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하)

사람은 한평생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아가며, 그 누구도 스스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가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패괴 속에서 살고 공허함 속에서 살며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모두 육을 위해, 정욕을 위해, 사탄을 위해 그렇게 아무 근심 없이 살아가며, 생존의 가치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은 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날 진리를 찾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볼지라도 어떻게 해야 사탄의 권세의 통제에서 벗어날지 알지 못한다. 역대로 이런 비결을 발견한 사람이나 찾아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사람은 사탄을 혐오하고 육을 혐오한다고 해도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권세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도 사탄의 권세 아래 있지 않더냐? 패역한 짓을 저지르고도 참회하지 않고, 더욱이 자신을 더럽고 패역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매우 편안하게 느낀다. 너의 편안함은 너의 패괴로 인한 것 아니더냐? 그 편안한 느낌은 너의 패역에서 나온 것 아니더냐? 사람은 모두 인간 지옥에서 살고 있고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살고 있다. 곳곳에서 유령이 사람과 함께 살면서 사람의 육체를 부패시키고 있다. 네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천당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네가 머물고 있는 곳은 바로 마귀의 영역이고, 인간 지옥이자 음부이다. 사람이 정결케 되지 않으면 모두 더러운 존재에 속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여전히 사탄의 포로이다.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으면 사람은 더더욱 사탄의 이 흑암 권세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네가 드러낸 패괴 성품과 네가 살아 낸 패역한 행위는 네가 아직도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충분한 증거이다. 너의 마음과 생각이 정결케 되지 않고 너의 성품이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으면, 네 전체가 계속 사탄의 권세에 좌지우지된다. 너의 마음이 사탄에게 통제당하고 너의 생각이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네 전체가 사탄의 손아귀에 좌지우지된다. 너는 지금 베드로의 기준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고 있느냐? 너는 자질을 갖추었느냐? 너는 오늘날의 심판과 형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너는 베드로가 알게 된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네가 지금도 알지 못하는데 앞으로는 알 수 있겠느냐? 너처럼 나태하고 나약한 사람은 결코 형벌과 심판을 알 수 없다. 네가 육적인 평안과 향락을 추구한다면 정결케 될 수 없을 것이고, 결국에는 사탄에게 돌아갈 것이다. 네가 살아 낸 것이 사탄이요, 육이기 때문이다. 지금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조금도 추구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정결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더 깊은 생명 체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생명을 추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온전케 될 기회가 없으며,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고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자는 모두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 가고 성품 변화에 들어가는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 종교를 믿는 사람처럼 종교의식에 따라 예배만 드린다면 헛수고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명에 대한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진리의 진입과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사역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 온전케 될 수 없다. 온전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행한 사역, 특히 형벌과 심판의 의의를 알아야 한다. 왜 사람에게 이 사역을 하는지,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런 형벌 속에서 네가 베드로와 같은 체험과 인식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성령 역사를 아는 것, 그리고 성품 변화를 추구한다면 온전케 될 기회가 있다.

온전케 되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복되는 이 단계의 사역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은 정복되어야 온전케 되는 사역을 체험할 수 있다. 네가 정복되는 역할만 맡는다면 그리 큰 가치가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도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복음이 확장될 때 너의 몫을 바칠 수가 없다. 그것은 네가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추구하지 않아 실제적인 생명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사역에서 너는 봉사자가 된 적이 있고 부각물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베드로처럼 되기를 추구하지 않고 베드로가 온전케 된 길을 따라 추구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성품이 변화된 체험도 없을 것이다. 네가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너에게 간증이 있을 것이다. 그럼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 한 단계 한 단계 사역에서 저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사역을 받아들여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을 얻고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되었지요. 그분의 형벌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그분의 공의로운 성품이 임하여 축복과 은혜를 받게 되었고요. 바로 그분의 심판과 형벌로 보호를 받고 정결케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없고 하나님의 엄한 말씀이 저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을 알지도, 구원받지도 못했을 겁니다. 오늘날 저는 피조물로서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공의로운 심판을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누릴 가치가 있기에 사탄에게 패괴된 피조물은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누려야 합니다. 그분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심판과 형벌도 있지만 크나큰 사랑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얻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그 사랑을 깨달았어요. 이건 제 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케 되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 가는 길이자 말하는 인식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고, 베드로의 체험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이고, 진리가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마지막까지 체험하면 반드시 심판을 통해 사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께 얻어지게 된다.

정복된 사람에게는 힘 있는 간증이 없다. 그저 사탄을 수치스럽게 했을 뿐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 내지 못한 것이다. 네가 속죄 제물을 얻기만 했을 뿐 두 번째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온전케 되지 못했다면 이것은 너무 큰 손실이다. 너희는 자신이 진입해야 할 것과 자신이 살아 내야 할 것에 대해 알아야 하고 진입해야 한다. 마지막에 가서도 온전케 되지 못한다면 너는 진정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너는 후회막급일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는 성결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에 있을 때 그들은 성결했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으며, 여호와께 충성하고 여호와를 배반할 줄 몰랐다. 사탄 권세의 방해를 받지 않았고 사탄의 독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성결한 인류였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더러움에 물들지도 않고 육에 점유되지도 않았으며, 여호와를 경외했다. 하지만 나중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독사의 독소가 생기고, 여호와를 배반하는 마음이 생겼으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성결했고 여호와를 경외했다. 그때의 그들이 바로 진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었으며, 사탄에 의해 점점 패괴되어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람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최초의 인류에게는 여호와의 생기가 있었고, 패역이 조금도 없었으며, 마음속에 사악함이 없었다. 그때의 사람이 진정한 인류였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 짐승이 되었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악하고 더러웠으며, 선함도 성결함도 사라졌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탄 아니겠느냐? 네가 많은 사역을 체험하고도 변화되거나 정결케 되지 못하고 여전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정복되기만 했을 뿐 온전케 되지 못한 사람이다. 왜 온전케 되지 못했다고 하겠느냐?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으며, 육적인 향락과 일시적인 안일만을 탐하여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루지 못했고,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걸어 다니는 송장이요,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다! 영적인 일을 알려고 하지 않고 성결해지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살아 내고자 하지 않고, 소극적인 면에서 정복된 것에만 만족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 살아가는 성결한 인류가 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진리가 없는 사람은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 없으며,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베드로 같은 사람이고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진리는 간절히 바라고 찾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고, 이 구원은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너희는 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을 통해 하나님께 얻어질 수도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얻으면 하나님도 너희를 얻게 된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다 들었으니 나의 이 말대로 실천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너희가 이 말을 실천했다면 나는 이 말을 통해 너희를 얻은 것이고, 동시에 너희도 이 말을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커다란 구원을 얻은 것이다. 너희가 정결함을 얻으면 진정한 사람에 속하게 된다. 네가 진리를 살아 내지 못하고 온전케 된 모습으로 살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송장이자 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가 없기에, 즉 여호와의 생기가 없기에, 너는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다! 정복된 후에도 간증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저 아주 작은 구원의 은혜를 얻은 것일 뿐, 네가 영이 있는 산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형벌과 심판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너의 성품이 새로워지거나 변화된 것은 아니므로 너는 여전히 옛 사람이자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지, 정결케 된 사람은 아니다. 온전케 된 사람만이 가치가 있고, 이런 사람만이 진정한 인생을 얻은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너에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했으니 하나님의 사역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얘기해 주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고, 모세도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행사와 기묘함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말세 성육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을 보았으니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얘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역의 기묘함에 대해 얘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어떻게 요구하셨고, 당신들은 또 어떻게 체험했습니까? 말세에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당신들이 보기에 가장 큰 이상(異象)은 무엇입니까?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얘기할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마주하면 너는 어떻게 대답할 것이냐? “하나님은 실로 공의로우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형벌하고 심판하시며, 가차 없이 우리를 폭로하셨지요. 하나님의 성품은 정말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난 뒤 저는 우리가 짐승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진실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네가 이렇게 대답하면 그는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또 어떤 면을 알고 있습니까? 생명 진입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어떤 다짐을 했습니까?” 그러면 너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피조물은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짐승이 되었습니다. 나귀처럼 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살게 되었으니 창조주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려야죠. 그분이 가르치시는 대로 따를 겁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네가 이렇게 두리뭉실한 말만 하면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네게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너 자신의 체험을 묻는 것이다. 형벌과 심판을 겪고 어떤 인식을 갖게 되었느냐고 묻는 것도 너 자신의 체험을 묻는 것이고 진리에 대한 인식을 얘기하라는 것이다. 말하지 못한다면 너는 현재의 사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네가 늘 그럴듯한 말이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기만 할 뿐, 세부적인 체험이 없고 실질적인 인식은 더더욱 없으며 진실한 간증도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불복할 것이다. 소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지 마라.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게 굴면 너 자신을 해치고 네 생명도 그르치게 될 것이다. 너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자신의 연약한 면을 극복해 진리를 얻고 진리를 살아 내야 한다. 너의 연약함은 두려운 것이 아니고, 너의 결점도 가장 큰 문제는 아니다. 너의 이런 미지근한 마음과 진리를 구하지 않는 마음이 가장 큰 문제이자 가장 큰 결점이다. 또 너희 모두의 가장 큰 어려움은 현 상태에 만족하면서 소극적으로 기다리는 나약한 마음이다. 이것이야말로 너희의 가장 큰 걸림돌이고, 진리 추구를 막는 가장 큰 적이다. 내 말이 너무 심오하다는 이유만으로 순종한다면 너는 진정으로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진리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도 아니다. 너의 그런 순종은 간증이 아니고 나는 너의 그런 순종을 칭찬하지 않는다. 누군가 너에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서 오셨습니까? 당신의 하나님의 내면적 본질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너는 “그분의 본질은 형벌과 심판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또 그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지 않나요? 당신은 모르십니까?”라고 물으면 너는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이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참도를 왜곡하게 될 텐데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너에게서 참도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너는 진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말하지도 못하고 더욱이 진리를 살아 내지도 못한다. 그런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교제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때, 네가 상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면 상대가 네 말에 반박할 텐데, 그러면 너는 폐물 아니겠느냐? 이렇게 많은 사역을 체험하고도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너는 무능한 인간 아니겠느냐? 네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너희는 이렇게 많은 사역을 체험했는데도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네게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진실한 인식이 있는지 물으면 말문이 막혀 묵묵부답이 되거나 사소한 얘기로 대충 얼버무린다. 그러면서 하나님께는 커다란 능력이 있다는 둥, 네가 그렇게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라는 둥,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라는 둥 말하는데, 이런 얘기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모두 쓸데없는 헛소리다! 이렇게 많은 사역을 체험했는데 하나님의 높여 줌이 진리라는 것밖에 모른단 말이냐?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아야만 참된 간증을 할 수 있다.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많은 사역과 많은 말씀이 네게서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하고, 사역을 확장할 때 네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 너는 부끄러움에 수치까지 당하게 된다. 그때 너는 하나님께 너무 죄스러우며,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얄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이 사역 기간에 알려고 추구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추구하려고 해도 늦고 만다. 결국 머릿속에 든 것이 없고 아무런 인식도 말하지 못할 텐데, 네가 하나님께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볼 낯이 있겠느냐? 지금 열심히 추구하여 최종적으로는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사람에게 크게 이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없으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고, 이 더러운 땅에서 수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질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아귀다툼을 벌이고, 서로 짓밟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었다. 사람은 패역이 너무 크고, 관념이 너무 많아 전부 사탄에 속한다.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떠난다면 사람은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될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 성육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사역에서 나타내는 것은 바로 영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고, 그가 한 사역은 영이 하는 대로 한 것이다. 오늘날, 이런 사역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너는 너무 어리석은 것이고 또 너무 많은 것을 잃은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너의 믿음은 종교적인 신앙이고 너는 종교적인 기독교 신자이다. 너는 죽은 규례를 붙잡고 지키는 바람에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잃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추구함으로써 진리와 생명을 얻을 수 있지만, 너는 자신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칭찬받기는커녕 도리어 악을 행하는 사람, 멸망의 가증한 일을 행하는 사람, 또 사탄의 웃음거리이자 사탄의 노획물이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신앙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추구하고 경배해야 하는 대상이다. 지금 추구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때 저는 왜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지 못하고, 생명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을까요? 그때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네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왜 추구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정말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너는 너 자신을 아주 증오하게 될 것이다. 너는 지금 내가 한 말을 믿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지만, 어느 날 이 사역이 전개되는 것을 전부 보게 되면 그때는 후회하고 아연실색할 것이다. 있는 복도 누릴 줄 모르고, 있는 진리도 추구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 아니겠느냐? 비록 아직은 다음 단계의 사역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지금 너에게 요구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 그 사역과 무관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사역과 진리가 모두 네가 알 가치가 없는 것이냐? 형벌과 심판은 너의 영을 깨어나게 할 수 없느냐? 형벌과 심판이 너로 하여금 너 자신을 증오하게 할 수 없단 말이냐? 너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평안하고 즐겁고 육의 편안함을 조금 얻는 것에만 만족하느냐? 그런 사람은 가장 비천한 사람 아니더냐? 구원을 보고도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보다 미련한 사람이고, 육적인 것을 탐하는 사람이며 사탄을 즐기는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어려움과 환난, 고통이 조금도 없기를 바란다. 너는 늘 이런 가치 없는 것들만 추구하고, 정작 생명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며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각을 진리보다 앞자리에 놓는다. 너는 너무도 무가치한 사람이다! 네가 돼지처럼 산다면 개돼지 따위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육적인 것을 좋아하는 자는 모두 짐승 아니겠느냐? 영이 없는 죽은 자는 모두 걸어 다니는 송장 아니겠느냐? 내가 너희 가운데서 얼마나 많이 말했더냐? 내가 너희 가운데서 행한 사역이 적더냐? 너희 가운데서 너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공급했느냐? 그런데 너는 어째서 얻지 못했느냐? 또 무슨 불평이 있단 말이냐? 네가 얻지 못한 것은 육을 너무 귀하게 여긴 탓이 아니더냐? 네 생각이 너무 사치스러운 탓이 아니더냐? 네가 너무 어리석은 탓이 아니더냐? 너는 이 복을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았다고 원망할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은 뒤 평안만을 얻고자 한다.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너는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고, 너의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바람이 불어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가 날려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으며, 홍수가 나도 네 집의 곡식은 잠기지 않고, 모든 재난이 너와 무관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못난 놈에게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짐승 아니겠느냐?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진정한 인생을 베풀어 주었는데 추구하지 않는다. 그럼 너는 개돼지 따위가 아니겠느냐? 돼지는 인생을 추구하지 않고 깨끗함을 바라지도 않으며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날마다 배불리 먹고 쿨쿨 잠만 잔다. 참도를 베풀어 주었건만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런 돼지 같은 삶을 계속하고 싶으냐? 그런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비루하고 저속하며, 더럽고 음란하게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가 하나도 없으니 너의 일생은 가장 비천한 일생 아니겠느냐?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뵙겠느냐? 계속 그렇게 체험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네게 참도를 베풀어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네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므로 끝까지 따르기만 하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공의로우신데, 끝까지 따른 사람을 어떻게 뿌리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공의로운 성품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한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나의 요구에는 다 적합한 기준이 있어서 내가 무엇을 요구하든 사람은 다 그것을 충족시켜야 한다. 나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 경력이나 관록을 갖고 있는지 보지 않고, 오직 네가 나의 도를 행하는 사람인지, 또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인지만 본다. 너에게 진리가 없고 오히려 내 이름을 모욕하며 나의 도에 따라 행하지 않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따르기만 한다면, 그때는 내가 너의 악을 이유로 너를 치고 징벌할 것이다. 그때 네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오늘 내가 한 말을 다 지킨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칭찬할 것이다. 너는 네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르면서 고난을 받고 비바람 속에서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며 환난을 함께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지는 못했다. 너는 날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거나 헌신하면 된다고 생각할 뿐,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또 너는 “어쨌든 저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걸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헌신했는데,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은 꼭 저를 기억하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공의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고, 사람의 뜻이 전혀 없으며, 육적인 것도, 사람처럼 거래하는 것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와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않는 자는 모두 징벌 받아야 한다.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는 지금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니 나중에 제게 축복을 조금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묻겠다. “너는 내가 한 말을 지켰느냐?” 네가 말한 공의는 거래를 전제로 한 것이다. 너는 내가 공의로우니 그 누구도 차별할 리가 없으며,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고 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끝까지 따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나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다.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나에게 완전히 얻어지는 사람이고, 또 나에게 정복된 후 진리를 구해 온전케 되는 사람이다. 너는 몇 가지를 해냈느냐? 끝까지 따랐다면 그 외의 것은 어떠냐? 너는 내 말을 준행했느냐? 너는 내가 내놓은 다섯 가지 요구 가운데 하나만 충족했을 뿐, 그 외의 네 가지는 충족시킬 생각도 하지 않는다. 너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길을 찾아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추구한다. 나의 공의로운 성품은 너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형벌이자 심판이고 공의로운 응징이다. 악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공의로운 징벌이다. 나의 도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설령 끝까지 나를 따른다고 해도 반드시 징벌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다. 이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 사람을 징벌할 때가 되면 사람은 매우 당혹해할 것이다. 하나님을 따를 때 그의 도를 행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그동안 고난만 조금 받았지, 하나님의 도를 행하지는 않았으니 할 말이 없어. 그냥 형벌을 받자!’라고 할 것이다. 또 마음속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 것이다. ‘아무튼 나는 끝까지 따랐으니 형벌을 받더라도 너무 무거운 형벌은 받지 않겠지. 형벌을 받고 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받아 주실 거야. 나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아. 그러니 나를 계속 이렇게 대하지는 않으실 거야. 어쨌든 난 멸망당할 사람들과는 다르거든. 멸망당할 사람은 무거운 형벌을 받겠지만 나는 좀 가벼운 형벌을 받을 거야.’ 공의 성품은 네가 말한 것과 다르다. 죄를 순순히 인정한다고 해서 가볍게 처벌하지는 않는다. 공의란 바로 거룩함이자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이다. 더러운 자와 변화되지 않은 자는 모두 하나님이 싫어하는 대상이다. 공의로운 성품은 법률이 아니라 행정, 하나님나라의 행정이다. 이런 행정은 진리와 변화가 없는 모든 자에게 있어 공의로운 징벌이며, 돌이킬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이는 사람이 각기 부류대로 나뉠 때, 상선벌악(賞善罰惡)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인류의 종착지가 드러나는 때이자 구원 사역이 끝나는 때이므로 그 후로는 더 이상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지 않고 악을 행한 모든 사람을 응징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늘 하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전케 하실 대상이 분명합니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온전케 될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과 늘 접촉하는 우리보다 많지 않겠지요. 하나님은 우리 중 아무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고 나중에 반드시 하나님께 온전케 될 겁니다.” 너희는 모두 이런 관념을 갖고 있다. 이것이 공의란 말이냐? 네가 정말 진리를 실행했느냐? 이런 헛소문을 퍼뜨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구나!

지금 어떤 사람들은 쓰임 받고 싶어 하지만, 정복된 후에도 바로 쓰임 받지는 못한다. 사람을 사용할 때에도, 네가 지금의 말씀으로 살지 못한다면 너는 온전케 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기간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이 도태될지 아니면 쓰임 받을지가 정해진다. 정복된 것은 그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예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의 본보기나 모델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부각물에 불과하다. 생명 성품이 변화되어 안팎으로 다 바뀌어야 진정으로 온전케 된 사람이다. 지금 정복되는 것과 온전케 되는 것이 있는데, 네가 바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너는 어느 것에 이르기를 바라느냐? 너는 지금 온전케 될 조건을 갖추었느냐?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은 어떤 것이냐? 너는 어떻게 갖추고, 어떻게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겠느냐?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완전히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네가 온전케 되고자 한다면 너는 성결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냐? 너는 형벌과 심판으로 정결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네가 정결케 되기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너는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느냐? 네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하는데 그러면 너는 형벌과 심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냐? 지금 너에게 하는 사역은 대부분 형벌과 심판인데, 너는 너에게 하는 이런 사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네가 체험한 형벌과 심판은 너를 정결케 하였느냐? 너를 변화시켰느냐? 네게서 성과를 거두었느냐? 오늘날, 이 많은 사역, 그러니까 저주와 심판, 폭로를 너는 귀찮다고 여기느냐, 아니면 너에게 아주 이롭다고 여기느냐? 너는 무슨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조그마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냐, 아니면 평안과 즐거움을 얻었기 때문이냐? 그것도 아니면 형벌과 심판으로 정결케 된 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느냐? 너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온전케 됨에 있어서 어떤 조건들을 갖추었느냐? 온전케 된 후에 보인 그의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겠느냐?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를 사랑한 것이냐, 그를 보지 못해서 사랑한 것이냐? 아니면 책망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환난의 고통을 받은 뒤에 자신의 더러움과 패역, 그리고 주의 거룩함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더욱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마음이 더 순결해진 것은 형벌과 심판 때문이냐,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냐?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 너는 은혜 때문에, 지금의 작은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것이 참된 사랑이냐? 너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겠느냐? 마땅히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보고 난 뒤, 참된 사랑이 생기고, 더 나아가 완전히 탄복하여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베드로처럼 “당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부족하기만 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네가 추구하는 것은 형벌과 심판을 통해 정복되는 것이냐, 아니면 형벌과 심판을 통해 정결케 되고 보호와 보살핌을 받는 것이냐? 네가 추구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너의 일생은 의미 있는 일생이냐, 아니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생이냐? 너는 육을 원하느냐, 진리를 원하느냐? 너는 심판을 원하느냐, 편안함을 원하느냐? 너는 이렇게 많은 사역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로움을 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추구해야겠느냐? 이 길을 대체 어떻게 가야겠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형벌과 심판이 네게서 결실을 보았느냐? 네게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이 있는지는 네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다! 네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패괴된 옛 성품대로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며, 더욱이 양심도 갖추지 못했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심이 있겠느냐?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인 사람이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고, 네 사역과 진입, 하는 말, 그리고 너의 삶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경외하는 마음도 없다. 이런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받은 사람이냐? 이런 사람이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냐?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그저 인식만 있고 그것을 살아 내지는 못한 사람이겠느냐? 지금 사람에게 요구하는, 참된 인생을 살라는 것의 조건은 무엇이냐? 베드로의 기도가 입으로만 한 것이더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란 말이냐? 베드로는 기도할 줄만 알고 진리를 행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느냐? 너는 누구를 위해 추구하느냐? 형벌과 심판 속에서 보호받고 정결케 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형벌과 심판은 다 사람에게 이롭지 않은 것이더냐? 심판이라 하면 모두 징벌하는 것이더냐? 설마 평안, 즐거움, 물질적인 축복, 일시적인 안일만이 사람의 생명에 이롭단 말이냐? 사람이 안일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살 뿐 심판받는 삶이 없다면 정결케 될 수 있겠느냐? 사람이 변화되고 정결케 되려면 온전케 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겠느냐? 너는 지금 어떤 길을 선택해야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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