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제6부분)

12.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씀

요 20:26~29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1:16~17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기록은 예수가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했던 일과 말씀이다. 우선, 부활한 후의 예수와 이전의 예수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그는 여전히 이전의 예수였느냐? 성경에서는 부활한 후의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 이때의 예수는 더 이상 육신이 아닌 영체였다. 육신의 제약을 초월했기에 문이 닫혔어도 사람들 가운데 올 수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를 보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후의 예수와 육신에서 살았던 예수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비록 이때의 영체와 이전의 예수 사이에 형상의 차이는 없었지만, 이때의 예수는 사람에게 낯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죽음에서 부활해 영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체는 이전의 육신보다 훨씬 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고, 의문스러운 존재였다. 동시에 사람은 예수에 대해 더 큰 거리감을 느꼈고, 신비하고 예측 불가한 존재라 여겼다. 이런 인식과 느낌은 사람을 모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던 과거 시대로 데려갔다. 그러므로 부활한 후의 예수가 해야 했던 첫 번째 일은 바로 많은 사람이 자신을 보게 하고, 또 그의 존재와 죽음에서 부활한 사실을 입증하며, 이와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를 그가 육신으로 사역하던 시기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와 사람과의 관계로 회복시켜 놓는 것이었다. 그래야 사람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과 예수가 인류를 구속한 사역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을 터였다. 한편, 부활한 예수가 사람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났다는 이 사실은, 사람을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은혜시대에 자리 잡게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은 예수가 ‘사라지거나’ 혹은 ‘말없이 떠났다고’ 해서 지난 시대, 즉 율법시대로 퇴보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은혜시대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며, 율법 아래 있던 인류도 이때부터 정식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원에 진입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예수가 사람 앞에 나타난 사건이 지닌 다양한 의미이다.

그는 영체였는데 어떻게 사람이 보고 만질 수 있었겠느냐? 이는 예수가 사람 앞에 나타난 의의와 관련이 있다. 이 구절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보통 영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게다가 예수가 부활했을 때는 그가 맡은 사역을 이미 완수한 후였다. 이론적으로 볼 때, 예수가 원래의 형상으로 다시 사람들 가운데 와 그들을 만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영체가 도마와 같은 사람에게 나타남으로써, 그 현현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갖고 사람의 마음속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도마에게 나타났을 때, 예수는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을 만지게 하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했다. 이는 예수가 부활한 후에 말하거나 행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부터 하려고 했던 일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부터 도마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겠느냐? 바로 부활한 후의 예수는 본질이 변하지 않은 원래의 예수라는 사실이다. 예수에 대한 도마의 의심은 그때에야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기간에도 줄곧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예수는 단지 죽음에서 부활하고 영계로부터 다시 돌아왔을 뿐이다. 그는 원래의 형상과 성품, 그리고 육신에 거할 때 얻은, 사람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한 것이다. 그렇게 예수는 부활한 자신의 영체를 보게 하고, 그 영체의 존재를 만지고 느끼게 해서 도마가 의심을 완전히 내려놓게 했다. 도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도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늘 의심하며 믿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도마의 믿음은 직접 보고 만져 봐야 하는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예수는 이러한 자들의 믿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만을 믿을 뿐, 하나님이 보낸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전혀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믿게 하기 위해, 예수는 도마에게 손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 전과 부활 후, 도마의 의심에 변화가 있었느냐? 그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다. 예수의 영체가 친히 나타나 직접 몸에 난 못 자국을 만져 보게 하는 것 말고는, 도마의 의심을 해결하거나 내려놓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못 자국을 느껴 보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도마의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고, 예수가 부활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도마는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 입은 육신임을 인정하고 믿게 되었다. 그때 도마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와 만나 함께하며 그를 따르고 알아 갈 기회와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케 될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말았다. 예수의 현현과 이 말씀은 의심 많은 자들의 믿음에 결론을 내렸고 심판을 행했다. 그는 의심 많은 자들과, 하늘의 하나님만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자신의 실제 말씀과 행사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의심을 품은 채 따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게 되는 날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이 대성공을 거둔 날일 것이며, 그날은 당연히 그들의 의심이 심판받는 날일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완고한 의심으로 인해 그들의 믿음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강퍅함으로 인해 그들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림 속 떡으로 허기를 채우려는 헛수고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의심이야말로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진정한 자세이기 때문에, 설령 예수의 몸에 난 못 자국을 만졌을지라도 그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결말은 ‘깨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도마에게 한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아주 명확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즉, 부활한 예수는 당시 33년 반 동안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한 바로 그 예수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 부활했어도 그의 모든 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몸에 못 자국이 생기고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왔지만, 그의 성품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람에 대한 마음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사람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왔으며 죄와 고난과 죽음을 이겼음을 알려 주었다. 그의 못 자국이 바로 사탄을 이긴 증거이며, 속죄 제물이 되어 전 인류를 성공적으로 구속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사람에게 그가 이미 인류의 죄를 짊어졌으며, 구속 사역을 완수했음을 알려 주었다. 돌아와서 제자들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현현으로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나는 오늘 실제로 너희 앞에 서 있기에 너희가 보고 만질 수 있다. 나는 너희와 늘 함께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는 또 도마의 일을 통해 후세 사람들에게 훈계하고자 했다. 즉, 예수를 믿으면서 그를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진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예수를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은 복 있는 자임을 알려 준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가 도마에게 나타난 사건은 은혜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예수의 현현과 그가 도마에게 한 말씀이 후세 사람들에게 준 영향은 매우 크며, 그 의미도 영구적이다. 도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의심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의심이 많고 음흉하고 간교하여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들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를 믿지 않고,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그들의 의심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그들이 의심 많고 간교한 사람임을 깨닫고 인식하고 인정하며, 나아가 예수의 존재와 부활을 진실로 믿도록 기회를 주었다. 도마의 사건은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이자 메시지로, 도마처럼 의심을 품으면 어둠 속에 빠지게 되니 그런 자가 되지 말라고 더 많은 사람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도마처럼 주의 옆구리를 만져 보고 못 자국을 느껴 봐야만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검증하거나 가늠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떠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도마처럼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는 그런 자가 되지 말고, 순수하고 정직한 자가 되라고 요구했으며,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오로지 믿고 따르는 자는 복되다고 했다. 이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아주 작은 요구였고,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주는 훈계였다.

위의 내용은 모두 의심 많은 자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를 정직하게 믿으며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또 어떤 말씀을 하고 어떤 일들을 했을까? 이는 우리가 이어서 보게 될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대화를 보면, 예수는 베드로에게 반복적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예수가 부활한 후에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 즉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주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요구한 더 높은 기준을 보여 준다. 다그치고 캐묻는 이 말씀은 질문이자, 나아가 베드로와 같은 사람에 대한 요구와 기대였다. 그는 이런 식의 질문을 통해 사람이 반성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했다.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예수는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물어보았으나, 실은 베드로에 대한 질문을 빌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더 많은 자들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다만 베드로가 복이 있었기에 그 부류 사람의 대표로 예수가 친히 하는 질문을 받았을 뿐이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도마에게 했던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에 비해 베드로에게 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에서는 그의 엄격한 태도와 당시의 절박한 마음이 훨씬 더 잘 느껴진다. 예수는 본성이 간사하고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못 자국을 만지게 함으로써 그가 곧 부활한 인자임을 믿게 했고, 그의 신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했다. 예수는 도마를 엄하게 꾸짖지 않았고, 그에 대해 명확한 말로 결론을 내리지도 않았지만,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이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결정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예수가 한 이 말씀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한 요구나 기대가 보이지 않는다. 도마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참된 믿음이 전혀 없는 자들이기에, 그들에 대한 예수의 요구 역시 그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은 이에게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못 자국을 만져 보라고 하지 않았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도 하지 않았으며,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사람을 깊이 반성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예수의 질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자책감과 당황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예수의 애타고 슬픈 마음을 더 잘 알게 된다.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한편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염려와 보살핌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순수하고 정직한 자들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간곡한 가르침과 엄격한 요구를 깨닫게 된다. 예수의 간단한 질문을 통해, 사람은 주님이 기대하는 바는 단순히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 너의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서 사랑이란 바로 헤아림과 순종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며 목숨까지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랑이란 하나님께 위안을 드리고, 하나님이 증거와 안식을 누리도록 하며,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자 본분이며, 또 사람이 평생 행해야 할 도이다. 이 세 번의 질문은 베드로와 모든 온전케 되는 사람에게 던지는 예수의 요구와 당부였다. 바로 이 세 번의 질문이 베드로가 인생 여정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를 인도하고 격려해 주었다. 또한, 예수가 떠날 때 했던 질문은 베드로가 온전케 되는 길로 가게 해 주는 한편, 주를 사랑함으로써 주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께 순종하고 위안을 드리며, 주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일생과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바치게 해 주었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두 유형의 사람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첫 번째는 그를 믿고 따르며,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며, 은혜시대의 도를 지킬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한 후에 먼저 가장 의미 있는 이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도마에게,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말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무엇을 대변하느냐?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을 대변하지 않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성을 대변하지 않느냐? 도마에게 행한 사역은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자가 되지 말고, 오로지 믿으라고 훈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베드로에게 행한 사역은 베드로와 같은 사람의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이러한 사람에게는 명확하게 요구하고 추구할 목표를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부활한 예수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말씀했으며, 그들에게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사람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기대를 남겼다. 즉, 성육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지냈던 기간이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영체가 된 다음이든, 인류에 대한 그의 염려와 요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도 제자들을 염려했으며, 모든 사람의 상태를 훤히 알고 있었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체가 된 후에도 당연히 육신에 거할 때처럼 각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사람이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육신으로 있는 동안 사람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저 부활한 후에 사람들에게 나타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성육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100% 확신시켰을 뿐이다. 그의 현현과 죽음에서 부활한 사실은 사람이 평생 추구하는 최대의 이상(異象)과 원동력이 되었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은혜시대의 사역이 인류 가운데 완벽히 실현되게 했다. 이에 따라, 은혜시대 예수의 구원 복음은 점차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에는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만일 네가 당시의 도마나 베드로이고, 일생 중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을 만났다면, 그 일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겠느냐? 그 사건을 하나님을 믿는 삶에서 가장 크고 좋은 이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평생의 에너지를 가장 큰 이 이상을 전파하는 데 쏟을 수 있겠느냐? 예수의 구원을 전파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이 일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도마와 베드로의 사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에 대해 확실히 알게 했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후, 친히 인간 세상에서 인류의 삶을 겪었다. 그렇게 인류의 타락과 삶의 실상을 보고 난 후,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기댈 곳 없는 인류의 슬픔과 가련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인성과 육신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고, 그리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을 더 염려하게 됐다. 너희는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한다’는 표현으로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를 걱정하고 관심을 보이던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 비록 이 표현이 인류의 언어에서 온 아주 인간적인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그의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하는’ 것에 대해, 너희는 체험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느끼고 음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성품 변화 추구를 바탕으로 조금씩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 가야 한다. 예수의 현현은 인성을 지니고 있을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품었던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하는’ 심정을 자신의 영체, 즉 신성에 실체화하고 옮긴 것이다. 그의 현현으로 인해, 사람들은 또 한 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와 보살핌을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다. 동시에, 하나님은 시대를 개척하고 열어 나가며, 또 시대를 종식하는 분임이 강력하게 입증되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타남으로써 모든 사람의 믿음을 견고히 했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확증을 주었으며, 새 시대 사역의 국면을 열었다.

13.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으며 사람에게 성경을 풀어 주다

눅 24:30~32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4. 제자들이 예수께 구운 생선을 드리다

눅 24:36~43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어서 위의 구절을 보자. 첫 번째 구절은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은 것과 성경을 풀어 준 것에 관한 기록이다. 두 번째 구절은 예수가 구운 생선을 먹은 것에 관한 기록이다. 이 두 구절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겠느냐? 예수가 떡과 구운 생선을 먹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희는 어떤 장면을 연상했느냐? 예수가 너희 앞에 서서 떡을 먹는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혹은 예수가 너희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사람과 함께 생선과 떡을 먹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주님과 아주 가깝고 주님이 친근하게 느껴졌다면 그 느낌은 맞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들과 마주 앉아 떡과 생선을 먹음으로써 얻으려던 효과였다. 만일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과 대화만 나눠, 사람이 그의 뼈와 살을 느끼지 못하고 멀리 있어 닿을 수 없는 혼 같은 존재로 느낀다면 어떠했겠느냐? 사람이 실망하지 않았겠느냐? 사람이 실망감을 느끼면 버려진 기분이 들지 않았겠느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겠느냐? 그 거리감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겠느냐? 사람은 틀림없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경원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한 관계는 단절되고, 은혜시대 이전의 관계, 사람과 하늘의 하나님의 관계로 돌아가게 됐을 것이다. 사람이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영체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사라지게 한다.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에 거할 때 쌓아 놓은 사람과의 거리감 없는 친근한 관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영체가 두려워 피하려 들거나 말없이 바라만 볼 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지도 못할 것이다. 그를 따르고 의지하고 앙망하지 못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피하고 멀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람이 그를 알고 그에게 다가오며, 그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예를 들어 너의 가족과 자녀가 너를 만나도 알아보지도, 다가오지도 않고 늘 너를 피할 때, 그들을 위해 네가 행한 모든 것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너는 어떤 심정이겠느냐?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마음이 찢어질 듯 슬프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피할 때 하나님이 느끼는 심정이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한 뒤에도 여전히 뼈와 살이 있는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났고, 사람과 함께 먹고 마셨다. 사람을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하나님은 사람 역시 하나님을 가장 친한 존재로 여겨 주길 바랐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람을 얻고,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할 수 있다. 이제 너희는 내가 부활한 예수가 떡을 먹으며 사람에게 성경을 풀어 준 부분과 제자들이 예수에게 구운 생선을 드린 구절을 고른 이유를 알겠느냐?

예수는 부활한 후, 그야말로 각별히 마음을 쓰면서 일련의 일들을 하고 말씀을 했다. 거기에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들어 있고, 육신에 거하던 기간에 사람과 쌓은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세심한 보호도 담겨 있다. 그리고 육신에 거하던 기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생활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도 녹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그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이 부활한 예수는 영계로, 사람이 영원히 볼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더 이상 사람에게 친근했던 주님이 아니고, 더 이상 사람과 함께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도 않았다. 그는 사람에게 지위의 차이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경원시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그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그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몹시 어려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체로 나타난다면, 또 한 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거리가 생길 터였다. 더군다나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너무 높고 큰 존재이고 자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므로 더 이상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은 죄가 있고 더러우니 영원히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오해할 터였다. 사람의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예수는 육신에 거할 때 늘 했던 일들을 행했다. 예를 들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라는 성경 기록과 같은 것을 말이다. 또한,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기도 했다. 예수가 행한 이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은 주님이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원래의 예수라고 느꼈다. 비록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부활했고, 사람을 떠나지 않고 다시 돌아왔으며, 그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느낀 것이다. 사람들 눈앞에 서 있는 인자는 여전히 원래의 예수였다. 그의 행동과 말씀은 사람에게 참으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변함없이 자비와 은혜와 포용으로 충만했으며, 여전히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예수였다. 그는 예전처럼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었고, 함께 성경을 얘기하기도 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피와 살이 있어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있었다. 사람은 이러한 인자를 아주 친근하고 편하게 느꼈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사람은 자신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인자를 마음 놓고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앙망하기 시작했으며, 망설임 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은혜와 축복,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기 위해 기도했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예수가 육신으로 사역하던 기간에, 그를 따랐던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신분과 말씀을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저 관망했을 뿐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 기간에 사람들은 예수가 육신에 거하는 동안 했던 말씀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나아가 그것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나타나자, 그를 직접 보거나 부활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은 부인하던 마음이 점차 반신반의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다 부활한 예수가 도마에게 그의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떡과 구운 생선을 먹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예수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뼈와 살이 있는 영체는 모두에게 마치 꿈에서 깬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눈앞에 서 계신 이 인자가 바로 영원부터 계셨던 그분이구나. 형체도, 뼈와 살도 있는 이분은 오랜 시간 사람과 함께 먹고 생활하셨구나….’라고 말이다. 이때 그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참되고 아름답고 오묘한 느낌을 주었고, 또 지극한 기쁨과 행복, 충만한 감동을 주었다. 예수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가 지극히 낮췄음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으며, 그의 친근함과 사람에 대한 염려, 애틋함을 느끼게 되었다. 예수와의 짧은 만남은 그를 본 사람들에게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상실감과 막연함, 당황스러움과 불안감, 초조함, 크나큰 그리움, 무감각이 들어 있던 사람의 마음이 위안을 얻은 것이다. 사람은 더 이상 의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는 희망과 의지처가 생겼고, 눈앞에 서 있는 인자가 바로 영원하고 든든한 요새요, 견고한 망대요, 피난처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활했지만, 그의 마음과 사역은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현현을 통해 사람에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곁에 있으며, 사람과 동행하고 함께한다고 알려 주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을 목양하며,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하고, 더 이상은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또 예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염려해 주고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사람의 영원한 의지처이고, 그를 따르는 모든 자의 가족이며, 그를 의지하면 더 이상 외롭지도 무기력하지도 않다는 것을, 그를 받아들여 자신의 속죄 제물로 삼은 자는 더 이상 죄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했던 이러한 사역들이 사람에게는 소소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부 참으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더없이 중요한 일들이었다.

예수가 육신으로 사역했던 기간은 어려움과 고난이 가득했지만, 그는 뼈와 살이 있는 영체로 나타남으로써 성육신하여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루었다. 그는 성육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직분을 시작했고, 또 성육신의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 자신의 직분을 마무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를 가져왔으며 그 시대를 시작했다. 또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펼쳤으며, 은혜시대에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고 그들을 이끌었다. 하나님의 사역은 확실히 시작과 끝이 있고, 절차와 계획이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 기묘한 행사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관통하는 일관된 맥락은 바로 사람에 대한 보살핌과 하나님의 떨쳐 버릴 수 없는 염려의 마음이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예수가 부활한 후에 행한 모든 일에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기대와 염려, 세심한 관심과 보호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너희는 이런 것들을 보았느냐? 이런 것들을 볼 때, 너희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않더냐? 만일 너희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예수가 부활한 후에 너희 앞에 나타나고, 형상이 있어 너희가 그를 볼 수 있었다면, 그가 너희 앞에 앉아 떡과 생선을 먹으며 성경을 풀어 주고 너희와 얘기를 나누었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을 받았겠느냐? 기쁘지 않았겠느냐? 가책을 느끼지 않았겠느냐? 전에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피하려는 마음, 반발심, 그리고 의심들이 다 사라지지 않았겠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좀 더 정상적으로 바뀌지 않았겠느냐?

너희는 이 짧은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하나님 성품의 어떤 작은 흠이라도 발견했느냐? 하나님의 사랑에 불순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더냐?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에 어떤 간사함이나 사악함이 있더냐? 단언컨대, 없다! 그럼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전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의 발현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나는 너희가 이 말씀들을 보고 깨달은 것들이 앞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데 유익과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말씀들이 너희에게서 갈수록 좋은 성과를 거둬 너희가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과도 가까워지길 바란다.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싫증 내지 말고, 진리와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 귀찮고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의 발현과 거룩한 본질이 너희에게 동기 부여가 되어 광명과 정의를 갈망하게 되기를,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하나님께 얻어지는 사람,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오늘 우리는 은혜시대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성육신하여 행한 일에 관해 얘기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는 기간에 나타낸 성품을 보았고, 하나님이 지닌 여러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을 보았다. 이 여러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은 아주 인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드러나고 발현된 모든 본질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성육신하여 인성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모든 방식과 그 성품의 측면은 다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육신의 방식으로 인류에게 임한 것은 아주 중요하며, 육신으로 행한 사역 역시 더없이 중요하다. 또한, 그가 나타낸 성품과 뜻은 육으로 사는 모든 사람, 패괴 속에서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더욱 중요하다. 이것을 너희는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소유와 어떠함을 알고 나니,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지 정리가 되었느냐? 이 문제에 있어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세 가지 충고를 하겠다. 첫째,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든, 절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둘째,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지 마라.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지위를 주고 어떤 사역을 담당하게 하든, 하나님이 어떤 본분을 맡겨 너를 높여 주든, 네가 예전에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바쳤든, 절대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지 마라. 셋째, 하나님과 겨루지 마라. 하나님이 네게 행한 일과 마련해 준 일, 그리고 네게 임한 일을 네가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순종할 수 있든 없든, 절대 하나님과 겨루지 마라. 이 세 가지를 지킬 수 있다면 너는 비교적 안전할 것이며, 쉽게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자!

2013년 11월 23일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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