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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편 진리를 구해야만 하나님의 행사를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그분>을 본 후 식견이 넓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사람은 새로운 깨달음이 생겼다. 원래 갖고 있던 이론적인 일부 생각과 견해 혹은 깨달음이 이번 영상을 통해 실증을 얻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느낀 것은 놀라움이었다. 그렇지? (네.) 왜 놀라움을 느낀 것이냐? 그저 이러한 사실들 때문이냐? 아니면 이러한 영상을 통해 목격한 하나님의 행사 때문이냐? (하나님의 행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를 목격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보고 알게 된 하나님의 이러한 행사를 통해 너희는 이 영상 속 대사나 장면에서 언급하지 않은 무언가를 깨달았느냐? 너희가 깨달은 것들 대부분은 모두 영상에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명확한 내용들이다. 대사에서 알 수 있는 그 의미를 너희도 다 느꼈다. 그렇다면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목적이 그저 너희에게 놀라움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냐?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함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다큐에서 언급한 모든 사실은 하나님이 전 인류를 주재하는 과정이고 또 하나님의 행사이다. 하나님의 말세 역사만 언급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한 그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다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전 인류를 경영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고, 화면과 내레이션 그리고 코러스 형식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 내용들을 보여 주는 목적은 그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한 이 모든 것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냐? 이 모든 사실을 보여 주는 목적은 그저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주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운명,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사명에 순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냐?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도 느꼈을 것이다. 만약 인정하고 순종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효과에 그친다면, 이는 이 다큐를 만들어 얻으려 한 효과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다. 만약 이 효과까지도 보지 못한다면 이 영상을 제작해도 쓸데없고, 그 어떤 의미나 가치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를 제외하고 또 어떤 효과를 보아야 할까? 이 안에는 찾고 구할 진리와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렇지 않으냐? 이러한 영상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은 말씀의 형식으로 사람에게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로써 사람은 마음속에 개념이 생겼고,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과 화면 그리고 내레이션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해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말씀이 가장 진실된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가장 크게 보아야 할 효과는 사람이 가장 명확하게 알아야 할 그 뜻으로, 바로 진리의 뜻인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서술하고 있는 모든 내용과 사실에서, 이러한 사실들이 한 가지 주제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주제이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전 우주의 만물을 주재한다. 그렇지?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재 속에서 사람이 알게 된 사실은 어떤 것이냐?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까지 하나님이 주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지배 속에 있다. 사람의 바람이 무엇이든, 만물의 의지가 무엇이고 그 추세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가 이러한 영향을 받겠느냐?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고 지배하는 원칙은 무엇일까? 이유는 무엇일까? 또 무엇에 근거할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하는 목적은 무엇이고 무엇을 중심으로 하는 것일까? 잘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의 경영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경영 계획을 중심으로 이 모든 것을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중심으로 한다는 이 말은 상상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는 무슨 뜻일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즉,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사역은 사람의 의지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주재, 그의 지배, 즉 어떤 국가나 민족이나 그 어떤 집단을 지배하든, 혹은 어느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의지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공간, 지리, 인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그의 계획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기에 이를 깨뜨리거나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류 혹은 어떤 집단의 주관적 바람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하려고 결심한 일은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도 방해할 수 없고 파괴할 수 없으며 좌지우지할 수도 없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하면 너희는 대사나 장면들을 통해 깨달은 것 외에 무언가를 더 깨달을 수 있다. 그렇지? (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면서부터 인류가 점차 발전해 오기까지, 인류 가운데는 하나님의 선민도 있고 이방인도 있으며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도 있다. 이 몇 부류의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게 인류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몇 부류의 사람들을 대할 때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르게 대한다. 하나님 선민에 대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있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들을 다른 인류와 다르게 대하지만, 선민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거나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하느냐?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하나님은 어떻게 볼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때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나타납니다.) 맞다. 네가 자신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든,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고 생각하든, 혹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어떤 공로를 세웠든,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있기에 벌해야 할 때는 벌을 주고 심판해야 할 때는 심판하고 멸해야 할 때는 멸해 버린다. 그 밖에,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천국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된 이 사실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사람의 고정관념과 상상에 따르면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선민이고 하나님의 아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걱정하시는 인류이고 하나님의 눈동자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대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럼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어떻게 대할까? 그 아이가 조금도 상처받지 않고 조금도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아마 애지중지하며 보호할 것이다. 또한, 어떤 일이 닥치든 그 아이가 바라지 않아도 베풀어 줄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날 때, 그것은 어떤 장면이었을까? 사상자가 있지 않았느냐? 사람이 죽는 일이 있지 않았느냐? (있었습니다.) 살육이 있었고 사상자가 있었다. 유혈 사태가 생기고 충돌이 생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중에 살아남은 일부 사람들이 유대 땅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 속에 어떠한 본질이 있다고 생각되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일단 제쳐 두고 먼저 실생활 속에서 사는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어떤 사람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 만약 그 아들이 재산과 앞으로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겠느냐? (엄격하게 대하며 인재로 키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아들이 인재가 되고 기능을 전수받을 수 있도록 엄격하게 대한다. 가장 주된 것은 무엇이냐? 그 아들이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고 다치거나 목숨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고, 그 어떤 위험에도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목적은 그 아들이 살아서 그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아이나 남에게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느냐? 이러한 방법으로 대하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에게 하는 모든 것은 사심과 감정 그리고 사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사람은 본성과 본질 속에 이러한 것들을 갖고 있지 않으냐? 그렇다면 사람의 이러한 감정과 사심 속에 진리가 있느냐? 공평함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행한 일을 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였고, 유대 땅에서 그 지역 이외의 이방 민족, 즉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의 지역까지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파하였을까? 하나님은 근거 없이 한 것이 아니다. 그 지역에 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없으니 성령이 아시아, 유럽 혹은 다른 대륙에서 뜬금없이 한 사람을 일으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이상을 말하고 하나님이 새로운 사역을 한다고 말하게 한 것일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근거 없이 하지 않았다. 이는 한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증명한다. 어떤 사실이냐? (하나님의 역사는 실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핵심을 짚었다. 하나님의 역사가 실제적이라면, 하나님의 실제는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근거 없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한 측면이고, 다른 한 가지는 무엇이냐? 유대인을 유대 땅에서 떠나 천국 복음을 확장하도록 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어떻게 그곳을 떠난 것이냐?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을 사용했다. 외부 침략자를 통해 그 지역을 침략하고 점령하여 그곳의 유대인들, 즉 천국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내쫓았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머물면서 살아남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인종이 다른 민족 속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흩어지자 복음이 각 지역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친 것과도 같다. 천국 복음을 위해 하나님은 이러한 대가를 치렀다. 그의 선민들 가운데 살육, 전쟁이 일어났고 내쫓긴 사람도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집을 잃고 떠돌게 되었고, 세계 각 지역으로 망명하여 천국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사람의 뜻과는 어긋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의 뜻과 어긋난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본질을 형용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분명히 그럴 수 없다. 이는 사람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질 속에는 사심이 없고 감정도 없다. 하나님이 행한 그 모든 것은 전 인류의 발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였기에 전 인류의 다음 단계 발전이 완전히 하나님의 경영 계획의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고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역사 절차가 거기까지이므로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을 보면 하나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 어떤 인류나 민족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로운 것이다.

유대인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에서 오늘날 하나님의 선민은 어느 정도의 깨우침을 얻어야 한다.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였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고 걱정하며 긍휼과 자비를 베푼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명을 부여할 때, 하나님에게 사람은 어떤 존재이냐? 그 뜻을 느낄 수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봤을 때, 하나님에게 사람은 가치가 없는 존재네요. 사람은 그저 바둑알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여야 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해야 하니까요.” 맞는 말이냐? 표면적인 현상을 보면 대체로 비슷해 보이고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다. 그렇지? (네.) “네.”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 의심을 하고 서운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의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일할 때 그렇게 많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전통적 사상이나 고정관념이 없고 속박받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할 때, 그렇게 자유롭고 공개적이며 희망차고 정의롭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영 계획의 절차에 따라 정상적으로 진행되며, 또 한편으로는 미래의 인류가 발전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미래의 인류가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님의 경영 계획에 따라 정상적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인류의 발전과 하나님의 경영 계획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아픔을 참으며 사랑하는 것을 버리면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류는 한 걸음도 발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이 한 모든 선택과 모든 절차 그리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고려한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능력, 권능 그리고 지혜가 담겨 있다. 사람은 종종 하나님이 행한 일들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은 고정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고정관념 중 일부는 상상이고, 일부는 사람의 전통문화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 일부는 사람의 사심과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영향을 주었고,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생기게 하였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그 일을 통해 결론을 지을 수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어떤 결론이냐? (하나님께는 사람과 달리 사심이 없으시고, 하나님이 하신 모든 것은 정의로운 것으로, 전 인류의 발전을 위한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이 오늘날 너희에게 일어나 살육이나 유혈 사태가 발생하고 집과 가족을 잃고 온 가족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면, 너희는 어떻게 깨달을 것이냐? 이러한 사실에서 사람은 선택을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려고 결심한 일에서 사람은 선택할 권리가 없다. 이 말을 듣고 난 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느냐? 마음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렇지? 마음이 반은 차가워져 이렇게 말한다. “이런 사실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가 없다면,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경영 계획에서 사람이 맡은 역할은 대체 무엇인가요?” 너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다. 그렇다면 이 피조물에게 어떠한 기능이 있을까? 예를 들어, 너희가 의자에 앉으면 그것은 의자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무엇이 되느냐? (쓰레기가 됩니다.) 그것은 쓰레기가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물이나 국을 냄비 채 들고 와서 의자 위에 올려놓는다면, 그 의자는 무엇이 되느냐? 냄비 받침대가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키가 작은 사람이 선반 위에 있는 물건을 집을 수가 없어 그 의자를 밟고 올라가 물건을 집었다. 그때 그 의자는 무엇이 되느냐? (사다리가 됩니다.) 사다리가 될 수 있다. 그 의자의 모양은 의자이지만, 일이 변동됨에 따라, 그것의 용도가 바뀜에 따라 그 의자 자체의 기능도 점차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자를 의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것의 모양은 의자지만, 상황이 바뀌거나 그것이 필요한 경우가 달라지면서 그것의 용도도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의자다. 그렇다면 그 의자의 용도는 모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사람의 필요에 따라 다릅니다.) 상황에 따라, 일의 변동에 따라 그 의자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준다. 그 위에 앉으면 의자가 되고, 밟고 올라가면 사다리가 되고, 그 위에 물건을 올려놓으면 받침대가 되고,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쓰레기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것의 기능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볼 때 피조물은 어떤 기능들을 가지고 있을까? 이는 실생활 속에서의 사람의 실행과 관련된다. 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찬양의 은사를 부여해 노래를 부르게 하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노래를 잘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부탁을 받아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를 복음 전도에 쓸 때, 피조물인 너는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복음 전파자, 전도자가 된다. 그렇지? 그렇다면 너를 인솔자로 쓸 때, 피조물인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형제자매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 부탁을 맡아 그 부탁과 본분에서 진리와 원칙에 따라 본분을 잘 감당해야 한다. 이때에는 또 이러한 기능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힘을 쓰는 일, 생명 진입에 관련되지 않는 일을 맡길 때 너의 기능은 무엇이냐?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지만 힘을 쓸 수 있다면 힘을 쓰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런 피조물의 기능은 무엇일까? (힘쓰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종합해 보아라. 하나님이 보기에 피조물은 대체 어떤 존재이냐? 이는 일상생활 속 너희의 실행과 관련된다. 사람은 고정관념으로 하나님 안중의 피조물을 상상한다. 하나님이 걱정하고, 징계하며, 책망하고, 훈계하며, 아끼고, 돌보며, 깨우쳐 주고, 지켜 주며,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손으로 받쳐 주며, 전심으로 온전케 하려 하고,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다 하나님이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중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느끼고 나면 사람은 “하나님은 더없이 사랑스러우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위대하시고 사람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이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좋으신 분입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 사실과 맞춰 볼 때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대하는 내용이 이것뿐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느냐?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람의 고정관념과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법과 태도가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일부 사람들을 놓고 볼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선 말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을 마련해 그 사람을 드러낼 때, 그 속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볼 수 있느냐? (볼 수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드러난 후, 그 본인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다른 사람에게 있어 이는 무엇이냐? 반면교사다. 그렇지 않으냐? 바울을 예로 들어 보자. 사람은 바울에게서 무엇을 보았느냐? 바울의 사례를 통해 사람은 바울이 간 길이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면류관을 추구하였고 육체의 앞날과 귀착지를 추구하였다. 결국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다가 멸망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반면교사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유익을 얻게 되었고 바른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바울 이외의 사람, 바울을 통해 유익을 얻은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구원이시고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바울 본인에게 있어 하나님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공의이십니다.) 하나님이 볼 때 바울은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그 피조물은 무엇이 되었느냐? (힘쓰는 자가 되었습니다.) 힘만 쓰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힘만 쓰는 존재인 것이다. 모두 같은 피조물이지만 유익을 얻는 자와 드러나는 자, 하나님이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이 두 부류의 사람은 모두 개미나 구더기처럼 가치가 없는 인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대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다.

그렇다면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사람이 가는 길을 근거로 합니다.) 사람의 모습, 사람의 본질, 사람이 가는 길을 근거로 한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이 행한 그 일이 너무나도 매정하게 보인다. 사람의 고정관념과 상상에 따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렇게 대하시면 안 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렇게 많은 사역을 했으며 하나님께 충성하였는데, 하나님은 왜 그런 태도로 바울을 대하시나요?”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감정이지 진리가 아니다. 사람의 상상에 따라, 사람의 도리에 따라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런 태도로 바울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행한 일은 사람의 도리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고 공의 성품이다. 사람의 도리에 따르면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울은 공로는 없다 해도 고생은 했고, 고생도 없다면 수고는 했습니다. 그가 몇 년간 고생한 것을 고려해 보면 힘쓰는 자가 된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야지 벌하거나 음부와 지옥에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고 사람의 감정이다.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점은 무엇이냐? 사람의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것은 진리에 근거하고 그의 본질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공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너의 주관적 바람이 무엇인지 상관하지 않고, 네가 무엇을 했는지 객관적 사실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한 일, 네가 드러낸 것, 네가 가는 길을 근거로 삼아 너의 성질을 정하고, 너를 규정하며, 너에 대한 가장 적합한 태도를 취한다. 바울의 결말도 그렇게 생긴 것이다. 바울의 그 사실에서 봤을 때,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는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모두 같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이 바울을 대한 태도, 바울의 결말을 정한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일에서 너는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이 한 사람을 대하거나 한 사람에게 사명을 주어 그 사람이 어떠한 사역을 하고 어떠한 본분을 감당하게 할 때, 사람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이 일하실 때 사람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권능은 원칙 없이 남용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들릴 수 있다. 실제로 그러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할 때는 원칙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실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쉽게 오해가 생기고 하나님을 판단한다. 네가 사실의 진상을 알고 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너에게 있었던 오해가 어떻게 될까? 네가 스스로 생각해 보니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비열하고 빛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때 너는 무엇을 알게 되느냐? (하나님이 하신 모든 것이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한 것은 모두 정확하다. 사람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어리석으며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정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네가 이해하게 되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정말 정확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타락했고 마음이 너무 좁으며 너무 어리석고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서 보게 된 것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이든,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옳으시고 모두 하나님의 참된 성품이 나타난 것이며 모두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모든 것이 진리에 부합되고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너희가 그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면 어떻게 대할 것이냐? 그땐 이러한 진리를 적용해야 한다. 이러한 이론들을 깨닫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네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람, 일, 사물에 직면했을 때, 이러한 진리들이 너에게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의 실행과 진입, 네가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갈 때, 이러한 일들이 어떠한 도움을 줄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반성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과 오해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조금씩 언급하였다.

방금 전에 언급한 것이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그분> 이 다큐의 어떤 내용이냐? (유대인이 쫓겨나 세계 각국으로 망명한 내용입니다.) 이 사실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았느냐? 어떤 진리를 깨달았느냐? 사람은 이 일을 통해 좀 반성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를 반성해 봐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를 먼저 말해 보겠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할 때는 사람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하나님이 일을 할 때는 하나님 자신의 원칙이 있다. 이때 사람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 어떤 일이 임하든, 사람은 자신의 고정관념에 부합되든 부합되지 않든 절대 하나님께 대항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이 “저는 생각으로 대항합니다. 본분을 할 때는 손이 쉴 새가 없는데, 그래도 안 됩니까?”라고 말한다. 이런 술수는 어떠냐? (안 됩니다.) 분명히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진실된 순종이 아니다. 절대 하나님께 대항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항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하고 어떻게 실제 상황에 적용해야 하느냐? 두 가지 실행 원칙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를 자발적으로 찾고 하나님이 부탁한 것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깊은 곳이나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 순종하지 못하는 것, 상상하는 것, 대항하는 것, 하나님과 맞지 않는 것을 성찰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네가 받아들인 하나님의 부탁을 정확하게 완수할 수 있다. 진리에 따라 완수하면 하나님께 기억될 수 있다. 이 실행 원칙은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이 ‘간단하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즉, 실행 길이 비교적 뚜렷하여 듣자마자 어떻게 실행할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1 더하기 1이 2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만큼이나 간단하다. 그렇지 않으냐? 1은 1이고, 2는 2다. 논리는 명확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도 이렇게 간단하냐?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락된 성품이 있고 항상 이치를 따지며 또한 상상과 고정관념이 많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일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도 못했습니다.”라고 오해한다. 그렇다면 너는 분석해야 한다. 무엇을 알아야 할까? “이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지만 사람이 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 성품을 보았습니다. 만약 전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디서든 다 사랑을 나타내셨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원수를 대하는 일에서, 사람의 타락된 성품을 대하는 일에서, 하나님과 대립되는 일에서 하나님이 드러내고 나타낸 것은 사랑이 아니다. 무엇이냐? (공의 성품입니다.) 공의 성품, 증오, 혐오, 심판, 형벌, 징벌, 훼멸이다.

사람은 자신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맞지 않는 것들을 항상 성찰해야 한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는데, 이것 역시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오해들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사람은 왜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것일까?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사실에서 보면, 사람은 이것을 보고 난 후 감정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유대인과 이스라엘 사람을 그렇게 잘 보살피시고, 그들을 이끌어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또한 만나와 샘물을 주셨고 직접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시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충만하여 그 시대의 사람은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변한 거죠?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로 간 걸까요?” 사람의 감정에서 넘어가지 못할 때 사람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대체 사랑이 맞는 건가요? 어째서 하나님이 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하시던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거죠?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사랑은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로 있는 건가요? 어디로 간 거죠?” 이렇게 사람의 오해가 생긴 것이다. 그 배경은 어떻게 된 것이냐?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재난과 고난이 임하게 하신 그 일이 사람에게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고 사람에게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에게 불리해졌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로 거짓 현상이 초래되면서 사람을 잘못 이끌어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해가 생긴 것에는 배경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어떤 배경이냐? 사람에게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해 놨기 때문이 아니냐? (맞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해 놓고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그렇게 대하시는 게 당연해. 그래야만 하나님이시고,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사랑이야! 나도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 좋단 말이야. 특히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홍해를 건너게 했던 그 순간에는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하셨어. 그때의 사람은 정말로 행복했을 거야! 나도 그들 중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네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너는 하나님이 그때 나타낸 사랑을 가장 높은 진리로 여기고, 하나님 본질의 유일한 상징으로 여긴 것이다. 너는 그것을 규정짓고 마음속에 담아 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그때 행한 모든 것을 가장 높은 진리로 규정짓고,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이자 사람이 가장 존경하고 경외하는 부분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규정지었다. 사실상 그 일은 하나님께 있어 긍정적인 것이지만, 너의 마음속에서는 부정적인 것이 되었고 너의 고정관념이 되었다. 이로 인해 네가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는 사랑 외에 다른 본질이 없고, 긍휼을 베풀고 보살피고 보호하고 인솔하고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는 것 외에 다른 본질이 없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잘못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왜 그러한 면을 그렇게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냐? 네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너의 어떤 이익과 관련되느냐? (육체의 향락, 생활의 안락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것들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얻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심판과 형벌, 하나님을 위해 고통을 받는 것,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하는 것, 심지어 하나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하나님의 인솔을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 본질의 유일한 상징과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로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영상 속에서 하나님이 한 일들이 사람에게 고정관념이 생기는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고정관념이 생기게 된 배경이다. 그러한 고정관념이 생기면 그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된 것이냐, 아니면 오해하게 된 것이냐?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오해다. 너무나도 단편적이다. 이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다. 이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할까? 이는 사람이 자신의 고정관념과 상상, 자신의 사욕에 따라 분석하고 해석한 일종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을 베풀고 구원하고 보살피고 보호하고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느냐? 너무나도 많다. 채찍질, 징계, 책망, 심판, 형벌, 시련, 연단… 이러한 것들이 모두 있어야 전면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 네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반성해 보게 될 때,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자신의 잘못을 더 잘 반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오해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를 구해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구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면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에 순종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너의 오해가 풀릴 수 있다면,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보고 난 후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류와 피조물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채찍질하고 쫓아내는 이러한 방식의 인솔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는 그 어떠한 선택도 해서는 안 되고 대항해서도 안 되며,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의 고정관념과 상상 속에서는 유대인을 대하는 하나님의 그런 태도가 사람의 뜻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지금 다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은 모두 공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주실 수 있는 동시에 또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본질이자 성품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실행에 있어 이 일은 어떤 깨우침을 줄까? 말하자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적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거나 하나님의 인솔과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 일부 사역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위해, 혹은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바치고 어느 정도 포기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방인들이 봤을 때, 너는 어느 정도 공헌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너는 절대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그것을 하나님께 너를 어떻게 어떻게 대해 줘야 한다는 협박 조건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태도가 너의 고정관념과 맞지 않을 때, 너의 육체적 이익과 맞지 않을 때, 인지상정에 어긋날 때, 하나님께 대항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너희는 이 세 가지를 해낼 수 있느냐? 이는 모두 실제와 관련된다! 이 몇 가지 상태가 사람에게 잘 나타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왜 그런 상태가 나타나는 것일까? 왜 사람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교만 자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을 말하지 못했다. 다시 잘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본성이 패역하기 때문입니다.) 정답에 조금 가깝다. 또 뭐가 있느냐? 하나님이 전 인류를 경영하고 만물을 주재하면서 이런 것을 자본으로 삼았느냐? 공을 바랐느냐? 하나님이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봐라. 너희는 왜 나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이냐?”라고 드러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왜 그런 것이 없을까? (하나님의 본질은 아름답고 선하며,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빈말을 하는구나. 빈말만 하지 말고 진실된 말을 좀 해 보아라. 첫 번째 질문부터 대답해 보아라. 사람에게 왜 그런 상태가 나타나고 왜 그런 모습이 나타나고 흘러나오는 것일까? 이 문제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사람에게 타락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간단한 문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것을 나타내지 않고 이런 모습이 없을까? 하나님의 본질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답이다. 이 두 마디를 잘 묵상해 보아라. 사람이 그런 태도를 보이고 그런 것을 드러내는 이유는 사람에게 타락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느냐?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하느냐? 위에서 방금 언급했던 세 가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실행하는 것이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를 해결할 방법은 있다. 이 세 가지를 듣고 난 후, 사람은 아마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할 거면, 그냥 머리를 비우고 꼭두각시가 되라는 거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냐? 너희는 분명 이 측면의 일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알려 주겠다. 이러한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첫 번째 측면이다. 그 밖에도 네가 추구하는 방식은 진리에 맞지 않으며 바른길이 아니다. 이는 이미 실패한 전례가 있다. 이런 것을 자본으로 삼고 조건으로 삼거나, 혹은 너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사람의 뜻에 어긋날 때 하나님께 대항한다면, 너의 그런 태도는 진리에 맞지 않고 바른길이 아니다. 설령 너에게 수많은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너의 그런 태도와 삶의 방식은 바른길이 아니고 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측면이다. 세 번째 측면은 만약 네가 그런 태도를 고집한다면 영원히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영원히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네가 손해를 보고 피조물이 갖춰야 할 존엄과 본분을 잃게 된다. 네 번째 측면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네가 오로지 자신의 태도만을 지키고 ‘나는 이렇게 내 태도를 지킬 거야. 그 누구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어. 나는 내 것이 맞다고 생각해. 나는 이렇게 할 거야. 나는 내 태도를 고수하고 내 생각을 고수할 거야. 이게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일이야. 나는 마땅히 이렇게 요구해야 하고 나의 그런 태도를 지키고 고수해야 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고수한다면 자신에게 그 어떤 유익도 없다. 또한 하나님도 네가 고수하거나 그 태도를 계속 지킨다고 해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즉, 네가 그렇게 고집스러운 태도를 갖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태도를 절대 바꾸지는 않는다. 반대로, 네가 거역하고 계속 대항한 것으로 인해 이에 맞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너를 대할 것이다. 총 몇 가지가 있느냐? (네 가지입니다.) 이 네 가지 중에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느냐? 내용이 공허하거나 사람의 실제 상황에 부적합하고 생활 속 실제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있느냐? 공허한 이론뿐이고 실행의 길이 아닌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가 일상생활에서 직면하게 되는 일에 도움이 되느냐? (네.) 이 네 가지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느냐? (실행의 길입니다.) 너희가 이 네 가지를 모두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너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이 네 가지를 지키면 많은 시험에서 혹은 많은 사람, 일, 사물이 임했을 때 보호받을 수 있다. 네가 이러한 상태를 드러냈을 때, 이 몇 가지 측면의 진리를 생각하여 자신과 대조해 보고 이에 따라 실행해 보아라. 초반에 행할 수 없다면 어떡해야 하겠느냐? 그렇다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또한, 자신에게 어떤 타락된 상태가 있고, 어떤 타락된 성품이 드러나 실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순종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너의 상태를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측면의 일이든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네가 행하는 것은 고정관념과 상상이거나 거역과 대적이다. 이것은 100%이다. 간혹 표면적으로 봤을 때,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나쁜 일도 하지 않고 교란하거나 방해하지 않은 것 같지만, 네가 한 일이 반드시 진리에 맞는 것은 아니다. 간혹 네가 고정관념과 상상에 따라 어떠한 일을 했을 때, 교란하거나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진리에 맞지 않는다면, 네가 한 그 일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떠한 경우, 네가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고정관념과 상상에 따라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의 고정관념과 상상을 지키며, 그 고정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대하고 고정관념과 상상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할 것이고 하나님이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표면적으로는 네가 어떠한 나쁜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너의 내적 상태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금 우리가 언급한 내용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네가 고정관념을 품고 규정한다면,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때 너의 규정과 너의 고정관념과 상상은 바른 것이냐, 아니면 잘못된 것이냐? 분명 잘못된 것이다. 비록 네가 고정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거나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너의 상태는 네가 마음속으로 계속 하나님을 규정하고 오해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결론은 무엇이냐? 이 결론은 네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니냐? (맞습니다.) 어느 날 어떠한 일이 생겼을 때,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것과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너의 고정관념 때문에 너는 하나님이 행한 그 일에 아멘 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행한 그 일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거나 경외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너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이 생길 것이고, 심지어 작은 반발심까지 생기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서 너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 당신은 이렇게 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사람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주게 되고 사람의 뜻에 너무나 어긋나게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피조물을 대하시나요? 어떻게 이렇게 당신의 선민을 대하시나요? 당신의 이러한 행사를 보니 찬미할 수 없고 찬양의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은 매우 고통스럽고 처량함을 느낍니다. 제 마음속에서 한없이 숭상하던 하나님이 제가 의지할 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저의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그렇게 대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저의 하나님은 이렇게 냉혹하거나 잔인한 분이 아니십니다. 저의 하나님은 인류를 아기처럼 부드럽고 자상하게 돌보시기 때문에 사람은 그런 차갑고 냉정함이 아닌 넘치는 행복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이러한 원망이 생겨날 때, 너는 네 눈앞에 일어난 그 사실을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는 인정하지 않고 아멘 하지 않으며 찬양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러면 너의 그런 감정과 상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냐, 아니면 대항이냐? 당연히 그것은 참된 순종이 아니다. 거기에는 순종이 없고, 그저 원망과 반항 그리고 불복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란 말이냐? 아니다. 너는 마음속으로 갈등을 느낀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내가 왜 인정하지 못할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대중들이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사람의 뜻에 왜 이렇게 어긋날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살육이 가득하고 유혈 사태가 가득한 걸까?’ 그때 너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하나님이 현실 속에 참으로 존재하는 창조주와 갈등이 생기지 않겠느냐? 모순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너는 어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땅하냐? 그때 너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고정관념 속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느냐, 아니면 기성사실이 된 눈앞의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느냐? 주관적 바람을 보면, 사람은 기성사실이 된 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의 고정관념, 사람의 사욕, 사람의 감정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하나님을 숨기고 기성사실이 된 눈앞의 이 하나님을 억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은밀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은 여전히 창조주가 행한 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을 계속해서 숨기고 자신만의 좁은 세상에서 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상상한 그 하나님과 아주 즐겁게 교류하고 함께 지낸다. 그 사람에게 있어 참된 하나님은 아주 막연한 존재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가득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고 참된 하나님이야.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그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야.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나는 너무나 실망했고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알지 못할 때, 마음 깊은 곳의 고정관념이 하나님과 갈등이 생길 때 사람이 나타내고 드러내는 다양한 상태다. 그렇다면 이 상태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한 측면으로는 사람에게 타락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사람의 고정관념과 상상에 맞지 않는 사실이 나타났을 때, 사람의 꿈을 깨뜨리고 사람의 환상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사욕과 바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을 때,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무엇이냐? 도피하거나 타협하거나 보류하거나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는 양측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제 마음속의 그 하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있습니다. 눈앞에서 큰일을 하신 권능이 있는 하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모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라고 중용지도(中庸之道)의 자세를 취하며 말한다. 사람은 종종 이러한 상태 속에 살고 있다. 결국 자신이 상상한 하나님의 존재 때문에 자기도취에 빠지게 된다. 그 하나님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헌신적으로 바치며 사역한다. 심지어 모든 대가를 지불해 본분을 맡고,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자신의 일생을 바칠 수도 있다. 사람에게 어떤 모습이 보이고 어떤 상태가 나타나는지에 상관없이 마음속에 이러한 하나님이 존재하는 동시에 진정한 창조주에게 있어 사람이 한 모든 일은 선행일까, 아니면 악행일까? 순종일까, 아니면 대적일까? 분명히 선행이 아니므로 기념할 가치가 없다. 여기에는 분명히 진정한 순종이 없고 진정한 봉헌도 없으며, 대적과 거역 그리고 대항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이러한 상태가 있고 사람이 종종 이러한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꿈속에서 깨어났을 때, 실생활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실생활 속의 하나님이 행하는 일이 사람 마음속 필요와 정신적 필요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곳곳에서 상처를 입고 곳곳에서 냉정함을 느끼며 곳곳에서 사람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정말로 사랑이 맞으실까? 하나님께서 아직도 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실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걱정하고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고 하시는데, 뭘 보고 그렇다는 건가? 왜 나는 보이지 않지?’라고 의심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다! 사람은 종종 이러한 상태에서 살고 있기에 하나님과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이다. 글자나 이론 혹은 일부 장면을 보고 사람의 고정관념에 맞을 때, 사람은 ‘나의 이 하나님은 천지를 진동시킬 만한 대단한 일을 하셨어. 이 하나님이야말로 내가 참으로 믿어야 할 하나님이야. 이 하나님이야말로 나의 하나님이야. 그분이 바로 나의 창조주이시니 나는 그분의 피조물이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생활 속에서 너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질 때, 네 상상 속의 그 하나님이 너에게 언제나 도움을 줄 수 없고 너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때,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은 이로 인해 식어지며 심지어 사라지게 된다. 사람에게 있는 이러한 상태, 드러내고 보이는 모습은 어떻게 초래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사람이 이 창조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창조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갈등, 거리, 오해 배후의 각종 근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근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먼저 사람의 고정관념부터 해결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모든 사역을 체험하고 경험하며 찾고 헤아려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너에게 행한 모든 계획과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사람, 일, 사물에 완전히 순종해야 한다. 순종의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이 모든 것의 진리를 알고 깨닫기 위해서이다.

내가 말한 것들이 너희에게 깊지는 않으냐? 이해할 수 있느냐? 따라올 수 있느냐?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아마 이해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깨달았다고 볼 수 있느냐? 이론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진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은 것이 되고 받아들인 것이 될까? 이 문제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성찰해 보아야 한다. 무엇을 성찰해야 하느냐?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런 성품과 태도가 있는지,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과 오해가 있는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맞다. 이러한 것을 성찰해야 한다. 네가 어떤 것들을 드러냈는지, 머릿속에 어떤 상상과 고정관념들이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성찰이 잘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어렵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서 보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바로 너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이러한 측면의 성품과 상태를 드러낼 때, 너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면 된다. 자신의 상황과 대조하여 자신도 그런 고정관념과 상상이 있는지, 그런 상태가 있는지를 보면 된다. 만약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켜야 하느냐, 아니면 꺼내서 터놓고 분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두어야 하느냐? (분석하고 털어놓아야 합니다.) 꺼내서 분석해야 한다. 이를 통해 모두가 유익을 얻고 상태와 타락된 성품을 정확하게 알며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거기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러한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 고정관념을 분석하고 올바르지 않은 상태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상태를 분석하는 목적은 무엇을 위함이냐? (그런 고정관념과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왜 벗어나야 할까? 그 목적은 진리를 얻기 위함이다. 이 측면의 고정관념이 없어졌다고 해서 끝난 것이냐? 고정관념이 없어져도 네가 진리를 얻지 못하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허술하고 가장 어리석은 해결 방법인 것이다. 고정관념을 해결하는 목적은 네가 그 고정관념을 지키지 않고 그것의 잘못된 점을 깨닫고, 그것이 네가 갖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기 위함이다. 네가 그것을 버리고 그다음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 무엇이 진리인지를 능동적으로 구하여 긍정적인 것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네가 갖고 있어야 할 실행 원칙과 사상관점으로 삼는다면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얻은 것이다. 이 측면의 진리는 이 정도만 말하겠다. 그렇다면 이 측면의 진리를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그 일에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그 일에서 사람의 공통적인 고정관념은 무엇일까? 그 일을 보았을 때, 사람은 기분이 안 좋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사람을 사랑하시지? 그렇게 사랑하는 방식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어. 사람의 뜻에 너무나 어긋나! 이건 사랑이 아니야. 하나님이 그렇게 유대인을 대하셨다면 하나님께는 사랑이 없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한다. 이것은 사람의 고정관념이다. 그렇지? 그렇다면 이 고정관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떻게 분석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착수해야 할까?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그 일에 대한 사람의 고정관념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한 것입니다.) 맞다. 사람이 어떠한 일을 규정한 것이 고정관념이다. 그것은 진리에 맞지 않고 진리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은 무엇을 규정하였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맞다.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규정하였다. 하나님이 반드시 어떠한 방식으로 일을 해야만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이고, 하나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사람은 규정을 지었다. 이 규정이 바로 사람의 고정관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어떤 규정을 했느냐? 무엇을 규정했기에 사람이 그 일에서 나타낸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반발심이 생기게 된 것이냐? (사람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모든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사람의 고정관념과 상상 그리고 사람의 예측을 벗어나 그들을 쫓아내 망명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를 이해하지 못해 아주 큰 고정관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뜻이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여 복음을 확장하는 목적을 이룬 것에 대해 사람은 이의를 갖게 되었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의 그 방식에 대해 기분이 언짢고 마음이 불편해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고정관념이 아니냐? 사람이 생각하는 ‘마땅치 않다’는 것은 규정이 아니냐? 네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너는 무엇에 근거해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그렇게 하였음에도 네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설마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냐? 네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한 것이 설마 잘못된 것이고 진리에 맞지 않는 것이란 말이냐? 이는 사람의 어리석은 부분이 아니냐? 사람은 어리석고 교만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고정관념이라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부분이 잘못된 것이냐? (사람은 교만하여 자신의 상상과 고정관념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 사람 자신의 요구에 맞지 않으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언짢은 기분을 느낍니다.) 이렇게 된 일이 맞지 않으냐? 보아라. 너희가 사실에 임하여 그것을 꺼내 분석할 때, 힘에 부친 느낌이 든다. 자신이 평소에 깨달은 그 도리들을 내놓자니 상황에 맞지 않고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것 같고, 그냥 막 얘기하자니 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것을 말하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말을 하지 못한다. 이는 어떤 문제이냐? (실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맞다. 실제가 없는 것이다. 실제가 없으면 일이 임했을 때 멍해지게 된다. 도리를 말할 때는 사람들이 모두 큰소리치며 거침없이 말한다. 영이 통하지 않는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다가 실제적인 일이 임하면 자기 자신도 그런 쓸데없는 말들이 아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대담하게 말하지 못한다. 어떤 측면의 진리를 말해도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도리들을 야바위하듯 다시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을 했다가 적합하지 않으면 창피를 당하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진리를 참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방금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을 가지고 분석해 보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그런 사역 방식에 고정관념과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아멘 할 수 없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러면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내가 가장 간단한 방법이자 최고의 방법을 알려 주겠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들어 보고 평소에 너희에게 닥친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보아라. 가장 간단한 그 방법을 통해 너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알아야 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최고의 원칙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기도 하다. 바로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하는 방법은 완전히 자신의 경영 계획에 근거하고 자신의 필요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 누구의 자문도 필요치 않고 그 누구의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행하며 피조물을 대한다. 그는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대하고 싶은 대로 대한다.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대하든 모두 원칙에 부합되고, 창조주가 일하는 원칙에 부합된다. 피조물은 마땅히 거기에 순종해야지 어떠한 선택도 있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창조주는 영원히 창조주라는 점이다. 그에게는 모든 피조물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주재할 권력과 자격이 있다. 이유가 필요치 않다. 이것이 바로 그의 권세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은 어떠할까? 창조주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창조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권력과 자격을 갖춘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창조주의 주재와 섭리에 따를지를 선택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 역시 하나도 없다. 창조주의 주재와 계획대로 자신이 어떻게 어떻게 따르겠다고 선택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 역시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진리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든 피조물인 인류가 유일하게 할 일은 창조주가 행하는 이러한 사실에서 찾고 순종하고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최종적으로 창조주는 자신의 경영 계획을 이루고 자신의 역사를 성취하게 된다. 자신의 경영 계획을 이루는 데 있어 아무 방해 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한편 피조물은 창조주의 주재와 계획을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주재와 계획에 순종했기 때문에 진리를 얻고 창조주의 뜻을 깨달으며 창조주의 성품을 알게 된다. 이 속에 진리가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너희에게 또 하나 알려 줄 것이 있다. 창조주가 무엇을 하고 어떠한 태도를 보이든, 큰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그는 창조주라는 것이다. 반면 피조물인 인류와 다른 피조물은 어떨까? 무엇을 하든, 얼마나 큰 재능과 은사가 있든 피조물인 것이다. 피조물인 인류는 창조주의 은혜와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고 창조주의 긍휼과 자비와 은총을 얼마나 많이 받든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자신이 고급 피조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너에게 아무리 은혜를 베풀고 은사를 주고, 너에게 일찍이 은총을 베풀어 주고 특별한 재능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의 밑천이 아니다. 네가 피조물이면 영원한 피조물인 것이다. 너는 영원히 ‘나는 하나님 품속의 아기라서 하나님은 내 뺨을 치지 않으실 거야. 하나님은 영원히 나를 사랑으로 대하실 거고,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 또 가만히 나를 어루만지시고, 작고 낮은 소리로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해 주실 거야.’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바꿔 말해, 너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다. 창조주의 눈에 너는 다른 피조물과 같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너를 쓸 것이고, 마음대로 너를 조종할 것이며, 마음대로 너를 사람, 일, 사물 속에 배치해 하나하나의 역할을 이행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인식이고 이성이다. 알겠느냐? 그러면 너희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어딘지, 여태껏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은 어딘지 잘 생각해 보아라. 이 말을 듣고 나서 잘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될 것이고, 또 하나님과 가장 올바른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똑바로 설 수 있으며 자신의 본분 역시 잘할 수 있다.

이 말을 다 듣고 나서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을까? 혹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예전에 사람은 개미와 같고 하나님의 눈에 구더기만도 못하다는 말을 종종 언급하셨었는데, 그러고 보니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대하신다는 말이 정말 이론이 아니라 사실인 것 같네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친밀하거나 가까운 분은 아니네요.” 사람의 마음이 차가워졌다. 그럼 사람의 마음이 차가워지는 게 좋을까, 아니면 계속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는 게 좋을까? (차가워지는 게 좋습니다.) 차가우면 좋으냐? 이것은 사람의 뜨거운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데, 열기를 좀 식혀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이성을 갖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정상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갖춰야 할 이성은 바로 매사에 진리를 원칙으로, 일을 대할 때 진리를 근거로 하고, 일을 할 때에도 진리를 원칙과 기초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것이다. 바꿔 말해, 사람은 늘 마음속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적 관계를 맺고 있고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어떠하냐? (좋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좋지 않다. 어떤 면에서 좋지 않을까?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품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오해하거나 집착한다고 해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태도를 바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그래 왔듯이 사람에게 원칙에 따라 일을 하며 인류의 삶을 주재하고 계획한다. 그러면 사람은 어떠할까? 큰 고통을 받게 되고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친한 척하려고 하고 하나님과 육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감정을 드러내고 흥정을 한다. 또한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내세우고 자신이 기울였던 노력과 자신의 빛났던 과거를 언급한다. 그야말로 이러저러한 이유를 다 대는 것이다. 사람이 계속 이렇게 하면서 과연 진리를 얻을 수 있을까? 네가 늘 관점을 바로잡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에 똑바로 서지 못한 채 하나님이 준 위치에 서지 않고 늘 너무 높은 곳만 바라본다면 최후에는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정확하게 대하지 못하고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너는 늘 연단과 고통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자신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염려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결국 임한 사실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고는 좌절하고 충격을 받는다. 사실을 보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야말로 김칫국부터 마신 것과 같다. 그러다 또 충격을 받고 한참을 불평하고 억울해하며 좌절감에 빠진다. 이런 식의 고생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자신의 상상과 고정관념을 갖기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최대의 문제다. 반드시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람이 실생활 속에서 드러내는 태도들 중 어떤 부분이 방금 언급했던 상황과 일치할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정말 눈치 빠르고 영리하며, 의사 표현을 뚜렷하게 할 줄 알고, 머리가 좋고, 기본 소양을 갖췄으며, 언변이 좋다. 이런 사람은 상면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상면에서 기용할 수도 있다. 때로는 상면의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 만족감을 느낀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좋은 사람이야! 하나님은 나를 제일 사랑하시고 나를 정말 좋아하셔!’ 이런 생각은 어떠하냐? 참으로 유치하다! 제삼자가 보고는 ‘저 사람, 정말 말을 잘해. 말만 하면 하나님의 기쁨을 얻고, 입만 열면 핵심을 꼭 짚어 낸단 말이야. 활발한 데다 언변도 좋고 머리가 영리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거야. 난 말주변도 없고 지적인 수준도 낮고 은사도 많이 없고 아무 재능도 없는 데다 둔하기 짝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분명 싫어하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아니냐? 하나님에 대한 이런 오해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실행하게 될까? 언변이 좋고 겉치레 식 일을 곧잘 하는 사람을 보면 그런 길로 가게 되고, 그런 길을 향해 추구하게 된다. 이것은 방향을 잃은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방향을 향해 추구하는 것이 바른길일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일까?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들 속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지 않느냐? 사람들은 이런 일들에 쉽게 속박받거나 규제받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교통하고 있는 말씀과 내용은 너희가 평상시 추구하는 것과 개인적 진입에 있어서 도움이 될까? (됩니다.) 어떤 도움이 될까?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적어지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아 하나님이 배치하신 환경을 정확히 대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상상 속에서 살지 않게 되고 오해와 원망 속에서 살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오해와 원망을 해결하고 세상의 처세 방식과 원칙을 해결해 진리로 대체하게 된다. 하나님 집에서,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고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곳에서 진리를 원칙과 기초로 삼아야 한다. 만일 이러한 생활 환경에서 산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다. 사람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가 되면 사람과 사람이 함께 지내기가 훨씬 단순해지고 편해진다. 그래야 사람은 진정으로 해방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너희는 지금 이런 경지에 이르렀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살아가느냐? (사탄의 철학과 타락된 성품, 그리고 상상과 고정관념입니다.) 아직도 처세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질투로 다투는 생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완전히 사탄의 타락된 성품이 권세를 잡고 있고 너희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의 삶이 무척 피곤한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하나님 집에서 살고 있는데, 왜 세상에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까? 여전히 힘들어. 늘 조심하고 눈치를 봐야 하니까!’라는 느낌이 든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일을 처리하는 원칙, 일을 바라보는 관점, 일 처리 방식 모두가 올바르지 않고, 진리의 원칙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기초가 있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무엇부터 먼저 해결해야 할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와 고정관념과 상상입니다.) 우선적으로 이것들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사상과 마음과 생각 그리고 인식과 관점에서부터 분석하고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위의 이런 일들을 대함에 있어서 어떤 관점을 갖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어떤 원칙을 갖춰야 할지 찾아야 합니다.) 맞다. 이것은 실행과 관련된다. 실생활 속에서 사람이 함께 지내려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어야 한다. 사람마다 피조물의 위치와 지위에 바로 서서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 사람 사이에 높고 낮음의 구분 없이 누구든 진리의 원칙에 근거해 일을 처리해야 한다. 처세 철학을 벗어 버리고 사탄의 일 처리 원칙과 방식을 벗어 버려야 한다. 진리의 원칙에 근거해 사람을 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진리의 원칙에 근거해 자신을 대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먼저 너희 가운데 이런 기풍이 형성돼야 교회 전체 그리고 형제자매 가운데서 하나님 집에 마땅히 있어야 하고 형제자매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기풍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스스로나 다른 사람 모두 구속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단속하지도 않으면서 일 처리 방식에 따라 너를 대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행 부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 외에 더 깊은 것은 바로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다. 간혹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다른 사람은 깨우쳐 주고 너는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바로 질투하고 언짢아하게 된다. ‘왜 저 사람한테는 깨우쳐 주시고 나한테는 빛을 비춰 주시지 않는 걸까? 무슨 근거로 이번에 저 사람은 위신을 세워 주고 나설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 나는 어째서 그 은혜를 얻지 못하는 걸까?’ 이것은 또 맞서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그 사람을 깨우치면 안 된다는 것이냐? 왜 모든 것에서 다 너의 위신을 세워 주어야 한단 말이냐? 왜 어떤 일이든 다 너를 나서게 해 주어야 한단 말이냐? 이것은 너의 무리한 요구가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일을 너는 어떻게 해결하겠느냐? 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깨우쳐 주셨으니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야겠어. 하나님이 누구에게 깨우쳐 주시든, 그 일이 누가 한 일이든 모두 옳고 하나님이 하신 거야. 하나님 집을 위해 하는 것으로 다 하나님의 역사야. 나는 전력을 다해 협력하고 지지하고 밀어줘야겠어.’ 이것이 네가 해야 할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네가 이런 깨우침을 얻었다면 그 깨우침을 다른 사람도 듣고 서로 알게 해야 한다. “이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깨우쳐 주셨어요.” 이렇게 사람들이 알게 하고, 한 단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다른 사람이 얻은 깨우침이라고 해서 네가 입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비열한 행위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비열한 행위는 타락된 성품이냐, 아니면 진리냐? (타락된 성품입니다.) 타락된 성품은 해결해야 한다. 만일 진리라면 고수하고 지켜야 하지만 타락된 성품이라면 해결하고 배반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실생활 속에서 분명 적잖게 맞닥뜨리고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너희는 이런 문제를 진리에 근거해 실행하고 진리로 해결할 수 있느냐? ‘어째서 다른 사람은 늘 앞에 나서는데 나는 그렇지 못할까?’ 때로 사람들은 이런 갈등을 겪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일은 종종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런 일에 마주쳤을 때 자신의 생각이나 무의식 중에 드러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문제가 있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지 않느냐? (인식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성품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이기적이고 비열한 좋지 않은 모습이다. 그렇지? 어떤 사람들은 인식했으면서 ‘알고는 있지만 상관 안 할래. 나는 질투가 나고 마음이 불편하니까. 당신 원하는 대로 해. 막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깨우침을 밀어주지도 못하겠고 아멘도 못하겠어. 당신의 깨우침이 누구한테서 온 건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당신의 개인적인 작은 은사일지도 몰라. 하나님과 관계없고, 성령의 깨우침도 아니야.’라고 한다. 그런 뒤에 협력하지도 않는다. 이런 행동은 어떠하냐? (좋지 않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고 진리를 실행한다고 합니까? 제가 인식했다면 그건 진리를 실행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인식하고는 사람이 다 매우 이기적이고 비열해 다른 사람이 좋게 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잘되기만 하면 하나님이 행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 것이라고 인식했을지라도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을 리 없잖아? 어떻게 그 사람의 위신은 세워 주면서 나한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항상 내 위신을 세워 주시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생기고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그리고 마음이 불편해지고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모두 패역한 성품이다. 지금 이런 일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 거역과 교만한 성품이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핵심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핵심은 무엇일까? 네가 이 일을 어떻게 대하고, 네가 드러낸, 스스로 의식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타락된 성품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핵심이다. 네가 맞닥뜨린 이 일을 어떻게 실행하고, 어떤 길을 선택해 네게 주어진 이 환경을 대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때는 네가 하나님께 대답을 할 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일에 대한 너의 미온적인 태도나 묵인을 보려는 것일까? 네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며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우선, 그런 것이 나오면 하나님 앞에 내놓고 그것이 어떤 면의 타락된 성품에 속하는지 분석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징계하고 책망해 달라고 구한 뒤 그런 것을 배반해야 합니다.) 우선, 너는 자신이 드러낸 것과 마음속의 생각이나 반응을 부인하고 정죄해야 한다. 다음으로, 네가 속으로 질투를 하든 서운하든 원망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은 너의 행동을 본다. 너는 그런 것에 속박받을 필요가 없다.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일을 진지하게 대해야겠어. 그게 내 본분이니까.’ 끝도 없이 분석할 필요는 없다. ‘왜 질투하는 거지? 질투가 왜 이렇게 심할까? 마음을 열고 교통하고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기자. 마음이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진 거지? 하나님께 내 생각을 정리하시도록 맡기고 징계해 달라고 해야지. 입에 물집이 생기고 머리에 부스럼이 나게 해 달라고 말이야.’ 이렇게 작은 일을 공연히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 네가 그것을 배반하고 속박받지 않으면 된다.

이방인들 사이에 있을 때 사람은 질투하고 미워한다. 사람은 질투와 증오의 기반 위에서 일을 하게 되고, 자신의 질투와 증오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 일을 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의 이익을 위주로 하여 자신을 위해 말하고 상대방을 공격한다. 또한 교묘하게 꾸민 말로 상대방을 기만하면서 상대방이 해낸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더욱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 상대방이 한 것을 망가뜨린다. 혹은 미혹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이 스스로 한 것을 부인하게 만들거나 배후에서 상대방의 것을 몰래 이용하기도 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그 사람이 일을 하는 원칙이나 방식은 무엇일까?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이런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진리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타락된 성품입니다.) 그 사람의 이런 동기와 근원은 완전히 사탄의 타락된 성품에서 나온 것이다. 진리나 인성이 조금도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의 이익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어떻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방인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사람이 드러내는 것, 태도, 감정은 모두 같다.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에 행동에 구속을 받고 규범적이다. 구속을 받아도 그 사람의 내면은 비어 있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있을 것이다. 그가 일을 처리하는 원칙, 방향, 동기, 근원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데, 자신의 본분을 잘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기존의 생각과 방법을 버린다. 이것이 다른 점이 아니냐? (맞습니다.) 기존에 하던 수단대로 하지 않고 기존에 하던 일 처리 방식대로 하지 않는다. 바꿔 말해, 그는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를 구하며, 양심의 평안을 구한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이성적이고 인성과 이성 그리고 진리에 부합된다. 이렇게 해서 맺는 열매는 무엇일까? 어떤 효과를 얻게 될까? 자신의 육체적 이익을 만족시키는 것일까? 개인적 욕심을 만족시키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피조물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것이 바로 피조물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이고 모습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 아니냐? 이 두 가지 삶의 방식 중 어느 쪽이 사람답고 기본적인 사람의 모습일까? 어느 쪽이 피조물이 해야 할 것이고 살아야 할 모습일까? (두 번째입니다.) 어느 쪽이 사람이 하는 것이고 어느 쪽이 귀신이 하는 것일까? (후자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전자가 귀신이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깨달았다. 그렇지? 이런 방식과 원칙대로 실행하면 사람은 점점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게 된다.

이런 것은 말로는 매우 쉽고 간단하지만 행하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다. 사람은 종종 어려움과 곤란에 봉착하고 각기 다른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각자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 의지해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하든 어떤 면의 진리를 말하든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진리를 실행하여 성품의 변화를 얻는 것입니다.) 최종 목표는 다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일이나 진리가 하나님을 아는 이상 방면에 관련된 것이든, 아니면 사람의 타락된 성품을 폭로하는 방면에 관련된 것이든, 사람의 고정관념과 상상 방면에 관련된 것이든, 최종적인 목표와 목적은 다 사람이 실생활 속에서 실행의 길을 얻기 위함이다. 실생활 속에서 실행할 때 진리의 원칙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 실행을 위한 것이다. 내 말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너희에게 빈말을 하지 말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네가 뱉은 어떤 말은 실생활 속에서 쓸모없는 말이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네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그 말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된다. 그 말은 빈말이다. 너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쓸모없는 말이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너희 대다수가 지금까지 믿음을 지켜 오면서 무엇이 진리의 실제인지 깨닫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까지도 영이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어떤 말이 실제적인 말이고 어떤 말이 빈말이고 구호이고 도리인지 모른다. 너희 스스로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때로는 도리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알지만 실생활에서는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최근에 가족이 병에 걸렸는데, 그런 일이 생기니 처음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모든 일은 다 하나님 손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서 검사를 한 뒤 의사가 상황이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고 하고 치료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진실로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하기 쉽다.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언제든 생명의 위험이 닥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마음이 있다면 우선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병을 주면 사람은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느끼겠지만 실제로 사람이 얻는 것은 은혜이지 병이 아니다. 그래서 먼저 너는 이 일을 제대로 알고 인정해야 한다. 이 일을 정확하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병에 걸리면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자주 오게 된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해내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더 조심히 더욱더 진지하게 자신의 본분을 대한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호이지 멍에가 아니다. 이는 소극적인 면에서 병을 대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모든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외적으로 이미 죽음에 이를 정도의 병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기에 너의 수명이 아직 다한 것이 아니고 너의 사명이 완수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너를 데려가지 않는다. 네가 기도하지 않고 보양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병을 대하면서 심각하게 대하지 않고 치료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네가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면 죽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너에게 할 당부가 있다면 너의 사명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죽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최후의 일각까지 살게 할 것이다. 너에게 이런 믿음이 있느냐?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너는 늘 조심스럽게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저는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저는 충성하고 싶습니다. 여한을 남기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싶습니다!” 너는 이런 구실과 이런 방식으로 늘 하나님과 거래한다. 사실 네가 거래를 하든 너의 병을 아예 대수롭지 않게 여기든 다 소용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본분을 할 수 있고 아직 쓸모가 있고 너를 아직 더 써야 한다면 반드시 너를 사용할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너의 수명을 정해 놓았기 때문에 죽을 때가 아니라면 죽을 리가 없는 것이다. 너에게 이런 믿음이 있느냐? 만일 네가 도리상으로만 인정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너의 방법인 것이다. 네가 만일 마음 깊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하며 하나님이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확인한다면 그런 너의 방법이나 실행법에 상당한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사람이 병에 걸리든 안 걸리든 생활 속에서 건강에 대한 상식을 일부 갖추고 있어야 한다. 건강에 대한 상식은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갖춰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본능이다. 사람의 자유의지에는 당연히 이런 것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날씨가 추울 때는 너무 차가운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이가 안 좋거나 속이 좋지 않으면 너무 찬 음식과 날 음식을 삼가야 한다. 날씨가 더울 때는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자유의지 안에 반드시 갖춰야 할 이성이고 상식이다. 지금 네가 병에 걸렸다면 당연히 이런 상식을 갖추면서 병을 대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반드시 취해야 할 행동이다. 하지만 네가 병을 대하는 이런 방식은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준 수명에 도전하기 위함도 아니고,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준 수명까지 사는 삶을 보장하기 위함도 아니다. 알겠느냐? 이 말에 어떤 의미가 내포돼 있을까? 소극적인 측면에서 네가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병을 방치하더라도 해내야 할 본분은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병에 걸린 상태에서 다른 사람보다 그저 조금 더 쉴 뿐, 본분을 지체하지 않고 한다고 해서 병이 악화될까? 악화되지 않고 죽게 되지도 않는다. 여기에 어떤 진리가 있을까?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는지를 봐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해 준 너의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너는 병에 걸려도 죽지 않는다. 만일 아직 죽을 정도로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너의 수명이 다했다면 하나님은 언제든 너를 데려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정한 대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된다. 병에 걸리면 적절하게 치료하고 약을 먹고 보건 운동을 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면서 너는 사람의 목숨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사람의 수명도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점을 마음속으로 인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한 운명을 뛰어넘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이런 인지도 못한다면 너는 진실로 믿는 사람이 아니고, 너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도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작은 병에 걸리면 갖가지 방법을 생각해 이런저런 치료를 시도하는데, 어떻게 해도 치료가 되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심각해진다. 하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와서 왜 이런 병에 걸렸는지 구하지 않고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않는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이 방법 저 방법 찾아본다. 결국 아무리 많은 방법을 써도 병은 낫지 않는다. 그러다 방치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낫는다. 또 어떤 사람은 사소한 병에 걸리면 “괜찮아. 치료할 필요 없어. 나는 하나님만 믿어.”라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린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이 사람은 세상에서의 사명이 끝나서 하나님이 데려간 것이다.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죽는 사람이 숱하게 많다. 큰 병에 걸렸는데 죽지 않고 10년, 20년, 30년을 사는 사람도 많다. 바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다. 자신이 병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한 분석은 소용없다. 너는 그 일을 마음 편하게 대하여라. 만일 그 기간에 병이 심해졌다면 약을 먹으면서 병을 잘 다스려야 하고 필요한 약을 먹고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마음을 편하게 먹어라. 이런 태도는 어떠냐?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갖춘 태도다. 너는 약을 먹지도 않고 주사도 맞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은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무작정 기도만 한다. “하나님, 저는 본분을 잘해야 합니다. 저는 제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소원과 제 결심이 있습니다. 저를 끝까지 살게 해 주세요. 저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세요. 당신만이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제가 죽으면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없습니다. 저는 피조물의 본분을 하기 원합니다. 당신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까지 당신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당신이 영광 받는 날을 보기를 원합니다.” 표면적으로 네가 약도 먹지 않고 주사도 맞지 않는 것은 마치 네가 매우 굳세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너의 그런 믿음은 겨자씨보다 작다. 너는 죽게 될까 두려워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저버린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은 어떻게 초래된 것일까?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하는 태도와 원칙과 방법에 대해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옹졸한 마음과 고정관념과 상상만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추측한다. 하나님이 너를 살게 하면 네가 얼마나 큰 병에 걸리든 상관없다. 하나님이 너를 살게 하지 않는다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네가 죽을 때가 되면 죽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앎이고 믿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병에 걸리게 하는 것은 우연일까? (아닙니다.) 우연이 아니고 사람의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다. 사람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너는 병에 걸린다고 해도 회피하지 말고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해도 구하지 말라. 그 모든 것은 창조주의 손에 있다. 사람은 순리에 따를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을 두고 순리라고 할까? 모든 순리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가족 유전병으로 아들도 병에 걸리고 딸도 병에 걸렸는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게 된 것처럼 어쩌다가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살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한 사명이 완수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너는 너의 사명을 잘 완수해야 한다. 주어진 그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면서 잘해야 한다. 병에 걸렸다고 회피하지 말고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구하지 말라. 어떤 일은 네가 구한다고 생기지 않고 또 어떤 일은 네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려고 결심한 일은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기도했다. 그 본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느냐?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42)) 피조된 인류의 일원으로서 사람에게는 이렇게 구하는 과정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정상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네가 어떻게 구하든, 네가 구하는 과정이 얼마나 길고 얼마나 고생스럽고 얼마나 힘겹든, 처음부터 하려고 결심한 하나님의 뜻은 바뀐 적도 없고 바꾸려고 결정한 일도 없다. 사람은 구할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실의 진상을 이해하고 깨닫고 정확히 아는 과정을 허락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결정도 바꾼 적이 없다. 그래서 너는 오늘 너에게 어떤 일이 닥쳤다면 그것을 요행이나 우연으로 생각하지 말라. 오늘 큰 재난을 겪고도 살아남은 것을 요행이나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거대한 것이든 피조된 인류이든, 미생물이든 모든 피조물에 대해 정한 바가 있고 계획한 바가 있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가 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어떤 힘든 일을 했거나 무언가를 잘못 먹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원인은 찾지 말라. 이것은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태도다. 마땅히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해 준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을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한다. 객관적인 원인을 찾거나 과거의 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다. 적극적인 면에서 창조주가 너에게 이런 일이 닥치게 했을 때 그의 뜻과 태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네가 그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것이 바로 창조주가 너보고 가지라는 태도이고 네가 피조물로서 갖춰야 할 태도다. 너는 반드시 이런 길을 찾아야 한다. 누구의 삶도 우연이 아니고 필연도 아니다. 모두 창조주가 계획한 것으로서 그 속에 창조주의 뜻과 주재가 내포돼 있다. 어떤 일이든 공허한 것이 없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진리가 다 공허하다고 생각하느냐? 공허하지 않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할 때 고정관념과 상상이 생긴다. 사람은 그런 고정관념과 상상이 아주 맞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아마 맞을 거야. 내 믿음은 아주 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그런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너의 그런 생각이나 방법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네가 스스로 아주 맞다고 생각할 때 사실 너는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네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결국은 다 창조주의 주재와 계획이고 창조주가 정해 놓은 것이라고 느끼게 될 때면 네가 직면한 모든 것이 정말로 있어야 할 효과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이런 일들에서 사람은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본분을 맡도록 정하셨으니 나는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분명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하나님은 나를 떠나실 리 없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은 틀렸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든 거기에는 모두 절차가 있다. 무엇을 절차라고 할까? 바로 그가 한 사람에게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는지, 그 사람의 평생의 사명이 얼마나 되는지를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너의 수명을 정해 놓았다. 네 평생의 태도가 나쁘다고 해서 너의 수명을 앞당겨 끝내거나 너의 평생의 태도가 좋다고 해서 너에게 몇 년의 목숨을 더 연장해 주지도 않는다. 이것이 절차다. 알겠느냐? 세상에서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 나쁜 사람들이 세상에 막대한 해를 가하고 또 어느 한 순간 사람들에게 상당히 많은 해를 끼치면 어떤 사람들은 “하늘도 무심하지. 어째서 저런 사람을 멸하지 않는 걸까?”라고 말한다. 여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너는 알고 있느냐? 그 이면에 어떤 근본적 원인이 있을까? 그 근본적 원인은 바로 이렇다. 긍정적인 인물은 긍정적 역할을 하고 부정적인 인물은 부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사명이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다. 모든 사람의 생과 사는 하나님이 일찌감치 정해 놓았기에 하나님은 절대 망치지 않는다. 태어날 때는 일분일초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시간대로 태어나고, 죽을 때, 즉 너의 영혼을 데려갈 때도 일분일초의 오차도 없다. 하나님은 한 개인이 인류에 대한 공헌이 크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몇 년의 수명을 더 연장해 주지 않고, 그 사람의 원래 정해진 수명을 변경시켜 20년, 30년을 더 살게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이렇게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수명이 3월 21일까지인데, 그 사람이 인류에게 끼치는 해가 너무 막대하다고 해서 앞당겨 한 달 전에 죽게 하는 일 역시나 하나님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것을 절차라고 하고 하늘의 규칙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깨뜨린 적이 없다.

이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정하고 계획한 일은 하나님 스스로 망친 적이 없고 바꾼 적도 없다. 이것이 사실이다. 그 밖에도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볼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의 탄생과 등장 그리고 수명과 결말, 그 일생의 사명과 전체 인류 가운데서 맡은 역할도 하나님이 전부 계획해 놓은 것이다. 사람은 그것을 바꾸려고 해도 전혀 바꿀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의 등장과 그 수명이 언제 끝나는지, 그리고 그 평생의 사명, 이 모든 법칙과 정해진 내용은 하나님이 각 천체의 운행 궤적을 정해 놓은 것과 같다. 하나님은 각 천체가 어떤 궤도에서 돌고 몇 년을 돌며 어떻게 돌고 어떤 법칙을 따를지 정해 놓았다. 그것들은 수천 년, 수만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권세이다. 그러기에 창조주라고 한다. 그렇다면 작디작은 피조된 인류는 어떠할까? 사람은 둘째 치고 개 한 마리의 수명이 12년 3개월이라면 12년 3개월을 살고 개는 죽는다. 죽은 뒤에 또 환생한다. 이 시간이 변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개는 죽는다. 어떤 강아지는 자기가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는 죽기 전에 주인의 팔을 베고 부비적거리며 주인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런 뒤 이튿날 죽는다. 만물 중에 말을 할 줄 모르고 언어가 없는 것들에게도 감지 능력이 있다. 그래서 죽을 때를 안다. 작은 동물의 수명도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은 변경시키지 못한다. 하물며 인류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구하든 절대로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사람의 수명이다. 사람 일생의 화복과 죽는 때는 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이런저런 일에 대해 깨우쳐 달라고 구하고, 어떤 환경에 있을 때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얻게 해 달라고 구할 수는 있다. 그리고 진리와 생명 진입과 생명 성품 변화를 위해 무언가를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죽게 해 달라든지, 몇 살까지 살게 해 달라고는 절대로 구해서는 안 된다. 네가 일생 동안 얼마나 고생할지, 얼마나 복을 누릴지, 그런 것은 절대 구하지 말라. 왜일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에 구한다 해도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해 놓았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지 않기에 네가 구해도 소용없고 거부해도 소용없다. 구해 온다 한들 소용없으니 구하지 말라. 만일 네가 그를 창조주로 인정하고 너의 주재자로 인정하며 너의 하나님, 너의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절대 그런 일을 구하지 말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말하고 있을까? 주기도문에서 어떻게 말씀했느냐?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무엇을 구하라고 했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고, 사명을 욕되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부여한 목숨에 떳떳하고 하나님이 준 이번 생에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헛살지 말아야 한다. 이번 생에 창조주를 알고 피조물이 반드시 갖춰야 할 모습을 살아내 창조주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마땅히 이런 것을 구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구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구해서는 안 되는지, 어떤 것을 구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고 어떤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네가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네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너는 먼저 마음속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네가 구한 일들이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라면 네가 구하든 구하지 않든 별로 소용없는 일이다. 네가 그것을 구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렇게 하면 어리석은 짓이 아니냐?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네게 80살까지 살게 했는데 네가 굳이 100살까지 살겠다고 하고, 하나님이 네게 30살까지 살게 했는데 네가 60살까지 살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거역하는 것이 아니냐? 대항하는 것이 아니냐?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하나님을 아는 것, 생명 진입, 성품 변화, 사람의 각종 상황, 사람의 수많은 어리석음과 상상과 고정관념, 이런 일들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한마디로 말해, 너희에게 한 가지 일을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은 다 실행을 위한 것이지 너희에게 신학 이론과 신학 지식을 배우고 갖추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라는 것이다. 네가 하는 말들은 너의 실행과 무관한 빈말이니 절대 그런 말은 하지 말라. 만일 그런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다면 너는 최대한 적게 말하고 점차 실제적인 말을 하여라. 지금 너희가 한 말을 들어 보면, 어떤 사람들은 좀 깨달았구나. 처음 너희와 대화할 때는 무척 힘이 들고 불편하였다. 너희가 처음에는 영이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엉터리로 되는대로 도리만 말하고 헛소리만 늘어놓고 쓸데없이 구호만 외쳐 너무 불편하였다. 지금 너희 몇몇의 말을 다시 들어 보니 조금은 누림이 있구나. 왜 그럴까?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실속도 좀 있고 마음속으로 무엇이 실제인지 조금이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큰소리치거나 허풍을 떨지 않고 실속 있게 이치에 맞는 말을 할 수 있으니 듣기에 편하다. 하지만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 비결이 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좋고 아름답다고 해도 그 말씀을 따라하지 말고 말씀 속에서 음미해야 한다. ‘이렇게 좋은 말씀을 주셨는데, 하나님은 내게 뭘 하라고 하시는 걸까? 무엇에 이르라고 하시는 걸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것은 실제와 관련된다. 그 말씀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 말씀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그 말씀에서 어떻게 실행의 방향과 원칙과 길을 찾을 것인지 이런 것에 관련되면 바로 실제에 근접하게 되고 실제가 있게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만일 네가 늘 그 말씀이 좋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도리로 삼아 전파하고, 주관 없이 전하고 흉내만 낸다면 그 말씀은 영영 너의 실제가 되지 못한다. 너는 영원히 공허하고 가련한 삶을 살게 된다. 다른 사람이 너를 봐도 불편하고 네가 다른 사람을 봐도 껄끄러워진다. 그렇지 않겠느냐? 먼저, 너는 실제적인 말,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실제적인 말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마음을 활짝 열어 솔직한 말을 하고 실속 있는 말을 하고 일상적인 대화나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너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함께 지내는 방식은 점차 사람들에게 유익이나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네가 늘 구호만 외치면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을수록 불편함을 느끼고 너와 점차 대화를 나누지 않고 너를 보면 피하게 될 것이다. 네가 “왜 피하죠?”라고 물으면 상대방은 “당신 말을 이해 못 하겠어요. 수준이 너무 높아서 못 따라가겠어요!”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너에게 이런 평가를 한다는 것은 너와 교제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냐? 너희는 나의 말을 듣기 원하느냐? (원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듣기 원하느냐? 심오하고 고상한 말을 듣고 싶으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떤 말을 듣기 원하느냐? 어떤 부분의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에 맞고 가장 듣고 싶었느냐? (우리의 타락된 성품을 놓고 우리에게 실행의 길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말은 듣기에 수준이 높으냐? (높지 않습니다.) 수준 높은 말도 아닌데 왜 듣고 싶은 것이냐? 무슨 고상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않아도 일단 그 말을 듣고 나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바르지 않은 내적 상태나 타락된 상황에 대조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내면에 여유가 생기고 길과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실생활 속에서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이런 말씀을 생각해 보고 조금이나마 적용할 수 있다면 이런 것을 두고 실용적이라고 한다. 너희는 마땅히 이런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네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교통할 때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실용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 말이 듣기에는 단순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다 듣고 난 뒤에는 쓸모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얼마나 좋으냐? 만일 사람들이 어떤 일에 직면해 너를 찾아와 교통해 달라고 할 때, 네가 “그게 무슨 어려운 문제예요? 일에 부딪히면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잖아요.”라고 하거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정말 간단한 문제예요.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면 되잖아요.”라고 한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전부 쓸데없는 말로 여기고 잠자코 있다가 가 버릴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는 너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 후로 너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한다. ‘나는 아주 진지하게 대했는데, 어째서 매번 냉대를 받는 거지? 사람들은 왜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걸까?’ 이유가 무엇일까? 네가 한 말은 옳기는 하지만 그저 맞는 도리일 뿐이고,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맞닥뜨린 어려움을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의 말은 내가 직면한 어려움과 완전히 무관해요. 물론 당신이 한 말은 맞는데, 내가 직면한 일에서는 당신의 말이 도리여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네요.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당신이 한 말은 저도 알고 있어요.” 문제에 봉착하면 무척 골치가 아프다. 얼마나 난처하냐! 이제는 너희도 어떤 일에 부닥쳤을 때 도리만 말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니와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상대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스스로도 이런 어려움에 봉착하고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모순되는 점은 어디에 있을까?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는 자신이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이것을 두고 영적인 척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일들은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관문을 넘어서야 한다. 도리와 구호를 깨닫고 일부 이론을 깨달은 뒤에 다시금 이런 일들이 닥치면 점차 도리와 구호를 실제로 변화시켜야 한다. 실제에 결부시키고 실제와 대조한 뒤에 맞닥뜨린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 현실 속에서 어려움을 만나고 자신의 구호와 이론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할수록 자신에게 실제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깨달은 것은 도리이지 진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때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려는 동기와 원천을 갖게 된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 너는 기존에 깨달았던 도리는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실제가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 실제란 무엇일까? 모두 진리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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