대하는 여러 부류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들이 너희 가운데 존재하느냐? (네.)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속에 이런 태도 중 어느 하나라도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겠느냐? 마음속에 이런 태도 중 어느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겠느냐?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네가 믿는 것이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면 네가 믿는 것은 누구겠느냐? 네가 믿는 것이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면 네가 믿는 것은 우상일 수도, 위인일 수도 있고, 보살일 수도 있다. 네가 섬기는 것이 마음속의 부처일 수도 있고, 네가 믿는 것이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일 가능성은 더 크다. 요컨대, 사람들의 여러 가지 믿음법과 태도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자기 마음속에 끌어다 놓고, 자신의 상상을 하나님께 갖다 붙이며,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상상을 유일무이한 하나님과 나란히 둔 다음 이를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부당한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이 참하나님을 버리고 거짓 신을 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을 저버리고 대적하며, 참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이런 믿음법을 고수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이런 믿음법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겠느냐?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그 반대다. 사람이 자기 관념과 상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도에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것은 네가 추구하는 방향이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방향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남원북철(南轅北轍)’ 이야기를 들어 봤느냐? 바로 이렇게 수레의 끌채는 남을 향하고 바퀴는 북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황당하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네가 힘을 쓸수록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힘을 쓰기 전에 반드시 방향의 옳고 그름을 확인하거라. 함부로 힘을 쓰지 말고 자신에게 꼭 이렇게 묻거라. ‘내가 믿는 이 하나님이 만물의 주재자일까? 내가 믿는 이 하나님은 단지 내 정신적 의지처일까? 그가 내 우상일까? 내가 믿는 이 하나님이 내게 요구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인정할까? 내가 행한 모든 것,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일까? 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맞추고 있는 것일까? 내가 걸어온 길은 하나님이 허락하고 인정하는 길일까?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믿음에 만족할 수 있을까?’ 이렇게 늘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반복적으로 물어보아라.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어 반드시 뚜렷한 의식과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200)

하나님이 요구한, 인류가 하나님께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

사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최소한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말씀도 선포하지 않고, 어떤 성품도 나타내지 않고, 어떤 행사도 나타내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있어 하나님을 아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추측해야 하는데, 이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많은 말씀을 했고, 수많은 사역도 했고, 사람에게 많은 요구도 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행한 많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혐오하는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는지를 알게 했다. 사람은 이런 것을 알고 난 후에 자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더 이상 막연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막연하거나 공허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거기에 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언어로 모든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을 알려 주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하나님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르고, 사람이 왜 하나님을 믿는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대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 인류에 대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요구는 5가지다. 바로 진심으로 믿고, 충실히 따르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진실로 알고, 진심에서 우러나와 경외하는 것이다.

이 5가지는 바로 더 이상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상상과 막연한 관점, 어떤 공상적 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지 말라는 요구이다. 또한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딴마음을 품거나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하나님을 충실히 따르라는 요구이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요구를 할 때,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너를 심판할 때, 너를 책망하고 훈계할 때, 너를 징계하고 칠 때 너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이유도 묻지 말고, 조건을 달지도 말고, 원인은 더더욱 말하지 말고, 반드시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과 무관한 말들을 하나님께 억지로 갖다 붙인다. 그들은 그런 말이 하나님에 대한 앎의 가장 정확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상상과 추론에서 비롯된, 지식을 통해 도출한 견해들이 하나님의 본질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임을 모른단 말이냐?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그저 알아보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길 원한다. 설사 너희가 한 마디만 할 수 있다 해도, 너희가 티끌만큼만 알고 있다고 해도 그 티끌만 한 앎이 정확하고, 진실하고,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 부합한 것이길 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실제에 맞지 않게 멋대로 찬미하고 자랑하는 것을 혐오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공기처럼 생각하는 것을 더욱 혐오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주제를 논할 때 되는대로 말하고, 멋대로 논평하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을 혐오하며,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여겨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아무렇게나 떠벌리며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하나님에 관한 주제를 논하는 사람은 더욱 혐오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가지, 즉 진심에서 우러나와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요구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정확하고 참된 인식이 생기게 되면,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게 된다. 이 경외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또한 기꺼이 원한 것이지 하나님이 강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께 어떤 좋은 태도, 좋은 모습, 표면적인 좋은 행동을 보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갖길 원한다. 이 경외는 네 생명 성품의 변화로 인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앎,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앎, 하나님 본질에 대한 앎으로 인해,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이라는 말로 경외를 정의했는데, 이는 인류에게 하나님에 대해 사람이 가져야 할 경외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함을 알리기 위함이다.

지금 이 5가지 요구를 보아라. 너희 가운데 그중 앞 3가지 요구 사항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바로 진심으로 믿고, 충실히 따르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말이다. 너희 가운데 있느냐? 5가지를 말하면 분명 너희 가운데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3가지로 범위를 좁혔으니 자신이 달성했는지 가늠해 보아라. ‘진심으로 믿는다’, 이 요구는 쉽게 달성할 수 있느냐? (쉽지 않습니다.) 이것도 달성하기 어렵다. 사람은 늘 하나님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충실히 따르는’ 것은 어떠하냐? ‘충실’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딴마음이 없는 일편단심을 말합니다.) 딴마음이 없는 일편단심이라, 정말 잘 말했다! 그럼 너희는 이 요구 사항을 달성할 수 있느냐?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지금 아직 달성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럼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달성했느냐? (못했습니다.) 역시 달성하지 못했다. 늘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고, 말을 듣지 않는 데다가 순종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말을 듣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것은 사람이 생명 진입 후 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3가지 요구 사항으로, 너희는 아직 달성할 수 없다. 그럼 지금 너희의 잠재력은 크지 않으냐? 지금 내 말을 다 듣고 나니 조급해지지 않느냐? (조급해집니다.) 조급해지는 것이 맞다. 조급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너희 때문에 조급하다. 나머지 2가지 요구는 말하지 않겠다. 분명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희가 조급해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목표를 확정했느냐? 어떤 목표와 방향으로 추구하고 노력해야겠느냐? 목표가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솔직하게 알려 주겠다. 너희가 이 5가지 요구를 달성할 그때면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다. 각 요구마다 하나의 지표이다. 모두 생명 진입이 성숙해졌다는 하나의 지표이자 최종적 목표이다. 그중 어느 한 가지를 따로 꺼내서 자세히 설명하며 너희에게 요구한다 해도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많은 고통을 받고, 많은 공을 들여야만 가능하다. 너희 모두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겠느냐? 모두 암 환자가 수술대에 오르는 것과 같은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의 만족을 얻으려면, 고통받지 않고 공들이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렇게 많은 도를 듣긴 했지만 들었다고 해서 이 도가 바로 네 것이 됐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도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네 개인의 생명, 네 개인의 생활 속으로 가져가 이 말과 도가 네게 생존의 방향을 알려 주고, 네 생명에 생존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불어넣게 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이 말들을 들은 보람이 있는 것이다. 내가 한 이 말들이 네 삶에 아무런 전환점을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네 생명에 존재의 가치를 불어넣어 주지도 못하면 이 말들은 헛들은 것이 된다. 알았지? 알았다면 남은 일은 모두 너희 자신의 몫이다. 반드시 공을 들여야 한다! 어떤 일이든 반드시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건성건성 대하지 말아라. 세월은 빨리 흐른다. 사실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지 벌써 십여 년이 됐다. 그럼 한번 돌아보아라. 십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사람의 일생에 이런 십여 년이 몇 번이나 더 있겠느냐? 시간은 길지 않다. 하나님이 사역할 때 너를 기다려 주진 않을까, 너에게 기회를 남겨 두진 않을까, 하나님이 같은 사역을 다시 하진 않을까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너의 지난 십 년은 되돌릴 수 있겠느냐? 하루가 지날 때마다, 네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네게 남은 세월은 하루씩 짧아진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일생의 중대사로 삼고 대해야 한다. 먹고 입는 것보다, 네 인생의 어떤 일보다 중요하게 대하면 수확이 있을 것이다! 네가 늘 심심풀이로 믿고, 믿음에 전념하지 못하고, 늘 건성으로 믿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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