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하나님 말씀 ― 생명 진입 | 발췌문 547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반역자다. 그는 내면에 너무 큰 야심을 품고 있고, 패역한 성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기 싫어한다. 이런 자들은 온전케 되기 어렵다. 하나님...
욥이 겪은 고통스러운 일은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직접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욥이 고통받은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욥은 자신이 평소에 마음속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 평소의 행동 원칙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전부 드러냈다. 그것은 다 진실한 것이었다. 만일 욥에게 시험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을 주기 전에,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이 매우 위선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아주 많은 재산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만일 욥이 시련을 받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이 큰소리치기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그가 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임하면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버릴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아 하고,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으면 하며, 임할까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차마 볼 수 없었던 그런 지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의 순전함을 지킬 수 있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의 그때의 반응에, 공리공론을 즐기며 글귀만 늘어놓기 좋아하던 자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오는 시련을 받아들인 적이 없던 자들은 욥이 지켜 낸 순전함에 의해 정죄받았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자들도 욥의 증거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과 그의 말을 두고 혹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질투를 하며, 혹자는 의혹을 품는다. 심지어 무시하는 태도로 욥의 증거에 대해 코웃음 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욥이 시련 속에서 받았던 고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욥이 했던 말도 들었고, 시련이 임했을 때 그가 보여 준 인간성의 ‘나약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나약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욥의 이른바 순전함 중의 순전하지 않은 부분인 동시에,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자’의 흠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순전한 자는 완벽한 사람, 즉 흠도 없고 오점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약함이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또한 아파하고 슬퍼하는 정서도 없고, 증오도 없으며, 과격한 행동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이 진정으로 순전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많은 행동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욥은 사람들의 상상처럼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대성통곡한 것이 아니다. 그의 이러한 ‘예상을 벗어난 행동’은 사람들에게 그를 냉혈 인간으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그에게서는 눈물도 혈육의 정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처음에 욥이 사람들에게 남긴 ‘나쁜 인상’이었다. 이어지는 욥의 일련의 행동들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겉옷을 찢는’ 행동을 하나님에 대한 불경한 행동으로 보았으며, ‘머리털을 미는’ 행동을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욥이 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 말 외에 사람들은 욥에게서 하나님이 칭찬한 그 어떤 의로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그저 이해되지 않아 하거나 오해하거나 의심하거나 정죄하거나 도리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욥에 대해 위와 같은 인상을 받은 데다가 욥의 의로움에 한층 더 의구심을 품었다. 욥이 했던 것과 성경에 기록된 그의 행동은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도 울릴 만큼 큰 감동을 선사할 것이라는 사람의 상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장거’를 이룩하기는커녕, 고작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던 것이다. 이 행동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욥의 의로움에 의혹을 품게 하고, 심지어는 부정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다. 욥은 몸을 긁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맹세한 적이 없었고, 통곡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들은 욥에게서 그의 나약한 모습만 보았을 뿐, 다른 것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욥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지라도 그 말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거나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으며, 욥의 말에서 그의 의로움을 볼 수 없었다. 시련의 고통을 겪고 있던 욥이 사람들에게 준 인상은 대체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이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보지 못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과 그가 어떤 원칙으로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그의 비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이 그저 빈말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 역시 그저 전설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그의 ‘나약함’에 대해서는 인상이 깊었다. 또한 그 ‘나약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했던 순전하고 정직한 자를 ‘다시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새롭게 이해’하기까지 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때, 내가 말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과 ‘새로운 이해’가 여기에서 입증되었다.
아무도 욥이 고통받은 정도를 상상하거나 느낄 수 없지만, 욥은 ‘대역무도’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몸의 고통을 줄여 보고자 성경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뿐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 아무도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 너희가 보기에 이 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이 있느냐? 이 말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뜻이 있느냐? 나는 너희 대부분이 욥의 이 말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너희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면 그 어떤 나약함을 보여서도 안 되고 슬퍼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탄의 모든 공격에 직면해야 하고, 심지어 웃으면서 사탄의 시험을 마주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사탄이 욥의 육체에 어떤 고통을 가해도 욥은 마땅히 아무런 반응도 없어야 하고, 자신이 느꼈던 어떤 것도 표현하지 말아야 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더 강력한 시련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강직한 자가 마땅히 보여 주고 갖춰야 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그저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뜻은 더욱 없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진짜로 행하기는 아주 어렵다. 예부터 지금까지 욥과 같은 시험을 받아 본 자가 없을뿐더러, 욥과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자도 없기 때문이다. 왜 욥과 같은 시험을 받은 자가 아무도 없겠느냐? 이는 하나님이 보기에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욥이 해낸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욥처럼 이러한 고통이 임했을 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지금 욥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욥의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냐? 의인인 자, 이처럼 하나님을 증거한 자, 사탄으로 하여금 머리를 감싸고 도망쳐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하게 한 자를 칭찬한다고 해서 안 될 게 뭐가 있느냐? 설마 너희의 요구 기준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것이냐? 너희는 시련이 닥쳤을 때 욥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도 칭찬했는데 너희가 무슨 이견이 있느냐?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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