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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관한 논법> 네 편에서 발췌한 말씀

1. 오랫동안 사람이 전통적으로 믿어 온 방식(세계 3대 종교 중 기독교의 믿음법)은 성경을 보는 것인데, 성경을 떠나면 주를 믿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떠나면 사교(역주: 사이비 종교)이고 이교(異敎)라고 하며, 설사 다른 책을 보더라도 반드시 성경 해석을 기초로 한 책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주님을 믿으면 성경을 보고 성경을 먹고 마셔야 하며, 성경 이외에 또 성경과 관련되지 않는 다른 책을 숭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고 한다. 성경이 생긴 이래로, 사람이 주님을 믿는 것은 성경을 믿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기보다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낫고,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고 하기보다는 성경을 믿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낫고, 주 앞에 돌아왔다고 하기보다는 성경 앞에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 낫다. 이렇게,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으로 숭배하고 자신의 목숨으로 여기는데, 성경이 없어진다면 생명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과 똑같이 높이 보고, 심지어 성경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 본다. 성령의 역사가 없고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살아갈 수는 있지만, 일단 그 성경책을 잃거나 성경의 유명한 장절이나 문구를 잃으면 마치 사람이 생명을 잃는 줄로 안다. 그리하여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서부터 성경을 보고 외우기 시작하는데, 성경을 잘 외우는 사람일수록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크다는 것을 더 잘 증명하고, 성경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다 훌륭한 형제자매라고 본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사람의 충성심이나 사람의 믿음을 다 성경에 대한 이해 정도에 근거하여 가늠하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덮어놓고 성경 구절을 열 수 있는 실마리만 수집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 역사의 동향을 추구한 적이 없고, 지금까지 힘들게 성경만 연구하고 조사하고 있을 뿐, 성경 밖에서 성령의 더 새로운 역사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는데, 아무도 성경을 떠나지 못했으며, 아무도 성경을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람은 오랫동안 성경을 연구하면서 많은 해석을 하였고, 많은 노력을 들였지만, 성경에 대한 견해에 많은 차이를 보여 끊임없이 논쟁하다 보니 오늘날의 2천 개가 넘는 교파가 형성되었다. 사람은 모두 성경에서 고차원적인 해석이나 더 깊은 심오한 비밀들을 찾아내려고 하고 성경을 탐구하려고 하는데, 성경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에서 역사했던 배경, 혹은 예수가 유대에서 역사했던 배경, 또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심오한 비밀을 찾아내려고 한다. 사람이 성경을 보는 시각은 모두 ‘수수께끼’이고 모두 ‘신뢰’이며, 성경의 내막과 실질을 완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와서까지도 사람은 여전히 성경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한 느낌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성경에 더욱더 ‘빠져들고’, 성경을 더욱더 ‘신뢰’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 성경에서 말세 사역의 예언을 찾아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말세에 어떤 사역을 하는지, 말세에는 모두 어떤 징조들이 있는지 찾아내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성경을 숭상하는 마음이 갈수록 강렬해졌고, 말세가 될수록 더욱 성경의 예언을 맹신하고 있는데, 말세에 관한 예언에 대해서는 특히 더 심하다. 사람이 그렇게 성경을 맹신하고 그렇게 신뢰하게 되면, 성령의 역사를 찾으려는 마음이 없어진다. 사람은 ‘오직 성경에서만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고, 오직 성경에서만이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으며, 오직 성경에만 하나님 역사의 심오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으며, 오직 성경에만 하나님의 모든 것과 모든 사역이 다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성경 외의 책이나 사람은 다 그렇지 못하다. 성경은 하늘의 사역을 땅에 가져올 수 있으며, 성경은 시대를 시작할 수 있고 시대를 끝마칠 수도 있다’라는 관념을 갖고 있다. 사람에게 이러한 관념이 있다 보니 성령의 역사를 찾으려는 생각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성경이 지난날에 사람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든, 지금에 와서는 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가로막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이 없었다면 사람은 별도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발자취는 다 성경에 ‘통제’되었다. 그러므로 최신 사역을 확장하는 것은 정말 설상가상에 첩첩산중이다. 이것은 다 성경의 유명한 장절과 문구, 많은 예언으로 초래된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에서 우상이 되었고, 사람의 머리에서 ‘수수께끼’가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성경 밖에서 별도로 사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하고, 성경을 떠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어 하며, 최종 사역에서 하나님이 성경을 떠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더 믿을 수 없어 한다. 이런 사실은 사람이 생각하기 어렵고, 믿을 수도 없거니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더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이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고, 하나님의 더 새로운 사역이 확장되는 데에 난관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2. 역대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은혜시대 전부터 성경을 보았는데, 그때는 구약만 있었고 신약은 없었다. 구약성경이 있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모세는 여호와가 다 이끌어 준 다음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 등을 쓰게 된 것인데, 여호와가 그 당시에 했던 사역을 회상하며 기록하였다. 성경은 한 부의 역사책이다. 물론 그 안에는 선지자의 예언도 어느 정도 있다. 그리고 선지자의 예언은 당연히 역사(歷史)가 아니다. 성경은 몇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데, 단지 예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가 했던 사역만 있는 것도 아니며, 바울이 쓴 서신만 있는 것도 아니다. 너는 성경에 몇 부분이 들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구약은 <창세기>, <출애굽기>… 그리고 그들이 쓴 예언서도 포함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말라기>로 구약성경의 전체를 끝맺고 있다. 곧, 여호와가 이끌었던 율법시대의 사역이 기록된 것이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는 구약 율법시대의 전체 사역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이다. 곧, 율법시대에 여호와가 이끌어 주었던 사람들이 그 당시에 체험했던 일들이 다 구약에 기록된 것이다. 구약 율법시대에 여호와는 많은 선지자를 일으켜 자신을 위해 예언을 하게 하였는데, 각 나라, 각 족속에게 효유하게 하였으며, 자신이 하고자 했던 사역을 예언하게 하였다. 여호와가 일으킨 사람들은 다 여호와가 부어 준 예언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환상을 볼 수 있었고 음성을 들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서 계시를 받아 예언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들이 했던 사역도 여호와의 음성을 발표한 것이고, 여호와를 대신해 예언 사역을 한 것이다. 여호와가 역사할 당시에는 오로지 영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지 성육신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많은 선지자들을 일으켜 자신의 사역을 하였는데, 그들에게 묵시를 주어 이스라엘 모든 족속에게 알리게 하였다. 그 사람들의 사역은 예언을 하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효유한 말씀을 다 기록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제공해 주었다. 여호와가 그 사람들을 일으킨 것은 예언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곧, 이후에 할 사역이나 그 당시에 아직 하지 않은 사역을 예언하여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기묘와 지혜를 볼 수 있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예언서들은 성경의 다른 책들과 크게 다르다. 예언서는 예언의 영을 받은 사람, 즉 여호와로부터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들은 사람이 했던 말이거나 그들이 기록해 놓은 말이다. 예언서를 제외한 나머지 책은 다 여호와가 사역을 마친 후에 사람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책들은 여호와가 일으킨 선지자의 예언을 대신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창세기>, <출애굽기>는 <이사야서>, <다니엘서>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언은 사역을 하기 전에 한 말이다. 예언 이외의 다른 책들은 사역을 다 마친 후에 기록한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완전히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했던 사역이다. 선지자들이 했던 말들, 곧 이사야, 다니엘, 예레미야, 에스겔… 그들이 했던 말은 땅에서 행할 다른 사역을 예언한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할 사역을 예언한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그 선지서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역사를 체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3. 창세는 인류가 있기 전의 역사이지만, <창세기>는 인류가 생겨난 후에야 있게 된 책으로, 모세가 율법시대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너희에게 발생한 일과 같은 것을 기록하여 후대들이 볼 수 있게 제공해 준다면, 그들에게는 너희가 기록한 것이 이미 지나간 시대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역사(歷史)로 볼 수밖에 없다. 구약에 기록된 것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에서 했던 사역이고, 신약에 기록된 것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했던 사역이다. 그런 기록들은 서로 다른 두 시대에 하나님이 했던 사역들을 실제로 기록한 것이다. 구약은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했던 역사에 대한 실제 기록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한 권의 역사책이다. 신약은 은혜시대 사역의 산물이지만, 새로운 사역이 시작될 때 그 서적들은 이미 시대에 뒤처진 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역시 한 권의 역사책이다. 물론 신약의 내용은 구약보다 체계적이지 못하고 구약에 기록된 일보다도 많지 않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4. 성경은 도대체 무슨 책일까? 구약은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했던 사역에 관한 것이다. 즉, 구약성경은 여호와가 율법시대에 했던 사역에서 세상을 창조한 사역까지를 기록한 책인데, 여호와가 했던 사역을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에는 <말라기>로 여호와의 사역에 대한 기록을 마쳤다. 구약은 하나님이 했던 두 가지 사역을 기록한 것이다. 하나는 창세 사역이고 하나는 율법을 반포한 사역이다. 그 사역들은 모두 여호와가 한 것이다. 율법시대의 사역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표하는 사역인데, 전체 사역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여호와의 사역을 기록한 것이다. 신약은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 것으로, 예수의 이름을 위주로 한 사역이다. 예수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가 했던 사역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대부분 신약에 기록되어 있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5. 네가 율법시대의 사역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도를 어떻게 준행하였는지를 알려면 구약성경을 보아야 하고, 은혜시대의 사역을 알고 싶다면 신약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너는 말세에 하는 사역은 어떻게 보는가? 오늘날의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고 오늘날의 사역에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새로운 사역이고 성경에 아무도 미리 ‘기록’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성육신하였고, 그 밖에 중국에서 또 선민들을 택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함으로 땅에서 하는 자신의 사역을 지속하고 있고, 은혜시대의 사역을 이어 가고 있다. 오늘날의 사역은 이전 사람이 가 본 적이 없는 길이고, 또한 아무도 보지 못했던 도(道)이며, 지금까지 한 적이 없는 사역이다. 즉,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가장 새로운 사역이다. 그러므로 행한 적이 없는 사역은 역사(歷史)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지금이고 아직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땅에서, 이스라엘 밖에서 더 크고 더 새로운 사역을 함으로 이미 이스라엘의 범위를 벗어났고 선지자의 예언도 초월했는데, 사람은 이것이 예언 이외의 참신한 사역이고, 이스라엘 밖에서의 더 새로운 사역이며, 사람이 꿰뚫어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사역임을 모르고 있다. 이런 사역이 어떻게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될 수 있었겠느냐? 누가 오늘날의 사역을 사전(事前)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해 놓을 수 있었겠느냐? 어느 누가 일반 상식을 깨는 더 크고 더 지혜로운 이 사역을 곰팡이가 핀 그 묵은 책에 기록해 놓을 수 있었겠느냐? 현시점의 사역은 역사(歷史)가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오늘날의 새 길을 가려면 성경에서 나와야 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예언서나 역사서의 범위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길을 잘 갈 수 있고 새로운 경지에, 새로운 역사에 진입할 수 있다. 지금은 왜 성경을 보지 말라고 하는지, 왜 성경 이외에 또 다른 사역이 있게 되었는지, 왜 성경에서 더 새롭고 더 세밀한 실행을 찾지 않고 성경 이외에 또 더 큰 사역이 있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다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다. 너는 신구 사역의 대비점을 알아야 하는데, 성경을 보지는 않아도 성경을 분석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성경을 숭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새로운 사역에 진입하기 어렵고, 새롭게 변화되기 어렵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6. 더 높은 도가 있는 이상 굳이 낮고 시대에 뒤처진 도를 연구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더 새로운 말씀과 더 새로운 사역이 있는 이상 굳이 묵어 빠진 역사(歷史) 기록 속에서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새로운 말씀이 너를 공급할 수 있으면, 그것이 새로운 사역임을 증명한다. 낡은 기록이 너를 배불리지 못하고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사역이 아니라 역사(歷史)라는 것을 증명한다. 최고의 도가 곧 가장 새로운 사역이다. 새로운 사역이 있게 되면, 이전의 도가 아무리 높은 것일지라도 다 사람이 회상하는 역사(歷史)가 되고, 아무리 참고할 가치가 있다 해도 역시 낡은 도가 된다. 낡은 도는 ‘성서’에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역사이고, 새로운 도는 ‘성서’에 한 페이지도 기록되지 않아도 현실적이다. 이 도는 너를 구원할 수 있고, 이 도는 너를 변화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7. 성경은 역사책에 속한다. 네가 구약성경을 은혜시대에 가져다 먹고 마시며 구약시대에 요구한 것을 가져다 은혜시대에서 실행한다면 예수는 너를 내버릴 것이고 너를 정죄할 것이며, 예수의 사역을 구약의 틀에 맞춘다면 너는 바리새인이다. 만약 현재 네가 신약과 구약을 같이 묶어 먹고 마시며 실행한다면, 오늘날의 하나님은 너를 정죄할 것이며, 너 또한 오늘날의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구약도 먹고 신약도 먹는다면, 너는 성령의 흐름 밖에 있는 자에 속한다! 예수 시대에, 예수는 그 당시 성령이 자신에게서 하는 역사에 따라 유대인들을 이끌었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었다. 예수가 했던 모든 사역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역에 따라 말씀한 것이다. 예수는 성경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든, 성경에서 길을 찾아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이끈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사역을 막 시작했을 때 회개의 길을 전했다. 그러나 ‘회개’라는 이 두 글자가 구약의 그 많은 예언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예수는 성경을 근거로 사역하지 않았을 뿐더러 더 새로운 길을 펼쳐 주었고 더 새로운 사역을 하였다. 예수는 성경을 참고하여 전도한 적이 없다. 율법시대에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의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예수의 사역, 예수의 교훈, 예수의 권병 역시 율법시대에 아무도 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오로지 자신의 더 새로운 사역만 했다. 비록 많은 사람이 성경으로 예수를 정죄하고, 심지어 구약성경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지만, 예수의 사역은 오히려 구약성경을 초월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어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겠느냐? 그 원인은 예수의 교훈과 병 고치고 귀신 쫓는 능력이 다 구약에 전혀 기록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 예수가 했던 사역은 더 새로운 길을 펼쳐 주기 위한 것이지, 일부러 성경과 ‘싸움’을 하거나 일부러 구약성경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단지 자신의 직분을 하여 예수를 갈급해하며 찾고 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사역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예수는 구약을 해석하거나 구약의 사역을 수호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예수가 역사한 것은 율법시대가 계속 발전해 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는 사역은 성경의 근거를 전혀 고려할 필요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사역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구약의 예언들을 해석하지 않았고, 구약 율법시대의 말씀에 따라 사역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구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든, 그것이 자신의 것과 부합되든 되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하는 사역만 했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구약 선지자의 예언으로 예수를 정죄했을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봤을 때는 예수가 아무 근거도 없이 사역하였고, 또 그의 사역은 성경 기록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것은 다 사람의 불찰이 아니냐?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규례에 맞출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해야 하겠느냐? 성경이 크냐, 하나님이 크냐? 왜 하나님이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 역사해야 하느냐? 설마 하나님 자신에게 성경을 벗어날 어떤 권리도 없단 말이냐? 하나님은 성경을 떠나 따로 역사할 수 없단 말이냐? 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겠느냐? 예수가 안식일에 따라, 구약의 계명에 따라 실행했다고 한다면, 예수는 왜 와서 안식일은 지키지 않으면서 발을 씻겨 주고 수건을 쓰며 또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셨겠느냐? 그런 것은 다 구약에 없는 계명이 아니냐? 예수가 구약대로 했다면, 왜 그런 규례들을 타파했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먼저였는지, 성경이 먼저였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의 주인은 되고 성경의 주인은 될 수 없단 말이냐?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8. 성경을 신구약 전서라고도 한다. 무엇을 ‘언약’이라고 하는지 너희는 아느냐? ‘구약’을 ‘언약’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여호와가 애굽 사람을 쳐서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 바로에게서 벗어나도록 구원할 때 이스라엘 사람과 세운 언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 ‘언약’은 문 인방에 바른 ‘양의 피’를 증거로 하였다. 또한 그것으로 언약을 세우며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가 있으면 모두 이스라엘 백성 ― 하나님의 선민 ― 이고 모두 여호와가 남겨 두는 대상이라고 알려 주었다(그것은 그때 여호와가 애굽의 모든 장자와 처음 난 우양을 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언약’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애굽의 사람과 가축은 모두 여호와가 구원할 대상이 아니기에 그들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들은 다 쳐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예언서에 애굽 백성을 중하게 벌한다고 예언한 것은 모두 여호와가 세운 언약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이다. 여호와는 애굽의 장자들과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을 쳤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전부 남겨 두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모두 여호와에게 귀하게 여겨졌으며, 그들을 전부 보존시키려고 했던 것은 그들에게서 오래도록 사역하려는 것이었고 게다가 그들과 ‘양의 피’로 언약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격살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여호와의 선민이라고 하였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전체 율법시대의 사역을 전개하여 자신의 모든 율법을 이스라엘 사람에게 열어 놓으려고 하였으며, 그들 가운데서 선지자와 사사들을 택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사역하려고 하였다. 여호와는 시대가 바뀌지 않는 한, 자신이 택한 백성들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도로 사역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과 언약을 세웠다. 여호와가 세운 언약 또한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피로 언약을 세웠고, 그것도 자신의 선민들과 언약을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여호와는 적절한 역사 범위와 역사 대상들을 택하여 자신의 전체 시대의 사역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두 언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것이 언약의 두 번째 의미이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언약을 세우기 전의 <창세기>를 제외한 그 외의 책들은 다 언약을 세운 후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행한 사역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가끔 이방 족속의 일들도 기록하였지만, 구약에 전반적으로 기록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했던 사역이다.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과 세운 언약으로 인해 율법시대에 기록된 책을 ‘구약’이라 칭하였는데, 곧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과 세운 언약으로 명명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2)>에서 발췌

9. 성경 신약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세운 언약으로 명명한 것이다. 예수가 세운 언약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흘린 피로 죄사함을 받고, 그것으로 예수에게서 구원 얻고 거듭나 더 이상 죄인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은혜를 받게 되고, 게다가 죽은 후에 지옥의 고통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체 은혜시대에 기록된 책은 모두 언약을 세운 후에 있게 된 것이고, 또한 모두 언약 안의 사역과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주 예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언약의 범위도 넘어서지 못한 것이며, 모두 주 안에서 체험이 있는 형제들이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그 책들도 언약으로 명명하여 ‘신약’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그 두 ‘언약’은 율법과 은혜, 두 시대만 포함할 뿐, 마지막 시대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오늘날 말세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게 되었는데, 기껏해야 임시적인 참고용일 뿐 큰 사용 가치는 전혀 없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2)>에서 발췌

10. 성경의 기록 전체가 다 하나님이 친히 발한 음성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앞 두 단계 역사의 실제 기록이다. 그 가운데 일부분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기록한 것이고, 일부분은 역대에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이 쓴 체험과 인식이다. 사람의 체험에는 자신들의 견해와 인식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많은 책에서 어떤 것은 사람의 관념에 속하고, 어떤 것은 사람의 편견에 속하며, 어떤 것은 사람의 그릇된 터득 방식에 속한다. 물론 대부분은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아 한 말이어서 정확한 터득에 속하지만, 완전히 정확한 진리의 발표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떤 일들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자신이 체험하여 얻은 인식이나 성령의 깨우침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이 친히 지시한 것이다. 그 당시에 이사야가 했던 예언, 다니엘, 에스라, 예레미야, 에스겔, 이들이 했던 예언은 성령이 직접 지시한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에 속하고 예언의 영을 받은 사람들로, 모두 구약의 선지자들이다. 율법시대에 여호와의 묵시를 받은 그들은 많은 예언을 하였는데, 그것은 여호와가 직접 지시한 것이다. 왜 그들에게 하였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민에 속하고, 그들 가운데는 반드시 선지자의 사역이 있어야 했으며, 그들은 그런 계시를 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받은 계시는 사실 본인들도 깨닫지 못한다. 성령이 그들의 입을 빌어 그런 말씀을 한 것은 후세대들에게 그런 일들을 통찰하여 그것이 확실히 하나님의 영이 행한 것이고 성령이 행한 것이지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게 하고, 그것으로 성령의 역사를 실증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3)>에서 발췌

11. 지금의 사람들은 늘 성경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곧 성경이라고 여긴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 만큼만 말씀을 했고, 성경에 있는 그만큼의 말들이 전부 하나님이 한 말씀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신구약 66권은 비록 사람이 쓴 것이지만 다 하나님이 묵시한 것이고 성령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것은 사람의 치우치고 그릇된 터득 방식이고, 사실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구약에서 예언서를 제외한 대부분은 다 역사(歷史) 기록에 속한다. 신약 서신의 어떤 것은 사람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고, 어떤 것은 성령의 깨우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이 쓴 서신은 사람이 행한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모두 성령이 깨우쳐 준 것으로,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낸 서신들이고 여러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주는 권면과 격려이지, 성령이 한 말씀은 아니다. 바울은 성령을 대표하여 말을 할 수 없고, 게다가 바울은 선지자도 아니고 이상(異象)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그 편지는 그 당시의 에베소, 빌라델비아, 갈라디아 등 여러 교회에 써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바울 서신은 다 바울이 그런 교회에 써 보낸 편지인데, 성령이 묵시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직접 했던 말씀도 아니며, 그 서신은 그저 사역하는 기간에 바울이 여러 교회에 권면과 위로와 격려를 해 준 것이고, 그 당시에 바울이 했던 많은 사역에 대한 기록을 주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로 써 준 것이기도 하며, 또한 그 당시에 많은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바울의 권유를 듣고 주 예수의 모든 도(道)를 준행하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 당시의 교회든, 그 이후의 교회든 다 바울의 것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자신이 했던 말들이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바울은 단지 그 당시 교회 정형에 근거하여 형제자매들과 교통하고 그들을 권면하여 믿음을 분발시킨 것이며, 단지 설교하거나 일깨워 주고 권면을 해 준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책임에 결부시켜 말했는데, 그런 말로 그 사람들을 돌본 것이다. 바울은 그 당시 교회들을 맡아 사도의 사역을 했는데, 주 예수가 쓰는 일꾼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고, 교회 사역을 담당해야 했으며, 형제자매들의 정형을 파악해야 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주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바울이 사람에게 했던, 덕이 되거나 긍정적인 말은 다 옳은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말은 성령의 말씀을 대표할 수 없고 하나님을 대표할 수는 없다. 사람이 만일 사람의 체험을 기록한 것과 사람의 서신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한 말씀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완전히 그릇된 인식법이고, 크나큰 모독이다! 특히 바울이 교회들에게 보내 준 서신이 그렇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당시에 각 교회의 상황과 각 교회의 현실적인 정형에 근거하여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주 예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권유한 것이고, 당시의 형제자매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바울 본인이 져야 할 부담이었고, 성령이 그에게 더해 준 부담이기도 하였다. 어디까지나 바울은 그 당시에 교회들을 이끄는 사도였기에,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 권면하는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 바울의 신분은 그저 사역하는 사도이고 보냄받은 사도일 뿐 선지자도 예언자도 아니었기에,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사역과 형제자매들의 생명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을 대표하여 말할 수 없다. 바울이 했던 말은 성령의 말씀이 아니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단지 피조물일 뿐, 성육신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과 예수의 신분은 같지 않다. 예수의 말씀은 성령의 말씀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신분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을 어떻게 예수와 동등하게 볼 수 있단 말이냐? 사람이 바울의 서신이나 바울의 말과 유사한 것들을 성령의 음성으로 여기고, 게다가 하나님으로 삼아 경배한다면, 너무나 분별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좀 심각하게 말하면, 사람이 하는 것은 완전히 모독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어떻게 사람의 말과 사람이 쓴 서신의 기록을 ‘성서’로 삼고 ‘천서(天書)’로 삼아 엎드릴 수 있단 말이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겠느냐? 이러한데 바울이 교회에 써 보낸 편지에 자신의 생각이 뒤섞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람의 뜻이 섞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바울은 자신의 체험과 생명 정도에 따라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에 한 가지 견해가 들어 있고, 베드로가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에는 또 다른 견해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견해를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야겠느냐? 아무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저 그들에게 교회에 대한 부담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편지는 그들의 분량을 의미하고, 형제자매들에 대한 그들의 공급과 돌봄을 의미하며, 교회에 대한 그들의 부담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이 사역하는 면만 의미하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성령에게서 비롯되었다’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네가 그의 서신을 성령의 말씀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너는 그릇된 것이다. 그것은 모독에 해당된다! 바울의 서신과 신약의 다른 서신은 근대 영적 인물 전기(傳記)에 해당되는데, 워치만 니의 책 또는 로렌스의 체험 등등, 이런 사람들이 쓴 영적 전기와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대 인물들이 쓴 책은 신약성경에 편성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질은 같은데, 모두가 성령께 한동안 사용되었던 인물들로, 직접 하나님을 대표할 수는 없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3)>에서 발췌

12. 신약성경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첫머리에서는 예수를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다윗의 자손이고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아래에 가서는 또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가 낳았다고 했다. 그것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며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족보 기록에 예수와 요셉을 억지로 엮어 놓았다. 족보 아래에서부터 예수가 강생한 과정을 기록하였는데, 계속해서 예수는 또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족보에는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족보는 예수를 위해 쓴 것이므로 요셉의 그 세대까지 42대 인물을 기록하고, 곧바로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하였다. 그 말은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데, 그러면 상하가 모순되지 않느냐? 족보에 기록된 것은 분명히 요셉 가문의 인물들이고, 분명히 요셉의 족보이다. 그러나 마태는 억지로 예수의 족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마태가 쓴 족보와 같은 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냐? 그것은 더더구나 황당한 논조이다. 그러면 너는 그 책이 온전히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혹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땅에 있으면 족보가 있어야 하므로 예수를 아브라함 가문의 제42대에 나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 너무나 황당하다! 하나님이 땅에 왔다고 어찌 족보가 있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에게 족보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피조물 가운데에 나열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땅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육신이지만 사람의 본질과는 다르다. 그런데 네가 어찌 하나님을 피조물과 같은 부류에 나열해 놓을 수 있단 말이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 당시 여호와의 역사 대상이었고, 단지 여호와께 인정받은 충성스러운 종으로, 이스라엘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그가 어찌 예수의 조상이 될 수 있단 말이냐?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3)>에서 발췌

13. 신약 복음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20~30년이 지난 뒤에 기록한 것이다. 예전에 이스라엘 사람이 보았던 것은 다 구약이다. 즉, 은혜시대 그 사람들이 보았던 것은 다 구약성경이다. 신약성경은 은혜시대가 되어서야 있게 된 것으로, 예수가 역사할 때에는 신약이 없었다. 예수가 부활 승천한 후에 후세들이 예수의 역사를 기록하여 4복음서가 있게 되었고, 거기에 바울의 서신, 베드로의 서신, <계시록>까지 이런 책들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예수가 승천하고 3백여 년이 지난 뒤에, 후세들이 다시 그 책들을 편집하여 하나로 묶으면서 신약책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은혜시대 단계 사역을 끝낸 후에야 신약이 있게 된 것이지, 사전(事前)에 미리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였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였다. 나중에는 바울과 베드로가 쓴 서신을 함께 모아 두었다. 그리고 요한이 기록한 밧모섬에서 본 가장 큰 이상을 맨 마지막 책으로 묶었는데, 그것은 말세에 할 사역을 예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다 후세들이 계획한 것으로, 지금의 ‘말씀’과는 다르다. 지금은 역사 절차에 따라 기록하기 때문에, 사람이 접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친히 한 역사와 말씀이다. 사람이 손댈 필요 없이 직접 영으로부터 온 말씀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나열해 놓았는데, 사람이 기록한 순서와는 다르다. 그들이 기록한 것은 그들의 지식 수준과 소질에 근거한 것이고, 기록한 것은 사람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마다 기록 방식이 다르고,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인식이 있으므로, 기록된 것도 다 다르다. 그러므로 네가 성경을 하나님으로 여겨 숭배한다면, 너무나 우매하고 너무나 어리석다! 왜 오늘날의 하나님의 역사를 찾지 않는 것이냐?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지 성경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성경은 몇천 년이나 되었어도 변화가 전혀 없는데, 네가 성경을 숭배한다면 영원히 성령의 역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3)>에서 발췌

14.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깨닫고 해석할 수 있으면 참 도를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것일까? 사람은 성경의 실제 내막이 어떤지를 잘 모르고 있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역사(歷史) 기록이고, 하나님의 앞 두 단계 역사의 증거일 뿐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역사의 취지를 깨달을 수 없다. 성경을 본 사람은 성경에 율법시대와 은혜시대 하나님의 두 단계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인데, 창세부터 율법시대가 끝날 때까지 여호와가 어떻게 역사하였는지가 기록된 것이다. 신약에는 예수가 땅에서 했던 사역을 기록한 4복음서도 있고, 바울이 한 사역도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모두 역사 기록에 속하지 않느냐? 지난날의 일을 오늘날에 가져오면 모두 역사에 속하는데, 그것이 아무리 진실할지라도 역사일 뿐이다. 역사는 현 실정에 초점을 맞출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를 뒤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성경만 알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현재 하려는 사역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찾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네가 성경을 보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즉 하나님이 온 천지를 창조한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네가 오늘날 죽은 글귀 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역사를 알기 위해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알려고 추구하는 사람인 이상, 하나님의 현시점의 뜻을 찾고 구해야 하고 성령 역사의 동향을 찾아야 한다. 네가 고고학자라면 성경을 봐도 되겠지만 고고학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현시점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4)>에서 발췌

15.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한 사역을 기록한 역사책에 속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옛 선지자의 예언들이 기록되었고, 여호와가 그 당시에 역사했던 말씀들도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 그 책을 ‘거룩하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다 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자 하나님을 앙모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 책을 그렇게 칭한 것은 단지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 경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인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 책을 ‘천서(天書)’라고까지 하였다. 사실, 그 책은 단지 사람의 기록일 뿐이지 여호와가 친히 명명하거나 친히 지도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 책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칭한 것은 다만 사람들이 그 책을 대하는 존칭일 뿐, 여호와와 예수가 공동으로 연구 토론한 다음 다시 결정한 것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책은 여호와가 기록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예수가 기록한 것도 아니라 많은 옛 선지자, 사도, 예언자들의 기록을 후세들이 수집하여 편찬한,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거룩한 고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보기에 그 속에는 사람이 측량하기 어려운 많은 심오한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후세들이 풀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책을 더욱더 ‘천서’라고 여기게 되었다. 거기에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 및 <계시록>까지 더해져, 그 책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그 어떤 책을 대하는 것보다 각별했다. 그러다 보니 감히 그 ‘천서’를 해부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그 책이 너무나 ‘신성(神聖)’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4)>에서 발췌

16. 내가 오늘날 성경을 이렇게 분석하는 것은 성경을 혐오하거나 성경의 참고 가치를 부인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네가 늘 캄캄절벽 상태에 있지 않도록 성경의 원래 가치와 성경의 기원을 분명하게 천명해 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사람의 견해는 너무나 많은 데다가 대부분은 정확하지도 않은 견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면 사람은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고,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려는 사역까지 가로막아 앞으로의 사역에 크나큰 걸림돌이 되는데, 유익은 없고 폐단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어디까지나 성경의 내막과 실질을 알라고 하는 것이지 성경을 보지 말거나 성경을 가치 없는 책이라고 선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해 정확한 인식과 정확한 견해를 가지라는 것이고, 너무 단편적이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성경을 사람이 기록한 역사서라고 하지만, 그 책에는 옛 선지자가 하나님을 섬겼던 원칙과 근대 사도들이 하나님을 섬긴 체험이 많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참된 깨달음과 인식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 것은 모두 본시대에서 참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참고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그 안에서도 다른 책에서 얻을 수 없는 생명의 도를 많이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도는 모두 역대의 선지자나 사도들이 체험한, 성령이 역사했던 생명의 도이고, 또한 많은 말들은 상당히 귀하여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 성경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는 비밀스러운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 책을 바라보는 사람의 견해는 그 어떤 영적 위인의 저작물을 대하는 것과 같지 않다. 성경에는 신구약시대에 여호와와 예수를 섬긴 사람들의 체험과 인식이 기록되었고 한데 모아져 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은 그 책에서 많은 깨우침과 빛 비춤 그리고 실행의 길을 얻을 수 있었다. 성경이 그 어떤 영적 위인들의 저작물보다 훌륭한 까닭은, 영적 위인의 어떤 저작물도 다 성경에서 취한 것이며, 그들의 체험도 다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고 게다가 성경을 풀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사 사람이 어떤 영적 위인의 책에서 공급을 받을 수 있을지라도, 사람이 숭배하는 것은 여전히 성경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보기에, 성경은 너무나 높고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비록 ‘바울의 서신’, ‘베드로의 서신’과 같은 생명에 관한 말씀 책이 일부분 모아져 있고, 또 사람들이 그런 책 속에서 공급을 받고 도움받을 수도 있지만, 그런 책들은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책이고 또한 구시대의 책이다. 그런 책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한 시기에만 적용될 뿐, 영원까지 보존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기에 바울, 베드로가 있었던 시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즉, 영원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은혜시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들은 은혜시대에만 적용될 뿐, 마지막인 하나님나라시대에는 적용되지 못하며, 은혜시대의 신자들에게만 공급이 되고 하나님나라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공급이 되지 못해 아무리 좋아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창세 사역처럼, 또 여호와가 이스라엘에서 했던 사역처럼, 그 사역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고 흘러갈 때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사역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끝날 때가 있는 것처럼, 영원히 창세 사역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영원히 십자가 사역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역에 설득력이 얼마나 있든, 사탄을 패배시키는 효과가 얼마나 있든, 사역은 어디까지나 사역이고, 시대는 또 어디까지나 시대이다. 사역은 계속 어느 한 기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시대도 영구불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세가 있으면 꼭 말세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생명의 말씀’, 즉 ‘사도 서신’, ‘4복음서’를 오늘날에 가져왔을 때는 모두 역사책이 되고 모두 노황력이 된 것이다. 그런 노황력이 어찌 사람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런 노황력이 아무리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고, 아무리 사람을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할지라도 다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니겠느냐? 다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더 이상 그 노황력을 맹신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 노황력은 너무 ‘낡아 빠져’ 너를 새로운 사역으로 이끌어 들어갈 수 없고 짐만 될 뿐이며, 너를 새로운 사역과 새로운 진입으로 이끌어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를 낡은 종교적인 회당으로 이끌어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퇴보한 것이 아니겠느냐?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4)>에서 발췌

17. 네가 성경을 알고 역사(歷史)는 알지만 지금 성령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은 안 된다! 네가 매우 훌륭할 정도로 ‘역사(歷史)’를 잘 배웠을지라도 지금 성령이 하는 사역은 전혀 알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하나님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지금은 어떤 것에 진입해야 하나요? 당신은 생명을 잘 추구하고 있나요?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나요?”라고 하면서 이런 것을 물어본다면, 너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럼 너에게 무엇을 아느냐고 물을 때, 네가 “저는 육체를 배반해야 하는 것과 자신을 인식하는 것만 알아요.”라고 대답하고, 너에게 또 어떤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을 때, 너는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복해야 하는 것을 좀 알고 거기에 성경의 역사도 조금 알고 있다고 대답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럼 네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얻은 것이 그것뿐이냐? 네가 알고 있는 것이 겨우 그런 것밖에 없다면 너는 결여된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ㆍ성경에 관한 논법 (4)>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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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효유(曉喩): 분명하게 알리고 직접 지시함.

②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겠느냐: 혹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할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음.

⑤노황력(老黃歷): 오래되어 누렇게 된 달력이란 듯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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