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하나님의 거룩함(2) 제1부분

오늘은 찬양 한 곡을 불러 보거라. 너희가 좋아하고 평소 자주 부르던 곡을 찾아보아라. (하나님 말씀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부르겠습니다.)

1. ‘사랑’은 마음으로 느끼며 헤아리는 티 없이 순수한 감정. ‘사랑’에는 조건도 장벽도 거리도 없느니라. 의심도 간교도 없고 기만도 없느니라. 어떠한 거래도, 어떠한 불순함도 없는 감정이라. 사랑하면 기만 않고 원망, 배반, 거역 하지 않으며, 무엇을 달라고 하거나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느니라.

2. ‘사랑’은 마음으로 느끼며 헤아리는 티 없이 순수한 감정. ‘사랑’에는 조건도 장벽도 거리도 없느니라. 의심도 간교도 없고 기만도 없느니라. 어떠한 거래도, 어떠한 불순함도 없는 감정이라. 사랑한다면 봉헌하리. 고난받고 하나님과 합하리. 그 위해 모든 것 다 버리고, 가정과 앞날 포기하고, 청춘과 결혼 포기하리. 그렇지 않다면 너의 사랑은 기만이고 배반이라!

찬양을 참 잘 선택했구나. 너희는 이 찬양을 좋아하느냐? (네.) 이 찬양을 부르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자신에게 이런 사랑이 있다고 느껴지느냐? (아직 거기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 찬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어느 부분이냐? (“‘사랑’에는 조건도, 장벽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기만도 없고, 거래도 없으며, 간교도 선택도 없고, 어떠한 불순함도 없다.”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도 많은 불순물이 있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부분, 그리고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저는 확실히 아직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네 사랑은 어떤 수준에 있느냐? 어느 정도에 머물러 있느냐?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너의 분량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 말해 보아라. 어느 정도에 도달했느냐? 기만이 있느냐? 원망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럼 마음속에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 있느냐? 하나님에 대해 요구나 욕망이 있느냐? (그런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 불순물은 어떤 상황에서 나타나느냐? (하나님이 마련하신 환경이 저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나 저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런 패괴된 성품이 드러납니다.) 대만의 형제자매들, 너희도 이 찬양을 자주 부르느냐? 너희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 볼 수 있느냐? 왜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겠느냐? (저도 이 찬양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사랑임을 진실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이런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참된 사랑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에서는 노력하며 협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더해 주신 힘과 기도로 하나님과 협력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임하거나 드러나 저 자신에게 앞날이나 운명, 종착지가 없다고 느껴질 때는 특히 연약해집니다. 한동안 체험한 후 기도를 통해 이런 상태들이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자주 이 부분에서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말하는 ‘운명과 앞날’은 도대체 무엇이냐? 가리키는 것이 있느냐? 하나의 그림이냐? 아니면 상상이냐? 그것도 아니면 네가 직접 그 앞날과 운명이란 것을 보기라도 했느냐? 그것은 하나의 실체이냐? 너희 모두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마음속으로 염려하는 앞날과 운명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입니다. 또 저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 받고, 합격된 본분을 이행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늘 드러나니, 하나님의 기준과 차이가 매우 크다는 생각이 들고, 제게 앞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말해 보아라.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느냐? (그것은 자신의 불순물이 없고, 앞날과 운명의 속박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든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면서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랑이야말로 티 없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저 자신과 대조해 보면, 하나님을 믿어 온 이 여러 해 동안 겉으로는 얼마간 헌신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드러날 때는 이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해졌다는 생각에 소극적인 상태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며, 종착지, 앞날, 운명을 한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희는 이 찬양을 자주 부르는 모양이구나. 너희가 이 찬양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실제 체험과도 연결을 좀 시키고 있지만,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서 언급된 매 구절의 말씀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원하는 것, 어떤 사람은 앞날을 내려놓으려 하는 것, 어떤 사람은 가정을 내려놓으려 하는 것,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또 어떤 사람은 기만도, 원망도, 거역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또 사람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했겠느냐? 사람은 이러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사람이 이런 사랑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겠느냐? 사람이 보기에도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사람에게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이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기에 이런 말씀들이 사람에게는 다 생소한 것이다. 사람은 이런 세상에 태어나 패괴된 성품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있거나 혹은 이런 사랑을 갖추어 바라는 것이 없고, 무엇을 얻고자 하지도 않고, 기꺼이 바치고 고난을 감내할 수 있다면, 또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면, 이런 사랑을 갖춘 자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사람이겠느냐? 완벽한 사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진공 속에서 살면 모를까, 이 세상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체험하면서 이런 말씀과 자신을 대조하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억제했고, 심지어는 끊임없이 자신을 저버리면서 고난을 받고 관념과 패역, 욕망과 요구를 내려놓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것은 어찌 된 영문이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기준을 준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즉시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더냐? 사람에게 얼마 동안의 시간 내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더냐?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했느냐? 이 말씀에 그런 부분이 있느냐? 이 말씀에 그런 부분은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려 주었을 뿐이다. 사람이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하나님을 대할 수 있을지는 말씀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즉시,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랑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늘 이런 말씀을 읽는다고 조금씩 사랑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먼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없으려면? (역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거래가 없으려면? 이것도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간교가 없으려면? 사랑에 선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모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 아니더냐? 여기에는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언급하거나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리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간격이나 거리가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의심하더냐? (그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고, 알고 있다. 진실로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기만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완벽하게 말씀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완벽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 중에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 사람이 있더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느냐? 사람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말하느냐? 베풀거나 바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말에 불과하며, 본질적인 면은 없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말씀은 하나님의 한 가지 측면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어떤 측면의 본질이겠느냐? 지난번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교통했다. 그 화제는 이전에 사람이 자주 말했던 것이고, 또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 그 단어가 자주 제기되지만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익숙하면서도 또 생소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 단어가 인류의 언어에서 오긴 했지만, 인류가 그것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다. 그 단어는 무엇이겠느냐? (거룩함입니다.) 거룩함, 이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교통했던 화제다. 지난번에는 일부만 교통했다. 지난번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측면의 본질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어떤 인식들이 새롭다고 생각되느냐? 어떤 인식과 말씀들이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거룩함과 내가 교통한 하나님의 거룩함이 구별되거나 다르다고 느끼게 하였느냐? 여기에 대한 인상이 있느냐?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신 대로 말씀하시는데, 거기에는 불순물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룩함에 대한 한 측면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를 발하실 때도 거룩하시고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저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는 진노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유일무이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전에는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과 같지 않고,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긍정적인 것이고 원칙이 있다고, 또한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인해 발하게 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보셨기에 그런 진노를 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이는 피조물이 갖추지 못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인류에게도 긍휼과 비슷한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들이 있지만 안에는 모두 불순물이나 목적이 있고, 심지어 어떤 경우, 긍휼이라는 것은 모두 가상이고 공허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인류에 대한 구원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런 긍휼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 아름다운 종착지와 소망을 얻을 수 있도록 구원받는 길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본질에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노로 한 성을 멸하려고 하셨다가도 긍휼의 본질로 인해 또 언제든지 사람의 회개로 긍휼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그 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받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 이 방면에 인식이 있구나.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화제는 ‘거룩함’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다 조금씩은 들어 보았고, 또 조금씩은 알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흔히 하나님의 공의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같이 놓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한다. ‘거룩함’이란 이 단어는 모두에게 생소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함의 함의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내는 것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하나님이 나타낸 것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지만, 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거룩하다고 말한다면 듣기에 조금 모호하고 헷갈린다. 왜 그렇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다거나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거룩하다고 말하는데, 그럼 너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다시 말해, 사람이 알고 있는 거룩함에는 하나님의 어떤 나타냄이나 소유, 어떠함들이 있느냐?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내가 본 것은, 사람은 늘 자주 쓰는 단어나 자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 습관이 되어 관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고 알아보면, 그것의 실제 의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룩함’이란 이 단어를 예로 들자면, 사람이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도대체 하나님의 어느 부분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인지, ‘거룩함’이란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적절하게 나타나는지(원문: 兌現)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음속이 멍해 사람은 다 그냥 두리뭉실하게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여길 뿐,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한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이 화제를 교통하는 것은 바로 ‘거룩함’이란 이 단어를 하나님에게서 구현시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의 실제 내용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늘 함부로 쓰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고, 또한 맞는지 틀리는지, 정확한지 부정확한지도 모른 채, 아무튼 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말하니 너도나도 덩달아 입버릇처럼 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단어를 더럽히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거룩함’이란 단어가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사람은 기본적으로 ‘거룩함’이란 단어가 깨끗하고, 정결하고, 신성하고, 순결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는 방금 부른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과 같이 어떤 사람은 ‘거룩함’을 ‘사랑’과 연결시키는데, 이는 틀리지 않았다. 그것도 일부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지닌 본질의 일부지,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관념적으로 이 글자를 볼 때 늘 본인이 순결하거나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 혹은 소위 말해서 불결하지 않고 정결한 것들을 연상한다. 일례로 연꽃이 정결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은 ‘거룩함’이란 단어를 연꽃과 연결시킨다. 또 지어낸 사랑 이야기나 꾸며 낸 위대한 인물들을 거룩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성경이나 영적 서적에 기록된 성도나 사도와 같은 인물, 또는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을 따랐던 자들의 영적 체험을 거룩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사람의 상상이자 관념이다. 사람은 왜 그런 관념을 갖고 있겠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고 사악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접하고, 체험한 것이 전부 사탄의 사악함과 사탄의 패괴,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 간의 암투와 싸움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하고, 말씀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나타내도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본질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이는 참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사람은 더러움 속에서, 패괴 속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으므로 빛을 보지 못한다. 또한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긍정적인 것인지 알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래서 거룩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괴된 인류 가운데 거룩한 것이나 거룩한 사람이 존재하겠느냐? 오직 하나님의 본질만이 거룩하므로 그런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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