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예수의 비유

씨 뿌리는 비유(마 13:1~9)

가라지 비유(마 13:24~30)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누룩 비유(마 13:33)

가라지 비유 설명(마 13:36~43)

보화를 감추는 비유(마 13:44)

진주를 찾는 비유(마 13:45~46)

그물을 치는 비유(마 13:47~50)

첫 번째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이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인데, 씨를 뿌리는 것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두 번째는 가라지의 비유이다. 농작물을 심어 본 자나 성인이라면 가라지가 무엇인지 다 알 것이다. 세 번째는 겨자씨의 비유이다. 겨자가 무엇인지는 너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보도록 해라. 네 번째는 누룩의 비유이다. 많은 사람이 누룩은 일상생활에서 발효에 쓰인다는 사실을 안다. 그 아래의 여섯 번째는 보화를 감추는 비유이고, 일곱 번째는 진주를 찾는 비유, 여덟 번째는 그물을 치는 비유이다. 이 모든 비유의 소재는 사람의 생활에서 취했으며, 모두 사람의 실생활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비유는 사람에게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느냐? 바로 하나님이 정상인이 되어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생활상의 언어와 인간적인 언어로 사람과 소통하며,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사람의 다양한 생활 방식을 직접 보고 겪었으며, 이 생활 체험들은 신적 언어를 인간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교재가 되어 주었다. 물론, 생활 속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인자의 인성 경험을 풍부하게 해 주기도 했다. 그는 사람에게 진리와 하나님 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할 때, 위의 몇 가지 비유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알려 주었다. 이러한 비유는 다 사람의 생활과 관련이 있으며, 이와 동떨어진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예수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농부가 씨 뿌리는 모습을 보았고, 가라지와 누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사람이 보화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기에 보화를 감추는 비유와 보물을 찾는 비유를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예수는 평소 고기 잡는 사람들이 그물을 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예수는 이렇게 인류의 생활과 관련된 행위들을 직접 보았고, 하루 세 끼 먹으며 일하고 쉬는 등 평범한 사람의 삶을 체험했으며, 타인의 생활도 직접 목격했다. 이 모든 것을 친히 경험하고 보며 예수가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삶을 살지, 더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갈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실제 생활을 경험하며 예수는 삶의 고단함을 보았고,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류가 사탄의 권세와 죄 가운데서 힘겹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친히 인류의 생활을 경험하는 동시에, 패괴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몸소 느꼈다. 또한,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류가 사탄과 죄악에 의해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받는 참상을 보고 느꼈다. 예수는 이러한 것들을 신성으로 보았느냐, 아니면 인성으로 보았느냐? 예수의 인성은 매우 실제적으로 존재했기에 그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본질, 즉 신성으로도 보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자신, 그러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직접 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본 예수는, 그때 성육신으로 담당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육신에서 담당할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한지, 그가 직면할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서 무기력한 인류를 볼 때마다, 율법 아래에서 불쌍히 살며 힘없이 발버둥 치는 인류를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아파 왔고,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싶은 마음은 더 절박해졌다. 자신이 어떤 곤경에 처하든,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게 되든,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속하겠다는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이 무엇인지, 담당할 사명이 무엇인지 갈수록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담당할 사역, 즉 사람의 모든 죄를 지고 인류를 대신해 속죄하는 사역을 한시바삐 완성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가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게 하고, 하나님도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더는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 앞으로 진행시키려는 것이었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쳐 희생하길 원했으며, 또한 속죄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하루빨리 그 사역을 완성하고 싶어 했다. 인류의 삶의 참상을 본 그는 1분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더 빨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게 될지, 얼마나 큰 굴욕을 참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자신을 바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 제물이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새 사역을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며, 죄 속에서 살아가고 생존하던 인류의 처지는 완전히 바뀔 것이다.’라는 신념뿐이었다. 그의 신념과 그가 하고자 한 일은 다 인류의 구원과 관계가 있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이 다음 단계의 사역을 순조롭게 전개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예수의 마음이었다.

그는 육신에서 사는 성육신 하나님으로서 정상 인성이 있었고, 정상인이 지닌 감정과 이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즐거움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인류의 삶을 보았을 때, 그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공급하거나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사람에게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낼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오직 그 자신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야만 사람이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류의 삶을 목격하고 체험한 후, 인류를 죄 가운데서 헤매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아주 강렬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 소망을 위해, 그는 자신이 하루빨리 십자가로 나아가 인류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예수가 인류와 함께 생활할 때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인류의 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가졌던 생각이다. 인류에 대한 성육신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과 드러난 성품은 평범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것이더냐? 평범한 사람이 이러한 환경에서 살면 무엇을 보겠느냐? 무엇을 생각하겠느냐? 평범한 사람이 이 모든 것에 맞닥뜨리면,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러지 못할 것이다! 비록 성육신 하나님이 겉으로는 사람과 다르지 않고, 또 사람의 지식을 배우고 사람의 언어를 쓰며, 심지어는 사람의 방식과 화법을 빌려 그의 뜻을 표현할 때가 있다고 해도, 그가 인류를 대하고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패괴된 인류와 결코 같지 않다. 게다가 그가 서 있는 위치와 차원은 패괴된 인류 중 누구도 닿을 수 없다. 하나님은 진리이므로 그가 입고 있는 육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갖추고 있으며, 그의 생각과 인성이 나타내는 것 역시 전부 진리이다. 패괴된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의 육신이 선포하는 것은 다 진리의 공급이자 생명의 공급이며, 이는 특정한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공급이다. 패괴된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관련된 몇몇 사람만을 마음에 수용할 수 있고, 관심을 갖고 걱정하는 이도 단지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재난이 닥치면 먼저 자기 집의 아이들과 배우자, 부모만을 생각한다. 비교적 ‘넓은 사랑’을 가진 사람도 고작 어느 친척이나 친한 친구를 생각할 뿐이다. 이보다 더 많은 이를 떠올릴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람의 위치와 차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패괴된 인류와 완전히 다르다. 그 육신이 아무리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보잘것없어 보여도, 심지어 사람에게 아무리 멸시를 당해도, 그의 마음과 인류에 대한 태도는 그 어떤 사람도 갖출 수 없고 모방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신성의 위치에서, 창조주의 차원에서 인류를 관찰하고, 하나님의 본질과 마음으로 인류를 대한다. 그는 절대 평범한 사람의 차원이나 패괴된 사람의 관점으로 인류를 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의 안목으로, 사람의 지식과 규칙, 학설 등을 평가 기준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이런 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고 패괴된 인류가 이를 수 있는 범주이다. 반면, 하나님이 인류를 볼 때는 하나님의 시각과 본질, 소유와 어떠함을 평가 기준으로 삼으며, 이 범주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주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패괴된 인류의 확연히 다른 점이다. 이 차이는 각자의 본질로 말미암아 결정된 것이고, 본질의 차이는 각자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차원을 결정한다. 너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선포와 발현을 보지 못했느냐? 예수가 행하고 말씀한 것들은 다 그의 직분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 사역과 관련이 있으며, 모두 하나님 본질의 선포와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설사 그에게서 얼마간 인성적인 면이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의 신적 본질과 발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인성적인 면이 정말 인성의 발현이겠느냐? 패괴된 인류가 드러내는 인성은 그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예수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다. 그가 진짜 패괴된 인류의 평범한 일원이라면, 신성의 위치에서 인류의 죄악된 삶을 대하겠느냐? 단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자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이다. 패괴된 사람은 모두 죄 가운데 살고 있어서 죄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누구나 그렇다. 마치 돼지가 진흙탕 속에서 살면서 불편함을 전혀 못 느끼는 것과 같다. 돼지는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잘 먹고 편히 잔다. 돼지우리를 깨끗이 청소해 주면, 돼지는 오히려 불편해하며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돼지는 또 그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더없이 자유롭게 살 것이다. 돼지 자체가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볼 때, 돼지는 아무리 깨끗하게 씻겨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더러운 동물이다. 그래서 아무도 돼지를 집 안에 두고 기르지 않는다. 사람이 돼지를 보고 대할 때의 느낌과 돼지가 자신에게 가지는 느낌은 영원히 같을 수 없다. 그것은 사람과 돼지가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육신한 인자와 패괴된 사람 역시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만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류와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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