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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편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해야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본분을 하든, 전문 지식을 배우든 반드시 열심히 배우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지 건성건성 대충 넘겨서는 안 된다. 전문 지식을 배우는 것도 본분을 제대로 하기 위한 것이므로 업무 방면에서도 공을 들여야 한다. 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이고 반드시 협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협력해야 할 때, 항상 뒤로 물러나며 온갖 이유와 변명을 댄다면 너는 문제가 되고 골칫거리가 된다. 업무를 배우는 것이긴 하지만 여기에서도 진리를 찾고 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벗어나서도 안 되고, 이방인이 업무를 대하는 것처럼 대충 해서도 안 된다. 이방인이 업무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하냐? 이방인들은 그저 하루살이로, 대충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일을 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식이고, 대충 넘길 수 있으면 그렇게 한다. 효율에도 관심이 없고 양심이나 책임도 중요시하지 않는다.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나한테 맡겼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돼. 끝까지 책임지고 잘해야지.”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양심이 없는 것이다. 그 밖에 이방인에게는 어떤 타락된 성품이 있을까? “내가 할 줄 아는 걸 전부 가르쳐 주면 제자들 때문에 스승이 굶어 죽는 꼴이 될 텐데, 절대 안 되지. 전부 가르쳐 주지 말고 일부는 남겨 놓자. 80%만 알려 주고 20%는 남겨 놔야 스승 소리라도 듣지, 다 전수해 줬다가 다들 할 줄 알게 되면, 난 쓸모도 없어지고 더 이상 날 우러러보지도 않을 거야. 그러면 스승의 자리라는 것도 없어지겠지.”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것은 궤사한 것이 아니냐?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도와주고, 혹은 자신이 배운 것을 공유해야 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느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따로 숨겨 두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배운 거 남김없이 다 알려 줘도 괜찮지. 그래도 난 남들보다 나아서 더 깊은 걸 깨달을 수 있거든.”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덜 가르친 것이냐, 아니냐? 이것도 덜 가르친 것이다. “기본적인 거 다 알려 준다고 해도 괜찮아. 그래도 내가 그 사람들보다 아는 게 훨씬 많으니까. 그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배워도 나만큼은 못해.” 이것도 역시 덜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 업무의 핵심, 남들이 간파하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한 것들을 모두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장점을 발휘하고 거기에서 더 많이, 더 깊이 깨닫고, 알짜들을 더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가 그것들을 모두 내준다면 모두에게, 그리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이롭다. 가장 낮은 수준의 것, 기본적인 것을 알려 주고는 그 정도면 괜찮다고, 다 가르쳤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때로는 네가 이론적이거나 글로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것들만 가르치면 초짜나 혹은 이제 막 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핵심을 전혀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너는 잠자코 있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어쨌든 난 알려 줬어. 다 알려 줬고, 덜 가르치려는 생각도 없었어. 가르쳐 주지 않은 부분은 그 사람 수준이 낮아서 깨닫지 못하는 거야.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지 않은 거니 내 탓이 아니지. 그건 하나님이 하실 사역이야.’ 이 역시 궤사하고, 이기적이고 비열한 생각이며, 덜 알려 준 것이다. 말로는 다 알려 주었다고 하지만, 행동은 그게 아니지 않느냐? 온갖 태도가 그 안에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핵심을 알려 주어야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이론에서만 맴돌지 않는다. 대개 사람들이 어느 분야의 업무 지식을 처음 접하면 글자 그대로만 이해하게 되고, 업무의 핵심은 좀 해 봐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네가 터득했다면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서 다른 사람들이 실천해 보거나 시행착오를 겪느라 시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너의 임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핵심적인 부분, 또 네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알려 주어야 남김없이 알려 주는 것이고, 사심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치거나 업무를 교류할 때, 혹은 생명 진입을 교통할 때 이런 타락된 성품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너는 인성과 이성, 양심이 없는 사람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반드시 타락된 성품을 이겨 내 사심을 없애야 한다. 어떻게 사심을 없앨까? 이방인들 사이에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기술이나 업무를 배울 때 그 핵심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파악하고 알게 된다면, 밥그릇을 잃을 수도 있다. 너에게서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고마워하기는커녕 이득을 챙겼다고 생각하니 항상 경계할 수밖에 없다. 네가 습득한 것은 가장 값진 것이고, 목숨이요, 밥그릇이고, 밑천이므로 남에게 알려 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행동하고, 하나님 집에서도 그렇게 한다면 세상 속에서 지낼 때와 뭐가 다르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뭐가 다르겠느냐? 별로 다를 게 없다.

너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구원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후에도 일하는 원칙, 일 처리 방향, 사람됨의 방향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이방인과 같다면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방인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그저 업무를 배우는 것뿐이지만, 그 일에서도 원칙이 있어야 하고, 진리에 따라 처리하고 실천해야 한다. 진리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에게서 드러난 타락된 성품, 잘못된 방식이나 생각을 해결해야 한다. 진리로써 그런 것들을 계속 극복해야 한다. 먼저 성찰하거라. 성찰을 통해 발견한 타락된 성품을 해결하고 극복하고 배반해야 한다. 그런 것을 해결하여 더 이상 타락된 성품으로 일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내려놓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의 그런 행위와 방법, 행동을 열납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이요, 선행이다! 왜 선행이라고 할까? 너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또 하나님 집의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해 했고, 동시에 진리를 실천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해 줬다. 그래서 선행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반대로,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여전히 이방인들처럼 그 사람들의 원칙과 방식에 따라 살아낸다면 증거라고 할 수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께 치욕을 안기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하는 것일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이 공급하는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여전히 사탄을 따르고, 일이나 상황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천하지 않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를 필요로 할 때, 네가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탄의 말에 복종하고 사탄을 따라가고 사탄의 논리와 처세술대로 실천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하고 모독하는 것이 아니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 때, 하나님이 말씀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은 누가 한 말이냐?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평범한 말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것이냐? (진리입니다.) 그것은 진리요, 사람이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것, 마땅히 실천해야 할 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나무에 열린 열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었고, 실천 원칙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임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경우, 결과는 죽음이라고 했다. 실천 원칙도 알려 주고, 어떤 득과 해가 있는지도 알려 주었다. 사람은 이것을 알아들었느냐? 사람은 이해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런데 뱀이 와서 먹어도 죽지 않으니 먹어 보라고 유혹했다. 사람은 사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중 누구의 말에 복종했느냐? 사탄의 말에 복종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실천하는 쪽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하지 않았다. 대신 사탄의 말을 믿고 받아들여 그대로 따랐다. 그 결과는 어떠했느냐? 사람의 그런 행위와 방식이 바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결국 사탄에 의해 부패되고 타락되고 말았다. 현재 사람이 진리를 실천하지 않거나 진리를 깨닫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과 분부를 어겼던 것과 같다. 그 성격은 같은 것으로, 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치욕스럽게 하면, 결국은 계속해서 사탄에 의해 타락되고, 사탄에게 통제되며, 사탄의 타락된 성품에 지배당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사탄의 타락된 성품의 유혹과 공격, 사탄의 참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하나님과 함께함이 없어져 평안을 잃고 고통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10년 믿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별로 얻은 것도 없네. 다들 공허한 게 사라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하는데, 난 왜 그런 걸 못 느끼겠지? 처음에 열정으로 믿을 때는 하나님 믿는 게 너무 좋고, 생활도 달라지고, 인생도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믿을수록 힘이 빠지지? 처음의 믿음도 다 식어서 없어졌어. 이젠 하나님 믿는 게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20년 믿고도 돈이나 세상의 조류, 명예와 이익과 같은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여전히 공허해한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어도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주 느끼고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 (진리를 실천하지 않고, 성력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그마한 분량만으로는 이겨 내기가 힘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깨닫고 또 실천할 수도 있는 사람에게 성령 역사가 없다면, 그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차이가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해 준 진리를 얻었다면, 성령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도록, 혹은 믿음이 생기도록 역사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그 말씀들이 사람의 생명이 되었을 때, 사람에게 성령 역사가 필요할까? 필요치 않다. 사람의 내적 상태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성령 역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결정되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얻었는지, 진리 실제에 진입했는지에 달려 있다. 너희는 아직 이것을 꿰뚫어 보거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성령 역사는 사람이 진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도와주고 인도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하나님을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거나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역할을 한다. 성령 역사는 주로 돕는 역할을 한다. 네가 실제에 진입하고, 좋은 내적 상태를 갖도록 돕는다. 그리고 네가 진리를 깨닫도록 깨우쳐 주고, 빛 비춰 준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한 다음,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진리다.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닫느냐가 관건이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빛 비춤과 깨우침이 없더라도 너희는 내가 말하는 내용을 너희의 기본 바탕과 정상적인 인성의 사고만 가지고도 이해할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이해한 것을 실천하는 것은 성령 역사에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아까 이야기했던 화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을 몇 년을 믿어도 무엇이 좋은지 느끼지 못하고, 실질적으로 얻은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방인처럼 세상의 조류를 거스르지 못하고, 세상에서 오는 시험, 육체의 명리,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공허함을 자주 느끼고 그것이 갈수록 뚜렷해진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무 재미도 없어. 이 정도로 믿으면 돼. 내가 구원을 받게 될지도 미지수인데.’ 왜 갈수록 이런 생각만 드는 것일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공급해 준, 사람이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의 원칙, 실천의 길로 삼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자신의 실제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을 하거나 생활해 나가거나 생존해 나가거나 모든 인ㆍ사ㆍ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너는 스스로 겪거나 체험하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의 참뜻이 과연 무엇인지 직접 느끼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폭로하고, 사람의 타락된 성품이나 각 부류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폭로하고, 세상의 각종 인ㆍ사ㆍ물이 임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를 폭로하면, 너는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체험하지 않고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영원히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이다. 명의상으로는 하나님을 몇 년 믿어 왔다고 하지만, 너는 아직도 그대로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너의 타락된 성품은 근본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세상과 인류, 사탄, 조류, 명리를 단 한 순간도 내려놓지 못하는데,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공허함과 무료함을 느끼고, 확신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왜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처음처럼 크지 못할까?” 사람은 스스로 이렇게 단정하고 결론을 내린다. “처음의 믿음을 잃고 믿음이 식은 거야.” 이 말이 맞느냐? 머리로만 분석하면 논리적으로 반은 맞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맞는 말일까?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빈말이자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처음의 믿음을 잃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처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냐? 갓 믿기 시작했을 때, 너는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이 있었느냐? 너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한 말씀이 모두 진리이며 사람이 얻어야 할 생명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깊이 타락됐는지, 자신의 본성과 본질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런 믿음이 뭐겠느냐? 상상, 막연함, 속이 텅 빈 이론일 뿐이고 사람의 호의와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이 전혀 아니다. 처음의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초기 때의 의욕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의욕이 사라진 것을 두고 처음의 믿음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영적인 척하는 사람의 거짓말이다. ‘첫 사랑과 믿음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애초에 너에게 사랑이 있었느냐? 믿음이 있었느냐?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 이기적이고 비열한 마음만 있었을 뿐이다. 광명과 정의를 향한 약간의 의지와 소망을 갖고 열심히 봉헌하고, 바치고, 포기하고,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무엇 때문이냐? 자신의 일방적인 바람과 상상, 복을 받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앞으로 인류의 아름다운 처소로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포기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목적이 있는 열정이었을 뿐, 참된 믿음이 전혀 아니었다.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할 순간에 사람의 믿음이 다 드러난다. 처음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전부 거짓이었던 것이다. 검증과 시련을 이겨 내지 못하고, 시간과 상황의 검증을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정말 컸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믿었고요. 그런데 그런 믿음이 지금은 왜 다 사라졌을까요? 헌신할 의욕도, 대가를 치를 힘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때는 밤새워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매일 교회를 목양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의욕이 넘쳤죠. 그런데 지금은 그 믿음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너의 그 보잘것없는 열정은 이내 사그라들고 만다.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빈 껍데기, 구호적인 것, 사람의 호의와 상상과 사심에서 비롯된 것들이 오래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오래가지 못한다. 최종에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냐? 사람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진리를 얻고,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과 참된 믿음을 가지려면, 유일한 길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다. 즉, 네가 생각하는 것, 네가 깨달은 진리가 더 이상 구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활용하고,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진리가 너의 실제가 되어야 하고,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그럼 너의 세계관과 인생관, 처세 원칙, 인ㆍ사ㆍ물을 대하는 원칙과 방식이 모두 바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바뀌면 세상과 사악한 조류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커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도 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몇 년 믿고 의식주 선택에 원칙이 생긴 것, 즉 실제가 조금 생겨서 외적인 차림새가 달라진 것은 간단하고 낮은 차원의 실제다. 그런데 세상에 유행하는 특이한 옷차림이나 먹고 노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 이런 환경에서 그러한 특이한 옷을 입지 않고 액세서리도 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사용하지도 않으니 너무나 억울해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왜 억울해할까? 그들이 억울해하는 것은 그것을 속으로 싫어하지 않고 좋아한다는 증거다. 그런 사람들의 성향과 취향, 애호가 모두 그리로 쏠렸음을 뜻한다. 믿기 전에는 그런 것을 좋아해도 괜찮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그런 것을 좋아해서 내려놓지 못하고, 미련을 갖고, 또 포기하고도 억울해한다면 문제가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일종의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꽤 괜찮은 것 같고, 그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한 가지 이유다. 또 한 가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도 긍정적인 사물의 올바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적인 것, 그 조류, 사악한 것을 포기하라고 하면 힘들고 불편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입으로만 “저는 이제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고 이방인이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형식적으로만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고 대가를 지불했을 뿐, 내면 깊은 곳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긍정적 사물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너희는 이런 문제가 있지 않으냐? 어떤 방면의 문제나 내적 상태든 진리로써 해결할 수 있지 않으냐?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은 큰 틀이고, 이론이다. 그러나 어떤 방면의 문제이든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가 이론에서 실제로 되어 그것을 실천하고 진입한다면, 그 누구든 변화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은 절대적이고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과 선택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달렸고, 그 일에서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키느냐, 아니면 육체를 배반하고 진리를 실천하여 하나님 말씀에 따르느냐에 달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달렸다. 계속 육체를 만족시키고 사욕을 만족시켜 육체적 취향과 소망을 따르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보람과 가치를 경험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육체를 배반하고 자신의 사욕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 진리를 실천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사람, 자신의 타산과 욕망, 사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 진리에 따라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은 점차 진리를 실천하는 의미와 재미,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는 의미,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하는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점차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 긍정적 사물을 점점 좋아하게 되고, 부정적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점점 강해질 뿐만 아니라 그런 부정적 사물을 점점 싫어하고, 그에 반감을 가지고 경시하게 된다. 이런 내적 상태와 태도가 있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렇게 실천해 나가다 보면 타락되고 사악하고 교만하고 이기적인 자신,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신을 증오하게 되고, 자신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 증오하고 혐오하게 되고, 반감을 갖게 된다. 동시에 주변의 부정적 사물에도 반감을 느끼는 그런 내적 상태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럼 자신에 대해서 증오와 혐오감을 느끼는 동시에,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바뀔까? 자기 자신이 진리를 실천하기를 바라고,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분량과 충분한 의지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고, 양심과 이성, 진리 실제가 있는 피조물이 되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이 마련한 모든 상황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훈계와 책망도 좀 받고, 많은 말씀을 들었어도 자신을 한 번도 증오한 적이 없고, 자신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 또 자신이 진리를 무척 사랑하고 사모한다고 여긴다. 그러한 내적 상태는 왜 생기느냐?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자신의 본성과 본질을 증오한 적도, 깊이 인식한 적도 없으면서 스스로 진리를 아주 사랑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빈말이고, 거짓말이고, 위선적인 말이다.

방금 얘기한 두 가지 방면을 느껴 본 적이 있느냐? 어떤 것을 더 뚜렷하게 느꼈느냐?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관한 방면이냐, 진리 실천에 관한 방면이냐? 어떤 경우가 더 많이 나타나느냐?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인식하고 증오하는 것은 소극적인 면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면은 어떠하냐? 그런 내적 상태가 많으냐 적으냐? 이 부분에서 성과가 있느냐? 그런 내적 상태는 아직 많지 않고, 뚜렷하지 않다. 그렇지? 자신을 증오하는 상태가 자주 생기느냐? 역시 가끔씩 나타난다. 내적 상태가 좋을 때, 혹은 누군가 너를 설득시킬 수 있을 때, 네 상황이 하나님 말씀과 맞춰질 수 있을 때면 자신을 좀 인식하고 증오한다. 하지만 그렇게 깊지 않다. 그리고 항상 자아만족에 빠지고 뿌듯해하면서 역시 남들보다 낫다는 내적 상태에서 산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기 인식과 진리 실천, 이 두 가지 방면에 다 진입하면, 늘 그런 내적 상태에서 살 수 있고 또한 그런 상태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정상적인 이성이 갖춰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뿌리를 내린 것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환경이나 업무 실적 혹은 주위 인ㆍ사ㆍ물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주변 사람들이 너보다 업무 능력도 뛰어나고 소질도 뛰어날 때는 ‘난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라는 사람은 정말 수준이 형편없구나! 교만하지 말고 나서지 말아야겠어.’라고 생각하면서 좀 겸손해진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질이 부족하고, 새신자가 많을 때는 또 교만해지면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불안정적이지 않으냐? 네가 항상 환경에 따라 변한다면, 그 내면의 상태는 너의 진실한 생명도, 진실한 상태도 아니다. 3살짜리 아이 앞에서 어른 노릇을 하던 8살 아이가 제 부모 앞에서는 3살짜리보다도 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그 아이의 실제 분량이다. 실제 분량은 어떻게 드러나느냐? 너의 평소 모습을 보면 된다.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어려운 일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잘못된 태도를 보인다. 실천 원칙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이것은 기반이 없고, 그 방면에서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깊이 반성하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소극적인 방면, 혹은 자신을 인식하는 방면에 끊임없이 진입하고, 더 깊이 인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다 보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내면 상태가 점점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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