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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편 진리 원칙을 구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지금 너희는 우선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순종하고 원칙 있게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어디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라고 정해 주면, 그것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 측면의 실행이자 실제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일까?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배정한 일이면, 그것이 바로 너의 본분이다. 그렇다면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요구가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분을 대할 때 어떤 진리를 실행하라고 요구할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 원칙을 따른다면, 게으름을 피우거나 본분을 이행하기 귀찮을 때, 또는 원망이 생길 때마다 찾고 구해야 한다. ‘내게 이런 내적 상태가 있는데, 뭐가 문제일까? 이건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하는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과 생각을 버리고 내 안의 옳지 않은 내적 상태를 되돌려야 해.’ 이때 사람은 개인적인 바람과 계획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무언가로부터 방해를 받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본분은 대단해 보이고 만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서 항상 부럽기만 한데, 막상 자기의 본분은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울적한 기분이 든다. 또, 자기는 관리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별로 지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어떤 생각일까? 어디서 비롯됐을까? (타락한 성품입니다.) 사람의 타락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타락한 성품이 빚어내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자신의 계획, 의도, 욕망, 야심 등이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우선, 이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부함으로써, 본분을 이행할 때 자신이 지위의 복을 탐하고, 야심과 욕망, 지나친 요구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는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의 이런 내적 상태는 잘못되었습니다. 저를 징계하고 징벌해 주십시오. 저를 심판해 주시고 회개하게 해 주십시오.” 너에게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네 분량에 따라 너를 징계하거나 조금씩 너를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징계한다면 그것은 너에게 어느 정도의 분량이 있기 때문이다. 징계하지 않고 조금씩 인도한다면 그것은 네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조금씩 너를 부축하여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점 순종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데는 어떤 전제가 있어야 가능할까? 너에게 회개하는 마음,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역하려는 마음, 진리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너를 조금씩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런 바람이나 마음이 없고, 기도도 하지 않고, 육체만을 추구하고, 너의 야심이나 의도, 욕망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보살피지 않고 외면할 것이다. 예배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말씀을 듣는데, 혼자서 꾸벅꾸벅 존다면 하나님이 너에게서 얼굴을 가린 것이다. 그러면 위험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위험하기까지 하겠어? 나는 본분도 이행하고 있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않았고, 말씀도 보고, 찬양도 듣고, 영적 생활도 하는데 말이야. 난 아직도 하나님 집의 일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뭔가를 결정짓지는 못한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에 달려 있느냐? 바로 하나님이 너를 보살피고 있는지,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는지, 성령이 너에게서 역사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 역사는 또 무엇에 달려 있는 것일까?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고, 사람의 마음, 즉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동경하고, 무엇을 갈구하고,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다.

결국, 너희에게 가장 손쉽고 직접적인 해결 방안은 바로 본분을 이행하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본분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부딪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하는지, 어떤 진리에 따라 실행해야 하는지,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생기거나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내려놓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그 밖에, 성찰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의 어떤 것들이 방해하고 가로막는지 성찰해야 한다. 무엇이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게 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일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 본분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너희는 지금 이런 이상(異象)이 있어야 하고, 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첫 번째 의무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본분을 이행하는 그 과정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차츰차츰 정상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또 그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의 타락한 성품과 본질을 알게 되고, 자신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점차 깨달아 가는 것이다. 이제 이해하겠느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실제가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에게서 일단 본분이 없어지거나 하나님이 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 부분을 이해했느냐?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실행해야 할 진리, 알아야 할 원칙은 같지 않느냐? (같습니다.) 인솔자가 되든, 글을 쓰든, 사무적인 일을 하든, 밥을 하든 모든 본분에서 따라야 할 원칙은 결국 진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크고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 본분을 잘 이행하고, 합격되게 하기 위해서는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과연 본분이란 어떤 것일까? 본분은 바로 하나님의 부탁이다. 그렇다면 본분이 너 자신의 사업일까? 네가 만약 본분을 자신의 사업으로 여기고 ‘내가 이 사업을 멋지게 해내서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본다면 자부심도 생기고 내 인생도 삶의 의미가 있을 텐데.’라고 한다면 이것이 옳은 태도일까? (아닙니다.) 본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이런 이상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본분이란 무엇일까? 본분은 너 자신의 경영도 아니고, 너 자신의 사업도, 너 자신의 직업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너의 동역이 필요해서 생겨난 것이 네 본분이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경영 사역을 하면서 사람이 협력해야 할 부분이 바로 사람의 본분이다. 어떤 부분의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은 너의 사업이 아니고, 개인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집의 일, 하나님의 경영 계획의 한 부분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준 부탁이다. 그렇다면 너는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네 성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너에게 토마토 요리를 하는 본분이 주어졌다면, 너는 그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진리 원칙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찾고 구할까? 첫째, 그것은 자신이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는 무엇이냐? (어떻게 하면 이 요리를 잘 만들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기준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요구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요구가 바로 진리이고, 기준이고, 원칙이다. 하나님의 요구에 따르는 것, 이것이 실행해야 할 하나의 진리다. 먼저 이 진리부터 생각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세부적인 면에서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위생적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탈도 나지 않는 거야.’ 바로 이런 원칙에 따라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일을 할 때 원칙을 구하고 하나님이 정한 범위를 넘어서지 않도록 실행했다면 그 본분을 제대로 이행한 것이므로 합격이다.

본분을 이행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요구를 구해야 하는 것이지, 개인의 기호를 먼저 고려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기분이 좋거나 편안한 것, 체면이 서는 것을 택하면 안 된다. 만약 개인적인 기호를 하나님께 강요하고, 개인적인 기호를 진리 또는 진리 원칙으로 삼아 실행하거나 지킨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본분은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항상 의혹을 품고 흐리멍덩하다. “도대체 본분을 잘 이행한다는 것이 어떤 건가요? 저는 이미 마음을 다 했고, 힘을 다 했고, 고통도 감내하고, 육체도 배반했는데, 왜 제가 이행한 본분에 대해 하나님은 항상 불합격이라고 하시고, 만족하지 못하시는 걸까요?” 이 사람은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하나님의 요구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따라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의 바람과 기호를 진리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이거나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설령 네가 옳다고 여기는 것일지라도 반드시 진리 원칙을 구하고, 하나님의 요구인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 네가 생각한 것과 하나님의 요구가 어긋난다면 네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사람의 주관적인 바람이 아닌 하나님의 요구와 기준,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한다면 그 본분은 합격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본분일까? 너희에게 주어진 본분이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저에게 주어졌으니 제 일이지요. 본분은 당연히 제가 해야 할 몫이고, 제가 해야 할 몫이면 개인의 일이 아닌가요? 본분을 더 잘하려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이 옳으냐? 이것은 틀린 말이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본분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구대로 해야만 합격할 수 있다. 너의 안목과 요구, 고정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한다면 합격할 수 없다. 그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경영 범위에 있지도 않고, 하나님 집의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 자신의 경영을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본분의 개념이 명확해지지 않았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최소한 실행해야 할 진리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본분을 이행하다 보면 사실 간단한 일들이 많다. 예컨대 어떤 사람에게 주방에 가서 쟁반을 3개 날라 오라고 하면서 그것이 그 사람의 본분이라고 했더니, 5분도 안 걸릴 일을 1시간 걸려서 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가 밖에서 산책하면서 바람을 쐬고 왔다면 이것은 본분을 이행한 것일까? (아닙니다.) 그는 우선 육체를 만족시킨 다음에 본분을 이행했다. 5분이면 충분히 끝날 일을 1시간이나 써 버렸다. 왜 이런 상황이 생겼을까? 바로 개인적인 의도나 바람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또 너희가 흔히 말하듯 사람의 육체가 너무 중요했던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점은 바로 개인이 의도하는 바가 너무 강한 경우다.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은 바로 자신의 갖가지 의도하는 바를 내려놓는 것이다. 자기에게 본분이 주어졌을 때, 이때가 가장 관건적이고, 중요하다. 설사 어떤 일 때문에 기분이 언짢고 울적하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잠시 한쪽에 내려놓고, 우선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그런 다음 본분이 영향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일들을 생각해야 한다. 본분을 최우선적인 의무로 여기는 것이 바로 본분을 중요시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자신이 의도하는 것과 바라는 것, 자신의 감정이나 사적인 일은 잠시 접어 두고, 전심전력을 다해 본분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했다면, 이것이 바로 내려놓은 것이다. 본분이 없을 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본분도 안 주시고, 사람을 차별하시는구나. 난 진실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 눈에 띄지 못하는 걸까? 하나님은 정말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기는 하실까?’ 그러다가 막상 본분이 주어지면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고르려 한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인솔하는 본분도 싫다, 사무 본분도 싫다, 글 쓰는 본분, 노래하고 춤추는 본분은 더 싫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밥하는 본분을 하게 했다. 그랬더니 대뜸 이렇게 말한다. “밥 하는 일은 제가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 몸값이나 말주변, 소양을 고려할 때 이걸 하라고 하는 건 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 큰 재목을 하찮은 일에 사용하는 것 같은데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왕 맡겨 주셨으니 두어 끼 해 보면서 다시 얘기하죠.” 결국 그는 10명이 오면 5인분을, 3명이 오면 1인분을 준비하고, 음식도 기분이 좋으면 만들고, 기분이 나쁘면 만들지 않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런 정서와 반응을 보였을까? 그런 태도가 본분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일까? 그런 모습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본분이 불만이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의 불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자신의 육체의 기호에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설령 만족스러웠다 하더라도 그가 꼭 기뻐했으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결코 만족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본분을 대하는 태도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생각하기에 체면이 서는 본분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수월하고 육체적으로도 편해야 한다. 찬바람이나 뙤약볕도 맞지 않고, 고생은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 마지막에는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모든 것을 바라는 동시에 마지막에 하나님께로부터 본분을 잘했다는 말까지 듣기를 바란다. 이것이 개인의 바람이 아니냐? 이것을 내려놓지 않고, 반성하지 않으면, 너는 결코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없다. 예전에는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너무 욕심이 많고 패역하여 본분을 대할 때 충성심이 전혀 없고 하나님의 부탁에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 그럼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내려놓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 배반하고 자제하는 한편 순종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당신께서 제게 이 본분을 계획하시고 배치하셨습니다. 제가 육체적 선택이 있어 이 본분을 이행하고 싶지 않지만, 주관적으로 저는 당신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다만 저의 본질이 좋지 못하고 너무 타락하였으니 저를 징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더 낫지 않을까? 더 순수한 본분이 되지 않을까? 자신의 바람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교회를 인솔하는 것이 대단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을 접하고 견식을 넓힌다고 생각한다. 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순종하는 태도일까?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일까? 사람에게 순종하는 태도가 없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너는 기어이 서쪽으로 가려고 한다. 서쪽으로 가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고, 맞서는데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겠느냐? 절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어떤 내적 상태와 모습이 나타날까? 말씀을 보아도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졸기까지 할 것이다. 어떤 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속으로 항상 의문을 품게 된다. ‘남들은 말씀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잘 깨닫고 항상 마음이 밝을까? 남들은 내적 상태가 항상 좋은데 나는 왜 늘 답답하고 우울하고 마음이 불편할까? 남들은 뭘 하든 순조롭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이런 사람은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섭리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주면 열심히 믿고 본분도 잘하지만,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면 제대로 믿지 않는다. 하나님께 이렇게 요구만 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할 리 있겠느냐?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자신이 품은 의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의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예를 들어, 네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섬김의 집이 있다고 하자. 그 집 형제자매는 요리도 잘 하고, 집도 꽤 괜찮고 냉난방 시설도 잘 갖춰 놨다. 너는 속으로 그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제가 거기서 지낼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너무 편하게 지내려고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한 번도 그런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으니 배반하기가 힘듭니다. 제 분량이 작은 점 이해해 주시고 허락해 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그 집에 보내 주신다면 본분도 열심히 하고, 당신께 충성을 다하고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한 보름쯤 기도를 했지만, 결국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배정되었다. 그러자 너는 화도 나고, 속상하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신다더니, 제가 속으로 그렇게 바랐는데도 당신은 전혀 모르시네요. 좋은 것을 달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형편없는 것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저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으시니 저도 당신을 흡족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본분도 열심히 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이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냐?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강퍅한 태도가 아니냐? ‘하나님이 저를 만족시켜 주시지 않으면 저도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제가 본분을 이행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하는데, 왜 저 사람에게는 주시고 저에게는 안 주십니까? 그가 저보다도 못한데 말입니다!’ 이런 태도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바로 하나님과 겨룬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겨루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내버려 두고 신경 쓰지 않는다. 너에게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가치가 있다면 놔두고 얼마 동안 봉사하게 하겠지만, 만약 그럴 가치가 없다면 하나님 집에서 내보낼 것이다. 네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너를 깨우쳐 줄 것이다. 하지만 네가 계속 회개하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과 겨루기만 한다면 너는 끝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너 자신이다. 하나님과 겨루는 것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큰 문제다. 하나님 얘기만 나오면 공손해지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좋게 여기던 사람이 막상 자기 뜻과 어긋난 일이 닥치면 본인의 타락한 성품이 살아난다. ‘하나님은 무슨, 내가 가장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이지. 내가 겨룬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날 어쩌시겠어?’ 하나님이 너를 어쩌지는 않겠지만, 네가 아주 옹졸하고, 강퍅하고, 골치 아픈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낼 것이다. 골치 아픈 인간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바로 네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임을 알아도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강퍅하고, 어리석고, 우매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무척 싫어한다. 이런 사람은 본분도 계속 이행하기 어렵다. 마지막까지 봉사할 수 없기에 끝까지 갈 수 없다. 이런 결과가 위험하지 않으냐?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은 피조물이니 하나님과 겨루지 말아야 한다. 겨룬다고 해도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기로 한 것은 네가 요구하고 구하지 않아도 너에게 줄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기로 계획하지 않은 것은 네가 구해도 소용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기로 계획했다면, 즉 너를 축복하고 인도하기로 계획했다면 네가 굳이 하나님께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너에게 시련을 주거나 너를 드러내기로 계획했다면,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네가 간구해도 소용없고, 억지로 가져와도 소용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태도에 따라 본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것이 정답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다.

사람은 정직한 마음으로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이것이 최고의 지혜다. 사람이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한다. 화와 복에 대해 묻거나 조건을 따지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야 한다. 항상 의혹을 품고 조건을 내세우고 연구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간사함과 사악함입니다.) 간사하고 사악하다. 이런 사람이 항상 연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사람은 왜 이것을 연구하는 것일까? 바로 본인의 이익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하시고 이런 상황을 계획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 일을 겪고 난 후 결과는 무엇일까?’ 그는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득과 실, 화와 복을 따진다. 연구한다고 해서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까? 순종할 수 있을까? ‘이 본분을 맡으면 고생스럽지 않을까? 툭하면 밖에서 밥도 제때 못 먹고, 매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야? 또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다른 사람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본인의 이익밖에 고려하지 않는다. 본인의 이익을 고려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게 머리를 굴린 결과는 어떨까? (하나님을 거역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거역한다. 즉, 소극적인 태도로 본분에 임하고, 일을 하면서 계속 살핀다. 이런 태도를 두고 어떤 성품이라고 할까? 간사함과 사악함이다. 사람이 사악한 지경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겨룬다는 것이다! 늘 연구하면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한 채 본분을 이행했다면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그는 신령과 진정(역주: 중국어 성경의 뜻은 정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계속 눈치를 살피고 늘 한 수 남겨 놓는다면 결과가 어떨까?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원칙을 찾지 못하고 하는 일에 자꾸 차질을 빚을 것이다. 왜 항상 일에 차질이 생길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 집의 사역,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본인 생각만 하고 본인의 체면과 지위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엔 일을 해도 치우치게 되는 것이다. 본인의 이익과 앞날을 위해 일하는 것과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결과가 같을까? 결코 같지 않다. 이 한 가지 일로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는 본질이 바뀌고 성질이 바뀌었다. 만약 손해가 미미하다면 아직은 만회할 여지나 기회가 있다. 그런데 만약 손해가 크다면 기회가 있을까? (없습니다.) 만약 상황이 심각하여 방해와 교란이 되었다면 교체되고 내쳐질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내쳐진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느냐? 그것은 바로 항상 본인의 이해득실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기반이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보이는 순종은 표면적인 순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실행의 길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 생기면 먼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하나님 집이 손해를 입겠지.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면 하나님 집에는 손해가 없어. 하지만 내가 돋보이지도 않고, 자료를 많이 찾아봐야 해서 무척 고생할 텐데, 또 다른 사람들과 의논도 해야 되잖아…’ 이 사람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자기 뜻대로 처리하기로 하고, 하나님 집에 가져오는 피해는 나 몰라라 했다.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하니 다른 사람들과 의논할 필요도 없고 자기 지위나 능력도 과시할 수 있는 데다 남들에게는 매우 과감하고 노련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막상 일이 다 끝나고 나니,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 집의 사역에 방해하고 교란하는 훼방꾼이 되었다. 결국 드러나 내쳐졌다. 만약 그가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의논했다면,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오차와 빈틈을 발견하여 하나님 집이 손해 보는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다 같이 모여서 교제하고 의논함으로 자신의 신분, 지위, 독립적인 것과 능력을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는 주지 않았다. 결과가 전혀 다르지 않으냐? 그럼 그가 교체되겠느냐? (아닙니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기억한다. 일이 임할 때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한다면 하나님이 뒤에서 지켜줄 것이다. 항상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고 계산하고 계획하면서 하나님 집 이익과 하나님의 뜻은 뒷전으로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따라오겠느냐? 실패로 돌아가지 않겠느냐? 그것은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동정할 가치가 있느냐? (없습니다.) 사적인 이익만을 생각하면 마지막에는 항상 이런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항상 제 이익만 생각하는데, 그런 결과가 없었는데요?” 네가 한 일은 사소한 일이기에 하나님은 그런 일들까지 따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네가 실행하지 않고 진입하지 않아서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결과는 어떤 것일까? 몇 년씩 하나님을 믿고도 생명이 자라지 않는다. 3년 전에도 너는 이론만 읊어대더니, 3년이 지난 지금, 몸에 힘은 그대로인데, 분량은 자라지 않고, 여전히 이론만 읊고 있으니 참으로 큰일이다. 분량도 자라지 않고, 진리 실제에도 진입하지 못하고, 성정도 변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인식도 그대로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기는커녕 하나님에 대한 오해만 늘었다면 정말 위험한 일이다.

너희들의 평상시 체험 가운데 본분과 관계된 일, 타락한 성품과 관계된 일에서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성찰할 수 있느냐? (조금 성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내려놓으려면 ‘의도란 무엇일까? 어떤 것을 두고 의도라고 할까?’, 이렇게 항상 성찰해야 한다. 성찰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게 되지만 항상 성찰하고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의도하는 바가 있어도 나한테는 없을 줄 알았는데, 나에게도 그런 생각이 있었구나.’ 자꾸 성찰하다 보면 자신에게도 확실히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찰하지 않으면 평생토록 알 수 없고, 영원히 내려놓지 못하며, 변화하지 못한다. 성찰하다 보면 얻게 되고, 성찰하다 보면 점차적으로 깨닫게 된다. 자신의 타락한 본성,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자세히 성찰할수록 내려놓기가 쉬워지고, 그럴수록 진리를 실행하려는 마음도 커진다. 진리를 실행하려는 마음이 클수록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순수해지고, 본분을 더욱 합격되게 이행할 수 있다. 성찰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한다면 일하는 것에만 치우친 나머지, 보기에 그럴싸하면 된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게 된다. 이것이 순종하는 태도일까? 결코 아니다. 이런 태도는 성품 변화와 관계가 없다. 일만 하고 성품 변화에 미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 원칙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를 두고 봉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너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느냐? (봉사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렇다. 가끔 본분을 이행할 때 실제가 있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성분은 점점 늘리고 봉사하는 성분은 점점 줄여서, 봉사하는 성분을 조금씩 본분을 이행하는 성분으로 바꾸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봉사하는 것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봉사하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누군가 추궁하는 사람만 없으면 적당히 넘기면 그만이고, 하나님의 성품만 거스르지 않으면 괜찮다는 태도다. 성품 변화나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만족게 하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일,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하는 일에는 더욱 관심이 없다. 이런 것을 바로 봉사한다고 하는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은 시종일관 힘만 낸다는 것이다. “거기서 뭘 하십니까?” “힘을 내서 일하고 있습니다.”, “뭣 때문에 몇 년을 죽어라 일만 합니까?” “복받으려고요.”, “그럼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었는데, 성품은 변화됐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합니까? 창조주의 섭리를 진실로 깨닫고 체험했습니까?” “뭐라고요? 창조주요? 창조주가 어디 있는데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할 말이 없다. 즉, 성품 변화와 관계된 각 부분의 목표는 전혀 향상되지도 않았고 발전이 없는 것이다. 시종일관 봉사만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이렇게 수년간 봉사하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타락한 성품 때문에 종종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으며 순종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사람에겐 정말 타락한 성품이 있구나.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일이 생기면 늘 개인의 소망이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늘 연구했었던 거야. 기꺼이 힘을 내면서도, 성품이나 내 야심과 욕망, 내 속셈이나 소망과 관계된 일은 배반하거나 내려놓지 못하고 항상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게 우선이었어. 나란 인간은 정말 한심하구나! 어떡하면 좋을까?’ 이런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이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면 조금은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봉사하는 사람이 언젠가 본분에 충실하고 성품 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또 본인의 타락한 성품을 인식하고 그동안 자신이 교만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돌려세울 수 있다. 성품이 변화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일 자체에만 매달리며, 일을 끝내는 것이 곧 임무를 완수하고 하나님 부탁을 완성한 것이고, 힘을 낸 것만으로 본분을 잘 이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인지는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이런 태도로 본분을 대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그럴까? 구원의 길, 하나님을 믿는 바른길을 가지 않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에서 아직도 힘만 내거나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일을 다 마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 그를 책망 훈계하지도 않고,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도 주지 않고, 그저 현생에서 약간의 축복만 주고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반성하기 시작하고, 말씀을 알아듣고, 고민한다면 어떨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그렇다면 구원받기 위해 노력해야겠어. 구원받기 위해 추구하지 않고 봉사하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나는 어떤 면에 타락한 성품이 있을까? 그 타락한 성품은 과연 무엇일까? 어쨌든 우선은 하나님께 순종해야겠어!’ 이렇게 진리와 성품 변화로 연관되면서 비로소 희망이 생기게 된다. 진리와 성품 변화로 이어지고, 이런 것들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책망 훈계, 시련 연단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꽤 오래 본분을 이행했는데, 저에게는 책망 훈계도 임하지 않았고, 깨우침과 빛 비춤도 얻지 못했습니다. 시련과 연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냐?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실행했다면 어떻게 깨우침과 빛 비춤이 없을 수 있느냐? 진정으로 진리 실행을 중시했다면 타락한 성품이 어떻게 흘러나오지 않겠느냐? 타락한 성품이 자주 흘러나오면 반드시 책망 훈계가 임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이행한 본분은 분명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책망 훈계를 자주 겪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도 자주 받고, 새로운 빛 비춤을 얻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왜 남들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까요? 다들 하나님께 축복받아 편안하게 살면서 힘든 일은 겪지 않는 것 같은데, 왜 저만 항상 연단과 시련을 겪을까요?” 이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연단과 시련을 주고 이런 일들을 하는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너희를 괴롭히거나 못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 스스로 자신이 타락했다는 사실과 자신의 타락한 본질을 똑바로 알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내려놓고, 봉사하는 단계를 본분을 이행하는 단계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차 정상적으로 될 것이고 되돌려 세운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게 되면 너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세주이고 사람은 구원받는 대상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네가 봉사만 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부탁을 하고,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늘 대강대강 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순종도, 성품 변화도 없이 진리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힘을 내 일만 하면서 과정만 거친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히 일꾼과 고용주의 관계에 머물 것이고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 결과는 너 스스로의 추구로 결정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제가 지금 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영어를 잘하게 되겠지요. 한 2, 3년 공부하고 토플도 보고 박사 공부도 하면 나중에 세상에서도 잘나갈 겁니다. 아니면 하나님 집에서 열심히 하다가 나중에 인솔자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것은 무언가를 꾀하는 것이 아니냐? 그 일을 잘 해내면 조장을 할 수도 있고, 그 방면에서 출중하면 인솔자도 할 수 있겠다는 것인데, 그런 것들을 도모한다. 이렇게 도모하는 것은 불명예스럽고 부당하지 않으냐? (부당합니다.) 부당하다는 점을 알면 내려놓을 수 있을까?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 또는 정상적인 타락한 성품에 의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점차 목표에 도달하는 길을 가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자신의 의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배반하고,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계속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상 궤도로 돌아가는 길을 가는 것이 옳을까? (끊임없이 자기를 배반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따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를 추구할까? 마음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간사하고, 강퍅하고, 사악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그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이 가는 길이 정당한 길이 아니라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며, 바울과 같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옳은 길을 갈 수 있을까? 그에게는 너무나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두 사람이 있는데, 자질도 비슷하고, 하나님을 믿은 시간도 같고,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본분을 이행했음에도 각자 가는 길이 달랐다. 한 사람은 정직하고 올곧으며, 정당하지 않은 일은 무조건 회피하고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요구대로 할 수 있었기에 갈수록 더 잘할 수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사악하고, 간사하고, 지위를 추구하고 야심이 큰 사람으로, 그런 것들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했다. 같은 말씀을 듣더라도 내려놓지 못했다. 그것은 개인의 추구, 본성과 관계가 있다. 내려놓지 못하면 마지막에 어떤 결말을 맞을까? 내쳐지고 만다. 두 사람의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진리를 추구한 그 사람은 갈수록 열심히 추구하여, 진리를 명확하고도 더 많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되었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사람은 단지 이론으로만 이해하고 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매사에 자신의 이익과 야심, 향락, 지위, 명리 등을 최우선으로 하고 진리는 뒷전이었다. 일이 생기면 우선 육체와 욕망을 만족시켰다. 매사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처리하기 일쑤에다 항상 그 목표만을 위해 움직이다 보니 일은 갈수록 엉망이 되었고 그는 결국 내쳐졌다. 하나님 집에서 내쳐진 자들이 바로 이런 자가 아니냐?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까? 이들도 진실로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내쳐지지 않고 구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강퍅함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욕망을 붙들고 있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질 것이다.

간사하고 사악한 사람은 마음속에 들어찬 야심과 계획, 속셈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비결이 있다. 즉, 내려놓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느냐가 그 비결이다.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너희가 명확히 구분만 할 수 있으면 된다. 만약 그 일이 하나님 집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일이라면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집의 일이 방해받거나 하나님 집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 집에 손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너의 야심과 욕망에 손해가 된다면 당장은 개인적으로 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최저선이다. 너의 사소한 야심이나 허영심을 위해 하나님 집의 일을 그르친다면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 교체되고 내쳐지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범한다면 이후에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기회는 많지 않다. 너를 검증할 기회가 몇 번이 될지는 너의 본질에 따라 달라진다. 네가 주어진 기회를 잘 잡아 자신의 체면이나 허영심은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 집의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그릇된 속셈이 생기면 기도를 통해 되돌렸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하며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러고 나서 네가 “이 일은 나의 공이 커.”라고 우쭐하며, 자신의 허영심을 약간 좀 만족시키더라도 괜찮다. 하나님은 굳이 따지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 일을 해냈으니 하나님은 너의 공로를 기록하고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공평하지 않으냐? (공평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확실히 네가 신령과 진정으로 해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육체와 야심을 배반하고 일을 완수하여 하나님 집이 손해 보지 않도록 했는데, 하나님이 위안을 얻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일은 네가 마음을 기울여 해낸 일이기에, 돈으로도 살 수 없으며, 바로 진리 추구의 성과인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너는 최저선을 지켜 하나님을 노하게 하거나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순간에 한 가닥 삶의 기회를 붙잡고 놓치지 않는다면 너는 구원받을 수 있다. “이 일은 내가 할 수 없으니 찾고 구해야겠어. 저 일은 나도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니, 사람들 의견을 들어 봐야지.” 평소에 이렇게 매우 신중하다가, 막상 결정적인 상황에 사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 집의 일을 그르친다면 징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일이 바로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최저선이다. 너는 하나님의 최저선이 어디까지인지, 네가 지켜야 할 최저선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선을 잘 지키면서 끝낸 일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억하고 열납하는 일이면 그것이 바로 선행인 것이다. 네가 매사에서 삶의 기회를 놓지 않고 모든 일을 하나님 요구대로 하면서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최저선을 잘 지킨다면,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는 것일까? 바로 너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 만족게 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손해 보지 않는다. 네가 모든 일을 이렇게 한다면 그야말로 진정으로 본분을 이행한 것이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 대해 요구할 때는 개개인의 자질과 인성 및 추구에 따라 다르며, 일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간단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정직한 말 한마디 꺼내기 힘든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자신의 간사한 본성을 배반하고, 몇 년 후 드디어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직한 말을 하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보기에 그것이 변화이고, 하나님 역사의 성과가 아닐까? 그것이 하나님이 달하려는 효과다. 하나님이 오랜 시간 역사한 성과를 드디어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거나, 아무리 많은 실패를 겪었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은 공의롭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은 옳은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최고의 진리니, 이 길을 따라 실행하고 일하면 틀림이 없다! 의혹을 품거나 계산할 필요가 없다. ‘예전에도 내가 대가를 지불했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또 지불한다면 손해 보는 게 아닐까?’ 이렇게 항상 계산을 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리저리 계산하다가 결국 말려드는 것은 누구일까? (자기 자신입니다.) 잘 알면서 왜 여전히 계산을 할까?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두뇌와 사고, 생각,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학식 때문에 머리를 안 굴릴 수가 없다. 이런 것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계산하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하나님 앞에서까지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린다면 자신의 결말을 망치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날릴 수도 있다. 이는 타산이 맞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너희는 평소에 계산을 하느냐? 머리를 굴리느냐? (네.) 자주 그럴 텐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원칙이 있느냐? 많이 찾고 구해야 한다.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고 사악하고 간사한 상태에 빠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성품에 사로잡혀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고, 하나님을 연구하며, 고정 관념으로 대하거나 그 일을 분석하려 하고, 자신의 바람에 끌려다니게 된다면 문제다. 그럴 때는 일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해야 한다. 사실 성찰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지금 이만큼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들었으면, 자신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잘 알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배반하여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장은 힘들 것이다. 아직은 연구하고, 이치를 따지고, 분석하려는 생각이 강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그 생각을 물리쳐 배반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자신의 뿌리 깊은 야심과 욕망으로 인해 남들이 자기 뜻대로 따라 주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옳지 않으며, 최소한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경우, 그때는 잠시 멈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다음 형제자매들과 교제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야심을 가라앉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일을 하는데, 욕망이 가장 강할 때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다. 하지만 2, 3일 후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하는 것은 뻔뻔스럽고, 이성도, 양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되돌린 것이 아니냐? 어떻게 되돌린 것이냐? (기도입니다.) 기도하니 성령이 너를 깨우쳐 주고 꾸짖어서 깨닫게 하고, 네가 두 가지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했다. 예전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분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왜 그렇게 하면 양심에 가책을 받고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내면의 변화가 있고 내적 상태를 되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의 내적 상태를 되돌리지 못하고 그대로라면 너는 절대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되돌리고 있다면 그것은 너에게 아직 희망이 있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되돌리지 않고 계속 원래 상태를 고수하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 기도하든, 말씀을 보든, 설교를 듣든, 형제자매들과 교제를 하든 그중 어떤 방식을 쓰더라도 긍정적인 것이 점점 주도적인 작용을 해서 내면의 상태를 되돌리고, 다른 각도, 다른 관점으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된 후에는 네가 일을 행하는 원칙도 따라서 달라진다. 만약 달라지지 않는다면 너의 추구와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아주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네가 그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또는 배가 불러서 먹고 싶지 않을 때, 너에게 그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면 쉽게 할 수 있지 않느냐? (쉽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네가 그 음식을 먹고 싶은데 못 먹게 한다면 어떨까?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배반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식욕을 배반하고, 자신의 욕망을 배반해야 한다. 그런데 네가 “먹고 싶어요. 저보고 먹지 말라고 하는데, 꼭 먹고 싶어요. 왜 못 먹게 하는 거죠? 뭣 때문에요?”라며 끈질기게 따진다면 내려놓지도 못하고 배반하지도 못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배반할 수 있을까? 우선 그런 환경을 피하고 며칠 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내가 왜 그렇게 음식을 탐했지? 먹지 말라고 하는데도 기어이 먹으려고 하다니, 정말 뻔뻔스러웠구나.’ 처음과는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느냐? 처음에는 너무 먹고 싶어서 못 먹게 하는데도 먹으려고 했다. 그런 강퍅하고 제멋대로인 태도가 바로 성품이다. 이 성품 때문에 너는 따지고 대들면서 순종하지 못했다. 순종할 수 없으면 환경을 바꿔 기도하고,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 원칙을 구하면서 인성 안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관점이 달라지지 않을까? 관점이 달라지면 처음의 그 생각도 달라지지 않겠느냐? 처음에 가졌던 강퍅하고 제멋대로인 태도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성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가끔씩 바로 그 순간 진리를 실행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평생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간사한 사람도, 제멋대로인 사람도, 강퍅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도 당장 변화가 없다고 해서 변화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성품 변화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고, 환경이 필요할 때도 있고, 가끔은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다 관두고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고 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다. 변화할 방법도, 기회도 없다. 달라지고 싶다면 여러 방면에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환경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너에게 다양한 환경을 마련하고 시간을 주는 것은 너의 타락한 성품이 변화의 과정을 겪게 하려는 것이다. 감정이든, 타락한 성품이든, 내적 상태든 변화와 회개의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이 회개의 과정에서 네가 돌려세운다면 너는 진입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회개의 기회를 주더라도 돌려세우지 않거나 계속 처음 생각이나 성품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어떤 일들이 닥쳤을 때 얼마나 돌려세울 수 있는지, 돌려세운 것이나 회개는 있는지를 가늠해야 한다. 그래서 만약 회개하고 돌려세웠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지만, 늘 돌려세우지 못한다면 구원받을 여지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열심히 하지 않고 건성으로 하거나 방해하고 교란한다. 그러다 결국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탓에 교체되고 만다. 하지만 교체되고 난 뒤에도 출교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락한 성품이 있고, 판단이 흐리고 어리석을 때, 분량이 작을 때가 있다. 너에게 기회를 주는 목적은 바로 너를 되돌리기 위해서다. 어떻게 되돌릴까? 자신이 실수한 일을 깨닫고 반성하며, 이치를 따지지 말고 곳곳에 다니며 자기 관념을 퍼뜨리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하나님을 오해한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네 관념을 퍼뜨려서 덩달아 관념이 생겨 너처럼 이치를 따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냐? 대항을 하고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지금 이렇게 하나님과 맞선다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까?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네가 도태되거나 지옥에 가야 한다고 결말을 선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교체되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일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면 기회는 있다. 그러나 이를 원치 않는 사람은 끝까지 대항한다. ‘나에게 그 본분을 못 하게 한 건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잘못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서 그런 거야.’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그런 사람은 표면에서만 원인을 찾고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반성하거나 진리를 찾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도 순종하지 않으면서 대항하고 관념을 퍼뜨린다. 사탄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사탄이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수도 구원할까? 하나님은 타락한 성품의 사람은 구원하지만 마귀나 원수는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맞서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원망하고, 오해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퍼뜨린다면 철저하게 하나님과 대립면에 선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 맞서는 것은 사탄 역할을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느낌이었느냐? (마음속이 온통 흑암에 빠지게 되고, 내적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좋은 길이 아니다. 이제 이런 일에 대해 지각이 생기지 않았느냐? 여기에 지각이 없는 사람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집안에 힘든 일이 생겨서 네가 괴로워하면 알아주는 이는 가족뿐이다. 네가 울 때 가족들이 곁에서 함께하고 위로하고 돌봐 주지만 집안의 개나 고양이가 알아주느냐? 짐승들은 알 리가 없다. 그저 주인이 먹이 주기만 기다릴 뿐, 전혀 지각이 없다. 지각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라 마귀가 복받으려고 들어온 것이다. 지각이 있으면 나중에 반성하고 깨달아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변화하게 된다. 그러면 괜찮지 않으냐?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은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므로 자기를 위해 뭔가를 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꾀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렇지? 사람의 내면은 작은 속셈들로 가득하다. 그 속셈들을 해부하고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맡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고, 점점 잘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너에게 밥을 하거나 쪽지 전달하는 것과 같은 본분을 시켰다고 하자. 하나의 아주 간단한 일도 네가 진지하게 대하고 본분으로 받아들이며 진리 원칙에 따라 행한다면 갈수록 본분을 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합격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한 가지다. 다른 하나는, 본분을 어떻게 이행하고, 어떤 원칙에 따라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장악한 다음, 평소에 일을 할 때나 본분을 맡았을 때, 또는 본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그 원칙들을 잘 지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파서 약을 먹는데, 이틀을 먹어도 아무 효과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조급할 필요가 없다. 병도 하루 이틀만에 생긴 것이 아니니, 치료도 하루 이틀만에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진리를 실행한 지도, 원칙대로 일한 지도 오래 됐는데, 왜 하나님의 축복이 느껴지지 않을까요? 왜 성령이 충만한 느낌이 없을까요?” 느낌에 의존할 수는 없다. 그렇지? 그렇다면 그런 변화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일이 닥쳤을 때 네가 순종하기가 점점 쉬워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순종하는 것이 힘들어서 이치를 따지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맞서려 하고, 대항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제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굳이 자제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일이 생겨도 더 이상 연구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떤 생각이 생기더라도 며칠 지나면 해결하고 내려놓을 수 있으며, 해결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이것은 네가 달라지고 있고, 인성과 생명, 성품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기가 점점 수월해졌다. 또한 자신의 계획과 의도, 속셈도 갈수록 작아지고, 점차 줄어들었다. 만약 그 반대라면 문제가 된다. 그동안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만 냈다는 뜻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힘을 낼수록 자신의 공로가 커진다고 느끼면서 부지불식간에 바울의 길로 들어선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자기 머리 위의 면류관과 후광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것을 중요하게 여길수록 눈앞의 성공과 이익, 복을 받는 데에만 급급해진다. 힘을 많이 낼수록 복을 많이 받고, 큰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중요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큰 공로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에만 신경을 쓴다면 결국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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