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집 (a) 하나님 말씀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에 대한 설교 교통

【131-A-1】

말씀 낭송 듣겠습니다.

성령 역사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단계마다 높아져 가며 내일의 계시는 오늘보다 더 높고 한 걸음에 한 계단씩 더 높이 나아간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역사를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한다. 사람이 만약 따라가지 못한다면 수시로 도태될 것이고 만약 순복(역주: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끝까지 따를 수 없다. 낡은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새로운 시대이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사역을 한다. 특히 사람을 온전케 하려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은 더 빠르게 더 새로운 사역을 하려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순복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어렵다. 하나님은 규례를 지키지 않으며 어느 한 단계 사역도 영원불변한 사역으로 여기지 않고 시종일관 더 새롭고 더 높은 사역을 한다. 그의 사역은 단계마다 더 실제적이며 사역할수록 사람의 실제적인 요구에 부합된다. 사람은 오직 이러한 역사를 경력(역주:체험)해야 비로소 최종의 성품 변화에 도달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사람의 인식이 갈수록 높아지므로 하나님의 사역 또한 갈수록 높아지는데 이래야 사람이 온전케 될 수 있고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한 방면으로는 사람의 관념을 반격하여 바로 잡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람을 이끌어 더 높고 더 실제적인 경지에 진입하고 하나님을 믿는 최고의 영역에 진입하게 하여 최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본성이 패역하고 고의로 대적하는 사람들은 빠르고 맹렬한 이 단계 역사에 의해 다 도태될 것이고, 오로지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기꺼이 ‘낮추려는’ 사람만이 길 끝까지 갈 수 있다. 이러한 역사에서 너희는 모두 순복하기를 배우고 관념을 내려놓기를 배워야 하며 걸음걸음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만약 덤벙거린다면 반드시 성령에게 버림받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사람이 된다. 이 단계 사역을 경력하기 전에는 사람의 낡은 규례와 율례가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아 모든 사람은 판단력이 흐리고 자만하여 분수를 모른다. 이런 것은 사람이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이는 데의 장애물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의 원수이다. 만일 사람에게 순복하는 마음과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위험하다. 네가 만약 간단한 역사와 말씀에만 순복하고 더 깊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낡은 것을 지키는 사람이므로 성령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갈 수 없다. 하나님이 각 시대마다 역사하는 것은 모두 다르다. 만약 이 기간의 역사에 네가 잘 순복했어도 다음 기간의 역사에 잘 순복하지 못하거나 혹은 순복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이 단계로 나아갈 때 네가 따랐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에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야말로 성령께 순복하는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시종일관 순복해야지 기분이 좋으면 순복하고 기분이 나쁘면 순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순복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새로운 역사를 교통해도 네가 따라오지 못하고 이전의 그 논법을 지킨다면 너의 생명이 진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 너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네가 순복하고 받아들인다면 성령은 반드시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내가 어떻게 말하면 성령이 그대로 역사하므로 너희가 내 말대로 행하면 성령은 곧 너희 몸에서 역사한다. 나는 새로운 빛을 내보내어 너희로 하여금 보게 하고 너희 모두를 현시(現時)의 빛 속으로 이끌어 들어간다. 네가 현시의 빛 속으로 들어가면 성령은 즉시 네 몸에서 역사한다. 어떤 사람은 불복하여 “저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네가 지금 길이 없고 메마르며 생명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품 변화를 경력하고 현시의 빛을 따르는 것은 가장 관건이라고 한다. 성령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부 사람들에게 역사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교회에서도 역사하는데, 누구 몸에 역사할지 모른다. 이 한동안 네 몸에서 역사하면 네가 경력하고, 다음 한동안 다른 사람에게 역사하면 너는 얼른 따라야 한다. 현시의 빛을 따를수록 생명은 더욱 자라나게 된다.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성령이 역사한 것이기만 하면 너는 따라야 한다. 그리고 너의 경력 가운데서 그의 경력을 실제적으로 체험하면 너는 또 더 높은 것을 얻게 되는데, 이렇게 실행하면 더 빨리 진보하게 된다. 이것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길이고 생명이 진보하는 경로이다. 온전케 되는 길은 바로 네가 성령의 역사에 순복하는 것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통해 너를 온전케 할지 모르며, 어떤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통해 너로 하여금 얻게 하고 보게 할지도 모른다. 만약 네가 이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다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희망이 크다는 것을 설명하고, 만약 네가 이 길에 들어설 수 없다면 너의 앞날은 어둡고 막막하고 빛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네가 이 정상 궤도에 들어섰다면 모든 일에서 계시를 받을 수 있다. 성령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계시하든지 네가 그의 인식에 따라 경력하면 너의 생명으로 될 것이다. 너는 이 경력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다. 남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사람은 경력이 없는 사람이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깨달음과 일깨움에서 실행의 길을 찾아야 하고 또 자신이 실제적으로 직접 경력한 것과 인식한 것을 말하면 자신의 생명에 더욱 도움이 된다. 너는 이렇게 경력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든 것에 순복하며 매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매사에서 공과(功課)를 배워 너의 생명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하면 진보가 가장 빠르다.

성령은 너의 실제 경력을 통해 너를 깨우쳐 주고 또한 너의 믿음을 통해 너를 온전케 한다. 너는 참으로 온전케 되기를 원하는가? 네가 참으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원한다면 너는 육체를 버릴 용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으며, 소극적이거나 연약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에 순복할 수 있으며, 앞에서 한 것이든 뒤에서 한 것이든 모두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다. 네가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한 사람이 되고 모든 일에서 진리를 실행하면 바로 온전케 된 사람이다. 앞에서 이런 수작을 부리고 뒤에서 저런 수작을 부리는 간사한 사람들은 온전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고 모두가 침륜과 멸망의 자식들이며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는 자는 이러한 사람이 아니다! 만약 네가 모든 행위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고 하나님 영의 감찰을 받을 수 없다면 너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너는 하나님의 심판ㆍ형벌을 받아들이고 성품 변화를 중요시해야만 온전케 되는 길로 갈 수 있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 원하고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원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순복해야 하고 그 어떤 원망도 하지 말며 하나님의 사역을 제멋대로 논단하거나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데에 있어 최소한 갖춰야 할 조건이다.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구비해야 할 조건은 매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너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너의 본심이 바르기 때문에 네가 행한 것이 옳든 그르든 용기 있게 내놓아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 형제자매에게 보여 줄 수 있으며 담대히 하나님께 맹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 하나의 본심, 매 하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이 살피도록 해야 한다. 만일 네가 이렇게 실행하고 진입한다면 생명의 진보가 빠를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만일 이것을 하지 못하면 믿고 안 믿고는 논할 수도 없다. 네가 하나님을 오래 믿었어도 여태껏 하나님께 순복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에게 순복하여 너의 관념대로 하라고 한다면 너는 가장 패역한 사람이고 불신파이다. 이런 사람이 사람들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하나님의 그런 역사와 말씀에 어떻게 순복할 수 있겠는가? 가장 패역한 사람은 고의로 하나님께 불복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이는 하나님의 원수이고 적그리스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대해 늘 적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여태껏 순복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고 기꺼이 순복하거나 낮춘 적이 없다. 그들은 사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높다고 여기면서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순복할 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말씀’을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고 또한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원래 자신에게 있었던 보배를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가보(家寶)로 삼아 섬기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데, 그것으로써 그들을 숭배하는 그 멍청이들을 훈계한다. 확실히 이런 사람이 교회에 일부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위풍당당하여 굴하지 않는 영웅 세가(世家)’로, 대대로 하나님 집에서 얹혀살고 있다. 그들은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최고 직책으로 삼아 한 해 또 한 해, 한 세대 또 한 세대 그들의 신성불가침의 직책을 이행하고 있기에 감히 누구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또한 어느 누구도 감히 그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제왕’이 되어 매 시대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횡포를 부린다. 이 무리의 악마들이 연합하여 나의 사역을 허물어뜨리려고 시도하는데, 내가 어찌 이런 산 귀신이 내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반이나마 순복하려는 그 사람들도 마지막까지 갈 수 없는데, 하물며 순복하려는 마음이 아예 조금도 없는 이 악질들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온 힘을 다 기울인다 해도 겨우 일부분 사람만 하나님께 얻어져 최종에 온전케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이 천사장의 후대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그것들은 더욱 하나님께 얻어질 희망이 없지 않는가? 내가 와서 정복 사역을 하는 목적은 단지 정복을 위한 정복이 아니라 의와 불의를 드러내기 위해 정복하는 것이고 사람을 징벌하는 증거를 장악하기 위해 또한 악인을 정죄하기 위해 정복하는 것이며 더욱이 순복하려는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정복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되게 하는데, 온전케 된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는 순복이 가득하다. 이것이 마지막에 이루게 되는 사역이다. 그러나 패역한 행위로 가득한 그 사람들은 모두 징벌받아 불사름의 불길 속에 떨어져 영원토록 저주받는 대상이 된다. 그때면 역대의 ‘위대하고 위풍당당하여 굴하지 않는 영웅 세가’의 사람들은 가장 비천하고 냉대받는 ‘나약하고 무능한 졸장부 세가’로 된다. 오직 이래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공의와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을 나타낼 수 있고 또한 나의 가슴에 맺힌 원한이 풀리게 된다. 너희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지 않은가?

성령 역사를 경력한 모든 사람들이 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또한 이 흐름 속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산물이 아니며, 성품 변화는 모든 사람이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는 데는 반드시 실제와 살아냄이 있어야 한다. 겉으로 순복한다 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이 아니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표면적인 것에만 ‘순복’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에 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순복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한다는 것은 본래 같은 뜻이다. 만일 하나님께만 순복하고 하나님의 역사에는 순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순복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며, 만일 진심으로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아첨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순복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얻는 것이 좀 있고 또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 이야말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새로운 역사 가운데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변화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칭찬받는 사람이고 온전케 되는 사람이며 성품이 변화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꺼이 순복하는 사람이고,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에 기꺼이 순복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사람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이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나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질상으로는 오히려 하나님을 욕하는 그 사람들은 자기를 위장하는 사람들이고 독사의 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며 가장 음험한 사람들이다. 이 악한 패거리들은 조만간 그 추악한 가면이 벗겨지고 말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사역을 하고 있지 않는가? 악인은 어쨌든 악인이므로 결국에는 그 징벌의 날을 피할 수 없고, 선한 사람은 어쨌든 선한 사람이므로 사역이 끝날 때 결국에는 다 드러날 것이다. 어떤 한 악인도 의인이라 칭할 수 없고 어떤 한 의인도 악인이라 칭할 수 없다. 내가 사람을 억울하게 하겠는가?

생명이 진보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새로운 진입이 있고 언제나 새롭고 높은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단계마다 더 심화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진입해야 할 것이다. 교통하는 것이나, 말씀을 듣는 것이나, 하나님 말씀을 보는 것이나, 어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을 통해 너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계시가 있고 낡은 규례 속에서 살지 않고 뒤떨어질 때가 없이 항상 새로운 빛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면 이것을 비로소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이라 한다. 겉으로만 대가를 치러서는 아직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루가 다르게 더 높아지고 날마다 새로운 것이 있으므로 사람도 날마다 새로운 진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디까지 말씀하면 거기까지 이루므로 네가 따르지 못하면 낙오된다. 기도가 깊어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먹고 마셔야 하며 받는 계시가 깊어지고 소극적인 것이 줄어들어야 하며, 일을 판단하는 능력도 강화시켜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며, 영 안의 일들을 깨닫는 것을 통해 외부의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문제의 실질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는다면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글귀 도리만 말하면서 실제가 없고 실행의 길이 없으면 한동안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새신자를 가르치는 것은 그나마 괜찮겠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 새신자에게 실제 경력이 있게 되면 너는 공급할 수 없게 된다. 이러면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합당하겠는가? 너에게 새로운 깨우침이 없으면 너는 사역할 수가 없다. 새로운 깨우침이 없는 사람은 모두 경력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이 없고 새로운 경력도 없다. 생명을 공급하는 이 일에서 언제나 자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받지도 못하는 이런 사람은 바로 폐물이고 밥통이다. 사실, 이러한 사람은 사역 중에서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모두가 쓸모없는 폐물이다. 그들은 자신의 기능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 쓸데없는 많은 말썽을 일으킨다. 더 이상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나는 이런 어르신들에게 교회에서 얼른 나가주십사 청한다. 새로운 사역에 대해 인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관념이 겹겹이 쌓이고, 교회에서 그 어떤 기능도 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도처에서 이간질하고 소극적인 말을 퍼뜨리며, 심지어 교회에서 못된 짓을 하고 마구 떠들어 대어 분별이 없는 그 사람들을 혼란시켜 어리벙벙하게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는 이런 산 귀신과 악령은 너로 인해 교회가 손실을 보지 않도록 일찌감치 교회에서 떠나라. 네가 오늘은 이러한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내일의 공의로운 징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교회에 많은 식충이들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정상적인 사역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늑대들이 많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악마의 우두머리가 보낸 마귀들이고 무지한 어린 양들을 통째로 삼키려고 시도하는 흉악한 늑대들이다. 소위 사람이라고 하는 이런 자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곧 교회 안의 기생충이 되고 모두 제물을 탐식하는 좀벌레가 된다. 비열하고 무지하며 비루하고 비천한 이 구더기들은 머지않은 어느 날 꼭 징벌을 받을 것이다!

【131-A-2】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 이것은 금방 우리가 먹고 마신 하나님 말씀 제목입니다. 이 말씀의 제목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매우 뚜렷합니다.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고 또 구원받기를 추구하려는 심지도 있다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한다면 그 사람의 소망과 심지는 반드시 현실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는 이 말씀의 제목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더더욱 진리죠. 지금 많은 사람들은 본분을 잘하겠다는 심지도 세우고 구원을 받으려고 힘을 다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진입해야 할까요?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요? 방금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 속에 아주 뚜렷한 답이 있습니다. 어떤 답이었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도대체 어떻게 경력해야 하는지, 도대체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경로이고, 또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여야만 정결케 되고 구원받고 온전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세 역사에 진심으로 순복해야만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먹고 마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지금처럼만 하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게 아닌가요? 전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또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하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해야 할 본분도 하고 있고요. 이게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는 게 아닌가요?” 그것도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순복만 가지고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느 한 가지 요구에라도 노력해서 도달한다면 그건 다 순복하는 겁니다. 하지만 한 방면에만 순복한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진정으로 순복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럼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한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성령 역사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단계마다 높아져 가며 내일의 계시는 오늘보다 더 높고 한 걸음에 한 계단씩 더 높이 나아간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역사를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한다. 사람이 만약 따라가지 못한다면 수시로 도태될 것이고, 만약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끝까지 따를 수 없다.” 여기에서 뭘 말씀하셨죠? “성령 역사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단계마다 높아져 가며 내일의 계시는 오늘보다 더 높고 한 걸음에 한 계단씩 더 높이 나아간다.” 말씀의 느낌과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정말 이런 느낌과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역사가 날마다 높아지고, 깨우침도 하루하루 높아지며 내일의 계시도 더욱 높아진다는 걸 정말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며칠만 예배를 드리지 않고 설교를 듣지 않아도 굉장히 많이 뒤처진 거 같고,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역사에 대해서 경력이 생겼습니다. 무엇으로 실증할 수 있죠? 바로 이런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속으로 ‘아, 성령의 역사는 정말 하루하루 높아지고 있구나! 하나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나 상면의 설교 교통을 놓고 봐도 정말 하루하루 높아지고 하루하루 깊어지고 있구나! 늘 새로운 깨우침과 새로운 계시도 있구나.’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수록 마음이 더욱 환해지고, 설교 교통을 들을수록 더욱 깨닫게 되고 더욱 힘이 생기는 걸 느낍니다. 그런 건 다 성령 역사로 도달한 효과가 아닌가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면서 사람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령이 사람에게 그렇게 역사하는 걸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지만,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서 한 걸음씩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깨닫게 되는 이상(異象)과 얻게 되는 진리, 얻게 되는 깨우침도 날마다 높아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렇게 경력하면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고, 끝까지 따라간다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얻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이 다 이런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니까 정말 다르구나. 우리의 생명은 정말 계속 자라나고 있구나! 옛날의 그런 종교적인 교회는 너무나 멀리 뒤떨어졌어! 한 1~2천년은 뒤떨어진 거 같아! 교계는 점점 더 멀리 뒤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우리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구나! 아, 교계는 왜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생명도 점점 더 빨리 자라나고, 점점 더 정결케 되고 있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왜 이런 걸 보지 못하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우린 정말로 아름다운 가나안 땅의 즐거움과 복을 누리고 있어요!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날마다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누리고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교계는 뭘 먹고 있죠? 시대에 뒤떨어진 성경 속에 있는 걸 먹고 있습니다. 진작에 도태된 거죠. 교계는 완전히 기근 속에서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해 주시기 때문에 셋째 하늘에서 누리고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을 볼수록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을 볼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진실해졌는데, 더 이상 막연한 도리나 관념, 상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경력하고, 또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더 진실하게 알게 됩니다.

교계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이라고 해도 교계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도 구원받아야 하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방치하지도 않으실 거예요.” 맞는 말인가요? 어떤 분들은 틀렸다고 하십니다. 왜 틀렸다고 하시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다 참 도를 고찰할 기회는 여러 번 주십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건 모든 사람들이, 땅 끝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봤고, 복음을 다 들었다는 걸 증명합니다. 그 복음을 들었고, 또 들어본 지도 몇 년씩 되면서 고찰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그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기회를 안 주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계 사람들이 말하는 ‘기회’는 뭘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실 것이고, 절대 버리지 않으실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어떤 기회를 주실까요? 어떻게 주실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를 주시거나 꿈에 나타나셔서 이상을 보여 주실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하실 때마다 하나님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이 있으시고 또 초자연적인 일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율법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셨습니다. 거기 250명의 족장들이 모세를 논단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나요?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쓰시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셨나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으시고 바로 멸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권병을 주셨습니다. 땅이 입을 열게 하시고 다 거기에 빠지게 하셨죠. 이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르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그리고 하시는 사역을 봤으면 마땅히 순복해야 합니다. 왜 불복하는 걸까요? 뭘 믿고 불복하는 걸까요? 그때 하나님과 따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따지는 것은 대역무도한 것입니다. 죽을 때가 된 것입니다.

【131-A-3】

자, 계속해서 은혜시대를 봅시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데리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줬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나서 그분이 바로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시고, 주님이시고, 그분이 오셨다는 것을 속으로 느꼈죠. 그리고 얼마 안 돼 요한은 감옥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감옥에서 요한은 주님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에게는 ‘정말 주님이라면 날 감옥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날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주님이 맞을 거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주님이 아닐 거야.’ 그런 관념이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요한을 구해 주지 않으셨고, 요한은 죽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요한을 따르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왜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에게 긍휼과 자비가 없으신 걸까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주님은 긍휼과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근데 주님은 왜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거기에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진리가 있고 또한 심오한 비밀이 있는 겁니다. 주님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쉽게 문을 열어 주신 적이 없고, 누구에게나 다 공평하십니다. 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받아들이게 하시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시대에 베드로가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주님을 증거한 외에 다른 사람이 있나요? 다른 사람이 깨우침을 받았나요? 아무도 받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만 받았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온 교계, 세계 각국의 교회마다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은 인터넷을 통해 10년 정도 전해졌습니다. 큰 붉은 용도 ‘동방번개’를 홍보해 줬고, 심지어 이스라엘에까지 전해져서 거기에서도 중국에 ‘동방번개’라는 교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도 ‘동방번개’,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보면 하나님의 말세 사역과 하나님의 이름이 벌써 땅끝까지 전해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교계에는 기회를 줄 수 없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았을까요? 기회는 지금도 주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저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뿐입니다. 지금도 기회를 주시고 있고, 이미 오랫동안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홈페이지가 생긴 지 최소10년이 됩니다. 그러면 기회를 10년 정도 준 거 아닌가요? 그 기회는 한두 번만 주시는 게 아닙니다. 한 번 주시면 몇 년씩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시작해서부터 대재난이 임할 때까지 그 기간은 은혜의 문이 열려 있는 때입니다. 은혜의 문이 열려 있는 그 동안이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신 거 아닙니까? 근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보지 못하고, 기회를 특별히 다시 한 번 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특별하게 줘야 될까요? 중국에 있는 하나님 선민들에게도 다 그렇게 증거했습니다. 다 그렇게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공개적으로 나타나신 적이 없고, 어떤 사람에게도 특별한 꿈이나 계시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자신의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본 것 뿐입니다. 사람에게 다 눈이 있지 않습니까? 보면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시면 됩니다. 사람들에게 보게 하고 듣게 하는 것이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면, 그건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마지막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 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왜 저희에겐 계시를 주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럼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난 누구에게도 나타난 적이 없고, 누구에게도 계시한 적이 없다. 근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믿었겠느냐? 넌 왜 믿지 않았느냐? 다른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왜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할 수 있었느냐? 너는 왜 듣고 나서 부인하였느냐? 그럼 그건 기회를 준 게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그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문을 두드렸지만 열어 주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게 합당하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나요?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가서 하나님과 이치를 따져 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이치를 따져 이길 수 있을까요? 사람은 뭡니까? 먼지입니다. 그런데 감히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려 하다니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바로 멸하실 겁니다. 그래도 이치를 따지겠습니까! 설마 셋째 하늘에 가서 하나님과 따지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자격이나 있나요? 너무 교만하고 방자한 게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에게든 다 공의로우십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정상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누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통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 맞고 너무 좋다고 말합니다. 정말 다 이해할까요? 이해하는 건 한정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한 것이 대부분은 맞다고 느끼는 겁니다. 어떤 말들은 관념에 부합되지 않고 잘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논단하지 않고 순복을 잘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형제님이 교통하시는 게 대부분 다 실제적이니,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 어떤 건 내 관념에 맞지 않아도 형제님이 틀리게 말했다고 하면 안 돼. 아마 내가 경력하지 못했거나 깨닫는 능력이 아직 부족해서 그럴 거야. 이제 천천히 찾고 구해야겠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하나님께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해도 관념에 좀 부합되지 않는 것이 있어도 천천히 찾고 구할 것입니다. 자기가 그 방면을 잘 알지 못한다 해서 도망가거나 물러나거나 거절하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참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제가 새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새 신자분들 교회의 상황을 들어 보니, 많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순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설교하는 것이나 교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체험하고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니 경력이 깊은 말에 대해 경력이 얕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관념도 생기지 않고 논단하지도 않습니다. “말씀이 좋고 실제적이니 받아들여야죠! 잘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해야 돼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제 교통을 듣고 나서 90%는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단 자기 관념에 부합되지 않거나 반대되는 면이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딱 한 가지가 자기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말한 게 다 틀렸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게 많은 맞는 부분에 대해서는 왜 알아보지 않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요? 딱 한 가지가 자기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네가 진리의 도를 듣고 생명의 말씀을 본 후에, 이런 말씀이 단지 만분의 일이라도 너의 생각에 부합되고, 성경에 부합된다고 여긴다면, 너는 그 만분의 일의 말씀 가운데서 계속 구하여라……” 저는 지금 새 신자분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통이 99%가 맞아도 하나만 틀리면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합니다. 교만 자대해서 옥에서 티를 찾듯 일부러 남의 흠만 잡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이 오신 걸 본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을 대적할 겁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은 사람의 관념에 더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죠. 진리는 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깊은 진리일수록 사람의 관념에 더 부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 이 말씀 제목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또한 이 말씀 자체가 진리이기도 하죠.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갖가지 관념이 생기고, 늘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근거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론하고 논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아닙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 많은 악인들과 적그리스도들이 다 출교됐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10년 넘게 양육해 주었는데, 아무리 양육해도 쓸모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사역하면서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사탄의 본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원히 변할 수 없고, 마지막에는 다 도태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일을 꿰뚫어 보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런 사람들을 과감하게 한 무리 한 무리씩 출교시키고 제명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교회 생활도 점점 정상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선민들이 예배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도 방해받지 않게 되고, 진리 실제에 대해서도 교통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 집은 글귀 도리만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다 엄격하게 대처 수리합니다. 그 외에 각급 인솔자 일꾼을 선거할 때도 진리 실제가 없는 사람은 뽑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진리 실제가 없는 사람은 글귀 도리만 말하면서 사람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진리 실제가 좀 있는 사람을 발탁해서 인솔자로 임명해 교회 생활이 점차 정상화되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은 다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서 인식하고 깨달은 걸 교통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교통할 때도 자신의 패괴 정형과 결부해 마음속 말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모두 단순하게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실, 그리고 잘못 경력한 것과 잘못된 인식을 내놓고 여러 사람들이 분별하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해 진실한 경력과 진실한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생활에서 효과를 보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늘 관념이 있고, 특별히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늘 하나님 집에서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적그리스도와 악마 무리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와 악마를 출교시키고 제명시키지 않은 곳이 있다면 그곳의 교회 생활은 영원히 정상화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적그리스도와 악마들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일까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들일까요? 탁상공론만 하고 허풍만 치는 사람들,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일까요? 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깨달아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한다는 것은 뭘 말할까요?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오고, 하나님 집에 온 것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직장도, 가정도 다 버리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하는 게 하나님께 순복하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큰 붉은 용이 정말 잔인하게 잡아가고 박해해도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을 따르고 있으며,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게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걸 다 버리고, 자신의 기능을 다해 날마다 하나님을 위해 본분을 하고 있는데, 그게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을까요? 말씀 제목에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실행에서 부족한 것이 바로 진심입니다.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어떤 부분에 순복해야 하는 걸까요? 모든 것을 버린다는 한 마디 말씀에만 순복하거나 은혜시대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거나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면서 사역하는 그런 것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걸까요?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뭘 말할까요? 하나님께 순복한다는 건 단지 하나님의 어떤 말씀 한 마디에만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한다는 건 또 뭘 말할까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수리와 대처, 시련과 연단에 순복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고, 하나님이 발표하신 모든 진리에 순복하고,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복하고, 성령의 역사에 순복하는 걸 말합니다. 그런 걸 통틀어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일에는 이렇게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딱 한 마디만 갖고 와서 하나님을 대표하려고 한다면 안 됩니다. 단지 한 마디를 갖고 와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대표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131-A-4】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순복한다〉는 찬양을 듣고, 전에 한 형제가 어떻게 말했는지 아십니까? 이 찬양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노래를 잘 불러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순복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온전케 될 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어떤가요? 어떤 사람은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가장 큰 복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전케 될 수 있으니, 하나님 사랑하는 것만 추구하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생명 진입에서 관건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거야. 난 나 자신을 인식하는 일만 중요시할 거야! 자신을 깊게 알게 되면, 생명 성정이 변화될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관건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거야. 내가 성실한 사람이 돼서 거짓말만 안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습니까? 하나님 역사에 순복한다는 것은 그저 말씀 한 마디만 실행하면서 경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한 마디는 하나님을 대표하지 못하고, 말씀 한 마디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대표하지 못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한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한다는 것을 가리켜 말씀한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에 진심으로 순복한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진심으로 순복한다는 걸 말합니다. 아셨습니까? 주로는 역사에 순복하는 걸 말합니다. 심판과 형벌, 책망과 징계, 시련과 연단을 거쳐야 마지막에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 대단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제가 어떤 부분에서 노력을 들였는지 얘기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인식하는 걸 중요시했습니다. 그다음 자신의 패괴된 본성 실질을 대조해 봤습니다. 둘째, 본분에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할 수 있도록 이 부분을 중요시했습니다. 셋째,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중요시하면서 정상 인성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사치하지 않고 욕망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넷째, 깨달은 모든 진리로 말미암아 더 많은 진리를 경력하게 되었고, 인식이 있게 되어 실제를 어느 정도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경력하다 보니, 마지막에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게 되고, 변화도 어느 정도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어느 방면에서나 다 조금씩 진리 실제를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에 마음을 들일수록,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일수록 더 많이 얻게 됩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상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겉면의 행위로 종교적인 규례만 지키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아무리 오래 지킨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과 성정 변화를 중요시하고, 일을 보는 관점의 변화를 중요시하고, 하나님 알아가는 것을 중요시해야 나중에 진리 실제를 살아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라는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얻는 하나의 경로입니다. 만약 늘 순복하려는 마음이 없고, 항상 복 받을 마음을 품으면서 항상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를 추구하고, 항상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하면서 늘 높은 지위를 추구한다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태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도태된다”는 건 뭘 말하냐고 묻습니다. 그건 성령의 역사를 잃기 쉽고, 하나님께 내버려지기 쉽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한쪽에 두고 거들떠 보시지도 않는다는 걸 말합니다. 이런 게 바로 하나님께 도태된 겁니다. 일단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 스스로는 아무리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이 교계에서 주님을 믿는데, 성령께서는 거기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계에서 아무리 믿어도 백년을 믿건, 천년을 믿건 소용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죽으면 또 지옥에 가야 합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한다”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하나님의 심판·형벌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은 무조건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의 말씀 중에서 일부분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떤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 순복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대하면 됩니다. 그리고 맞서지 말고, 논단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이 말씀은 너무나 깊어서 내가 다 아직 깨달을 수 없으니, 우선 내려놓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실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맞지도 않고, 사실에도 부합되지 않아. 하나님은 말씀에서 사소한 일을 크게 떠벌려 흠만 잡아. 이건 하나님의 말씀 같지 않아.’ 그렇게 말끝마다 논단하지 마세요! 만약 마음에 정말로 그런 관념과 생각이 있거나 또는 그런 말을 한다면, 그건 어떤 문제일까요? 그것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일까요? 그러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집의 사역에 엇나가고 방해되는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인성도 없고 양심도 없고, 또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냐고 책망하자, 그가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난 하나님께만 순복하지, 사람에겐 순복하지 않아.’라고 합니다. 그럼, 그 사람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일까요?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늘 관념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항상 저촉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밖에, 성령께서 쓰시는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 그 사람은 대처 수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이건 사람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게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처하신다면, 순복하겠어. 근데 사람이 대처하는 거라면, 순복하지 않아! 난 하나님께만 순복하지, 사람에겐 순복하지 않아.’ 이건 어떤 문제일까요? 이것은 가장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을 통해 대처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시면서 역사하실 때, 모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사람들을 대처하고 질책할 때, 사람들이 순복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게 아닙니까? 그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겁니다. 모세가 사람들을 대처하거나 책망할 때,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께 순복하지 사람에게는 순복하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면, 그건 무슨 문제일까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장 크게 패역하고, 하나님을 가장 교활하게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정확한 말로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가장 적절하고 가장 합리적인 말로, 합리적인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장 교활하게 대적하는 게 아닙니까? 그건 성질이 심각합니다. 그 밖에,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때때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형제자매들을 통해 사람을 대처하시고, 가로막고, 책망하고,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인사물(人事物)을 통해 사람을 징계하고, 책망하고, 가로막으십니다. 그런 일들이 있지 않나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죠!

만약, 어떤 수리 대처가 임하든 다 사람의 이론에 따라 “난 하나님께 순복하지, 사람에게는 순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 역사에 순복하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순복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 왜일까요? 인식하기 쉽지 않죠? 우리가 말하는 건 실제입니다. 하나님 역사가 실제적으로 임해 생기는 여러 가지 정형들에 대해 사람들은 분별할 줄도 모르고 실행할 줄도 모릅니다. 여전히 실행의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일에서 세부적인 정확한 실행이 없으면서도 하나님께 순복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건 빈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여긴다면, 뭘 가지고 본인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나요? 하나님께 순복하는 실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순복하는 실제가 어디 있습니까? 얘기해 보실 수 있나요?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저를 대처하시지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순복합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저를 대처하신다면, 전 무조건 순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가요? 좀 실속이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날마다 사람을 수리 대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나님은 지금까지 저를 한 번도 징계하신 적이 없어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질책하셔야만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하시는 거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저를 책망하신 것도 아니고, 말씀이 육신 되신 하나님이 오셔서 저를 책망하신 것도 아니고, 성령께서 친히 나타나서 책망하신 것도 아니라면, 그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 겁니다. 사람에게서 비롯된 거라면 저는 순복하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깨닫는 것이 맞나요? 어디가 잘못 됐죠? 그 사람은 어떤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분별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 역사를 경력하는 데는 세부적인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련이란 뭘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련이란 큰 환난 같은 것들이 임하는 거죠! 질병이 임한다거나 생활고가 온다거나 박해를 받는다거나 하는 걸 다 시련이라고 하죠. 큰 붉은 용에게 붙잡힌 것도 시련이고, 암에 걸린 것도 시련이고, 가정에 누가 죽은 것도 시련이고, 천재지변이나 사람을 통해서 임하는 재앙도 다 시련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될까요? 시련이란 뭘까요? 사탄의 시험이란 뭘까요? 어떻게 설명할까요?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진리의 세부적인 것을 말하기만 하면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드러내십니까? 어떤 사람은 패괴가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는 거라고 합니다. 그럼 흘러나오지 않을 때는 드러내지 않으셨나요? “드러내지 않았죠. 패괴가 다 감춰져 있었으니까요. 패괴가 흘러나오면 그때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은 사람을 드러내신 후에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도태시키십니다! 아무튼 패괴를 유로하기만 하면 드러난 거죠. 드러나게 되면 도태되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 맞는 말일까요? 제멋대로 규례에 씌우는 겁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다 드러내십니다. 특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마지막에 온전케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계속 드러내고, 계속 연단하며, 계속 정결케 하십니다. 드러난 건 도태된 걸 대표하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생명 경력에는 모두 드러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에서 패괴를 유로하게 되었는데,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깨닫게 되니, 자신이 유로한 그런 패괴 실질을 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드러난 게 아닌가요? 그렇게 드러내는 건 뭘 위한 걸까요? 정결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식하게 해서 회개하게 하기 위한 겁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정결함을 받은 겁니다. 만약 진정으로 깨닫지 못해 회개하지 못한다면, 정결함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 도태되는데,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된 걸까요? 그런 자들은 적그리스도와 악마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일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게 하시는 겁니다. “아, 저건 마귀구나! 제대로 봤어! 저 사람이 뒤에서는 저런 짓을 하고 있었구나. 저걸 전에는 알 수 없었지. 말하는 걸 들을 땐 얼마나 듣기 좋았는데, 뒤에서 하고 다닌 그런 사실의 진상을 이렇게 까발리니까 알게 되는 거지!” 그런 것이 바로 드러나게 되어 도태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악인과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추악함과 패괴된 진상, 그리고 사탄의 몰골이 일단 철저히 폭로되면, 그것이야말로 드러난 것이고, 도태된 겁니다. 아셨나요?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그런 사람도 항상 어느 정도 패괴를 유로는 하지만, 진리를 찾고 구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게 되어 참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드러내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또한 그 사람에게 정결함을 받아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들에게도 드러나게 되는 일이 있지만, 그건 도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고,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아셨죠?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이 패괴를 유로하여 드러나게 되는 그 성질과 진리를 증오하는 적그리스도, 악마들이 드러내는 그 실질에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있습니다. 패괴 유로와 사탄의 본성 실질은 다릅니다. 악마가 작심을 하고 살인하는 걸 보세요. 그 속셈이 드러나는 순간, 그건 죽을 죄입니다. 그게 바로 도태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마음으로 규례를 지켰거나 혹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미련한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연약하거나 혹은 육체가 방탕해 하나님께 패역하고 진리와 위배되는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성질과 적그리스도가 악을 행하는 성질은 다릅니다. 그건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악을 행해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는데, 그 사람은 방해하기 위해 하는 것이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중단시키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무너뜨리고 혼란케 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그 성질은 드러나게 되면 다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역을 잘하기 위해 했는데, 본인에게 경력이 없고 길도 없어,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된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호의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다가 사역을 잘하지 못해 실패한 겁니다. 그런 것들과 적그리스도, 악인이 방해하여 사역을 무너뜨리는 그 성질이 같나요? 그건 성질이 다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돈을 보관하다가 몰래 써버렸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다고 핑계를 댑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교회의 돈을 보관하다가 정말 조심하지 않아 사기를 당해 도둑이 가지고 도망가게 됐습니다. 이 두 일의 성질이 같을까요? 다릅니다. 그래서 이런 일에 대해 다르게 처리하고, 처리하는 원칙도 다릅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 사람이 일을 저지른 성질에 근거해 처리를 합니다. 한 사람이 거짓을 꾸민 그 실질은 하나님의 제물을 횡령한 것인데, 그 실질은 악마이기에 반드시 출교시켜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변함없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수호하였고, 또 하나님 집을 위해 대가도 많이 치렀으나, 일시적인 우매무지로 속임수에 걸려들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사기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과오에 속하기 때문에 출교시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엄하게 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과오에 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사탄의 본성이 크게 폭로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처리하는 원칙도 다 다릅니다.

【131-A-5】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대처를 받아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도태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설령 큰 수리 대처가 임하지 않는다 해도 기회만 되면 그 사람을 도태시킬 것입니다. 그가 좋은 놈이 아닌 걸 꿰뚫어 보기만 하면 도태시킵니다.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사에 순복하는 사람이 만약 한동안 본분을 해도 효과가 별로 없다면, 좀 지켜본 후 그 본분이 적합하지 않고 다른 본분이 더 맞다고 판단되면 바꿔 주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면서 수리 대처를 여러 번 받고 좀 좋아졌습니다. 한동안 며칠에 한 번씩 계속 수리 대처가 임하고 심판, 형벌도 임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하나님의 수리 대처를 경력하고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경력하는 거죠. 시련이 임해도 힘써 진리를 찾고 구하면서 간증을 서는 겁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노력하면서 협력합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하죠? 바로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고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복하고 따르면서 몇 년을 따랐을까요? 어떤 사람은 5, 6년을 따르면서 물러가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10년 가까이 따르면서 수리 대처를 셀 수도 없이 많이 경력했지만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고,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따랐을 때, 저마다 다 진리 실제가 있고, 저마다 자기의 경력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또 저마다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이 좀 있죠. 이런 사람들이 바로 진정으로 정결케 되고, 최종에 구원받아 온전케 될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정형이 괜찮습니다. 2, 3년간 어떻게 하나님을 따라왔는지 간증해 달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2, 3년 동안 아주 잘 따라왔습니다. 꽤 많이 자라났어요. 하나님을 갓 믿기 시작했을 때는 어리석었고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지금은 얻은 게 참 많아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처음에 집을 나와 본분을 시작할 때는 너무 연약해서 집 생각만 하면 눈물을 흘렸었는데, 나중에는 집 생각도 하지 않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본분하는 것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또 수리 대처를 경력하고 거기서 성과를 좀 얻게 되니 분량도 비교적 커졌습니다. 그렇게 자라나고 철이 들어서 나중에는 “참 많이 자랐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순복할 수 있습니다. 수리와 대처에도 순복할 수 있고, 심판 형벌의 말씀이 아무리 엄해도 순복할 수 있고,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그 시련에 순복할 수 있고, 아무리 힘든 환경이어도 순복할 수 있습니다. 이젠 절대 도망치지 않습니다. 맡은 사역이 아무리 어렵고,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 해도 힘들다고 우는소리 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 중임을 짊어지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습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끝까지 따릅니다. 이건 아주 귀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분량이 너무 작아서 형제자매들이 얕보면 괴로워하고, 자기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면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자기한테 순복하지 않고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괴로워했죠. 수리 대처가 임하기라도 하면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졌었습니다. 참 불쌍하지 않습니까? 실제적으로 경력한 걸 간증하려고 하면 할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교통하려고 해도 못했죠. 글귀 도리로 교통하자니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진리 실제를 교통하자니 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불쌍합니다! 그런데 몇 년을 경력하니 좀 순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안배하든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할 수 있게 됐고 개인의 선택도 없어졌습니다. 본분을 하는 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이 높여 주신 거라고 느낍니다. 분량이 좀 커지고 중임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게 된 겁니다. 힘들다고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 하나님을 흡족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즐겁고 누림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이 더 커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순복하는 분량이 자라 중임을 맡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처음 본분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돈을 벌지 않으면서 하는 것도 어디냐면서 하루에 1시간만 본분해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2시간도 할 수 있다고 하고, 또 반나절도 할 만한 것 같다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매일매일 본분해도 아주 괜찮다고 느낍니다. 누군가 매일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건 뭘 위한 거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그러게요, 뭘 위해서죠? 거기까지는 생각 못 해봤어요. 음, 나중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예요!” 이렇게 말을 하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를 얻어서 하나님을 알고 정결함을 받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매일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본분한다 해도 기꺼이 하는 것이겠습니까? 기꺼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슨 궁리를 하겠습니까? ‘앞으로 계속 이렇게 지내야 돼?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돈 한 푼도 안 벌고 그냥 여기서 먹고 자는 것만 해결하면 되는 거야? 나중에도 결혼하지 않고? 부모님은 누가 모시지? 아이는 누가 먹여 살리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내려놓다가도 또 생각하고, 그러고 나서는 또 반성합니다. 그러다가 또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되냐면서 며칠간 소극적이 됩니다. 본분을 하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이상(異象)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늘 연약해지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이건 이상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한동안 경력하고는 “진리가 정말 너무 소중하네요. 진리를 얻어서 생명이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버려도 가치가 있죠. 진짜 너무 보람 있어요! 한평생 명예와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살지도 생각하지 않고, 진리와 생명을 얻기 위해서만 고생하면 너무나 가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 보물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것을 비유해 말씀하신 적이 있죠.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우리는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이것을 즐겁게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왜 이렇게 화비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럼 진리를 얻는 것과 하나님께 얻어지는 것은 어떤 관계일까요? 또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럼 하나님을 얻는 것과 하나님께 반드시 얻어지는 건 어떤 관계일까요? 하나님께 반드시 얻어진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 얻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셨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얻으셨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게 됐다는 거죠.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얻은 것과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뜻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을 얻었다고 말하면, 틀리게 말한 걸까 봐 걱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었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건 더 정확하고 실제적입니다. 그렇죠? 왜 그런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동적이시고, 사람은 피동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발자취와 나타나심을 찾고, 그분의 역사를 알아보는 게 주동적인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게 정말 사람이 주동적으로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오셔서 진리를 발표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곳곳에서 역사하시면서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하신 사람들을 알맞은 환경에 안배해서 합당한 때에 하나님 앞으로 오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고 정결케 하시는 목적은 바로 사람을 얻으시려는 것이고, 하나님과 합하는 사람을 얻으시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세 역사의 결정체입니다.

왜 대부분의 경우에 소극적이고 연약하고 힘이 없어서 나아가지 못하다가도, 나중에는 굳게 서고 또 계속 따를 수 있었을까요? 왜 비틀거리다가도 다시 바로 설 수 있었을까요? 왜 그럴까요? 그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기 때문이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계시기 때문이고, 은연 중에 우리를 부축하고 이끄셨고 또 굳세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주동적으로 하나님을 얻으려고 하는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사람을 얻으시려고 하는 걸까요? 어떤 게 정확합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사람을 얻으시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또 인류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죠.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20년, 30년, 50년 경력하고 마침내 하나님께 얻어진다면, 한평생 산 것이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 되는 것과 비하면 어떻습니까? 부자와 비하면 어떻습니까? 천배, 만배 더 낫습니다. 어떤 사람은 “30~50년, 한평생을 믿고 하나님께 얻어졌다 해도 집이 없고 재산도 없어요. 작은 방 하나도 없고 별장이나 차도 없어요!”라고 합니다. 그럼 어떤 부분에서 더 낫다고 하는 걸까요? 바로 하나님께 얻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다 가졌다고 말씀하셨고, 전 세계가 다 우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은혜시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누가복음 18장 29~30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는 금세에 백배를 얻게 되는 것이고, 하나는 내세에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전 세계와 바꾸라고 해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렇죠? 대통령이나 고위직의 사람들 그리고 돈 많은 부자들은 결국엔 수명도 몇 년 줄고 마지막에는 또 죽게 됩니다. 각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은 정말 피곤하게 삽니다. 8~10년 그렇게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또 죽게 되는데, 좋은 결과를 얻은 사람이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하나님을 따르고 있지만 마지막에는 무엇을 얻게 됩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죠. 전 세계를 다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보물이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건 바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손해 보고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럼 여러분, 아직도 연약하고 소극적입니까? 어떤 사람은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일어나 생각합니다. ‘온종일 뭐가 이렇게 바쁘지?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하지? 언제까지 해야 돼? 내가 지금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도 괴롭고 본분을 할 생각도 싹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위해 본분을 하고,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합니까? 이런 것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본분을 한다고 하는데, 참 어리석습니다!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본분을 하는데, 연약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영도 통하고 소질도 좋고 진리도 잘 추구해요, 어차피 그런 인재니까요. 근데 전 둔해서 진리를 추구할 재목이 안 돼요. 아무리 교통해도 못 알아들으니 말이에요. 이렇게 화비하고 효력해서 영생을 얻을 수나 있을까요? 잘 모르겠네요.” 이런 말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또 뭐라고 합니까? “이런 소질로는 이렇게 계속 한평생 화비한다 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둔하기 짝이 없다니까요. 차라리 집에 가서 일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일을 하면 그래도 돈이나 벌 수 있고, 고기라도 먹을 수 있잖아요.” 이런 말은 또 어떻습니까? 소질이 아무리 낮다 한들 얼마나 낮겠습니까? 설마 하나님 말씀을 보고 설교 교통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까? 만약 깨달을 수는 있다면, 그걸 교통하지는 못해도 깨닫기만 해도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할 수 있습니다. 좀 둔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바르고 순결하면 괜찮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푸대접하지 않으십니다. 아셨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마음이 올바르고 순결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피조물의 본능을 다하고, 미약한 힘이라도 다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흡족해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무 과하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사람의 소질을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131-A-6】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 이 ‘진심’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럼 무엇을 진심이 아니라고 할까요? 진심이 아니면 늘 다른 속셈과 목적이 있고, 늘 다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면류관을 얻고 상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를 얻어 남보다 뛰어나게 되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화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지 않는 결말을 얻어서 대재난에서 벗어나려고 화비하죠. 이런 속셈들이 있다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런 몇 가지 속셈이 있으면 큰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혐오하시고 증오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 부당한 속셈들은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어떤 사람을 교만 자대하고 사탄의 부류에 속한다고 심판하고 형벌하시면 “사탄의 부류요? 저는 아닌데요.” 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말 위험합니다. 심판하는 말씀이 자기 관념에 부합되지 않으면, 이치를 따지면서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그런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맞추고 자기에게는 비춰 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본분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처하면 안 됩니다. 대처하기만 하면 반항하면서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처하지 않으면 말없이 열심히 하면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지만 대처만 하면 바로 마귀 사탄으로 변해서 노발대발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일까요?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양처럼 하나님께 목숨까지 맡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든 순복하고 이치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어떻게 하시든 다 순복한다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고 했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께 얻어질까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지 20여 년이 된 형제자매들이 꽤 많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늘 이치를 따지면서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했었습니다. 수리 대처가 임하기만 하면 펄쩍펄쩍 뛰면서 패역과 본성을 유로했습니다. 그렇게 유로하니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2, 3일이 지나면 얌전해졌고 괴로워했죠. ‘내가 왜 또 펄쩍 뛰었지? 마귀 본성이 발작해서 순복하지 않았어. 순복하지는 않고 이치만 따지고, 내 관념과 상상을 다 진리인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저촉하는 말들을 했구나.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했구나.’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뉘우치지 않겠습니까? 그 며칠간 아무도 대처하지 않으니 마음이 괴로웠고, 그 고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면 어떤 결과인지 알겠습니까? 연단을 받게 됩니다. 마음이 괴로워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을 증오할 뿐입니다. 그러고는 맹세하죠. ‘하나님, 다음에 또 대처하시면 그땐 꼭 순복하겠습니다. 꼭 실제적으로 순복해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다시는 반항하지 않고, 이치를 따지지 않겠습니다. 제가 또 이치를 따지면 저주하고 징벌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니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심판과 형벌이 임했습니다. 근데 몇 분도 참지 못하고 또 펄쩍 뛰면서 하나님께 변명을 늘어놓고 이치를 따집니다. 그렇게 따지니 다른 사람들은 ‘이치를 따지시네요, 그럼 좋습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참 잘했어요.’라면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일이 지나고 나면 또 힘없이 주저앉아 연단받고 징벌받습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괴로워하죠. 나무라거나 책망하지도 않았는데, 매우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왜 또 그랬지? 지난번에 기도하면서 순복하겠다고 굳게 다짐까지 해놓고, 왜 또 그랬을까? 왜지? 사탄 본성 때문이야. 이게 아직 바뀌지 않았어. 죽어도 뉘우치지 않아. 에휴, 진짜 깊이 뿌리박혔네! 강산은 바뀌기 쉬워도 본성은 바뀌기 어렵다더니 진짜 그러네!’ 이렇게 생각하니 또 몰래 눈물을 흘리게 되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탄 본성이 너무 깊이 뿌리박혀 구제불능이라는 걸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 이젠 대처하지도 마시고, 그냥 징벌해 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나니 좀 괜찮아졌습니다. ‘이젠 이 옛 사탄, 육체와 결사전을 벌여야겠어. 꼭 징벌받아서 죽이고 말 거야!’ 그렇게 마음이 또 평안해졌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도 안 돼서 일이 임하고 수리 대처가 임하니 또 펄쩍 뜁니다.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왜 이러는 거지? 왜 계속 변화되지 못하지?’ 이렇게 경력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아닐까요? 이런 사람이 도태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경력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정상이라고 해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렇게 해도 되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제멋대로 음란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과오입니다. 한두 번은 있을 수 있어도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그러나 패괴 성정을 해결할 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공식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알아들으셨죠? 사람의 사탄 성정이 정결케 되는 것은 한두 번이나 서너 번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긴 시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약한 불에서 천천히 연단하고 천천히 제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을 보세요. 젊었을 때 결혼해 서로 사랑했지만 며칠 못 가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두어 번 말다툼 하다가 나중에는 손찌검을 하고, 그러다가 발길질까지 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싸우면서도 이혼은 하지 않습니다. 몇 살이 되면 더 이상 싸우지 않을까요? 60세 정도 되면 싸울 기운도 없고 따질 기운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때리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죠. 그때가 되면 노부부가 아주 금슬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목하게 지내면서 싸우지도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럴 기운이 없어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60여 세가 되면 한평생을 다 경력해 봤고 받을 고난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때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이나 정상 인성을 다 갖추게 되는 거죠. 젊었을 때 유로한 사탄 성정이나 불같은 성격을 지금에 와서 다시 돌아보면 그게 뭐냐면서 혼자서도 역겨워서 지난날은 생각하기도 싫어집니다. 그러나 지금은 뭐든 순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대하든 마음으로 순복합니다. 그때면 무엇이 정상 인성이고, 무엇이 양심이고 이지인지 알겠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말하는 것도 정직하게 하고, 일도 성실하게 합니다. 또 생각하는 것도 합리적이고, 사람의 생각에 부합되고, 모든 일이 다 술술 잘 풀립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이 성숙해진 게 아닐까요? 젊어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많은 진리를 깨닫고, 실패도 많이 겪고 나니 이제는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힘들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쉬워지고,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도 쉬워지고, 형제자매들에게 순복하는 것도 쉬워집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도 쉬워집니다. 또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것도 쉬워지고,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쉬워지죠. 뭐든 다 쉬워지고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부정적인 일을 하라고 하고, 명예와 이익과 지위와 허영심을 위해 어떤 일을 하라고 하면 하지 않을 것이고, 수치스럽다고 여길 겁니다. 그러면 육체를 배반하고, 육체에 속한 그런 일을 포기하기는 더욱 쉬워집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쉽고, 육체를 배반하기는 더욱 쉽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근데 갓 믿기 시작할 때는요?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육체를 배반하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육체를 배반하는 게 쉬워지는 건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도달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배반하기 쉬우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반드시 쉬울 거고, 진리를 실행하기 쉬우면 육체를 배반하는 것도 쉽습니다. 이것은 서로 같은 것입니다. 생명 경력이 어느 한 정도에 이르게 되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나 육체를 배반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육체를 내려놓는 것은 더 어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일을 하면서도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죠. 이런 것은 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도 어렵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좀 하는 것뿐인데, 자신의 책임을 다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새 신자인 것을 보고는 새 신자에게 필요한 것에 따라 도와주면 되니까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만약 개인을 위해 일하거나 혹은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하려고 한다면 수치스럽다고 느끼고, 마음이 편하지 않고, 비열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정도의 생명 경력은 하나님께 순복해서 얻은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해서 생긴 효과죠. 계속 순복하다 보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또 계속 진리를 실행하다 보면 그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늘 성실한 사람이 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어느 날엔가는 그것이 어렵지 않고, 다 쉬워질 것입니다.

그럼, 이런 효과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졌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은 첫째,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고, 둘째, 모든 진리를 실행하면서 어렵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이고,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떠나지 못하죠. 또 하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못하죠.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얻어진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하나님께 얻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얻어지면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드디어 얻었다고 느낍니다. 그럼 여기에서 ‘얻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많은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하나님을 얻었고 또 하나님께 얻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얻어지면, 하나님을 떠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 위해 살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증거합니다. 그런 사람이 살아내는 것은 바로 가장 의의 있는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이 말을 하고 일을 하면,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흡족해하시고 위로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인류를 창조할 때부터 최종에 인류를 어느 정도까지 온전케 할지 생각했느니라. 지금 그 계획을 드디어 이루었느니라.”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님과 완전히 합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마음을 기울여 참답게 듣고 묵상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선택이나 취향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분부에 따라 실행하죠. 하나님은 사람을 이 정도까지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럼 그것을 무엇에 의해 이루실까요? 바로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는 것에 의해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다 경력하고 나면 그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형제자매들이 날마다 본분을 하고,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날마다 진리를 교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 경력하고 실행하면서 10년, 20년 지나면 성과가 있고, 어느 정도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소질이 뛰어난 사람은 소질이 뛰어난 만큼 효과가 있고, 또 소질이 낮은 사람은 소질이 낮은 만큼 효과가 있습니다. 1년 경력하면 그만큼 효과가 있고, 10년 경력하면 그만큼 효과가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131-A-7】

지금, “내가 하나님께 순복하는 건 가정과 세상을 다 버리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하는 거야! 이렇게 본분하는 게 하나님께 순복하는 거야! 이렇게 끝까지 견지만 하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나요? 이렇게 말하는 게 성립될까요? 어떤 부분이 부족하죠? 그저 겉으로만 순복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을 시키든 다 하고, 말하는 대로 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않냐고 합니다. 그런 겉면의 순복도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또 진리도 추구해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될까요? 보세요,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라고 하면 기운이 나지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라고 하면 꾸벅꾸벅 좁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 교통을 듣기만 하면 정말 달게 잡니다. 평소에는 잠이 잘 오지 않다가도 예배하고 진리를 교통할 때면 정말 잘 잡니다. 그건 어떤 문제일까요?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다는 건, 사람이 본분만 하고 일만 하면 온전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진리가 사람을 온전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홀시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들으셨죠? 그저 ‘내 본분만 잘 지키자! 내가 하는 본분을 하루에 어느 정도 하고, 매일매일 잘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까지 견지하면 마지막에는 온전케 될 거야.’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그릇된 것입니다.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경력해야 합니다. 본분을 할 때 패괴 유로가 없을까요? 패괴 유로가 있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교통해야 합니다. 지금 일주일에 예배를 몇 번 드리죠? 설교 예배가 있고, 또 여러분들끼리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면 진리를 교통해야 하고, 자신의 패괴 정형에 결부시켜 인식한 걸 교통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 생활이든 자기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가장 관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책망하고 저렇게 책망해도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형제님이 날 어떻게 대처하시면 잘 기억해 둬야지. 어떤 일에서 어떻게 훈계를 했으면, 그 말 속에서 나 자신을 인식해야겠어. 꼭 깊이 인식해야지! 책망받은 걸 흐리멍덩하게 흘려보내지 말고, 대처받은 걸 잘 인식해야겠어.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변화될 거야! 난 이렇게 경력할 거야.’ 하나님으로부터 온 대처 수리를 이렇게 경력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경력하면 변화될 수 있지만, 이렇게 경력하지 않는다면 변화되기 힘듭니다. 어떤 사람은 흐리멍덩합니다. 누가 대처받은 게 어떠냐고 물어보면, 그건 당연하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일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보냐고 물어보면, 잘못했으니 인정하고 다음엔 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는 끝입니다. 그렇게 하면 될까요? 깊은 인식이 없습니다. 마음을 들이지 않고, 그저 겉면으로만 순복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효과는 결코 좋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수리 대처해도 공개적으로 대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속에서 충돌되지만, 지나고 나서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속에서 계속 맞서고 있는데, 이건 패역 성정이야. 왜 순복이 조금도 없을까? 겉으로는 맞서지 않았지만 속으로도 순복해야 되잖아! 한결같이 아멘 해야 되잖아. 상면에서 대처할수록 속으로 더 아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고 난 뒤에도 인식하고 회개하면 겉과 속이 같은 거잖아!’ 사람의 바람은 다 이렇습니다. 그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나요? 몇 년이라는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요 한 가지도 3년이나 5년 정도의 노력이 없으면 힘듭니다. 만약 마음속으로 맞서지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하고, ‘형제님이 그런 말로 책망을 했는데, 정말 진리를 찾고 구하면서 잘 반성해 봐야겠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을 반성한다면, 한동안 지난 후에는 정말 자신의 정형을 제대로 반성하고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때가 돼야 “하나님, 당신은 정말 저를 사랑하십니다. 이번의 대처 수리는 완전히 당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그때는 순복하지 못했습니다. 제 성정은 정말 마귀 사탄의 성정입니다!”라고 반성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사람한테서 온 게 아니구나! 앞으로 다시 수리 대처가 임한다면 잘 순복해야지. 사람한테서 온 거니까 순복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순복할 거란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어! 계속 그런 관념과 그런 이치를 따지다 보면 나 스스로를 해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이런 변화가 어떻습니까? 이런 것은 축하할 만한 변화입니다. 생명의 변화이고, 인식의 변화이고, 또한 진실한 순복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속으로 거역하고 저촉하다가 진실하게 순복하게 된 겁니다. 겉으로 반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순복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반항이 없고 완전히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복이 진정한 순복입니다. 이 정도로 순복하기가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한 다음, 어느 정도 경력해야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속에 진실한 순복이 있다면 생명 성정이 변화된 것입니다. 생명 성정은 어디서부터 변화될까요? 바로 마음속에 진실한 순복이 생기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순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책망하고 심하게 말해도 그 사람은 겉으로 눈물은 흘리지만 마음속으로는 순복하고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은 생명 성정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저 겉으로 대들지 않고 이치를 따지지 않는다고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됐다고 여깁니다. 겉으로는 순복이 조금 있긴 합니다. 뭐, 이방인들과 비긴다면 많이 낫겠죠? 여러분은 이방인들에게 감히 꾸짖을 수 있습니까? 그러기 전에 그 사람들이 벌써 눈에 거슬려 하고, 그 사람들이 먼저 손보려고 할 겁니다. 이방인들을 꾸짓는다면, 그들이 당신 뺨을 안 때릴 거 같습니까? 겉면의 순복이 있는 것은 이방인들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저 하나님의 사역에 순복하고, 하나님께 순복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비교적 객관적이죠.

어떤 사람은 일이 임하거나 대처 수리를 받으면, 열 번에서 여덟 번은 순복할 수 있고 두 번은 순복하지 못합니다. 그럼 그 두 번은 왜 순복하지 못하는 걸까요? 대처하는 말이 너무 과격하고, 정죄의 뜻이 있고, 또한 저주의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부드럽게 대처했다면 다 순복했을 겁니다. 만점일 겁니다. 말이 너무 과격하고 정죄와 저주의 성질이 있기 때문에 순복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맞을까요? 그 정도라면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실 수 있나요? 여러분의 상상처럼 100% 다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기준이 너무 높습니다. 요 정도까지 순복하면 좀 저촉이 있다고 해도 나중에 잘못을 인식하면 벗어 버리게 됩니다. 지금 이미 변화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하나님께 참으로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흠이 좀 있다 해도 그건 진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렇죠? 우리가 처음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람은 짐승이고, 사탄의 후손이라는 말씀을 봤을 때, 관념이 생겼었습니다. “이건 사람을 모욕하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이 왜 사람을 모욕하시지? 하나님의 말씀은 다 맞고 다 진리인데, 이 말씀에서 사람을 모욕하는 말이 나왔어. 이걸 어떻게 하지?” 관념이 생기면서도 감히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못하고, 또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사역은 맞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말씀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순복하지 못합니다. 2, 3년 경력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책망하고 꾸짖으시고, 사람의 패괴 진상을 폭로하신 말씀을 보면 ‘아, 하나님이 사람을 짐승이라고 한 건 인류의 패괴 실질을 폭로하신 거였구나. 이건 사람을 모욕한 게 아니라 사실대로 말씀하신 거였어. 사람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정도에 근거하면 사람은 인간미도 없고, 인성도 없는데, 이게 바로 짐승이잖아? 그 말씀은 사람을 모욕한 게 아니고 다 사실대로 말씀하신 거였어! 패괴된 인류의 패괴 진상을 가장 실제적인 언어로 표현한 거였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인식하고 나면 그전에 하나님을 논단하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어떤 때는 사람을 모욕하는 말이라고 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후회합니다. ‘그건 하나님을 논단한 거잖아?’ 스스로 자기 뺨을 때립니다. ‘누가 너보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논단하랬어, 이래서 되겠어?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리인데,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시인하면서도 한 마디만은 시인하지 않았으니 정말 눈이 멀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데다가 부인하고 논단까지 하다니. 하나님이 날 꾸짖지 않으셨어도 이번엔 내가 내 자신을 책망해야지. 나는 순전히 짐승이고, 개돼지만도 못해!’ 이게 변화가 있는 게 아닙니까? 1, 2년을 경력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이 한층 더 깊어집니다. 그리고 2, 3년 후에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해 더 한층 분명히 알게 되고, 점점 더 알게 되고,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리이고, 구절마다 다 진리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든지, 사람을 저주하든, 정죄하든 다 진리이고 다 사실이야!”라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정죄하고 저주하시는 말씀일수록 사람을 온전케 하는 말씀이라는 걸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갓 믿었을 때, 그 몇 년 동안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말씀만 보면 “이 내용은 빨리 넘겨야지, 이런 말씀은 보면 볼수록 마음만 찔리고 괴로워, 빨리 넘기고 다른 내용을 봐야겠어.”라고 합니다. 일단 심판 형벌의 말씀들을 다 표시해 뒀다가 그 부분에 가게만 되면 재빨리 넘겨 버립니다. 몇 년을 경력하고 나서 돌이켜 보면 ‘그 말씀이 가장 관건이었어. 사람을 가장 온전케 하는 말씀이고, 사람의 성정을 가장 잘 변화시키는 말씀인데, 내가 다 넘겨 버렸었네. 생명이 자라나는 데 얼마나 지체됐는지 모르겠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인식하면서 돌아가서 그 말씀들을 중점적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람을 저주한다거나 정죄한다는 말씀을 보게 되면, 빨리 여기서 진리를 찾아 답을 구해야 되고, 이런 패괴를 얼른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역사를 그렇게 경력하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해야 할까요? 이제 아시겠죠? 어떤 사람은 겉에 보이는 작은 일에만 순복하고, 진정으로 진리를 구해야 할 부분이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정결케 하실 부분이나 사람을 구원하려는 부분에서는 순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다 피해 가고 돌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욱 인식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좋다고 느끼게 됩니다. 3년을 경력하는 것과 5년 경력하는 게 다르고, 5년을 경력하는 게 10년을 경력하는 것과는 더욱 다릅니다. 절반이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제 막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이 말씀들은 다 진리야! 예수님을 믿을 때, 성경을 보면서도 이런 진리들을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니, 정말 너무 좋아. 진리를 많이 얻었어. 문제는 이 말씀들이 너무 많아! 이런 말씀들을 언제 다 먹고 마시고 알 수 있을지? 이런 말씀들을 언제면 잘 경력할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년 더 일찍 믿을 걸.’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 자기가 하나님을 늦게 믿었고, 좀 더 일찍 믿었더라면 더 많이 얻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억력이 좋아서 1년을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수십 단락을 외울 수 있고, 3년이나 5년을 믿으면 수백 단락을 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3년이나 5년만 더 일찍 믿었어도 수백 단락의 말씀을 다 외웠을 거고, 경력도 잘 했을 텐데. 아, 그럼 대단할 텐데. 그랬다면 하나님을 증거할 수도 있고, 쓰임받는 정도도 됐을 텐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건 매년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말씀이라도 갓 믿었을 때, 이해를 좀 합니다. 그걸 깨닫고 나서 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집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그 말씀을 다시 보았을 때, 또 다른 이해가 있게 되고, 더 깊은 이해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은 건 또 다른 새로운 그림이 됩니다. 10년이 지나서 다시 말씀을 볼 때면, 또 깨달음이 더 깊고, 더 새로운 그림이 그려집니다. 똑같은 하나님 말씀도 오래 믿었다 해도, 다시 보면 효과가 다 다릅니다. 갈수록 더 좋아지고 갈수록 더 뚜렷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수의 원천입니다. 한 마디 말씀마다 다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다 사람을 수십 년 동안 경력하게 하고, 평생 경력할 수 있게 합니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진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한평생 경력한다 해도 다 경력할 수 없습니다. 10년 경력하고 나면 이제는 거의 성실한 사람이 된 거 같다고 합니다. 근데 마음속이 아직도 좀 궤사합니다. 그러다가 20년을 경력하고 나서 지금은 그전보다 또 진보가 있고, 정말로 성실한 사람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마음속에는 여전히 궤사함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30년을 경력하고 나서 또 틀림없이 성실한 사람이 됐을 거고, 이전보다 더욱 순결하게 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여전히 흠이 조금 있습니다.

【131-A-8】

그럼 하나님께 순복하는 데에 관한 진리를 경력하는 건 어떨까요? 역시 그런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조금 순복할 수 있다고, 자기가 가정과 세상을 다 버린 걸 보지 못했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보면 많은 진리에서, 하나님의 많은 말씀에서 순복하지 못합니다. 겉면의 요구는 바짝 힘을 써서 기본적으로 해낼 수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복하는 건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리고 순복에는 자신의 관념과 상상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있거나 자신의 관념에 부합되면 좀 순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거나 관념에 부합되지 않으면 여전히 순복하지 못합니다. “아, 하나님께 순복하는 진리 실제가 아직도 너무 부족하네요.”, “10년을 경력해 오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일반적인 진리에도 순복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꾸짖고 책망하시는 것에도 기본적으로 순복할 수 있으신데, 아직도 어떤 부분이 부족하시죠?”, “하나님의 권병에 절대적으로 순복하지 못합니다. 속에는 여전히 패역이 있거든요.”, “그럼 큰 시련이 임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맡긴다면 순복할 수 있으시겠어요?”, “아직 완전하게 순복하지는 못해도 반항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래도 속에는 원망이 좀 있어요.”, “그러면 안 되죠! 아직 죽기까지 순복하지는 못하네요.” 하나님께 순복하는 진리는 한평생 경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진리는 한평생 경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깊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진리는 영원히 끝이 없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진리 또한 가장 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리도 같습니다. 저도 처음에 주님을 믿었을 때는 계속 열심만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고, 미련한 일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원칙에 부합되지 않게 제멋대로 전도한 겁니다. 어디에 병든 사람이 있거나 암에 걸려 곧 죽게 된다면 “빨리, 복음 전하러 갑시다.” 하고, 어디에 악령이나 귀신 들린 사람이 있으면 “빨리, 귀신을 쫓아내 병 고칩시다. 기도하고요.” 그렇게 했었습니다. 이건 우매하고 무지한 게 아닙니까? 그때는 성령의 인도하에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더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열심만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사역했습니다. 어느 날엔가 저는 주님을 위해 직장과 가정을 포기하고는 제 자신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이고 나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사람의 본성 실질을 폭로하신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됐을까요? 속이 다 무너졌죠. 더 이상 제 자신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드러내고 심판하자 속으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겉으로만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라고 착각했었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그렇게 쉬울까요?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이 있는 걸까요? 가장 쉽게 말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얼마나 깨닫고 또 얼마나 알고 있는 거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얼마나 하셨는지, 하나님이 왜 사람을 심판 형벌하시는지, 하나님은 왜 인류에게 그렇게 많은 고난과 시련 연단이 임하게 하시는지,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이 애쓰시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사람은 얼마나 인식할 수 있고,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많이 느끼지 못한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사랑이 없고, 또한 이유 없는 미움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복하고 주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인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람의 본성 실질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때야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빈궁하고 가련하며, 이전에 깨달았던 하나님 말씀은 그저 글귀 도리이고, 경력해서 알게 된 것이 전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리 실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정복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을 보면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이지만, 어느 날엔가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을 1년 정도 받고, 대처 수리까지 거치면 하나님 앞에서 한 방에 쓰러지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빈궁하고 가련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허풍 떨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은 넘어져도 저는 넘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큰 소리치지 않게 됩니다.

문제 해답

문제 (1): 본분을 하는 데에 노예성이 아주 강합니다.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좀 낫지만, 그런 사람이 없으면 너무나 피동적입니다. 어떤 때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람이 노예성이 너무 강해 본분을 할 때 언제나 다른 사람이 강요하거나 지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인식할 뿐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육체를 배반하고 의식적으로 협력을 하긴 하는데, 어떤 때는 상태가 좀 좋고, 어떤 때는 제 자신이 충심을 다하지 못하고 늘 주동적으로 충성스럽게 본분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정형이 저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정형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형제님이 교통해 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그런 상황에 대해 교통해 봅시다. 사람은 왜 노예성이 너무 강할까요? 두 가지 상황입니다. 첫째는 진리가 없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밥을 먹는 것처럼, 어른이 먹여 주기를 기다립니다. 어른이 먹여 주지 않으면 울고 떼쓰기만 할 뿐,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주동적으로 향상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다른 사람이 재촉하거나 끌어 주거나 당기거나 채찍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녀가 몇 살 정도가 되면 자발적으로 부모를 도울 수 있을까요? 적어도 십대 중반은 돼야겠죠? 그래서 주동적으로 본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지 않고, 누가 말하면 좀 하고, 이끄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지고, 이끄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막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 생명을 얻지 못했고, 진리 추구에 노력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저절로 부담이 생길 때면, 이끄는 사람이 있든 없든 같은 모습일 때면 됩니다. 이끄는 사람이 있어도 정상적으로 본분하고, 이끄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이 어떤 본분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분량이 있고 철이 든 겁니다. 예를 들면, 대여섯 살, 일고여덟 살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어른들이 밭에 일하러 나가고 집을 비운 사이에 도둑이 든다면 그 아이가 도둑을 막을 수 있을까요? 도둑이 달래면서 사탕 두 개를 주면 도둑을 아버지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도둑이 물건을 훔쳐 달아났는데도 도둑을 아빠라고 한다면 그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어려 철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민들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수호하지 않고, 본분도 주동적으로 하지 않고, 다 피동적이고, 누가 관여하고 단속해야 조금 할 수 있다는 것은 다 분량이 너무 작은 것입니다. 이것이 한 가지 상황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10년 넘게 믿으면서 계속 그랬다고 합니다. 새 신자라면 정상이지만, 10년 넘게 믿은 사람이라면 그건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멍청한 사람입니다.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본분을 하러 왔다면서 일을 하든 안 하든 똑같이 하루가 지나가니, 그럭저럭 하루 하루 날만 보내면 그만이란 겁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역에 진도가 있는지, 효과가 있는지 상관하지 않고,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일까요?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사람은 향상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몇 년 믿으면서도 계속 그렇게 진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효력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효력이 끝난 뒤에도 충성된 효력자가 아니라면 죽게 되고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겐 인성이 없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할 때, 하나님 말씀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종일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죽기만 기다리는 그런 사람에게 생명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본분을 하면 생명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생명도 없는데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다지 영이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도 노력하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그렇다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노력을 들인다면, 1~2년이나 2~3년이면 그 사람에게도 성과가 있고, 변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노력을 좀 들이면, 1~2년이나 2~3년이면 변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변화가 있을 겁니다. 노력한 지 몇 년이 되는 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그건 곤란합니다. 그 안에는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을 경력하면서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한동안 지나면 다 진보가 있을 겁니다. 사람이 1~2년이나 2~3년 동안 아무런 진보도 없고, 인식한 것도 없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 역사가 없는 사람이 여기서 효력하는 건 사탄의 개와 같은 노예입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건 사탄에 속하는 게 아닌가요? 그 사람도 진리를 추구한다면, 차차 진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계속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누군가가 얘기하거나 이끌어 주면 따르고, 안 그러면 다시 해이해지고 그런다면, 끝장입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진리 추구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어떤 본분을 하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흡족케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원칙 있게 일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진실한 순복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본분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늘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진입하고, 또 생명도 그렇게 자라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또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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