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2]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6)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면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해 하나님의 만족을 얻어야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하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맡기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해야 한다. 온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부어야만 조금씩 정상적인 영 생활이 이뤄진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부담을 자신의 부담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며, 종교 인사들의 행위와 같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그저 하나님 역사의 부각물, 즉 하나님 집의 장식품처럼 숫자만 채우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성령이 역사할 기회가 없을뿐더러 온전케 될 가치도 없으며, 전형적인 산송장이므로 성령이 쓸 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 이들은 전부 사탄에게 점령당하고 사탄에 의해 극도로 패괴된, 하나님께 도태될 대상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할 때, 사람의 취할 만한 부분은 활용해 쓰고, 취하지 못하는 부분은 온전케 하고 변화시킨다. 만약 네가 마음을 전부 하나님께 쏟아부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질 수 있다면, 너는 성령께 쓰임 받을 기회와 자격을 얻게 될 것이며,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게 될 것이다. 나아가 성령을 통해 네 부족한 부분을 메울 기회도 얻게 될 것이다. 네가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면, 긍정적인 면에서는 더 깊이 진입하여 더 높은 깨달음을 얻게 되고, 부정적인 면에서는 자신의 부족함과 결함에 대해 더 잘 인식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를 더욱 갈망하게 될 것이며,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이는 네가 올바른 사람임을 설명해 준다. 네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졌다는 전제하에, 성령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의 관건은 네가 적극적으로 진입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성령이 사람을 깨우치고 사용하는 데에는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사람을 적극적으로 향상하게 만든다. 연약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살아가지 않으며, 생명의 성장을 지체하지도 않고 계속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준이며, 이것 하나만으로도 네가 성령의 함께함을 얻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항상 소극적이라면, 설령 빛 비춤을 얻어 자신을 인식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소극적이고 피동적일 것이며, 일어나 하나님과 협력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만 입었을 뿐, 성령의 함께함을 얻지는 못했다. 이렇듯 사람의 소극적인 면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고, 사람의 영이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모두 이 점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7)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듯,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은 사람의 영 생활 및 생명 성장에 관련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너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져야만 진리와 성품 변화를 추구함에 있어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너는 부담을 갖고 하나님 앞에 왔기에 늘 자신은 부족함이 많고, 깨달아야 할 진리와 체험해야 할 실제가 많고, 마땅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느낀다. 이러한 일들이 늘 마음에 걸려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억눌려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하지만 소극적인 상태는 아님).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과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부담과 무거운 마음으로 인해, 즉 하나님 앞에서 지불한 대가와 받은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하게 대한다. 하지만 그는 마음대로 사람에게 베풀어 주거나 무조건적으로 더해 주지는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한 측면이다. 많은 사람이 실생활에서 이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최소한 마음조차도 하나님께로 완전히 향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명 성품에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기만 할 뿐, 성령 역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 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부담을 느끼며,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진리를 구하려는 의지가 있다. 이런 사람만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으며, 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겉으로 볼 때 이성이 없는 것 같고,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도 맺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적절하게 말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이성이 없는 사람’은 겉으로 볼 때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같고, 또한 밖으로 보이는 사랑이나 행위를 중시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영적인 일을 교제할 때면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체험하여 얻은 빛 비춤과 깨우침을 사심 없이 다른 이에게 공급해 주며,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한다. 다른 이들이 모두 그를 비방하고 조롱해도, 그는 외부의 사람과 일, 사물에 좌우되지 않고 시종일관 하나님 앞에서 평온할 수 있다. 그는 마치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마음이 늘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담소를 나눌 때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묵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는 다른 이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처세 철학이 없는 듯 보인다. 겉으로 볼 때 이런 사람은 활발하고 사랑스러우며 치기(稚氣)가 있고,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침착하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모습이다. 처세 철학이니, ‘정상적인 이성’이니 하는 것은 이런 사람에게 아예 통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만 있는 듯, 온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말씀한 ‘이성이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으며, 다른 사람이 얼마나 제멋대로이든, 정욕과 육체를 얼마나 방종하든, 그의 마음은 늘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시류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사람이며, 성령께 온전케 될 사람이다. 이렇게 될 수 없다면, 너는 하나님께 얻어지고 성령께 온전케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8)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면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이 기초 위에서 다른 사람과도 정상적인 관계가 맺어진다. 만약 너와 하나님 사이에 정상적인 관계가 없다면, 네가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든, 어떻게 노력하고 힘을 쓰든, 그것은 모두 사람의 처세 철학에 속할 뿐이다. 너는 사람의 관점과 처세 철학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너의 위치를 지키고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려는 것일 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다른 이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길 원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운다면, 모든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정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와 다른 이의 관계는 육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서 맺어진 것으로, 육적인 왕래는 거의 없으나 영적으로 교제하고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며 공급하게 된다. 이 모든 행함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기초 위에서 이뤄지며, 사람의 처세 철학으로 유지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부담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또한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 없이 하나님 말씀의 원칙에 따라 실행하면 된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원하느냐? 너는 하나님 앞에서 ‘이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너는 네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들 가운데서의 네 위치는 생각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네가 접한 사람 중 너와 관계가 가장 좋은 자들은 누구냐? 너와 관계가 가장 나쁜 자들은 누구냐? 너와 사람들의 관계는 정상적이냐? 너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느냐? 너와 모든 사람의 관계는 너의 처세 철학을 통해 유지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이뤄진 것이냐?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영이 둔해지고 무감각해져 지각을 잃게 된다. 이런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이런 자의 성품은 영원히 변하지 못한다.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는 과정은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하는 한편, 부정적인 면에서는 그것을 인식한 후 벗어 버리게 한다. 네가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경지에 이르면 영 안의 모든 미세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작은 깨우침과 빛 비춤까지 모두 알 수 있다. 이를 계속 유지하면 성령께 온전케 되는 길에 차츰 들어서게 된다. 네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질수록 네 영은 더욱 예민해지고 섬세해지며, 성령의 감동을 더욱 세밀하게 살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갈수록 정상적이 될 것이다. 사람 간의 정상적인 관계는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한 것을 기초로 이뤄지는 것이지, 사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육적인 관계만 있을 뿐인데, 이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이것은 모두 정욕의 방종으로, 하나님이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너의 영에 감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늘 너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나 중시하는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이 찾고 구하는데도 네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편견을 갖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이는 네가 감정대로 행하는 사람이며,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전혀 정상적인 관계가 없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을 기만하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덮어 가리는 행위이다. 설령 네가 인식을 좀 말할 수 있을지라도 의도가 불순하다면 네가 하는 모든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만 좋아 보일 뿐,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육으로 행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부담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왕래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사람인 것이다. 그때는 네가 사람들과 어떻게 접촉하든 그것이 처세 철학과는 무관하고,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된다. 너희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너와 다른 이의 관계는 정상적이냐? 그것은 어떤 기초에서 맺어진 것이냐? 너의 처세 철학은 얼마나 되느냐? 벗어 버렸느냐? 만약 네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할 수 없다면, 너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온 사람이니, 결국 사탄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다. 너는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09)

하나님을 믿는다면 최소한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의의도 없게 된다.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으려면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해야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의혹을 품거나 부정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자신을 위해 타산하지 않으며,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집의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고, 설령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진 다음에 그에 따라 실행해도 늦지 않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 되면 사람과의 관계도 정상적이 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하고,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교회를 교란하는 일을 하지 말고, 형제자매들의 생명에 이롭지 못한 일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광명정대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때로 육적인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탐하지 않으며, 의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한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정상이 된 것이다.

일을 할 때면 항상 자신의 마음가짐이 올바른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인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의 기준이다. 네가 자신의 마음가짐을 살펴 올바르지 못한 속셈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이 된 것이다. 이는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이미 정상적이며, 네 모든 행동이 너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며 감정이나 개인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일 처리 원칙이다. 작은 일 하나에서도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분량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에 진입하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가짐,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어야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책망, 훈계, 징계, 연단이 너에게서 당위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음에 하나님이 있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개인의 앞날을 생각(육적인 것을 생각함을 가리킴)하지 않는다면, 또 생명 진입에 부담을 갖고 온 힘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한다면, 네가 추구하는 목표는 올바른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상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은 영적 노정에 진입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 손에 있고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라 개인이 바꿀 수 없지만, 네가 온전케 될 수 있을지,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을지는 모두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인지에 달려 있다. 어쩌면 너에게 연약하고 패역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의 관점이 옳고 마음가짐이 바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정상적이라면 너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고 그 관계가 육이나 가정을 위한 것이라면, 네가 얼마나 노력하든 전부 헛수고이다.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이면 모든 것이 잘 풀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너의 관점이 올바른지만 본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대체 누구를 믿는지, 누구를 위해 믿는지, 왜 믿는지 등을 꿰뚫어 보고 관점을 바로잡아 실행할 수 있다면, 너의 생명은 성장할 것이고 반드시 정상 궤도에 진입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적이고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 치우쳐 있다면, 모든 것이 허사이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 봤자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라야 육을 저버리고, 기도하고, 고통받고, 인내하고, 순종하고, 형제자매를 돕고,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이 헌신하는 것 등의 행동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네가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이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이 될지는 네 마음가짐과 관점이 올바른지에 달려 있다. 현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고 시계를 보는 것처럼 관점이 올바르지 못한데, 이것을 깨뜨리고 해결해야 모든 것이 좋아지고,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어떤 이들은 내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만, 뒤에서는 대적하는 일을 저지른다. 이는 교활하고 간사한 태도이고, 이런 사람은 사탄의 종이자 전형적인 사탄의 화신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러 온 자이다. 내 사역과 내 말에 순종해야 옳은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고, 네가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 전부 광명정대하고, 떳떳하지 못한 일이나 타인의 생명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고, 빛 속에서 살면서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은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한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0)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마음가짐과 관점을 바로잡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님이 마련해 준 모든 환경과 하나님이 증거한 사람, 그리고 실제의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하며, 올바르게 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거나 자신의 의견대로 결정하지 말고, 범사에 진리를 찾으며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고 생명의 정상 궤도에 진입하고 싶다면 네 마음을 항상 하나님 앞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하고, 제멋대로 굴어서는 안 되며, 사탄을 좇아서도, 사탄에게 역사할 기회를 줘서도 안 된다. 사탄이 너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너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너를 주관하게 해야 한다.

너는 사탄의 종이 되고 싶으냐?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싶으냐? 네가 하나님을 믿고 추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 위해서냐, 아니면 하나님 사역의 부각물이 되기 위해서냐? 너는 하나님께 얻어져 의미 있는 인생을 보내고 싶으냐, 아니면 무가치하고 공허한 인생을 보내고 싶으냐? 너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사탄에게 이용당하기를 원하느냐? 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충만하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죄악과 사탄으로 가득하기를 원하느냐? 이러한 것들을 잘 생각해 보아라. 일상생활 속에서 너는 어떤 말과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정상으로 만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고 난 뒤에 자신을 바로잡아 올바른 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 수시로 자신의 모든 언행과 일거수일투족, 마음의 생각을 성찰하고, 자신의 실제 상태를 파악해 성령의 역사 방식에 진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지를 가늠함으로써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로잡아야 하고,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통해 실제 체험에 진입할 수 있고, 실제적으로 자신을 저버릴 수 있으며,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지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너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성령이 역사하는 수많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사탄의 수많은 간계를 꿰뚫어 보고 사탄의 음모를 간파할 수 있다. 이러한 길로 가야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안배에 순종하기 위함이며, 실제 체험에 더 깊이 진입하여 더 많은 성령 역사를 얻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은 대부분 육을 저버리고,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너는 마땅히 ‘협력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얻기 힘들고, 육체가 고난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없으며, 영적 싸움이 없으면 사탄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조목들을 실행하여 확실히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너의 관점도 바로잡힐 것이다. 너희는 현재의 실행에서 ‘떡으로 배 불리려는’ 관점을 버리고, ‘모든 것이 성령께 달려 있으므로 사람은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없애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모두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성령이 역사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거지. 사람은 육적으로 절제할 필요 없고, 협력할 필요도 없어. 성령의 감동만으로 다 되잖아.’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성령은 이런 상황에서는 역사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이 바로 성령 역사에 크나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성령 역사는 많은 경우에 사람의 협력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람이 협력하지 않고 의지도 없으면서 성품 변화나 성령 역사,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이것을 바로 ‘스스로에게 여지를 주고, 사탄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이다. 네가 자신에게서 사탄의 모습과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많이 찾고, 지난날의 행실에 하나님이 현재 요구하는 것과 상반되는 것도 찾게 된다면, 너는 사탄을 저버릴 수 있느냐?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 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지난날의 과오를 따지지 않고, 지나치게 통회하지 않으며, 일어나 하나님께 협력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면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한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1)

네가 이러한 말들을 다 본 뒤에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저 입으로만 인정하고,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지 않고 네 관점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의 마음가짐은 여전히 하나님께 얻어지거나 하나님이 영광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음모가 이루어지는 것, 곧 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하며 관점이 비뚤어진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든 꿈쩍도 하지 않고 어떤 변화도 없으며, 마음속으로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영이 없는 어리석은 자다. 하나님이 말씀할 때마다 보고 깨달았다면 실행해야 한다. 과거에 네가 어떻게 했든, 육적으로 연약하거나 거역하고 대적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들이 오늘날 네 생명의 성장을 가로막지 못한다. 현재 네가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희망이 있다. 네가 언제나 말씀을 보고 나서 변화가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네 삶이 달라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는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올바르고 정상임을 뜻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과오에 근거해 그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네가 깨닫고 이해하여 더는 거역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의지를 갖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너의 상태는 정상이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이렇게 생각하여라. ‘내가 하는 이 일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나님 집의 사역에 이로울까?’ 기도하든, 교제하든, 대화하든, 일하든, 다른 사람과 소통하든 모두 자신의 마음가짐을 살펴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지를 살펴야 한다. 마음가짐도 생각도 살피지 못한다면 분별력이 없는 것이고,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은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일을 판단할 수 있으며, 하나님 편에 서서 일을 판단할 수 있다면 너의 관점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첫 번째 임무이자 인생의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과 정상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마음가짐이 올바르다면 그때 움직여야 한다.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유지하려면 자신의 이익이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지 말고, 사탄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해야 하며, 사탄에게 약점을 잡히거나 사탄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수립했다는 뜻이다. 이는 육적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평안을 위한 것이며, 또한 성령 역사를 얻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올바른 내적 상태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얻고, 말씀의 성과가 너에게서 뚜렷하게 보여지고, 더 많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너는 올바른 방식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성령의 현재 역사 방식에 진입해야 한다. 지금 하나님이 요구하는 대로 행하고, 과거의 낡은 실행법을 고수하지 말며, 지난날의 행실에 연연하지 말고 하루빨리 오늘날의 역사 방식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완전히 정상이 될 것이며, 너는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한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2)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수록 더 많은 깨우침을 얻게 되며, 몹시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더 깊이 있고 풍성한 체험을 할 수 있고, 그의 생명 또한 나날이 성장한다.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전적으로 이를 자신의 일로 삼고 대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고,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 없이는 모든 것이 공허할 뿐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효과를 얻지 못한다면 어떤 일도 할 마음이 없다’는 결심을 해야지, 자신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생명 체험은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로 이룰 수 있는 것이며, 너희의 주관적 노력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너희는 모두 자신에게 ‘생명 체험 과정에서 스스로를 용서하면 안 된다’는 요구를 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상태가 비정상적이어서 하나님의 함께함을 잃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이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정상이며, 마땅히 바로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와 멀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루, 이틀, 심지어 한 달, 두 달이 되도록 성령의 함께함이 없고, 성령의 역사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해 어느 정도까지 무감각해지면 너는 또다시 사탄에게 끌려갈 것이며, 심지어 무슨 일이든 다 저지르게 될 것이다. 재물을 탐하고, 형제자매를 속이고, 영화를 보고, 영상을 보고, 마작을 하고, 심지어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셔도 징계받지 않을 것이며,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몰래 독립을 꾀하고 제멋대로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할 것이다. 더 심한 자는 남녀 관계에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런 사람은 성령이 버린 자로, 이미 오래전부터 성령 역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갈수록 패괴되고 죄악의 손길이 점점 더 멀리 뻗어 나가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는 결국 이 도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며, 죄를 따라 사탄에게 끌려갈 것이다. 만약 네가 성령의 함께함만 있고 성령의 역사가 없음을 발견했다면 이미 매우 위험한 상태이다. 성령의 함께함을 느낄 수 없게 되면, 너는 죽음의 벼랑 끝에 있는 셈이다. 그 상황에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너는 완전히 사탄에게 돌아갈 것이며, 도태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 상태가 성령의 함께함만 있고(죄를 짓지도, 방종하지도, 눈에 띄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도 하지 않는 것),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기도해도 감동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도 명확한 깨달음이나 빛 비춤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이 항상 귀찮고, 생명 또한 성장하지 않으며, 꽤 오랜 시간 동안 큰 빛 비춤이 없는 것) 더욱 조심해야지, 자신과 타협해서는 안 되고 더는 자신의 성미대로 행해서도 안 된다. 성령의 함께함은 언제든 없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럴 때가 가장 위험한 상태이다. 네가 이런 상태에 처했다면 되도록 빨리 돌이켜야 할 것이다. 가장 먼저 회개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매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또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먹고 마셔야 하며, 이것을 기반으로 많이 기도해야 한다. 또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거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가장 연약할 때야말로 사탄에게 마음을 점령당하기 가장 쉽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네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사탄에게로 끌려갈 것이며, 결국 네게서 성령의 함께함이 없어질 것이다. 그 상태에서 성령의 역사를 회복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러니 성령이 함께할 때 성령의 역사를 구하여 하나님이 더 많이 너를 깨우쳐 주고, 너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낫다.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역할을 다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사탄에게 역사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이며, 이를 통해 성령이 네게 역사하도록 할 수 있다. 네가 이렇게 되돌리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다가 성령의 함께함을 잃게 된다면, 성령의 특별한 감동과 빛 비춤, 깨우침이 없는 한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성령의 특별한 감동과 빛 비춤, 깨우침이 있을지라도 네 상태는 하루 이틀에 회복될 수 없으며, 심지어 어떨 때는 반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못한다. 이것은 전부 사람이 자신에게 엄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정상적으로 체험하지 못해 성령께 버림받은 것이다. 설령 되돌린다 해도 하나님의 최신 역사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일락천장한 것처럼 생명 체험에서 멀리 뒤처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명이 위급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에게 지금 회개하면 늦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바로 많이 노력하고 게으름 피우지 않는 것이다. 다른 이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한다면 너는 열 번 기도해야 한다. 다른 이가 하루에 두 시간 먹고 마신다면 너는 네 시간, 나아가 여섯 시간 먹고 마셔야 한다. 또한, 다른 이가 두 시간 찬양을 듣는다면 너는 적어도 반나절은 시간을 내서 찬양을 들어야 한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해야 한다. 그래서 감동을 받고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다시는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아야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렇게 실행해야만 예전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어떻게 해야 정상적인 내적 상태에 진입할 수 있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3)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너희가 지나온 노정은 여전히 너무 짧다. 너희는 아직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의 기준에 한참 뒤처져 있으며, 너희들의 분량으로는 아직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의 자질과 패괴된 천성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을 항상 건성으로 대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는 너희의 가장 큰 단점이다. 성령이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대부분이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이 일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참답게 대하지도 않는다. 만약 계속 이런 상태로 나아가면서 성령의 사역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가 가는 하나님을 믿는 길은 전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추구하지 않고, 잘 협력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역하지 않았거나 성령이 감동시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너무 경솔해서 성령의 역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마땅히 이를 즉시 바로잡고 성령이 인도하는 길에 들어서야 한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하려는 주요 화제이다. 성령이 인도하는 길이란, 영 안에서 깨우침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식을 얻는 것이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길을 분명하게 알고, 진리에 점차 진입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인도하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여 치우치거나 그릇됨 없이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성과를 내려면 조화로운 협력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실행의 길을 찾아 성령이 인도하는 길에 들어서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협력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너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을지, 어떻게 행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을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인도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 말로는 복잡해 보이지만, 실행의 길을 확실하게 알면 매우 간단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들이지 연목구어(緣木求魚)처럼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사람을 위해 근심을 덜어 주고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 너희는 이 점을 확실히 알아야지, 하나님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성령이 가는 길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성령이 인도하는 길에 들어서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이 일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할 수 있겠느냐? 일상생활 속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모두 건성으로 하고, 다른 일을 하면서 기도하곤 한다. 그래 놓고도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할 수 있겠느냐? 마음속으로는 가정사와 육적인 일을 생각하니, 마음은 하나지만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네 마음이 늘 외적인 것에 있기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마음을 평온히 하려면 반드시 의식적으로 협력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너희는 모두 자기만의 영 생활 시간을 가져야 하며,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피해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져야 한다. 사람마다 영 생활에 대해 기록을 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과 영적인 감동이 깊든 얕든 다 기록해야 하며, 의식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해야 한다. 만약 네가 하루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 가량 진실한 영 생활을 할 수 있다면 하루의 삶이 충실해짐을 느끼고 마음은 밝아질 것이다. 그런 영 생활을 매일 해서 네 마음을 더 많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면, 네 영은 갈수록 강해질 것이며, 너의 상태는 갈수록 좋아질 것이고, 성령이 인도하는 길에 더 잘 들어설 수 있고, 하나님은 너를 곱절로 축복할 것이다. 너희의 영 생활은 의식적으로 성령의 함께함을 얻기 위한 것이지, 규례를 지키고 종교 의식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즉, 진실로 하나님과 협력하고, 진실로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너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네가 잘 협력할수록, 그리고 네가 기울이는 노력이 많아질수록, 네 마음을 더 많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더 평온해질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경지에 도달해 하나님이 네 마음을 완전히 얻고, 그 누구도 네 마음을 흔들거나 빼앗아 갈 수 없게 되면, 너는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된 것이다. 네가 이 길에 들어선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너에게 나타나 네가 모르는 것들을 깨우쳐 줄 것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네 협력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줄곧 “나와 협력하는 자에게는 내가 반드시 곱절로 베풀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 길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바른길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너희의 모든 힘을 기울여 하나님을 흡족게 해야 한다. 영 생활은 온 힘을 다해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이 일에서 그다지 큰 성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극적이 되지 말고, 뒷걸음치지 말아야 한다. 계속 노력하여라! 영 생활이 많아질수록 네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 많이 점유되어 항상 이런 일들을 유념하고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런 후에는 영 생활을 통해 네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모두 하나님께 털어놓아야 한다. 네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체험하여 깨달았는지 조금도 숨김없이 전부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 마음속 말을 털어놓고 심정을 토로하는 훈련을 해서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전부 말씀드리도록 해라. 그렇게 할수록 너는 하나님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질 것이고, 네 마음은 하나님께 더욱 끌릴 것이다. 그때 너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장 친근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매일 이런 영적 수양을 하고 항상 유념하며 그것을 네 평생의 큰일로 여겨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점유될 수 있다. 그것을 바로 성령께 감동받은 것이라고 한다. 네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점유된 것 같고, 네 마음속에 늘 네가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면, 그때 하나님은 진정으로 네 안에 살아 계신 것이며, 네 마음속에서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정상적인 영 생활은 사람을 정상 궤도로 인도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4)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실제에 진입하는 기초이다. 지금 너희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노래하고, 찬미하며, 묵상하고, 말씀을 되새기는 등의 실행은 정상적인 영 생활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느냐? 너희 모두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영 생활이란 생생하고 활기찬 영 생활을 하는 것으로서 기도와 찬양, 교회 생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 등등의 방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방식이 아니라 효과가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거나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 성과가 있든 없든, 참된 인식이 있든 없든, 겉으로 보이는 과정만 중시할 뿐, 그 성과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종교 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지 교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나라의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와 찬양,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규례를 지키는 것에 속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혹은 주변 분위기에 따라서 하는 것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찬송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그들이 실행하는 것은 종교적인 규례와 의식일 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법만 중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규례 삼아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육체를 만족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행동할 뿐이다. 그러한 종교적 의식과 규례는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되었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규례도 율법도 지키지 않으며, 날마다 새로운 일과 실제적인 사역을 한다. 삼자교회의 사람들처럼 매일 새벽 기도와 저녁 기도, 식전 기도를 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등의 제한적인 것만 실행한다면, 그런 실행은 아무리 많이, 또 아무리 오래 해도 성령의 역사가 임하지 않는다. 사람이 규례 속에서 살면서 행위에만 마음을 쏟는다면 성령은 역사할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이 규례와 관념에 점령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역사할 수가 없고, 사람은 계속 율법의 통제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정상적인 영 생활이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을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게 해 준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깨우침을 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현재 하나님이 하려는 일에 대해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고, 옛것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으며, 모든 실행이 생명 성장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기도는 듣기 좋은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거나 하나님 앞에서 한번 대성통곡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을 운용하는 훈련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여 범사에 말씀의 인도를 구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마음이 날마다 새로운 빛에 끌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소극적으로 되지도, 게을러지지도 않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위한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이 다 행위만 중요시할 뿐, 생명의 성장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는 치우친 것이다. 새로운 빛은 받아들이지만 실행법을 바꾸지 않는 일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오늘날의 하나님 말씀을 과거의 종교 관념과 결합해 받아들인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종교 관념을 띤 도리이지, 순전한 오늘날의 빛이 아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실행에는 불순물이 끼어 있으며, 형식만 바꿨을 뿐 내용은 그대로이다.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게 행해도 그것은 외식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매일 사람을 인도하고 새로운 일을 하면서 사람에게 낡아 빠지고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닌, 날마다 새로운 견해와 인식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네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겉으로만 열정적이고 바쁠 뿐, 행실이 조금도 바뀌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이고도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 않고, 새로운 실행법에 따라 실행하지 않으며, 더 새로운 인식을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옛것을 고수하고 제한적인 새 빛만 받아들일 뿐 실행법이 그대로라면, 그런 사람은 명목상으로는 이 흐름 안에 있는 사람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성령의 흐름 밖에 있는 종교 바리새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정상적인 영 생활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5)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날마다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해 추구해야 한다. 또한, 진리를 더 밝히 깨닫고, 범사에 실행의 길을 찾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새로운 문제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마음이 생겨 네 전 존재가 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게 되고, 자신이 뒤처질까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이렇듯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마음을 갖고 끊임없이 진입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영 생활의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있고 향상심이 있으며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 깊은 인식을 얻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대가를 치르며,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실제적으로 진입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체험을 더 참되고 실제적으로 만들어 허황된 글귀상의 도리나 초자연적인 느낌을 추구하지 않게 되고, 어떤 큰 인물도 숭배하지 않게 된다. 이런 자는 정상적인 영 생활에 진입한 사람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더 큰 생명 성장을 위한 것이고, 영 안에서 생기가 넘치고 침울해지지 않기 위한 것이며, 늘 적극적으로 진입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사람에게 정상적인 영 생활이 있고, 영이 날마다 해방되고 자유를 얻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자재로 실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기도를 한다고 해도 형식을 따르고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빛을 좇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훈련을 통해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평온해진다면,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어떤 사람과 일, 사물도 그의 정상적인 영 생활을 제한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일정한 성과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지, 사람에게 규례를 찾아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실행은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네가 이것을 규례로 여겨 지킨다면 너의 생명은 영원히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훈련하니 너도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성령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잡고 너는 성령의 흐름에서 도태된다면, 이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에게서 막힘없이 이뤄져 성과를 내게 하기 위함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정상적인 영 생활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6)

너희의 일상생활을 보면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소홀히 하고 있다. 예전에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해도 대충대충 건성으로 했다. 무슨 일이 생겨야만 하나님께 간구할 뿐, 지금껏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 진실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너는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눈물 흘린 적이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알게 되었던 적이 있느냐?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며 기도한 적이 있느냐? 기도는 천천히 훈련해야 한다. 평소에 집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교회에 가서도 기도할 수 없고, 평소에 작은 예배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큰 예배에서도 기도할 수 없다. 평소에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기도하려 해도 할 말이 없고, 설령 기도한다 해도 그것은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 입술만 놀리는 것에 불과하다.

진실한 기도란 어떤 것일까?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와 교제하면 그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바로 네 앞에 있는 것 같고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며, 마음이 환해지고 그가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져 특별히 격려받는 느낌이 들게 된다. 그 기도를 듣는 형제자매들도 기쁨을 누린다. 네가 그들의 속마음과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기도다. 진실한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생겨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너의 기도가 결실을 맺었다는 증거다. 너는 이런 기도를 경험한 적이 있느냐?

기도는 어떤 내용으로 해야 할까? 너의 진실한 내적 상태와 성령이 하는 것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게 요구한 것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 기도하는 훈련을 시작할 때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마음속 말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려고 해야 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제가 지금껏 당신을 거역해 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증오스러울 만큼 패괴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허송세월했으니 앞으로는 당신을 위해 살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며, 당신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영이 저에게 역사하사 빛 비춰 주시고 깨우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제가 당신 앞에서 굳세고 힘 있게 증거하고, 사탄이 우리에게서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증거, 당신께서 승리하신 증거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네가 이렇게 기도하면 마음이 완전히 해방될 것이고, 네 마음이 하나님과 한층 더 가까워질 것이다. 네가 늘 이렇게 기도한다면 성령도 반드시 너에게 역사할 것이며, 늘 이렇게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서 다짐한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너의 다짐을 열납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마음, 너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얻어진다면 최종적으로 너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것이다. 너희에게 기도는 실로 너무나 중요하다. 네가 기도하여 성령 역사를 얻으면, 마음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도 솟아난다. 하지만 기도할 때, 네가 마음을 쓰지 않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너에게 역사할 수 없다. 네가 진심을 털어놓고 기도를 했음에도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지 않고 네가 격려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 간절하지 않고 네 말이 진실하지 않으며 불순물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네가 기도를 마친 뒤에 기쁨이 찾아온다면 네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되고 하나님의 영이 너에게 역사했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사람은 기도가 부족해서는 안 된다. 네가 정말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로 여긴다면 기도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어서는 안 된다. 기도가 부족하면 너는 육으로 살게 되고, 사탄에게 잡혀서 살게 되며,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어둠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된다. 나는 형제자매들이 날마다 진실하게 기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것은 규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실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잠을 조금 적게 자고, 조금 적게 누리더라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한 뒤 하나님 말씀을 누리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신다면 더더욱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다. 네가 매일 아침 이렇게 실천하고, 날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왕래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나님, 저는 저의 본분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저희에게서 증거를 누리실 수 있도록,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저를 온전히 바치길 원합니다. 제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흡족게 하며 당신을 제가 추구하는 목표로 삼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십시오.” 네가 이런 부담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네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이 가장 진실한 기도다. 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냐?

과거에 너희는 기도할 줄도 몰랐고 또 기도를 소홀히 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도 훈련을 잘해야 한다. 네 마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하나님, 제 마음에 당신에 대한 참된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만 힘이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당신 앞에서 모든 부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고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도 속박받지 않고 당신께 완전히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더 나아가 저를 온전히 당신께 바칠 수 있도록, 제 영의 눈을 열어 주시고 당신의 영으로 제 마음을 감동시켜 주세요. 저에게 어떤 시련을 주셔도 좋습니다. 이제는 제 앞길이 밝든 어둡든 연연하지 않을 것이고, 죽음에도 구속받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생의 길을 찾고 싶습니다. 만사 만물이 당신 손에 있듯이 저의 운명도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의 일생도 물론 당신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당신의 허락이 있든 없든, 사탄이 어떻게 방해하든 상관없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이렇게 기도하여라. 네가 날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조금씩 생길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7)

어떻게 진실한 기도에 들어갈 수 있을까?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평온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듣기 좋은 말로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는 지금 하나님이 이루려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 더 많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는 다짐을 포함해 자신의 실제 상태와 어려움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을 늘 평온히 할 수 있게 지켜 달라고 간구해야 하며, 또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서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을 미워하고 저버림으로써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기도의 의의는 무엇일까?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길이자 하나님께 부르짖는 방식이며,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는 과정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영이 없는 죽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 감동받는 기관(器官)이 없다는 뜻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영 생활이 있을 수 없고, 성령의 역사에 발맞추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므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할수록, 즉 하나님께 감동을 많이 받을수록, 더 큰 다짐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새로운 깨우침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성령에 의해 빨리 온전케 될 수 있다.

기도는 어떤 결실을 맺어야 할까?

사람이 기도를 실천하고 그 의의는 깨달을 수 있지만 기도로 결실을 맺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해야 더 많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다. 진실한 기도를 한 번 하고 나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요구에 부응하길 원하며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을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인식이 더해져 하나님이 밝혀 준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기도를 하고 나면 의지와 믿음이 생기고, 인식과 실천의 길이 생긴다. 그래야 진실한 기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기도야말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도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지에 진입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8)

기도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상식은 다음과 같다.

1. 맹목적으로 마음대로 몇 마디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마음속에 부담, 즉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2.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기도해야 한다.

3. 기도는 상투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현재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해야 한다.

4. 단체로 기도할 때는 중심이 있어야 하며, 성령의 현재 사역이 바로 그 중심이어야 한다.

5. 누구든 대표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도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모습이다.

개인의 기도 생활은 그 바탕에 기도의 의의와 상식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간구하고 기도하며, 생명 성품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도해야 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기도 생활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 말씀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실사구시의 태도로 자신의 내적 상태를 하나님 앞에 털어놓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참된 인식과 하나님 말씀의 실제 체험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 생활에 진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다양한 방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묵도, 하나님 말씀 묵상,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식 등등 이처럼 목적 있는 영적 교감은 모두 정상적인 영 생활에 진입해 하나님 앞에서 점점 상태가 나아지고 생명이 성장하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든, 묵도를 하든, 큰 소리로 외치든, 네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님이 너에게서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깨닫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함으로써 네 생명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은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을 드리고 진심을 말한다면, 하나님도 사람에게 역사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교활한 마음이 아니라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을 원한다. 사람이 진심을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고 그에게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부족함과 패역한 성품을 하나님께 고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야 하나님도 너의 기도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외면할 것이다. 기도가 갖추어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을 계속 평온히 하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네가 한동안은 더 새롭고 높은 인식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네 상태가 퇴보하지 않도록 기도를 통해 현 상태를 유지시켜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 기준에도 이르지 못했다면 너의 영 생활이 정상 궤도에 들어서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너는 본래 가지고 있던 이상(異象)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며 너의 다짐 또한 사라지게 된다. 네 기도가 정상 궤도에 진입했는지의 여부는 네가 영 생활에 진입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다. 모든 이들이 이러한 실제에 진입해야 하고, 의식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소극적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성령의 감동을 구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기도를 시작할 때 너는 첫술에 배부를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입을 여는 즉시 성령의 감동을 받고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지나친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그가 사람의 기도를 이루어 주는 것은 모두 때가 있다. 그는 때로 너의 믿음을 검증함으로써 네가 그에게 충성하는지 살펴보기도 한다. 기도할 때는 믿음과 끈기,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훈련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성령의 감동을 찾지 못하면 쉽게 실의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너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성령의 감동을 찾고 모색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때로는 네가 실천하는 길이 잘못되었거나, 개인의 마음가짐과 관념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해 하나님의 영이 너를 감동시키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때로는 하나님이 네가 충성스러운지 보려고 할 수도 있다. 요컨대, 훈련하는 동안 대가를 많이 치러야 한다. 네가 실천하는 방법에 치우친 점이 있다면 기도하는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 네가 진심으로 구하고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성령은 반드시 너를 그 실제로 인도할 것이다. 때로는 네가 진심으로 기도해도 큰 감동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믿음에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감찰하고 있음을 믿고 굳은 의지로 기도해야 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간사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 수시로 자신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으면 너의 성품이 점차 변화될 것이다. 진정한 영 생활은 바로 기도하는 생활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감동을 받는 생활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과정은 사람의 성품이 변화하는 과정이고, 성령의 감동이 없는 생활은 영 생활이 아니라 종교 의식이다. 항상 성령에 감동받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영 생활에 들어간 사람이다. 사람의 성품은 기도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을수록 더 적극적이고 더 잘 순종하게 되며, 사람의 마음 또한 점점 정결케 되고 성품도 점차 변화된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결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19)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이며, 현재 모든 사람이 우선 진입해야 할 공과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기 위한 진입 경로는 다음과 같다.

1. 외적인 일에서 마음을 거두어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2.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누린다.

3.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되새긴다.

먼저 기도에서 시작하여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시간이 없어도, 일이 바빠도, 무슨 일이 생겨도 매일 정상적으로 기도하며,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기만 하면 영 안에 특별한 누림이 생기고, 주위 사람과 일, 사물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평소에 하나님을 그리워할 때도 외적인 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분량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기도하는 것에서 시작하여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기도하면 가장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묵상하면 빛을 얻을 수 있고,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 말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깨달음이 치우치지 않게 된다. 평소에 마음이 정상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면 외적인 일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너의 마음이 깊이 평온해지면 정념(靜念)의 단계에 이르러 어떤 환경에 있든 내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께 다가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마음속에서 찬미가 흘러나오는 경지에 도달하는데, 이는 기도할 때보다 더 낫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분량이 있는 것이다. 네가 앞에서 말한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첫 번째 기본기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한 후에야 성령의 감동과 빛 비춤, 깨우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령의 인도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영 생활의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훈련을 하여 일정한 깊이를 갖게 되면 자신을 저버리고 증오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 수 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증오하거나 저주하거나 저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한 성과이며,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은 당장 진입해야 할 공과이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는 물론이고, 기도할 때조차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한다. 이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너무 동떨어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했는데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지지 못한다면 누군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네 마음이 뺏길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말이라도 하면 네 마음이 뺏길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하는 일도 네 마음을 가져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다면 어떤 외적인 일에도 방해받지 않고,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도 점령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측면에서 진입이 있다면 소극적인 상태나 사람의 관념, 처세 철학,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 생각 등 부정적인 것들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네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며, 늘 하나님의 현실적인 말씀에 점유되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 부정적인 것들을 벗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새롭고 긍정적인 것들이 너를 점유하면 낡고 부정적인 것들은 자리를 잃을 것이니 그 소극적인 것들에 신경을 쓰지 말라. 그러한 것들은 네가 힘써 억제할 필요 없다.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지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며 누리고,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고 찬미하며, 하나님이 너에게서 역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하나님은 친히 사람을 온전케 하려 하고, 너의 마음을 얻으려 하므로 그의 영이 너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네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면 하나님을 흡족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것에 신경을 쓰고, 진리를 많이 교제해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게 되면 그런 종교 관념이나 독선적이고 스스로를 높이 여기는 것들은 모두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흡족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 외의 것들은 너도 모르는 새에 하늘 끝 저 멀리 버려질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0)

하나님의 현실적인 말씀을 먹고 마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첫걸음이다. 만약 네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다면,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너와 함께할 것이다. 모든 영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해야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해야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을 수 있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평소에 묵상하고 교제하며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다가갈 때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해야 네 내면에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이 생기며, 하나님의 사랑과 사역에 대해서도 진실한 인식이 생기고, 하나님의 마음을 참으로 헤아릴 수 있다. 평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수록 빛 비춤도 더 많아질 것이며, 자신의 패괴 성품과 부족한 점, 진입해야 할 것, 자신이 해야 할 역할, 부족한 면 등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은 전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에 깊이가 생기면 영 안의 비밀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현재 네게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의 정수와 본질, 어떠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실행의 길을 더욱 선명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영 안에서 평온해지는 것에 깊이가 부족하면 성령의 감동이 좀 있고, 내적으로 힘이 좀 있으며, 약간의 누림과 평안만 있을 뿐, 더 깊은 것들은 찾을 수 없다. 나는 “사람이 온몸의 힘을 다하지 않으면 내 음성을 듣기 힘들고, 내 얼굴을 보기 힘들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이 깊이가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 외적으로 힘을 쓰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점유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장담컨대 모두 절제함이 없이 제멋대로 구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생명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고, 영적 교제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세상에 연연하는 허황된 사람이고, 생명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뿐이다.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온전케 하고 만들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사람은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루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시간이 아주 적고, 바깥일에만 정신없이 바쁘며, 생명 진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외식하는 자들로, 발전 전망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고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1)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주고 네게 인식을 더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수록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더 잘 얻을 수 있다. 그러려면 모두 경건함과 믿음이 필요하며, 그래야 온전케 될 수 있다. 영 생활에 진입하기 위한 기본기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모든 영적인 훈련이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한다면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없다. 네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한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 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간다면, 그것은 네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길을 걸을 때 ‘내 마음은 외적인 것들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어. 나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어.’라고 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평온해진 사람이다. 네 마음을 바깥으로 끌어갈 수 있는 일은 접하지 말고, 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말라. 무슨 일이든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내려놓고 하지 말거나 멀리하여라. 그렇게 하면 너의 생명에 더 유익하다. 지금은 성령이 크게 역사하는 시기이자, 하나님이 친히 사람을 온전케 하는 시기이다. 바로 이때, 네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온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일을 추구하면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러한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럴 때 너 자신을 바치지 않고 언제까지 기다릴 셈이냐? 자신을 바치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바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 진실로 마음을 바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가망이 있다. 너는 어떤 일을 마주하든 영향받지 말아야 한다. 책망과 훈계를 받든, 좌절과 실패를 맛보든, 네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네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해야 하고, 어떤 환경을 만나든, 어떤 환난과 고통, 핍박이나 갖가지 시련이 닥치든 네 마음은 늘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해야 한다. 이것은 전부 온전케 되는 길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마음을 평온히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현실적인 말씀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고, 성령의 빛 비춤과 깨우침을 치우침 없이 더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더 확실히 알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더 정확한 방향성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더 정확하게 깨달아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 살아갈 자신이 생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마음을 평온히 할 때 얻게 되는 성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실행의 길이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실행에 원칙이 없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진실하고 실제적이며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기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늘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온전케 할 방법이 없다. 사람에게 의지가 없다면 이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사역과 말씀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이것이 마음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마음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질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으며, 그런 사람은 짐승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질 수 없다면, 이런 자는 짐승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실행법을 잘못 인식해 밥때가 되어도 밥을 하지 않고, 일할 때가 되어도 일을 하지 않으며, 시종일관 기도하고 묵상만 한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은 밥을 하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며, 일과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정상적인 내적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다는 뜻이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열심히 기도하고, 일을 하거나 밥을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찬송을 하는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만의 실행 길을 갖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다가가며,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해야 한다. 조건이 되면 전념해서 기도하고, 조건이 안 되면 손으로는 일을 하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다가가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을 때는 그렇게 하고, 기도할 수 있을 때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그리워할 수 있을 때는 그리워해라. 즉, 처한 환경에 따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훈련하고 진입하는 것이다. 혹자는 일이 없을 때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일이 생기면 마음도 그와 함께 사라지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정확한 체험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지 않는 것이며, 외부의 사람, 일, 사물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진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예배하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지만, 교제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평온히 하지 못해 잡생각이 많아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평온해진 것이 아니다. 현재 많은 사람이 다 이런 상태에 처해 있으며, 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면에서 많이 노력하고 훈련해서 점차 생명 체험의 정상 궤도에 진입하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야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2)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은 모두 너희의 성품 변화를 위한 것이다. 그의 목적은 너희가 깨닫거나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다지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이 인간적인 언어로 이뤄져 있으며, 매우 명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깨닫고, 무엇을 실행하라고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이해 능력이 있는 정상인이라면 갖춰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현재 하나님이 하는 말씀은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다.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많은 일이나 사람의 각종 상태까지도 하나님은 다 짚어 내며, 밝은 달과 같이 구석구석 다 말씀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때, 사람은 많은 문제들을 다 깨닫고 이해했으니 이제 실행하는 일만 남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각 측면의 진리를 세부적으로 체험하고 상세히 탐색하며 찾아야지, 더는 가만히 앉아서 누가 떠먹여 주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다가는 공짜 밥만 빌어먹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결국에는 도태되고 만다. 90년대의 베드로의 품격을 갖춘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은 너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 속에서 참된 진입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과의 협력을 통해 하나님의 더 많고 큰 깨우침을 얻고, 자신의 생명에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 만약 너희가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을 보고도 그 말씀을 글귀상으로만 이해할 뿐, 실제 체험 속에서 경험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으며,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아니라 죽은 글귀만 될 뿐이다. 네가 죽은 글귀만을 붙잡고 있다면, 너는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종잡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실제 체험으로 경험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영적인 뜻이 너에게 활짝 열릴 것이다. 오직 체험으로만 수많은 진리의 영적인 뜻을 찾아낼 수 있고, 체험으로만 하나님 말씀의 비밀을 풀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무리 명확하게 말씀하더라도 네게는 그저 공허한 글귀나 도리에 불과하며, 너의 종교 규례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작태가 아니겠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에게 실제가 되겠지만, 실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는 셋째 하늘에서 온 전설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사실상,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과정은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는 과정이자, 하나님께 얻어지는 과정이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고 체험하고 살아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실제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어 영생을 얻을 생각만 하고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것은 잔치에 가서 잔칫상에 어떤 맛난 음식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마음속에 담아 두기만 할 뿐, 직접 맛보지는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리를 깨달았다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3)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진리와 사람에게 아주 이롭고 도움이 되는 것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너희에게 필요한 자양분이자 영양분으로, 정상 인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수록 너희의 생명은 더 빨리 성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수록 진리는 더욱 명확해진다. 너희의 분량이 커지면 영계의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더욱 강력한 힘으로 사탄을 이길 수 있다. 너희가 깨닫지 못한 수많은 진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때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표면적 의미를 깨닫는 데 만족하고 도리적인 글귀를 채우는 데에만 집중할 뿐, 실행에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작태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삼아라”라는 말의 실제를 갖출 수 있겠느냐?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했을 때 생기는 것이지, 말씀을 보는 것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만 하면 생명과 분량이 생길 거라고 여겼다면, 네 인식은 치우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실행했을 때에야 참되게 깨닫는 것이다. 너는 ‘진리는 실행했을 때 깨닫는다’는 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본 후에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는 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진리를 실행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절반만 맞을 뿐, 100%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네가 어떤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너는 그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설교를 들으면 언뜻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저 진리의 글귀를 갖췄을 뿐, 진리의 참뜻을 갖춘 것은 아니다. 진리의 겉껍데기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이해하고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다. 진리의 참뜻은 모두 체험 과정에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체험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체험 과정에서 진리의 감춰진 부분을 찾아낼 수 있으며, 체험이 깊어져야 진리의 함의를 포착하고 진리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가 있어야 천하를 다닐 수 있다고 한다. 네게 진리가 없으면 많은 종교 인사들을 탄복시키기는커녕, 네 가족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갖추지 못하면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 같겠지만, 진리를 갖추면 어떤 구속도 받지 않고 유유자적할 수 있다. 그때는 누구도 너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이론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진리를 무너뜨릴 순 없다. 진리가 있으면 천지를 뒤집어엎고 산을 밀고 바다를 뒤엎을 수 있지만, 진리가 없으면 한낱 버러지로 인해 무너지는 성처럼 허술할 것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리를 깨달았다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4)

현재 관건은 진리를 알게 된 후에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며, 더 많은 진리의 참뜻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도달해야 할 경지이다. 다른 이에게 너의 글귀에 순종하기만을 강요하지 말고, 네 실행에 순종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떤 일이 닥치든, 어떤 사람과 마주치든, 진리가 있어야 굳게 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사람을 살게 하지, 죽게 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보았는데도 살아나지 못하고, 여전히 죽은 사람 같다면 그것은 너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한 네가 한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보고, 실제가 있는 수많은 설교를 들었는데도 침체된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얻어지고자 한다면 도리를 갖추고 높은 도리로 사람을 가르치는 데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현재 진입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하는 기간은 다 정해져 있다. 그런데 네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무슨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어째서 하나님은 늘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그 말씀을 실행하라고 하겠느냐?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을 밝히 알려 준 후에는 너희가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가 실행할 때, 하나님은 다시 깨우치고 인도해 줄 것이다. 일의 순서는 바로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명을 성장하게 하지 사람을 치우치게 하는 요소나 소극적으로 만드는 부분은 없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실행했음에도 아직 성령 역사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어린아이뿐이다. 네 마음이 올바른지 아닌지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까지 모르겠느냐? 어째서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면 성령의 깨우침이 있겠느냐? 어째서 네가 실행하면 성령의 깨우침이 없겠느냐? 하나님에게도 감정적으로 일하는 면이 있겠느냐? 네 마음가짐이 정말 올바르고 또 협력도 했다면, 하나님의 영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일부 사람은 늘 일어나 따로 깃발을 날릴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이끌게 하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본분을 다하기만 했을 뿐인데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는 마음가짐이 올발라야지, 그렇지 않다면 결코 굳게 설 수 없다. 너희가 가장 기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성과를 거두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행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면 하나님이 그 부족함을 메워 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수많은 진리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이는 핵심 중의 핵심이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33년 반의 삶 속에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받았다. 그가 진리를 실행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으며, 하나님의 마음만 헤아렸기 때문에 수많은 고초를 겪은 것이다. 그가 진리를 알기만 할 뿐 실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고초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예수가 유대인의 교훈을 따르고 바리새인들을 따랐다면 고난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예수의 사례를 통해 사람에게 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이 성과를 거두려면 사람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부분은 너희가 꼭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겪었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면 슬퍼하며 기도를 했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마땅히 진리 실행을 위해 고난을 겪어야 하는데, 이 고난은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리를 깨달았다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5)

실행 과정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연관되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면서도 진리 실행이 되고, 진리를 실행하면서도 계명의 원칙을 위배하거나 계명을 거스르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한다. 진리 실행과 계명 준수는 서로 연관되며 모순되지 않는다. 진리를 실행할수록 계명의 본질을 더 잘 지킬 수 있으며, 계명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밝히 이해하게 된다. 진리 실행과 계명 준수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처음에 사람은 계명을 잘 지킨 후에야 진리를 실행할 수 있었으며, 그래야만 성령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마음을 다해 경배하는 것을 원하지, 그저 올바른 행동만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너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라도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 점차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 정확히 알게 되고,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의심하지도 않아야 계명의 본질을 지킬 수 있다. 그렇기에 계명만을 지키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성과를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배할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에게 실제 분량이 없기 때문이고, 진리가 없이 계명만을 지키는 것은 맹목적으로 규례를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행한다면 계명은 율법이 되어 네 생명 성장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구약의 율법처럼 너를 단단히 옭아매어 너는 성령의 함께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실행해야만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기 위함이다. 계명을 지키는 가운데 더 많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할 때 계명에 내포된 실제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한 목적과 의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규례를 지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 진입과 관련된다. 너는 생명이 자라는 만큼 계명도 지킬 수 있다. 비록 계명은 사람이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계명의 본질은 오직 생명 체험을 통해서만 분명히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계명만 잘 지키면 ‘모든 것이 완벽해. 이제 들림 받기만 하면 돼.’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은 너무 지나친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다. 이것은 진취성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며, 육적인 것을 탐하는 사람이 하는 억설에 불과하다! 이는 실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진리만 실행하고 실제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이런 사람은 다리 한쪽이 없는 불구자와 다름이 없다. 또한, 마치 규례를 지키듯이 계명만 지킬 뿐 진리가 없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눈 한쪽이 없는 불구자와 같다. 계명을 잘 지키고, 실제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되면 진리를 얻은 것이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실제 분량도 생긴 셈이다. 그것은 실행해야 할 진리를 실행하면서 계명도 지킨 것이니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진리 실행과 계명 준수는 사람의 생명 체험에 없어서는 안 될 두 개의 큰 줄기이다. 사람은 체험할 때 계명 준수와 진리 실행을 동시에 진행해야지, 둘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이 둘 사이에는 다른 점도 있고 연관성도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계명을 지키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6)

새 시대의 계명이 반포되었다는 것은 이 흐름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오늘날 하나님이 한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이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증명한다. 이것은 하나님 사역의 새로운 기점이자, 6천 년 경륜 중 마지막 부분 사역의 시작이다. 새 시대의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의 경지에 들어갔음을 상징한다. 또한,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예수가 유대 민족 가운데서 사역했듯, 하나님이 땅에서 더 실제적인 사역, 더 큰 사역을 더 많이 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이는 이 무리 사람들이 하나님이 준 더 큰 사명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실제 공급과 양육, 보살핌, 붙듦, 보호를 받고, 더 실제적인 훈련과 말씀의 책망 및 깨뜨림, 나아가 연단까지 받게 될 것임을 뜻한다. 새 시대 계명의 의의는 참으로 깊다. 이는 하나님이 실제로 땅에 나타나고, 땅에서 온 우주를 정복하고, 육신으로 그의 모든 영광을 나타낼 것임을 예고하며, 실제의 하나님이 땅에서 더 실제적인 사역을 전개하고 하나님이 택한 모든 대상을 온전케 할 것임을 예시한다. 또한, 하나님이 땅에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성육신한 하나님은 지극히 높이 올라 크게 높임 받고, 만국 만민은 크게 높임 받으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경배한다’는 사실을 실현할 것임을 말해 준다. 새 시대의 계명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고, 사람이 본분으로 이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계명이 상징하는 의미는 사실상 매우 깊어서 한두 마디 말로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새 시대의 계명은 여호와가 반포한 구약의 율법과 예수가 반포한 신약의 규례를 대체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더 깊은 공과이며,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새 시대의 계명은 실제적 의의의 일면을 지니며, 은혜시대와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의 교차점이다. 새 시대의 계명은 옛 시대의 모든 실천 방식과 규례, 예수의 시대와 그 이전 시대에 있던 모든 실천 방식을 종결지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 온전케 되도록 더 실제적인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으며, 이는 사람이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는 기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새 시대의 계명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지, 소홀히 여기지도 말고 건성으로 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새 시대의 계명은 사람이 오늘날 실제의 하나님 자신을 경배하게 하는 것에 역점을 둔다. 다시 말해, 영의 본질에 더 실제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공의로운 해로 나타날 때, 사람을 죄와 의로 판정하는 원칙을 강조하기도 한다. 계명은 알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사람이 온전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가 필요하며, 사람의 타고난 총명함이나 영리함으로 이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새 시대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을지는 실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심도 있는 공과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계명을 지키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7)

진리 실행은 생명 성장의 노정이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론만 있을 뿐, 실제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사람의 분량을 가늠하는 표징이다. 너의 진리 실행 여부는 너의 분량 유무에 직결된다. 만약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공의롭지 못하며, 감정적이고, 육적인 것을 좇는다면, 계명 준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가장 깊은 공과이기 때문이다. 시대별로 사람이 진입하고 인식해야 할 수많은 진리가 있지만, 또 시대마다 서로 다른 계명이 진리와 함께한다. 사람이 실행하는 진리와 준수하는 계명은 시대와 관련이 있다. 시대마다 모두 실행해야 할 진리가 있고, 더욱이 지켜야 할 계명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반포한 계명에 따라, 그러니까 시대에 따라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 이뤄야 할 목적과 성과도 달라진다. 계명은 진리를 위해 존재하며, 진리는 계명을 수호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진리만 있다면 하나님 사역의 변화는 언급할 수도 없다. 하지만 계명과 결합한다면 성령의 역사가 어느 선에서 흘러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사람 또한 하나님이 어느 시대에서 역사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많은 종교인들이 율법시대 사람들이 실행했던 많은 진리는 실행할 수 있지만, 새 시대의 계명은 얻지도, 지키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전히 낡아 빠진 방식으로 살고 있는 원시인이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역사 방식이 없다. 게다가 그들은 새 시대의 계명을 보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의 역사 또한 없다. 그것은 병아리가 나올 수 없는 속 빈 달걀과 같다. 그러면 영이 없는 것이다.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새 시대에 진입하지 못해 한참 뒤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옛 시대의 진리만 있고 새 시대의 계명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 중 많은 사람이 오늘날의 진리를 실행하지만, 오늘날의 계명은 지키지 않고 있다.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그들이 실행하는 진리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으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도 없다. 진리 실행은 반드시 오늘날의 성령 역사 방식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즉, 오늘날의 실제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야 하며, 이것을 떠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 역시 새 시대의 계명이 반포된 실제 의의이기도 하다. 계명을 잘 지키려면 최소한 실제로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계명의 원칙을 잘 파악하고 지켜야 한다. 계명을 지킴에 있어 함부로 지키거나 마음대로 지켜서는 안 되고, 근거와 목적, 원칙이 있게 지켜야 하며, 먼저 이상(異象)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오늘날의 성령 역사에 대해 확실히 알고 그 역사 방식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면, 계명을 지키는 일도 자연히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네가 새 시대 계명의 본질을 참으로 꿰뚫어 보고 잘 지킬 수 있을 때면, 그때 너는 온전케 된 것이다.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의 실제 의의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지는 새 시대 계명의 본질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성령의 역사는 끊임없이 사람에게 나타나고, 하나님의 요구는 점점 높아진다. 그래서 사람이 실제로 실행해야 할 진리도 점점 많아지고 높아지며, 계명 준수를 통해 이뤄야 할 성과도 점점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마땅히 진리 실행과 계명 준수를 동시에 실천해야 하며, 누구도 이 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새 시대에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계명과 함께 발맞춰야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계명을 지키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8)

실행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한두 마디 정도 개인의 느낌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얻은 빛 비춤일 뿐, 본인이 직접 실행한 부분이 없고, 본인이 체험해서 얻은 깨달음도 없다. 나는 일찍이 이러한 문제를 분석했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라.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네가 어찌 사탄에 대한 승리를 운운하겠느냐? 어찌 이겼다는 간증을 입에 담느냐?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 낸다고 하느냐? 전부 터무니없는 헛소리다! 오늘날 하나님이 감상이나 하라고 너희에게 그렇게 많은 말씀을 했다고 생각하느냐? 입으로는 옛 자아를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하겠다고 하면서 손으로는 다른 일을 하고, 마음으로는 다른 타산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어째서 마음과 손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냐? 그렇게 많이 교통해 줬는데도 공허한 글귀가 되었으니, 비통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이는 네가 성령 역사의 방식에 진입하지 못했으며, 성령 역사와 성령의 인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고만 말하고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다면, 너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너 같은 사람을 구속하러 온 것이 아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극도의 고통을 받은 것은 죄인과 가난한 사람 그리고 비천한 사람을 구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속죄 제물이 되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하겠다면, 하나님 집에 눌러앉아 공짜 밥을 얻어먹지 말고 속히 나가라. 뚜렷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제하기 어려워한다. 이는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면서 무슨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운운하느냐? 무슨 낯짝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겠다는 것이냐? 하나님이 준 밥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작을 부리니, 음험하고 악랄하며 몹시 간교하다. 설령 하나님이 네게 축복을 내릴지라도 그것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 때 부끄럽지 않겠느냐? 낯이 뜨겁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홀로 딴 살림을 차리는’ 수작을 부리면서도 두렵지 않더냐? 이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앞날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느냐? 네게 앞날은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늘 무슨 더 큰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냐?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을 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에 어떤 느낌도 없다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겠느냐?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네 본성이 되었는데, 그 상태로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천하를 두루 누빌 수 있겠느냐? 누가 너에게 탄복하겠느냐? 네 진상을 아는 사람은 모두 너를 멀리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겠느냐? 결과적으로 말해, 말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말할 때는 성령 역사가 있지만 실행하지 않을 때는 성령 역사가 없는 이런 상황을 반복하면서 어찌 앞날을 논할 것이며, 어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하기만 했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이 너에게서 얻은 것은 말뿐인 마음이지 진리를 실행한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이 너의 실제 분량이 될 수 있겠느냐? 이렇게 해서 언제 하나님께 온전케 되겠느냐? 네 앞날이 암담한데 초조하지 않으냐? 하나님이 네게 이미 실망했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너는 하나님이 더 많고 새로운 사람들을 온전케 하려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낡아 빠진 것들이 굳게 설 수 있겠느냐?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지 않으면서 내일을 기다리겠단 말이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구원받는 사람은 기꺼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29)

네가 하나님 말씀을 들고 망설임 없이 한번 쭉 해석할 수 있다고 해서 실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제가 있다는 것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고, 너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비로소 실제가 있다고 할 수 있고, 네게 진정 인식과 실제 분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랜 검증을 견디고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 억지로 만들어 낸 모습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이야말로 참으로 실제와 생명이 있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봉사자의 시련’을 예로 들어 말하겠다. ‘봉사자’에 관한 이론적인 인식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들어 보면 인식한 깊이도 얕지 않아 서로 경기장에서 경쟁하듯 말은 누구보다 잘한다. 하지만 큰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훌륭한 간증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어찌 됐든 사람이 살아 낸 것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인식한 것과 일치한 구석이 없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실제 분량도 생명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인식한 것을 실제에 적용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의 분량은 사상누각처럼 위태롭기 그지없고, 실제는 너무도 적어 찾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다.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실제적인 부분이 너무 적고, 모두 강제적으로 살아 낸 것이기에 나는 사람에게 실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입으로는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 시련이 임하기 전에 한 말에 불과하다. 언젠가 갑자기 시련이 임하면 사람이 한 말과 실제는 또 한 번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여전히 사람에게 실제가 없음을 증명한다. 네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임해 네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오면, 그것은 너에게 시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확실히 나타나기 전까지,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준엄한 검증이며, 크나큰 시련이다. 너는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줄 때는 늘 사실이 확실히 드러나기 전에 사람에게 선택을 하게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줄 때는 항상 진상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을 드러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하는 방식이며, 이를 통해 네가 오늘날의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지, 너에게 실제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너는 정녕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있느냐? 큰 시련이 닥쳐 왔을 때 정말 굳게 설 수 있느냐? 누가 “절대 걱정 마세요.”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누가 “어느 누가 의심할지라도 저는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베드로가 시련을 겪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진상이 드러나기 전에는 늘 큰소리를 친다. 이는 베드로 한 사람만의 결점이 아니라, 현재 모든 사람에게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너희들이 오늘날의 하나님 사역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내가 몇 곳을 찾아가거나 일부 형제자매를 방문한다면, 너희는 분명 수많은 인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의심도 없는 듯 얘기할 것이다. 내가 만약 “오늘날의 사역이 진정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라고 확신하느냐? 조금도 틀림이 없느냐?”라고 물으면 너는 분명 “조금도 틀림없는 하나님 영의 사역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너는 이렇게 대답한 후,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이로 인해 큰 기쁨을 누리며 자신에게 어느 정도는 실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식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실제가 없으며, 자신이 뭔가를 갖췄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시련 속에서 똑바로 서지 못한다. 교만하고 자신을 크다 하는 자,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말은 누구보다 잘하지만, 실행은 제일 형편없다. 그들은 몹시 작은 일에서도 곧바로 의심하거나 나갈 생각을 하며 실제가 전혀 없다. 그저 종교보다 높은 이론만 갖추었을 뿐, 오늘날 하나님이 요구한 실제는 갖추지 못했다. 나는 이론만을 말하고 실제가 없는 사람을 가장 혐오한다. 평소에 사역할 때는 누구보다 크게 외치지만, 실제가 임하면 바로 주저앉으니, 이것이 실제가 조금도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무리 큰 바람과 파도가 쳐도 굳게 서서 의심하지 않고, 주변에 아무도 없을지라도 굳건히 서서 부인하지 않는다면, 너에게는 진실로 인식과 실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이 불면 쓰러지고 흘러가는 대로 따르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배운 것으로 아무리 훌륭하게 말할지라도 너에게 실제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공허한 글귀를 너무 일찍 외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는지를 알고 있느냐? 나중에 얼굴도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 베드로가 했던 일을 반복하는 역할을 맡지 말라. 그런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에게 실제 분량이 조금도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했지만 사실이 임한 것은 하나도 없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친히 형벌하지 않았다. 그러자 혹자는 이러한 시련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만하게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죄악의 손을 점점 더 크게 뻗친 것이다. 이런 시련조차 통과하지 못하면서 무슨 더 큰 시련이니 실제니 하는 것을 운운한단 말이냐? 이는 전부 하나님을 기만하는 말이 아니냐? 실제는 네가 있는 척한다고 생기는 것도, 인식했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네 실제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든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는지에 달린 문제다. 알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리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실제가 있는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0)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실제를 말로 할 수 있는 걸로 끝이 아니다. 그렇다면 너무 간단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왜 또 생명 진입에 대해 말씀했겠느냐? 왜 변화에 대해 논했겠느냐? 실제에 대해 공리공론을 늘어놓기만 한다면 성품이 변화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훈련시키는 하나님나라의 정예병은 실제를 말하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고, 큰소리만 치는 사람도 아니라 언제 어느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좌절이 와도 굽히거나 쓰러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으며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말씀한 실제이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한 실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깨우침이 있다고 해서 실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분량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대한 것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이룬 성과가 없다. 누구나 베드로가 받은 고난을 받아야 하고, 더구나 베드로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역사를 얻어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실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를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실제가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궤변이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말로, 실제적인 의의가 없다!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런 말을 없애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깨닫는 사람은 모두 ‘이방인’으로서, 실제적인 인식은 물론, 실제 분량도 없다. 그런 자는 식견과 실제가 없는 사람에 속한다. 즉, 하나님 말씀의 본질 밖에 있는 사람은 모두 ‘이방인’에 속한다. 사람이 생각하는 이방인은 하나님께 짐승 취급을 받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방인은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실제가 없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지 못하는 자는 모두 ‘이방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두가 실제를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 내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실제는 너무 얄팍하고 가치가 없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 비천해서 언급할 가치도 없으며, 너무 많은 것이 결핍되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모든 사람에게 대대적인 검증 사역을 하여 누가 인식만 말하고 길을 가리키지 못하는지, 누가 쓸모없는 폐물인지 알아볼 것이다. 앞으로 명심하여라! 공허한 인식을 말하지 말고, 오직 실행의 길과 실제만을 말해라. 실제적인 인식에서 실제적인 실행으로 옮겨 가고, 실행에서 실제적인 살아 냄으로 옮겨 가야 한다. 사람을 가르치는 말도, 소위 실제적인 인식이라는 것도 말하지 말라. 너의 인식이 길이라면 얘기해도 되겠지만, 길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말해 봤자 아무 쓸모가 없다. 몇 마디 인식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만하고 다른 이의 부러움을 사려 한다면 그것은 네 야심이 아니겠느냐? 고의로 사람을 농락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거기에 가치가 있겠느냐? 체험한 후에 인식을 말한다면 그것은 허풍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교만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체험 과정에서는 수많은 일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자신의 육을 버리지도 못하며, 늘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지도 못하는데, 무슨 낯짝으로 이론이니 인식이니 하는 것을 거론한단 말이냐? 정말 부끄러움도 모르는구나! 무슨 낯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을 말한단 말이냐? 후안무치하구나! 허풍을 떨고 큰소리를 치는 게 본성이 되고 습관이 되어 언제든 식은 죽 먹기처럼 술술 말을 꺼내며, 실행 과정에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꾸미니 이것이 사람을 속이는 수작이 아니겠느냐?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사람은 잘 모르고 분별력도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진지하게 대하므로 너를 가만두지 않는다. 아마 형제자매들은 모두 너를 옹호하고 네 인식에 칭찬을 늘어놓으며 탄복을 금치 못하겠지만, 네게 실제가 없다면 성령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실제 하나님은 네게서 흠을 잡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영은 너를 상대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너는 몹시 힘들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실행의 실제에 대해 많이 말해야 한다는 것을 잊은 것이냐? 실제의 길에 대해 많이 말해야 한다는 것을 잊은 것이냐? “큰 도리나 무가치한 큰소리는 적게 해야 하는데, 가장 좋기는 지금부터 실행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잊은 것이냐?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이냐?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단 말이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리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실제가 있는 것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1)

지금 너희는 더 현실적인 공과를 배워야지, 그럴싸한 고담준론 따위를 늘어놓아선 안 된다. 인식한 것을 말할 때 보면 하나같이 고매하지만, 여전히 실행의 길은 없다. 실행의 원칙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실제적인 공과를 배운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누가 현실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인식한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너의 진짜 분량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네 타고난 총명함과 재능에 불과하다. 네가 길을 가리킬 수 없다면 전부 허사이고, 쓸모없는 폐물이다! 실제적인 실행의 길을 조금도 말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가식 아니겠느냐? 자신의 실제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여 공과를 배우게 하거나 실행할 길을 갖게 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가짜 아니겠느냐? 모조품이 아니겠느냐?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그저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자’일 뿐, ‘사회주의 실현의 기여자’는 되지 못한다. 실제가 없으면 진리가 없는 것이다. 실제가 없는 자는 폐물이자 산송장이며,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가’이므로 하등의 참고할 가치가 없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론을 떠드는 입을 다물고 좀 진실되고 참된 것, 실용적인 것을 말하라고 권하겠다. ‘현대 예술’을 공부하고 현실적인 것을 말하고, 실제적인 것을 내놓고 봉사 정신을 가져라. 말할 때는 현실을 직면해야지, 쓸데없이 부풀리거나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고 특별한 시선을 받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말할 때는 ‘예술성’에 신경 쓰고, 행동할 때는 공평하게 하며, 일을 처리할 때는 이성적이어야 한다. 말에는 실제가 있어야 하고, 일거수일투족은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는 모습이 나올 때는 양심적이어야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거나 위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부정적인 영향’을 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는 실제와 많이 연관 짓고, 교통할 때는 현실적인 것을 많이 이야기하며, 높은 위치에 서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대할 때는 많이 ‘참고’, ‘양보’하며 마음을 넉넉하게 쓰고 ‘관용’을 배워라. 그릇된 생각이 들 때는 육을 버리는 것을 많이 실행해라. 사역할 때는 실제적인 길을 많이 말하되, 너무 높은 것을 말하지 말라.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한다. 적게 누리고 많이 기여하며, ‘공평무사’한 봉사 정신을 가져라.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헤아리고 양심적인지를 잘 살펴보아라.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날마다 고심하며 말씀하니 그것을 많이 되새기고 잊지 말며, ‘오래된 책력’은 되도록 덮어라. 많이 기도하고 교제하며, 더는 흐리멍덩하게 굴지 말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되 식견을 키워라. 죄악의 손이 뻗어 나올 때는 웅크려 너무 멀리 뻗지 말라. 그래 봤자 소용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저주만 받을 뿐이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무기로 늘 다른 사람을 때리지 말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많이 교제하고, 생명에 대해서도 많이 나누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마음을 가져라. 말은 적게 하고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하여라.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은 적게 하고 실행을 많이 하여라. 성령의 감동을 많이 받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많이 얻어라. 사람의 뜻에서 난 성분을 더 많이 없애라. 인간의 방식이 여전히 너무 많다. 피상적인 방식과 행위는 혐오감만 불러올 뿐이니 더 많이 제거하여라. 심리 상태는 너무나도 혐오감을 들게 하니 많이 고쳐라.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람의 자리가 적지 않다. 하나님께 더 많은 자리를 드리고, 억지를 부리지 말라. ‘전’은 본디 하나님의 것이니 사람이 점유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공의를 많이 행하고, 감정에는 적게 연연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육을 버리는 것이 좋다. 실제를 많이 말하고 인식은 적게 말하여라. 그러지 못할 바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실행의 길을 많이 말하고 무가치한 큰소리는 적게 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지금부터 실행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제를 좀 더 중시하여라>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2)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리 높지 않다. 사람이 조금만 노력하면 ‘합격’할 수 있다. 사실,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일이다. 먼저 진리를 실행한 후에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 역사의 절차이자 방식인데, 네가 순종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너 스스로의 힘으로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성령이 너의 뜻에 따라 역사하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너의 부족한 부분에 맞춰 역사하겠느냐? 이것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전부 헛수고이다. 어째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데에 힘을 적잖게 들였는데도 인식만 있을 뿐 실제적인 길을 말하지 못하겠느냐? 너는 인식이 있으면 진리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어리석은 견해가 아니냐? 네가 백사장의 모래만큼 많은 인식을 말할 수 있다 한들, 그 안에 실제적인 길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허세가 아니겠느냐? 전부 남을 해하는 수작에 불과하다! 이론이 고매할수록 실제가 없기에 사람을 실제 속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이론이 고매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거역하고 대적하게 된다. 고매한 이론을 보배처럼 여기지 말라. 그것은 화근일 뿐, 아무런 쓸모도 없다! 어떤 이가 최고의 이론을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안에는 실제가 조금도 없을 수도 있다. 그 자신이 아직 체험하지 못했기에 실행의 길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이끌 뿐, 정상 궤도로 인도할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사람을 해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너는 적어도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해 줌으로써 다른 사람이 진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네가 봉헌한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일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비현실적인 큰소리만 치면서 합당하지 못한 수작으로 다른 이를 속박하여 네게 복종시키려 하지 말라.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점점 더 흐리멍덩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다 보면 수많은 규례가 생겨 사람들이 너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전부 사람의 부족한 면인데, 실로 골치 아픈 문제이다. 그러므로 현재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많이 말하되, 타인의 체험을 ‘자신의 소유물’인 양 가져다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실행해야 할 것이다.

너의 교제에서 다른 사람이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네게 실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말을 어떤 식으로 하든 다른 사람을 실행으로 인도하고 실행할 길이 있게 해야 한다. 인식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할 길이 있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하나님이 사역을 통해 인도하는 길을 가야 한다. 다시 말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과정은 성령이 인도하는 길을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 실행할 길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야 한다. 너무 멀리 뒤처져서도,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제대로 따라가며 방해하지 말라. 이렇게 해야 성령 역사를 얻고, 진입할 길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며,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많이 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사역하는 사람은 말을 분명하게 하고, 따르는 사람은 고난받고 순종하는 것을 많이 중시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서로의 자리를 지키며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똑똑히 깨닫고 성령이 인도하는 길로 가야지, 치우치거나 어긋나서는 안 된다. 또한, 오늘날의 사역에 대해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사역 방식에 진입하는 것은 너희가 응당 실행해야 할 일이자, 제일 먼저 진입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하나님 집의 사역을 하는 것은 너희의 직책이고, 오늘날의 사역 방식에 진입하는 것은 너희의 본분이며, 오늘날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너희가 짊어져야 할 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제를 좀 더 중시하여라>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3)

하나님은 실제의 하나님이며, 그의 모든 사역 역시 실제적이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는 실제적이다. 하나님 말씀 이외의 것은 모두 헛되고, 존재하지 않으며, 확고하지 못하다. 지금 성령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하도록 인도한다. 사람이 실제에 진입하려면 실제를 찾고 인식한 다음, 실제를 체험하고 살아 내야 한다. 실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다른 사람의 말이 실제적인지 더 잘 분별할 수 있으며, 사람의 관념은 줄어든다. 실제를 체험할수록 실제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사탄의 패괴 성품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다. 또 실제를 갖출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며, 육을 더 증오하고 진리를 더 사랑하게 된다. 사람은 실제를 갖출수록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에 가까워진다. 하나님께 얻어지는 사람은 바로 실제가 있는 사람이자 실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며, 실제를 체험하여 하나님의 실제적인 행사에 대해 인식을 갖게 된 사람이다.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협력하며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킬수록 성령 역사를 더 얻게 되고, 실제를 더 갖추게 되며, 하나님의 깨우침을 더 얻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실제적인 행사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현재의 성령의 빛 속에서 살 수 있으면, 지금 실행해야 하는 길에 대해 더욱 명확히 알게 되고, 기존의 종교 관념과 낡은 관행을 더 잘 벗어 버릴 수 있다. 지금은 현실적인 것만 이야기하겠다. 사람은 실제가 있을수록 진리를 더 명확히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실제는 모든 글귀와 이치, 나아가 모든 이론과 지식을 압도한다. 실제를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더 진실하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갈급해하는 법이다. 네가 언제나 실제를 중시한다면, 너의 처세술과 종교 관념, 그리고 타고난 개성은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를 추구하지 않고 실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기 쉽다. 성령은 그런 자에게 역사할 수 없으므로 사람은 이내 공허함을 느끼고, 삶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성령은 네가 실제적으로 훈련하고 찾고 기도할 때 역사하며, 네가 진리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내할 때 비로소 역사한다. 진리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오직 글귀와 이치, 공허한 이론만 있다. 또한, 진리가 없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자는 하나님이 그의 육체를 영체로 바꿔 셋째 하늘에 올라가게 해 주기만을 바란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실제에 대해 알지 못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협력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기다릴 뿐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명확하게 알며 나아가 진리에 진입해 진리를 실행하려면 실제로 훈련하고, 찾고 구하며, 갈급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네가 갈급해하며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할 때,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너를 감동시키고 네게 역사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고 실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니, 이는 네 생명에 더 큰 도움이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제’에 대해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4)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려면 먼저 하나님이 실제의 하나님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실제로 육신을 입고 나타난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실제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이 모두 실제임을 알아야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야 너의 생명이 자랄 수 있다. 실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없고, 관념에 빠진 채 상상 속에서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 실제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다. 반면, 막연한 것과 이치를 추구할수록 하나님과는 멀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기가 더 힘들고 어렵게 느껴져 진입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고 영 생활의 정상 궤도에 진입하려면 먼저 실제를 알고, 막연하고 초자연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먼저 성령이 너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깨우치고 인도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성령이 사람에게 행하는 실제 역사를 진실로 알게 된다면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지금 모든 것은 실제에 근거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가장 실제적이고, 사람이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체험하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막연하고 초자연적인 것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현재 사역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늘 편차가 생기고 힘겹게 느껴진다. 이는 전부 사람의 관념으로 초래된 것이다. 사람은 성령이 역사하는 원칙을 파악할 수 없고 실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늘 소극적이 되고,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한 채 멀리서 바라만 보며, 하나님의 말씀이 실로 좋다고만 생각할 뿐 진입하는 길은 찾지 못한다. 성령 역사에는 원칙이 있다. 바로 사람의 협력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성령은 사람이 능동적으로 기도하고 구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역사하며, 깨우침과 빛 비춤을 준다. 성령이 일방적으로 역사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것도 아니다. 둘 중 하나라도 없어선 안 된다. 사람이 협력하고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에 다가갈수록 성령도 더 역사한다. 사람의 실제적인 협력에 성령의 역사가 더해져야만 실제적인 체험이 만들어지며, 하나님 말씀의 본질에 대한 인식도 생겨난다. 이렇게 조금씩 체험해 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만들어진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관념적으로 하나님이 전능하며,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성령의 감동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내가 협력하는 만큼 사역하셔. 하나님이 내게 역사하셔서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내가 어떻게 협력하는지에 달려 있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나는 온 힘을 다해 찾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해. 이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라고 생각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제’에 대해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5)

너에게는 종교적인 행위가 얼마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자기 뜻대로 행한 적이 얼마나 있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 적이 몇 번이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하며, 행동함에 있어 규례가 아닌 원칙을 지키고,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려 하지 말고 진리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모든 행동은 규례가 아닌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는 이들은 형제자매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얘기하지만, 뒤에서는 진리를 실천하지 않고 다른 꿍꿍이를 부린다. 이들이 종교 바리새인과 다를 바 있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들은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기꺼이 진리를 실천하며, 양심을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모든 일을 지혜로이 해결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원칙 있게 일한다. 이런 자들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말로만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얘기하면서 온종일 울상을 짓고, 능청스럽게 불쌍한 척 연기를 하니 정말 못 봐줄 노릇이다! “왜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 마디도 못 하면서 말이다. 네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면 겉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줘야 하며,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무성의하게 말로만 하나님을 대하는 자들은 모두 위선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말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기도하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며, 성령의 감동이 없음에도 울음을 터뜨리려 한다. 이들은 종교 의식과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그것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여기며, 하나님이 겉으로 보이는 경건함이나 슬픔의 눈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그릇된 자들이 발전성이 있겠느냐? 어떤 자는 겸손해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얌전한 척 말한다. 또 어떤 자는 순한 양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춰 아무 힘도 없는 양 행동한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정말 그렇단 말이냐?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활발하고 자유로우며, 순수하게 마음을 열어 놓는다. 또한, 정직하고 사랑스러우며, 자유로운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인격과 존엄성을 갖추어 어디서든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설 수 있기에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새 신자들은 형식적인 것이 너무 많아 한동안 훈계와 깨뜨림을 받아야 한다. 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겉으로는 티 나지 않지만,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는 사람이다. 네가 매일 여기저기 복음만 전하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데에만 급급해하면서 정작 자신은 규례와 도리 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종교 인사에 속하며 외식하는 사람이다.

……

그렇다면 외적인 좋은 행위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육을 의미한다. 외적인 행위는 제아무리 훌륭해도 그 사람의 성품만을 의미할 뿐, 생명을 의미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도 없다. 네가 하나님께 죄스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도 다른 사람의 생명에 공급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영적인 것이라 여기겠지만, 사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너는 자신이 좋아하고 바라는 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너의 기호가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성격이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네가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요, 너의 습관은 하나님이 혐오하여 버리는 것들이다. 하나님께 죄스럽다는 생각이 들거든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도 드리지 않고 늘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겉으로만 행동을 취하는 것은 네가 누구보다 가식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인 좋은 행위만 있을 뿐 실제가 없는 자들이 어떤 사람이냐? 외식하는 바리새인이요, 종교 인사이다! 외적인 행위를 버리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한다면, 가식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가식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대적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결국 도태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종교 의식이 아닌 실제를 중요시해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6)

정상인의 모습을 회복하려면, 그러니까 정상 인성을 갖추려면 입술로만 하나님의 기쁨을 얻고자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는 행위에 불과하며, 진입과 변화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받으려면 반드시 조금씩 훈련을 해서 천천히 진입해야 하고, 조금씩 찾고 모색하면서 올바르게 진입하여 실제적인 진리의 생활, 성도의 생활을 해야 한다. 그다음은 실물과 실제 사실 그리고 실제 환경을 통해 실제적인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 환경을 통해 훈련하는 것이므로 입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사람이 자신의 자질 부족을 깨닫고,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며 진입하고 훈련을 해야 실제가 생기고, 더 빨리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변화하려면 실제가 있어야 하며, 훈련을 할 수 있는 실물과 실제 사실, 실제 환경이 있어야 한다. 교회 생활에만 의존한다면 진정한 훈련을 받을 수 있겠느냐?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실생활에 진입하지 못하면 사람의 낡아 빠진 행태와 생활 방식이 변화할 수 없다. 이는 사람의 게으름이나 의존적인 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에게 생활 능력이 전혀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상인의 모습이 대체 어떤 기준에 이르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날 사람은 모두 말하고 교제하는 것에만 치중했으며, 심지어는 다 ‘연설가’가 되었다. 그러나 생명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심오한 이론을 추구하는 데에만 심취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렇게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삶은 바꿔야 한다. 특정한 일과 사물, 사람에 초점을 맞춰 진입하고 훈련하되, 명확한 목표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성과를 낼 수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본질부터 바꿔야 한다. 사람의 본질과 생활, 게으름, 의존성, 노예근성에 집중해서 사역해야만 사람을 바꿔 놓을 수 있다.

교회 생활도 한 면의 성과를 낼 수 있다고는 하나, 핵심은 역시 실생활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실생활이 없으면 사람의 옛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은혜시대 예수의 사역을 들어 말해 보자. 예수가 과거의 율법을 폐하고 새 시대의 계명을 세운 것도 다 실생활 속의 실례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가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지날 때였다. 배가 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자, 바리새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그들은 안식일에는 송아지가 구덩이에 빠져도 구해서는 안 된다며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수는 이러한 일들을 바탕으로 조금씩 새 시대의 계명을 반포했다. 당시, 그는 수많은 실제 일들을 가지고 사람에게 인식을 주고 변화를 주었다. 이는 성령이 역사하는 원칙이며, 이렇게 해야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사람은 실제 일이 없으면 도리상으로만 인식한다. 즉, 머리로 이해하고 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럼 훈련을 통해 지혜와 식견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저 듣고 보고 인식하는 것만으로 가능하겠느냐? 그렇게 해서 어떻게 커질 수 있겠느냐? 반드시 실생활 속에서 인식하고 체험해야 한다! 그러므로 훈련이 빠져서는 안 되고, 실생활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여러 면을 중시해야 하며, 다양한 면에서 진입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식적 소양, 표현력, 통찰력, 분별력,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능력, 인간으로서의 상식과 사람이 지켜야 할 규범 등 인성과 관련해 갖춰야 할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인식한 후에는 모두 진입을 중요시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변화될 수 있다. 사람이 인식만 하고 실행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화할 수 있겠느냐? 이제 사람은 많은 것을 이해했지만, 실제를 살아 내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도 매우 얄팍한 것이다. 네가 약간의 깨우침과 성령의 빛 비춤만을 얻었을 뿐, 실제 생활에서 진입이 없고, 심지어 진입 자체를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적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은 아주 많은 것을 깨달았고 도리에 대한 인식 또한 많이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성품은 예전과 같으며, 기존의 자질 또한 조금도 향상되지 않고 그대로이다. 이러면 네가 언제쯤 진입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교회 생활과 실생활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7)

교회 생활은 그저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는 생활로, 사람의 삶 속에서 극히 적은 일부의 시간만을 차지할 뿐이다. 만약 사람이 실생활에서도 교회 생활처럼 정상적으로 영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며,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다가가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실생활 속에서 산다면, 또한 범사에 진리에 따라 행하는 실생활 속에서 살고, 기도와 하나님 앞에 평온해지는 것, 찬송하고 춤추는 것을 훈련하는 실생활 속에서 산다면, 이런 생활은 사람을 하나님 말씀의 삶 속으로 인도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몇 시간 안 되는 교회 생활을 할 때의 상태만 중시할 뿐, 그 외의 생활에 대해서는 자신과 무관한 듯 전혀 ‘돌보지’ 않는다. 또한,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거나 찬송하거나 기도할 때만 성도의 생활에 진입할 뿐, 이 시간 외에는 다시 원래 모습대로 살아간다. 이런 생활은 전혀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도록 해 주지도 못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품이 변화하려면 실생활과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실생활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저버리며,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 또한, 범사에 사람으로서의 원칙과 상식, 규범을 배워야만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 네가 도리상의 인식만을 중요시하고 종교 의식 속에서만 생활할 뿐, 실제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실생활에 진입하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실제에 진입할 수도, 자신에 대해,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 알 수도 없을 것이며, 언제까지나 눈멀고 무지한 사람으로 살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단기간 내에 정상인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며, 틀린 관념이나 도리를 바꿔 놓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옛 성품과 모든 옛 생활, 사람의 뒤처진 사상과 정신적인 면모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교회 생활만 중요시해서는 사람의 낡은 생활 습관이나 오래된 생활 방식을 바꿔 놓을 수 없다. 사람은 어쨌든 실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교회 생활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도 정상 인성으로 살 것을 요구한다. 또한, 교회 생활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도 진리를 살아 낼 것을 요구하고, 교회 생활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에 진입하려면 모든 것을 실생활로 향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실생활에 진입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생활 속에서 정상 인성으로 살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실패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모두 실생활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이고, 하는 말은 인간성이 있어 보이나 귀신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며, 입술에만 진리가 있을 뿐 이론으로 사는 사람이다. 실생활 속에서 진리를 살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께 혐오받고 버림받은 사람이다. 너는 실생활 속에서 진입하는 훈련을 하고, 자신의 부족함과 패역, 어리석음, 비정상적인 인성, 연약한 면 등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너의 실제 상태와 실제 어려움에 결부해야 한다. 그래야 너의 인식이 실제적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의 상태를 잘 파악할 수 있어 성품 변화까지 가져올 수 있다.

현재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기 시작했으니, 사람은 반드시 실생활에 진입해야 한다. 변화를 얻고 싶다면 먼저 실제 생활에 들어가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 만약 네가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을 전부 무시하고 그저 영 안의 일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것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며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러한데 사람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겠느냐? 지금 너에게 실생활에 진입해 훈련을 하라고 하는 것은 모두 실제 체험에 진입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라는 것이다. 이는 전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부분이다. 성령의 역사는 주로 길을 인도하는 데 있다. 나머지는 사람이 훈련하고 진입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진입의 길에 따라 실생활 속으로 진입해야 하며, 하나님을 실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하여 진정한 정상 인성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생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교회 생활과 실생활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8)

예전에 성령의 함께함과 성령의 역사는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령이 함께하는 상황에서는 사람의 사유, 이성, 인성이 모두 정상적이다. 성격은 예전과 같으나 내면에 평안이 깃들고 외적으로 성도의 품위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성령이 함께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성령이 함께할 때, 사람의 생각도 정상적이다. 배가 고프면 밥이 생각나고, 목이 마르면 물이 생각나는 등등이다. 이러한 인성의 정상적인 현상은 성령의 깨우침이 아니라 사람의 정상적인 생각에 속하며, 성령의 함께함이 있는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성령이 함께하면 육에서 거의 벗어난 것처럼 배고픔이나 피곤함을 느끼지 못하고, 가정이 있다는 것도 망각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실 성령이 함께할수록 사람은 더욱 정상적이 된다. 즉, 어떻게 먹고 입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물론,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고, 다 버리고 헌신하며, 충성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가져야 할 정상적인 인간성을 전혀 잃지 않으며, 굉장히 이성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사역을 되새기다 보면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고, 진리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성령의 역사는 당연히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성을 잃은 것이고, 이러한 상태는 비정상적이다.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정상인의 이성을 갖고 있다. 즉,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는 때가 있다. 반면 성령의 함께함은 일반적으로 언제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이성, 생각, 상태가 정상적이면 분명 성령의 함께함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이성과 생각이 비정상적이면 인간성도 정상적일 수가 없다. 지금 네 안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면 분명 성령의 함께함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함께함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특별한 경우에만 역사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함께하면 사람은 다만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성령의 역사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네가 리더나 일꾼이라고 하자. 교회에서 공급하고 양육을 할 때, 어떤 말씀에서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교제하면 듣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형제자매들의 실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이는 성령이 역사하는 경우이다. 때로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다가 성령의 깨우침으로 유난히 자신의 체험에 잘 비춰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데, 그런 것도 성령의 역사다. 때로는 너희가 나의 말을 듣는 과정에서 자신의 상태와 잘 결부시키고, 내 말에서 감동을 받기도 하고 격려를 받기도 하는데, 그것도 성령의 역사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언제나 성령 역사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에게 언제나 성령의 함께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이다. 또한 언제나 정상적인 생각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현실적이다. 이는 그에게 성령의 함께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성령의 감동이 따르며, 시시각각 새로운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정상이다! 그런 것은 너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악령이다!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어도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할 때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느냐? 악령이 들린 사람은 육의 연약함이 없이 무엇이든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감정이 없고 고통에 강해 힘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육을 초월한 것 같다. 이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냐? 악령의 역사는 초자연적이어서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런 자를 보면 부러워한다. 또한 하나님을 정말 열성적으로 믿고, 믿음이 굳건하며, 연약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악령이 역사하는 현상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인간적인 연약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39)

굳게 서서 간증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신경 쓰지 않고 그런 대로 따르겠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생명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나가지도 않는다. 그저 이 단계의 사역이 모두 하나님이 행한 것이라고 인정할 뿐이다. 이는 간증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정복된 간증조차 할 수 없다. 정복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따르고, 생명을 추구한다. 실제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한다. 이런 사람이 간증이 있는 사람이다. 간증이 없는 사람은 생명을 추구하는 법이 없고 지금까지도 허송세월하면서 따르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따른다고 해도 정복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정복된 것에도 기준이 있다. 따르는 사람이라고 다 정복된 것은 아니다. 너는 자신이 오늘날의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도 전혀 모르고, 또한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오게 되었는지, 또 누가 지금까지 올 수 있게 잡아 주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늘 엉터리인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따른다고 할지라도 간증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대체 참된 간증이란 무엇이냐? 여기에서 말하는 간증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정복된 간증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케 된 간증이다(물론 이것은 미래에 더 큰 시련이나 환난을 겪은 후의 간증을 말함). 즉, 네가 환난과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다면 두 번째 부분의 간증을 하는 것이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첫 번째 부분을 간증하는 것이다. 즉, 연이은 형벌과 심판의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복된 간증이다. 지금은 정복되는 기간(너는 지금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성육신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주된 사역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심판과 형벌로 정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이기 때문이다. 네가 정복되었음을 간증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렸다. 또한, 더 중요하게는 네가 각 단계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에 대한 참된 인식이 있는지, 이 모든 사역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지에 달렸다. 끝까지 따른다고 해서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한번 또 한번 반복되는 형벌과 심판에 기꺼이 복종하고, 네가 체험하는 단계별 사역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최종적으로 해야 할 정복된 것에 대한 간증이다. 정복되었음을 간증한다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해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간증의 핵심은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것이다. 네가 세상 사람이나 집권자들 앞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사역에 순종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따라서 이 단계의 간증은 사탄과 모든 원수를 ―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하여 더 큰 사역을 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육신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모든 마귀와 원수, 즉 모든 적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성육신을 믿지 않는 모든 원수를 ―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거나 바란다고 해서 하나님께 정복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복됐다는 것은 그가 곧 ‘도’가 ‘육신’이 되고 ‘말씀’이 ‘육신’이 되고, ‘영’이 ‘말씀’이 되었으며,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났음을 믿을 수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중요한 간증이다.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따르는지, 얼마나 헌신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정상적인 인성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고 ‘진리의 성령’이 ‘육신’에 실체화되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모든 진리, 길, 생명이 모두 육신으로 임했고, 하나님의 영이 확실히 땅에 왔으며, 영이 육신으로 왔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성령으로 잉태된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사역을 통해 영이 육신에 실체화되었고, ‘도’가 ‘육신’ 되었고,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났음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따라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란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너는 오늘날의 말씀이 하나님이고, 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말씀이 육신 되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이것이 너의 가장 좋은 간증이다. 이러면 네가 단순히 성육신 하나님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가고 있는 길이 생명의 도, 진리의 도임을 깨달았기에 진정으로 그에 대해 알게 되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예수가 한 단계 사역을 했지만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는 본질적 의미만 이루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의 영은 육신과 함께하므로 둘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즉, 육신을 입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므로 성육신한 예수가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이라는 증거가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번 단계의 사역은 ‘말씀이 육신 되었다’는 말의 함의를 이룬 것이다. 또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의 의미와 더 깊게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까지도 확신하게 만든다. 즉, 천지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며, 그의 말씀은 그와 함께하였으므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그의 말씀의 위력과 권병을 한층 더 명확하게 드러내어 그의 모든 말씀을 보게 한다. 즉, 그의 모든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하는 사역이다. 너는 이런 것을 밝히 알아야 한다. 육신을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육신과 말씀, 육신과 도의 관계를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마땅히 해야 할 간증이자 모든 이가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두 번째로 성육신하여 하는 사역이자 마지막 성육신이다. 즉, 말씀이 육신 된 의의를 완전케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모든 사역을 철저하게 하여 선포하고, 하나님이 육신에 있는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말씀이 육신 된 의의를 알아야 한다. 열심히 뛰어다니거나 다른 외적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육신 하나님 앞에 완전히 복종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그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것이 네가 해야 할 것이자 어김없이 지켜야 할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간증은 네가 온전케 될 수 있는지를 간증하는 것이다. 즉, 네가 성육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이해한 다음, 하나님을 알고, 확신하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살아 냄으로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베드로의 풍격’, ‘욥의 믿음’, 이런 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기까지 순종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어 정복되고 온전케 된 사람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종적인 간증이고, 궁극적으로 온전케 될 사람이 해야 할 간증이다. 이는 사람이 두 차례에 거쳐 해야 할 간증으로, 이 두 단계는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오늘날 너에게 요구하는 간증은 세상 사람이나 어느 특정 인물 앞에서 간증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요구한 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만족스러워할 수 있는지, 내가 너희 각 사람에게 요구한 기준에 완전히 합치할 수 있는지에 근거한다. 이는 너희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0)

어느 정도 고통과 단속을 받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하다. 너희를 느슨하게 하면 망가지게 될 것인데, 어찌 보호를 받을 수 있겠느냐? 지금 너희들은 형벌과 심판, 저주를 받고, 많은 고난을 받음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일찌감치 타락했을 것이다. 내가 일부러 너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본성은 쉽사리 바뀌지 않으므로 이렇게 해야만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지금 너희는 바울의 양심과 이성은커녕 바울처럼 스스로를 정확히 아는 능력조차 없다. 너희에게는 늘 압력을 가하고, 늘 형벌하고 심판해야 너희의 영을 일깨울 수 있다. 너희의 생명에 가장 유익한 것은 역시 형벌과 심판이다. 필요시 사실로 형벌을 가해야 너희가 완전히 수긍하게 된다. 너희는 본성상 형벌과 저주 없이는 머리를 숙이거나 수긍하려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사실 없이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너희의 인품은 천박하고 서푼어치도 안 된다! 형벌과 심판 없이는 너희를 정복하거나 너희의 불의와 불순종을 억누르기 어렵다. 너희의 옛 성품은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너희를 보좌에 올려 놓는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어디에 서야 할지를 모를 것이다. 너희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모르는데 어찌 창조주를 알 수 있겠느냐? 오늘날 시의적절하게 이루어진 형벌과 저주가 없었다면 일찌감치 너희의 마지막 날이 임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너희의 운명은 몹시 위태롭지 않았겠느냐? 형벌과 심판이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너희가 얼마나 교만을 부리고 타락했을지 모른다. 이러한 형벌과 심판이 너희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왔고, 너희의 삶을 유지해 왔다. 지금도 너희의 ‘아비’처럼 너희를 ‘교육’한다면 너희가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너희는 자제력과 자기 반성력이 하나도 없다. 너희 같은 사람들이 따르고, 순종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다. 너희는 오늘날의 형벌과 심판을 더 잘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1)

생명을 갖추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인생에 대한 생각, 특히 하나님의 말세 사역에 대한 인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을 추구하는 한 이런 것들을 갖춰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는 반드시 자신의 실제 상태와 결부시켜야 한다. 즉, 실제 체험 속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실행의 길을 찾고 자신의 그릇된 마음가짐과 관념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네가 늘 이런 면에서 노력하고 이런 일들에 마음을 쏟으면, 실행의 길이 생길 것이고 공허한 느낌이 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라야 자신의 생명에 부담을 갖고 있는 사람이자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핵심적인 것들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생명에 무책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핵심을 잡지 못하면 실행의 길도 없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도 자신의 상태에 결부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저 자신의 상태와 연관시켰습니다. 또한, 제가 패괴되었고 자질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데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표면적인 것만 조금 알게 된 것이다. 육적인 즐김과 독선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지, 이런 것들에 어떻게 진입하고 어떻게 자신의 자질을 높여야 할지, 어느 부분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등등 실제에 속하는 것들을 너는 전혀 모르고 있다. 단지 일부 외적인 것들만 잡아내고 자신이 확실히 패괴되었다는 것만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을 만나 자신의 패괴에 대해 말을 하면, 자신을 인식한 것처럼 보이고 생명에 대해 부담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너의 패괴 성품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 이는 네가 실행의 길을 찾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만약 네가 교회를 이끄는 자라면 너는 형제자매들의 상태를 짚어 주고 일깨워 줄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당신들은 정말 패역하네요. 뒤처졌어요!”라고만 말하면 되겠느냐? 도대체 어떤 면에서 패역한지, 어떤 면에서 뒤처졌는지, 구체적인 모습을 말해 줘야 한다. 즉, 그들의 패역한 상태와 행위, 사탄 성품을 지적해 그들이 진심으로 인정하게 해야 한다. 사실을 말하고, 예를 들어 문제를 설명하며,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러한 패역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고, 실행의 길을 가리켜 줄 수 있어야 설득력이 생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다른 이를 이끌 수 있으며,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7>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2)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너의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가 어떻게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하며 변화시키는지, 어떻게 사람을 진리의 실제 속으로 이끌어 가는지, 따라서 그에 의해 정복되고 온전케 되며 구원받게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증거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사역과 너의 모든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한 사역만이 그를 대변할 수 있고, 그의 사역만이 그의 모든 것을 명확히 공개할 수 있으며, 그의 사역만이 그를 증거할 수 있다. 그의 사역과 음성은 직접적으로 영을 대변한다. 그가 한 사역은 영이 한 사역이며, 그가 한 말씀은 영이 한 말씀이다. 그저 말씀으로 된 육신을 통해 선포된 것일 뿐, 사실상 그것은 영의 선포이다. 그가 한 사역과 말씀은 그의 본질을 대변한다. 만약 육신을 입고 사람들 가운데 온 하나님이 말씀도, 사역도 하지 않으면서 너희에게 그의 실제와 정상적인 면, 전능을 인식하라고 한다면 알 수 있겠느냐? 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그의 육신의 성질이 어떤지 알 수 있겠느냐? 너희가 그의 사역을 일일이 체험했기에 그를 증거하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어떤 체험도 하지 못했다면 그런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을 증거할 때는 정상 인성의 겉모습은 물론이요, 그가 한 사역과 인도한 길까지 증거해야 한다. 네가 그에게 어떻게 정복되었는지, 어떤 면에서 온전케 되었는지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에 관해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어디를 가든 “땅에 오신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로 실제적입니다! 그분은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으시며, 어떤 이적과 기사도 나타내지 않고 우리를 얻으셨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다른 사람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건 대체 어떤 것입니까? 이적과 기사 없이도 당신을 정복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 질문에 “어떤 이적과 기사도 없이 말씀만으로 우리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역으로 우리를 정복하신 거죠.”라고 대답한다면, 결국 본질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구체적인 내용도 말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성육신한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했다는 것은 그의 신성에서 나온 말씀으로 정복했다는 것이다. 이는 인성으로 이를 수 없는 일이며, 평범한 사람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상인 가운데 최고의 자질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불가능하다. 그의 신성은 어떤 피조물보다도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에게는 비범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창조주는 피조물보다 높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창조주보다 높을 수 없다. 만약 네가 그보다 높다면 그는 너를 정복할 수 없다. 그가 너보다 높아야 너를 정복할 수 있다. 전 인류를 정복할 수 있는 이는 창조주뿐이다. 그 외에는 누구도 이 사역을 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증거이며, 네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측면의 증거이다. 네가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형벌, 심판, 연단, 시련, 좌절, 환난을 겪고 정복되어 앞날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속셈, 그리고 모든 육체적 이익을 내려놓는다면, 너의 마음이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정복된 것이다. 너의 생명이 그가 요구한 정도까지 성장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네가 이러한 것들을 모두 깨닫고 그가 한 일을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증거이다. 이는 실제적인 증거인 것이다! 그가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러 온 것은 사람을 정복하기 위함이지만, 그는 또한 사역을 끝마치고 시대를 끝내며 마무리 사역을 하는 자이다. 그는 모든 시대를 끝내고 전 인류를 구원한다. 또한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철저히 구원하여 그의 피조물인 인류를 완전히 얻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네가 해야 할 증거이다. 너는 하나님의 많은 사역을 직접 보고 직접 체험했음에도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못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복음을 확장할 때가 되면 너는 자신의 인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얻은 것을 전부 증거함으로써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번 단계 사역의 의의는 대체 무엇인지, 어떤 성과를 내려고 하는지, 사람에게서 이뤄진 것은 얼마나 되는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성육신한 하나님이 땅에서 행한 모든 사역을 너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완벽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가 행한 사역의 의의와 내용, 본질, 그리고 대변하는 성품과 사역 원칙, 이 다섯 가지 측면을 전부 밝히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진실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너희에 대한 내 요구는 그다지 크지 않다. 진심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의 증인이 되겠다는 결심이 서 있다면, 너는 그가 증오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너 자신이 그의 사역을 얼마나 체험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역을 통해 그의 성품을 알고, 그의 뜻과 인류에 대한 그의 요구를 알아야 한다. 이것으로써 그를 증거하고, 너의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네가 “저희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심판과 형벌은 지극히 혹독하며, 그의 말씀은 정말로 엄합니다. 정말 공의롭고 위엄 있어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라고만 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 줄 수 있겠느냐? 사람들에게서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너는 이 심판과 형벌의 사역이 너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참으로 인식했느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네 패역과 패괴를 드러내고 있지 않느냐? 네 안에 있는 더럽고 패괴된 것들을 정결케 하고 없애 버릴 수 있지 않느냐? 만약 심판과 형벌이 없다면 너는 어떻게 되겠느냐? 너는 사탄이 너를 매우 심하게 패괴시켰다는 것을 정녕 깨달았느냐? 이러한 것들이 전부 현재 너희가 갖추고 깨달아야 하는 것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7>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3)

지금 너희가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한 가지는 사역의 이상에 관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너의 실행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생명이 자라기를 바라면서 이상이 없다면 너에게는 토대가 없는 것이다. 실행 방법만 있을 뿐, 이상이 전혀 없고 전체 경륜에 관한 사역을 조금도 모른다면 너 같은 사람은 쓸모없는 자다. 이상에 관한 진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실행에 관한 진리는 이상을 알고 난 뒤에 적당한 실행 방법을 찾고, 말씀대로 실행하면서 네 상태에 비추어 진입해야 한다. 이상은 토대다. 이를 가볍게 여기면 너는 끝까지 따를 수 없고, 아무리 체험해도 그 체험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넘어지고 실패해서 성공하지 못한다! 큰 이상이 토대가 되지 못한 사람은 실패만 있을 뿐 성공이 없으며, 굳게 설 수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너에게 이상이 없다면 네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이겠느냐? 오늘날의 사역에서 네가 이상을 갖추지 않으면 절대로 온전케 될 수 없다. 네가 믿는 이는 누구냐? 너는 어째서 그를 믿느냐? 너는 어째서 그를 따르느냐? 그저 장난으로 믿는 것이냐? 네 목숨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것이냐? 오늘날의 하나님이 바로 가장 큰 이상인데, 너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또 얼마나 깨달았느냐? 오늘날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토대가 탄탄해졌느냐? 그렇게 흐리멍덩하게 따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이 흐려진 것을 기회로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쉽겠느냐? 너는 오늘날의 하나님이 하는 말씀에 대해 네 관념을 얼마나 내려놓았느냐? 오늘날의 하나님에 대한 이상을 갖추었느냐? 오늘날의 하나님에 대한 네 인식은 어디에 있느냐? 너는 항상 따르면 바로 얻을 수 있고, 보면 곧 얻을 수 있으며, 아무도 너를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 그렇게 쉬우리라 생각하지 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그를 알고 그의 사역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받고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에게 온전케 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네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이상이다. 항상 은혜를 누리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누리게 하고 은혜를 베풀기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목숨을 버리고 따를 수 없다면,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수 없다면, 결단코 끝까지 따르지 못한다! 이상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만약 어느 날 네가 화를 입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계속 따를 수 있겠느냐? 끝까지 따를 수 있을지 없을지 쉽게 말하지 말고 우선 지금이 어떤 때인지 눈을 크게 뜨고 보아라. 너희가 지금은 모두 성전의 기둥인 것 같아도 그때가 되면 너희, 이 많은 기둥은 벌레에 갉아먹힐 것이며, 결국에는 성전마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지금 너희에게는 이상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저 너희 자신의 좁은 세상만 중요하게 생각할 뿐, 어떻게 추구하는 것이 가장 온당하고 적합한지 모른다. 너희는 오늘날 사역의 이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한 것에 마음 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가장 낯선 곳에 데려다 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보았느냐? 내가 너희의 전부를 빼앗아 가는 날, 너희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있겠느냐? 지금의 열의가 그때까지 유지되겠느냐? 너희의 믿음이 또다시 나타나겠느냐? 너희는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이라는 이 가장 큰 이상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다. 너희가 세상 사람들과 거룩히 구별된다고 해서 하나님 집에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 가운데서 사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떤 운동을 펼치려고 인간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해 왔다. 너희 중에는 오늘날의 사역이 하늘의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행하는 사역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오늘날의 사역은 너희를 출중한 인재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인생의 의의와 인류의 종착지에 대해 알게 하고 하나님과 그의 모든 것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너는 자신이 창조주의 손안에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네가 무엇을 깨달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이 네가 깨달아야 할 진리 아니겠느냐? 네가 알아야 할 이상 아니겠느냐?

사람에게 이상이 있으면 토대가 생기고, 토대 위에서 실행하면 진입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렇게 진입에 토대가 생기면 걱정할 필요 없이 아주 쉽게 진입할 수 있다. 이상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니 너희는 이러한 측면의 것들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의 진리를 갖추지 않고 실행 방법만 안다면 많이 부족하다. 너희 중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소홀히 여기며 이 부분의 진리를 글귀 듣듯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지금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 있어도 인내심을 가지고 구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조금씩 갖추어라. 영적인 도리라도 조금 깨달을 수 있다면 소홀히 여기는 것보다는 낫고,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도 낫다. 이는 너의 진입에 도움이 되고 너의 의심을 없앨 수 있으므로 관념을 갖고 있는 것보다 낫다. 네가 이런 이상을 토대로 삼으면 훨씬 좋아지고 근심이 모두 사라져 당당하게 진입할 수 있는데, 항상 의심하면서 흐리멍덩하게 따를 필요가 있겠느냐?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 아니겠느냐? 당당하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으냐! 굳이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찰 필요가 있겠느냐? 그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냐? 여호와의 사역과 예수의 사역, 그리고 이번 단계 사역에 대해 모두 알게 되면 토대가 생긴다. 너는 지금 아주 단순하게 상상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때 가서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시면 저는 무슨 말씀이든 다 교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깨닫지 못한 것은 성령께서 저를 깨우쳐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 네가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때 가서 자유자재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너는 지금 네가 갖춘 것이 많아서 종교계 인사와 최고 이론가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심지어 그들의 말을 반박해 굴복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럴 수 있겠느냐? 너의 그 얄팍한 체험으로 어떤 인식을 말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갖추고 진리를 위해 싸우며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은 네가 생각하듯 그렇게 하나님이 하기만 하면 전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때 어떤 문제가 너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러면 너는 아연실색할 것이다. 핵심은 네가 이 단계 사역을 과연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적대 세력을 이길 수 없고 종교 세력과도 싸워 이길 수 없다면, 너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오늘날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직접 들었음에도 결국 증거할 수 없다면 네가 낯을 들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 누구에게 면목이 서겠느냐? 지금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라. 앞으로 행하게 될 사역은 네 상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진리를 위한 싸움은 그렇게 쉽지 않고 또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다. 지금은 갖추어야 한다. 지금 진리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성령도 초자연적인 사역을 하지 않을 때 너는 어쩔 줄 모르게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흐리멍덩하게 따르지 말고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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