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편 합격된 본분 이행이란 어떤 것인가

지난번 예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내용에 대해 교제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심판과 형벌을 받아 온전케 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기본 조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 네 가지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느냐? 첫째,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셋째,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기본적’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오해하거나 요구 기준이 너무 높다고 여겨, 다른 생각이나 어떤 내적 상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라면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네 번째 조건은 무엇이었느냐?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조건에는 각각 세부 사항이 있고, 거기에 관한 구체적인 말씀과 실행 방법, 그리고 뜻하는 바가 있다. 그러니 이 네 가지 조건을 합쳐 말한다면 복잡해져서 너희가 기억하거나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하나 떼어서 말해도 각 항목마다 구체적인 내용과 많은 의미가 있다. 사실, 이 네 가지 조건은 요 몇 년 동안 내가 계속 말해 왔던 것이다. 나는 어떤 진리를 교제하든, 어떤 환경에 임하든, 어떤 상태의 사람에 대해 말하든 모두 많게 혹은 적게 이러한 것들을 다루곤 했다. 그러니 오늘 다시 이 화제에 대해 말한다면 식상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으냐? 진리와 관련된 일은 사람의 생명 진입과 관계되며, 끝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든 너는 글자나 도리, 또는 진리의 실제를 조금만 알 뿐, 그 부분에 모두 진입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중 일부에만 진입했을 뿐, 그 진리를 참되게 깨닫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든 자주 교제하고 들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실제 체험 속에서 각 진리에 대한 인식이 점점 깊어지고, 참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참되게 체험을 하고 인식이 깊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실행하고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아주 좋다. 네가 어떤 진리를 깨달으면, 너는 글자상의 의미를 행하거나 규례를 좀 지키거나 행위와 관점의 개선을 이룰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어디까지 깨달았느냐 하는 문제는 너의 체험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이는 진리의 실제에 대한 너의 깨달음 정도와도 관계가 있다.

방금 나는 네 가지 조건에 대해 말했다.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이었느냐?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그 조건에 대한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어떤 이는 “근 몇 년간 계속 본분 이행에 관련된 말씀을 해 주셔서 본분 이행의 원칙이나 진리는 이제 눈을 감고도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고,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 본분 이행 시 어떤 원칙들을 지켜야 하는지 등도 손금 보듯 훤하니,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요 몇 년간 일상생활에서 접한 것 역시 전부 본분 이행과 관련된 진리였습니다.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할 때부터 여기에 관한 진리를 찾거나 먹고 마시며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화제를 언급하시니 언제까지 그것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부 예전의 그 화제들 아닙니까? 뭐 또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결국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려면 앞서 말한 그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는 원칙을 구하되,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며, 조화롭게 협력하고, 생명 진입과 걸음을 같이 해야 한다’는 내용이겠지요.”라고 한다. 보아하니 너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고 체험한 것들 또한 이러한 내용인 듯하다. 그러니 너희가 이해한 것 역시 비슷한 내용일 것이다. 물론, 그 안에도 세부적인 사항들이 있지만 큰 틀은 같다. 그러나 너희가 얼마나 이해했든, 오늘 우리는 또다시 본분에 관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중복된 말이 있다면 다시 되새긴다고 생각하고, 예전에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받아들여라. 중복되는 것이든 아니든 모두 자세히 듣고, 그 안에 어떤 진리가 있는지, 이 진리가 너희들의 생명 진입과 합격된 본분 이행에 유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합격된 본분 이행’이라는 화제를 꺼낸 것이다.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 이것은 첫 번째 내용이다. ‘합격된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본분’이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하겠다. 다 듣고 나면 너희는 본분이란 무엇인지, 합격된 것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고, 어떻게 실행해야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길이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본분이란 무엇이냐? (본분이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이자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맡긴 일, 그리고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본분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론적으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자세하게 파고든다면 그 해석이 완벽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자. 무엇을 본분이라고 하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그가 일생 동안 어떻게 살아갈지, 이 세상에서 어떤 일들을 할지, 그의 운명이 어떨지 등은 모두 하나님이 정한 것 아니겠느냐? 예컨대 어떤 이는 음악을 한다. 음악을 하는 것은 그의 인생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그 사명을 본분이라고 칭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또 어떤 이는 전 세계가 놀랄 만한 위업을 이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기여를 했으며 시대를 바꿔 놓았다. 이는 그의 필생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 사명, 그가 일생 동안 한 일들을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반대로 본다면 사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그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그에게는 책임, 그러니까 온 인류 가운데서 꼭 해내고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게 어떤 분야든, 예술이든 상업이든 정치든 경제든 또는 과학 연구든, 전부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을 어떻게 정해 놓았든,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경영 사역 밖에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들이 한 일 또한 하나님의 경영 사역 밖에 있는 사람이 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책임과 그들이 받은 일, 그들의 평생 사명을 본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제 문제가 보일 것이다. 본분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본분이란 하나님이 맡긴 일이자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 대답은 맞겠느냐? (반만 맞은 것입니다.) 왜 반만 맞았다고 하겠느냐? 방금 우리는 몇 가지 예를 들었다. 거기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가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수동적으로 창조주가 맡긴 일과 사명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이 받은 사명과 그들이 이행하는 책임을 본분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을 고려하면, 그들이 어떤 책임을 맡았든, 평생 어떤 일을 맡든, 어떤 사명을 완수하든, 그것을 본분 이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얼마나 큰 사명을 받았든, 어떤 변혁을 이뤘든, 인류에 대한 기여가 크든 작든, 그러한 사명과 일은 다 본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무관하며, 그저 사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그들은 사명을 완수한 데 불과하며,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경륜,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과 무관한 것이라면, 사명을 완수했다 한들 본분을 이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에, 무엇을 본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마땅히 어떤 전제 조건을 더해야 비로소 본분이라는 말과 본분에 관련된 진리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 하나님이 맡긴 일과 사람의 사명을 본분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 정확한 해석 아니겠느냐? 정확하다면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정확하지 않고 편면적이라면 그것은 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무엇이 본분인지 완전히 깨닫지도,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고, 본분이라는 이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사람은 본분이라는 말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고, 여기에 관한 진리를 그리 깊게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각양각색의 관념과 다른 해석들이 나오고, 그 해석을 통해 본분을 대하거나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이들은 “사람이 어떤 가정에 태어나느냐, 가난하냐 부유하냐, 또는 평생 어떤 일을 하느냐 등은 모두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것이며, 하나님이 맡긴 일이자 사람의 사명입니다. 사명과 관련되었으니 이것들도 전부 본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흐리멍덩하게 이것을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후 “아이를 낳는 것은 하나님이 저희에게 맡기신 일이자, 사명입니다. 아이를 낳았으면 키워야 되죠. 그러니 아이를 키우는 일이 바로 저희의 본분입니다.”라고 한다. 이는 잘못된 이해 아니냐?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래도 저희는 평생 부자로 살긴 그른 것 같습니다. 농부의 운명을 타고났으니, 매일 땅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수밖에요. 이왕 이런 운명으로 태어난 거, 농사를 잘 지어야 합니다. 농사짓는 일이 힘들고 살림이 궁핍해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자 사명, 그리고 본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그는 운명과 사명, 운명과 본분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 이것 역시 잘못된 이해 아니겠느냐? 또 장사를 하는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저는 무엇을 해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장사에 손을 대자마자 살림살이가 좋아지고 생활도 안정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 하나님은 제게 장사할 운명을 내려 주신 것 같습니다. 장사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저는 이번 생에 장사를 잘, 그리고 크게 해서 일가족을 건사할 겁니다. 이것이 제 사명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사명이 바로 제 본분이겠지요.” 그는 자신의 살림살이, 진로와 운명, 그리고 육적인 삶, 사명과 관련된 이 일들을 본분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잘못된 이해이며 그릇된 해석이다.

또 다른 어떤 이는 “농사를 짓고 농부가 되는 것이 사명은 될 수 있어도 본분은 될 수 없다면, 농사를 짓는 것은 모두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겠네요.”라고 한다. 이 말은 옳으냐? 이 말에는 어떤 오류가 있느냐? 그는 농사를 짓는 것이 본분 이행과 무관하므로 본분 안에는 농사라는 일이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논리적인 오류가 아니냐? 논리학에는 ‘추리’라는 것이 있다. 이런 식으로 추리하면 오류가 생긴다. 네가 세상에서 농사를 짓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은 본분 이행에 속하지 않으며, 본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농사를 짓는 것이 꼭 본분 이행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관건은 어디에서 농사를 짓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땅을 사서 어떤 이들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하면, 이해하지 못해 “하나님은 농사를 짓는 것이 사람의 운명 가운데 있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일 뿐, 본분 이행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본분이 아니며, 본분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네.) 문제가 생긴 이유는 무엇이냐? 본분 이행에 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엇이 본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관한 진리를 이해했다면, 농사짓기를 원할 것이다. 농사짓는 일이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함이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이를 부양하고 먹여 살리기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맡긴 일이며,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의 한 항목이다. 그것은 깨알이나 모래알처럼 미미하기 그지없는 일일 수도 있으나, 크기와는 무관하게 그것 역시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나온 한 가지 일이다. 지금 하나님이 이 일에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너는 거절하지 말고 기꺼이 그것을 본분으로 여기며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네가 수동적으로 순종하며 “농사를 지으라고 하시니 짓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본분이 너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네 가족을 건사하고 살림살이를 하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 집에서 이 기간에 해야 할 일의 필요인 것이다. 너는 여기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사람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이 일을 해야 하며, 이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일의 성질은 변한 것 아니겠느냐? 평범한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에서 본분 이행으로 바뀐 것이다. 평범한 농부로서 농사를 짓는 일의 성질은 무엇이냐? 바로 먹고 사는 것이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며, 해마다 봄이면 파종하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는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이 이런 삶, 이러한 생활 방식을 갖도록 운명 지었으니 너는 이렇게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농사를 짓느냐?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하루하루 살아나가기 위해서이다. 너는 한평생 그렇게 살아가야 하며,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그 운명은 본분과 관련이 있느냐? 네가 하는 그 일, 너의 운명에 있는 그 사명은 하나님이 너에게 운명 지어 놓은 이번 생에서의 날들과 관련이 있을 뿐, 너의 본분과는 관련이 없다. 반면, 지금은 네가 하나님 집에 와서 똑같이 농사를 짓지만 그 일의 성질이 달라졌다. 이 농사는 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도, 네 살림을 위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너의 본분으로 된 것이다. 어떤 이는 “이제 겨우 호미며 낫을 내려놓았는데, 하나님 집에서 또 농부가 되라니요? 이를 어떡하면 좋습니까?”라고 한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문제다. 이 일을 본분으로 여기면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수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본분이 왜 하필이면 제게 맡겨진 겁니까?”라고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한 것인데, 이 일이 네게 복이 되겠느냐, 화가 되겠느냐? 네가 이 일을 본분으로 여긴다면 이 일은 너의 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이 일을 본분이 아닌, 짐 또는 귀찮은 일거리로 생각하며 하나님이나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못살게 하기 위해 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 너의 본분이 아니니, 너는 떠나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또 ‘우리보고 살림을 살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왜 살림을 하기 시작했을까? 하나님이 우리보고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하셨잖아. 개인의 땅을 버리고 하나님 집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가치가 없고, 하나님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가치가 있단 뜻일까?’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바로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똑같이 힘써 일하고 고생하지만 네가 세상에서 한평생 일한다면 기껏해야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고 피조물로서 너라는 사람의 사명을 완수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너는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 다음 세대로 윤회할 따름이다. 여기에는 복이니, 창조주와의 관계니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창조주의 경영 사역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더 말할 거리도 안 된다. 지금 네가 하나님 집에서 한 가지 본분을 이행할 때, 그 일이 지난날 세상에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들고 고될 수 있다. 또한 그 일이 예전처럼 그렇게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성질은 완전히 다르다. 이는 인간이 살림을 사는 것, 가족 부양과는 전혀 다른 일이며,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과도 다르다. 이 일은 무엇이 되었느냐? 창조주가 네게 맡긴 일이자 책임이 되었다. 네게서 이 일은 너의 본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본분과 세상에서의 사명 중 어떤 것이 더 고귀하겠느냐? (본분이 더 고귀합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일이며, 하나님이 맡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일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힘든 일이든 고된 일이든, 고귀한 일이든 비천한 일이든, 너의 몫이 있기만 하다면 그것은 너의 본분이 된다. 네가 그것을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이자 책임으로 여길 수 있다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가 생기는 것이다. 네가 행한 일, 네가 이행한 본분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되는데, 네가 이렇게 성심성의껏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받아들이고 이 일을 해낸다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여길 것이다. 이는 크나큰 복이다. 그렇기에 나는 사람이 큰 이익을 앞에 두고도 그것을 모르고 때로는 원망하기까지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여기까지 듣고 본분에 대해 새롭고 깊은 깨달음이 생기지 않았느냐? 본분은 사람이 구원받는 데 있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 (사람이 본분을 잘 이행하는지의 여부는 그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와 관계되며, 그의 결말, 그리고 종착지와도 관련됩니다.) 그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느냐? (만약 본분이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가지 사명만 완수한 것뿐이기에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구원받는 하나의 길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기회인 것 같습니다. 만약 본분이 없다면 그것은 구원받을 기회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컨대, 본분과 구원을 받는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네가 평생 어떤 사명을 완수했든,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다면 구원받는 것과는 무관하다. 또한 네가 평생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든 그것은 인류 가운데서 한 가지 사명을 완수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한 것이 아니기에 구원을 받는 일과는 무관하며, 인류를 경영하는 하나님의 사역과도 관계가 없다.

무엇을 본분이라고 하는지 거의 다 말한 것 같다. 그렇다면 본분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크게 보자면 본분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으로 인해 생긴다. 작게 보자면 본분의 생성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면서 사역에 대한 다양한 필요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사역은 사람의 협력을 필요로 하며 사람을 통해 이뤄진다. 이로써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각종 책임과 사명이 생기게 되는 것이며, 이 책임과 사명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본분이다. 본분의 유래와 정의로 인해, 하나님 집에서 사람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각종 사역을 당연히 사람이 협력해야 할 본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분에는 귀천이나 크고 작은 중요성의 차이가 있느냐? 그런 차이는 없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 집과 하나님의 사역 전개에 필요한 것이라면 곧 사람의 본분이 된다. 이것이 바로 본분의 정의이자 유래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하나님의 사역이 없다면 본분이 생기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이제 확실해졌을 것이다. 본분은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련 있습니다.) 그렇다. 사람의 본분, 그러니까 피조물의 본분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즉, 땅에서 그리고 인류 가운데서 행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없다면 사람에게 본분이란 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본분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측면에서 보면, 네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경륜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준 사명이다. 작은 측면에서 보면, 너는 하나님이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하는 각종 사역의 필요로 인해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중요한 물건 하나를 간수하거나 보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사소한 일로서 네가 맡은 ‘책임’이라고밖에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 본분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좀 더 크게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이 맡긴 일이다. 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교회를 이끄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위험하고 더 큰 사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필요한 일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본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본분이란 크게 보면 한 사람의 사명이자 하나님이 맡긴 일이고, 작게 보면 사람이 맡은 책임이자 의무이다. 너의 사명이자 하나님이 맡긴 일이고, 너의 책임이자 의무라면 이는 네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본분은 개인적인 일과 무관하다. 왜 이것을 얘기하겠느냐? 사람은 본분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분이란 무엇이냐? 본분이란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에서 피조물이 받아들여야 할 일이자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큰 전제는 알고 있겠지만 세부적으로 놓고 말한다면,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이는 농사를 짓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땅에 농사를 짓는 것과 하나님 집에서 농사를 짓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같겠느냐?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분과 개인적인 일의 차이이다. 네가 본분을 네 개인적인 일로 여겨 “제 땅에 농사를 지을 때도 이렇게 합니다. 먼저 봄에 씨를 뿌린 다음 비료를 주고 잡초를 제거하지요. 가끔 가물 때는 물을 주기도 하고요. 가을이 되면 수확할 수 있는 만큼 수확합니다.”라는 자세로 하나님 집에서 농사 짓는 본분을 이행할 때도 네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과 똑같이 하면 되겠느냐? 이는 네가 본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이는 “저는 늘 착실하게 본분을 이행합니다. 본분을 제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요.”라고 말한다. 이 원칙은 옳은 것이냐? 너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너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차이가 생긴다. 자신을 위해 일할 때는 어떤 원칙으로 하느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다른 사람과도, 하느님과도 상의할 필요가 없다. 언제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원칙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이런 원칙으로 하면 되겠느냐? 이것을 본분을 받아들이는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분을 대할 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다’는 말은 참 쉬워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네가 본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방금 우리는 본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본분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하나님이 맡긴 일이며, 하나님의 경륜 사역, 그리고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본분 이행의 원칙과 네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는 원칙은 관계가 있겠느냐? 네 개인적인 취향과 생활습관, 생활 수칙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진리와 관계가 있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이는 “이 본분이 제게 온 이상 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본분 이행의 제1 수칙은 여러분 중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본분을 이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것 외에도 더 높은 기준을 하나 더 세웠습니다. 바로 본분을 제 일처럼 여겨 이행하는 것이지요.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그것을 이뤄 최고의 성과를 낼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원칙은 어떠하냐? 옳은 것 같으냐? 만약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본분을 받아들였다면,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과 본분을 대하는 원칙은 이래서는 안 된다. 방금 언급한 그 기준이 더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며, 진리가 있는 모습이냐? 먼저, 이렇게 분석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 본분은 누가 배정한 걸까? 상위 리더일까, 중간 리더일까, 아니면 하위 리더일까? 누가 시킨 거지?’라고 분석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라. 이것이 한 가지 원칙이다. 이 밖에도 네게 주어진 본분의 상하 귀천을 논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하나님이 맡긴 일이자 하나님 집의 사역이지만, 남들에겐 별것 아닌 일로 보일 거야! 얼굴이 드러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티 나지 않고 뒤에서 힘쓰는 일은 다 나보고 하라고 하네. 이게 무슨 본분이야? 이건 내 본분이 아니야. 내 본분은 사람들 앞에 서고 이름이 남는 것이어야 해. 아무도 몰라주는 일이라면 적어도 내게 이득이 되고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본분이어야 돼.’라고 분석하면 되겠느냐?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는 건 하나님으로부터 본분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취향에 따르는 일이다. 이는 본분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본분을 거절하는 행위이다. 본분을 고르는 순간 그것은 참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 안에 네 개인적인 취향과 바람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너는 자신의 이익과 체면 등 갖가지 요소를 모두 고려했다. 본분을 대하는 너의 이러한 태도는 순종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분석하지 말고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따지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 본분이자 해야 할 일로 여겨야 한다. 둘째, 상하 귀천을 논하지 않고, 어떤 성질의 일인지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얼굴이 드러나는 일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중요시하지 마라. 이 두 가지는 모두 본분을 대할 때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태도가 아닌 다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에 하나 실수할 경우 도태되면 어쩌나 걱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형제자매들이 너를 리더로 뽑는다면, 너는 속으로 이왕 선발되었으니 그것이 네 본분이고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본분을 대하는 마음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리더가 된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그것은 칼날 위를 걷고 살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아. 잘해도 알아주지 않고 만에 하나 잘못하면 늘 책망이 따르잖아. 그나마 책망 정도면 괜찮은데, 교체되기라도 한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이 길을 가야 하지?’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어떤 태도냐? (경계하는 태도입니다.) 경계하고 오해하는 태도다. 본분을 대함에 있어 이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태도란 어떤 것이냐?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기꺼이 맡아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기꺼이 맡아 하는 것’이라? 그것은 알맹이가 없는 말 아니냐? 두려움에 그런 태도를 취했는데,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 기꺼이 맡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어떤 상태를 기꺼이 맡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너는 추후에 생길 문제들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이겨 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마음에 수많은 것들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가 하는 ‘기꺼이 맡아 하겠다, 죽더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지옥 불이라도 뛰어들겠다’라는 말은 젊은이들이 외치는 혈기 어린 구호와 다름이 없다. 그러한 구호는 절대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현재 너에게는 본분 이행에 대해 알아가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네가 이러한 진리를 갖춘다면 일이 닥쳤을 때 그 진리와 그런 태도가 네 안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순조롭고 적극적으로 그 일과 본분을 받아들이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며, 진리이다. 기꺼이 맡아 한다는 말과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로 네 마음속 공포를 없애려 한다면 효과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진리도, 실행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저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다른 생각도, 불순물도 없습니다. 기꺼이 맡아 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겉으로 본분을 받아들였다고 치자. 그 뒤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당하기 힘들고 마음에는 그래도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책망받는 것을 보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더 겁을 집어먹고 그 본분을 짊어지기 힘들어한다. 자신의 분량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질 것이고, 그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본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호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순종과 적극적인 협력, 이것이 바로 너의 본분이자 책임이다. 네 앞에 놓인 길이 어떻든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두려움과 걱정, 추측 등은 모두 본분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다.

방금 우리는 본분의 정의와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또 사람이 본분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교통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모두 나눴으니, 이제 본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명확해졌을 것이다. 그러하냐? (네.) 본분이란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는 너희 모두에게 낯선 화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화제는 입버릇처럼 꺼내도 무방하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해도 좋다. 어쨌든 본분의 정의에 대해 깨닫는 것은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론도, 구호도 아닌, 한 가지 진리이다. 이 진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하나님이 맡긴 일을 마음속으로 어떻게 정의하고 바라봐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그 일에 협력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다.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해결해 준다. 어떤 이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밑천으로 여기고, 어떤 이는 자신의 일로 여기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사업, 혹은 심심풀이 소일거리나 오락거리로 여긴다. 네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대하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위해 해야 할 일, 또는 협력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는다면, 네가 하는 일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네가 본분을 너 자신의 사업이나 사적인 일, 또는 개인적인 직업이나 취미로 여긴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인식이다. 왜 이러한 화제를 언급하겠느냐? 이 화제가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본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이러한 진리를 깨달으면,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점차 진리에 부합하게 되고, 진리의 원칙이나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본분을 대하는 네 관점과 태도가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다. 본분은 하나님이 네게 맡긴 일이자, 네가 마땅히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네 개인적인 경영도, 네가 두각을 드러낼 기회로도 될 수 없다. 어떤 이는 본분 이행을 통해 자신의 경영을 하고 당을 지으며,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어떤 이는 내적 공허함을 채운다. 또 어떤 이는 본분 이행을 통해 자신의 요행심리를 만족시키며 ‘본분을 이행했으니 하나님 집에 몫이 있겠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마련하신 아름다운 종착지에도 분깃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본분에 대한 이런 태도는 옳지 않으며,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므로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

무엇을 본분이라고 하는지, 어떻게 본분을 대해야 하는지, 본분을 대할 때는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통을 한 것 같다. 그러면 듣고 나서 어떤 것을 깨달아야 하느냐? 우선, 그 안에 있는 이상(異象)에 관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실행 과정과 실생활에서 네가 본분에 관한 진리를 대할 때 어떤 오해와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본분 이행과 관련된 진리를 마주할 때, 이러한 말씀이나 진리가 네 내면의 상태를 해결해 준다면, 이는 방금 말한 내용들을 네가 완전히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일상생활 속에서 본분과 관련된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런 진리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본분 이행과 관련된 진리는 사실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듣고도 뒤죽박죽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다면 이는 그 사람이 진리에 대해 너무 얄팍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조금의 분량도 없다는 의미이다. 네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하기만 한 후 시키는 대로 한다면, 그것은 종교의 믿음법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해서는 생명 진입을 할 수 없으며, 그런 사람에게는 분량이 전혀 없다. 분량이 전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누군가 유혹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바로 그 사람을 따라간다. 책망과 훈계 몇 마디, 또는 부드럽지 못한 말만 들어도 믿음을 저버릴지 모른다. 그런 자는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좌절이나 생활상의 어려움을 마주하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더 이상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면 즉시 믿음을 버린 채 뒤돌아 도망친다. 본분 이행이라는 이 기본 진리에 어느 정도 진입했다면, 너는 이미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이러한 진리의 실제에조차 진입하지 못하고 그것을 갖추지 못했다면, 이는 진리가 네 안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진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네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해야 비로소 그 진리를 더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네가 늘 진리에 의구심을 품으며 의문을 제기하고 연구하거나 분석한다면, 그 진리는 네게 있어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네 실생활과 무관하며 너의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진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행동의 지침, 사람으로서의 수칙, 또는 하나님을 믿는 지침으로 삼는다면, 그 진리는 네 삶과 인생 목표, 방향, 그리고 일 처리 방식을 바꿔 놓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역할이다. 이제 너희는 본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큰 도움과 이익이 되고 보탬이 될 것이다. 적어도 너희는 본분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또한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관심이 있거나 바람과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진리이자, 가장 기본적으로 진입해야 할 진리이다. 무엇을 본분이라고 하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할 수 있는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받아들이고 대해야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몇 년 동안은 너의 본분에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다가 특정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의 행정을 거스를 수 있으며,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좀 좋게 얘기한다면 B팀으로 보내질 수 있고, 심할 경우는 도태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기본적인 진리라고는 하나,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계되므로 무척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사람이 본분의 정의를 도리적으로 알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올바른 태도로, 그리고 진리에 부합하는 태도와 상태, 관점으로 하나님이 너에게 준 본분을 대해야 한다. 바로 이런 효과에 도달해야 한다. 이 본분 안에는 단순히 힘만 보태거나 어떤 일을 해내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더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본분의 개념과 정의에 대해 반드시 깨달아야 하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본분의 정의와 유래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본분의 성질과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의 성질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일이나 사역을 본분으로 여기는 것과 어떤 사명 또는 일거리를 너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여기는 것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네가 어떤 일을 본분으로 여긴다면 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너는 “이 일은 내 본분이야. 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일까? 교회의 규정은 또 무엇일까? 그 안에 있는 원칙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봐야겠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며, 사람이 본분을 대함에 있어 가져야 할 태도이다. 반대로 세상의 일이나 개인적인 일을 대할 때는 어떤 태도겠느냐? 진리를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원칙이니 뭐니를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 원칙을 따져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의 원칙이라면 돈을 많이 벌어 더 나은 삶을 살고, 부자가 되며, 세상에 두각을 드러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등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전부 세상과 시대의 흐름, 사탄, 그리고 사악한 인류에게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 그리고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갈라놓을 수 없다. 반면 사람이 종사하는 일련의 직업이나 일들은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와 어떤 관계도 없다. 능력이 있고 고생을 견디며 열심히 분발하기만 하면, 독하게 살며 용기만 있으면,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고 사업을 크게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집에서는 그러한 원칙과 철학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 집에서는 네가 어떤 일에 종사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 본분의 성질이 귀해 보이든 천해 보이든, 중요해 보이든 별것 아닌 걸로 보이든, 눈에 띄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직접 맡긴 일이든 교회의 형제자매가 배정해 준 일이든, 그러니까 하나님 집에서 네게 준 일이 무엇이든, 네 일 처리 원칙은 진리의 원칙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러한 원칙은 모두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와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 집에서 규정한 행정이나 사역지침(직역: 사역안배)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희는 마땅히 본분과 사람이 세상에서 종사하는 일, 이 두 가지를 구별해 대해야 한다.

내가 왜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교통하겠느냐? 이것이 중요하냐? (중요합니다.) 어떤 부분이 중요하냐? 이는 본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관계된다. 너는 세상에서 일을 할 때의 태도나 원칙을 본분 이행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태도나 원칙을 본분에 적용한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느냐? (자기 뜻대로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자들은 일을 할 때 다른 이와 상의하지 않고 자기가 무엇이든 결정하고 싶어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고 시원하며, 억울할 일도, 괴로움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암투를 벌이고 시기 질투하고 당을 짓고, 남의 공을 가로채 상을 받으려 하며 자신을 뽐내는 일 등이 일어나고, 뭐든 대충 넘기고 무책임하게 굴면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속이고 독립 왕국을 세우는 일이 자주 생긴다. 결론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세상에서 종사하는 모든 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와 원칙에 따라 행하고 진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경영도, 사업도 아니며, 사생활도 아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 체면, 지위, 세력, 앞날과 어떤 연관성도 없으며, 그것은 오직 사람의 생명 진입이나 성품 변화와만 관계 있을 뿐이다. 반면, 본분을 이행하는 것 이외에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온전히 개인의 경영에 속한다. 네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거나 기업을 운영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 가정을 버리고 직장을 버리든, 다른 이들에게 모욕과 오해를 받든, 감정적ㆍ육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고생을 하든, 여론의 압박을 받든 ─ 네가 하는 모든 일의 성질은 너 개인의 바람과 목표, 야심, 욕망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네 개인적인 경영이지, 다른 이를 위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저는 전 인류를 위해 공익사업을 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뜻과 원칙에 따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 이다. 설령 어떤 이가 일어나 “저는 인류를 위해 가장 공익적이고 위대한 사업을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 좋은 일을 할 겁니다.”라고 말한다 한들 그의 목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개인의 경영을 위해 그런 일을 할 뿐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을 하든, 얼마나 고생을 하고 대가를 치르며 큰 기여를 하든, 설령 전 인류와 시대를 바꿔 놓고 새로운 기원을 여는 일을 한다 한들, 그의 목적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는 인간들이 하는 일의 공통된 성질이다. 일의 크기에 상관없이 개인적인 명리에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개인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경영은 하나님의 경영과 관계가 있겠느냐? 털끝만큼의 관계도 없다. 어떤 이는 “그건 틀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와서 시대를 바꿔 놓았습니다. 시대를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일일 테니 하나님의 경영과 관계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경영과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면 반만 맞은 것이다. 거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며, 본질적인 문제 또한 존재한다. 하나님의 경륜과 무관한 것은 전부 사람의 경영이다. 이것이 하나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충해서 말하고자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의 성질이 개인을 위한 것, 그러니까 자신의 명리를 위한 것이라면 마지막에 이득을 보는 이는 누가 되겠느냐? 그 자신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가 한 모든 일의 성질과 원칙,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성과는 다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춘다. 그럼 자신을 위하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하는 것이냐? (사탄을 위하는 것입니다.) 사탄을 위해 하는 일의 성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에 내포된 본질은 무엇이냐? 왜 그것을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느냐? (그가 하는 일의 출발점, 원칙,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가 일을 하는 출발점, 근원, 원칙이 전부 사탄과 사악한 것에 속하므로 그 일은 분명 옳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그가 증거하는 것은 누구겠느냐? (사탄입니다.) 그렇다. 그가 증거하는 것은 사탄이다. 인류는 오늘날까지 6천 년의 역사를 써 왔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가 행한 일들의 공로를 창조주에게 돌린 사관(史官)이나 작가가 있더냐?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이것은 인류의 위대한 사업이 남긴 유적, 또는 업적이다’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한 유적과 업적을 만든 명인이나 위인들은 인류의 마음속에서 누구를 대표하느냐? (사탄을 대표합니다.) 모든 명인과 위인,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신이나 우상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이 점하고 있는 지위는 하나님과 동일하다. 이것이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겠느냐? 나는 방금 사람이 일을 하는 근원과 동기, 출발점, 원칙 등이 모두 사탄에 속하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사람이 사람의 수단, 또는 은사로 어떤 일을 이뤄 이름을 남긴다면 최종적으로 그 모든 공을 사탄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례로,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공자, 관우 등 위인이나 명인들을 숭배하는 것만 봐도 인류가 모든 공을 사탄에게 돌렸음을 알 수 있다. 역사에 나오는 이러한 유명 인물, 위인 등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든, 그 근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서로 다른 시기에 특정한 일을 하도록 배치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 인류의 역사 기록을 통틀어도 ─ 현대사든 근대사든 ─ 창조주의 행사를 증거한 자는 아무도 없다. 전 인류의 역사에서 오직 성경만이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에 하나님이 행한 두 부분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국한적이다. 사실 하나님은 많은 말씀을 하고 많은 일을 했지만, 인류가 기록한 것은 더없이 미미하고 보잘것없다. 이와 반대로 명인이나 위인들을 기록하고 알리는 서적들은 매우 많다. 이것이 방금 우리가 말한 그 문제의 본질을 말해 주고 있지 않느냐?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일에 종사하는 것의 성질과 본질은 무엇이냐? (개인의 경영을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의 근원은 사탄을 증거하는 데 있다. 개인의 경영에 있어 모든 원칙과 동기는 사탄에게서 나오며,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와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그렇다면 본분의 성질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종사하는 일이다. 맞느냐? 그 일은 진리에 근거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은 진리의 원칙과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일하고 행동하며, 그 성과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창조주를 더 깊게 알게 되며, 창조주에게 더 진실하게 순종하고, 나아가 피조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점점 더 정상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서 종사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그 반대의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오래 일할수록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부분도 많아진다. 또한 개인적인 경영을 더 잘, 더 성공적으로 해낼수록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요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왜 본분과 세상에서 하는 일의 차이를 말하겠느냐? 이를 통해 사람에게 어떤 진리를 알게 하겠느냐? 예를 들어 교회의 선거를 통해 리더가 되었다면, 그 교회의 리더는 네 본분이다. 네가 어떤 본분을 받았든 그것을 네 본분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요구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한다’는 대답은 너무 두리뭉실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세부 내용이 있느냐? 먼저 너는 그것이 본분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직위가 아니다. 만약 직위를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면 문제다. 만약 네가 “저는 교회의 리더가 되었지만 졸병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저보다 높고 훌륭하십니다.”라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그렇게 포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정상적으로 하면 된다. 포장하지 말고 올바르게 받아들여라. 무엇보다도 너는 이 본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 교회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있다. 너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진리의 실제를 알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또한 연약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그 상태에서 나와 적극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 밖에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전부 본분을 이행하게 하고, 마지막까지 능력을 발휘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관한 진리를 알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본분을 건성으로 대하지 않고 잘 이행하여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세우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여러 해 믿었으나 인성이 악한 자, 본분을 이행하면서 방해하고 교란하는 자들이 있다. 제명해야 할 사람은 제명하고 책망해야 할 사람은 책망하는 등 각기 부류대로 나누어 적절히 배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인성과 자질이 좋은 사람이 한 가지 사역을 책임질 수 있다면 마땅히 양성해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환이다. 이러한 것들이 리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해야 할 일이 아니냐? 이 본분을 받았음에도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없다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못합니다.) 리더 본분을 받았다면 이러한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야 한다. 첫째, 좋은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 둘째, 형제자매들의 생명 진입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진리에 대한 네 이해와 그동안 들은 말씀을 기반으로, 그들에게 이러한 진리의 실제를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이다. 셋째,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본분을 이행하게 하되, 건성으로 하지 않고 효과가 있게 해야 한다. 넷째,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자는 즉시 처분하고 제지해야 한다. 다섯째, 각 부류의 사람들을 분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부 소극적이고 연약한 사람들은 일시적인 원인으로 그렇게 된 것일 수 있으므로 모두 한데 묶어 “이 사람들은 늘 소극적이니 방법이 없어!”라고 해선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의 자질이 어떤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하나님을 믿은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등에 기반하여 각 부류의 사람에게 서로 다른 맞춤형 사역을 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 집에서 최대의 기능을 발휘하여 본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본분을 받은 후 네 마음에 이러한 생각들이 있다면, 부담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의 눈은 늘 주의 깊게 주변을 관찰할 것이다. ‘관찰한다’고 해서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보고 성가시게 하거나 외모가 별로인 사람을 보고 놀리라는 게 아니다. 또한 너에게 불복하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혼낼지 생각하라는 것도 아니다. 각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살핀 후 그에 따라 합당하게 배정하라는 것이다. 먼저 교회 사람들을 머릿속에서 정렬한 후, 자질이 좋은 사람과 떨어지는 사람을 분리하고, 전 시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아예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자들을 각각 분류하여라. 그리고 늘 교란하는 자, 늘 소극적이 되는 자,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분류해 놓고, 늘 이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나서 그들을 만나 보아라. 그러면 각 부류 사람들의 다양한 상태나 분량을 모두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부담을 갖고 있기에 나오는 행동 아니겠느냐? 이것이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아니겠느냐? 네가 이렇게 올바른 태도를 갖고 부담을 느낀다면, 주어진 사역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이러한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너는 ‘교회에서 나를 뽑았으니, 내게는 좋은 일이고 행운이야. 이번 생에 내가 한자리 하게 될 줄이야. 그 자리가 높든 낮든 어쨌든 직위를 얻은 거잖아.’라고 할 것이다. 직위를 얻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고는 ‘직위를 얻으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 교회의 리더들은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이 감히 끼어들지를 못해. 예배를 할 때도 제일 먼저 교제하고, 예배가 끝날 때도 리더가 마무리를 짓는 그런 우월한 점이 있지. 이 밖에도 교회에서 좋은 것은 우선적으로 누릴 수 있어. 또 하나 좋은 점이 있는데, 바로 일반적인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모든 걸 직접 해야 하지만, 리더가 되면 다른 사람을 대신 시킬 수 있다는 점이 있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냐? (아닙니다.) 많은 이가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한다. 그런 자들은 본분을 받으면 약간의 기쁨과 희열, 그리고 자축의 감정과 즐거움을 느낀다. 정확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중엔 생각 끝에 ‘겸손해야지, 우쭐거려선 안 돼. 우쭐거리는 건 거만한 태도고, 거만한 태도는 실패의 전조야.’라고 중얼거리며 저자세를 취하지만, 속으로는 아무도 몰래 자화자찬하며 ‘마침내 내가 뽑혔구나. 나보고 자질이 좀 부족하다고 했는데, 자질이 부족하면 어떻게 리더로 뽑힐 수 있겠어? 왜 다른 사람이 뽑히지 않았겠어? 이번 선거에서 내 득표수가 가장 많았잖아. 다른 사람과의 표차가 꽤 컸단 말이야. 이게 바로 내 강점이야.’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뱉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람들 앞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리더가 된 것은 하나님의 높여 주심입니다! 저도 하나님이 제게 이런 일을 맡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그것은 거절이고 불순종이니까요. 그러니 달갑게, 그것도 잘 해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본분이 제게 온 이상 밀어내면 안 될 테니까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본분에 그런 태도를 보이시니 저희도 나중에 그런 태도를 갖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즉, 이 본분을 이행할 때, 그리고 본분이 임했을 때, 그는 무엇보다 먼저 위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내게 온 이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할까? 예전에 누가 이 본분을 잘 이행했는지 보고 배워야겠어.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일까? 교회의 사역지침에는 이런 내용이 있을까? 예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이런 일들을 잘 몰랐었어. 갑자기 이런 본분을 맡게 되니 정말 당황스럽구나. 어떻게 해야 할까?’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사실 네게 마음만 있다면 길은 생긴다. 네가 그것을 본분으로 여긴다면 길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어떤 이는 이런 본분을 앞에 두고 “이 사람들을 저에게 맡겼단 말인가요? 앞으로 그들이 무엇을 먹고 마실지, 어떻게 예배하고 어떤 사역을 맡길지 등등이 전부 제 말에 달렸단 말인가요? ‘이 본분을 맡게 되다니, 마음이 무겁구나’, 지금 제 심정이 이 말로밖에 형용이 안 됩니다.”라고 한다. 이런 심정은 어떠냐? 무엇 때문에 마음이 무겁단 말이냐? 마치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마음이 무겁다’는 말 한 마디로 할 수 있느냐? 그걸로 된 것이냐?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냐? 그런 말은 알맹이가 없는 빈말이자 도리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외식하는 자 아니냐? (맞습니다.) 너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역시 위선적이다. 사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평범한 사람은 아주 작은 직위라도 얻으면 그것을 한껏 뽐내고 싶어 하며, 단번에 자신의 몸값이 몇 배나 오른 것처럼 느끼곤 한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공통된 특징이다. 사람은 조금이라도 지위와 명리의 맛을 보면 대단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예전과 달라진다. 각종 성품과 생각이 모두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 타락한 인간은 다 이런 것들을 갖고 있다. 교회 리더가 된 후 정상적으로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교회 리더나 상층 리더로 뽑힌 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담이 작아서가 아니다. 리더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몇 년 동안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위엄 있는 모습을 만들어 낸 후 한쪽에 가서 자세를 잡는다. 다른 이들도 그를 보며 “정말 멋집니다!”라고 말하니, 그 자신도 스스로를 리더의 재목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들은 리더가 된 후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조차 몰라 별의별 작태를 보이곤 한다.

너희에게는 방금 전에 말했던 그런 모습이 없느냐? 정도만 다를 뿐, 모두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 지나야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1, 2년? 3, 5년? 아니면 10년?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결심과 정도에 달려 있다. 어떤 이는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깨달은 진리와 진입이 정비례한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는 족족 그것을 살아내고 진입할 수 있다. 깨달으면 깨달은 만큼 진입하고, 깨달은 만큼 받아들이고, 체득하며 체험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깊게 이해하지만 살아 내지 못함은 물론, 진입도 전혀 없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내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며, 일이 닥치기만 하면 바로 추한 몰골을 드러낸다. 안간힘을 다해 참고, 억누르고, 막아도 숨기지 못한다. 그렇게 해 봤자 그의 내적 상태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은 세월이 길고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일을 여러 번 체험한 사람이라면 교활하고 간사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위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적 상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 추구는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로 돌아오게 된다. 본분 이행에 관계되는 일도 마찬가지다. 네가 어떤 본분을 받든, 어떤 본분이 네게 임하든 ― 그 본분이 무거운 책임을 요하는 것이든, 간단한 것이든, 눈에 띄지 않는 것이든 ― 진리를 구하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그 본분을 대한다면, 너는 그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본분 이행 과정에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도 각기 다른 정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반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본분을 단순히 너의 경영이나 임무, 취미 생활, 개인적인 일 정도로 여긴다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본분을 자신의 경영으로 여기는 것과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본분을 자신의 경영으로 여길 경우,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명리와 지위이므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에 맞추길 바라게 된다. 그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느냐? 우선, 너는 늘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없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열심히 노력한 듯하지만, 사실 너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으므로 네가 한 일의 성과도 좋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렇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요구에 맞게 행하지 않고 네 뜻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너는 자주 과오를 범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며, 좋지 못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이미 쓴맛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교회에는 B팀에 속한 사람들이 꽤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만약 이 사람들이 본분 이행에 관련된 진리를 깨닫고, 그렇게 제멋대로 하거나 방해하고 교란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말을 듣고 순종하며 착실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면, 지금 B팀에 있겠느냐? (아닙니다.) 그 많은 사람이 어떤 문제로 B팀에 가게 되었느냐? (방해하고 교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들의 방해와 교란의 근원은 무엇이냐? 그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이냐 아니면 그렇게 하려고 계획했던 것이냐? B팀에 있으면서 괴롭겠느냐, 괴롭지 않겠느냐? (괴로울 것입니다.) 그들은 B팀에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B팀에 가게 된 이유는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도, 추구하지도 않고, 인성 또한 극도로 사악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인성이 극도로 사악하면 모두 거기로 가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고, 인성이 극도로 사악했으며, 본분 이행 과정에서 하나님 집의 사역을 자주 방해하고 교란했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손해를 끼쳤다. 그것이 일련의 결과를 낳고 영향을 미쳤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그곳으로 보낸 것이다. 이것이 그 이유이다. 그들은 무엇을 본분이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본분 이행’이라는 이 일을 깨닫고 있었으며, 또한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본분을 이행하기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네가 원하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다 말해도 그것은 전부 구호이므로 아무 쓸모가 없다. 너는 본분을 이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는 기초에서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한다. 네가 “저는 진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도 성품이 별로 변하지 않았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킨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며,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순종하지는 못했지만 말은 들었습니다.”라고 한다면, A팀에 남겨둘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최소한의 요구조차도 지키지 못하고 방해했다. 그런 사람은 A팀에 남겨 둬서는 안 된다.

사람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무엇을 본분이라고 하는지 알아야 하며, 본분에 대해, 본분과 관련된 사역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본분에 관한 진리를 더 깊이 알 수 있다. 방금 나는 본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사람은 본분을 대할 때 최소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 네가 “하나님께서 제게 어떤 일을 주시면, 그 일은 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라고 한다면, 이런 태도는 어떠냐? 절대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일을 그르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옳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느냐? 먼저 진리와 원칙을 찾고 구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그 일이 네 본분이라는 것을 확정하고 나서, 그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할지,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진입 원칙은 무엇인지, 네가 해야 할 사역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충성을 다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를 찾아야 한다. 누구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느냐? (하나님입니다.) 맞다. 하나님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다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원칙을 견지하고 자기 본분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진리의 원칙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자기 본분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네가 어떤 일을 맡은 지 1~2년이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아무도 이 일에 대해 묻지 않네. 이 본분이 없어진 건 아닐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 그렇겠느냐? 누가 묻든 묻지 않든, 조사하든 조사하지 않든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라. 네게 주어진 일이 네 개인적인 일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네게 맡겨진 일이 되었으니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잘할지 하는 것은 네가 마땅히 행하고 생각해야 할 너의 책임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봐 주고, 감독하고 독촉해 주기만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어떤 태도냐? 소극적인 태도겠느냐, 적극적인 태도겠느냐?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그것이 본분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냐? 결코 아니다. 본분의 개념, 본분을 대하는 태도, 본분과 세상일의 차이에 대한 화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너희는 앞에서 말한 내용들을 되새겨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왜 본분 이행과 개인의 경영 간의 관계를 말했겠느냐? 이것을 말함으로써 무엇을 피할 수 있느냐?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본분 이행에 올바른 길과 방향, 원칙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봐도 어떤 행동이 개인의 경영에 속하는지를 알려 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 두 가지를 깨닫는 것은 일부 진리의 글귀를 깨닫는 것과는 다르다. 너는 그것들이 어떤 모습들과 내적 상태들로 나타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네가 이러한 모습들과 내적 상태들을 꿰뚫어 보고 분별한다면, 그리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네게 그릇된 모습들이 나타날 때 너는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이 부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개인적인 경영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게다가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바로 이런 결과가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네 일련의 생각과 행위, 그리고 일 처리 원칙이나 의도가 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그것이 본분 이행이 아니며, 그 일이 본분 이행의 원칙과 범위에서 벗어나 성질이 변했음을, 네가 자신의 경영을 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비로소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러한 생각이나 행동, 태도를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그런 일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모를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따랐음에도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제게 면류관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았음에도 바울과 같은 길을 간다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진리를 깨닫는 것이 네게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자신이 타락한 모습을 드러내며 타락한 성품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실행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정말 가련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에 진입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는 목적은 일을 할 때,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네가 추구하는 것이 진리임을 알고, 네가 가는 길이 옳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함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했고, 진리 추구하기를 원하기도 했지만 큰 힘을 들여 한 일의 성질이 결과적으로 기대한 것과 정반대이고 옳지 않은 것이라면 정말 큰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듣고 자주 먹고 마시는 것의 목적은 대충 보고 듣고 넘기거나 마음을 충실히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도리를 갖추고 말재주를 키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진리를 갖추고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목적이다. 사실 방금 말한 내용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진리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일 뿐이다. 그러나 진리는 대소로 나눌 수도, 귀천으로 나눌 수도, 더욱이 깊이에 따라 구분할 수도 없다. 그저 가장 기본적인 진리, 또는 초보적인 진리 등으로 나눌 뿐이다. 진리에 연관되거나 실행에 연관된 것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이다. 가장 얕은 진리도 그 실제적인 면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도리적으로만 깨달은 것은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앞에서 나는 본분과 관련된 화제들을 다뤘지만,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 합격된 본분 이행에 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합격된 본분 이행’의 핵심은 ‘합격된’이라는 수식어에 있다. 그렇다면 ‘합격되다’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겠느냐? ‘합격되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 안에도 너희가 찾아야 할 진리가 있으며, 이를 위해 많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교통해야 한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원칙과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한 것들을 깨닫는 것은 합격된 본분 이행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움이 될 뿐이지, 그것이 본분 이행의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잘못된 길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역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사역을 전개하는 곳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된다. 또한 그 의무와 책임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역 중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이 역사하고 구원하는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이행한 본분이 합격되는지 등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 집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였기에 너에게는 본분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는 네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고 진리의 기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가늠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명확히 깨달아야 하며, 이해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찾고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에서 서로 다른 본분을 받게 된다. 즉, 각자의 은사와 자질, 연령, 조건, 시기 등에 따라 서로 다른 본분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본분이 무엇이든, 네가 그것을 어떤 시기, 어떤 상황 속에서 받았든, 본분은 그저 본분일 뿐 사람의 경영이 될 수 없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은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격되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며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격’했다는 말씀을 듣는다면 네 본분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합격’했다고 말씀한다면 너는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한 것이다. 너도 본분을 이행했고, 하나님도 네가 본분을 이행했음을 인정하지만, 합격되게 하지는 못했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심할 경우, 구원받을 희망조차 사라지고 깨지게 된다. 심하지 않을 경우에는 본분 이행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한동안 방임된 후, 따로 처분을 받고 배치될 것이다. 여기에서 처분받고 배치된다는 것은 도태를 의미하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이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태도를 봐서 결정할 일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너희는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그 문제를 대하고, 그것을 자신의 생명 진입이나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일로 여겨야지, 대충 넘겨서는 안 된다. 사람은 부류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도 지켜보고 있다. 하나님은 본분 이행으로 서로 다른 결과를 낸 사람들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합격하는 이도 있겠지만, 합격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이가 있을 것이고, 더 지켜봐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보기에 불합격한 사람들도 무척 많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중 일부를 기다리고 지켜보겠지만,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규정했을 것이다.

이제 어떤 것이 본분을 합격되게 이행하지 못하는 것인지 교통하겠다. 몇몇 사례나 이야기를 나눌 텐데, 너희는 그 사례 속 인물들의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을 요소가 있는지, 합격 기준에 부합하는지 분별해 보거라. 너희가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하면 효과가 더 좋다. 그렇지? 어떤 이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다. 그는 한 지역에 교회 리더로 파견이 되었는데, 그곳에 가자 한 섬김의 집에서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 집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는데, 어쨌든 형제자매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그 가족은 직위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눈치를 살피며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그런 태도가 그 리더에게 어떻게 작용했겠느냐? (시험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 시험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그에게 복이었겠느냐, 화였겠느냐? 복인지 화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그 집 사람들은 특별히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들은 리더를 맞이한 후 매끼 고기며 맛있는 것들을 대접했다. 그 가족이 왜 그렇게 아첨했겠느냐? 그들이 바보였겠느냐? 그저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런 음식들을 대접했겠느냐? 분명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였기에 끼니마다 고기를 대접했던 것이다. 나중에 기분이 좋아진 리더는 이런 약속을 했다. “당신 가족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군요. 당신의 어머니와 아들, 아내, 그리고 당신까지 전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겁니다.” 그러자 그 가족은 “우리 모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식구들까지도 들어갈 수 있게 됐으니, 고기 대접이 헛되지는 않았어. 계속하자!”라고 했다. 사실 그 집 가족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개념도 없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그것이 좋은 일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싶지 않겠어. 리더가 우리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으니, 갈 수 있을 거야. 리더가 말했는데, 그러면 된 거지. 리더는 하나님 대표잖아!”라고 했다. 그 후 그 집 사람들은 리더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할수록 더욱 극진히 대접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자, 리더는 다른 집에 가고 싶지 않아졌다. 다른 집에 가면 그 집에서만큼 대접받을 수 없고, 자기 비위를 맞춰 주는 사람도 없으며, 그런 수단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리더는 그 집에서 하도 대접을 잘 받아 ‘돼지’처럼 살이 올랐고, 얼굴은 터질 정도로 토실토실해졌다. 그 후 사역자 모임 때 상면에서 보니 ‘한 달 만에 보는 건데,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지? 얼마나 먹으면 얼굴이 저렇게 돼지처럼 커질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 후 조사에 들어가니, 누군가 그 집 사람들이 아부하느라 리더의 얼굴이 토실토실해질 정도로 고기를 대접했다고 고발했다. 그 밖에도 그 리더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사람을 억누르고, 나쁜 일도 아주 많이 벌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아라. 이것도 역시 본분을 이행한 것인데, 어떻게 이행한 것이냐? 먼저,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어땠느냐? 그는 사역하러 간 것이 아니라 지방에 내려가 관리로, 먹으러 간 것이다. 중국에서 끼니마다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지역은 많지 않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렇게 살이 오를 정도로 먹을 수 있었겠느냐?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고기를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내 이동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며 지나치게 많이 먹은 것이다. 안일을 꾀하고 지위의 복을 탐하는 것은 본분 이행이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느냐? 둘째, 그는 분명 어떤 고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부담을 가졌다면, 각지에 가서 사역을 할 때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주 많았을 것이다. 그 많은 사역을 보면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겠느냐? 그 조급함으로 인해 부담이 생기고, 더 많은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사역을 많이 하다 보면 피로가 쌓여 지칠 수 있고, 또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생활 여건상 어쩌다 한 번씩 좋은 것을 먹는다 해도 살이 찔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돼지머리’처럼 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그 리더의 본분 이행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느냐? (불합격입니다.) 불합격은 차치하더라도 본분을 이행했다고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의 본질은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지위의 복을 탐하고 관리 행세를 한 것이다. 그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행을 저질렀다. 자기에게 아첨하거나 맛있는 것을 대접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억누르고, 다른 형제자매들을 부추겨 그 사람을 괴롭혔다. 결국 사람들의 원망이 쌓여 고발당한 것이다. 고발당한 후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의 본분 이행에는 합격의 요소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한 것이었지, 본분을 이행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털끝 만큼의 충성심도 없었거니와 마음도, 힘도 다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먹고, 고기 대접을 받기 위해 그 가족을 기분 좋게 하려고 머리를 굴렸을 뿐이다. 그가 한 노력은 이것뿐이었다. 그는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쁜 짓만 저질렀다. 이는 최악의 본분 이행이 아니겠느냐? 그는 무엇을 본분이라고 하는지 몰랐고,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을 맡기고 책임을 주었건만, 그는 그 일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지위의 복을 누리는 밑천이자 근거로 여겼다. 그 결과 그는 나쁜 짓들을 저지르고, 형제자매들을 교란했으며, 그들의 생명 진입에 해를 끼쳤다. 합격은 고사하고 오히려 악행을 한 셈이다. 이런 본분 이행에는 합격의 요소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기억하겠느냐? 안 한다. 그러니 가련한 것이다. 진리를 모르니 가련하고, 진리를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니 더욱 불쌍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람 머리가 ‘돼지머리’로 변한 예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네.) 이것이 첫 번째 사례로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지위의 복을 탐하였지 충성심은 전혀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더욱 없었으며 하나님이 맡긴 본분을 지위의 복을 누리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런 사례는 분별하기가 쉽다. 너희는 앞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대조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채찍질할 수 있도록, 이 첫 번째 사례를 스스로 거울로 삼고 이름을 붙여 보거라. 이 사례를 보니 어떠냐? 너희는 이런 사람, 이런 행위를 혐오하느냐? (혐오합니다.) 혐오하는 동시에 너희 자신도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느냐? 너희는 이 사례의 인물보다 올바르게 행동하고 자제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의 반만이라도 자제할 수 있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50% 정도는 있을 것이고, 네가 그의 80%가량 자제할 수 있다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 또한 80% 정도 있을 것이다. 이는 네가 얼마나 진리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너희는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으니, 자제하고 절제할수록 구원받을 희망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이는 정비례 관계를 이룬다. 만약 네가 “저는 고기를 보면 식탐이 생겨 절제를 하지 못하고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비위를 맞춰 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도취되어 정상적으로 길을 가지 못합니다.”라고 한다면, 너는 구원받을 희망이 조금도 없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다음은 두 번째 사례이다. 복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우리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각지로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사역은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든,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일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본분과 관련된다. 즉, 그것은 사람의 책임이자 본분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사람의 본분과 관련된다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복음을 전하는 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좋고 부유한 지역으로 갈 때가 있다. 그 사람은 그곳에 간 뒤 ‘이제야 좀 눈이 뜨이는 것 같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저렇게 큰 차를 몰고 저렇게 큰 집에 살다니….’라며 속으로 부러워하고 질투하다가 그것에 연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공을 세웠으니 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복음 전파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먹는 빌미로 변질되었다. 2~3년이 지나자 그는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복음 전파를 통해 사람도 좀 얻고 어느 정도 밑천도 있게 되었다. 금의환향할 때 그는 신수가 훤해져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를 본 마을 사람들이 “저렇게 잘 차려입다니, 어디 가서 큰돈이라도 번 건가?”라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랬다. 그는 큰돈을 벌었다. 복음을 전파해서 번 것이다. 전기밥솥과 카세트 플레이어, 카메라, 전자레인지 등을 들고 온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지르르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고향 사람들마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어디 가서 큰돈이라도 벌었나 생각할 정도였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 그는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었다. 원래 그의 집에는 값어치 있는 물건이라곤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좋은 옷과 좋은 가전제품들을 집에 가져온 것이다. 그는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좋은 것들을 쓰게 됐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가 누리는 것들은 대체 어떻게 얻은 것이겠느냐? 일부는 복음 전파 과정에서 고생의 대가로 바꿔 온 것이었다. 즉, 그가 수년간 하나님을 믿고, 고생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에게 좋은 물건들을 준 것이다. 그럼 정말 진심으로 준 것이겠느냐?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집이 아무리 부유해도 다른 이에게 그렇게 좋은 물건을 쉽게 주지 않는다. 듣기 좋게 ‘바꾼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바꿔 온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일부는 복음을 받아들인 새 신자들 앞에서 우는소리를 하며 대놓고 뜯어낸 것이었다. “저희는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저희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복을 받았고, 얼마나 큰 이득을 보았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성의 표시를 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토록 부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토록 많이 누리고 있으니, 여러분께 남는 것, 또는 쓰지 않는 것들을 저희에게 나눠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몇 번이고 이야기하니 민망해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성의 표시를 한 것이다. 받는 입장에서는 명분이 있으니 당당하다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주는 사람은 기꺼이 원해서 줬겠느냐? 그 사람들이 기꺼이 주었든 그렇지 않든, 그 물건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마땅히 받을 만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어떤 이는 이치를 따지며, “왜 받으면 안 됩니까? 그동안 고생하느라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사람들의 성의를 받는 것 정도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뭘 하는 것이냐? 일을 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냐? 그것은 품팔이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건을 요구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물건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는 감히 그렇게 요구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달라고 할 수 있느냐? 너는 자신이 공을 세웠으니 대가로 그런 물건들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힘을 좀 들였으니 현금으로 바꾸고 싶지만 직접 돈을 요구하는 건 또 좋지 않고 해서 물건을 요구한 것이다. 이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냐? 그 성질이 변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제품화, 상품화하여 팔아먹고 그 대가로 전기밥솥과 좋은 옷 같은 물건들을 바꿔 왔으니, 이것은 어떤 행위겠느냐? 나쁜 짓, 악행이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왜 악행이라고 하겠느냐?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본분을 이행하러 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얻으면 네 사명은 끝난 것이다. 사명이 끝나면 네가 무엇을 원하든 하나님이 네게 줄 것이다. 너는 누구에게도 네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으며, 사람들 또한 네가 원하는 물건을 주고 복음을 살 이유도, 사야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복음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으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어떤 물건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을 요구하는 것 자체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하나님에 대한 모욕의 기호이다. 또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네게 감지덕지하길 바란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역은 상품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복음을 값없이 전해 주며, 어떤 물건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상품화하여 다른 이에게 팔고 물질적인 대가와 재물을 요구했다면 이는 간증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것이다. 이것이 악행이 아니겠느냐? 이러한 본분 이행이 합격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복음을 값없이 사람들에게 베풀어 준다. 그런데 사람이 오히려 그 가운데서 폭리를 취하거나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떤 물건짝이냐? 강도이자 악인이다. 그것은 사탄의 짓거리다! 보거라,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만들었다는 말씀을 그 누구에게도 하기 전에, 사탄도 자기가 사람을 만들었다느니, 여와*가 사람을 만들었다느니, 또 누가누가 천지를 만들었다느니 하고 떠들어 댔다. 사람이 복음을 판다면 그것은 사탄의 행위와 같지 않느냐?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숭배하고 창조주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이는 악행이지, 본분 이행이 아니다. 혹자는 “뭘 좀 얻는 것은 세상에서 흔한 일입니다. 일을 했으면 대가가 주어지기 마련이지요. 어떻게 조금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네가 받은 것은 무엇이냐? 네가 훔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네가 팔아먹은 것은 하나님의 복음 사역과 진리요, 바꿔 온 것은 너 개인적인 이익이다. 이것이 바로 악행이다. 이런 행위를 악행이라고 정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여기느냐? (아닙니다.) 사람이 본분을 받아들이고 이행했지만 이런 결과를 낳았다면, 누굴 탓해야 하겠느냐? (자신입니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것과 관계된다. 어떤 이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지만 염치와 인격,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이는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인성이 없으며, 탐욕스럽고 흉악한 성품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로 인해 합격된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행으로 변질된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어떻게 악행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얻은 것을 보더라도 그의 행위를 악행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라고 한다. 이 말이 옳으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의 본분이자 책임이다. 그는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다했을 뿐이다. 그럼 그가 저지른 그 행위들은 무엇이냐? 본분을 이행할 때 그가 가졌던 속셈과 목적은 무엇이냐?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이에 근거하여 그 사람이 악인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한 사람인지를 규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의 본분 이행의 성질을 규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 임무를 완성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본분을 이행할 때의 근원과 출발점은 진리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갖가지 행태를 보인 것이다. 그러한 행태의 이면에 있는 성질은 악을 행하는 것이지, 진리 실행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일이 적잖이 벌어질 거라 믿는다. 이 사례를 어떻게 명명해야겠느냐? (복음 판매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복음 판매 사례이다. 이름만 들어도 그 사안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복음 판매’라는 말을 언급할 때마다 너희는 마땅히 그게 무슨 일이고 이야기 속 인물이 어떤 상태였으며, 어떤 행위와 작태를 보였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두 번째 사례이다. 이 사례의 성질은 첫 번째 사례보다 심각하다.

다음에 다룰 사례 역시 복음 전파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처음 하나님 집에서는 복음 전파와 관련해 일련의 원칙과 방식을 규정했다. 그중에는 사랑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방식도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어떤 이들은 틈 탈 기회를 찾았다. 어떤 이들이 그랬겠느냐? 본성이 사악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랬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많은 이성과 관계를 맺었다. 그런 일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근거가 있다고 여겼다. 그들의 ‘근거’는 무엇이었겠느냐? 사역지침이었다. 그것을 ‘근거’라고 일컫는 건 적절치 않다. 그들은 다 이유가 있어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탄의 사악한 무리들이 틈을 노린 것이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빌미로 이성을 찾거나 접촉했으며, 그러다가 적합하다 싶거나 비교적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들과 사통하고 접촉했다. 겉으로 보기엔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을 얻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상 개인적인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을 얻는다는 명목을 내걸고, 또 하나님의 사역 확장과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그런 일들을 저질렀다. 누구도 실수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는 없다. 모두 마음속으로 그것이 범죄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며 허락하지 않는 일임을 알면서도 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했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핑계를 대고 자신을 변호하며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가릴 수 있느냐? 한두 번 잘못을 저지른 후 회개한다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지만, 몇 번이고 책망을 듣고도 바뀌지 않는다면 위험해진다. 어떤 이는 그런 일을 저지를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져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또 ‘괜찮을 거야. 나는 의를 위해 헌신하고 있잖아? 어쨌든 사람을 얻었으니 복음 확장을 위해 헌신한 셈이야.’라고 생각을 바꾼다. 그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과 통회, 고통을 느끼는 한편, 또 일관되게 스스로를 위해 해명하고 변명하며, 명예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렇게 자신의 범죄 행위를 의를 위한 헌신으로 변모시킨다. ‘나는 지금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거야. 이건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는 책임이잖아. 복음은 이렇게 전하지 않으면 안 돼. 이렇게 전할 수밖에 없어. 특히 이 사람은 이렇게 해야 얻을 수 있어.’ 이런 사람들의 본분 이행에 ‘합격’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것은 물건을 요구하며 복음을 판매하는 행위보다 성질이 더 심각하다. 이는 역겨운 행위이다. 그것은 육적인 거래이자 정욕의 거래이다. 그럼 이 문제의 성질은 무엇이겠느냐? 진리임을 알았음에도 짐짓 죄를 범한 것이다. ‘짐짓’이라는 말이 포함되면서 문제의 성질이 변했다. 사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사역지침의 내용이 어떻든, 그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정욕을 방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도, 함부로 남녀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얻어,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기 위한 것임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틈을 노려 함부로 남녀 관계를 맺거나 마음대로 정욕을 방종해도 된다는 것으로 억지 해석을 하면서 사역지침을 그러한 행위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고서는 계속해서 똑같은 잘못과 죄를 저질렀으니, 이것이 바로 ‘짐짓’인 것이다. 짐짓 죄를 범한 것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속죄제마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과 관계가 있겠느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당시 상황으로 인해 그런 일을 저질렀지만, 그 후 안에는 참소가 있었다. 만약 죄를 지은 횟수가 많지 않다면, 많아도 3번을 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회개하여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자신의 악행을 상쇄할 수 있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이 얼마나 되는지는 개인의 추구에 달려 있기에 누구도 확언하거나 보증할 수 없다. 나 역시도 네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분명히 구원받을 거라고 보증할 수도, 약속할 수도 없다. 앞으로 네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 횟수가 넘고, 몇 번이나 책망을 듣고도 고치지 않으며, 복음 전파 과정에서 그 악행을 상쇄할 만한 선행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철저히 끝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갈수록 방탕하고, 갈수록 방종하며, 회개의 뜻을 전혀 보이지 않고 어떠한 선행도 없이 그저 문란한 남녀 관계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그 외의 일들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본분과 연관성을 잃은 것이다. 이는 속죄제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정직한 사람도, 정상인도 아닌, 더러운 귀신이나 악령이다. 그는 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본분과도 무관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없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쫓겨나고 잘려 나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행위는 합격된 본분 이행은커녕 본분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결말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정하느냐에 달렸다. 이 사례는 앞에서 말한 두 번째 사례보다 성질이 더 심각하지 않으냐?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들 가운데 죄가 심각한 자들이 반성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앞으로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을 쓸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이 있겠느냐? 그들이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겠느냐? 사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된 그 기간까지 일부 사람들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들이 한 사역은 어떻게 됐느냐? 본분 이행이 아닌, 힘쓰는 일이 되었다. 사실 그들도 적잖이 힘을 들였다. 하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이 그들의 운명과 결말을 결정지었다. 똑같이 복음을 전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시험에 드느냐? 장소와 정도만 다를 뿐, 모두가 비슷한 시험에 맞닥뜨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똑같이 죄를 저지르고 시험에 빠져드느냐?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저지르거나 같은 짓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정죄할 수 있다. 그들의 성품과 인성에 문제가 있었기에 드러난 것이다. 그들이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오직 그들 스스로를 원망할 뿐, 다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떤 과오를 범했든, 진리를 찾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다가 결국 내쳐지고 만다. 내가 들은 바로는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얻었고, 그가 책임진 범위도 아주 컸으며, 그를 우러러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오히려 한 여성을 차지하고는 그 여성이 다른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지 못하게 위협까지 했다. 그가 벌인 일의 성질은 매우 심각하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악인입니다.) 그런 악인들이 하나님 집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그런 사람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으며, 그런 악당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일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가질 수 있게 하고, 하나님 집에서 그런 사람을 출교시키지도, 처리하지도 않고 복음을 전하게 하고 게다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지지했다며 하나님을 오해하게 할 수도 있다. 그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이 하나님 집을 대표한다고 생각할 것이니, 이는 하나님 집에 완전히 먹칠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자 모독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복음 전파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한들 바른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소용 있겠느냐? 그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행위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제거될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가 한 일들을 본분 이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철저히 지워 버리고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본분 이행에는 합격의 요소가 없을뿐더러 본분 이행의 성질마저 달라져 악행으로 변질된 것이다. 하나님은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잘라 버린다. 즉, 하나님이 택한, 구원하려는 대상자들 가운데서 제명해 버렸으니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역시 본분을 이행하다가 이런 처지가 된 또 한 부류의 사람이다. 그가 저지른 짓은 앞에서의 사례들과 비교했을 때 그 성질이 더 심각하지 않으냐? (네, 그렇습니다.) 더 심각하다. 대표성이 있다. 이 사례는 세 번째 사례 중 특수하고 전형적인 사례에 속하기에 세 번째 사례와 하나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 전체 사례를 어떻게 명명해야 하겠느냐? (‘사악한 자는 반드시 제거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악한 자는 반드시 제거된다’라, 그것도 괜찮구나. 일단 그렇게 정하기로 하자. 이것이 세 번째 사례였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힘만 썼을 뿐, 어떤 성과도 내지 못했다. 어떤 것을 가리켜 힘만 쓰고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느냐? 그들은 본분 이행을 힘만 쓰는 것으로 변질시키고는 제대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 본분을 잘 이행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분을 본분으로 여기지도 않고 끊임없이 각종 못된 짓과 악행을 저질렀다. 결말이 없어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사례는 모두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다. 그렇지 않으냐?

이것 외에도 또 하나의 심각한 사례가 있다. 예전에 여러 해 동안 사역을 한 사람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로 헌신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가정을 버리고, 자신의 미래와 결혼을 포기했으며, 많은 지역을 다니며 경중과 관계없이 사역을 좀 했다. 그러나 사역을 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진리는 많지 않았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도리를 이해하는 데만 그쳤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본분 이행 또한 도리를 말하고 규례를 지키는 데에 그쳤다. 그는 평소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고, 누구의 미움도 사지 않았다. 하나님 집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역을 하든 그는 수호하지 않았으며, 공을 들이지도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그의 사역 태도는 기본적으로 미적지근했다. 그리 애를 쓴 것도 아니요,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대충대충 넘어가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이렇다 할 사역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사건이 벌어졌다. 그의 소홀과 업무 태만으로 하나님 집의 제물에 천만 위안이 넘는 손해를 끼친 것이다. 천만 위안은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일반인들은 그 금액만 들어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이니,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힘든 액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노선생’은 천만 여 위안의 손해를 끼친 후에도 조금도 회개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았고, 하나님 집에서 그를 출교시키자 원망하기까지 했다. 이는 어떤 물건짝이냐? 여기서 두 가지만 짚어 보겠다. 첫째, 그 돈은 그의 사역 기간에 생긴 손해이니, 직접적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손해가 나지 않도록 그 돈을 지킬 책임이 있었다. 그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직무 소홀이다. 그 돈은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제물이므로 반드시 신중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그 밖에 일반적으로 이런 손해를 끼쳤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죽어도 그 돈을 갚지 못하겠구나. 이는 목숨과 관련된 일도, 돈의 액수와 관련된 일도, 배상할 수 있을지 여부와 관련된 일도 아니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천만 위안을 손해 보고도 백 위안쯤 잃어버린 양 상면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회개는 고사하고 주변 사람에게 “이 손해가 어떻게 난 건지 분석해 봅시다. 이 일을 대체 어떡하면 좋죠? 돈으로 갚아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상면에 보고 드리고 우리는 사직합시다. 기도하고 죄를 인정합시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이런 태도조차 없었다. 가증스럽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그의 본분 이행이었다. 그가 몇 년 동안 본분을 이행해 왔든 상관없이, 그 일은 본분과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드러냈다. 하나는, 그가 드러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출교된 뒤에도 그는 불복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자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고 오히려 원망했다. ‘난 하나님을 20년이나 믿어 왔어. 결혼도 하지 않고, 많은 것을 버려 가며 고생했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출교시키다니, 날 버린다고 해도 갈 데는 있어!’ 그 후 그는 얼마 안 가 결혼했다. 말해 보아라.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빨리 결혼할 수 있겠느냐? 그럴 마음이 생기겠느냐?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큰 일을 저지른 순간,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을 것이다. ‘내 삶은 끝났어. 하나님을 20년이나 믿어 놓고도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출교당해도 마땅해! 나는 천만 위안은 고사하고, 백만 위안도 못 갚을 거야. 내 목숨값도 천만 위안은 안 되잖아!’ 그 돈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었다. 네 책임은 그 돈을 보관하는 것이었지, 탕진하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네게는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그 돈을 보관할 의무와 책임이 있지 않느냐? 사고가 생길 확률을 가능한 한 낮춰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떤 놈이냐? 산송장 아니겠느냐? 너무 역겹고 인간성이라곤 없다! 게다가 그는 출교된 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가족들을 교란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 아니냐? 그는 오랜 세월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은 것을 버리며 헌신했다. 또한 많은 대가를 치르며 위험을 무릅쓰고 적지 않은 사역을 했고, 심지어 감옥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이러한 것들이 운명을 결정짓지는 못한다.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진리의 길을 추구했다면, 오늘날까지 오지도, 그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런 일이 그의 사역 기간에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큰 일이 발생했는데도 그런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가 그런 길을 가는 것을 몰랐겠느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 그 일의 발생으로 그를 드러내는 것이었겠느냐, 도태하는 것이었겠느냐? 도태였다. 사람들은 ‘그가 본분을 잘 이행하고, 충성을 다해 헌신하며, 대가를 치르고 고생하는데, 하나님은 왜 이 사람에게 이런 일을 하실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그를 드러냈겠느냐? 그것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했던 것일까? 그저 그의 결말을 보여 주기 위해 그랬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믿음과 인성, 본질과 본성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즉, 그 일을 통해 그의 모든 것을 폭로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도 구원하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갖겠느냐? 그런데도 그에게 자비나 긍휼을 보이겠느냐? (아닙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긍휼을 보이지 않으신다면, 오직 공의와 위엄, 진노만 보이시는 것 아닙니까?”라고 묻는다. 그에게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도 없다. 그의 결말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없으며,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어떤 연관성도 없다. 그래서 도태되고 제거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금 어디에 있든 그는 하나님의 눈에 산송장이다. 즉 더러운 귀신과 악령, 그리고 인면수심의 짐승같은 그런 부류들 속에 살고 있는 산송장이다. 그는 바로 이러한 성질 때문에 창조주의 눈에서 제거된 것이다. 그럼 자신과 관계되는 그 큰일을 대하는 그의 마지막 태도와 그의 결말을 봤을 때, 그가 지금까지 이행한 본분에 ‘합격’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네가 어떻게 아느냐? 판단한 것이냐, 추리한 것이냐, 아니면 사람의 본질을 본 것이냐? (사람의 본질을 본 것입니다.) 그렇다. 바울을 예로 든다면, 그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고 베드로처럼 온전케 되기를 추구했다면 그렇게 참람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인 것처럼 그의 결말에는 상응하는 원인이 있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가 하나님과 제물, 그리고 자신의 악행에 대해 보인 태도는 그가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인지를 보여 줬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성질이 무엇인지도 알려 주었다. 그의 본질과 그가 걸어온 길이 전부 드러난 것이다. 만약 그가 지나온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길이었다면, 그리고 그가 그 본분을 진심으로 자신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면, 피치 못하게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떤 태도를 보였겠느냐? 절대로 지금의 그런 태도 ― 반항하고 하나님을 욕하는 귀신의 모습 ― 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귀신의 몰골이 드러나면 영혼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본질과 정체가 드러난다. 그의 본질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을 20년 넘게 믿어 놓고 이제 와서 그 상태,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일이 발생한 후에 통회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며, 자신의 잘못이 피하기 어렵고, 용서받지 못할 만큼 죄가 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교회에서 출교됐을 때,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배반하지는 않을 것이며, 나아가 믿는 사람들을 방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보인 모습들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인성이 악독하고, 추호도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불신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일들의 발생과 사례 속 인물들의 갖가지 모습, 그리고 일이 벌어진 후에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은 모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고 생긴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의 결말은 본분 이행과 밀접하고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결말,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짓고,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태도, 사람이 가는 길 등은 모두 본분 이행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본분 이행이라는 이 화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화제인 셈이다. 또한 본분 이행에 관련된 진리는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깨달아야 할 진리이자, 생명 성장과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뤄야 할 화제이다. 그것은 사람의 성품 변화나 생명 진입, 사람이 가는 길, 마지막 결말 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오늘, 이 화제를 교제하는 이유는 주로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본분 이행의 중요성과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다. 방금 우리는 또 하나의 사례를 이야기했다. 앞에서 말한 사례들은 뒤로 갈수록 그 사안이 심각해져 사람을 두렵게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겠느냐? 어떤 이는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일이 생기니, 아예 본분을 안 하면 안 됩니까?”라고 한다. 이는 밥 먹다가 체할 게 두려워 굶어 죽을지언정 밥을 먹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있겠느냐? 그래 봤자 어차피 죽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태도이며, 정상적인 사람, 산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정죄ㆍ출교ㆍ도태ㆍ제거되고 결국 구원받을 희망조차 없어질까 봐 두려워, 아예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맞서는 태도로 본분을 대한다면,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어떤 이는 “제가 본분을 하면 늘 문제가 생깁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봉사를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봉사에 대한 요구치는 그리 높지 않잖습니까? 거기에는 원칙이랄 것도, 요구나 기준이랄 것도 없으니 그저 힘만 쓰면 그만이고, 착실히 하라는 대로 하고 말만 들으면 되죠. 큰 책임을 지지도 않고, 리더가 되거나 온전케 되겠다는 야심도 없이 마지막 살길만 남겨 두면 됩니다.”라고 한다. 이는 어떤 생각이냐? 이 생각은 올바르냐, 그릇되냐? 참으로 옹졸하고 못난 모습이다. 그렇지 않으냐? 나는 지난 몇 번의 교통에서 많은 사례들을 언급했다. 이런 사례들은 기억하기 쉬우나, 진리는 기억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례를 다루면 좋은 점이 있으니, 바로 그런 일을 언급할 때마다 그와 관련된 진리를 깨닫거나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례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효과를 내기가 힘들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사례를 언급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채찍질, 또는 경고가 된다. 즉, 그 안에서 올바른 길을 찾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알고 하나님의 행정을 거스르거나 죄를 지어 잘못된 길을 가지 않게 경고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례를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사람이 합격된 본분을 이행하도록 할 수 있다. 이제 네 번째 사례를 이야기했으니, 이 마지막 사례에 제목을 붙여 보아라. (‘천만 위안 제물 유실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거기에 몇 마디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천만 위안의 제물 유실에도 회개하지 않은 자의 사례’라고 이름 붙이면 좀 더 괜찮지 않을까? 이는 사람에 대한 경고로, 적어도 그 일의 심각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 네 개의 사례를 들으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합격된 본분 이행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쉬운 것이냐?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이 어려운 것이냐? 진리를 모르고 원칙을 찾지 못해 늘 일을 그르치는 것이 문제냐?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것, 이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거기에 흉악하고 사악하고 교만한 성품까지 더해지면 앞에서의 사례들과 비슷한 결과가 초래된다. 즉, 사람이 예상치 못한, 그리고 원치 않았던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결말이 나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결말은 중간만 가면 돼. 어쨌든 마지막까지 그럭저럭 버텨서 살아남기만 하면 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일을 그르치거나 죄를 저지르기 쉽다. 그런 사람이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기란 몹시 힘든 일이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합격된 본분 이행을 할 수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 인성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리 추구까지 한다면 쉽게 합격된 본분 이행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네 가지 사례를 살펴봤다. 어떤 이는 “당신은 심각한 사례나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 반면교사의 사례들만 언급하시네요. 긍정적인 사례, 합격된 본분 이행 사례는 없을까요? 항상 부정적 사례만을 예로 드시니 들을수록 자신이 없어집니다. 대체 언제쯤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걸까요?”라고 묻는다. 그럼 긍정적인 것을 말해 보도록 하자.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 현재 이미 이렇게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즉, 진리를 들으면 100% 완벽하게 진리에 따라 실행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은 도중에 실패하기도 하고 연약해지거나 치우치기도 하며, 종종 잘못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최선을 다해 이 원칙에 따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때때로 너는 네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동역자나 팀원들과 함께 그 일을 의논할 수 있다. ‘그 일을 그렇게 하면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진리의 원칙을 위배하지도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해 생각한 것으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최대한 지킬 수 있다.’라는 것을 충분히 교제하여 모두의 동의를 얻는 것이다. 때로는 최종 결과가 썩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네가 행한 길과 방향, 목표는 옳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그 일을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했다고 말씀할 것이다. 그럼 합격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이겠느냐?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며, 100% 완벽하게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네가 가는 길과 마음가짐, 그리고 방향이 옳은 것뿐이다.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했다 하더라도 네가 한 일의 성과는 하나님이 요구한 기대치나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순종에 관한 진리를 예로 들 수 있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 어떤 일을 배정받는다면, 순종하는 면에서 봤을 때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합격되겠느냐? 어떤 일에 대해 들었을 때, 너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르는 일이 있으면 구하고 순종하라고 하셨어. 그러니 구해 봐야겠다. 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일이 내게 왔으니 순종해야지. 일단은 규례라도 지켜야겠어.’라고 생각한다면 합격된 것이다. 합격된 것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차이가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느냐? 진리에 대한 너의 깨달음 정도에 있다. 순종한다고는 해도, 너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진리의 원칙을 완벽하게 찾아 실행하지도 못한다. 그저 규례를 지킬 뿐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을 양심적 기준과 규례, 원칙에 맞춰 행하고, 행위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일의 성질도 그릇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너는 아직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저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킬 뿐,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 일을 더 잘 해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합격되기만 할 뿐, 하나님께 인정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한 것이다.

합격된 본분 이행의 가늠 기준은 무엇이냐? 네가 가는 길과 방향, 마음가짐, 근원, 원칙 등이 옳으면 합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리상으로는 이해하기 쉬우나 막상 일이 닥치면 어리둥절해지기 십상이다. 종합해서 한 가지 원칙을 말해 주겠다. 바로 일이 닥쳤을 때 독단적으로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먼저, 독단적으로 행하는 것은 본분 이행의 원칙이 아니다. 다음으로, 본분은 네 사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의 본분 이행은 너 자신을 위해 하는 일도, 네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도 아니며, 너의 개인 장사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너 개인이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집의 사역이자 하나님의 사역이다. 너는 시시각각 이것을 인지하고 인식해야 한다. ‘이 일은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야. 난 본분을, 내 책임을 이행하고 있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니까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는 거지. 내가 하는 일은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야.’ 먼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그다음에는 이것을 기초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만약 네가 본분을 네 사적인 일이라고 여기고, 자신의 의도와 원칙, 속셈대로 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만약 네가 본분과 사적인 일을 확실히 구분하여 그 일을 본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 일이 임했지만 나도 진리를 잘 모르겠어. 어느 정도 생각이 있긴 하지만 별로 확실하진 않아. 누가 잘 알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과 좀 교제해 봐야겠어.’ 그렇게 옆에 있는 동역자나 팀원, 또는 리더와 교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본분을 대할 때에는 우선적으로 이런 태도를 갖춰야 한다. 네 생각대로 결정지으면 그만이라고 여기지 마라. 그러면 문제가 생긴다. 그 일은 네 개인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의 일은 그 종류와 상관없이 모두 사적인 일이 될 수 없다. 본분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며, 모두 진리와 원칙에 관계된다. 그러니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 진리와 원칙을 찾는 것이다. 진리를 모를 때는 먼저 원칙을 찾아야 한다. 진리를 깨달았다면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렇다면 일이 임했을 때 네가 알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다른 사람과 교제해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만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늘 네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무슨 문제냐? 네가 “저는 대학생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대학원에는 가지 않았지만, 제 이력을 보면 대학원생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요. 즉, 저는 문화적 소양과 수준을 갖춘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편이고요. 당신들은 모두 이렇다 할 문화적 소양이 없으니, 무슨 일을 하든 제가 결정한 대로 따르고, 다른 의견을 내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하는 말은 제가 하는 것보다 못하니까요. 그러니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당신들은 진리를 모르니 가능한 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한다면, 이 태도는 어떠하냐? 네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문제가 된다. 너는 영원히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이행하는 본분은 결코 합격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이 합격되지 못한다고 하겠느냐? (근원부터 틀렸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 때문이냐?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려면 반드시 그런 과정을 거치고, 그런 규례를 지켜야 하는 것이냐? 이는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는 네 생명 진입과 관련된다. 네가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임하든, 얼마나 많은 일을 하든, 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이든, 하나님이 보는 것은 그 일을 대하는 너의 태도이다. 그 일을 할 때 네가 보여 준 태도와 행동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를 말해 주며, 또한 너의 생명 진입과도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통해 너의 생명 진입과 네가 가는 길을 본다. 네가 가는 길이 생명 진입의 길이라면, 네 본분 이행은 합격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네가 본분 이행 과정에서 늘 자신은 밑천이 있고, 업무를 알고 있으며,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추구한다는 걸 강조하면서, 자기 뜻대로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으며, 독단적으로 행하고 군계일학식으로 개인의 경영을 한다면, 그 길이 생명 진입의 길이겠느냐? 그것은 지위를 추구하는 바울의 길이지, 생명 진입의 길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생명 진입의 길,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아니며,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

나는 방금 합격된 본분 이행의 기준에 대해 말했다. 무엇이었느냐? (생명 진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 네가 하나님을 몇 년이나 믿었는지, 네가 여태껏 어떤 본분을 이행했는지, 하나님 집에 기여한 적이 있는지, 어떤 사역이나 업무를 함에 있어 경험이 있는지 등은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는 것은 한 사람이 가는 길, 다시 말해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일 처리 원칙, 방향, 근원, 출발점 등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본다. 그것이 네가 가는 길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본분 이행 과정에 이런 것들을 네게서 전혀 볼 수가 없고, 네가 일하는 근원이 자신의 생각에 있고, 출발점도 역시 자신의 이익, 체면, 지위에 있으며, 일하는 방식과 방법은 독단적이고, 자기 스스로 결정하며, 다른 사람과 상의도 하지 않고, 조화로운 협력도 하지 않으며, 권고도 듣지 않고, 진리도 구하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보겠느냐? 너의 본분 이행은 잘못된 것이다. 합격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합격된 길에 들어서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네 본분 이행 과정에는 실행과 원칙, 방향 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쉽겠느냐? 사실 그리 어렵지는 않다. 사람이 겸손한 태도로 몸을 낮출 수 있다면 말이다. 네 학력이 얼마나 높든, 과거에 어떤 상을 받고 어떤 성취를 이뤘든, 네 자질과 수준이 얼마나 높다고 여기든, 그러한 것들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아무리 높아 봤자 진리보다 높을 수 없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이러한 이성을 가져야 한다. 만약 네가 “저는 많은 은사를 받았고 머리가 좋으며 반응 속도도, 배우는 속도도 빠릅니다. 기억력도 비상하지요. 저 자체가 이런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하며 언제나 그러한 것들을 밑천으로 삼는다면 문제가 된다. 네가 그것들을 진리로 여기거나 진리보다 높게 생각한다면 진리를 실행하는 길을 가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그것들을 내려놓고 몸을 낮추라고 말하는 것이다. 몸을 낮추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말해 보아라. 사람이 그런 걸 마음에 갖고 사는 게 피곤하겠느냐, 아니면 자연스럽게 다 내려놓고 숨만 쉬며 사는 게 피곤하겠느냐? 자연스러울수록 좋다. 네 본분 이행도 사실은 같다. 너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언뜻 좋고 대단해 보이며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들을 내려놓고 먼저 그것들을 부인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진리가 아니며, 오히려 네가 진리에 진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너의 급선무는 진리를 찾고 진리에 따라 실행하며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이제 막 생명 진입의 길에 들어선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첫걸음을 떼었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들, 입문을 위한 것들이 있는 법이다. 합격된 본분 이행은 사람의 생명 진입에 있어 입문과도 같은 길이자 경로이다. 만약 네 본분 이행이 ‘합격’되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면, 합격과는 조금의 관계조차 없다면, 너는 더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노력해야 하겠느냐? 성격을 바꿀 필요도, 은사니 업무상의 장점이니 하는 것들을 내려놓을 필요도 없다. 너는 그러한 업무상의 장점과 배운 것들을 가지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 업무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하면 된다. 또 그 기간에 더 진리를 찾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을 하면 된다. 다시 말하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 생명 진입이 있으면 합격된 본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합격된 본분 이행은 진리를 찾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하는 것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진리를 찾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합격되다’는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합격되다’는 말의 정의이다. 사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다지 높지 않다. 올바른 태도와 마음가짐, 관점을 갖고 그것을 기초로 성품 변화에 이르며, 더 깊은 진리에 진입하고, 자신을 더 깊이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련과 연단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깨달은 선상에서 네게 얼마큼의 심판과 형벌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심판과 형벌, 그리고 시련과 연단의 두 단계는 모두 무엇을 토대로 이뤄지느냐? 합격된 본분 이행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즉, 네게 생명 진입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너의 생명 진입과 네가 하나님 집에서 하는 사역, 맡고 있는 책임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온종일 집에서 하나님 말씀만 읽으면서 말로만 본분을 이행하고, 말로만 생명 진입을 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성과도 낼 수 없다. 그것은 탁상공론과 다를 바가 없다. 온종일 합격된 본분 이행,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이는 것 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상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봉헌도, 헌신도, 고난도 없이 온실 속 화초처럼 말로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말로만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이고, 늘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아 통곡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러한 각도에서 봤을 때, 합격된 본분 이행과 구원받는 일은 관계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받을 심판과 형벌에는 관계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으려면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달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이러한 기준을 제시하고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은 네 본분을 통해 네 생명 진입 상황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너의 생명 진입이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이는 네 생명 진입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을 기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즉, 너는 온전케 될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을 위해 하나님이 네게 제시한 조건은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 집에서 이행한 본분이 하나님이 보기에 반드시 합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너의 생명 진입에 기본적인 길과 방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합격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떼어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면, 곧 심판과 형벌을 시작할 것이다. 심판과 형벌이 임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네게는 어떤 위험도 없을 것이다. 너는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사례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그런 사람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 너를 보호해 줄 것이며, 다른 한 편, 너 개인적으로는 인생 목표와 방향이 지금의 이 길에 튼튼히 뿌리를 내려 도망가지도, 잘못된 길을 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다음 단계에 분명히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그 복이 네게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러한 복을 받고 싶고 온전케 되는 길을 가고 싶다면 먼저 본분을 합격되게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보여 준 여러 모습들과 하나님이 네게 맡긴 임무, 일, 사명을 통해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네 태도를 볼 것이고, 네 태도를 통해 네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네가 가는 길이 온전케 되는 길이라면 너의 본분은 이행할수록 합격될 것이며, 본분 이행 과정에서 반드시 생명 진입이 있을 것이고, 성품도 어느 정도 변화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있기 전에, 너희는 각기 다른 정도로 변화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각기 다른 정도의 변화는 그저 ‘합격된 본분 이행’이라는 범주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행사는 정확하다! 그가 너를 심판하고 형벌하기 전까지 네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은 거기까지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기에, 너는 그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생각이 이를 수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사람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 즉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고, 포기하며, 감정도 세상도 내려놓고, 사악한 조류에 대해 인식하며, 지식과 식견, 생각, 그리고 사람의 정상적인 사유로 달할 수 있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다음 단계는 하나님이 직접 할 것이다. 네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거의 개입하지 않고 끊임없이 네게 진리를 공급하며,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할 것이다. 또 어떤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지 등을 모두 네게 알려 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전부 깨닫고 진입하여 하나님께 ‘합격증’을 받는다면 네가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은 80%쯤 된다. 그러나 그 80%에 이르기 전에 사람은 모든 심혈을 다 쏟아부어야 한다. 어떤 이는 “저는 20년간 하나님을 믿어 왔습니다. 이러면 심혈을 다 쏟아부었다고 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데, 그것은 햇수에 근거해 가늠하는 것으로 틀린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 5년쯤 됐는데, 이미 일부 진리를 깨닫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합격된 본분 이행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방향을 향해 노력하고 있고, 나아갈 길도 얻었습니다. 제 마음도 좀 평안해지고 위안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느낌은 기본적으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느낌이 있다고 구원받을 확률이 80%에 달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겨우 10~15%밖에 되지 않는다.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책망과 훈계를 받아야 하고, 여러 가지 환경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긍정적인 면으로, 그리고 적극적인 면으로 네게 많은 것들을 알려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이러한 사람과 일, 사물을 깨닫는 과정에서, 즉 이러한 실제적인 환경에서 일련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왜 이러한 사람과 일, 사물 가운데서 진리를 깨달으라고 하겠느냐?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진리에 대한 너의 인식은 영원히 글귀와 도리, 그리고 구호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여러 가지 환경을 체험하면, 네가 예전에 깨달은 것, 또는 기억 속에서 인식하고 깨우친 도리들이 실제가 될 것이다. 이 실제는 진리 실제의 진실된 면이므로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스무 살인 사람은 몸이 괴롭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길을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노인을 보면 비웃곤 한다. 이는 어떤 모습이냐? 무지하고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40대 되면 다양한 노화의 신호가 나타난다. 남녀를 막론하고 관절이 굳고 반응이 느려지며 머리는 하얗게 세고, 얼굴의 주름이 많아지는 등 여러 가지 모습이 다 나타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자신이 스무 살 때 노인들을 비웃던 것을 떠올리며 무지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스무 살 때는 마흔 살이 된 사람을 비웃을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네가 마흔 살이 되어 노화의 신호들이 나타나게 되면, 더 이상 예순 살이 된 사람을 비웃지 않게 된다. 너는 자신이 60세가 되면 아마 다른 사람보다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느낌과 인식은 구호가 아니라, 체험에서 비롯된 깨달음이다. 너는 지난날 노인을 비웃던 네 무지를 깨달을 것이다. 그때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며, 지금 비웃지 않는 것은 늙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비웃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왜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구원받을 확률의 10~15%밖에 안 된다고 하겠느냐? 너희가 하는 많은 일이 여전히 도리와 구호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10~15%란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이제 막 체험한 구호나 도리, 이론 등 규례와 글귀 부분을 뜻한다. 그러니 이제는 여러 가지 진리에 노력을 기울일 차례다.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더 정확히, 더 착실하게, 더 실제적으로 진입하기 위한 것이다. 진입을 해야 비로소 어떤 길을 가는지를 말할 수 있다. 네가 구호만을 외친다면, 어떤 길을 가는지와 관련이 있겠느냐? 관련되지 않을뿐더러 아직 거리가 멀다. 나는 방금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을 체험하고 나면 글귀와 도리, 구호로만 머물러 있던 여러 가지 진리들을 실제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구원받을 희망도 점점 커진다. 무엇에 따라 커지겠느냐? (진리에 대한 깨달음 정도에 따라 커질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진리에 대한 깨달음 정도가 아니라, 진리에 진입한 정도이다. 진입을 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고, 진입을 하지 않으면 진정한 깨달음도 없다. 네가 진입하고 깨달은 진리가 많을수록, 실제적이고 깊을수록 구원받을 희망 또한 커진다. 먼저 긍정적인 부분을 보면, 너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자신의 본분을 똑바로 대하고, 어떤 환경이 임하든 그 본분을 포기해선 안 된다. 다른 이들이 모두 믿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지라도 너는 늘 거기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지, 포기해선 안 된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그것을 지켜 나가며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너는 진정 본분을 본분으로 여긴 것이다. 여기까지 이를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한 셈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면에서 이뤄지는 본분 이행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르려면 부정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시험을 견뎌 내야 한다. 만약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시험을 견디지 못해 본분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등진다면 그 사람에게는 일말의 희망도 없다. 그런 사람은 합격되느냐 안 되느냐를 논할 가치도 없으며, 구원과는 더더욱 무관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 본분을 지키는 데 있어,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난관은 시험을 겪을 때 굳게 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험들이 있겠느냐? 금전과 지위, 이성 관계, 감정 등의 시험이 있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만약 어떤 위험을 감당해야 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런 본분이 있어, 그것을 이행할 때 감옥에 가거나 죽을 수도 있다면, 너는 그것을 이행하겠느냐? 어떻게 이행하겠느냐? 이러한 시험을 이겨 내기가 쉽겠느냐? 이러한 것들은 진리 추구를 통해 이겨 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너는 네게 임한 이 시험들을 점차 분별하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시험의 본질과 그것의 본 모습을 알게 되고, 네 자신의 본질과 타락한 성품, 연약함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 너를 보호해 달라고 늘 기도한다면, 이러한 시험들을 이겨 낼 수 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다면, 어떤 환경에 처하든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배반하거나 도망가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형식상에서는 기본적으로 50%쯤은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한 것이다. 지금 이 50%에 도달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다. 걸음걸음이 함정이고 위험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보면서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느냐? 복은 받고 싶어 하면서도 고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냐? 이런 사람은 못난이다. 합격이란 어떤 것인지, 합격의 정의, 합격의 기준, 하나님이 그 기준을 제시한 이유, 그리고 합격된 본분 이행과 생명 진입 간의 관계 등을 거의 다 이야기했다.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포기하지 않고, 각종 시험을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배치한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다양한 진리를 깨닫고 인식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 첫째, 본분을 대하는 태도다. 둘째, 본분 이행 과정에서 각종 시험을 견디는 것이다. 셋째, 본분을 이행하면서 다양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모두 갖추고 도달한다면, 앞에서 말한 첫 번째 항목을 — 합격된 본분 이행을 —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나는 합격된 본분 이행에 대해 좀 교통한 적이 있다. 그때 ‘합격’이란 단어를 어떻게 정의했었느냐? (원칙대로 일 처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한 ‘합격’은 ‘합격’, 이 두 글자로 너의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를 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높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며,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기준과도 관련된다. 다시 말해, 네가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온전케 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너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지금 본분 이행의 길과 방향이 모두 맞지만,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을 흉내 내 집안일이나 바깥일을 하려는 것과 같다. 즉, 마음은 있어도 그만한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럼 언제쯤이면 책임을 분담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합격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가 하는 많은 일들이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독립할 수 있을 때이다. 또 그가 한 일의 결과가 어른들이 요구한 기준에 부합할 때이다. 지금 네가 일련의 일들을 할 수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힘쓰고 봉사하는 범위에 머물러 있다. 깨달은 진리가 너무 얕아 실행할 수 있는 진리가 극히 적고, 구비한 원칙 또한 너무 적어서 항상 모색하는 과정에서 늘 모호한 상태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확신하기 힘들며, 마음속으로 늘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의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줄 수 있겠느냐? 아직은 그럴 수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것은 네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고, 네 생명 진입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으며, 네 분량 또한 너무 작기 때문이다. 분량이 작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분량이 너무 작다고 하는 데에는 실제적인 모습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네게 어떤 본분이 임했는데 그것을 할 줄 모른다면, 너는 자신이 끝장났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여겨 연약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맡긴 그 본분이 안 좋은 것 같고, 자신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작은 모습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한 가지 예이다. 이 밖에도,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 형제자매들은 멋진 남성이나 미녀를 만나 마음이 통하면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곤 한다. 그러면 본분을 팽개치게 되고, 본분에 지장을 주게 된다. 거기에 연애까지 하면 ‘합격’은 고사하고, 본분을 이행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시험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분량이 작은 것 아니겠느냐?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보겠다. 남다른 은사를 받아 하나님 집에서 특별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밑천 삼아 폼을 잡고 싶어 한다. 그런데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 폼 잡는 것이 멋쩍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늘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원칙 없게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사람들의 칭찬이라도 들으면 더욱 잘난 척하니, 더욱 원칙 없이 일을 하게 되고, 결국 붕 뜬 채로 본분을 망각하게 된다. 이것 또한 시험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분량이 작은 모습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은 이 정도 일로도 넘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는 배우들도 있다. 그들 중 한 배우는 외모도 괜찮은 편이고 그럭저럭 인기도 있으며 어느 정도 이름도 알려졌다. 그는 ‘나도 이제 꽤 유명해졌는데, 세상에 있었다면 사인도 해 주고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아무도 나보고 사인을 해 달라고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스타들이 평소에 어떤 스타일을 하고 어떻게 꾸미는지 인터넷에서 보고 배워야겠어.’라고 생각하고는 스타들의 스타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또 ‘안 되겠어. 아무래도 괜찮은 작품 하나는 찍어야 유명한 배우로 발돋움할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음 작품에서 주연으로 발탁되지 못하자 원망을 하며 일을 놓아 버렸다. 늘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의기소침해진 채 감정을 품으며, 하던 일까지 내려놓으니, 이런 사람이 바로 분량이 작고 못난 자라고 하는 것이다. 분량이 작으면 중임을 맡을 수 없고, 하나님이 준 임무를 믿음직하게 해낼 수도 없다. 본분을 이행하다가 달아나거나 딴 길을 가고, 한눈을 판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하나라도 있으면 바로 도망치고 하나님께 맞서며 본분을 내려놓으니, 이것이 분량이 작은 것 아니겠느냐? 이러한 모습은 합격된 본분 이행과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이냐? 어떤 점에서 거리가 멀다고 한 것이냐?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또 어떤 사람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이 병에 걸리자 예배에도 나오지 않고 복음도 전하지 않았다. 그는 “며칠 본분을 내려놓는다고 뭐가 어떻게 되겠어요? 가족은 죽으면 다시는 못 보잖아요.”라고 했다. 그는 본분을 이행할 기회와 구원받을 기회가 이번 딱 한 번 뿐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감정과 가족을 본분보다, 그리고 구원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이 분량이 작은 것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모르는 행위이고, 훗날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며, 본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작태이다. 그럼 분량은 나이와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내가 보니 하나님 집에서 주인공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이들도 다 애들만은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40~50대이고, 심지어 노인도 있다. 그런데도 그런 다툼을 하니 못난 것이고, 분량이 작은 것이다. 타락한 인간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똑같이 내면에 타락한 성품이 있어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변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린 후, 하나님께 의지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여겨져 황급히 본분을 이행하러 갔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과연 이 병이 나을 수 있을까? 나을 수 있다면 언제쯤 나을 수 있지? 나을 수 있겠지, 내가 생명도 내놓았는데 안 나을 수가 있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병은 죽을병이었고, 그가 본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죽을 운명이었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그의 분량과 이러한 본분 이행, 출발점으로 그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은 진리도 추구하지 않고, 인성도 나쁘기에 마음속에 늘 자신만의 타산이 있다. 그런 사람은 병이 재발하거나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다고 느껴지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긴 하신 걸까? 정말 날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걸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그러니 나도 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몸이 약간만 불편해도 본분을 포기하려고 한다. 이것이 분량이 있는 것이냐? 그러므로 지금은 다양한 사람이 여기 모여 말씀을 듣고 있지만, 또 너희 중 일부는 가정과 사업을 버리고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며, 자기 업무나 자기가 배운 것과 관련된 일련의 사역들을 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이가 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아니며, 모두가 본분을 기꺼이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이가 어느 정도의 분량을 지닌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다 아주 바쁘게 보내며, 신실한 믿음을 토대로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일하며 헌신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각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은 수시로 연약해지며, 수시로 포기하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또한 늘 자신만의 타산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사역이 빨리 끝나 복 받을 수 있기를 더욱더 기대한다. 바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연약함과 패역, 무지한 생각, 작태 등 분량이 작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언젠가 네가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여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때면, 즉 어떤 환경에 처하든 네 본분 이행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면 네 분량이 자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최종적으로 어떤 길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사람의 추구와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 본분을 포기할 것 같으냐? 죽음이 임했을 때겠느냐, 아니면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겠느냐? 일부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요구가 있느냐? 첫째, 바람과 햇빛을 피할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알맞은 사역 환경이 갖춰져야 하고 조금도 불편함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언제나 남편(아내)과 함께 하며 둘만의 세상을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운동이나 쇼핑, 여가 활동, 휴가 등 이 모든 것들이 충족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심사가 꼬여 문제를 일으키며, 관념을 퍼뜨리고 다른 사람들을 방해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런 자들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멀리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은 분량도 작고 어떤 진리도 알지 못하기에 바로 방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다른 이를 방해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격리하고, 심할 경우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분량이 작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럼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 본분을 포기하고 말없이 사라질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보겠다. 네가 서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미녀들을 본다면 그 시험이 크지 않겠느냐? 서양인들은 흰 피부에 높은 코, 큰 눈을 가졌고, 말에도 기품이 있다. 그들을 보며 선망하는 마음이 점점 커진 너는 ‘본분 이행만 아니라면 구애를 해 볼 텐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생기면 문제가 되며, 위험해진다. 막상 구애에 성공하고 나면, 너는 그 사람 역시 타락한 하나의 인간임을 깨닫겠지만, 그때는 이미 후회막급일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이런 일에 빠지면 3~5년 안에는 빠져나올 수 없다. 사람은 실패를 겪어야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3~5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서 돈을 벌어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잘 먹고 잘 삽니다. 돈 벌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천지에 널린 것이 금덩이니, 자기가 노력하고 고생만 한다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지요. 그러니 저도 돈을 좀 벌어야겠습니다!”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을 보고 마음이 혹해 자기도 돈을 벌러 가고 싶어진 것이다. 시험이 임한 것이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흔들려 본분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자는 모두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하는 사람이며, 위험한 상태에 처한 사람이다. 이는 분량이 작은 모습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맛있는 것을 먹는 걸 보면 기분이 나빠지고 씁쓸한 생각이 들며, 누군가 시집을 잘 간 것을 보면 또 마음이 유쾌하지 않다. 너와 나이도, 생김새도 고만고만했던 사람이 너보다 잘 차려입고 사회적 명성까지 얻은 것을 보면, 너는 ‘예전에 나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졸업해서 일자리를 찾았더라면 저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그 생각으로 며칠을 괴로워할 것이다.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괴로워하니, 네게 그 시험은 통제이자 고뇌이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작은 것이다. 좀 못생기거나 능력이 별로 없거나 사회에서의 생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래도 분수를 좀 아는 편이다. 외모가 돋보이는 일부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적합한 사람, 돈 많은 멋진 남자나 흰 피부에 돈 많은 예쁜 여자를 만나면,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느냐? 너의 분량이 각종 시험을 이겨 낼 수준에 이르지 못해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의 마음이 점유되고 통제되어 네 마음속으로 그 일을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그 일을 떠올리며, 심지어 꿈에서도 그 일을 꿈꾸고, 다른 이와 대화할 때도 그 일을 화제에 올릴 것이다. 본분 이행 시에도 영향을 받아, 대화하고 교제할 때 다른 사람은 할 말이 많은데 너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꼬임에 넘어간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빠져든 것이다. 그러면 위험하다. 어떤 이들은 반드시 연애를 하고 이성과 함께 해야만 빠져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상황이 거기까지 발전하면 이미 돌려세울 방법이 없다. 너희는 그런 일을 마주했을 때 똑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건 분량이 작다는 의미이자, 네가 너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 모른다는 것은 분량이 작은 것이라고 하겠느냐? 하나는, 네가 실제로 그러한 일에 맞닥뜨리지 않았기에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네게는 대처 방법이 없는 것이다. 너는 능동적으로 반격하지 못하고 언제나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한다.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고, 일이 벌어진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니까 겁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이다. 네가 능동적으로 반격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실제적인 인식이나 진입이 없으면, 수동적인 것이다. 네가 수동적이라면 네 분량은 작을 수밖에 없다. 사실 네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른 이를 유혹할 확률은 높지 않다. 다른 이가 너를 유혹할 뿐이다. 다른 이가 네게 돈과 지위를 준다거나 좋은 결혼 상대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로 유혹한다면 너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듣건대 어떤 이는 초콜릿 한두 개 받고 마음이 동해 그 사람과 사귀어 볼까 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분량이 겨우 그 정도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은 세월이 짧아서 그렇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이는 십여 년간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유혹에 빠지곤 한다. 왜 그렇겠느냐? 분량이 작고, 어떤 진리에 대해서는 진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깨닫지 못했겠느냐?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추구하지 않고 흐리멍덩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일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정말 적당한 상대가 있다면 결혼해도 안 될 건 없잖아?’라고 여겨왔다. 다만 지금 당장 괜찮은 상대,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기에 하루하루 보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모습은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가 아닐뿐더러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그런 마음가짐이 없다. 그저 대충 되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자는 생각뿐이다. 언젠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날이 올지라도 될대로 되라는 식이다. 그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과 사역에 관심이 없으며, 구원과 관련된 여러 진리 또한 제대로 믿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는 항상 하나님의 교통을 잘 듣는데, 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까?”라고 하는데, 형식적으로 듣는 것과 마음속으로 참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단순히 귀로 들었다고 해서 꼭 그 길을 간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면 도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행, 진입과 관련시켜 듣고 진입할 부분, 길이 되는 부분을 잡는다. 그리고 진리의 실제 부분을 찾아 어떻게든 실행의 길이 있게 한다. 그들은 “그 일이 임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 자신에게 대조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가 듣고 이해한 것은 실행할 때 도움이 되고 길이 된다. 그런데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그는 들어도 흐리멍덩하게 듣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다 들었지만, 말씀이 끝난 후에 그에게 하나하나 그렇게 또렷하게 받아 적은 것이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물으면, 그는 그저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말만 할 뿐이다. 그것이 정말 도움이 되었겠느냐?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얻을 수 있었겠느냐? 어떤 이는 “왜 얻지 못했다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하십니까? 그는 메모까지 하면서 정말 열심히 들었습니다.”라고 한다. 메모 좀 했다고 해서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영적 상태와 자신이 가는 길, 삶 속에서의 처세 방법, 하나님을 믿는 원칙, 하나님이 맡긴 일, 책임 등 다양한 면에서 자신에게 대조해 보고 결부시킬 수 있는 것들은 어떤 방법을 다해서든 듣고 이해한 후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행이고 진입이며, 참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방금 나는 분량이 작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분량이 작은 문제를 해결하고, 우매함과 무지함, 두려움, 연약함 등을 해결할 수 있다. 연약함이란 무엇이냐? 너에게 믿음의 요소가 극히 적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특별히 작은 것을 말한다. 너는 도리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고 주재한다는 것을 믿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에 마음 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연약함이다. 모두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했느냐? (우매함과 무지함, 연약함, 그리고 두려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패역을 더해야겠구나. 패역은 성품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조금씩 개선해 나가야 할 것들이다. 무엇을 개선이라고 하느냐? 이러한 일들에 대처하는 능력이 날로 커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일을 마주할 경우 작은 분량으로 인해 연약해져서 본분을 포기하거나 본분을 이행할 때 불순물들이 늘어나거나 본분에 대한 태도가 변했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생겨도 일관되게 본분에 충성하고, 마음속 어려움과 연약함을 스스로 해결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 진입의 문제가 본분과 충돌되지 않고, 너의 정서나 영적 상태, 연약함이 네가 맡은 사역이나 너의 책임, 본분, 의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일 처리 능력과 외부 사물에 대응하는 능력이 강해진 것이며, 분량이 자란 것이다. 그렇다면 분량이 자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어떤 일이 닥치든 네가 맡은 사역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자란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배우 본분을 좋아한다. 예전에 그는 주인공을 맡으면 너무 좋아서 날아다니다가 주인공이 아닌 단역 등을 맡으면 화가 나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곤 했다. 이는 분량이 작은 모습 아니겠느냐? 그러나 지금 그는 단역을 시키든, 스태프를 하든 모두 순종한다. 마음속에 다른 생각이 좀 있을지라도 그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예전에는 주인공이었는데, 이제는 일반 스태프가 되었어. 직위가 내려간 거잖아? 체면 깎이는 일이구나! 하지만 상관없어. 이것 역시 본분이니, 체면이야 어찌 됐든 잘 해내야 돼.’라고 한다. 내적 상태가 강해진 것이다. 네 정서와 본분이 작은 일이나 감정, 사람과 사물 등의 환경 변화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죄를 이기고 각종 환경과 감정을 이겨 내는 능력이 강해졌다면, 너의 분량은 자란 것이다. 그렇다면 분량이 어떻게 자란 것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점차 일련의 진리를 깨닫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면, 그러한 진리는 너의 생명이 되고, 너의 사람됨에 있어, 일함에 있어 근본이 된다. 또한 어떤 일을 대할 때 너의 관점이 되며, 너 자신의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너는 강해질 것이며, 수시로 연약해지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 네게 리더 본분을 맡겼을 때 너는 몹시 기뻐했으나, 그 본분을 교체하자 한두 달 의기소침해진 채로 뭘 시키든 하기 싫어하고 일에서 손을 떼거나 건성으로 넘어가며 소극적인 상태로 지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리더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하면 “리더 자리에서 물러나도 저는 영향을 받지 않고, 단 하루도 소극적으로 되지 않을 겁니다. 리더 본분이 오늘 교체된다고 해도 내일은 무슨 일이든 받아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배치를 받아들일 것입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강해진 것이냐, 아니면 연약해진 것이냐? (강해진 것입니다.) 그 강함은 어떻게 얻은 것이냐?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순종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진리를 실행하는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런 분량을 가질 수 있었겠느냐? 이방인들이 가진 겨우 그 정도의 처세 철학으로 살아간다면 너는 영원히 강해질 수 없다. 오직 진리를 토대로 살아야만 비로소 그러한 체면이나 지위, 허영심 등을 하나씩 내려놓고 소극적인 정서를 바꿀 수 있다. 그렇게 되어 결국 어떤 일도 너를 넘어지게 할 수 없고 네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강해진 것이다. 네가 이렇게 강해지고 분량이 자란다면, 네가 이행하는 본분은 점점 더 합격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이미 어느 정도의 분량을 갖춘 것 아니겠느냐? 그 분량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 그리고 충성심이 들어 있다. 또한 분량이 있으면 자신의 본분을 올바르게 대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큰 사람의 모습이다.

이제 구원받는 일을 더 중요한 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더 이상 흐리멍덩하게 넘어가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여러 가지 진리는 구원받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중 어느 한 가지 진리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힘 좀 쓰고 열심히 뛰어다니거나 고난 좀 겪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구원받는 것을 평생의 큰일로 생각한다면, 너는 무엇이든 내려놓을 수 있을뿐더러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내려놓기 힘들 것이며,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도 커지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합격된 본분 이행은 어려워진다.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려면 많은 진리를 깨닫고, 많은 진리에 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닫고 진입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은 점차 합격될 것이며, 사람의 연약, 사람의 다양한 정서에 점차 변화가 있을 것이며, 각종 부정적인 내적 상태 또한 점차 개선될 것이다.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그 과정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구원받는 이상(異象)을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와 동시에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의 희망과 바람은 점점 더 절실해진다. 그럼 절실해진다는 건 어떤 것이겠느냐? 처음에 너는 구원받는 것, 온전케 되는 것에 대해 어떠한 개념도 없었다. 그렇게 백지와도 같은 상태에서 사람에게는 타락한 면이 있어 하나님의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죄악과 타락한 성품 가운데서 살기에 자유 없이 고된 삶을 살게 되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사탄의 사악한 조류에 휘말려 굳게 서지 못하게 된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또 네가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지식이 있고 의지가 굳건하든, 그것은 네가 마지막까지 걸어가도록 보장해 주지 못하며,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너는 진리는 사람이 영원히 포기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화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는 구원받는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네가 마지막에 온전케 되는 것과도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점차적으로 합격된 본분 이행에 달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연약과 무지, 우매함도 차츰 개선된다. 여기에서 ‘개선’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죄를 이겨 내는 능력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타락한 사물과 사악한 사물에 대한 너의 민감도는 점점 높아질 것이다. 즉, 마음속으로 그러한 것들을 더 잘 분별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너는 파리를 발견해도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피할 뿐, 때려잡지는 않는다. 때려잡는 순간 손에 세균이 묻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금 너희는 아직 이런 의식을 갖지 못해 죄악이나 사탄에 속하는 사악한 것들을 봐도 마음에 아무 느낌이 없다. 그래선 안 된다. 그렇다면 네 분량은 아직 부족한 것이다. 혹자는 다른 이가 죄를 범하는 걸 보거나 사탄의 각종 추악한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다. 그것을 증오하지도 않을뿐더러 전혀 반응이 없다. 또한 자기가 저지른 일, 나타내고 드러내고 살아낸 것들,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사탄의 타락한 성품과 타락한 본질의 것들에 대해서도 일말의 증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민감하게 대하거나 분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언급할 가치도 없다. 이런 사람은 아직 분량이 많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분량이 얼마나 부족하든, 얼마나 연약하고 분량이 작든, 이러한 것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길을 내어 주고 방향을 제시하여,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점차 합격된 본분 이행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너는 진리를 알려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네가 진리를 알기 위해 추구하는 동시에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면 죄를 이겨 내는 능력이 점점 더 커질 것이며, 사악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 또한 갈수록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의 연약과 패역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분량이 작을 때는 어떤 일을 마주할 경우 그 일이 분명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통제받고 구속받으며, 심지어 그 일에 뛰어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고 일부 진리 실제에 진입하면, 그런 일이 닥쳤을 때 마음속으로 혐오감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거절하거나 하지 않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가 그 일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발전이고 분량이 자란 것이다. 사람의 분량이 자랐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 무엇이겠느냐? 첫째, 본분에 충심이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진실하고 실제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편, 시험을 분별하고 이겨 낼 수 있다.

너희는 오늘 이 교통을 통해 자신이 이행한 본분이 합격되는지 가늠할 수 있겠느냐? 가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오늘 들은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받아들였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아직도 가늠하지 못하겠다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니 그 진리를 되새겨야 한다. 너희는 스스로를 가늠하는 한편, 어떻게 하는 것이 합격된 것인지 알아야 하고, 그 길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예전에 나는 주로 본분 이행에 관한 것만 이야기했지, 합격된 본분 이행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주로 합격된 본분 이행, 그중에서도 합격의 기준과 합격되는 여러 가지 태도, 그리고 관련된 각 진리를 구체적으로 교통했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사람이 피해야 할 문제나 잘못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약 그러한 잘못을 저지른다면 네게는 정말로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때는 누구도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면 너는 너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만약 그 지경까지 간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니 돌려세우기 힘들다. 이런 것을 두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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