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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

지난번 예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주제를 교통한 바 있다. 그 주제가 무엇이었느냐? 기억하고 있느냐? 내가 다시 한 번 반복해 보겠다. 지난번에 교통했던 주제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 주제가 너희에게 중요하지 않으냐? 어느 부분이 너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냐?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부분이냐, 아니면 하나님 자신 부분이냐? 너희는 어느 부분의 주제가 가장 흥미로웠느냐?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이 중에 어느 부분이 너희가 가장 듣고 싶었던 주제였느냐? 나는 너희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 또한 언제 어디서나 그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을 대표한다.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이 세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지난번에 교통했던 하나님 사역의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 사건들은 모두 사람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서, 그것은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참여와 하나님의 선포가 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고 나서부터, 인류와 접촉하기 시작했고, 인류에게 말씀을 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의 성품을 인류를 향해 나타내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과 인류가 접촉하기 시작한 이래로, 하나님은 인류에게 끊임없이 그의 속성과 본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전 사람이나 현시대 사람이 볼 수 있든 없든,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어쨌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면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고, 자신의 본질을 나타낸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질,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과 인류가 접촉함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고 발현되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람에게 뭔가를 숨긴 적도 없고, 그 어떤 것도 비밀로 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성품을 아낌없이 공개하고 보여 주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성품과 본질을 이해하기를 바라며, 인류에게 그의 성품과 본질이 영원히 오묘한 비밀로 남는 것을 바라지 않음을 말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을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로 간주하는 것도 원치 않음을 말해 준다. 인류는 하나님을 알아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인류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능하에 살고, 빛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선포하는 말씀과 나타내는 성품은 그의 마음을 대표하고, 그의 본질을 대표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접하면서 무슨 말씀을 했든지, 어떤 일을 했든지, 어떠한 성품을 나타냈든지, 또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속성과 본질을 보았든지, 그것은 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인류가 얼마나 체험할 수 있는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얼마나 깨달을 수 있는지와 상관없이 다 하나님의 마음 ―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 을 대표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는 요구이다. 즉,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그러한 요구는 하나님의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냐? 즉,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고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사람에게 요구할 때 나타난다. 거기에는 그 어떤 거짓도, 위장도, 숨김도, 포장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왜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늘 똑바로 보지도 못할까? 왜 사람은 늘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할까? 하나님이 나타내고 보여 주는 것이 다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고, 하나님 자신의 진실된 성품 구석구석의 면면인데, 왜 사람은 보지 못할까? 왜 사람은 분명하게 알지 못할까?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바로 창세 이래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초에, 하나님이 사람 ― 막 창조된 사람 ― 에게 무엇을 했든지 간에, 사람은 그저 하나님을 하나의 동반자로, 의지할 대상으로 삼았을 뿐, 하나님을 제대로 알거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 사람에게 ‘동반자’로 보이는 이가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가 만물을 주재하는 분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 당시의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지 만물이 하나님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또한 하나님이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으며,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물론 하나님도 그 당시에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행한 일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인류가 창조되었던 초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시대 사역의 준비 단계부터 사람에게 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람에게 요구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제사드리는 법,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이때서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간단한 개념 정도가 생겼고,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하나님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하나님 쪽에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얼마만큼 알아야 하고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하는지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사역 절차에 맞춰, 사역의 진행 상황에 따라, 사람에게 다양한 요구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아주 진실하지 않으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합리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은 인류가 창조된 초기에는, 사람에게 정복 사역을 하지 않았고, 온전케 하는 사역도 하지 않았다. 사람에게 많은 말씀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아주 낮은 것이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심지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을 하든, 하나님 편에서는 용서할 수 있었으며, 따져 묻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고, 사람에게 무엇을 갖추게 했는지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요구 기준을 두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때의 요구 기준은 아주 낮았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위대하지 않다거나,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이 빈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 자신을 알려면 길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 절차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된 다음에도 하나님의 본체가 인류에게 나타나 주기를 바라겠느냐? 사람은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런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되었으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하나님 자신을 보고 하나님의 참모습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계획이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하나님은 무지개를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삼아 사람과 언약을 세운 후, 그와 동심합의할 수 있는 사람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간절해졌다. 그리고 땅에서 그의 뜻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얻고자 하는 마음도 간절해졌으며, 더욱이 땅에서 흑암 세력과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얻기를 바랐다. 그러한 사람들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바라던 것으로, 하나님이 창세 이래 줄곧 기대해 마 않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든, 사람과 언약을 세우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마음도,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도 변함이 없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한 것은 창세전부터 오래도록 바랐던 것으로, 인류 가운데서 그가 얻고자 하는 사람을 얻는 것이었다. 그의 성품을 이해하고 알며 그의 뜻을 깨닫고 그를 경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마음지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 계속해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 사역의 절차를 따라, ‘봉인’된 지 오래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조금씩 찾아보자.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알고 이해해 보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또한 사람마다 서서히 하나님께 다가가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하자.

지난번, 우리는 하나님이 왜 사람과 언약을 세웠는지에 관련된 일들을 나누었다. 이번에는 다음 부분의 성경 구절을 계속 교통해 보도록 하자. 성경을 읽어 보자.

(1) 아브라함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시다

(창 17:15~17)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 17:21~22)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다

(창 22: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하나님이 하고자 결정한 사역은 막을 자가 없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너희가 다 들었다! 그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에 택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그가 100세, 그의 아내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 임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떠한 약속을 주려고 했느냐? 그것은 성경에서 언급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했을 때, 그의 당시 상황은 어떠했느냐? 성경에 이런 기록이 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다시 말해, 이 노부부의 나이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그는 땅에 엎드려 웃으며 속으로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한 약속을 단지 농담으로 여긴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브라함에게는 그것이 아주 웃긴 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음에도, 이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시다니. 그리고 나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며,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일 거야!’ 그래서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려 웃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불가능한 일이야.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농담하시는 거야. 이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로 믿지 않았다. 그러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의인이었습니다.) 어디에서 그를 의인이라고 했느냐? 너희는 하나님이 부른 사람이면 다 의인이고 완전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참으로 교조적이구나! 이 일은 너희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쉽게 정의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의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모든 사람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비록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이 사건에서 보여 준 것으로 보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어떤 것이냐? 막연한 면이 있지 않으냐? 그의 믿음이 크냐? 크지 않다! 아브라함의 웃음과 그의 마음속 생각은 이미 아브라함 본인을 대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쪽에서 그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은 순전히 상상에 속하고, 아무렇게나 끼워 맞추는 것으로, 무책임한 평가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웃음과 그의 작은 동작을 하나님이 보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알고 있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일을 바꾸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계획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하나님 쪽에서는 전혀 어떤 영향이나 방해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마음대로 바꾸지 않을 것이며, 사람의 행동, 심지어는 무지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을 함부로 바꾸거나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창세기> 17장 21절~22절에서는 뭐라고 되었느냐?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했는지 하나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나님이 신경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냐? 그때 하나님 쪽에서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요구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알아야 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한 사역과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을 택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어떤 원칙에 따라 일을 하는지에 대해, 사람에게 완전히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의 분량이 그 정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 어떤 행동을 했든, 하나님 쪽에서 볼 때는 모두 정상이다. 하나님은 결코 정죄하지도 훈계하지도 않았고, 그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이삭을 낳을 것이니라”라는 말씀만 남겼다. 하나님 쪽에서는 그 일이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짐에 따라 점차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가 이루고자 하는 계획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다 마련해 놓고는 바로 떠났다. 사람이 뭘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든지, 어떻게 계획하든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과 절차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앞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원칙이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떻게 인식하든,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거나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이 정한 시간에 이삭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 사실에서 증명되듯이, 사람의 행위와 태도로 하나님의 사역을 막을 수 있더냐?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작은 믿음이나 관념과 상상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영향을 준 것이 있느냐? 없다! 전혀 없다! 하나님의 경영 계획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일에도, 그 어떤 환경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고자 뜻을 정한 모든 일은 그의 계획에 따라 제때에 완성되고 이루어지며, 그의 사역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사람의 어떠한 미련함과 무지함에 대해,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과 관념들에 대해 하나님은 상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하고자 하는 사역을 거침없이 해 나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며, 그의 무소불능의 행사이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였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그것으로 끝났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반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영 계획은 막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 것은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의 서막을 연 것에 불과하다. 그 시각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 사건으로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을 또 누가 알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고, 사람의 진심만을 원하신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자. <창세기> 22장 2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분부하였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즉,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 그가 사랑하는 이삭 ― 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행한 이 일은 지금에 와서 봐도 여전히 사람의 관념과는 어긋나지 않느냐? 그렇다! 하나님이 이때 행한 일은 사람의 관념에 매우 맞지 않는 것이며,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이런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믿지 못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다가, 아들을 얻은 후에는 또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하나님이 대체 뭘 하시려는 거지? 하나님의 뜻은 대체 무엇일까?’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다. 그러고는 또 그에게 조건 없이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 이것은 지나친 것이냐?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지나칠 뿐만 아니라 조금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 본인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에 대해 다른 생각이나 자그마한 추측은 있었지만 그래도 아들 이삭을 바칠 준비를 하였다. 여기서 너는 어떤 일에서 아브라함이 기꺼이 아들을 바치려고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느냐? 원문에 뭐라고 했느냐? 이같이 기록되었다.“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 22:3),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 22:9~10).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그 모든 행동을 하나님은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보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게 되었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리석었고 무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오해했다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진짜였으며,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 ― 그의 아들 ― 을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사람이 봤을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가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하나님의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 ― 이삭을 바치라는 것 ― 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영 계획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인물이라고 확신하였다. 비록 그 일이 하나의 시련이고 검증일 뿐일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위안을 받았고, 사람이 그에게 바친 사랑을 느꼈으며, 또한 사상 처음,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고 하던 그 찰나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애초에 이삭의 생명을 가져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바로 저지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복종은 이미 시험을 이긴 것이었다. 그가 보인 행동으로 이미 충분했으며, 하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한 일에서 이미 결과를 얻었다. 그 결과에 하나님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느냐? 그 결과는 하나님이 만족한 것이고 하나님이 원한 것이며, 하나님이 보고자 기대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냐? 비록 하나님이 다양한 배경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각 사람을 검증한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은 자신이 원했던 것을 보았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무조건적인 것이었고, 이 ‘무조건’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이미 이것을 바쳤어. 나는 이미 그것을 포기했어.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나에게 만족을 못 하시는 걸까? 왜 계속 나에게 시련을 주시는 거지? 왜 계속해서 나를 검증하시지?’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 준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을 보지 못했고, 너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에게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려고 칼을 들었던 것과 같은 그런 진심을 보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보지 못했고 너에게서 위안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 계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이 주제는 여기까지 하자. 이어서 다음 단락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읽어 보자.

3.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창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원본 그대로의 기록이다. 말씀은 아주 간결하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아주 풍성하다. 이 속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이유와 배경,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할 때의 기쁨과 벅찬 심정이 담겨져 있으며,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얻기를 희망한다’는 간절한 마음도 담겨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의 분부에 순종하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긍휼히 여긴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얻기 위해 치른 대가와 고심을 보았다. 더욱이 이번 경영 계획 사역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혼자 감당하고 있는 슬픔과 아픔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마디에서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말씀이자, 후세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와 크나큰 영향력을 주는 말씀이다.

사람은 진심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여기에서 보게 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복은 크지 않으냐? 어느 정도로 크냐? 여기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전무후무한 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그의 독생자 ― 그가 사랑하는 독생자 ― 를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려고[주:여기서 ‘바치다’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로 말해야 한다.] 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복을 내렸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한 복은 무엇이냐? 바로 그의 자손을 많아지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많아지게 한다는 것이냐?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하나님의 이 말씀은 어떤 배경하에서 나온 것이냐?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느냐?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한 것과 같다.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니라”.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분부를 청종하고 조금의 원망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구대로, 분부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그러한 복을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에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 당시의 하나님의 마음과 관련된다. 그 중요한 말씀을 너희는 보았느냐? 아마 너희는 주의 깊게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할 때,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맹세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보통 어디를 가리켜 맹세하느냐? 다 하늘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을 향해 맹세하고 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키며 맹세했다는 이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정확한 해석을 해 주면 너희는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면서, 다시 한 번 외로움을 느꼈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에’ 혹은 ‘무의식적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고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자기 자신에게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 행동으로부터 너는 너 자신을 연상해 볼 수 있다. 네가 가슴에 손을 대고 자신에게 말할 때, 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알고 있지 않느냐? 너의 태도는 아주 진지하지 않겠느냐? 너는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보여진 것 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할 때의 태도는 아주 진지하고 진실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며 약속을 주었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에게 ‘나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할 것이다. 그는 내 말에 순종했으며, 내가 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한하노니”라는 이 말씀을 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라엘 선민들이 나오게 하고, 그다음 그 선민들을 이끌어 그의 사역에 발맞춰 함께 나아가게 하기로 뜻을 정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담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이 선포하고자 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서 계속 이어지게 하며, 그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바람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이것은 복받은 일이 아니냐? 인류에게 있어서 이보다 큰 복은 없으니, 이것이 가장 큰 복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받은 이 ‘복’은 그의 자손이 많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장차 그의 경영, 그의 당부와 사역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할 때, 자신을 가리키며 맹세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뜻을 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뜻을 정한 과정은 매우 진실하지 않으냐? 아주 실제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은 이때부터 그의 심혈과 대가, 그의 속성과 그의 모든 것, 더 나아가 그의 생명까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베풀어 주기로 뜻을 정한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서부터 그의 행사를 보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보게 하리라 뜻을 정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리는 축복의 말씀만 들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은 그 순간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을 알 수 있었겠느냐?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키며 맹세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외롭고 여전히 슬펐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 그가 계획한 것에 대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와 마음을 나누며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더욱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사역에 동역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겉보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얻었고, 그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을 얻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인식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렸을지라도, 마음은 여전히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가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의 경영이 비로소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얻고자 하는 사람, 그가 보고자 하는 사람, 그가 기뻐하는 사람이 아주 멀리 있어서, 그는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려야 하고 인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때는 하나님 자신 외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얻고자 하며 무엇을 바라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음이 아주 흥분된 동시에 무겁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다음 사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준 일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처럼 큰 복을 내렸다.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같은 진심을 어느 정도로 소중히 여기느냐? 아마 너희는 그 정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자란 후, 하나님은 또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요구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수행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다. 아브라함의 그 진심에 하나님은 감동한 것이며, 그것을 귀히 여긴 것이다. 어느 정도로 귀하게 여겼느냐? 귀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이냐?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세상이 놀랄 만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전에 없던 만족감을 느꼈으며,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을 얻은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만족감’과 ‘기쁨’은 하나님이 손수 만든 피조물로부터 온 것이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께 드린 가장 진귀한 첫 번째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피조물로부터 받은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선물로 간주하였다. 또한 그것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대가로 돌아온 첫 번째 성과를 보았고, 인류에게서 희망도 보았다. 그 후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 더 나와 그와 함께하며, 그를 진심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그를 헤아리기를 바랐다. 심지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계속 살기를 희망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같은 마음을 가진 자가 그와 함께하고, 그의 경영에 계속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했든, 그것은 단지 바람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저 하나님에게 순종은 했지만, 하나님에 대해 전혀 이해하거나 알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 ― 하나님을 알고 증거하고 하나님과 동심합의해야 하는 것 ― 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일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보게 되었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검증을 통과한 것도 보게 되었다. 비록 하나님이 그의 진심과 순종을 열납했을지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지기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했으며,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사람이 되기에도 부족했다. 또한 하나님과 동심합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외롭고 조급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외롭고 조급해질수록 최대한 빨리 그의 경영을 계속해 나가려고 했고, 한 무리를 선정하고 얻어 그의 경영 계획을 이루고 그의 뜻을 이루려고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그런 간절한 마음은 바뀐 적이 없다. 처음 인류를 창조해서부터 하나님은 이긴 자들, 즉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깨닫고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나와 그와 동행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난하든, 하나님이 희망하는 목표가 얼마나 멀든,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기대를 바꿔 본 적이 없고, 포기한 적도 없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조금 느낄 수 있느냐? 아마도 그렇게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느껴 보거라!

아브라함이 있었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또 성 하나를 멸망시켰다. 그 성의 이름은 소돔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성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성을 멸망시킨 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분명 잘 모를 것이다.

오늘 우리는 다음 몇 단락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를 통해 그 당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보도록 하자. 이어서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2)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려고 하다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몇 구절의 말씀은 내가 성경에서 고른 것이다. 완전한 문장 그대로가 아니다. 너희가 온전한 문장을 보고자 한다면, 성경에서 찾아보면 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부분적인 내용은 빼 버렸다. 여기에는 중요한 단락과 구절만 선별했다. 몇 구절을 빼긴 했지만, 오늘 우리가 교통하는 것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교통하는 모든 장절, 내용에서 당시 사건이 발생한 세부적인 사항과 사람에게서 드러난 것들은 피하고, 당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지,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 가운데서 진실된 하나님 자신을 보았다면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의 분부대로 따르는 사람만을 보살핀다

이 단락의 내용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것은 숫자들이다. 우선, 여호와는 성안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용서할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50명의 의인이 있었느냐? 없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또 하나님과 어떤 대화를 나눴느냐? 만일 4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그래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시 아브라함이 30명이면 어찌 되는지 물었다. 하나님은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20명이 있으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10명이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성안에 의인이 10명이라도 있었느냐? 10명은 없었지만 한 명은 있었다. 그 한 명의 의인이 누구냐? 그 사람은 롯이었다. 당시 성안에는 의인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 쪽에서는 숫자에 대해 까다롭고 엄격하게 말씀했느냐?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40명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30명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 질문하며 “10명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까지 왔다. 하나님은 “10명만 있더라도 나는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고, 10명 이외의 사람들을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이 10은 아주 안타까운 숫자였다. 그러나 사실상 소돔 성안에는 의인이 10명조차도 없었다. 이로써 하나님이 보기에 그 성안의 사람들의 죄악과 사악함은 이미 하나님이 멸해야만 할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의인이 50명 있어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말씀은 무슨 뜻이냐? 그런 숫자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의인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성에 의인이 한 명밖에 없더라도, 하나님은 그 의인이 성을 멸하는 것으로 피해를 보게 두지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 성을 멸하고자 했든 안 했든, 그 성에 의인이 몇 명이 있었든, 그 죄악의 성은 하나님이 보기에 저주받아야 할 곳이었고, 마땅히 멸망되어 하나님 눈앞에서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인은 마땅히 살아남아야 할 대상이었다. 어떤 시대든 막론하고, 인류가 어느 시대까지 발전했는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이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악한 것을 증오하며, 그의 눈에 보이는 의인을 보살핀다. 하나님의 명확한 이 태도는 하나님 본질의 진정한 발현인 것이다. 성안에 의인 한 명만 있었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그 성은 반드시 멸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그 시대에 하나님은 성안의 의인 50명으로 인해, 그 성을 멸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의인 10명으로 인해서도 그 성을 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류를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결정이나 그들을 인도하는 사역을 할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로운 행동을 아주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며, 그의 앞에 선행을 쌓은 자들을 귀하게 여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성경에서 너희는 하나님이 그 어떤 사람에게 진리를 교통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교통해 주는 것을 보았느냐? 본 적이 없다. 우리가 본 것은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알려 주는 말씀뿐이었다. 누군가는 그대로 하고, 누군가는 하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그 말씀을 믿었고, 누군가는 믿지 않았다. 단지 이런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의인 ― 하나님 눈의 의인 ― 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집행할 수 있도록 둔 종들이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에 의해 온전하게 된 자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의인이 몇 명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기에 그 ‘의인’은 하나님의 마음지기라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절대 아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마음지기, 증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 불렀느냐? 성경에서 우리가 본 그 단락까지는 하나님이 여러 차례 사람을 ‘나의 종’이라 칭하였다. 즉, 그 시대의 의인들이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종으로 보였던 것이며,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그 호칭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생각되었느냐? 왜 그렇게 불렀을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호칭을 붙여 부를 때, 하나님의 마음에는 기준이 있지 않겠느냐? 분명히 있다. 사람을 ‘의인’이라고 칭하든, ‘완전한 자’, ‘정직한 자’라고 칭하든 혹은 ‘종’이라고 부르든, 하나님 쪽에서는 기준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종’이라고 부를 때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를 맞이할 수 있고, 하나님의 분부를 따를 수 있고, 하나님의 사자가 분부한 대로 행할 수 있는 자라고 확신한 것이다. 어떤 일들을 행하는 것일까?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땅에서 행해야 한다고 분부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람에게 행하라고 한 것을 하나님의 도(道)라고 칭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바가 그저 간단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 단발성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을 행하라고 간단하게 당부한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에 따라 그의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여러 조건들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고, 시기도 아직 무르익지 않아 인류가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도를 선포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한 ‘의인’은 30명이든, 20명이든, 하나님이 보기엔 다 하나님의 종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 종에게 임했을 때, 그 종은 나가서 영접할 수 있고, 그의 분부에 청종하며, 그의 말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눈의 종이 된 자가 해야 할 것이고, 달성해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칭하는 데는 정도가 있다. 그들을 ‘종’이라 칭하는 이유는 결코 지금의 너희들처럼 말씀을 많이 들어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깨닫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정직한 인성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분부했을 때 하던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분부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종’에 대한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에 동역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는 아닐지라도, 땅에서 하나님 말씀을 집행하는 자요, 시행하는 자들이다. 이것으로 그 종이나 의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려면 그와 동역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종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하나님의 사자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담당하는, 하나님이 분부한 모든 ‘임무’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잃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종들이 하나님과 동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인류에게 행하고자 하는 사역은 멈추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경영 계획, 하나님의 바람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보살피는 자에게 크게 긍휼을 베풀고,

혐오하여 포기하는 자에게 크게 노한다

성경 기록에 보면, 소돔 성에 하나님의 종이 10명이라도 있었느냐? 없었다! 하나님에게 그 성은 남겨 둘 가치가 있었느냐? 성안에서 롯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했다. 이는 그 성에 하나님의 종은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롯만을 구원하고 소돔 성을 멸한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보기에는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매우 원칙 있게 일을 한다는 것이다. 결정 하나를 내리기 전에 장기간의 검증과 고민의 과정을 거치며, 시기가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결정이나 판단도 단호하게 내리지 않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는 그 결정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일찍이 성안에 의인 40명도, 30명도, 20명도 없으며, 심지어 10명조차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의인은 단지 롯 한 명뿐이었다. 성에서 일어나는 일, 성안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감찰하고 있었으며,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결정은 잘못될 리가 없었다. 그에 비하면, 하나님의 전능 앞에서 사람은 매우 무감각하며, 더없이 우매하고 무지하며, 근시안적인 존재라는 것이 더 두드러진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에서 우리가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발현되어 왔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숫자는 아주 간단하며 어떤 문제도 설명하지 않지만,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의인 50명으로 말미암아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관용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의 이 부분의 성품을 보았느냐? 더 나아가 의인이 10명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의인 10명으로 인해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관용과 사랑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 의인들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고, 그들을 염려하여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용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결과는 무엇이냐? 아브라함이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였다. 그 후,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성에는 그가 말한 의인이 10명도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기로 뜻을 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 쪽에서는 어떤 결정을 하였느냐? 그 성에 의인 10명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성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성을 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노가 아니냐? 그 ‘노’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지 않느냐? 그 성품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의 발현이 아니냐?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본질의 발현이 아니냐? 하나님 쪽에서는 의인이 10명도 없다는 것이 확정되면 반드시 그 성을 멸할 것이며, 게다가 그 성에 있던 사람들을 엄하게 벌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고 또한 그들이 너무 더럽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이 대화들을 왜 이렇게 분석할까? 이 간단한 몇 구절에는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의인을 귀하게 여기고 긍휼히 여기며 관용으로 대하고 염려하는 동시에, 그 성안의 모든 타락한 자들을 마음속 깊이 증오하였다. 이것이 크게 긍휼을 베풀기도 하고, 크게 노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느냐? 불로 멸하였다. 하나님은 왜 불태우는 방법으로 그 성을 멸했을까? 네가 어떤 물건이 불에 타는 것을 볼 때, 혹은 네가 어떤 것을 불태워 버리려고 할 때, 너는 그 물건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 왜 그것을 불태우느냐? 더는 필요 없고, 더 이상 그 물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으냐? 그것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불로 태우는 방식에는 포기한다는 의미가 있고, 증오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불로 소돔성을 멸할 때 바로 이런 심정이었다. 불태우는 방식은 바로 하나님의 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노할 때는 사람에게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의 일면을 보여 준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분부와 요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푼다. 사람이 심히 타락하고 하나님을 매우 적대시하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크게 노한다. 그리고 그 노는 어느 정도로 분출되느냐?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에게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노가 사라지게 된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몸과 생각이 외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싶든지 간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면 하나님의 노가 끝없이 분출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크게 노할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하나님의 노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분출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더 이상의 긍휼도 관용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성 하나를 멸하려고 했을 때, 그 일이 사람에게는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 성은 죄악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의 눈에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남아 있을 수 없으니 하나님이 그 성을 멸하는 것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기 전후에 발생한 일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보았다.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며, 악한 것과 죄에 속한 것,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노하며, 노가 끊이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된 부분이자 가장 두드러지고, 더욱이 하나님이 시종 나타내고 있는 주요 2가지 측면이다. 즉,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는 것이다. 여기 앉아 있는 너희들 대다수는 하나님의 긍휼은 어느 정도 느낀 적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노를 체험한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일찍이 크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 있는 너희 중 그 어떤 사람이나 일부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크게 노한 경우는 아주 드물고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조급해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노는 조만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왜 그런 것이냐?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노를 표출할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크게 노할 때는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람을 혐오하고 버렸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존재를 증오하며 더 이상 그 사람의 존재를 참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노가 임하면, 그 사람의 소멸을 의미한다. 지금 하나님의 사역이 아직 그 정도까지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크게 노하면, 너희 중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이 시대에서 너희 모든 사람에게는 크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을 뿐, 아직 크게 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노가 임하기를 구해도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노와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이 정말 존재하는지를 체험해 보면 된다. 너희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말세의 사람은 하나님의 노를 말씀에서만 보았을 뿐,

진정으로 체험하지는 못했다

이 몇 구절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두 가지 측면의 성품은 교통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으냐?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생겼느냐? 어떤 이해가 생겼느냐? 창세부터 지금까지, 마지막 이 무리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마지막 단계에서 위엄과 진노를 지니고서 심판 형벌의 사역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단지 말씀으로 그의 사역을 이룬다. 말씀으로 가르치며, 말씀으로 적셔 주고 공급하며 양육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노는 쭉 감춰져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노의 성품을 느낀 것 외에, 직접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즉, 심판과 형벌의 사역에서, 사람은 말씀 속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노를 통해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을 느꼈지만, 하나님의 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말씀 안에 제한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꾸짖고 드러내고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며 심지어 사람을 정죄하기도 하기만, 아직까지 사람에게 크게 노한 적은 없다. 말씀 외에는 사람에게 노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사람들이 체험한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의 발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체험하게 된 하나님의 진노는 그저 하나님 말씀의 어조와 분위기에서 주는 효과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효과로 인해 자신이 하나님의 노를 진짜 체험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았고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모습도 보았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가 얼마나 조악하든 혹은 성품이 얼마나 타락했든 상관없이, 하나님 쪽에서는 줄곧 인내하고 있다. 그가 인내하는 목적은 그가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그의 말씀과 그가 심혈을 기울인 대가의 효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기다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또한 사람에게 다양한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마치 사람이 태어나서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18~19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고, 심지어는 20~30년이 걸려야 진정한 어른으로 성숙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과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그러한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끊임없이 크게 긍휼을 베풀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역 기간에 극소수의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심하게 하나님을 대적해서 징벌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들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이 더욱 잘 입증되었으며, 하나님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는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도 충분히 입증되었다. 물론 이러한 전형적인 사례에서, 그 사람들에게 나타낸 하나님의 일부 성품은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사실상, 마지막 단계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기다리는 기간에 계속 인내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인내와 생명을 대가로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을 너희는 보았느냐?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계획을 망치지 않는다. 그는 노할 수도 있고 긍휼을 베풀 수도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된 두 가지 성품의 발현이다. 매우 뚜렷하지 않으냐? 즉, 하나님은 사람에게 옳은 것과 틀린 것,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증오하는지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다 직접적으로 구현되어 나온다. 또한 하나님은 사역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이 모든 것들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보여 준다. 아주 모호하거나 두리뭉실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구체적이고 진실되며 매우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에게 숨기지 않았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만일 내가 이런 것을 교통하지 않으면, 너희는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진실된 성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행한 일들이 기록되긴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적고,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성품을 소개하거나 그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런 기록을 이야기로만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감춰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본체가 사람에게 감춰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이 사람에게 감춰졌다고 생각한다. 오늘 나의 교통을 들었는데, 너희는 아직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완전히 감춰졌다고 생각되느냐? 아직도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에게는 감춰졌다고 생각되느냐?

창세 이래,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은 함께했으며, 사람에게 감춰진 적이 없고, 전부 공개되었고 명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시간의 추이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졌으며, 사람이 점점 더 심하게 타락함에 따라 사람과 하나님의 거리도 점차 멀어졌다. 서서히, 사람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과 관련된 ‘소식’을 전부 다 잃게 되었다. 나아가, 사람은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게 되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으며,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사람은 늘 하나님을 피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멀어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사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간 것도 아니다. 자기가 간직한 채, 하나님에게 드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에게 보여 드리지도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저의 마음을 감찰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께서 아십니다.’라고 늘 기도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 서원을 어기면 벌을 받겠다고 맹세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비록 하나님에게 자신의 마음을 감찰하라고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지배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앞날의 운명과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에게 어떤 맹세를 하고 다짐을 했든지 간에, 하나님이 보기에 너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다. 너는 하나님이 너의 마음을 살피는 것만 허락했지, 하나님이 너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허락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내놓지도 않았으며,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하고는 각종 간사한 속셈은 다 감춘 것이다. 너는 자신의 의도와 타산, 계획을 전부 숨기고, 앞날의 운명을 하나님이 빼앗아 갈까 두려워 자기 손안에 꼭 쥐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는 하나님이라 사람이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볼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았으며, 사람은 마음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하나님은 단지 살펴볼 권리만 있지 다스릴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주관적인 의식 안에,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길 생각이나 계획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폐쇄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마음을 감추고, 감언이설로 허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신임을 사취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실된 모습은 감추어 하나님이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이 보지 못하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고, 자신이 간수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일을 생각하든 다 자신이 계획하고 타산하며 결정하고 싶은 것이지 하나님의 ‘참여’와 간섭이 필요치 않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섭리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분부나 당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대할 때는, 자신의 속셈과 이익, 그리고 그 당시의 자신의 상태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늘 자신의 지식과 식견을 바탕으로, 자신의 머리로 자기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며, 하나님이 간섭하고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본 사람의 마음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류뿐이었다. 즉, 모든 생물 가운데서,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인류밖에 없다. 사람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며, 언어가 있고 생각과 자유의지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맡겨 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바람을 모두 사람에게 걸었다. 그는 사람을 그와 동심합의하고 그와 동행할 수 있는 동반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경영을 시작해서부터,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 마음을 정결케 하고 채워 주어, 하나님이 흡족해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를 줄곧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 과연 그러한 사람이 있느냐? 즉, 성경에 마음을 하나님에게 드린 인물이 있느냐? 지금 시대 이전에는 그런 선례가 있었느냐? 오늘 성경의 기록을 좇아 계속 보도록 하자. 다음의 인물 ― 욥 ― 이 행한 모든 것이 오늘 우리가 나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다’라는 이 주제와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욥은 하나님이 흡족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인지 살펴보자.

욥이라는 사람이 너희 이미지 속에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느냐?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욥에 대한 평가이다. 만약 너희가 자기 말로 욥을 평가한다면, 욥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혹자는 욥은 좋은 사람이고 이지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며, 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는 자라고 한다. 또 혹자는 욥이 인성이 좋은 의인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모두 욥의 믿음을 보았다. 너희는 마음으로 욥의 믿음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매우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욥이 도대체 어떤 것들을 갖췄기에 하나님께 그토록 열납되었는지 보자. 계속해서 성경 말씀을 보자.

(3) 욥

1. 성경과 하나님이 욥을 평가한 말씀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여기 몇 구절에서 너희가 발견한 핵심은 어떤 것이냐? 이 짧은 세 구절은 모두 욥과 관련된 것이다. 내용은 비록 짧지만, 욥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욥의 일상 속의 행위와 그가 보여 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라 근거가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세 구절 성경 말씀은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든(욥 1:1),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든(욥 1:8), 다 욥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한 모든 것들로(욥 1:5) 말미암아 생긴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우선 첫 번째 구절을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욥을 평가한 첫 번째 말이다. 이것은 <욥기> 저자의 욥에 대한 평가로서, 물론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평가는 이렇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다음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이 두 평가 중 하나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두 평가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평가이다. 이는 욥의 행위와 모습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칭찬까지 얻었음을 말해 준다. 즉, 욥은 사람 앞에서의 행동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행동이 일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언제나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일을 해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그는 땅에서 유일하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인 것이다.

욥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

우리는 이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보자. 위와 아래 이 두 단락을 제외하고, 1장 5절을 보자.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한 가지 사례이다. 이 사례는 평소 생활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지와 관련이 있다. 욥의 두드러진 모습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늘 이렇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잔치를 열 때,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면 욥은 이 일에서 어떻게 행동했느냐? 원문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욥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결코 외부적인 행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일상생활 속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본인이 악한 일을 멀리할 뿐만 아니라, 늘 아들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욥이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매우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도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 욥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진실성은 확실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은 어쩌다가 한 번씩 그런 것이냐, 아니면 항상 그렇게 했느냐? 원문 마지막 구절에서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욥이 가끔씩이나 혹은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을 때나 들여다본 것이 아니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죄를 자백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욥은 항상 아들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항상’은 일조일석이나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은 일시적인 것도, 단지 인식상에만 머문 것도, 그저 입으로만 떠든 것도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 욥의 마음을 주도하고 그의 행동을 지배했으며, 욥의 삶의 근본으로 마음에 자리 잡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항상 두려워했으며, 또한 자신의 자녀들도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걱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길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 주고 있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하는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걱정이 있고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로 가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녀들을 위해 걱정하며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욥의 일상생활에서는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바로 이런 정상적인 행동들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욥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실제로 살았음을 입증한 것이다.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 말로 욥이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행동을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이다. 욥이 항상 그렇게 행함으로, 그의 행동과 마음이 늘 하나님 앞에 있지 않았느냐? 다른 말로, 하나님은 항상 그의 마음과 행동을 열납하지 않았느냐? 즉, 욥은 어떤 상황과 배경에서 항상 그렇게 했느냐? 혹자는 하나님이 항상 그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혹자는 욥이 악에서 멀리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었기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욥이 자신의 재산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거역해서 재산을 잃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견해들은 다 사실일까? 확실히 아니다. 하나님이 욥을 열납한 부분과 욥에게서 가장 귀하게 여겨진 부분은 그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는 것 때문만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욥이 사탄에게 넘겨져 시험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보인 행동과 사람 앞에서 보인 행동, 그리고 사탄 앞에서 보인 행동 때문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바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이 증거들을 통해, 우리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자.

2. 사탄이 처음으로 욥을 시험하다(가축은 약탈당하고, 자녀는 화를 입다.)

1) 하나님의 말씀

(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2) 사탄의 대답

(욥 1:9~11)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은

욥의 믿음을 완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욥기> 1장 8절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였느냐?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욥에 대해 평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과 사탄의 이 대화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서 욥을 시험하기로 뜻을 정했다. 바로 욥을 사탄에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한편으로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과 평가가 오차 없이 정확함을 실증하며, 욥의 간증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수치를 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직접적으로 사탄에게 질문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의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즉, 사탄이 곳곳을 떠돌며 늘 하나님의 종 욥을 감시하고, 늘 시험하고 공격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욥을 무너뜨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이 굳게 서지 못하는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탄은 어떻게든 욥을 해할 기회를 노리며, 욥이 하나님을 배신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품에서 욥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마음을 감찰하므로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보았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질문하는 방식으로 사탄에게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난 자여서, 절대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따를 리가 없음을 알려 준 것이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듣고 사탄은 더 화가 났으며 그럴수록 욥을 빼앗아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해졌다. 왜냐하면 사탄은 사람이 ‘순전하고 정직할’ 수 있음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은 순전하고 정직한 자를 증오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욥기> 1장 9절에서 11절에 사탄이 여호와에게 대답하여 말한 것과 같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악독한 본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사탄이 이미 오래전부터 욥을 해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 하나님은 사탄하게 다시 한 번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난’ 자라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사탄이 순순히 따르도록 ― 욥을 공격하고 시험하려던 본래의 진면목을 드러내도록 ― 하고자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의식적으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탄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인해, 증오하고 분노하여 욥을 공격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욥의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사탄이 철저히 수치를 당하고 실패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더 이상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점을 의심하지 못하고 참소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온 시련과 사탄으로부터 온 시험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시련을 감당할 수 있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는 욥이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사탄은 허락을 받고 욥을 시험하였다. 이것이 사탄의 첫 번째 공격이었다. 첫 번째 공격의 목표는 욥의 재산이었다.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욥을 참소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소유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한 의도이다. 다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한 가지 요구가 있었다. <욥기> 1장 12절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면서 욥을 사탄에게 넘긴 후에 제안한 조건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한 최저선이자, 사탄에게 욥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였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정직함과 순전함은 검증을 통과할 수 있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에게 범위를 제한하였다. 단지 욥의 재산만 빼앗아 갈 뿐, 그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때, 하나님은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맡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탄이 욥을 어떻게 시험하든, 어떤 방식을 쓰든 상관없지만, 욥 본인을 해치는 것은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즉,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관장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지, 사탄은 그런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이 말씀을 마친 후에, 사탄은 곧바로 가서 각종 수단을 다 동원해 욥을 시험하였다. 곧 욥은 가득하던 소와 양을 잃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준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의 시련은 이렇게 욥에게 임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욥이 받았던 시험의 유래를 알고 있지만, 그 ‘당사자’인 욥은 그 일을 알고 있었느냐? 욥은 평범한 사람으로, 그의 배후에 발생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단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전하고 정직해서, 하나님의 시련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이다. 그는 영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으며, 그 시련의 배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욥은 어떤 일이 임하더라도, 항상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욥이 이 일을 대하는 태도와 반응은 하나님 쪽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았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았을까?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을 보았다. 시험을 받기 전부터 시험을 받기까지, 욥의 마음은 줄곧 하나님에게 열려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약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도 등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흡족해했던 부분이다. 계속해서 욥이 어떤 시험들을 받았는지, 또 시련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자.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 보자.

3) 욥의 반응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발적으로 돌려드린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이 말씀이 끝나고 사탄은 물러갔다. 곧바로 욥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먼저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당했다. 이어서 양떼들과 종들이 불에 타 죽었다. 그 후에 낙타를 약탈당하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녀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일련의 공격은 욥이 처음으로 시험에서 받은 고통이었다. 이 공격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욥의 재산과 자녀들만 타겟으로 삼았으며, 욥 본인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거액의 재산을 가진 엄청난 부자에서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은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없고, 정면으로 대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그의 비범한 일면을 보여 주었다. 성경에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고 난 후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우선, 욥은 놀라지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으며, 분노와 증오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이 모든 재앙이 결코 우연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이 아니며,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시련이 그에게 임한 것이고, 여호와가 그의 재산과 자녀를 거두어 간 것임을 그는 확신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욥의 마음은 매우 차분했으며, 정신도 매우 맑았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매우 이성적이고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닥친 재앙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 때와 다른 냉정함을 보여 주었다. 즉,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던 것이다.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가 벌거숭이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음을 의미하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그가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왔고, 지금 그에겐 아무것도 없으며, 갓난아기처럼 하나님께 돌려드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일을 대한 태도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에 대한 그의 믿음은 믿음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종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린 복에 감사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거두어 간 것에조차도 감사할 줄 알았으며, 더욱이 자신의 목숨을 포함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돌려드릴 줄 알았던 것이다.

욥이 보여 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은 인류의 모범이 된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람들이 갖춰야 할 인성의 최고봉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도 전혀 원망하는 바가 없었으며, 게다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자신의 육체를 당장 가져가더라도 그 어떤 원망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욥의 이러한 모든 반응은 그의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욥은 순수하고 정직하며 선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굳게 믿으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욥은 하나님의 인도와 만물을 통해 보게 된 하나님의 행사에 따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생각과 행실, 태도와 일 처리 원칙을 요구하고 규범화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욥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진실되고 실제적인 경외심을 갖게 된 것이다. 아울러, 악에서 떠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이 고수한 ‘순전함’의 유래인 것이다. 욥은 정직하고 단순하며 착한 인성을 갖췄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악에서 떠난 실제 경험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욥은 사탄의 이 같은 공격 속에서도 굳게 설 수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하나님께 만족할 만한 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시험에서 욥은 아주 ‘단순’하게 반응했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도 욥이 해냈던 그 ‘단순’한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욥이 보여 준 그 모습도 갖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지금 욥의 그 ‘단순’한 반응을 보며, 오늘날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표명한 ‘절대 순종, 죽기까지 충성’이라는 구호나 결심과 비교해 보면, 너희는 매우 부끄럽지 않으냐?

너는 성경에 기록된 욥의 집이 당한 이 모든 상황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이 있었으냐? 많은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매우 놀라지 않았으냐? 욥이 맞닥뜨린 시련은 ‘끔찍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으냐? 다시 말해서, 글로 묘사된 내용만 봐도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의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실제 현장은 어떠했겠느냐? 이로써 욥에게 임한 것은 ‘연습 훈련’이 아니라 ‘실제 총탄을 든 정규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임한 이 시련은 도대체 누가 직접 움직인 것이냐? 물론 사탄이 한 것이다. 사탄이 직접 한 것은 맞으나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떤 방식으로 욥을 시험하라고 말씀했느냐?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조건을 하나 제시했을 뿐이고, 욥에게 그런 시험이 임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욥이 닥친 시험을 통해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과 악독함, 그리고 사탄이 사람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로 볼 때, 이번 시험의 잔인함 정도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추한 몰골이 이때 낱낱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은 이러한 기회를 틈타, 하나님이 허락한 기회를 빌미로, 욥에게 가차 없이 미친 듯이 해를 가했다. 그 해치는 수단과 잔인함의 정도는 지금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수준이었으며, 지금 사람들이 전혀 견뎌 내지 못할 정도였다. 욥이 사탄의 시험을 당하며 그 시험 속에서 굳게 섰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욥이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켜 내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기 위해 사탄과 대결을 벌였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대결에서 욥은 가득했던 소와 양을 잃었고 모든 재산과 자녀까지 잃었다. 하지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버리지 않았다. 즉, 그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그의 재산과 자녀를 잃을지언정,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고, 그의 사람됨의 근본을 지키려고 하였다. 성경에는 욥이 재산을 잃는 전 과정과 욥의 반응과 태도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간단명료한 묘사에 욥이 그 시험에 아주 ‘수월’하게 직면했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실제 장면과 사탄의 악독한 본성을 결부시켜 보면, 그것은 이 몇 마디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거나 수월한 일이 아니다. 진짜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처참하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대하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을 대하는 잔인함과 증오의 정도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몸에 손대지 말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사탄은 분명 사정없이 욥을 사지로 몰았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 눈의 의인이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는 것은 사탄을 멀리하고 배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사정없이 모든 분노와 증오를 욥에게 쏟은 것이다. 이것으로 욥이 마음부터 육체까지, 외적인 것부터 마음속까지 받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당시의 장면을 볼 수 없고, 그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욥이 고통받았을 당시의 심정을 미미하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욥이 순전함을 지켜 낸 것으로

사탄은 수치를 당하고 황급히 도망갔다

욥이 이러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았으며, 또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면서 심정이 어땠을까? 당연히 몹시 마음 아팠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파서 자신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라고 허락한 것을 후회했을까? 답은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또한, 사탄에게 그것의 사악함과 비루함을 드러낼 기회를 준 것이다. 더욱이 욥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사탄,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궁극적으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틀림없이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느냐? 사실상, 욥이 사탄을 이긴 것이 아니냐? 여기에 욥이 한 가장 멋진 말이 있다. 그 말이 바로 욥이 사탄을 이겼다는 증거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이것은 욥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이다. 이어서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다. 욥에게서 나온 이런 말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며,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칭찬은 틀리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칭찬한 그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것이다. 바로 이처럼 평범한 말 한 마디에 사탄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수치를 당해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으며, 속수무책이 되었다. 욥의 이 한 마디에서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가 얼마나 놀랍고 위력이 있는지 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길이 마음속에 권세 잡고 있는 사람의 비범한 매력도 보게 되었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기 위해 발산되는 강력한 생명력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대결에서 사탄은 이렇게 패했다. 사탄은 이 사건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지만, 욥에 대해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으며, 사탄의 악독한 본성 역시 이로 인해 변하지 않았다. 사탄은 계속해서 욥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또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이어서 욥이 두 번째 시험을 당한 성경 구절을 보자.

3. 사탄이 다시 욥을 시험하다(온몸에 악창이 나다)

1) 하나님의 말씀

(욥 2: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6)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2) 사탄의 말

(욥 2:4~5)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3) 욥은 시련을 어떻게 대했는가

(욥 2:9~10)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 3: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욥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겼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사탄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시련에서 보여 준 욥의 반응과 모습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보았다. 이 평가는 욥이 사탄의 시험을 당하기 전의 평가와 똑같았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눈에 순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그의 가족을 지켜 주었으며, 그에게 복을 내린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 눈에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시험을 겪은 후에도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입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욥의 실제적인 행동에 하나님은 갈채를 보냈으며, 만점을 부여했다. 욥의 눈에는 모든 재산이든 자녀든 어느 하나 하나님을 버릴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 어떤 재산이나 자녀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이 처음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대한 애정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는 것을 보았다. 이번 시련이 욥에게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가 다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게 되는 경험을 한 것뿐이었다.

욥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의 마음을 씻는 진실된 체험이었으며, 그의 인생을 충실하게 하는 생명의 세례였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을 검증하는 한 차례의 풍성한 잔치였다. 이번의 시험으로 욥은 부자의 신분에서 무일푼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으며, 동시에 그는 사탄으로부터 해를 입었다. 욥은 자신이 무일푼이 되었다고 해서 사탄을 증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탄의 졸렬한 행위로 인해 사탄의 추함과 비열함을 보았으며, 사탄이 하나님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영원히 지키겠다고 더욱 굳게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다. 욥은 맹세했다. ‘재산, 자녀, 가족 같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며, 절대 사탄의 노예나 재산의 노예, 그 어떤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어떤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욥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시험의 다른 한 측면에서도 욥에게는 수확이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에게 준 시련에서도 얻은 바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의 인생에서 욥은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려 준 복을 받았다. 그러한 복은 욥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고, 더 자책감이 들게 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이와 같은 큰 복을 주어 참으로 많은 은혜를 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은 늘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울러,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랐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순종과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순종을 검증하고 그의 믿음을 더 정결케 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욥은 이번에 시련이 임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기회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며, 전혀 태만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욥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소원이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회가 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이 검증받을 수 있고, 아울러 정결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이로부터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욥은 이와 같은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이번 시련에서 더욱 순전해질 수 있었고, 이 시련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욥은 하나님이 내려 준 복과 은혜에 더욱 감사했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 찬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앙망하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더 간절히 사모했다. 이때의 욥이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을지라도, 욥의 경험과 체험을 놓고 봤을 때, 욥의 믿음과 인식은 엄청난 진보와 발전이 있게 되었다. 그의 믿음은 커졌고, 그의 순종은 목표에 도달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한층 더 깊어졌다. 비록 이번 시련으로 욥의 마음과 생명에 완전히 새로운 변화가 생겼을지라도, 욥은 이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욥은 이번 시련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고, 또 자신의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들을 성찰해 보았다. 아울러, 그는 묵묵히 기도하며 다음 시련을 기다렸다. 욥은 자신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하나님의 또 한 번의 시련을 통해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언행 하나하나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관찰하고 있다. 욥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귀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 다시 한 번 어김없이 다가왔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진정으로 느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질문을 하고 난 후, 사탄은 혼자 속으로 기뻐했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눈에 완전한 사람을 공격할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는 이 얼마나 얻기 힘든 기회인가! 사탄은 이 기회를 틈타 욥의 믿음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언제든지 욥을 자기 손에 넣고 함부로 우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신의 사악한 의도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악독한 본성은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런 진면모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탄의 대답 중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사탄의 이 말에서 사람은 자연히 사탄의 악독함에 대해 실질적인 인식과 생각을 갖게 된다. 사탄의 이런 황당무계한 논리를 듣고 난 후, 진리를 사랑하고 사악함을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을 증오할 것이다. 또한 사탄의 그릇된 논리에 염증과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욥을 위해 기도와 축원을 올릴 것이다. 정직한 자가 더 순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영원히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바랄 것이다. 또한, 욥의 의로운 행동이 영원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편달하고 격려하기를 바랄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사탄의 이러한 말 속에서 사탄의 악독한 속셈을 보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아주 흔쾌히 사탄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다만 사탄에게 또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사탄이 이번에는 손을 뻗어 욥의 뼈와 살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의 뜻은 욥의 육체를 사탄의 손에 붙이지만, 그의 생명은 유보해야 하며, 그의 생명을 앗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떠한 방식과 수단으로 욥을 대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사탄은 허둥지둥 욥의 앞에 이르러 손을 뻗어 그의 살가죽을 쳤으며, 그의 온몸에 악창이 나게 했다. 욥은 살가죽의 통증을 느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와 거룩함을 찬양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사탄은 더 길길이 날뛰었다. 사탄은 사람을 해치는 쾌감을 느꼈기 때문에 손을 뻗어 욥의 살을 악창으로 짓무르게 했다. 그 순간 욥은 피와 살에 너무나 큰 통증을 느꼈으며,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문질렀다. 마치 그러면 육체의 통증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곁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무릎 꿇고 엎드렸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고통을 살피시나이다. 당신께서 어이하여 사람의 나약함까지 염려해 주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욥이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에 사탄은 급하게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다. 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욥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살가죽이 뼈에서 벗겨지는 것 같았고, 또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화살이 심장을 뚫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죽는 것보다 못한 느낌이 들었다… 욥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극한에 달했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 통증을 덜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욥은 참고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지도 않았다. 욥은 사탄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또다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하지만 이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그의 앞에, 그의 뒤에, 그의 좌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아파할 때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그때는 얼굴을 가리고 숨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미는 고통받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욥은 눈물을 흘렸다. 욥은 몸의 통증은 억지로 참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너무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여리고 무지합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어찌하여 이처럼 염려하고 긍휼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치시고 오히려 당신이 고통스러워하시나이다.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어 당신께서 염려하고 마음에 두시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묵묵부답하며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사탄은 수를 다 썼어도 성과가 없자,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결코 이로 인해 끝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욥의 몸에서 나타낸 큰 능력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는 사탄의 퇴각으로 인해 끝나지 않았다. 더 멋진 장면은 각 인물의 출현에 따라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또 다른 모습은

범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이다

욥이 사탄의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을 때, 그의 아내가 가장 먼저 나서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사탄의 역할을 하며 욥을 공격했다. 성경 말씀은 이와 같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것은 사탄이 사람의 모습으로 한 말이었다. 이 말에는 공격과 참소의 의미를 띠고 있었고, 유혹과 시험과 훼방의 의미도 띠고 있었다. 사탄은 욥의 육체를 공격해도 소용이 없자, 직접 욥의 순전함을 공격하였다. 이를 통해, 욥이 그의 순전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게 하여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사탄은 또한 이러한 말을 빌려 욥을 유혹하고자 하였다. “만일 여호와의 이름을 버린다면, 그 모든 고통을 참지 않아도 되고, 그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니라.” 아내의 충고를 듣고, 욥은 이렇게 질책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이 말은 욥이 오랫동안 쌓아 온 인식이다. 다만 욥이 이 말을 인식한 것에 대한 진실성이 이때 입증되었을 뿐이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권고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당신의 하나님은 당신을 이렇게 대하는데 어찌해서 그를 버리지 않느냐? 당신이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렇게도 불공평한데 당신은 계속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받을지라고 말하다니,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데 왜 당신에게 화를 입게 하느냐? 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버려라. 다시는 그를 따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당신의 재앙은 사라지리라.’라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보고자 했던 욥의 증거가 또다시 나왔다. 이런 증거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며, 우리가 성경의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이러한 말들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보았다. 단지 하나님은 이번 기회에 욥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맞다는 것을 실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내의 그런 충고를 듣고도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말은 매우 무게감이 있지 않으냐? 여기에는 이 말이 매우 무게감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사실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칭찬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고 듣고 싶어 했던 말이며 보고 싶어 했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욥이 증거한 것 중의 정수에 해당한다. 여기서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욥의 귀함은 바로 그가 시험을 받고 온몸에 악창이 났을 때, 즉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아내와 가까운 사람들의 충고에도 여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있다. 바로 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시험이 닥쳐와도, 아무리 큰 환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설사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가장 크며,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욥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입술로 범죄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그의 마음과 입은 일치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 진실된 욥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욥을 귀하게 여겨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욥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오해

욥이 겪은 고통스러운 일은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직접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고통받은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욥은 그가 평소에 마음속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 평소의 행동 원칙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전부 드러냈다. 그것은 다 진실한 것이었다. 만일 욥에게 시험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을 주기 전에,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을 매우 위선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아주 많은 재산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만일 욥이 시련을 받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이 큰소리치기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그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임하면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버릴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아 하고,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으면 하며, 임할까 봐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차마 볼 수 없었던 그런 지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의 순전함을 지킬 수 있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의 그때의 반응에 대해서, 공리공론을 즐기며 글귀만 늘어놓기 좋아하는 자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지만 한 번도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은 욥이 지켜 낸 순전함에 의해 정죄받았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자들도 욥의 증거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과 그의 말을 두고, 혹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질투를 하며, 혹자는 의혹을 품는다. 심지어 무시하며 냉담한 태도로 욥의 증거에 대해 코웃음 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욥이 시련 속에서 받았던 고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욥이 했던 말도 들었고,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 그가 보여 준 인성의 ‘나약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나약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욥의 이른바 완전함 중의 불완전함인 동시에, 그 ‘나약함’이 ‘하나님 안중의 완전한 자’의 흠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완전한 자’는 ‘완벽한 사람’, 즉 흠집도 없고 오점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라면 나약하지 않고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아파하고 슬퍼하는 정서도 없고 증오도 없으며, 겉으로 보기에 격한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이 진정으로 완전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많은 행동들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대성통곡할 것이라는 사람의 상상과는 달랐다. 그의 이러한 ‘예상을 벗어난 행동’은 사람들에게 아주 냉정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도 혈육의 정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욥이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남긴 ‘나쁜 인상’이었다. 이어지는 욥의 일련의 행동들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겉옷을 찢는’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에게 불경하다고 느꼈으며, ‘머리털을 미는’ 행동을 보고는 욥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에게 대든다고 오해하였다. 욥이 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 말 말고는 사람들은 욥에게서 하나님이 칭찬한 그 어떤 의로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그저 이해되지 않아 하거나 오해하거나 의심하거나 정죄하거나 도리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욥에 대한 위와 같은 인상을 받은 상태에서, 욥의 의로움에 대해 한층 더 의구심을 품었다. 욥이 했던 것과 성경에 기록된 그의 행동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귀신도 울릴 만큼 큰 감동을 선사할 거라는 사람의 상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쾌거’를 이루기는커녕, 고작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던 것이다. 이 행동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또한 세상 사람들이 욥에 대한 의혹을 품게 하고, 심지어는 부정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다. 욥이 몸을 긁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맹세하는 모습도, 통곡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들은 욥에게서 다른 것은 보지 못하고 그의 나약한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욥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지라도, 그 말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거나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으며, 욥의 말 속에서 그의 의로움은 볼 수 없었다. 욥이 시련의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준 인상이 기본적으로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이면에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보지 못했다. 또한 욥의 마음에서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가 어떤 원칙으로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의 비굴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이 그저 빈말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 역시 그저 전설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겉으로 드러낸 ‘나약함’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인상을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했던 순전하고 정직한 자를 ‘다시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새롭게 이해’하기까지 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때, 내가 말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과 ‘새로운 이해’가 여기에서 입증되었다.

아무도 욥이 고통받은 정도를 상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욥은 ‘대역무도’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몸의 고통을 줄여 보고자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 아무도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너희가 보기에, 이 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이 있느냐? 이 말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뜻이 있느냐? 나는 너희 대부분이 욥의 이 말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안다.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면 그 어떤 나약함을 보여서도 안 되고 슬퍼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탄의 그 어떤 공격에도 직면해야 하고, 심지어 웃으면서 사탄의 시험을 마주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사탄이 욥의 육체에 가한 그 어떤 고통에 대해서도 욥은 마땅히 아무런 반응도 없어야 하고, 자신이 느꼈던 그 어떤 것도 표현하지 말아야 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더 강력한 시련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강직한 자가 마땅히 보여 주고 갖춰야 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그저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뜻은 더욱 없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진짜로 행하기는 아주 어려운 것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욥과 같은 시험을 받아 본 자가 없을뿐더러, 욥과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자도 없기 때문이다. 왜 욥과 같은 시험을 견뎌 낼 자가 아무도 없겠느냐?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기에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욥이 해낸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누구도 욥처럼 이러한 고통이 임했을 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지금 욥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욥의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냐? 의인이 된 자, 이처럼 하나님을 증거한 자, 사탄으로 하여금 머리를 감싸고 도망쳐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하게 한 자를 칭찬해 준다고 안 될 게 뭐가 있느냐? 설마 너희의 요구 기준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것이냐? 너희에게 시련이 닥쳤을 때, 욥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도 칭찬했는데, 너희가 무슨 이견이 있는 것이냐?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은 외관을 본다고 나는 늘 말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살핌으로 사람의 본질을 아는 반면,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을 정의한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때, 그 행동은 욥의 세 명의 친구를 포함해서 모든 영적 인물들을 놀라 어리둥절하게 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므로, 마땅히 생일을 포함해서 생명과 육체를 준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저주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런 깨달음은 신성불가침이자, 언제라도 바꿀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런데 욥이 그 ‘관례를 위반’하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금기를 깬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해와 동정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도 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의로움’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그들이 욥은 하나님이 베푼 은총으로 말미암아 ‘방종’해졌고, 그토록 경거망동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준 축복과 보살핌에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이 태어난 그날이 멸망하기를 저주하다니,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이 사람들에게 욥을 정죄할 수 있는 증거를 제공한 셈이다. 그러나 이때 욥의 진짜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또 욥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느냐? 그 속사정과 이유는 하나님만이 알고 있고, 또한 욥 자신만이 알고 있다.

사탄이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을 때, 욥은 마수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벗어날 수도, 저항할 힘도 없었으며, 그의 몸과 영혼은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 ‘극한의 고통’을 통해, 욥은 육체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미소함, 무력감과 유약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욥은 또 인류를 염려하고 보살피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다. 마수에 걸려든 욥은 평범한 육체를 가진 사람은 그렇게도 무력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을 때, 그는 마치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숨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사탄의 손에 맡긴 한편, 욥 때문에 눈물 흘리고 마음 아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욥의 상처로 말미암아 괴로워했다… 욥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고, 또한 미어지는 하나님의 심정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때의 욥은 육체 껍데기를 벗어나 더 이상 육체로 인한 고통을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참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은’ 것으로 인해 오는 고통까지도 참아 내야 했다. 하나는 육체로부터 오고, 하나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이중의 아픔은 욥에게 가슴이 찢어지고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참으로 속절없고 무기력한,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강렬해졌으며, 사탄을 증오하는 마음 역시 그에 따라 더 심해졌다. 이때의 욥은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지언정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심히 증오하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도, 자기가 태어난 날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싫어졌다. 욥은 자신의 생일과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모든 것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욥 3:3~4). 욥의 말 속에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또한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 때문에 자책하고 죄스러워하는 심정도 묻어났다.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이 두 마디는 그 당시 욥의 심정을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완전하게 보여 준 것이다. 이때, 또 한편으로는 욥이 원했던 대로 욥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진정으로 승화되었다. 물론 이 ‘승화’는 바로 하나님이 예정했던 결과인 것이다.

욥은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 눈의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

욥이 처음에 시련을 당했을 때,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 냈고, 재산과 자녀 그리고 몸 이외의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이겨 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이 그의 것을 거두어 간 것에도 순종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감사와 찬양까지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이 욥이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보여 준 것이며, 또한 욥이 하나님의 첫 번째 시련 속에서 굳게 증거이다. 두 번째의 시련 속에서, 사탄은 손을 뻗어 욥에게 갖은 해를 가했다. 욥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을지라도, 욥의 증거는 오히려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는 그의 강인함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또 한 번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의 반응과 증거 역시 또 한 번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았고, 열납되었다. 이번 시험에서 욥은 자신의 실제 행동을 통해 사탄에게 선포했다. 육체의 고통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순종을 바꿀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심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알린 것이다. 또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욥의 의연함을 본 사탄은 겁이 났다. 욥의 믿음으로 사탄은 두렵고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사탄과 사생결단하겠다는 욥의 기세를 보고 사탄은 침통함을 느꼈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탄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탄은 욥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것은 욥이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하나님에게 속한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욥은 이 두 차례의 시련 속에서 굳게 섰으며,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드러났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의 생존 법칙의 범위 역시 확장될 수 있었다. 이 두 번의 시련을 겪고 나서, 욥의 인생에는 더욱 풍부한 경험이 생겼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더 성숙해지고 원숙해졌으며, 더 강인해지고 더 믿음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자신이 지키고 있는 순전함의 정확성과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련으로 욥은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을 깊이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부터 욥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하나님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더 추가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련은 욥을 천 리 밖으로 몰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욥의 마음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욥은 육체의 고통이 극한에 달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끼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게 되었다. 그런 모습은 욥이 일찍이 계획했던 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욥의 그 ‘자연스러운 발현’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욥은 자신을 미워함으로 인한 것이고, 차마 하나님까지 고통받게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헤아림과 사랑은 자기 자신을 잊는 경지에까지 달했던 것이다. 이때의 욥은 자신이 오랜 세월 하나님을 우러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마음을 모두 헤아리고 사랑하는 경지로 승화시킨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순종과 경외심을 헤아림과 사랑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조금이라도 상처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용납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에게 어떠한 슬픔이나 상심, 심지어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눈에는 욥이 여전히 변함없는 욥이었을지라도, 그의 믿음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에게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이때의 욥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그 완전함에 이른 것이며, 하나님 눈의 명실공히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욥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사탄을 이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섰으며, 자신을 더 온전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생명 가치를 승화시키고 초탈하게 되었다. 또한, 더 이상 사탄에게 공격받지 않고 시험당하지 않는 사람의 첫 사례가 되었다. 욥은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에게 참소당하고 시험당했으며,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의 손에 넘겨졌고, 또한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패배시켰으며, 굳게 섰다. 이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에게 넘겨지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빛 속에서 살며, 사탄의 감시와 상해를 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 눈의 진정한 사람이 되었으며, 자유로워졌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욥이 시련을 겪은 전 과정을 이해하고 난 후, 대다수의 사람들은 욥과 관련된 정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 믿는다. 특히, 욥이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 그 ‘비결’에 더욱 관심을 보일 것이다. 오늘 여기서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자.

욥의 일상생활에서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음을 보았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순전하고 정직하다’를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욥이 아주 완벽하고 강직하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과 이해이다. 욥이라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실생활을 떠나서는 안 된다. 단지 문자적으로, 책에서, 그리고 도리상만으로는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다. 먼저 욥의 일상생활이 어땠는지 살펴보자. 즉 그의 삶에서 보편적인 모습은 어땠는지 보자. 이것들을 통해 욥의 생활 원칙과 인생 목표를 이해하고, 또 욥의 인성과 품격, 그가 추구한 것이 어땠는지 알아보자. 성경의 <욥기> 1장 3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도록 하자.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 구절은 그 당시 욥의 지위와 신분이 아주 높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인 이유가 많은 재산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기 때문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어쨌든, 욥의 지위, 신분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사람에게 주는 욥에 대한 첫인상이다. 즉, 욥은 순전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고, 엄청난 재산과 고귀한 지위를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환경과 조건을 가진 정상인에게 있어, 그가 평소에 먹고 마시는 것, 생활의 질, 각 방면의 개인 생활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다음 성경 구절들을 계속 봐야 한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4~5). 이 구절에서는 두 가지 일을 기록하였다. 첫 번째는 욥의 자녀들이 자주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일은 욥이 항상 번제를 드렸는데, 그는 항상 자녀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두 부류 사람의 서로 다른 생활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는 욥의 자녀들은 생활이 풍족하여 늘 잔치를 베풀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으며, 풍부한 물질이 가져다주는 높은 생활의 질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나날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늘 죄를 짓고, 늘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를 성결케 하지도 않고, 이를 위해 번제도 드리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욥의 자녀들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중점은 이러한 일들이 임했을 때, 욥은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성경 구절에 기록되어 있는 또 한 가지 일이다. 이 일은 욥이라는 사람의 인성과 본질, 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던 것이다. 즉, 욥은 잔치를 베풀지도, 자녀들과 함께 즐기지도 않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부유하고 각종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호사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부유하다고 해서 질 높은 생활 환경 속에 빠져 살지 않았고, 육체적 쾌락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번제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욱이 부유하다고 해서 마음에서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이 없었다. 욥의 삶은 단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준 복으로 인해 탐욕스러워지거나 향락에 빠지지 않았고, 생활의 품격을 중시하고, 일을 함에 겸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사람됨은 허세를 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각했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는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 이것은 욥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의 마음 속에서 풍부한 물자가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도 대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일상에서 행한 것, 자녀들을 위한 것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든,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여호와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단지 입술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실행에 옮겨졌으며,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드러났다. 욥의 이와 같은 실제 모습에서 우리는 욥의 정직함을 보았으며, 정의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의 본질을 보았다. 그가 항상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했다’는 것은 자녀들의 행동을 찬성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싫어하고 그들을 정죄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녀들의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게 하였던 것이다. 욥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욥의 인성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욥은 항상 죄를 일삼으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그들을 멀리하고 피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혈연관계에 연연해 사람됨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정에 이끌려 그들의 죄에 관용을 베푸는 일도 없었다. 대신, 그들이 죄를 인정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권고하고, 그들이 향락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욥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과 분리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증오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좋아하고, 악행을 저지르거나 하나님께 죄를 짓는 자들을 혐오했다. 그의 애증은 그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드러난다. 이것이 곧 하나님 눈에 보인 욥의 정직함이었다. 물론 이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할, 욥이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보인 진정한 인성과 삶의 모습이다.

시련 속에서 보여진 욥의 인성

(욥이 시련 속에서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을 알아보다)

이상 우리가 말한 것은 다 욥이 시험을 당하기 전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난 인성의 여러 측면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면에서 보여지는 욥의 모습을 통해, 욥의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악에서 떠나는 것에 대해 일차적인 인식과 이해가 있고, 물론 일차적인 인정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일차적’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과 품격, 욥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추구하는 정도에 대해 아직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다수의 사람은 성경에서 알게 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욥이 말한 이 두 구절을 통해 욥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조금 갖게 된 것 외에는 깊이 있는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일 때, 그의 인성이 어떻게 보여졌는지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래야만 모든 사람에게 욥의 진정한 인성이 완전하게 보여질 수 있다.

욥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들이 목숨을 잃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이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하였다. 욥이 이 소식을 듣고 난 후, 놀라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소식을 알리러 온 종을 꾸짖지도 않았다. 더욱이 현장에 가서 조사도 하지 않았고, 어떤 상황인지 사실 확인을 해서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잃은 재산을 아까워하거나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자녀와 가족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욥의 이러한 행동은 일반 사람들의 행동과 달랐다. 그의 이 행동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으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욥이 ‘모질다’는 비난을 사게 되었다.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없게 될 때, 일반 사람들은 괴로움이나 절망감을 나타낼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재산은 사람이 일생 동안 흘린 피땀이며, 그것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희망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재산이 사라졌다는 것은 사람의 피땀 흘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의미이고, 희망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미래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재산을 대하는 태도이고, 재산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이다. 또한 사람이 재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의 사람은 욥이 재산을 대하는 이러한 냉담한 태도에 대해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오늘 욥의 마음을 해석함으로써,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혹을 풀어가도록 하자.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욥에게 풍부한 재산을 내려 주었으니, 욥은 재산을 잃고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는 하나님이 준 재산을 제대로 간수도 못했고, 보살피지도 못했으며, 지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산이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욥의 첫 번째 반응은 마땅히 현장으로 달려가 각종 물건을 철저히 점검했어야 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 죄를 인정함으로써,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자연히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욥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은 다 본인이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복받은 것을 자본으로 삼지 않았으며, 자기가 지켜야 할 길을 마음과 힘을 다해 지키는 것을 생존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더 많은 복을 탐하거나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재산을 대한 태도이다. 욥은 복받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았으며, 복이 없거나 복을 잃었다고 걱정하거나 상심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으로 말미암아 너무 기뻐하거나 모든 것을 망각하는 일이 없었고, 항상 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길을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일도 없었다. 욥이 재산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사람들은 욥이 가진 참된 인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질생활에 대한 요구 기준이 아주 낮았다. 둘째, 욥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거두어 갈까 걱정한 적도 없고 두려워한 적도 없다. 이것은 그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태도이다. 즉,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든 혹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든 말든, 어떤 요구도 원망도 없었다. 그는 이유도 묻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기만을 구했다. 셋째, 욥은 본인의 재산은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생각했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이다. 즉, 욥의 확신을 가리킨다. 욥에 대한 이상의 세 가지 개괄을 통해, 욥의 인성과 그가 평소에 진실로 추구한 것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욥이 재산을 잃었을 때, 그처럼 냉정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욥의 그러한 인성과 그의 추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일상생활에서 추구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량과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욥이 한 이 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그가 갑작스러운 생각이 떠올라 만들어 낸 말도 아니다. 이는 그가 오랜 인생의 경험 가운데서 보고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만 하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원망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욥의 순종은 아주 실제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만 믿고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욥은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으냐?

욥의 이성

욥은 실제 체험과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 덕분에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이성적인 선택은 그가 평소에 추구했던 바와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했기 때문에 만물이 다 여호와의 손에서 관장된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계획에 순종하기를 원했고, 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진실하게 경외할 수 있었으며, 그 경외심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진 것이다. 그의 온전함은 그를 지혜롭게 만들었으며, 그를 가장 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성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문자적 해석은 바로 이성과 생각이 논리에 맞아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적절한 언행과 판단, 적절한 규범을 가진 도덕적 기준을 말한다. 그러나 욥의 ‘이성적’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될 말이 아니다. 여기서 욥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인성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행동과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그의 주재에 순종할 수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욥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통해,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을 더욱 정확하게 구분하고 판단하며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을 더욱 정확하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언행과 일 처리 원칙과 방침은 맹목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았고, 매우 규범적이고 명확하며 아주 구체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았고, 각종 복잡한 사건의 관계들을 어떻게 균형 잡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았다.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길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도 알았으며,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줄 때와 거두어 갈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이성을 갖춤으로써,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은 육체의 극심한 고통이 닥치고, 가족과 친구들의 권고가 임하고,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실제적인 행동으로 또다시 자신의 진실된 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준 것이다.

욥의 진정한 모습: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음

욥기 2장 7~8을 보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것은 욥이 몸에 악창이 난 후,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때,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통증을 견디고 있었으며, 그를 치료해 주는 이가 없었고, 그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이도 없었다. 그는 혼자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이 난 상처를 긁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욥이 고통받던 기간 중 한 장면에 불과해 욥의 인성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욥은 이 기간에 그 어떤 말로도 이때의 심정과 그의 생각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행동과 반응은 여전히 그의 인성을 진정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의 1장의 기록에서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라는 구절을 보았다. 그리고 2장의 이 구절에서는 이 동방 사람 중 가장 큰 자가 뜻밖에도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앞뒤의 두 가지 묘사는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으냐? 이 대비를 통해, 우리는 욥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욥은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동이 자기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하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후광을 즐기지도 않았다. 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만 신경 썼을 뿐이다. 욥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욥의 본질이었다.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다.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았다.

애증이 분명한 욥

욥이 아내와 나눈 대화에서 욥의 또 다른 면의 인성이 모두에게 보여졌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9~10). 욥의 아내는 욥이 그런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욥에게 충고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호의’는 욥의 칭찬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욥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종을 부인하는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여지껏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은 어떻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고, 그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욥은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한 것이다. 욥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는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고, 책망과 질책도 담겨 있었다. 이것은 바로 애증이 분명한 욥의 인성의 자연스런 발현이자, 그의 정직한 인성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사악한 풍조와 추세를 증오했으며, 그릇된 사설과 황당무계하고 터무니 없는 말들을 증오하고 정죄하고 밀어냈다. 또한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버림 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정확한 원칙과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욥의 선함과 성실함

욥의 다양한 행동에서 욥의 인성을 볼 수 있다면,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에서는 또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다음으로 내가 교통할 주제이다.

앞에서 나는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원인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만일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도 없고, 아주 냉혹하고 무정하며, 인성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겠느냐? 욥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증오했겠느냐? 다시 말해서, 욥은 마음이 강퍅하고 인성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으로 인해, 마음 아파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한 것 때문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답이다. 욥은 마음씨가 착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은 마음이 착했기에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을 느끼고 더 많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고통을 느꼈기에 자신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한 것이며, 그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모든 행동은 사람이 배울 만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만큼은 사람들에게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들거나 다양한 평가를 내놓게 만들었다. 사실상, 욥의 이 행동이야말로 욥의 인성과 본질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의 인성과 본질은 숨김이 없고 과장된 것이 없었으며, 사람에 의해 가공된 것도 없었다. 그의 이 행동들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의 선함과 진실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넘치는 샘물같이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욥이란 사람의 면면을 이해하고 난 후에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과 본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이 ‘순전하고 정직하다’라고 한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고 진일보한 실제적인 이해와 깨달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한 이해와 깨달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것과 하나님 사역의 취지와의 관계

비록 이때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고, 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인정했을지라도, 사람들은 욥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더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인성과 그가 추구하는 바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욥이 이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이처럼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왜 하나님은 그를 사탄에게 넘겨서 그런 고통을 받게 하셨을까?’ 이러한 질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의문은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그 필요성이 있으며, 또한 다 평범하지 않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에게서 하는 일들은 다 그의 경영과 관련되며, 인류의 구원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욥에게 행한 일도 예외는 아니다. 욥이 하나님 눈의 순전하고 정직한 자임에도 말이다. 즉,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어떤 것을 대가로 삼든지, 무엇을 목표로 하든지 간에, 그가 하는 사역의 취지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취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요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이 보기에 긍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사물을 다 하나님의 절차에 따라 사람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명확하게 알며, 하나님의 주재와 계획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의 한 취지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탄은 하나님 사역의 부각물이자 기여품이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사탄에게 넘겨진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사탄의 시험과 공격 가운데서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과 비열함을 보게 함으로써, 사탄을 증오하고 부정적인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점차 사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참소, 교란과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에 기대어 사탄의 공격과 참소를 완전히 이길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완전히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되는 것이다. 사람이 구출됐다는 것은 사탄이 패했다는 선언이며, 그 사람은 더 이상 사탄의 먹이도, 사탄이 삼키려고 하는 대상도 아니라 사탄이 포기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직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으며, 사탄과 철저하게 결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에게 수치를 주고, 사탄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또한 사탄에게 완전한 실패를 안겨 준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사탄을 물리쳐, 사탄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확실히 손을 놓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종 목표인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탄으로부터 오는 크고 작은 시험과 공격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완전히 사탄을 이기고 거기에서 나오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게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시련과 사탄의 무수한 시험과 공격을 겪은 사람이다. 하나님에게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요구를 아는 자요, 하나님의 주재와 계획에 순종하고 사탄의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포기하지 않은 자이다. 하나님에게 구원받은 자는 정직하고, 선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의 속박, 염탐, 참소, 상해 등이 없으며,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얻은 자이고, 완전히 해방받은 자이다. 욥이 바로 이러한 자유인이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의미이기도 하다.

욥은 사탄의 상해를 겪었을지라도 영원히 자유로운 해방을 얻었다. 그는 영원히 사탄에 의해 타락하지 않고 상해와 참소를 받지 않으며, 어떤 우려도 걱정도 근심도 없이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복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 권리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고, 아무도 파괴할 수 없으며, 아무도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권리는 욥이 자신의 믿음과 의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바꾼 것이다. 그는 목숨을 댓가로 그가 땅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삶을 얻었으며, 진정한 피조물로서 땅에서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당연하게 창조주를 경배할 자격과 권리를 얻은 것이다. 이 역시 욥이 시험을 겪은 후의 가장 큰 성과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사람의 삶은 항상 사탄에 의해 방해를 받으며, 심지어 사탄에 의해 통제받고 있다. 즉,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는 사탄에 의해 구금된 자이고, 자유가 없는 자이며,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과 권리가 없는 자이며, 사탄에 의해 쫓기고 심한 공격을 받는 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을 논할 수도 없고, 정상적인 생존 자격은 물론이고 존엄성은 더더욱 말할 수도 없다.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과 경외심을 무기로 삼아 사탄과 싸우며 결사전을 벌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탄이 너를 보면 도망가고 너를 보면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완벽하게 사탄을 물리쳐야 한다. 그래야 사탄은 너에 대한 공격과 참소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다. 그때 너는 구원받아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네가 사탄과 철저히 결별할 결심만 하고,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유리한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면, 너는 여전히 아주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면, 너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괴롭힘으로 인해,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굳게 서지도 못하고,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요원해지는 것이다. 최종에, 즉 하나님의 사역이 마지막을 고하게 될 때에도 네가 여전히 사탄에게 꽉 잡혀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기회도 희망도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다.

하나님의 검증을 받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전인(全人)을 하나님께 드리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장기적으로 공급해 주고 돌봐 주는 사역을 하는 기간에, 하나님은 그의 뜻과 요구를 모두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또한,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믿음의 분량을 갖추게 하고자 함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기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진리를 얻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한 진리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사탄과 싸울 수 있는 예리한 무기이다. 사람은 이러한 장비를 갖췄으면, 하나님의 검증과 대면해야 한다. 하나님의 검증은 여러 종류의 방식이 있고,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모든 경로와 방식은 다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협력’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를 준 다음에는 사람을 사탄 손에 넘겨, 사탄으로 하여금 그 사람의 분량을 ‘검증’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탄이 설치한 진영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포위 공격에서 살아 나오게 되면 이 검증을 통과한 것이다. 만일 사탄의 진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사탄에게 항복하게 되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어떤 부분을 검증하든지 간에, 검증의 기준은 바로 사람이 사탄의 공격하에서 굳게 설 수 있는지의 여부, 사탄의 올무 속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무기를 버리고 사탄에게 굴복하는지의 여부이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사람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지 여부에 있다. 사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는 사람이 독립적으로 하나님이 준 무기를 들고 사탄의 굴레를 이겨 내서, 사탄이 사람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접고 포기하게 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사탄이 사람에 대해 단념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 그 사람을 두고 싸우지 않고, 그 사람을 참소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더 이상 제멋대로 그 사람을 해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얻어진 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는 전 과정인 것이다.

욥의 증거가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와 계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완전히 얻는 전 과정을 이해하는 동시에, 사람은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목적과 의미도 이해하게 되었다. 욥이 받았던 고통에 대해, 사람은 더 이상 마음에 두고 있지 않으며, 욥이 받은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도 새로운 깨달음이 생겼다. 사람은 더 이상 자신에게 욥과 같은 시험이 올까 걱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이 주는 시련에 거역하고 저항하지 않게 되었다. 욥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욥이 사탄을 이긴 증거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도움과 격려가 되었다. 욥에게서 사람들은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에 의지하면 사탄을 완벽하게 이길 수 있다는 것도 보았다. 하나님의 주재와 계획에 순종하고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믿음만 있다면, 사탄에게 실패와 수치를 안겨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사람에게 목숨을 버릴지언정 굳게 서겠다는 결심과 의지만 있다면, 사탄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황급히 도망간다는 것을 보았다. 욥의 증거는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고를 주었다. 이 경고는 사람에게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사탄의 참소와 방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영원히 사탄의 공격과 상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일깨워 주고 있다. 욥의 증거는 또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계시를 주었다. 이 계시를 통해,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해야만 영원히 사탄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솔과 보호하에서 살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욥의 인성과 품격, 그가 인생에서 추구한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욥의 일생의 삶과 그가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욥의 증거에서 하나님이 위안을 받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욥은 사랑스러운 자라고 말하면, 너희는 아마도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내가 왜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너희가 욥과 같은 혹은 비슷한 시련을 겪게 될 때, 너희가 환난을 겪게 될 때,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해 만들어 놓은 시련을 겪게 될 때, 시험 속에서 사탄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치욕과 고통을 이겨 내게 될 때, 너는 내가 한 이 말들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너는 욥과 비교했을 때, 네 자신이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며, 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얼마나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욥이 말한 그 멋진 말들은 타락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욥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해내기 힘든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네가 해내기 어렵다고 느낄 때,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얼마나 걱정스러워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치른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것과 인류를 위해 바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교통했으니, 너희들은 욥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 마음속에 욥은 진정으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맞느냐?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마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욥이 했던 그런 일들은 사탄을 포함한 그 어떤 사람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들은 욥이 사탄을 이긴 가장 유력한 증거이다. 이 증거는 욥에게서 만들어진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얻은 첫 번째 증거이다. 그러므로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증거했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마음 역시 욥으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창세부터 욥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처음으로 무엇이 위안인지, 무엇이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것인지 진정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은 무엇이 진정으로 그를 증거하는 것인지를 보았고 또 그것을 얻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의 증거와 욥에 대한 다방면적인 설명을 듣고 난 후, 자신 앞에 펼쳐진 길에 대해 계획이 생겼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그동안 우려와 공포로 가득했던 많은 사람들이 점차 심신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안심하게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다음 몇 구절들도 욥에 관한 기록이다. 이어서 계속 보자.

4.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다

(욥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42:2~6)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너희는 이런 구절들에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보았느냐?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있느냐? 먼저 우리는 욥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천지 만물을 하나님이 주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보자. 다음 구절로 이상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이 구절로부터 욥은 전해지는 말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 후, 그는 삶 속에서,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무엇이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갔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지금의 사람들과 같지 않으냐?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말로, 욥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하시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요인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가 하나님을 따를지라도, 하나님은 한 번도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고, 그와 말을 나눠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하나님이 그와 얘기를 나눈 적도 없고, 그에게 어떤 분부를 한 적이 없었음에도, 욥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들려오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욥이 하나님을 따르게 된 원인과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든지, 어떻게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에게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다음의 이 구절을 읽어 보자.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11).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욥은 하나님이 그의 곁에 계시다는 것을 느꼈을 수도 있고,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 그의 앞을 지나가거나 혹은 일을 행하거나 혹은 사람을 인도한다고 상상은 했지만 전혀 알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주의하지 않을 때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 임했는지, 어디에 임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흔들린 적이 없다

다음 구절에서 욥이 또 말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이 기록을 보면, 욥의 경험 중에서 하나님은 시종일관 욥에게 보이지 않았고, 그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으며, 그에게 공개적으로 무슨 말씀을 한 적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늘 하나님이 그의 앞을 지나가거나 그의 우편에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의 곁에서 그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계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을 전혀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도, 욥은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할 수 없는 것이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지도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욥에게 진정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계속해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며, 아마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너는 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의로움은 하나님이 과장한 것이 아니라 진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그를 대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게 말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의연하게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키며,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게다가 하나님께 죄지을까 두려워 항상 번제를 드리며,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였다. 욥이 하나님을 본 적이 없음에도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이 사실로 볼 때, 욥이 얼마나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했는지, 욥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고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믿음을 잃거나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능력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는 만물 중에서 이미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고, 자신이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복과 은혜를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이 예전과 다름없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어떤 사람도 얻지 못한 성과, 곧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화복을 따지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된 욥의 이야기에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언급할 중점이다. 욥이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다. 그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했느냐? 바로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태도였다. 이 ‘찬송’에는 조건도 배경도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여기서 욥이 마음을 하나님에게 드려 하나님이 주관하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음속에 생각하고 결심하고 계획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숨김없이 다 열어 놓았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번도 하나님께 그를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 그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또한,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면 무언가 얻을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뭘 얻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던 이유는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세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가 복을 받거나 화를 당한 것으로 인해 그렇게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세는 변함없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이 화를 입는 것 역시 하나님의 주재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큰 능력과 권세로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계획한다. 사람에게 수시로 임하는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세의 발현이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지 간에,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욥이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다. 욥의 이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고, 그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그것을 중히 여겼으며, 욥의 그러한 인식을 귀하게 여기고, 그러한 마음도 귀하게 여겼다. 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 임하는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욥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바가 없었다. 욥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배치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대면하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욥이 생각하는 자신의 책임이자,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거나, 무엇을 분부하거나, 무엇을 가르쳐 주거나, 무엇을 알려 주는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말로 하자면, 그에게 그 어떤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깨우침이나 인도, 공급이 없는 상황하에서, 그가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고, 하나님을 그런 태도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욥의 그러한 행동은 아주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고,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는 말씀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심오한 이론만 떠들어 대며 큰소리치고 번제만 중시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도 없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도 않는 사람들보다는 욥의 마음이나 그의 사람됨이 하나님에겐 훨씬 소중했다. 욥은 마음이 순결하고 하나님에게 숨기지 않았고 그의 인성은 정직하고 선했으며, 또한 정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성을 갖추고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길을 좇아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권세와 큰 능력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에 순종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화복을 따지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관장되므로, 사람이 걱정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고 무지하며, 이성이 없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태도이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욥의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지금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론적 인식이 너희보다 더 많으냐? 하나님이 그 당시에 행한 사역과 말씀은 매우 적었으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욥이 그러한 성과를 이룬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 그러한 태도를 갖췄다는 것은 완전히 그의 인성과 그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인성과 그의 추구는 지금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하나님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이미 그에 대해 그러한 평가와 결론을 내렸는데, 하물며 지금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서 나타내는 행사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사역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심과 시련 속에서 굳게 선 증거는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보았고, 기뻐했으며, 칭찬했다. 또한, 사람들 역시 부러워했고, 경탄했으며, 더욱이 칭찬이 자자했다. 그의 일생은 위대하지 않고 평범했다.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평범한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그는 보통 사람이 얻지 못한 하나님의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또한, 보통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큰 능력과 하나님의 주재를 느끼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어떤 보통 사람보다 총명한 것도 아니고, 막강한 생명력을 지닌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성실함과 선함과 정직함, 그리고 공평과 공의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인성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었으며, 강한 의지와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이 행한 모든 평범치 않은 일들을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거룩함, 공의로움을 보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총과 보호를 보았으며,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존귀함과 권능을 보았다. 욥이 일반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속했으며, 그 마음은 창조주에게 끌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욥의 추구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추구했으며,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악에서 떠나는 자가 되고자 추구했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상황에서, 그것들을 갖추고 추구했던 것이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을 깨달았으며,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지혜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지만, 사람에게 복을 주고 사람에게서 거두어 가는 것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았다. 그가 지나온 세월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의 아주 평범한 일상은 그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결코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는 데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에 하나님의 행사는 만물의 운행 법칙 가운데 충만했으며, 하나님의 주재 역시 사람의 삶 속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행사의 무소부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평범한 날들 속에서, 삶에서 접하게 되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비범하고 오묘한 행사를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기묘한 지배를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음’과 ‘침묵’은 욥이 하나님의 행사를 체험하는 데 있어,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욥의 일생은 평범한 삶 속에서, 만물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또한 욥은 평범한 날들 속에서, 만물 속에서 침묵하고 계시지만 만물의 운행 법칙을 주재함으로써 전달하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욥과 같은 인성을 갖추고 욥처럼 추구하면, 욥과 같은 경험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욥처럼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욥에게 말씀하지 않았지만,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고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은 상황하에서, 사람은 만물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행사와 주재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세를 충분히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세로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욥같이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었다면,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이 논리적 추론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물의 법칙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욥만 가지고 있는 특허처럼 보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언급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욥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욥’이란 딱지가 붙어 있어, 그 일이 다른 사람과는 무관한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주 명확하다. 욥만이 성실하고 선하고 정직하고, 공평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과 품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마 너희도 깨달았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은 성실함과 선함과 정직함, 그리고 공평 공의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악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사지도 못하고, 시련에서 굳게 설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욥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사탄의 속박과 굴레에 묶여 있으며, 모두 사탄이 참소하고 공격하고 해치고 삼키려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들은 자유를 얻지 못한 자들이고, 사탄에 의해 구금된 죄수들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적이 되었는데,

어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욥과 같은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사람의 본성과 본질,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하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맞느냐? 악에서 떠난 사람이 맞느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못한 자들을 ‘하나님의 적’이라는 표현으로 개괄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하나님의 적’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실제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적’이라는 표현에는 본질적인 면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초심에 어떤 목적과 야심도 갖지 않고 어떤 저의도 없는 자가 누가 있느냐? 설사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이 존재함을 보았을지라도, 여전히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최종 목적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 체험 과정에서 늘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한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가정도 직업도 내려놓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주셨지? 그동안 내가 무슨 복을 받았는지 한번 계산해 보고 따져봐야겠어!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헌신과 노력을 들이며 많은 고난을 받았는데, 하나님은 그동안 내가 한 것에 대해 어떤 약속을 해 주실까? 하나님은 나의 선행을 기억해 주실까? 나의 결말은 도대체 어떨까? 복은 받을 수 있을까? …’ 모든 사람은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계산하고, 저의와 야심을 품고 또한 하나님과 거래할 마음을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뭘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상대로 계산하고, 자신의 결말을 두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논쟁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며 하나님께 구두 증거를 구걸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거래를 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려고만 한다. 심지어는 한 발 한 발 압박하며 한도 끝도 없이 욕심을 낸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동시에, 또 끊임없이 하나님과 논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련이 임하거나 어떤 환경에 처하면 늘 나약해지고 일을 태만히 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화수분이나 만물 상자로 삼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큰 채권자로 간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약속을 얻어 내는 것이 생득적 권리이자 책무라고 생각하고, 반면에,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며 사람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해야 할 책임이라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며,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이기도 하다. 사람의 본성과 본질로부터 사람의 주관적인 추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을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과는 아예 관련시킬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고,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이러한 상태를 볼 때, 사람의 본질은 뻔한 것이다. 이 본질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씨가 악독하고 음험하고 간사하며, 공평 공의를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으며, 게다가 비열하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닫고, 하나님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태껏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했으며, 사람의 경배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행하든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급하든지 간에, 사람은 봐도 못 본 척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사람은 마음을 시종 하나님에게 드리지 않고 자신이 주관하고 자신이 결정하려고 한다. 그 뜻인즉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섭리에 순종하고 싶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지금 사람들의 상태이다. 다시 욥의 경우를 보자. 우선 그가 하나님과 거래를 했느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면서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느냐? 그때 하나님이 누구에게라도 이후의 결말에 대해 말씀한 적이 있느냐? 그때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결말에 대한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욥은 그러한 배경하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양자의 차이가 너무 크다. 같은 레벨의 사람이 아니다. 욥이 비록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지라도, 그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그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속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한 번도 거래를 한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에게 그 어떤 지나친 기대나 요구를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다’라고 여겼다. 이것은 욥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는 삶을 사는 과정에서 보고 얻게 된 성과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라고 말할 수 있는 성과도 얻었다. 이 두 구절은 그가 살면서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보고 깨달은 것이다. 이 두 구절은 그가 사탄의 시험을 이긴 가장 유력한 무기였으며, 그가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설 수 있었던 초석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나눈 얘기로 볼 때, 너희는 욥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느냐?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너희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렵느냐? 너희는 하나님께 욥 같은 시련을 달라고 기도할 마음이 있느냐?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감히 그러한 기도를 드리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너희들의 믿음은 보잘것없이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과 비교하면 너희들의 믿음은 정말 언급할 가치도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적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지도 못하고, 사탄의 공격과 참소와 시험을 이길 수도 없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겠느냐? 욥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과 사람이 구원받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고 나니, 이제는 욥과 같은 시련을 받아들일 믿음이 생겼느냐? 이제 자신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시련에 대해 그 어떤 걱정도 하지 마라

욥의 시련이 끝나고 하나님은 욥에게서 증거를 얻은 다음, 욥과 같은 사람들을 한 무리 혹은 더 많이 얻어야겠다고 뜻을 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사탄이 하나님과 내기를 걸며 욥을 시험하고 공격하고 해쳤던 그 방식으로 또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뜻을 정했다. 하나님은 사탄이 나약하고 무지하며 우매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욥에게 했던 그 한 번의 시험으로 이미 충분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제멋대로 사람들을 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이 보기엔 욥 한 사람이 사탄의 시험과 상해를 받은 것으로, 이미 충분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더 이상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명과 그들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주관하며,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선민을 함부로 지배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너희가 확실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나약함을 염려하고, 사람의 우매함과 무지함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이 완전하게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늘 사탄에게 우롱당하고 해를 입는 것을 원치 않으며, 사람이 늘 고난받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니,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배치하는 것은 더없이 지당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고, 만유를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제멋대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사탄이 온갖 방법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는 데에 사탄이 끼어드는 것은 더더욱 용납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는 법칙을 사탄이 짓밟고 깨트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이처럼 큰 사역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6천년 경영 계획 사역의 핵심이자 결정체이다. 또한, 하나님이 6천년 사역에 심혈을 기울인 대가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사람들을 마음대로 사탄에게 넘기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시련이 임할까 봐 늘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사탄의 굴레에 묶여 살고, 사탄의 공격과 상해의 위험 속에 살면서도, 두려운 줄 모르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그저 보이는 사물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배려에 대해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시련,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하나님의 위엄과 진노에 대해서 공포와 두려움을 조금 느낄 뿐, 하나님의 고심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시련을 언급하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어쩌면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저의를 품고 있어 사람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와 섭리에 순종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오히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섭리에 극력 반발하고 저항한다. 그들 생각에, 사람이 조심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 ‘잘못 인도’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지도 모르며, 심지어 목숨도 위태로워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탄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사탄이 사람을 해칠까 걱정한 적이 없었고, 사탄에게 해를 입으면서도 사탄에게 잡혀가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반면, 사람은 말끝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겠다고 외치지만 하나님을 신뢰한 적이 없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람을 사탄의 마수에서 구원하리라는 것을 믿은 적도 없었다. 사람이 만약 욥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배치에 순종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긴다면, 사람의 결말은 욥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순종한다고 해서 사람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권고하는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너의 신변에 임하는 모든 일들을 신중히 대하라. 경솔하거나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말고 혈기와 천연적인 본능, 혹은 상상과 생각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사람이나 일, 사물들을 대하지 마라.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구하라. 기억했겠지?

이어서 시련을 겪고 난 후의 욥이 어떠했는지를 보자.

5. 시련을 겪은 후의 욥

(욥 42:7~9)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 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욥 42: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를 귀히 여기고,

우매한 자를 천하게 여긴다

<욥기> 42장 7~9절에서 하나님은 욥을 그의 종이라고 언급했다. ‘종’이라는 이 호칭으로 욥을 불렀다는 것은 욥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을 의미한다. 비록 하나님이 그에 대해 더 높은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을지라도, 이 호칭은 결코 욥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여기서의 ‘종’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이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내 종 욥’이라고 언급한 표현으로부터, 하나님이 욥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언급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한 이 구절에서 ‘종’이라는 단어에 대해 내린 정의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먼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욥을 시련한 후, 자신이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했음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알린 것이며, 욥의 행동과 말이 정확하고 옳았음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의 정확하지 않은 그릇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노한 것이다. 그들도 욥처럼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도,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도 않는 상황에서 생활했지만, 욥은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정확한 인식을 가졌는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엉뚱하게 추측하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 이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염증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게 그들이 속죄할 수 있는 방법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우매함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번제를 드려 그들의 과오를 만회해야만 했던 것이다. 보통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번제는 욥에게 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번제가 다른 것과 차별화된 부분이다.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열납되었다. 동시에, 욥의 친구들은 욥이 시험을 받던 기간에 다 드러났다. 그들은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해 정죄받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이 ‘징벌’이 바로 욥 앞에서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다시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노를 풀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자 함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욥의 순전함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을 열납하지 않으나, 욥의 행동은 아주 열납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사람이 하나님에게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고,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 눈에 천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이 두 측면은 하나님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해 내린 정의이고, 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또한 이 두 부류 사람의 값어치와 지위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욥을 종이라 불렀을지라도, 이 ‘종’이 하나님의 눈에는 기뻐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에게 권세를 받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과오를 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또한,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높고 존귀한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한 ‘종’의 진정한 함의인 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이런 ‘특별한 영광’을 얻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종’이라 불리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완전히 다른 태도는 바로 하나님이 이 두 부류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하나님에게 귀하게 보이는 것이다. 반면, 우매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날 수 없어,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않으며, 늘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하나님의 정죄를 받으며, 하나님에게 천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권세를 주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 후에 하나님은 욥의 기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우매함대로 그들에게 갚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을 벌하지 않고 그들에게 어떤 응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종인 욥이 그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열납했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한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한 사람을 축복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많은 상을 내려 주는데, 그 상은 물질적인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또 그에게 권세를 주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자격을 가지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 몇 사람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준 권세인 것이다. ‘욥의 기도로 타인이 하나님에 의해 정죄받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그 우매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징벌이었던 것이다.

욥은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은 어떤 말을 했느냐? 바로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말이다. 또한 <욥기>에 기록된 그 많은 분량의 말들이다. 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말들을 보면, 욥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원망도, 의심도 없었으며, 오직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림은 바로 그가 순종하는 태도였다. 그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에게 한 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받은 것이다. 그가 시련을 겪을 때,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다. 하나님이 곁에 있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보았고, 듣고자 한 것을 들었다. 욥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고, 그의 모든 말은 하나님 귀에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다 들었고, 보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 시기에 욥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 하나님에 대한 마음속의 생각은 사실 지금 사람들처럼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 배경에 따라 하나님은 그가 말한 것에 대해 긍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욥의 마음속 생각과 모든 행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드러낸 것들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그의 마음속 생각과 다짐을 통해 하나님은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보기에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뒤이어 하나님은 시련을 거두어 갔다. 그 후 욥은 고통 속에서 벗어났으며, 욥의 시련은 그때부터 사라져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욥은 이미 시련을 겪었고 또한 시련 속에서도 굳게 서고 사탄을 완전히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당하게 그에게 복을 내린 것이다. <욥기> 42장 10절과 1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욥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이 받은 것이다. 이때, 사탄은 물러가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의 방해와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준 것 역시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비록 그때의 복은 단지 소와 양, 낙타, 재산 등에 국한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욥에게 주고자 했던 복은 그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하나님이 욥에게 영원한 약속을 준 기록이 있느냐? 하나님이 욥에게 약속한 복 가운데는 결말을 언급하지 않았고, 또 결말과 연관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욥의 비중과 지위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는 매우 절도가 있었다. 하나님은 결말에 대해 선포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말을 선포할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을 때, 즉 사역을 끝내는 단계가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언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물질적인 축복만 좀 주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욥의 여생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보냈으며,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점이다. 같은 점은 그도 정상인처럼 늙어 가고 어느 날 세상과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 여기서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는 무슨 의미이냐? 하나님이 결말을 선포하지 않은 그 시대에, 하나님은 욥에게도 수명을 정해 주었고, 그 수명이 다 찬 후, 욥은 자연스럽게 세상과 이별한 것이다. 그가 두 번째로 복을 받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그 어떤 고통도 주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무슨 선고도 아니었고, 정죄도 아니었다. 욥은 그의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가 죽고 난 후에 어떤 결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고, 그 어떤 평가도 없었다. 하나님은 매우 절도 있게 말씀하고 일한다. 그가 말씀하고 일하는 내용과 원칙은 그의 사역 단계와 사역 시기에 근거해 진행된다.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욥의 결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 않았을까? 확실히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고 알려 줄 생각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욥이 기한이 차서 죽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일생이다.

욥의 삶의 가치

욥의 일생은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냐?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왜 그의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느냐? 사람 쪽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무엇이냐?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를 대표해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했다. 또한 그는 피조물이 해야 할 본분을 다 이행했고,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 인류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탄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쪽에서 볼 때, 욥의 삶의 가치는 그가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고 찬양하므로 하나님에게 위안을 안겨 주고 기쁨을 얻게 한 것에 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의 삶의 가치는 또한 욥이 살아생전에 겪은 그 시련에서 사탄을 이겼고,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한 데에 있다. 그리고 인류 중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하였고, 하나님에게 위안을 가져다주었으며, 절박하던 하나님에게 결과를 보게 하고 희망을 보게 한 데에 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의 인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고 사탄을 부끄럽게 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욥의 삶의 가치가 아니냐?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위안을 얻게 하고, 하나님에게 영광받은 기쁨을 미리 맛보게 했으며,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거기서 완벽한 시작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욥의 이름은 이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얻은 상징이 되었으며, 인류가 사탄을 이긴 표징이 되었다. 욥의 삶과 그가 사탄을 이긴 위업은 하나님에게는 영원히 소중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는 완전무결하고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행한 사역을 살펴보자.

(4) 율법시대의 조문

십계명

제단을 쌓는 원칙

종을 대하는 것에 관한 규례

도둑질과 배상에 관한 규례

안식년과 3개 절기 지키기 

안식일에 관한 규례

제사에 관한 규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례(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준수하라고 분부함)

제사장이 드리는 번제

제사장이 드리는 소제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

제사장이 드리는 속건죄

제사장이 드리는 화목제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규례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부녀가 산후 정결케 하는 규례

문둥병 검사 기준

문둥병자가 치유받는 규례

병균에 감염된 방을 정결케 하는 규례

유출병 등 질병에 관한 규례

매년 지켜야 할 속죄일

소와 양을 잡는 규례

좇아서는 안 될 이방인의 악습(근친결혼 금지 등)

백성이 지켜야 할 규례(“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자는 쳐 죽일 것

간음죄 처벌 규례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일상에서 지켜야 할 행동과 사람됨의 규례, 성물을 먹는 규례, 생축으로 제사드리는 규례 등)

지켜야 할 절기 (안식일, 유월절, 오순절, 속죄일 등)

기타 규례(등불 관리, 희년, 토지 무르기, 서원, 십일조 등)

율법시대의 규례는 하나님이 인류 전체를 인도한 확실한 증거다

율법시대의 이러한 규례나 원칙을 다 보았느냐? 이러한 규례는 광범위하지 않으냐? 처음에는 십계명이 있다. 그다음 제단을 쌓는 등의 조문들이 있다. 그리고 안식일과 3개의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규례가 있고, 그다음은 제사를 드리는 것에 관한 규례이다. 제사를 드리는 데에 모두 몇 가지가 있느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등이 있다. 그다음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례이다. 제사장이 드리는 번제, 제사장이 드리는 소제 등을 포함한 각종 제사가 있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것에 관한 규례이다. 그 뒤로는 사람이 생활하면서 준수해야 할 규례들이다. 여기에는 사람의 생활에 관련된 여러 방면의 규정이 있다. 예를 들면,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규례, 부녀가 출산 후 정결케 하는 규례, 문둥병 환자가 치료받는 규례 등이 있다. 이러한 규례들을 보면 하나님은 질병에 관한 것까지도 다 말씀했다. 심지어 소와 양을 잡는 규례까지도 말씀했다. 소와 양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 하나님이 규정한 대로 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알려 준 규정대로 행하면 틀림이 없고, 사람에게도 분명히 유익하다! 그리고 마땅히 지켜야 할 일부 절기, 규례 등이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일, 유월절 등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마지막 조항을 보자. 기타 규례에 등불 관리, 희년, 토지 무르기, 서원, 십일조 등이 있다. 이 모든 조문들은 관련되는 범위가 넓지 않으냐? 우선, 사람이 제사를 드리는 것에 관련된다. 그리고 도둑질, 배상, 안식일을 지키는 등등, 생활 속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다 관련된다. 즉, 하나님은 경영 계획의 사역을 정식으로 시작할 때, 사람을 위해 많은 규례를 제정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규례들은 인류가 땅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정상적인 인류의 삶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제단을 쌓아야 하는지, 어떻게 제단을 세워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고, 그다음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었다. 또 사람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정해 주고, 생활 속에서 어떤 것들을 주의하고 지켜야 하는지, 어떤 것들을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정해 주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매우 구체적으로 정해 주었으며, 이러한 조문과 규례, 원칙들을 통해 사람의 행동을 규범화하고, 사람의 생활을 이끌어 주며,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다. 또한, 사람을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인도해 주었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창조한 만물 가운데서 질서적이고 규칙적이며 절제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하나님은 먼저 이러한 간단한 규례와 원칙으로 사람에게 일부 범위를 정해 주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땅에서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고, 정상적인 인류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6천년 경영 계획 시작의 구체적인 내용들인 것이다. 이러한 규례와 규정에 포함된 내용들은 아주 광범위하며, 하나님이 율법시대에서 인류를 인도한 구체적인 내용들이다. 이것은 율법시대를 앞둔 사람들이 반드시 받아들이고 준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행한 사역의 기록이자, 하나님이 전 인류를 이끌고 인도한 확실한 증거이다.

인류는 영원히 하나님의 가르침과 공급을 떠날 수 없다

이러한 규례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과 경영, 그리고 인류를 대하는 태도가 엄숙하고 진지하며 신중하고 책임감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절차에 따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인류에게 펼쳤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도 빠짐없이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음을 보았고,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도 보았다. 사람이 다음 시대에는 어떤 모습이든, 결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최초의 율법시대에는 이러한 간단한 사역을 행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과 세상과 인류에 대해 가졌던 개념은 아주 모호하고 불분명했다. 설사 머릿속에 일부 생각과 타산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하거나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공급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초의 인류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하나님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인류의 생존 원칙과 생활에 필요한 규례들로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 주어야 했다. 이런 말씀의 규정들과 규례들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점진적으로 알아가고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점차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거둔 다음에야 하나님이 그 이후의 사역을 점차적으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율법시대의 이러한 규례들과 하나님이 행한 사역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의 기초 중의 기초이고, 경영 계획의 기본적인 사역인 것이다. 비록 율법시대의 사역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혹은 그의 후손에게 말씀을 한 적이 있을지라도, 그때의 분부와 가르침은 이렇게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한 조항씩 사람들에게 반포되지 않았으며, 성문화된 규정도 규례로 정해진 것도 없었다. 그때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 그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이끌고 그 단계까지 와서야 율법시대의 규례들을 말씀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율법시대의 규례들을 실행하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필수적이고, 이 결과 역시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간단한 규례와 조문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의 절차를 보게 되었고, 하나님이 경영 계획에서 나타낸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증거하는 자, 자신과 한마음으로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자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내용과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고, 어떤 방식으로 지속해야 하며, 또 어떤 방식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또한 그는 사람 안에 무엇이 갖추어져 있고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알고 있으며, 그가 사람에게 무엇을 공급해 주어야 하고 어떻게 사람을 인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도 알고 있다. 사람은 목석과 같다. 비록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사람은 무의식중에 하나님의 경영 사역의 절차에 따라 한 걸음씩 지금까지 이끌려 온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든 모호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아주 확실하고 명확한 계획으로 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절차에 따라, 그의 계획에 따라,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점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펼쳐 나간다. 비록 이후의 사역이 사전에 사람에게 예시되지 않았지만, 그 이어지는 사역 역시 엄격하게 그의 계획에 따라 계속해서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구현된 것이자, 하나님의 권능이다. 그가 그의 경영 계획에 따라 어떤 사역을 펼치든 그의 성품과 본질은 모두 그 자신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는 조금도 틀림이 없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단계의 사역을 하든지, 그가 사람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원칙 그리고 그의 성품과 속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하나님이 율법시대의 사역에서 정한 규례와 원칙들은 아주 얕고 단순해 보인다. 게다가 이해하기도 쉽고 행하기도 쉬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담겨 있다. 겉보기에 단순한 이런 규례에서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염려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매우 섬세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본질도 나타나고,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만유가 전부 하나님 손에서 관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진실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아무리 많은 지식, 아무리 많은 이치와 심오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 쪽에서 볼 때, 그런 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과 인도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는 영원히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고, 하나님이 친히 이끄는 사역도 떠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류의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준 것이 계명이든 규례든, 또는 너에게 진리를 공급해 그의 뜻을 깨닫게 하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의 목적은 사람을 아름다운 내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과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들은 모두 하나님 본질의 한 측면이 발로된 것이며, 그의 성품과 지혜의 한 측면이 발로된 것이다. 또한 이는 그의 경영 계획에 없어서는 안 될 절차로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 개의치 않으며, 또한 사람이 그에 대해 어떠한 관념이나 생각을 갖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이나 일, 사물의 통제도 받지 않고 오로지 그의 경영 계획에 따라 그의 사역을 행하고 있고, 그의 경영을 계속해서 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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