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지난번 예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주제에 대해 나누었다. 무엇에 대해 나누었느냐? 기억하고 있느냐? 내가 다시 말해 보겠다. 지난번에 나누었던 주제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 주제가 너희에게 중요하냐? 너희에게는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하냐? 하나님의 사역이냐, 하나님의 성품이냐,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냐? 너희는 이 중 어떤 주제가 가장 흥미로우냐?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중에서 가장 듣고 싶은 주제는 무엇이냐? 나는 너희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역 곳곳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은 그의 사역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드러나며, 또 하나님의 성품이 사실상 하나님 자신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체 경륜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이 셋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지난번에 나누었던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된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사람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자 또한 하나님의 참여와 말씀이 있었던 일이기에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면서부터 인류와 접하고 인류에게 말씀하기 시작했으며, 인류에게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은 인류와 접하면서부터 인류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소유와 어떠함, 본질을 공개했다는 뜻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볼 수 있든 없든,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요컨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면서 자신의 성품과 본질을 나타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류와 접하고 사역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성품과 본질, 소유와 어떠함을 선포하고 나타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람에게 뭔가를 숨기거나 감춘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내보였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은 인류가 그를 알고 그의 성품과 본질을 이해하길 바라지, 인류가 그의 성품과 본질을 영원한 비밀로 간주하거나 하나님을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로 여기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류는 하나님을 알아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이런 인류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선포하는 말씀과 나타내는 성품은 그의 뜻과 본질을 대변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접하면서 무슨 말씀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떠한 성품을 나타내든지, 또 사람이 본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본질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 인류가 얼마나 느끼고 이해하며 깨달을 수 있는지와 상관없이 이는 전부 하나님의 뜻, 즉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살며 또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흡족게 하라는 요구로 나타난다. 이러한 요구는 하나님의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더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할 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그 어떤 거짓이나 위장도, 숨김이나 포장도 없다. 그런데도 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이겠느냐? 왜 사람은 늘 하나님의 뜻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나타내고 보여 주는 것이 전부 하나님 자신의 소유와 어떠함이고 진실한 성품의 면면인데, 왜 사람은 보지 못하고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은 창세 이래 단 한 번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러니까 막 창조한 사람에게 무엇을 했든, 사람은 그저 하나님을 동반자나 의지할 대상으로 여겼을 뿐,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즉,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 사람에게 ‘동반자’로 보이는 그 대상이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가 만물을 주재하는 분이라는 사실 역시 알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 당시의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천지 만물이 하나님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으며, 하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는커녕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도 그 당시에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며, 그가 행한 일을 이해하고 그의 뜻을 알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인류가 창조된 직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시대의 사역을 준비할 때부터 사람에게 일련의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제사 드리는 법,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 등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개념이 생겼고,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하나님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 얼마만큼 많이 알고, 얼마만큼 깊게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역의 절차와 사역의 진행 상황에 따라 사람에게 서로 다른 요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아주 진실하지 않으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합리적이지 않으냐? 그는 인류가 창조된 초기에는 사람에게 정복 사역을 하지 않았고, 온전케 하는 사역도 하지 않았다. 그리 많은 말씀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는 아주 낮았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심지어 그를 거스르는 일을 해도 그는 모두 용서하고, 따져 묻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사람이 어떤 것들을 갖추고 있는지 알기에 사람에게 어떤 요구 기준을 두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요구 기준이 아주 낮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성품이 위대하지 않다거나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이 허황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을 이해하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발걸음을 따르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과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된 후에도 하나님께 참모습을 드러내라고 요구하겠느냐? 사람은 그러지 않을 것이며, 그럴 엄두를 내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게 됐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참모습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간다. 그에 따라 하나님은 무지개를 증거 삼아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세운 후, 자신과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는 사람과 땅에서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점점 더 간절히 원하게 됐다. 특히, 땅에서 흑암 세력과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얻길 원했다. 그런 사람들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창세 때부터 줄곧 기대해 마지않던 일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든 사람과 언약을 세우든,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마음도, 계획과 소원도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 창세전부터 오래도록 바라던 것은 인류 가운데서 그가 얻고자 하는 사람, 즉 그의 성품을 알고 그의 뜻을 이해하고 그를 경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그를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그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 계속해서 하나님의 발자취와 사역 발걸음을 따라,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면면을 찾아보자.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알고 이해해 보도록 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조금씩 하나님께 다가가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하자.

지난번에 우리는 하나님이 왜 사람과 언약을 세웠는지에 관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다음 부분의 성경 구절을 나눠 보도록 하자. 성경을 읽어 보아라.

1. 아브라함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다

창 17:15~17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 17:21~22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하나님이 하고자 결정한 사역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너희는 방금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겠지? 그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에 택한 인물로, 아브라함이라고 불렸다. 그가 100세, 그의 아내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 임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떠한 약속을 주려고 했느냐? 바로 성경에서 언급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라는 약속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했을 때 아브라함의 상황은 어떠했느냐? 성경에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 이 노부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그는 땅에 엎드려 웃으며 속으로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그저 농담으로 여긴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고, 하나님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것이 몹시도 웃긴 일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으면서 나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도 모르시는구나. 게다가 내게 아이를 낳아 기르라며 아들을 주시겠다니.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생각하며 땅에 엎드려 웃었다. 또 그는 마음속으로 ‘불가능해. 이건 하나님의 농담일 거야. 진짜일 리 없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로 여기지 않았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어떤 사람이었느냐? (의인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를 의인이라고 하느냐? 너희는 하나님이 부른 사람이면 다 의인이고, 완전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구나. 참으로 교조적이다! 너희는 이 일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쉽게 정의하지 않으며, 여기에서도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이 있다. 이 일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태도를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어떠한 것 같으냐? 막연한 면이 있지 않으냐? 그의 믿음이 큰 것 같으냐?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의 웃음과 그의 마음속 생각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은 순전히 상상에 불과하며, 아무렇게나 끼워 맞춘 무책임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웃음과 몸짓을 하나님이 보지 못했겠느냐? 하나님이 알지 못했겠느냐? 하나님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자신이 정한 일을 바꿀 리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계획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어떤 태도를 보이든, 하나님은 어떤 영향도, 방해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쉽게 바꾸지 않으며, 사람의 태도, 더욱이 무지한 태도 때문에 함부로 계획을 바꾸거나 무너뜨리지 않는다. 창세기 17장 21~22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라고 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든 하나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라고도, 하나님을 얼마나 알라고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행한 일과 말씀을 이해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이 하려는 일과 택하려는 사람, 그리고 일의 원칙에 대해 사람에게 완전히 이해하라는 요구도 하지 않았다. 사람의 분량이 턱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 어떤 태도를 보이든,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 정상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정죄하지도 훈계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라는 말씀만 남겼을 뿐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에 따라 점차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눈에는 이루고자 계획한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다 예비한 후 곧 떠나갔다.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든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계획하든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과 절차,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발전되어 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역 원칙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떻게 인식하든 간섭하지 않지만, 사람이 믿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계획이나 사역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일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대로 이루어졌고, 성경에서 보았듯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시간에 이삭을 태어나게 했다. 사람의 행위와 태도가 하나님의 사역을 막았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되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믿음이나 관념, 상상이 하나님의 사역에 어떤 영향이라도 주었더냐? 그렇지 않다! 조금의 영향도 주지 않았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 어떤 사람, 일, 환경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가 하고자 뜻을 정한 모든 일은 그의 계획에 따라 제때에 완성되고 이루어지며, 그의 사역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우매함과 무지함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과 관념조차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거침없이 해 나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며, 전능함의 발현이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다

창 22: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줌으로써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이 응하였지만, 그것이 하나님 계획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그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 것은 전체 경륜의 서막에 불과하다. 그 시각,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사건으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음을 또 누가 알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고, 사람의 진심만을 원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자. 창세기 22장 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였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그가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이 일은 지금 보기에도 여전히 사람의 관념과는 어긋나지 않느냐? 그렇다! 이때 하나님이 행한 일은 사람의 관념에 매우 맞지 않는 것이며,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사람이 믿지 못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아들을 주시고는 아들을 얻자 또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하나님은 대체 뭘 하시려는 거지? 하나님의 뜻은 대체 무엇일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고는 또 그에게 조건 없이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하느냐?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너무 지나칠 뿐만 아니라 조금은 ‘말이 안 되는’ 처사이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 본인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 다른 생각이나 약간의 추측은 했지만 그래도 아들 이삭을 바칠 준비를 했다. 아브라함이 기꺼이 아들을 바치려고 했음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느냐? 원문에는 어떻게 적혀 있느냐? 이같이 기록되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 22:3),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 22:9~10).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그 모든 행동을 하나님은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보았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한때 어리석고 무지했으며 하나님을 오해했지만, 이때 하나님에 대한 마음만큼은 참되고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 그의 아들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되지 않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보일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이해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드러났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 ― 이삭을 바치라는 것 ― 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했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인물이라고 확신했다. 비록 그 일이 시련과 검증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위안을 받았고, 그에 대한 사랑을 느꼈으며, 또한 처음으로 사람에게 위로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고 하던 그 찰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더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삭의 생명을 가져갈 생각이 없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바로 저지했다. 하나님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미 검증을 통과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것으로 충분했으며, 하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한 일에서 결과를 얻었다. 그 결과에 하나님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그 결과에 만족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한 것, 보고자 기대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비록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 사람을 검증한다고는 하나,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았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진심임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무조건적인 것이었고, 이 ‘무조건’은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이미 이것을 바쳤고, 그것을 포기했어.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내게 만족을 못 하시는 걸까? 왜 계속 내게 시련을 주시는 거지? 왜 계속해서 나를 검증하시는 거지?”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 준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을 보지 못했고, 너의 마음을 얻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너에게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려고 칼을 들었던 것과 같은 그런 진심과 무조건적인 순종을 보지 못했고, 너에게서 위안을 얻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네 시련이 계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사실 아니더냐? 이 주제는 여기까지 다루고, 이어서 다음 단락,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읽어 보자.

3)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창 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사실 그대로 담은 기록이다. 말씀은 아주 간결하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아주 풍성한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이유와 배경, 축복의 내용이 담겨 있다. 동시에, 그 말씀을 할 때 하나님의 기쁨과 벅찬 심정,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얻기를 희망한다’는 간절한 마음도 담겨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따르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긍휼히 여긴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치른 대가와 고심도 보았으며, 나아가 이번 경륜 사역의 뒤에서 하나님이 혼자 감당하고 있는 슬픔과 아픔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말씀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뜻깊은 말씀이자, 후세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와 크나큰 영향을 주는 말씀이다.

사람은 진심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여기에서 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복은 크지 않으냐? 얼마나 크더냐? 이 말씀 중 핵심은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는 구절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전무후무한 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그의 외아들을 ―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을 ―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여기에서는 ‘바친다’는 말 대신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말을 써야 한다.) 했을 때,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복을 내렸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한 복은 무엇이었느냐? 바로 그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번성한다는 것이더냐? 성경에는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이냐?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더냐? 성경에는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조금의 원망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구대로, 명령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그러한 복을 약속한 것이다. 그 약속에는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하나님의 마음과 관련된다. 그 중요한 말씀을 너희는 보았느냐? 어쩌면 너희는 주의 깊게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하였다. 그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할 때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보통 맹세할 때 어디를 가리키느냐? 다 하늘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을 향해 맹세하고 서원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맹세했다는 이 ‘현상’에 대해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정확하게 해석을 해 주면 너희는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다시 한번 외로움을 느꼈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에’ 혹은 ‘무의식적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했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고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스스로에게 말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은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에서 너는 너 자신을 연상해 볼 수 있다. 가슴에 손을 대고 스스로에게 말할 때, 보통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알지 않느냐? 그럴 때 너의 태도는 아주 진지하지 않으냐? 더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할 때 하나님의 태도가 아주 진지하고 진실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며 약속을 주었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나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할 것이다. 그는 내 말에 순종했으며, 내가 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말씀을 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라엘 선민들이 나게 하고, 그 후 그 선민들을 이끌어 그의 사역에 발맞춰 나아가게 하기로 뜻을 정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맡기려 했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이 선포하고자 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지게 하며, 그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바람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러니 이것은 복받은 일 아니겠느냐? 인류에게 있어서 이보다 큰 복은 없으니, 가장 큰 복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받은 이 ‘복’은 그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장차 그의 경영, 부탁, 사역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이루려고 한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경륜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을 할 때,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맹세할 때, 하나님은 이미 뜻을 정하였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는 이 과정이 매우 진실하지 않으냐? 더없이 실제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은 그때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심혈을 기울이고, 그의 소유와 어떠함, 그의 모든 것, 더 나아가 그의 생명까지 그들에게 베풀어 주기로 결정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서부터 그의 행사를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그의 지혜와 권병과 능력을 보여 주리라 뜻을 정했다.

하나님을 알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그에게 내리는 축복의 말씀만 들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그 순간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을 알 수 있었겠느냐?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키며 맹세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외롭고 슬펐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 그가 계획한 것에 대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을 포함한 모든 사람 중에 그와 마음을 나누며 대화할 수 있는 이는 물론이고, 그가 하고자 하는 사역에 협력할 수 있는 이조차 한 명도 없었다. 겉보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얻었고, 그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을 얻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렸을지라도, 마음은 여전히 만족을 얻지 못했다.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의 경영이 비로소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그가 얻고자 하는 사람, 그가 보고자 하는 사람, 그가 기뻐하는 사람이 아주 멀리 있어서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려야 하고 인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때는 하나님 자신 외에 누구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얻고자 하며, 무엇을 바라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몹시 흥분되는 동시에 또 몹시 무거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다음 사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님은 이처럼 큰 복을 내렸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해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며, 자신을 이해하고 진심을 보이는 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같은 진심을 어느 정도로 소중히 여길 것 같으냐? 아마 너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자라자 하나님은 또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수행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 아브라함의 그 진심에 하나님은 감동했고, 그것을 귀히 여겼다. 어느 정도로 귀하게 여겼느냐? 귀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이냐?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세상이 놀랄 만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전에 없던 만족감을 느꼈으며,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을 얻은 기쁨을 느꼈다. 그 ‘만족감’과 ‘기쁨’은 하나님이 손수 만든 피조물로부터 온 것이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께 드린 가장 진귀한 첫 번째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그토록 힘들게 기다리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창조된 인류에게서 받은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선물로 여겼다. 또한 그것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기울인 심혈로 얻은 첫 번째 성과를 보았고, 인류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그 후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 그와 함께하며, 그를 진심으로 대하고 그를 헤아리기를 바랐다. 심지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계속 살아가기를 희망했다. 그는 아브라함 같은 마음을 가진 자가 그와 함께하고, 그의 경영에 계속 함께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단지 바람이고 생각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저 하나님께 순종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 ― 하나님을 알고 증거하고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하는 것 ― 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일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보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검증을 통과한 것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진심과 순종을 열납했을지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기(知己)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했으며,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사람이 되기에도 부족했다. 또한,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외롭고 조급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외롭고 조급할수록 최대한 빨리 그의 경영을 이어 나가고자 했고, 한 무리의 사람을 택하고 얻어 그의 경륜과 뜻을 이루고자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그런 간절한 마음은 바뀐 적이 없다. 처음 인류를 창조한 이래, 하나님은 이긴 자들, 즉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깨닫고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나와 그와 동행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난하든, 하나님이 고대하는 목표가 얼마나 멀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변한 적이 없고, 그것을 포기한 적도 없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느냐? 아마도 그렇게 실감 나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느껴 보거라!

아브라함이 살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또 성 하나를 멸망시켰다. 그 성의 이름은 소돔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성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성을 멸망시킨 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다음 몇 단락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를 통해 그 당시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어서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2.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려고 하다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몇 구절의 말씀은 내가 성경에서 고른 것이다. 하지만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니 온전한 문장을 보고 싶다면 성경에서 찾아보아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원문의 일부 내용은 생략했다. 중요한 단락과 구절만 선별하고 몇 구절을 뺐지만, 그것이 오늘 우리의 교제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나는 우리가 교제하려는 모든 장절과 내용에서 당시 발생했던 사건의 세부적 사항과 사람의 태도는 제쳐 놓고, 당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고,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에서 진실한 하나님 자신을 보았다면 목표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명령대로 따르는 사람만을 보살핀다

이 몇 구절의 내용에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숫자들이다. 처음에, 여호와는 성안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용서하겠다고 했다. 즉,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50명의 의인이 있었느냐? 없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또 어떤 대화를 나눴느냐? 만일 의인 4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그래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시 30명의 의인이 있으면 어찌 되는지 물었다. 하나님은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의인이 20명 있으면? 역시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의인이 10명이라면? 그래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실제로 성안에 의인이 10명이라도 있었느냐? 10명은 없었지만 한 명은 있었다. 그 한 명의 의인은 누구였느냐? 바로 롯이었다. 당시 성안에는 의인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이 숫자에 대해 까다롭고 엄격하게 말씀했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질문했으며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묻기까지 했다. 하나님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했다. 여기에서 10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숫자였지만, 실제로 소돔 성안에는 10명의 의인도 없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눈에 그 성안 사람들의 죄악과 사악함이 이미 멸해야만 할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의인이 50명 있어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말씀은 무슨 뜻이겠느냐? 그러한 숫자는 하나님께 있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성에 의인이 한 명밖에 없더라도, 하나님은 성을 멸할 때 그 의인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게 할 생각이었다. 즉, 하나님이 그 성을 멸하고자 했든 안 했든, 그 성에 의인이 몇 명 있었든, 그 죄악의 성은 하나님이 보기에 저주받을 곳이었고, 마땅히 멸망되어 하나님 눈앞에서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인은 마땅히 살아남아야만 했다. 시대와 인류의 발전 정도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이러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사악한 것을 증오하며, 그의 눈에 보이는 의인을 보살핀다. 하나님의 이 명확한 태도가 바로 하나님 본질의 진정한 발현이다. 성안에는 의인이 한 명뿐이었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그 성이 반드시 멸망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그 시대에 성안에 의인이 50명만 있었으면 하나님은 그 성을 멸하지 않았을 것이며, 의인이 10명만 있었어도 그 성을 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고 경배하는 사람들을 봐서 인류를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결정을 내리거나 그들을 인도하는 사역을 할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로운 행동을 중히 여기고, 그를 경배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며, 그의 앞에 선행을 쌓은 자들을 중요시한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너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진리를 교제하거나 하나님의 도에 대해 얘기해 주는 것을 성경에서 본 적이 있느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본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알려 주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는 그대로 하고 누군가는 하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그 말씀을 믿었고 누군가는 믿지 않았다. 이것이 다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의인, 즉 하나님 눈의 의인은 그저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명령대로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집행하는 종이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된 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의인이 몇 명이든 하나님이 보기에 그 의인이 하나님의 지기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들을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지기나 증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 불렀느냐? 구약 성경에 하나님은 여러 차례 사람을 ‘나의 종’이라 칭하였다. 즉, 그 시대의 의인들이 하나님께는 자신의 종,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호칭을 어떻게 생각했겠느냐? 왜 그렇게 불렀겠느냐? 사람에게 어떤 호칭을 붙여 부를 때, 하나님의 마음에 기준이 있지 않겠느냐? 분명히 있다. 사람을 ‘의인’이라고 칭하든, ‘완전한 자’나 ‘정직한 자’라고 칭하든, 혹은 ‘종’이라고 칭하든, 하나님께는 기준이 있다. 그가 사람을 ‘종’이라고 부를 때는 그 사람이 그의 사자를 맞이할 수 있고, 그의 명령을 따를 수 있으며, 그의 사자가 지시한 대로 행할 수 있는 자라고 확정한 것이다. 어떤 일들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람에게 행하라고 명령한 일들이다. 그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땅에서 행하라고 한 것을 하나님의 도라고 칭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일들은 단순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사람에게 단발성으로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라고 간단하게 지시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나님은 계획에 따라 그의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여러 조건들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고, 시기도 아직 무르익지 않아 인류가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기에 하나님은 그의 도를 선포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한 ‘의인’은 30명이든 20명이든, 하나님이 보기엔 다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의 사자가 종에게 임했을 때 그 종은 나아가 영접할 수 있었고, 그의 지시를 따르며, 그의 말대로 행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눈의 종이 된 자가 행하고 달성해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칭하는 데는 기준이 있다. 그들을 ‘종’이라 칭한 이유는 그들이 결코 지금의 너희처럼 많은 도를 들어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정직한 인성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고,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하던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있어 ‘종’의 또 다른 의미는 땅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는 아닐지라도 땅에서 하나님 말씀을 집행하는 자이자 시행하는 자이다. 이것으로 그 종이나 의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려면 그에게 협력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하나님의 종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하나님의 사자가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들이 담당하는, 하나님이 명령한 모든 ‘임무’는 하나님께 있어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그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 종들이 하나님께 협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은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바람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보살피는 자에게는 크게 긍휼을 베풀고, 혐오하고 버리는 자에게는 크게 노한다

성경의 기록을 봤을 때 소돔 성에 하나님의 종이 10명이라도 있었느냐?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께 그 성을 남겨 둘 가치가 있었겠느냐? 성에서 오직 롯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했다. 이는 그 성에 하나님의 종이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롯만 구원하고 소돔 성을 멸한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언뜻 보기에는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행사에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가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장기간의 감찰과 생각을 거치며, 때가 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결정이나 판단도 단호하게 내리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는 그 결정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성안에는 의인이 40명, 30명, 20명은 물론이고 10명조차도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의인은 롯 한 명뿐이었다. 하나님은 성에서 일어나는 일과 성안의 상황을 감찰하여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결정은 잘못될 리가 없었다. 하나님의 전능에 비하면 사람은 한없이 무감각하고, 우매하고 무지하며, 근시안적인 존재라는 것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에서 우리가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현되어 왔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숫자는 지극히 단순하며 어떤 문제도 설명하지 않지만,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의인이 50명 있다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 아니더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관용으로 말미암은 것 아니더냐? 너희는 하나님의 이 부분 성품을 보았느냐? 더 나아가 의인이 10명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의인 10명을 생각하여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관용과 사랑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그 의인들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고, 그들을 염려하여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용이다. 우리가 마지막에 본 결과는 무엇이었느냐? 아브라함이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멸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였다. 그 후,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성에는 그가 말한 10명의 의인이 없었기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기로 뜻을 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너희는 여기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어떤 결정을 하였느냐? 그 성에 의인이 10명도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성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성을 멸하겠다고 결정했다. 이는 하나님의 노 아니겠느냐? 그 ‘노’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하지 않느냐? 그 성품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의 발현 아니겠느냐?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본질의 발현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의인이 10명이 안 될 경우, 반드시 그 성을 멸할 것이며, 또한 그 성의 사람들을 엄하게 벌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했으며, 너무나 더럽고 패괴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 이 대화들을 분석하는 것이겠느냐? 이 간단한 몇 구절에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오롯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인을 귀하게 여기고 긍휼히 여기며 관용으로 대하고 염려하는 동시에, 그 성안의 모든 패괴된 자를 마음속 깊이 증오했다. 이것이 크게 긍휼을 베풀기도 하고 크게 노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느냐? 불로 멸하였다. 하나님은 왜 불태우는 방법으로 그 성을 멸했겠느냐? 어떤 물건이 불에 타는 것을 볼 때, 혹은 어떤 것을 불태워 버리려고 할 때, 너는 그 물건에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 왜 그것을 불태우느냐? 더는 그것이 필요 없고,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그것을 포기한다는 뜻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불로 태우는 방식에는 포기한다는 의미, 증오한다는 의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불로 소돔 성을 멸할 때 하나님의 심정이 바로 이러했다. 불태우는 방식은 하나님의 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는 그가 노할 때 사람에게 그의 거스를 수 없는 면을 드러낸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푼다. 반면 사람이 심히 패괴되고 하나님을 끝없이 적대시하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크게 노한다. 그 노는 어느 정도까지 분출될까?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분출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노가 사라진다. 즉, 누구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몸과 생각이 외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따르고 순종하길 원하든 간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노는 끝없이 분출된다. 심지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하나님이 크게 노할 때, 하나님의 노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분출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더 이상의 긍휼도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하나님이 성 하나를 멸하려고 한 일이 사람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죄악으로 가득한 그 성은 하나님이 보기에 더 이상 존재할 수도, 남아 있을 수도 없으니 그 성을 멸하는 것이 이치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기 전후에 발생한 일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볼 수 있다. 그는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지만, 악한 것과 죄에 속한 것,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노하며, 그 노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된 부분이자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고, 나아가 하나님이 시종일관 나타내고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이다. 즉,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한다는 것이다. 너희들 대다수가 하나님의 긍휼은 어느 정도 느낀 적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노를 체험한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모든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일찍이 크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 중 어떤 이, 또는 어떤 이들에게 크게 노한 경우는 아직까지 매우 드물어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급해할 것 없다! 하나님의 노는 조만간 모든 사람이 보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겠느냐?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노를 표출할 때,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크게 노할 때는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에 그 사람을 혐오하고 버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존재를 증오하며 더 이상 그 사람의 존재를 참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노가 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소멸됨을 의미한다. 지금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직 그 정도까지 진행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크게 노하면 너희 중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이 시대에 너희 모두에게 크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을 뿐, 아직 크게 노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하나님의 노가 임하기를 구하면 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노와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이 정말 존재하는지를 체험해 보아라. 너희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말세의 사람은 하나님의 노를 말씀에서만 보았을 뿐, 진정으로 체험하지는 못했다

이 몇 구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두 가지 측면의 성품은 교제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으냐?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생겼느냐? 어떤 이해가 생겼느냐? 마지막 이 무리의 사람들은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마지막 단계에서 위엄과 진노를 지니고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는 오직 말씀으로 그의 사역을 이룬다. 말씀으로 가르치며, 말씀으로 공급하고 양육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노는 줄곧 감춰져 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진노의 성품을 느낄 뿐, 직접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 심판과 형벌의 사역에서 사람은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노를 통해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을 느꼈지만, 하나님의 노는 어디까지나 말씀 안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꾸짖고 드러내고 심판하고 형벌하며 심지어 정죄하지만, 아직까지 사람에게 크게 노한 적은 없으며, 말씀 밖에서는 사람에게 노를 표출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사람이 체험한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의 참된 성품의 발현이지만,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저 하나님 말씀의 어조와 분위기에서 느낀 효과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효과로 인해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노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았고, 거스를 수 없는 모습도 보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체험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가 얼마나 나쁘든, 사람의 성품이 얼마나 패괴되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줄곧 인내하고 있다. 그렇게 인내하는 목적은 그가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그의 말씀과 그가 기울인 심혈로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 위함이다. 그러한 결과를 기다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또한 사람에게 다양한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18~19년, 심지어는 20~30년이 지나야 진정한 어른으로 자라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과정이 끝나기를, 그러한 날이 오기를,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끊임없이 크게 긍휼을 베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역 기간에 극소수의 사람은 죽임을 당했고, 또 몇몇 사람은 하나님을 심하게 대적해서 징벌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잘 입증하며,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전형적인 사례에서, 그 사람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일부 성품이 하나님의 전체 경륜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사실, 마지막 단계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기다리는 동안 내내 인내하고 있다. 그는 그의 인내와 생명을 대가로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너희는 이것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계획을 망치지 않는다. 그는 노할 수도 있고 긍휼을 베풀 수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된 두 가지 성품의 발현이다. 더없이 뚜렷하지 않으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에게 옳은 것과 틀린 것,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증오하는지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직접적으로 구현되어 나온다. 또한 하나님은 사역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보여 준다. 모호하거나 두리뭉실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구체적이고 진실하며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준다는 말이다. 이런 분이 바로 참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에게 감춰진 적이 없으며, 다만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뿐이다

만일 내가 이런 것을 교제하지 않았다면, 너희는 성경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행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그의 말씀은 아주 적고,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성품을 소개하거나 그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런 기록을 단순히 이야기로만 여기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이 ― 사람에게 감춰져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나의 교제를 듣고도 여전히 하나님이 사람에게 완전히 감춰졌다고 생각하느냐? 아직도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에게 감춰졌다고 생각하느냐?

창세 이래,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사역과 함께했으며, 사람에게 감춰진 적 없이 전부 공개되고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졌고, 사람이 점점 더 심하게 패괴됨에 따라 사람과 하나님의 거리도 점차 멀어졌다. 서서히, 사람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사라졌으며, 또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면서 하나님과 관련된 ‘소식’을 전부 잃게 되었다. 나아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모르게 되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감춰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 늘 하나님께 다가가지 않고, 사람은 늘 하나님을 피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멀어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사실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옮겨 간 것은 아니다. 그저 혼자 간직한 채 하나님께 바치지도, 보여 드리지도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 저의 마음을 감찰하소서. 당신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라고 기도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 서원을 어기면 벌을 받겠다고 맹세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감찰해 달라고 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한다는 뜻은 아니며, 자신의 앞날과 운명과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겼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께 어떤 맹세와 다짐을 했든 간에, 하나님이 보기에 네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네 마음을 살피는 것만 허락했지, 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는 네 마음을 하나님께 내놓지 않았으며,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했을 뿐, 각종 간사한 속셈은 다 감춘 셈이다. 너는 네 의도와 타산, 계획을 전부 숨기고, 하나님이 네 앞날과 운명을 빼앗아 갈까 두려워하며 손안에 꼭 움켜쥐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그에 대한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 분이기에 사람이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볼 수 있으며, 사람의 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손에 바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단지 살펴볼 권리만 있을 뿐, 다스릴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주관적인 의식 안에는 자신을 하나님의 지배에 맡길 생각이나 계획이 없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폐쇄적이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마음을 감추고, 감언이설로 허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신임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꼭꼭 숨겨 하나님이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이 보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간수하고 싶지, 하나님께 바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든 다 스스로 계획하고 타산하고 결정할 것이므로 하나님의 ‘참여’와 간섭이 필요치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도 필요치 않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이나 부탁, 요구를 대할 때는 자신의 속셈과 이익, 그리고 그 당시 자신의 상태와 처한 환경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늘 자신의 지식과 식견을 바탕으로, 또 자신의 머리로 자기가 나아갈 길을 판단하고 선택하며, 하나님이 간섭하고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본 사람의 마음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인류뿐이었다. 즉, 모든 생물과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인류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며, 언어가 있고 생각과 자유 의지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바람을 전부 사람에게 두었다. 그는 사람을 그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동행할 수 있는 동반자로 삼고자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경영을 시작한 후 줄곧 사람이 그에게 마음을 바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을 정결케 하고 채워 주어 하나님이 흡족해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를 줄곧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 그러한 사람이 있느냐? 즉,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인물이 기록되어 있느냐? 지금 시대 이전에 그런 선례가 있더냐? 계속 성경의 기록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그리고 다음의 인물인 욥이 행한 모든 것이 오늘 우리가 나눌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다’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는지, 욥은 하나님이 흡족해하고 기뻐하는 사람인지 살펴보자.

너희는 욥이라는 사람을 어떤 이미지,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느냐? 누군가는 성경 말을 인용해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 이것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다. 만약 너희가 자신의 말로 욥을 평가한다면 그를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혹자는 욥은 좋은 사람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며, 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는 자라고 말한다. 또 혹자는 욥을 가리켜 인성이 좋은 의인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모두 욥의 믿음을 보았으며, 그의 믿음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은 욥이 도대체 어떤 것들을 갖췄기에 하나님께 그토록 열납되었는지 보도록 하자.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보자.

3. 욥

1) 욥에 대한 성경과 하나님의 평가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너희는 위의 구절에서 어떤 핵심을 발견했느냐? 이 짧은 세 구절은 모두 욥과 관련된 것으로,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욥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일상 속에서 욥이 보여 준 행동과 태도를 들어,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 근거가 있음을 모두에게 알려 주고 있다. 이 세 구절의 성경 내용은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든(욥 1:1) 하나님의 평가든(욥 1:8) 전부 그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보인 행동(욥 1:5)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 준다.

우선 첫 번째 구절을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는 성경 기록 중 욥을 평가한 첫 번째 말로, 욥에 대한 욥기 저자의 평가이며, 당연히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를 대변한다. 그 평가는 이렇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다음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 두 평가 중 하나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그 내용은 같다. 이를 통해 욥의 행동과 태도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은 물론, 하나님의 칭찬까지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욥은 사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는 땅에서 유일하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욥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

이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보자. 위와 아래 이 두 성경 구절 말고 1장 5절을 보자.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 중 하나이다. 이 모습은 평소 생활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지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모습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늘 이렇게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잔치를 열 때면 늘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욥은 이 일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원문에는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욥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심이 결코 외적인 행동이 아니며,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일상생활 속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악한 일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늘 아들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두려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아들들도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음을 말해 준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몇 번을 살펴보아도 진실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은 어쩌다가 한 번씩 그랬느냐, 아니면 항상 그랬느냐? 원문 마지막 구절에는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 이는 욥이 가끔, 혹은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을 때 들여다본 것이 아니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한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즉, 욥은 항상 아들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항상’이란 하루 이틀이나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태도는 일시적인 것도, 단지 인식상에만 머문 것도, 그저 입으로만 떠든 것도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가 그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했으며, 삶의 근간으로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걱정했음을 뜻한다. 이는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도가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한 이유는 마음속에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고, 또 하나님의 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아울러 그는 자녀들을 위해 걱정하며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다. 이런 것들은 욥이 일상생활에서 보여 준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정상적인 모습들이 바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그가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살았음을 입증한다. 또한,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는 구절은 평소 하나님 앞에서 행한 그의 모든 행동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욥은 항상 그렇게 행했으며, 그의 행동과 마음은 늘 하나님 앞에 이르지 않았더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늘 그의 마음과 행동을 열납하지 않았더냐? 욥은 어떤 상황과 배경에서 항상 그렇게 했느냐? 혹자는 하나님이 늘 그에게 나타났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라고 말하며, 혹자는 욥이 악에서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었기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욥이 자신의 재산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면 재산을 잃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이 다양한 견해들이 다 사실이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욥을 열납하고 귀하게 여긴 이유는 그가 ‘항상 이러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욥이 사탄에게 넘겨져 시험받았을 때,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탄 앞에서 보인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다음의 구절들이 바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로, 이 증거들을 통해 우리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자.

2) 사탄이 처음으로 욥을 시험하다(가축은 약탈당하고, 자녀는 화를 입다)

(1) 하나님의 말씀

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2) 사탄의 대답

욥 1:9~11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이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한 이유는 욥의 믿음을 완전케 하기 위함이었다

욥기 1장 8절은 성경에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과 사탄의 첫 번째 대화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였느냐?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는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말한 욥에 대한 평가로서,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과 사탄이 이러한 대화를 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 욥을 시험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즉, 욥을 사탄에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과 평가가 틀림없음을 실증할 수 있고, 욥의 증거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수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을 완전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왔을 때, 하나님은 즉시,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의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탄이 곳곳을 떠돌며 하나님의 종, 욥을 늘 감시하고, 시험하고 공격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무너뜨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이 굳게 서지 못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있었다. 또한,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욥을 해하려는 사탄이 욥에게 하나님을 버리게 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그를 빼앗아 가려 한다는 것도 하나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욥의 마음을 감찰하는 하나님은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보았으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도 보았다. 하나님은 질문의 방식으로 사탄에게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므로 절대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따를 리가 없음을 알려 준 것이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들은 사탄은 더욱 화가 났지만 그럴수록 욥을 빼앗아 가고 싶은 마음도 더 강렬해졌다. 사탄은 사람이 ‘순전하고 정직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은 순전하고 정직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를 증오했다. 이는 욥기 1장 9~11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악독한 본성은 물론, 사탄이 이미 오래전부터 욥을 해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다시 한번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사탄이 순순히 따르게 ― 욥을 공격하고 시험하려던 본래의 진면목을 드러내게 ― 하려 했다. 즉,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방식으로 사탄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모습’으로 인해 증오하고 분노하여 욥을 공격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의 모습을 통해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사탄이 철저히 수치를 당하고 패배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더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임을 의심하거나 참소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시련과 사탄으로부터 온 시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감당하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는 욥이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사탄은 허락을 받아 욥을 시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사탄의 첫 번째 공격이었다. 그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욥의 재산이었다.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욥을 참소하였기에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소유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했다. 여기에서 사탄과 대화한 하나님의 의도가 드러난다. 다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한 가지 요구를 했는데, 욥기 1장 12절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고 욥을 사탄에게 넘기면서 제시한 조건이었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선을 그음으로써 사탄에게 욥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자신 앞에서 보여 준 욥의 정직함과 순전함이 의심할 여지 없이 검증을 통과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에게 범위를 제한하였다. 욥의 재산은 빼앗아 가도 되지만, 그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사실 이때, 하나님은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긴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시험하든 상관하지 않았지만, 욥 본인을 해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탄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며, 사탄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탄은 기다렸다는 듯 온갖 수단을 동원해 욥을 시험하였다. 이에 욥은 가득하던 소와 양을, 하나님이 그에게 준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는 시련은 이렇게 욥에게 임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욥이 겪은 시험의 유래를 알고 있지만, ‘당사자’인 욥은 그 일을 알고 있었겠느냐? 욥은 평범한 사람으로, 그 이면에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단지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순전하고 정직해서 하나님의 시련이 임했다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그는 영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으며, 그 시련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욥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대하는 욥의 태도와 반응을 하나님은 아주 분명히 보았다. 하나님이 본 것이 무엇이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이었다. 시험을 받기 전부터 시험을 받을 때까지, 욥의 마음은 줄곧 하나님께 열려 있었고, 하나님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버리지도, 등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있어 가장 기쁘고 위안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어서 욥이 어떤 시험들을 받았는지, 또 그 시련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자. 계속 성경을 읽어 보아라.

(3) 욥의 반응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돌려 드린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이 말씀이 끝나자 사탄은 물러갔다. 곧이어 욥은 갑작스럽고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먼저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당했다. 이어서 양 떼와 종들이 불에 타 죽었으며, 그 후에는 낙타가 약탈당하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에는 그의 자녀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욥이 받은 첫 번째 시험으로, 이 일련의 공격에 그는 고통을 받았다. 이 공격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욥의 재산과 자녀들만 목표로 삼았으며, 욥 본인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거액의 재산을 가진 엄청난 부자에서 순식간에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은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하거나 똑바로 직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그의 비범한 일면을 보여 주었다. 성경에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고 난 후에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다. 우선, 욥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으며, 분노와 증오는 더더욱 없었다. 여기에서 욥이 마음속으로 이 모든 재앙은 결코 우연이나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이 아니며,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 여호와의 시련이 임해 여호와가 자신의 재산과 자녀를 거두어 간 것임을 확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욥의 마음은 매우 차분했으며, 정신도 매우 맑았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을 지녔기에 이성적이고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정확히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보통 때와 다른 냉정함을 보였다. 즉,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한 것이다.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벌거숭이임을 의미하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가겠다는 것을 뜻한다. 또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그가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갓난아기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일에 대한 욥의 태도는 어떤 피조물도 보여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에 대한 그의 믿음은 믿음의 차원을 넘어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종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내려 준 복에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거두어 간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으며, 나아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었다.

욥이 보여 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은 인류의 모범이 된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람이 갖춰야 할 최고 수준의 인성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로 인해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거두어 가도 전혀 원망하는 바가 없었으며, 게다가 땅에 엎드린 채 하나님이 자신의 육체를 당장 거두어 갈지라도 원망 한마디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욥의 이러한 모든 행동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욥은 순수하고 정직하며 선하기에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의 존재를 굳게 믿으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을 토대로 욥은 하나님의 인도와 만물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행사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생각과 행실, 태도와 일 처리 원칙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규범화했다. 그것이 오랜 세월 지속되면서 욥은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께 진실하고 실제적인 경외심을 갖게 되었고, 아울러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욥이 지킨 ‘순전함’의 유래이다. 욥은 정직하고 단순하며 선량한 인성을 갖췄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악에서 떠난 실제 체험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탄의 이 같은 공격 속에서도 굳게 설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만족스러운 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시험에서 욥이 보여 준 태도는 무척이나 ‘단순’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도 욥의 그 ‘단순함’에 이르거나, 욥이 보여 준 태도를 갖추지는 못할 것이다. 욥의 그 ‘단순’한 태도와 오늘날,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표명한 ‘절대 순종, 죽기까지 충성’이라는 구호나 결심을 비교해 보아라, 너희는 부끄럽지 않으냐?

성경에 기록된 욥의 집에 닥친 이 모든 상황을 접했을 때, 너는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많은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욥이 맞닥뜨린 시련은 ‘끔찍하다’는 말로 표현할 만하지 않겠느냐? 글로 묘사된 내용만 봐도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의 장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는 어떠했겠느냐? 이로써 욥에게 임한 것은 ‘연습’이 아니라 ‘총탄을 사용하는 정규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임한 그 시련은 도대체 누가 직접 가져온 것이더냐? 물론 사탄이 직접 가져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어떤 방식으로 욥을 시험하라고 말씀한 적이 있더냐? 그런 적은 없다. 그저 조건을 하나 제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험은 욥에게 임했다. 사람들은 욥에게 닥친 시험을 통해 사탄의 사악함과 추악함, 사람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행태를 느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 시험이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해하는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추한 몰골이 그때 낱낱이 드러난 셈이다. 사탄은 이러한 기회, 하나님이 허락한 이 기회를 빌미로 욥에게 가차 없이, 그리고 미친 듯이 해를 가했다. 그 수단과 잔인함은 지금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전혀 견뎌 낼 수도 없는 정도였다. 욥이 사탄의 시험 속에서 굳게 섰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기 위해 사탄과 대결을 벌였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대결에서 욥은 가득했던 소와 양, 그리고 재산 전부와 자녀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재산과 자녀를 잃을지언정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고, 사람됨의 근본을 지키려고 했다. 성경에는 욥이 재산을 잃는 전 과정과 그의 반응, 태도 등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간단명료한 묘사에 욥이 그 시험을 아주 쉽게 직면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제 장면과 사탄의 악독한 본성을 결부시켜 보면, 성경에 묘사된 구절처럼 그렇게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장면은 그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사탄은 이 정도로 인류와,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해하고 증오한다. 하나님이 욥의 몸에 손대지 말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사탄은 분명 사정없이 욥을 사지로 몰았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 눈의 의인이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사는 것 또한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는 것은 사탄을 멀리하고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이 기회를 이용해 모든 분노와 증오를 사정없이 욥에게 쏟은 것이다. 이것으로 욥이 육체와 마음, 외적 내적으로 받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당시의 장면을 볼 수 없으니, 그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욥이 고통받을 당시의 심정을 미미하게 느낄 뿐이다.

욥이 지킨 순전함에 사탄은 수치를 당하고 황급히 도망갔다

욥이 이러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았으며, 또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찰하고 살펴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땠겠느냐? 당연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라고 허락한 것을 후회했겠느냐? 그렇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 있는 욥이 의롭다는 것을 확인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탄에게 사악함과 비루함을 드러낼 기회를 주었으며, 욥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사탄,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주었다. 결과적으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틀림없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더냐? 사실상, 욥이 사탄을 이긴 것 아니겠느냐? 여기에 욥이 한 가장 멋진 말, 그가 사탄을 이겼다는 증거가 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욥의 태도였다. 이어서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다. 욥의 이런 말들로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며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분임이 입증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칭찬은 틀리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칭찬한 그 사람은 의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증언이다. 이처럼 평범한 말 한마디에 사탄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수치를 당해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으며, 속수무책이 되었다. 사탄은 욥의 이 한마디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놀랍고 위력 있는 행사와 마음속에 하나님의 도가 권세 잡고 있는 사람의 비범한 매력을 보게 되었다. 또한, 보잘것없는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기 위해 발산하는 강력한 생명력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대결에서 사탄은 이렇게 패했다. 사탄은 이 사건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지만 욥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으며, 사탄의 악독한 본성 역시 이로 인해 변하지는 않았다. 사탄은 욥에 대한 공격을 이어 나가기 위해 또다시 하나님 앞에 왔다….

이어서 욥이 당한 두 번째 시험에 관한 성경 구절을 보자.

3) 사탄이 다시 욥을 시험하다(온몸에 악창이 나다)

(1) 하나님의 말씀

욥 2: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6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2) 사탄의 말

욥 2:4~5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3) 욥은 시련을 어떻게 대했는가

욥 2:9~10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 3:3~4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욥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를 귀하게 여겼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여러 번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시련에서 보인 욥의 태도와 모습을 여호와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평가는 사탄의 시험을 당하기 전의 평가와 똑같았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눈에 순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그의 가족을 지켜 주었으며, 그에게 복을 내린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 눈에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시험을 겪은 후,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해서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욥의 실제적인 행동에 하나님은 갈채를 보냈으며, 만점을 주었다. 욥의 눈에는 그 모든 재산도 자녀도 하나님을 버릴 만큼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는 그 어떤 재산이나 자녀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욥이 첫 번째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소중히 여기는 욥의 마음이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보았다. 욥에게는 그 시련이 그저 여호와 하나님이 준 복 ― 모든 재산과 자녀들 ― 을 여호와 하나님이 다시 거둬 가는 것을 경험하는 데 불과했다.

욥에게 있어서 이것은 마음을 씻는 진실한 체험이었으며, 인생을 충실하게 하는 생명의 세례였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을 검증하는 한 차례의 풍성한 잔치이기도 했다. 이 시험으로 욥은 부자에서 무일푼의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했고, 동시에 사탄으로부터 해를 입었다. 욥은 무일푼이 되었다고 해서 사탄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탄의 졸렬한 행위로 인해 사탄의 추함과 비열함을 보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적대심과 배반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영원히 지키겠다고 더욱 굳게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다. 욥은 ‘재산, 자녀, 가족 같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도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절대로 사탄의 노예나 재산의 노예, 다른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맹세했다.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다른 시각으로 봤을 때 욥이 이 시험을 통해 얻은 것도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준 시련에서도 그는 상당히 많은 것을 얻었다는 뜻이다.

지난 수십 년의 인생에서 욥은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려 준 복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복은 욥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빚진 마음이 들게 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없는데도 그처럼 큰 복을 받고 큰 은혜를 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은 늘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울러 하나님의 행사와 위대함을 증거할 기회가 오기를 바랐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순종과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순종을 검증하고 그의 믿음을 정결케 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시련이 임하자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생각했고, 그 기회를 매우 소중히 여겼기에 조금도 태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욥의 일생 중 가장 큰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이 검증받을 수 있고, 아울러 정결해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또한, 하나님께 칭찬받아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뜻했다. 이와 같은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욥은 그 시련을 통해 더욱 순전해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도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욥은 하나님이 내려 준 복과 은총에 더욱 감사했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 찬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앙망하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더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때의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지만, 욥의 경험과 체험을 놓고 봤을 때 그의 믿음과 인식은 이미 엄청난 진보와 발전을 이룬 상태였다. 즉, 그의 믿음은 커졌고, 그의 순종은 지향점을 얻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이번 시련은 욥의 마음과 생명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해 놓았지만 욥은 이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욥은 이번 시련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 또 자신의 결점과 부족한 부분들을 성찰해 보는 한편, 묵묵히 기도하며 다음 시련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하나님이 주는 또 한 번의 시련을 통해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언행 하나하나와 마음속 생각을 모두 살핀다. 욥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 예상대로 다시 한번 임했던 것이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진정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느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질문을 하자, 사탄은 속으로 기뻐했다. 하나님 눈에 완전한 사람을 공격할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졌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탄에게는 정말이지 얻기 힘든 기회였다! 사탄은 이 기회를 틈타 욥의 믿음을 철저히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욥을 자기 수중에 넣고 멋대로 우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탄은 자신의 사악한 의도를 철저하게 숨겼지만 악독한 본성은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탄의 대답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사탄의 이 말을 본 사람은 사탄의 악독함에 대해 실제적인 인식과 느낌을 갖게 된다. 진리를 사랑하고 사악함을 증오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사탄의 이 황당무계한 논리를 듣고 사탄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에 증오심을 느낄 것이다. 또한 사탄의 그릇된 논리에 염증과 역겨움을 느끼는 동시에, 욥을 위해 기도와 축원을 올릴 것이다. 정직한 자가 더 순전해지기를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영원히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빛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또한 욥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영원히 편달하고 격려하기를 바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탄의 말 속에서 사탄의 악독한 속셈을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주 흔쾌히 사탄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다만 사탄에게 또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사탄이 이번에는 손을 뻗어 욥의 뼈와 살을 해하려고 했기에, 하나님은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라고 말씀했다. 이는 욥의 육체를 사탄의 손에 붙이겠지만, 그의 생명은 보존해야 하며, 그의 생명을 앗아 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즉, 그 외에는 어떤 방식과 수단으로 욥을 대해도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부리나케 욥의 앞에 이르러 손을 뻗어 그의 살가죽을 치고, 그의 온몸에 악창이 나게 했다. 욥은 살가죽의 통증을 느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함과 거룩함을 찬송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사탄은 더 길길이 날뛰었다. 사람을 해치는 쾌감을 느낀 사탄은 손을 뻗어 악창이 난 욥의 살을 움켜쥐고 곪아 터지게 했다. 그러자 피와 살에 더없는 통증과 아픔을 느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문질렀다. 마치 그렇게 하면 육체의 통증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욥은 하나님이 곁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무릎 꿇고 엎드렸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고통을 살피시나이다. 당신께서 어이하여 사람의 나약함까지 생각해 주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욥이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에 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탄은 급하게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다. 순식간에, 욥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살가죽이 뼈에서 벗겨지는 것 같고, 또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화살이 심장을 뚫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욥의 인내력은 극한에 몰렸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 통증을 덜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욥은 참고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지도 않았다. 사탄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또다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지만, 이때만큼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그의 앞에, 뒤에, 좌우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아파할 때 고통스러워하는 그 모습을 보지 않았으며, 얼굴을 가리고 자신을 숨겼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미는 고통을 주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때 욥은 눈물을 흘렸다. 몸의 통증은 억지로 참아 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이나이다. 지극히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여리고 무지한데,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생각해 주고 긍휼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치시고 오히려 당신이 고통스러워하시나이다.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어 당신께서 생각해 주고 마음에 두시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탄은 온갖 수를 다 써도 성과가 없자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결코 이렇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욥에게서 나타낼 큰 능력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의 이야기는 사탄의 퇴각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각 인물이 출현함에 따라 더 멋진 장면들이 계속 펼쳐졌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또 다른 모습은 범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이다

욥이 사탄의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자, 가장 먼저 그의 아내가 나서서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사탄의 역할을 하며 욥을 공격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는 사탄이 사람의 모습으로 한 말로, 공격과 참소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유혹과 시험과 훼방의 의미도 띠고 있었다. 사탄은 욥의 육체를 공격해도 소용이 없자 직접 욥의 순전함을 공격하였다. 이를 통해 욥이 그의 순전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려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사탄은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버린다면 그 모든 고통을 참지 않아도 되고 그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니라.’라는 말을 통해 욥을 유혹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내의 권고를 들은 욥은 이렇게 질책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이 말은 욥이 오랫동안 쌓아 온 인식이었다. 다만 이 인식에 대한 진실성이 이때 입증되었을 뿐이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권했다. 그 의미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대하는데 어째서 그 하나님을 버리지 않느냐? 그렇게 살아서 뭐 하냐?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렇게 불공평한데도 당신은 계속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라고 말하다니,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데 왜 당신이 화를 입게 하느냐? 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고 다시는 그 하나님을 따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당신의 재앙은 사라지리라.’라는 것이었다. 이때 하나님이 보고자 했던 욥의 증거가 다시 한번 나왔다. 이런 증거는 보통의 사람에게 없는 것이며, 성경의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이러한 말을 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이번 기회에 욥을 통해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실증하고자 했을 뿐이다. 아내의 권고를 듣고도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말은 매우 무게가 있지 않으냐? 이 말이 무게를 지녔음을 입증해 주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마음으로 칭찬하는 것이며, 또한 원하고, 듣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했던 결과라는 것이다. 이 역시 욥의 증거 중 정수로 꼽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욥의 귀함은 그가 시험을 받아 온몸에 악창이 났을 때, 즉 가장 고통스러울 때 아내와 친족들의 권고를 듣고도 여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시험, 어떤 환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설사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버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로써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가장 크며,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욥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입술로 범죄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다. 그의 마음과 입은 일치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본 참된 욥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욥을 귀하게 여겨 사랑하는 이유였다.

욥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오해

욥이 겪은 고통들은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준 것도, 하나님이 친히 준 것도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직접 준 것이었다. 그러니 욥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욥은 자신이 평소 마음속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행동 원칙,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전부 드러냈으며, 그것은 다 진실했다. 만일 욥에게 시험이 임하기 전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을 주기 전에,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그를 위선적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막대한 재산을 베풀어 주었으니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했을 것이다. 또한, 만일 욥이 시련을 받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을 허풍선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은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으면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버렸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욥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으면 하며, 임할까 봐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차마 볼 수 없었던 그런 지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여전히 순전함을 지켰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의 이러한 태도에, 공리공론을 즐기며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기 좋아하던 자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오는 시련을 받아들인 적이 없던 자들은 욥이 지켜 낸 순전함에 의해 정죄받았고,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자들도 욥의 증거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과 그의 말을 두고 혹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질투를 하며, 혹자는 의혹을 품었다. 심지어 무시하는 태도로 욥의 증거에 대해 코웃음 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욥이 시련 속에서 받은 고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욥이 하는 말을 들었고, 시련이 임했을 때 그가 드러낸 인간적인 ‘나약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나약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욥의 이른바 순전함 중의 순전하지 않은 부분인 동시에,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자’의 흠집이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순전한 자는 완벽한 사람, 즉 흠도 없고 오점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약함이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아파하고 슬퍼하는 감정도, 증오도, 과격한 행동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욥을 진정으로 순전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많은 행동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욥은 사람들의 상상처럼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대성통곡하지 않았다. 욥의 그러한 ‘예상을 벗어난 행동’은 그가 사람들의 눈에 냉혈 인간으로 비치게 했다. 그에게서는 눈물도, 혈육의 정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욥이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남긴 ‘나쁜 인상’이었다. 이어지는 욥의 일련의 행동들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겉옷을 찢는’ 행동을 하나님에 대한 불경함으로 보았으며, ‘머리털을 미는’ 행동을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으로 오해했다. 사람들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욥의 말 외에 하나님이 칭찬한 그 어떤 의로움도 그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욥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평가는 그저 몰이해와 오해, 의심, 정죄, 도리적인 인정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와 같은 인상을 기저에 깐 사람들은 욥의 의로움에 한층 더 의구심을 품었다. 욥의 행동과 성경에 기록된 그의 태도는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릴 만큼 큰 감동을 선사할 것이라는 사람의 상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큰일’을 해내기는커녕, 고작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이 장면에 세상 사람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고, 욥의 의로움에 의혹을 품고, 심지어는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욥은 몸을 긁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맹세하지 않았고, 통곡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들이 욥에게서 본 것은 오직 그의 나약함뿐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욥의 말을 듣고서도 무감각한 채로 있거나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으며, 욥의 말에서 그의 의로움을 보지도 못했다. 시련의 고통을 겪고 있던 욥이 사람들에게 준 인상은 대체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이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과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원칙 또한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며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이 그저 빈말에 불과하다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심 역시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그의 ‘나약함’에 대해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나약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한 순전하고 정직한 자를 ‘다시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새롭게 이해’하기까지 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이 그를 ‘다시 보게’ 되고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이 입증되었다.

욥이 받은 고통은 누구도 상상하거나 느낄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대역무도’한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몸의 고통을 줄여 보고자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이라고 했을 뿐이다.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고, 이 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너희는 이 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보느냐? 이 말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느냐? 나는 너희 대부분이 욥의 이 말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너희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면 그 어떤 나약함도 보여서는 안 되고 슬퍼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탄의 모든 공격을 직면하거나, 심지어 웃으면서 사탄의 시험을 마주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또한 사탄이 욥의 육체에 어떤 고통을 가해도 욥은 마땅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느꼈던 어떤 것도 표현하지 말아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께 더 강력한 시련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강직한 자가 마땅히 보여 주고 갖춰야 할 태도라고 말이다. 그러나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그저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뜻은 더욱 없었다. 이는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행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욥과 같은 시험을 받은 자가 없을뿐더러, 욥과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자도 없기 때문이다. 왜 욥과 같은 시험을 받은 자가 아무도 없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이러한 책임과 부탁을 짊어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욥이 해낸 것을 해낼 수 있는 자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욥처럼 이러한 고통이 임했을 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뿐,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자 역시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지금 우리가 욥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욥의 행위를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겠느냐? 의인인 자, 이처럼 하나님을 증거한 자, 사탄으로 하여금 머리를 감싸고 도망쳐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하게 한 자를 칭찬해선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 설마 너희의 요구 기준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것이냐? 시련이 닥쳤을 때 너희는 욥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도 칭찬했거늘 너희에게 무슨 이견이 있느냐?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은 사람의 겉면을 본다고 나는 늘 말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살피기에 사람의 본질을 알지만,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을 정의한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자, 욥의 세 친구를 비롯한 모든 영적 인물들은 그 행동에 아연실색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므로 생일을 비롯해 생명과 육체를 준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지, 그것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이해이자 생각이었다.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신성불가침한 것이자 영원히 바뀌지 않는 진리이다. 그런데 욥은 그 ‘관례를 어기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 금기를 깨는 행위로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이 욥의 ‘의로움’에 의심을 품었다. 그들은 욥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방종’해져 그런 경거망동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생전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보살핌에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이 태어난 날이 멸망했으면 하고 저주했으니,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사람들이 욥의 행동을 정죄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욥의 마음이 진정 어떠했는지 누가 알겠느냐? 또 욥이 왜 그렇게 했는지 누가 알겠느냐? 그 실상과 이유는 오직 하나님과 욥 자신만이 알고 있다.

사탄이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을 때, 욥은 사탄의 마수에 걸렸다. 그는 벗어날 수도 저항할 힘도 없었으며, 그의 몸과 영혼은 극한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극한의 고통’을 통해, 욥은 육으로 사는 사람의 보잘것없음과 무력감, 유약함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욥은 하나님이 왜 인류를 염려하고 보살피는지, 그 심정을 절실히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마수에 걸려든 욥은 평범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도 무력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을 때, 욥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숨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이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기기는 했지만, 또 그로 인해 눈물 흘리고 마음 아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의 고통에 아파하고, 욥의 상처에 괴로워했다…. 욥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고, 또한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더욱이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육의 껍데기에서 벗어나 더 이상 육에서 오는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도 더는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참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다’는 심적 고통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육체와 마음에서 오는 이중의 아픔에 욥은 가슴이 찢어지고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감내했으며, 참으로 속절없고 무기력한,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강렬해졌으며, 사탄을 증오하는 마음 역시 그에 따라 더 커져 갔다. 당시의 욥은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를 바랄지언정,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심히 증오하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도, 자기가 태어난 날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싫어졌다. 욥은 자신의 생일과 출생에 관련된 모든 것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욥 3:3~4). 욥의 말에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또한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 때문에 자책하고 죄스러워하는 심정도 담겨 있다.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이 두 마디는 그 당시 욥의 심정을 최대한 표현한 것으로, 모든 이에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오롯이 보여 주고 있다. 그때, 욥이 원했던 대로 그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진정으로 승화되었다. 물론 이 승화는 하나님이 예정한 결과였다.

욥은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처음의 시련에서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 냈고, 재산과 자녀, 나아가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이겨 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의 거두어 감에 순종했고, 그로 인해 감사와 찬양까지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이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욥이 보여 준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첫 번째 시련에서 욥이 증거한 것이다. 두 번째의 시련에서 사탄은 손을 뻗어 욥에게 갖은 해를 가했다. 욥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의 증거는 오히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강인함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또 한 번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가 보여 주고 증거한 것은 또다시 하나님께 인정받고 열납되었다. 이번 시험에서 욥은 자신의 실제 행동을 통해 사탄에게 선포했다. 육체의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심을 빼앗아 갈 수도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이 다가왔다고 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순전함과 정직함을 버리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욥의 의연함을 본 사탄은 겁이 났다. 사탄은 욥의 믿음에 두렵고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사탄과 사생결단하겠다는 욥의 기세를 보고 침통해졌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앞에 사탄은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서 욥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짓도 그만두었다. 이는 욥이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죽음을 이겨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욥은 두 차례의 시련 속에서 굳게 섰으며, 순전함과 정직함을 실제로 살아 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의 생존 법칙의 범위 역시 확장될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시련을 겪은 후, 욥의 인생 경험은 더욱 풍부해졌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더 성숙하고 원숙해졌으며, 더 강인해지고 더 믿음 좋은 사람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욥은 자신이 지킨 순전함의 정확성과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으로 인해 욥은 사람을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느끼게 되었으며,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이 더해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에 욥은 천 리 밖으로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으로 하나님께 더 다가갔다. 육체의 고통이 극한에 달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낀 욥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그런 모습은 그가 일찍이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욥의 그 자연스러운 발현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욥은 자신을 미워했고,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의 욥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데서 하나님을 헤아리고 사랑하는 경지로 자신을 승화시켰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순종과 경외심을 헤아림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욥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상처 주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신의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을 슬프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자신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눈에 욥은 여전히 똑같은 욥이었지만, 그의 믿음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드릴 수 있었다. 그때의 욥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하나님 눈에 명실공히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사탄을 이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섰으며, 온전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명 가치를 승화시켰으며, 초월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더 이상 사탄에게 공격받지 않고 시험당하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욥은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에게 참소당하고 시험당했으며,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의 손에 넘겨졌지만, 또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고 물리치고 굳게 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욥은 더 이상 사탄에게 넘겨지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빛 속에서, 그리고 사탄의 감시와 해가 없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고, 자유로워졌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욥이 겪은 시련의 전 과정을 알면, 대부분 사람이 욥과 관련된 정보에 흥미를 보일 것이라 믿는다. 특히, 욥이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 그 ‘비결’에 더욱 관심을 보일 것이다. 이제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자!

욥의 일상생활에서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모습을 보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여기서 ‘순전하고 정직하다’는 말을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욥이 몹시도 완벽하고 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느냐? 물론 그것은 문자적인 해석과 이해이다. 욥이라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의 실생활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저 문자적으로 책 속에서, 그리고 도리 가운데서 답을 찾는다면 그 어떤 답도 얻을 수 없다. 먼저 욥의 일상생활이 어땠는지, 그가 삶에서 보여 준 보편적인 모습은 어땠는지 보자. 그리고 이를 통해 욥의 삶의 원칙과 인생 목표, 욥의 인품과 그가 추구한 것에 대해 알아보자. 성경 욥기 1장 3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도록 하자.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 구절은 당시 욥의 지위와 신분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 준다. 그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인 이유가 재산이 많기 때문인지, 아니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기 때문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어쨌든 욥은 모두가 주목하는 지위와 신분을 지녔다. 이것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욥에 대해 가지게 되는 첫 번째 인상이다. 즉, 욥은 순전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고, 엄청난 재산과 고귀한 지위를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환경과 조건을 가진 정상인은 평소에 먹고 마시는 것, 삶의 질, 사생활의 각 부분이 모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다음의 성경 구절들을 볼 필요가 있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4~5). 이 구절에는 2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욥의 자녀들이 자주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녀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이 된 욥이 항상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이 2가지는 두 부류 사람의 서로 다른 삶의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한 가지는 욥의 자녀들은 생활이 풍족하여 늘 잔치를 베풀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으며, 물질적 여유가 가져다주는 높은 질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나날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늘 죄를 짓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를 성결케 하지 않고, 이를 위해 번제를 드리지도 않았다. 이것으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죄짓는 것을 겁내지 않았고, 더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욥의 자녀들에 관한 세부 내용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중점은 이러한 일들이 닥쳤을 때 욥은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이 성경 구절에 기록된 또 다른 한 가지의 일로, 욥이라는 사람의 인성 본질, 그리고 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던 것이다. 즉, 욥은 잔치를 베풀지도, 자녀들과 함께 즐기지도 않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부유했고, 각종 재산을 소유했으며, 수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호사를 누리지는 않았다. 그는 부유하다고 해서 좋은 생활 환경에 빠져 살지 않았고, 육체적 쾌락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번제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욱이 부유하다고 해서 마음에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일도 없었다. 여기에서 욥은 검소한 인생을 살았고, 하나님이 준 복으로 인해 탐욕스러워지거나 향락을 즐기지 않았으며, 삶의 품격을 중시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일을 함에 있어 겸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 인품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각했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 즉, 욥은 혼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녀들까지 자신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욥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도 대체하지 못했다. 그가 일상에서 행한 것은 자녀들을 위한 것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든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단지 입술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실행에 옮겨졌으며,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드러났다. 욥의 이러한 실제 행동에서 우리는 욥의 정직함과, 정의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욥이 항상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했다’는 것은 그가 자녀들의 행동을 지지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싫어하고 그들을 정죄했다는 뜻이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녀들의 행위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항상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라고 한 것이다. 욥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욥의 인성에서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욥은 죄를 일삼으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그들을 멀리하고 피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혈연관계에 연연해 사람됨의 원칙을 버리지는 않았다. 또한, 정에 이끌려 그들의 죄에 관용을 베푸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죄를 자백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권고하고, 향락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사람을 대하는 욥의 원칙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원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악행을 저지르거나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자들은 혐오했다. 그의 애증은 그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드러났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눈에 비친 욥의 정직함이었다. 물론 이는 우리가 알아야 할,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욥이 보인 진정한 인성과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련 속에서 나타난 욥의 인성(시련 속에서 보인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에 대해 알아보다)

위에서 우리는 시험을 당하기 전, 욥이 일상생활에서 보여 준 인성의 여러 측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렇듯 곳곳에서 드러난 욥의 모습을 통해 그의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악에서 떠난 것에 대해 일차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일차적인 인식과 이해가 생겼을 것이라 믿는다. 내가 ‘일차적’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이 욥의 인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추구한 정도에 대해 아직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은 성경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나온 욥의 말을 통해 욥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어느 정도 갖게 됐을 뿐, 깊이 있는 앎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받아들일 때 욥이 보여 준 인성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이 욥의 진정한 인성을 완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들이 목숨을 잃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욥이 보인 반응은 다음과 같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욥이 이 소식을 듣고 난 후 놀라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소식을 알리러 온 종을 꾸짖지도 않았다. 더욱이 현장에 조사하러 가지도 않았고, 어떤 상황인지 사실 확인을 해서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잃은 재산을 아까워하거나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죽은 자녀와 가족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욥의 이러한 행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과 달랐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으며, 또 너무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냉혈 인간’이라는 비난을 사게 되었다.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져 빈털터리가 된다면, 일반 사람은 괴로움이나 절망감을 느낄 것이며, 심지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재산은 평생의 심혈이자 생존을 위한 근간이며 살아가는 희망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재산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피땀 흘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하고, 또 희망이 사라졌음을, 심지어는 미래를 잃어버렸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재산을 대하는 모든 정상인의 태도, 그리고 재산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며, 나아가 사람이 재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재산을 대하는 욥의 냉담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은 욥의 마음을 해석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는 의혹을 풀어 보도록 하자!

상식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이 욥에게 풍족한 재산을 주었으니 재산을 잃은 욥이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하나님이 준 재산을 제대로 간수하지도, 보살피지도, 지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산이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욥이 가장 먼저 보여야 할 반응은 마땅히 현장으로 달려가 물건들을 철저히 점검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 후, 다시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했어야 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은 다 본인이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복을 밑천으로 삼는 대신, 자기가 지켜야 할 도를 전심전력으로 지키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더 많은 복을 탐하거나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재산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욥은 복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으며, 복이 없거나 복을 잃었다고 해서 걱정하거나 상심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모든 것을 망각하는 일이 없었고, 항상 누리는 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를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일도 없었다. 재산을 대하는 욥의 태도는 사람들에게 그의 참된 인성을 보여 준다. 첫째,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으며, 물질생활에 대한 그의 요구 기준은 아주 낮았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갈까 걱정한 적도, 두려워한 적도 없었다. 이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그의 태도이다. 즉,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든, 혹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든 가지 않든, 그는 어떤 요구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기만을 원했다. 셋째, 욥은 본인의 재산을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생각했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으로, 즉 그의 확신을 보여 준다. 욥에 대한 이상의 3가지 개괄을 통해 욥의 인성과 그가 평소에 진실로 추구한 것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욥이 재산을 잃었을 때 그처럼 냉정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말한 그의 인성, 그리고 그의 추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평소 그렇게 추구해 왔기에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의 분량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욥의 이 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갑작스럽게 떠올라 지어낸 것도 아니다. 오랜 인생의 경험을 통해 보고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바라기만 할 뿐,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원망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욥의 순종은 아주 실제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만 믿을 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욥은 아주 진솔하고 정직하지 않으냐?

욥의 이성

욥은 실제 체험과 정직하고 진실한 인성 덕에,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이성적인 선택은 그가 평소에 추구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하기에 만물이 여호와의 주재하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으며, 그 믿음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원했고,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진실하게 경외할 수 있었으며, 그 경외심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날 수 있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완전해진 것이다. 그의 완전함은 그를 지혜롭게 바꿔 놓았고, 그를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성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문자적 해석은 이성과 생각이 논리에 맞아 터무니없지 않으며, 적절한 언행과 판단, 적절한 규범을 가진 도덕적 기준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욥의 ‘이성적’인 모습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욥이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 것은 그의 인성,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보인 행동과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수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을 통해 자신에게 닥친 일을 더욱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들을 더 정확하고 현명하게 선택하는 것이 가능했다. 즉, 그의 말과 행동, 일 처리 원칙과 방침은 맹목적이지도 충동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았으며, 지극히 규범적이고 명확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닥치든 그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각종 복잡한 사건의 관계를 어떻게 균형 잡고 처리해야 할지 알았다.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를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도 알았으며,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줄 때와 거두어 갈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이었다. 이러한 이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욥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일가친지들의 권고,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 실제 행동으로 또다시 자신의 진실한 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은 욥의 본모습

욥기 2장 7~8절을 보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는 몸에 악창이 난 후 욥의 반응을 보여 주는 설명이다. 그때,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 그를 치료해 주는 이도, 그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 주는 이도 없었다. 그는 혼자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이 난 상처를 긁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욥이 고통받던 기간의 한 장면에 불과하며, 욥의 인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는 관계가 없다. 욥은 이 기간에 그 어떤 말로도 자신의 심정과 생각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행동과 반응은 그의 인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우리는 앞의 1장의 기록에서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라는 구절을 보았다. 그리고 2장의 이 구절에서는 이 동방 사람 중 가장 큰 자가 뜻밖에도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전후 두 개의 묘사는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으냐? 이 대비를 통해 우리는 욥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 욥은 높은 신분과 지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또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동이 자기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하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가져다주는 후광을 즐기지도 않았다. 욥의 관심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욥의 본모습이 바로 그의 본질이다.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다. 또한,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았다.

애증이 분명한 욥

욥이 아내와 나눈 대화는 그의 또 다른 측면의 인성을 보여 준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9~10). 욥의 아내는 그렇게 고통받는 남편을 보고는 그를 설득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호의’는 욥에게 칭찬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분노를 살 뿐이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종을 부인하는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신을 용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도 그럴진대, 다른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고 그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욥은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했다. 아내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책망과 질책이 담겨 있었다. 이는 애증이 분명한 그의 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자, 그의 정직한 인성의 참된 표출이었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의감이 있었기에 그는 사악한 풍조와 흐름을 증오했으며, 그릇된 사설과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증오하고 정죄하고 밀어냈다. 또한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옳은 원칙과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욥의 선함과 진실함

욥의 다양한 행동에서 그의 인성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에서는 또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겠느냐? 이것이 다음으로 내가 이야기할 주제이다.

앞에서 나는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이유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만일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이 없고, 냉혹하고 무정하며, 인간성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증오했겠느냐? 다시 말해,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인간성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아파한다고 해서 마음 아파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답이다. 욥은 마음씨가 착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마음이 착했기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고 더 고통스러워했다. 욥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에 자신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시련 속에서 보여 준 욥의 모든 행동은 마땅히 본받을 만한 모범일 것이다. 하지만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만큼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양한 평가를 내놓게 한다. 사실, 욥의 이 행동이야말로 그의 인성 본질을 가장 참되게 보여 준다. 그의 인성 본질에는 숨김도, 포장도, 사람에 의한 가공도 없었으며, 그의 이 행동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선함과 진실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넘치는 샘물같이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욥이란 사람의 면면을 알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이 욥의 인성 본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순전하고 정직하다’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고 발전한, 실제적인 앎과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러한 앎과 깨달음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것과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 간의 관계

비록 이때 대부분의 사람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고, 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인정했다고는 하나, 욥을 인정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욥의 인성과 그가 추구한 것을 부러워하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욥은 이처럼 순전하고 정직하며,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데, 왜 하나님은 그를 사탄에게 넘겨 그런 고통을 받게 하셨을까?’ 이러한 질문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의문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이 다수의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니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에는 다 그 필요성이 있으며, 평범하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가 사람에게 하는 일들은 모두 그의 경영, 그리고 인류의 구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욥에게 행한 일도 예외는 아니다. 욥이 하나님 눈의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고 해도 말이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하든, 무엇을 대가로 삼고 무엇을 목표로 하든, 그가 하는 일의 근본 취지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근본 취지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 그러니까 하나님이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절차에 따라 사람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행하는 일의 근본 취지 중 하나이다. 또 한편으로 사탄은 하나님 사역의 부각물이자 봉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사탄에게 넘겨진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이 사탄의 시험과 공격 속에서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과 비열함을 보게 함으로써 사탄을 증오하고 부정적인 것을 인식하고 분별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점차 사탄의 통제와 참소, 교란과 공격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순종, 믿음과 경외심으로사탄의 공격과 참소를 전부 이겨 내면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완전히 구출될 것이다. . 그런 사람은 정직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 경외심을 지녔으며, 사탄과 철저하게 결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탄에게 수치를 주고, 사탄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또한 완전한 실패를 안겨 준다.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사탄을 물리쳐, 사탄이 완전히 손을 놓게 만든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종 목표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구원받고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사탄에게서 오는 크고 작은 시험과 공격에 직면해야 한다. 거기에서 벗어나 완전히 사탄을 이기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준 시련과 사탄의 무수한 시험, 공격을 겪은 사람이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를 이해하는 자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사탄의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포기하지 않은 자다. 또한,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는 정직하고, 선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이성이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의 속박, 염탐, 참소, 상해 등을 받지 않으며,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얻고 해방받은 자이다. 욥이 바로 이러한 자유인이었다.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의미가 여기에 있다.

욥은 사탄의 상해를 겪었지만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그는 영원히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고 상해와 참소를 받지 않으며, 어떤 우려도 걱정도 근심도 없이 하나님의 얼굴빛과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복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 권리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고, 아무도 파괴할 수 없으며, 아무도 차지할 수 없는 것으로, 욥이 자신의 믿음과 의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얻어 낸 것이다. 그는 목숨을 대가로 땅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삶을 얻었으며, 진정한 피조물로서 땅에서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창조주를 경배할 당연한 자격과 권리를 얻었다. 이 역시 욥이 시험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이다.

구원받기 전까지 사람의 삶은 항상 사탄의 방해를 받고, 심지어는 사탄에게 통제되기도 한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는 사탄에게 구금된 자, 자유가 없는 자, 사탄에게서 해방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과 권리가 없는 자이며, 사탄에게 바짝 쫓겨 맹렬한 공격을 받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존엄성은 물론이고, 행복이나 정상적인 생존 자격을 논할 가치도 없다. . 그렇게 되면 사탄은 너에 대한 공격과 참소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고, 그때 너는 구원받아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사탄과 철저히 결별할 결심만 할 뿐, 사탄을 물리칠 유리한 무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너는 여전히 몹시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너는 사탄에게서 오는 괴롭힘으로 기진맥진하여 굳게 서지도,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을 희망은 요원해진다. 마지막 순간, 즉 하나님의 사역이 끝을 알리는 순간에도 네가 여전히 사탄에게 꽉 잡혀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에게는 영원히 기회도 희망도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사람은 완전히 사탄에게 사로잡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검증을 받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온 몸과 마음이 하나님께 얻어지다

사람에게 장기적으로 공급해 주고 붙들어 주는 사역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뜻과 요구를 모두 알려 주었다. 또한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보여 주었다. 그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의 분량을 갖추고, 하나님을 따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진리를 얻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러한 진리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사탄과 싸울 수 있는 예리한 무기이다. 사람이 이러한 장비를 갖추려면 하나님의 검증에 직면해야 한다. 하나님의 검증에는 여러 가지 방식과 경로가 있지만, 그 모든 경로와 방식에는 다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협력’이 들어간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를 준 다음, 사람을 사탄의 손에 넘겨 사탄이 그 사람의 분량을 ‘검증’하게 한다. 사람이 사탄이 쳐 놓은 진영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포위 공격에서 살아 나오면 그 검증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진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탄에게 항복한다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어떤 부분을 검증하든, 검증의 기준은 그 사람이 사탄의 공격 가운데서 굳게 설 수 있는지, 사탄의 올무 속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무기를 버리고 사탄에게 굴복하는지 등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원은 사탄을 이기고 물리치는 것에 달려 있다. 또한, 사람의 해방은 사람이 독립적으로 하나님이 준 무기를 들고 사탄의 결박을 끊어 사탄이 완전히 단념하고 포기하게 하는 데에 달려 있다. 사탄이 사람을 단념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더는 그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싸우지 않고, 그 사람을 참소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며, 제멋대로 그 사람을 해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얻어진 자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는 전 과정이다.

욥의 증거가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와 계시

사람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완전히 얻는 전 과정을 깨달은 동시에,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목적과 의미도 알게 되었다. 또 더 이상은 욥이 받은 고난을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고, 욥이 받은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다. 이에 사람은 더 이상 욥과 같은 시험이 올까 걱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주는 시련에 반발하거나 저항하지 않게 되었다. 욥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사탄을 이긴 증거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도움과 격려가 되었다. 사람들은 욥에게서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 경외심을 통해 사탄을 완벽하게 물리쳐 이길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아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과 믿음만 있다면, 사탄에게 실패와 수치를 안겨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목숨을 버릴지언정 굳게 서겠다는 다짐과 의지만 있다면, 사탄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황급히 도망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욥의 증거는 후세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이 경고는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사탄의 참소와 방해, 공격과 상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욥의 증거는 또 후세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있다. 사람은 이 계시를 통해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해야만 영원히 사탄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욥의 인품, 그가 인생에서 추구한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욥이 일생 동안 살아 낸 것과 그가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소중한 자산인 셈이다.

욥의 증거로 하나님이 위안을 받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욥은 사랑스러운 자라고 한다면, 너희는 아마도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내가 왜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욥과 같은, 혹은 비슷한 시련을 겪게 되면, 즉 환난을 겪고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시련을 겪게 되면, 시험 속에서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치욕과 고통을 이겨 낼 때, 너는 내가 한 말들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너는 너 자신이 욥에게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느낄 것이며, 욥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가 되면, 너는 욥이 한 그 멋진 말들이 패괴된 사람, 지금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욥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해내기 힘든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내기 어렵다고 느낄 때면,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걱정스러워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것과 인류를 위해 바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교제했으니 너희는 이제 욥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 마음속에 있는 욥은 진정으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맞느냐?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고 확답할 것이다. 욥이 한 일들은 사탄을 포함한 그 어떤 사람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욥이 사탄을 이긴 가장 유력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 근거는 욥에게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이 얻은 첫 번째 증거이다. 그러므로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증거했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며, 욥으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창세 때부터 욥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처음으로 위안이란 무엇인지,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것은 또 어떤 것인지 진정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은 무엇이 진정으로 그를 증거하는 것인지를 보았고 또 그것을 얻었다.

욥의 증거와 욥에 대한 다각도의 설명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 앞에 펼쳐진 길에 대해 계획이 생겼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그동안 우려와 공포로 가득했던 많은 사람이 점차 심신의 안정을 찾고, 조금씩 마음을 놓게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다음의 몇 구절들도 욥에 관한 기록이다. 이어서 계속 보자.

4)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다

욥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42:2~6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위의 구절들에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보았느냐?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있느냐? 먼저 욥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주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보자. 이 2가지 문제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욥이 전해지는 말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뿐,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 후 그는 삶 속에서, 그리고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무엇이냐? 욥이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기는 했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본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의 사람들과 같지 않으냐?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존재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주관적인 요소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가 하나님을 따랐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그에게 나타나거나 그와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이것이 사실 아니더냐? 하나님은 그와 얘기를 나누지도, 그에게 어떤 명령을 하지도 않았지만, 욥은 만물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이 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으며,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욥이 하나님을 따르게 된 전말과 과정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든, 어떻게 자신의 순전함을 지키든, 하나님은 한 번도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다. 다음의 구절을 읽어 보자.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11).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욥은 하나님이 그의 곁에 계신다는 것을 느꼈을 수도 있고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앞을 지나가거나 일을 행하거나 사람을 인도한다고 상상하기는 했지만, 전혀 알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임하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 임했는지, 어디에 임했는지 알지 못한다.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모습을 감춘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다음 구절에 또 욥의 이런 말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이 기록을 보면, 욥의 체험에서 하나님은 시종일관 숨어 있었고, 그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거나 아무 말씀을 한 적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욥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늘 하나님이 그의 앞을 지나가거나 그의 우편에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그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렇겠느냐?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지도,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욥에게 진정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계속해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너는 욥의 이러한 말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느냐?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의로움은 하나님이 과장한 것이 아니라 진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그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게 말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의연하게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키며,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또한, 하나님께 죄지을까 두려워 항상 번제를 드리고,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였다. 하나님을 본 적이 없음에도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이 사실에서 욥이 얼마나 긍정적인 것을 좋아했는지, 얼마나 믿음이 확고하고 실제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적이 없고,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믿음을 잃거나 하나님을 버린 적도 없다. 그는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숨겨진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능력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현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그는 이미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고,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복과 은혜를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은 언제나처럼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어떤 사람도 얻지 못한 성과, 곧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욥은 화복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욥의 이야기에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다룰 중점이다. 욥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다.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떠했느냐? 바로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것이 그의 태도였다. 이 ‘찬송’에는 조건도 배경도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여기서 욥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 주관하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결심하고 계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숨김없이 다 열어 놓았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되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 무엇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한 적이 없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면 무언가 얻는 게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뭔가를 얻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던 이유는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 때문이지, 그 자신의 복이나 화 때문이 아니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변함이 없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이 화를 입는 것 역시 하나님의 주재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큰 능력과 권병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한다. 사람에게 수시로 임하는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의 발현이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욥이 일생을 통해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었다. 욥의 이러한 모든 생각과 행실은 하나님의 귀에 들어갔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의 생각과 행실을 중히 여겼으며, 그의 그러한 인식과 마음을 귀하게 여겼다. 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 임하는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욥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는 바가 없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안배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직면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할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욥이 생각하는 자신의 책임이었고, 또한 하나님이 원하는 바였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고, 하나님이 그에게 뭔가 말씀하거나, 명령하거나, 가르쳐 주거나, 알려 주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말로 하자면,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그 어떤 깨우침이나 인도, 공급이 없는 상황에서, 욥이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 있고 그런 태도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욥의 그러한 행동에 매우 만족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이 칭찬하고 귀히 여기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심오한 이론만 떠들어 대며 큰소리치고, 번제만 중시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과 경외심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욥의 마음이나 사람됨이 하나님에겐 훨씬 소중했다. 욥은 순결한 마음을 지녔고, 하나님께 숨김이 없었으며, 그의 인성은 정직하고 선했고, 또한 정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성과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와 권병, 큰 능력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또 이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 그가 화복을 따지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 손안에 있기에 사람이 걱정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고 무지하며 비이성적인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태도이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욥의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론적 인식이 지금의 너희보다 많은 것 같으냐? 당시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은 매우 적었으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욥이 이룬 그러한 성과는 정말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태도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인성과 추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의 인성과 추구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하나님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가 세상에 없다’고 말씀했다. 이미 그 시대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러한 평가와 결론을 내렸을 정도이니, 하물며 지금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서 나타내는 행사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사역을 직접 체험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심과 시련 속에서의 증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보았고, 기뻐했으며, 칭찬했다. 사람들 역시 부러워했고, 경탄했으며, 칭찬이 자자했다. 그의 일생은 위대하지 않고 평범했다.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평범한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보통 사람이 얻지 못한 하나님의 도를 얻었고, 보통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큰 능력과 주재를 느끼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총명하지도, 막강한 생명력을 지니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갖추지 못한 진솔함과 선함, 정직함, 그리고 공평과 공의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었으며, 강한 의지와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행한 모든 비범한 일들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거룩함, 공의로움을 보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총, 보호를 보았으며,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존귀함과 권병을 보았다. 욥이 일반 사람들은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순결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마음이 하나님께 속해 있었으며, 창조주에게 끌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욥의 추구에 있다. 그는 완벽한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했으며,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악에서 떠난 자가 되고자 했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추구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과 그 지혜를 깨달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는 사람에게 복을 주고 그 복을 거두어 가는 행사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그가 지나온 세월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의 일상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는 데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의 눈에 하나님의 행사는 만물의 운행 법칙 가운데 충만했으며, 하나님의 주재 역시 사람의 삶 속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행사의 무소부재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평범한 나날 속에서,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비범하고 오묘한 행사를 보고 체험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기묘한 안배를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숨겨진 모습’과 ‘침묵’은 욥이 하나님의 행사를 체험하는 데 어떤 방해도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도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욥의 일생은 평범한 삶 속에서 만물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욥은 평범한 나날 속에서, 만물 가운데 침묵하고 계시지만 만물의 운행 법칙을 주재하면서 전하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사람이 욥과 같은 인성을 갖추고 욥처럼 추구하면, 그와 같은 경험과 깨달음을 얻고, 욥처럼 하나님의 만물 주재를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지도, 말씀하지도 않았지만,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거나 말씀하지 않아도 사람은 만물 가운데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행사와 주재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큰 능력과 권병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사람이 얼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게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욥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할 수 있었으니,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이 논리적 추론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물의 법칙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욥 혼자만의 특권처럼 보인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언급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욥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욥’이란 팻말이 붙어 있어 다른 사람과는 무관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주 명확하다. 오직 욥만이 진솔하고 선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인품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욥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갈 수 있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너희도 깨달았을 것이다. 즉, 욥 외의 모든 사람은 진솔함과 선함과 정직함, 그리고 공평과 공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악에서 떠날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사지도, 시련에서 굳게 서지도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욥 이외의 모든 사람은 여전히 사탄의 속박과 굴레에 묶여 있으며, 전부 사탄이 참소하고 공격하고 해치고 삼키려는 대상이다. 그들은 자유를 얻지 못한 자들이자, 사탄에게 구금된 죄수들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적이 되었는데 어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욥과 같은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사람의 본성 본질, 그리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하냐?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맞느냐? 악에서 떠난 사람이 맞느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표현으로 개괄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실제 의미는 전혀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표현에는 본질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원수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 어떤 목적과 야심, 저의도 없는 초심을 지닌 자가 있는지 보아라. 설사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본 사람이 몇몇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최종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있다. 사람은 생명 체험 과정에서 늘 ‘나는 하나님을 위해 가정도 직장도 내려놓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주셨지? 그동안 내가 받은 복이 있는지 한번 계산하고 따져 봐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헌신하고 뛰어다니며 수많은 고난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동안 내가 한 것에 대해 어떤 약속을 해 주실까? 내 선행을 기억해 주실까? 내 결말은 어떤 것일까? 복은 받을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은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계산하고, 저의와 야심을 품고, 하나님께 장삿속을 들이밀며 뭔가 얻어 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며, 하나님을 상대로 계산하고, 자신의 결말을 두고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논쟁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며 하나님께 구두 증거를 구걸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장삿속을 들이밀며, 끊임없이 뭔가를 얻어 내려고만 한다. 심지어 갈수록 심해지고 탐욕스러워진다.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동시에, 또 끊임없이 하나님과 논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련이 임하거나 특정 환경에 처했을 때 항상 나약해지고 일을 태만히 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는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사람은 하나님을 화수분이나 만물 상자로 삼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큰 채권자로 간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약속을 얻어 내는 것이 생득적 권리이자 책무라고 생각하고, 반면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며 사람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해야 할 책임이라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이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과 연결 짓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려고 생각하거나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이러한 상태를 볼 때, 사람의 본질은 뻔한 것이다. 그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마음씨가 악독하고 음험하고 간사하며, 공평과 공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나아가 비열하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마음을 닫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태껏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했으며, 사람의 경배를 받지도 못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든,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급하든, 사람은 봐도 못 본 척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사람은 시종일관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자신이 주관하고 자신이 결정하려고 한다. 그 뜻인즉,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고 싶어 하지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사람들의 상태다. 다시 욥의 경우를 보자. 우선 그가 하나님과 거래를 했더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면서 어떤 다른 의도를 품었느냐? 당시 하나님이 누구에게라도 이후의 결말에 대해 말씀한 적이 있더냐? 그때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결말에 대한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욥은 그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을 그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양자의 차이가 너무 커서 같은 선상에 놓을 수조차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지라도 욥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속했다. 그는 단 한 번도 하나님과 거래를 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께 그 어떤 지나친 기대나 요구를 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고 여겼다. 이는 욥이 오랫동안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며 보고 얻은 성과였다. 또한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말할 수 있는 성과도 얻었다. 이 두 구절은 그가 살며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보고 깨달은 것이다. 또 이 두 구절은 사탄의 시험을 이긴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며,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설 수 있었던 초석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나눈 얘기로 봤을 때, 욥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느냐?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사탄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려우냐? 너희는 하나님께 욥 같은 시련을 달라고 기도할 다짐이 되어 있느냐? 대부분의 사람이 감히 그런 기도를 드리지 못할 것이다. 이를 통해 너희의 믿음이 보잘것없이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과 비교하면 너희의 믿음은 그야말로 언급할 가치도 없을 정도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적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지 못하고, 사탄의 공격과 참소와 시험을 이기지도 못한다. 그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겠느냐? 욥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이 구원받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고 나니, 이제는 욥과 같은 시련을 받아들일 믿음이 생겼느냐? 이제 너희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주는 시련에 대해 그 어떤 걱정도 하지 마라

욥의 시련이 끝나고 욥에게서 증거를 얻은 다음, 하나님은 욥과 같은 사람들을 한 무리 혹은 더 많이 얻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내기를 걸며 욥을 시험하고 공격하고 해쳤던 그 방식으로 또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해치는 일이 반복되는 건 없게 할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사탄이 나약하고 무지하고 우매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욥에게 했던 그 한 번의 시험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제멋대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시험과 상해를 겪은 사람은 욥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탄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명과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주관하지,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선민을 함부로 지배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점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나약함을 생각해 주며, 사람의 우매함과 무지함 역시 잘 알고 있다. 사람을 완전히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야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늘 사탄에게 우롱당하고 해를 입는 것을 원치 않으며, 사람이 늘 고난받는 것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자, 만유를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병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제멋대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사탄이 온갖 방법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는 데에 사탄이 끼어드는 것은 더더욱 용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만유 주재 법칙을 짓밟고 깨뜨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이 크나큰 사역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는 6천 년 경륜 사역의 핵심이자 결정체이다. 또한, 하나님이 6천 년 사역에 기울인 심혈의 대가이기도 하니, 하나님이 어찌 이 사람들을 쉽사리 사탄에게 넘기겠느냐?

사람은 늘 하나님의 시련이 임할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람은 또 언제나 사탄의 굴레에 묶여, 사탄의 공격과 상해의 위험 속에서 살면서도 두려운 줄 모르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이게 어찌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그저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을 뿐이며, 사람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 긍휼과 배려를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는 시련과 심판, 형벌, 하나님의 위엄과 진노에 대해서만 공포와 두려움을 조금 느낄 뿐, 하나님의 고심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시련을 언급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심지어 하나님의 속내는 종잡을 수가 없으므로 사람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극력 반발하고 저항한다. 사람이 조심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 ‘잘못 인도’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또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빼앗길지도 모르며, 심지어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탄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사탄이 자신들을 해칠까 걱정한 적이 없었고, 사탄에게 해를 입으면서도 사탄에게 잡혀가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반면, 사람은 말끝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겠다고 외치지만 하나님을 신뢰한 적이 없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람을 사탄의 마수에서 구원하리라는 사실을 믿은 적도 없었다. 사람이 욥처럼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면, 모두가 다 욥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순종한다고 해서 무슨 손해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권고하건대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신변에 닥치는 모든 일을 신중히 대해라. 경솔한 행동,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말고, 혈기와 천연적인 본능, 상상과 생각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사람, 일, 사물을 대하지 마라.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하되, 더 많이 기도하고 구해라. 명심했느냐?

이어서 시련을 겪고 난 후의 욥이 어떠했는지를 보자.

5) 시련을 겪은 후의 욥

욥 42:7~9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 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욥 42: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우매한 자를 천하게 여긴다

욥기 42장 7절에서 9절에 하나님은 욥을 그의 종이라고 언급했다. 욥에게 사용한 ‘종’이라는 이 호칭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욥이 차지한 비중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를 더 높은 호칭으로 부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호칭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욥이 차지한 비중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여기서의 ‘종’은 욥을 부르는 하나님의 ‘애칭’이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내 종 욥’이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에서 욥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종’이라는 단어의 함의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말씀 구절에서 하나님이 ‘종’이라는 단어에 내린 정의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먼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욥을 시련한 후, 처음으로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했음을 공개적으로 알린 것이며, 욥의 행동과 말이 정확하고 옳았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의 정확하지 않은 그릇된 논쟁에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도 욥과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모습을 본 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정확한 인식을 가졌던 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엉뚱하게 추측하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염증을 느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라고 요구했다. 이 구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게 속죄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우매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므로 반드시 번제를 드려 과오를 만회해야만 했다. 보통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나, 여기서의 번제는 욥에게 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번제의 차별화된 점이었다.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을 증거했기에 하나님께 열납되었지만, 욥의 친구들은 욥이 시련을 받는 동안 다 드러났다. 그들은 우매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정죄받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이 ‘징벌’이 바로 욥 앞에서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노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들이 아니었으며 또한 욥의 순전함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이 그들의 행동은 열납하지 않으나 욥의 행동은 흔쾌히 열납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했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그들에게 사람은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며,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 눈에 천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두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이자 태도였다. 또한 이 두 부류 사람의 값어치와 지위에 대한 해석이기도 했다. 비록 하나님은 욥을 종이라 불렀지만, 이 ‘종’은 하나님 눈의 기뻐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에게서 권병을 받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과오를 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높고 존귀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한 ‘종’의 진정한 함의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기에’ 이런 ‘특별한 영광’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종’으로 불리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이 두 태도는 두 부류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귀하게 여겨지지만, 우매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못해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수 없으며, 늘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하나님께 정죄받고, 천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권병을 주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 기도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의 우매함에 따라 그들을 처리하지 않았다. 즉, 그들에게 벌도, 어떤 응징도 내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종인 욥이 그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열납했기에 그들을 용서했다. 너희는 여기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축복할 때 많은 것을 내려 주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권병을 주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자격을 부여한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 몇 사람의 과오를 기억하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준 권병이었다. ‘욥의 기도로 타인이 하나님께 정죄받지 않는’ 방식을 통해 그 우매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는 또한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징벌이기도 했다.

욥은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더 이상 사탄에게 참소당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은 어떤 말을 했느냐? 바로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말, 또 욥기에 기록된 그 많은 말을 했다.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그 말들을 보면, 욥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원망도 의심도 없었으며, 오직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림이 바로 그의 순종하는 태도였다. 그의 태도와 그가 하나님께 한 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열납하였다. 그가 시련을 겪고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다. 하나님이 곁에 있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보았고, 듣고자 한 것을 들었다. 욥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 눈에 들어왔고, 그의 모든 말은 하나님 귀에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전부 듣고 보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 시기, 하나님에 대한 욥의 앎과 마음속 생각은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시의 배경에 따라 그가 말한 것을 인정해 주었다. 욥의 마음속 생각과 모든 행실, 그가 보여 주고 드러낸 모든 것들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그의 마음속 생각과 다짐은 하나님께 결과를 보여 주었고, 그 결과는 하나님이 보기에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뒤이어 하나님은 시련을 거두어 갔다. 그 후 욥은 고통 속에서 벗어났으며, 그의 시련도 그렇게 사라져 다시는 임하지 않았다. 욥은 이미 시련을 겪었고, 또한 시련 속에서 굳게 서서 사탄을 철저히 이겼기에 하나님은 그가 받아 마땅한 복을 그에게 내렸다. 욥기 42장 10절과 1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욥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복을, 처음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았다. 이때, 사탄은 물러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의 방해와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준 것 역시 더 이상 사탄에게 참소당하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비록 그때의 복은 소와 양, 낙타, 재산 등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이 욥에게 주고자 했던 복은 그러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 하나님이 욥에게 어떤 영원한 약속을 주려 했다는 기록이 있느냐? 하나님이 욥에게 내린 복 중에는 결말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또 그 복은 결말과 관계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욥이 차지하는 비중과 지위가 어떻든, 하나님의 축복에는 매우 적당한 선이 있었고, 하나님은 결말에 대해 선포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말을 선포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 때, 즉 사역을 끝내는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물질적인 축복만 좀 내려 줄 뿐이다. 다시 말해, 욥은 여생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보냈다. 이는 그와 다른 이의 차이점이다. 같은 점은 그 역시 정상인처럼 나이를 먹고 어느 날 세상과 이별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성경에는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겠느냐? 하나님은 결말을 선포하지 않은 그 시대에 욥에게도 수명을 정해 주었으며, 욥은 그 수명이 다 찬 후 자연스럽게 세상과 이별했다. 그가 두 번째로 복을 받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그 어떤 고통도 더해 주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무슨 선고도, 정죄도 아니었다. 욥은 살아생전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자였다. 하나님은 그가 죽고 난 후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말씀하지도, 논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에는 적당한 선이 있으며, 그 말씀과 행사의 내용, 그리고 원칙은 그의 사역 단계와 사역 시기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이 본 욥의 결말은 어떤 것이었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 않았겠느냐? 그렇다.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은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고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 봤을 때, 욥은 기한이 차서 죽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일생이었다.

욥이 평생 살아 낸 가치

욥의 일생은 가치가 있는 삶 아니겠느냐?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왜 그의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겠느냐? 사람의 시선으로 볼 때, 그의 가치는 무엇이냐?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를 대표해 사탄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했다. 그는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 이행했고,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모범과 본보기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면 얼마든지 사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겠느냐? 하나님이 볼 때, 욥의 삶의 가치는 사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고 찬양하여 하나님께 위안과 기쁨을 안겨 드린 데 있다. 또한, 욥은 살아생전에 겪은 그 시련에서 사탄을 이겼고, 사탄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했으며,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영광을 얻게 하고, 하나님께 위안을 드려 절박했던 하나님께 결과와 희망을 보여 주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본 욥의 삶의 가치이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의 인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고 사탄을 부끄럽게 한 선례를 만들었다. 이러한 것이 욥의 삶의 가치 아니겠느냐? 그는 하나님께 마음의 위안을 드리고 영광을 얻는 기쁨을 미리 맛보게 했으며, 하나님의 경륜이 그로부터 완벽한 시작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욥의 이름은 하나님이 영광을 얻었다는 표징이 되었으며, 인류가 사탄을 이겼다는 상징이 되었다. 욥이 일생 동안 살아 낸 것과 사탄을 이긴 그의 위업을 하나님은 영원히 소중하게 여길 것이며,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는 완전무결하고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행한 사역을 살펴보자.

4. 율법시대의 조문

십계명

제단을 쌓는 원칙

종을 대하는 것에 관한 규례

도둑질과 배상에 관한 규례

지켜야 할 안식년과 3개 절기

안식일에 관한 규례

제사에 관한 규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례(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준수하라고 지시함)

제사장이 드리는 번제

제사장이 드리는 소제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

제사장이 드리는 속건제

제사장이 드리는 화목제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규례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부녀의 산후 정결 규례

문둥병 검사 기준

문둥병자의 치유 규례

병균에 감염된 방을 정결케 하는 규례

유출병 등 질병에 관한 규례

매년 지켜야 할 속죄일

소와 양을 잡는 규례

좇아서는 안 될 이방인의 악습(근친결혼 금지 등)

백성이 지켜야 할 규례(“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자는 쳐 죽일 것

간음죄 처벌 규례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일상에서 지켜야 할 행동과 사람됨의 규례, 성물을 먹는 규례, 생축으로 제사드리는 규례 등등)

지켜야 할 절기(안식일, 유월절, 오순절, 속죄일 등등)

기타 규례(등불 관리, 희년, 토지 무르기, 서원, 십일조 등등)

율법시대의 규례는 하나님이 전 인류를 인도했다는 확실한 증거다

율법시대의 이 규례나 원칙들을 다 보았느냐? 이 규례들은 범위가 넓지 않으냐? 우선 십계명이 있고, 그다음에는 제단을 쌓는 등의 조문들이 있다. 그리고 안식일과 3개의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내용이 있고, 이어 제사를 드리는 것에 관한 규례가 있다. 제사에는 모두 몇 가지가 있느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등이 있다. 그다음으로는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례로, 제사장이 드리는 번제, 소제 등을 포함한 각종 제사가 있다. 여덟 번째는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것에 관한 규례이다. 이어 사람이 생활하면서 준수해야 할 규례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여기에는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규례, 부녀의 산후 정결 규례, 문둥병 환자의 치유 규례 등 사람의 생활과 관련된 여러 측면의 규정이 있다. 이 규례들에서 하나님은 질병에 관한 것까지 전부 말씀했으며, 심지어는 소와 양을 잡는 규례까지도 언급했다. 소와 양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 하나님이 규정한 대로 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알려 준 규정대로 행하면 문제가 없었고, 사람에게도 분명 이로웠다! 이 밖에도 하나님은 안식일, 유월절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부 절기, 규례까지 전부 알려 주었다. 마지막 조항을 보자. 기타 규례에 등불 관리, 희년, 토지 무르기, 서원, 십일조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 이 모든 조문들은 관련되는 범위가 넓지 않으냐? 우선, 사람이 제사를 드리는 문제에 관련되며, 도둑질, 배상, 안식일을 지키는 것 등등 생활 속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다 관련된다. 즉, 하나님은 본격적으로 경륜 사역을 시작하면서 사람을 위해 많은 규례를 정해 지키게 했다. 이러한 규례들은 인류가 땅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정상적인 인류의 생활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제단을 쌓아야 하는지, 제단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고, 그다음으로는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었다. 또 사람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정해 주고, 생활 속에서 어떤 것들을 주의하고 지켜야 하는지, 어떤 것들을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해서는 안 되는지 정해 주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이러한 것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해 놓았으며, 이 조문과 규례, 원칙들을 통해 사람의 행동을 규범화하고, 사람의 생활을 이끌며,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다. 또한, 사람을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인도하는 한편,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창조한 만물 가운데서 질서 있고 규칙적이며 절제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하나님은 먼저 이 간단한 규례와 원칙들로 사람에게 어느 정도 범위를 정해 줌으로써, 사람이 땅에서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생활을 하고, 정상적인 인류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행하는 6천 년 경륜의 시작 부분에 속한 세부 내용들이다.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규례와 규정들은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인류를 인도한 구체적인 사항들이다. 이는 율법시대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받아들이고 준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행한 사역의 기록이자, 하나님이 전 인류를 이끌고 인도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인류는 영원히 하나님의 가르침과 공급을 떠날 수 없다

이 규례들에서 사역과 경영, 그리고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엄숙하고 진지하며 신중하고 책임감 있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차에 따라 하고자 하는 사역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인류에게 펼쳐 보였으며, 말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하나도 빠짐없이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음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다음 시대 사람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하나님은 최초의 율법시대에 이 간단한 사역들을 행했다. 하나님의 눈에 하나님과 세상, 인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개념은 아주 모호하고 불분명했다. 설사 머릿속에 어느 정도 생각과 타산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확실하거나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공급을 떠날 수 없었다. 최초의 인류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하나님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인류의 생존 원칙과 생활에 필요한 규례들로 사람을 가르치고,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 주어야 했다. 이 말씀의 규정과 규례들을 통해 사람은 점진적으로 하나님을 알아 가는 한편, 하나님의 인도를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개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거둔 다음에야 하나님은 비로소 이후의 사역을 하나하나 행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시대의 이 규례들과 하나님이 행한 사역은 인류 구원 사역의 기초 중의 기초이며, 하나님 경륜의 시작 단계 사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율법시대의 사역을 하기 전에도 아담과 하와 혹은 그 후손들에게 말씀을 했다고는 하나, 그때의 지시와 가르침은 이렇게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한 조항씩 반포되지 않았으며, 성문화된 규정도, 규례로 정해진 것도 없었다. 그때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 그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이끌고 그 단계에 이르러서야 율법시대의 규례들을 말씀할 수 있었고, 그 규례들을 실행하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필수적이었고, 그 결과 역시 필연적이었다. 사람은 그 간단한 규례와 조문들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는 경영 사역의 절차와 하나님이 경륜에서 나타낸 지혜를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증거하는 자, 그와 한마음으로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자를 얻기 위해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시작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지속해야 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또한 그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갖추어져 있고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알고 있으며, 사람에게 무엇을 공급해 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람을 인도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도 알고 있다. 사람은 꼭두각시 같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는 새 하나님이 행하는 경영 사역의 절차에 따라 한 걸음씩 지금까지 이끌려 왔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모호하지 않으며, 아주 확실하고 명확하게 계획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절차와 계획에 따라,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펼쳐 나간다. 이후의 사역이 사전에 사람에게 예시되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사역 역시 엄격하게 그의 계획대로 계속 진행되고 전개된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구현된 것이자 하나님의 권병이다. 그가 그의 경륜에 따라 어떤 사역을 펼치든 그의 성품과 본질은 모두 그 자신을 대변한다. 이는 조금도 틀림이 없다. 어떤 시대에 어떤 단계의 사역을 하든, 그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을 증오하는지, 그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이 율법시대의 사역에서 정한 규례와 원칙들이 아주 얕고 단순하며, 이해하기도 행하기도 쉬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이 담겨 있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규례들에서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염려, 섬세하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것과 만유가 전부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진실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이치,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볼 때 그것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과 인도를 대체하지 못한다. 인류는 영원히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고, 하나님이 친히 이끄는 사역도 떠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류의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계명을 주든 규례를 주든, 또는 너에게 진리를 공급해 그의 뜻을 깨닫게 하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의 목적은 사람을 아름다운 내일로 인도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과 하나님이 행하는 이 모든 사역은 하나님 본질의 일면이 발현된 것이며, 그의 성품과 지혜의 일면이 발현된 것이다. 이는 그의 경륜에 빠져서는 안 될 절차로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또한 사람이 그에 대해 어떤 관념이나 생각을 갖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의 통제도 받지 않고 오로지 그의 경륜에 따라 그의 사역을 하고, 그의 경영을 계속 해 나갈 뿐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자. 안녕!

2013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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