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9)

최근에 교제한 주제는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를 다루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인성에 관한 더욱 구체적인 문제들과 사람의 생활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지난번 예배 시간에는 자질 방면에 관한 주제를 교제했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을 어떻게 분별하는지에 대해서도 교제했다. 자질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교제를 마쳤으니 앞으로 이런 내용을 근거로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 판단하면 된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성품, 이 세 가지 방면의 내용을 교제할 때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이 보이는 몇 가지 모습과 표출에 대해 교제하여 그것이 선천적인 조건인지, 인성인지, 아니면 패괴 성품인지 판단해 보았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방면을 교제함으로써 인류라는 피조물의 기본적인 구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지 않았느냐? (예전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 생활 속에서 표출하는 이 세 가지 방면의 모습을 교제하는 이유는 피조된 인류가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어느 인종들 사이에서 살고 어느 국가에서 살든, 혹은 어느 시기에 어떤 사회적 환경과 배경에서 살든, 외모가 어떻든 상관없이 피조된 인류라면 모두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리 말해, 패괴된 인류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은 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피조된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을 갖추고 있다. 물론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은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다. 인성 가운데 일부분은 선천적인 조건에 영향받고 일부분은 가정과 성장 배경, 사회 환경, 나아가 사탄의 교육에 물들고 영향받는다. 그런데 패괴 성품은 사탄에게 미혹되고 패괴되어 생겨난 사탄의 성품이자 사탄의 본성으로, 이 패괴된 본성 중 일부는 가정에서 비롯되고 일부는 사회에서 비롯되며 일부는 사람이 여러 환경에서 영향받고 물들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렇게 보면 그 어떤 피조된 사람도 사실은 그다지 신비롭지 않다. 왜냐하면 모두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는 것은 사실 쉽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고 베푼 선천적인 조건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 그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는지를 분별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 어떤지를 결정한다. 이렇게 분별하면 아주 명확하다. 이런 것들을 근거로 한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근거와 평가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선천적인 조건의 일부 구체적인 모습을 열거했는데, 그런 것들은 패괴 성품과는 관련이 없다. 선천적인 조건은 사람이 의지해 생존하는 근본이자 피조된 인류가 갖추어야 하는 일부 조건이다. 태어난 시간, 환경, 장소 등 출생에 관한 일부 조건이든, 아니면 외모, 자질, 특기, 본능, 흥미와 기호, 성격 등의 방면이든 모두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이다. 이런 선천적인 조건은 사람을 패괴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안에 패괴 성품도 섞여 있지 않다. 종합해 보자면 선천적인 조건은 생존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피조된 인류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일부 기본 조건이다. 인성은 바로 선천적인 조건을 갖춘 육체가 표출해 내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관한 것들을 살아 내는 것이다. 반면 패괴 성품은 단순한데, 선천적인 조건과 인성의 육체를 갖춘 생명이 사탄의 패괴를 거치면서 생겨난다. 이는 다소 추상적이지 않으냐? 요컨대 피조된 인류는 바로 패괴 성품에 의해 주도되고 기본적인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춘 피조물이다. 이런 피조물은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여러 방면의 선천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든 인류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이 중 선천적인 조건과 패괴 성품은 어느 정도 이해하기 쉽지만 인성은 상대적으로 추상적일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인성은 피조된 인류가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성으로, 이런 고유한 속성을 가진 피조물은 양심과 이성, 인품, 나아가 시비를 가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고유한 속성이 바로 인성이다. 이 인성에는 당연히 언어 표현 능력, 시비를 분별하는 능력, 이해력, 새로운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 창조주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어떤 일도 처리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이게 바로 인성이다. 인성을 가장 간단히 이해하자면, 바로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피조된 인류만의 고유한 속성이다. 이 속성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바로 양심과 이성이다. 이것이 가장 간단하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일부 세부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성 안에 갖추어야 하는 일부 인격과 인품,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대한 변별,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선택과 실행 등이다. 기본적으로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방면에서 사람은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인식해야 한다. 너희는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예전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처음 접해 보니 이해할 수 있겠느냐? 닿을 수 있겠느냐?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다루고 있는 이 주제가 너무 심오하고 다소 추상적이며 마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없느냐? 우리는 최근에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방면의 일부 구체적인 모습을 교제했으니 방금 이야기한 것들이 너희에게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 가지 방면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이 세 가지 방면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인성은 한 사람이 기본적이고 선천적인 조건을 갖춘 것을 토대로 표출해 내는 인격과 품질, 양심과 이성이다. 반면 패괴 성품은 선천적인 조건을 통해 인성 안에서 살아 내는 것으로,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생명에 의해 주도되는 사람이 살아내는 여러 가지 성품이다. 이 경우, 사람이 어떤 선천적인 조건을 갖추었든 그것은 단지 가장 기본적인 껍데기일 뿐이고 진정으로 사람의 본질을 주도할 수 있는 생명은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패괴 성품이다. 즉, 한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별하려면 그가 표출해 내는 성품이 무엇인지 봐야 한다. 표출해 내는 성품이 교만함, 강퍅함, 간사함, 사악함, 흉악함과 같은 패괴 성품이라면 인품이 선하든 악하든 그 사람의 본질은 사탄에 속한다. 그의 생명은 사탄의 패괴 성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속성이 무엇인지는 내면에 지니고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지 선천적인 조건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지 않다. 만약 그의 생명이 사탄의 패괴 성품이라면 선천적인 조건인 겉모습이 아무리 존귀하고 위대해 보여도 그의 본질은 사탄에 속하고 그는 패괴된 인류의 일원일 뿐이다. 반면 한 사람의 생명이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다면 선천적인 조건인 겉모습이 아무리 평범하고 정상적이어 보여도, 아무리 남에게 무시당해도, 심지어 겉보기에 인성의 연약함과 부족, 결함을 좀 가지고 있어도 그는 결국 구원받는 인류이고, 그의 본질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렇게 본질이 변한다. 본질이 변하면 귀속도 변하여 그는 진리에 속하고 하나님에게 속하게 된다. 따라서 한 사람의 귀속과 본질, 최종적인 결말이 무엇인지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선천적인 조건이 아니다. 물론 오로지 인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만약 그의 생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패괴 성품을 생명으로 삼는다면 그는 사탄에 속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사탄에 귀속된다. 반면 한 사람이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귀속되며 하나님이 인류에게 예비한 아름다운 종착지로 돌아간다. 현재 사람에게 있는 여러 가지 모습과 여러 방면의 본질로 보면 사람은 현재 무엇으로 귀속되느냐? 사람이 진리를 생명의 생명으로 삼느냐? (아닙니다.) 그럼 사람의 본질은 대체 무엇에 달려 있느냐? (사람이 무엇을 생명으로 삼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 네 내면의 생명이 바로 네 본질이다. 네 내면의 생명이 변하여 패괴 성품을 생명으로 삼지 않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다면 네 본질은 하나님과 진리에 속하는 본질이 된다. 물론 사람의 이런 속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여전히 사람일 뿐이고 사람의 속성도 계속 피조된 인류에 속한다. 그러나 네 생명이 변화한다면 네 귀속에도 변화가 생긴다. 결국 선천적인 조건이 바로 피조된 인류를 구성하는 일부 기본적인 조건이다. 즉, 네가 피조된 인류라고 불리기만 한다면 네게는 반드시 이런 선천적인 조건이 있다. 이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성은 사람이 선천적인 조건하에서 살아가며 표출하고 살아 내는 정상적인 인성이다. 패괴 성품은 패괴 인류가 가진 고유한, 선천적인 조건과 인성이라는 껍데기에 가려져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이다. 이 세 가지 방면의 연결과 구분, 그리고 그것들이 각각 피조된 인류에게서 맡는 역할이나 일으키는 작용은 이렇다. 우리는 예전에 사람이 표출하는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방면과 관련된 모습들을 교제했다. 이 세 가지 방면과 관련된 내용은 우리가 교제했던 것들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오늘도 계속해서 이 주제를 교제하겠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모습 분별하기

말을 더듬고 어눌하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여러 표출에 대해 지난번에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소심한 것과 대담한 것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 내용은 전부 교제했으니 이제 말을 더듬고 어눌한 것을 살펴보자. 이는 어느 방면의 문제이냐?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이는 선천적인 조건이자 신체에 있는 한 방면의 결함이다. 물론 말더듬의 형태는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한 글자를 길게 늘여 발음하고, 어떤 사람은 한 글자를 반복해서 말하느라 한참 동안 말 한 마디도 온전히 내뱉지 못한다. 어쨌든 이는 선천적인 조건이고, 당연히 신체에 있는 한 방면의 결함이기도 하다. 이것이 패괴 성품과 관련 있느냐? (관련 없습니다.) 패괴 성품과는 관련이 없다. 만약 누가 “말을 더듬는 걸 보니 당신은 꿍꿍이속이 많군요!”라고 하거나 “당신은 말도 더듬으면서 어쩜 그렇게 교만하죠?”라고 한다면 그런 말이 정확하겠느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말을 더듬는 결함이나 흠은 사람이 가진 특정 방면의 패괴 성품과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말을 더듬는 것은 선천적인 조건이자 사람의 신체에 있는 한 방면의 결함일 뿐이고, 분명 사람의 패괴 성품과는 관련이 없다. 사람의 패괴 성품과는 그 어떤 연관도 없다. 똑같이 말을 더듬지만 상황이 다른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는 말이 어눌하지 않은데 질문만 하면 우물쭈물한다. 한참 걸려 한 마디를 해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는 늘 말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하지 않고 항상 네게 무슨 뜻인지 추측하도록 하며 네가 추측한 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웃어넘긴다. 어쨌든 문제에 직접 대답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그에게 “어디 있다 왔어요?”라고 물으면 그는 “저… 저는… 그냥 좀 돌아다니다가…”라고 말해서 대답을 듣고 나서도 그가 어디에 있다 왔는지 알 수 없다. 혹은 “그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 한번 평가해 볼래요?”라고 물으면 그는 “그는… 자질이요… 다들… 우리는… 모두… 딱히 잘… 모르겠네요.”라고 답한다. 그는 왜 말 한 마디도 이렇게 띄엄띄엄 하느냐? 이것이 말을 더듬고 어눌한 것이냐?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럼 그는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말을 더듬고 어눌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느냐? (그는 패괴 성품에 지배된 것입니다.) 이는 분명 한 가지 성품의 표출이다. 즉, 그는 일을 전달하거나 처리할 때 한 가지 성품에 지배되는 것이다. 그 성품은 그의 생명의 일부분으로서 그의 말과 행동을 지배해 한 가지 목적을 이루려 한다. 그 목적은 무엇이냐? 그는 실상을 감추어 네게 알려 주지 않으려는 것이고, 일에 대해 명확히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왜 그렇게 하겠느냐? 실정을 말하면 자신이 그에 따른 결과를 감당해야 하거나 남에게 미움을 사거나 그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과를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 네게 실상을 알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패괴 성품에 지배받는 상태에서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일종의 방식이자 스타일이다. 그가 이렇게 하도록 지배하는 이런 생명이 그의 본성을 대표한다. 이는 그가 진리를 조금도 갖추지 않았고 진리 원칙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럼 진리 원칙대로 말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 5:37)라고 말씀한 것처럼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 그가 이렇게 하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느냐? 옳아도 옳다고 하지 않고 아니어도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 그는 말을 얼버무리고, 간사하고 사악한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여 자신을 지키려는 목적을 이룬다. 사탄이 그에게 가르치고 주입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전한다. 이는 분명 사탄의 패괴 성품이다. 이는 단순히 인성 방면의 표출이 아니라 사탄의 패괴 성품에 지배받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 처리 방식의 표출이다.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

이어서 다룰 또 다른 모습은 바로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고 평범한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생활 방식을 선택하든 목적은 결국 자극을 얻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겠느냐? 우선, 이것이 선천적인 조건 중 흥미와 기호이겠느냐? (그렇습니다.) 정말 그러냐? 그런지 아닌지 잘 생각해 보아라.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보아 정상이냐? (비정상입니다.) 그럼 선천적인 조건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적절하지 않다. 이 모습은 어느 방면의 문제에 해당하느냐? 만약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이 패괴 성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패괴 성품이냐? 교만함이냐, 간사함이냐, 아니면 흉악함이냐? (모두 아닙니다.) 이는 어느 방면의 패괴 성품과도 관련이 없다. 그럼 이는 무슨 문제이냐? (인성의 문제입니다.) 이는 인성에 있는 어느 방면의 문제이냐?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처신이 올바르지 않고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며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고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분수를 모르는 것은 정상 인성이 없는 것이다. 이는 양심과는 관련이 없고 주로 정상 인성의 이성이 없는 것이다. 정직하고 반듯하게 분수를 지키면서 한 가지 일을 맡거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지도 못하며 생각이 성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처신하는 스타일이나 행동 방식도 미성숙하다. 이는 최소한 인성에 있는 한 방면의 결함이다. 물론 이는 인품의 문제라고까지는 할 수 없고 처신하고 행동하는 일종의 태도와 관련된다. 신선하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며 무슨 일을 하든 끈기가 없어서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데다가 분수를 모르고 올바르지 않다. 늘 자극을 찾으며 새로운 것을 하려 한다. 이런 문제는 인성의 결함에 해당한다. 자극을 좋아하는 이런 부류는 정상 인성의 이성이 부족하고 어른이 마땅히 담당해야 하는 책임과 사역을 잘 담당하지 못한다. 어떤 사역을 하든 시간이 흘러 신선함이 사라지면 싫증을 내고 의욕을 잃는다. 그저 신선하고 자극적인 느낌만 찾을 뿐, 자극이 없으면 평범하다고 느끼고 심지어 정신세계가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느낌을 받으면 속으로 분수를 모르게 되고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만 찾는다. 늘 독특한 일들만 하려 하고, 어떤 사역을 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따분하고 재미없다고 느끼면 더이상 하려 하지 않는다. 설사 해야 하는 사역이거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사역이라 하더라도 지속하지 못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 중에는 늘 마약을 복용하는 자들이 많다. 이유가 무엇이든 마약을 복용함으로써 자극적인 느낌을 받는 것을 즐기고, 정상인을 넘어서는 비이성적인 느낌을 찾는다.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약을 복용하여 자극을 찾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처신할 때 정상인의 이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속으로 늘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느낌을 추구하여 자신의 생활 방식을 선택하는데, 이는 몹시 위험하다. 이런 부류는 흔히 겉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분별하지 않거나 이런 부류의 본질과 이런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너는 ‘이 사람은 단지 성품이 불안정해서 서른, 마흔이 되었는데도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이런 부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자극을 찾는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어른스러운 생각과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어른스러운 일 처리 방식과 태도도 갖추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런 부류는 아주 골치 아프다. 그는 인성이 나쁘지 않고 인품도 그다지 악랄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인성에 이런 방면의 결함이 있기 때문에 큰 사역, 특히 일부 중요한 사역은 능히 감당하지 못한다. 그에게 진리를 교제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다 이해했지만 실천을 못 하는 거예요.” 그는 정직하고 반듯하게, 분수를 지켜가며 정상인의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생활하거나 사역하지 못하는 데다가 속으로 늘 분수를 모른다.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주 골치 아픈 사람이다.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민감하다

이어서, 민감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구분하자면 우선 배제법을 쓰면 된다. 민감한 것이 선천적인 조건이냐? (아닙니다.) 그럼 패괴 성품이냐?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민감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패괴 성품의 표출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민감함이란 특정 음식을 먹은 뒤 가려움증이 생기거나 특정 냄새를 맡은 뒤 재채기를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혹은 꽃가루 알레르기나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것, 어떤 방부제나 화학 약품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 등 육체적인 민감함을 뜻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민감함은 체질이 민감해서 인체에 해로운 외부의 냄새나 물질 같은 것들에 쉽게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육체적인 민감함이다. 육체적인 민감함은 그저 선천적인 조건 중 본능에 해당하며 선천적인 체질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민감함은 이런 것이 아니다. 선천적인 조건은 여기에서 배제된다. 또한, 이런 민감함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패괴 성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즉, 구체적으로 패괴 성품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감함’은 무슨 문제겠느냐? (인성의 문제입니다.) 이는 인성의 장점이냐, 결점이냐? (인성의 결점입니다.) 이는 분명 인성의 결점이다. 여전히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몹시 어리석은 것이다. 민감한 것이 바람직하냐? 인성의 결점이라면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민감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자기 말로 한번 얘기해 보아라. (신경이 과민한 것입니다.) 신경이 과민한 것은 신경 질환 아니냐? 평범한 사람도 신경이 과민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신경은 사람의 근육 조직 안에 있어서 외부의 공기나 먼지 등의 물질과 접촉할 수 없는데 어떻게 과민해질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늘 민감하다면 이는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또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신경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신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생각에 이끌린다는 것이고, 생각에 이끌리는 것은 인성 측면의 문제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눈짓 하나, 말 한마디, 단어 하나, 혹은 마주한 환경이나 한 가지 일에 대해서 과도하게 해석하고 자신과 대조한 후 긴장과 억압, 괴로움, 의기소침 등의 감정에 매몰된다. 심지어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기도 하며, 더 심한 경우 복수하고 적대시하는 등의 부정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이런 모습은 민감함이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라는 것을 충분한 증명해 준다. 결함이란, 그 부분에 문제가 있다면 비정상적인 인성이 표출된다는 뜻이다. 민감함이 생각 때문이든 신경 때문이든, 이성 때문이든 아니면 어느 측면의 구체적인 관념과 관점 때문이든 이는 결국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다. 민감함으로 인해 표출되는 인성은 비정상적이고 정상 인성의 이성과 양심에 부합하지 않으며, 정상 인성의 사고방식이 만들어 내는 사상과 관점, 혹은 인간관계에서 가져야 하는 태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결국 인성이 표출해 내는 이 본질은 신경이 비정상적인 것에 해당한다. 남이 무심코 힐끗 보기만 해도 신경이 과민해지고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여 기분 나빠하며 속상해서 울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말해 보아라. 이는 신경이 비정상적인 것 아니겠느냐? 정신병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지 않겠느냐? (정확합니다.) 이 측면에서 드러나는 인성의 모습을 정확히 말하면 ‘정신병’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괜히 며칠 동안 엉엉 울고 이 일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데, 이는 인성의 결함이다. 주변에 이런 부류가 나타나면 몹시 답답하고 자유롭지 못하다. 언제 화를 입거나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지 알 수 없어서 그의 앞에서는 단단히 말조심을 해야 하고 단어를 선택할 때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이 말을 하면 내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내가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몇 마디 하면 내게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가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이런 부류는 정신이 이상해. 정말 골치 아프다!’ 그와 어울릴 때는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들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 그는 항상 올바르게 대하지 못한다. 또 인성이 매우 비정상적이라서 이런 부류와 오래 어울리다 보면 멀리하고 피하고 싶어지며, 다시는 그들과 접촉하지 않고 싶어진다. 이런 부류는 정상 인성처럼 사고하지 못하는 정신 이상자이다. 민감함이란 이런 모습을 가리키며, 이는 인성의 결함이다. 비록 인성의 결함일 뿐이지만 패괴 성품보다 간단하지는 않다. 인성에 결함과 문제가 있으면 남과 어울릴 때 수많은 골칫거리를 만들기 때문에 어울리기도 어렵고 바로잡아 주기도 어렵다. 이는 인성 한 측면의 모습이다.

편집적이다

이번에는 편집적인 모습에 대해 말해 보자. 이는 무슨 문제이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우선 선천적인 조건을 배제하자. 편집적인 것은 분명 선천적인 조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 것도 아니다. 이 밖에, 편집적인 것은 패괴 성품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인성의 결함이다. 편집적인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터무니없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으냐? (관련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그럼 편집적인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예시를 들어 보아라. 어떤 부류가 편집적으로 굴기 쉬우냐?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편집적인 모습이냐? (편집적인 사람은 일부 사람과 일, 사물을 맞닥뜨렸을 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 집착하느냐? (어떤 사람은 문제점을 지적하면 계속 이유를 들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말 한마디나 단어 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을 변명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책망과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늘 자기 주장만 하며 해명하고 자기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이 책망 훈계하거나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자신의 이유와 핑계만 강조하며 자기 마음가짐이 옳다고 할 뿐, 자신의 잘못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집착하는 모습 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제멋대로 굴다가 교체되어도 반성하지는 않고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하나님은 저를 좋아하시지 않고, 저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니 어쩔 수 없죠. 제가 계속 노력해도 소용없잖아요.” 누가 “그렇게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면 안 돼요. 당신한테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질이 있으니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요!”라며 타이르면 그는 “좋은 종착지를 얻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예정해 놓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아무리 애쓰고 잘해도 소용없다고요.”라고 말한다. 그는 속으로 늘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과 겨루며 남이 뭐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네가 하는 말이 아무리 그의 내적 상태에 부합하고 그가 돌아서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다고 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한다. 이는 편집적인 모습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오로지 이렇게 확신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 내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은 내게 은총을 베풀지 않으신다고. 난 방치됐어. 나는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 계속 노력해도 소용없으니 이행할 수 있는 본분이나 좀 이행하자. 내게 봉사자라고 해도 받아들이겠어. 그냥 따라가는 거지, 뭐!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으면 난 떠나지 않을 거야.’ 사실 자질과 여러 조건을 따져 보면 그가 이 정도로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래도 가치 있는 일을 좀 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편집적이기 때문에 계속 노력하지 않고, 돌아서거나 회개하지도 않은 채 속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모두 크고 작은 빛 비춤과 깨우침을 얻고 수시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데, 자신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니 속으로 하나님에게 원한을 품는다. 이는 편집적인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집에서 발탁하고 양성하는 사람들은 다들 말솜씨가 좋고 은사와 특기가 있는 데다가 자신을 뽐낼 줄 알아. 나처럼 스스로를 뽐낼 줄 모르고 말재주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눈에 띄지 않지. 하나님도 기회를 주지 않으시니, 재주가 있어도 쓸모없고, 자질과 이해 능력이 있어도 소용없어. 뒷전으로 밀릴 뿐이라고. 특히 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외모도 평범한 데다가 꾸밀 줄도 몰라서 어디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잖아. 이번 생은 결국 이렇게 끝날 거야. 세상에서든 하나님 집에서든 지위를 얻지 못하는구나.’ 이는 일종의 편집적인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이제 무엇이 편집적인 것인지 명확히 말할 수 있겠느냐? (완고하게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고지식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고지식하게 주장한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반드시 편집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고지식하게 주장하는 것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가 고지식하게 주장하는 것이 올바르다면 그나마 괜찮다. 예를 들어, 고지식하게 “사람은 언제나 양심을 지켜야 해요.”라고 주장한다면, 이런 것은 그래도 나름 긍정적이다. 그러나 고지식하게 주장하는 것이 올바르지도 않고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데 끝끝내 붙들고 놓지 않으며 남이 뭐라고 해도 자신의 사상과 관점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는 편집적인 것이다. 편집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치우친 인식법으로, 우매하고 완고하게 하나의 치우친 사상과 관점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성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는 더더욱 부합하지 않으며 당연히 진리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편집적이라는 것은 인성의 혈기와 감정에 지배된 상태에서 계속 치우친 사상과 관점을 고수한다는 뜻이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편집적인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면, 자기가 그 일에서 잘못했으니 회개해야 한다고, 과오를 저질렀으니 책망 훈계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제때 책망 훈계를 받아서 망정이지 책망 훈계를 받지 않았다면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편집적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저를 책망하는 것은 저를 무시하는 거고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트집을 잡는 거예요. 제가 운이 나빠서 이런 시련을 겪는 거겠죠. 마침 화가 났는데 화풀이할 곳이 없어서 제게 분을 풀고 책망한 거예요.” 누가 “그렇지 않아요. 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성찰하지 않죠? 당신은 그 일을 원칙대로 처리했나요? 진리 원칙을 위배하지 않았나요?”라고 물어도 그는 그런 것들을 성찰하지 않은 채 감정과 혈기로 사건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대한다. 요컨대, 편집적인 사람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긍정적인 사상과 관점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떤 일과 어떤 환경이 닥치든 항상 편집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데다가 절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고수하는 것이 사실에 완전히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늘 뭐라고 말하느냐? “귀로 들은 것은 믿을 수 없어요. 눈으로 봐야 확실하죠. 제가 본 것이 사실이라고요. 당신이 직접 보지 못했다면 당신이 말하는 게 진리라고 해도 당신에게는 발언권이 없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라고, 그 사실이 겉으로 드러내는 본질이 바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진리를 말해도 소용없다. 진리는 그에게 허울이나 명목,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한다.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진짜야. 나는 실상을 봤고 사실이 발생하는 과정도 봤으니까.’ 예를 들어, 편집적인 사람은 한 부부가 싸우면서 서로 이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걸 보면 그들이 분명 이혼할 거라고 확신한다. 누가 “그들이 이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걸 봤다고 해도 진심으로 이혼하려는 건 아닐 수도 있어요. 홧김에 하는 말은 다 거칠잖아요. 사실 저 부부는 평소에 꽤 금실이 좋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두터워요. 평생 싸우긴 했지만 서로를 떠나지는 못할 거예요. 그 아내는 가까운 사람에게 자기들은 절대 이혼할 수 없다고 말했대요. 이런 사실과 평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혼할 리 없어요.”라고 말해도 편집적인 사람은 믿지 않는다. 결국 그 두 사람이 정말로 이혼하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그는 계속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 ‘겉보기에 이혼을 하지 않았을 뿐이야. 사실 진작에 남들 몰래 이혼했지만 아이를 위해 공개하지 않는 거라고.’ 보아라. 그는 여전히 이 일을 물고 늘어진 채 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눈과 판단만 믿는 데다가 집요하게 자신의 판단, 사상과 관점이 올바르다고 여긴다. 설사 사실이 그렇지 않거나 문제의 본질과 근원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어떤 일을 인식할 때 자신의 편견과 혈기, 감정에만 기댈 뿐, 사실의 성질과 문제의 근원을 근거로 판단하지 않는다. 사건에 변화가 생길지라도 그의 인식법과 사상, 관점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편집적인 사람의 모습이다.

구체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편집적인 사람이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과 표출하는 성품은 패괴 성품과 관련 있다. 편집적인 것은 인성의 큰 결함이지만 당연히 인품과 인격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단지 인간관계와 관련된 일종의 태도나 사상, 관점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편집적이라면 그의 인성에 결함이 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이 측면의 결함이 어떤 구체적인 일에서 표출될 때 그는 단지 인성의 결함만 표출하는 게 아니다. 만약 한 가지 일이 닥쳤을 때 늘 자신의 치우친 인식과 관점만 고수하고 그것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진리를 교제하든 귀담아듣지 않는 데다가 일부 치우친 행동 방식과 주장까지 드러낸다면, 그것은 단순히 인성 문제가 아니라 성품 문제로 확장되며, 패괴 성품의 수준에 이른다.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는 일을 예로 들자면, 일을 할 때 원칙을 위배하고 제멋대로 구는 경우에는 마땅히 책망 훈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책망 훈계는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상응하는 처벌과 질책은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는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재수없는 일을 당했다고 불평한다. ‘난 우연히 휘말린 거야. 저 사람은 화가 나서 풀 곳이 없었는데 마침 내가 이 일에 얽혀서 괜히 나를 책망하는 거라고.’ 책망 훈계를 대하는 그의 이런 사상과 관점, 태도는 일종의 패괴 성품 표출이다. 어떤 패괴 성품이냐?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싫어하고 강퍅한 것이다. 그가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사상과 관점은 인성이 편집적인 것에 해당하는데, 이런 편집적인 사상과 관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패괴 성품은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의 본질은 심각하며, 이 사람은 불신파에 해당한다. 편집적인 것은 인성의 결함인데, 이와 관련된 패괴 성품의 주된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은 패괴 성품의 수준에 미친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발견했느냐? 일부 인성의 결함은 사람이 처신하고 행동하는 사상, 관점, 태도와 관련 있고, 패괴 성품의 수준에 미친다. 예를 들어, 말을 어눌하게 하는 것은 인성의 결함으로, 말을 어눌하게 하는 사람은 무슨 말이든 어눌하게 한다. 어눌하다는 것 자체는 패괴 성품이 아니고 패괴 성품의 수준에 미치지도 못한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어눌한 방식으로 하는 말에 사상이 담겨 있고, 그 사상이 패괴 성품에 지배된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어눌하든 어눌하지 않든 그가 하는 말의 이면에 있는 사상들은 모두 패괴 성품과 관련 있다. 어눌한 것은 말주변의 문제로, 패괴 성품과는 관련이 없지만 어눌한 방식을 이용해 말하는 이면의 사상과 관점은 패괴 성품에 의해 야기되거나 생겨난다. 보아라. 인성의 결함이 선천적인 조건과 관련 있다면 패괴 성품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인성의 결함이 인품과 관련되며 악랄하고 치우치고 부정적인 것들에 속한다면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무감각하다

이번에는 무감각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는 무슨 문제이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무감각한 것은 인성의 결함이다. 무감각한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에게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일을 처리할 때 반응이 느리고 동작이 굼뜨며 융통성이 없을 뿐 아니라 문제를 사고하는 생각의 폭이 좁거나 여러 방면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한다. 이런 것을 두고 무감각하다고 한다. 무감각한 것은 인성의 어느 방면과 관계되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깊이나 지능, 혹은 자질과 관계된다. 보통 어떤 사람을 ‘무감각하다’라는 말로 묘사하느냐? (자질이 비교적 부족한 사람입니다.) 무감각한 것은 사람의 자질이 부족하고 지능이 낮으며 반응이 느린 것을 가리킨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무감각한 것이고, 무감각한 것은 인성에 있는 큰 결함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감각한 것은 팔과 다리가 저려서 감각이 없는 육체적인 마비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의 성격이 과묵하거나 고지식하거나 융통성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사람의 생각과 관련된 반응이나 문제를 처리하는 지능의 모습을 말한다. 보통 이런 사람은 주위의 사람, 일, 사물에 대해 늘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반응이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즉, 사건을 보고도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 안의 문제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 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도 반응조차 하지 않고 그것이 문제인지도 알지 못한다. 설사 누가 그에게 문제를 알려 주어도 그 안에 있는 문제의 심각성이나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따라서 많은 일을 처리할 때 속도가 느린데, 이것이 무감각한 것이다. 무감각한 것 자체는 인성의 결함이다. 나이가 몇이든, 육체의 각 기관이 무감각하든 무감각하지 않든 무감각한 사람의 인성에 있는 이 방면의 모습을 보면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기술력이 요구되거나 업무적 성격이 유독 강한 사역도 담당하지 못한다. 물론 이런 부류는 리더 일꾼도 되지 못한다. 리더 일꾼이 무감각하다면 그가 책임지는 범위 내의 사역은 대체로 마비 상태에 빠진다. 그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며 다양한 사람, 일, 사물이 나타났을 때 생길 결과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명확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의 눈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는 어떤 사역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른 채 매일 그저 정해진 틀에 맞춰 예배하고 찬송을 배운다. 상부에서 어떤 사역지침을 내리면 그대로 하달하는데 하달한 뒤에 제대로 시행될 수 있는지, 어떤 성과를 이룰 수 있는지, 후속 효과가 어떤지는 전부 알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하든 꿰뚫어 보지 못하고,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악을 행하고 교란하고 방해하고 있든 알아차리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역을 점검해야 하고 어떤 구체적인 사역을 시행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누가 “사역을 배치하고 안배했나요?”라고 물으면 “다 안배했어요. 교제도 했고 사역지침도 쭉 한 번 읽어 줬으니 다들 잘 알 거예요.”라고 답한다. 이게 사역지침을 시행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사역지침을 시행하려면 우선 리더 일꾼의 직책을 잘 안배해야 한다. 어느 리더가 어떤 사역을 해야 하는지 정해 각각의 사역을 개인별로 지정해 줘야 한다. 또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원칙대로 해야 하는지 알려 줘야 한다. 이런 일들을 명확히 이야기하여 모두가 사역을 할 줄 알게 해야만 비로소 사역을 할당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사역할 때 단지 사역지침을 한 번 읽어 주고 사람들이 인식과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고는 일을 끝낸다. 사람들이 바쁘게 본분을 이행하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사역지침을 잘 시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형제자매는 본분을 이행할 때 어려움이 없을까요? 어떤 문제가 남아 있죠? 교제해서 해결해 주었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문제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요.”라고 답한다. 사실 사역을 책임지는 사람이 문제점이나 어려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려움은 존재한다. 단지 그가 너무 무감각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서로 협력하지 못하고 지위를 놓고 다투어 사역에 영향을 끼쳐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저 둘은 사이가 꽤 좋아요. 서로 대화도 하고 소통도 하잖아요. 협력하지 못한다면 대화를 나누지 않겠죠.” 누가 “그럼 지위를 놓고 다투지는 않나요? 정말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그건 아직 모르죠.”라고 답한다. 알아보니 그 둘은 협력하지 못하는 데다가 누가 더 수준 높게 설교하는지, 누가 더 큰 목소리로 오랫동안 말할 수 있는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하나님 선민들은 이런 일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문제들을 제때 해결했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해결하지 않았어요. 제가 해야 하는 사역인지 몰랐거든요.”라고 답한다. 이런 큰 문제도 해결할 줄 모른다면 지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사역지침을 한 번 읽고 나서 사람들에게 본분을 잘 이행하겠다는 태도를 밝히고 맹세하라고 한다. 그러고는 바로 일을 끝낸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교회 리더가 누구인지, 누가 어떤 사역을 구체적으로 책임지는지, 영상 사역을 누가 책임지는지 난 다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그는 구체적인 사역들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보지 못한다. 이게 바로 무감각하고 우둔한 모습이며, 그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사람이다. 그는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느 방면의 진리 원칙도 교제하지 못한다. 진리 원칙과 관련된 문제도 진리를 교제해 해결하지 못하고, 인사나 행정 사역과 관련된 문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설사 누가 사역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르고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게 바로 무감각한 것이다. 그는 교리나 좀 이야기할 줄 알 뿐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며 무감각하고 우둔한 모습을 보인다. 너희가 보기에 이런 사람이 합격한 리더이냐? (아닙니다.) 리더 일꾼이 무감각하면 골치 아프다. 아무 사역도 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일도 나서서 처리하지 않고 누가 문제를 보고해도 처리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무감각한 문제가 아니다.

무감각한 것은 인성의 결함이다. 이 결함은 비록 패괴 성품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자체로 치명적인 문제이다. 여기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 한 명이 서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이목구비와 사지는 다 온전하지만 정상인처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없다. 사역할 때는 아예 생각을 못하는 쓸모없는 인간처럼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한다. 누가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하지 못하고 어떤 사역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하며 마음은 마치 아무 일 없는 사람과 같아서 결국 어떤 사역도 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속 빈 강정이자 쓸모없는 인간이다. 이런데도 문제가 심각하지 않으냐? 보아라. 편집적인 사람이나 민감한 사람은 적어도 생각이 유연하고 정상인처럼 사고하며 생각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반면 무감각한 사람은 생각이 단순하여 마치 뇌성 마비 환자나 죽은 사람처럼 눈은 달려 있지만 어떤 일을 보든 마음이 반응하지 않고 깊이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는 생각이 없는, 완전히 목석같은 사람이다. 목석같은 사람이란 무엇이냐? 나무로 조각한 사람으로, 외형은 사람 같지만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에게 집을 지키라고 하면 그는 집에 도둑이 들어도 신경쓰지 않는다. “왜 집을 지키지 않죠?”라고 물어도 그는 반응이 없다. 어떤 일에도 반응하지 않으니 몹시 골치 아프다. 즉, 인성의 본능이 발휘해야 하는 기능, 생각하고 의식하는 기능, 눈, 귀, 뇌, 마음이 발휘해야 하는 기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정상 인상이 가져야 하는 생각도 갖추지 않았거나 그 생각에 닿지 못한다. 이게 바로 무감각한 것이다. 무감각한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에 가깝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 말대로라면 이런 부류는 무감각해서 눈과 귀, 뇌의 사고가 모두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요. 하지만 이들도 남에게 욕을 먹거나 손해를 보면 반응을 보이잖아요.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동물들은 사람의 말을 알아들는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다 듣고 이해한다. 그런데 사람인데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인지를 평가할 때는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왜 일부 동물을 언급하겠느냐? 너는 피조된 사람이라는 유형에 속하는 생물이지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네게 알려 주려는 것이다. 만약 동물도 갖추고 있는 생각을 사람인 네가 갖추고 있지 않다면 너는 몹시 형편없는 것이다. 동물도 자기에게 잘해 주고 하루 세 끼를 챙겨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가까이하는데 사람으로서 이런 인성도 갖추지 못했다면 네가 사람으로 불릴 자격이 있느냐? 왜 이렇게 비교하겠느냐? 너는 동물도, 고등 동물도 아닌 사람이며 하나님이 만든 만물 가운데 가장 고등한 생물인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너는 언어 능력과 사고 능력, 진리를 깨닫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네가 만물의 주인이 되어 만물과 다른 생물을 관리하게 하려고 너를 만들었다. 너는 만물 가운데 모든 생물의 관리자이다. 그것들을 관리하려면 그것들보다 뛰어나야 하고 강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들을 관리할 능력을 갖출 수 있다. 따라서 동물을 언급하는 것은 너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것들보다 강해야 한다고, 네 인성이 갖춰야 하는 능력과 후천적으로 배운 여러 방면의 상식과 능력으로 그것들을 관리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사람이 해야 하고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일을 해야 한다고 일깨우고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만약 네가 자신을 피조된 인류라고 생각한다면 피조된 인류가 갖춰야 하는 기준으로 네 인성과 본질을 평가해야 한다. 그 기준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기준보다 낮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한 사람의 자질과 인성에 있는 여러 방면의 문제를 평가하려면 사람이 갖춰야 하는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성 방면에서 생각이 무감각하고 반응이 느려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교회 사역도 능히 감당하지 못하며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너는 자신을 인식해야 하고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이 방면의 자질이나 이 방면의 인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혹은 네 인성에 무감각하다는 결함이 있다면 너는 리더나 책임자가 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네가 리더나 책임자가 된다면 네가 사역을 책임지는 교회는 마비될 것이고, 네가 책임지는 사역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능히 감당하지 못한다면 뒤로 물러난 다음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자기 주제를 알고 나서 유능한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남을 추천할 줄 아는 것이 실행 원칙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너무 무감각해서 누가 훌륭한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제가 누구를 추천할 수 있겠어요?” 누가 자질이 좋은지 볼 줄 모르고 추천할 줄 모른다면 공과를 좀 배워야 한다. 진리를 깨달아 남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을 보고 배우면서 그와 많이 교제하면 배움을 얻을 수 있다. 네 인성 안에 무감각하다는 결함이 있다면 본분을 이행할 때 이것저것 까다롭게 고르지 마라. 너는 이 방면의 결함이 있어서 할 수 있는 사역과 이행할 수 있는 본분이 원체 많지 않다. 간신히 네게 적절한 자리를 찾아 주었는데도 까다롭게 고른다면 그건 무감각한 문제도, 인성의 결함도 아닌 패괴 성품이다. 어떤 패괴 성품이냐? 교만하고 순종하지 못하며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넌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머저리에 바보일 뿐인데 그럴듯하고 힘들지 않으며 남들이 우러러보는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니 이는 교만한 성품이다. 만약 네가 아주 무감각하여 해야 하고 신경써야 하는 일이 있는데도 하지 않고 보지 못한다면, 기름병이 넘어진 걸 보고도 도로 세우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는 일을 보고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이건 우리 집 일도 아니니까 난 신경쓰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단지 무감각한 것이 아니라 양심과 이성이 없는 것이다. 만약 양심과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고 하나님 집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한다면 마땅히 책임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고 좋은 일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면 너는 우둔하고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냐? 이상으로 무감각한 모습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다.

뻔뻔하다

이어서, 뻔뻔한 것에 대해 말해 보자. 뻔뻔한 것은 어떤 문제이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이것이 결함이냐? (인품이 형편없는 것입니다.) 인품이 형편없는 것은 바로 인성이 나쁜 것이다. 뻔뻔한 것은 인성의 어느 방면과 관련되느냐? 양심과 이성, 인격과 존엄과 관련되고, 인품과 관계된다. 뻔뻔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어떤 일을 통해 사람이 뻔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느냐? 어떤 행동이 부끄러운지 모르는 것이다. 뻔뻔하면 분명 이런 모습을 보인다. 아첨하면서도 낯간지러워하지 않는다면 뻔뻔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왜 뻔뻔하다고 하겠느냐? 수치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낯간지럽고 듣기 거북해도 정상 인성의 양심에 위배되거나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말을 얼굴을 붉히거나 긴장하지 않고 다 내뱉을 수 있다면, 남이 듣고 나서 어떻게 보든 신경쓰지 않으며 남이 비웃어도 상관하지 않는다면 이는 수치심이 없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수치심이 없는 것이 바로 뻔뻔한 것 아니냐? 그 밖에도, 분명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데도 공개적으로 지위를 얻고 리더가 되려고 경쟁한다면 이는 뻔뻔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공개적으로 경쟁할 뿐 아니라 선거할 때도 거짓 투표용지를 만들어서 남들은 한 사람당 한 표를 던지지만 그는 자기에게 두 표를 던진다. 뻔뻔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남이 그를 뽑지 않아도 그는 스스로 자기를 뽑는다. 이놈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염치도 없이 리더 일꾼이 되려고 경쟁한다. 낯짝이 참으로 두껍다! 지위를 좋아하고 야심이 있는 사람은 보통 남들이 자신을 리더로 뽑도록 하기 위해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리더 일꾼으로 뽑히면 상당히 의기양양해지지만 뽑히지 못하면 속으로 언짢고 불쾌해한다. 이는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뻔뻔한 사람은 이러지 않고 리더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다들 저를 좋아하지 않고 저를 뽑지 않아도 저는 어떻게든 리더가 될 거예요. 설사 속임수나 부정한 수단을 써서라도 다들 저를 리더로 뽑게 만들 거라고요!” 누가 “당신이 리더가 되어도 사람들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다들 당신에게 호감이 없다고요. 당신은 명성도 좋지 않잖아요. 당신이 어떤 사역을 안배해도 다들 당신 말을 듣지 않을 거예요.”라고 해도 그는 “제 말을 안 들어도 저는 리더가 될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놈은 대체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 것이냐! 이런 점으로 보아 그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데다가 난폭한 성질도 좀 가지고 있다. 이런 뻔뻔한 부류는 처신하는 사상과 관점으로 보아 인성 안에 수치심이 없다. 인격이나 품성, 양심이나 수치심에 신경쓰지 않고 도덕과 처신에서 최소한 지켜야 할 선도 중시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생각과 의식으로 보아 그는 아주 어리석고 무지하며 비천하다. 그래서 그의 인품이 형편없고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분명 잘못된 사상과 관점에 지배되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동을 저지르는 것임이 틀림없다. 교회 선거 기간에 그는 기어코 자신을 뽑고 자신에게 투표하여 어떻게든 리더가 되려고 한다. 리더가 되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리더가 되지 못하면 자신을 뽑지 않았다고 형제자매를 원망한다. 그는 일단 네가 그를 뽑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너를 못마땅해하고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반격하며 대화할 때는 마치 화약이라도 삼킨 듯 거칠게 말한다. 그는 네게 복수하고 너를 괴롭힐 궁리를 하며 심지어 평생 너와 말도 섞지 않는다. 이런 부류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행동할 때 표출해 내는 것은 일종의 패괴 성품이다. 어떤 패괴 성품이냐? (흉악함입니다.) 가볍게 말하자면 교만하고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그저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수단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아 그는 성품이 흉악한 사람이다. 보다시피 뻔뻔하고 인성이 악랄한 사람의 패괴 성품은 아주 눈에 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다 패괴 성품의 수준에 미친다. 뻔뻔한 것은 그의 인품에 있는 한 가지 모습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고 행동할 때 이 방면의 인품에 지배되어 후안무치한 일을 수없이 저지르고 교만함과 흉악함 등 온갖 패괴 성품을 표출해 낸다. 따라서 인품에서 표출되는 악랄한 모습은 모두 어느 정도 패괴 성품에 속한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 본질과 관련 있고 연관되어 있다. 어떤 패괴 성품의 구체적인 표출이든 모두 악랄한 인품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악랄한 인품과 패괴 성품은 서로 관련이 있다. 사람의 패괴 성품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후 생겨난다. 예를 들어, 인성 안에 있는 편집적인 것, 속이 좁은 것, 뻔뻔한 것과 같은 악랄한 인성 본질과 인품의 모습은 모두 사탄에 의해 패괴되거나 가공된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일부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사악하고 부정적인 사상과 관점의 패괴를 먼저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구체적인 패괴 성품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생명으로 삼는다.

뻔뻔한 모습에는 다른 것들도 있다. 어떤 리더 일꾼은 눈에 띄게 방해하고 교란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속이고 사역지침을 위배하는 짓을 저지르고 심지어 교회 사역에 극심한 손해를 끼치고도 자신의 문제를 반성하고 인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하고 공적을 명분으로 상을 기대하며 여기저기에서 자신이 얼마나 사역을 많이 하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사역 기간에 얼마나 기여를 많이 했는지, 복음을 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는지 등을 자랑하고 증거한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악을 행했는지, 교회 사역에 얼마나 큰 손해를 끼쳤는지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회개하지도 않을뿐더러 뉘우치지도 않는다. 너희가 보기에 이런 부류는 뻔뻔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당신은 진리 원칙대로 교회 사역을 했나요?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부합하게 사역했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주제를 회피한다. 누가 그는 사역 기간에 하나님의 제물에 몇 백 위안, 몇 천 위안, 심지어 몇 만 위안의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고 폭로하며 배상하라고 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정상적이고 양심과 이성, 염치가 있는 사람은 이런 말을 들으면 벙쪄서 마음속 깊이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느낀다. 자신이 제대로 사역하지 못해 하나님에게 죄를 많이 지었다고 생각해서 변명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구체적인 사역도 좀 하고 고생도 많이 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사역을 제대로 했다면 하나님 집의 사역에 이토록 많은 손해를 끼칠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손해는 그가 사역을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니 마땅히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손실을 배상해야 하든 말든 최소한 너는 네 사역이 교회 사역에 방해와 교란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오직 후안무치한 사람만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손실을 배상한다고 해도 저는 제가 사역하면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옳지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거예요. 설사 빚을 갚는다고 해도 저는 공로가 있어요. 하나님 집에서도 평범한 사람보다 낫죠. 어쨌든 저도 한때는 잘나가던 사람이라고요!” 이는 어떤 인성이냐? 네가 보기에 이런 부류에게 염치가 있겠느냐? ‘염치’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쓰는지 알겠느냐? 정말 염치가 없다면 아주 골치 아프다. 속으로는 자신이 악을 행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입으로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아주 강퍅한 것 아니냐? 속으로도 자신이 악을 행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입으로도 인정할 수 있다면 그나마 양심이 있는 것이고 내면에 아직 염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속으로도 불복하고 늘 반항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집이 자신을 불공평하게 대한다며 자신이 재수없는 일을 당했다고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닌다면 이 사람은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양심은 한편으로는 정의로워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량해야 한다. 정의감을 구성하는 한 가지 요소는 바로 염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염치를 알아야만 정직할 수 있고 정의감을 가질 수 있으며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고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양심과 정의감 안에 염치가 없다면, 염치를 모른다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거나 증오할 줄 모르며 후회도 하지 않는다면, 남이 어떻게 폭로하든 신경쓰지 않고 뻔뻔한 데다가 수치심도 없다면 네가 처신하는 양심은 문제가 되고, 너는 양심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네 마음이 나쁜지 악한지는 명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네 마음은 악의로 가득하거나 극악무도할 수도 있고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양심과 인성이 없는 사람은 마귀가 된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후회하거나 죄스럽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변론하고 반발하려 한다면, 자신을 위해 해명하고 변명하며 허울좋은 명목을 내세운다면 전형적인 인성으로 평가할 때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네 이성이 어떻든 양심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너는 자격이 부족하다. 그러니 네게 과연 인성이 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네 내면의 영이 무엇이고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예전에 어떤 악을 행했는지 탐구하지 않고 네 전생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다만 이번 생에 네가 갖춰야 하는 양심으로 말하자면 너는 수치심이 부족하다. 그러니 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뻔뻔하게 마냥 얹혀살 거예요.” 그렇다 하더라도 얹혀살 수 있는 곳인지 구분은 해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은 네가 얹혀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네가 계속해서 교회에 얹혀산다면 분명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난 낯짝이 성벽만큼이나 두꺼워서 마치 꽃게처럼 어디에서든 이렇게 옆으로 걸어!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난 신경쓰지 않아. 누가 날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너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네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하는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정의하고 규정하는지에 유의해야 한다. 이 방면에 유의하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이것조차 신경쓰지 않는다면 너는 불신파이다. 남이 네게 뭐라고 하는지는 신경쓰지 않더라도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나 생각, 규정은 신경써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며 염치가 없다고 평가하고, 네 인성 안에는 부족한 것이 많고 너는 중요한 것들을 갖추지 않았다고 평가한다면 너는 마땅히 새롭게 처신하고 회개해야지 자기 주장만 해서는 안 된다. 설사 네게 천 가지, 만 가지 이유가 있다 한들 뻔뻔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네 인성과 양심에 큰 문제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 한 가지만으로 판단해도 네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만약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너는 마땅히 회개해야 하고, 속으로 자기 주장만 해서는 안 된다. 네 주장은 혈기와 감정, 사탄에서 비롯되었고 설사 네가 옳다고 여겨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패괴 성품만을 근거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패괴 성품을 보기 전에 우선 인성을 보려 한다. 인성이 어떤지, 모든 일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는 인품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보는 것은 분명 정확하고 너를 평가하는 기준도 진리에 부합한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겉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한 일, 일상생활 속에서 표출하는 모습, 모든 일을 할 때 가지고 있는 사상, 관점, 태도, 나아가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근거로 평가한다. 하나님이 결국 너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네게는 억울한 일이 아니다. 이는 네 일시적인 모습이나 우발적인 과오가 아니라 네 종합적인 모습을 근거로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뻔뻔한 모습은 인품과 관련되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 패괴 성품의 수준에 미친다. 사람은 이 방면의 인성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행동을 보이는데, 그런 행동을 할 때 사람은 패괴 성품을 표출한다. 어느 방면의 패괴 성품을 표출하든 뻔뻔한 부류가 표출하는 패괴 성품과 하는 행동은 모두 그의 인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이 패괴 성품을 바꿀 수 있을지, 벗어 버릴 수 있을지 알려면 그의 인품이 어떤지 봐야 한다. 만약 인품이 악하여 진리에 맞서고 진리에 반감을 품으며 진리를 싫어하는 데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쉽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다. 반면 인품으로 보아 악인이 아니며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뿐 아니라 편집적이지 않은 데다가 인품이 악랄한 문제들도 없다면 그는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다. 똑같이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패괴를 벗어 버리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봐야 하느냐?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봐야 합니다.) 그렇다. 사람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 봐야 한다.

의심이 많다

이번에는 의심이 많은 것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의심이 많은 것은 방금 언급했던 모습 중 어떤 것과 조금 유사하냐? (민감한 것과 유사합니다.) 민감한 것은 어느 측면의 문제이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의심이 많은 것은 민감한 것보다 한 단계 높은,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민감한 것은 단지 인성이 다소 미성숙해서 마치 어린아이 같은 것일 뿐이지만 의심이 많은 것은 어느 정도 구체적인 사상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속된 말로 하면 꿍꿍이가 많은 것이다. 이는 인품이 나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에게 10위안짜리 물건을 사다 달라면서 “10위안이 넘는 물건은 절대 사지 마세요. 너무 비싸면 사지 마세요.”라고 특히 강조해도 그는 듣고 나서 이렇게 고민한다. ‘예의상 빈말하는 거 아니야? 사실은 100위안짜리 물건을 갖고 싶은데 말하기가 민망한 거지. 그러니까 내가 사다 주면 좋아할 거야. 내게 호감도 가질 테고.’정작 물건을 사 오면 그 사람은 말한다. “너무 비싸요. 저는 10위안밖에 없어요. 그렇게 많은 돈은 없다고요.” 그렇다면 그가 100위안짜리 물건을 사다 준 것은 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 것 아니냐?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돈을 더 내기 싫어서 자신을 등쳐먹으려 한다고 의심한다. 너희가 보기에 이렇게 의심이 많은 사람은 아주 골치 아프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점에서 골치 아프냐? (그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과는 어울리기가 어렵다. 솔직한 사람이 이런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겠느냐?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너는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방면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고, 그에게 어떤 속셈이 있는지, 그가 너를 어떻게 의심하는지도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맡기면 분명 아주 간단하고 사소한 일도 몹시 복잡하고 번거로워진다. 일을 처리하다 보면 너는 아주 피곤하다고 느끼고 차라리 직접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그런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고 그를 피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쓰지 않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냥 놀리자니 낭비이고 버리자니 아까워서 그에게 주면 그는 감사히 여기기는커녕 속으로 의심한다. ‘왜 이 물건을 내게 주지? 분명 속셈이 있을 거야. 내가 자기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자기에게 신세를 지게 만들려는 건가? 아니면 내게 무슨 일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건가?’ 너는 그가 이토록 사소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이 많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물건을 좀 주었을 뿐인데도 이렇게나 의심을 많이 품는다. 그의 의심을 해소하려면 수많은 말을 해야 하니 아주 골치 아프지 않으냐? 결국 너는 이 사람에게 반감이 생겨서 나중에 또 필요 없는 물건이 생겨도 차라리 버릴지언정 그에게 주지는 않게 된다. 왜 주지 않겠느냐? 야박한 게 아니라 골치 아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전에 어떤 사람이 막 세 들어 살기 시작했을 때 집 안에 청소 도구가 하나도 없어서 내가 집에 있던 청소용품을 좀 가져다줬다. 한 병 가득 차 있는 세제도 있었고 절반만 차 있는 세제도 있었는데 세입자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저 주는 물건이지만 고맙지 않네요. 전부 쓰던 물건인데 좋은 물건이면 왜 제게 주겠어요?” 상당히 상처가 되는 말 아니냐? (그렇습니다.) 왜 상처가 된다고 하겠느냐? (그가 호의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호의를 악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고마워하라고 하지도, 돈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세를 준 집에 청소용품이 하나도 없고 나가서 사기도 불편하니 쓰기 편하도록 내게 있던 것을 가져다준 것뿐이지 네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물건을 쓰라고 한 것이 아니다. 네게 빚진 것도 없고 내게 신세를 지라고 네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토록 단순한 일인데 그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흥! 별것도 아닌데 물건 좀 가져다주고는 인심 쓴다고 생각하다니! 좋은 물건을 가져다준 것도 아니고 말이야. 거저 주는데 좋은 물건일 리 있어?’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귀한 술이라고 한 적도 없고 그저 평범한 청소용품일 뿐인데 쓰기 싫으면 안 쓰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느냐? 나는 그 사람이 어울리기 힘들고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럼 내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으면 아무 일 없겠느냐? 꼭 그렇지도 않다.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아도 골칫거리가 생기기 쉽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세 들어 사는데 청소용품도 하나 안 가져다주다니 이게 무슨 형제자매야.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네!’ 그는 여전히 불평을 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인품은 몹시 형편없어서 늘 자신의 기호나 기준으로 남이 좋은지 나쁜지 평가하고, 까다로운 시선으로 남을 살피고 평가한다. 자신은 높은 위치에 있고 남은 음흉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남은 어떻게 행동하든 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오직 자신만이 패괴되지 않았고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의심이 많은 부류는 인품이 좋지 않다. 그러다 보니 행동할 때 패괴 성품을 표출할 수밖에 없다. 이 방면의 나쁜 인품을 가지고 있으니 그는 분명 이런 인품에 지배된 상태에서 행동하거나 이런 인품을 갖춘 사상과 관점에 지배된 상태에서 행동할 것이다. 그러니 그가 표출해 내는 것은 정상 인성일 리가 없다. 정상 인성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 이는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다. 의심이 많은 점에서 보면 이런 부류가 행동하거나 남과 왕래하고 어울릴 때 표출해 내는 대표적인 패괴 성품은 분명 사악함과 간사함이다. 그의 생각은 이토록 복잡하며 사악하고 음험하다. 그는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네가 그런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는 믿지 않고 네가 해명해도 소용없다. 그는 너를 그렇게 생각한다. 네가 사악한 방식과 사악한 성품으로 만사 만물과 모든 사람을 바라본다면 설사 네 행동이 정당하고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더라도, 인성과 이성, 혹은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며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그렇게 행동하죠? 속셈이 뭔가요?” 네가 “아무 속셈도 없어요.”라고 말해도 그는 결코 믿지 않고 기어코 네게 어떤 속셈이 있다고 단정지어서 네가 인정하게 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골치 아프지 않으냐? (골치 아픕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분명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 아니고 당연히 정직한 사람도 아니다. 그의 인품 안에는 기본적으로 정직함, 선량함, 이성 같은 요소가 없다. 그럼 그의 인품 안에는 주로 무엇이 있겠느냐? 의심이 많고 간사하고 사악하며 순수하거나 정직하지 않다. 그는 모든 사람과 모든 문제를 아주 복잡하게 바라본다. 네가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도 그는 네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분석하고 고민하려 한다. 설사 그가 너와 오랫동안 사귀어서 네 인품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는 너와 대화하고 일을 처리하고 왕래할 때 늘 의심하는 태도로 너를 대한다. 따라서 이런 부류는 아주 골치 아프다. 그와 사귀다 보면 너는 부담이 늘고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며 해야 할 일도 많아진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일을 좋아하지 않는지, 무엇을 하기 싫어하고 말하기 싫어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하다 그에게 미움을 사거나 그가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는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데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그에게 한 가지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하면 그는 고민한다. ‘내가 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실까? 하나님께서 기억하실까? 얼마나 많이 애써야 잘 넘어갈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기억될 수 있을까?’ 한동안 본분을 이행하고 나서도 그는 리더 일꾼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 그를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는지 알아보려 한다. 이는 어떤 인성이냐? 처신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인성으로 보아 이런 부류는 아주 골치 아프고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왜 그렇겠느냐? 그는 정직한 사람이 되기 쉽지 않다. 그는 양심 안에 정의감이 없고 이성 방면도 온전하지 않으며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판단한다. 왜 비이성적이라고 하겠느냐? 비교적 극단적이고 한 가지에 집착하며 꽤나 이상하다. 정상 인성의 사고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고 떳떳하지도 않으며 유독 음흉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이 음흉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남보다 똑똑하며 남에 비해 세련되고 섬세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자신의 똑똑함에 특히 심취해 있는데, 이런 것을 두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긴다고 한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인성의 이성 측면에 결함이 많고 양심 안에도 정의감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런 부류는 인성이 나쁘고 모두가 그와 접촉하기 싫어한다. 그는 누가 한 마디를 하든 다 트집을 잡을 수 있다. 그가 이해하는 것은 모두 치우친 것, 혈기에 속하는 것, 사탄에 속하는 것, 감정에 휘둘린 편집적인 것이다. 전부 음흉하고 부정적이며 진리에 위배되고 진리를 대적하는 것들로, 결코 사람이 바른길에 오르도록 이끌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부류는 반감과 혐오감을 일으킨다. 그들은 어두운 구석이나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살면서 특히 자기애가 넘치고 자아도취에 빠져 있으며, 자신이 남보다 섬세하고 고상하고 존귀하고 존엄하니 남들은 자신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이런 부류는 인격이 아주 천박하고 진정한 존엄이 없다. 소위 진정한 존엄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인품이 특히 형편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인성 안에서 생겨난 것들은 모두 어둡고 공개 석상에 놓을 수 없는 떳떳하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부류에게는 존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사람에게 의심이 많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기 쉬우냐? 쉬운 말로 하자면 이런 부류는 속이 시커멓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모두 꿍꿍이속이 많다. 너희도 알다시피 마왕이 하나님 선민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것은 꿍꿍이속이 몹시 많은 것이고 결국 사람을 패가망신시키며 가족과 뿔뿔이 흩어놓는다. 그것이 바로 마귀와 마왕이 하는 짓이다. 따라서 의심이 많은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 마땅히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해야지 함부로 의심해서는 안 되며 말할 때도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나 한 가지 일을 바라볼 때 만들어 내는 생각은 최소한 긍정적이고 칭찬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사람에게 도움이 되며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부류가 만들어 내는 사상과 관점은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적어도 긍정적인 사물은 아니다. 즉, 그가 문제를 사고하는 각도나 만들어 내는 사상과 생각은 결코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부류는 어두운 구석에서 살며 인격과 존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의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음흉하고 사악하며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가 의심하여 만들어 낸 온갖 사상과 관점을 받아들이면 너는 해를 입고 그를 따라 나쁜 길로 빠지게 된다. 이는 사탄에게 패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네가 그를 분별하고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부정적인 사물을 인식하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성장하고 분별력을 가질 수 있다. 의심이 많은 측면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마치겠다.

무능하다

이어서 무능한 것에 대해 말해 보자. 무능한 것이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사람들이 늘 “당신은 왜 그렇게 무능해요? 정말 못났네요!”라고 말하듯 어떤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능력 없어 보이는 것이다. 무능한 것이 바람직하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것을 분류해 보아라. 그것은 무엇에 속하느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무능한 것은 분명한 인성의 결함이다. 무능한 것은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지능이 무척 낮고 생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를 두고 무능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할 때 말주변이 없어서 표현을 잘 못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말하거나 나설 때면 주늑 들고 겁먹어 말을 잘 못하고 늘 괴롭힘을 당한다. 어떤 악인은 이런 부류를 괴롭히는 게 당연하고 아주 재밌으며 즐겁다고 생각해서 매일같이 이런 부류를 비웃고 놀린다. 무능한 사람은 일 처리 능력이 형편없고, 그중 일부는 생존 능력도 떨어져서 돈을 벌 줄 모르며 무리에서 늘 움츠러들고 소심하게 행동한다. 기가 센 사람을 보면 숨어서 말도 못 하고 괴롭힘을 당해도 미움을 살까 봐 감히 반항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의 인성이 무능한 모습을 보면 이는 단지 인성에 있는 한 측면의 결함일 뿐이다. 스스로 무능하기 때문에 잘못된 사상과 관점을 가지거나 자신과 남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무능한 것은 인성의 결함일 뿐이다. 그럼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왜 그렇겠느냐? 무능한 사람은 괴롭힘을 당하고 모두가 무시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만약 악한 것과 무능한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너는 분명 악한 것을 선택할지언정 무능한 것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무능한 사람은 되지 않겠어! 무능한 사람은 이 사회에서 모욕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환영받지 못해. 어디를 가든 무시당하고 짓밟힌다고. 존재감도 없는 데다가 생존권마저 박탈당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악인이 되면 다르지. 악인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손하게 대해.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고. 어디를 가든 특권을 가지고 심지어 남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위세를 부릴 수도 있어. 악인은 이 세상 어디서든 잘나가.’ 그러니 지금 선택하라고 하면 너희는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악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이는 어느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느냐? 무능한 것은 인성의 결함이다. 가장 흔히 보이는 모습은 바로 아무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남에게 차별받고 배척당하는 것이다. 괴롭힘당하고 사회에서 짓밟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은 모두 재능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심지어 두각을 나타내고 권세를 얻고 위세를 부리면서 어느 무리에서든 특권과 위신을 가지기를, 괴롭힘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함부로 남을 괴롭힐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사상과 관점이 옳겠느냐?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이토록 많이 들었는데도 여전히 악인이 되는 것에 찬성한다면 너희는 성품이 상당히 사악한 것이다. 악인을 보면 부러워하고 탄복하며, 속으로 악인이 나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악인을 추종하는 데다가 악인을 따르면 기댈 곳이 생기고 괴롭힘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 무능한 사람을 보면 반감을 품고 무시하며 짓밟으려 한다. 하지만 악인을 따르면 얼마나 많은 악을 행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악인을 따르면 구원받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 악인을 따르는데 악을 행하지 않겠느냐? 악인을 추종해 그의 노예가 된다면 그는 네게 이득을 좀 나눠줄 것이다. 너는 그를 따르며 위세를 부리고 호의호식할 것이고, 평생 좋은 것을 누리며 괴롭힘도 당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누리기 위해 너는 얼마나 많은 악을 행해야겠느냐!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무거운 징벌을 받아야 하는지 아느냐? 이것이 바른길이냐? (아닙니다.) 그래도 너희는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고 괴롭힘당하지 않기 위해 악을 행해 징벌받는 것도 불사하며 자신의 종착지와 운명을 대가로 이번 생의 즐거움을 얻고 싶으냐? 너희는 이런 사상과 관점을 가지지 않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사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악인이 되기를 선택할지언정 무능한 사람이 되어 괴롭힘당하지는 않으려 한다. 이는 악인의 길을 걸으려는 것 아니냐? 무능한 것은 단지 인성의 결함일 뿐인데 나쁠 게 뭐 있느냐? 기어코 남을 괴롭히고 악을 행해야만 하겠느냐? 하나님이 네가 굶어 죽지 않도록 네게 먹을 것을 준다면 네가 굶어 죽을 리가 있느냐? 하나님이 네가 즐겁고 자유롭게, 행복하고 기쁘고 평안하게 살도록 한다면 너는 이런 것들 중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남이 너를 괴롭힌들 어쩔 수 있겠느냐? 이런 것들은 누구도 빼앗지 못한다.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준 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네가 악인을 따라 악인의 길을 걷는다면 네가 누리는 즐거움들은 모두 죄악 속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네가 악을 행하는 수단을 통해 얻는 금전과 물질적 향유는 모두 강제로 빼앗는 방식으로 얻은 것이다. 너는 이번 생에 하나님이 네게 준 것보다 많은 것을 누리니 앞으로 몇 번의 내세에 걸쳐 갚아야 한다. 징벌받는 대가로 이번 생의 육체적 쾌락을 얻는 것은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너희는 악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지언정 괴롭힘은 당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너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악에 대한 인식과 사랑이다. 그렇다면 무능한 것이 왜 나쁘냐? 인성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 측면의 결함이지만 동시에 선천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무능한 사람들도 그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무능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비록 그것은 한 측면의 결함이지만 패괴 성품이나 인품의 문제는 아니다. 이게 무엇이 나쁘냐? 무능하고 지위가 낮아 늘 괴롭힘을 당한다면 세상의 불공평함과 사악함, 이 사회의 어두움을 깊이 느끼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일 수 있다. 기꺼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순종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할 수 있으며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이 결정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무능함은 너를 보호해 주는 것 아니냐? 무능한 것은 부정적인 사물이 아니라 단지 인성에 있는 한 측면의 결함일 뿐이다. 결함이란 무엇이냐? 부족함이자 작은 문제나 흠이다. 단지 완벽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고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고 이상적이지 않을 뿐이지 인품이 형편없거나 악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너희는 왜 이런 작은 결함도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냐? 게다가 이 정도의 결함은 생명 진입에도 큰 유익을 준다. 또는 일부 사람들은 인성에 이런 측면의 결함이 있고 이런 선천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더더욱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 걸어 결국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서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구원받게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는 복이므로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무능한 것이 뭐가 나쁘냐? 사람이 무능하다고 해서 패괴 성품이 더욱 심각해지는 것은 아니고, 무능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시하거나 구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또한 무능한 것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데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따라서 너희의 사상과 관점은 좀 변해야 한다. 너희의 사상과 관점은 상당히 형편없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차라리 악인이 될지언정 무능한 사람은 되지 않을 거예요. 무능한 사람은 변변치 못해서 남들이 다 무시하고 자기조차 자기를 무시해요. 무능한 사람이 되면 힘이 없지만 악인이 되면 얼마나 힘이 센데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데다가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괴롭혀도 아무도 감히 반항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폼 나게 살 수 있어요!” 폼 나는 게 뭐가 좋으냐? 세상에서는 잘나가고 폼 나겠지만 네 앞길과 종착지는 망가지고 너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며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게 된다. 너는 하나님과 하나님 집의 생활 환경, 사역 환경에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어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생활 환경을 찾으려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의 악행을 제한하기 때문에 어떤 악인도 하나님 집에서는 날뛸 수 없고 굳게 설 수 없다. 네가 악인을 좋아하고 악인이 되려 한다면 하나님 집에서 머물 수 있겠느냐? 너는 조만간 정리되어서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자신이 행한 악으로 인해 징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무능한 것은 비록 인성에 있는 한 측면의 결함이긴 하지만 패괴 성품에는 속하지 않고 인성이 악하다는 뜻도 아니다.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무능한 것은 어떤 사람이 선천적으로 말을 더듬거나 선천적으로 못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결함이다. 인류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어서 선천적으로 백인인 사람도 있고 선천적으로 황인이거나 흑인인 사람도 있다. 이는 한 측면의 선천적인 조건이다. 황인종은 보기에 몸이 별로 건강하지 않고 혈색이 좋지 않은데, 이는 한 가지 결함이다. 흑인종은 몸이 좀 건장해 보이지만 아무도 검은 피부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백인종은 다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개중에도 너무 하야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햇볕을 쬐며 구릿빛으로 피부를 그을리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야 건강해 보이고 피부도 윤기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다. 보아라. 무능한 것은 사람에게 있는 여러 측면의 선천적인 조건과 마찬가지로 단지 한 측면의 결함일 뿐이다. 그게 큰 문제가 되느냐? (아닙니다.) 따라서 이 측면의 문제가 설사 인성의 결함이라 해도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닫는 데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럼 너희는 여전히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에 거부감이 드느냐? (이제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무능한 사람을 보면 괴롭힐 것이냐?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는 많이 괴롭히지 않았느냐? 앞으로도 무능한 사람을 보면 무시하고 비하할 것이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네 자신이 무능한 사람이라면 너는 더더욱 자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무능한 것은 무능한 것일 뿐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면 된다. 무능하더라도 정직하고 간사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좋아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네 무능함이 아니라 네가 무능하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 남에게 무시당하고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직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고 흡족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려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처럼 무능함은 장점이 되기도 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너희의 관점은 변하지 않았느냐? (변했습니다.) 물론 모든 무능한 사람이 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은 무능함이라는 인성의 결함 이외에 인품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무능함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의 인품이 어떤지도 살펴야 한다. 간사하거나 인품이 악랄하다면, 뻔뻔하고 의심이 많고 민감하고 편집적이며 심지어 성품이 흉악하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무능한 사람도 반드시 인품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상으로 무능한 측면에 대한 교제를 마치겠다.

충후하다

다음으로 설명할 모습은 충후한 것이다. 이 측면의 모습은 인성의 장점에 해당한다. 한참을 설명하고 나서야 드디어 인성의 장점을 하나 찾았다. 인성의 장점은 정말이지 많지 않다. 충후한 것은 인성 한 측면의 장점이다. 장점이니 제대로 한번 이야기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있는 몇 안 되는 인성의 장점조차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 한번 살펴보자. 이 충후한 것을 왜 장점이라고 하겠느냐? (충후하다는 것은 사람이 비교적 성실하여 상대적으로 마음이 놓이게 일을 처리하고, 맡은 일을 책임지고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충후한 사람은 행실이 비교적 바람직하며 남을 고려하고 배려할 줄 압니다.) 남을 배려하다니 참으로 고상한 품격이구나! 이런 자는 고상한 사람이다. 그런데 충후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고상하겠느냐? (아닙니다.) 충후한 사람은 생각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며, 교활하지 않다. 또한 남에게 까다롭지 않고 관대하며 남과 어울릴 때 개인의 득실도 따지지 않는다. 남이 욕을 한 마디 하면 속으로 잠시 괴로워하다가도 ‘됐다.’라고 생각하며 더이상 따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돈을 빌려 간 뒤 오랫동안 갚지 않아도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빚을 독촉하기도 좀 미안해. 저 사람도 형편이 어렵잖아. 그때는 내가 저 사람보다 여유가 있었고. 빌려준 건 어쩔 수 없지. 그냥 가난한 사람을 도와줬다고 생각하자.’ 보아라. 그는 생각이 비교적 너그럽고 관대하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그를 오해해도 그는 개의치 않고 해명하지도 않는다. 남이 그를 판단하며 그가 멍청하다고 해도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피곤해하지 않고 남이 하려 하지 않는 일도 나서서 한다. 누가 “남들은 다 쉬는데 왜 아직도 하고 있어요?”라며 비웃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 좀 더 하는 게 어때서요? 힘들지도 않아요. 일한다고 힘들어서 죽기라도 하겠어요? 하기 싫은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세요. 저는 할 수 있는 만큼 더 할 거예요.” 그는 그런 것들은 따지지 않는 데다가 몸소 나서서 행동한다. 이해득실을 별로 따지지 않고 체면이 서는지 서지 않는지, 지위가 높은지 낮은지도 잘 따지지 않으며 자신이 손해를 봐도 언급하지 않는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자발적으로 도와주고 속셈이나 목적 없이 돕는다. 남이 그에게 빚을 갚으려고 해도 그는 조금 도와주는 건 별것도 아니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도와주고 나서 상대방이 감사히 여기지 않아도 신경쓰지 않고, 도와줄 일이 생기면 또 돕는다. 이런 부류가 많으냐? (많지 않습니다.) 이런 부류는 많지 않다. 이런 부류는 충후하긴 하지만 처신할 때는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늘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하고 그를 바보로 생각하며, 이익을 취하고 나서는 듣기 좋은 말로 구슬린 뒤 얼마 지나면 또 그에게서 이익을 취한다. 그는 그 사람이 계속 그러는 것을 보고도 따지거나 논쟁하거나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그런 부류가 좋은 사람이 아니며 어울리기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속으로 알아차리고는 더이상 상대하지 않는다. 그래도 뒤에서 판단하지는 않고, 기껏해야 그 사람이 어떠냐고 누가 물을 때 “그 사람은 남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걸 좀 좋아해요.”라고 답할 뿐이다. 그는 거짓말을 보태지도 않고 혈기에 차서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이다. 충후한 부류의 인성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의 장점은 별로 계산적이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 혈기나 기분,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고 다해야 하는 책임을 다할 뿐이라는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관계의 범위 내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며 온 힘을 다해 성심성의껏 남을 돕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저 겸사겸사 도와줄 뿐이야. 당신은 내게 빚진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 내게 진 빚을 평생 못 갚을 거라는 생각에 늘 내 앞에서 비굴해지거나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고. 그럴 필요 없어.’ 이런 사람은 사람들 무리에서 인성이 가장 좋고 간사하지 않으며 남에게 야박하게 굴지도 않는다. 그는 마음이 따뜻하고 인성에 선량한 측면이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서서 하고 개인의 득실을 별로 따지지 않으며 대가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인성의 장점이다. 너희 주변에 누가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라. 만약 이런 인품을 갖추고 있다면 그 부류는 패괴된 인류 중에서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계산적이지 않고 간사하지 않으며 남에게 야박하게 굴지도 않다. 게다가 남을 도울 때 이익을 바라지도 않고 남에게 특히나 관대하며 너그럽게 처신한다. 너그럽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사소한 일을 가지고 끝없이 따지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서 이익을 취한다고 해도 원망을 품지 않는 것이다. 이를 두고 너그럽다고 하며, 이는 인성의 큰 장점이다. 충후한 것이나 너그러운 것 모두 장점이다. 이와 달리 인색하고 의심이 많고 민감하고 편집적인 사람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끝없이 따지고 걸핏하면 성을 낸다. 노발대발하거나 섬뜩할 정도로 정색하기도 한다.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고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복수할지만 생각한다. 이는 모두 정상인이 갖춰야 하는 것들이 아니다. 반면 충후한 부류는 생각 속에 그런 복잡한 일들이 없고 남을 의심하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전부 다 정상인이 갖춰야 하는 것들로서,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특히나 부합하고 인성의 정의감과 선량함의 기준에도 부합한다. 이런 부류와 어울리면 마음이 가볍고 복잡하지 않으며 골치 아픈 일도 별로 없다. 무언가를 경계할 필요도, 상대의 속마음을 추측하거나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가끔 실수로 그에게 상처를 주어도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당연히 어떤 결과를 감당할 필요도 없다. 네가 화가 났을 때 혈기에 차서 욕을 좀 하더라도 그는 그 당시에는 너와 다투고 싸울 수도 있지만 싸운 뒤에는 앙심을 품지도 않고 모함하거나 복수하지도 않는다. 너는 그가 지위를 가지고 나면 너를 못살게 굴거나 네 트집을 잡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툭하면 너를 괴롭힐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의 안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는 그토록 단순하다. 결코 그 일로 인해 너를 물고 늘어지지 않으며 지나간 일은 지나가게 두고, 그 뒤에는 대화할 때도 정상적으로 너를 대한다. 당시에는 화가 나서 너와 다툴지라도 그러고 나서는 네게 앙심을 품지 않는다. 그는 네가 단지 홧김에 과격한 말을 몇 마디 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이해해 준다. ‘화가 났을 때는 누구든지 말을 거칠 게 할 수 있어. 그 사람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게다가 사람은 모두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잖아. 기분이 나쁠 때도 있고 혈기도 가지고 있지. 진정하고 나서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이 패괴 성품을 표출해서 원칙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성하기만 하면 돼.’라며 너를 용서해 준다. 악인처럼 너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거나 끝까지 괴롭히는 일은 없다. 충후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복수심이 없다. 누가 일을 처리하다가 기분을 상하게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할 때도 있지만 결코 인성과 도덕을 위배하여 비열한 수단으로 괴롭히지는 않는다. 설사 그에게 패괴 성품이 있어서 패괴 성품에 기대 말하고 행동하며 예전에 저질렀던 실수를 언급하거나 책망하고 훈계할지는 몰라도, 없는 사실을 날조하거나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 공격하고 복수하지는 않는다. 설사 그가 공격하고 복수하려고 해도, 그에게 그런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있더라도 그의 인성에는 충후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복수하고 싶을 때도 구속을 받아서 결국 분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패괴된 인류로서, 권력을 가진 상황에서 이 정도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이미 훌륭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이런 측면의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 정도 분수조차 잘 지키지 못하고, 공격하거나 복수하지 않는 것조차 실천하지 못한다.

충후한 모습이나 표출은 인성 한 측면의 장점이다. 인성의 이 장점은 사람이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 어느 정도 통제하고 절제하도록 크게 구속하거나 일깨워 준다. 만약 그 충후한 사람이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거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성의 이 장점은 그가 더욱 엄격하게 진리 원칙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반면 간교한 사람은 훨씬 교활해서 충후한 사람과는 달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반성하기는커녕 한술 더 떠서 끝까지 나쁜 짓을 저지르려 한다. 이는 마귀와 다름없고 충후한 사람의 행동 원칙과 완전히 상반된다. 예를 들어, 충후한 사람으로서 이런 인성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말다툼을 할 때도 사실을 근거로 말하고 거짓말을 보태지도 않을 것이며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나쁜 일을 꾸며내지도 않을 것이다. 화가 나서 비방하거나 인격을 모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말다툼을 할 때 교만하거나 흉악한 성품을 표출할 테지만 단연코 그의 양심과 이성, 충후한 인성에 구속받는 상태에서 말을 내뱉을 것이다. 그러니 네게 상처를 입히는 정도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이다. 반면 악인에게는 충후한 인성이 없다. 악인은 어떻게 말다툼을 하느냐? “당신은 음녀이고 창녀예요. 나는 당신의 팔 대조까지 욕하고 저주할 거예요!” 그는 온갖 거친 말과 악담을 퍼붓는다. 이런 자가 바로 악인으로 인품이 악랄하다. 일부 인품이 악랄한 사람은 사실을 근거로 남을 욕하지 않는다. 왜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겠느냐? 그는 양심이 없고 양심의 기준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남을 욕할 때 양심의 제약을 받지 않아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분풀이가 되고 네 마음을 후벼파며 너를 미치도록 화나게 할 수 있는 말을 골라서 한다. 그가 하는 욕에 너는 화가 나서 쓰러질 수도 있다. 이런 부류는 마음이 선량하지 않고 악독함으로 가득차 있다. 악인은 주로 교만함과 흉악함이라는 이 두 측면의 성품을 표출한다. 그가 하는 욕의 본질은 저주를 담고 있고 사탄의 악독함이 가득하며 충분한 살상력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그는 가장 악독한 저주의 말까지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만약 네게 인성이 있거나 네 인성이 충후하다면 너는 그런 욕을 내뱉지 못할 것이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지도 못할 것이다. 네게 양심과 지각, 이성이 있기 때문에 네 양심 안에 있는 선량하고 충후한 측면이 네가 욕을 내뱉지 못하도록 크게 구속하고 통제할 것이다. 누가 너를 욕할 때 너는 부아가 치밀어서 그의 팔 대조까지 욕하고 그에게 지옥에 떨어지라고 저주하고 싶다가도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저주하겠어? 나는 하나님도 아닌데 내 말대로 이루어지겠냐고.’ 너도 상스러운 말로 그에게 반격하고 싶지만 ‘상스럽게 욕을 하면 나 자신도 역겨운데 주위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인격과 존엄이 없는 행동이잖아? 몰상식한 인간 같다고. 난 그런 사람은 되지 않겠어.’라는 생각에 욕을 내뱉지 못할 것이다. 너는 말할 때 상당히 제약을 받는다. 할 수 있는 말도 제한적이어서 기껏해야 “당신은 사탄이고 패괴 성품이 아주 심각해서 구원받을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좋아하시지 않는다고요.”라고 말할 뿐이다. 너는 기껏해야 이 정도 말만 할 뿐인데도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지 않으시고 내 말대로 되는 것도 아니잖아.’라는 생각에 그것조차 자신감 있게 말하지 못한다. 누가 너를 욕하고 18층 지옥에 떨어지라고 저주하면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18층 지옥에 떨어지라니 말이 너무 심하네!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잖아. 말을 살살 해야지!’ 너는 왜 이런 생각이 들겠느냐? 네 인성 안에 있는 것이 악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네가 충후하고 선량하며 네게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너는 아주 이성적으로 말할 것이다. 양심의 범위 내에서 홧김에 과격한 말을 좀 하고 욕은 좀 하겠지만 그런 다음에는 아무리 화가 많이 나도 남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 것이고 살상력도 없을 것이다. 악인은 욕할수록 신이 나지만 너는 욕할수록 화가 나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관두자. 저런 비열한 소인배, 악인은 상종할 가치도 의미도 없으니 다투지 말자고.’ 악인과 다투는 것은 사탄에게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무 효과도 없는 일이니 그와 다투고 따질 필요가 없다. 앞으로 그런 부류를 멀리하면 된다. 네가 그를 해칠 궁리를 하겠느냐? 그에게 복수하고 기회를 틈타 본때를 보여줄 생각을 하겠느냐? 너는 그런 모진 마음을 먹지 못하고 이렇게 말할 뿐이다. “관두자. 저 사람이 욕 몇 마디 했다고 내가 손해를 본 것도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어떤 사람은 ‘어차피 하나님께서는 나를 저주하지 않으셨으니 그가 나를 저주해도 소용없어.’라며 자신을 달래기도 한다. 사실은 네가 양심과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인성이 충후하고 선량하기 때문에 결코 그런 욕설을 내배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더럽고 격이 떨어지는 것을 싫어해서 입으로 그런 말들을 내뱉으면 양심에 반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없는 사실을 지어낸 말이나 사실 무근인 일은 더더욱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것은 너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의 말은 네게 큰 살상력이 있고 네게 상처를 입히는데 그것은 그의 악행이다. 그 악행은 왜 생겨났겠느냐? 그의 인성 안에 악랄한 품성이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나 충돌이 발생했을 때 그의 패괴 성품은 무한대로 팽창하여 그는 거리낌없이 욕설을 퍼붓는다. 그의 이런 악랄한 인품은 자연스레 패괴 성품을 표출한다. 반면 네가 충후하고 선량하며 양심과 이성,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패괴 성품을 발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성이 패괴 성품의 표출을 크게 구속할 것이다. 이는 네게 무척이나 좋은 일이다. 겉보기에는 네가 손해를 보고 불리한 입장에 있으며 그를 이기지 못해 우스갯거리가 된 것 같지만 사실상 네 인성이 네가 악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너를 보호한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너를 보호해 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인성의 장점이 네가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혐오하는 일을 하거나 하나님이 혐오하고 하나님에게 정죄되는 말을 하지 않도록 너를 크게 보호한 것이다. 이는 비록 선행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너는 악을 행하지 않았으니 네 행동은 정죄되지도, 징벌받지도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악인이 악랄한 인품에 지배된 상태에서 하는 행동은 정죄될 뿐만 아니라 징벌도 받을 것이며 그는 그에 따른 결과와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인성의 장점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들에서 겉보기에는 체면과 지위, 존엄을 잃은 것 같고, 특히 주도권을 가지고 이치를 따질 기회를 잃은 것 같지만 그것은 손해를 본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이익을 본 건가요?” 손해를 봤다거나 이익을 봤다는 식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평가해야겠느냐? ‘이 일에서 손해를 본 것은 중요하지 않아. 유익을 얻었다는 게 중요하지.’라고 평가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성의 장점이 네가 악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정죄되지 않게 행동하도록 너를 지켜 주었으니 이는 유익을 얻은 것 아니냐? 악을 행했다는 이유로 징벌받을 일은 없어진 것이다. 이는 네게 좋은 일 아니냐? (좋은 일입니다.) 비록 그것이 네가 자발적으로 한 선행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진리 원칙을 준수한 행위도 아니지만, 인성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인성의 틀 안에서 진리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일을 했으니 보호받은 것이다. 기억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죄되지는 않을 것이니 너는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아도 되고 징벌받을 필요도 없다. 이는 좋은 일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네 행동이 진리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바라보든 최소한 너는 스스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설사 하나님에게 기억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에게 정죄되고 증오받지는 않아야 한다. 이는 네가 최소한 준수해야 하는 원칙이다. 인성의 장점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너는 인성의 장점을 좀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늘 남들에게서 이익을 취하지도 못하고 이득을 얻을 수도 없다고, 좋은 건 다 남이 가져가고 너는 늘 손해만 본다고 언짢아해서는 안 된다. 손해 보는 게 뭐가 나쁘냐? 최소한 네가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준 고유한 것이고 너는 남의 것을 차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남에게서 이익을 취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남의 몫을 빼앗아 온 것이고 네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빼앗아 온 것이니 하나님은 정죄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정죄될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어떤 일들을 해야 하나님께 기억될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정죄될 일이 무엇인지는 아느냐? 무엇인지 안다면 적어도 그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은 지켜야 한다. 하나님에게 정죄될 일은 하지 마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런 일들은 많이 얘기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대다수 사람은 인성에 충후한 측면의 장점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로 이런 측면의 장점을 갖추고 있다면 그 사람은 패괴된 인류 가운데 보기 드물게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네가 만약 정말로 이런 측면의 장점을 갖추고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축복할 것이고 네게 이런저런 은총을 베풀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여러 방면에서 너를 보살필 것이다. 어떻게 보살피겠느냐? 네가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자신의 이익을 버리더라도 다른 사람은 네게서 이익을 취할 것이나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서는 축복을 얻지 못할 것이고 그저 남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것에 기대어 살아갈 것이며 다음 생에도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반면 너는 하나님의 축복에 기대 살아갈 것이다. 남이 네게서 이익을 취하더라도 사실상 너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말해 보거라. 이는 좋은 일 아니냐? (좋은 일입니다.) 보다시피 충후한 사람은 겉보기에는 늘 손해를 보는 것 같다. 남들은 어수룩한 그의 모습을 보고는 말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늘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고 항상 그를 바보로 대하며 괴롭힌다. 게다가 그에게서 돈과 이득을 챙기고 수많은 물건을 빼앗는다. 하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 그는 무엇이든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고 일을 처리할 때도 똑똑하고 지혜로우며 걱정이 없다.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을 맡겨도 그는 득실을 따지거나 다투어 빼앗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며, 무슨 일을 처리하든 거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비록 가끔씩 작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긴 해도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일을 처리할 때도 상당히 마음을 쓰고, 양심과 이성을 거스르지 않는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 충후한 것이 인성 한 측면의 장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처신할 때 이런 측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시시콜콜 따지지도 말고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트집쟁이처럼 굴지도 마라. 그런 부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이 네게서 이익을 취해도 괴롭힘당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좀 어수룩하다고 나쁠 게 뭐가 있느냐? 어떤 사람은 꿍꿍이가 너무 많아서 늘 자신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저를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저는 똑똑하다고요! 누가 저를 좋아하지 않고 제게 못되게 구는지 다 봤어요. 누가 저를 무시하고 말끝마다 비아냥거리면서 은근히 저를 비꼬는지 다 들었다고요.” 네가 보고 들어서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그건 잔꾀이고 꿍꿍이일 뿐이다. 그 정도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네가 지혜롭고 정말 똑똑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너를 무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깟 꿍꿍이와 속셈은 동물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동물과 가까이 접촉하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작은 동물도 좋은 말을 하는지 나쁜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듣는다. 강아지도 듣기 싫은 말을 하면 바로 기분 나빠하고, 분명하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면 그것도 곧장 알아듣는다. 사람이 만약 작은 동물도 갖추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한다면 자신의 속성을 낮추는 것 아니겠느냐? 피조된 인류를 평가하는 기준을 낮춘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몸값을 낮추는 것이다. “저를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저는 세 살배기 아이가 아니라고요. 찐빵 따위는 절대 안 먹어요. 만두를 갖다주세요. 나도 만두가 맛있다는 걸 안다고요!”라고 말하지 마라. 이런 멍청한 말로 자신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지 마라. 만약 네가 정말로 멍청하지 않다면 너는 인성의 기준에 미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람이 양심과 이성 안에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하는지, 어떤 모습이 인성의 장점인지, 어떤 모습이 인성의 결점이나 나쁜 인품인지 등의 측면에 관해 교제하고 인식해라. 사람의 인성이 갖춰야 하는 것, 피조된 인류가 갖춰야 하는 것을 교제한 다음 그 측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것들을 갖춘다면 네 몸값이 오르지 않겠느냐? 늘 세 살배기 아이와 지능을 비교하면 발전이 있겠느냐? 성장할 수 있겠느냐? 세 살배기 아이가 “저는 플라스틱 젖병으로 우유를 마실 수 있어요.”라고 하면 너는 “나는 유리병으로도 우유를 마실 수 있어. 손을 데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라고 한다. 세 살배기 아이가 “저는 신발을 신을 때 왼발과 오른발을 구분할 수 있어요.”라고 하면 너는 “나는 스웨터를 입을 때 앞뒤도 구분할 수 있어. 너도 그럴 수 있어?”라고 한다. 이래서 발전이 있겠느냐? 만약 네 지능과 인품, 인성이 갖춰야 하는 여러 측면의 능력이 늘 세 살짜리 어린이나 미성년자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너는 성숙한 사람이 되거나 남에게 어른으로 대접받기 어렵다. 어떻게 해야 남에게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느냐? 어른이 해야 하는 일, 피조된 인류가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고 피조된 인류가 갖춰야 하는 인성을 갖춰야 한다. 이 인성은 최소한 무엇을 갖춰야 하느냐? 양심과 이성, 그리고 여러 측면의 좋은 인품을 갖춰야 한다. 그러면 인성의 결함과 문제가 점차 변화하고 개선되어 진리에 진입하는 일이 훨씬 쉬워지고 장애물도 줄어들 것이다.

충후하다는 인성의 장점은 상당히 드물고 대다수 사람이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런 측면의 장점을 갖출 수 있겠느냐?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한 상태라면 인성의 이런 장점을 갖추기 어렵고 이런 사람이 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일부 진리를 이해하고 나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생기고 이런 사람이 될 희망이 생긴다. 그럴 수 있을지, 최종적으로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생명 진입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런 측면의 장점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누가 네게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 혈기나 감정에 휘둘려서 상대해서는 안 된다. 그가 무슨 뜻으로 네게 그렇게 하는지, 네게 얼마나 큰 해를 입히는지, 네 체면을 얼마나 많이 구기는지를 분석해서도 안 된다. 머리나 사람의 뜻, 혹은 처세 철학에 기대 그런 일들을 대하지 마라. 그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대해야 한다. 어떤 환경 안에서 어떤 사람을 마주하든 그 사람과 함께 대화하고 어울리고 구체적인 일을 처리할 때 너는 진리 원칙을 구하고 진리 원칙에 기대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인성을 개선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즉, 네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어느 정도 보조적 역할을 할 것이며 네가 정의감을 가지도록, 올바른 위치와 시각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를 두고 개선이라고 한다. 개선은 바로 원래 좋지 않았던 네 인성을 좋게 바꾸고 정상화하는 것이다. 그럼 원래 좋지 않았던 인성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패괴 성품에 영향받고 지배된 것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처신하고 행동한다. 그러니 네가 행동할 때 네 인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부터 상당히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 영향이 바로 개선이다. 물론 이 개선은 한 가지 일을 통해 네 인성을 변화시키고 인격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장기간 실행하고 체험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행동의 준칙과 방식, 방향으로 삼다 보면 너는 점점 더 진리를 깨닫게 되고 갈수록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게 된다. 이로써 네 인성은 점차 변화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너는 갈수록 양심적으로 변하고 선량해지며 정의로워진다. 이성도 점점 더 정상화되고 혈기에 휘둘리거나 충동적으로 굴지도 않게 된다. 그러면 인성이 패괴 성품을 갈수록 강력하게 구속하게 된다. 이런 인성의 조건을 토대로 패괴 성품의 표출에 대한 구속력도 갈수록 강화되고 더 강력해진다. 그러면 점점 패괴 성품을 덜 표출하게 되며 표출하는 정도도 약해진다. 하는 행동이나 드러내는 관점은 갈수록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 원칙에 부합하게 된다. 이런 현상과 표출이 바로 사람의 생명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 인성이 갈수록 정상화되고 패괴 성품의 표출이 점점 더 줄어들어 차츰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게 된다. 이는 하나의 선순환이다. 그러나 사탄의 논리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 인성이 크게 망가지고 타락할 것이며 패괴 성품은 갈수록 커지고 심각해질 것이다. 이는 악순환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선순환이다. 반면 사탄의 논리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 사람은 결국 악순환하는 생활과 테두리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며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선순환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바로 인성의 결함과 패괴 표출에서부터 시작하여 반성하고 자신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여,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성과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은 선순환에 들어갈 것이고 인성은 갈수록 정상화될 것이며 너는 패괴 성품을 점차 변화시키고 벗어 버릴 것이다. 이게 바로 생명 진입의 과정이자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구원에 도달하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물론 이는 한 측면의 진입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하는 이런 인성의 결함과 흠, 그리고 인품이 악랄하고 인격이 미천한 문제들이 자신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마땅히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거나 진리를 실행하는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러면 선순환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인성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패괴 성품도 벗어 버릴 것이며 네가 의지해 생존하는 패괴 성품의 뿌리도 변화하는 수확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지 못한 채 속으로 ‘당신은 나더러 인색하다고 하고, 편집적이고 뻔뻔하고 의심이 많다면서 내 인성의 결함과 흠을 지적하지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냥 이렇게 살 거고 변할 생각도 없으니까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어차피 난 손해 보기 싫고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상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불행하게도 너는 악순환의 구렁텅이에 빠져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하겠느냐? 아마 너도 원치 않는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건 바로 네 패괴 성품이 영원히 네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평생토록 너를 단단히 얽매고 네 생각과 영혼 깊은 곳에 깊숙이 뿌리내려 너는 결코 벗어 버리지 못할 것이다. 벗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너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해 놓은 종착지에는 네 몫이 없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결말이다. 이런 결말을 보고 싶지 않다면 내가 말한 방법에서부터 시작해 진입하고 실행하여 선순환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결국 틀림없이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오늘은 많은 주제를 교제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내용을 다루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른 측면의 주제와 내용은 나중에 이어서 교제하겠다. 또 보자!

2023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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