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 이행에 관한 말씀
발췌문 30
본분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이 바로 사람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부탁하면, 그것이 바로 네가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다. 비현실적인 목표를 잡지 않고 착실하게 본분을 이행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의 것을 탐내어 너에게 적합한 것을 버리고 기어이 다른 것을 하려 해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접대하는 일이 맞는데도 기어이 리더를 하려고 하고, 배우가 맞는데도 감독을 하고 싶어 하는 등 늘 높은 지위에 오르려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제대로 정확하게 찾아야 한다. 이런 사람만이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런 다음에 착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고 평온해진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요구에 따른 본분 이행을 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할 수 있고,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올바른 마음가짐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본분을 이행한다면, 성령이 역사하여 이끌고 인도해 줄 것이다. 또한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하려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완벽하게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내게 된다. 사람의 생명은 모두 본분을 이행하면서 점차적으로 성장한다.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믿어도 진리와 생명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만을, 자신의 능력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만을 축복한다.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든, 너는 그것을 자신의 책임과 본분으로 받아들이고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하면 된다. 하나님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제대로 이행하라고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전혀 원칙 없이 자신의 뜻대로 함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봤을 때, 네가 ‘어차피 내 책임도 아니니까 상관하지 않을래.’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마음을 다한 것이겠느냐? 마음을 다하지 않았으며, 무책임한 것이다. 만약 네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안 되겠다. 비록 이 일이 내 관리 범위는 아니지만, 리더한테 문제점을 이야기해서 그가 원칙대로 처리하도록 할 수는 있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한 후 모두가 적합하다고 판단하면, 네 마음이 평온해지고 책임을 다한 것이다. 이러면 마음을 다한 것이다. 만약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소홀히 하며 ‘이 일은 간단하게, 대충대충, 무성의하게 해도 넘어갈 수 있어. 어차피 아무도 따지지 않고, 나도 최선을 다했어. 내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고 업무 능력도 뛰어나지 않으니, 대충 넘어가기만 하면 돼. 게다가 아무도 이 일에 관심 없고, 나에게 진지하게 따지는 사람도 없고, 또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아.’라고 한다면, 이런 속셈과 마음가짐이 있다면, 마음을 다한 것이겠느냐? 이는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대충 한 것으로, 바로 사탄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사탄의 패괴 성품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면 마음을 다할 수 있느냐? 마음을 다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너는 말할 것이다. “상부에서 이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고, 하나님 집의 모든 사역 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게 제 본분이니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 일이 중요한지 아닌지와 제가 제대로 잘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중요하냐? 바로 네가 제대로 잘할 수 있는지, 마음을 다할 수 있는지, 원칙을 고수하며 진리에 따라 실행할 수 있는지, 이것이 중요하다.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이것이 바로 완벽하게 마음을 다한 것이다. 만약 네가 어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중요한 본분을 또 이행하려고 한다면, 또한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면, 이것은 더더욱 마음을 다한 것이다. 네가 마음을 다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무엇이냐? 하나는 네가 하나님 말씀의 원칙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네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였으며,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성격대로 한 것도, 자신의 기호에 따라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맡긴 부탁으로 여겨 이런 책임감과 마음으로 이행한 것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하나님의 요구대로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너의 마음을 다 쏟는 것, 이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 이행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조금만 고통을 겪어도 원망을 하며 늘 개인의 이익과 득실을 따진다. 그는 마음속으로 ‘리더가 맡긴 사역을 내가 제대로 잘 해내면 리더만 띄워 주는 거지 누가 나를 기억이나 하겠어? 아무도 내가 한 줄 모르고, 리더가 공로를 인정받는데, 내가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 아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는 패역이며, 이런 자는 몹쓸 인간이다. 하나님의 부탁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늘 감투를 쓰고 싶어 하고, 공로를 인정받고 상을 받고 싶어 하며, 돋보이고 싶어 하는 자이다. 어째서 그는 늘 명예와 이익을 중시하느냐? 이는 명예와 이익을 향한 그의 욕망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본분 이행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다. 그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실에 따라 규정하며, 이로써 그릇된 관점이 생겨 소극적인 태도로 본분을 게을리하고, 본분 이행에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게 된다. 그의 마음속에 진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에게는 본분을 이행할 때도 남이 알아주고, 자신이 수고하고 고생할 때도 남이 알아주고, 또한 리더 일꾼이 칭찬하고 찬성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의 가치가 있고, 모두가 볼 수 있어야만 영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하지 않으냐?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믿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이는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이 바로 성품이 사악한 자이다. 그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본분을 지키지 않는데, 언젠가는 도태된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이어야 하며, 반드시 건전한 이성을 지녀야 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모든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각기 다른 자질과 은사를 주었기에 각각의 사람에게 적합한 본분이 다 다르다. 이것저것 가리면서 자신의 기호에 따라 본분을 선택하거나 오직 편안하고 수월하며 자신의 바람에 부합하는 본분만 골라 이행해서는 안 된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는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무엇을 하든,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더러운 일이든 힘든 일이든, 사람들 앞에서 하는 일이든 사람들 뒤에서 하는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아니든, 모두 다 본분으로 삼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만약 마지막에 다 이행하고 나서 자신이 느끼기에 어떤 일들은 마음에 조금 걸리기도 하고, 비록 마음을 다하기는 했지만 사역이 그리 잘되지 않아 마음을 다한 성과가 그다지 좋지 않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떤 사람은 ‘나는 마음을 다했지만 성과가 그다지 좋지 않아.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건 하나님께 달렸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관점이냐? 이 관점이 옳으냐? 이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건성으로 대충 하려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로 마음을 전부 다 쓴다는 것이다. 딴마음을 품으면 안 되며, 마땅히 한마음으로 본분 이행에 전념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충성심을 다하며, 책임을 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잘 처리해 마땅히 거둘 성과를 거둔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사역 효과가 별로 좋지 않으면 너는 마음속으로 ‘어쨌든 나는 마음을 다했어. 먹고 자는 것도 잊고, 밤을 새워 가며 일했어. 다른 사람은 밖에 나가 산책을 하고 기분 전환을 할 때도 있었지만, 난 그런 것도 없이 고생했어. 육적인 안일함을 즐기지 않았다고. 이러면 마음을 다한 거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옳으냐? 너는 시간을 썼고 힘도 들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런 형식들을 모두 거쳤다. 하지만 성과가 좋지 않아도 네가 책임도 지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데, 이것이 마음을 다한 것이겠느냐?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다해 일을 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 하나님은 어떤 측면들을 보느냐? 우선, 네가 그 일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대하는지 여부를 살펴본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네가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에 전념했는지, 줄곧 진리 원칙에 따라 그 본분을 이행했는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도록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살펴본다. 사람이 일할 때, 하나님은 지켜보고 감찰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줄곧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고 있다. 사람은 이를 모르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감찰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시종일관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다가 결국에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해 그를 드러내면, 그때서야 하나님에게 버림받았음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지 않고 이방인, 마귀, 사탄 같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런 사람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도태된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자신을 반성하며, 간혹 성과가 좋지 않거나 문제가 생기면 속으로 느낄 수 있고, ‘내가 또 건성으로 대충 한 것은 아닐까?’라며 가책을 받는다. 이런 가책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냐? 이는 하나님이 한 것으로, 성령이 깨우쳐 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너를 깨우쳐 주는 것이냐? 하나님은 어떤 기초 위에서 너를 깨우쳐 주는 것이냐? 어떤 배경 속에서 너를 책망하는 것이냐? 너는 바른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이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해. 진리에 따라 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내가 마음을 다한 것일까?’ 이렇게 늘 이 문제를 고민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깨우쳐 준다. 너는 “알고 보니 제가 그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았어요. 저는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해 저한테 99점을 줬었죠. 이제 와서 보니 결국은 그게 아니라 간신히 합격한 거였어요.”라고 말하며 비로소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준 것으로, 네가 대체 어떻게 본분을 이행했는지, 하나님의 요구치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만약 본분 이행이 합격선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그래도 깨우쳐 주겠느냐? 아마 깨우쳐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깨우쳐 주느냐? 첫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순종하는 태도를 갖춘 사람이며, 셋째는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넷째는 언제나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하면, 마음을 다하는 측면의 진리에 대한 실행과 이 측면의 실제에 대한 체험이 점점 더 많이 쌓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는지, 다양한 사람들의 본분에 대한 태도와 행동을 네가 점차적으로 다 알게 된다.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너는 점점 더 참답게 본분을 대하게 되어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것을 조금도 놓치지 않을 것이며,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에 따라 처리할 수 있고, 진리를 점점 더 많이 실행하게 되고, 마음이 평온하고 편안해질 것이다. 만약 어느 날, 어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음을 네가 마음속으로 느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곰곰이 생각을 해야 한다. 자료를 찾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다 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이는 너의 본분 이행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도움이 된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사실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진리 원칙을 구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성과를 이룰 수 있다.
발췌문 31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어 본분을 늘 대충 건성으로 이행하는데,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으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 따라서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행해야 하겠느냐? 먼저 마음가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본분을 올바르게 대하고, 참답게 책임을 다해 일해야 하며, 기만하거나 대충 하려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본분 이행은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가짐이 단정해질 것이다. 또한, 일을 다 한 후에도 검토하고 반성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불안해서 자세히 검토해 보니 정말 문제가 있다면, 이럴 때는 고쳐야 한다. 고치고 나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 안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참답게 검토해야 하며, 중요한 부분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책임감 있게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이다. 사람이 참답고, 책임감 있고, 마음과 힘을 다하면, 사역을 잘할 수 있다. 때로 너의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눈에 띄는 잘못이 있는데도 찾지 못하고 발견하지도 못한다. 네 마음가짐이 바르면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로 그 문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성령이 너를 인도해 어떤 깨달음을 주어 네가 마음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오류를 바로잡고 진리 원칙에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네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고 건성으로 대강대강 한다면 그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너는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사람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하며, 마음과 생각을 어느 측면에 쓰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품고 있는지,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하나님은 감찰하고 있으며, 전부 볼 수 있다. 관건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이 협력하는 이 부분이 매우 관건이다. 본분을 다 이행하고, 일을 다 끝낸 후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하나님께 죄스럽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고 계속 대충 건성으로 넘기다가 사역에 커다란 손해를 입히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효과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때는 늦은 것이다. 이는 영원한 아쉬움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점이다! 일관되게 대충 건성으로 넘기는 것은 오점이고, 심각한 과오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는 자신이 맡은 범위의 일과 해야 할 일을 대충 건성으로 하지도, 아쉬움을 남기지도 않고 마음과 힘을 다해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이행한 본분은 하나님께 기억될 것이다. 하나님께 기억되는 일은 선행이다. 그럼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는 일은 무엇으로 간주되겠느냐? (과오로, 악행으로 간주됩니다.) 지금 악행이라고 말한다면 사람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일로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때 너는 그 과오가 행위상의 과오만이 아니라 하나의 악행이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너는 진작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 당시에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노력했더라면 그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할 것이다. 그 영원한 오점이 네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죄책감으로 남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는 하나님이 맡긴 부탁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매번의 본분 이행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억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절대 대충 건성으로 넘기지 마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잘못이 심각한 과오에 속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오점이다. 일단 아쉬움을 남기면 메울 방법이 없는데, 그것은 영원한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길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나님께 칭찬받겠느냐? 바로 마음과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선행을 예비하며, 자신의 선행을 쌓아 가되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악을 행해 다른 이의 본분 이행을 교란해서는 안 되며, 진리를 위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저질러서도 안 된다. 평생의 한을 남기지 마라. 사람의 과오가 너무 많아지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쌓아 가는 것이다! 네 과오가 많아질수록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도 많아지고, 마지막에는 징벌받게 된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큰 문제가 없이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눈에 띄는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도 않았으며,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도 않았다. 본분 이행에도 이렇다 할 큰 잘못이 없고, 원칙적인 문제도 없지만, 몇 년도 안 돼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파로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다. 이는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사람은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므로 문제를 간파할 수 있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줄곧 대충 건성으로 하며 회개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되니 드러날 때가 된 것이다. 줄곧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가 본분을 계속 이행하고 있었지만 늘 잘못된 태도, 대충 건성으로 넘어가는 태도로 계속 본분을 대했다는 것이다. 공을 들이는 법이 없고, 마음을 다하는 법은 더더욱 없으며 힘을 좀 쓸 때도 그저 과정만 밟았을 뿐, 온 힘을 다하는 법이 없어 과오가 끊임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그는 계속 회개하지 않았고 대충 건성으로 하는 태도를 바꾼 적이 없다. 즉, 그는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회개하는 태도를 본 적도,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는 늘 이런 태도와 방식으로 자신의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대했다. 이렇게 완고하고 강퍅한 성품을 시종일관 고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죄스럽다거나 이렇게 대충 건성으로 하는 것이 과오이자 악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죄책감도, 미안함도 느끼지 않으며, 가책받거나 참소받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하든, 그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그의 마음은 감동받지 못하고 마음가짐의 변화나 전환도 없다. 하나님은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가망이 없다. 아무리 말해도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고, 되돌릴 수도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내 집에서 힘쓸 자격도 없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을 할 때 일관되게 대충 건성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하며 관용과 인내를 베풀어도 효과를 볼 수 없고, 진실한 회개를 하게 할 수도 없고, 그가 진실로 변화하게 할 수도 없다.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게 할 수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게 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는 구제 불능인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이를 구제 불능이라고 정할 때, 그 사람을 단단히 잡고 놓지 않겠느냐?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손을 놓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 저를 놓아주십시오! 제가 고통받게 하지 마시고 징계하지 마시고 좀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제가 대충 건성으로 임해도 봐 주십시오! 제가 방탕하게 굴어도 내버려두십시오. 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며 구속받기 싫어한다. 그럼 하나님은 “네가 바른길을 걷기를 원치 않으니 나는 손을 놓고 방임하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나는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구제 불능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구제 불능인 사람이 양심의 감각이 있겠느냐? 마음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참소를 받겠느냐? 하나님에게서 온 질책과 징계, 채찍질, 심판을 느낄 수 있겠느냐?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전부 의식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희박하거나 심지어는 아예 없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이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구원받기 힘들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위험한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추구하고 실행하며, 어떤 길을 선택해야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을지, 절대 이런 내적 상태가 나타나지 않을지 알고 있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다음 지금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최저 기준이며,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런 기초 위에서 다시 진리를 구하고, 또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기준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의 유대를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어떤 일을 하라고 부탁하고 어떤 본분을 주었을 때 네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 네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바로 이런 문제이다. 하나님은 너의 태도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빨리 하나님에게 너의 태도를 밝히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이 핵심을 잡고 하나님이 맡긴 부탁을 제대로 완수한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정상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사역을 맡기거나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라고 했는데, 네가 무성의하고 진지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과는 상반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분명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네가 이행하는 본분은 분명 합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는 정말 중요하며, 선택하는 방식과 길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든, 본분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도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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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본분을 늘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고, 한 번도 진지하게 대한 적이 없다. 마치 이방인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일을 너무나 거칠게 하고 건성으로 대충 하며,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고 대강 한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이는 이방인이 힘쓰는 것이다. 불신파는 바로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한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건달기가 심해서 방탕하고 제약을 받지 않으며, 이방인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할 때는 절대로 건성으로 대충 하지 않으면서 왜 본분을 이행할 때는 전혀 진지하지 않고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냐? 무슨 일을 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늘 장난하는 것처럼 까불며 말썽을 피우고, 늘 건성으로 대충 하며 기만한다. 이런 사람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절대로 인성이 없다.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고, 야생 당나귀나 야생마와 다를 것 없으니, 누군가가 옆에서 관리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하나님 집을 속이고 기만하는데, 여기에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의미가 있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힘쓰는 것조차 합격하지 못한다. 만약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일한다면, 며칠 못 가 잘리고 해고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힘쓰는 자이자 고용 노동자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며, 그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너무나도 건성으로 대충대충 본분을 이행한다. 이들은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치를 따지며, 하나님 집이 그를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그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고, 그를 너그럽게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어처구니가 없지 않으냐? 객관적으로 말해, 이것이 바로 교만한 성품이며,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적어도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일할 때 양심과 이성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 책망과 훈계가 닥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이니, 정말이지 말로 납득시킬 수 없다. 짐승이라고 말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무슨 일을 하든 그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결과가 어떨지 상관하지 않고, 문제가 생겨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힘쓰는 것에도 합격하지 못한다. 그가 이렇게 본분을 대하니, 다른 사람이 봐도 눈에 거슬리고 마음을 놓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느냐? 이런 최저 기준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힘쓰는 것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것이며, 도태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로 교만하고 독선적이냐? 그는 늘 자신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에게 어떤 일을 안배하든 “이 일은 쉬워요. 별거 아니에요. 제가 할 줄 아니까 다른 사람이 진리 원칙을 교제해 줄 필요 없어요. 저 스스로 점검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늘 이런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리더 일꾼이 보아 넘기지 못하고 그가 하는 일에 마음을 놓지 못한다.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 아니겠느냐? 사람이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이면 바로 이런 꼴이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대해야 하느냐? 최소한 책임감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가 닥치더라도 마땅히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 집의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본분 이행이 어떤 성과를 거둬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분명히 알면 본분 이행에 쉽게 합격할 수 있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먼저 원칙과 하나님 집의 요구를 이해해야 하며, 어떤 성과를 거둬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본분을 이행하면 길이 생기지 않겠느냐? 따라서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본분을 건성으로 대충 이행한다. 그들은 정확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단 한 번도 진리 원칙을 구한 적이 없고, 또한 하나님 집의 요구와 거둬야 할 성과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건성으로 대충 하려는 내적 상태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하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저버리고 진리 원칙에 공을 들여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점차적으로 하나님 집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다. 사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저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있는지, 사람의 마음이 바른지, 사람이 마음을 쓰는지에 달려 있다. 이방인 중에 매우 진지하게 일해서 결국 성공한 자들도 많다. 그들은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었겠느냐? 바로 그들에게 마음이 있었고, 그들이 마음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지하고 참답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일을 수월하게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집의 본분은 모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한다면 다 잘 해낼 수 있다. 만약 마음이 바르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쓰지 않으며, 늘 수고를 덜 할 생각만 하고 건성으로 대충 해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을 망쳐 하나님 집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는 악을 행한 것이고 과오를 범한 것이니, 하나님이 혐오한다. 복음을 확장하는 중대한 순간에, 네 본분 이행이 성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방해와 교란만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혐오받고 도태되어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영원히 한으로 남게 된다! 하나님이 너를 높여 주어 본분을 이행하게 하는 것, 이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네가 무책임하고, 소홀히 하고, 건성으로 대충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네 태도인 것이다. 너에게 일말의 진심도 없고, 약간의 순종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지금은 시간이 너무나 귀중하다. 하루하루, 심지어 일분일초가 다 매우 중요하다. 만약 네가 진리를 구하지 않고, 생명 진입을 중시하지 않으며, 본분을 여전히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여 하나님을 기만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비이성적인 것으로, 매우 위험하다! 일단 하나님이 혐오하고 내치면, 성령이 다시는 역사하지 않을 것이며, 만회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때로는 그 일 분 동안 한 일 때문에 자신의 일생을 망치게 되고, 때로는 한 마디 말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순식간에 드러나 내쳐지지 않겠느냐? 일부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 줄곧 무책임하게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하면 이방인이고 불신파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다 망쳐서 하나님 집에 손실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린다. 바로 이렇게 본분 이행 자격을 취소당한다. 이는 드러나서 내쳐지는 것으로, 매우 비극적인 일이다. 어떤 사람은 회개하려 한다. 하지만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럴 기회가 또 있겠느냐? 일단 내쳐지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일단 하나님이 사람을 버리면, 거의 만회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겠느냐? 모두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며,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를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그런 사람은 인성이 없는 사람으로, 속된 말로는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한다. 부도덕하다는 것은 어떤 성질이냐? 인성이 없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지만, 도덕심만은 없어서는 안 된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인 것이다. 너희가 보아라. 마귀와 마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하나님의 선민을 해치는 일만 저지르니, 부도덕한 것 아니냐? 부도덕해도 너무 부도덕하다. 사람이 만약 지나치게 부도덕한 짓을 많이 했다면, 분명히 죄의 대가를 받을 것이다. 부도덕한 사람은 인성이 없는데, 부도덕한 사람이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또한, 그는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없다. 그가 짐승이기 때문이다. 부도덕한 사람은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이런 자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만이 사람의 일을 할 수 있고, 신용을 지킬 수 있으며, 신뢰할 가치가 있고, ‘정인군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 집에서는 ‘정인군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다. 정직한 사람만이 신뢰할 가치가 있고, 양심과 이성이 있으며,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만약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다면, 그는 정직한 사람이며,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직한 사람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는 너의 능력이나 외모와 상관이 없으며, 너의 자질과 재능 혹은 은사와는 더더욱 상관이 없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책임감 있게 일하고, 양심과 이성을 갖추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의 재능과는 상관이 없지만, 사람이 부도덕할까 봐 두려울 뿐이다. 사람이 부도덕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하나님 집에서 내친 사람은 모두 인성이 없고 너무나 부도덕해서 내쳐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양심과 이성은 지니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한다.
일을 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너희는 늘 자신의 행위와 속셈을 성찰하느냐? (성찰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성찰하는 경우가 적은데,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자신의 진실한 내적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겠느냐? 만약 정말 패괴 성품이 드러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이런 것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만약 사람이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줄곧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며 전혀 원칙 없이 일한다면, 결국 많은 악을 행하여 드러나고 내쳐진다면, 그 결과가 매우 심각하지 않겠느냐?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깊이 패괴되었는데, 자주 자신을 반성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진리를 구해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쉽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원칙을 위배하게 되며, 심지어는 악을 행하게 된다. 만약 한 번도 자신을 성찰하지 않았다면, 이방인과 별로 다를 바가 없으니 문제가 심각해진다. 많은 사람이 바로 이런 이유로 내쳐지는 것 아니겠느냐? 진리 추구를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느냐? 주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원칙을 위배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에게 패괴 표출과 그릇된 속셈이 있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자신을 반성하고, 하나님 말씀과 자신을 대조하면, 쉽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반성하면 패괴 성품이 점점 해결되어 그런 꿍꿍이, 불량한 속셈과 동기가 쉽게 해결된다. 만약 일이 생기고 나서야,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야, 악을 행하고 나서야 성찰한다면, 한발 늦었다. 이미 결과를 초래했으니, 이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만약 악을 많이 행하여 내쳐지고 나서야 성찰한다면, 이미 모든 것이 늦었으니 그저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높여 줌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니, 마땅히 그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니 본분을 이행할 때 더더욱 항상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많이 성찰해야 하고, 매사에 성찰해야 한다. 자신의 속셈과 내적 상태를 성찰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살고 있는지, 일하는 마음가짐이 정당한지, 일하는 동기와 근원이 하나님의 검증을 통과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였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때로 사람은 본분 이행 중에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진리를 구하는 것을 귀찮아하기도 한다. 마음속으로 ‘이 일을 이렇게 해도 되겠지. 이 정도면 됐을 거야.’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일을 대하는 태도이고, 본분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바로 일종의 내적 상태이다. 이런 내적 상태는 무엇이냐? 무책임하고 건성으로 대충대충 본분을 대하는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성찰하지 않는다면 매우 위험하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내적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조금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게 정상이지. 사람은 다 그래. 별문제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리석은 자 아니냐? 사람이 그런 식으로 일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보아라. 내쳐진 사람은 다 이렇게 줄곧 건성으로 대충대충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바로 건성으로 대충 한 결말이다. 건성으로 대충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만간 자신을 망치게 될 것이며, 실패를 맛보지 않고는 뉘우치지 않을 것이다. 건성으로 대충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제대로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확실히 너무나 위험하며, 언제라도 내쳐질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여전히 성찰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고 망치게 된다. 내쳐지는 그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겠지만, 모든 것은 이미 늦었다.
발췌문 33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본분 이행과 현실 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할 줄 모르면서, 늘 예배를 많이 드려 진리를 얻고 생명을 키우려 하는데, 이는 비현실적이며 말이 되지 않는다. 생명은 하나님 말씀과 심판 형벌을 체험하여 얻는다. 하나님 사역을 체험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모두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으며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해 성품이 변화될 수 있으며, 모두 본분 이행 과정에서 하나님에게 온전케 될 수 있다. 나태하고 편안함을 탐하는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고, 또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집에 예배와 설교로 진리를 교제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결국 10년, 20년을 믿으면서 무수히 많은 설교를 들었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 일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며,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여 자신을 인식하고 진리와 생명을 얻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편안함만 꾀하고 본분을 회피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 드러나 도태되었다. 현재 본분 이행에 전념하고 진리 추구를 중시하는 사람은 모두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느 정도 생명 진입이 있으며, 패괴가 드러날 때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할 줄 알며, 또한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진리를 구하고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할 줄 안다. 몇 년 동안 본분을 이행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눈에 띄는 수확을 얻어 체험 간증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다. 이로써 사람의 생명 성품이 변화하였다. 현재 각 지역의 교회마다 악인과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을 정리하고 있다. 남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 본분 이행을 견지할 수 있는 사람들로, 어느 정도 충성심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둘 줄 안다. 이런 사람은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다. 너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현실 생활 속으로, 본분 이행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실행하고 적용하며,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경우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본분을 이행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매사에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하는 훈련을 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담을 헤아려 하나님을 만족게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래야 비로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네가 진리를 완벽하게 깨닫지 못해도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다.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것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줄 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 진입의 공과이다. 만약 매사에 이렇게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며,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다. 본분 이행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생명 진입의 성과가 있고, 생명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면, 이런 본분 이행 자체가 즐거움이 되어 아무리 바빠도 피곤하지 않고, 마음이 늘 평안하고 기쁘며, 늘 매우 충실하고 안정된 느낌을 갖게 된다. 또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진리를 구할 때 늘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를 받게 되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이 외에도, 본분을 이행할 때 바쁘든 한가하든 상관없이 간혹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한다. 건강을 위해 적당한 운동을 하면 혈액 순환이 촉진되어 활력이 넘치고 일부 직업병도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본분 이행에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본분 이행 과정에서 많은 공과를 배울 수 있고, 많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을 진실하게 인식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고 완벽하게 하나님 뜻에 부합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고 증거하며,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다면, 이는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는데, 이 얼마나 복된 일이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크게 축복해 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것은 뭐라고 확언하기 어렵다. 모든 복은 본분 이행과 하나님 사역의 체험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심판 형벌, 책망 훈계, 시련 연단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크게 받는 일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모두 진리를 얻을 수 있고, 생명 성품이 변화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된다.
일부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일이 닥쳐도 진리를 구하지 않고, 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살아가며, 늘 사람의 기호에 따라 일한다. 모든 것을 자기 뜻에 따라 되는대로 하다가 결국 많은 일을 잘못해 교회 사역이 지체되었다. 책망 훈계를 받아도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고집대로 하고 제멋대로 하다가, 그 결과 성령의 역사를 잃게 되고, 하나님 믿는 것이 막막해지고 어둠 속으로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이익을 사랑하고 지위를 추구하여 온통 그것들을 얻기 위해 바쁘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는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에는 드러나 도태되어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성육신도 인정하기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하늘의 하나님, 하나님의 영만 믿는다. 실제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늘 관념과 경계심을 갖고, 하나님이 그의 속사정을 헤아릴까 두려워 늘 하나님을 피해 다니며, 하나님을 봐도 낯선 사람 보듯이 한다. 그 결과 몇 년을 믿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전혀 없으니, 불신파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전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초래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실제의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며, 하나님에게 발탁되어 지위를 얻은 후 교회에서 기세를 부리고 싶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진실한 말을 하지 않으며, 늘 하나님의 안색을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했는데, 그들은 어째서 또 하나님을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냐?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냐? 왜 늘 명예와 이익, 지위, 이득 등을 추구하려는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꿍꿍이를 품고 있어 다른 사람이 그 속을 알 수 없다. 이는 모두 불신파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엄격한 의미에서 이들은 모두 불신파이다.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자 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자 하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지금 너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한 해 한 해가 모두 가치가 있는데, 이런 가치는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사람이 창조주 앞에 나아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여 창조주로부터 진리를 얻으면, 하나님이 보기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자신의 미약한 힘을 다하는 것은 네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가치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네가 매일 살아가는 가치이며, 소중한 것이다! 네가 하루하루를 모두 이렇게 가치 있게 산다면, 네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약간의 고통과 질병을 겪은들 그게 대수겠느냐? 사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얻었으니, 원망하면 안 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은 생각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은혜, 축복, 보호를 누리고 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얻었는데, 소소한 병고가 좀 있은들 그게 대수겠느냐? 그것은 바로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하는 공과 아니겠느냐? 병고를 겪으면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얻는 것 아니겠느냐? 세상에서 되는대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 중에 병고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들이 병고가 있다고 누가 상관이나 하느냐?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그들에게 보장을 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너희 같은 사람은 보장을 받느냐? (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라면, 모두 보장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너희가 목격하고 인식한 보장은 무엇이냐? (더 이상 세상의 사악한 흐름에 영향받거나 해를 입지 않고, 이방인의 괴롭힘과 해침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있어, 앞으로도 큰 붉은 용의 체포와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살며 형제자매와 함께 지내니 마음이 평안하고, 즐겁고, 안정되며,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교제하니 마음이 나날이 밝아집니다. 특히 진리를 깨달은 후, 마음이 매우 즐겁고 영적으로 해방과 자유를 얻어 더 이상 악인과 간사한 사람의 기만과 해침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보았기 때문에 재난이 닥쳐도 두렵지 않고 마음이 평안하고 평온합니다. 앞으로의 의식주와 노후 문제 등 이런 고민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제한적으로 느끼지만, 대재난 이후에는 많은 일을 이해하고 간파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다. 지금 너희가 이따금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체험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심판 형벌도 체험해야 하고, 또 하나님 말씀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이는 구원받고 온전케 되기 위해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고통으로, 이방인의 고통과는 다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너라는 피조물이 쓸모가 있게 되고, 삶의 가치와 의미가 생겨, 육체와 사탄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살게 된다는 점이다. 본분 이행 기간 네가 많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 이것이 가장 귀중하다. 네가 진리를 깨닫고, 또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얻어 생명이 되게 하면, 너는 하나님 앞에, 빛 속에 살게 된다. 지금 네가 매일 본분을 이행하고 있으니,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모두 수확이 있으며 가치가 있다. 네가 또 진리를 얻고 하나님 앞에 살고 있으니, 이는 보장을 받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보장은 무엇이냐? (사탄에게 사로잡히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탄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라는 사람을 만들었는데, 네가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리 실제가 있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어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게 되면, 너는 보장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너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살아가는 밑천 아니겠느냐? 만약 너에게 이런 것들이 없다면, 네가 그래도 살아갈 자격이 있겠느냐?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의 이런 자격은 어떻게 얻는 것이냐?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고, 또 진리 실제를 얻고 하나님 말씀을 생명이 되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네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 눈에 네가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면, 하나님이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멸망시키려 하느냐? 어떤 부류의 피조물이냐?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며, 모두 하나님을 적대하는 하나님의 원수이니, 이런 자들을 모두 우선적으로 멸망시켜야 한다.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는 적그리스도와 불신파, 그 밖에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 진리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자, 그리고 피조물의 본분을 전혀 이행하지 못하는 자,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멸망시킨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불신파이고,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기는 하지만 시종일관 건성으로 대충 할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해 교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대항한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런 자가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라고 할 수 없다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하나님에 의해 도태되고 멸망됩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라고 할 수 없다면, 삶의 가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어쩌면 그 자신은 ‘난 삶의 가치가 있고, 살고 싶어. 내가 살면 좋은 일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이 사람은 피조물의 최소한의 본분도 이행하지 못한다.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없다면, 그는 삶의 가치가 없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존재 가치가 없는데, 하나님이 여전히 그를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를 도태시킨다. 심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선 한쪽에 방치하고 더러운 귀신 악령에게 넘기지만, 심할 경우에는 징벌하며, 더 심각할 경우에는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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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으려고 한다. 문제에 부딪히면 어렵다고 앓는 소리를 하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태도이냐? 이것이 바로 건성으로 대충 하는 태도이다. 본분을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며 경시하는 태도로 본분을 대한다면, 결과가 어떻겠느냐? 네가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본분도 잘 이행하지 못해 합격하지 못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너의 태도에 매우 못마땅해할 것이다. 원래는 네가 만약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여 성심성의껏 할 수 있다면, 네가 이렇게 협력할 수 있다면, 네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성사되어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하나님이 앞에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놓는다. 네가 최선을 다해 협력할 때, 하나님은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해 놓는다. 만약 네가 잔꾀를 부리며 불성실하게 본분을 이행하고, 그릇된 길로만 간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하지 않아 너는 기회를 잃게 된다.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은 안 되겠다. 쓸 수가 없구나. 옆으로 비켜라! 너는 몸을 사리고 농간 부리기를 좋아하지 않느냐? 게으름 피우고 편안함을 탐하지 않느냐? 그러니 영원히 편안히 있어라!”라고 말하며, 그 은혜와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남겨 줄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는 손해를 본 것이냐, 아니면 이익을 본 것이냐? (손해를 본 것입니다.) 손해가 너무나 막심하다!
하나님은 다양한 환경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케 하고, 또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온전케 하며, 사람이 다양한 환경이나 시련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여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진실로 인식하게 하며, 최종적으로 진리를 얻게 한다. 네가 만약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다면, 너의 생명 성품이 변화할 것이고, 진리와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너희가 몇 년 동안 체험하면서 얻은 것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통을 좀 겪고 대가를 좀 치른 것이 가치 있지 않으냐? 대신 너는 무엇을 얻었느냐? 너는 많은 진리를 깨달았다. 이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이다! 사람은 무엇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느냐? 바로 진리와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 네가 이런 환경을 겪지 않고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절대 안 된다. 특별한 어려움과 환경에 부딪혔을 때 네가 회피하거나 도망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즉 온 힘을 다해 거부하고 벗어나려고 하며,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하려 하지 않고 진리가 주도권을 잡게 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또 늘 혼자 결정하려 하고, 사탄 성품으로 네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이 분명 너를 한쪽에 치워 두거나 사탄에게 넘길 것이다. 이는 시간문제이다. 사람이 이 일에 관해 똑똑히 알았다면 한시바삐 뉘우치고, 하나님이 요구한 올바른 길을 따라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면 그 길은 올바른 것이다. 길이 올바르면 방향도 올바르다. 어쩌면 그 기간에 굴곡과 어려움이 있어 일이 뜻대로 안 될 수도 있거나, 때로는 마음이 상해 며칠 소극적일 수도 있다. 오로지 본분 이행을 견지하고 일을 지체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은 다 별것 아니다. 하지만 제때에 자신을 반성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지, 절대로 본분을 질질 끌거나, 내팽개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네가 ‘소극적이고 나약한 것은 별것 아니야. 이건 내면의 일이라 하나님께서는 모르셔.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전에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을 봐서라도 틀림없이 관용을 베풀어 주실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약하고 소극적으로 굴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서 진리를 구해 공과를 배우지 않는다면, 너는 계속해서 기회를 잃게 된다. 결국,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려는 기회를 네가 다 놓치고, 파괴하고, 망치게 되니,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너의 마음이 점점 어두워져 기도해도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일정 수준 이상 소극적이 되어 마음속으로 온통 악과 배반만 생각한다면, 너는 극도의 고통에 빠져 온몸이 무력하고 굉장히 괴로울 것이다. 또한, 어떠한 길도 없고, 어떠한 방향도 없으며, 빛도 볼 수 없고 희망도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게 힘들지 않겠느냐? (힘듭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빛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영원히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죄악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살게 되니 희망이 없다. 내가 하는 이런 말이 무슨 뜻인지 너희는 알아들을 수 있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성심성의껏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분이 주어졌을 때, 그 일을 너에게 맡겼을 때, 어려움을 회피하려고 고민하지 말고 처리하기 힘들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 너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니 사람이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너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너는 하나님이 만물의 주재자임을 믿으면서, 왜 일이 닥치면 여전히 두려워하고 버팀목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너의 버팀목으로, 너의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다. 현실 생활 속에서 어떤 일이 닥치든, 너는 수시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설령 매일 한 가지 일에서 진리를 깨닫고 수확을 얻는다 할지라도 헛되지 않다! 지금 너희는 하루에 얼마나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느냐? 하루에 몇 번이나 하나님 앞으로 나오느냐? 성과가 있느냐? 만약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시간이 너무 적으면, 영적으로 메마르고 어두워진다. 사람은 모두 평안하고 별일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떠나고 무시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그제야 하나님을 찾는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이냐? 이는 모두 불신파의 모습이며,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도, 실천하지도 않으며, 언제나 사탄의 패괴 성품과 사탄의 각종 그물 안에 살면서 자신의 앞날과 체면, 지위 등 각종 이익만 생각하고, 이를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네가 만약 그런 자세로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구하고 추구한다면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너는 자신의 극히 소소한 이익을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또한, 주도면밀하고 세심하게 생각하고 완벽할 정도로 계획을 세우느라 마음을 많이 쓰고 공도 많이 들인다. 만약 네가 이런 의욕을 본분 이행에 쓴다면,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쓴다면, 하나님이 너를 어떤 태도로 대할지 보아라. 완전히 다른 태도로 대할 것이다. 사람은 늘 “그 사람한테는 잘해 주시면서 왜 저한테는 잘해 주시지 않나요? 왜 늘 저에게는 깨우침을 주시지 않나요? 왜 저는 늘 나약한가요? 왜 저는 그 사람만 못한가요?”라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어째서 이러는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데,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않고 일이 닥쳐도 늘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깨우쳐 주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네가 하나님에게 기도해 간구한다면, 하나님이 베풀어 줄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기를 기다리느냐? 파렴치한 사람들처럼 돈, 편안함, 명예와 이익, 즐거움을 요구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하나님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한 사람들은 모두 파렴치한 사람이며, 가장 미천한 사람이니,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죄 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에게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너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사탄에 의해 너무 깊이 패괴되어 늘 패괴 성품으로 살아갑니다. 명예와 지위 같은 각종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진리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니,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본분을 이행하고 싶지만 제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 분량이 너무 작고 업무 지식이 부족해서 제대로 못 할까 봐 걱정됩니다. 저를 인도하고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네가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구할 때,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주고 빛 비춰 주면, 너는 길이 생겨 어떻게 본분을 이행할지 알게 된다. 네가 늘 진리에 공을 들이고, 자신의 진실한 내적 상태를 털어놓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인도와 은총을 구하면, 점차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게 된다. 이러면 네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되며, 정상 인성과 진리 실제를 갖게 된다.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항상 자신의 여러 방면의 이익을 위해 계산하고, 궁리하며, 마음을 쓰고, 공을 들이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며 모든 대가를 치른다면, 너는 사람의 존중을 얻고 여러 방면에서 이익과 체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얻은 이런 것들과 진리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더 중요하냐? (진리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은 모두 이런 이치를 이해하고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이익과 지위만 중시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정녕 이해한 것이냐, 아니면 가짜로 이해한 것이냐? (가짜로 이해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어리석어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언제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면 사람은 분량이 좀 생긴 것이다. 이러려면 진리를 추구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여야지, 흐리멍덩하게 굴거나 대충 넘어가선 안 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다가 일단 어느 날 하나님이 “하나님은 말씀을 다 했다. 더는 이 인류에게 말하지 않고 무슨 일도 하고 싶지 않다. 이젠 사람의 일을 점검할 때가 되었다.”라고 한다면, 너는 분명 도태될 대상이 될 것이다. 너에게 아무리 큰 뒷배가 있어도 소용없고, 아무리 많은 은사와 재능이 있어도 소용없으며, 학력이 아무리 높아도, 명성이 아무리 높아도 소용없다. 네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소용없다. 그때가 되어서야 너는 진리의 소중함과 중요함을 알게 될 것이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가련하고 슬픈지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이 정도의 느낌으로는 아직 사람의 진리 추구 의지를 자극해 낼 수 없다. 사람은 아직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진리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단지 약간 의식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진실하게 이 일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이 일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되면, 너는 어느 측면의 진리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알게 된다. 진리만이 사람의 다양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각종 치우친 사상과 편협한 관점 혹은 타락한 성품, 그리고 각 측면의 패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너희가 주저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해 끊임없이 진리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다 사람의 방법과 자제력에만 의지한다면, 이런 어려움과 패괴 성품을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을게요. 매일 몇 시간씩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확실히 성품이 변화할 수 있나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네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는지, 진리를 깨닫고 실행해 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그저 형식적으로만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면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얻지 못하면 생명 성품 또한 분명 변화하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 성품이 변화하려면 반드시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해야지, 하나님 말씀을 읽기만 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 바리새인처럼 전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고 어떻게 실행하는지 말해 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잘못된 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여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진리 추구의 정확한 인생길에 들어서게 하는데, 이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따를 때 반드시 본분 이행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온전케 될 수 있다.
발췌문 35
지금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닥친다면, 너의 본분 이행이 영향을 받겠느냐? 예를 들어 보자. 때로 일이 바쁘면 고생을 좀 하고 대가를 좀 치러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관념과 반발심이 생겨 소극적인 태도로 사역을 게을리할 수 있다. 또 때로 일이 바쁘지 않아 본분 이행이 좀 수월하면, 어떤 사람은 기뻐하며 ‘본분 이행이 늘 이렇게 수월하면 좋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나태하고, 육적인 안락함을 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충성심을 갖고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도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다고 말은 한다. 하지만 그의 순종에는 조건이 있다. 반드시 그의 관념에 부합해야 하고, 또 고통을 겪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야만 순종할 수 있다. 만약 환난이 닥쳐 고통을 받게 된다면, 그는 몹시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것이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이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한 일이 그의 관념과 바람에 부합하고, 자신이 고통을 받거나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을 때에는 순종할 수 있지만, 만약 하나님의 사역이 그의 관념과 기호에 부합하지 않고, 자신이 고통을 받고 대가를 치러야 하면 순종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반대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반발하고 기분 나빠하며, 자신이 매우 큰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해 속으로 원망한다. 이는 무슨 문제이냐? 이는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기도하고, 맹세하고, 다짐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우선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깨닫고, 진실한 순종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또한, 거역과 대적이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자신의 어떤 패괴 성품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지 반성하여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육, 특히 육의 기호를 저버릴 수 있다. 그런 다음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면, 패괴와 거역을 해결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상태를 분별할 줄 모르고,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너는 육을 저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육의 기호조차 저버리지 못한다면 충성심을 가지고 본분을 이행하기 어려운데, 이런 자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사람이 충성심이 없는데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분명히 도달하지 못한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최소한 진리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육의 기호를 저버리지 못하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없다. 늘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설령 어쩌다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조건적인 순종으로, 너의 관념에 부합하고 네 기분이 좋을 때에만 순종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한 일이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너에게 안배해 준 본분과 마련해 준 환경으로 인해 네가 많은 고통을 받거나 아주 난감해지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그때에도 네가 순종할 수 있겠느냐? 순종하기 어렵다. 너에게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이유가 많을 것이다. 설령 나중에 자신을 반성한다 하더라도 육을 저버리기 어렵다. 육을 저버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육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 당연히 진리를 구해야 하고, 자신의 패괴 본질과 패괴 추태를 인식해야 한다. 자신을 증오하게 되고 육의 기호와 본질을 증오하게 되면, 육을 저버리려고 하게 된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육적인 것들을 증오하지 못하게 되고, 증오하지 못하게 되면 저버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해야만 실행 가능한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가 없으면 힘도 없어서 진리를 실행하고 싶어도 실행해 내지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기도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면 절대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단지 육적인 안락함만을 탐하며, 진리를 얻기 위한 고통을 겪지 않으려 한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겪으면 바로 불만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당신의 신분과 본질은 너무나 고귀하여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께 순종하기를 원하오니 저를 인도해 주시고 빛 비춤과 깨우침을 주십시오. 제가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저의 마음을 감찰해 주시고, 징벌과 심판을 내려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치고는 뿌듯해한다. 이는 빈말이 아니냐? 기도할 때 늘 빈말만 하고 글귀와 도리를 외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빈말로 기도하는 것은 어떤 성질의 문제이냐? 기만하는 성질이 있지 않으냐?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유용하겠느냐? 그는 나태하고, 고생하기 싫어하며, 육적인 안락함을 탐한다. 진리임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본분인 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로 속이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종교 의식의 기도를 가장 혐오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반드시 진심으로 기도해야 열납될 수 있다.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마라. 또한, 늘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멋대로 맹세하며 자신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심을 다하고 싶다는 말로 하나님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너의 소망은 네가 달하지도 못하고, 또한 그럴 만한 의지도 없고 분량도 안 된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기도하지 마라. 그것은 조롱이다. 조롱이란 무슨 의미이냐? 비웃고 우롱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람이 만일 그런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가볍게 말하면 기만하는 것이고, 심각하게 말하면 네가 늘 그렇게 할 경우 너라는 사람의 인품은 너무나 비천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정죄한다면 그것을 모독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만족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거나 패괴 성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와서 이방인들이 사람을 속이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뿐만 아니라 ‘정중하게’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런 말로 하나님을 속이고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고 자신이 한 일의 심각성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함께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함께함이 없다. 하나님의 함께함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에서 빛을 얻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이러면 문제가 된다. 너희는 이런 기도를 많이 하느냐? 자주 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오래 살다 보면 거기에 물들어 매우 세상적이고 불량기가 가득해지고 사탄의 독소와 철학이 사람에게 깊이 침투된다. 그래서 입만 열면 위선적이고 기만하는 말을 하고, 기도할 때도 늘 빈말과 도리만 말할 뿐 마음속 말과 실제 어려움은 말하지 않는다. 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지만, 진리를 구하는 마음은 별로 없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전부 기만과 위장이다. 패괴 성품이 지나치게 심각해서 그야말로 산 귀신이 되었다. 하나님 앞으로 나와 기도할 때도 말 같은 말과 마음속 말을 할 줄 모르며, 오히려 사탄의 기만과 위장을 모두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기도를 들어주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싫어하며 절대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도는 전부 하나님을 기만하고 속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아 마음속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근원을 따져 보면, 이는 사람의 본성으로 초래된 것이지 일시적인 패괴 표출이 아니다. 그는 ‘어차피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지도 모르니 그냥 아무렇게나 하나님께 몇 마디 하지 뭐. 하나님께서 들으시는지 안 들으시는지도 모르는데 뭐.’라고 생각한다. 그가 의심하고 시험하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니 기도를 마치고 나면 어떤 느낌을 받겠느냐? 여전히 공허하지 않겠느냐? 아무런 느낌도 없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기도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며, 마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에게 마음속 말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은밀히 듣고 있는 것이다. 매번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마치 하나님을 만난 것 같아 믿음이 증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 밀접해지고 가까워져 마음이 충실해지고 굉장히 편안해진다. 이것이 바로 기도 후의 진실한 느낌이다. 종교식 기도는 형식적이어서 매일매일 같은 말 몇 마디만 반복하다 보니 자신조차도 말하기 싫을 정도이고, 기도해도 아무런 느낌도 없으며 성과도 전혀 없다. 이런 사람이 진실한 믿음을 지닐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이 없다. 늘 건성으로 대충 하거나 이행하는 본분이 너무 고되고 힘들다고 느껴지면 순종하기 싫어하고, 늘 도망가고 싶어 하며, 늘 거절하고 싶어 하고, 늘 수월하고 비바람 맞지 않으며 안전하고 육이 편안할 수 있는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나태하고, 육적 편안함을 탐하고, 고통을 겪지 못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알면 비웃을까 봐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실한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또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해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어떤 일을 제대로 못 했을 때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저는 인성이 없어요. 본분을 이행할 충성심이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일 때, 어떻게 기도해야 이성적인 기도이겠느냐? 예수는 마음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네 마음이 정직해야 한다. 꾸미거나 겉과 속이 다르게 굴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미며 글을 짓는 것처럼 듣기 좋은 말과 허울 좋은 말을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 결과, 하나님은 네가 마음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아니며, 마음이 정직하지 않고 지나치게 음험하고 사악하며,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는 너를 버린다. 그렇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늘 부딪히는 이런 일들과 늘 접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에게 마음속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하나님, 지금 이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힘들어요. 저는 육적인 편안함을 탐하고, 나태하며, 편한 것만 좋아하고 일하기는 싫어해요.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본분에 저의 충성심을 바칠 수 없고, 힘을 다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늘 도망치고 싶고, 거절하고 싶고, 건성으로 대충 하고 싶어요. 저를 징계해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진실한 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이렇게 말할 용기가 있느냐? 말을 하고 난 후에는 또 혹시나 언젠가 하나님이 정말로 징계하면 어쩌나 싶어 두려워하고 마음을 졸이며 늘 새가슴으로 살아간다.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은 늘 고생을 덜 하고 싶어 하며, 육적 편안함을 탐한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고 애를 좀 써야 하거나 다소 힘이 들면 바로 뒤로 물러나고 싶어 하며, 늘 이것저것 가린다. 또한, 약간의 고통만 받아도 늘 ‘하나님께서 아실까? 기억하실까? 내가 이렇게 큰 고통을 받는데 나중에 무슨 상이라도 있을까?’라고 궁리하며, 늘 결과를 바란다. 이런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예전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을 전하라고 시킨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고하러 왔을 때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는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다루기 어려웠는지, 자신이 또 그 사람에게 듣기 좋은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등등 한바탕 자신의 공로를 먼저 말했다. 결국에 일을 성사시키자 그는 늘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저를 칭찬해 주셔야 해요. 나중에 어떤 상을 얻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고 약속해 주셔야 해요.” 이는 대놓고 상을 달라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게 칭찬할 만한 일이냐? 본분을 좀 이행했다고 늘 칭찬을 바란다면, 이는 어떤 성품이냐? 사탄 본성 아니겠느냐? 이 정도의 일로도 칭찬과 상을 바라는데, 만약 큰일이나 큰 사역을 한다면 엄청나지 않겠느냐? 만약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얻지 못한다면, 반기를 들지 않겠느냐? 셋째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에게 따지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슨 길을 걷고 있는 것이냐? (적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바울과 같은 적그리스도의 길이다. 바울은 늘 하나님에게 상과 지위를 요구했다. 하나님이 상을 주지 않으면 소극적인 태도로 사역을 게을리하고, 주를 대적하고 배반하려 했다. 말해 보아라. 본분을 이행하느라 고통을 좀 받는다고 해서 상을 요구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악인입니다.) 인성이 너무나도 악하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없겠느냐? 모든 사람은 다 이런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본성 본질은 모두 똑같다. 단지 그렇게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은 이성적이므로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런 내적 상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어느 측면의 진리로 이 내적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핵심은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지위에 서야 하는지, 어떤 길을 추구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당연히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것이다. 사람이 이런 것조차 모른다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것은 말할 수도 없다.
특별한 본분이나 고통스럽고 힘든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은 한편으로는 이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 어떤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굳게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가짐에 어떤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본분 이행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고통을 받기 싫어한다. 고통을 받을수록 힘이 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육은 고통을 받으면 우울하고 괴로워지는 것이 본성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가 이런 본분을 이행하면서 받는 고통이 뭐 얼마나 되느냐? 그저 육이 좀 힘들고 고생할 뿐이다. 만약 네가 이 정도의 고통도 견딜 수 없다면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는 아무도 너를 감독하지 않으니 전부 네가 자발적으로 해야 하며, 하나님 집에 사역지침과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은 믿음, 양심, 이성에 따라야 한다. 네가 행한 것이 좋은지, 아니면 안 좋은지는 하나님만이 감찰한다. 만약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사람과 일, 사물 속에서 자신이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전혀 지각하지 못하고 가책을 받지 않는다면, 이는 좋은 일이냐, 아니면 나쁜 일이냐? (나쁜 일입니다.) 왜 나쁜 일이라고 하느냐?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최저 기준이 있다. 만약 양심조차 지각이 없어서 네가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너를 단속하거나 너의 행위를 단속하지 못한다면, 네가 행정 법령과 원칙을 거스르는 일을 하고 인성이 없으며 마음속으로 가책도 받지 않는다면, 이는 도덕적 최저선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양심 지각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일을 잘못했을 때, 또는 원칙을 어겼을 때, 또는 오랜 시간 동안 충성심 없이 본분을 이행했을 때, 너희는 이를 지각하느냐? (지각합니다.) 그렇다면 너의 양심이 네가 양심과 이성에 따라 일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하도록 단속할 수 있느냐?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양심에 따른 일 처리에서 진리 원칙에 따른 일 처리로 발전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있다면 너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통을 받는 것,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 측면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 이 또한 간단하지 않다. 분명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가 그의 내면에 작용한 것이다. 그가 선천적으로 고통과 힘듦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이 동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가 그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본분이 닥쳤을 때 그의 관점과 입장이 바뀌어 본분을 수월하게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육이 고통을 좀 받고 좀 힘든 것은 별것 아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관념, 사욕, 개인의 기호에 따라 살아가며, 본분을 이행하더라도 기꺼이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똑같이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고, 교회의 안배대로 본분을 이행합니다. 그것이 더러운 일이든 힘든 일이든, 영예로운 일이든 보잘것없는 일이든, 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모두 본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부탁하신 일이니 좀 더럽고 힘들어도 제가 받아야 하는 고통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사역할 때 그다지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은 더럽고 힘들다고 느껴도 그는 수월하다고 느낀다. 이는 그의 마음이 편안하고, 하나님을 위해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더럽고 힘든 일 또는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하면, 자신의 신분과 인격에 대한 모욕이자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괴롭히고 얕잡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사역, 같은 업무량인데도 그는 매우 힘겹게 일한다. 무엇을 하든 그의 마음속은 원망으로 가득하며, 무엇을 하든 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하든 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의 내면은 소극적인 것과 반발심으로 가득 찬다. 그가 소극적이고 반발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 근원은 무엇이냐? 대부분은 본분 이행이 월급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상을 준다면 그것도 괜찮은데, 상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본분을 이행할 가치가 없으며 공짜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할 때 항상 소극적이고 반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한다. 그렇다면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데 그들은 어째서 굳이 본분을 이행하러 오는 것이냐? 그건 바로 자신이 자신에게 강요한 것으로, 복을 얻기 위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무력한 모습이다.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다. “그럼 그들 마음속의 소극적인 것과 반발심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교제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들이 불신파인 것이 드러난다. 그들은 거래하려 하고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이 그들에게 상을 약속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는 보증서를 써 준다면, 그들은 분명 의욕에 차서 본분을 이행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약속은 공개적인 것이라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얻을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얻을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막막한 느낌이 들고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는 공수표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믿지 못하고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 그들은 현실의 것을 원한다. 만약 그들에게 월급을 준다면 그들은 분명 의욕이 넘칠 것이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이 없는 그런 사람들도 반드시 의욕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건달기가 너무 심해 세상에서 일한다고 해도 제대로 일할 리가 없고, 또 몸을 사리고 농간을 부리기 때문에 분명 또 해고될 것이다. 이는 순전히 본성의 문제이다. 그러니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제명하고 도태시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들의 핑계와 이유가 모두 말이 안 되는 것들이니 그들의 인품이 대체 어떨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대부분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본분이란 무엇인가, 본분은 어떻게 생기고 누가 주는 것인가에 대해 너희는 분명히 알고 있느냐? (본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부탁입니다.) 맞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안배한 일,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준 준행해야 하는 도, 하나님이 너에게 한 부탁,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너의 본분이다. 너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하나님 집의 안배를 듣고 이해했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면, 너는 하나님 집의 일원이 되고, 복음을 확장하는 일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하나님 사역을 확장하는 일원으로 삼으면, 네가 이행할 본분이 생긴다. 네가 해낼 수 있는 것과 닿을 수 있는 것이 모두 너의 책임이자 본분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부탁이자 남에게 미룰 수 없는 너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책임이자 부탁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 ‘내 본분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일이니 바로 내 의무이자 책임이야. 그러니 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해. 내게 주어진 일은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니 사양하거나 거부해서도, 고르거나 선택해서도 안 돼. 선택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서는 안 되는 거야. 이건 피조물이 갖추어야 할 이성이야.’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이것저것 고르고, 늘 쉬운 일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려 하면서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분량이 너무 작고 정상인의 이성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만약 젊은이라면, 집에서 오냐오냐 받들어 키워 고생해 본 적이 없으니 조금 멋대로여도 용서할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점차 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30~40대 성년이 여전히 그런 꼴이라면, 그것은 나태함의 문제이다. 나태함은 선천적인 병으로,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본성의 문제이다. 반드시 특별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강요를 당해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약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마치 일부 거지들이 사람들의 경멸과 차별을 받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게을러 일하기 싫으니 체면 따지지 않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거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면 조만간 도태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는 것, 이는 가장 큰 과오이다. 만약 네가 본분 이행을 거절하거나 늘 고통과 힘듦을 꺼린다면, 너는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너는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으니 떠나도 된다. 어느 날,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창조주가 너에게 한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자라는 것을 네가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하며, 이것이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면, 너는 착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것이다. 본분에 패역과 소극적인 것이 있다면, 즉 하나님에게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본분을 기꺼이 제대로 이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최소한의 태도이다. 그렇다면 본분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본분은 하나님에게서 오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책임입니다.) 본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책임이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본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없다고 하는 것이냐? (그들은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맞다. 이방인은 단지 육적 생활을 위해 분주할 뿐이고, 그들이 한 것은 본분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고 사탄에게 속한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이 언제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며, 성장한 후에는 어떤 일을 하고, 언제 죽는지와 같은 일생의 운명을 안배할 뿐,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구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 작게 보면, 하나님 집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사람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다. 크게 보면, 하나님의 전체 경륜에서 모든 피조물이 이행하는 본분은 전부 다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네가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것이든 아니든, 이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상, 사람이 만약 정말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거두어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면, 그제야 하나님의 백성이자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너에게 준 모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합격한다면, 너는 하나님 집의 일원이자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된다.
발췌문 36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진정으로 즐겁네> 이 찬양의 가사가 매우 실제적이니, 몇 구절 골라 교제해 보겠다. 우선 “육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키네.”라는 구절을 교제해 보자. 이는 어떤 내적 상태이냐? 사람이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어떠하냐? 양심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피조물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 보답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다. 즉, 본분을 이행할 때 진지하게 책임감을 가지며, 건성으로 대충 하거나 꾀부리거나 책임을 미루지 않고, 또한 태도가 단정하며, 정상적인 내적 상태와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고, 양심적이고 이성적이며, 하나님을 배려하고, 본분에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육을 걱정하지 않고”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여기에도 여러 내적 상태가 있다. 크게는 자신의 육적 장래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나중에 늙으면 어떻게 될지, 부양해 줄 사람이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범사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제대로 된 본분 이행을 최우선 순위에 놓는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하나님의 부탁을 지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면, 조금은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다. 최소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충성심이 있고, 마음과 뜻을 다해야 한다. 무엇을 가리켜 ‘본분을 지킨다’고 하겠느냐?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도망치거나 본분을 내팽개치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을 가리켜 ‘본분을 지킨다’고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일을 맡았는데 지켜보는 사람도 독촉하는 사람도 없다고 해 보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본분을 지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는 것은 첫걸음이자 한 측면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마음과 뜻도 다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과 뜻을 다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어떤 요구를 하든 전부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본분을 자신의 일로 여겨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단속하고 지켜보고 점검하고 독촉하고 감독하지 않아도, 나아가 책망과 훈계가 없어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본분을 이행하는 건 내 책임이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야. 이 일이 내게 주어졌잖아. 또 나는 원칙을 들었고 그 원칙에 관해 파악도 했어. 그러니 한결같이 열심히 해야 해. 최선을 다해 이 일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고.’ 계속 그렇게 하면서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킨다는 것이며,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모습이다. 그럼 사람이 무엇을 갖춰야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겠느냐? 먼저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양심이 있어야 한다. 이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 밖에,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면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일편단심으로 충성해야지, 딴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책임을 지지 않거나 자신의 취미나 기분에 따라 일을 처리해서도 안 된다. 이는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하는 것이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기분, 환경, 사람, 일, 사물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부탁을 받아들이겠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거야.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까 이걸 내 일로 간주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어떤 식으로든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할 거야.’ 네게 이러한 내적 상태가 있으면 양심의 지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충성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효율과 효과를 따지지 않고 일을 끝내는 것에 만족하면서 그저 힘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양심의 기준에 지나지 않으며 충성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요구 기준은 양심의 기준보다 약간 높다. 이것은 단지 힘을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 다해야 한다. 항상 본분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이 일에 대해 부담을 가지며,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거나 조금이라도 대충대충 하려는 내적 상태가 있으면 가책을 받고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 하나님께 정말 죄스러워.’라고 생각해야 한다. 진정으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누가 감독하든 안 하든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여겨 본분을 이행한다. 하나님이 그에 대해 기뻐하든 그렇지 않든,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는 항상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이 바로 충성심이다. 이는 양심의 기준보다 높지 않으냐? 양심의 기준은 많은 경우 외부적인 일의 영향을 받거나 혹은 그저 힘을 다하면 그만인 것이라 순결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충성심을 얘기하자면, 충성스럽게 본분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순결도가 높은 것으로, 이는 그저 힘만 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고 너의 몸과 마음을 모두 본분에 쏟아야 하는 것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때로는 육적으로 고통을 좀 겪어야 한다. 대가를 좀 치러야 하며, 본분 이행에 모든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거나 본분 이행을 지체시키지 않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면, 대가를 치를 수 있어야 한다. 육적 가정, 개인사, 개인의 이익을 모두 버려야 하고, 자신의 허영심, 감정, 육적 즐거움, 심지어 청춘, 결혼, 장래, 운명 등등 이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버려야 하며, 기꺼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러면 충성심이 있는 것이고, 이렇게 살면 사람다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양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양심의 기준에 더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충성심으로 자신을 가늠하고 자신에게 요구하며 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추구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나님 선민 중에서도 어쩌면 천 명, 또는 만 명 중에 한 명 겨우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가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 아니겠느냐? 당연히 삶이 가치 있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다음 가사를 보자. “자질은 형편없어도 내 마음은 정직하네.”, 이 말은 듣기에 참 현실적이고 여기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들어 있다. 어떤 요구이냐? 바로 자질이 부족해도 괜찮지만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역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너는 어떤 상황, 어떤 배경에서도 반드시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정직한 말을 하며, 정직하게 일을 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마음과 뜻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며, 꾀를 부리지 말고,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거짓말하거나 기만하지 말아야 하며,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에 근거해 일을 해야 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질이 너무 부족해 아무리 해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늘 합격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마음과 힘을 다해서 일을 하지만 늘 원칙을 파악하지 못해 성과가 여전히 별로 좋지 않다 보니, 결국에는 자신의 자질이 부족함을 원망하게 되고 소극적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자질이 부족하면 길이 없는 것이냐? 자질이 부족한 것은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예전에 하나님은 정직하지만 우매한 사람들 때문에 슬퍼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우매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많은 경우 우매함은 자질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리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깊이 깨닫지 못하고, 늘 겉으로 보이는 글귀, 도리, 규례만을 이해하는 데 그친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을 꿰뚫어 보지 못하며,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원칙을 파악하지 못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원하지 않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길과 방향은 무엇이냐?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입으로 말만 하면 정직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정직한 사람의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정직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다. 둘째, 정직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모든 일에서 진리를 구하고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네가 스스로 무척 정직하다고 말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겠느냐? 네가 “저는 자질이 부족해도 마음은 정직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본분이 임했을 때, 고생할까 두려워하고 잘 이행하지 못하면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려워 핑계를 대며 거부하거나 다른 이가 이행하도록 제안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겠느냐? 그것은 분명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며,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에 충성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측면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정직한 마음으로 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육적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딴마음을 품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직한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 너의 마음과 사랑을 전부 본분에 사용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직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며 보여 줘야 하는 모습이다. 만약 네가 깨닫고 알게 된 것을 행하지 않고, 50~60%의 힘만 쓴다면 이는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사리는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며 몸을 사리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을 쓰지 않으며, 반드시 도태시킨다. 하나님은 오직 정직한 사람에게만 본분을 이행하게 한다.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라 해도 반드시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 언제나 건성으로 임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은 전부 간사한 사람이자 마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 도태될 대상이다. 혹자는 ‘정직한 사람으로 살려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돼. 사실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건 쉬워.’라고 생각하는데, 이 주장이 어떠하냐?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좁은 범주의 일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너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정직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이 더없이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 마음은 네 행위를 지배하고 네 내적 상태를 바꿔 놓으며,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게 한다. 이 마음은 더없이 귀하다. 네가 그렇게 정직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러한 내적 상태로 살 것이고, 그러한 행위와 노력이 있을 것이다. 이 가사들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모든 구절이 다 문자적 의미처럼 단순하지 않으니, 곰곰이 생각해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수확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가사를 살펴보자. “매사에 충성을 다해 하나님 마음을 흡족게 하리.”라는 이 말에는 실행의 길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어려움이 닥치면 소극적이 되어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런 사람은 문제가 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왜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이 소극적으로 변하는지, 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지를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을 반성하고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사람의 최대 어려움은 주로 패괴 성품의 문제이지만,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패괴 성품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만 하면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매사’는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일이든 리더 일꾼이 너에게 배치한 일이든, 아니면 갑자기 너에게 닥친 일이든, 그것이 네가 해야 하고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면 충성을 다해 네가 맡은 책임과 본분을 다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듣기에 이 원칙은 약간 거창해 사람이 이르기에 다소 어려운 듯하다. 좀 더 현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바로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본분을 지키고 제대로 이행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리더 일꾼을 하든 아니면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모두 어느 정도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는데,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되겠느냐? 진리 원칙을 지키지 못해도 되겠느냐? 만약 각 측면의 진리를 네가 다 깨닫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자 본분을 지키는 것이며,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이렇게 하기 쉬우냐, 어려우냐? 만약 이행하는 본분이 네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너는 이를 자신의 책임이자 의무이며 당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행복하고 즐겁고 편안해할 것이다. 이는 네가 원해서 하는 것이고, 네가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네가 싫어하는 본분이나 이행해 본 적 없는 본분을 맡게 된다면,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느냐? 이는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노래를 잘하는 너에게 찬양팀에서 이행하는 본분은 네가 좋아하는 일이자 기꺼이 이행하고자 하는 본분이다. 하지만 만약 너에게 난이도가 좀 있는 복음 전파라는 다른 본분을 맡긴다면, 순종할 수 있겠느냐? 너는 고민을 하다가 말한다. “저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바로 복음 전하러 가기 싫다는 뜻이다. 뻔히 그런 뜻인데도 너는 계속해서 “저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요.”라고 말한다. 리더 일꾼이 아무리 “복음 전파를 연습해 보세요. 진리로 많이 무장하면 당신의 생명 성장에도 더 유리합니다.”라고 권해도, 너는 여전히 계속 “저는 노래하는 걸 좋아해요.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요.”라고 말하며 아무리 얘기해도 복음 전하러 가기 싫어한다. 왜 싫어하는 것이냐? (흥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흥미가 없기 때문에 가기 싫어하는데,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이는 기호와 개인의 입맛대로 본분을 선택하는 것으로, 순종이 없는 것이다. 순종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만약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너는 진실한 순종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이 일의 경우, 진실하게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이때 이 측면의 진리를 묵상하고 교제해야 한다.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려면 한 가지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맡기는 모든 부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네 입맛에 맞거나 흥미를 갖는 것이든, 네가 싫어하는 것이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어려운 것이든, 너는 다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배우고 체험하고 진입도 해야 한다. 고생하고 수고스럽고 모욕을 당하며 고립된다 할지라도 충성을 다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할 수 있어야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너는 그것을 자신의 사업이 아닌 본분으로 여겨 이행해야 한다. 본분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행하라고 맡긴 일이다. 사람의 본분은 바로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 그것이 바로 너의 본분이다. 네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맡긴 부탁임을,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한 것임을 확실히 깨닫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본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모든 난관을 극복할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탁을 절대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본분도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떤 본분을 부탁하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거부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다. 다시 말해, 매사에서 진리를 실행하고 충성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점은 어디에 있겠느냐? ‘매사’라는 말에 있다. 이 ‘매사’는 네가 좋아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고, 네가 잘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으며, 더욱이 네게 익숙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서투를 것이고, 때로는 배워야 할 것이며, 때로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때로는 고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라면 너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어떤 일이 생기든 진리를 구해야 하고,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지 확신한다면 그렇게 실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가사에는 “마음에 거리낌이나 간사함 없이 빛 속에 살아가네.”라는 구절이 더 있다. 이 길은 누가 준 것이냐?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과 영을 하나님께 완전히 열어 놓았고, 숨길 것도, 피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또한,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털어놓았으니 이것은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의미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 간격이 있겠느냐?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 쉽게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를 가리켜 간사하다고 해도, 교만하고 독선적이라고 해도 그는 다 인정한다. 그는 인정하기만 하면 끝인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진리 원칙을 향해 노력하며,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치고,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시정할 수 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수많은 잘못된 행동 방식을 고치게 되고, 간사함, 기만, 대충 임하는 것 등이 점점 줄어들며, 살아갈수록 점점 더 광명정대해지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목표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면 빛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사람이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행한 일이므로 사람이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사람이 빛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며, 일이 닥칠 때마다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법을 알고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비록 의인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제법 어느 정도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다. 최소한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일이 닥치면 진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으니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게 된다. 비록 진리를 깊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말을 듣고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고, 악에서 떠날 수 있다. 그에게 맡긴 임무나 본분을 마음과 뜻을 다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신뢰할 만하며, 하나님도 마음을 놓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을 숨길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을 수 있겠느냐? 여전히 뒤에서 떳떳하지 못한 꼼수를 부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의 마음은 완벽하게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감추고 숨긴 게 없다. 그는 하나님에게 마음속 말을 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이든 다 하나님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조금도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기준에 도달하면, 사람의 삶이 수월해지고 자유로워지며 해방된다.
발췌문 37
본분 이행은 주로 어떤 원칙에 근거하느냐? 하나님 집의 기준, 원칙, 요구에 따라 해야 하며, 진리에 따라 실행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 수호를 원칙으로 마음과 힘을 다해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일은 보통 어떻게 하느냐? 마음 가는 대로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한다. 자신의 이익이 최우선이니,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일을 한다. 자신의 육적 사욕을 채우기 위해 정의, 양심과 이성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저 사탄 성품으로 사람의 기호에 따라 할 뿐인데, 늘 간계를 부리고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는 어떤 삶의 방식이냐? 바로 사탄의 삶의 방식이다.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이행할 때는 마땅히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고, 최소한 양심과 이성을 지녀야 하며, 마지노선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이 일을 대충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양심적인 행동이겠느냐? (아닙니다.) 대충 하고 싶을 때, 자신이 마음속으로 의식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느냐?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성찰해 낼 수 있느냐? (약간은 성찰할 수 있습니다.) 성찰해 낸 후, 또 비슷하게 건성으로 대충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이를 저버리고 해결할 수 있느냐? (의식할 때는 그래도 조금은 저버릴 수 있습니다.) 매번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저버릴 때마다 한 번씩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만약 전쟁 끝에도 여전히 너의 사욕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면, 이는 네가 일부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매우 위험하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10년 동안 믿었다면, 최초 3년은 열의는 있지만 되는대로 믿는 것에 불과하고, 3년 이후에야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실행해야 하고, 또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육을 저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 다음 조금씩 자신에게 패괴와 악독함이 있으며, 자신이 사악하고 교만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그때 자신을 진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즉, 자신의 패괴 본질을 인식하게 되어 진리를 받아들일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패괴 성품 해결이 핵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소로 진리 실제가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가련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비록 매번 패괴 표출이 있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르지만, 매번 전쟁을 치를 때 모두 사욕을 이겨 내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기호대로 행동할 수 있다. 사실 그도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마음은 여전히 사탄 성품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진리를 실행해 내기 아주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는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원받을 수 있을지 정말 확언하기 어렵다. 네가 정말 의지가 있다면, 깨달은 진리를 실행해 내야 하며, 진리를 실행할 때에는 어떤 패괴 성품이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하고, 용감하게 패괴 성품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육을 저버려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다. 비록 때때로 실패할 때도 있지만 네가 낙담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하여 사탄을 이겨야 한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 육을 이기고 진리를 실행할 때가 많아지고 실패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설령 간혹 실패한다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변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해 낼 때까지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면, 구름을 가르고 푸른 하늘을 보게 되는 것처럼 희망이 생긴다. 한 번이라도 진리 실행에 성공한다면, 이런 사람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자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마지막에야 비로소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몇 번이나 실패했든, 얼마나 소극적이든,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 몇 번이나 실패를 반복했든, 사람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 어느 날, 자신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며, 중요한 일에서, 특히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 사탄과 타협하지 않고 본분을 포기하지 않으며, 또한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발견하게 된다면, 이는 구원받을 희망이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다.
매번 진리를 실행할 때마다 마음속 전쟁을 치러야 한다. 진리를 실행할 때 전쟁을 겪지 않는 사람도 있겠느냐? 절대로 없다. 그 사람이 이미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드러나는 패괴 성품이 아주 적어 기본적으로 큰 전쟁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특수한 상황이나 배경에서는 여전히 약간의 전쟁을 치른다. 즉,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수록 전쟁이 적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일수록 전쟁이 많다는 의미이다. 특히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사람은 매번 진리를 실행할 때마다 마음속 전쟁이 특히나 격렬하다. 왜 격렬하겠느냐? 바로 사람은 자신의 기호와 육적 선택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기 때문이며, 또한 패괴 성품의 방해도 있기 때문이다. 네가 어느 한 측면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 네 측면의 장애물과 전쟁을 해야 한다. 즉, 최소한 장애물을 세 번이나 네 번 통과해야 비로소 진리를 실행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처럼 패괴 성품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 너희가 패괴 성품의 구속을 이기고 진리의 편에 설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사람과 협력해 교회 정리 사역을 하는데, 그가 늘 형제자매에게 하나님은 최대한 사람을 구원하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교제한다고 치자. 너는 그의 교제를 통해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의 말이 매우 옳은 것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에게 속셈과 목적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 싫어서 사역지침을 실시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교제하면, 분량이 작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에게 교란되어 원칙도 없이 무분별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며 사람에 대한 분별을 중시하지 않고 또 적그리스도, 악인, 불신파를 폭로하거나 고발하지도 않게 될 것인데, 이는 교회 정리 사역에 장애물이 될 것이다. 제때 적그리스도, 악인, 불신파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하면, 하나님 선민이 정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줄 것이며, 더 나아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여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이때, 너는 어떻게 실행해야 하겠느냐? 문제점을 발견했으면 네가 나서서 그를 폭로하고 제지해 교회 사역을 수호해야 한다. 만약 네가 ‘동역자인 내가 직접 폭로했다가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이만 틀어지는 거 아냐? 안 돼. 직접적으로 말하면 안 돼. 완곡하게 말해야 해.’라고 생각한다면, 간단하게 몇 마디 말로 일깨워 주고 권면할 것이다. 그가 듣고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유를 들어 반박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아 하나님 집 사역이 손해를 입게 생겼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안배해 주세요. 그를 징계해 주세요.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자신이 제지할 수 없으니 그대로 방임한다면, 이것이 책임감 있는 태도이겠느냐? 네가 진리를 실행한 것이냐? 만약 네가 그를 제지할 수 없다면, 왜 리더 일꾼에게 얘기하지 않는 것이냐? 왜 예배 때 가져와 모두가 교제하고 토론하도록 하지 않는 것이냐? 이렇게 하지 않고도 네가 나중에 가책받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제가 관여할 수 없어서 안 한 것이라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어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떤 마음이겠느냐? 이것이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겠느냐, 아니면 남을 해치는 마음이겠느냐? 일이 닥쳤는데 자신이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을까 봐 원칙을 고수하지 않았으니, 네 마음 또한 지나치게 악랄하다. 사실, 너도 마음속으로 그가 그렇게 하는 것에는 그 자신만의 목적이 있으니 그 일은 그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너는 원칙을 고수하지 못했으며 그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을 제한하지도 못해 결국에는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끼쳤다. 나중에 너는 자책했느냐? (자책했습니다.) 자책했다고 해서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느냐? 만회할 수 없다. 나중에 너는 또 고민한다. ‘어차피 내 책임은 다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알고 계셔.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셔.’ 이는 무슨 말이냐? 이는 사람을 속이는 마귀적인 말이다. 사람을 기만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기만하는 것이며, 책임을 다하지 않고 오히려 이유와 핑계를 대며 책임을 미루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간사함이고 강퍅함이다. 이런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대하겠느냐? 정의감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며, 사탄에 속하는 부류이다. 너는 일이 닥치면 처세 철학에 따라 살며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살까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께 죄짓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려 한다.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인간관계는 잘 지켜 내겠지만, 하나님께 죄지어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여 버리고 너에게 노하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 만약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네가 정말 어리석으며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가 이런 식으로 하며 줄곧 깨닫지 못한다면 너무나도 위험하다.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하게 되는데, 손해를 보는 것은 너 자신이다. 네가 이 일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실패한다면, 나중에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만약 계속 진리를 구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손해를 입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며, 결국에는 도태될 것이다. 너에게 무골호인의 속셈과 관점이 있다면, 너는 어떤 일에서도 진리를 실행하거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늘 실패하고 쓰러질 것이다. 깨닫지 못하고 시종일관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불신파이니, 영원히 진리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런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으며, 구원해 달라고 해야 한다. 네가 원칙을 지키고 해야 할 일을 하며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입장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 집의 사역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믿음과 힘을 더해 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네가 자신의 이익과 체면, 무골호인의 관점을 저버리고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면, 이는 사탄을 이긴 것이며 이 부분의 진리를 얻은 것이다. 언제나 사탄의 철학으로 살기를 고집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키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며, 원칙을 지킬 엄두도 내지 못한다면 다른 일에서는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여전히 믿음도, 힘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진리를 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구원받을 수 없다. 언제나 사탄의 철학으로 살면서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면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진리를 얻는 것은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로 살아가며 진리가 네 생존의 토대가 되면 너는 진리를 얻고 생명이 있게 되고,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
발췌문 38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업무 지식이 너무 모자라고, 배우는 데에도 굉장히 힘이 든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바로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질이 지나치게 부족한 사람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뭔가를 배우기도 쉽지 않다. 자질이 지나치게 부족한 사람은 또 대부분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양심과 이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다는 점이다. 눈이 흐릿하고 초점이 없는데, 마치 짐승 같다. 먹고 마시고 놀 줄만 알고, 배운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무엇을 배우든 대강 보기만 하고 겉핥기 식으로 이해하고는 다 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더 설명하려 하면 듣기 싫어하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귀 기울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결과 제대로 해내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정말 쓸모없는 놈이다.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 자체로도 매우 치명적인데, 거기에 더해 성품도 나쁘고 부도덕하기까지 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받아들이기를 싫어한다면, 이런 사람이 바로 쓸모없는 놈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자신에게 어떤 결점이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늘 자신이 많이 부족해서 새로운 사물을 학습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이런 위기감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동력이 된다. 한편으로는 많은 진리를 갖추어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본분 이행에 필요한 업무 지식을 많이 배워야 한다. 이렇게 실행하면 성장할 수 있고 본분 이행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어야 삶이 가치가 있으니, 본분 이행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일부 사람들은 성품이 좋지 않은데, 무지할 뿐만 아니라 매우 교만하기까지 하다. 늘 모든 일에서 구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면 남들이 업신여길 것이고 너무나 창피하며, 너무 존엄성이 없는 처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네가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아무것도 안 배우고 모든 분야에서 다 뒤처지고 구식이며, 식견, 생각, 견해가 없는 것이야말로 창피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격을 상실한 것이며 존엄성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고 무엇을 배우든 수박 겉핥기 식이면서도 도리를 약간 이해하는 걸로 만족하고는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일도 제대로 못 해내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다. 네가 그에게 아무것도 모르고 이룬 것도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 수긍하지 않고 계속해서 따진다. 하지만 정작 일을 하면 그는 하나도 제대로 못 해내는데, 바로 얼치기이다.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면, 이는 쓸모없는 놈 아니겠느냐? 못난 놈 아니겠느냐? 자질이 지나치게 부족한 사람은 가장 간단한 일도 제대로 못하니, 바로 못난 놈이고, 살아 있을 가치가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배운 게 없고 식견도 없으며 자질도 부족해요. 도시에서 사는 당신들처럼 많이 배우고 식견도 있는 게 아니어서 무슨 일이든 다 잘해 내지 못해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떤 점이 옳지 않으냐?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지 여부는 환경과 관계없습니다. 이는 주로 그 사람이 배우려 노력하는지, 향상하려고 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학력에 따라 대하지 않으며, 태어난 환경과 재능에 따라 대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대한다. 이 태도는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인성과 관련이 있고, 사람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올바른 태도로 진리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 자질이 좀 부족해도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줄 것이고, 네가 얻게 할 것이다. 네가 자질이 훌륭하지만 늘 교만하고 독선적이어서 자신이 하는 말은 다 옳고 남들이 하는 말은 다 옳지 않다고 여겨 다른 사람의 건의도 다 거절하고, 심지어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늘 반발한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성령이 이런 사람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성품이 나빠 하나님의 깨우침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네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도 모두 빼앗아 간다고 말할 것이다. 이러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매우 가련하다. 자신이 별 볼 일 없고 어느 측면도 다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괜찮다고, 다른 사람보다 뭐든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약점과 단점, 자신의 나약함과 소극적인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늘 강한 척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네가 뭐든지 잘하고 연약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배워 자신의 단점을 보완할 필요도 없는,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게 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교만한 성품입니다.) 너무나도 교만하다. 이런 사람은 삶이 가련하다! 사실 그가 정말 대단하겠느냐? 정말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느냐? 예전에 많은 일들을 망쳤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뭐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너무나 비이성적인 것 아니냐? 사람이 어느 정도로 비이성적이면 어리석은 자이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고, 새로운 사물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의 내면은 몹시 메마르고, 매우 협소하고 빈곤하다. 그는 어떤 일에서도 원칙을 깨닫거나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며, 그저 규례를 지키고 글귀와 도리를 이야기해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낼 줄만 안다. 그 결과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진리 실제가 전혀 없는데도 여전히 이렇게 교만하다. 정말 어리석은 자이고 어처구니가 없는 자이니 도태될 수밖에 없다.
평소 다른 사람과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때, 너희는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걸 허용할 수 있느냐? (조금은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형제자매가 건의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듣기 싫어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려고 고집했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잘못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나서야 형제자매가 그때 제시했던 건의가 대부분 옳았으며, 모두가 함께 상의해 도출한 결과가 적합하고, 혼자 판단하면 정확하지 않으며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체험을 한 후에야 조화로운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느냐? 체험 후에 도움을 얻고 진리를 깨달았느냐? 말해 보아라. 완벽한 사람이 있겠느냐?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능력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 또한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이자, 사람이 자신의 장점이나 단점을 올바로 대하고자 할 때 마땅히 갖춰야 하는 태도이며,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하는 이성이다. 이런 이성이 있다면, 너는 올바른 태도로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대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 또한 올바른 태도로 대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다. 네가 이 측면의 진리를 깨달으면, 이 측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형제자매와 함께 화목하게 지내며 서로 장점을 배워 단점을 보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점점 더 잘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 만약 네가 늘 자신은 훌륭하고 다른 사람은 다 자신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혼자 결정하려고 한다면 문제가 된다. 이는 성품의 문제이다. 이런 사람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 아니겠느냐? 만약 다른 사람의 말이 옳지만, 그 사람의 건의를 받아들이면 너를 얕잡아 보고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할까 봐 그의 말을 듣지 않기로 결정하고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형이상학적인 말로 그를 억눌러 너를 우러러보게 한다면, 네가 늘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낸다면,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겠느냐? 조화롭게 협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도 생긴다. 시간이 지나면 다들 네가 지나치게 간사하고 교활하며 가늠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만약 모두가 너에게 반감을 갖는다면, 이는 버림받은 것 아니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모든 사람들이 버리는 자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도 혐오한다. 하나님은 어째서 이런 자를 혐오하겠느냐? 비록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본분을 이행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그런 방식을 혐오한다. 그가 드러내는 성품, 그의 모든 생각과 속셈이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 사악한 것이고, 하나님이 역겨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우러름을 받는 목적을 이루고자 늘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 말하고 일을 한다면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 혐오받는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이행하거나 어떤 사역을 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이 순결해야 한다. 너의 마음이 맑은 물처럼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고 불순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가짐이 옳은 것이겠느냐? 바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든 모두 꺼내 놓고 다른 사람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너의 방법이 틀렸다며 다른 의견을 제시해 주었을 때, 네가 그 방식이 괜찮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것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실행하면, 다른 사람들이 네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바른길을 선택할 수 있으며, 일을 함에 원칙이 있고 맑아서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성이 있으며, 마음속에 어두운 부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진심과 정직한 태도로 일하고 말하고,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맞으면 맞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며 별다른 수단을 부리지 않고 감추는 것이 없고, 네가 매우 투명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일종의 태도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이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일종의 태도이며, 이런 태도는 그 사람의 성품을 대표한다. 반대로,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전혀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소통하지 않으며, 일을 할 때도 상의하지 않고, 늘 마음을 닫고 있어 마치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 것처럼 자신을 꽁꽁 숨긴다면, 이런 자는 매우 간사한 자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보자. 자신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가 있을 경우에 그는 ‘일단 말하지 말아야지. 말했다가 당신들이 사용해 버리면 내가 돋보일 수 있는 기회를 뺏기는 거니까 그러면 안 돼. 일단 비장의 카드로 남겨 두겠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짐작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는 ‘일단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지. 만일 말했다가 더 뛰어난 아이디어가 나오면 망신이잖아? 그러면 다들 내 실제 실력을 알게 되고, 내가 이 측면에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잖아. 말하면 안 돼.’라고 생각할 것이다. 무엇을 고려했고 어떤 속셈이 있든 상관없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늘 이런 관점과 태도로 자신의 본분을 대하고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데,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것이 바로 교활하고 간사하며 사악한 성품이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말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뒤로 몰래 남겨 놓는 것이 있다. 무엇을 남겨 놓느냐? 자신의 체면과 이익에 관련된 것을 남겨 놓는다. 그는 그것들이 프라이버시라서 절대 말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러면 문제가 된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사람이 입으로는 하나님은 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계셔. 비록 내가 드러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감찰하고 계시니 분명히 알고 계셔. 하나님께 감추면 안 되니까 반드시 이 일을 말해야 해. 형제자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교제해야 해. 나의 생각과 사고가 좋든 나쁘든 사실대로 말해야 해. 교활하고 간사하며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이 될 수는 없어. 나는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해.’ 사람은 전혀 이렇게 의식하지 못한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이것이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잔머리는 쓸 줄 알지만 진리를 구할 줄 모르는데, 자신의 이익과 체면, 다른 사람 마음속의 자신의 위치 또는 무게를 특히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가 유일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자신의 목숨줄로 여기고 꽉 움켜쥐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볼지, 어떻게 대할지는 그 다음이라 일단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이 무리에서 우두머리인지, 다른 사람이 우러러보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자신의 말이 무게가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이 위치를 선점하려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무리에 오게 되면 다들 이런 위치와 기회를 차지하려 한다. 자신이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려 하고, 능력이 평범해도 무리 속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 한다. 무리 중에서 능력이 낮은 편이며 자질과 재능이 보통이어도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체면과 존엄, 이 최후의 보루를 반드시 굳게 지키려 하는 것이다. 설령 인격을 잃고 하나님의 인정과 열납을 잃더라도, 무리에서 쟁취하려는 체면, 지위, 남들의 우러름은 절대 잃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성품이다. 하지만 사람은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마지막 남은 체면마저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헛된 것들을 완전히 버리고 포기해야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마땅히 버려야 할 이런 것들을 생명처럼 지키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그는 이런 이해관계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비장의 카드를 남겨 놓는데,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전부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자신을 위해 변명과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 영예로운 일에는 늘 앞으로 나서 자신도 한몫했다는 것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 일은 그와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그는 늘 뒤처지기 싫어하고, 늘 무시당할까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이 그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재능도 없다고 말할까 두려워한다. 이는 사탄 성품의 지배를 받은 것 아니겠느냐? 네가 체면과 지위와 같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네 삶이 홀가분해지고 자유로워지며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화면을 통해 얼굴을 알릴 때, 사람은 다들 앞다투어 나선다. 다들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좋아해 많이 알려질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얼굴 알릴 기회가 적을까 봐 걱정한다. 얼굴 알릴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 이는 사탄 성품의 지배를 받은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탄의 성품이다. 네가 얼굴이 알려진들 뭘 어쩌겠느냐? 사람들이 너를 우러러본들 뭘 어쩌겠느냐? 사람들이 너를 숭배한들 뭘 어쩌겠느냐? 이것이 네게 진리 실제가 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겠느냐? 이는 가치가 별로 없다. 사람이 이것들을 이겨 낼 수 있고, 담담하게 대할 수 있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을 때, 체면, 허영심, 지위, 사람들의 우러름이 더 이상 너의 생각과 행위를 좌우하지 못할 때, 더 나아가 너의 본분 이행 방식을 좌우하지 못할 때, 너의 본분 이행 성과가 나날이 좋아질 것이며, 순결도도 점차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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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고분고분하게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늘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고 큰소리치는데, 이게 좋은 일이겠느냐?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큰소리치는 것은 무슨 성품이냐?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입니다.) 성품은 교만하고 독선적인데, 이 일을 하는 성질은 무엇이냐? (독립하고, 일가를 이루고, 따로 파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따로 파를 세운다는 것은 모두가 진리 원칙에 따라 일하지 않게 하고 그의 말을 듣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독립하고 일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속셈과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훼방 놓는다는 뜻이다. 훼방 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파괴한다는 의미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성질이다. 원래 다 같이 교제하고 토론하면 대부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며, 대부분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올바르고 정확한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늘 누군가가 승복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집의 이익도 고려하지 않으며, 자신이 남들에게 우러름 받도록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이상한 이론을 내세워 정확한 결정을 부정하려 하고 모두의 선택을 부정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훼방 놓는 것이고 파괴하는 것이며,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큰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한편으로는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전혀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뜻에 따라 늘 우러름을 받고자 나서려는 것인데, 그 결과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진리가 없어 일을 꿰뚫어 볼 수 없으면서도 늘 큰소리치며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제멋대로 하는 것 아니겠느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자보다는 두 사람이 함께 상의하는 것이 일을 더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만약 늘 혼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려 하거나 큰소리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르게 한다면, 이는 위험하다. 이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아니겠느냐!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과 상의를 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먼저 들어야 한다. 만약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옳고 진리에 부합한다면, 너는 이를 받아들이고 순종해야지 절대로 큰소리쳐서는 안 된다. 어떤 무리에서도 큰소리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네가 치는 큰소리가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남들도 다 찬성한다면 그건 괜찮겠지만, 만약 진리 원칙에 어긋나고 교회 사역에 불리하다면, 네가 책임져야 하고, 자신의 행위로 초래된 나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또한, 큰소리치는 것은 성품의 문제이다. 그것은 너에게 진리 실제가 없고 여전히 패괴 성품에 따라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가 큰소리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끄는 리더가 되려 하고, 일가를 이루고 따로 파를 세워 하나님 선민이 너의 말을 듣고, 너를 따르고, 너에게 순종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선민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 선민을 하나님나라로 데리고 갈 수 있느냐? 너 자신조차 진리가 없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는 일도 해낼 수 있는데, 만약 네가 또 하나님 선민을 이끌고 이 길을 가려고 한다면, 네가 원흉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바울은 원흉이 되어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다. 만약 네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바로 바울의 길을 걷는 것이니, 마지막에는 바울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큰소리쳐서는 안 된다.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으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에게 조화롭게 협력해 본분을 이행하기를 요구하는데, 이것이 의미 있고 정확한 실행의 길이다. 교회에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들 중 누구에게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가 있을지 모른다. 너는 반드시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붙잡고 그 뒤를 바짝 따라가며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걷는 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성령이 인도하는 길이다. 성령 역사가 있는 사람을 볼 때 성령이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어떻게 인도하는지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는 수시로 사람들과 교제하고 네 의견을 제시하며 관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는 너의 본분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 너 혼자 정하고 다른 사람은 듣게만 하며 네 뜻대로 하고자 한다면, 이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너는 많은 사람의 뜻에 근거하여 올바른 선택을 한 후,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만약 많은 사람의 의견 역시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견지해야 한다. 그래야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 만약 네가 늘 큰소리치고 고매한 이론을 이야기해 다른 사람의 우러름을 받고자 하는데, 사실 너 자신도 마음속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억지로 나서지 마라. 이것이 네가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냐? 너의 본분은 무엇이냐? (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 자신이 다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깨달은 만큼만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관점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건의를 많이 듣고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는 법을 배워 다 함께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입니다.) 만약 네가 아무것도 밝히 알지 못하고 어떤 관점도 없다면, 말을 듣고 순종하며 진리를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네가 마땅히 다해야 할 본분이자 성실한 태도이다. 아무 관점도 없으면서 늘 망신당할까 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할까 봐, 부끄러운 일이 생길까 봐, 모두에게 미움받을까 봐, 모두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잃어버릴까 봐 걱정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남들 앞에 나서려 하거나 큰소리치고 싶어 하며, 실제 상황에 맞지 않는 황당한 주장을 내세워 남들에게 받아들이게 하려 한다면, 이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행동이겠느냐? 파괴하는 행동이다. 누군가 늘 이런 일들을 한다면, 너희가 이를 제한해야 한다. 어떻게 제한해야겠느냐? 말도 못하게 하거나 전혀 기회를 주지 않거나 하지는 마라. 배척하지 않고 그가 교제하게 할 수는 있지만, 다들 분별할 필요는 있다. 이것이 원칙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잘못된 관점을 제시했는데, 그 관점이 사람들의 관념과 상상과 완벽하게 부합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옹호하고 찬성한다고 치자. 소수의 분별력 있는 사람만이 거기에 섞여 있는 사람의 뜻, 개인의 야심과 욕망을 발견했다면, 그를 폭로해 그가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 옳다. 만약 다들 무골호인이 되어 분별하지 않고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부 사람들은 그에게 아첨하느라 동조하고 지지할 것이다. 이는 그의 야심과 욕망을 조장할 것이고, 그는 곧 교회의 실세가 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위험해진다. 그는 이런 사람들과 연합해 세력을 형성하여 악을 행하고 교회 사역을 교란할 수 있다. 이로써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일단 교회를 통제하게 되면, 그는 적그리스도가 되어 독립 왕국을 세우기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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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닥치면 다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많이 해야지, 절대로 개인의 생각에 따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마음과 뜻을 한데 모아 하나님에게 기도해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성령 역사로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 예수가 뭐라고 말했었느냐?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무슨 의미이냐?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독자적으로 하거나 자신의 길을 가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독자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조화롭게 협력하고, 마음과 뜻을 합쳐야 하며, 공동의 목표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똘똘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똘똘 뭉칠 수 있느냐? 바로 조화롭게 협력하여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성령이 역사할 것이다. 만약 각자 다른 속내를 품고,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며, 아무도 교회 사역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다들 나 몰라라 하며,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고, 힘을 쓰려 하지 않고, 고통을 겪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다면, 그런데도 성령이 역사하겠느냐? (역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역사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그릇된 내적 상태로 살면서 하나님에게 기도도 하지 않고 진리도 구하지 않으면, 성령이 버리고 하나님은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성령이 역사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혐오하여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고, 성령은 모습을 감춘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너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한쪽에 방치하면 너는 끝나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이방인은 어째서 그렇게 일하기 어려운 것이냐? 바로 각자 다른 속내를 품고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 각자 다른 속내를 품고 있으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없고 무슨 일을 하든 힘이 드는데, 아주 간단한 일도 하기 매우 힘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사는 모습이다. 만약 너희가 이방인처럼 그렇게 일을 한다면, 그럼 이방인과 다를 게 무엇이냐? 별로 다르지 않다. 만약 진리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권력을 잡는다면, 사탄의 성품으로 가득 찬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인데, 이는 실제로는 사탄이 권력을 잡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교회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이 한 일이 전부 다 진리를 어긴 것이라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준다. 일단 사탄에게 넘겨지면, 사람들 사이의 질투와 분쟁 등등 다양한 추태가 모두 드러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버렸으며,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이 이해한 알량한 글귀와 도리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 소용없다. 성령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으면 마음속이 텅 빈 느낌을 받고,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때면 사람은 아연실색하게 된다. 사람의 모든 영감, 지혜, 슬기로움, 깨달음, 깨우침은 모두 하나님이 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한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에서 진리를 구할 때 갑자기 깨닫고 길이 생긴다면, 이런 빛 비춤은 어디에서 온 것이겠느냐?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진리를 교제할 때 원래는 인식이 별로 없었는데 교제 중에 갑자기 빛 비춤이 생기면서 인식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깨우쳐 주고 역사한 것이다. 성령은 주로 언제 역사하겠느냐? 바로 하나님 선민이 진리를 교제할 때, 사람이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본분을 이행할 때 역사한다. 그때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만족해할 때이다. 그러니 너희는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이 많든 적든, 어떤 상황이든, 언제든, 한마음 한뜻이라는 이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내적 상태로 살면 성령이 역사한다.
발췌문 41
하나님 집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모두 하나의 공동 목표를 위한다. 즉, 본분을 잘 이행하고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잘 해내며, 진리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처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이다. 만약 너의 목표가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고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사탄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고, 이방인은 사탄 성품의 지배를 받아 일한다. 이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길이다. 이방인은 각자의 속내를 품고,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각자의 셈법이 있다. 모든 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기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이득을 두고 싸우고, 하찮은 이익도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열돼 있지, 하나가 아니다. 그들이 위하는 것은 공동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하는 속셈과 성격은 같은데,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거기에선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지 않고 온통 사탄의 패괴 성품이 권력을 잡고 주인 노릇을 한다. 모두 사탄의 패괴 성품에 통제당해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 그 결과 죄 가운데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된다. 만약 하나님 집에서 일하는 너희의 출발점, 동기, 원칙, 방식이 이방인과 같고, 역시나 사탄 패괴 성품의 지배와 통제, 조종을 받으며, 일하는 출발점 역시 자신의 이익과 명예, 체면과 지위를 위한 것이라면, 너희의 본분 이행은 이방인이 일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너희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자신의 이익, 개인의 속셈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일을 할 때 먼저 다 함께 진리를 교제하여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깨달은 다음에 분업을 해야 한다. 누가 무엇을 잘하고 못 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받아 오고,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 싸우지도 말고 뺏지도 말아야 하며, 양보하고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어떤 본분을 처음 이행하거나 이제 막 그 분야의 업무 기술을 배운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일은 그 사람이 하기에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니 억지로 맡기지 말고 약간 쉬운 일을 나눠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가 쉽게 본분 이행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것이 바로 포용하고 인내하고 원칙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부분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자 사람이 마땅히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 분야 업무를 비교적 잘하고, 또 이 분야에서 오래 일했다면, 상대적으로 다소 어려운 일을 네가 맡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순종해야지 “왜 다들 저를 못살게 구는 거죠? 다른 사람한테는 쉬운 일을 맡기면서 저한테는 어려운 일을 맡기는데, 이건 저를 힘들게 하는 것 아닌가요?”라며 고르거나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게 어째서 힘들게 하는 것이란 말이냐? 이는 각자에게 딱 맞는 일을 맡기는 것이고, 잘하는 사람이 수고를 많이 하는 것이다. 네가 많이 배웠고 하나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었으니, 당연히 너에게 중임을 맡겨야 한다. 중임을 맡기는 것은 너를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니라 너에게 꼭 맞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 본분이므로 가리거나 거절하지 말고, 피하지도 마라. 너는 왜 어렵다고 느끼느냐? 사실, 네가 마음을 좀 들이면 능히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도 네가 어렵다고 느끼고, 그게 사람을 차별하고 일부러 못살게 구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은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그것은 본분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본분 이행을 가려서 가볍고 쉬운 일만 하려 하고 그럴듯한 일만 하려는 것은 바로 사탄의 패괴 성품이다. 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은 네가 아직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으며, 대항하고, 거절하고, 피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이 바로 패괴 성품이다. 그것이 패괴 성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네가 보기에 다른 사람에게 준 일은 쉽게 끝나는데, 네게 준 일은 오랫동안 바삐 보내야 하고 애쓰며 자료도 찾아봐야 하는 일이라면 기분이 언짢아진다. 그 언짢음이 옳은 것이냐? 분명 옳지 않다.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만약 네가 반발해 “매번 일을 나눌 때마다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은 저에게 맡기고, 쉽고 간단하고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데, 이건 제가 만만해 보여서 그러는 것 아닌가요? 일을 이렇게 나누는 것은 불공평해요!”라고 말한다면, 이런 생각은 옳지 않다. 일 배분이 잘못되었든 합리적이든 간에, 하나님은 무엇을 감찰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순종이 있는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중책을 맡을 수 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살핀다. 만약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가늠하면, 너의 이유가 말이 되지 않고, 네가 이행한 본분이 합격점에 달하지 못하고, 너는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이다. 너는 전혀 순종하지 않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좀 한다고 해서 원망까지 한다. 무엇이 문제겠느냐? 우선은 마음가짐이 잘못됐다. 마음가짐이 잘못됐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늘 자신의 체면과 이익을 고려하고,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으며, 전혀 순종하지 않으면, 이는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만약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더러운 일, 힘든 일, 어려운 일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마음가짐이 다를 것이다. 어려운 일은 무엇이든 선택하고, 무거운 짐만 고를 것이고,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고를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할 것이다. 마음속은 즐거움으로 가득해 절대 일말의 원망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더러움, 힘듦, 어려움이 사람을 드러낸 것이다. 쉽고 얼굴을 알리는 일만 골라서 하는 그런 사람들과 네가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너도 그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 일은 이렇게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분 이행이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말은 매우 그럴듯하게 하는데, 입만 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분 이행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온갖 원망과 소극적인 말들이 다 튀어나오는데, 그런 자는 틀림없이 외식하는 자이다. 만약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본분 이행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본분이 적합하지 않게 안배되었어도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며, 마음을 다해 본분을 대할 것이다. 설령 힘든 일, 더러운 일, 어려운 일이라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일과 본분을 제대로 해낼 것이다. 그의 마음속은 즐거움으로 가득하고, 하나님도 이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위안을 받는다. 이런 사람이어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 더러운 일, 어려운 일, 힘든 일이 닥쳤을 때 호저로 변해 가시를 곤두세우고 아무도 말도 못하게 하고 건드리지도 못하게 한다면, 이런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니 드러나 도태될 수밖에 없다. 평소에 너희가 이런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을 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할 수 있느냐? (약간은 의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조금은 의식할 수 있다면, 자신의 힘, 믿음, 분량으로 이런 내적 상태를 되돌릴 수 있겠느냐? 너는 이런 태도를 되돌려야 한다. 너는 먼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옳지 않아. 이는 본분을 이것저것 골라가며 이행하는 것 아니겠어? 이것 또한 순종하는 것이 아니야. 본분은 마땅히 즐겁고 기꺼이 이행해야 하는 건데, 왜 나는 즐겁지 않고 짜증이 나는 걸까? 내 본분이니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왜 나는 순종하지 못하는 거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고 내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이런 패괴 성품의 표출을 인식해야 해.’ 그런 다음에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라는 사람은 제멋대로 하는 것이 버릇되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요. 저의 태도가 옳지 않고 순종이 없습니다. 저를 징계하시어 제가 순종하도록 해 주세요. 저는 짜증을 부리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당신을 거역하고 싶지도 않아요. 저를 감동시켜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저는 사탄을 위해 살고 싶지 않고, 진리를 위해 살고 진리를 실행하고 싶어요.’ 네가 이렇게 기도를 하면 내면의 내적 상태가 좋아지고, 내적 상태가 좋아지면 너는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건 별것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은 조금 하는데 내가 좀 많이 하고, 그들이 놀 때 놀지 않고, 그들이 수다 떨 때 수다 떨지 않는 것일 뿐이야. 하나님께서 내게 부담을 더해 주시고 무거운 짐을 더해 주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중히 여기시고 선대하시는 거야. 내가 이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지.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잘해 주시니 순종해야 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도가 좋아진다. 네가 막 본분을 받아들였을 때는 태도가 좋지 않고 순종하지 못했지만, 너는 제때에 태도를 돌이킬 수 있었으며, 제때에 하나님의 감찰과 징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제때에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었고, 순종하는 태도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태도를 갖출 수 있었다. 네가 이 본분을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히 받아들여 기꺼이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이것은 전쟁의 과정을 거친다. 이 전쟁 과정이 바로 네가 변화하는 과정이며, 바로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무슨 일이 닥치든 사람이 전부 다 순종하고, 기꺼이 원하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사람이 모두 이럴 수 있다면, 이는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없어서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해 사람을 구원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생각, 그릇된 태도, 잘못된 내적 상태와 소극적인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모두 현실적이며 현존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소극적인 내적 상태, 부정적인 내적 상태, 소극적인 정서, 패괴 성품이 주도권을 잡고 너의 행위, 생각, 태도를 통제할 때, 네가 어떻게 하고, 어떻게 실행하고,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는 진리를 대하는 너의 태도에 달려 있다. 너에게 정서, 소극적인 내적 상태, 패역한 내적 상태가 있을 수도 있지만 본분 이행에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겨날 때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고, 네가 진리를 깨닫고, 네가 하나님께 구하기 때문에, 네가 순종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이런 내적 상태들은 모두 쉽게 돌이킬 수 있다. 그러면 순조롭게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고, 너를 구속하고 통제하는 사탄의 패괴 성품을 이겨 낼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진리 생명을 얻게 된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얻는 과정은 성품이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은 모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한다. 또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늘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하고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색함으로써 어려움을 해결하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모두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고, 성령의 인도하에 살면서 점차적으로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워 마지막에는 본분 이행에 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네 마음속에서 주도권을 잡고 권세를 잡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 진리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 관념, 상상이나 바람대로 일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바쁘고, 패괴된 성품에 지배받아 일한다. 겉으로는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있지만, 전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진리 생명을 얻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힘쓰는 자가 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한 것이냐? 그는 진리에 의지하거나 하나님께 의지해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다. 그가 깨달은 약간의 진리는 그의 마음속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은사와 재능, 자신이 배운 지식, 자신의 끈기 혹은 선의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천성, 상상, 관념, 지식, 학문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하면 겉으로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악을 행하지도 않았지만,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만족해하는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너의 관념과 상상, 너의 뜻이 한 번도 바뀐 적 없고, 한 번도 진리로 그것을 대체한 적 없고, 한 번도 진리 원칙대로 행동한 적이 없다면, 그 마지막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생명 진입이 없어 힘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하나님은 왜 힘을 내거나 힘쓰는 이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겠느냐? 이 사람들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사역을 하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동기와 근원, 속셈, 생각은 순전히 사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순전히 자신의 이익과 미래를 지키기 위해, 자기 체면과 허영, 지위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런 것을 중심으로 고려하고 계획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에 진리가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도 없다. 이것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이제 주로 어떻게 추구해야 하느냐? 매사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자기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이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바로 일할 때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알고, 자신에게 어떤 속셈이 있고 어떤 생각이 있는지, 이런 속셈과 생각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반성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바로 내려놓은 뒤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의 감찰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진리 실행을 보장할 수 있다. 만약 자기에게 속셈과 목적이 있고, 그것이 진리에 어긋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위험하다. 이러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저지르기 쉽다. 한두 번 악을 행했을 때 회개할 수 있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계속 악을 행하면 바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못한다면, 큰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한쪽에 내버려두거나 포기할 것이다. 이러면 도태될 위험이 있다. 온갖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징벌받고 도태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