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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편 자신을 알아야만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현재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단지 본분이나 업무만으로 바빠서 매일 생명 진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저 기여만 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기여가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어쨌든 저에게 좋은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런 마음을 쓰는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걸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하나님 집에서 저는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바람도 없고, 욥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높지 않아요. 저는 기여자가 되어 살아남는 걸로 족합니다.” 물론 높지 않은 요구다. 하지만 그런 요구라도 거기에 도달하려면 진리를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떤 진리를 갖춰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것이 너의 관념에 부합하고 너의 육체를 돌봐 줘서 네가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실한 순종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네가 순종하기를 원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만일 하나님이 행하는 것이 너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고 배치된 본분과 주어진 환경이 너에게 많은 고통을 주고 네 맘처럼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는 순종할 수 있겠느냐? (자신을 배반해야 합니다.) 어떻게 배반해야 할까? 육체의 안일을 탐하기 좋아하고 고생하기를 싫어하며 고생만 하면 원망하는데,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이 너무 패역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당신의 신분과 본질은 너무나 고귀하여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당신께 순종하기를 원하오니, 저를 인도해 주시고 빛 비춤과 깨우침을 주십시요. 제가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저의 마음을 감찰해 주시고, 징벌과 심판을 내려 주십시요.” 이렇게 기도를 마치고는 뿌듯해한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빈말이 아니냐? 늘 속이 빈 기도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이는 어떤 성질일까? 기만하는 성질이 아니냐? 그는 나태하고, 고생하기 싫어하며, 육체적 안락을 탐한다. 진리를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본분인 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로 속이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절대로 종교 의식의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하고, 진심이 없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아무 때나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멋대로 맹세해서 하나님을 속이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께 충심을 다하고 싶다는 둥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너의 소망은 네가 달하지도 못하고 해내지도 못하고, 또한 그럴 만한 의지도 없고 분량도 안 된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만일 그런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가볍게 말하면 기만하는 것이고, 심각하게 말해 네가 늘 그렇게 한다면 너라는 사람의 성품은 너무나 비천한 것이다. 이런 너를 정죄하자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만족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타락한 성품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이러한 성품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이방인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뿐만 아니라 정중하게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만 거짓말로 하나님을 속인 뒤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고 자신이 한 일의 심각성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함께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함께함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의 빛 비춤이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이러면 문제가 된다. 너희는 이런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느냐? 그것도 자주 하지 않느냐?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이 사회에 뒤섞여 오래 살다 보면 거기에 물들어 불량기가 가득해진다. 사탄의 이런 독소와 행위, 생활 방식 및 방법이 사람들에게 깊이 침투돼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양심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속셈을 갖고 있는데, 너무나 위험하다. 사람이 그런 방식과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 표면적으로는 기도하는 말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근원적으로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 없고, 또 사람의 본성이 간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성이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을 다하지 않고 늘 건성으로만 하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는다. 그 본분이 너무 힘들다고 늘 도망치려 하고 거부하려 하고, 늘 최대한 편하고 아무런 고난도 받지 않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는 육체적으로 편한 본분을 이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와도 자신의 진실한 생각을 나누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채면 웃음거리가 될까 봐 입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해요!” 그러다가 어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또 남들에게 털어놓고 말하기도 한다. “저는 인성도 부족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이성적인 기도가 될까? 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역주: 중국어 성경의 뜻은 정직)으로 예배하라고 되어 있다. 너는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와야 하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 사람 앞에서 하는 말과 마음속의 생각이 달라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 와서 스스로를 꾸미면서 그럴듯하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너의 마음이 정직하지 않고 너무 음험하고, 사악하고, 마음씨가 바르지 못해 결국 하나님은 너를 버리게 될 것이다. 생활 속에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일과 접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기도해야 진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무척 힘듭니다. 저라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편한 것만 좋아하고, 일하는 건 싫어합니다. 저는 어쩌면 당신이 저에게 주신 본분에서 저의 충성을 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늘 도망치고 싶고, 거부하고 싶어서 건성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징계해 주세요.” 이것이 진실한 말이 아니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할 용기가 있느냐? 어쩌면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는 어느 날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을 징계하면 어쩔까 걱정되고 마음이 조마조마할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소심하다. 그렇지 않느냐?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한편으로는 덜 고생하고 육체적으로 편하기를 바라며 조금 어렵거나 버거워지거나 조금만 힘들어도 뒷걸음치려고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따져 고른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이라도 고생하면 늘 궁리를 한다. ‘하나님이 기억해 주실까? 하나님께서 알아주실까? 이렇게 많은 고생을 했는데, 나중에 상을 주실까?’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기만을 바란다. 이런 문제점은 해결해야 한다. 특별한 본분이나 힘들고 어려운 본분을 이행할 때는, 한편으로 마땅히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이 어떤 고생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지,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자신의 내면의 속셈을 성찰해야 한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고생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고통을 받을수록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 육체의 본성은 고통을 받으면 우울해지고 고민에 빠지게 돼 있다. 하지만 지금 주어진 본분을 이행한다고 해서 받는 고통이 얼마나 되겠느냐? 만일 네가 그 정도의 고생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진심으로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란 이름값을 못 하는 것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고생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도 참 대단하다. 그런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그 안에서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가 천성적으로 고생하고 힘든 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부 말씀과 진리가 원동력과 기초가 되어 그의 관점과 입장이 변화돼 일이 수월해지고 고생이 문제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반대로 관점과 입장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의 생각과 관념, 사욕과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일을 할 때 힘이 부친다. 예를 들어 똑같이 힘들고 궂은 일을 대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하나님 집의 배정에 순종하고, 하나님 집에서 저에게 배정해 주신 본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것이 궂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영광스러운 일이든 사람들이 깔보는 일이든 저는 바라는 거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 본분으로 알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부탁이기 때문에 마땅히 감수해야 할 고생입니다.” 이렇게 그 사람은 일을 할 때 고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그 일을 힘들거나 궂은 일이라고 여기지만 그는 도리어 수월하다고 여긴다. 그가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것이다. 반면 또 다른 사람은 일단 그에게 힘들고 궂은 일, 하찮은 일을 하게 하면 자신의 신분이나 인격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긴다. 그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라고 한 것이며 사람들이 자신을 업신여기고 얕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똑같은 일, 똑같은 양이지만, 그는 버거워하면서 할 때마다 원망하고, 뜻대로 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순조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속에 온갖 반발심이 생긴다. 그가 저항하는 것은 무엇으로 살기 때문이냐? 분명 진리나 인성에 근거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 본분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것이니 잘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몹시 억울해하고, 버거워하며,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서로 다르다. 그러니 똑같은 일을 한다면 그가 잘할 수 있겠느냐? 그가 이러한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여기지 않고 분명 건성으로 대충대충 과정만 거칠 것이다.

본분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오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부탁입니다.) 그렇다. 하나님 집에 오면 하나님 집에서는 네가 할 일을 알려 주고, 하나님은 너에게 준행해야 할 길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을 하면, 그것이 본분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여기고 너도 네 자신을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이상, 이 대가족의 모든 일은 너의 본분이자 책임이고 의무이므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본분이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책임이자 부탁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저의 본분이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부탁하신 일이니 마땅히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를 두고 순종하는 태도라고 한다. 주어진 일은 마땅히 네가 해야 하는 것이니, 거부하거나 따지거나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선택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피조물이 갖추어야 할 이성이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작게는 사람의 사명, 사람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고, 크게는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큰 각도에서 논하는 것은 무리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직 순결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그만한 분량도 없기 때문에 큰 각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진리에 어긋난다. 사실이 그렇다. 진정으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 집의 일원,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의 일원으로 여겨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집에서 맡겨 준 모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한다면, 그 사람은 곧 하나님 집의 일원이자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본분은 이렇게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느냐? 최소한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하고 최저선이 있어야 한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니까 대충 하지 뭐.” 이런 자세는 양심이 있는 자세일까? 건성으로 하고 싶을 때 스스로 느낄 수 있느냐? (느낄 수 있습니다.) 느끼지 못할 때도 있느냐?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느끼지 못했을 경우,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성찰할 수 있느냐? (조금은 성찰할 수 있습니다.) 성찰한 다음에도 또 일을 대충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너는 배반하거나 해결할 수 있느냐? 너의 생각과 뜻을 배반하려면 그때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항상 너의 사심이 이긴다면 그야말로 위험하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같이 동역한다고 하자. 어떤 일이 임했을 때 듣기에는 상대방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가 이렇게 일 처리하는 데에는 속셈과 목적이 있다. 만약 형제자매들이 분별없이 그의 말대로만 한다면 하나님 집의 사역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다. 네가 그의 속셈을 눈치챘다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해 일어나 그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민이 된다. ‘같이 동역하는데, 만약 저 사람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말고 돌려서 말해야겠어.’ 그리고 너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님, 이 일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네 말을 들은 그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는 ‘하나님, 당신이 배치하시고, 지배하시고, 징계해 주십시요.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한다.결국 그 일은 그의 뜻에 따라 처리되었고, 너는 하나님 집이 큰 손해 보는 것을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본 꼴이 되었다. 스스로 이를 막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너는 그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이것은 이긴 것일까? 진리를 실행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 전쟁은 실패하지 않았느냐?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살까 봐 자신의 입장을 지키지 못했다. 사실, 이런 일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혹시나 네가 이 일을 정말 꿰뚫어 보지 못해 하나님께 찾고 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도 안다. 하지만 네가 이미 상대방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려는 것을 의식했다면, 그의 말을 따라서는 안 된다. 형제자매들이 그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도록 네가 물러서지 않는다면, 하나님 집이 손해를 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물러섬으로 인해 하나님 집의 사역이 손해를 입었다면 나중에 너는 가책을 받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가책을 받는다고 해서 손해를 만회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나중에 이런 생각도 한다. ‘어쨌든 내가 책임을 다했다는 건 하나님도 아실 거야.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니까.’ 이건 무슨 말이냐? 이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간사하고 강퍅하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진심이 있을까? 정의감이 있을까? (없습니다.) 싸움에서 실패하고 예스맨의 그런 처세 철학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람에게 미움 살 것은 걱정하면서 정작 하나님께 미움 살 일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인간 관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삼았다는 말이다. 네가 인간 관계는 잘 지켰지만 하나님께는 죄를 지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 이를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번 싸움에서 졌다면, 다음에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이길 수 있을까? 예스맨의 속셈과 관점으로는 그런 일 앞에서 늘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상황이 닥치면 하나님께 원칙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되 원칙과 입장을 지켜 하나님 집 사역이 손해를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이익과 체면, 예스맨의 관점을 배반하고, 정직하고 일관되게 일을 한다면, 사탄을 이겨 내고 이 부분의 진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인간 관계를 지키려는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면 너는 여기서 이길 수 없다. 그러면 다른 일에서는 이길 수 있을까? 역시 그럴 힘도, 믿음도 없지 않느냐? 그런 상황에서는 진리를 얻지 못한다. 진리를 얻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진리를 얻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을까? 그 진리에 진입하여 실행한다면, 그 진리가 네가 살아가는 토대가 될 것이다. 그 진리대로 살아간다면, 너는 그 부분의 진리에 진입하고 그 부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평소에 하나님의 교통을 많이 듣는 사람들은 글귀가 마음속에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고 접촉할 때 보면 매우 일리가 있고, 진리에 부합한다. 그런데 막상 일이 생기면 진리에 맞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하는데, 왜 그런 것일까? (진리를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깨달은 것일까? 자신의 타락한 성품에 대해 알고는 있을까? 자신을 인식하는 문제가 나오자 어떤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뗀다. “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마귀이고, 독사이고, 살아 있는 사탄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인식하는 것일까? 다른 한 사람이 방금 교통한 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방금 전 일에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너무 사악하고 간사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말했다. “이분, 진짜 반응이 빠르네요. 듣자 마자 바로 인식하고 교통하다니. 진짜 진리를 사랑하네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틀림없어요.” 이 말이 맞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 그렇다면 그 사람이 과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까? 그가 평소에 살아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자신이 말한 것을 실천하는지, 행동이 그 사람의 말과 일치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즉 말은 그럴듯하게 잘하는데, 정작 일이 생겼을 때 흘러나오는 본인의 타락한 성품들을 하나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좋은지 나쁜지를 어떻게 판단할까? 가장 간단한 부분을 보면 된다. 예를 들면, 본인이 간사하고 옹졸하다는 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다른 사람이 간사함을 드러낼 때에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자신의 간사함을 고백한 다음 그에 해당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가 배반하는지, 회개하는지, 그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지, 수치심을 느끼는지를 보아라.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본인의 간사함을 진정으로 인식하지 않고 건성으로 인식하는 시늉만 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남들은 자기보다 더 간사하니 자기는 제일 심한 사람이 아니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간사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스스로 간사하다고 드러내고 인식한 다음에도 여전히 그대로이고 자기가 간사하다는 점을 농담이나 구호 정도로 가볍게 여기면서 얼렁뚱땅 넘기려 한다면, 또 마음속 깊이 증오와 혐오를 품고, 회개와 인식의 태도로써 자신의 간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겉면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간사함을 털어놓는다면 이는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형식만 따지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다들 자신이 간사하다고 하니, 저도 그렇게 말하죠. 안 그럼 좀 멋쩍으니까요.” 이런 형식적인 태도라면, 마음속에 죄책감이 있는 것일까? 아무리 자신의 간사함을 인식하고 자신의 타락한 성품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진실로 인식한 것이 아니다. 왜 진실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일까? 속으로는 자신을 진실로 드러내고 미워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증오가 없기 때문에 어떤 나쁜 일을 해도 죄책감이 없다. 하나님을 기만해도, 하나님을 모독해도, 하나님을 거역해도 죄책감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을 속여도 죄책감이 없다. 죄책감이 없는데 뉘우침이 있겠느냐? 뉘우치지 않는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느냐?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난 일을 되돌려 자신의 육체적 이익을 배반하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렇지? 이것이 바로 마음의 일이다. 진실로 깨닫고 회개한 사람은 말은 하지 않더라도 염치가 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해서 형제자매들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다고 생각해 부끄러워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자신을 증오한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모두들 본성은 같지만, 본인이 얼마나 비열한지를 발견한 사람은 수치스럽다고 느끼고 하나님이 드러낸 것이 맞다고 인정하며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속으로 진실로 뉘우친다. 이런 것을 두고 진실한 지각, 진실한 인식이라고 한다. 진실한 지각이 없는 사람도 틀에 박힌 말들은 할 줄 안다. 그는 장난 삼아 노래를 부르듯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로 사람들을 속여 눈물을 흘리게 하지만 정작 본인은 말만 뱉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런 사람이 많지 않느냐?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사기성이 짙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것은 누구나 자주 접하고, 보기만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기 힘들고, 알아차리기 어렵고, 또 어떤 것에 민감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느냐? (이기적이고 비열한 모습입니다.)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이 쉽게 대는 핑계가 있다. 바로 ‘남들을 위해서’이다. 사실 자기가 수고를 덜 하기 위한 속셈인데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며, 이를 알아채기도 쉽지 않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 바로 그 속에 뭔가 숨겨져 있어 본질적인 것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겉모양은 남들을 속이는 것이고 꾸며낸 모습이다. 사실 이 내면에는 일종의 성품이 숨겨져 있다. 또 어떤 것이 분별하기 쉽지 않으냐? (형제자매들의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 앞에서는 받아들이지만 속으로는 저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역시 발견하기 힘든데, 이를 두고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남들이 훈계하면 맞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저항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를 훈계하는 게 맞아도 안 받아들이고 끝까지 저항할 거야.’ 겉으로는 잘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측면의 성품이 발견하기 어렵고 인식하기 힘드냐? 강퍅함은 발견하기 매우 어렵지 않느냐? 강퍅함은 잘 숨겨져 있다. 강퍅함은 말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 숨어 있는 한 가지 성품이자, 사람이 지키고 고수하거나 자신의 주관적 바람이 품고 있는 일종의 태도로 발견하기가 무척 어렵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사악은 가장 발견하기 어렵고 강퍅보다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묻는다. “왜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까? 일반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사악한 감정과 사욕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악함이 아닙니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다. 진정한 사악함은 어떤 것일까? 어떤 내적 상태에서 드러나는 것이 사악함인지 알고 있느냐? 허울 좋은 말로 자신 내면의 사악하고 낯부끄러운 속셈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그 말이 매우 훌륭하고 광명정대하고 정당하게 들리게 하여 결국 말할 수 없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사악한 성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왜 그것을 간사하다고 하지 않고 사악하다고 할까? 간사한 것은 본질과 성품 면에서 상대적으로 정도가 가볍다. 그런데 사악함은 간사함보다 바르지 않다. 즉, 더 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일반 사람들은 간파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던 말이 어떤 말이었느냐? (겉보기에는 맞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말입니다.) 맞다.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아닌 말이다. 네가 듣기에는 마치 맞는 것처럼 들리고, 너를 위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무슨 뜻인지 간파하지 못한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그 유혹을 견디기가 힘들어 상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함정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그렇다면 그런 성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뱀에게서 오고, 사탄에게서 온다. 사람의 본성 안에 바로 이 사악한 성품이 있다. 이 사악함은 사람의 사악한 감정 및 사욕과는 다르지 않느냐? 진정한 사악함은 일종의 성품으로,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체험이 없거나 분별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전혀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가장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사악함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자기 입으로 사탕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를 두고 사탕을 좋아한다거나 탐한다고 말하는 것도 듣기 싫어한다. 그럼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꾀를 내 사람들이 자기에게 사탕을 먹으라고 하거나 사탕을 나누어 주도록 유도하였다. 그래서 체면을 구기지 않고 자신의 식욕을 만족시키면서도, 남들로부터 자기가 사탕을 좋아하는 것을 의심받지 않는 데 성공했다. 이런 것을 두고 사악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탕이 먹고 싶어진 그가 친구에게 말했다. “요 앞에 사탕 가게 새로 문 열었던데, 한번 가볼래? 날씨도 더운데 안에만 있으면 덥잖아. 가게 가서 에어컨이라도 쐬면서 사탕 종류도 많던데 좀 구경하고, 가게에서 주는 공짜 사탕도 받으면 좋잖아?” 상대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승낙하자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사실 널 생각해서 그랬어. 네가 더워하지만 않았어도 가자고 하지 않았을 거야. 그 가게가 뭐 볼 게 있다고.” 참으로 사악하지 않으냐? 그는 친구를 꾀어내 자기 목적에 따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얘기가 끝난 다음에도 친구가 의심할까 봐 그 의심을 없애고, 친구가 다른 생각을 하거나 자기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질 만한 여지를 없앰으로써 미혹했다. 그리고 급기야 그 친구가 남이 가자고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가게에 도착하자 그가 말했다. “우리 온 김에 사탕 좀 사자. 왔다가 그냥 가면 아쉽잖아? 에어컨 바람만 쐬었다 갈 순 없지.” 그 친구는 잠시 고민하더니 사탕을 사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사니까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 그 사탕을 그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사탕을 먹니? 먹으면 이나 상하지. 에이, 네가 이미 샀으니 어쩔 수 없지. 먹을게. 안 그럼 아깝잖아.”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 친구는 상대방이 사탕을 먹고 싶어서 자기를 유인했고,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농락당했고, 상대방이 사탕을 먹겠다는 목적을 이루었음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 바로 사악함이다. 이것이 간사함보다 심각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악함은 간파하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사악한 성품이 심각할까? 바로 사람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다. 능숙하게 사람을 휘어잡고 우롱하는 사람들의 그런 성품을 바로 사악함이라고 한다. 사악한 사람은 간사함을 기본으로, 그 위에 다른 방식을 써서 자신의 간사함, 자신의 죄악을 감추고, 남이 모르는 자신의 속셈과 목적, 사욕을 감춘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또한 남들이 자기 뜻을 따르도록 온갖 수를 써서 사람들을 유인하고, 시험하고, 유혹하고, 결국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목적을 이루는데, 이것도 모두 사악함이고, 전형적인 사탄의 성품이다. 너희에게도 그런 면이 있느냐?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성품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네가 잘 모르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꾀를 써서 남들이 네가 이 문제를 잘 안다고 생각하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그런 일이 흔히 있지 않으냐? 이 경우도 그중 한 가지다. 시험하고 유혹하는 행위는 모두 사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사람들을 시험하는 경우가 많으냐? 만약 떳떳하게 한 사람을 알기 위해 그 사람과 교통하려 한다면, 이는 사역에 필요한 것이고 정당한 교류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의 성품이나 인식, 추구하는 것들을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도나 목적을 품고 상대방의 속마음이나 실제 내막을 알아내려 한다면, 그것은 사악함이고, 시험이고, 유혹인 것이다. 네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에게 사악한 본질이 있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본질이 쉽게 변할까? 그것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냐? 만약 각 측면의 성품이 모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자주 어떤 영적 상태가 생겨나는지 대조할 수 있고, 이를 대조해 보고 나서 그 부분의 성품이 심각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부분에서 본인이 진입하여 고치는 일에 부담을 갖고,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달라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조해 본 다음에도 진리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없고 죄책감도, 참소도 없으며, 더욱이 회개의 마음도 없고, 진리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달라지기 힘들다. 진리를 깨달아도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 이론만 깨달은 것에 불과하다. 어떤 측면의 진리이든 네가 각 측면의 진리의 관계를 모두 깨닫고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론에만 머물고 너의 실행과 진입으로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면, 또 네가 자신의 타락한 성품을 인식함으로써 단 한 번도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죄책감을 갖고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희망은 제로다. 더 엄중하게 말하면, 자신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문제의 본질의 근원을 알면서도 자신을 증오하지 못하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간절한 마음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여 마음이 계속 무감각한 상태거나, 계속 수동적이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닫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능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깨우침과 빛 비춤, 인도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조건은 무엇일까? 먼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동역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의 사욕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체면과 지위, 허영심, 자신의 여러 가지 이익, 자신의 계획, 욕망, 전망, 귀착지 등이 있다. 바로 앞의 것이든 내일의 것, 혹은 한참 뒤의 것이든 관계없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그 안에 있는 것을 하나씩 돌파하고, 조금씩 포기할 수 있다면, 너의 안에 진리는 늘어나고, 분량도 점점 커질 것이다. 그 진리들을 깨닫고 난 뒤 사욕을 조금씩 간파하고 포기하다 보면 너의 성품이 변하게 된다. 너희는 지금 어디까지 변화되었느냐? 내가 관찰한 바로는 너희는 아직 성품 변화 측면의 진리 실제에는 진입하지 못했다. 지금 너희의 분량은 어느 정도일까? 어떤 범위 안에 있을까? 아직도 본분에서만 맴돌고 있다. 즉, 본분을 할까 말까?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대충대충 하는 것이 아닐까? 가끔은 무책임하게 본분을 이행해서 가책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열심히 본분을 이행해서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그만두고 싶어하고, 소극적으로 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늘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분량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마음과 뜻을 다하여 본분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배정에 순종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이상 교통하지 않아도 너희들이 본분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무런 요구와 원망, 선택 없이 잘할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는 어느 정도 분량을 갖춘 것이다. 아직은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늘 교통해야 하는데, 왜 지금까지 이런 내용을 교통해야 할까? 너희가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본분에 관한 여러 가지 진리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고, 진입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리적으로는 이해했지만 아직 진입하기를 원치 않고, 고생과 굴욕을 감수하기 싫어하며 육체의 편안함만 누리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너무 많아서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못했다. 또한 자기의 계획과 요구, 개인적인 소망, 생각, 전망이 더 중요해서 거기에 끌려다닌다. ‘지금 이 본분을 이행하는 건 전망이 있을까? 여기서 기술이라도 배울 수 있을까? 하나님 집에서 장래성이 있을까?’ 항상 이런 생각만 하는데, 성품 변화와 연결될 수 있겠느냐? 아직이다. 아직도 멀었다. 먼저 이 단계를 넘어서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성품 변화에 달할 수 있다.

지금은 본분을 이행할 때도 그렇고 기초적으로 성품 변화의 진입을 추구할 때도 여러 가지의 진리로 사람의 타락한 성품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것은 모두 타락한 성품에 관련되는 문제다. 어떤 것은 일부 나쁜 버릇이나 표면적인 습관, 지식이나 관념으로 초래된 것이고 또 어떤 것은 가정 교육이나 전통 교육, 풍습으로 초래된 것이다. 너에게 관념과 생각을 주입시킨 그 어떤 것이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지 못하거나 계속 지키려는 것은 모두 성품 문제에 관계되는데, 이런 것을 해결하려면 마땅히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품 문제와 무관한 행위나 방법, 관념은 진리로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냐? 역시 진리로 해결해야 한다. 모든 문제는 진리로 해결할 수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많이 깨닫는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하느냐? (모두 글귀 도리입니다.) 모두 글귀 도리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글귀 도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평소에 글귀 도리나 빈말을 적게 하고, 구호도 그만 외쳐야 한다. 자신의 타락한 성품과 내적 상태, 자신의 어려움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덕이 될 수 있도록 실행에 관한 말들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런 빈말이나 구호, 남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꾸며 낸 말, 그럴듯한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말들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사람들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하여 너를 우러러보게 하기 위해 좋은 말로 자기를 꾸며 냈다고 하자. 너의 이런 속셈은 성품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을 해도 될까?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할 말을 가만히 참고만 있을까?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바꾸어서 말할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성품의 문제가 아니냐?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사악한 성품입니다.) 그것은 사악함이다. 이 사악함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바로 뿌리, 즉 타락한 본질이라고 한다. 너희에게 그런 본질, 그런 뿌리가 있으면 조금씩 파헤쳐야 한다. 각종 내적 상태에서도 파헤치고, 또 말을 할 때의 마음가짐에서도 파헤쳐야 한다. 또, 네가 내뱉는 말들을 분석하고 인식하면, 그런 깨달음이 점차 뚜렷해지고, 영은 점점 예민해진다. 그래야 너에게 변화가 있게 된다. 너희는 성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중시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가짐과 내적 상태로부터 조금씩 성찰해야 한다. 자신이 말하는 방식을 항상 성찰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사악함이고 타락한 성품이지, 정상 인성이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있게 되면, 그 후로는 자신의 사악한 성품이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점차 뚜렷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찬가지로 자신이 말하는 방식에서 그 안에 담긴 마음가짐을 계속해서 성찰하다 보면, 자신에게 분명 그러한 본질과 성품이 있다는 것을 점차 정확하고, 진실되게 평가하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정말로 사악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증오하고 혐오하게 된다. 자신을 좋은 사람, 품행이 바른 사람,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 정인 군자,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자신의 교만하고, 강퍅하고, 궤사하고, 사악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본질을 깨닫게 될 때, 스스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하게 되고,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된다. 진실된 증오는 말로 인정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자질이 부족하고, 천성적으로 겁도 많고 소심해. 난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고지식하고 야무지지 못한 사람일 거야. 하나님께 제일 먼저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나라고.’ 이것이 진실된 인식이냐? 그런 생각은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자질이 부족하다고 타락한 성품이 없을까? 소심하다고 타락한 성품이 없을까? 사악한 성품, 교만한 성품은 보통 사람에 비해 한 가지도 적지 않고, 아주 깊이 숨어 있어 더욱 완고하다. 왜 깊이 숨어 있다고 하는 걸까? (그는 늘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의 가상이 스스로를 속이고 미혹한 것이다. 자신은 이미 괜찮은 사람이니 진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그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악인이나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 인솔자에게 하는 말씀이지,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자신을 진실로 인식할 수 있겠느냐? (못합니다.) 자신을 알지 못한다. 즉, 시종일관 진리가 무엇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심판 형벌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구원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완전히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다양한 성품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내적 상태를 알아야 사람이 성품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영적 상태들을 알지도, 결부시키지도 못하고 맞추어 보지도 못한다면 성품 변화가 있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성품 변화는 다양한 성품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내적 상태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적 상태를 알지 못해 그 부분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면, 성품 변화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힘을 쓰고, 일을 하느라 바쁘다. 지금 본분을 하더라도 대부분은 힘을 쓰는 과정에 있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는 힘을 많이 쓰고, 기분이 별로일 때는 힘을 덜 쓴다. 그리고 힘을 덜 쓴 것에 반성하고 후회하며 힘을 좀 더 내는데, 그것으로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진실한 변화가 아니고 진실한 회개가 아니다. 진실한 회개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즉, 행위에 변화가 있고 배반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행위적으로는 합격되고 원칙에 맞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차츰 말을 하고 행동할 때 원칙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너희는 지금 어느 정도까지 왔느냐? 행위에 힘을 쓰는 단계에 있지 않으냐? 일부 사람들은 얼마간 힘을 내고는 항상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꾸 알아보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간사함과 사악함을 모두 가지고 있지 않으냐? 또 어떤 것이 있을까? (복을 받으려는 마음입니다.) 복을 받으려는 마음은 어떤 성품에서 생겨났을까? 자신의 지위의 복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강퍅함이 아니냐? 그런 사람은 항상 걱정한다. ‘내가 본분을 하면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하나님이 기억해 주실까? 나를 축복해 주실까? 인정해 주실까?’ 마음속으로 항상 이런 계산을 하는데, 겉으로 보면 거래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몇 가지 성품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런 다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즘 하나님의 축복도 별로 못 받고, 보호도 받지 못해서 여기저기 다치거나 손해를 본 것 같아 속으로 원망한다. 이것은 어떤 성품일까? 사람이 원망이 생기면 어떤 일들을 할까? 우선 이 원망은 긍정적인 사물일까? (아닙니다.) 분명 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면 진리에 맞지 않는 것들은 어떻게 생겨날까? 흉악한 성품의 지배를 받아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냐? 그는 대가를 치렀으면 보수가 따라야 하고 보수 없이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사탄의 논리에 따라, 보복하는 태도로 본분을 그만두려 하고, 거부하려 하며, 보답을 요구한다. 이것은 흉악한 것이 아니냐? 이것은 바울의 어떤 점과 비슷할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렇다. 제대로 대조했구나. 그렇다면 사람에게 바울의 그런 태도가 있느냐? 너희 자신에게도 이렇게 대조해 볼 줄 아느냐? 자신의 성품에 대조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성품을 인식해야만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한 것이다. 그저 ‘나는 마귀이고 사탄이야.’라고만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인식한 것이 아니다.

간사한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그런 사람은 간사한 생각이 들 때 바로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다. 그러고 돌아서면 자신의 간사함은 없던 일인 양, 얼굴도 변하지 않고 가슴도 두근거리지 않는다. 그리고 방금 전 일은 까맣게 잊은 채, 여전히 간사한 모습을 보인다. 얼마나 강퍅하고, 사악한 사람인가!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는 이런 방법을 진리를 실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진리 실행을 무엇으로 여긴 것이냐? 그는 진리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에 사람들이 올 때만 급히 청소하고, 평소에 오는 사람이 없을 때는 청소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집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그 집에 사는 사람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아유, 정말 부끄럽네요, 손님이 올 때만 청소를 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네요.” 실은 남들이 듣고 이렇게 생각하라고 한 말이다. ‘이 사람, 정말 진실하네. 정말 솔직하게 안 한 것은 안 했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잖아. 사람이 올 때만 청소를 한다고 솔직히 말을 하네.’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진리를 실행하는 줄 알고 미혹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청소하는 일에 책임감도 없군요. 너무 체면에만 목을 매는 거 아닌가요?’ 그는 남들이 이렇게 생각할까 봐 그런 말로 사람들 입을 틀어막는다. 고단수가 아니냐? 여기에는 몇 가지 성품이 있느냐? 우선 사악함이 있다. 그가 사람들 입을 막는 방법은 이런 식이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 더 말하지 마세요.” 남들이 보면 겉보기엔 그가 스스로를 잘 알고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회개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위선과 거짓말로 남들에게 가상을 심어 주고,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봐 주기를 바란다. 여간 영리한 게 아니다. 자기가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미혹되는지 알고 있으며, 남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리 예상한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사악입니다.) 또 어떤 성품이냐? (간사입니다.) 간사함도 분명히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손님이 올 때만 일을 하는 것은 대충대충 하여 속이는 것이라는 것도, 거짓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체면을 세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손님이 올 때서야 일을 하는 것은 강퍅한 것이 아니냐? 위선적이고, 강퍅하고, 사악하지 않으냐? 이제는 분별할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은 분별할 줄 알면서 자신은 분별할 줄 아느냐? 자신을 분별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분별할 수 있다. 자신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지금 와서 보니 좋은 일이다. 자신의 타락함은 발견할수록 더 정확하게 발견되고, 자신의 본질을 더욱 잘 인식할 수 있다. 그러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갈수록 구원받는 데에 가까워진다. 발견하지 못할수록 자신을 훌륭하고 괜찮다고 여기게 되는데, 이것은 구원받는 길과는 아직도 멀었고 위험한 것이다. 하루 종일 자기는 일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이성적이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항상 자기가 그렇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분량이 매우 작은 사람이다. 구원받을 희망이 남보다 크고, 구원받는 길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신의 타락한 성품을 진실로 인식하고 깊이 인식하는 사람일수록 구원받는 데 근접한 사람이다. 진실로 자신의 타락한 성품을 인식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살아 있는 사탄이라는 본질을 인식한다면 이런 문제는 심각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다. 자신을 알아갈수록 점점 소극적이 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끝났어. 완전히 끝장이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임했어. 나는 지금 징벌을 받은 거야.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실 거야.’ 이렇게 착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도 있습니다.) 이제는 다 끝이고 구원받을 방법도,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자기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더 희망이 있으니, 소극적이 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 자신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자신의 타락한 성품, 각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질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변할 생각이 없다면 무감각한 것이다. 이는 죽은 사람인데, 죽은 사람을 살려 내기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 아직 회개의 기회, 구원받을 기회가 있느냐? (숨이 붙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만 대답하면 소용없다. 대조해 보아야 한다. 어떤 모습이 있을까? 하나는 양심과 지각이 있고,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임을 아는 것이다. “나는 비록 패역하지만 순종하고 내 자신을 배반할 수 있어.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속상하시게 하면 안 되지.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려야 해.” 이렇게 양심이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이성 부분이다. “나는 피조물이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옳아. 하나님이 나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리시는 것은 나의 타락한 성품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야.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하시는 일에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어.” 이것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이성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저는 패기가 넘치는 대장부고, 인격과 존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대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성이 있는 것일까? 사탄의 성품이지 사람의 이성이 아니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이 저를 만드셨으니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본분이 조금 고생스럽다고 해서 본분을 선택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순종해야 한다. 어떻게 순종할까? 처음엔 순종하려니 힘도 들고, 괴롭다. 도망가고 싶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어떡해야 할까? 기도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극복하고 자신을 배반하고, 조금씩 조금씩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성적인 태도다. 너는 먼저 이런 이성을 갖추어야 한다. 양심도 갖추고, 이성도 갖추고 나면 또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 염치다. 어떤 일에서 염치가 있어야 할까? 자신이 일을 잘못하거나 거역하고, 간사하고, 교활하고, 기만하고, 거짓말하면 이에 대해 의식이 있어야 하고 염치가 있어야 하며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잃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뉘우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것이다. 그러면 끝이다. 아무리 말해도 귀에 들어가지 않고, 아무리 말해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두고 염치가 없다고 한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 뉘우칠 수 있을까? 염치가 없는 사람은 존엄이 없고, 존엄이 없는 사람은 뉘우칠 줄 모른다.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이 돌이킬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은 악을 내려놓지 못하고, 악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염치와 지각이 있어야 하고, 죄스러운 마음과 자신의 잘못을 알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돌이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성에 최소한 갖춰야 할 이성이다. 또 무엇이 있을까?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해야 합니다.) 인성 안에 긍정적 사물을 좋아하는 특성을 갖추려면 마음씨가 착해야 한다. 악인은 긍정적 사물을 좋아할까? (좋아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사악하고 흉악하고 악독한 것들을 좋아하며, 부정적 사물과 관계 있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긍정적 사물이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면 듣기 싫어하고, 거기에 관심도 없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아무리 좋게 말하고 그 말이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악인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먹고 마시고 노는 일, 유흥, 도박, 절도, 빼앗는 일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화색이 돈다. 이런 흉악하고 나쁜 성품 때문에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할 수가 없다. 악인은 긍정적인 사물을 어떻게 볼까? 멸시하고 우습게 보고 비웃는다. 정직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 이런 반응을 보인다. “정직한 사람이요? 그런 손해 보는 일은 안 합니다! 정직하면 바보가 되는 거 아닌가요? 당신처럼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만 하고, 제 살 궁리도 못 하고, 자기 몸도 못 챙기고, 그러다 쓰러지면 누가 신경이나 쓴대요?”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 적당히 합시다. 바보같이 너무 힘 빼지 말고, 우리 살길을 마련해 놓고 나서 더 열심히 하면 돼요.”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과 비슷한 말을 하면, 그는 기뻐한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충성을 다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면, 그는 싫어하고 반감을 가지며 귀를 닫아 버린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이 아니냐? 마음씨가 착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냐? 이런 사람이 봉헌하고, 헌신하고, 포기하는 것은 모두 목적이 있어서다. 그는 이미 마음속에서 계산이 끝났다. 자기가 하나를 바치면 열을 얻을 수 있으니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품일까? 사악하고도 흉악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다. 하지만 이리 저리 계산을 하다가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별탈 없이 잘 지내 온 것도 하나님 덕분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더라면 혼자 아무리 애써도 그렇게 잘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느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 손에 달려 있지 않은 일들을 사람이 혼자서 타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이미 다 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랜 세월 체험하면서 경험이 쌓이니 이런 일들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 일들을 하나님에게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악하고 흉악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고 항상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려 한다. ‘운명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고? 과연 그럴까?’ 하면서 항상 의문을 갖는다. 똑같이 말씀을 듣고, 진리 교통을 듣더라도 어떤 사람은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를 느끼고, 내적 상태가 좋아지며, 변화가 생긴다. 어떤 사람은 들을수록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복잡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 교통을 들을수록 싫어하며 전혀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런 반응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본성을 드러내, 염소와 양이 쉽게 구분된다. 한 부류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다른 부류는 아무리 들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말씀을 모두 틀에 박힌 말로 치부하며 설령 진리를 듣고서 이해했다 하더라도 실행할 마음이 없다. 자신의 계획, 사욕과 이익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몇 년을 믿어도 변화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느냐? 진정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헌신하며, 하나님 말씀이 모두 맞다고 믿는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이 최고의 원칙이다. 사악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오늘은 보니까 복을 받을 희망이 있는 것 같아서 최선을 다하고 좋은 일을 하다가 또 어느 날은 보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 후회하고 원망한다. 결국 어떤 결론을 얻을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다. 흉악하지 않으냐? 이익만 좇는다는 것은 그가 헌신을 달가워하지 않고,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았느냐? 욥이 시련을 겪을 때 그의 아내가 뭐라고 했느냐? (아직도 당신의 하나님을 믿냐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 아내는 불신파다. 화를 입자 믿음을 버렸다. 하나님이 복을 내릴 때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위대한 구세주이십니다! 저에게 이렇게 많은 재산을 주시고 저를 축복하시니,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칭송하다가, 재산을 빼앗자 욥에게 말했다. “하나님은 없으니 더 이상 믿지 마세요.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강도가 재산을 앗아가게 하겠어요? 왜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은 겁니까?”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흉악합니다.) 사람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거나 자신의 목적과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바로 노발대발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유다가 되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버릴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많지 않느냐? 지금도 교회에 아마 이런 뚜렷한 부류의 사람들이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이런 성품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변할 필요가 없는 것이냐? 이런 성품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흉악한 사람이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이 몇 가지 성품이 변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 합할 수 없고, 하나님과 합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올 수 없다. 욥은 어땠느냐? 하나님이 복을 내리자 욥은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다년간의 체험 가운데 때로는 하나님이 거두어 간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욥은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디며 나이가 지긋해졌을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앗아가자 욥의 태도는 어땠느냐? 그럼에도 원망은커녕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을 위해 증거했다. 이런 성품은 어떠냐? 여기에는 정상 인성이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성품이 있느냐? (양심, 이성, 긍정적 사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선, 욥에게는 양심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간파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그렇다면 이성의 경우, 그의 어떤 말에서 엿볼 수 있느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기 1:21)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 하나님 행사에 대한 진실한 체험과 인식을 간증하였고, 자신의 진실한 분량과 진실한 인성을 표출한 것이다. 또 무엇을 갖추었느냐? (진리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너희는 어떻게 하나님이 거두어 간 그 일을 통해 그가 진리를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느냐? (그는 요란을 떨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그는 하나님께 찾고 구했습니다.) 찾고 구하는 것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의 한 가지 모습이다. 아무리 괴로워도, 또 자신에게 닥친 일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욥은 원망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리를 좋아하는 표현이 아니냐? 한편, 진리를 좋아해서 나타나는 더 본질적인 모습은 어떤 것이냐? (순종입니다.) 순종할 수 있는지는 어떻게 볼 수 있느냐? 그것이 진리를 좋아하는 절실하고도 정확한 모습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람들이 평소에 자주 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사람에게 유익하고, 거기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라는 이 말은 진리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는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축복을 줄 때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거두어 가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습니다.) 너는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욥은 받아들였다. 그는 이 말을 진리로 생각했다.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욥의 모든 재산을 모조리 거두어 갔을 때 욥은 그토록 크나큰 손실을 입었고 큰 병까지 얻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옳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라는 이 말이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손해를 보고, 아무리 괴로워도 이 말이 정확하기에 지킬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주는 그 어떤 방식의 시련이든 다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거두어 갔을 때, 강도가 빼앗아 갔을 때, 온몸에 종기가 났을 때 욥은 어떻게 대했느냐? 하나님을 원망했느냐? 선택했느냐? 그는 선택하지 않았고, 한 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두고 진리를 사랑하고, 공평과 공의를 사랑한다고 한다. 욥은 말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너무나 공평하시고 공의롭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피조물은 구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모두 옳은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하는 일은 전부 옳은 일이고,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본인이 그토록 괴로워도 일절 원망하지 않았다.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큰 손해를 입고, 큰 어려움을 겪더라도, 욥은 그 어려움을 모두 이겨낼 수 있었다. 자신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두고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고, 진실된 순종이라고 한다. 진실로 순종해야 비로소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게 된다. 만약 큰소리만 치고, “하나님, 저의 병을 거두어 가 주십시요! 저의 재산을 되돌려 주십시요!”라는 요구를 한다면 이것이 순종하는 것일까?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닙니다.) 이는 큰소리만 치는 것이고, 재산을 좋아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것이다. 욥은 물질적 이익, 재산 등의 문제를 극복했다. 그래서 순종에 이를 수 있었다. 욥은 속으로 이런 일을 모두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다. “한평생 얼마를 벌든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한 푼도 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 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즉,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이 사실과 진리가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에 느낌표만 있을 뿐 물음표는 없었다. 이렇게 그에게 진리가 되어 마음속에 아로새겨졌다. 욥의 인성에는 또 어떤 것들을 갖추었느냐? 그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는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 하나님이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은 어떤 품성, 어떤 본질일까? (착한 성품입니다.) 이 착한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지? 이 몇 가지가 모두 합쳐지면 비로소 인격이 된다. 인격은 어떻게 생겨날까? 이 진리들을 깨닫고 난 뒤에 하나님의 시련과 사탄의 시험을 겪으면서도 굳게 설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진리를 갖춰야 비로소 인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욥은 인성의 본질 면에서 볼 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보기에 괴롭고 슬프고 걱정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이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이런 인성을 갖추었다. 이러한 착한 인성과 본질을 갖춘 사람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만약 착한 인성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은 무감각하고 냉혹하다. 바울과 한번 대조해 보자. 바울은 욥과는 정반대인 인물이다. 바울은 항상 자기 생각만 했고, 그리스도가 되려고 했다. 면류관을 얻지 못하자 하나님에게 시비를 가리고 따져 물으려고 했다. 얼마나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인가?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사람에게 사탄의 타락한 성품이 있으면 사람은 반드시 변화돼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더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와 생명을 얻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바로 이런 피조물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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