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제2부분
인류는 참된 회개로 인해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다
계속하여 ‘하나님이 니느웨를 구원하다’, 이 성경 이야기를 읽어 보도록 하자.
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욘 3장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4장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니느웨 이야기 개요
‘하나님이 니느웨를 구원한’ 이야기는 짧지만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또 다른 면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했던 사역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이야기의 시작 부분을 보자.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1~2).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 성으로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왜 요나를 그곳으로 보냈을까? 성경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니느웨 사람들의 악독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서 여호와가 하려는 일을 그들에게 선포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요나가 누구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물론, 이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무관하기 때문에 너희는 이 사람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 너희는 하나님이 요나에게 시킨 일과 왜 그렇게 했는지만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임한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
이어서 두 번째 단락인 요나 3장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이 말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직접 일러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한 말씀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하고자 했던 말씀이다. 이를 통해 니느웨 사람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말미암아 성을 멸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그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40일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40일 안에 회개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니느웨 성을 소돔 성처럼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안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분명 단순한 선포가 아니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와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태도를 전달한 것이었고 또한 성안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이 경고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악행을 증오했음을 알려 주었다. 또한 그들의 악행이 큰 재난을 불러올 것이므로 성안 사람들의 목숨도 위태롭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대함에 있어 소돔 성 사람들과 전혀 달랐던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
여기서 ‘무너지리라’는 무슨 의미이냐? 사라진다는 뜻이다. 왜 사라질까? 누가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이냐? 물론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았기에 듣자마자 그 말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이 그 성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악독이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그들은 성과 함께 멸해질 것임을 알아차렸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후 어떻게 하였느냐? 왕부터 백성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성경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니느웨 성 사람들은 소돔 성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소돔 성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공개적으로 대항하여 악에 악을 더했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은 그 선포를 들은 후 외면하거나 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신복(信服)하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신복’이란 무슨 의미이냐?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믿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의 실제 행동에 따라 해석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곧 그렇게 할 것임을 믿고 기꺼이 회개하겠다는 뜻이다. 곧 닥쳐올 재앙을 앞두고 니느웨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느냐? 그들은 신복했기 때문에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니느웨 사람들이 신복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성경에 따르면,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니느웨 사람들이 참으로 신복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신복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금식을 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 이는 그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소돔 성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대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개를 표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니느웨의 백성뿐만 아니라 왕도 그렇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니느웨 왕의 회개
소식을 들은 니느웨 왕은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은 후 재에 앉았다. 그리고 니느웨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고 소나 양 같은 가축에게도 풀이나 물을 먹이지 말고,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에게 간절히 부르짖으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선포하였다. 니느웨 왕이 행한 일들을 살펴보면 그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회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보좌에서 일어난 후 왕의 의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이 일련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니느웨의 왕이 왕의 신분을 내려놓고 일반 백성처럼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다시 말해,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왕위에 있을 때 행했던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 권력을 내려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는 것이다. 이때 니느웨 왕은 왕의 신분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와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였다. 또한 그는 성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라고 선포하였으며,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는 니느웨 성의 왕으로서 최고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으므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무시하거나 홀로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는 데에 그칠 수도 있었으며,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보좌에서 내려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죄를 인정했으며, 성안의 사람들과 가축들 또한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명하였다. 니느웨 왕의 이러한 행동은 왕으로서 진정으로 행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하기 어렵고 하지 못했던 행동이자,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행동으로, 기념하고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왕들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에게 대적하고 대항하게 하였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며 악행을 돌이켜서 여호와 하나님께 사함을 받고 징벌을 피하게 한 자는 없었다. 하지만 니느웨 왕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에게로 마음을 되돌리게 하였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도록 하였으며 왕위를 내려놓았다. 이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은 뜻을 바꾸고 진노를 거두어 성안의 사람들을 멸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니느웨 왕의 행동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기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타락한(직역: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죄를 인정한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보았다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일련의 일을 했다. 그들의 행동과 그들이 그런 일을 한 성격은 무엇이냐? 즉,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들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하나님의 안중에 그들은 참으로 회개하였다. 하나님에게 힘써 부르짖으며 죄를 인정하였고 또한 모든 악행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큰 두려움을 느꼈고,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는 것으로 자신을 돌이키고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임을 표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간구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과 내리려 했던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이 이전에 행했던 악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이 왜 멸망되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하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완전히 떠나려고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알게 된 후 그들은 다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이상 악을 저지르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신들의 지난날의 죄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과거로 그들을 대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또한 그들은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고자 했으며,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들의 회개는 참되고 철저한 것이었으며, 가식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했다는 소식을 들은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취한 모든 행동과 태도, 그리고 그들의 결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눈에 아주 분명하게 보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보인 행동에 따라 마음이 바뀌었다. 이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렸지만 그때 하나님의 마음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하고 죄를 인정하고 있고, 마음 깊은 곳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복이 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음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릴 처벌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재앙을 면할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진노를 거두어 달라는 절실한 간청도 들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실을 살핀 후 조금씩 진노를 거두었다. 전에 얼마나 크게 노했든 간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보고 감동받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았고, 더 이상 노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긍휼과 관용을 베풀었고 인도하고 공급해 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복이 있으면 너는 늘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모호함도 없었고, 순수한 진노에서 순수한 관용에 이르렀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이 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에 있어 단 한 번도 우유부단한 적 없고, 사역의 원칙과 목적도 흠 없이 순결하고 투명하며, 여기에 절대 그 어떤 계략과 음모도 섞지 않는다. 하나님의 본질에는 어둠과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노한 것은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 안중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고 그들에게 다시 관용을 베풀었을 때도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었다. 이 모든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로 인해 바뀐 것이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질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하지만, 사람이 참된 마음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어 진노를 거둔다. 그러나 사람이 완고하게 하나님에게 계속 대항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멸할 때까지 노를 멈추지 않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에게 가까워진다. 이 또한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성품이 진노든, 긍휼과 자비이든 모두 사람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기인한다. 만약 하나님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노한다면,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거나 하나님에게 ‘머리를 숙인’ 적이 없고 진심으로 신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항상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신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시한 적이 없는 것이다. 늘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늘 임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간단한 성경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 본질의 참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과 마음을 되돌리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진노할 때와 마음을 되돌릴 때 극명한 대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관용, 두 측면의 본질에 차이와 대비가 크다고 느꼈다. 하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서 사람은 또 한 번 하나님의 참된 성품의 다른 면을 느낄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진실성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며, 진실하게 발현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전설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진실했고, 진실로 마음을 되돌렸으며, 하나님이 확실히 또 한 번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결말을 바꾼 니느웨 사람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것과 진노하는 것에 모순이 있느냐? 당연히 없다! 하나님이 관용을 베풀었을 때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그것은 성경에 언급한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나다’와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다’이다.
‘악한 길’은 한두 가지의 악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의 근원이 사악함을 의미한다. ‘악한 길에서 떠나다’는 더 이상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악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하는 방식, 근원, 출발점, 속셈, 원칙 모두를 바꾸어 더 이상 그런 방식과 원칙으로 향유하거나 즐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다’의 ‘떠나다’는 내려놓고 버림으로 과거를 완전히 끊어 내고 다시는 지난 길을 걷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난 것은 참된 회개를 했음을 증명하고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과 내면을 모두 관찰한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으로 참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살펴보고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제서야 마음을 되돌렸다. 즉, 사람의 행동과 태도, 다양한 모습과 마음에 진실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고, 뜻을 바꾸고, 내린 결정을 거두고, 그들을 벌하지 않고, 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의 결말이 바뀌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되찾았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었다.
얻기 힘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이 아닌 사람의 참된 회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든 간에,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점차 누그러져 뜻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을 멸할 것이라 선포하기 바로 직전, 즉 그들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 직전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점차 관용과 긍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두 성품이 하나의 일에서 동시에 나타났는데, 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모순되지 않음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느냐? 완전히 다른 두 본질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과 후에 하나님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본질의 참됨과 거스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어렵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노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사람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낌없는 긍휼과 관용을 베풀 것이다. 사람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는 자와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대한 일에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의 참된 회개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리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생생하게 나타나는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마음을 되돌렸을 때 하나님이 베푼 긍휼과 관용은 거짓이었느냐?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두 측면의 성품이 전환되어 나타난 것을 보며 너는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분리된 것이 아닌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노하든,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 모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나며, 하나님은 일이 진행되는 상태에 따라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으로 하나님이 로봇이나 돌부처가 아니며 하나님에게도 마음과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알려 준 것이다. 또한 그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 자신으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진노할 수도 있고, 그들의 태도 변화에 따라 그들의 과거를 용서할 수도 있으며,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결정을 할 수도 있고, 그들의 회개로 그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알려 준 것이다. 사람은 규례에 끼워 맞추기를 좋아하고, 규례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공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생각할 줄 모르고 실질적인 견해도 없다고 여긴다. 사실상 사물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은 계속해서 바뀌고, 그와 동시에 다양한 면으로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난다. 바뀌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실제적인 나타냄으로 인류에게 그의 진노와 긍휼과 자비 그리고 관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물이 발전함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그에게는 수사자 같은 진노도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긍휼과 관용도 있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은 그 누가 의심하거나 침범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그 누가 바꾸거나 곡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사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즉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만물의 구석구석에서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고, 모든 순간순간에 생생하게 시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이나 공간에 국한되어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발현되고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려 더 이상 진노하지 않고 니느웨 성을 멸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만 베푸는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진노가 빈말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긍휼을 거두고 크게 진노할 때, 너는 하나님에게 인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사람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며, 그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로 감동받고 사람의 회개로 마음을 돌이킨다. 그의 감동과 돌이킴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용과 긍휼에는 모두 흠이 없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순결하며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 하나님의 관용은 곧 관용이고, 긍휼은 곧 긍휼이다. 사람의 여러 가지 태도로 인해, 사람의 회개로 인해, 하나님은 진노의 성품도 나타내고 긍휼과 관용도 나타낸다.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드러냈든지 그것은 모두 순결하고 직접적이며 그 어떤 피조물의 본질과도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사역의 원칙, 마음과 생각 혹은 하나님이 내린 어떤 결정, 하나님의 그 어떤 행동에서도 흠이나 오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결정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이룬다. 이 결과는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정확한 것이다. 결과의 근원에 흠이 없고 오점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도 피조물이 갖추지 못한 것인데,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어떤 연구와 검증(원문: 推敲與體驗)에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니느웨 성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서 다른 측면의 본질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또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인류 중에 이러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의 이런 진노를 갖춘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의 이런 긍휼과 관용을 갖춘 사람이 있을까? 피조물 중에 크게 진노하여 인류를 멸하기로 결정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더냐?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고 죄를 사해 줌으로 인류를 멸하겠다는 결정을 바꿀 자격이 있는 자가 또 누가 있더냐? 창조주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방식과 원칙으로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 좌지우지되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만이 갖고 있는 성품 속에서 그 어떤 사람도 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없고, 그 어떤 사람도 그를 설득하고 그가 내린 결단을 바꿀 수 없다. 피조물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심판받는다. 그가 진노하든, 긍휼을 베풀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창조주의 본질, 즉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다!
니느웨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전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해석을 통해, 너희는 ‘유일무이’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중의 긍휼을 설명할 수 있느냐?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한 측면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이 두 측면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라 정의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한 것으로, 사람이 거스를 수 없고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모두 갖추고 있지 않는, 하나님만이 특유하게 갖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며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인 긍휼도 거룩하고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도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소돔을 멸하거나 니느웨를 구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참된 발현이다.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진심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상 말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행사를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와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고, 인류를 피해 숨은 적이 없으며, 자신의 마음과 생각, 말씀과 행사를 인류에게 다 공개하였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기만 한다면 여러 가지 경로와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 수 있다. 인류는 계속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류를 피하고, 인류에게 숨고, 사람이 이해하고 아는 것을 싫어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으며, 더욱이 창조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창조주가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행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사실, 틈날 때만이라도 창조주의 말씀이나 행사에 관해 관심을 두고 이해하려 하고, 창조주의 마음과 그의 음성에 주의를 조금이라도 기울인다면, 창조주의 모든 생각과 말씀과 행사가 공개적이고 투명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창조주가 항상 인류와 함께 있고, 만물과 대화하고 인류와 대화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새로운 행사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본질, 그의 성품은 인류와의 대화에서 나타나고, 그의 마음과 생각은 그의 행사에서 빠짐없이 나타난다. 그는 늘 인류와 함께하며 인류를 관찰하고 있으며, 무언의 언어로 조용히 만물과 인류에게 알려 준다. “나는 하늘 위에 있다. 나는 만물 중에 있다. 나는 수호하고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바로 너의 곁에 있다. 나는…”. 그의 두 손은 따뜻하고 힘이 있으며, 그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의 음성은 감미로우며, 그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인류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의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다. 그는 떠난 적도 사라진 적도 없고, 줄곧 그림자처럼 인류와 함께하였다. 인류를 보살피는 정성과 인류에 대한 특별한 ‘감정’, 그리고 진실한 염려와 사랑은 그가 니느웨 성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나타났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은 요나와의 대화에서 창조주가 손수 만든 인류에 대한 연민의 정을 완전하게 나타냈다. 여기서 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깊이 느낄 수 있으며….
요나 4장 10절에서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원래 말씀으로, 하나님과 요나의 대화이다. 짧고 간결한 이 대화에 인류를 아끼고 염려하는 창조주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진실한 태도와 감정을 나타냈고, 또한 인류가 들어 보기 어려운, 명확한 언어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나타냈다. 이 대화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 준다. 어떤 태도일까? 회개하기 전후의 니느웨 성의 사람들에 대한 태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있고 하나님의 성품도 있다.
이 대화에서 하나님의 어떤 마음을 볼 수 있느냐?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하나님이 ‘아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낀다’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보살피고 불쌍히 여긴다. 둘째, 몹시 사랑한다. 셋째, 너무 아까워서 차마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 단어는 몹시 어여삐 여기고 몹시 귀여워하며 내버리지 못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인류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대화에서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와 인류에 대한 태도를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니느웨 성 사람들도 소돔 성 사람들처럼 타락하고(직역: 패괴되고) 사악하고 아주 폭력적이었지만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렸고 그들을 멸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를 대하는 태도는 소돔 성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순종하고 회개하였고, 그리고 여러 면에서 진실하고 간절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끼는 마음이 우러나 상을 주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상을 주고 아끼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그리고 인류에 대한 진심은 그 누구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위인이나 슈퍼맨 중에 높은 위치, 즉 위인의 입장이나 지고한 위치에 서서 인류나 피조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느냐? 인류 중에 누가 인류의 생존 현황을 손금 보듯 환히 알 수 있겠느냐? 누가 인류의 생존에 부담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겠느냐? 누가 성을 멸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또 누가 성의 죄를 사할 자격이 있겠느냐? 누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아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오직 창조주밖에 없다!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창조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참된 마음이 있다. 또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타락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속성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조용하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기여하며…. 그는 자신의 생명은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고 또한….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고,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참된 고백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와 나눈 이 대화는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참된 고백임이 틀림없다. 이는 창조주가 자신이 주재하는 만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말씀과 같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이는 하나님이 니느웨 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안에 살아 있는 것(사람과 가축 포함)이 얼마나 있는지, 아이나 미성년자, 즉 좌우를 분변 못 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다음으로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태도, 즉 창조주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인류의 무게를 사람에게 알려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말씀과 같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 …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를 책망하는 말씀이지만 모두 사실이다.
요나가 명을 받들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성안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염려와 기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요나를 질책함으로써 그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 있었다. 즉, 인류는 하나님이 손수 만든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였고, 모든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며,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누리고 있고, 하나님이 심혈 대가로 그 모든 사람을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손수 만든 인류를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더군다나 그 성안에는 수많은 아이와 무고한 가축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철없는 나이대인 피조된 인류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끝내거나, 그들의 결말을 그렇게 쉽게 정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장하여 다시는 조상들이 갔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으며, 니느웨 성의 과거를 증언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한 후의 니느웨와 니느웨의 미래를 보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 아래에서 사는 니느웨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피조된 인류가 곧 니느웨의 미래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언급하기 싫은 니느웨 성의 과거를 짊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 속의 니느웨 성의 과거와 미래를 증언하는 중차대한 일을 책임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그 참된 고백에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 창조주의 마음을 완전히 볼 수 있다. 이는 인류에게 ‘창조주의 긍휼’이 알맹이 없는 단어나 헛된 약속이 아니라 여기에 구체적인 원칙과 방식, 목표가 있고, 실제적이고 분명하며 허구나 거짓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각 시기와 시대에 끊임없이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하지만 요나와의 대화는 창조주가 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어떻게 긍휼히 여기는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관용과 진심을 베풀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창조주가 언어로 표현한 유일한 내용인 것이다. 이 짧고 간결한 대화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표현한 것은 인류에 대한 완전한 뜻과 인류에 대한 그의 마음속의 실제 태도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긍휼을 많이 베풀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선조에게 긍휼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과 같이 오늘날의 후손에게도 한 세대 또 한 세대 긍휼을 베풀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종종 인류의 어떤 구석, 어떤 시대에 임했더라도 하나님은 긍휼을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긍휼로 피조된 인류를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끌고 인도하며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에 대한 그의 참된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한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가 손수 만든 만물을 아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에 있는 긍휼이다. 이것 또한 틀림없는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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