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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편 사람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태도

너희들은 매일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느냐?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면서 해결하느냐? 이것은 생명 진입의 문제와 관련된다. 만약 본분을 이행하면서 자신의 내적 상태와 연관시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상관이 없게 된다. 어떤 본분,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어떤 말씀과 관련이 있는지, 자신에게 어떤 생각과 관점, 그릇된 속셈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은 모두 그 사람의 내적 상태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내적 상태는 그 사람의 입장, 태도, 속셈, 관점, 철학, 논리, 지식을 포함하는데, 결론적으로 그 사람이 평소에 일을 하거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어떤 일이 생기면 먼저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이 첫 번째 순서다. 두 번째는 그 관점이 올바른 관점인지 아닌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관점의 옳고 그름은 어떻게 판단할까?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고, 또 하나는 일을 하는 원칙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를테면, 하나님 말씀에서 명확히 제시된 요구나 하나님 집의 사역 배정, 하나님 집의 이익을 기준으로 자신의 관점이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먼저 첫 번째 순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너는 자신의 관점을 성찰할 줄 아느냐? 성찰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너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떤 일을 할 때 사람에게는 항상 그 일에 대한 관점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포도를 먹을 때에도 마구 집어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천히 먹는 사람이 있고, 실온 상태 그대로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냉장고에 넣었다가 차갑게 먹는 사람이 있다. 먹는 방법이 이렇게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각자의 취향 때문이다. 이런 취향에는 바로 사람의 관점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관점을 성찰해야 할까? 이 관점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어떤 일을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 처리 방법을 정하는 근거는 무엇인지가 바로 관점이다. 포도를 먹을 때 사람마다 먹는 방법이 다른데, 이는 곧 사람마다 각자 원하는 것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며, 그런 생각이 바로 관점인 것이다. 포도를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먹는 사람의 관점은 그렇게 먹는 것이 시원하고 상큼하며 더 맛있다는 것이다. 실온 상태로 먹는 사람은 차갑게 먹으면 위장에 탈도 나고 한기가 든다고 생각한다. 그의 관점은 실온 상태에서 먹는 것이 몸에 더 좋다는 것이다. 상황이 어떻든 사람은 그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태도에서 하나의 관점이 생겨나고, 사람은 그 관점에 따라 일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관점이 생겨난 근원이 무엇이냐에 따라 관점의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너의 관점이 생겨난 근원이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널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네가 어떤 일을 하는 출발점이 된다. 네가 그 일을 하는 내면에는 그릇된 속셈이 있는 것이다. 그릇된 속셈은 반드시 그릇된 관점과 방법을 야기하며, 결코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릇된 관점이나 태도가 생기거나 행동을 하게 될 때, 너는 이를 성찰할 수 있느냐? (속셈을 가지고 일을 할 때는 스스로도 알고, 조금은 성찰할 수 있습니다.) 관점의 옳고 그름을 성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만족게 할 수 있는 조건 하나를 갖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조건은 무엇일까? 자신의 관점이 잘못되고, 자신에게 그릇된 속셈과 사적인 계획, 욕망이 있다고 판단될 때, 어떻게 해야 잘못된 관점에 따라 일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까? 바로 자신의 그릇된 속셈과 관점을 내려놓는 동시에 진리를 구해야 한다. 자신의 그릇된 관점이 진리에도 맞지 않고, 하나님 뜻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면, 이럴 때는 배반해야 한다. 배반하는 목적은 하나님 뜻에 따라 진리에 부합하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배반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진리를 실행할 수도 없고, 살아낼 수도 없다. 그러면 진리는 너에게 무엇이 되겠느냐? 너의 행위를 이끌거나 단속하지 못하고, 너의 그릇된 관점도 바로잡아 주지 못한 채 그저 이론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자신의 관점을 성찰해야 하고, 그다음으로는 그 관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그릇된 관점을 배반하고, 옳은 관점은 견지하고 지켜야 한다. 지금 너희의 어려움은 무엇이냐? 하나는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서 성찰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찰을 하더라도 자신의 속셈이나 관점이 옳은지 그른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옳은 것도 같고 그른 것도 같아서 결국에는 멍해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속셈이나 관점이 있을 때 극복하고 배반할 수 있다. 물론, 특별한 상황에서 그러지 못하는 것은 정상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을 너만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도 별로 없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너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것은 중요시하면서,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로써 네가 추구하는 속셈이나 관점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관점은 내적 상태에 포함된 한 가지 요소다. 내적 상태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즉, 사람이 마음속으로 항상 반응할 수 있고, 명확히 의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속셈입니다.) 속셈 역시 내적 상태에 있는 하나다. 때로는 정당하게 생각되는 속셈이 사실은 자신의 어떤 이익을 채우거나 무언가를 덮어 감추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너는 자신의 속셈이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왜 그런 속셈이 생겼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만약 너에게 어떤 사람을 처리하라고 한다면 어떤 속셈이 생겨날까? 또 너의 내적 상태는 어떨까? 예를 들어, 본분에서 아무런 효과도 없고, 게다가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너에게 빨리 그 사람을 교체하라고 했다. 너는 고민할 것이다. ‘그 사람의 본분 효과가 좋지 않다고? 왜 나는 여태 몰랐을까? 그 사람은 불평도 별로 없고 나와 사이도 좋은데다가 내 부탁도 잘 들어 줬는데, 그를 처리하라고? 좀 더 두고 보지 뭐.’ 너는 자신의 이런 속셈 때문에 당장 그를 처리하지 못하고, 상면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사람들에게는 얼렁뚱땅 넘기는 등 잔머리를 굴린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좀 더 열심히 해야 돼요. 너무 편하게만 하려고 하지 말고요. 이건 우리 본분이잖아요.”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이 본분에 좀 더 신경을 쓰긴 했지만, 여전히 실제 효과는 없었다. 그 후 내가 너에게 그 일은 어떻게 처리했냐고 물으니, 너는 “그 사람 많이 좋아졌어요. 본분도 잘 이행하려고 하고, 본분 효과도 전보다 좋아졌어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네 속마음은 이랬다. ‘이건 내가 그 사람을 달래서 그렇게 된 거지, 안 그랬으면 그대로였을 거야. 그 사람은 나한테 잘해 주는데, 내가 그 사람을 처리할 수는 없지.’ 너에게는 이런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내적 상태일까? 너는 사적인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해 처세술대로 처리했다. 네가 이렇게 한 것은 순종한 것일까? 너는 자신이 보고 들은 일에 주관적인 판단을 했다. 자신의 주관적인 바람과 감정에 따라 판단을 내린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돕는 것이라고 여겨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네가 일한 결과이고, 일을 대했던 태도이다. 너는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고도 마음 편하게 느끼며 진리를 실행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모든 과정에서 너는 진리를 따른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취향이나 속셈을 따른 것일까? 완전히 자신의 취향, 속셈을 따랐다. 일련의 모든 과정에서 너는 소위 호의와 사랑, 감정, 처세술을 동원하여 중용의 길을 택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알았다고 해 놓고, 뒤로는 다른 사람을 살살 달래서 남들이 보기에 너의 처사가 하나님이 말한 방법보다 더 나아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절충하여 사람도 달래고 하나님의 미움도 사지 않는 것이 진리를 실행했다고 생각하고, 지혜롭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중용의 길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할까? 우선 하나님이 정의하기에, 너는 진리에 순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할 것인데, 너는 진리와 하나님 요구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네가 그런 식으로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 요구를 대하고, 또 그런 태도로 본분을 이행했을 때, 너의 속셈은 여기서 어떤 작용을 한 것일까? 절대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체면, 인간관계를 지키는 작용만 했을 뿐, 하나님의 요구, 자신의 본분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긍정적인 작용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자신의 체면과 사적인 인간관계만 지켰을 뿐,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설명을 할 필요도,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고, 그것이 문제라는 것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다면, 어떠한 본분을 이행하고 문제를 해결하든지 원칙에 따라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 늘 속셈과 사적인 욕망으로 산다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속셈을 성찰하지 않고, 또 그 속셈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온갖 이유를 들어 자기에게 유리한 거짓말이나 핑계만 늘어놓는다면, 자신의 이익과 체면, 인간관계는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시간은 참 오래됐는데, 본인의 체험에 대해 나누라고 하면 늘 말이 없다. 성품 변화의 체험에 대해 나눌 게 전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을 성찰하거나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길로 치우치고, 속셈이나 관점, 욕망, 계획과 같은 내적 상태를 품고 있으며, 회개할 줄 모른다. 사람이 듣고 받아들이는 것도 진리요, 전하는 것도 진리지만, 정작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닌 자신의 속셈을 따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며,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를 참답게 대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께서는 왜 그런 요구를 하실까? 그 요구가 하나님 말씀과 일치할까? 이렇게 요구하시는데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이실까? 하나님이 하신 요구는 아닌 것 같은데? 이건 양심에도 맞지 않고 사람의 마음도 너무 몰라주는 게 아냐?’ 사람이 이런 태도와 속셈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판단하고 대한다면, 이것은 받아들이는 태도일까, 아니면 대항하는 태도일까? 이것은 분명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 대항하는 태도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연구부터 한다. 심지어는 비웃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교회의 형제자매들과는 접촉이 적어 사실 모르는 일이 많으실 텐데, 그렇게 요구하시는 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형제자매의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잖아. 또 하나님은 신성만 있고, 정상적인 인성은 없으신 분이니 사람의 연약함을 헤아리거나 일상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챙기지는 못하실 거야. 하나님이 보살펴 주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도 우린 다 할 수 있어.’ 그가 취한 것은 판단하고, 정죄하며, 대항하는 태도다. 그는 연구한 다음 판단을 한다. ‘어쨌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야. 내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야.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지!’ 이 말은 무슨 뜻이냐?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가 한 말씀이 꼭 하나님을 대표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한 일이 자신의 이익이나 속셈, 관점에서 대립되고 어긋나면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판단한다. 사람을 두고 뒤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판단이라면, 하나님을 두고 뒤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판단이자 모독이다.

사람의 내면에 판단하고, 대항하고, 모독하는 것이 생길 때, 사람의 마음속에는 느낌이 있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의식할 수 있지 않느냐? 예를 들어, 적당한 상황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났다고 하자. 너는 그 사람과 교제하고 싶었지만, 문득 한평생 하나님만을 위해 헌신하기로 맹세했던 일이 떠올라서 포기했다. 그런데 그 후로도 둘이 자꾸 마주치다 보니 끝내 사귀게 되었다. 교제 후, 너는 여러 면에서 막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맹세를 어겼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도로 자신을 저주하고 배반하여 결국 그 사람과 헤어졌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니 너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당연하다. 그것은 사람의 정상적인 연약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을 겪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이것이 바로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다. 이 일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면 그 내면에는 어떤 잘못된 생각이 있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합니다.) 믿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애초에 왜 하나님을 믿는 길을 택했을까? 하나님 믿지 않았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을 텐데. 나한테 딱 맞는 사람을 겨우 만났는데 이번에 놓치면, 나중에는 나이 들어 만나려는 사람도 없어서 포기해야 하는 거 아냐?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예전에 없던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태도지만 그래도 아주 심각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세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건 참 좋은 일이야. 게다가 나는 젊어서 짊어져야 할 가정도 없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서 참 좋아. 그런데 좀 아쉬운 게 있다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도 사귀거나 결혼할 수 없다는 거야. 왜 교제하면 안 되는 걸까? 설마 결혼하면 죄를 짓는 건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형제자매들도 많잖아? 다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나만 안 되는 거지?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셔!’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만스러워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한 것으로 치부하는데, 왜 그럴까? 그래야 분풀이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내 욕심을 채울 수 없어. 그래서 나 자신을 배반해야 하고, 포기해야 하고, 그 일로 고통을 받는 거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공의롭지 않아. 사람의 마음을 너무 몰라주셔!’ 이것은 어떤 내적 상태일까? 대항하고, 불만스러워하며,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받아들이고 순종하려는 뜻은 전혀 없고, 하나님이 그러지 않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면서 가정과 일에 얽매이다 보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힘들 텐데, 그러면 그때 가서 후회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사라지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하나님이 하는 일이 불만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길은 네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하나님은 다만 너의 그러한 마음을 이루어 준 것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었다. 그런데 너는 왜 그 일에서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하느냐? 왜 그리 불만이 많으냐? (자신의 이익이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자 싫어하고 하나님께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어떤 성품일까? 흉악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 만족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하는 것, 배정한 것이 적절치 않다고 원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악하고 강퍅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다. 그런 내적 상태나 생각은 어떻게 생겨날까?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런 내적 상태나 생각이 생겨나고 드러났을까? (아닙니다.) 그 일이 없었을 때는 너의 그 부분의 이익이 하나님의 요구와 충돌하지 않아서 너의 이익도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추구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크고, 누구보다도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이 닥쳤을 때는 너의 이익이 도전을 받게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다. 이 일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고, 자신의 속셈, 계획, 욕망이 만족을 얻지 못했을 때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판단하고, 모독하며, 원망하고 심지어는 대항까지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항하는 것에는 어떤 구체적인 태도가 있느냐? (마음을 쓰지 않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합니다.) 건성으로 하는 것 말고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자포자기할까?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예전에 오전 8시에 예배가 있으면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영적 생활을 하면서 준비한 다음, 예배 시간에 나눌 내용을 미리 기록해 두었다. 이것은 진지하게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다. 그런데 책망과 훈계를 한번 겪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일찍 일어나면 뭐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사람들한테도 좋은 소리 못 듣고, 하나님께도 칭찬을 못 받으니 나중에 상 받기도 어려울 거야. 또 좋은 소리도 못 듣고 책망만 받을 텐데. 다음부터는 8시 예배면 7시 반쯤 일어나야겠어.’ 그리고 예배 전에 말씀도 보지 않고, 기록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것은 어떤 태도일까? 책임감도 없고, 대충대충 하며 마음을 다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과 겨루려 한다. 짐승같은 성품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도 두렵지 않아. 본분도 더 이상 열심히 하지 않겠어. 그렇게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했는데도 하나님이 인정은커녕 나를 이렇게 대하잖아. 하나님은 정말 불공평해!’ 그는 속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움,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 사람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부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대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대충대충 하고 자포자기하며 책임도 지지 않고, 원망하고 오해하고, 심지어 자신의 관념을 퍼뜨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다 복받는 건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모두 바울의 길을 가는 사람인데,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념과 불만을 퍼뜨리는 것은 어떤 성질이냐? 대항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이냐? 그것은 그의 내면에 있는 관점이 그릇됐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방식에 대해 오해가 있고, 제대로 알지도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할 때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순종하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을 판단하고, 모독하고, 정죄하고, 대항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몇 가지 과정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일까, 아니면 소수의 나쁜 사람들만 가는 길일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인성이 정말 악독한 사람이라면, 각각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조금이라도 어떤 생각이 있으면,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과 맞춰 보고 자신을 성찰하고 진리를 구한 후, 생각을 바꾼다. 생각을 바꾼 다음에는 회개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순종의 마음을 갖게 된다. 때로는 불순물이 섞여 있거나 마지못해 순종할 수도 있겠지만,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만 있다면 진리에 대해 점점 분명해질 것이다. 하지만 네가 전혀 순종할 마음도 없고, 성찰을 통해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더라도 진리를 구하거나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방식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 어떤 문제가 생길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거침없이 하나님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가볍게는 집안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장벽을 쌓고 하나님 앞으로 와서 기도도 하지 않으려 한다. 심할 경우 사람들에게 관념을 퍼뜨리고, 더 심하면 교회 안에서 공개적으로 관념을 퍼뜨리고 교란할 것이다. 물론 그 정도와 표현은 인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인성을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사람은 누구나 관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이익과 하나님의 요구가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 누구에게나 이런 것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다. 또한 누구나 하나님께 오해와 관념, 원망이 생기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거역할 때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관념이 생겨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서 속으로 조금씩 소화하고 해결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와 같은 상황을 겪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체험으로 그 사람을 돕는다. 그는 그런 관념이 좋지 않으며, 남들에게 퍼뜨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속으로 기도하여 해결하고 진리를 구한 다음, 조금씩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요구에 맞춰 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인성이며, 이것이 바로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관념이 생기면 밖에서는 퍼뜨리지 않아도, 집안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친척들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또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가 자신의 관념을 집안 사람들에게 퍼뜨려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관념이 생기게 하였다. 관념과 오해는 그 자체로 전염병과 같아서 한번 퍼지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분별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그들 역시도 분명 영향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 것들을 그가 그런 식으로 퍼뜨리면, 믿음이 약해지거나 더 이상 믿지 않을 사람도 생기고, 심지어 그를 따라 하나님 집의 사역을 교란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이런 사람들의 인성은 어떠냐? 결코 좋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밖에서는 입을 다물고, 집에서만 말했습니다.” 집안에서 한 말은 본인이 한 말이 아니냐? 집안에서 한 이야기라고 성질이 다를까? 너는 구하지도 않고, 성찰하지도 않고, 자신을 배반할 생각도 없으면서 말하고 다녔으니, 결국 성질은 똑같다. 또 자신의 관념을 교회에서 퍼뜨리는 사람도 있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런 관념을 퍼뜨린다.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원래 하시던 본분을 안 하게 됐어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제가 천성적으로 솔직하고 말주변이 없다 보니, 그만 예전에 잘못한 일을 말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그만두게 하더라고요. 보셨죠? 이 일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돼요. 하나님 집에서는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지만, 그것도 사람을 봐 가면서 해야 해요. 가족들한테는 괜찮지만, 남한테도 정직하게 다 말했다가는 손해만 봐요. 저를 보세요. 제가 딱 그런 경우잖아요. 이것도 교훈이에요.” 그 사람은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집에 그런 일도 있어요? 우리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요.” 이것은 중독된 것이다. 왜 중독되었을까? 한편으로는 자질이 낮고 멍청해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분별이 없고, 자신의 입장도 없다. 또 진리를 알지도, 고수하지도 못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잘 모른다. 그래서 중독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중독시킨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좋은 사람일까? 그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불만을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퍼뜨리고, 심지어 그것을 부풀리거나 왜곡시켰다. 그의 그런 행동은 남들에게 동정을 받기 위한 것으로, 그는 모두가 들고일어나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은 가장 음험한 사람이고 구제불능이다.

누구에게나 사랑과 도움, 관용을 베풀면서 유독 하나님에게만 철천지원수처럼 날을 세우는 부류가 있다. 진리와 관련되거나 하나님 말씀, 하나님 요구에 관한 것이라면 받아들이기는커녕 사사건건 방해를 하고 관념을 퍼뜨리며,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 집의 사역에 불리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닌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될 경우에는 들고일어나 하나님께 대들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맡은 역할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원수요, 마귀다. 속된 말로 산 귀신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산 귀신인지 확인되면 얼른 제명시켜야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본성에는 다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다. 평소에 태도가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일시적으로 내적 상태가 좋지 않거나 분량이 너무 작아 진리를 알지 못해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좀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일관된 태도도 아니고, 본성이 원래 그런 사람도 아니라면 그런 사람은 남겨 두어도 괜찮다. 또 인성이 별로 좋지는 않지만, 나름의 장점도 있고, 봉사하기를 원하며,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보통 때는 본분도 정상적으로 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찬성하거나 또는 찬성하지 않더라도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런 사람도 남겨 놓을 수 있다. 구원받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최소한 봉사는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끝까지 봉사할 수 있을지는 그의 추구에 달렸다. 그런데 그가 만약 산 귀신이고 하나님의 원수라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이것은 100%다. 이런 사람은 제명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제명된 것은 그에게 회개의 기회와 교훈을 주기 위해서이고, 다른 경우는 그의 본성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제명된 후 내적 상태가 가라앉고 흑암해지더라도 본분만은 내려놓지 않고 계속하기도 한다. 본분을 계속하는 사람과 본분을 아예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내적 상태도 다르고, 가는 길도 다르다.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에게 그나마 양심이 있는 것일까? (본분을 계속하는 사람입니다.)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양심이나 됨됨이가 있다는 뜻이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 또 어디를 가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본분도 이행할 수 있다. 이것이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러나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의 뜻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저를 원하지 않으시니 저도 하나님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하나님인지도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최저선의 됨됨이를 부인한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한 것조차도 모두 부인한다. 두 부류 사람이 정말 다르지 않으냐? 중요한 순간에는 인성에 내재된 양심과 이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는 내적 상태에 포함된 속셈에 대해 나눴다. 지금부터는 입장과 태도에 대해 나눠 보자. 어떤 한 부분의 일을 놓고 볼 때, 그 부분의 영적 용어든 진리든 그 안에는 수많은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으며, 표면적인 몇 개의 글자나 몇 마디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네가 만약 하나의 단어나 한 가지 개념, 또는 문장의 표면적인 의미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도리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 내적 상태, 또는 실생활에서 드러나는 생각과 관점, 행동과 연관시켜 맞춰 본다면 자신에게 있는 많은 문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중에는 진리에 어긋나는 문제도 있고, 이치에 맞거나 규례나 전통적인 방법에도 부합하지만, 사실 진리와 하나님 뜻에는 맞지 않는 문제도 있다. 어떤 사람들의 관점이나 입장은 세상의 전통 관념이나 방법으로 보면 옳은 것 같지만 진리와 대조해 보면 그릇된 것들인데, 이런 것들이 많지 않으냐? 어떤 방식들이 있을까? 사람들 앞에서 다른 사람을 흉보지 않는 것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누구를 만나든 입에 발린 말, 축복의 말,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예를 들어, 네가 보기에 뚱뚱한 한 자매가 있는데, 어느 날 그 자매가 너에게 물었다. “제가 뚱뚱한가요?” 너는 생각 끝에 “아니요, 저보다 훨씬 날씬한데요!”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미혹하고 잘못 인도하며, 거기다 비위에 맞는 말까지 덧붙이는 목적은 남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한 것 아니냐? 이런 식의 처세술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모두 하나의 출발점에서 시작하는데, 그 출발점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남들에게 자신이 우호적이고, 이해심 많고, 사람을 관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은 어떤 입장에서 비롯될까? ‘좋은 사람은 일생을 편안하게 지낸다’는 전통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입장과 관점은 사람의 태도를 결정한다. 하나님이 행한 것, 어떤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너의 입장과 관념은 사실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너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라는 입장이라면, 너의 관점은 분명 너 자신의 이익, 체면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본분을 잘 이행하고 충성을 다하려는 입장이라면 너의 태도는 바로 본분을 잘 이행하고,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진리에 따라 실행할 것이다. 이것은 서로 일치한다.

너희들이 서로 교제할 때, 서로 어떤 이치를 듣고 어떤 도리를 기억하고 있고 어떤 영적 이론에 대해 파악했는지를 나눌 게 아니라 그동안 자신의 내적 상태와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입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새롭게 발견하고 알게 된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요구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교제해야 한다. 이런 것을 교제할 수 있다면 너희의 분량은 자란 것이다. 너희들이 자신의 각 부분의 관점과 입장, 속셈, 생각을 성찰해 보지 않거나 성찰을 하고도 옳고 그름도 모르고 어리벙벙하다면, 너희들에게 교회를 이끌라고 했을 때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모두 무엇이겠느냐? (글귀, 이론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글귀와 영적인 이론만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관점과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정 관념도 함께 주입할 것이다. 그런 적이 있지 않으냐?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일방적인 관점과 인식을 주입한 적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과 인식은 실정에도 맞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인솔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글귀만 읊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면, 그것을 정확하게 대하지 못하게 되는데, 대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것은 너희가 사람들에게 주입한 것이 관념과 상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의 양육과 인솔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줄이게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너희가 이행한 본분은 어떻겠느냐? 불합격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가 양육하고 사역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었는지, 진정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인식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되었는지 판단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너희의 사역이 그런 효과에 이르렀다면, 너희는 실제 사역을 한 것이고, 본분도 합격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본분에 지장을 주었다고 하자. 너는 그에게 계속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형제(자매)님의 개인적인 요구와 욕망이 너무 많아도 안 됩니다. …” 사실 그는 그런 게 아니었다. 본분을 하고 싶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고 싶거나 고생을 견딜 수 없없던 그런 문제가 아니라,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믿다가 출교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해 하나님 집에서 그 사람을 처리한 것에 대해 그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그의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한다. 계속 “젊은 사람이 고생을 참고 견뎌야 하고 의지력이 있어야 해요.”라고 하는 것도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의 내적 상태와는 맞지 않는다. 그러니 그가 이 말을 듣고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반드시 풀어야 하며, 어떤 오해인지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다. 오해는 좋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오해했나요? 어떤 오해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잘해 주고 돌봐 주셨는데도 오해를 하다니, 양심이 없네요!”라고 캐묻는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충고하고 가르치려는 것이지, 진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나누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오해가 생기면 사람은 보통 어떻게 생각할까? 왜 마음이 괴로울까? 바로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 일에 자신을 연결시켜 보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믿어도 안 되는구나. 나는 믿은 기간도 그 사람보다 짧은데, 어느 날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시면 그냥 내쳐지는 게 아닐까?’라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한 오해와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다. 하나님에 대한 이 두 가지 오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오해의 성질은 무엇일까? 하나님 역사에 대한 긍정일까, 아니면 의혹일까? (의혹입니다.) 그 의혹은 옳은 것이냐, 잘못된 것이냐?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의 그런 행동과 태도, 혹은 내적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잠재의식 속에서 자신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해야만 어떤 진리를 교제하든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하신 일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구나. 하나님도 꼬투리 잡힐 부분이 있고, 잘못하실 수 있고, 사람을 대하시는 것도 공평하지 않아.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것도 바로 불공평하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잠재의식 속에서 하나님이 한 일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너의 오해가 맞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문제다. 그때는 어느 부분의 진리를 교제하든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두 가지 관점과 두 가지 잠재의식 중에 어느 쪽이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주는 창조주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일까? (첫 번째입니다.) 그럼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믿고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니라, 항상 관찰하고, 연구하고, 분석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등한 지위에 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한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이 자신의 관념이나 뜻에 맞지 않는 일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결국 제게 꼬투리 잡히셨군요. 당신께서 하신 이 일은 공의롭지 않고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공공연히 하나님께 대든다.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태도일까? 이것은 자신을 피조물의 위치에 놓은 것일까? (아닙니다.) 사람에게 오해가 생겼을 때, 마땅히 이 둘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교제해야 할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제(자매)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일을 하시더라도, 또 형제(자매)님을 괴롭게 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을 하시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연구하거나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고, 영원히 하나님이 될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타락한 인간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진리를 얻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분이 언짢아 우리를 멸한다고 하셔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피조물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 관념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에게 타락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선 우리는 늘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주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입니다. 두 번째는, 눈에 불을 켜고 하나님에게서 트집 잡을 궁리만 하고, 하나님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분석하는데, 이것은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모자라 사탄의 편이 되어서 하나님께 대들고, 대항하고, 겨루는 것입니다. 이건 피조물로서 할 행동이 아니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어떤 부분의 진리에 부합하는지, 하나님의 공의 성품과 어떻게 맞추어 볼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의 책임과 의무, 본분은 무조건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피조물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옳은 것입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어도 좋고, 상처와 고통을 가져다주어도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를 욥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또 베드로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아브라함과는요? 자격을 논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대화할 자격도, 하나님을 오해할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일도 평가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고, 사람에게는 그런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이렇게 교제한다면 문제가 조금은 해결될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정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평가나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율법시대,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하나 주겠다고 하자, 당시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느냐? 그는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태도였다. 그가 하나님을 판단했느냐? 비웃었느냐? 뒤에서 어떤 일을 꾸몄느냐? (아닙니다.) 이런 것이 바로 순종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그 아내 사라도 마찬가지였을까? 사라가 하나님을 대했던 태도는 어떠했느냐? 의심하고 비웃었으며, 불신하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보내는 얄팍한 수를 써서 결국 그렇게 많은 황당한 일을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라는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하나님에게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불신했다. 사라는 왜 불신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과 배경이 있다. 우선은 아브라함이 너무 나이가 많은 데다, 자신도 이미 나이가 들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불가능하며 그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믿은 것이 아니라 거짓말, 또는 농담으로 여겼다. 그것이 옳은 태도냐? 하나님 말씀을 사기꾼의 거짓말로 여기는 것이 창조주를 대하는 마땅한 태도냐? (아닙니다.) 그녀가 하나님이 한 말씀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려는 일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련의 결과가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들은 모두 사람의 뜻에서 비롯되었고, 그녀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오해, 판단, 추측, 의혹들이 있는데, 모두 종합해 보면 그것은 타락한 사람의 패역한 행동이다. 따라서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순종에 어떤 태도와 행동이 나타나야 진실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이다. 즉, 하나님이 한 말씀과 행한 일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옳고, 하나님은 진리이므로 의심할 필요도, 남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고, 혼자 속으로 계산하거나 분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한 부분의 순종이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옳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한 일이라면 어떤 사람이 했는지, 그 사람의 배경과 인품은 어떤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이 한 것이라면, 즉시 입을 다문 채 그 어떤 의혹이나 물음표를 달지 말고 전부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중에서도 어떤 진리는 이해가 잘 안 되고, 하나님과의 거리도 여전히 좀 있을 것이다. 비록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이 한 일이라고 인정은 했지만, 아직은 도리적으로만 이해하는 부분이 있어서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럴 때는 찾고 구해야 한다. ‘이 안에 어떤 진리가 있는 걸까? 내 생각이 어디가 틀렸을까? 하나님과의 거리는 어떻게 생긴 걸까? 나의 어떤 관점이 하나님 말씀과 맞지 않는 걸까?’ 이렇게 구하는 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이고, 실행해야 할 자세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나는 순종만 하면 돼요. 우리 같은 피조물은 간섭하지 못하니, 하나님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죠!” 이것은 진실한 순종이 아니고 책임을 다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하나님이 하는 일에 무관심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몇 가지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실현된다는 것을 100%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심하지 않고,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으며, 그 어떤 얄팍한 수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태도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은 축복이다. 그는 어떤 의혹도 품지 않았고, 사람의 뜻이 뒤섞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욥은 어떠했느냐? 욥에게 닥친 일은 아브라함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에게는 화가 닥쳤다.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다. 그것도 한 부분이다. 또 다른 부분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대개 사람은 큰 고통을 받지 않을 때는 순종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복을 내릴 때는 쉽게 순종한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거두어 간다고 하면 그래도 쉽게 순종할 수 있을까?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떤 관점과 어떤 진리를 깨닫고 갖추었으며, 하나님에 대해 어떤 측면의 인식이 있었기에 그에게 닥친 화를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었을까? (욥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대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은혜와 복을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지만,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화를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점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마땅히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정확히 제자리를 지켰다. 하나님의 본질은 외부 세계의 사람과 일의 변화에 따라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실질은 영원히 하나님의 실질이므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복을 내리면 하나님이고, 사람에게 화나 고통을 주고 징벌을 내리거나 사람을 멸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이 변한다거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질은 어떠냐? 피조물이라는 위치와 본질 역시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네가 피조물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인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그토록 큰 시련을 주었지만, 욥은 순종하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인식한 것 말고도,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불평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를 지배한 가장 큰 힘은 무엇일까? 바로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옳고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말이 아주 적절하지 않으냐?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어떤 요구도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말며, 하나님이 어떤 일을 어떤 이유와 목적, 어떤 의미에서 하든지 너는 평가할 필요가 없다. 너의 책임과 본분은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말은 간단한데 실행하기는 어떠냐?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이를 깨달아야 일이 닥쳤을 때 기초가 되어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욥이 하나님이 준 시련에 순종할 수 있었던 건 모든 게 하나님의 손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 많은 소와 양, 재산, 자녀들 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사람은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노예나 마찬가지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든 참는 수밖에 없지.’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는 것이 정확할까?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했던 욥의 말에서 그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여기에도 구할 만한 진리가 있다. 그가 한 말에 원망이 담겨 있느냐? 부정적인 뜻이 들어 있느냐? (없습니다.) 전혀 없다. 욥은 체험을 통해 창조주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든 사람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았기에, 그가 사람의 주인인 이상 사람은 당연히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는 진리이고 그는 만물(자신과 모든 피조물 포함)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하든 모두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사람이 늘 반항하거나 이유를 찾고 하나님의 꼬투리를 잡으려 하고,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복이나 좋은 것만 얻으려고만 한다면, 이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의 관점이 틀렸다면 일이 닥쳤을 때 반드시 하나님과 부딪히게 되고 대항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건 옳지 않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게 하면 다들 항의할 텐데. 하나님인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 그럴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사람에게 그런 이성과 인식이 없이 매일 일어나는 일마다 항상 연구하려고 한다면,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겨루거나 맞설 것인데, 그러면 너는 그런 내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그 점을 인식하고, 피조물의 위치에서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부분의 진리와 맞춰 보고, 그 부분의 진리를 실행하고 진입한다면, 점점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다. 또한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두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점차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연구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너 자신을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도록 하여라! 그러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죄책감이 들 것이다. ‘피조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왜 순종하지 못하는 걸까? 이건 창조주께서 슬퍼하시는 일이잖아.’ 네가 피조물의 역할에 충실할수록 그 부분의 진리를 더욱 잘 이해하고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네가 너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여겨 하나님이 너를 책망 훈계하거나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일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바라고, 하나님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왜곡된 길을 가게 된다. 또한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모독하고, 나중에는 뒤에서 얄팍한 수를 쓰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정말 잘해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일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위해 고통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저를 이토록 책망하고 훈계하시는 걸까요? 왜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높여 주시지도 않는 걸까요?”, “저는 모태 신앙에다 지금까지 착실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순수한데요! 가정도, 직장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그동안 하나님이 저를 정말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네요. 냉대받는 기분이 듭니다. 하나님께 정말 실망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은 무엇이냐?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다. 늘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해 하나님이 마땅히 자신을 존중하고, 높여 주고, 사랑하고, 소중히 대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과 그릇되고 무리한 요구가 있다면 문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대해야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부합될 수 있을까? 그런 어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까? 하나님 집에서 어떤 사람은 리더가 되어 사역도 무척 잘하고, 하나님 집을 교란시키는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하나님이 환경을 배치하여 그를 드러냈고, 그는 리더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거짓 리더, 거짓 일꾼들이나 하나님 집을 교란시킨 사람들은 교체되지만 저는 그런 적도 없는데, 왜 교체되는 건가요?”라며 서운해했다. 왜 그럴까? 그는 자기가 그 정도로 일하면 자신에게 마땅히 그만큼의 자격과 지위가 부여되어야 하고, 교체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앗아가니 내키지 않아 한다. 하나님이 한 그 방식에 대해 관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 관념이 자리잡자,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고 원망하기 시작한다. ‘리더를 뽑고 도태시키는 일에는 다 원칙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 일에는 원칙이 없는 것 같아. 이번 일은 하나님께서 잘못하신 거야!’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한 일이 자신의 이익에 관계되고 자신의 관념과 맞지 않으면 그는 꼬투리를 잡는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너에게 어떤 은사와 재능이 있고,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으며 얼마나 큰 밑천이 있고 심지어 하나님 집에서 얼마나 큰 공로를 쌓았든 하나님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네가 그런 것들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면,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또 오해가 생겨 갈등이 빚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너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줄여서 하나님과의 갈등을 풀고, 너 자신이 믿고 고수해 오던 것들을 부인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제자리에 설 수 있고, 순종하게 된다. 또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두 옳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내려놓는 한편, 자신의 공로를 밑천으로 삼아 하나님께 조건을 달고, 요구하고, 상을 바라지 않게 된다. 그러면 네가 안고 있던 어려움들이 사라질 것이다. 사람의 모든 오해는 어떻게 생겨날까? 사람이 자기의 분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눈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른 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하나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지위를 과대평가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몸값과 밑천을 하나님께 구원받는 기준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마음에서 네가 갖는 지위,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태도는 모두 적절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의 관점과도 부합한다. 네가 그 점에 맞추어 실행하고 대한다면, 너와 하나님 사이의 갈등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너를 대할 때, 순종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마음이 조금 편치 않더라도, 혹은 불만이 나오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네가 이미 이러한 진리를 갖추고 깨달은 상태이기 때문에 너는 제자리에 잘 설 수 있고, 하나님께 대항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너를 멸망으로 이끄는 행동이나 방법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때면 너는 안전하지 않겠느냐? 네가 안전해지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러면 베드로와 욥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로 무엇을 교제했느냐? 하나는 자신의 여러 측면의 내적 상태를 성찰하는 것을 중시하여 분석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파악하는 것에 대해 나누었다. 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여러 가지 오해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나누었다. 오해가 생길 때는 사람 내면의 강퍅함과 고집스러운 면이 진리를 구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생기고, 거리와 장벽이 생기면 하나님을 향한 너의 마음이 닫혀 버린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도 듣기 싫어지고, 진리도 구하기 싫어지게 되는데, 네가 어떻게 하든 그것은 결국 과정을 거치고 사람을 속이게 될 뿐이다. 그 오해가 풀려서 고비만 넘기면, 사람은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 요구 하나하나를 참답게 대할 수 있게 된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갈등과 거리, 오해가 생긴다면, 사람은 사탄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적대되는데, 그것으로 초래되는 결과는 무엇일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사람의 성품 변화는 거기서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여러 가지 내적 상태를 성찰할 때는 우선 자신을 제대로 알고, 또 하나님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오해에는 관념, 상상, 규정, 의혹, 연구, 추측 등이 포함된다. 네가 이런 내적 상태에 빠져 있을 때는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므로 얼른 이를 해결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와 하나님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맞을까? 본분에 지장을 주지 말고,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부지불식간에 호전될 조짐이 보일 것인데, 그러면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심각한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언젠가 “사람은 피조물이고, 창조주는 영원히 나의 주이며, 그 본질은 변함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위치도, 하나님의 지위도 변함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모든 인류의 눈에 틀린 것처럼 보여도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진리이며, 영원히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을 연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배와 모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일은 모두 옳으며, 사람은 하나님께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됩니다. 피조물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장난감으로 대하시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저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 부분의 진리를 체험하고 깨달았다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에 진입한 것이며, 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거나 각 부분의 진리를 실행하는 일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크고 깊은 진리다. 사람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걸림돌에 부딪히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경우는 대부분 사람이 위치를 잘못 섰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연구하거나 하나님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한 일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부인하려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피조물이 되기 싫어하고,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고 하는데, 그러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네가 이 부분의 진리를 잘 지킨다면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항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간혹 오해나 관념이 생길 수는 있지만 최소한 너의 태도나 출발점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원하게 된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욥에게 하나님의 시련이 임했을 때, 욥은 처음에 그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았느냐? (몰랐습니다.) 사람에게는 영계를 간파하는 능력이 없다. 욥도 영계에서 생긴 일을 전혀 알지 못해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어리둥절한 것이 하나님을 오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길을 갔다든가 또는 순종하지 않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다음 욥은 어떻게 했느냐? 그의 행동은 그의 관점, 그가 가는 길을 대표한다. 처음 시련이 닥쳤을 때 그는 어리둥절했다. ‘이 일이 왜 나한테 임했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건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이 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린 것을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고, 사탄이라 할지라도 손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볼 때 욥은 하나님이 한 일을 다소 오해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쳤는지 모르는 차원의 오해이지,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해 부인하거나 의혹을 품은 그런 오해가 아니다. 그 정도의 오해는 하나님이 허락하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취하려 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두 옳기 때문에 서둘러 무릎을 꿇어 받아들이고 순종했다. 그 당시 욥이 얼마나 어리둥절했든, 얼마가 지나서야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닥친 일을 받아들였든, 그는 시종일관 피조물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이것은 하나님이 한 것이니 사람이 나서지 말아야 하며, 사람이 나서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에 대항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욥은 한 마디 불평도 없었고, 그 일을 판단하거나 손을 써서 모든 것을 돌이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며 하나님이 하는 일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욥이 한 일은 자신의 본 위치를 지켰고,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것이 바로 그의 태도였다. 자신에게 일이 닥쳤을 때, 그는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진리를 구하고 창조주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인정한 다음 순종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도가 그의 재산을 빼앗아 갔을 때, 욥은 하나님의 손길이 임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혈기로 대항하거나 사람의 방식으로 강도와 싸우지 않았다. 그것은 나약함의 모습도 아니고, 강도를 용인하거나 무서워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손길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다. “이것들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가져갈 테면 가져가라지.” 이 말은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말이 아니냐? 욥은 손을 쓰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빼앗긴 것을 되찾아 오거나 지키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진실된 태도가 아니냐? 욥은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인식하지 못했다면 아마 사람의 방식대로 빼앗아 왔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어떻게 볼까?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손으로 하는 일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본다. 그동안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줄 때는 기뻐하다가 그것을 앗아가려고 하자 화를 내고, 싫어하고, 강제로 빼앗으려 한다. 즉, 하나님이 주기만을 바라고 가져가지는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배정에 순종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피조물의 위치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하고 대항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행동을 자주 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욥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과 인식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진실한 순종이 있었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체험하고 구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창조주를 어느 정도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그런 태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창조주는 어떻게 해도 옳으며, 어떻게 하든지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마땅히 그를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인류의 영원한 주이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줄 때만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다시 앗아가면 하나님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이 점을 사람이 체험으로 깨닫고 간파한다면,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점점 정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모두 옳다고 입으로만 인정한다면, 그것은 단지 이론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일이 닥칠 때마다 여전히 이치를 따지려 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한다면,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정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이 한 걸음을 떼지 못하면 이 부분의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진입할 수 없게 된다. 또한 네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과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영원히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의 요구와 다르다면, 하나님의 배치에 완전히 순종할 수 없다. 그러면 너는 늘 이치를 따지게 되는데, 너의 이치가 진리보다 더 크게 느껴져 공개 석상에 내놓으려 하고, 많은 이들이 너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너의 편에 섰다고 해도 모두 타락한 인류이고, 진리가 아니다. 모든 인류가 너를 찬성하고 하나님께 대항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틀릴 리가 없다. 틀린 것은 역시 인류이다. 이것이 일종의 공식, 규정, 주장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다. 인류가 하나님이 하는 일을 옳다고 하든 그르다고 하든, 하나님이 하는 일의 본질은 인류에게 영원히 옳은 것이다. 모든 인류가 일어나 하나님을 반대하더라도 하나님은 잘못이 없다. 즉, 모든 인류가 각종 이론을 한꺼번에 들고 나오더라도 하나님의 한 마디 말씀, 한 마디 진리에도 이기지 못한다. 이 말씀은 도리가 아니라 진리이므로 사람은 천천히 체험해야 한다. 체험의 전제는 무엇일까? 먼저 그 말씀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실천하고 체험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그 말씀이 옳고, 확실히 진리라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가 어떤 본분을 하느냐가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얻었는지,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고 진정한 피조물로 될 수 있는지 등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 점을 잘 기억하고 다른 생각을 갖지 말며 다른 길을 찾지 말라. 하나님은 바뀌는 게 없다. 누가 되었든 구원받을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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