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제 2 부

인류의 문명과 문화 해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범위는 매우 넓으니, 먼저 몇 가지 예를 들고 하나씩 천천히 이야기해 보겠다. 방금 모기 이야기를 했는데, 모기를 좋아하고 모기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모기를 싫어하고, 심지어 평생 모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기 문제는 큰일은 아니지만, 한 부류의 사물과 관련되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한 부류의 사람, 일, 사물의 성질을 인식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한 가지 진리를 인식하고 아는 것과 관련되고, 또 삶에서 한 부류의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실행 원칙과도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기라는 생명체는 작지만, 그것과 관련된 일은 작지 않으며 사람이 인식하고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는 내용은 거시적, 미시적 두 가지 측면의 주제로 이어진다. 방금 우리는 미시적 측면의 작은 종(種)인 모기에 대해 간단히 교제했다. 그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비교적 작은 생명체이며, 모기보다 더 작은 것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모기 같은 생물은 사람이 자주 접할 수 있고, 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비교적 미시적인 생명체다. 이 측면의 문제는 미시적이니, 나중에 교제하기로 하자. 그럼 먼저 무엇을 교제해야겠느냐? (거시적인 것입니다.) 먼저 거시적인 일에 대해 교제하겠다. 거시적인 일들은 매우 많다. 사람의 삶과 가장 가깝거나 사람이 접하고 느끼고 볼 수 있는 익숙한 것들 중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생존 환경 속 사물들 이외에는 인류가 있다. 그렇다면 인류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사람, 일, 사물 중 어떤 것들이 이야기할 가치가 있겠느냐? 어떤 것들이 사람이 인식할 가치가 있겠느냐? 인류 사회에서 가장 인식할 가치가 있는 주제는 바로 인류의 소위 ‘문명’이다. 이 문명 아래 포함된 주요 주제는 바로 서로 다른 문화이고,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사회의 교육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른 사회의 교육이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냈고, 서로 다른 문화라는 배경하에서 인류는 서로 다른 시기의 소위 ‘인류 문명’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바로 인류 문명의 근원과 그 기원이다. 동양 사회에는 동양 사회의 문명이 있고, 물론 그것만의 소위 ‘문화’도 있다. 이 문화는 동양 사회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마찬가지로 서양 사회에도 서양의 소위 문명이 있고, 서양의 문명 역시 그들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들의 문화 역시 서양 사회의 교육에서 생겨났다. 즉, 서양 사회에서 서로 다른 시기의 교육이 서양 문화를 만들어 냈고, 이런 문화적 배경하에서 서양 문명이 점진적으로 생겨나고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전해 온 것이다. 동양 문화든 서양 문화든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렇듯 동서양의 사람들을 교육하며, 서로 다른 시기에 끊임없이 한 세대 또 한 세대를 물들이고 그들에게 영향을 주며, 서로 다른 시기에 한 세대 또 한 세대에 걸쳐 전파되며, 계속해서 발전하고 이어진다. 이렇게 동서양의 문화와 문명이 점차 형성되고 펼쳐지면서, 사람들 가운데서 점차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면서, 또 동서양 사회에서 점차 형성되고 고정되면서 동서양의 주류 문화와 문명을 형성했다. 동양에는 동양의 주류 문화와 문명이 있고, 서양에도 마찬가지로 서양의 주류 문화와 문명이 있다. 동양 사회와 서양 사회는 그 본질과 형식 면에서, 그리고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 면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을 형성했다. 동양 문화든 서양 문화든 인류의 삶과 생존, 사상 관점에 지울 수도, 저항할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영향을 미쳤다. 동서양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 만큼 동서양 문화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동양 문화에는 동양 문화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요 사상 관점이 있고, 서양 문화에는 서양 문화만의 특색과 중요하게 여기는 주요 사상 관점이 있다. 그렇다면 동양 문화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겠느냐? 동양 문화의 주된 교육은 무엇이겠느냐? 대부분의 사람은 이 측면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여기서부터 시작하시는 거죠?”라며 혼란스러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본래 거시적 일들은 추상적인 요소가 많다. 너희가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주의 깊게 들으면 곧 이해가 될 것이다.

먼저 동양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동양 문화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더냐? 그 본질은 무엇이냐? 동양 문화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냐? 네가 직접 느낀 것, 혹은 보고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알게 된 동양 문화의 주된 특징은 무엇이냐? ‘문화’라고 하면 교육과 관련되는데, 가정 교육이든 학교 교육이든, 아니면 사회 교육이든 기본적으로는 다 문화와 관련되고, 한 민족이나 지역 사람들의 교육과 관련된다. 교육에서 문화적 배경이 생성되는 것은 분명하다. 동양 문화는 어떤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느냐? (동양 문화는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전통 속 본질적인 것은 무엇이냐? 전통이란 하나의 개념인데, 그 개념 아래 포함된 세부 내용은 무엇이냐? 너에게 어떻게 생각하라고, 무엇을 하라고, 어떤 방향과 목표를 위해 처신하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이 그 구체적인 교육의 본질이다. 동양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은 사회적 윤리에 대한 것으로, 이 사회적 윤리 교육에도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동양인들이 사회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사조 중에는 “이치로 다른 이를 설득하라.”가 있다. 이것이 그중 한 가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또 “먼저 예를 지키고, 안 될 때 무력을 행사해라.”, “예의상 남에게 양보해라.”, “재상의 뱃속에서 배도 저을 수 있다.”,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 “한순간을 참으면 무사 평온하고,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 등이 있다.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 “대장부는 굽힐 줄도 펼 줄도 안다.”, “사내대장부는 천하에 뜻을 둔다.” 등이 있다. 또 무엇이 있느냐? (“모든 선행 중 효가 으뜸이다.”도 해당될까요?) 그것도 해당된다. 이 밖에도 “멀리서 벗이 찾아 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도 있다. 이는 손님 대접의 도리다. 또 무엇이 있느냐?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등이 있습니다.) 동양 교육의 이 모든 이념이 이루려는 효과는 사람이 사회적 윤리를 중시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사회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를 가르치고, 이 소위 ‘예의’를 인품의 상징으로 삼는 것이다. 동양 교육은 이러한 것들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한다. 사람이 사회에서 자리 잡으려면, 먼저 매사에 남들의 탄복을 자아내고, 우러름과 존중을 받아야 하며, 이런 인성적 특징의 윤리를 갖춰야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교육을 받은 다음, 그 소위 도덕적 품격 사상으로 자신을 제약하고, 그러한 요구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동양의 이런 교육은 사람이 표면적으로 예의를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고, 겸손한 군자나 고상한 품격을 지닌 존재로 보이게 한다.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어떤 인성적 수요와 바람, 나아가 야심과 욕망이 있든 전부 억제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동양 교육의 문제에 대해 이전에 적잖이 교제한 바 있다. 이 모든 사상 교육 이념의 성질은 무엇이냐? 그것이 인성의 수요에 부합하겠느냐? 인성의 본질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동양 사회의 윤리 교육 아래에서 드러내고 살아 내는 행위는 사람의 본질, 인성적 수요와 완전히 상반되므로, 이것은 정확히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해 준다. 즉, 동양 사회의 윤리 교육에서 제창하는 각종 사상은 사람의 실제 상황, 인성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배치된다. 사람의 실제 문제를 감추고, 사람이 사회에서 더 체면 있게 살며 표면적으로 더 고상해 보이고 남들의 동조를 얻게 하기 위해서 동양 사회에는 이러한 사회적 윤리 교육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위장 교육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 위장 교육의 본질이나 그것이 이루는 효과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인품이 어떻든, 배경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모두가 스스로를 위장하고 포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 앞에서 더 존엄과 체면을 갖추고, 삶에서 자존심을 지키고, 남들의 탄복과 동조를 얻으며 살게 한다.

동양의 이러한 위장 교육의 배경 아래에서 동양인들은 무엇을 배웠겠느냐? 동양인들은 참는 법을 배웠다. 동양의 사상 교육은 동양인의 인성에 한 가지 특징을 부여했는데, 사상적 측면에서 보든 행위 측면에서 보든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참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회적 시기든, 어떤 통치 계급 아래에서든, 혹은 어떤 생활 환경 속에서든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했을 때 참는 법을 배우고, 진실한 정서와 생각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좋게 말하면 참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저 위장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위장하겠느냐? 동양의 사회적 윤리 교육이나 동양 문화에서 얻은 각종 사상 관점, 처신하는 수단, 처세 철학으로 자신을 위장해 표면적으로 겸손한 군자, 고상한 품격과 인격, 존엄을 갖춘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한편, 사람들에게서 우러름과 동조, 탄복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회의 윤리 교육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으로, 주로 참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이 ‘인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것은 매사에 참고, 이치로 다른 이를 설득하며, 사람들과 교류할 때 먼저 예를 지키고 안 될 때 무력을 행사하며, 인과 의를 다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대단히 도량이 넓고 자애로움과 포용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스스로를 아주 위대하고 고상하게 위장하고, 심지어 인류 윤리의 최고점에 서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의 이런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동양인의 문화생활은 기본적으로 이런 사상과 이념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이 문화로 끊임없이 다음 세대를 물들이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외치는 사상 중 하나로 “큰 협객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큰 협객이란 어떤 이미지겠느냐? 무협 영화의 큰 협객 대부분은 품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삿갓을 쓰고 몸에는 검이나 칼 한 자루를 찬 채 무표정하게, 또 공평무사하게 천하와 백성, 창생을 가슴에 품으며, 곳곳에서 의를 행하고 덕을 쌓고 선을 행하는 한편, 불의를 보면 칼을 뽑아 돕고, 나서야 할 때 나선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 큰 협객의 이미지이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큰 협객이 지니는 가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만드는 이유는 모든 동양인의 내면에 사회와 인류에 대한 일종의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혹은 삶 속에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자신은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이 사회의 문화에 결박되고 속박되지 않아도 된다는 갈망 말이다. 이런 수요가 있기 때문에 문예 작품 속에서 계속 이런 인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 측면에서 보자면 문화적 선전의 수요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시청자의 수요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사회에서 너무 오래 고통스럽게 참으며 살아왔기에 발산할 곳이 필요하지만, 마땅한 분출구가 없다. 오직 문예 작품에서 창조된 영웅과 큰 협객들의 모습을 통해서만 그 수요를 충족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영화나 드라마, 캐릭터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찬양받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큰 협객들의 의거나 불의를 보면 칼을 뽑아 돕는 행동이 대중의 심리적 수요에 딱 들어맞을 때, 그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한다. “맞아도 싸지! 그러게 누가 나쁜 짓을 하래? 누가 백성을 해치래?”라고 말이다. 그들의 환호성은 동양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참아 왔던 고통을 반영하며, 이와 동시에 그들이 사회와 통치 계급으로부터 받아 온 중첩된 무거운 압박과 유린을 반영한다. 그래서 이런 엔터테인먼트 작품이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환영받고, 인정과 기대를 얻어 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동양의 사회적 윤리 교육이 가져온 ‘인내’ 때문에 동양인들은 사상과 인성 측면에서 최대한도로 결박되고 제약받아 인성과 사상이 몹시 왜곡되었다. 이 왜곡은 어떤 부분에서 드러나겠느냐? 모든 사람이 공직자와 부자를 미워하고, 불공평한 일을 보면 마음속으로 증오하며, 곧바로 통치 계급이나 부자를 연상하고, 자신의 모든 고통이 통치 계급이나 부자들 때문이라고 느낀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이 밖에, 동양의 사회적 윤리 교육이 가져온 것은 ‘인내’라는 인품이기에 동양인들은 사상적으로 단단히 결박되고 묶여 있다. 동양인은 서양인에 비해 사상 측면에서 독립이나 해방에 도달하기 어렵다. 즉,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동양의 사회 환경하에서는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누구에게나 노예근성이라는 특성이 있기에 독립적으로 어떤 문제를 생각하게 하거나, 원칙과 계획에 따라 한 가지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동양인의 인내는 동양인들로 하여금 사회와 인류, 각 계층을 적대시하게 한다. 그리하여 동양인들은 꽤나 교활한 인성적 특징을 갖게 됐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양아치 기질’이다.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사람은 사회나 업무 환경, 가정에서 오는 온갖 압박과 결박을 감당해야 한다. 그로 인해 자신의 인성 안에 있는 정상적인 수요, 감정적, 육체적 정상 수요가 제대로 공평하게 해결되지 못해 모두의 마음속에 세상을 비웃고 증오하고 비관하는 인생 태도가 생겨났다. 이러한 인생 태도 때문에 동양인은 삶에 희망이 아득하고, 생존 동력을 거의 느끼지 못하며, 무슨 일을 하든 의욕이 없다. 그리하여 교활하고 유들거리는 처세 태도가 생겨났는데, 이 교활하고 유들거리는 태도를 요약하면 ‘양아치 기질’이다. 이 ‘양아치 기질’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무슨 일을 할 때든 세상을 비웃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본분 이행 태도가 제멋대로여서 하고 싶으면 좀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한다. 또 사역으로 조금만 압박감을 느껴도 힘들다고 아우성치며 쉬려고 한다. 진리를 교제해 주며 그런 행동은 사역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알려 주면, “제가 알 바인가요. 어쨌든 지금은 쉬고 싶네요. 놀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일에 대해서든 삶에 대해서든 심지어 인생이나 신앙에 대해서도 건성이고 진지하지 않은 데다가 세상을 비웃는 태도를 지닌다. 어디서든 함부로 설치려 하고, 벽에 부딪혀도 상관없다고 여기며, 통제받는 걸 견디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자유가 생기면 바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자유를 잃으면 하늘과 땅을 원망한다. 바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양아치 기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동양의 사회 환경 아래에서 생겨난 동양인 특유의 인품이다. 어떤 이들은 인내를 중시하여 무슨 일이든 참는데, 그것도 매우 오래, 인내심과 강인함을 갖고 참는다. 어떤 고통이든 견디고, 어떤 환경에서든 생존하며, 어떤 환경에서든 웃는 것이다. 밤이 되면 잘 시간에 자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홍수가 나서 집과 농지, 가축이 모두 잠겼는데도 별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홍수 속에서 좋은 물건을 주워 한탕 하겠다는 생각뿐이다. 사람들이 말리며 “그렇게 위험하게 물건을 주우면 안전을 보장 못 해요!”라고 말하면, 그는 “홍수가 난 건 돈을 벌 기회가 온 겁니다.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한가요!”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또 “땅도 잠기고 곡식도 떠내려갔는데, 정부에서는 우리를 구제해 주지 않고, 구호 인력도 오지 않네요. 앞으로 어떻게 살죠? 사는 게 정말 너무 고통스럽네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재난이 닥치면 자기 자신에게 기대야죠. 하늘은 사람을 막다른 길에 빠뜨리지 않는다잖아요. 홍수가 난 건 돈을 벌 좋은 기회가 온 거예요. 밑천 하나 없이 한 방에 큰돈을 벌 수 있잖아요. 잃은 게 좀 있더라도 주운 것으로 손실을 메우면 되죠. 오히려 이익을 볼 수도 있다고요!”라고 말한다. 보아라, 정상인이라면 재난이 닥쳐 손해를 보면 괴로워할 것이다. 그런데 동양인 중에는 이런 ‘영웅’이 있어서 어떤 재난이 닥쳐도 순응하고 돈 벌 기회까지 찾는다. 그는 걱정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으며, 정부가 구제해 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재난을 여러 번 겪어 익숙해진 것처럼 말이다. 중국 사회가 이렇지 않으냐? 그래서 중국 사회의 이러한 교육 아래에서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보는 문예 작품이나 여가를 보내는 방식 대부분은 자조적이고 자기 풍자적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재미를 얻고 마음속의 억압을 조금이나마 해소하지만, 그 후의 삶에서는 여전히 위장하고 참는다. 정부가 국민을 어떻게 대하든 이미 익숙해져서 죽 한 그릇만 있어도 만족하며, 죽음이 코앞에 닥치지 않는 이상 들고일어날 궁리를 하지도 않는다. 국민들은 이런 일을 모두 체념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 하늘은 사람을 막다른 길에 빠뜨리지 않아. 그냥 이렇게 살자!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건 다 사치스러운 욕망일 뿐이야. 중국인은 이런 박복한 팔자를 타고났으니, 살아 있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이는 극도로 미련하고 무감각한 것 아니겠느냐? 이들에게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이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는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동양에서 창조된 대부분의 문예 작품이 반영하고 제창하는 것은 서양과 큰 차이가 있다. 동양의 문예 작품도 사회의 불공평함을 반영하긴 하지만, 이는 감독이나 작가가 진정으로 제창하고자 하는 사상이 아니며, 관객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문예 작품에서 진정으로 제창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이 역시 동양의 사회적 윤리 교육이다. 그것은 주로 애국심을 보여 주며,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고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라고, 사내대장부는 천하에 뜻을 둬야 한다고, 길 가다가 불의를 보면 칼을 뽑아 도와야 하며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제창한다. 또 무엇을 제창하겠느냐? “한순간을 참으면 무사 평온하고,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 등이 있다. 그들이 제창하는 인성은 사실 공허하며, 사람의 상상과 추론이다. 그들이 이렇게 인성을 제창하는 것은 전적으로 통치 계급의 정권 안정을 위해서이다. 국민들이 영원히 통치 계급을 위해 마소처럼 일하게 하고, 어떤 반항도 허용하지 않으며, 이런 공허한 사상으로 사람들을 마비시키고 미혹하여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수요와 일시적인 심리적 수요를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협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들이 무엇을 제창하더냐? 의협심,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선뜻 칼을 뽑아 돕는 큰 협객이 될 것을 제창한다. 소위 ‘큰 협객’이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자’를 뜻한다. 의협심을 제창하여 국민들이 이러한 인물을 칭송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동경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양의 문예 작품은 또 무엇을 제창하느냐? 영웅주의를 제창한다. 국가와 민족, 한 지역과 그 지역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며, 민족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칠 것을 제창한다. 요컨대, 동양의 사회 환경, 특히 중국의 사회 환경에서 생겨난 무협 인물의 전기와 전설들은 전통적인 것이든 현대적인 것이든, 허구든 실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든 모두 사람들에게 무아(無我)와 망아(忘我)에 도달하라 가르치고, 이를 교육의 주요 정수와 주제로 삼아 높은 사회적 품격을 갖추게 한다. 무아와 망아란 자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대아(大我)가 있어야 소아(小我)가 있고, 국가가 있어야 가정이 있으며, 좋은 삶도 있다고 제창한다. 사람에게 이런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기적으로 굴거나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생활과 생존,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위해 어떤 희생이나 노력도, 나아가 어떤 분투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대신에 국가와 사회, 인류, 민족의 대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바치라고 한다. 이러한 교육을 통칭하여 ‘위장 교육’이라 한다. 소위 위장 교육은 비현실적이고 인성의 수요에 부합하지 않으며, 인성 수요, 사람의 선천적인 본능, 기본적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을 기초로, 국가와 민족, 공허하고 무의미한 일을 위해 헛된 희생을 하게 한다. 이렇게 자기를 희생하는 품격은 전적으로 동양 사회가 사람의 인성 안에 강제로 주입한 것이다. 소위 강제 주입이란, 인성적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고, 선천적 본능으로 생긴 것도 아니며, 선천적 본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천적 자유 의지와 주관적 의지가 이르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통치 계층이나 사회학자들이 사람의 사상에 강제로 주입한 것으로, 사람을 오도하거나 강제로 이러한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받아들이게 한 다음, 소위 고상한 품격이라는 큰 명분으로 교육하여 벗어날 힘도 내지 못하게 하고, 감히 벗어날 엄두를 내지도 못하게 한다. 이러한 교육에서 벗어나거나 이 교육을 뚫고 나간다면, 이 교육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는 전 사회와 민족에 대적하는 것이 되고, 대역무도한 사람이 되며, 비인류,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고립된 생존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고 이 사회와 교육을 몹시 증오할지라도 벗어날 힘도 용기도 없으며, 더욱이 “아니요.”라고 말할 배짱도 없다. 그리하여 그저 울분을 참으면서 조용히 받아들일 뿐이다. 즉, 무력하여 반항하지 못하고 침묵한 채 참기만 하는 것이다. 만약 참지 않으면, 크게는 사회가 너를 비난하고 버릴 것이고, 작게는 가족과 친지들이 너를 버리고 멀리하고 고립시키며, 심지어는 대역무도하다고 정죄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릴 때 부모는 네게 “밖에 나가면 어른들에게 인사해야 한다. 엄마, 아빠보다 어린 사람은 삼촌, 이모라고 하고, 나이가 많은 분은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해야 해. 누가 뭔가를 주면 반드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렴. 다른 아이가 때리면 참아야 해. 참다 참다 정말 못 참겠으면, 그때 받아치렴. 참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참아야지.”라고 가르쳤다고 해 보자. 그러다 어느 날 네가 외출했다가 누군가를 보고도 부끄러워서 인사를 못하면, 부모는 체면이 구겨져 집에 와서 너를 책망하니, 그 후로 너는 사람을 만나면 재빨리 인사하게 된다. 맞지 않으려면 아무리 민망하고 싫어도 억지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사람은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참게 된다. 이렇게 작은 일에서조차 그렇게 해야 하며,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 불편해 한 번이라도 네 멋대로 군다면, 사회에서 비난받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가정과 부모조차 너를 꾸짖고 질책할 것이다. 커서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체면을 세우고 사회에서 자리 잡기 위한 것임을 알지만, 어릴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책망을 들어야 하며,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부모에게 혼나거나 매를 맞아 평생 잊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사회의 큰 배경하에서 너는 이 소위 고상한 윤리 교육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이 최종적으로 네 인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든, 어떤 인품이나 특성을 가져오든 결국 그 결과는 오직 사람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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