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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하나님의 권병 (1)

지난번,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주제로 교통하였다. 교통 후에 너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는 바가 생기지 않았느냐? 그 이해와 인식의 정도가 얼마나 되느냐? 너희는 속으로 알고 있지 않느냐? 지난 몇 차례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과연 너희가 하나님의 본질 전체와 속성까지 인식하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는 확실하다. 왜냐하면, 지난 몇 번의 교통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대해 이해한 것은 전부가 아닌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 몇 번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이 일찍이 행했던 사역의 일부에 대해 이해하고, 또 그런 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그리고 하나님이 매사에 취하는 태도와 생각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문자나 말로만 이해한 것일 뿐, 그 내용에 과연 실제적인 부분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 내용의 실제적인 부분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주로 무엇에 의해 결정되느냐? 그것은 사람이 실제 경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체험했는지, 실제로 얼마나 보고 얼마나 알게 되었는지에 달려 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이 있느냐? “지난 몇 차례의 교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행한 사역, 하나님의 생각을 다 이해했고,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사역의 출발점 그리고 사역하는 원칙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전부를 이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과연 맞느냐? 확실히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맞지 않다고 할까? 하나님이 행한 사역, 하나님이 한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며, 또한 하나님의 속성이 발현된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저 그러한 사역과 말씀이 하나님의 일부 성품과 속성만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더 많이 더 깊게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더 많은 말씀과 사역을 체험해야만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체험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그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대표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본질을 대표하지 않느냐? 물론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대표하며, 하나님의 본질도 대표한다.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역하고 어떤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며, 어떤 방식으로 그의 마음을 표현하든, 그가 나타내고 보여 주는 것은 다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며, 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으로 사역하고, 자신의 진정한 신분으로 사역하는 것은 더 없이 확실하다. 하지만 사람이 현재 그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교통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일부를 이해하는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일부는 이론적인 인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실제 상황으로 볼 때, 사람마다 실제 경험 속에서 조금씩 체험해야 오늘 듣고 보게 된 것이나 마음으로 인식하고 깨달아서 얻은 하나님의 대한 이해와 인식을 입증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너희와 이러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체험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겠느냐? 그것은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만 사람이 어떻게 경험할지 알게 되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먹었는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길을 이끌고 사람이 경험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번 몇 차례에 걸친 교통은 진실된 체험이 있는 사람이 진리를 더 깊이 깨닫고, 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체험이 없는 자, 혹은 막 체험하기 시작한 자, 이제 막 실제적인 것을 접한 자에게는 커다란 검증이 될 것이다.

지난번 교통했던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이야기한 모든 내용 중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부분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지난 몇 번의 교통을 통해, 너희는 그러한 사역을 할 수 있고, 그러한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분은 만물을 주재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 만일 너희가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너희는 무엇을 통해 그것을 확신한 것이냐? 몇 가지 측면에서 인정한 것이냐?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지난 몇 번의 교통의 내용은 확실히 너희를 움직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마음속에서 새롭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는 참 긍정적이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이전에 비해 장족의 발전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신분에 대한 너희의 정의는 여전히 율법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은혜시대의 주 예수의 이름에 머물러 있다. 또한, 하나님나라시대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 자신’이라는 이 주제에 대한 교통을 통해, 너희에게 하나님이 이전에 했던 말씀, 행했던 사역, 나타내 보인 속성에 대한 일련의 이해가 생겼다 할지라도, 너희는 결코 ‘하나님’이라는 이 명사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와 확실한 자리매김은 할 수 없다. 하나님 자체의 지위와 신분이 바로 하나님의 만물, 전 우주에서의 지위라는 것에 대해서도 너희는 제대로 된 자리매김도, 정확한 인식도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에 대해 교통한 모든 내용은 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일찍이 보여 주고 나타냈던 것에 기초한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동시에, 이 외에 하나님이 나타내고 보여 준 속성은 다 사람이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이 이전에 행한 사역 가운데 나타낸 속성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에 대해 너희가 내린 정의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하나님, 만물을 주재하는 그분과는 거리가 있고, 창조주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번의 교통을 통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는가? 만일 누군가 정말 안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일 것이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생각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만이 또 자신이 사역을 할 때의 자세와 출발점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가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그것이 확실히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고 사람의 일이 아니며, 사람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느냐? 또 이 모두가 하나님의 본질과 능력을 지닌 그분이 주재할 수 있는 것임을 볼 수 있느냐? 즉, 너희는 어떠한 특징과 본질로써 그가 바로 하나님의 신분을 갖고 있는 하나님 자신이고, 만물을 주재하는 그분이라는 것을 확신하느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가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을 말해 준다. 지난 몇 차례의 교통을 통해, 너희는 단지 하나님이 예전에 사역했던 그 기간의 역사(歷史)와 하나님이 이전의 사역에서 취했던 태도, 나타내고 보여 주었던 것에 대해 조금 이해했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런 이해를 통해, 사람은 확실하게 그 두 단계의 사역을 행한 분이 바로 너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너희가 영원히 따라야 할 그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너희는 그가 바로 창세 이래로 존재하고 영원까지 존재하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없으며, 그가 바로 전 인류를 인도하고 주재하는 그분이라는 것 또한 확신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여호와도 좋고, 주 예수도 좋다. 너희가 어떤 측면의 본질과 구현을 통해, 그가 바로 너희가 따르려고 하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류를 관장하고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그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더욱이 천지 만물을 주재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너희는 어떤 채널을 통해 너희가 믿고 따르는 분이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 어떤 채널을 통해 너희가 믿는 하나님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하나님과 함께 연관시킬 수 있으냐? 무엇을 통해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천지 만물 가운데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하느냐? 이것은 바로 내가 아래에서 얘기할 주제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너희가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 혹은 생각할 수 없었던 문제는 아마도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 속에서 사람이 짐작할 수 없는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가 너희 앞에 맞닥뜨리게 되어 너희가 직면해야 하고 선택해야 할 때, 만일 너희의 우매함과 무지함으로 인해, 혹은 너희의 경험 부족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들이 철저하게 해결되지 못하면, 그 문제들은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복병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이 부분에 대한 교통이 반드시 필요하리라고 본다. 너희는 이제 너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말하는 문제를 확실하게 이해했느냐? 이러한 문제들은 너희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들이 아니냐? 너희가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냐? 너희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문제가 아니냐? 이러한 문제가 너희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으냐? 진정한 문제가 아니냐? 너희 마음속에 이러한 일에 대해 모호하다는 것은 너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너희가 그에 대한 진지한 태도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말했다. “저는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무엇을 증명할 게 있겠습니까? 설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단 말입니까? 설마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해 봐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하나님 자신의 신분에 대해 의문을 품어야 한단 말입니까?” 너희가 이렇게 생각하든 안 하든, 요컨대, 내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시험하게 함도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함도 아니다.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본질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지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고자 함이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유일한 존재가 되게 하고, 또한 모든 피조물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지위(창조주, 만물의 주재자,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를 회복하고자 함이다. 이 또한 내가 다음으로 교통하고자 하는 주제인 것이다.

이제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1.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유를 창조하다

1) (창 1:3~5)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2) (창 1:6~7)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고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래도 되니라”

3) (창1:9~11)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4) (창1:14~15)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5) (창1:20~21)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6) (창1:24~25)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첫째 날, 인류의 낮과 밤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세워지다

우선 첫 번째 단락을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이 단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면서 행한 첫 번째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첫 번째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던 하루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평범하지 않은 하루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위해 빛을 예비하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다. 이날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되었다. 그의 말씀과 권능은 공존한다. 그의 권능은 만물 가운데서 드러났고, 그의 능력은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서 펼쳐졌다. 이날부터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권세,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권세,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운행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빛이 있으라’ 이 말씀이 있자, 빛이 생겼다. 하나님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사람이 여전히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낮이라 명명된 ‘빛’이다. 하나님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자신의 본질과 가치를 바꿔 본 적이 없다. 또한 사라진 적도 없다. 그것의 존재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창조주의 존재를 알리고 있으며, 반복적으로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공허하지도 아득하지도 않으며, 사람들이 진짜로 볼 수 있는 빛이다. 이로부터 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모호함으로 뒤덮인 세계에 첫 번째 물질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빌어 만물 가운데 출현함으로써 만들어진 서막이었다. 이어서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변화되고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명명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였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만들고자 한 세계의 첫 번째 저녁과 첫 번째 아침이 생겨났으며, 하나님은 이날을 첫째 날이라 칭하였다. 이날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한 첫 번째 날이며, 또한 만물 창조의 시작이고,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이 그가 만든 이 세계에서 첫 번째로 나타난 날이다.

이 단락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고, 하나님 말씀의 권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준다. 하나님만이 이러한 능력을 지녔으므로, 하나님만이 이러한 권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이러한 권세를 지녔기에 하나님만이 이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권세와 능력을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갖출 수 있겠느냐? 너희 마음속에 이에 대한 답이 있느냐? 하나님을 제외하고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이 이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느냐? 너희는 어떤 책이나 간행물에서 이러한 사례를 본 적이 있느냐? 누군가가 유사 이래로 천지를 창조한 기록이 있느냐? 이것은 책이나 어떠한 기록에도 없으며, 물론 성경에서도 이것은 역시 유일한 기록이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위세가 드높고 권능과 위력을 지닌 말씀의 일부인데, 이 부분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권능을 대표하며,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신분을 대표한다. 이러한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신분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냐? 그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유일하게 지닌 권세와 능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권세와 능력은 그 어떤 피조물과 비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대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만의 한 특징이 아니냐? 이것을 너희는 보았느냐? 이 부분의 말씀을 통해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하나님이 유일무이한 권세와 유일무이한 능력을 가졌고, 지극히 높은 신분과 지위를 가졌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상의 교통을 통해,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둘째 날, 하나님이 권능으로 물을 지배하고 궁창을 창조하사,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공간이 만들어졌다

계속해서 두 번째 단락의 성경 구절을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 1:6~7). 하나님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고 말씀한 후에 어떤 변화가 생겼느냐? 성경에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뉘게 하시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일을 하자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바로 이 단락의 마지막 말씀이다. “그대로 되니라”

짧은 이 두 구절에 기세가 웅장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물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인류의 생존 공간을 창조하였는지, 이 놀라운 위업, 멋진 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물과 궁창은 순식간에 하나님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아 갈라졌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위와 아래로 나뉘어졌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궁창이 아래쪽 물 위를 덮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위쪽 물까지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창조주가 물을 움직이고 물을 다스리고 궁창을 창조한 장관이나 하나님이 보여 주는 권세의 위력은 놀랍고 찬미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말미암아 또 한 번의 위업이 달성되었다. 이것이 창조주 권능의 위력이 아니겠느냐?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행사를 해석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물 가운데에는 그의 말씀에 따라 궁창이 생겼고, 아울러 이 공간에는 하나님의 한 마디 말씀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이 변화는 일반적 의미의 변화가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일종의 교체로서, 그것은 창조주의 생각으로 생겨난 것이다. 창조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인해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고, 그때부터 그것은 창조주를 위해 존재하고 세워지며, 창조주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며 새로워진다. 이 단락에서 기록한 것은 창조주가 행한 천지 창조의 두 번째 사건으로서,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이 또 한 번 발현된 것이자 창조주의 위업이다. 이날은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하며 보낸 둘째 날이자, 창조주가 보낸 또 하나의 멋진 하루였다. 하나님이 빛 속을 거닐며 궁창을 가져오고 모든 물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날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능력이 운행되었다…

하나님이 말씀하기 이전에 물 가운데 궁창이 있었느냐? 물론 없었다. 하나님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고 말씀한 후에는 어떠했느냐? 하나님이 원하던 것이 나타나 물 가운데 궁창이 생겼고, 물 또한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위아래로 나뉘어졌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에 신선하고 새로운 두 가지 사물이 출현하였다. 그러면 그 두 가지 새로운 사물의 출현에 대해 너희는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창조주 능력의 위대함을 느꼈느냐? 창조주의 유일무이하고 비범한 기개를 느꼈느냐? 그러한 기개, 그러한 능력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 권능은 하나님 자신의 대언이자,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있는 특징인 것이다.

이 단락의 말씀에서 너희는 또 한 번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을 감명 깊게 느끼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너무 부족한데,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은 그의 본질이 그 어떤 피조물의 본질과도 다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이 비범하고 무한하여 모든 것을 초월하며 모든 것의 위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권세와 속성(원문: 所有所是)이 생명과 기적을 만들 수 있고, 멋지고 특별한 매 순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하나님 역시 자신이 창조한 생명을 주관하며, 자신이 만든 기적과 일분일초의 매 순간을 주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날, 땅과 바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겨났으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생기로 가득 찼다

계속해서 다음 단락 창세기 1장 9절에서 11절 말씀의 첫 구절을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하나님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고만 했을 뿐인데,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느냐? 빛과 궁창 이외에 그 공간에 또 무엇이 생겼느냐? 성경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는 바로 그 공간에 또 육지가 생기고 바다가 생긴 것, 다시 말해 물과 육지가 나뉘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사물의 출현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에 “그대로 되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이러한 일을 하던 기간에 바쁘게 보냈다고 기록된 것이 있더냐? 하나님이 손을 댔다고 기록된 것이 있더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한 것이냐? 하나님은 어떻게 그 새로운 사물이 생겨나게 했느냐?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었고, 그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구절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큰 사건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나고 생겨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순차적으로 하나님의 눈앞에 나타났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루어지라 하면 반드시 이루어지고, 세워지라 명하면 그대로 세워진다.”라는 이 말씀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 본질은 하나님의 생각이 시작되던 그 순간에 증명되었으며, 하나님이 말씀하는 가운데 충분히 구현되었다.

계속해서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하나님이 말씀하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생겨났다. 순식간에, 형태가 각각인 여린 작은 생명들이 흙 속에서 꼬물꼬물 올라와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몸에 묻은 흙을 채 털어 내기도 전에 너도나도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그들은 창조주가 부여해 준 생명에 감사를 표하고, 그들 모두가 만물의 일원임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또한 그들은 창조주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해 그들 각자의 생명을 바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땅에는 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났고, 사람들에게 제공될 각종 채소가 흙을 뚫고 무럭무럭 자라났으며, 산과 들판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숲이 울창하였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밋밋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풀, 채소와 나무 등 각종 식물들로 둘러싸여 초록빛을 한가득 머금게 되었다… 공기는 풀꽃 향기로 그윽하고, 흙내음이 물씬 풍기며, 각종 식물들은 공기를 통해 숨을 쉬면서 자신들의 성장 과정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에 따라 모든 식물들은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싹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고 번식하는 일련의 생명 여정을 시작하였다. 각자 생명의 궤적을 지키며, 만물 중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두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나고,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된다. 또한 창조주에게서 계속 자양분을 공급받을 것이고,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이 땅 곳곳에서 강인하게 살아갈 것이며, 이를 통해 창조주가 부여해 준 생명력을 영원히 세상에 알릴 것이다…

창조주의 생명은 비범하고 그의 생각은 비범하며 그의 권능은 비범하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이 있자 최후의 결과는 늘 “그대로 되었다”. 확실히 하나님은 일을 할 때 손댈 필요 없이, 생각으로 지휘하고 말씀으로 명령하기만 하면 일은 곧 그대로 되었다. 그날 하나님은 물을 한곳으로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한 다음, 뭍에 풀이 자라나게 하였고,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도 자라게 하였으며, 그것들을 각기 종류대로 분류하고 열매마다 씨를 품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분부대로 이루어져 계속해서 이 새로운 세상에 나타났다.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이 그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기 시작할 때, 바로 하나님이 그 그림의 내용을 말씀으로 표현할 때,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의 권세를 어떻게 행사하든, 일은 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한 단계씩 이루어졌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권세로 말미암아 한 단계씩 변화되었다. 그 모든 변화와 발전은 창조주의 권세를 나타내고, 또한 창조주 생명력의 비범함과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단순한 구상도, 공허한 그림도 아니며, 생명력과 엄청난 능력을 지닌 권능이며,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소생시키고, 새롭게 하고, 소멸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다 그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며, 동시에 그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물이 아직 생겨나기 전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완전한 구상과 아주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비록 셋째 날 땅에 각종 식물들이 자라났을지라도, 하나님은 천지 창조의 발걸음을 멈출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계속 말씀으로 자신이 창조하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새로운 사물을 만들었다. 그는 말씀하고 명령하고 그의 권세를 행사하고 그의 능력을 보이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만들고자 한 만물과 인류를 위해 구상한 모든 것들을 예비하고 있었다…

넷째 날, 하나님이 또 한 번 권능을 행사하자

인류의 계절과 날짜와 연도가 탄생되었다

창조주는 말씀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면서 그렇게 자신이 계획했던 처음 3일을 보냈다. 그 3일 동안, 하나님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기진맥진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했던 첫 3일을 멋지게 보냈고, 상전벽해처럼 변화무쌍하게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었다. 새로운 세상이 하나님의 눈앞에 나타나고, 하나님의 생각 속에만 봉인되어 있던 그림이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조금씩 펼쳐졌다. 모든 새로운 사물의 출현은 마치 신생아가 태어나는 것과도 같았다. 창조주는 그의 생각 속에 있던 것이 막 현실이 된 그 광경을 흐뭇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마음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창조주의 그 새로운 페이지의 계획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는 또 무슨 말씀을 하였을까? 그의 권세는 또 어떻게 행사되었을까? 아울러, 또 어떤 새로운 사물이 이 새로운 세상에 왔을까? 창조주의 인도에 따라 우리의 눈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넷째 날에 머무는데, 이 하루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물론 창조주에게 있어 그것은 틀림없이 또 하나의 멋진 하루이자 현 인류에게도 역시 대단히 중요한 하루이며,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하루였다. 그날이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중요하며, 또 헤아릴 수 없는 가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먼저 창조주의 말씀을 들어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창1:14~15). 이것은 하나님이 뭍과 그 위의 식물을 만든 후에, 또 하나의 피조물에서 보여진 하나님 권능의 행사이다. 이런 일이 하나님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말씀하면 그대로 지키고, 지키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하늘 궁창에 광명체가 있으라고 명령하니, 그 광명체는 하늘에서 빛을 발해 땅을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낮과 밤, 계절과 날짜와 연도를 구분하는 기호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순간, 하나님이 이루고자 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방식대로 이루어졌다.

‘하늘 궁창의 광명’은 상공에서 빛을 발하는 물체로서, 그것은 하늘도 비추고 땅과 바다도 비춘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한 속도와 빈도로 회전하며, 다른 시간대에 땅을 비춘다. 이와 같이, 동서의 낮과 밤은 이 광명체의 회전 주기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낮과 밤에 대한 표시일 뿐만 아니라, 다른 회전 주기로 인류의 절기와 각종 날짜에 대한 표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명한 춘하추동의 사계절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인류에게 계절과 날짜와 연도를 나타내는 규칙적이고 정확한 기호가 된다. 인류는 경작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하나님이 만든 광명체가 구분해 주는 계절, 날짜, 연도를 알아보고 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인류가 오늘날 알고 있는 계절, 날짜, 연도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넷째 날부터 있었고, 인류가 경험하는 춘하추동의 교체 주기 역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넷째 날에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광명체로 인해 사람들은 낮과 밤을 규칙적이고 정확하며 분명하게 구분하고 날짜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고, 절기와 연도를 아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달이 둥글어지는 날, 즉 달이 차서 한 달이 되는 날에 사람들은 광명체가 비추는 새로운 주기의 시작을 알게 되고, 달이 이지러지는 날, 즉 한 달의 절반이 되는 날이면 사람들은 새로운 절기의 시작을 알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밤낮이 하나의 계절이 되고, 얼마나 많은 계절이 1년이 되는지 아주 규칙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인류는 광명체의 운행으로 표시되는 계절, 날짜, 연도를 매우 쉽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류와 만물은 자연스럽게 광명체의 운행으로 만들어지는 낮과 밤의 교체, 사계절이 바뀌는 규칙 가운데서 살게 되었다. 이 역시도 창조주가 넷째 날에 광명체를 만든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그 일을 통해 이룬 목표와 의의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든 광명체와 그 광명체들이 장차 인류에게 가져다줄 가치 역시 창조주가 행사한 권능의 또 하나의 걸작인 것이다.

인류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세계에서, 창조주는 이미 자신이 곧 만들 새 생명을 위해 ‘아침과 저녁’, ‘공기’, ‘땅과 바다’, ‘풀과 채소, 그리고 각종 나무’, ‘광명체와 계절, 날짜, 연도’를 예비하였다.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은 그가 창조한 모든 새로운 사물 가운데서 발현되었고, 그의 말씀과 실제가 함께 가니 한 치의 오차도 없고 조금의 간극도 없었다. 그 모든 새로운 사물의 출현과 탄생은 다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즉, 말씀을 했으면 그대로 지키고, 지키면 반드시 이루어지며, 이루어지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뀐 적이 없으며,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지금 다시 성경의 이 말씀을 보면, 너희는 매우 새롭게 느껴지지 않느냐? 너희는 새로운 내용을 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것은 창조주의 행사가 너희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권세와 능력을 알도록 인도하고 또한 너희에게 창조주를 알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며, 그의 행사와 권능이 이런 말씀과 생명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사람들은 창조주의 권능이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창조주의 지고지상함을 보게 되었으며,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의 뛰어남을 보게 되었다.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은 기적이 연속되게 만들었고, 사람의 이목을 끌었으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여 주는 하나하나의 놀라운 행사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비범한 능력은 인류에게 계속 놀라움과 기쁨을 선사하여 사람들이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정도로 기뻐하고, 찬양하며, 갈채를 보내게 만들었다. 더욱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사모하고 경외하는 마음과 애틋함이 생기게 했다. 창조주의 권능과 행사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였으며, 더욱이 사람의 마음을 흡족게 하였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 모든 음성, 발현된 하나님의 모든 권능은 다 만물 가운데의 걸작으로서, 피조물인 인류가 가장 깊이 알고 인식할 가치가 있는 놀라운 위업인 것이다. 창조주의 말씀으로 탄생된 모든 피조물을 하나하나 짚어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기묘한 능력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창조주의 발자취를 따라 다음날, 즉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다섯째 날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다음 성경 구절을 보면서 창조주가 또 어떤 일들을 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다섯째 날, 다양한 형태의 생명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창조주의 권능을 보여 주었다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0~21). 성경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날에 하나님은 각종 수중 생물들을 만들고, 땅 위에는 각종 새들을 만들었다. 즉, 어류와 날짐승들을 만들고, 아울러 하나님이 그들을 각기 종류대로 되게 하니, 땅 위와 하늘과 물속이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풍요로워졌다…

하나님이 말씀하자, 순식간에 형태가 각기 다른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이 창조주의 말씀 속에서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팔딱팔딱 뛰면서 기쁨에 차 환호하며 이 세상에 왔다… 물속에서는 각종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각양각색의 패류들이 갯벌에서 자라며, 비늘 달린 생물, 갑각류, 그리고 각종 연체 생물들이 물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경쟁하듯 자라났다. 그들은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들로 어우러져 크기도 다양했다. 거기다 각종 해조류들도 마찬가지로 서로 앞다투어 자라났으며, 수중 생물들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거렸다. 그들은 몸을 흔들며 그 고요한 물에 다그치듯 말하는 것 같았다. “힘차게 흘러라! 네 친구들과 함께. 이제 너는 외롭지 않아!” 하나님이 만든 수중 생물들이 물속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그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은 오랜 세월 침묵하던 바다에 생기를 불어넣고 신기원도 열어 주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함께하면서 서로를 구분 짓지 않았다. 물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물들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이 품고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고, 그 각각의 생명들 또한 물이 공급해 주는 자양분으로 말미암아 물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각자의 생명을 바치며,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창조주의 오묘함과 위대함을 증거하고, 넘을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을 증거하고 있다.

바다가 더 이상 고요하지 않게 되면서 공기 중에도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새들이 땅에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들이 수중 생물과 다른 점은 깃털이 가득 나 있고, 두 날개가 있으며, 우아한 자태와 가벼운 몸놀림을 가졌다는 것이다. 새들은 두 날개를 퍼덕이며 의기양양하게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화려한 겉모습, 특별한 능력과 재주를 한껏 과시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롭고 능숙하게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다니고, 들판과 숲속을 누비고 있다… 새들은 하늘의 총아이자 만물의 총아로서, 곧 하늘과 땅의 연결체가 되어 만물에게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들은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날아다니며 휑하니 비어 있던 세상에 기쁨과 웃음소리를 채워 넣었고, 생기와 활력도 불어넣었다. 그들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마음의 소리로,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부여해 준 생명을 찬미한다. 그들은 즐거운 춤사위로 창조주의 완벽하고 놀라운 창조를 자랑하며, 창조주로부터 받은 특별한 생명으로 창조주의 권능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일생을 바친다…

수중 생물이든 공중을 날아다니는 생물이든, 다 창조주의 분부에 따라 구조가 다른 생명체로 살며, 또 창조주의 분부에 따라 무리 지어 그들 각자의 부류 속에서 살아간다. 그 규칙과 법칙은 그 어떤 피조물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감히 창조주가 정해 준 영역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며, 또한 그 범위를 벗어날 수도 없다. 그들은 창조주가 정해 준 숙명 속에서 대를 이어 번식하며, 창조주가 그들에게 정해 준 생명의 궤적과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또 창조주의 무언의 분부와 창조주가 그들에게 준 천상의 법칙과 계율을 오늘날까지 자발적으로 지키고 있다.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창조주와 대화하고, 창조주의 뜻을 깨닫고, 창조주의 분부에 순종한다. 그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의 권세를 초월한 적이 없다. 창조주는 생각으로 그들을 주재하고 관장하고 있다. 말씀은 하지 않더라도, 창조주만이 갖고 있는 권능으로 이 인류와는 달리 말하지 못하는 만물을 소리 없이 관장하고 있다. 이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시행하는 권능은 사람들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해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여기에서, 나는 새날에 창조주가 행사한 권능이 다시 한 번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해서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을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가 창조한 만물이 이미 말씀으로 세워지고 이루어졌으며, 모두 다 점진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들어진 각종 사물과 성취한 갖가지 일들에 대해 아주 흡족해하지 않았겠느냐? 그에 대한 답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무엇을 상징하느냐?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가 계획한 일과 정해 놓은 일, 그리고 그의 목표를 성취할 능력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다 마친 후에 후회한 적이 있느냐? 그 답 역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즉, 하나님은 후회는커녕 아주 흡족해했다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완벽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또한 완전무결하며, 그의 권능이 그의 계획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근원임을 의미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나서 하나님이 했던 것처럼 보기에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완벽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어떤 일을 한 번에 그리고 영원히 이룰 수 있겠느냐? 사람들이 “더 좋은 것은 있어도 가장 좋은 것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하는 일은 영원히 완전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이 이룬 모든 일들이 보기에 좋았을 때,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은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법칙이 생겼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을’ 때, 그가 창조한 것은 한 번에 그리고 영원히 그 형태가 고정되고 유형이 구분되며 위치와 용도와 기능이 정해졌다. 동시에, 만물 가운데서 하는 역할과 하나님이 만물을 관장하는 기간에 가야 할 여정이 이미 정해져 영원히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창조주가 만물에게 정해 준 ‘천상의 법칙’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구절은 단순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 사람들의 충분한 이목이 쏠리기도 어려운 말씀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천상의 법칙과 계율을 하달한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창조주의 권능이 또 한 번 더 실제적이고, 더 깊이 있게 구현되었다. 창조주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가 얻고자 한 모든 것을 얻었고, 그가 이루고자 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가 만든 모든 것을 그의 수중에서 주관할 수 있고, 그가 만든 만물을 그의 권세하에서 질서 정연하게 주재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만물도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소멸되며, 그의 권능으로 그가 정한 법칙 안에서 생존한다.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법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위해 창조주가 그것을 폐기하는 그날까지 존재하고 지속되고 운행될 것이다!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는 데에서, 또 세워지라고 명하면 세워지는 데에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물을 관리하고 주재하고 만물에게 생기와 활력을 부여할 수 있는 데에서도 구현되고 있다. 더욱이 창조주가 한 번에 영원히 그가 창조하고자 계획한 만물에게 완벽한 형식, 완벽한 생명의 구조, 완벽한 역할을 갖게 하여, 그가 만든 세계에 나타나고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데에서도 구현된다. 또 창조주의 모든 생각이 그 어떤 조건의 제한이나 시간, 공간, 지리적인 제한도 받지 않는 데에서도 구현된다.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은 그의 권능처럼 태고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권능은 영원히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의 대언과 상징으로서, 영원히 그의 신분과 함께할 것이다!

여섯째 날, 창조주가 말씀하니

그의 생각 속 각종 생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부지불식간에,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는 사역이 벌써 닷새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곧이어 그 여섯째 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날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자 또 하나의 평범하지 않은 날이었다. 새 날이 왔을 때, 창조주는 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까? 또 어떤 새로운 피조물이 생기고 만들어졌을까? 들으라. 이것은 창조주의 음성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25). 이들 생물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말하자면, 이날 땅 위에는 각종 생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모두 그 종류대로 분류되었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앞의 다섯 날과 마찬가지로, 창조주는 여섯째 날에도 똑같은 어조로 그가 원하는 생물이 생겨나라 명하니 그들이 땅 위에 나타났으며, 각기 종류대로 되었다. 창조주의 권능이 행사되자, 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에 창조주가 만들고자 계획한 모든 생물들이 예정대로 생겨났다.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라는 창조주의 이 말씀이 있자, 뭍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땅 위는 순식간에 각종 생물들이 내뿜는 기운으로 가득 찼다… 초록 풀빛을 잔뜩 머금은 들판에는 튼실하게 살진 소들이 꼬리를 흔들며 속속 등장하고, 양들이 메헤~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무리를 짓고, 말들이 울부짖으며 질주해 왔다… 순식간에, 고요하던 광활한 들판이 시끌벅적해졌다… 각종 가축들의 출현으로 조용하기만 하던 들판에 아름다운 볼거리가 더해졌고 활기가 생겼다… 그들은 들판을 벗 삼고, 들판의 주인이 되어 서로 의지하며 살 것이고, 들판의 파수꾼이 될 것이다. 들판 역시 그들의 영원한 서식지가 되어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그들이 영원히 생존하게끔 자양분을 공급해 줄 것이다…

이들 가축들과 같은 날에 태어난 각종 곤충들도 창조주의 말씀에 따라 잇따라 나타났다. 비록 그들이 피조물 중 가장 작은 생명체일지라도 그들의 생명력 역시 창조주의 오묘한 창조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결코 늦게 온 것이 아니다… 참으로 다양한 것이,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도 있고, 천천히 기어 다니는 것도 있으며, 또 어떤 것은 폴짝폴짝 뛰어다니기도 한다. 비틀거리며 걷는 것도 있고, 힘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재빠르게 뒷걸음질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옆으로 걷고, 어떤 것은 위로 뛰어오른다… 그들은 각자 바쁘게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 중이다. 어떤 것은 풀숲에 들어가고, 어떤 것은 땅에 굴을 파느라 분주하고, 어떤 것은 큰 나무에 날아올라 숲속에 몸을 감춘다… 몸집은 작아도 그들 모두 배고픔을 참지 못하니, 각자 집을 마련하고는 배를 채울 먹이를 급하게 찾아 나선다. 어떤 것은 여린 풀잎에 기어올라 먹고, 어떤 것은 흙을 한 움큼 집어 한 입 삼키는데, 아주 맛있게 먹으면서 정말 즐거워한다(흙은 오히려 그들의 맛있는 먹이가 되었다). 어떤 것은 숲속에 숨어서도 결코 쉬지 않는데, 나무 위 진초록 잎사귀의 진액은 그들 입맛에 맞는 아주 좋은 음식이 되었다… 배를 실컷 채운 후에도 그들의 활동은 계속된다. 그들은 작지만 에너지도 활력도 아주 넘쳐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물 가운데 가장 많이 활동하고 가장 부지런한 피조물이다. 그들은 게으름 피우거나 편안함을 탐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배를 채운 후에도 여전히 앞으로 살날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그들의 내일과 생존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선율과 다채로운 박자의 노래들을 조용히 흥얼거리며 스스로에게 힘찬 기운을 북돋아 준다. 또한 온 풀숲, 숲속, 모든 토양에도 즐거움울 선사하며, 언제나 특별한 하루, 남다른 한 해를 만들어 준다… 그들은 각자의 언어와 각자의 방식으로 땅 위의 각종 생물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또한 각자 특별한 생존의 궤적으로 다른 만물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며 족적을 남긴다… 그들은 흙과 풀과 숲과 매우 친밀하여 이들에게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창조주가 각각의 생물에게 한 당부와 안부를 전해 주기도 한다…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만물을 두루 살피고 있던 그 시각, 그의 두 눈은 숲에, 큰 산 사이에 머물렀으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무성한 숲속에, 그리고 산속에는 이전의 피조물과는 다른 부류의 피조물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한 ‘들짐승’이다. 그들은 예사롭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보라. 털이 난 것이 있는가 하면 딱딱한 껍질이 있는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이를 드러내고 어떤 것은 입을 벌리고 있다. 또 목이 긴 것, 꼬리가 짧은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두 눈에 살기를 띠고 있고, 어떤 것은 두려워하는 눈빛을 띠고 있다. 몸을 굽히고 풀을 뜯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입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두 발로 뛰어다니는 것, 네 발로 움직이는 것이 있고, 또 나무에 기어 올라가 멀리 바라보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숲속에 숨어 기다리고 있고, 어떤 것은 쉴 만한 동굴을 찾는가 하면, 어떤 것은 또 평원을 내달리며 장난치고, 어떤 것은 수풀을 헤치며 다닌다… 포효하는 것도, 으르렁대는 것도 있고, 미친 듯이 짖어 대는 것도, 울부짖는 것도 있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각기 다양해서, 높은 것도, 나지막한 것도 있고, 우렁찬 것도, 맑고 청아한 것도 있다… 그들의 생김새 또한 각양각색인데, 어떤 것은 무섭게 생겼고, 어떤 것은 예쁘장하고, 어떤 것은 역겹게 생겼는가 하면, 어떤 것은 아름다워 호감 가게 생겼고, 어떤 것은 그 생김새가 공포감을 주고, 어떤 것은 귀여움이 철철 넘친다… 그들이 하나하나 속속 걸어 나온다. 보라. 그들 모두 의기양양하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며, 누구를 상대하려 하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눈길 한 번 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특별한 생명을 받아, 거친 야수성과 난폭성을 지니고 숲과 산속에 나타났다. 그들이 그렇게 ‘안하무인’ 격으로 기세가 등등해도 그들이 산과 숲의 진정한 주인인 것을 어쩌겠느냐? 창조주가 그들에게 나타나라 명령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숲과 산을 ‘강점’했다. 창조주가 이미 그들의 경계를 정하고 그들의 생존 범위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산과 숲의 진정한 제왕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처럼 야수성을 지니고 ‘기고만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야수’로 불리는 까닭은, 만물 가운데 그들만이 진정으로 야수성과 난폭성을 지니고 있는 길들이기 어려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길들여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사육될 수 없고, 인류와 화목하게 살 수 없으며, 인류를 위해 일할 수 없다. 그들이 사육될 수 없고 인류를 위해 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인류를 멀리해야 하고, 인류도 그들을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인류를 멀리하고 인류가 그들과 가까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창조주가 부여한 책임 ― 산과 숲을 지키는 일 — 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야수성은 산과 숲을 지키는 것이며, 그들의 번식을 위한 최적의 보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의 야수성은 또 만물의 균형을 보장하고 유지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의 출현은 산과 숲에 의지처를 제공했으며, 적적하고 쓸쓸하던 산과 숲에 생기와 활력이 넘치게 하였다. 그때부터 산과 숲은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고, 그들은 영원히 자신들의 집을 잃지 않게 되었다. 산과 숲은 그들을 위해 생기고 존재하며, 그들은 장차 산과 숲을 지키기 위해 맡은 책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당부한 것 ― 그들의 영토를 지키고 그들의 야수성을 유지함으로 창조주가 정한 만물의 균형을 유지하고,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는 것 ― 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권세하의 만물은 다 완전무결하다

새와 어류, 나무와 화초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과 움직일 수 없는 것, 그리고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집짐승, 곤충, 들짐승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만든 만물은 하나님이 보기에 다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보기에 그 모든 일들은 그의 계획에 따라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졌고, 그의 기준에 도달하였다. 창조주는 그의 계획에 따라 하고자 한 사역을 순서대로 하나씩 이루었다. 그가 창조하고자 한 것들이 한 가지씩 나타났고, 나타난 것마다 모두 창조주 권능의 구현이자 그의 권능이 가져온 결정체였다. 이 결정체는 모든 피조물들로 창조주의 은혜와 공급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가 나타남으로 이 세계는 점차 하나님이 만든 만물로 풍요로워졌다. 혼돈하고 캄캄했던 세계가 맑고 깨끗하게 변화되었고, 적막하던 세계가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세계로 변화되었다. 창조된 만물은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작은 것에서 미세한 것까지,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으로 창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모든 피조물은 그것만이 갖는 정해진 존재의 필요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형식이나 구조가 어떻게 다르든지 간에, 창조주의 창조에서 온 것이면, 그것은 모두 창조주의 권세하에서 생존하게 된다. 간혹 사람은 못생긴 곤충을 보면 “왜 이리도 못생겼어? 하나님이 절대 이렇게 못생긴 것을 만드셨을 리 없으니 이건 절대 하나님이 만드신 게 아니야.”라고 한다. 그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이 곤충은 유난히 못생기긴 했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니 분명히 이것만의 특별한 쓰임새가 있을 거야.” 하나님은 그가 만들려는 모든 생물들이 다양한 생김새를 가지고 각양각색의 기능과 용도가 있도록 다 생각해 두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든 만물은 천편일률적이지 않으며, 외형부터 내면의 구조까지, 생활 습관부터 각자 차지하고 있는 위치까지 다 다르다. 소는 소의 생김새가 있고, 나귀는 나귀의 생김새가 있으며, 사슴은 사슴의 생김새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생김새가 있다. 누가 제일 예쁘고 누가 제일 못생겼다고 하겠느냐? 누가 가장 쓸모가 있고, 누가 가장 불필요한 존재라고 하겠느냐? 어떤 이는 코끼리의 모습을 좋아하지만 코끼리를 이용해 밭을 가는 자는 없다. 어떤 사람은 만물 가운데 가장 위엄 있게 생겼다며 사자, 호랑이의 모습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사자와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키울 수 있느냐? 요컨대, 만물을 대함에 있어, 사람은 창조주의 권세에 순종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즉, 창조주가 만물에게 정해 준 규칙에 순응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현명한 것이다. 또한, 창조주의 초심을 찾고 순종하는 태도야말로 창조주의 권세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에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이때에 이르러, 창조주 권세하의 만물은 창조주의 주재에 새 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창조주의 새날의 사역에 눈부신 서막을 열 것이며, 창조주도 그 순간 자신의 경영 사역에 새로운 장을 열 것이다! 만물은 창조주가 정한 ‘봄에 싹트고 여름에 무성해지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저장하는’ 이 법칙과 창조주의 경영 계획에 따라 서로 함께 호응할 것이다. 그들은 각자 새로운 날과 새로운 시작, 그리고 새로운 생명 여정을 맞이할 것이고, 또한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서의 하루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쉼 없이 성장하고 번성할 것이다…

피조물과 비피조물 모두 창조주의 신분을 대체할 수 없다

만물을 창조하면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유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만유를 창조했든, 그가 왜 만유를 창조했든, 요컨대 만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기고 세워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이다. 인류가 이 세상에 아직 출현하지 않았을 때, 창조주는 그의 능력과 권세로 인류를 위해 만유를 창조했고, 그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인류를 위해 적합한 생존 환경을 예비했다. 그가 이룬 그 모든 것은 다 장래에 자신의 생기를 얻게 될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권능은 인류와는 다른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구현되었는데, 크게는 천체, 광명체, 바다, 육지가 있고, 작게는 날짐승과 길짐승 및 각종 곤충과 미생물이 있다. 또한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각종 균류까지 포함해 그 어느 것도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어느 것 하나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번식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또 어느 것 하나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의 주재 아래에서 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들은 비록 창조주의 생기를 얻지 못했지만, 다양한 형식과 구조로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부여한 언어 능력을 받지 못했지만, 그들 각자는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베풀어 준 인류의 언어와는 또 다른, 생명을 표현하는 방식을 얻었다. 창조주의 권능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사물에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 그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살아 있는 존재에게 번식 능력을 주어 영원히 자취를 감추지 않고 대를 이어 창조주가 부여해 준 생존 법칙과 규칙을 전하게 할 수 있다. 창조주가 권능을 행사하는 방식은 거시적, 미시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어떠한 형식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우주의 운행을 주관하고 만물의 존망을 주재하며, 더욱이 만물을 움직여 자신을 위해 기여하게 한다. 그는 산천, 호수의 운행을 관장하고, 그 가운데의 만물도 주재하며, 만물이 필요로 하는 바를 공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이외의 만물 가운데서 나타나는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이다. 이는 일생에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멈추지 않고 쉬지 않는다. 또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바꾸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또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더하거나 제할 수도 없다. 창조주의 신분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의 권능을 대체할 수 없고, 그 어떤 비피조물도 그 권능에 이를 수 없다. 예컨대, 하나님의 사자나 천사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갖지 못했고, 더욱이 창조주의 권세도 갖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갖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창조주의 본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피조물 가운데, 예컨대 하나님의 사자와 천사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어떤 일들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대표할 수는 없다. 그들이 인류에게는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권세는 갖지 못하였고, 하나님처럼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을 주관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권세는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은 그 어떤 비피조물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역시 어떤 비피조물도 대체할 수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어떤 사자가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왜 그의 사자와 천사를 파견해 만물을 창조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권세를 행사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창조주의 주재 아래에 있고,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있으며, 창조주는 그들의 하나님이자 그들의 주재자이다. 신분의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에 상관없이, 능력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그들 가운데 그 어떤 자도 창조주의 권능을 초월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창조주의 신분을 대체할 수 없으며,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 없고, 영원히 창조주가 될 수도 없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며 사실이다!

이상의 교통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면 어떻겠느냐? ‘오직 유일무이한 권세와 능력을 갖춘 만물의 창조주와 주재자만이 유일한 하나님 자신이라고 불릴 수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나의 질문이 너무 심오하다고 여길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그 안의 본질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이 질문이 대답하기 어렵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계속해서 교통하겠다. 계속해서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있는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는 여러 측면의 실제적 행사를 보게 하여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이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권능이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하고 깨닫게 할 것이다.

2.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다

(창 9:11~13)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만물을 창조한 후, 창조주의 권능이 ‘무지개 언약’으로

또 한 번 입증되고, 다시 나타나다

창조주의 권능은 언제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나타나고 행사된다. 그는 만물의 운명을 주재할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빚은 인류 ― 다른 구조와 형식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특별한 피조물 ― 역시 주재하고 있다. 만물을 창조한 후에도 창조주는 그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물과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권능을 정식으로 행사한 것은 인류가 그의 손에 의해 탄생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인류를 경영하고 주재하기로 하였고, 인류를 구원하기로 하였다. 또한 진정으로 인류를 얻고자 하였는데, 바로 만물을 관리할 수 있는 인류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인류가 그의 권세 아래에 살아가며, 그의 권세를 제대로 알게 하고 그의 권세에 순종하게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으로 그의 권세를 선포하고, 그의 권세로 자신의 말씀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세는 어디서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숙한 일부 특수 사례들만을 선별하였다. 이것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 권능의 유일무이함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게 하겠다.

창세기 9장 11절에서 13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기록과 관련된 말씀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유사한 부분은 무엇이냐?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행한 것이다. 다른 부분이라면 이 단락의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라는 점이다. 이 대화는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사람에게 언약에 대해 알려 주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그때 권능을 행한 것은 사람과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인류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부와 명령이었으며, 그가 만들고자 하는 피조물에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대상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사람과의 대화이며, 또한 그가 인류에게 하는 당부와 훈언이었으며, 그가 만물에게 하달하는 권능을 지닌 명령이었던 것이다.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일들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느냐? 거기에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킨 후,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알려 주고, 또한 이를 위해 하나님이 증거를 세운다고 하였다. 그 증거는 무엇이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것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한 원래의 말씀이다. 그가 말씀함과 동시에 무지개가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너희는 다 무지개를 본 적이 있을 것인데, 무지개를 보았을 때, 이 무지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고 있느냐? 과학으로는 이 사실을 논증할 방법이 없다. 그 근원을 찾지 못했으며, 그것의 행방도 찾지 못했다. 이것은 창조주가 사람과 세운 언약의 증거이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는 필요 없다.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말씀이 있고 난 후, 권능이 지속되는 결과인 것이다. 창조주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과 세운 언약과 약속을 지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무지개를 출현시켜 하나님이 세운 언약의 증거로 삼은 것은 창조주에게나 창조된 인류에게 있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천상의 규율이자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이 법칙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난 후, 그의 권능이 또 한 번 진정으로 구현된 것이며,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이 무한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지개’를 그 언약의 증거로 삼은 것은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행한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세운 언약의 증거이다. 이는 그가 무엇을 하고자 결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루고, 어떤 방식으로 성취하겠다고 하면,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말씀이 있고 난 몇천 년 후인 오늘날에도 인류는 하나님이 말씀한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인해, 그 일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무지개를 없어지게 할 수 없고, 그것의 규칙을 바꿀 수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인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면 그대로 지키고, 그대로 지키면 반드시 이루어지며, 이루어지면 반드시 영원하다.” 이 말은 여기서 아주 명확하게 구현되는데, 바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확실한 증거이자 특징이다. 이러한 증거와 특징은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볼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 어떤 비피조물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와 특징은 유일무이한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 특유의 신분과 본질을 피조물과 구분시켜 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영원히 초월할 수 없는 증거이자 특징인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줌과 동시에 그의 마음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특수한 증거를 사용해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그 증거로 그가 사람과 세운 언약에 확신을 준 것이다. 이 언약을 세웠다는 것이 하나의 큰 사건이 아니냐? 얼마나 큰 사건일까? 바로 그 ‘언약’의 특별함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이 아니며, 또 단체와 단체 간의 언약도 아니다. 더욱이 한 국가와 또 다른 국가 간에 세운 언약도 아니며, 창조주가 인류 전체와 세운 언약이다. 이 ‘언약’의 유효 기간은 창조주가 만물을 폐기하는 그날까지이며, 이 ‘언약’의 시행자는 창조주이고, 그것의 수호자 역시 창조주이다. 요컨대, 인류와 세운 ‘무지개 언약’의 모든 것은 창조주와 인류의 대화에 따라 응하고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세에 순종하고, 따르고, 신뢰하며, 그 권세의 존재를 깨닫고 우러르고 칭송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느냐? 유일무이한 하나님 이외에 이러한 언약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매번 무지개가 나타나는 가운데, 그것은 인류에게 창조주가 사람과 세운 언약을 알려 주고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창조주가 인류와 세운 언약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것이 인류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은 ‘무지개’와 ‘언약’ 자체가 아니라, 창조주의 영원불변의 권능인 것이다. 무지개의 출현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가 은밀한 곳에서 행하는 놀랍고도 오묘한 사역이며, 창조주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변치 않는 권능의 생생한 구현이다. 이 모든 것들이 창조주의 또 다른 면에서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권능의 구현이 아니냐?

3. 하나님의 축복

1) (창 17:4~6)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2) (창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3) (창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4)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창조주만의 말씀 방식과 특징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고, 그의 방식대로 사람에게 복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얼마만큼의 은혜를 베풀어 주는지는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따라 분배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을 설명할까? 사람에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게 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잠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는지와 하나님이 축복해 주는 원칙에 대해서는 접어 두자.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살펴보자. 즉,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가는 이 관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보자.

이상 네 단락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준 축복에 관한 기록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욥과 같은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대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내리는 이유와 그 복의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조, 말씀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와 시각으로부터, 사람은 복을 내리는 자와 받는 자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와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위치는 창조주의 신분을 가진 하나님만의 것이다. 그는 권능과 힘은 물론 창조주의 존귀함과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의 위엄을 지니고 있다.

먼저 다음의 말씀을 보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17:4~6).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이다. 하나님이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그의 후손이 번성케 하리라 하였다. 또한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였다. 너는 이 몇 마디 말씀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지 못했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 권능의 어떠한 본질을 보았느냐? 이 구절들을 자세히 읽다 보면, 하나님의 권능과 신분이 하나님의 어휘 사용에서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니 너는… 될찌라 … 내가 너로 … 하리니” 이 중에서 ‘너는 … 될찌라’, ‘내가 … 하리니’ 등의 표현에서 하나님 신분과 권능을 나타내 주는 적극적인 어휘 사용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창조주의 신실함이요, 또 한편으로는 그것은 모두 창조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전용 어휘이자, 관용어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축복하기를, 후손이 번성하고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난다고 했다면, 이는 확실히 하나의 바람일 뿐이지 약속이나 축복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는 반드시 너로 하여금 어떠하게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어떠어떠하게 하겠다.”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에게는 이러한 결정권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이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빈말일 뿐이고 헛소리일 뿐이며, 사람의 욕망과 야심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사람의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이 알게 될 때, 감히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좋은 소망을 갖기 마련이어서, 후손들이 모두 출세하고 남보다 뛰어나기를 희망한다. 만일 황제가 되는 후대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나큰 행운이다! 성장(역주: 도지사급)만 될 수 있어도 괜찮다. 어쨌든 높은 사람만 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바람이지만, 사람은 그저 후손을 위해 축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어떤 누군가의 약속을 이루어 줄 수는 없다. 인간에게 거기까지 가능하게 하는 권력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안다. 자신의 일도 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운명을 관장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에게는 그런 권능이 있어서 사람과 약속한 것, 사람에게 축복한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하나님에게 있어 사람의 후손을 번성케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가 누군가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는 것은 단 한 마디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한 번도 이 때문에 수고한 적이 없다. 또한 이 때문에 머리를 쓰거나 고민해 본 적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권세이다.

창세기 18장 18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라는 이 말씀을 보고 난 후, 너희는 하나님의 권능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지고지상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긍정적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필승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또는 그런 확신이 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실증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이뤄지도록 내린 명령인 것이다. 여기에 너희가 주목해야 할 두 어휘가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반드시)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라고 한 이 말씀에 어떤 모호한 부분이 있느냐? 걱정하는 부분이 있느냐?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느냐? 그런 것은 인류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요소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반드시’와 ‘반드시 인하여’ 이 두 어휘 때문에라도, 사람의 그런 요소는 창조주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이러한 어휘를 타인에 대한 축복에 사용하지 못한다. 또한 그 누구도 감히 타인에게 강대한 나라를 주겠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며, 감히 타인에게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할수록 더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권능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권능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임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매우 확실한 것이고, 주저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에 따라 이 모든 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그 어떤 세력도 이 일의 응답을 바꾸거나 파괴하거나 교란시킬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이룩과 성취를 멈추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하는 말씀의 위력이며,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인 것이다! 네가 이 말씀을 다 읽었을 때, 마음속에 의혹이 일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능력과 위엄, 권세가 묻어난다. 이러한 힘과 권세, 그리고 일이 필연적으로 성취된다는 것, 이것은 그 어떤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이를 수도 초월할 수도 없는 것이다. 창조주만이 이러한 어조로 이러한 뉘앙스로 인류와 대화할 수 있다. 그의 약속이 빈말이 아니고 허풍이 아니며, 사람과 일, 그 어느 것도 초월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권능의 구현이라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하나님 말씀의 힘과 하나님의 권능을 느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너는 어떤 느낌을 받을 것 같으냐? 그 사람을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가 허풍을 떤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가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그런 권세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그러한 일들을 이룰 수 없다. 그가 이렇게 확실하게 약속한다면 단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 오만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며, 전형적인 천사장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면, 네가 오만함을 느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농담이라고 느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이며 사실이다. 그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가 어떤 일을 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다. 그 약속은 기정 사실이며,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점차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하나님께 오만한 성품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해낼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고,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능력 범위의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실된 성품이 나타나고 표출된 것이며,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권능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이고, 창조주 신분에 가장 적합하고 합당한 증거인 것이다. 그가 말씀하는 방식, 어조, 어휘 사용은 바로 창조주 신분의 상징이며, 하나님 자신의 신분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이는 그 가운데 어떤 거짓됨도 불순함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완전무결하게 창조주의 본질과 권능이 구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피조물에게는 이러한 권세도 없고 이러한 본질은 물론 하나님이 부여한 능력도 없다. 만일 사람에게서 이러한 부분들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확실히 타락된 성품의 분출이며, 사람의 교만과 야심이 꿈틀거리는 것이고, 확실한 마귀와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토록 유혹하는 흉악한 본심의 발로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언어적 노출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과 자리를 다투고 하나님을 사칭하며,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어 한다고 여길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를 흉내 낸다는 것은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함이며, 원래 하나님에게 속하는 인류를 빼앗고자 함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탄이고, 천사장의 후예가 하는 행위이며, 하늘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 중에는 하나님을 모방하여 말을 했던 자가 없느냐? 사람을 오도하고 미혹시킬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권세와 힘을 가지고 말을 하고 일을 하며, 자신의 본질과 신분은 남다르며, 심지어 어조가 하나님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던 자가 없느냐? 너희는 이런 일들을 한 적이 없느냐? 하나님의 말투를 모방해서 말하고, 이른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손짓을 하며, 하나님의 힘과 권세를 가장한 적이 없느냐? 이런 것들은 너희들 대부분이 자주 하고, 또 하려고 마음먹은 것들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창조주의 권능을 진짜로 보고 느끼고 알게 되었는데, 처음 너희가 행하고 드러냈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 역겹게 느껴지지 않느냐? 너희가 비열하고 파렴치했던 모습을 알게 되지 않느냐? 이러한 자들의 성품과 본질을 해부해 보면,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보통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모두 굴욕을 자초한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이냐? 사람이 이렇게 하는 본심은 바로 하나님을 모방하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자 함이다. 또한,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신이 사람을 통제하고 차지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는 모두 이러한 욕망과 야심이 있다. 사람마다 이렇게 사탄이 타락시킨 본질 속에서 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면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사탄의 본성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련된 주제로 교통하였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칭하고 그를 모방할 야심이 아직도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이 능히 모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는 사람이 사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네가 하나님 말씀의 어조를 흉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본질을 모방할 수는 없다. 네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그를 사칭할 수는 있을지라도, 영원히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영원히 우주 만물을 주재하거나 관장하는 일은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언제까지나 그저 아주 하찮은 피조물일 뿐이다. 너의 능력과 재주가 얼마나 뛰어나든, 네가 얼마나 많은 은사를 가졌든, 너의 모든 것은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다. 네가 몇 마디 모진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너에게 창조주의 본질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너에게 창조주의 권세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지,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며, 밖으로부터 더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본위를 지켜야 하며, 성실한 사람됨으로 분수껏 창조주가 맡겨 준 바를 지켜야 한다. 도에 넘치는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된다. 위대한 사람, 초월적인 존재, 고귀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사람에게 존재하지 말아야 할 ‘소망’이다. 위대한 사람,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며,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파렴치한 일이고, 혐오감을 불러오고 침뱉음을 당할 일이다. 반대로 진정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야말로 귀한 것이고, 피조물이 지켜야 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창조주의 권능은 시간, 공간, 지리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창세기 22장 17절에서 18절을 보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차례 축복하며 그의 자손을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된다고 했느냐? 성경 구절처럼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하리라”,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저 형상적인 언어일 뿐이지만, 이 형상적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후손이 한 둘이 아니고 수천수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나라를 이룰 정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나라의 아비가 되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많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냐, 하나님에게 달린 일이냐? 자신의 후손이 얼마가 될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느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느냐?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후손이 몇 명일지조차도 사람은 결정할 수 없다. 누가 자신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 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되든,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상관없이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는 대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적게 주었는데 네가 너무 많이 받게 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네게 많이 준다면, 네가 많다고 탓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으며,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네 씨로 크게 성하여”라고 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무지개 언약’처럼 영원히 지켜질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기도 하다. 이러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으며, 사람이 믿든 안 믿든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바라보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이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이나 일의 변화에 의해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만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만물이 사라지는 그날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뤄지는 날이다. 이는 그가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주의 권세를 지녔으며, 창조주의 능력이 있고, 만물을 관장하고 모든 생명을 주관한다.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가능케 하며, 모든 생과 사의 전환을 관장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손을 번성케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간단한 일인 것이다. 이 얘기가 사람이 듣기에는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가 하고자 결정한 일이나 사람에게 약속한 일은 결코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본 사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체득이 있느냐? 이런 것은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예가 많지 않으냐? 얼마나 많으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지 않으냐? 각 나라, 각 지역, 세계 각지로 널리 퍼져 있지 않으냐? 이러한 사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냐? 하나님 말씀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동안 그 말씀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끊임없이 현실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자 하나님 권능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이는 순식간의 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일의 성취와 응답은 시간 차 없이 즉시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또한 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권능의 또 다른 면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더불어, 사람들에게 창조주의 권능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고, 창조주가 가진 권능의 더 실질적이고 더 훌륭한 면을 느끼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가 무섭게 하나님의 권능은 그 사역을 관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이 점차 현실이 되기 시작하였다. 만물의 모든 것들이 다 이로 인해 다양한 변화를 맞았다. 봄이 오면, 풀이 파릇파릇해지고 꽃이 피고 나무에 싹이 튼다.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기러기들이 돌아오며, 논밭에는 사람들의 일손이 분주해진다… 이에 발맞춰 만물도 다시 소생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놀라운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룰 때, 하늘과 땅의 만물이 다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새로워지고 변화되는데, 그 어느 것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 만물이 다 힘쓰며 움직이게 된다. 모든 피조물들이 다 창조주 권능의 섭리 아래 배치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각자의 재능을 바친다. 이는 창조주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범위가 정해져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시간적 제약이 있느냐? 하나님 권능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을 논할 수 있느냐? 크고 작음과 강함과 약함을 논할 수 있느냐?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사라졌다 나타나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축복하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 간에 그의 그 축복은 지속된다. 그 지속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고, 인류에게 창조주가 가진 영원불멸의 생명력이 수없이 재현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권능이 나타날 때마다 그의 말씀을 완전하게 구현해 내어 만물과 인류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의 권능으로 이뤄진 일마다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완전무결하다. 즉, 그의 생각, 그의 말씀, 그의 권능과 그가 행한 사역마다 전부 그 어떤 것도 비할 수 없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그 의의와 가치는 인류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후에는,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든, 무엇을 하든, 약속 받기 전후의 사정이 어떻든, 그가 생활하는 환경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든, 하나님은 다 알고 있다. 말씀을 하고 난 뒤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방금 일어난 것과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에게는 인류에게 한 모든 약속을 추진하고 관장하고 실현시키는 능력과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무엇이든 간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그 약속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요소, 예를 들면 시간, 장소, 종족 등과 같은 요소가 얼마나 넓든, 그 약속은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전혀 힘들지 않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관장하는 범위는 우주 전체, 인류 전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빛만 관리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물을 만들었으니 물만 관리하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오해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일이 몇백 년이 지난 뒤에는 사람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 약속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고,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권능을 행사하였는지, 만물은 또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배치되었는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얼마나 훌륭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인류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사역에서 나타난 탁월한 면면들은 만물 가운데 전해지고 칭송되고 있다. 만물은 또한 창조주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며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갖가지 미담들은 만물을 통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권세와 하나님의 능력은 만물에게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항상 존재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은 시간, 지리, 공간,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이나 일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범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며, 사람이 헤아릴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우며,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추리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상력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으로 하나님 권능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할 수 있느냐? 진정 하나님의 권세를 깨닫고 순종하게 할 수 있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은 사람 두뇌 작용의 산물일 뿐,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증거하고 있다. 공상과학소설을 읽어 본 사람은 달이 어떤 모양인지 상상할 수 있고, 우주의 행성들이 어떤 모습인지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알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며, 사실이 어떤지, 다시 말해서 그 일련의 사건들과 하나님의 권능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설사 네가 달에 가 봤다 한들 어쩌겠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범위가 얼마나 큰지 상상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으로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알 수 있게 할 수 없다면, 사람은 어찌해야 하겠느냐? 가장 현명한 선택은 추리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가는 데에 있어, 절대 상상력이나 추리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권세, 능력, 하나님 자신의 신분,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은 너의 상상력으로 인식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상력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알 수 없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야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교통을 통해, 또한 하나님 말씀을 체득한 것을 통해 점차적으로 실증하면서 이해하고, 하나씩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외에는 다른 첩경이 없다. 너희에게 상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앉아서 기다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논리로 추리하지 말고, 지식으로 분석하지도 말며, 과학을 근거로 삼지도 말라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통해, 삶 속에서 접하게 되는 매사를 통해 네가 믿는 하나님이 권능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느끼고 증명하고 실증하라는 것이다. 또한 그가 너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으며, 그의 능력은 항상 그가 진정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음을 실증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혹자는 더 간단한 방법으로 이 목표에 이르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런 간단한 방법을 너희는 생각해 냈느냐? 내가 말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그러니 너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을 통해 성실하고 착실하게 하나님의 속성을 인식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모든 것은 허상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만물과 생령을 주관한다는 이 사실이

창조주의 권능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욥기에도 마찬가지로 욥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욥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욥에게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42:12).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욥에게 베풀어 준 것들은 무엇이냐? 사람의 재산이 아니냐? 이런 재산을 소유한 욥은 그 시대에 아주 부유하지 않았겠느냐? 욥은 그 재산들을 어떻게 소유하게 된 것이냐? 그의 부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욥이 그 재산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여기서 우리가 언급할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사람이 꿈에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생 동안 재산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이 관장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산을 베풀어 주고 축복을 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축복에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복을 주느냐?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실은 같지만,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축복은 다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모래와 같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축복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이 일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후손, 한 종족을 강성해지게 한 것이다. 이 일에서 하나님이 권능으로 주재한 것은 만물과 생령 중에서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인류이다. 하나님 권능의 주재 아래에서, 이 인류는 하나님이 정한 범위와 속도에 따라 종족을 번식하며 생존해 나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들 족속의 생존 능력, 번성 속도, 수명은 다 하나님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의 원칙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권능의 보호하에 막힘없이 순조롭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대해 말하자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어떤 시대에서도, 인류가 어떤 재난을 겪어도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 죽음이라는 재앙의 위협에서 안전할 것이며, 그 족속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반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그를 매우 부유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준 것 가운데, 숨 쉴 수 있는 각종 살아 있는 생령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생령들의 수, 번식의 속도, 생존율, 얼마나 실할지 등, 이러한 구체적인 사항들도 다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다. 이 생령들 또한 언어 능력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지배하에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은 욥에게 약속한 축복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약속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날지라도 만물과 생령을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능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 아브라함과 욥에 대한 서로 다른 약속과 축복 가운데에서 구현되고, 또 한 번 인류에게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상상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세부적 내용은 또 한 번 인류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알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가운데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에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하니 궁창이 생겼고 뭍이 드러나라 하니 뭍이 드러났느니라”라는 이런 말씀에서만 구현된 게 아니다. 더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빛을 지속시키고, 궁창이 사라지지 않게 하며, 뭍을 영원히 물과 나뉘게 하는 데에서 구현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빛, 궁창, 뭍과 같은 피조물들을 주재하고 관리하는지의 세부적 내용에서 구현된다. 인류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과 욥에게 복을 준 후에, 하나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권능이 이제 막 행해지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은 자신이 한 모든 말씀을 현실로 이루고, 자신이 한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을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후의 세월 속에서 그가 하고자 한 모든 일들을 계속하였다. 어쩌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권능이 있기 때문에 말씀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사가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이런 상상은 황당한 면이 없지 않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만일 네가 단편적으로만 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만물이 생존하는 각종 현상과 사실들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 권능에 대한 너의 이해는 공허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러한 상상은 하나님에 대한 앎이 이미 미궁에 빠져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상상 속 하나님은 명령만 내리는 기계일 뿐,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욥의 사례를 통해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실제적인 면을 보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을 축복한 후에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고, 사자에게만 시키고 자신은 결과만 기다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마자 만물은 하나님 권능의 인도하에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에 협력하여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일을 예비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의 권능은 온 땅에서 행해졌고,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응답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각각의 절차와 모든 중요한 부분에 필요한 것들을 다 계획하고 예비하였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움직인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도 포함되었다. 즉, 하나님 권능의 역사 범위는 하나님의 사자들 가운데서만이 아니고, 대부분은 만물을 움직여서 하나님이 행하려는 사역에 동원시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권능을 구체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세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셋째 하늘이나 어떤 고정된 자리에 계시면서 그 어떤 구체적 사역을 행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다 생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말 한 마디로 충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이 그러냐? 확실히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의 권세는 진실되고 실제적인 것이지 절대로 공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그가 가진 능력의 진정성과 실제성의 단면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고 관장하며, 그가 인류를 인도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나타나고 구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각각의 방식, 각각의 관점, 각각의 세부 내용과 그가 이룬 모든 사역, 그리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는 확실히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결코 공허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의 권세와 능력은 항상 모든 일에서 구현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세가 실제로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시각각 자신의 권세와 능력으로 사역하며, 만물을 관장하고, 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과 권세는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축복을 주고, 욥에게는 또 어떤 것을 축복하였는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다. 설사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이나 욥에게 직접 임했을지라도, 그들이 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분부대로 한 것이며, 모두 하나님의 권세하에 있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임한 것을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무엇을 하였는지 보지 못했을지라도, 사실상 진정한 능력과 권세로 역사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사 네가 천사나 사자에게 큰 능력이 있어 그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일련의 일을 행하는 것을 보았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일 뿐, 절대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능을 가진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창조주의 권능을 행하거나 나타낼 수 없다.

하나님의 권능은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다

이상 세 부분의 성경 말씀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권능을 행사할 때 원칙이 있다는 것을 보았느냐? 예컨대, 하나님은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웠는데,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며 사람에게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지금 사람들이 보는 ‘무지개’가 하나님이 당시에 말씀하였던 그 ‘무지개’가 아니냐? 그 무지개의 성격과 의미에 변화가 있느냐? 확신하건대 어떤 변화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그 일을 행하였고, 사람과 세운 언약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언약이 언제 변할지는 물론 하나님이 결정한다.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겠다’고 말씀한 후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 일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권세와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역사할 때는 신중하고 원칙 있게 하며, 일을 행할 때는 신용을 지키며 한다. 그의 신중함과 그가 일하는 원칙은 창조주를 거스를 수 없고 그의 권능을 초월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지고지상한 권능을 가지고 있고, 만물이 모두 그의 권세 아래에 있을지라도, 만물을 주재하는 능력을 갖추었을지라도,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계획을 파괴한 적도 방해한 적도 없다. 그는 권능을 행사할 때마다 항상 자신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정확하게 그가 말씀한 대로, 그가 계획한 절차와 목표대로 진행한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는 만물 역시 하나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의 권능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고, 그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없다. 그가 보기에 복을 받는 자는 그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되고, 저주받는 자 역시 그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 권능의 주재하에, 하나님 권능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으며, 하나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없다. 창조주의 권능은 그 어떤 요인의 변화로도 바뀌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권능의 행사 원칙 역시 그 어떤 원인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는다. 천지가 격변한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 권능의 본질인 것이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성인 것이다!

다음의 한 마디는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가는 데 있어 언급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며, 그것이 함의하는 것은 다음 교통할 내용 안에 있다. 우리는 이어서 성경 말씀을 읽어 보자.

4.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분부

(욥기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사탄은 감히 창조주의 권능을 초월하지 못했으며,

만물은 규칙 가운데 생존한다

이것은 욥기에서 발췌한 말씀이다. 이 말씀 가운데의 ‘그’는 욥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비록 짧지만, 많은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영적 세계에서 사탄과 나눈 구체적인 대화로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인 사탄을 설명하였다. 또한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분부이고 명령이다. 그 명령의 세부적인 사항은 욥의 목숨과 관련되며,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욥을 대하는 마지노선에 관련된다. 즉, 오직 욥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우선 이것이 하나님이 사탄에게 한 말씀이며, 욥기의 원문과 결부시켜 하나님이 어떠한 배경하에서 이러한 말씀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탄은 욥을 참소하고자 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동의를 얻어야만이 욥을 시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요구를 들어준 상황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러한 조건을 걸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이 말씀은 어떤 성격을 띠느냐? 확실히 그것은 분부이고 명령이다. 이 말씀의 성격을 파악한 후에 너는 이 명령의 선포자가 하나님이며, 명령을 받아들이는 자가 사탄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양자의 관계는 그 명령을 통해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 준다. 물론 이 역시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 기록에서 보여 주는 영적 세계에서의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관계이며, 그 기록이 제공하는 하나님과 사탄의 신분과 지위의 차이이다. 또한 지금까지 인류가 구체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문자 기록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과 사탄의 신분, 지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기록이 인류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아는 데 있어 중요한 문헌이며, 인류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그것으로 영적 세계에서 창조주와 사탄의 대화 중 일부를 통해 창조주 권능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게 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씀 속에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이 또 한 번 입증되었다.

외적으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실제로 말씀하는 태도와 서 있는 위치는 사탄보다 높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하는 어조로 사탄에게 분부한 것이다. 사탄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알려 주고, 욥을 이미 사탄의 손에 붙였으니 마음대로 욥을 대할 수는 있으나 욥의 생명을 취할 수는 없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 함축적 의미는 비록 욥을 사탄의 손에 붙였으나 욥의 생명까지 붙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태도는 사탄에게 한 이 명령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타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하며 서 있던 위치 역시 이 명령에서 나타났다. 여호와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는 빛과 공기를 만들고 만물과 생명체를 만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만물과 생명체를 주재하는 하나님이고, 인류를 관장하고 음부를 관장하는 하나님이며, 모든 생명체의 생과 사를 관장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 하나님을 제외하고 누가 감히 사탄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또한 어찌해서 사탄에게 친히 명령을 내린 것일까? 욥의 목숨을 포함해서 사람의 생명은 모두 하나님이 관장하고, 하나님은 사탄이 침해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며,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했을 때에도, 욥의 생명을 앗아가지 말라는 이 특별한 뜻을 전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사탄은 감히 초월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명령과 구체적인 분부에 대해 사탄은 각별히 조심하고 명령에 복종하고 따르며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물론 사탄 역시 마음대로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한 범위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감히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 권능의 위력이 아니겠느냐? 하나님 권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 사탄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자기가 속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은 사탄이 인류보다 훨씬 잘 안다. 하나님의 지위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사탄은 영적 세계에서 확실하게 보았다. 하나님 권능의 위력과 하나님의 권능이 행사되는 원칙에 대해 사탄은 깊이 느꼈다. 그래서 감히 태만하거나 그 어떤 것도 위반하려고 하지 못하며, 감히 하나님 권능을 벗어나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그 어떤 도전도 감히 하지 못한다. 사탄은 본성이 사악하고 교만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해 준 한계와 범위를 감히 벗어나지 못했다. 천만년 동안, 사탄은 엄격하게 그 한계를 지키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분부와 명령을 준수하며 지금껏 감히 한계선을 벗어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사탄이 비록 악독하긴 하지만, 타락한 인류보다 훨씬 ‘현명’하다. 사탄은 창조주의 신분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안다. ‘규율을 지키는’ 사탄의 행위로부터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은 사탄이 뛰어넘을 수 없는 천상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유일성,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해 만물이 법칙 가운데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인류가 하나님이 제정한 궤적 가운데서 번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 규율을 깰 수 없고 이 법칙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창조주의 결정에서 온 것이며, 창조주의 권능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신분을 갖춘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권능을 소유한다

사탄의 ‘특수’한 신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여러 부분에서의 행적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 이외에 사탄도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사탄도 이적을 보이고 인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이외에도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대역무도하고 또한 그들의 타고난 사악한 본질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너희가 권능이 무엇인지, 권능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고 대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곧 권능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고함과 하나님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나님 자신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탄은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또 만물을 주재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느냐? 사탄은 당연히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만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그 어느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으므로 영원히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느냐? 물론 없다. 사탄이 행한 일들, 사탄이 보인 이적은 무엇이냐? 능력이 맞느냐? 권능이라 할 수 있느냐? 물론 그것도 아니다. 사탄은 사악한 흐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며 방해하는 일만 일삼는다. 몇천 년 동안,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것 중에 인류를 부패시키고 해치는 것 말고,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하는 것 외에, 어느 것 하나 기념하거나 칭찬하고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사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되었을까? 사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을까? 사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나아갔을까? 사탄에게는 권세와 능력이 없다면, 사탄이 행한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느냐? 혹자는 사탄의 모든 행위가 보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에 대한 이런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인류를 타락시키는 악행이 보잘것없는 잔재주일까? 사탄이 욥을 해한 그런 사악한 기세와 욥을 집어삼키려던 강렬한 욕망은 단연코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순식간에 욥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소와 양들이 사라졌다. 찰나의 사이에 욥의 그 거액의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보잘것없는 기교로 해낼 수 있는 것이냐? 사탄의 행위의 성격으로 볼 때, 다 파괴, 방해, 파멸, 상해, 사악, 극악, 어둠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매치되고 어울린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롭지 못하고 사악한 사물의 출현은 사탄의 행위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또한 사탄의 추악한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무리 거만할지라도, 야심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사탄의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사람을 미혹하고 타락시키는 재능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을 협박하는 꼼수와 권모술수가 아무리 기발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무리 변화무쌍할지라도 상관없다. 사탄은 지금까지 생명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만물이 생존하는 법칙과 규율을 제정할 수도 없었고,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을 관장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었다. 우주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사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없으며, 사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도 없다. 또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사탄이 주재하고 관장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분부와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개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만든 인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눈에 사탄은 산 속의 백합만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만 못하며 바닷속의 물고기만 못하고 땅 위의 구더기만 못하다. 만물 가운데서 사탄의 역할은 바로 만물과 인류를 위해 기여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얼마나 독하든지 간에 본질이 얼마나 사악하든지 간에 상관없다. 사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분수껏 자신의 기능 — 하나님을 위해 기여하는 것 — 을 지키며 부각물이라는 역할을 잘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자 본래의 위치인 것이다. 사탄의 본질은 생명과 무관하고 능력과 무관하며 권능과 무관하다. 사탄은 단지 하나님 수중에 있는 장난감일 뿐이며, 하나님을 위해 기여하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사탄의 본모습을 알게 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권능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권능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권세든 능력이든 모두 긍정적인 부분으로서, 그것은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과도 무관하며,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과도 무관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형식이든 생명이 있고 활력 넘치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은 모든 생명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겨나고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생존하며 지속된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주재하고 관장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틀림이 없었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창조주만이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권능이라 부른다. 이것이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그러므로 ‘권능’이라는 이 단어 자체나 권능의 본질은, 오직 창조주와만 관련이 있다. 그것이 창조주만의 신분과 본질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권능’이라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사탄이 비록 욥을 호시탐탐 노렸을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의 털 한 터럭도 건드릴 수 없었다. 사탄이 비록 본성이 사악하고 잔인할지라도, 하나님이 사탄에게 명령을 하달한 후에는 사탄도 하나님이 분부한 바를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나운 늑대가 양떼들에게 침입하듯이 욥에게 임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해 준 범위를 감히 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 사탄은 어떻게 해도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범위를 감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이 점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어떤 한 마디도 사탄이 감히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고 천상의 법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뒤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상의 법을 어기며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하나님의 권능을 어기고 천상의 법규에 대항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 결과는 도대체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사탄이 욥 한 사람에게 행한 일은 단지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키는 축소판일 뿐이다. 그리고 사탄이 이 일을 벌일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범위와 명령은 사탄이 모든 일을 하는 데 있어서의 원칙의 축소판일 뿐이다. 또한 사탄이 이러한 일 가운데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는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계획 중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의 축소판일 뿐이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던 그 일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단지 사탄이 하나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께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축소판일 뿐이다. 이러한 축소판이 너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이냐? 사탄을 포함한 만물 가운데 그 누구도 그어떤 것도 감히 창조주가 제정한 천상의 법과 규칙을 어기지 못하며, 그런 법과 규칙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저항자에 대한 창조주의 처벌을 바꾸거나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만이 천상의 법과 규칙을 제정할 수 있고, 창조주만이 그러한 법과 규칙을 시행할 능력이 있으며, 창조주의 능력만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만의 권능이며, 이 권능은 만물 가운데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크고 사탄이 그 다음이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유일무이한 권능을 가진 창조주 이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현재 너희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어떤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느냐? 우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권력과 어떻게 구분되느냐? 어떤 차이가 있느냐? 혹자는 함께 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매우 좋은 말이다. 사람들이 비록 이 둘을 함께 논할 수 없다 말할지라도, 사람의 생각과 관념 속에는 항상 사람의 권력을 권능으로 말하곤 한다. 또한, 함께 놓고 비교하기도 하는데 왜 그런 것일까? 이는 개념을 달리 이용하는 오류에 빠진 것이 아니겠느냐? 함께 연관시킬 수도 함께 비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를 어찌 해결해야 할까? 네가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권능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창조주의 권능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면 너는 사람의 권력과 하나님의 권능을 한데 놓고 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권력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사람의 타락된 성품, 사람의 욕망과 야심이 최대한도로 팽창되어 목적한 바를 달성시키는 일종의 수완이나 재주라 할 수 있다. 이것을 권능이라 할 수 있겠느냐? 누군가의 야심과 욕망이 매우 팽창하고 달성되더라도 권능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팽창과 목적 달성은 기껏해야 사탄이 인간 사이에서 한 어릿광대짓에 지나지 않는다. 잘해 봤자 사탄이 스스로 조상이 되어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야심을 만족시키는 연극일 뿐이다.

이제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상의 내용을 교통하고 난 후, 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의 권능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만의 지위를 상징하지 않느냐? 만물 가운데 너는 어떠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느냐? 어떻게 보았느냐? 사람이 경험하는 사계절을 들어 보자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에 대한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봄에는 나무들이 싹트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무성하게 잎이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 법칙을 바꿀 자가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 권능이 어느 한 측면에서 구현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자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은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으냐? 그것의 존재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느냐? 인류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느냐? 누가 그것의 본질과 기능을 바꿀 수 있느냐? 하나님이 나눈 낮과 밤, 주야를 정한 그 법칙을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사탄을 포함해서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밤이 되었을 때, 잠을 자지 않고 대낮처럼 보낼지라도 역시 밤이다. 네가 너의 생활 규칙을 바꾸었지만, 낮과 밤이 교체하는 법칙은 바꿀 수 없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사자에게 소처럼 밭을 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코끼리를 나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닭을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늑대를 양처럼 풀을 먹게 할 사람이 있느냐? 물속의 물고기가 육지 위에서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왜서일까? 하나님이 그들을 물속에서 살도록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속에서 살아야 한다. 육지에서는 살 수 없고 죽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만물은 모두 자기만의 생존의 법칙과 범위가 있다. 각각 자기만의 본능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가 정한 것으로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사자가 영원히 사람으로부터 격리된 야생 세계에서 살 듯이, 그것은 영원히 소처럼 충직하게 성실하게 사람과 함께하며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없다. 코끼리와 나귀가 모두 동물이고 모두 네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숨을 쉬는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다른 종이다. 그들 각자 하나님에 의해 종류가 구분되고 모두 각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서로 바뀔 수 없다. 닭도 두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영원히 하늘을 날 수 없으며, 기껏해야 나무 위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것의 본능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자명한 것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면서, 인류의 과학은 ‘일취월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의 탐구 과정에서 이룩한 성과는 ‘과히 놀랄’ 정도라서 인류의 재능은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유독 한 가지만은 인간의 과학이 돌파할 수 없다. 인류는 비행기를 만들고, 항공모함을 만들고, 원자 폭탄을 만들고, 우주로 날아가고 달나라에 착륙하고, 네트워크를 발명하여 하이테크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숨 쉴 수 있는 생물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어떤 생물의 본능과 생존 법칙 및 각종 생물의 생사윤회에 대해서 인류 과학은 무능하고 통제할 수 없다. 이것은 인류의 과학이 얼마나 최고의 수준에 달했든지 간에, 창조주의 생각 하나에도 비할 수 없고,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한 오묘함과 창조주 권능의 위력은 가늠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바닷물이 그렇게 많아도, 그것은 지금껏 함부로 자신의 범위를 넘어 육지로 올라온 적이 없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경계를 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해 준 대로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움직이라고 말씀할 때에야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의 거취와 존폐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늘 하는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만물의 법칙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며, 사람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의지로는 변할 수 없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지 만물, 우주, 별, 1년 사계절,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도 다 하나님의 명령과 분부,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의 법칙에 따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존재하고 운행되며 변화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의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 본래의 운행 궤적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사그라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어떠한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갖출 수 있는 것이냐?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모방하고 따라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이냐?

창조주의 신분은 유일무이하며, ‘다신론’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비록 사탄의 기량과 재주가 사람보다 크다 할지라도, 사탄이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탄이 하는 일이 네가 부러워하고 갈망하는 것이든, 네가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든, 네가 볼 수 있는 것이든 볼 수 없는 것이든, 또한 사탄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자기를 숭배하게 할 수 있든, 네가 사탄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든지와 상관없이 너는 절대로 사탄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만이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만물을 관장하고 주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는 재주를 가졌고, 사탄이 하나님을 사칭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사탄이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를 모방할 수 있다는 이유로, 또한 사탄이 하나님과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유일무이한 분이 아니라, 여러 분이 있고, 단지 그들의 능력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들이 장악하는 권력의 범위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또한 그들이 먼저 오고 나중에 온 순서에 따라, 그들의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들의 크고 작음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있다고 오해하거나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세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만일 네가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만일 네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고 유일하게 하나님만이 권능을 지닌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만일 네가 ‘다신론’만 고집한다면, 나는 너를 피조물 중에 패륜자라고 할 것이며, 사탄의 화신으로서 매우 사악한 자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희에게 어떤 것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인지 알겠느냐? 언제 어디서 어떤 배경하에서도 너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 사물과 함께 놓고 얘기해선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아무리 어렵고 접근하기 힘들다고 생각할지라도, 사탄의 행위 방식과 말하는 방식이 아무리 너의 생각과 일치하고 너의 상상에 부합되더라도, 얼마나 너를 만족시키더라도,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되고 개념을 혼동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거나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부인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문전박대하고 대신 사탄을 끌어들여 너의 마음속 ‘하나님’을 대체하거나 너의 하나님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 결과가 무엇일지, 너희들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류는 비록 타락되었어도

여전히 창조주 권능의 주재 하에서 살아간다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킨 몇천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며, 대대로 사람들을 미혹하며 인간 세상에서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사람을 해치고 미혹시키고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유혹하며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는 등의 악행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 아래의 만물과 생명체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제정한 법칙과 규율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과 비교할 때,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그것의 창궐은 추하기 그지없으며, 사람을 역겹게 하고 염증을 일으킨다. 또한 왜소하기 짝이 없고 보잘것없다. 비록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사탄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몇천 년이 지나오면서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내려 준 빛과 공기를 누리고 있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친히 불어 준 생기로 숨을 쉬고 있고, 하나님이 만든 꽃과 새, 물고기와 곤충들을 즐기며, 하나님이 공급해 준 만물을 만끽하고 있다. 낮과 밤은 여전히 끊임없이 교체되고, 사계절 역시 변함없이 순환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올 겨울에 떠나가서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온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과 호수인 그들의 집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땅 위의 매미는 여름날 마음껏 노래를 부른다. 풀 속의 귀뚜라미들은 가을날 가을 바람을 따라 노래한다. 기러기는 무리를 이루고 송골매는 홀로 고독하게 날고 있다. 사자 무리는 사냥하며 살아가고, 사슴들은 꽃과 풀밭을 떠나지 않는다… 만물 가운데의 각종 생명체들은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며 찰나 속에서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 각자의 본능과 생존 법칙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자양분 아래 생존한다. 그 누구도 그들의 본능을 바꿀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들의 생존 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만물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류는 비록 사탄에 의해 타락되고 미혹되었지만, 하나님이 만든 물과 공기와 만물을 떠날 수 없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이 공간 속에서 번성하며 살아간다. 인류의 본능은 변화가 없으며, 인류는 여전히 두 눈으로 바라보고, 두 귀로 경청하고, 머리로 생각하며, 마음으로 깨닫고, 두 다리와 두 발로 걸으며, 두 손으로 일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하나님과 협력하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고,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 심령에 필요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며, 인류가 뿌리를 찾아 돌아가려는 소망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창조주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원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살아가면서 사탄의 피비린내 나는 학대를 견디고 있는 인류의 현주소다. 비록 사탄의 엄청난 유린을 당한 인류는 더 이상 태초에 창조한 아담과 하와가 아니고, 지식과 상상, 고정 관념 등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들이 가득하고, 사탄의 타락된 성품이 가득한 인류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 섭리 하에 있고, 하나님이 정한 궤적 가운데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사탄에 의해 타락된 인류는 단지 외관적으로 더럽고 굶주리고 반응도 느리고 기억력도 감퇴하고 나이가 조금 많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기능과 본능은 오히려 무결하게 완전하다. 이런 인류가 바로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이다. 이런 인류는 창조주의 부름을 듣고 창조주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곧 일어나 음성의 근원을 찾아 달려간다. 이런 인류는 창조주의 그림자를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창조주를 위해 헌신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의 마음과 영이 창조주의 마음의 소리를 깨달을 때, 인류는 사탄을 버리고 창조주의 곁으로 온다. 인류가 완전히 몸의 더러움을 씻어 내고 창조주가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얻을 때, 인류의 기억은 회복된다. 이때의 인류는 진정으로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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