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편 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1)

너희들이 하나님을 수년 간 믿어 오면서 비록 진리는 조금 깨달았지만, 각자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본래 뜻과 진리에 어긋나고 대립되는 이해와 생각, 상상을 품고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진리에 위배되는 것들은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관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한 측면으로는 지식의 전파와 주입으로 인한 것이고, 다른 한 측면으로는 전통문화와 사회 조류,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다. 한마디로, 사탄의 사악한 사회가 사람에게 주입한 이것들이 바로 사람의 관념이 생겨나는 근원이다. 사람에게 이런 관념들이 생겨나면 쉽게 없앨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런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고 위안을 얻는다.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정을 받으면 하나님에게도 분명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가 느끼는 위안은 참일까, 거짓일까?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참이다. 그가 추구한 것이 바로 그런 위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위안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바로 관념 때문이다. 그의 관념이 만들어 낸 허상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님이 만족하고 자신도 최후에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관념과 상상은 그에게 그런 확신과 허상을 심어 주었고 그의 마음을 아주 편하게 해 주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까? 그것은 사람의 좋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자신에게 일이 닥쳐서 책망을 받으면, 그는 좋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그게 아니라는 것,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마음속에 반발심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오랫동안 좋은 사람으로 살았고, 나보고 나쁘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하나님만 나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구나!’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바로 사람의 관념이 문제다. 관념 때문에 사람은 종종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여러 가지 요구를 하고,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잘못된 사상 관점으로 사물의 옳고 그름, 사람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가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심이 있는지 없는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한다. 이런 잘못된 자세는 바로 사람의 관념에 의해 생겨난다.

사람의 관념은 먹고 자는 것에 영향을 주거나 사람이 정상 인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사람의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존재하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1분 1초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한다. 네가 매 순간 그것을 떨쳐 버리지 않으면 매 순간 너의 행동과 생각을 좌우하고, 판단을 좌우하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좌우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품고 있다는 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벽이 존재하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과 본질을 보지 못한다. 관념과 상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관념에 기대어 판단하고, 정죄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지 못하고, 진실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설령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해도 관념과 상상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탄과 세상에 속하는 사람의 것들이 뒤섞여 진리에 부합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품는 이 문제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크고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누구나 하나님에 대해 온갖 관념과 추측을 품는다. 즉,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품고 하나님이 주는 모든 것과 하나님의 섭리를 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이 마주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할까? 바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추측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의 이런 행위는 무엇이냐? 하나님에 대한 패역과 대적, 정죄, 모독, 판단, 겨루기다. 심한 경우 사람은 하나님과 ‘결투’를 하려고 한다. 가장 심각한 경우에는 관념 때문에 진실한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순종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이 따르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문제다. 관념은 사람에게 백해무익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관념이란 무엇이며, 사람이 갖고 있는 관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교제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너희에게 어떤 관념이 있는지, 또 관념에 속하는 사상과 인식, 판단, 관점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비록 사람의 행위는 관념에 속하지 않지만,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상과 관점은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상과 관점의 일부가 사람의 관념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념은 다음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행위와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각각 다양하게 상상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한 관념이 생겨난다. 둘째,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대한 관념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가지는 관념이다. 관념은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 안에 포함된다.

먼저 첫 번째 관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관념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다 갖고 있다. 원래부터 주님을 믿었던 사람이든 믿지 않았던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는 누구나 많은 관념과 상상을 품고 있다. 나이 든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하나님을 믿은 다음부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나름대로 상상을 한다. 자신이 나이도 많고, 하나님도 오래 믿었기 때문에, 말이나 행동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야지,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단정하고 점잖은 신사처럼 품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화를 할 때에도 엄숙하고 진지하다. 예배 시간에 젊은 자매들이 율동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도 그는 스스로 절제하면서 눈을 딴 데로 돌린다. 그는 안목의 정욕을 억제해야 하고, 예가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중얼거린다. ‘젊은 사람들은 즐겁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살까?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 정도 답답한 건 좀 참아야지. 내가 늙은 걸 누굴 탓하랴.’ 그는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따금씩 자매들을 훔쳐본다. 이것은 분명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위장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어쩌다 그런 ‘궁색한 처지’가 되고 말았을까? 바로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행위와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관념 때문이다. 이 관념이 그의 행위에 방향을 제시하였고, 그래서 떳떳하지 못한 행동과 가식적이고 꾸민 모습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박수를 칠 때도 다른 사람들은 우렁차게 치지만, 그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자신은 나이가 들었는데, 체통을 지키지 않고 너무 크게 박수를 치면 젊은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가식이고, 기계적으로 꾸며 낸 것이다. 꾸며 낸 그의 행위들이 사람들에게 덕이 될 수 있을까? 어떤 느낌일까? 첫째는 그의 가식적인 모습에 그와 접촉하기를 꺼리게 된다. 둘째는 위선적인 느낌 때문에 그와 이야기를 해도 마음이 시원하지 않고, 답답하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든 그 행위에 관념과 사람의 뜻이 담겨 있으면 사람들에게 덕이 될 수 없고 거리감을 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렇게 함으로써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유익이 되는가, 그가 이렇게 실행하고 행동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 믿는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 요구에 부합할까? 하나님은 어떻게 요구하셨을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까? 내가 이해한 것이 과연 하나님의 요구와 서로 일치할까?’ 그가 이런 고민을 해 봤을까? 분명히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만약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면 확실히 알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떤 행동과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단정하고 품위 있는 태도를 강조하는 전통문화나 학교 교육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가 보인 온갖 이상한 태도는 그 때문이다. 그의 행위나 표정을 보면 어딘가 이상하고 정상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상한 행위와 표정을 떠나, 무엇보다도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지 못한 데다가,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마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진리와 동떨어진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간단한 일,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행위도 인간의 관념이 섞이면 이렇게 황당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 요구의 기준을 깨닫지 못한다. 나이 든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깨닫지 못하여 이상한 행위나 태도, 심지어 황당한 거동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젊은 사람들이 하나님 요구의 기준을 깨닫지 못하고 상상과 관념을 따를 때 어떤 그릇된 행위와 태도를 보일까? 어떤 젊은이가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단순하고, 솔직하고, 생기 있고, 활발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라고 하시니, 말과 행동을 아이처럼 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선민이 되는지 이제야 알았어요. 예전에는 항상 간사하게 살고, 남들이 보기에도 너무 노숙하고 무감각하고 활기가 없었는데, 이제는 생기 있고 활발하게 지내야겠어요.” 그 후로 그는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하고 자기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말을 할 때도 마치 응석을 부리듯이 말을 하는데, 그가 보기에는 아이들이 그런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또 어색한 손동작을 해 보이곤 하는데, 정말 부자연스럽고 거북해 보인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단순하고, 솔직하고, 생기 있고, 활발한 어린아이같은 모습이 어떤 것인지 그는 깨닫지 못한다. 그가 이해한 것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행위와 방식일 뿐이다. 그런 사람은 그릇되게 이해한 것이다. 또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그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이방인의 행위와 방식, 세상의 조류와 결합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 앞에도 오지 않고, 형제자매들과 하나님이 말씀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나누지 않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도 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근거와 말씀이 가리키는 바를 자신의 머리로 분석하고 연구하거나 이방인들 사이에서, 혹은 지식과 전통문화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사람이 찾는 근원과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람이 하나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느냐를 떠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는 세부적인 것이다. 절대 사람의 머리로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겉모습이나 행위,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과 사람됨에 있어서의 실행 원칙의 범위이다. 오늘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는 하나님이 요구한 단순하고, 솔직하고, 생기 있고, 활발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에 대해 잘못 이해하거나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너희도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한 적이 있느냐? 그런 행동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행위에 속한다. 이는 사람의 관념으로 초래한 것이다. 관념이라고 하면 틀림없이 잘못된 것, 부정적인 것, 하나님의 요구나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사람의 터무니없는 상상에 의한 것이든, 근거가 있는 것이든, 관념은 모두 진리와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관념에 대해 교제하고 분석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관념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동시에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오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의 관념이 아무리 이치에 맞고, 아무리 근거가 있다고 해도 결국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대신할 수도 없다. 만약 네가 관념을 진리라고 여긴다면, 진리는 너와 관계가 없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도 너와는 상관이 없게 되며, 너의 믿음은 일말의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네가 관념과 상상을 위해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고,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니고,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진리와 무관하고, 하나님과 무관하다. 최후의 결과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죄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칭찬받는 것과 정죄받는 것의 이해(利害)관계이다. 그러므로 관념을 해결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관념을 해결하는 첫 걸음은 바로 관념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또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 집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을 때, 아주 혐오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사람의 관념과 관계가 있었다. 지금 그 일을 분석하는 것은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분별을 길러 그 일을 기억함으로써 관념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관념이 사람에게 얼마나 해로운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언급하지 않으면 모두들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이를 분석하면 모두가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영화를 찍으려면 의상을 선정해야 하는데, 이때 어떤 색상과 디자인을 골라야 할지가 문제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황토색 옷만 골랐다. ‘왜 그러지? 왜 저런 색깔만 골랐을까?’ 하나같이 황토색으로 도배를 하니 모든 장면이 암울해 보여서 나는 너무 답답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왜 화려한 색은 고르지 않았을까? 하나님 집에서 사용하는 의상들은 색깔도 화려하고 스타일도 품격에 맞고 세련돼야 한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나님 말씀, 하나님 집의 요구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황토색 옷감으로 옷을 만들었을까? 왜 그렇게 했을까? 이것은 반성해 봐야 하지 않을까? 입만 열면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고 진리를 구하겠다고 하면서, 막상 일이 닥치면 자기 생각이 앞선다. 이것은 어떤 성품일까?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강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생긴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황토색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표지, 혹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기본 색상이자 상징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색상을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 뜻과 요구에 맞는 색상으로 정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와 원칙은 접어 둔 채, 그 색상을 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요구와 원칙을 대체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다. 색상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사람이 관념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그 일의 성격이 변하고, 문제가 된다. 사실 의상의 색상과 디자인을 선택하는 것은 모두 표면적인 일로, 깊은 진리에는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관념 때문에 그런 황당한 일이 생겼고, 부정적인 영향도 초래했다.

체험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관념은 끊임없이 생기고, 사람은 또 끊임없이 그런 관념들을 사용하며, 그런 관념 가운데서 살아간다. 그리고 관념에 의해 좌우되고, 지배되고 통제된다. 즉, 사람의 행위, 사상, 생활 방식, 인생의 방향과 목표, 일 처리 원칙, 그리고 하나님을 대하는 말 한마디까지, 사람은 처음에 생긴 자신의 관념에 따라 이 모든 일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5년에서 10년, 15년에서 심지어 20년까지 하나님을 믿고 나면 드디어 햇수를 채웠다고 착각한다. 그럼에도 맨 처음 생겨났던 관념은 전혀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 그것을 자세히 분석해 준 사람도 없었고, 스스로도 성찰해 보지 않았으며, 더욱이 책망과 훈계를 받은 적도, 진지하게 대한 적도 없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무리 오랫동안 믿었다고 한들 성과가 있겠느냐? 전혀 없을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관념을 분석하고 인식한 후, 그 관념을 해결하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서 점차 개선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관념이 여전히 처음 하나님을 믿었던 그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련하여 아직도 어떤 관념들이 해결되지 않았느냐? 너희 행위와 추구에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 영향을 주어, 너희와 하나님의 관계가 항상 미온적이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무척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이 자라고 고통을 감내할 의지도 커졌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들 말이다. 너희들 스스로 분석해 보아라. 틀림없이 누구나 다 이런 관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관련하여 앞서 세 가지 예를 들었다. 세 가지 예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 믿는 것에 대해 어떤 관념들을 가지고 있는지 기본적인 개념이 있게 되지 않았느냐? 이와 관련한 진리를 어느 정도 알게 되지 않았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또 어떤 관념들이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하나님의 요구를 구하는 일,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에 영향을 미치느냐? (저의 관념은 매일 바쁘게 보내면 본분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기만 하면 본분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관념이다. 관념이란 무엇이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각종 상상과 이해, 정의가 모두 관념에 해당한다.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본분을 많이 할수록 공로가 더 크고, 하나님께 더욱 인정받을 수 있으며, 나중에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관념은 하나님 말씀의 내용이나 하나님이 규정한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근거가 없거나 혹은 어떤 것에 근거하여 생각한 것이다. 사람이 제멋대로 상상하고, 그 생각에 지배당해 일을 처리한 다음, 그 결과가 본인의 상상과 다르게 나오면 사람은 기운이 쭉 빠진다. 그러다 어느 날 뒤돌아보고 자신이 걸어온 길이 상상과 관념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많은 시간을 낭비한 뒤다. 또 어떤 관념이 있느냐? 말해 보거라. (제 마음속에는 이런 관념이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저에게 잘 해 주셔야 하고, 제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길을 열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분을 이행하다가 문제가 생기거나 하나님이 마련하신 환경이 제 뜻과 맞지 않으면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맞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모든 게 잘 풀려야지 저에게 그런 일들이 생기게 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이므로, 좋은 것을 얻지 못하면 본인이 틀림없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 이 관념이 지금 바뀌기 시작했느냐? 해결받았느냐? 이 관념이 너의 행위를 좌우하거나 네가 나아갈 방향에 영향을 줄 때, 너는 진리를 구하였느냐? 사람은 종종 하나님을 믿으면 이럴 것이라고 규정을 내린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 편안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매일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 가정에 복을 내리고, 나를 보호해 주셔서 아프지도 않게 하고 뜻하지 않은 일도 생기지 않게 해 주셔야 돼. 또 내가 본분을 하고 있지만 이 일은 전부 하나님의 일이니까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지셔야 해. 그러니까 본분을 할 때 어려움이나 위험, 시험이 닥치는 일은 없어야지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게 아닐 거야.’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관념이 자주 생기지 않느냐? 만약 이런 관념을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진리를 구해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진리는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항상 말씀을 먹고 마시고, 예배도 드리고, 설교도 듣고, 영적인 생활이 아주 정상적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됨됨이, 일을 처리하거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마저도 관념에 따르며, 일의 옳고 그름을 관념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관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관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듣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보더라도 성품이 전혀 변화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하겠느냐?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내면의 관념을 분석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아무 일도 없으면, 사람은 자신에게 관념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일이 닥치면 관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리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자꾸 여의치 않은 일들이 생기고, 몇 년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건강도 안 좋아졌다거나, 큰 붉은 용에게 잡혀가 구타까지 당했다고 하자. 그는 ‘참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보호해 주지 않으실까? 왜 내가 악인에게 매 맞고, 악마에게 유린당하는 걸 보고만 계실까?’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념이 생기지 않겠느냐? 이런 관념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연히 내 생활도 돌봐 주셔야 하고, 내 앞날과 운명도, 내 가족의 신변의 안전까지도 지켜 주셔야 해!’ 그러다가 막상 하나님이 돌봐 줄 거라 믿었던 그런 일에 문제가 생겨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좋을 게 없고, 결국 하나님이 아무것도 돌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옳은 생각일까? 너희들은 누구나 고통 없는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가정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일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결혼 때문에, 어떤 사람은 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고통을 받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고통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육체의 삶이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느낌을 체험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느낌, 부정적인 느낌, 적극적인 느낌, 소극적인 느낌 등 다양한 느낌은 모두 인생의 경험이 된다. 네가 그 가운데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점점 하나님이 너에게 준 목표에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것도 사람의 경험을 쌓기 위한 한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고통받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책임이라는 점이다. 무슨 책임일까? 너는 마땅히 그 고통을 받아야 하고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간증이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면 그것을 감추며 부끄럽게 여기는데, 사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이 배치한 온갖 고통을 감내하면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하고, 하나님이 맡긴 일을 정상적으로 완수한다면 그 일은 간증이자 사탄에게 치욕을 안기고 사탄을 물리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고통을 받든 피조물이자 사람으로서 마땅히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 마음에 부합하는 것이고, 역시 하나님의 본래 뜻이기도 하다.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배치했다. 하나님이 너에게 배치한 환경과 조건은 너에게 준 책임과 의무, 사명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마땅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이런 요구, 그것이 바로 진리다. 왜 그것을 진리라고 할까? 네가 이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받아들인다면, 너에게 일이 닥쳤을 때 그 말씀을 통해 너의 관념과 패역을 해결하고, 순조롭게 넘길 수 있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 뜻에 위배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부여한 조건과 환경에 순종하면 진리를 깨달아 간증을 할 수 있고, 사탄을 치욕스럽게 할 수 있다. 반대로, 네가 자신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마땅히 축복해 주셔야 하고, 나는 마땅히 복받는 사람이 되야 해.’라고 생각한다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간증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사람은 많은 상상을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생 부귀와 평안을 누리고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은혜를 입을 것으로 상상한다. 또 부러움의 시선을 받고, 자신은 궁핍하거나 병이 나거나 재난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상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도록 만든다. 네가 하나님에게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분명 비정상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너는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과 겨루고 대항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버릴 것이다. 게다가 그런 행위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즉, 사람에게 그런 관념이 생기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은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고,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이 준 사명과 하나님을 믿는 데에 관한 여러 가지 요구를 찾고 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데에 관한 관념이 해결되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도 더욱 정상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관념을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를 해결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관념을 해결해야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늘 마음속에 있으면서 너희의 행위를 지배하는 관념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여의치 않은 일들이 생기면, 이런 관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너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과 겨루고 따지게 된다. 그로 인하여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순식간에 실질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하면서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했지만, 갑자기 충성심도 사라지고, 본분을 이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너를 택했다고 원망하기까지 한다.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갑자기 이렇게 크게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관념이냐? (하나님께서 환경을 마련하여 저에게 시련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셨고, 좋은 결말도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렸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을 원하지 않고,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도 일종의 관념이다. 이런 관념은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 때문에 생긴 것일까 아니면 근거가 있는 생각일까? 하나님이 결말을 안 줄지 네가 어떻게 안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너에게 말씀했느냐? 그것은 사람이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제는 그것이 관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 관념을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이 관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 관념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런 다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요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면 된다. 만약 자신의 관념이 하나님의 요구와 서로 대립될 때,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의 관념을 고집한다면, 이런 사람은 생명 진입이 없고, 분량이 상당히 작은 사람이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종착지와 결말, 본분의 조정이나 교체에 특히 민감하다 보면 그에 대해 종종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일단 교체되거나 혹은 하나님이 싫어한다고 하면, 다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의미가 없고, 결말도 이미 다 정해졌고 하나님이 자신을 거부하는데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종의 패역이자 자포자기다. 자포자기하는 본질은 바로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포자기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까 모를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할까? 누군가는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주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많은 사역을 하고, 많은 노력을 쏟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과 대가를 치르고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포자기한다면 하나님은 무척 슬퍼하실 것입니다. 매일 그 사람이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서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도 역시 사람의 관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취하는 태도가 있다. 네가 자포자기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관두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저는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만족게 하겠습니다. 제 안에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재능을 최대한 살릴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요구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면 계속 따르거라. 하지만 너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원칙과 기준은 변하지 않았다.”라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다시 말하면,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뿐이지, 하나님은 영원히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최종에 구원받기까지 실패를 한 번 경험하거나 책망과 훈계, 또는 심판과 형벌을 한 차례 겪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온전케 되기까지 수백 번의 연단을 겪었다. 즉, 봉사만 하다가 최종에 살아남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단 몇 차례의 시련과 연단만으로 길 끝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냐? 그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다.

사람은 늘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하나님이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포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생각한다. 진정한 포기란 네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가끔 하나님이 너에게 정의 내린 그 말씀은 단지 화가 나서 한 말씀이지, 너를 규정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고, 최후에 내리는 벌이라든가 최후의 종착지를 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심판하거나 책망하는 말씀이고,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말씀이고, 너를 깨우치고 지적하는 말씀이다. 또, 하나님의 마음속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심판의 말씀 한마디에 쓰러지거나 하나님을 저버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한동안 연약해져 있다가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안 돼. 그래도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야지. 창조주를 떠난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피조물의 가치를 살아내려면 그래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따라야 해.’ 어떻게 하나님을 따를까? 과거의 방식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본분에 충성을 다하지 않고 약간의 책망과 훈계도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조금만 고통스러워도 불만을 품던 예전의 방식은 이제 바꿔야겠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야 해.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시면 우리도 우리의 관념과 상상대로 규정하면서 하나님과 대립하지 말고, 순종하고 우리 자신은 안 된다는 걸 인정해야겠어’ 이러면 길이 보이지 않느냐? 길이 보이는데도 하나님을 떠날 수 있겠느냐? 가끔 하나님이 너를 떠났다고 느끼겠지만, 사실 하나님은 너를 떠난 것이 아니다. 단지 네가 너무 괘씸해서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 정말 너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힘을 내어 본분을 이행하지만, 그의 본질이라든가 여러 가지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택하지 않고, 사실상 포기하였다. 그는 그저 잠깐 동안 힘만 쓴 사람에 그치고 만다.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는 심하게 징계하고, 채찍질하고, 심판한다.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갖가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차갑게 대하고 상처를 주는 것으로 여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게 존엄도 없는 것 같고, 다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에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버린다. 자신은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그렇게 먼저 하나님을 떠났지만, 사실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여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포기하고 마는데, 이것이 정말 양심적인 행동일까? 하나님은 가끔 사람을 멀리하기도 하고, 반성하라는 의미에서 한동안 방임하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사람을 포기한 적은 없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지 진정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포기하는 것은 오로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인과 적그리스도뿐이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성령 역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성령의 깨우침이 없는데, 혹시 하나님께서 저를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까?”라고 한다. 이런 생각은 착각이다. 네가,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고 구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너의 결말을 정해 놓았단 말이냐? 네가 가끔 성령의 역사를 느낄 수 없다고 해서 너에게서 하나님 말씀이 사라졌느냐? 하나님이 말씀 읽을 권리를 빼앗아 갔느냐? 너는 정상 인성의 사유를 다 갖추었고, 구원받는 길도 막히지 않았다. 그런데 괴로울 게 뭐가 있느냐? 자신의 내적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진리를 구하여 해결하지는 않고 “하나님이 저를 원하지 않으시니, 저도 하나님이 필요 없어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억지만 부린다. 이것은 공연한 트집을 잡는 것이다.

“베드로는 온전케 되기까지 수백 번의 연단을 겪었다.” 너희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사람은 수백 번의 연단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히는 것처럼 기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도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시련이 무엇인지, 무엇을 수백 번 겪었다고 하는 것인지, 그 수백 번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근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관념과 상상에 따라 생각한다. 실생활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축복을 주고, 인도하고, 온화하게 이야기하는 것뿐이라면 그 시련은 사람에게 있어 영원히 빈말이자 하나의 단어, 하나의 정의나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너에게 역사한다. 네가 병에 걸리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의치 않은 일이 닥쳐 연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애로 사항이 생기게도 한다. 이 모든 뜻하지 않은 일, 고통, 어려움, 심지어 사탄의 시험을 모두 하나님의 시련, 수백 번의 시련 중 한 번으로 여기고 받아들여 그 안에서 진리를 구한다면, 너의 내적 상태는 달라지고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시련이 닥쳤을 때 이를 거부한다면, 자꾸만 피하고, 맞서고, 대항한다면 그 수백 번의 시련은 너에게 있어 영원히 빈말로 남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무례하게 굴어서 기분이 상했다고 하자. 네가 만약 혈기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너도 그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듯이 무례함을 되갚아 줄 이유가 생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 앞에 살면서 하나님의 온전케 함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너에게 닥친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는 시련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것은 시련으로 여길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준 여러 가지 방식의 시련인 것이다. 이번 교제를 들으니 답답함이 많이 해소되고 편안해지지 않았느냐? 너희들이 내가 지금까지 말한 대로 실행하고 너희의 행위와 관점을 거기에 비춰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을 주제로 이야기했는데, 주로 어떤 면을 다루었느냐? 하나는 표면적인 행위로, 겉으로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아주 고상하고 점잖고, 말하는 것도 부드럽고 세련되어야 한다는 관념이다. 다른 하나는 생활의 기본 요소에 관한 관념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들의 관념은,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복과 좋은 일이 따라야 하고, 병이나 화가 닥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욥의 체험을 살펴보자. 욥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이 한 것이라고 믿었다. 본인이 잘못해서 하나님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몇몇 친구들은 욥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그런 화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었다. 그렇다면 욥은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이미 그런 일을 체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하는 동안 그는 이미 그런 관념들을 분석하고 인식하여 내려놓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이 그에게 임했을 때 아무런 오해나 원망, 거역도 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하게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 사물의 실제로 여기고, 지고지상한 것, 사람이 실행해야 할 원칙과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오해를 품지 않는다. 관념이 있다면 사람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해결해야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저는 관념이 없어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다 해결했어요. 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이것으로 된 것일까? 관념을 해결했다고 끝이 아니다. 관념을 해결하는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에 따라 실행하여 최종에는 진리 실제에 진입함으로써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바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 지식, 철학, 전통문화 등 진리에 맞지 않는 것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분석함으로써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사탄의 철학, 사탄의 논리인지 깨닫게 된다. 이런 것들을 깨닫는 순간, 사람은 올바른 길이 어떤 길인지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 요구대로 해 나갈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사물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지금 관념을 분석하는데, 저에게는 관념이 없습니다. 대개 관념이 있는 사람은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들, 아니면 신학자들이나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냐? 이 사람은 자신을 모른다. 무엇을 교제해도 자신에게 맞추어 보지 않고,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무지하고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너희도 그런 생각을 하느냐? 보통 사람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설교를 많이 듣다 보니, 타락이나 관념과 같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를 분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분별이 생기고 자신도 발전하여 진리를 더욱 빨리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들 공개적으로 자신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관념을 분석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길에 진입하고 어떻게 하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최종에, 한 측면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한 측면으로는 사악한 관념, 상상, 또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과 같은 부정적 사물에 저항할 면역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종교 분야의 지식인, 신학자, 학식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바로 그 사람을 꿰뚫어 보고, 진리를 이용해 그들이 가진 갖가지 관념과 상상, 지식에서 비롯된 것들을 반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너희가 부정적 사물에 대해 분별이 생기고, 긍정적 사물에 대해서도 아주 많은 깨달음과 인식, 실천, 체험이 있게 되면 긍정적 사물이 전혀 없고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 사람을 마주할 때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지식, 학문, 철학, 심지어 그의 전체적인 사상과 이론도 너에게는 일격에도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다 겪었으므로 그것들을 모두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진리를 깨달으면 다른 사람을 간파할 수 있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다른 사람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사람과 사물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기초와 생명이 되는 진리가 없이는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각종 관념과 상상을 해결한 사람은 내면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생기고,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사람에게 생긴 각종 관념과 상상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해결이 되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본질,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여러 태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어떻게 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을까? 바로 사람이 여러 가지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고, 지식, 철학, 전통문화, 또는 세상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사상과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와 관계된 여러 가지 관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으면 사람은 그와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게 되어 진리로 생각하고, 진리로 문제를 바라보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해결이 사람의 생활과 생명에 가져온 변화다. 이러한 변화와 동시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바뀐다. 그 관계에는 힘겨루기도 시험도 없고, 패역도 아주 적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충성심, 순종과 경배의 요소와 이해, 정직한 마음이 많아지게 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도 생긴다. 이러한 변화가 뒤따른다면, 관념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느냐? 관념을 해결한다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자신을 부정해야 하고, 자신이 집착하던 것, 그리고 옳다고 믿으며 평생 추구하고 지향해 왔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사탄의 세상에서 배운 지식, 철학, 생존의 길까지 내려놓아야 함을 뜻한다.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하며, 그 방식은 진리를 생존의 근간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상당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생활에 수반되는 고통이나 곤란이 아니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각종 사물, 인류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각 방면의 인식을 바꿔야 하는 고통, 즉 세상과 인생, 인류,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본래의 인식과 관점을 완전히 뒤집는 고통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을 이야기했다. 몇 가지 예를 통해 이 방면의 진리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이 있게 되었다. 너희는 각자 다시 묵상하고 교제하면서 더 많은 것을 알아내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본인이 갖고 있던 여러 가지 관념을 천천히 반성하고, 인식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런 다음 점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아무튼,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련하여 사람은 분명 적지 않은 관념과 상상을 품고 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으면 나중에 하나님이 다 하실 테니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기만 하면 사람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다. 이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에 해당한다. 사람이 배워야 할, 본분과 관련된 업무와 지식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고, 공상과 상상은 지양하고, 본분에 필요한 것들은 공부하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본분에 대해 마땅히 지녀야 할 관점이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진리요, 하나님의 요구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하는 일은 사람의 상상과 맞지 않는다.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 원칙을 구한다면 그 일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관념을 집요하게 고집하면서 그것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이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옳은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관념만을 고집한다면, 너는 분명 진리와 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했던 세 가지 관념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이고 아주 흔히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한 관념이다. 이와 관련한 진리는 그다지 깊은 편이 아니므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성육신에 대한 사람의 관념에 대해 교제해 보자. 성육신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면 사람의 내면에 많은 상상들이 있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성육신 하나님은 모르는 게 없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 거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아주 완벽해서 사람은 높이 바라볼 수 없고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육신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했을 때 이렇게 상상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이다. 그 관념은 사람의 판단에 근거하거나 혹은 지식과 종교 신앙, 전통문화 교육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본 후에는 사람에게 또 새로운 관념이 생긴다. ‘그리스도 모습이 이러시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왜 이렇게 다르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모습이 아니어야 해.’ 하지만 하나님이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사람 스스로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관념이 생기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관념이자 상상이고,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관념은 그대로 한꺼번에 밖으로 표출된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하는 공상이든, 하나님을 보고 나서 하는 생각이든, 어쨌든 하나님 말씀이나 하나님의 본질에 맞지 않고, 그분이 그리스도이고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그분에 대해 부인하고 의심하게 하는 생각과 관점들은 모두 관념이다.

사람은 성육신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관념을 가진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교제해 보자. 너희 중에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막 믿기 시작했을 때, 아니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누군가 너에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해 주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해 설 무렵에 다른 사람들은 명절을 쇠러 다들 집에 갔는데, 그리스도는 혼자 눈과 바람을 맞으며 길을 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동을 받은 누군가가 말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오셔서 정말 힘들게 지내셨군요! 인류가 사탄에게 너무 깊이 타락되어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고통을 당하셨네요. 이제 보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였네요. 그 말씀이 이루어졌네요.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함이 그 이야기에서 탄생한 결과라고 믿었다. 너희들은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펑펑 울면서, 한편으로 사람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는 생각해 보았느냐? 왜 이런 이야기에 감동을 받을까? 하나님의 육신 자체에 대해 사람이 관념과 요구,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보았느냐? 하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즉 인자의 생활이 그 이야기와 달리 고생스럽지 않고 복을 누리는 삶이었다면, 사람들은 탄복하지도 않고 아무런 격려도 받지 못할 것이며, 본분도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본분을 하면서 고생을 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관념이 생기지 않을까?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고통을 받아야 온 인류에게 본보기가 되고 귀감이 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에 와서 부귀영화를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은 전적으로 고통을 받으러 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고통을 받아야 온 인류가 더 이상 할 말도 없게 되고, 또 그 일로 감동을 받고 탄복하며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위와 같은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쉽게 인정받고,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 말한 그 일이 과연 정말로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기를 바라느냐, 아니기를 바라느냐?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사실이기를 바라자니 사람의 관념에 너무 맞아 떨어지는 것 같고, 반대로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자니 너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영웅적 본보기 이미지가 깨질 것 같은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관념을 분석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생활 환경과 생활의 질, 그의 일상적인 생활에 대해 기준과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 관념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 오면 반드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영향력이 있는 존재, 숭배하고 우러러보고 흠모할 만한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뛰어난 지능과 기억력에,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심지어 많은 기적을 행해야만 사람들이 따를 가치가 있고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칭호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으로 상상하는 이런 것들이 만약 현실에서 실현된다면 사람의 믿음이 무척 강해지고 열의가 넘칠 것이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거나 혹은 사람의 상상과 다르게 나타난다면 별로 하나님을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람의 관념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냐? 이런 관념들은 위인에 대한 사람의 정의에서 비롯된다. 성육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의 상상은 근거가 있든 없든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의 모델을 그려 놓는다. 그리고 사람은 그 모델을 하나님 성육신에 대조해 보고 맞지 않으면 마음이 언짢고, 관념이 생긴다. 그렇지 않으냐? 아마 지금도 방금 내가 말한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당시 상황에는,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인 형제자매가 많지 않았는데,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새 이름을 증거할 때부터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 이방인이었다가 믿은 것이 아니라, 다들 예수를 믿다가 이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형제자매를 무함하는 것이다! 모두 터무니없는 일이고, 사람들이 제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그런데 너희는 또 정말로 믿는다.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 그건 사람이 성육신에 대해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감정과 욕망, 또는 심리적으로 이런 것을 필요로 하기에 다들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이 빈틈을 노려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것을 열심히 선전하고, 확대하고, 부풀린다. 결국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지어낸 이야기가 사실로 둔갑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너희는 평생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그러면 계속해서 성육신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이야기해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통해 성육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당시는 하나님의 이 단계 새로운 사역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교회에서 찬송가를 만들어야 해서 나도 한 곡을 만들었다. 당시는 성육신 하나님을 이미 증거했을 때다. 사람들은 내가 지은 노래를 보고 나서 아주 맘에 들어 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아주 이상한 소리를 했다. “어떻게 노래를 이렇게 빨리 만드실 수가 있어요? 어휘력은 또 왜 이렇게 좋으세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휘력이 좋다고? 노래를 만드는 데 어휘력이 필요하냐? 지식이 필요하냐?” 보통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면 그 말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는 노래를 만들려면 일정한 생명 경험이 있어야 하고, 또 문학을 알고 작문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면 어떤 잘못을 한 것이냐? 노래 하나 만들었는데 ‘어휘력이 좋다’고 하면, 성육신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들을 그는 어떻게 생각했던 것이냐?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부 어휘나 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성육신이 하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방인의 말로 해석을 하는데, 그 해석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에 거슬리고 역겹다. 그것은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은 관념의 어떤 면과 관련이 있을까? 그는 성육신,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고, 일종의 관념으로 그 일을 판단했다. 그의 생각에 그리스도는 사람들 중에서 지식과 교양이 뛰어나서 남들이 믿고 복종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비록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재주와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야 한다. 즉, 반드시 다른 사람을 능가하거나 다른 사람과는 다른 부분이 있어야 하나님이 되고, 그리스도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는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본질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그래서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관념은 사람의 진입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 어떤 방해가 될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육신을 머리로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하나님이 하는 말씀이 논리와 문법에 맞는지, 그 말씀을 어디서 배웠는지를 살핀다.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거나, 진리를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고, 사람의 머리와 지식으로 말씀을 분석하고 연구하려 든다. 사람이 이런 관점으로 말씀을 본다면, 거기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리스도가 한 말씀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임을 입으로 시인하고, 그분의 말씀은 모두 진리요, 생명이요,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고 확신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관점으로 말씀을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이 육신의 신분과 본질에 대해, 그분의 사역에 대해 시종 의심하게 되고, 이 육신이 도대체 사람인지 하나님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하면 자신의 관념들을 내려놓지 못한다. 믿지 말고 떠나라고 하면 그래도 하나님이라고 여겨져 자신이 떠나면 복을 받지 못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는 진리를 구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도와줄 방법이 없다.

성육신에 대한 관념에 관해 이야기를 하나 더 해 보자. 20년 전에는 내가 아직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다. 그 연령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말하는 것도 일 처리하는 것도 그다지 노련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정상이지 않으냐? 만약 노인 같다면 그것이 비정상적이다. 사람은 제 연령대에 맞게 사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만들면서 정상적인 성장의 법칙을 정했고, 이것은 성육신 하나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그분도 그 법칙에 맞게 살면서 인생을 체험한다. 이 법칙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은 그것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스무 살이 되기 전 하나님의 어떤 행동들은 틀림없이 젊은이들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당시 자매 몇 명과 한 집에서 살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 자매들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펜과 노트를 놓고 갔는데 버리기가 아까웠다. 다른 사람들이 메모할 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펜과 노트를 모아 자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랬더니 관념이 생긴 한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쓰면 되지, 뭘 나누기까지 하시나요? 어린애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소한 일이냐, 큰일이냐? 일반적으로 사람을 어린애 같다고 평가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일종의 표현 방법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말에 마음 쓰지 않고 그냥 넘길 것이다. 또 그런 말을 이론이나 관점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평가한 것은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그 일은 어떤 성격을 띨까?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하나님 성육신은 설령 스무 살이 안 되어도 성숙한 태도를 보여야 하고, 매일같이 바른 자세를 하고 앉아 눈은 앞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에게 지혜롭고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노인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농담이나 수다와도 거리가 멀고 아주 진중하고 침착한 모습이어야 한다. 행여나 펜과 노트를 나누어 주는 것처럼, 나이 든 사람의 이미지와 어긋나는 행위나 행동을 하면, 누군가는 내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나 하나님이 아니라 어린애 같다고 정죄한다. 하나님 성육신은 그 어떤 어린애 같은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내린 정의가 아니냐? 이런 종류의 정의는 정죄나 판단일까, 아니면 감상이나 인정일까? (정죄나 판단입니다.) 왜 정죄라고 할까? 하나님이 어린아이 같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일까? 여기서 그의 관념의 초점은 무엇이냐? (성육신의 정상 인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정상과 실제를 부인하였습니다. 그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부인이자 정죄와 모독입니다.) 그가 부인한 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연령대에 맞는 정상 인성을 나타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었어도 쉰 살처럼 노련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정상적인 성장 법칙에서 벗어나 초자연적으로,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이고 우리 마음속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관념이다. 앞서 말한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에게서 관념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도 그 관념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그를 드러내었다. 그 일에 관념이 생겼을지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람은 분명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찾고 구할 여지가 있기에 봐줄 만하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많은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똑같이 분명히 알지 못하더라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이 있고, 함부로 입을 열기보다는 묵묵히 기다리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으냐? 그렇다면 그가 분명히 알지 못한 것은 어떤 성격에 해당할까? 그는 대놓고 하나님을 정죄했다. 이는 문제가 심각하다. 사람은 관념이 생기면 하나님 성육신을 의심하고, 심지어는 정죄하고 부인한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일이다.

지금까지 세 가지 예를 들어 성육신에 대한 관념을 살펴보았다. 이 예를 통해 일부 문제들을 설명할 수 있지 않느냐? 그 안에 담긴 진리는 무엇일까? 사람의 관념은 무엇일까? 첫 번째 관념은 바로 하나님 성육신은 고통을 많이 받음으로써 온 인류에게 본보기와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관념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가 지식과 은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세 번째 관념은 하나님 성육신은 초자연적이고, 남다르고,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면에서든 다 평범하고 정상적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심지어는 부인하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좋아한다. 오늘 한 이야기들이 너희가 진리를 깨닫는 데 유익이 되었느냐?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내가 아무런 소재도 없이 이 방면의 진리를 말하면 너희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실제로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구체적인 예를 곁들이면 너희가 듣기에도 매우 와닿고 이해가 잘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예로 활용함으로써 너희는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유형의 일이 닥쳤을 때도 마찬가지로 이 방면의 진리를 이용하여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다면 너희는 영이 통하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영이 통하지 않고,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말한 이야기의 내용에서 이 방면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인식하고 분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입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하여 얻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너는 영이 통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만약 이야기가 끝난 뒤 그 일에 흥미를 느껴 일만 기억하고 진리는 내팽개친다면 그것은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껏 이야기한 사례에서 사람이 해결해야 할 관념은 무엇일까? 우선,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해 말하자면, 이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정의는 평범하고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타락한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면서 정상 인성의 모든 활동에 종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도와주고, 인도하고, 이끌 수 있다. 그의 정상 인성과 신성, 성격 그 어떤 면에서도 자신이 맡은 사역과 직분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에 대해, 성육신에 대해 정의한 기준이다. 예수가 사역을 하던 당시의 인성을 이번 성육신과 비교해 보면, 예수는 초자연적인 면을 보였다.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보이는 예수의 정상 인성과 일상생활은 무척 정상적이고 실제적이었다. 예수가 처음부터 서른 세 살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다. 하루, 한 달, 일년 그렇게 서른 세 살이 될 때까지 지낸 것이다. 이는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육신이 그렇게 지낸 것이다. 최종에 하나님 자신, 그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구속 사역을 담당하였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서른 세 살까지 세상을 체험한 육신이 그 사역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제다. 그리고 지금 하는 이 사역, 너희에게 말하는 모든 일, 너희에게 교제하는 모든 진리도 너희의 분량과 자라는 속도, 그리고 하나님이 배치한 전체적인 환경에 근거하여 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육신이 그런 일들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 동시에 이 육신 역시 협력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영이 모든 것을 이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이렇게 생각하면, 육신의 본질과 신분에 대해 영원히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육신이 너에게 역사한 것, 너에게 요구한 것은 하나님 영의 전체 경륜과 영원히 충돌하지 않으며, 함께 나아가고, 상호 보완한다. 이 육신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은 너희와 마주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너희도 하나님 영이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만 있고,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본질이 없으면, 누구도 이 사역을 담당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정상적인 육신은 반드시 하루, 한 달, 일년 그렇게 살아나가야 한다. 그의 인성은 계속 성숙하고 있고, 경험도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에서 하고자 하는 사역을 능히 담당하기까지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이 단계의 사역을 할 때,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예배를 하고, 교제를 하고, 각 교회를 돌아보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 자신의 언어 구사 능력, 그리고 사물과 사람을 보는 능력이 계속해서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여기서 너희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너희들은 내가 하는 말, 내가 교제하는 진리를 통해 경험을 한다. 그리고 경험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진리라는 사실, 또 너희가 성품이 변화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차츰 실증하게 한다. 또한 너희가 자라는 과정에 나 역시 끊임없이 깊이 들어가면서 너희를 더욱 알게 된다. 동시에 나는 또 끊임없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로 점진적으로 너희의 필요를 공급해 준다. “당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셔서, 우리의 분량이 점차 자라나 구원받는 길에서 점점 변화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하려고 하시는데요, 당신은 어떻게 이에 달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은 이 부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구하지 않는다. 어서 나에게 말씀을 공급해 주셔서 다시 그것을 사람들에게 잘 공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금식 기도하거나 기우제를 하듯 빌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의 이 육신 자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 직분은 진리를 발표하여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육신과 타락한 인류의 차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나는 특별히 알아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공급해 주고 교제해 주고자 하는 것이면 틀림없이 너희들의 생명이 자라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양육하는 바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너희의 영적 상태는 점점 나아지고 생명도 점차 자라날 것이다. 또한 내가 너희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영이 너희 가운데 역사하여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고, 너희에게 환경과 조건을 마련하여 너희가 여러 방면의 진리에 진입하게 한다. 인성과 신성은 이렇게 협력한다. 그러므로 이 방면의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전체 경영을 인식하고, 이런 진리로 이 육신을 대하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이 육신의 본질과 육신이 어떻게 사역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그분이 사람인지 하나님인지를 확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네가 이 방면의 진리를 경험하고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육신 즉, 그리스도가 땅에서 역사함과 동시에 성령도 협력하고 있으며, 역시 같은 사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 인류가 아무도 도달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리고 영이 역사함과 동시에 육신도 영의 역사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고 서로 보완하며, 또한 일치한다. 그들은 영원히 충돌하지 않는다.

이제 너희에게는 성육신과 성육신의 본질에 대해 또 어떤 관념들이 있느냐? 내가 너희와 만났을 때, 너희들이 나에게도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관념이 생기지 않겠느냐? “당신도 모르시는군요. 당신이 모르신다니 너무 이상합니다. 당신은 당연히 다 아셔야 합니다. 모르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없어야지요!”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 아니냐? 하나님 성육신에게는 정상 인성이 있다. 정상 인성이란 어떤 것일까? 바로 하나님 성육신의 사고방식에는 정상 사람의 논리가 있고, 초자연적이거나 막연하거나 공허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정상 인성의 사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조금 노력을 하면 습득할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 부분의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정상이다. 또한 그의 말이나 행동 역시 정상 인성의 논리와 사유를 따르지,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상 인성의 사유를 가진 사람이 조금씩 상황에 맞게 일해 나가는 것처럼, 그의 사유도 그런 것이다. 이러면 순리에 맞지 않느냐? 이것은 어디에 맞추는 것일까? 바로 사역할 대상에게 필요한 것에 맞추는 것이다. 내가 진리를 교제할 때 한 가지 주제를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주 심오하게, 아주 큰 틀에서만 이야기한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 사역은 공허하고 비현실적일 것이다. 너희들의 이해 수준이 한 발에 한 계단씩 나아가는 정도이고, 나 역시 한 발에 한 계단씩 너희를 이끌어 간다면, 너희는 나를 따라올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한 발에 네 계단씩 올라간다면, 너희는 영원히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내 생각이 너무 뛰어나 크게 앞서 나가서, 너희가 결코 따라오지 못한다면, 말씀이 육신 됨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이 육신이 아무리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심지어 사람들 보기에 무능해 보이더라도 그것은 다 인류의 필요이다. 하나님이 지금 공급하는 대상은 사탄에 의해 타락하고, 그 어떤 진리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달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육신은 반드시 정상 인성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사유란 무엇일까? 자질이 보통이거나 다소 못하더라도 인성과 사유가 정상적이기만 하면 누구나 하나님이 한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실행하고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 단계 역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현실적이지 않으냐? 지금 인류는 사탄에 의해 타락하여 손쓸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정상적인 사람의 사유와 자질을 좀 갖추었고, 하나님의 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따르는 마음, 그리고 양심과 이성이 좀 있는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육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본질과 인성을 갖추고 어떤 정상적인 사람의 사유를 갖추어야 무지하고 하나님과 적이 된 타락한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올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타락한 성품까지 해결할 수 있을까? 사람 안에 진리를 심어 줄 수 있을까? (없습니다.) 너희들이 지금 이렇게 대답하는 것도 아마 일종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언젠가는 사람이 얼마나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얼마나 패역하고 강퍅하고 사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경험을 통해 언젠가는 하나님 성육신, 정상 인성을 지닌 그 성육신이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갖가지 상상과 관념을 품는 것은 너 자신에게는 무책임한 태도이자, 하나님에게는 모독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고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부정과 의심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등 교육도 받았고, 가정 배경도 괜찮고, 교양이 있는 현대인이야. 그런데 그리스도는 너무 평범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패역이자 사리 분별을 못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관념이 생기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관념이 해결되었다 해도 하나님 성육신을 강하게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의 그 일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다. 경험하다 보면 언젠가는 하나님 성육신과 하나님의 정상 인성,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정상적일수록 너희에게는 더욱 구원이고, 더욱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 성육신이 초자연적인 존재라면, 아무리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 해도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는 성품,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정상과 실제 덕분에 인류에게는 구원받을 기회가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의 본질에 패역과 사탄의 타락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관념과 오해를 품고, 하나님께 대항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관념으로 인해 득의양양하게, 또는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을 부인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큰 잘못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려면 우선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관념과 그릇된 정의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견해와 관점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말씀, 그가 말씀한 진리가 조금씩 너의 마음에 스며들어 너의 생명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다면 그분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지,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면에 서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면서 그리스도를 계속 오해하고 의심하거나 심지어 그리스도와 맞서며 대항해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는 네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

지금 하나님의 말세 사역의 이런 형식에 대해 상상이나 관념을 갖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 바로 하나님 말씀이 이룬 성과다. 하나님 말씀과 역사에 정복된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가 자신의 하나님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참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말씀을 믿고, 확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성과를 이루었다고 해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오해가 해결되었느냐? (아닙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입은 육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직도 많은 관념이나 상상, 또는 요구가 있으며, 이 관념들이 아직도 너의 사상, 너의 추구 방향과 목표를 주도할 뿐만 아니라 너의 내적 상태에 종종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관념에 관련되지 않는 일이 닥치면 너는 그래도 정상적으로 말씀을 먹고 마시고 본분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일이 너의 관념에 맞지 않아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관념을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할까 아니면 처리하고, 억제하고, 배반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관념이 생기면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겼다는 점과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점, 그리고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쉽게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을 의심하며 심지어 배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래서 하나님께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부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진리를 구한다. 한동안 이렇게 하다 보면 관념을 확실하게 분석하고 내려놓거나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진리가 그의 생각과 행동을 주도하고, 본분을 이행하도록 인도하여, 본분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관념이 해결되기도 한다. 이것이 올바른 실행 방법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배치나 처사가 좀 불만스러우면 관념이 생긴다. 관념이 생기고 나면 본분을 할 마음도 없고 열의가 없어지고, 계속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빠져 저항과 불만, 원망을 품는다. 이런 행위가 옳으냐? 이런 것이 쉽게 해결이 될까? 예를 들어 너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에게 영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면 너는 화가 날 것이다. “저보고 함부로 영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라곤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이런 얘기를 듣는데, 정말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영이 통하지 않는데 교회를 이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큰 사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내린 평가와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엇갈리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일은 쉽게 반성할 수 있을까? 반성은 어떤 사람이 할 수 있을까?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반성할 수 있다. 우선은 자신을 부인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네가 스스로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이 너에게 영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면, 그것은 너의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다. 그러니 그것이 네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받아들여 자신과 맞추어 보아야 한다. 그러다가 네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을 처리하거나 같이 지낼 때 비교해 보면 자신이 영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바보 같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제서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한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하나의 규례, 정의나 개념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다음 실생활에서 맞추어 보고, 인식하고,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시간이 쌓여서 스스로를 정확히 평가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남아 있을까? 네가 그 일에서 더 이상 하나님과 갈등이 없는데도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대항할 수 있겠느냐? 너는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여서 그 부분을 확실히 깨달으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못 받아들이면 영원히 제자리에 머물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는 말씀에 그 어떤 거부감이나 적의를 갖지 말라. 그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어떤 사람은 본분에서 교체되었다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되고 연약해진다. 그러면 계속 본분을 태만하게 대하면서 이행하기 싫어한다. 겉으로는 그 지위를 너무 소중히 여긴 탓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다. 그의 연약함과 소극적인 태도는 순전히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나 형제자매의 평가가 스스로의 평가와 달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내린 평가가 스스로 내린 평가나 인식보다 낮았기 때문에 그는 불복하며 받아들이지 않다가 나중에는 소극적으로 되어 대항하며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결국 본분에 지장을 주어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자신의 생명 진입도 제자리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손해가 너무 크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저보고 나쁘다고 하셨는데,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성육신은 정상 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종종 잘못 판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하시는 많은 일들도 다 100%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한 사람을 평가하고 정죄하거나 처리하고, 배정하실 때 실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부분은 좀 의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즉 땅의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시든 전 두렵지 않습니다. 그분은 저를 정죄할 수도 없고, 제 결말을 정하실 수도 없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내가 자기를 책망하고 처리하기만 하면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아무튼 제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이런 말로 맞대응하는데, 이건 무슨 소리냐?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이다. 그 말의 뜻인즉 결정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면, 성육신 그리스도와 하늘의 하나님의 관계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에 땅의 이 육신은 영원히 사람이다. 아무리 많은 진리와 아무리 많은 말씀을 하여 사람들을 온전케 하고 구원받게 했다 하더라도 그분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고 하늘의 하나님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믿으며, 자기 맘에 드는 방향으로 하나님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땅의 하나님이신 당신이 저를 잘 대해 주시면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면서 존중하겠지만, 저를 계속 책망 훈계하면서 잘 대해 주시지 않으면 당신은 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때는 하늘의 하나님을 택하겠습니다!” 너희를 포함해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접해 봤으니 말이다. 평소에는 나에게 차도 따라 주고 시중도 들면서 잘 해 주지만, 만약 자기를 처리하기라도 하면 바로 나와 반목하며 원수가 된다. 그럼 그가 나에게 잘 대해 줄 때, 내가 하나님이고 그리스도임을 인정했던 것이겠느냐?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신분과 지위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아첨 외에 다른 게 없다. 결국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다. 땅의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말씀하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과 유익을 주었든, 정상 인성 안에서 살아간다면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한다. 이 관점이 어떠냐? 사실 이런 관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다 있을뿐더러 사람들의 잠재 의식 속에 아주 깊이 숨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공급과 말씀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의심하고 관찰한다. 이와 동시에 하늘의 공의로운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을 평가해 주기를 고대한다. 왜 그가 하늘의 하나님의 평가를 바랄까? 그는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제멋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하늘의 하나님이 자신을 대하도록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의 하나님은 진리만 이야기하고, 어떻게 원칙으로 사람을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하늘의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사심도 없고,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도 없다. 하지만 땅의 하나님은 다르다. 사람이 어떤 말을 했거나 어떤 일을 좀 저질렀을 때, 일단 하나님이 알게 되면, 하나님은 설교 중에 그 사람을 교재로 삼아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고 숨어 다니면서 무슨 일이 생겨도 하나님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나로 모르게 하는 그런 일들을 내가 분석할 수 없겠느냐? 네가 한 일을 분석할 필요없이, 내가 너의 성품과 내적 상태를 분석해도 되지 않느냐? 불신파들의 생각에,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일은 이 육신, 이 하나님도 알 리가 없다. 설령 진리에 관계된 일이라고 해도 모른다. 사람이 타락한 본질의 지배를 받아서 저지른 일들을 이 육신은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의 타락한 본질을 이 육신이 알 리가 없다. 그는 관념에 따라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영원히 연구와 의심, 심지어 불신의 태도로 그리스도를 대하면서, 정상인을 평가하는 기준, 정상인이 이해할 수 있고 달할 수 있는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판단한다. 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그는 상대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성품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와 대화를 할 때도, 나를 보통 사람과 똑같다고 생각해서,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남들은 별로 개의치 않으니, 나에게도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 아니냐?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자, 사람의 무지다. 이 무지에는 사탄의 사악한 성품이 담겨 있다. 이 성품 때문에 사람에게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본성을 폭로하거나 한 사람의 본성을 꿰뚫어 볼 때, 굳이 그 사람과 같이 생활하면서 시시각각 그의 사상과 관점을 관찰하고 그의 모든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을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루 이틀만 지내도 그가 하는 일, 하는 말, 드러내는 관점에서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하지만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나도 같이 지내거나 일해 보지 않은 일부 사람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일단 한 가지 일이 닥쳤을 때 나타내는 관점에서 그 사람의 본성 실질이 바로 드러난다. “본성이 드러난다고 해서 바로 사람을 파악할 수 있습니까? 무슨 근거를 가지고 파악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을 판단할 수 없고, 영원히 기준이 없다. 기준이 없이는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기준이 있다. 기준이 있다는 것은 첫째, 진리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을 좀 더 정확하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한다는 뜻이다. 물론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나이가 들면 사물이나 사람을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간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간파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회에는 여러 가지 속임수가 있다. 사회상의 정치적인 면, 경제적인 면, 성적인 면에서의 속임수들은 직간접적으로 경험이 많이 쌓이다 보면 피할 수 있다.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는 잘 속던 사람도, 자주 속다 보면 경험이 생겨서 그 속임수들을 간파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파악이 가능해진다. 사람이 진리를 갖추지 않으면 영원히 사탄이 타락시킨 인류의 본질을 간파할 지혜가 생기지 않으며, 한 가지 사건 배후의 다양한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지도 간파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사람을 꿰뚫어 보거나 너희에게 공급할 수 있는 모든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에서 왔기 때문이라 하겠고, 좀 실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를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다. 언젠가 너희가 진리를 얻고 실제 생명이 되는 진리를 갖추면, 지혜가 생기고 사람을 간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성육신에 대한 사람의 관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에게 있는 또 한 가지 관념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관념이다. 이 관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신앙에 대한 예전의 이해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처음에 사람은 하나님이 하얀 탁자보를 씌운 큰 탁자를 하늘에 설치하고,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심판을 하는 것으로 상상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이 상상이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경영,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사람은 많은 상상을 품고 있는데, 이런 상상들은 대개 사람의 취향에서 비롯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원하지 않고 손쉽게 복을 받고 천국으로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의 많은 상상 중 하나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에게 임할 때,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사람을 이런 방식으로 대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예로 들어 보자. 너희는 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광대하고 더없이 큽니다.”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두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면 이 두 단어는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정한 뜻을 담고 있다. 내가 그때 이 두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너희 모두의 주의를 불러일으켜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은 어떠냐? ‘광대하다는 것은 하늘처럼 넓다는 뜻이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넓어서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뜻이구나!’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랑은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체험하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으며 온 인류가 이해하는 사랑과 다르다는 것을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일까?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려면 우선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모성애를 예로 들자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식을 각별히 보살펴 주며 무척이나 따뜻하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에 모성애와 같은 느낌과 의미가 있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고, 잘못되었다.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 남편이나 아내, 자식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관심과 분리하여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도 없고, 혈연관계의 영향도 없는 순수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체현되면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체득하여 나중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빈말이나 하나님의 일종 행위가 아니라, 진리임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지만, 행위라고 여길 경우에는 본질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을 행위라고 할까? 어머니처럼 자식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자식이 잘했든 못했든, 어떤 길을 가든, 어머니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식에게 다 내준다. 자식을 교육하고 도와주거나 인도할 때 올바른 길은 주지 못하고, 그저 무조건 감싸고 아끼고 보호하기만 한다. 그 결과 자식들은 마지막까지도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틀린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모성애, 혹은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혈기나 감정, 육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랑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정반대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의 표현 방식은 그 사람을 채찍질하고 징계하고, 책망 훈계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록 그가 느끼기에는 채찍질과 징계 속에서 사느라 편한 날을 보내지 못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뒤돌아보면 많은 것을 배우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분별과 지혜가 생기고, 진리도 좀 깨달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네가 상상하는 모성애, 부성애처럼 덮어놓고 감싸면서 과잉보호를 일삼는다면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 부분만 언급한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진리의 안목으로 대해야 하고, 거기에서 진리를 구해야 한다. 진리를 구하지 않고서, 어떻게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디에 심혈을 기울이는지를 근거 없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 사람들은 이런 것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 사역에 관련되는 것으로, 사람이 가장 쉽게 오해하고, 가장 체득하기 힘든 하나님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한 반면 이는 사람이 가장 진실하게, 또 온몸으로, 매우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대개 사랑이라고 하면,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또 항상 단것만 주고 쓴 것은 안 주며, 설령 쓴 것을 주더라도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사심이나 감정, 육의 것이 담겨 있기에 다 의도와 목적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설령 사람으로부터 오해나 원망을 사더라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에게 역사한다. 심지어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을지라도, 네가 반성하고, 뉘우치고, 손으로 행한 악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너를 받아들인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길을 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최종 목적은 무엇일까? 이런 방식으로 너를 일깨우거나 언젠가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그런 결과를 보게 되었다 할지라도 사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 왜일까? 너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므로 하나님은 아무것도 얻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네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따르고 진입하여 나중에 정상 인성을 살아내고, 편하게, 사람답게 살아가며, 다시는 사탄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큰 공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광대하고, 더없이 크다’라는 말씀을 너희는 이런 의미로 이해했느냐? (아닙니다.) 아마 거기까지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여기서 사람이 돌려세워야 할 관념은 무엇일까? 사람은 하나님 사랑의 방식에 대한 여러 가지 관념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관념에서 나오는 것은 쉽지만, 돌려세우기는 쉽지 않다. 입장을 바꿔서, 일이 닥쳤을 때 너에게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이런 방식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고 깨달아야 가능하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관념이 무엇인지를 분석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하나님의 역사 방식에 대한 너의 각종 상상과 반감, 각종 요구를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들은 네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한 모든 것을 오해하고 대항하게 만든다. 이것은 심각한 관념이기 때문에 분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아마 저를 구원하시지 않을 겁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관념이 아니냐? 이런 관념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이런 관념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너의 발걸음을 가로막아 너를 제자리에 묶어 두고 자포자기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네가 하나님을 저버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말해 봐라. 교회에 적그리스도, 악인들이 나타나 일부 사람들을 미혹했는데, 이는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훈련시키는 것이냐, 아니면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냐, 아니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냐?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렇지? 하나님은 만사만물을 힘쓰게 하여 그가 구원하려는 사람을 온전케 하고 구원한다.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얻는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역사 방식은 적합하지가 않아. 내가 생고생하게 만들잖아! 하마터면 적그리스도를 따라갈 뻔 했어. 정말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만들 수 있지?”라고 원망한다. 하지만 네가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에 대해서는 구원이라는 입증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를 따라간 사람들은 드러나서 도태되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 악인이 교회를 교란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적그리스도, 악인이 드러나면 너는 분별이 생기고, 나중에 그들이 제거되면 너의 분량도 자란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기도 전에 너는 저버릴 수 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 하나님이 역사하는 여러 가지 방식은 비범하고, 사람의 상상을 넘어선다. 이 두 단어로 하나님의 역사를 정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락한 인류는 이런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타락한 인류는 진리, 하나님의 사역 방식, 하나님이 사탄과 전쟁을 할 때의 지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며, 모든 인류가 이런 것에 대해서는 백지 상태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이렇게 말씀하고 역사하는 것은 지금의 이 인류에게는 천지개벽으로, 처음 있는 일이다. 즉, 모든 인류와 대면하여 이렇게 공개적으로 역사하면서 그의 경륜을 공개하고 또한 이 인류 가운데서 그것을 시행하고, 구체화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역사 방식의 영역에 대한 인류의 인식은 공백 상태이며, 생소하다. 그러므로 인류가 이에 대해 관념을 갖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정상적이라고 해도 해결할 것은 해결해야 한다. 아무리 정상적이라고 해도 창조주와는 어긋나고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그로부터 변화되고 진리를 얻어 창조주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은 진리로 해결해야 한다. 관념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올바른 생각은 그다지 고수하지 않지만, 각종 관념이나 사악하고 그릇된 것에 대해서는 쉽게 내려놓지 못하고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무슨 이유로 그럴까? 바로 사람에게 있는 사탄의 타락한 성품 때문이다. 사람에게 타락한 성품이 없다면, 관념은 그 크기와 심각성에 관계없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사실 관념은 일종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는 강퍅하고 사악하고 교만한, 이런 타락한 성품 때문에, 관념이 도화선이 되어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판단까지 하게 된다. 말은 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행위에서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관점에 반감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타락한 성품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을 해결하는 동시에 사실 사람의 타락한 성품도 해결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의 타락한 성품이 해결된다면, 사람의 미숙하고 유치한 많은 생각들, 심지어 이미 형성된 관념도 사실 문제가 안 된다. 그것은 일종의 생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관념은 타락한 성품과 관련된다. 관념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너의 직접적인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는 너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고 관념의 그 이면에 타락한 성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 네 관념과 충돌하면 너는 모종의 태도로 그 관념을 고수한다. 그 태도는 네 타락한 성품이 지배하는 것으로, 강퍅함일 수도 있고, 교만함일 수도 있고, 흉악함일 수도 있다. “제 관점은 많은 학술 논증을 거친 것으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고수해 오던 것인데, 무엇 때문에 고수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당신의 말씀이 옳지 않은데, 어떻게 또 그것이 진리이고, 지고지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 관점이야말로 전 인류 중에서 지고지상한 것입니다!” 하나의 관념으로 인해 너는 이런 행위, 이런 큰 소리를 치게 된다. 무엇으로 초래된 것일까? 바로 타락한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관념과 사람의 타락한 성품은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각종 관념이 해결된다면,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역 안배에 쉽게 순종하게 된다. 그러면 방해도 교란도 하지 않고, 추태를 부려 체면 잃는 일도 하지 않고, 굽은 길도 가지 않으며 더욱 순조롭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예컨대, 황토색 옷에 대한 일이 바로 사람의 관념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 옷을 산 돈은 사실 정상적인 의상을 사는 데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황토색 옷을 사는 데 돈을 낭비하여 하나님 집의 재정에 손해를 입히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방해이고 파괴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의 관념으로 인해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반감이 생긴다. 이 반감 때문에 너는 그리스도를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도 지장을 받는다. 보다 큰 틀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생긴 각종 관념 때문에 너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역사 방식과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부인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구원받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다.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면에 대해 관념이 생기든, 그 이면에는 타락한 성품이 숨어 있다. 그 관념 때문에 사람의 타락한 성품은 더욱 심각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유로 삼아 자신의 타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성품을 대한다. 그렇게 되면 관념이 사람을 타락한 성품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만드는 것 아니냐? 이것이 바로 관념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결과다.

예전에도 사람의 관념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지만, 오늘처럼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교제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사람이 어떤 면, 어떤 일에 관념이 있고, 어떤 관념들이 생기는지, 몇 가지로 분류하여 교제하고 해부했다. 이로써 너희에게 뚜렷한 윤곽을 제시하고, 어떤 면에서 자신이 관념을 품고 있는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관념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사람 내면에서 진리는 점점 뚜렷해진다. 그러면 사람의 앞길도 점점 명확해지고, 하나님을 믿는 길도 갈수록 편안하고 환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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