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4]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3)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 많은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실제 하나님과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또는 재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께 어느 정도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순종은 조건부 순종이자, 개인의 앞날을 전제로 한 순종이며,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대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느냐? 네가 그저 장래와 운명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낫다. 너의 그런 ‘믿음’은 자기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고, 자기 위안이며 자아도취다. 너의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너는 결국 하나님을 대적한 것으로 인해 징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구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실천하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약 네 본심이 정말 이러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높이고 너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 이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고,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만약 네 본심이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네가 말하고 행동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 심지어 너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너의 말투가 부드럽고, 태도가 온화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너의 일거수일투족과 표정이 적절하여 순종하는 자처럼 보이더라도, 너의 본심과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서 본다면 네가 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이다. 겉으로 양과 같이 순종하면서 마음속에는 악의를 품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이며, 직접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는다. 성령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이들을 한 명씩 드러낼 것이다. 외식하는 자는 반드시 성령께 버림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처벌하고 해결할 것이니 누구도 걱정하지 말라.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4)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이 오늘날 하는 일을 꿰뚫어 보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않으며, 의심하거나 판단하거나 연구하고 분석한다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의 빛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여전히 어제의 빛을 소중히 여기고 새 사역을 대적한다면, 이런 사람은 순전히 그릇된 놈이고 일부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다. 하나님께 순종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장 새로운 빛을 깨닫고 받아들이며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순종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그저 현 상태에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이유는 기존에 있던 것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 내면에 여러 가지 관념과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의 관념이자, 자신의 상상 속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너의 상상 속 하나님을 기준으로 오늘날 실제로 사역하는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너의 믿음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원치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아무리 많이 헌신해도, 설령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심지어 순교를 해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를 조금 베풀어 주어 잠시 누리게 할 뿐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실천했다고 할 수 없다. 성령은 이런 사람에게 역사하지 않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씩 도태시킬 것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은 모두 대적하고 방해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모두 도태될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해 조금의 순종도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인정하고 하나님의 친절함과 사랑스러움을 조금 느낄 뿐 성령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성령의 현재 사역과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없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누리는 것을 통해, 생활 속의 고난과 연단을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한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야 성품이 변화될 수 있고, 하나님을 진실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며,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만 누린다면, 순종, 경건함, 사랑과 인내는 모두 표면적인 것에 그칠 뿐 온전케 되거나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만 누린다면,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한다. 설령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해도 얄팍한 것이다. 혹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거나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사람에게 생명이 있거나 참된 인식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을 연단할 때, 또는 사람에게 시련을 줄 때, 사람이 순종하지 못하고 의심하며 넘어진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한 여러 가지 규정과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쌓은 낡은 경험, 또는 성경을 원칙으로 한 각종 규례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인간적인 것으로 가득 찼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모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순종’하는데 하나님이 그런 순종을 바라겠느냐? 이는 규례를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만족과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만약 이런 것을 일컬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너는 애굽의 바로이고, 악을 행하는 자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너의 이러한 섬김을 원하겠느냐? 너는 하루빨리 회개하고 네 주제를 좀 아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너에게 더 이로울 것이다. 방해나 교란을 하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살림이나 잘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대적하여 벌을 받지 않도록 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5)

성령 역사는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한 단계 한 단계 더 높아진다. 내일의 계시는 오늘보다 더 높으며,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듯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하나님은 이런 사역을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한다.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면 언제라도 도태될 수 있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낡은 시대는 지나가고 지금은 새로운 시대다. 새 시대에는 새 사역을 한다. 특히 사람을 온전케 하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은 더 새로운 사역을 더 빠르게 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규례를 지키지 않으며 어느 단계의 사역도 영원불변한 사역으로 여기지 않고, 언제나 더 새롭고 더 높은 사역을 한다. 그의 사역은 한 단계 한 단계 더 실제적이고, 행할수록 점점 더 사람의 실제적인 요구에 부합하게 된다. 사람은 오직 이런 사역을 체험해야만 최종적인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사람의 인식이 갈수록 높아지므로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 또한 점점 높아진다. 그래야만 사람이 온전케 되어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해진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은 한편으로는 사람의 관념을 깨서 바로잡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더 높고 실제적인 경지에 진입하고, 또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높은 영역에 진입하도록 인도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본성이 패역하고 고의로 대적하는 사람들은 빠르고 거센 이 단계 사역에 의해 모두 도태될 것이다. 오직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만이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다. 이러한 사역에서 너희는 모두 순종하기를 배우고 관념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하며 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세심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대한다면 반드시 성령께 버림받는 자,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 단계 사역을 체험하기 전에 사람에게는 낡은 규례와 율례가 그야말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하여 모두가 이성을 잃었고, 득의양양해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이 새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원수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마음과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위험해진다. 네가 그저 간단한 사역과 말씀에만 순종하고 더 깊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옛것을 지키는 사람이므로 성령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진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6)

하나님의 사역은 시대마다 서로 다르다. 네가 이 기간의 사역에 잘 순종했더라도 다음 기간의 사역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거나 순종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이 단계로 올 때 네가 따라왔다면 다음 단계로 갈 때도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시종일관 변함없이 순종해야 한다. 기분이 좋을 때만 순종하고 기분이 나쁠 때는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런 순종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내가 새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따라오지 못하고 과거의 견해를 고집한다면 너의 생명이 성장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말씀을 통해 너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네가 순종하고 받아들인다면 성령은 반드시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성령은 내가 말하는 대로 역사하므로 너희가 내 말대로 한다면 성령이 곧바로 너희에게 역사할 것이다. 나는 새 빛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너희 모두를 현재의 빛 속으로 인도한다. 네가 현재의 빛 속으로 들어가면 성령은 즉시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누군가 인정하지 못하고 “저는 당신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네게 이제 길이 없으며 메마르고 생명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품 변화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빛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부 사람들에게 역사하고, 더욱이 교회에서도 역사하는데, 누구에게 역사할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네게 역사한다면 너는 체험할 것이고,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역사한다면 너는 빨리 따라야 할 것이다. 현재의 빛을 따를수록 생명은 더 자란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성령이 역사한 것이라면 너는 따라야 한다. 네가 체험하는 가운데 그의 체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면 더 높은 것을 얻게 되는데, 이렇게 실행하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길이요, 생명이 성장하는 경로이다. 너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함으로써 온전케 되는 길에 이를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통해 너를 온전케 할지 모르고,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을 통해 너로 하여금 얻게 하고 깨달음을 갖게 할지도 모른다. 네가 이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고, 이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의 앞날이 어둡고 암담하다는 뜻이다. 네가 이 정상 궤도에 들어서면 모든 일에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 성령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계시해 주든 네가 그의 인식에 따라 체험한다면 그것은 너의 생명이 될 것이다. 또한 너는 그 체험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된다. 남의 말을 흉내 내어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이는 체험이 없는 사람이다. 반드시 다른 사람이 얻은 빛 비춤과 깨우침에서 실행의 길을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뒤에 자신이 실제로 체험한 것과 깨달은 것을 말한다면 자신의 생명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너는 이렇게 체험하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에 순종하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공과를 배워 너의 생명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하면 가장 빨리 성장한다.

성령은 너의 실제 체험을 통해 너를 깨우쳐 주고, 또 너의 믿음을 통해 너를 온전케 한다. 너는 진정으로 온전케 되기를 원하느냐?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기를 원한다면 육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극적이거나 연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종하며, 앞에서 한 것이든 뒤에서 한 것이든 모두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정직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일에서 진리를 실행한다면, 이런 사람이 바로 온전케 된 사람이다. 앞에서와 뒤에서 하는 행동이 다른 간사한 사람은 모두 온전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고, 침륜의 자식이자 멸망의 자식이며,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너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고 하나님 영의 감찰을 받을 수 없다면 이는 너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 성품 변화에 주력해야만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길 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순종해야 하며, 아무 원망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역을 제멋대로 판단하거나 단정 짓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은,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이겠느냐? 바로 너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너의 마음가짐이 옳기 때문에, 네가 한 일이 옳든 그르든 용감하게 내놓아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 형제자매에게 보여 주며 하나님께 맹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의 모든 속마음과 생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 이렇게 실천하고 진입한다면 네 생명은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진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7)

네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이상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조차 할 수 없다면 믿고 안 믿고는 거론할 수도 없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하나님께 순종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네게 순종하고 너의 관념대로 따르게 한다면, 너는 가장 패역한 사람이며 불신파다. 이런 사람이 어찌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가장 패역한 사람은 일부러 하나님께 불복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적그리스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새 사역을 항상 적대적인 태도로 대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며, 기꺼이 순종하거나 자신을 낮춘 적도 없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가장 대단하다고 여기며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도’에 대해 가장 잘 나누고 다른 사람의 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보배’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것을 가보로 삼아 섬기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함으로써 자신을 우러러보는 아둔한 이들을 가르친다. 교회에는 확실히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굴복을 모르는 영웅 세가’로, 대대로 하나님 집에 얹혀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도’(리)를 얘기하는 것을 자신의 최고 직책으로 삼고, 한 해 또 한 해,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어 가며 자신들의 신성불가침한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누구도 감히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누구도 감히 그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지 못한다. 하나님 집에서 ‘거물’이 된 그들은 시대마다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날뛴다. 이 악마의 무리가 연합하여 나의 사역을 허물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이런 산 귀신이 내 눈앞에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 내게 절반만 순종하는 사람들도 마지막까지 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순종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이 악한 자들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전력을 다해도 그중 일부만 얻고서 최종적으로 온전케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역을 망가뜨리려고 시도하는 천사장의 후손들은 어떻겠느냐? 그들은 더더욱 하나님께 얻어질 희망이 없지 않겠느냐? 내가 와서 정복 사역을 하는 목적은 그저 정복을 위한 정복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의와 불의를 드러내기 위해 정복하고, 사람에게 징벌을 내릴 증거를 손에 넣기 위해 정복하며, 또 악인을 정죄하기 위해 정복하고, 더욱이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정복한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는데, 온전케 된 사람은 순종하는 마음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이루는 사역이다. 하지만 패역한 행위로 가득한 자들은 모두 징벌받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 떨어져 영원히 저주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역대로 ‘위세와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 대단한 영웅 세가’의 사람들은 가장 비천하고 냉대받는 ‘나약하고 무능한 겁쟁이 세가’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모든 공의와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을 나타낼 수 있고, 또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게 된다. 말해 보아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지 않겠느냐?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이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산물이 아니고, 성품 변화는 누구나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것에는 실제적인 행동과 살아 냄이 있어야 한다. 겉으로만 순종한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표면적인 것에만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것은 본래 같은 뜻이다. 하나님께만 순종할 뿐 하나님의 사역에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순종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진심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아첨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 어느 정도 얻는 것이 있고, 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새로운 사역 가운데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변화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정받은 사람이고, 온전케 된 사람이며, 성품이 변화된 사람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옳은 사람이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원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반면,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욕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위장하는 사람이고, 독사의 독을 지닌 사람이며, 누구보다 음험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그 못된 패거리의 추악한 가면이 벗겨질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사역을 하고 있지 않더냐? 악인은 어쨌든 악인이므로 결국에는 그 징벌의 날을 피할 수 없고, 선한 사람은 어쨌든 선한 사람이므로 결국 사역이 끝날 때 전부 드러날 것이다.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악인은 없고, 악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의인도 없다. 내가 사람을 억울하게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진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8)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새로운 진입이 있다. 언제나 새롭고 높은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단계마다 더 심화되어야 한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교제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 말씀을 보거나 또는 한 가지 일을 처리함으로써 새로운 깨달음과 깨우침을 얻고, 낡은 규례 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뒤처짐 없이 항상 새로운 빛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바로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고 한다. 겉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높아지고 날마다 새로운 것이 있으므로 사람도 날마다 새로운 진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한 만큼 이루므로 네가 따르지 못하면 뒤처진다. 기도가 깊어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쉼 없이 먹고 마셔야 하며, 더 깊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고, 관념과 상상을 점차 줄여야 한다. 또 일을 판단하는 능력도 강화해야 하고, 어떤 일이 닥치든 생각과 주관을 가져야 하며, 영 안의 일들을 깨달음으로써 외부의 일을 꿰뚫어 보고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고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글귀와 도리만 말할 뿐 실제가 없고 실행의 길이 없으면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새 신자에게는 어찌어찌 말할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새 신자에게도 실제 체험이 생기면 공급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네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적합하겠느냐? 새로운 깨우침이 없으면 사역할 수가 없다. 새로운 깨우침이 없는 사람은 모두 체험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경험이 없다. 생명을 공급하는 이 일에서 전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폐물이고 식충이다. 사실, 이런 사람은 사역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폐물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는커녕 도리어 교회에 불필요한 많은 번거로움을 더한다. 나는 그런 ‘어르신’들에게 다시는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빨리 교회에서 나가 줄 것을 청한다. 그들은 새로운 사역에 대한 인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관념이 겹겹이 쌓여 있다. 교회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가는 곳마다 이간질하고 소극적인 말을 퍼뜨리며, 심지어는 교회에서 못된 짓을 하고 함부로 소란을 피워 분별없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런 산 귀신, 악령은 교회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교회에서 썩 물러가라. 네가 오늘의 이러한 사역은 두렵지 않다 해도 내일의 공의로운 징벌까지 두렵지 않겠느냐? 교회에는 빌붙어 먹고 사는 사람도 많고, 하나님의 정상적인 사역을 무너뜨리려는 늑대들도 많다. 그들은 모두 악마의 우두머리가 보낸 마귀이며, 무지한 어린양들을 집어삼키려는 악한 늑대이다. 소위 ‘사람’이라는 이런 자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기생충이 되고 제물을 게걸스럽게 갉아먹는 좀 벌레가 될 것이다. 비열하고 무지하며 비루하고 비천한 이 구더기들은 언젠가 곧 징벌을 받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진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9)

실제에 대해 인식이 있고,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덕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식한 것을 교제하고, 그 교제를 통해 다른 사람을 깨우쳐 주고 길을 인도해 줄 수 있다면 그 길이 바로 실제이다. 너희 모두는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해 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급선무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할지 모르는 일은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의 길을 찾고, 이해하지 못한 문제나 어려운 점 또한 전부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을 받아 실제적인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이 네 삶에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 그에 해당하는 성과가 있어야 한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하고, 무슨 일이 닥칠 때는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별일이 없을 때는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만 신경 쓰면 된다. 때로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봤을 때 어떤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었는지, 어떤 반응이 생겼는지를 교제하고, 그 교제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실제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 실질적인 공급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너는 하루에 몇 시간이나 진실로 하나님 앞에 있느냐? 너의 하루 중 하나님께 바친 시간은 얼마나 되느냐? 육적인 것을 위한 시간은 얼마나 되느냐? 마음을 늘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너는 네 몸과 마음, 그리고 너의 모든 참된 사랑을 하나님께 바치고 내놓으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또한, 육적인 것이나 가정,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해야 하며, 모든 것에 있어 하나님 말씀을 원칙과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올바른 마음가짐과 관점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절대적인 사람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성하는 사람을 기뻐하고, 그에게 딴마음을 품거나 거역하는 사람을 혐오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를 믿으면서 늘 그를 누리려고만 하고 그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 사람을 혐오하며, 입으로만 그를 사랑한다 말하고 마음으로는 거역하는 사람을 혐오하고, 감언이설로 기만 행위를 하는 사람을 혐오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헌신과 순종이 없는 사람은 대역무도한 사람이고, 천성적으로 몹시 교만한 사람이다. 특히 실제적이고 정상적인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지 못하는 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교만한 사람이자, 천사장의 충실한 후계자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토대로 삼으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할 부분을 진심으로 찾는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네가 행하는 것이 너의 생명에 유익하고,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써 내면에 필요한 것과 부족한 것을 채워 생명 성품이 변화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일이다. 또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그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육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더 실제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너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실제 행동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다. 네가 이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면 진리를 얻게 될 것이다. 이는 실제에 진입하는 시작이다. 먼저 이 훈련을 해야 나중에 더 깊이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늘 언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나 하는 생각만 하지 말고,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충성을 다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라. 네 성품이 변하기 전까지는 무엇을 생각하든 다 소용없다!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생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최소한의 기준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실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0)

현재 시련 속에 있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한 마디 하겠다. 모르면 적어도 판단은 하지 말라. 언젠가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너에게 유익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찾고 구하면서 적극적으로 진입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다. 사람은 패역으로 인해 실제 하나님에 대해 늘 관념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제 하나님은 사람에게 크나큰 시련이기 때문에 네가 굳게 서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고, 실제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가 없다. 사람이 온전케 될 수 있을지 여부는 하나님의 ‘실제’를 아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성육신 하나님이 땅에 온 ‘실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시련이다. 네가 여기에서 굳게 선다면, 너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 게다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굳게 서지 못하고 오직 영만 믿을 뿐, 하나님의 실제는 믿지 못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허사이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을 믿을 수 있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께도 순종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영에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영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에게 순종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부 허튼소리 아니겠느냐? 계명을 지키는 것의 핵심은 바로 실제의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다. 실제 하나님을 알면 계명을 지킬 수 있다. 계명을 지키는 것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한 부분은 영의 본질을 지키는 것, 즉 영 앞에서 영의 감찰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한 부분은 성육신한 하나님에 대해 진실로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육신 앞에서도, 영 앞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만이 온전케 될 자격이 있다. 만약 네가 실제 하나님의 ‘실제’를 안다면, 즉 이 시련 속에서 굳게 선다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쉬워요.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말하고 경건하게 이야기하며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는 거잖아요.”라고 말한다. 이 말이 맞느냐? 그러면 네가 뒤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해도 계명을 지켰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 밝히 알아야 한다. 이는 네가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 진실한 인식을 갖고 있는지와 관계된다. 네가 ‘실제’에 대해 알고 이 시련 속에서 쓰러지지 않는다면, 이는 너에게 굳센 증거가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위해 힘 있게 증거하는 것은 주로 네게 실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는지,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는지, 나아가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는지와 관계된다. 네가 정말 이러한 순종으로 하나님을 위해 증거한다면 그것은 네가 하나님께 얻어졌음을 뜻한다. 죽기까지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 한 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고, 판단도 비방도 하지 않으며, 관념도 다른 속셈도 갖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영광을 얻을 것이다. 사람들이 경시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죽기까지 순종하고 전혀 관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참된 증거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입하라고 요구하는 실제는 그가 하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 그것을 실행하며, 실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패괴를 깨닫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그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 그에게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 네가 정복되어 그에게 완전히 순종한다면, 그때 하나님은 영광을 얻게 되며, 그것을 통해 사탄에게 수치를 주고 사역을 끝마칠 것이다. 성육신한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 관념이 없다면, 즉 네가 그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다면, 너는 잘 증거한 것이다. 언젠가 네가 실제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되고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순종하게 된다면, 너는 하나님께 얻어졌다고, 즉 온전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일이 네 관념에 맞지 않는 것은 너에게는 시련이다. 만약 네 관념에 맞는다면 고난을 겪을 필요도, 연단을 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너의 관념에 맞지 않기에 너는 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너에게는 시련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제로 인해 모든 사람이 시련을 겪고 있다. 그의 사역은 초자연적이지 않고 실제적이다. 네가 실제의 말씀과 음성에 대해 분명히 알고 관념도 전혀 가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역이 실제적일수록 더 참되게 그를 사랑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께 얻어진 것이다.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 즉 하나님의 실제를 아는 사람이자, 하나님의 실제 사역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실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1)

성육신 기간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순종은 사람의 상상처럼 판단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에게 그의 말씀을 삶의 원칙과 생존의 토대로 삼고 절대적으로 말씀의 본질을 실행하여 그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를 요구한다. 성육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요구는 그의 말씀을 실행하라는 것이며, 또한 그의 정상적인 면과 실제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는 모두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한 사람은 모두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성으로 역사한다. 그러기에 그가 취한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간적인 모습은 사람에게 크나큰 시련이자 어려움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는 아무리 방법을 찾아도 정상적인 인간적 모습을 없애 버릴 수는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늘에 계신 ‘영’인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의 외형을 지닌 하나님이다. 그러한데 그의 정상적인 인간적 모습을 없애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겠느냐? 그러므로 그는 어찌 됐든 육신의 입장에서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해야 한다. 이 사역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데,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한다. 그런데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또 무슨 좋은 방법이 있겠느냐? 아직까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순종’뿐이다. 이것 외에 다른 최상의 방법은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련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어찌하겠느냐?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성육신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사람은 바꿔 놓을 수 없다. 하늘의 하나님조차 그의 행사에 간섭하지 않으니, 사람은 더욱 그에게 순종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비록 실제적이고 정상적이지만 그는 틀림없이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이다. 그는 자신의 뜻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늘의 하나님이 모든 임무를 그에게 맡겼으니 그가 어떻게 하든 너는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인성을 지니고 있고 너무나 정상적이지만, 이 모든 것은 그가 특별히 예비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어찌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보면서 불만을 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길 원하면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인성으로 살기 원하면 인성으로 살고, 신성으로 살기 원하면 신성으로 산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은 어쨌든 하나님이고, 사람은 어쨌든 사람이다. 그러니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로 인해 그 본질을 부정해서는 안 되며, 그를 ‘하나님’의 ‘위격’에서 밀어내서도 안 된다.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의 자유가 있고,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으로서의 존엄이 있다. 이는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조금이라도 자유를 줄 수 없느냐?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조금도 용납하지 못한단 말이냐? 하나님에게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라. 서로 ‘포용’하면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거리가 생길 리 있겠느냐? 이렇게 작은 일도 용납하지 못해서야 아량이니 도량이니 하는 말을 어찌하겠으며, 어떻게 대장부가 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자잘하기 그지없는 일을 크게 부풀려 처리하니, 침소봉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 정말이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성으로 사역하지만, 그가 하는 것은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가 하는 사역의 본질은 보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만 본다. 이렇게 큰 사역은 보지 못하고 하필이면 하나님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성만 보며 물고 늘어지니, 이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늘의 하나님은 오늘날 땅의 하나님이 ‘되었다’. 이제는 땅의 하나님이 바로 하늘의 하나님이다. 겉모습이 어떤지, 어떤 사역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는 분이라면 하나님 자신이다. 너는 원하든 원치 않든 순종해야 한다. 이는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사람의 순종을 받아야 하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여기에 조금의 거짓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이 오늘날 얻으려는 사람은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의 사역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서도, 막연한 생각에 빠져 살아서도, 성육신 하나님을 난처하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의 안배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어떤지, 인류에게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온 마음을 땅에 온 하나님께 바치며, 자신의 전부를 내놓는다. 그들은 자기 안위를 생각하는 법을 모르며, 성육신 하나님의 정상적인 면과 실제를 ‘문제시’하지도 않는다. 성육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께 온전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 약속과 축복을 내리는 존재는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땅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늘 하늘의 하나님만 존귀하게 여기고 땅의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공평하지 않은 일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위대하고 기묘하며, 놀라운 지혜를 지니고 있지만 그 하나님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땅의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으며 아주 정상적인 데다 사람의 사유를 뛰어넘는 경천동지할 행사를 보여 주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정상적이고 실제적으로 사역하고 말씀할 뿐이다. 또한, 천둥을 치며 음성을 발하지도 않고 비바람을 불러오지도 않지만,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화신이며, 확실히 사람들 가운데서 살고 있는 하나님이다.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상상에 부합하는 존재는 하나님으로 여겨 높이 받들고,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존재는 비천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의 패역이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실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2)

양심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없다. 양심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열의가 생기지 않는다. 네가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겠다고 말할 뿐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의가 생기지 않는다. 양심의 느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이다. 왜 소극적인 방법이라고 하겠느냐? 이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너희의 이런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나님을 기만하고 무성의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해도 상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형벌을 받으니 어쨌든 죄만 짓지 않으면 돼.’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양심의 느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마음 깊은 곳의 진실한 느낌을 말한다. “저는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저를 버리신다고 해도 저는 계속해서 따를 겁니다. 그분이 저를 원하든 원하지 않으시든, 저는 계속해서 그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나중에는 꼭 그분을 얻고야 말 것입니다. 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평생 따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얻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너는 이런 의지가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거나 양심의 느낌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의 양심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왜 예전에 늘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을 감동시키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했을까? 왜 사람의 양심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사람은 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수긍할 수 없다면 네가 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보아라. 잠시 불타오르던 열의가 얼마 가지 못하고 사그라질 것이다. 양심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느끼면 기도할 때 타오르던 열의가 금방 사그라져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양심만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깨울 수 없다는 것이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진실로 느낄 때 너의 영이 하나님께 감동된다. 그리고 이때야 네 양심이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즉, 사람은 영 안에서 하나님께 감동받고, 마음이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고무받은 후에야, 다시 말해 이를 체험한 후에야 효과적으로 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을 향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일 뿐이다. 사람의 ‘하나님의 은혜에 죄송하지 않을 정도’의 사랑으로는 전혀 적극적으로 진입할 수 없다.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어느 정도 얻을 때, 즉 실제 체험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정말 사람이 사랑할 만한 분이고 사랑할 만한 요소가 매우 많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때에야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자발적인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3)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접하고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우선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네가 마음속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했다고 할 수 있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외 다른 것(가정, 돈, 남편, 아내, 자녀 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네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거나, 네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추구한다면, 네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다. 만약 네가 아직도 마음속으로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늘 ‘언제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까? 우리 집은 언제쯤 부유해질까? 어떻게 하면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을까?’라는 상태에 빠져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너의 마음이 아직 하나님께로 온전히 향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이 너와 매우 가까워 하나님이 네 안에 계시고 너도 하나님 안에 있는 것 같은 이런 내적 상태에 있다면 너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음을 말해 준다. 네가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항상 교회의 사역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그의 마음을 만족게 한다면 네 마음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만약 많은 사물이 네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네 마음이 여전히 사탄에게 점령당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면 하나님을 참되게 자발적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마음을 쓰게 된다. 우매하고 비이성적일 때도 있으나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성품의 변화에 마음을 쓰며 마음이 완전히 올바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교회 명의를 내세우지만 실은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일한다. 이런 사람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고, 교활하고 간사하다. 그가 한 많은 일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이 여전히 사탄에게 속하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한다. 하나님도 이런 사람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얻어지려면 첫 단계로 네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또한, 어떤 일을 하든 ‘이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가? 개인적인 의도는 없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목적을 위해 하는 것인가?’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마음을 극복하고, 자신의 불순한 마음을 모두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위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실행 길이다. 자신의 마음을 극복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바로 육적인 사치스러운 욕망을 내려놓고, 지위의 복과 안락을 탐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자발적인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4)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야 생기는 사랑이다.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이 꼭 순결하고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데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애모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자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는 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진심을 드린 후 생명 체험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사람의 성품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식도 차츰 깊어진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은 생명 체험의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위한 전제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내놓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만 있을 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약간 사랑한다 해도 이는 자발적인 것도, 참된 것도 아니다. 사람의 육에서 비롯된 것은 참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감정적인 작용의 산물일 뿐이다. 이는 일시적인 감동에 불과하며 오랫동안 지속되는 애모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자신의 취향과 개인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 없이는 자발적인 참된 사랑이 있을 수 없으며, 맹목적으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역할이나 해야 할 본분을 좀 이행하는 데에 그칠 뿐이다. 이런 사람은 성품이 바뀌기 어려운 사람이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거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순결한 것은 아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지에서 비롯되는 차이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했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자발적인 것임을 증명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은 사람이 정상 궤도에 들어서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일 뿐,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분’을 완수한다거나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데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또한, 피조물로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즉,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을 얻고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자발적인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5)

오늘날,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알고자 한다면 고난과 연단을 받아야 하고 대가도 치러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깊은 공과로, 사람이 한평생 하나님을 믿으면서 배우는 공과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기만 할 뿐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한 번도 가슴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어 봤자 헛일이다. 하나님을 믿으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일생을 헛사는 것이요, 네 일생은 가장 미천한 일생이다. 평생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고, 한 번도 하나님을 만족게 한 적이 없다면, 네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헛수고 아니겠느냐? 바꿔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하고, 겉으로 무엇을 하려고 추구할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참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찬양을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은 재미있어하지만, 진리 실행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무슨 일에서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어떤 일에 부딪히든 깊이 파고들어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 일에서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네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닥쳐 고통을 겪어야 할 때, 너는 그 일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을 만족시킬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육은 가장 비천한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방법을 찾고 네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그 일에서 특별히 너를 깨우칠 것이요, 네 마음도 위안을 얻을 것이다.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일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우선 자신을 내려놓고 육을 가장 천한 것으로 여겨라. 네가 육을 만족시킬수록 육은 더 큰 욕심을 낼 것이다. 이번에 만족시키면 다음에 또 다른 요구를 하니,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사람은 육을 더 사랑하게 된다. 육은 항상 사치스러운 욕망을 가지고 있어 늘 네가 만족시켜 주길 바라고 그 안에서 즐기길 바란다. 먹고 입거나 화를 내거나 자신의 연약함과 나태함 등등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 네가 육을 만족시킬수록 육의 욕망은 더 커지고, 나날이 방종해질 것이다. 그러다 어느 지경에 이르면 사람의 육은 관념이 더 깊어져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을 받들며, 하나님의 사역도 의심하게 된다. 네가 육을 만족시킬수록 육의 연약함은 더 많아져 늘 아무도 너의 연약함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왜 이리 엄하십니까? 왜 언제나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지 않으시죠?”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이 육을 지나치게 만족시키고 지나치게 사랑하면 자신을 망치게 된다. 네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육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행하는 것이 더없이 적절하고 좋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며, 네 패역을 저주하고 네 불의를 심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때로 하나님이 너를 채찍질하고 징계하고, 환경을 조성해 단련하고, 억지로 하나님 앞에 오게 해도 너는 늘 하나님이 행하는 것이 아주 좋다고 여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크게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고 하나님이 몹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네가 육의 연약함을 헤아리며 하나님이 행한 것이 지나치다고 말한다면, 늘 고통스럽고 슬프다고 느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행한 모든 사역에 대해서도 모호해져 하나님이 사람의 연약함을 조금도 굽어살피지 않고, 사람의 고충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며, 언제나 너 자신이 외롭고 쓸쓸하고 대단히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여길 것이다. 그때면 너는 원망의 말을 쏟아 낼 것이다. 네가 이렇게 육의 연약함을 헤아릴수록 하나님이 행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될 것이고, 결국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할 것이며, 네 내면은 패역한 것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러므로 육을 저버려야지, 헤아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남편(아내), 자녀, 미래, 결혼, 가정 따위는 없어! 내 마음속엔 오직 하나님뿐이야. 나는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려야 해. 육을 만족시키면 안 돼.’ 너는 이런 의지를 가져야 한다. 늘 이런 의지를 갖고 진리를 실행하며 자신을 내려놓는다면, 조금만 힘써 노력해도 해낼 수 있게 된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길에서 얼어붙은 뱀 한 마리를 보고 주워 품 안에 넣었더니 뱀이 깨어나 농부를 물어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육은 뱀과 같아 본질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친다. 네가 육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했을 때가 곧 목숨을 잃는 때이다. 육은 사탄에 속하는 것으로, 그 안에는 언제나 사치스러운 욕망이 들어 있어 항상 자신만 생각하고, 호강하길 원하며 안락한 생활을 탐내고, 초조해하지도 않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어느 지경까지 육을 만족시키다 보면 종국에는 육에 삼켜지고 만다. 다시 말해, 네가 이번에 육을 만족시켰다면 육은 다음에도 네가 만족시켜 주길 바란다. 육 안에는 늘 사치스러운 욕망과 새로운 요구가 있으며, 네가 육을 생각하는 기회를 틈타 육을 더욱 아끼며 육의 안락 속에서 살게 한다. 그러니 네가 그것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 너 자신을 망칠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을지, 마지막에 어떤 결말일지는 육을 어떻게 저버리느냐에 달렸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고 또 너를 선택하고 예정했다 해도 네가 지금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 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려 하지 않으며,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육을 저버리려 하지 않아 결국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너는 극한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네가 항상 육을 생각한다면, 너는 천천히 사탄에게 잠식될 것이고, 생명도 영적 감동도 없다가 언젠가 내면이 완전히 어두워질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살면 사탄에게 사로잡혀 더 이상 마음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때 너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쓰라린 대가를 치르고 고난을 받아야 한다. 겉으로 열성적으로 행동하거나 고생할 필요도, 책을 많이 보거나 많이 뛰어다닐 필요도 없으며, 사치스러운 생각과 개인의 이익, 자신의 계획, 관념, 속셈과 같은 사람 내면의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해야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6)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성품을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 사역의 한 부분이다. 예를 들면, 겉으로 드러나는 비정상적인 인성, 사람의 생활 방식, 생활 습관, 풍습 및 외적인 행동과 사람의 열의 등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실행해 성품을 변화하게 하는 것은 주로 사람 내면의 마음가짐과 관념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네가 겉으로 드러나는 성품만 다스리려 한다면 그건 쉬운 일이다. 예를 들어, 네가 즐기는 음식을 못 먹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은 쉽게 해낼 수 있다. 하지만 내적인 관념에 관계되는 것이면 내려놓기가 힘들다. 여기에는 육을 저버리고 대가를 치르며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렇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여러 가지 잘못된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을 때는 네 마음가짐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떤 일에 부딪히면 네 내면의 여러 가지 잘못된 마음가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할 때,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내면에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을 가로막는 관념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네가 자신의 마음가짐이 잘못됐음을 깨달았을 때, 네 관념이나 마음가짐에 따라 행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며 입장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육을 저버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육을 저버리려 할 때 네 내면에서는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사탄은 사람에게 자기를 따르고 육의 관념대로 육적인 이익을 지키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깨우쳐 줄 것이다. 그때는 네가 하나님을 따를지, 아니면 사탄을 따를지를 봐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실행하라 할 때는 주로 사람 내면의 것,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사람의 생각과 관념을 다스리려는 것이다. 성령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또한 깨우침과 빛 비춤을 준다. 그래서 모든 일의 이면에는 싸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할 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길 실천할 때마다 큰 싸움이 벌어진다. 사람의 육이 평온무사한 듯 보여도 사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생사를 건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 차례 격렬한 싸움과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겨우 승패가 나뉘니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노릇이다. 사람의 내면에 잘못된 마음가짐이 많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많은 사역이 사람의 고정 관념에 맞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면 늘 이면에 큰 싸움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실행할 때 뒤에서 많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에는 마음을 다잡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게 된다. 싸움이 있기에 사람은 고통받고 연단을 받는다. 이것이 진정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다. 싸움이 임했을 때, 네가 참으로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다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하면서 내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진리를 실행할 때 사람 내면의 것이 모두 옳다면, 하나님께 온전케 될 필요가 없고, 싸움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도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내면에 하나님이 쓰기에 부적합한 구석이 많이 있고, 육적인 패역 성품도 많기 때문에 육을 저버리는 공과를 더 깊이 배울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받게 된다는 그 ‘고통’과 관련되어 있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는 빨리 하나님께 기도해라. ‘하나님, 저는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리길 원합니다. 온갖 고통을 끝까지 견뎌 당신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길 원합니다. 아무리 큰 좌절을 겪어도 저는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리겠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릴 것입니다!’ 네가 이런 의지를 갖고 이렇게 기도한다면 굳게 설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할 때마다, 연단과 시련, 하나님의 사역이 임할 때마다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 것들이 사람에게는 전부 검증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실제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보고 분주히 다니는 것 등도 얼마간 대가를 치르는 것이긴 하나 그것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사람의 본분이자 응당 이행해야 할 책임이다. 하지만 사람 내면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은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지 못한다면 외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받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든 모두 헛수고이다! 다시 말해, 내적 변화야말로 외적 고통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적 성품이 변화되고 진리를 실행했다면 외적으로 받은 고통 역시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다. 하지만 내적 성품에 변화가 없다면 외적으로 받은 고통이 아무리 크고,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녔다 해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받은 고통에 하나님의 확증이 없다면 모두 허사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너의 대가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네게 변화가 있는지에 달렸고,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자신의 속셈과 관념을 저버려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충성했는지에 달렸다. 네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녔다 해도, 단 한 번도 자기 속셈을 저버린 적이 없고 외적인 행위와 외적인 열정만 추구하며 늘 생명을 중요시하지 않았다면, 그런 고통은 전부 허사가 된다. 어떤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 말이 형제자매에게 도움이 안 되고 타인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서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내적으로 괴로울지언정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내면에서 싸움이 벌어지겠지만, 네가 고통을 참고 포기하길 원하고, 고통을 감내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길 원하며, 내적으로 고통받을지언정 육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흡족해할 것이다. 따라서 네 내면도 위안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치르는 대가로, 하나님은 이런 대가를 바란다. 네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하나님은 분명 너를 축복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네가 아는 것이 아무리 많고 말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허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사탄과 하나님이 싸울 때 네가 하나님의 편에 서고 사탄에게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고, 그러면 굳게 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해야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7)

사람에게 하는 하나님의 각 단계 사역은 겉으로 보면 마치 사람이 사람과 접촉하는 것 같고, 사람의 안배나 방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사역과 일의 이면에는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한 내기가 있으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설 필요가 있다. 이는 욥이 시련을 받았을 때, 그 뒤에는 사탄이 하나님과 한 내기가 있었지만 욥에게 닥친 것은 사람의 행위요, 사람의 방해였던 것과 같다. 너희에게 행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이면에는 사탄이 하나님과 한 내기가 있고, 싸움이 있다. 예를 들어, 네가 형제자매에게 편견이 생겨 어떤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러자니 하나님이 기뻐할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말하지 않자니 내적으로 괴로울 때가 있다. 이때 내면에서 싸움이 시작된다. ‘말할까, 하지 말까?’ 이것이 바로 싸움이다. 그래서 일이 임할 때는 늘 싸움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네 내면에서 싸움이 벌어질 때, 하나님은 너의 실제적인 협력과 네가 실제로 받는 고통을 통해 네게 역사한다. 결국 너는 내면에서 그 일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화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 역시 네가 하나님과 협력한 결과이다. 어떤 일을 하든 일정한 심혈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실제로 받는 고통 없이는 하나님을 만족게 한다는 말 자체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은 공허한 구호를 외치는 것에 불과하다! 공허한 구호로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사탄이 영계에서 하나님과 싸울 때, 너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야겠느냐? 일이 닥칠 때마다 네게는 그것이 큰 시련이자 하나님이 네 증거를 필요로 하는 때가 왔음을 알아야 한다. 겉으로 봤을 때 큰일이 아닌 것 같아도, 일단 그런 일이 닥치면 너라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설 수 있겠지만, 하나님 사랑하기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자요, 진리도 생명도 없는 쭉정이임을 보여 줄 것이다! 일이 닥칠 때는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야 할 때이다. 지금 네게는 큰일이 닥치지 않아 별로 크게 증거한 것이 없겠지만, 일상의 사소한 부분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형제자매들이 탄복하고, 가족이 탄복하고, 주위 사람들이 탄복하게 해라. 언젠가 이방인이 와서 네 모든 행위에 탄복하며 하나님이 행한 것이 참으로 좋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오면, 너 자신이 바로 증거가 될 것이다. 네게 식견이 없고 자질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면, 너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자질이 가장 부족한 사람에게 행한 하나님의 이 엄청난 사역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탄 앞에서 이기는 자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이들은 가장 기개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간증이다. 네가 큰 사역을 하지는 못해도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고정 관념을 내려놓지 못해도 너는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실제 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해도 너는 자신의 실제 분량과 실제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며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너는 가족들 사이에서,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간증이 없는 것이다. 사탄 앞에서 증거하지 못하면 사탄은 너를 비웃고, 노리개 취급하고, 항상 너를 농락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앞으로 큰 시련이 닥친다 해도 지금 네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또 앞으로의 시련이 아무리 클지라도, 어떤 일이 닥칠지라도, 굳게 서서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장차 어떤 큰 시련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앞의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며, 그저 지금의 상황에서만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너희는 뭔가 큰 사역을 할 수도 없지만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 체험을 중요시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며, 강인하고 힘 있게 증거함으로써 사탄을 수치스럽게 해야 한다. 비록 육이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통받겠지만 너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사탄에게 수치를 안겨 주게 될 것이다. 네가 항상 이렇게 행한다면 하나님이 네 앞에 길을 열어 줄 것이다. 그러면 어느 날 큰 시련이 닥쳐 다른 사람은 다 넘어져도 너는 굳게 설 수 있다. 너는 대가를 치렀으니 하나님은 네가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설 수 있도록 보호할 것이다. 네가 평소에 진리를 실행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앞으로의 시련에서 반드시 너를 보호할 것이다. 네가 우매하고, 분량이 작고, 자질이 부족해도 하나님은 너를 차별하지 않는다. 이것은 네 마음가짐이 바른지 그른지에 달려 있다. 지금 너는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소한 일도 놓치지 말고, 매사에 하나님을 만족게 하며,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진심을 하나님께 바쳐라. 밝히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해도 하나님 앞으로 와서 마음가짐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혹여 형제자매가 너를 버리더라도 육적인 즐거움을 좇지 말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라. 네가 늘 이렇게 실행한다면 큰 시련이 닥쳤을 때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해야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8)

시련은 사람의 어떤 내적 상태에 초점을 두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하는 사람 내면의 패역 성품에 초점을 둔다. 사람의 내면에는 수많은 불순물과 외식하는 요소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시련으로 사람을 정결케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지금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시련으로 온전케 될 것이다. 반면, 지금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없다면 앞으로의 시련은 네게 시험이 되어 너는 부지불식간에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는 네 뜻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을 따라가지 못하고, 실제 분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더 잘 만족게 하고 하나님을 따라 끝까지 가고 싶다면, 지금 반드시 기초를 잘 다져야 하며, 매사에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네가 항상 이렇게 실행하면 내면에 토대가 생길 것이며, 하나님은 너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믿음을 더해 줄 것이다. 언젠가 정말 시련이 닥치면 고통스럽기도 하고, 매우 슬프기도 하고, 죽을 것 같은 비통함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마음은 한결같을 뿐만 아니라 더 깊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다. 지금 네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너를 축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이어받는 자가 된다. 그러나 지금 실행하지 않으면, 어느 날 시련이 닥쳤을 때 네 사랑도 사라지고 믿음도 사라질 것이다. 그때 시련은 시험이 되고, 너는 사탄의 시험에 빠져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너에게 작은 시련이 왔을 때는 설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 큰 시련이 닥쳤을 때도 설 수 있을 거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 여기며 득의양양해한다. 하지만 그때 깊이 진입하지 않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위험해진다. 하나님이 지금은 더 큰 시련 사역을 하지 않아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시련을 주면 너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달을 것이다. 네 분량이 너무 작아 큰 시련은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지금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으면, 시련이 임할 때 쓰러지고 만다. 늘 자신의 분량이 작다는 것을 인지해야 발전이 있다. 시련이 닥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분량이 너무 작고, 의지가 너무 약하며, 실제적인 것이 너무 적고,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 가서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된다면 너무 늦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모른다면, 시련 속에서 필히 쓰러질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련이 닥쳤을 때 네 관념에 맞지 않으면 설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곧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다. 하나님이 그의 모든 성품을 사람에게 나타내면 너의 육에 무엇을 가져다주겠느냐? 하나님이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사람에게 나타내면 사람의 육은 필연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런 고통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고, 하나님께 진실한 사랑을 바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한다면 필히 그의 모든 성품을 네게 나타낼 것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모든 성품을 사람에게 나타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말세에 하나님은 그가 예정하고 택한 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성품을 나타내고, 사람을 온전케 할 때 자신의 성품을 나타냄으로써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든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에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고,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께 진실한 사랑을 완전히 바치고 싶다면, 반드시 많은 고통과 환경의 시달림을 겪어야 한다. 너를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해야 결국 마지못해 하나님께 진심을 돌려 드릴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진실한 사랑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고난과 연단 속에서 드러나며, 하나님이 사람의 사랑을 순결하게 만드는 것도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해야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99)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본질은 종교적인 신앙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그저 로봇처럼 하나님을 따를 줄만 알 뿐, 하나님을 진실로 흠모하거나 사모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을 따를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많고 많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사람은 그저 재난이 닥치는 것이 두려워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하나님이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감탄’할 뿐이다. 사람의 경외와 감탄에는 사랑이나 진실한 흠모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사람은 다 체험 과정에서 진리의 구체적인 부분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비밀들을 찾는다. 많은 사람이 그저 하나님을 따르면서 복을 받기 위해 기회만 노리고 있을 뿐,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의 하나님을 믿는 생애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으며, 다 개인적인 타산과 추구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 많은 사람이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하나님의 이익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진실한 믿음도 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람에게 믿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이 ‘비밀’을 발견하지 못해 하나님을 사랑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운 면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사랑할 하나님이라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면은 그의 사역에서 드러난다. 사람은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그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고, 오직 실제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체험할 수 있다. 실생활에서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면은 아주 많지만, 사람이 그와 실제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과 실제로 접촉할 수 없고, 하나님과 실제로 접촉하지 못하면 그의 사역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사랑에 너무나 많은 거짓과 상상이 섞이게 된다. 사람은 하늘의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땅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다.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사람의 상상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사람이 직접 본 것도, 직접 체험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땅에 올 때 사람은 하나님의 실제 행사와 그의 사랑스러운 면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정상적인 모든 성품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보다 몇천 배는 실제적이다.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사랑은 조금도 실제적이지 않으며 사람의 뜻으로 가득하다. 땅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사랑은 모두 실제적이다. 설령 그것이 아주 미미한 사랑일지라도 실제적이다. 하나님은 실제 사역을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고, 이런 인식들을 통해 사람의 사랑을 얻는다. 베드로처럼 말이다. 그가 예수와 함께 생활하지 않았다면, 예수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에 대한 그의 충성심 역시 예수와의 접촉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친히 세상에 임하여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실제를 보게 하고 체험하게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0)

하나님은 실제와 임하는 사실을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일부를 온전케 하는 것은 인도하고 길을 여는 사역에 속한다. 다시 말해,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의 길을 찾고, 이상(異象) 부분에 대한 인식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것을 깨달음으로써 실제 실행에 길이 생기고 이상을 갖추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우침을 얻고 이 일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며, 많은 일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깨달은 뒤에는 즉시 실제에 진입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실생활에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게 된다. 하나님은 매사에 너를 인도하여 네게 실행할 길을 줄 것이며,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행하는 한 단계, 한 단계의 사역이 모두 너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임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싶고 진실로 체험하고 싶다면, 반드시 실제에 깊이 들어가고 실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사랑이요 구원이며, 다 정결하지 않은 것을 벗어 버리게 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는, 사람 안의 것을 연단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으로 공급하는 한편, 실생활에서 환경을 마련해 주어 체험하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신다면, 실제로 실행할 때 하나님의 많은 말씀으로 삶 속의 어려움을 다 해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너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만 실제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면, 실생활에서 길이 없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닥쳤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너는 단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만 알 뿐, 조금도 분별할 줄 모르고 실행할 길도 전혀 없으며, 뭐가 뭔지 몰라 때로는 육을 만족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라 착각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아 생기는 결과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의 도움 없이 현실 속에서 모색하기만 하면 실행의 길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과 인도를 통해, 항상 기도하고 모색하고 구하면서 실행해야 할 것을 발견하고 성령이 역사할 기회를 찾아 하나님과 진실하게 협력하되,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실생활에서 길이 생기고 진실로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만족게 하면 네 안에 하나님의 인도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특별히 너를 축복하여 즐거움이 있게 할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 하나님을 만족게 한 것이 아주 영광스럽게 느껴지고, 내면이 매우 밝아지며, 마음이 환하고도 편안해질 것이다. 또한 양심이 위안을 얻고 참소받지 않으며, 형제자매를 봐도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린다고 하며, 이렇게 되어야 진실로 하나님을 누린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은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고난을 받고 진리를 실행하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만약 네가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사랑한다고만 말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참으로 많은 대가를 치렀으며 간곡하게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면서 계속 사람을 구원하고 있다고만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일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은 실생활에서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실제적인 것을 더 많이 누리게 된다. 그러고 나서 마음이 편안하고도 환해지고 내면이 매우 감동을 받아 하나님이 아주 사랑스럽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너는 자신이 치른 대가가 매우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심혈을 기울인 뒤에는 내면이 특히 밝아져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누린다고 느끼게 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구원의 사역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하나님이 사람을 연단하는 것은 정결케 하기 위함이고, 시련을 주는 것은 사람에게 진실한 사랑이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네가 항상 이렇게 진리를 실행한다면 하나님의 많은 사역을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늘 하나님의 말씀이 네 앞에서 수정처럼 투명하다고 느낄 것이다. 많은 진리를 분명히 알게 되면, 이 일도 저 일도 실행하기 쉽다고 느끼고, 이 일도 저 시험도 이겨 낼 수 있다고 느끼며, 모든 일이 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어 매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때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되는데, 이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에게 임한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은 이상(異象)이 있고 진리가 있으며 인식이 있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실생활에서 진리를 실행해야 하고, 가슴 아파하며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는 마음과 고통을 감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또 눈물을 흘릴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너를 축복할 것이다. 네가 그런 고통을 받고 난 뒤에는 성령 역사를 얻게 된다. 실생활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해야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1)

진리를 실행할수록 진리를 갖추게 되고, 진리를 실행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며, 진리를 실행할수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 항상 이렇게 실행한다면 하나님은 네게 그의 사랑을 조금씩 보게 할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실제 사역을 행하시는 지혜가 있나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나이다. 더욱이 사람을 창조하고 구원하며 온전케 하고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실 수 있어 사람이 사랑하나이다. 하나님께는 사람이 사랑할 만한 면이 아주 많나이다.” 베드로는 예수에게 “당신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실 만한 것이 어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만이겠나이까? 당신께는 사랑스러운 면이 더 많이 있나이다. 실생활에서 일을 처리하시는 것, 행동하시는 것과 당신의 영이 제 안에서 감동시키고 저를 징계하고 책망하시는 이런 것들은 더욱 사랑할 가치가 있나이다.”라고 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체험하려면, 실생활에서 모색하고 구해야 하며 기꺼이 육을 버리려는 이런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의지 있는 사람이 되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나태하지 않고 육적인 즐거움을 탐하지 않으며, 육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번에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니, 다음번에는 힘을 좀 쓰더라도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지, 육을 충족시켜서는 안 된다. 이렇게 체험하는 과정에서 너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할 수 있고, 성육신하여 사람들이 실제로 보고 실제로 접할 수 있게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영은 실생활에서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그의 사랑스러운 면을 보게 하고, 그의 징계와 채찍질, 그리고 축복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늘 이렇게 체험한다면 실생활에서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게 된다. 어느 날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이 된다면, 너는 가책을 받고 자신을 뉘우치게 될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너는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하나님이 너를 버린다고 말하면,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버림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할 것이다. 이런 느낌이 있으면 너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기초가 생긴 것이고,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2)

사람은 흔히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정도까지 체험하지 못했다. 단지 하나님은 너의 생명이고 날마다 너를 인도하니, 네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너의 생명이 된다고만 말할 뿐이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인식이 너무나 얄팍하다. 많은 사람의 내면에는 아직 기초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에 심기만 했을 뿐, 아직 싹이 트지 않았고 열매는 더더욱 맺히지 않았다. 지금 너는 어느 정도까지 체험했느냐? 하나님이 떠밀어 이 정도까지 오게 한 지금에야 너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언젠가 어느 정도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이 너더러 가라고 해도 떠날 수 없을 것이고, 늘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된다고 느낄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 또는 아들딸, 가족, 부모, 그리고 육적인 즐거움은 없어도 되지만,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것은 안 된다고 느낄 것이다. 너에게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이 너의 생명을 거두어 간 것과 같다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이런 정도까지 체험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의 생명이 되고 네 생존의 토대가 되어 다시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게 된다. 네가 그 정도까지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누린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가까워지면, 하나님은 너의 생명이요 너의 사랑이 될 것이다. 그때 너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저는 이미 당신을 떠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저의 생명이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지만 당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참된 분량이요 실제 생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떠밀려 지금까지 오게 되었고, 가고 싶든 가기 싫든 다 가야 하기에 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하나님이 곧 너의 생명이므로 네 마음에서 하나님을 거두어 간다면 생명을 빼앗긴 것과 같다고, 하나님은 곧 너의 생명이므로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느낄 정도까지 체험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정말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이요 하나뿐인 순결한 사랑이다. 계속 체험해 어느 날 네 생명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기도하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든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너의 생명이 된 후에는 세상을 잊고 아내나 남편, 아들딸을 잊으라는 것은 괜찮아도 하나님을 잊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되며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너의 참된 생명이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게 되면, 그 무엇을 사랑하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초월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앞에 두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책망과 훈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네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실제 가운데서 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3)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기만 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행사 아니겠느냐? 이것이 가장 강력한 증거다! 하나님이 어느 단계까지 사역하여 사람에게 봉사하라고 하고, 형벌하거나 죽게 하겠다고 말해도 사람이 떠나가지 않게 된다면, 사람은 하나님께 정복된 것이다. 실제 체험 속에서 굳게 설 수 있고, 입장을 지킬 수 있으며, 하나님 편에 서서 절대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정상 관계가 있다면, 일이 닥쳐도 하나님께 완전히,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리가 있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실행하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증거다. 즉, 사람이 살아 내는 모습이요, 하나님의 증거이다. 그러면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네가 이 정도까지 체험했다면 성과를 거둔 것이다. 자신에게 실제적으로 살아 내는 것이 있어 일거수일투족은 다른 사람의 탄복을 자아낸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겉면의 차림새는 평범하지만 매우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때는 하나님의 인도와 깨우침이 있다. 또 말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얘기할 수 있고 실제를 나눌 수 있으며 영적으로 섬기는 많은 일에 대해 알 수 있다. 대범하게 말하고, 단정하고 올바르며, 다툼을 벌이지도 방종하지도 않고,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굳게 설 수 있다. 무슨 일을 처리하든 믿음직하고 침착하다. 이런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어리지만, 겉면의 행동이 중년처럼 성숙하고 진리가 있어 모두가 탄복한다. 이런 사람은 간증이 있으며,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까지 체험하면 내면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외적인 성품도 안정된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기에 굳게 서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고 하나님의 증거가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가장 증오한다. 그가 예배 때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살아 내는 것은 사탄이다.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자 하나님을 폄훼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없으며, 성령 역사가 전혀 없으므로 언행이 다 사탄을 대변한다. 네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주위 사람이나 일 그리고 사물에 늘 주의를 기울여 관찰한다면, 또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하나님은 네 안에서 수시로 깨우쳐 줄 것이다. 교회에는 ‘감독관’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보고 따라 배우며 모방한다. 그들은 분별력이 없고 죄를 혐오하지 않으며,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을 증오하지 않고 역겨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내면은 사탄의 것들로 가득하여 결국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말하고 일할 때는 분수를 알아야 하며, 절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상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너에게 행하는 일이 헛수고가 되지 않게 하고, 이전에 받은 고통과 이전에 실행한 것들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며, 앞으로의 길에서 더욱 노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상(異象)을 토대로 한 사람이고, 진보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4)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면, 그런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으며, 그가 살아 내는 것은 진리이고, 증거하는 것 또한 진리와 하나님의 어떠함과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직접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 헌신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글귀와 상상으로 그를 사랑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억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하게 한다. 그의 사역과 말씀에서 그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한 뒤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오게 한다. 그래야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증거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이가 선동해서가 아니고 일시적인 감정의 충동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면을 보았고, 하나님께 사람이 사랑할 만한 면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지혜와 놀라운 행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찬미가 우러나오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모의 마음이 우러나오며, 하나님을 얻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격정이 일어나게 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증거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과 사모의 마음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또 감정적인 충동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 증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기에 반드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반드시 하나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하나님의 실제를 알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이고 실제가 있으며 실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지, 피동적인 것도,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는 사람이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살고,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축복받은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증인이며, 하나님께 축복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기(知己)이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과 함께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서 영원토록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랑할 만한 분이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증거하거나 하나님과 함께 왕권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온 힘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천하를 두루 다녀도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이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왕권을 잡고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세계 각지에서 함께 모인 사람들이고, 언어와 피부색은 달라도 같은 삶의 의미를 갖고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또 모두 똑같은 증거가 있는 사람들이고, 공통된 의지와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하를 두루 다니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은 전 우주를 횡단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5)

지금 하나님에 대한 너의 사랑은 얼마나 되느냐? 하나님이 네게 행한 것을 너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는 모두 네가 배워야 할 공과이다. 하나님이 땅에 와서 사람에게 행한 것과 보여 준 것은 모두 그를 사랑하게 하고 그를 진실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겪으면서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나아가 사람에게 행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사역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고난받게 하지 않았다면, 솔직히 말해 너희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는 사역이 클수록 사람은 더욱 고통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역 의의가 매우 크다는 것을 더욱 의미하며, 사람은 마음으로 더욱 참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공과는 무엇으로 도달하게 되느냐? 만약 고난과 연단, 고통스러운 시련이 없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 긍휼만 베푼다면 네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한편으로는 시련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보잘것없고 비열하고 천박하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마련한 상황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더 잘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고통이 너무 커서 이겨 내지 못할 때도 있고, 심지어 극도의 비통에 빠질 때도 있지만, 체험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사역이 실로 사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토대로 사람에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생기게 된다. 사람은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긍휼만으로는 자신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없고, 사람의 본질은 더더욱 인식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거듭된 심판과 연단을 통해야만 사람이 연단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사랑은 하나님의 연단과 심판을 토대로 이뤄진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정이 평안하거나 물질적 축복만 받았다면, 하나님을 얻었다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와서 은혜의 사역을 하며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물질적 축복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은혜와 자비, 긍휼만으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다. 사람은 체험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느끼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도 보았다. 그러나 한동안 체험한 후에는 그의 은혜와 자비, 긍휼로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고, 사람의 내면에 있는 패괴된 것들을 들춰내지 못하며, 사람의 패괴 성품을 벗겨 버릴 수 없고, 사람의 사랑과 믿음도 온전케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 사역은 한 단계 사역일 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알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6)

현재 많은 이들은 알지 못해, 고난받는 것이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가정은 평안하지 않으며 하나님 역시 기뻐하지 않으니 앞날이 막막하다고 말이다. 어떤 이들은 몹시 괴로운 마음에 죽고 싶어 하는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는 의지가 없고 나약하며 무능한 겁쟁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사랑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사람은 그를 사랑할수록 더 큰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된다. 네가 그를 사랑하면 갖가지 고난이 네게 임하겠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고 주변 환경도 평화로울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부터 주변의 많은 상황들이 늘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의 보잘것없는 분량으로 인해 연단을 받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도 못한다고 느끼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높아 사람이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연단을 받고, 또한 자신의 내면에 연약한 부분이 많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지 못하는 면이 많은 것으로 인해 연단을 받는다. 하지만 너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연단을 통해서만 정결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 아무리 큰 고난이 닥쳐도 끝까지 가야 하며, 마지막 숨이 붙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의 지배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굳세고 힘 있게 증거하는 것이다. 사탄의 시험이 닥칠 때면 너는 “내 마음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은 이미 나를 얻으셨다. 그러니 나는 너를 만족시킬 수 없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릴 것이다.”라고 말하여라. 네가 하나님을 만족게 할수록 하나님은 너를 더욱 축복할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생기고 의지도 굳세지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근심과 슬픔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많은 실제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지만, 그럴 때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영이 위로를 받아 편안하고 든든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낼 수 있고, 네가 겪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 찬양하고 춤추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교제하고 싶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안배한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이 모두 적절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보든 네 뜻에 부합하지 않고 눈에 거슬릴 것이며, 영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압박을 느낄 것이며, 늘 하나님께 원망을 품으면서 자신이 겪는 고난이 너무 많다고,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네가 네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기 위해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실행할 수 있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실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 식어도 너만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리는 것, 이것이 바로 실제 분량이다. 너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마음이 얼마나 큰지, 시련이 임했을 때 굳게 설 수 있는지, 어려운 상황이 닥쳐올 때 연약해지지는 않는지, 형제자매들이 너를 버려도 네 입장을 굳게 지킬 수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실이 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수많은 사역에서 알 수 있듯, 하나님은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다. 다만 사람이 영의 눈을 완전히 뜨지 못해 하나님의 수많은 사역,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수많은 사랑스러움을 밝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너무나 작을 뿐이다. 너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 왔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너의 모든 퇴로를 차단했다. 솔직히 말해, 너는 어쩔 수 없이 바른길로 끌려온 것이고, 하나님의 엄한 심판과 크나큰 구원이 너를 바른길로 인도한 것이다. 사람은 고난과 연단을 겪어야만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깨닫게 되며, 지금까지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어느 정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사람에게는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묘한 사역을 더 많이 체험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준비한 모든 고난의 연단을 더 많이 체험해야만 생명 성품이 변화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알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7)

지금 너희는 모두 시련과 연단을 겪고 있다. 연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겠느냐? 사람은 연단을 겪고 나면 하나님을 진실하게 찬미하게 되고, 연단 속에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단을 많이 겪을수록 육을 더 잘 저버릴 수 있고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어째서 연단을 받아야 하겠느냐? 연단으로 거두려는 성과는 어떤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연단 사역에는 어떤 의의가 있겠느냐?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해 어느 정도까지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연단이 아주 좋은 것이고 매우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연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겠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의지로 하나님의 연단을 받아들이고, 연단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지라도 육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흡족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내적으로 괴롭고 고통이 심하더라도 너는 하나님 앞에 와서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나님, 저는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비록 제 내면은 어둡지만 저는 당신을 흡족게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당신께서는 제 마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 안에 당신의 사랑을 더 많이 심어 주시길 바라옵니다.” 이것이 연단 속에서의 실행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연단이 너를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친해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맡겨야 한다. 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으면 너는 연단 속에서 결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정상적으로 바뀔 것이며, 하나님과의 교통도 점점 더 빈번해질 것이다. 네가 늘 이렇게 행하면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사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시간도 많아질 것이며, 성품도 점점 변화되고 인식도 나날이 늘어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너에게 하나님의 시련이 닥칠 때 네가 하나님의 편에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면, 그때 너는 욥과 베드로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을 증거한다면 너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증인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연단을 거친 사랑이라야 약하지 않고 굳건하다.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시련을 주든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며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다면, 너의 사랑은 순결해질 것이고, 너의 믿음도 실질적인 믿음이 될 것이다. 그때 너는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자 진정으로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 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연단을 겪어야 참된 사랑이 생기게 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8)

사람이 사탄의 권세 아래 떨어진다면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고 과거의 이상(異象), 사랑, 의지도 없어질 것이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수없이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이는 사탄의 역사에 속하며, 사탄의 권세 아래 떨어진 사람의 모습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얼른 기도하고 얼른 돌려세워야 한다. 그러면 사탄이 공격할 때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사람은 고통스러운 연단 속에서 가장 쉽게 사탄의 권세 아래로 떨어진다. 이런 연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겠느냐? 의지를 북돋워 하나님 앞에 네 마음을 내놓고 마지막 남은 시간을 전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연단하든 계속 진리를 실천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하며 자발적으로 교통하기를 찾고 구해야 한다. 이럴 때, 네가 수동적으로 대응할수록 더 쉽게 소극적이 되고 더 쉽게 후퇴하게 된다.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 비록 잘하지 못하더라도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고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잘했다고 하든 못했다고 하든, 어쨌든 네 마음은 옳은 것이며 독선적인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너를 오해할 때 너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이 저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거나 잘 대해 주길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저를 이해해 주거나 지지해 주길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고, 마음이 안정되며 양심이 평안하기만을 바라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칭찬하고 높여 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오직 당신을 흡족게 해 드릴 수 있기만을 마음속으로 바라옵니다. 저는 제 모든 능력을 쏟아부어 이 역할을 수행하겠습니다. 비록 저는 어리석고 자질이 부족하며 눈멀었지만, 당신의 사랑스러움을 알고 있습니다. 제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와 마음이 많이 편해질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체험하는 과정에서는 두 번 실패하고 한 번 성공할 수도 있고, 다섯 번 실패하고 두 번 성공할 수도 있다. 이렇게 체험하다 보면 실패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된다. 너에게 또다시 그런 일이 닥치면 신중해야 하고, 행동을 조심해야 하며,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그 일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기도의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네가 이 성공으로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으며 성령의 함께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네게 그렇게 역사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실천을 통해 체험하는 가운데 길이 생기게 된다.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네 안에는 성령의 함께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임했을 때 진리를 실천한다면 비록 마음은 조금 괴롭겠지만 지나고 난 뒤에는 성령이 너와 동행할 것이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함께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도 힘이 생기고 형제자매들과 교제할 때는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으며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는 네가 행한 것을 내놓고 보여 줄 수 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실천한 것이 성과를 거두었음을 말해 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연단을 겪어야 참된 사랑이 생기게 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09)

하나님이 연단할수록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고통받으면 사람의 생명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더 평온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과 구원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수백 번의 연단을 겪었고, 욥도 여러 차례 시련을 겪었다. 너희도 하나님께 온전케 되려면 수없는 연단을 겪어야 하고 또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반드시 이 절차를 거쳐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연단은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오직 연단과 고통스러운 시련을 통해야만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 우러나오게 할 수 있다. 사람은 고난 없이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지 못하며, 내면에 시련이 없고 진실한 연단을 겪지 않고서는 마음이 항상 밖에서 떠돌게 된다. 어느 정도까지 연단을 받으면 너는 자신의 연약함과 어려움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많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겨 낼 수 없음을 알게 되며, 자신에게 패역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련 속에서만이 자신의 실제 상태를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시련은 사람을 더욱 온전케 할 수 있다.

베드로는 평생 수백 번의 연단을 받았으며, 수많은 고통의 단련을 받았다. 그런 연단은 모두 그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토대가 되었고, 그의 일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체험이 되었다. 베드로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연단과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초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그에게 가장 잊기 힘든 일이 되어 주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연단의 고통을 겪지 않으면 그 사랑이 불순물과 사람의 기호로 점철된다. 그런 사랑에는 사탄의 뜻이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흡족게 할 수 없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설령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람 자신의 뜻은 전혀 없이 다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하나님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는 없다. 설령 사람이 모든 진리를 분명히 알고 깨달았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징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비록 연단을 받기 전에 수많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런 진리를 다 실천할 수는 없다. 사람은 연단 속에 있을 때 비로소 그런 진리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고, 진정으로 그런 진리에 내포된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 다음에 다시 그런 진리를 실천한다면 정확하게 실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할 것이다. 그때의 실천에는 개인의 뜻이나 사람의 패괴, 사람의 감정이 적어진다. 그때의 실천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진리는 사람이 입으로 안다고 말하고 마음으로 원한다고 해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깨닫는다고 해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고 연단 속에서 많은 고통을 받아야만 사람의 사랑이 순결해지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연단을 겪어야 참된 사랑이 생기게 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0)

하나님은 사람의 내적 상태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맞추어 새로운 사역을 하고, 이로써 사람이 그를 알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사랑하고 증거하게 한다. 이렇게 되려면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연단을 겪어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훈계와 책망을 겪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진실하게 사랑하거나 증거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연단하는 것은 한 측면의 성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의 성과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진리를 구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연단의 사역을 하고, 이로써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연단은 진리를 구하기 원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므로 어쨌든 사람과 같은 성품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의 성품을 알기가 쉽지 않다. 진리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는 진리가 갖추어져 있지 않고, 진리를 실천하려는 의지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사람이 고난과 연단을 받지 않고 심판도 받지 않는다면, 사람의 의지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연단은 모든 사람에게 상당히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자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주고,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자신의 요구를 공개하는 한편,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더 많은 깨우침을 주고, 더 많이 실질적으로 책망하며 훈계한다. 이렇게 사실과 진리를 대조함으로써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하고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닫게 하며, 이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더 참되고 순수하게 사랑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연단의 사역을 하는 목적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모든 사역에는 그 목적과 의미가 있다. 그는 무의미한 사역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불리한 사역도 하지 않는다. 연단은 사람을 그의 앞에서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을 멸하여 지옥에 보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연단 속에서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속셈과 낡은 관점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변화시키고, 또 사람의 모든 삶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사람에게 연단은 실제적인 검증이자 실제적인 훈련이다. 오직 연단 속에서만이 사람의 사랑이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연단을 겪어야 참된 사랑이 생기게 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1)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또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를 실천하며 네 본분을 다 이행해야 하며, 그뿐만 아니라 네가 체험해야 할 것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책망, 징계, 심판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누릴 줄만 알 뿐, 하나님이 언제 너를 징계하고 책망하는지 느끼지 못해서는 안 된다. 네가 이번 연단에서 바른 입장을 견지했더라도 거기서 그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과는 끝이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일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경험한 후에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람의 상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사역을 통해 사람을 연단하면 사람은 고통을 받는다. 사람이 받는 연단이 클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지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더 많이 나타난다. 반대로 받는 연단이 적을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작아지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큰 능력도 더 적게 나타난다. 많은 연단을 받을수록, 큰 고난을 받을수록, 많은 시달림을 받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더 갖게 되며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체험하는 과정에서, 너는 큰 연단과 고통을 받고 많은 책망과 징계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고 하나님에 대해 더 깊고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책망을 한 번도 겪지 않은 사람은 인식이 매우 얕은 관계로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십니다.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어 그분을 누리게 하십니다.”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한다. 책망과 징계를 겪은 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이 기묘할수록 더욱 가치와 의의가 있고, 네가 헤아릴 수 없고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을수록 더욱 너를 정복하고 얻을 수 있으며 온전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매우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사람을 이렇게 연단하지 않고 이 방식대로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성과도, 의미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은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택하였고 또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세에 이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 특별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에게 큰 사역을 행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더 깊어지고 순결해지며, 하나님이 큰 사역을 행할수록 사람이 그의 지혜를 더 잘 깨닫게 되고 그에 대한 인식도 깊어진다.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은 말세에 끝나겠지만, 그렇게 쉽게 끝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하면 끝이겠느냐?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사람은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행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하나님이 하는 사역의 어느 한 부분도 사람은 온전히 측량할 수가 없다. 네가 온전히 측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은 측량할 수 없고 네 관념에 크게 어긋난다. 네 관념에 어긋날수록 하나님의 사역이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네 관념에 부합하면 의미가 없다. 지금 너는 하나님의 사역이 몹시 기묘하다고 느끼고 있다. 하나님의 사역이 기묘할수록 너는 더욱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하나님의 행사가 아주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그가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사역만을 행하여 사람을 정복하고 끝낸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 지닌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 얼마간 연단을 받지만 이는 네 생명이 자라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너희에게 너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네가 연단을 조금 받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될 것이고, 결국 너는 “하나님의 행사가 실로 기묘하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동안 연단(봉사자 시련, 형벌시대)을 겪은 후 마지막에 “하나님을 믿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라고 했다.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를 측량할 수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하는 일은 참으로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고, 사람이 소중히 여길 만하다는 의미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도 네가 전혀 알지 못한다면 내가 한 사역이 가치가 있겠느냐? 나는 네 입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는 정말 쉽지 않구나. 하나님의 행사는 실로 기묘하다. 하나님은 정말 지혜롭고 사랑스러우시다!”라는 말이 나오게 할 것이다. 한동안 체험을 한 후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이 네게 한 사역을 통해 무언가를 얻었음을 말해 준다. 훗날 네가 외국에 나가 전도할 때 누군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행사는 너무도 기묘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너의 이 말 속에 실제 체험이 들어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참된 증언이다. 또한 네가 하나님의 사역은 실로 지혜롭고, 너에게 한 사역이 너를 진심으로 탄복하게 하고 네 마음을 정복했으며, 그는 실로 사랑할 만한 분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를 사랑할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 이것이 모두 증언이다. 힘 있게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게 한다면, 그것은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말해 준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의 증거를 통해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역을 찾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참된 증거이다. 지금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너는 마땅히 하나님의 사역이 아주 가치 있고 소중히 여길 만하며, 하나님은 참으로 보배롭고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 하나님은 말씀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심판하고, 사람의 마음을 연단할 수도 있으며,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정복할 수 있고 온전케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체험 속에서 하나님이 매우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는 지금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 정말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말이 우러나온다면 그때는 너에게 증거가 있는 것이다. 네가 이 정도까지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증거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직 멀었다. 연단 속에서 사람이 연약해지는 것은 정상이다. 그러나 연단 후에는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지혜롭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이 말의 실제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보배로울 것이고 너의 체험도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2)

너는 지금 무엇을 추구해야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할 수 있는지, 네가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지,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지, 이것이 네가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느냐? 너는 그 사역에 대해 얼마나 알고 또 얼마나 깨달았느냐? 얼마나 체험하고 얼마나 경험했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주든, 너를 책망하든 징계하든, 어쨌든 하나님은 너에게 자신의 행사와 사역을 행했다. 그런데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너의 실제 체험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할 수 있느냐? 실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낼 수 있느냐? 실제 체험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기 위해 너의 일생을 헌신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려면 너의 체험과 인식, 네가 치른 대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는 사람이냐? 너에게 그런 의지가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할 수 있고, 더욱이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요구하는 백성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증인이다! 너는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증거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기를 갈망하며, 너의 입으로 증거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해야 한다. 네가 정말로 이렇게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온전케 되어 마지막에 복을 받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이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 너는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너에게 나타날 때 어떻게 그를 만족게 할 것인지, 하나님의 기묘함과 지혜를 어떻게 증거하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지 추구해야 한다. 이런 것이 모두 지금 네가 곰곰이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마음이 단지 하나님께 온전케 된 후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을 실제적으로 증거하고, 그의 요구를 실제적으로 충족시키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사역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고난을 받든, 눈물을 흘리든, 근심으로 슬퍼하든 모두 실제로 체험해야 한다. 이는 네가 하나님의 증인이 되도록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네가 지금 고난받고,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냐? 오늘날 네가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증거하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육체의 복을 받거나 나중의 앞날과 운명을 위한 것이냐? 마음가짐과 동기, 추구하는 목표를 바로잡아야지, 너 자신의 뜻에 따라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군가는 복을 받기 위해, 왕 노릇 하기 위해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고, 또 누군가는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역을 실제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온전케 되기를 추구한다면 너는 이 둘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전자를 택한다면 너는 아직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행사를 전 우주에 공개하고, 전 우주에서 왕권을 잡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너희에게 맡긴 일은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지, 왕이 되어 우주 전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행사를 우주 궁창에 가득 나타내 모든 이가 보게 하고 인정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얼마나 증거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겠느냐? 너에게 온전케 되기를 원하고, 또한 자신이 살아 낸 것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겠다는 원동력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너에게 이런 원동력이 있다면 그 어떤 소극적인 것, 수동적인 것, 육적인 나태함, 육적인 관념, 처세 철학, 패역한 성품, 감정 등도 모두 쉽게 버릴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3)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사람이 연약해지거나 소극적이 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거나 실행의 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다 정상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믿음이 있어야 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욥이 비록 연약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지만, 그는 사람이 태어나서 가지게 된 모든 것은 여호와가 베풀어 준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 이도 여호와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어떤 시련을 겪든 그의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네가 체험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연단을 받든, 결국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사람의 믿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가 그렇게 사역함으로써 온전케 하는 것은 사람의 믿음과 사랑이며, 또한 사람의 의지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할 때 사람은 그것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너의 믿음이 필요하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일에서 사람의 믿음이 필요하고, 네가 관념을 내려놓지 못할 때 너의 믿음이 필요하며, 네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모를 때 너의 믿음이 필요하다. 너는 이러한 주관을 갖고 굳게 서야 한다. 욥이 이 수준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말씀했다. 다시 말해, 네가 믿음 안에 있어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네게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지만, 네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도 너를 온전케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네가 바라는 것을 베풀어 준다. 너에게 믿음이 없으면 온전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전능은 더더욱 볼 수 없다. 네가 실제 체험 중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볼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나타나 네 안에서 너를 깨우쳐 주고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네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다. 네가 하나님께 희망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지니며,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어야 체험 속에서 그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고, 그의 행사를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모두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연단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고, 연단이 없으면 믿음도 생기지 않는다. 믿음이란 무엇이냐? 바로 사람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을 때,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의 관념과 맞지 않아 이를 수 없을 때, 갖춰야 하는 참된 믿음과 진실한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믿음이다. 사람은 고난받을 때 믿음이 필요하고, 연단받을 때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있으면 그에 따라 연단도 온다. 이 둘은 갈라놓을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든,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언제나 생명을 추구하고 진리를 구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알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알고 진리대로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연단 속에서도 진리를 추구하여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계속 진리를 실행하여 그를 만족게 하고, 깊은 곳에서 그의 뜻을 구하고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지난날, 너에게 왕권을 잡게 할 것이라고 했을 때는 그를 사랑하고, 너에게 공개했을 때는 그를 추구했지만, 이제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고 고난이 임하니 하나님에게 실망했느냐? 그러므로 너는 언제든 생명을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바로 이것을 진실한 믿음이자 가장 참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다들 하나님 앞에서 각오를 다지며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저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 너에게 임한 연단이 네 관념에 어긋나자 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냐? 너는 지난날 욥의 행적을 여러 번 보았다. 그것을 지금은 잊은 것이냐? 믿음 안에서만 참된 사랑이 생길 수 있다. 네가 연단을 받으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 생길 것이다. 실제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믿음으로 자신의 육을 버리며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네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온전케 되려면 반드시 고난받겠다는 각오, 믿음, 인내, 순종 등 모든 것을 갖춰야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슬픔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연단이 닥칠 때마다 너의 믿음과 사랑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려면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줄만 알아서도 안 된다. 많은 것을 갖추어야만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 될 수 있다. 고난이 닥쳤을 때 육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모습을 감추었을 때 하나님을 따를 믿음을 갖고 예전의 사랑도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또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고, 차라리 자기 육체를 저주할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며, 시련이 닥쳤을 때 고통을 참으며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할지언정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사랑과 믿음이다. 너의 실제 분량이 어떻든, 너는 우선 고난받겠다는 각오와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하고, 육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하며, 자신이 고난받고 개인적인 이익에 손해를 볼지언정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또 스스로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했더라도 지금은 스스로 통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가지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통해 너를 온전케 한다. 네가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면 온전케 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4)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을 줄만 알아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쓰는 것은 너를 연단하여 고통받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네게 하나님의 행사와 인생의 진정한 의의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며, 더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이상 하나님의 형벌도 누려야 한다. 이런 것들을 모두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깨우쳐 준 것을 체험할 수 있고,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고 심판한 것도 체험할 수 있다면, 너는 전면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심판 사역도 하고 형벌 사역도 했으며 말씀으로 너를 책망한 적도 있지만, 너를 깨우쳐 주었고 빛을 비추어 주었으며, 네가 소극적이 되어 연약해졌을 때도 너를 염려하였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사역을 통해 너에게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난받는 것,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 또는 육체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우며 편안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가져야 할 목적이 아니다. 네가 이렇게 믿고 있다면 너의 관점은 바르지 않은 것이며, 너는 절대로 온전케 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기묘함과 난측함에 대해 알아야 한다. 또한 이런 인식을 통해 네 마음속에 있는 개인적인 요구와 소망, 관념을 없애야 한다. 이런 것을 없애야만 하나님이 요구한 조건을 갖출 수 있고, 이것을 통해서만 생명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이 요구한 성품으로 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격 없는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통해 그의 행사와 영광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옳은 관점이자 네가 추구하는 목표여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관점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실제 행사를 보고, 하나님이 우주 전체에서 행하는 기묘한 행사와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실제 사역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실제 체험을 통해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 사람에 대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하기 위함이다. 네 안의 불결하고 불의한 것을 벗어 버리고 너의 옳지 못한 속셈을 버리며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참된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믿지 않는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왕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흐리멍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받을 수 있겠다 싶으면 바로 열의가 생겨나고, 연단받는 것을 보면 바로 열의가 사라지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으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고, 수많은 종교 관념을 버리지 못하며, 개인적인 이익을 놓지 않고, 육적인 복이 내리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너의 육과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한다면, 이는 전부 관점이 바르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육적인 이익만 추구할 뿐,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종교 신앙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이는 전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겠다는 마음과 자기를 버리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이 두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고, 성품이 변화될 수도 없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5)

연단 사역은 주로 사람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는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이 모든 희망을 잃었을 때도 믿음을 버리지 않으며, 자기 앞날에 대해 아무런 소망도 갖지 않는 정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연단이 끝나게 된다. 사람이 죽도록 힘든 지경에 이르러 죽음의 맛을 보기 전까지는 이 연단이 끝나지 않는다. 봉사자의 단계에서도 연단은 극한에 이르지 않았다. 욥은 극한의 연단을 받아 의지할 곳이 전혀 없었다. 사람은 반드시 그 수준까지 연단을 받아 희망도 의지할 곳도 전혀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연단이다. 봉사자일 때 언제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계속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한다면, 이 길 끝에서 너는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는 욥의 시련을 겪는 동시에 베드로의 시련 또한 겪게 된다. 욥이 시련을 받을 때 굳게 서자 마지막에 여호와가 그에게 나타났다. 굳게 섰기에 하나님의 얼굴을 볼 자격이 생긴 것이다. 어째서 “나는 거룩한 나라에는 나타나지만 더러운 땅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라고 말했겠느냐? 다시 말하자면, 네가 성결하게 되고 굳게 서야만 하나님의 얼굴을 볼 면목이 있는 것이지, 굳게 서지 못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떠나거나 원망하고 굳게 서지 못해 사탄의 조롱거리가 된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만약 욥처럼 시련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저주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육체를 증오할 수는 있어도 절대 불평하지 않으며, 입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굳게 선 것이다. 네가 어느 정도로 연단을 받아도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에게 다른 요구를 하지 않으며, 관념도 갖지 않는다면, 그때 하나님은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너에게는 수많은 관념과 선입견이 있고, 사심, 잡념, 사사로운 요구, 육적인 이익이 많아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을 만나면 너 자신의 관념을 가지고 평가할 것이므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많은 일이 닥쳤을 때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아도 내려놓을 수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알 수 있으며, 연단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굳게 선 것이다. 만약 네 가정이 평안하고 육체적으로도 누릴 수 있으며 아무도 너를 핍박하지 않고 교회의 형제자매들 또한 너에게 순종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너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 그러면 너를 연단할 수 있겠느냐? 연단 속에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너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고,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닥쳐야만 너를 온전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많은 일을 역이용하고, 또 사탄의 수많은 행위, 참소, 교란과 미혹 등 다양한 모습을 통해 네가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똑똑히 보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탄을 분별하게 하고 나아가 사탄을 증오하고 저버리게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6)

너는 많은 실패를 겪고 연약함을 수없이 체험했으며, 또 많은 경우에 소극적이 되는데, 이 역시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고, 만사 만물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실패하든, 연약해져서 넘어지든,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고, 하나님이 주관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네게 시련을 주는 것이지만 네가 알지 못하면 그것이 시험이 된다. 사람은 두 가지 상태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에게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전자는 성령의 빛 비춤을 받아 자신을 알고 증오하고 통회하게 되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갖게 되고, 굳게 마음먹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 한다. 반면 후자는 자신을 알기는 해도 소극적이고 연약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사탄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임을 알고 하나님께 큰 죄책감을 느끼며 앞으로는 보완하여 다시는 그렇게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잘 먹고 마시겠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갈망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련이다. 고통을 받은 후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계속 인도하고 빛을 비추어 주고 깨우쳐 주고 양육해 줄 것이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아예 자포자기하려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탄의 시험이 닥친 것이다. 욥이 겪은 시련은 하나님과 사탄이 내기를 한 것이었고, 사탄이 욥을 학대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었다. 비록 하나님이 욥에게 시련을 주었지만 실제로는 사탄이 욥에게 임했다. 사탄의 입장에서는 욥을 시험한 것이었지만 욥은 하나님 편에 섰다. 만약 욥이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다면 시험에 빠졌을 것이다. 사람은 일단 시험에 빠지면 위험해진다. 연단 겪는 것을 하나님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상태가 좋지 못하면 사탄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이상(異象)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하면 사탄이 너를 참소하고 이상에 대해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시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지 않으면 온전케 될 수 없다. 너는 세부적으로 체험하며 진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유로 관념이나 많은 속셈이 생기는지, 또 그런 것에 대한 적절한 실행 방법이 있는지 등을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안다면 분량이 있다는 의미다. 겉으로만 열정이 있다면 참된 분량이 아니므로 전혀 굳게 설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알아야, 또 언제 어디서든 체험하고 곰곰이 생각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목양자들을 떠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독립적으로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실제 행사를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의 뜻에 다다른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체험할 줄 모르고, 일이 닥쳐도 처리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모르고, 영 생활을 할 줄도 모른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너의 실생활에 적용시켜야 한다.

때로 하나님은 너에게 내면에 누림을 잃고, 하나님의 함께함이 없고 어둠에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일종의 연단이다. 또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문제가 생기고 실패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이다. 때로 네가 거역하는 일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징계하는 것이다. 성령 역사는 아주 세밀하다. 사람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생각 하나까지도 아주 또렷하게 감찰하고 사람이 속으로 느끼게 한다. 네가 일을 할 때 한 번, 두 번 문제가 생기다 보면 성령 역사에 대해 차츰 알게 될 것이다. 여러 번의 징계를 통해 너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지 알게 되며, 최종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인도에 정확하게 반응하게 된다. 어떤 때는 네가 거역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책망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오는 징계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소홀히 하면, 하나님은 너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답게 대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이 깨우쳐 준다. 지금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흐리멍덩하게 믿고 지나친 일을 많이 해도 징계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뚜렷한 역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위해 사명을 버리고 사업하러 떠나도 징계가 임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은 더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지금 당장 성령의 역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온전케 되기도 어렵다. 많은 사람에게서 성령 역사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징계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연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따라가야 하며, 최소한 떠나지 않고 베드로의 0.1%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사용 가치가 없다. 빨리 깨닫고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며 베드로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하는데, 그들에게 징계하고 깨우쳐 주는 일을 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즉시 벗어 버릴 수 있게 한다. 이런 사람은 금은보석이자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역을 했는데도 네가 여전히 모래나 돌이라면 너라는 사람은 가치가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7)

하나님이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하는 사역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데, 한 무리 사람을 온전케 하고 또한 일부 사람들을 도태시킬 것이다. 교회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어, 분명 일부 불신파나 악인들이 도태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부정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일부 소수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누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인지, 이때 모두 드러난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한 단계 한 단계 역사를 통해 드러나 도태될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은 모두 정복 사역에서 드러난 사람들이고, 온전케 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온전케 된 사람은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져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정복된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사랑할 뿐이다. 정복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란 실제로 체험하여 인식을 갖게 됨으로써 생기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이 마음을 점유하면 사람은 자각적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이 근간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고난도 받게 된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정복되기만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목적을 이룬다면 ‘봉사자’ 단계에서 사역이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아니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이루려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를 정복하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보다 온전케 하는 사역, 도태시키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그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또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데, 이 두 사역은 동시에 시작된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역해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복하는 목적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정복된 사실이다. 그러나 연단은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연단 없이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연단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고 한 무리 사람들을 얻는다. 예전에 말한 열 가지 복은 모두 온전케 되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고, 땅에서 형상을 바꾼다는 것은 모두 온전케 되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온전케 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8)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이다. 특히 오늘날 성육신 하나님이 직접 사역하는 시대는 하나님을 알아 갈 좋은 기회다.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을 기반으로 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런 인식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반드시 지녀야 할 이상(異象)이자 토대이다. 사람에게 이런 인식이 없다면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는 것이고, 공허한 도리 속에서 믿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 흐름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자는 훗날 도태될 대상으로, 공밥을 먹는 사람이다. 네가 어느 단계의 사역을 체험하든 그에 따른 큰 이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새 사역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새 사역은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없고 사람의 사고로 이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목자의 목양이나 이상에 대한 목자의 교제 없이는 새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이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새 사역도 이해하지 못하고, 새 사역에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확히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다. 이는 진리를 구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점이자 하나님을 알아 가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는 과정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상을 아는 것은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을 아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아는 것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어떠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첫걸음이며, 하나님을 처음 믿을 때부터 가장 깊게 믿을 때까지의 과정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자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네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을 믿기 위해 믿는 것이라면, 네 ‘믿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실제가 없고 순결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차츰 하나님을 알게 되면, 조금씩 성품에 변화가 생기게 되고, 믿음도 점점 진실해진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되면 하나님을 온전히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이토록 심혈을 기울여 두 번째로 육신을 입고 직접 사역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알고 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사역을 마칠 때 거둘 최종의 성과이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요구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지막 증거를 위해서이며, 궁극적으로 인류가 철저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고, 무엇을 얻기 위해 추구하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아야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고, 참된 경외와 순종도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거나 경외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어떠함을 아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에 포함되지만, 어느 측면을 알든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하고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마지막까지 따를 수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의 고정 관념에 너무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과 어떠함은 사람이 알기 아주 어려우며,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나 행동 하나도 사람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고자 해도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꺼린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창세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많은 사역을 했고, 사람의 관념이 치유받기 힘든 많은 말씀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사람들의 고충이 크다는 것을 이유로 자신의 사역을 멈춘 적이 없으며, 계속 사역하고 계속 말씀해 왔다. 수많은 ‘용사’가 쓰러졌지만 그는 계속 자신의 사역을 하면서 새 사역에 기꺼이 순종하는 한 무리 또 한 무리의 사람을 끊임없이 택하고 있다. 그는 쓰러진 ‘영웅호걸’을 전혀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반면, 그의 새 사역과 새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을 귀히 여긴다. 그런데 그의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사역은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그는 왜 늘 사람을 도태시키기도 하고 택하기도 하겠느냐? 왜 항상 이런 방식을 택하겠느냐? 그가 사역하는 목적은 사람들이 그를 알고, 그로 인해 그에게 얻어지게 하는 데 있다. 그의 사역 원칙은 그의 현재 사역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사역하고, 과거 사역에는 순종하나 현재 사역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사역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도태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공과는 하루 이틀 만에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은 체험하고 고난받고 참되게 순종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없고, 또 단시간 내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자도 없다. 그러므로 모두 필요한 체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알거나 진심으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사역이 많아질수록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요소도 많아지고,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의 고정 관념에 부합하지 않을수록 사람은 그에 대해 더 새롭고 깊게 알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앎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한 것은 무엇이고, 은혜시대에 한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한 것은 또 무엇인지, 이런 이상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사역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직역) ‘하나님을 아는’ 이 단계 사역은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19)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생명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이다. 네가 자신을 인식하는 것과 자신의 패괴 성품을 다스리는 것만 추구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사역이 무엇이고 얼마나 큰 구원이 있는지,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체험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어떻게 보았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체험이다. 네가 단순히 진리를 실행하고 인내할 수 있다고 해서 생명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면, 생명의 진정한 함의와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근본 취지를 아직 모르는 것이다. 언젠가 너는 예배당에서, 오회파(懊悔派)에서, 생명파에서 경건한 사람을 수없이 만날 것이다. 그들의 기도에는 ‘이상’이 있고, 생명 추구에는 감동과 말씀의 인도가 있다. 또 그들은 많은 일에서 인내할 수 있으며, 자신의 육체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를 내려놓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너는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들이 모두 옳게 행동하고 있고, 모두가 생명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지만 아쉽게도 믿는 이름이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관점 아니겠느냐? 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이 없다고 말하겠느냐?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도, 생명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이 어느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이 하는 모든 단계의 사역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너에게 진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을 알지 못한다면, 너의 그런 체험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예수 그 단계에는 어떻게 했고 이 단계에는 또 어떻게 했는지, 하나님이 은혜시대에는 어떻게 했고 무슨 사역을 했는지, 이 단계에는 또 어떤 사역을 했는지 등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너는 늘 마음이 불안하고 확실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얼마 동안 체험해서 하나님이 행한 사역과 하나님의 모든 단계 사역의 절차를 알 수 있다면, 또 하나님 말씀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그렇게 많은 말씀이 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등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면, 마음을 놓고 대담하게 앞길을 추구할 수 있으며 걱정하지 않고 연단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수많은 사역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봐야 한다. 바로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말씀을 통해 사람을 연단하고 사람의 고정 관념을 돌려놓는다. 너희가 받은 고통과 너희가 겪은 연단, 내면에서 받은 책망, 체험한 깨우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느냐?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오하기 그지없으며,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드러내 과거의 일을 알고 미래의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고통받고 또한 하나님 말씀으로 온전케 된다. 그때에야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온전케 되든, 연단을 받든 핵심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는 사역이자 오늘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이상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중에서

이전: 생명 진입[3]

다음: 생명 진입[5]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설정

  • 텍스트 설정
  • 테마

색상

테마

폰트

폰트 사이즈 조정

줄 간격 조정

줄 간격

페이지 너비

목차

검색

  • 페이지 내 검색
  • 도서 내 검색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