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제 5 부

사람이고, 정상 인성을 가졌으니, 시비에 밝은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지 못해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도 양심과 이성으로 단순한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실생활에서 접하는 일부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들에 대한 분별력과 인지 능력이 어느 정도는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인성의 상식, 사람의 생존 규칙, 그리고 사람이 늘 마주하는 일부 사람과 일, 사물들을 분별할 수 있다. 흐리멍덩하게 살지 않고, 인간 세상의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대해 스스로 분별하고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생각과 입장, 그리고 올바른 태도도 지니고 있다. 이런 사람은 삼십 대부터 인생의 여러 측면의 일을 차츰 접하게 되는데, 설령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보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지 않았더라도 오륙십 대가 되면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차츰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긍정적인 사물에 따라 살아가고, 긍정적인 사물의 규칙을 준수하게 된다. 일부 부정적인 사물에 대해서도 분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음속 깊이 멀리할 수도 있게 된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세상의 흐름이나 사람들 사이의 처세 철학과 말을 따르게 되면, 그는 양심에 어긋난다고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마음속으로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생존을 위해, 그리고 잠깐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그의 본심이 아닌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나면, 사람의 삶과 생존 등 각 측면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과연 뭐라고 말씀하는지, 사람의 생활 속 난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정확히 어떻게 말씀하는지, 사람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등에 더 집중한다. 그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갈망한다. 답을 얻고 나면 그는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기가 너무 어렵다거나 인성의 필요에 너무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진리들이야말로 바른길이자 사람이 갖추고 해내야 하는 것이며, 사람이 살면서 갖추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렇게 산다면, 사람은 진정으로 양심과 인성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으며, 이렇게 살아야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안심이 되며 기쁨과 평안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래야만 희망과 삶의 의욕이 생기며 각종 사악한 세력과 사악한 흐름, 그리고 인류의 공허한 삶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는 마음속 양심의 작용으로 하나님 말씀의 다방면에 걸친 내용, 가르침, 공급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마음 깊이 수용한다. 그리고 그는 추구를 통해 진리를 얻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말씀이 점점 더 많이 선포되고 점점 실제적이고 자세하게 공급될수록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갈망이 점점 더 충족된다. 들으면 들을수록 좌불안석이 되고 복잡하다고 느끼거나 흐리멍덩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들을수록 명확해지고, 일을 간파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길이 생겼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앞길에 희망과 빛이 보이고, 진리를 실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이 생겼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점점 안심되고, 하나님을 믿는 길이 옳다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매일 치렀던 대가, 매일 쏟았던 에너지나 피와 땀이 모두 값지고 의미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확증을 얻은 것이다. 비록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고,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충족되었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은 곧이어 굳게 다짐하고 계획을 세우며 각 측면의 진리에서 스스로 실행하고 진입하고자 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각 측면의 진리 원칙, 각 측면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스스로 실천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생활 속 본인의 행동과 처신의 준칙, 생명 실제가 되게 할 것이다. 예전에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그저 글귀와 도리밖에 말할 줄 모르고, 일이 닥치면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처럼 편견을 가졌다.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삶이 따분하다고 생각했고, 아무런 목표도 기대도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았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될수록 더욱 명확해지고 진리는 교제할수록 더욱 분명해지니, 길이 점점 환해지고 명확해지며 나아갈 길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그리고 한 부류의 사람을 만날 때마다 따를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있으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실제적이고 좋다고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른길이며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서 사람다운 모습으로 사는 건 더없이 의미 있고 값진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갈망하고 실행하는 동시에 그 진리에 끊임없이 진입하고 끊임없이 좋은 수확을 거둔다.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그의 양심과 인성의 갈망과 욕구가 충족되고, 이와 함께 그의 생명도 조금씩 변화한다. 비록 늘 패괴 성품을 표출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일이 닥치면 자기도 모르게 패괴 성품과 육, 그리고 어리석고 그릇되며 터무니없는 자신의 사상 관점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와 동시에 좋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행동하면 그는 양심적으로 늘 불안감을 느끼고, 자신의 패괴 성품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쉬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작용으로 늘 가책을 받고 죄책감을 느끼고 통회하며, 늘 자기 행동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회개한다. 이 모든 게 양심의 작용이다. 사람이 양심을 지니면 이런 느낌이 있고 이런 모습을 보이며, 늘 반성하고 늘 회개하며 뉘우치는 생활 양상을 보인다. 비록 늘 실패와 좌절에 직면하고, 늘 잘못을 저질러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을 받지만, 늘 회개하며 늘 변화하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그의 목표는 변하지 않고, 결국 좋은 결과와 좋은 수확도 거두는 것이다. 늘 가책을 받고 죄책감을 느끼며, 늘 뉘우치고 회개하기도 하니, 이는 좋은 현상이다. 이는 그가 이미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진정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패괴 성품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요소도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닥치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고 진리를 구할 수 있다.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대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황당하며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전에 그는 어려움이 닥치면 소극적으로 변했지만, 이젠 그러지 않고 올바르게 대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비록 소극적으로 변할 때도 있지만,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는 않으며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한다. 그의 양심이 그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알려 주고, 그는 이렇게 할 때 마음이 편안하고 참소를 받지 않으며 갈수록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실행할수록 그는 범사에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진리를 구해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고, 그것이 옳은 길이며 그렇게 실행하면 수확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수확이 생기면, 사람은 자기와 하나님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고, 자기 내면의 생명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패괴 성품은 점점 주도권을 잃어 가고, 사람에 대한 결박과 속박도 줄어든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바람은 점점 커지고, 진리를 실행하여 패괴 성품을 이겨 내는 힘도 점점 커진다. 그러면 사람은 이런 느낌이 들 것이다. 자기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구원에 이를 희망이 있다는 느낌, 자기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느낌 말이다.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이렇고, 차츰차츰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사람이 보이는 모습이 바로 이렇다.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최소한 양심이 규제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네게 양심이 있다면 네 양심은 분명 규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이 규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너의 그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네게는 양심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양심을 지녔다면 시비에 밝을 것이고,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할 수 있으며, 부정적인 사물을 버리고 긍정적인 사물을 택할 것이다. 사람이 만약 양심을 지녀서 시비에 밝다면,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실행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택할 것이고, 진리 원칙대로 행동할 것이다. 만약 네가 이번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다면, 너는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고, 다음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그때도 가책을 받을 것이다. 만약 네가 양심의 지각을 지녔고 시비를 깨달았으며 이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는데도 잘못을 거듭 저지른다면, 너는 양심으로부터 더 강한 가책과 참소를 받을 것이며, 양심에서 비롯된 생각대로 올바른 선택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잘못을 저지르면 양심의 가책을 받긴 하지만, 십 년, 이십 년 동안 가책을 받아도 여전히 진리를 실행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말하건대 네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너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네가 뉘우치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며, 네가 말하는 양심이 네가 올바른 길을 택하도록 통제하는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네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너는 인성도 없는 것이다. 네가 “그래도 저는 옳고 그름을 아는데, 어떻게 제게 양심이 없다고 할 수 있죠?”라고 한다면, 네 마음이 너무 강퍅해서 양심이 이미 제 기능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네가 정말 인성의 양심을 지녔다면, 잘못을 저질러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인성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되고 양심이 속에서 너를 참소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건 옳지 않아. 얼마나 인성이 없는 행동이야!’ 늘 이렇게 질책하는데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오직 양심이 없는 사람만이 자각하지 못한다. 정말 양심을 지녔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는데도 계속 강퍅할 수 있겠느냐? “전 십 년, 이십 년간 가책을 받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던데요?”라고 한다면, 양심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양심도 없으면서 인성을 지녔다고 한다면, 이는 기만이 아니냐? 인성을 지녔는데 어떻게 양심이 없을 수 있느냐? 양심이 없다면 인성도 없는 것이다. 인성이 없다는 징표 중 하나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양심이 있다고 하면서 어찌 시비에 어두운 것이냐?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도 어찌 진리 추구를 동경하지 않느냐? 너는 “제 마음은 진리를 추구하길 원하고 진리를 실행하길 원합니다.”라고 하는데, 그럼 너는 어떤 진리를 실행했느냐?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네 마음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길 원한다면, 어찌 진리를 실행하지 않느냐? 이는 기만이 아니냐? 사기꾼의 거짓말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이는 마치 큰 붉은 용의 행태와 같다. 큰 붉은 용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일이라고 선전해 놓고,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바른길을 가면, 미친 듯이 체포하고 박해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진리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지도 못하게 하면서 오직 당만 따르고 당의 말을 듣는 것만 허용한다. 그러다 결국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져 징벌받으면 기뻐한다. 그렇다면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라는 큰 붉은 용의 말이 사실이냐, 거짓이냐? 사탄은 늘 사람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지 못하고 사람을 인생의 바른길로 이끌지 못한다. 그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만 주입해서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노름과 계집질에 빠지라고, 사악한 길을 가라고, 세상과 명리를 추구하라고, 서로 다투고 괴롭히라고 한다. 그러면서 바른길은 못 가게 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곁에서 빼앗아 간다. 결국 사람은 명예와 이익을 얻지만, 몸과 마음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며, 마음속에 하나님은 없고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만 가득하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이 지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적대하기 시작한다. 사탄의 이런 행동이 사람을 위하는 것이냐? 이는 사람을 해치고 망치는 것 아니냐? 시비에 어두운 사람은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 인성이 있고 시비에 밝은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양심도 있고요.” 그렇다면 오늘 교제한 내용에 비춰 보면서 자신이 양심을 지녔는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는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통회하고 죄책감을 갖는지, 진실하게 회개하고 변화하는지 살펴보아라. 네가 만약 생명 진입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는데도 양심이 제 역할을 한 적이 없다는 증거다. 양심이 제 역할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은 어찌 된 일이겠느냐?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네가 양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생명 진입은 없지만 진리라는 진리는 전부 깨달았어요.” 진리를 깨달았는데 왜 실행하지 않느냐? 왜 진입이 없느냐? 지금껏 네 생명에 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느냐? 진리를 깨달아 놓고 실행하지 않다니, 양심이 어디로 간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논쟁까지 벌인다. “하나님을 믿은 지 이렇게나 오래됐는데, 제게 양심이 없다면 이렇게 많은 것을 버리고,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이토록 많은 대가를 치를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기꺼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을까요?” 네게 양심이 있다면, 그토록 많은 진리를 듣고서 네 양심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 네가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너를 단속했느냐? 네 행동과 생각을 통제했느냐?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고, 많은 도리를 이야기할 줄 알며, 그 많은 고생을 견디고 수많은 대가를 치를 수 있었으면서 왜 네 양심은 네가 원칙을 어기지 않고 원칙대로 행동하도록 네 행위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냐? 그렇게 양심과 인성이 있고 그렇게 많은 진리를 깨달았으면서 왜 실행하지는 못하느냐? 어째서 그렇게 대놓고 원칙을 어기고 교회 사역을 교란하느냐? 네게 양심이 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하면서 네 생명에 변화가 생겼느냐?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아무런 진리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네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양심이 없다면, 제가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너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 힘쓰고 있는 것이다. 힘쓰는 데에는 양심이 필요하지 않다. 힘만 들이면 그만이다. 이는 ‘힘쓰는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고, 생명 진입과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힘쓰는 것만 추구하며 힘만 들이려 한다.’라는 말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힘쓰는 것의 특징이 무엇이냐? 바로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 하며, 그 속에서 기쁨을 찾고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찾으며, 복받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과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야심을 채우고, 이를 통해 복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힘쓰는 일을 시키거나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라고 하면, 그는 의욕이 넘친다. 그런데 원칙대로 행동하고 진리를 실행하라고 하면 의욕을 잃고 멍해져서는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른다. 심지어 난색을 표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더러 힘들이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라고 하면, 얼마나 고생스럽든 상관없어.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는 건 나를 난처하게 하는 거잖아? 군말 없이 힘들이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만 해도 잘하는 건데, 왜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그러지? 너무 무리한 요구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일만 끝내면 그만이지. 제대로 못 하면 차근차근 바로잡으면 되고!’ 그는 힘만 쓰고 싶어 한다. 힘쓸 때는 꽤 의욕적이지만, 진리를 실행할 때는 무기력하고, 생명 진입에 관해 이야기하면 더더욱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면서 자기가 좋은 사람인 줄 알고 늘 이렇게 말한다. “전 양심이 있고 선량하며 본분도 요령 피우지 않고 있는 힘껏 이행하는 사람입니다. 가정과 직장까지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요. 제가 왜 이렇게 의욕적이겠습니까? 태생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죠!” 사실 그는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했고, 더구나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줄도 모른다. 무식하게 힘쓰는 것밖에 모르면서 자기가 괜찮은 줄 안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양심과 이성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만약 정말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억지 논리를 늘어놓을 수 있겠느냐? 어째서 진리를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느냐? 양심이 있고 인성이 있다면, 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준칙이 무엇이고, 모든 일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마음을 다해 들어 보지 않느냐? 만약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진리를 지각하지 못한다면, 너는 양심이 없고 인성이 없는 놈이다. 무식하게 힘만 쓰면 그 대가로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그 대가로 구원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불가능한 일이다. 그 길은 통하지 않는다. 네가 기꺼이 힘쓰려 하고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며 고생도 좀 견딜 수 있어서 남들에게 약간 충성스러워 보이더라도 끝까지 충성을 다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언제 네 짐승의 성품이 발작하여 못된 짓을 저지르고 방해하며 교란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정리해 내보내야 한다. 최근 교회에서 몇 사람을 정리해 내보내지 않았더냐? 이런 부류는 말은 그럴싸하게 한다. 누가 들어도 그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실질적인 일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맞설 뿐 아니라 하나님 집에도 맞선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아니냐? 하나님 집에서 그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본분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성실하고 올바르게 이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주인 노릇을 하고 권세를 잡으려 하며, 교란하고 망치려 한다. 어느 정도로 교란하느냐? 심지어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참견하면서 왈가왈부하고 가로막으며 교란하려 한다. 나까지 교란하는데, 내가 그를 가만히 둘 수 있겠느냐? 만약 내 개인 생활만 교란한다면,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 집에서 사역하고 하나님 선민을 위해 실질적인 일을 하는 것인데, 이것까지 교란하고 망친다면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정리해 내보내야 합니다.) 하나님 집에는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정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전 억울합니다. 이게 당신께 죄짓는 행동인 줄 몰랐어요. 이게 상부와 하나님께 대드는 행동인 줄 몰랐습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라고 한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의적인 것이다. 너는 몇 년 동안 설교를 들었느냐? 네게 양심이나 인성이 있느냐? 네가 사람이라면, 그리고 인성이 있고 양심과 이성을 지녔다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행사를 고의로 교란하고 망치는데, 그러고도 사람이겠느냐? 이런 자는 마귀가 아니냐? 만약 사람이 정말 양심과 이성, 그리고 인성을 지녔다면, 설사 보통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교회 사역과 형제자매에게 유익하다면 그것을 망치지 말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내가 친히 하는 일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는 중간에서 교란하고 방해하려 한다.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한다. 이는 완전히 마귀가 되어 버린 것 아니냐? 내가 말하건대, 이 놈은 심각한 악을 행했으니,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집에는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이 있으니, 그를 제명 처리해라. 그렇게 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 (합당합니다.) 만약 그가 생활 면에서 개인적인 기호를 따를 뿐이라면 그건 괜찮다. 예를 들어, 내가 “나는 면 요리를 즐긴다.”라고 하자 그가 “전 면 요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밥을 차릴 때 당신께는 면 요리를 해 드리고, 저는 밥을 해 먹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이 일은 교회 사역과 관련되지 않고 진리 원칙과 관련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인성이나 양심과 관련되지도 않으니, 개인적인 기호를 따라도 된다. 하지만 교회 사역에 관련된 일에서는 안 된다. 만약 제멋대로 굴고 방해하며 교란한다면, 그것은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대놓고 행정 법령을 거스르겠느냐? 어떤 사람이 공공연하게 진리와 하나님 집에 반기를 드느냐? (마귀입니다.) 그런 무모한 흐리멍덩한 사람과 짐승들은 이렇게 반기를 들고 교란할 수 있다. 특히 마귀는 더더욱 그럴 수 있다. 하나님 집에서 무슨 일을 하든 마귀는 늘 교란한다. 마치 귀신 들린 사람처럼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교란한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교란해 놓고도 의식하기는커녕 자기는 교란하지 않았다고, 무고하다고 생각하면서 변명한다. 이런 부류는 아무것도 교제해 줄 필요 없이 곧장 제명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마귀이다. 그는 영영 변하지 못한다. 너더러 꼭 진리를 추구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범사에서 진리를 실행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규율은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네가 규율과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모르고 행정 법령을 거스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러고도 네가 인성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그러면 너는 인성이 없고 마귀이다. 마귀는 저도 모르게 악을 행한다.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며 모독하는 것은 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다. 다른 사람이 부추기거나 주입하지 않아도 그는 자연스럽게 그런 악을 행할 수 있다. 이는 마귀의 본성에 지배된 것이다.

오늘은 사람의 양심과 이성에 관련된 시비에 밝은 문제에 대해 교제했다. 교제를 통해 이 측면을 분명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진정한 사람은 양심을 지니고 있고 시비에 밝으며 양심이 제 역할을 한다. 어떤 사람이나 일, 사물에 직면하고 어떤 문제를 마주하든 양심은 최소한 첫 번째 관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네가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판단하고 변별하도록 도와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방향을 잡고 앞길을 살피며, 선을 넘지 않게 처신하도록 거들어 주어서 결국 올바른 취사선택을 하여 바른길을 걷도록 도와준다. 물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나 하나님을 오래 믿어서 기초가 있는 사람은 양심의 작용으로 결국 긍정적인 사물을 택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을 택하여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양심이 인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양심은 사람이 올바른 길로 걷도록 인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택하도록 규제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한 사람에게 양심이 없다면, 그는 긍정적인 사물과 올바른 길을 택하지 못할뿐더러 무슨 일을 하든 양심으로부터 최소한의 단속과 규제도 받지 않을 것임이 뻔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너무 쉽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다. 그가 만약 동물에서 환생했다면 악마가 하는 짓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고, 악마나 마귀 부류는 그보다 더 악한 짓도 저지를 수 있으니, 너무나도 끔찍하다. 그래서 양심을 지니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한 사람에게 자기 행위를 규제하고 자기가 올바른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양심이 없다면, 그 사람이 선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일 수밖에 없고, 행하는 바는 부정적인 사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 인한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가 대놓고 진리와 사물의 발전 규칙을 어기며, 거리낌없이 모독하고, 진리와 하나님이 행한 모든 사역을 판단할 수 있고, 심지어는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스르며 하나님을 거침없이 욕하고 정죄하고 모독하기까지 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마귀 사탄과 완전히 똑같다. 그는 마귀 사탄이 하는 모든 악을 행할 수 있고, 마귀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으며, 마귀 사탄이 말하는 모든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 억지 논리를 늘어놓을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전형적인 마귀 사탄이다.

오늘 예배 시간에 나눈 교제를 듣고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인성이 있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을 지녔고, 시비를 확실히 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비에 밝은 측면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례와 결부해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부정적인 사물인지 무척 명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일이 닥쳤을 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올바른 추구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사물은 동경하고 추구해야 하며, 부정적인 사물은 증오하고 내쳐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인성에 갖춰져 있는 양심과 이성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만약 이 두 가지 기본 조건을 갖추었을지라도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조금 깨달았다 해도 실행하지 않아 결국 진리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양심과 이성은 구원받기 위한 기본 조건일 뿐이다. 어떤 길을 가는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만약 정말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양심의 규제를 받아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는 선택을 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길을 가도록 규제하고 인도해 주는 양심이 있는데도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육을 저버리고 자신의 육적인 이익과 관련된 것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으며,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여전히 구원받을 희망이 없는 것이다. 이 구원받을 희망은 인성의 양심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추구하면서 치를 수 있는 대가,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결심, 소망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양심은 단지 구원받기 위한 기본 조건을 제공하고, 진리를 실행할 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어서 네가 양심의 규제를 받아 올바른 길에 들어설 기회를 줄 뿐이다. 즉, 네가 올바른 길에 들어설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고, 구원받을 희망이 상대적으로 커서 50퍼센트 이상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100퍼센트는 아니다. 그러니 스스로 양심과 인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자기는 양심과 이성이 있으니 좋은 사람이라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구원받는 건 따 놓은 당상이라고 자부하지 마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말해 두는데, 너는 이 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네가 양심을 갖추고 있고 인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를 통해서는 네가 하나님이 택한 대상, 하나님에게 부름받은 대상이라는 점만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네 개인의 추구이다. 네 양심이 늘 지각하여 네 행동을 규제하고, 네가 올바른 길을 택하도록 규제한다고 해도 네가 늘 양심을 어기고 올바른 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또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고 늘 개인의 이익과 명예, 체면을 지키면서 자신의 앞날과 야심, 욕망만 생각한다면,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희망은 희박하다. 번번이 자기 손으로 망쳐 버린 것이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또 보자!

2024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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