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제2부분

우리는 방금 하나님이 처음으로 행한 일련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같이 다 하나님의 경륜,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과도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더 많은 소유와 어떠함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구약이나 율법시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시작하자, 우리의 발걸음도 그에 따라 은혜시대, 즉 은혜와 구속으로 충만한 시대로 들어갔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또 한 번 처음으로 매우 중요한 일을 행하였다. 새 시대의 그 사역은 하나님께 있어서나 인류에게 있어서나 모두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새로운 시작점은 하나님이 또 처음으로 한 새 사역이며, 그 새 사역은 바로 사람도, 만물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일을 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일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류의 일원이 되어 처음으로 사람의 형상과 신분을 지니고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새 사역은 그가 이미 율법시대의 사역을 끝냈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더 이상 율법 아래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율법의 형식으로, 율법의 원칙과 규례에 맞춰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즉, 율법을 위주로 하는 모든 사역은 영원히 멈추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사역, 새 일을 하고자 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또 새로운 시작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다음 시대로 인도해야만 했다.

그 일이 사람에게 희소식이 될지 흉보가 될지는 사람의 본질에 달렸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희소식이 아니라 흉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할 때, 율법의 조문과 규례만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흔히 지난 사역을 가지고 하나님의 새 사역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흉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은 순수하고 마음이 열린 자,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하는 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인류가 생긴 이래, 하나님이 처음으로 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생활했으며, 사람에게서 태어난 인자의 방식과 형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살면서 사역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처음으로 사람의 고정 관념을 깨뜨렸고, 또 모든 사람의 상상을 넘어섰으며, 아울러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실익’을 안겨 주었다. 하나님은 구시대를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그의 오래된 사역 방식과 사역 ‘스타일’을 버렸다. 더 이상 그의 사자를 통해 그의 뜻을 전달하게 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구름 속에 ‘숨어’ ‘우렛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군림하며 사람에게 나타나거나 말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전과 완전히 다르게’ 사람이 생각지 못한 방식,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 즉 말씀이 육신 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그의 그 시대 사역을 펼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에 인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고 난감해했다. 하나님이 또 한 번 전례 없던 새 사역을 행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새 시대에 어떤 새 사역들을 행했으며, 그러한 새 사역들을 통해 우리가 또 하나님의 어떤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알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다.

1. 마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마 12:6~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우선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라는 구절을 보자.

왜 이 구절을 골랐겠느냐? 이 부분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연관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이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안식일임에도 밖으로 나갔고, 게다가 제자들을 이끌고 밀밭을 지나갔다.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이다. 율법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마음대로 외출하지 말고 마음대로 활동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런 행동은 오랫동안 율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 많은 비난을 야기했다. 사람이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떻게 예수의 행동을 비판했는지는 잠시 차치해 두고, 우선 예수가 왜 하필 안식일을 택해서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리고 그가 이 일을 통해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이것이 바로 이 구절과 하나님 성품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세상에 온 예수는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인류에게 하나님이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새 사역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안식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대한 일종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진짜 큰 사역은 뒤에서 계속될 터였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나 율법시대에 정한 규례와 원칙을 깨뜨린 상태였다. 그에게서는 율법과 관련된 그 어떤 행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을 지나간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이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밖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 행동은 사람의 고정 관념을 깼으며, 사람에게 그가 더 이상 율법 아래에서 살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며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사역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알려 주었다. 또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새 사역을 가져왔으며, 그 새 사역은 율법과 안식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할 때, 더 이상 옛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율법시대의 규례에 신경 쓰지 않았으며, 지난 시대에 했던 사역에 영향받지도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변함없이 사역했으며, 게다가 그의 제자들은 배고프면 이삭을 잘라 먹어도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많은 사역과 말씀들을 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며,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이전에 했던 옛 사역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지속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사역을 하고자 할 때, 즉 그가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인도하고자 할 때, 다시 말해 그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진입할 때, 사람이 지난날의 말이나 규례를 계속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새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사역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새 사역을 가져올 때,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각도, 방식으로 사람에게 나타나고, 사람에게 그의 다양한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가 새 사역을 하는 목적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가지 않는다. 그의 사역과 말씀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이런저런 금기가 없다. 하나님은 아무런 매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그 어떤 금기도 없고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자유와 해방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고, 진실로,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 목각 인형도, 흙으로 빚은 인형도 아니다. 그는 사람이 모시고 절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며, 그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다 생명과 광명, 자유와 해방이다. 그에게 진리와 생명, 길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인류가 그의 새 사역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한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의 관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이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사람이 그의 새 사역을 극력 반대하고 대적해도 개의치 않는다. 피조물 중 그 누구도 사람의 이치나 상상, 지식, 혹은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고, 규정하고, 헐뜯고, 방해하고, 파괴할 생각은 하지 마라. 하나님이 일하고 사역하는 데는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의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대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의 새 사역에 있어, 그는 바로 영원히 승리하는 왕이며, 모든 적대 세력과 인류에게서 온 각종 사설이나 그릇된 말들은 다 그의 발등상 아래에 뭉개진다. 그가 어느 단계의 새 사역을 하든지 간에, 그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고,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되며, 또한 전 우주에서 막힘없이 행해지고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이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떳떳하게 안식일에 나가 사역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규례도,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고, 그가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도였으며, 그가 행한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사람을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도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상과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매일 사탄의 속박과 각종 복잡한 규율에 묶여 오늘은 이것을 금기시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시하며, 자유라곤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마치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 같아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금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속박을 의미하고 굴레를 의미하며 사악함을 의미한다! 사람은 일단 우상을 섬기게 되면, 다시 말해 거짓 신이나 악령을 섬기게 되면 금기가 뒤따라온다. 이것도 먹으면 안 되고 저것도 먹으면 안 되며, 오늘은 외출하면 안 되고 내일은 취사하면 안 되며 모레는 이사하면 안 된다. 관혼상제 때마다 항상 택일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 낳는 것도 날을 가려서 낳아야 한다. 이것들을 뭐라 하느냐? 이것들이 바로 금기이자, 사람에 대한 속박이며, 사탄과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마음과 육을 옭아매는 족쇄이다. 하나님에게 이러한 금기가 있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얘기할 때, 너는 먼저 하나님께 어떠한 금기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는 원칙이 있지만, 어떠한 금기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진리, 길, 생명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래의 구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에서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가리킨다.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한 예수의 말씀에서 ‘이’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이’는 성육신한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예수만이 성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한다고 알려 준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와 거기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하나님의 새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성전이란 장소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알려 준 것이다.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봤을 때, 율법 아래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형식만 차렸을 뿐이었다. 예수는 그 형식을 ‘우상 숭배’로 정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게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성전만 있을 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삶터도, 경배할 곳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고 여겼다. ‘삶터’란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에 머무르면서 자신들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란 성전 안에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수작들을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당시에 사람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을 눈가림으로, 제사를 핑계로 삼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 말씀은 현재에 적용해도 효과가 있고, 현재 상황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비록 오늘날의 사람과 율법시대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사역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의 본성과 본질은 같다. 사람은 지금과 같은 사역의 배경하에서도 여전히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기는 것’과 비슷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은 본분 이행을 직업으로 삼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큰 붉은 용과 싸우는 것을 인권 보호로, 자유와 민주 쟁취를 위한 정치 운동으로 여기며, 약간의 기술을 요하는 본분을 자신의 사업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종교적 교리로 간주하여 지키는 등등의 행동을 한다. 사람의 이러한 행동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기는 것’과 성격이 같지 않으냐? 다만 2천 년 전의 사람은 형체가 있는 성전에서 개인의 경영을 했지만, 오늘날의 사람은 형체가 없는 성전에서 자신의 경영을 할 뿐이다. 규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규례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고, 지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위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며, 사업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본다. 나는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들을 보면서,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높다고 칭송하나 모든 것을 하나님보다 크게 본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일단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찾거나, 자신의 경영과 사업을 할 기회가 생기면, 하나님을 멀리 버려두고 자신이 열중하는 사업에만 몰두하며, 하나님이 맡긴 소임과 하나님의 뜻을 일찌감치 새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2천 년 전 성전에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경영을 했던 사람들과 뭐가 다르겠느냐?

이어서 이 구절의 마지막 말씀을 보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에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가 왜 이 말씀을 했겠느냐? 너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지금 너희는 어쩌면 이 말씀의 함의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때의 사람은 율법시대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안식일에서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웠고,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임을 알려 준다. 비록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모든 물질을 공급해 줄 수 있지만, 너의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었다고 해서, 그 물질들이 너에게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너의 진리 추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교제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은 모두 진리의 내용이므로 그 어떤 값나가는 물질로도 절대 저울질할 수 없고, 그 가치 또한 돈으로 가늠할 수 없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비물질적 진리는 네가 귀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 말은 너희가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말의 요지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다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어떤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주겠다. 너는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 음식은 좋을 수도 있고 별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으로 배만 채우면 배고플 때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사라진다. 그러면 너는 그 자리에 앉아서도 안정을 되찾게 되고, 너의 몸도 함께 편해진다. 사람의 배고픔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겨질 때 네 마음속의 그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음식물이 해결해 줄 수 있느냐? 또는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느끼는 그런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품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성품 또한 알지 못한다면, 마음이 매우 급하지 않겠느냐? 마음속으로 기갈을 느끼지 않겠느냐? 너는 그러한 느낌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러한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거리 구경을 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을 찾아 얘기를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한잠 푹 자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보거나 혹은 본분 이행에 더 노력을 기울이고 더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너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너희는 그러한 방법들에 대해 깊이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네가 마음은 있으나 힘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진리의 실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깨우쳐 주기를 갈망할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때 네게 필요한 것은 배부른 한 끼 식사도, 따뜻한 말 몇 마디도, 일시적인 육적 안락과 만족도 아니라,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알려 주는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확실하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아주 조금일지라도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면, 너의 마음은 밥 한 끼를 배불리 먹은 것보다 더 만족을 느끼지 않겠느냐? 네 마음이 만족을 느낄 때, 너의 마음은 물론, 너의 전 존재가 진정한 안식을 얻지 않겠느냐? 내가 이렇게 비유하고 분석해 줬으니, 이제 너희는 내가 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을 보라고 했는지 이해하게 되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물과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보다 크다는 의미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안식을 얻을 수 없다. 너희는 이후의 체험 과정에서 내가 오늘 왜 너희에게 이 구절을 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진리이고 생명이다. 사람에게 ‘진리’란 사람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자, 사람이 한시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며, 또한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록 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진리가 너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네 마음이 안식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내적 상태와 결부시킬 수 있느냐? 너는 실생활에서 먼저 자신이 경험한 사람, 일, 사물이 어떤 진리와 관련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진리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킬 수 있다. 너에게 임한 일이 어느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도 모른 채 곧장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그것은 비교적 맹목적인 행동에 속하며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우선 너에게 닥친 일들이 어떤 유형의 일인지, 어느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네 체험에 상응하는 진리를 찾은 다음에 그 상응하는 진리에서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너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것은 어떤 규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거나 어떤 공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공식 같은 것이 아니며, 규칙도 아니다. 진리는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이며, 살아 있는 것이다. 또한 피조물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칙이자, 사람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법칙이다. 너는 체험 과정에서 이러한 것을 많이 체득해야 한다. 너는 어느 정도까지 체험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수 없고 진리를 떠날 수 없다. 네가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현된 것이고, 진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자체가 바로 진리이다. 다만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나타내는 것을 진실되게 구현한 것일 뿐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전부 구체화하고 명문화했으며,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하게 하고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증오하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더욱 직설적으로 알려 준다. 하나님이 선포한 이런 진리의 이면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희로애락과 하나님의 본질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 성품의 발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체험을 통해서도 그 효과에 도달해야 한다. 사람이 실생활 밖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약간의 인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도리와 문자적 의미에 국한될 뿐, 진정한 하나님 자신과는 거리가 있다.

현재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내용의 범위는 모두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예전에 일어난 그 일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하나님이 일찍이 나타냈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인식함으로써 더 광범위하고 더 깊이 있게, 더 다양한 측면에서, 다원적으로 하나님의 면면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직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면면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하나님이 한 말씀과 행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더 잘 알 수 있고 게다가 더 전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사람에게 익숙한 성경의 사례나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이 좀 더 쉽게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현재 하나님이 선포한 심판과 형벌의 말씀, 진리들을 한 글자, 한 구절씩 분석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면, 너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공식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 속의 이러한 이야기들을 죽 열거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면, 사람은 지루하거나 재미없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사례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언어로 당시 하나님 마음속에 있던 구체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당시 심정, 즉 정서 혹은 마음과 생각까지 전부 사람에게 알려 주는 셈이다. 이러한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는 목적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공식도, 전설도 아니고,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며, 사람이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임을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하려는 데 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거울로 삼아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더 광범위하게 알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보며, 또한 하나님이 나타낸 이러한 성품들을 통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함과 인류에 대한 염려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인식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전부 느꼈으리라 믿는다!

은혜시대에 예수가 했던 사역에서, 너는 하나님의 또 다른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모두 육신을 통해 나타나며, 또한 인성을 통해 사람이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사람은 인자에게서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며 인성을 지니고 사는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며 신성을 나타내는 모습도 보았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발현된 모습을 통해 사람은 실제적인 하나님을 보았으며, 하나님에 대해 다양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반면, 창세 이후부터 율법시대가 끝나는 시점까지, 즉 은혜시대 이전에 사람이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은 모두 하나님 신성의 일면이었다. 즉, 하나님이 비물질적인 세계에서 행하고 말씀한 것, 사람이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참모습에서 발현된 것들이었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너무 높고 큰 분이라 가까이할 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남겨 준 인상은 대부분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였다. 심지어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마음도 사람에게 너무 신묘막측해서 도저히 종잡을 수도, 알 방법도 없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묵상하거나 체험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모든 것은 아주 요원해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마치 하늘 끝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알거나 혹은 하나님의 어느 한 가지 생각을 안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자 더욱이 아주 요원한 일이었다.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일부 구체적인 사역을 하면서 구체적인 말씀을 하고, 구체적인 성품을 나타냄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체험하거나 볼 수 있는 분명한 인식을 갖게 했지만, 그것은 어쨌든 하나님이 비물질세계에서 나타낸 소유와 어떠함이었다. 사람이 이해하고 알게 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성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이었다. 그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사람에게 구체적인 개념을 줄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상이 여전히 ‘가까이하기 어렵고,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체’라는 범위에 머물게 했다. 하나님이 물질세계의 구체적인 물건이나 형상으로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여전히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항상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정하여 하나님을 물질화, 인간화하려는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생김새는 어떤지, 하나님의 구체적인 기호와 성격은 어떤지 등등이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사람의 필요 또한 잘 알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행한 것이다. 그 방식은 인성으로도 사역하고, 신성으로도 사역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사역한 기간에 사람은 하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아주 많이 보았다. 예를 들면, 그가 춤을 추고, 혼인 잔치에 참석하고,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고, 혹은 어떤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등의 모습이었다. 이와 함께 예수는 신성을 대표하는 사역도 많이 행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역은 다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고 발현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의 신성이 정상적인 육신에 실체화됨으로써 사람은 그를 보거나 만질 수 있었고, 또한 더 이상 하나님을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사람은 인자의 일거수일투족, 인자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거나 하나님의 신성을 알 수 있었다. 성육신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을 지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와 어떠함 등등을 구체화하고 인간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인자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었다. 단지 발현되는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사역하고, 육신의 위치에서 말씀했으며, 인자의 신분으로, 인자의 위치에서 인류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을 접하고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지극히 낮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게 되었고, 초보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과 그의 사역 방식, 말씀할 때의 위치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과 다소 다를지라도, 그의 모든 것은 사람이 본 적 없는 하나님 자신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대변하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 패괴된 인류 중의 그 어떤 사람도 대표할 리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은혜시대에 예수가 말씀했던 한 가지 비유에 대해 알아보자.

3. 길 잃은 양의 비유

마 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것은 비유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 여기에서 비유의 표현 방식은 인류 언어에 있는 수사법의 일종으로, 인류의 지식 범주 안의 것이다. 만일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했다면, 사람은 이러한 말씀이 하나님의 신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은혜시대에 인자가 한 것이라 사람에게는 아주 편하고 따뜻하며, 친근하게 느껴졌다.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인성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로 그의 마음의 소리를 표현했다. 이 마음의 소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대변하고,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하고자 했던 사역을 대변하며, 또한 하나님 자신이 은혜시대에 사람을 대한 태도를 대변했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이 태도를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양으로 비유했다. 만일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그는 어떤 대가라도 치르고 찾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때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람에게 행한 사역의 한 가지 원칙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유로 당시 사역에 대한 결심과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우월함’이다. 즉, 그는 사람의 지식을 이용해서 인간적인 언어로 사람에게 말씀하고, 그의 뜻을 표현할 수 있다. 심오해서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신적 언어를 인간적인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에게 해석하거나 ‘번역’해 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그의 뜻과 그가 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한편, 그는 또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람의 언어로, 그리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 나아가 사람의 언어와 지식으로 말씀하고 사역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을 친근하고 가깝게 대할 수 있는 존재로 느끼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일하는 데에 금기가 있느냐?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 사람의 언어나 사람의 대화 방식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씀과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의 뜻도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이는 잘못된 상상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유를 이용했으며, 사람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진실함과 하나님의 진심을 느끼고, 그 기간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았다. 이 비유는 율법 아래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을 꿈속에서 깨어나게 했고, 또한 대대로 은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사람은 이 비유의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고, 사람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이해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마지막 구절을 보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 자신이 말한 것이냐,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말씀한 것이냐? 겉으로는 예수가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은 그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낸 사람일 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에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확실히 느끼게 하고, 또한 이 말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 반드시 이 말을 보충해야 했던 것이다. 비록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고, 예수의 낮춤과 감춤을 드러낸 말이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든, 영계에서 사역하든, 사람의 속마음과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람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보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던 문제, 즉 인자가 하는 말씀에 반신반의하는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말씀을 하면서 반드시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는 전제를 추가해야만 말씀이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사람이 그의 말씀의 정확성을 믿도록 할 수 있었으며, 말씀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평범한 인자가 되었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어색했는지, 인자의 처지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의 지위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의 이 말씀은 사실 사람에게 ‘절대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한 말은 내 뜻이 아닌, 너희 마음속에 자리한 그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 것이니라’라는 메시지를 전해 준 것이었다. 이 말씀이 사람에게 주는 풍자적 의미가 크지 않으냐? 그는 성육신으로 사역하면서 하나님의 본체에 없는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사람에게 의심받고 버림받는 것을 참아야 했으며, 또한 사람의 무감각과 둔감함을 감내해야 했다. 인자의 사역 과정은 사람에게 버림받는 경험을 하는 과정이자, 사람의 대항을 경험하는 과정이고, 더욱이 몸소 실천하면서 자신의 소유와 어떠함과 본질로 끊임없이 사람의 신뢰를 얻고 사람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탄과 실제로 전쟁을 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그를 따르는 자들과 대결을 펼쳤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대결을 통해 인자는 그의 낮춤, 그의 소유와 어떠함, 그리고 그의 사랑과 지혜로써 그의 사역을 완성하였고, 그가 얻고자 한 사람을 얻었으며, 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신분과 지위를 얻어 그의 보좌로 ‘돌아갔다’.

이어서 아래의 두 구절을 보자.

4.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5. 주의 사랑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내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성육신할 때, 한 단계의 사역과 함께 그 시대에 나타내고자 하는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도 가지고 온다. 해당 시기에 인자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시대에 행하고자 하는 사역의 범위를 둘러싸고 이뤄지며, 그보다 넘쳐 나거나 부족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해당 시대와 관련이 있다. 사람의 방식이나 언어로 표현하든 신적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위치에서 표현하든 그의 목적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그의 뜻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사람이 알고 이해하게 한다. 그래서 은혜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명하려는 바를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아울러 더 많은 경우에 그는 평범한 길 안내자의 위치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사람이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과 훨씬 친근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형식과 방식 면에서 훨씬 더 실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비유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한 숫자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당시에 이렇게 비유한 의도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그의 목적은 사람이 다른 이를 용서할 때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어떤 개념이겠느냐? 바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도’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불과했지만, 이 표현은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은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달았으며, 이 말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을 찾고, 실행의 원칙과 기준을 얻었다. 또한, 이 비유로 사람은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조건 없이, 횟수의 제한 없이 다른 이를 용서하라는, 용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확실한 이해를 얻었다.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그가 정말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숫자를 생각했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정해져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횟수’에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기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예수의 입에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 숫자에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숫자는 하나님이 인성으로 말씀한 비유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숨은 의미나 함의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말씀을 할 때의 위치와 배경을 사람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선포된 것이라 육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에는 영계에서 벗어나 인성의 각도에서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의 관념 속 상상이나 사람이 삶 속에서 보고 접하는 일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또는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그의 신적 성품과 마음, 그의 태도를 전했다. 그리하여 사람이 이해 가능하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과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행하는 사역 방식과 원칙이 대부분의 경우 인성을 통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신성으로 직접 사역해서는 얻기 힘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인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 내용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다. 방식도 훨씬 유연하고, 형식 면에서도 율법시대를 뛰어넘는다.

이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말씀은 직접 신성으로 선포한 것이더냐?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인자가 인성으로 한 말씀이다.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명을 보살피듯 보살핀다’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오직 사람만이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적어도 하나님의 신성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 안에 들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그의 성품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자 발현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 일부러 무언가를 하거나 특정 방식과 도덕규범을 따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본질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할 때, 인간적인 형식으로 많은 말씀과 진리, 방식을 전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 뜻도 함께 전하여 사람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 본질, 그리고 소유와 어떠함을 더없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본질을 나타냈다. 인자의 인성은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과 사귀고 소통하는 데에 있어 방해물이나 장애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와 창조주를 연결하는 유일한 경로이자 다리가 되었다. 이쯤에서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의 성격과 방식 중 일부는 지금 이 단계의 사역과 유사한 부분이 아주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지금 단계의 사역에서도 많은 인간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했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나 인류의 지식적인 측면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이용해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나님이 일단 성육신하고 나면 인간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신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이나 표현 방식에 있어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한 때는 바로 네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했을 때 성장 과정에서 인성으로 사람의 지식, 상식, 언어 혹은 표현법을 이해하고 배우며 파악하게 된다. 피조물인 인류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것들은 성육신 하나님께 갖춰져, 그가 육신에서 하나님의 성품 혹은 신성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람의 언어로 더 적절하고 현실적이며 정확하게 사역할 수 있게 되고, 이에 사람은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역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 하나님의 육신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장차 실제적으로 발현될 때이다. 그리고 그때는 인자가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사자(使者)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사역을 곧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 가운데서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과 사역을 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곧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모두 예수가 강생했을 때 일어난 많은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마왕에게 쫓긴 것으로, 온 성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까지 전부 살해당한 일이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사람들 가운데 왔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새 사역을 사람들 가운데 전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적어도 기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며 직분 이행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더없이 즐거웠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한 끝에 드디어 정상인의 육신을 입고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사람의 신분으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마침내 사람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들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언어를 이용해 공급하고 인도하며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또 사람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방식으로, 나아가 사람의 시각으로 인류와 사물, 모든 것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은 육신 사역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같았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함에 위안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났기에, 하나님이 느낀 위안은 실로 참된 것이었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이룰 때, 하나님이 기쁨과 위안을 느낄 때, 그때가 바로 인류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때이자 구원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때가 바로 그의 새 사역이 전개되고, 그의 경륜이 앞으로 나아가는 때이며, 더욱이 그의 뜻이 완전한 성취에 가까워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은 인류에게 행운이자 더없이 좋은 일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펼칠 때는 하나님께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이 새로운 사역과 시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실현될 때는 이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고 이루어진 때이며, 하나님이 최종 효과와 성과를 거둔 때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성과에 만족해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을 보았고 확정하고 얻었으며, 그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를 만족게 할 수 있는 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슬픔을 내려놓았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새 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그가 하고자 하는 사역을 막힘없이 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느꼈을 때, 이미 결말을 보았으며, 이 결말로 인해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하나님이 그 즐거움을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겠느냐? 상상이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려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손뼉을 쳐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춤을 출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노래를 불러도 되겠느냐? 그 노래는 어떤 노래여야겠느냐? 하나님은 당연히 마음속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그 노래를 사람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만물에게 들려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고,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다양한 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고정된 생각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즐거움과 심정을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즐거워해서도, 울거나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 어느 정도 자유와 해방을 허락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중에 너희가 하나님이 슬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최소한 하나님이 왜 즐거워하고 슬퍼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 때, 너의 마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질 것이며,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 혹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며, 너의 생명이 된 하나님이자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바람이 있느냐?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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