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하나님 말씀 ― 하나님 알아 가기 | 발췌문 11
2020.8.7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방법과 기준
그 어떤 생각과 결정이 있기 전에 너는 우선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며,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람의 결말을 시간을 기준으로 정한 적도, 받은 고통의 양에 따라 정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시간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방법은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한다. 또한 헌금을 많이 내고 헌신도 많이 하고 대가도 많이 치르고 고난도 많이 받는 등 너희가 종종 보게 되는 사람들은 다 너희의 관념으로 볼 땐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보여 주고 살아 내는 것은 바로 사람의 관념 속에 있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기준인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너희의 관념 속에 있는 기준들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이 생각하는 기준이 아니라면 모두 사람이 상상해 낸 것이고, 사람의 관념이다. 네가 계속 너의 관념과 상상을 고집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그 결과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은 너를 혐오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원인은 네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알려고 하지 않고, 늘 하나님 앞에서 경험 많은 티를 내고,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며 논쟁하려고만 들기 때문이다. 너의 그런 행위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고 구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이런 관점을 버리고 지난날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요구에 따른다면 아주 좋겠다. 지금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행하고, 어디서든 하나님을 높이며, 자신의 상상, 관점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으면 참으로 좋겠다. 매사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알고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흡족게 한다면 그야말로 너무나 좋겠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곧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이런저런 사상과 관점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사람이 시련을 받는 횟수이고, 둘째는 시련을 통한 결과이다. 이 두 가지 기준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이제 이 두 가지 기준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자.
첫째,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준 시련이 닥칠 때[주: 이 시련 역시 네 입장에서는 아주 사소하고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이 임한 것이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임을 분명히 알게 해 줄 것이다. 너의 분량이 작다면 하나님은 네 분량에 맞고, 네가 깨닫고 감당할 수 있는 시련들을 마련하여 너를 검증한다. 너의 무엇을 검증하겠느냐? 하나님을 향한 너의 태도를 검증한다. 이 태도가 중요한 것일까? 당연히 중요하다! 그것도 특별히 중요하다! 이 태도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그토록 공을 들여 사람에게 이런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를 보려고 하고, 네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있는지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당시 네가 깨달은 진리가 많든 적든 하나님이 주는 시련은 너에게 임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깨닫는 진리가 많아짐에 따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에게 알맞은 시련을 마련할 것이다. 너에게 또다시 시련이 임할 때, 하나님은 그때의 네 관점과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발전이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왜 자꾸 사람의 태도를 보려고 하시죠? 사람이 이렇게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람의 태도까지 봐서 뭐 합니까?”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한다는 건 그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곁에서 사람의 말과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마음과 생각까지 하나하나 다 살펴본다. 하나님은 사람의 선행, 사람의 잘못과 과오, 더 나아가 사람의 패역과 배반 등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일이 기록하여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증거로 삼는다. 하나님의 사역이 점차 깊어질수록 네가 들은 진리도 점점 많아지고, 네가 받아들인 긍정적인 사물과 긍정적인 정보와 진리의 실제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높아질 것이며, 하나님은 너에게 더 큰 시련을 마련할 것이다. 이는 그 기간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에 발전이 있었는지 검증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때 하나님은 너의 관점과 네가 깨달은 진리 실제가 서로 부합되기를 요구한다.
너의 분량이 점차 커짐에 따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도 점차 높아질 것이다. 네가 어릴 때 하나님은 매우 낮은 기준을 설정해 주지만, 너의 분량이 좀 커졌을 때는 그에 상응해 좀 더 높은 기준을 설정해 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 하나님은 너에게 더 큰 시련이 임하게 할 것이다. 더 큰 시련 가운데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과 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어진 네 인식과 진실한 경외심이다. 그때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바는 네 분량이 작을 때의 요구보다 더 높고 ‘가혹’할 것이다[주: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혹하겠지만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주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기간, 하나님이 이루려는 건 어떤 걸까? 하나님은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어떻게 드려요? 저는 본분도 이행하고, 가정과 직장도 내려놓았고, 헌신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게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표현 아닌가요? 거기다 더 어떻게 마음을 드리라는 겁니까? 설마 이런 방식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요? 하나님은 대체 구체적으로 뭘 요구하시는 건가요?” 그 요구는 매우 간단하다. 사실, 각 단계의 시련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도는 다르나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육체나 사탄에게로 향하고 있는지를 본다.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네가 하나님과 대립하는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입장에 서 있는지를 본다. 네 마음이 하나님 편에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이다. 네가 어릴 때 네 믿음은 시련 가운데 한없이 나약하다. 깨달은 진리가 많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네가 진심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게 하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다면,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네가 들은 도와 깨달은 진리가 점점 많아지면, 너의 분량도 점차 성장하게 된다. 그때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네가 어릴 때 요구했던 기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일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점차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마음이 점차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점점 더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다.
하나님이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고 할 때면 그 사람에게 여러 차례 시련을 준다. 시련들을 주는 기간,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의 어떤 태도도 보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천과 태도를 보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려고 하는 태도와 결심도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 차례 시련을 준 뒤 그 사람에 대한 인내심을 접고, 더 이상 관용도 베풀지 않으며 시련도 주지 않을 것이다. 또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사역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결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의 결말은 결말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악행을 저지른 게 아닐 수도 있고, 방해와 교란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감추고, 하나님에 대해 명확한 태도와 관점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 입장에선 그가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하고 있는지 명확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더 이상 인내해 주지도,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해 주지도, 긍휼을 베풀어 주지도 않고,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생애가 이미 끝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준 여러 번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사람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겉으로는 열정적으로 뛰어다녔고 책도 많이 보고 일도 많이 했다. 필기 노트도 열권이 넘고, 글귀와 이치도 많이 이해했다.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나 명확한 태도도 전혀 볼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늘 베일에 싸여 있고 봉쇄되어 있었다. 하나님을 향해 봉쇄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진실한 마음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어떻게 행했는지는 더더욱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지금까지도 얻지 못했는데 이후라고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얻지 못할 대상에게 하나님이 강요를 하겠느냐?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런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겠느냐? (혐오하여 포기하시고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상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혐오하여 포기한다. 너희는 그 말을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기억했구나. 아주 잘 알아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따를 때 어리고 무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도 몰라 인위적이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 시련이 닥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에 대해 아주 무감각하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시련 속에서 굳게 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기한을 주어 그 기한 내에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관점을 밝힐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은 그 단계에 있는 사람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관점들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려 흔쾌히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일부 기본적인 진리들은 실천하면서도 큰 시련이 닥치면 이내 도망가고 포기하려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도 여전히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다. 그 결과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달렸다. 사람이 적극적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포기한다.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기 전에 네가 이미 스스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포기했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렇게 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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