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6) 제 5 부

정상 인성으로 교류하다 보면 교류가 매끄럽지 않은 문제가 자주 나타난다. 여기서 매끄럽지 않다는 말이 무슨 의미겠느냐? 나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교류하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무척 복잡하고 까다롭게 생각해서 계속 교류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말이다. 계속 교류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럴 때는 왕래하지 않고, 왕래할 수 있는 사람, 교류하며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왕래한다. 너희를 만나면서 가장 많이 마주했던 상황은 사람들이 모두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이었다. ‘당신의 신분과 지위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당신은 성육신 하나님이시고 저희는 피조된 인류인데, 잘못 말했다가는 대등한 위치인 것처럼 되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촉범하기 쉽습니다. 또한, 당신은 성육신이시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고 계시죠. 당신의 책임이나 당신이 감당하는 사역은 진리를 선포해서 패괴된 인류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한정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사역에 관한 것이나 신성에서 비롯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셔야 해요. 정상인의 생활이나 의식주 같은 문제, 누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런 내용을 다루신다면, 당신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속셈이 있으신 겁니다.’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이 성육신을 비인류의 일원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정상 인성을 지니지 못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와 왕래할 때, 내가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의식주에 관해 조금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경계선을 그어 놓고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해서 뭐 합니까? 영적인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이야기하시는 게 아닌가요?” 만약 어떤 사람의 상황을 언급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뒤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계산하시는 거 아닌가? 그를 노리시는 거 아냐? 그를 발탁하시려는 걸까? 아니면 도태시키시려는 걸까? 계속 그를 쓰시려는 걸까? 아니면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시려는 걸까?’ 만약 어떤 사람의 문제를 언급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싫어하고 그에게 반감을 품고 계신 거 아닌가요? 그가 당신께 해가 되는 짓을 하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당신께 노여움을 살 말이나 행동을 했나요?’ 특히 리더 일꾼과 관련된 민감한 주제를 꺼내면, 어떤 사람들은 더더욱 이야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런 주제를 언급하시는 건 사역을 위해서겠지만, 저희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민감한 주제거든요. 자칫 잘못해서 정확하지 않게 말했다가는 저희를 폭로하고 책망하실 테고, 저희의 패괴 표출이 안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될 텐데, 그건 적절하지 않아요.” 또 어떤 주제를 언급할 때, 가령 내가 “너희 가족 중에 누가 하나님을 믿느냐?”라고 묻는다면, 이는 중국에서는 민감한 주제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함께 지낸 시간이 비교적 길고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끼리 묻는다면, 이를 그다지 민감한 주제라고 할 수 없고, 해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주제에 관해 내가 물으면,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가족 중에 누가 믿는지 물어보시는 건 내 내막을 캐내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 그에게 “너희 현지 교회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느냐? 교회 리더가 누구냐?”라고 물으면, 그는 ‘이런, 지금 교회 실태를 알아보시려는 거 아냐? 말씀드릴 수 없어. 말씀드렸다가 교회 리더가 알게 되면 큰일이야.’라고 생각한다. 보아라, 교회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경계하며 감히 이야기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교회 리더, 교회 사역과 관련된 주제를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자유롭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교회 실태를 실토했다가 리더 일꾼에게 미움받을까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무심코 자신의 사상 관점이 드러났다가 책망받고 폭로당할까 봐 걱정도 되고 말이다. 이는 그가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왕래할 때 평범한 교류조차 매끄럽지 않은 것이다. 이방인과 왕래하고 일을 처리할 경우, 이방인은 마음, 생각이나 배경이 복잡하기 때문에 나는 용무가 끝나면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그와 깊게 교류하거나 긴밀히 접촉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형제자매와 왕래하는 건 어떻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로 긴밀하게 접촉할 수 없고 깊이 교류할 수 없다. 내가 거만하게 굴면서 많은 사람과 왕래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고 그들을 만나려 하면,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피하거나 달아나기 때문이다. 왜 나를 피하느냐? 네가 말실수한다고 해도 너를 정죄하거나 확대 해석하지는 않는다. 네가 리더 일꾼이라면 함께 진리를 교제하고, 네가 이해하지 못한 측면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네가 보통 형제자매인데 정말 말실수하거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이럴 경우는 내가 너에게 이야기를 해 줄 마음이 있는지에 달렸다. 내가 봤을 때 네 자질이 부족하고 이해 능력이 없으며 아무것도 간파하지 못한다면, 너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이야기해 준다고 해도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네가 자질이 좋고 이해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정도 일을 간파할 줄 알 경우, 네게 이야기해 주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서 말해 준 보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와 한담하든, 그리고 어떤 문제를 발견하든 나는 마음속으로 첫째, 정죄하지 않고, 둘째, 저주하지 않으며, 셋째, 사람의 결말을 정하지도 않는다. 이는 근거 없는 행동이다. 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정상 인성의 측면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하고 한담하고 싶을 때가 있다. 네가 원한다면 이야기하겠지만, 원치 않는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한담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내가 어떤 말을 하든 경계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는 아무런 관점을 밝히지 않는다. 말실수해서 나한테 꼬투리 잡힐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네가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으면 나는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것이다. 네가 날 항상 경계하고 계산적으로 대할까 봐 걱정한다면, 나도 너와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나의 이런 이성이 정상이 아니냐? (정상입니다.) 내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교류할 때는 항상 저마다의 배경이 있다. 가령 네가 농장에서 사육을 담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육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고, 네가 교회 리더라면 우리는 교회의 일, 형제자매의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현재 형제자매의 내적 상태가 어떤지, 교회 생활은 어떤지에 대해서 말이다. 또 네가 만약 복음을 전하는 복음 증거자라면, 우리는 복음 사역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들은 정상 인성의 범위에서 왕래하는 것이며, 이것이 내 사역이기도 하다. 어떤 일들은 교회 사역과 관련은 없지만 하나님 집의 사무이기도 하다. 만나서 이런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일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으니, 너를 만나면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하면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사람들과 한담하다가 이렇게 물을 때가 있다. “요즘 저녁에 쌀쌀하던데 집이 춥지는 않으냐?”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내 말이 듣기 싫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다 큰 어른인데 뭐 하러 참견하실까?’ 선의를 베풀어도 이런 취급을 받는다. 그렇지 않으냐? 때로는 주방에 가서 이렇게 물어보기도 한다. “올해 채소가 어떠냐? 먹기 부족하지는 않으냐? 너희는 어떤 채소나 먹거리를 좋아하느냐?” 이는 모두 정상적인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도 복잡해서 정상적인 왕래나 소통이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늘 문제가 들통날까 봐 걱정하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내 실상이 드러나면, 예배 설교 시간에 나를 폭로하고 타깃으로 삼으시겠지.’ 너를 타깃으로 삼으면 안 되느냐? 네 문제에 맞춰 진리를 교제해서 네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건 특별한 은혜가 아니겠느냐? 네게는 행운이 아니냐? 잘된 일이다. 이는 내가 너를 중시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맞는 말이 아니냐? 내가 만약 너를 거들떠보지 않고 마음속에 너를 두지 않는다면, 네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을 보고도 외면한 채 네게 지도해 주거나 교제해 주지도 않는다면, 네가 진리를 깨달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네 기분이 좋겠느냐? 만약 그렇게 했더니 네가 무척 흡족해하면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모든 문제는 다 나랑은 관련 없는 이야기야. 나한테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지.’라고 생각한다면, 네가 만약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어떤 책망과 훈계도 받아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부각물이 되어 본 적도 없다며 이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매우 훌륭하고 아무 문제도 없어서 구원받을 게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골칫거리가 아니냐? 이런 사람은 분명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정상 인성의 사고를 지닌 사람은 정상 인성으로 남들과 소통하고 왕래할 때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감각을 따른다. 이런 감각이 있다면 그는 최소한의 선과 원칙을 가지고 남들을 대할 것이다. 정상 인성의 사고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왕래하면, 남들이 너를 인간적인 양심의 지각을 가진 사람으로 느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정선을 지켜 가며 행동해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또 중요한 한 가지는 네가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할 때 네가 나누는 말을 통해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고,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왕래라고 하고, 교류라고 한다. 무엇을 교류라고 하느냐? 쉬운 말로 한담을 나누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담을 나눌 줄 모른다. 말만 했다 하면 다투고 설전을 벌이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말을 들으라고 남들을 훈계하기 십상이다. 말주변이 좀 있는 사람은 입만 열면 자기가 선생이라도 되는 양 설교하려 든다. 이런 모습은 모두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사람이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으면 남들과 정상적으로 한담을 나누지 못한다. 설사 잠깐 정상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하고, 언제 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신나게 싸울지 모른다. 이는 정상적인 한담이 아니다. 정상적인 한담은 시비를 따지거나 옥신각신하면서 말다툼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며,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한번 한담의 정의를 내려 보자. 한담이란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한담이라고 한다. 이 정의가 정확하지 않으냐? (정확합니다.) 어떤 점이 정확하냐? 정보의 교환과 공유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들이 어떻게 한담하고 교류하는지 보아라. 그들은 다투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상대방이 유익을 얻게 한다. 상대방이 해 준 말을 듣고는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 줌으로써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게 하고, 그가 인성 면에서 경험을 쌓고 식견과 견문을 넓히게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과 평등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원칙에 따라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상대방에게 공유해 주고, 상대방이 자기에게 공유해 주는 정보도 얻는다면, 이것이 상부상조가 아니겠느냐? 이는 평등, 협력, 화목, 공평을 바탕으로 한다. 이를 교류와 한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 정의가 정확하지 않으냐? (정확합니다.) 이를 원칙으로 한담하고 교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교류와 한담이 계산, 다툼, 싸움, 음모, 간계, 함정, 시험으로 가득하고 표출되는 것이라고는 모두 패괴 성품이고 상호 억압뿐이라면, 그리고 저마다 우쭐거리면서 누구의 말이 더 대단하고 누가 더 말을 많이 하는지 비교하고 다툰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교류가 아니며,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교류가 아니다. 이런 교류는 정보의 교환이나 공유가 아니라, 겉으로나 뒤에서 싸우고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남들과 교류하면서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으려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교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류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동시에 상대방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유익을 얻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교류이다. 이렇게 교류하면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해 보아라, 이방인이 교류하고 한담할 때 정상적인 교류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패괴된 인류가 교류하고 한담할 때, 그 교류의 내용이나 출발점, 말투가 정상적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들의 교류는 그야말로 투계나 투견 같은 싸움질이다. 그들 간의 교류가 순조롭겠느냐?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계산적으로 대하거나 다투지 않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교류가 순조로워지려면 사랑하는 마음과 상부상조하고 서로 배우며 보완하려는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나와 너희가 교류하고 한담할 때, 나 혼자만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희도 이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하며, 계산적으로 대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는데 너희는 늘 그런다면, 그리고 너희 자신이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도 모자라 나 역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면, 우리의 교류는 순조로울 리 없으며 유익하고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없을 것이고, 화목하게 지낼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오는 것을 보면 즉시 숨을 곳을 찾는다. 도저히 숨을 곳이 없으면 마지못해 인사는 하지만 속으로는 만나기 싫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귀찮아 죽겠네. 또 우리 실상을 파악하러 오셨나 봐. 파악하고 나면 또 진리 원칙을 교제해서 난처하게 만드시겠군. 이를 어쩐담?’ 나를 만나거나 나와 왕래하는 게 싫다면, 또 나와 왕래하면 마음이 너무 지치고 늘 내가 계산적으로 대하려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 모습이 보이는 순간 피해도 된다. 그런데 만약 네 생각에 나와 왕래하면 내가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고, 네 마음이 편하고 즐거우며 자유롭고 해방감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만나서 한담하고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네가 내게 “요즘 잘 지내시죠?”라고 묻는다면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고, 내가 네게 “네 근황은 어떠냐? 생명이 성장하였느냐? 본분 이행에 수확은 있었느냐?”라고 물으면 너도 사실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직한 모습이다. 매번 부드럽고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이 나만 보면 숨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말할 때마다 굽신거리면서 의도적으로 아부하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아첨하기 좋아하는 것은 속임수에 해당하니, 실제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상적인 마음가짐으로 대하면 됩니다. 한편으로는 솔직하게 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첨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거나 알랑방귀를 뀌지 말아야 합니다.) 내 요구는 하나뿐이다. 내가 너를 봤을 때는 나를 피하지 말고, 내가 널 찾지 않을 때는 나한테 매달리지 마라. 네 할 일을 하되 모든 걸 정상적으로 해라. 내가 너희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을 테니, 너희도 나한테 지장을 주지 마라. 나를 피하거나 나한테 달라붙는 것은 모두 나와 접촉하고 왕래하는 원칙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교류하고, 솔직하고 사실대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묻는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해야 한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느냐? 가령 내가 네게 “이번 달에 복음을 전해서 몇 명이나 얻었느냐?”라고 물었는데 네가 대답하기 싫어한다면, 나는 네가 그렇게 난처해하는 걸 보고 묻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결코 사람에게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남들이 어떤 질문을 하든 늘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라고 고민한다. 그는 바로 답하려 하지 않는다. 잘못 대답했다가 문제가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늘 이렇게 추측하고 계산적으로 대한다면 우리는 교류할 수가 없다. 너는 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자꾸 연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를 계산적으로 대하지도 마라. 단순하게 마음을 열고 속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함께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쉬운 일이겠느냐? (쉽습니다.) 말이 쉽지 막상 하려면 조금 어려울 것이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내가 너한테 질문을 했는데, 그때 네가 사실대로 답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그 만남과 교류에서 실패했다고 해 보자. 실패했으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다음에 만나면 “지난번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라고 용기를 내서 인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를 격려하고 손뼉 쳐 주며 엄지를 치켜들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는 의미로 말이다. 정말 바람직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는 측면의 주제에 관해 얼마나 많은 사례를 교제했든 그것은 너희에게 한 가지 원칙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무슨 원칙인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대할 때 패괴된 인류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패괴된 인류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대하지 마라. 그러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느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대하면 안 되느냐?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안 되느냐? 네가 그를 하나님으로 대하든, 사람으로 대하든 사람 간의 왕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솔직하게 대하는 것이다. 나는 너와 말하고 일을 처리할 때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너 역시 나를 이렇게 솔직하게 대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도 그를 계산적으로 대해야 하겠느냐? (아닙니다.)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어도 원칙에 따라 그를 대해야 한다. 그것이 옳다. 단지 내가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으니 너도 나를 솔직하게 대하고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더라도 진리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저를 계산적으로 대하는데, 보복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에게 쓴맛을 보여 주지 않고 이렇게 저를 괴롭히게 놔둔다면 저만 손해 아닌가요? 제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입니까?”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의 이런 논리가 통하겠느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통하는 말이지만, 진리로 판단하면 이는 틀린 말이다. 그가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은 악행이다. 반대로 네가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계산적으로 대하면서 보복한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똑같다. 그것은 악행이다. 하나님은 그가 너를 계산적으로 대했다고 해서 네가 그에게 앙갚음하는 것이 마땅하다거나 원칙에 맞다거나, 악행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무엇 때문에 그를 계산적으로 대하는지 보지 않는다. 너의 그 행위 자체가 계산적인 행동인지, 악행인지, 그리고 네가 그 일을 진리로 판단하는지 아니면 사람의 윤리관으로 판단하는지를 본다. 만약 사람의 윤리관으로 판단한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그가 먼저 너를 계산적으로 대했으니, 너도 똑같은 수법으로 그에게 보복하고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마땅히 그는 그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사람의 윤리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고, 법적으로 판단해도 위법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는 진리에 위배된다. 그리고 진리에 위배되는 일은 악행이며 하나님이 보기에 정죄되는 것이다. 설사 네가 앙갚음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네 앙갚음이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합당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고 나서 네가 어떤 방식으로 그를 대하는지 볼 것이다. 만약 네가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대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진리 원칙으로 그를 대하고, 하나님이 가르쳐 준 방식으로 공평하고 공정하게 그를 대한다면, 도덕적으로 사람들이 관념을 품고 정죄할 수도 있고, 법률적으로 정죄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네 이런 행동은 원칙에 맞다. 악행이 아니고,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할 때는 관념과 상상, 패괴 성품으로 대하거나, 음모와 간계를 부리지 말아야 하는데,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네가 그리스도라는 평범한 사람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면, 사람도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든 올바른 태도로 대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대하는 네 방식과 원칙이 올바른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네 태도나 사상 관점이 잘못되었다면,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스스로 반성하고 네 사상 관점을 바로잡는 동시에 끊임없이 네 행동을 단속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을 대하는 네 사상 관점, 그리고 네 처신과 일 처리 원칙이 점차 진리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진리 원칙이 네 생명이 되면, 너는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변화될 것이며, 사람을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너는 상대방을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는데도 너는 그에게 그러지 않고, 진리를 구해 진리 원칙에 따라 그를 대한다면, 이는 성장이 아니겠느냐? 변화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너를 계산적으로 대한다고 너도 그를 계산적으로 대한다면, 네가 가는 길이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걷는 길과 똑같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게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하는 네 관점에 변화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의 원칙을 따라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너도 그를 계산적으로 대하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나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반면 상대방이 너를 계산적으로 대하든 말든 그를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한다면, 이러한 입장과 관점이 옳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은혜시대에 예수님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였느냐? 남이 네 오른뺨을 때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절 때리면 되갚아 줘야죠! 그가 제 왼뺨을 때리면 저도 그의 왼뺨을 때리고, 그가 제 오른뺨을 때리면 저도 그의 오른뺨을 때릴 거예요. 그런다고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정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니다. 그가 네 왼뺨을 때리면, 너는 보복하지 말고 오른뺨도 그에게 대 주어라.”라고 말한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일부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말, 미련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요구가 사람이 보기에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그것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못 해요. 그가 제 왼뺨을 때린다면 전 꼭 되갚아 주고 말 거예요. 안 그러면 제 인격과 존엄이 모두 무너지는걸요. 제 체면도 구겨질 거고요.”라고 대답한다. 너의 이 말이 패괴된 인류 사이에서 성립되든 않든 하나님 관점에서 너의 그 말이 잘못되었고, 네 관점이 잘못되었으며, 네 행위가 잘못되었다면, 네 행동은 하나님에게 정죄된다. 정죄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누군가 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대 주라고 했는데,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이 물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느냐?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대로 실행했느냐? 네가 실행하지 않았다면 너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은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좋아하지 않을 테고, 너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 관점에서 네가 따귀로 앙갚음하는 것은 악행이다. 어쩌면 영원히 너는 이러는 게 당연하고, 자신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따귀를 때린 것이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이론이자 빈말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만 할 뿐 결코 실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에게 열납될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네 생명이 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자기 논리를 펼친다고 해도 하나님은 듣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 이유도 없이 남한테 왼뺨을 맞다니, 불쌍하기도 하지. 네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의 뺨을 때려도 좋다. 때리고 나서 기도하고 죄를 시인하면 하나님이 용서하고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누군가 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대 주라고 할 때,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고,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 관점에서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는 사람, 즉 악인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어떤 태도로 악인을 대하느냐? “내게서 떠나라! 난 너희들을 모른다.”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는 “그가 저를 계산적으로 대했는데, 제가 그를 계산적으로 대하는 게 무슨 잘못이죠?”라고 말한다. 네가 남을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점이 잘못되었느냐? 계산적으로 대하는 자체가 선행이 아닌 악행이기에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남을 계산적으로 대하면 하나님이 그를 정죄할 것이고, 네가 똑같은 짓을 저지른다면 너 역시 하나님이 정죄할 것이다. 너는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열납되도록 행동해야 한다. 네 본분은 하나님이 네게 알려 준 실행의 길과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이지, 네 논리를 펼치거나 너 개인의 존엄과 체면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너 개인의 체면과 지위, 존엄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네게서 실행되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었는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네게서 성취되었는지 여부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절 욕했으니 저도 그를 욕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옳은 말이냐? (옳지 않습니다.) “그는 늘 제게 따지고 드는데, 왜 저는 그에게 따져서는 안 되나요? 제가 따지지 않으면 멍청해 보일 것 아닙니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늘 체면을 따지고, 자기가 멍청하고 어리석게 보일까 봐 걱정한다. 사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무엇이냐? 그가 너를 멍청하고 어리석게 보고 비웃을 때 어떻게 대하겠느냐? 혈기로 대하고 사람의 방법이나 수단으로 대하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알려 준 원칙대로 대하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했느냐? 네 본분을 지켰느냐? 너는 그가 너를 멍청하다며 비웃었다고 해서 “내가 멍청하다고? 안 해!”라고 성질을 부리면서 본분을 내팽개친다. 그에게 해 주는 것도 아닌데, 내팽개치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말하겠느냐? ‘남들이 자기한테 멍청하다고 했다고 내가 준 본분을 내팽개치다니, 너는 충성심도 없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네 마음속에 정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면, 누가 너를 보고 멍청하다고 비웃든 이런 생각부터 할 것이다. ‘나보고 멍청하고 어리석다고 뒤에서 비웃지만, 난 당신과 싸우지 않을 거고 당신에게 따지지도 않을 거야. 나는 어리석고 자질도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싫어하지 않고 높여 주셨어. 내 본분은 당신이 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거야.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거라고. 당신이 날 높이 평가하든 말든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당신한테 보여 주려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아닌걸. 본분 이행은 내 사명이야. 난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해. 그리고 이 본분을 소중히 생각해야 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높여 주심과 신뢰에 부끄럽지 않게 본분에 충성을 다해야 해. 당신이 나보고 멍청하다고 했다고 본분을 내팽개쳐서 하나님께 죄송한 짓을 저지를 순 없어. 그거야말로 진짜 멍청한 짓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원칙에 맞지 않겠느냐? 이것이 혈기를 내려놓은 게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혈기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때 진정으로 변화되고 분량이 생긴 것이다. 사람과 일, 사물에 속박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가슴에 새기며, 그 어떤 일도 혈기나 감정, 기분, 개인의 기호, 욕망, 야심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속에서 가장 높고 크게 여기며, 어떤 일이 닥치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확실하게 지켜야지. 남들이 날 멍청하게 생각하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날 어떻게 보시냐지. 비록 난 어리석고 자질도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이행할 본분을 주셨어. 하나님께서 날 얼마나 높여 주셨는지 몰라. 이건 복이야!’ 네 주변에 닥친 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할 수 있다면, 너는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 원칙에 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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