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찾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색상

테마

폰트

크기

줄 간격

페이지 너비

검색결과 0개

관련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

제118편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 실행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할 때 무슨 일이든 원칙을 파악해 진리를 실행한다면 합격인 것이다.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한지 알 수 없다면 교통하고 합의해야 하는데, 교회 사역에 유리하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확정하고 그대로 행하여라. 이런저런 규례에 얽매이지 말고 미루거나 기다리지 말고 관망하지 말라. 관망하다가 다른 사람이 결정하면 의견을 종합하고, 결정하는 사람이 없으면 미루고 망설이다 보니, 결국 일을 처리하는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일을 파악한 후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신 대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책임질까 두려워 말고, 미움을 살까 두려워 말라. 뒤탈이 날까도 두려워 말라. 꾀를 부리거나 건성으로 임하면 하나님이 보고 감찰할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린다 해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충성심도 없고 항상 개인적인 불순물, 개인적인 뜻, 개인적인 생각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감찰하여 알아차리실 텐데, 그러면 다음에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겠느냐? (안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함께하지 않을까? 사람이 마음속으로 항상 하나님과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거리를 둘까? 바로 자기의 생각, 자기의 이익, 자기의 체면, 그리고 옹졸함이다. 하나님과 거리를 두면 그만큼 일이 어려워지지 않느냐? 만약 네가 자질과 인성도 보통이고 경험도 풍부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어 일이 닥쳤을 때 최선을 다하면서 숨기지 않는다면, 하나님 눈에 보일 것이다. 네가 하나님과 거리를 둔 채 항상 자기 이익과 체면, 목적을 위해 마음을 숨기고 이해타산을 따지고 머릿속은 온통 그런 것들로 가득하다면 결국 하나님이 너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리고 네가 하는 많은 일이 효과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너라는 사람은 쓰기에 적당하지 않고, 충성심도 없고, 진리를 좋아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 항상 마음을 숨기고 하나님 집에서 성심성의껏 일하지도 않으며, 진솔한 마음도 없고 마음을 다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힘만 조금 쓰고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각 방면의 진리에 대한 진입과 인식이 더 깊어지지도 발전하지도 않는다.

늘 발전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은 각 방면의 상태나 인성에서 어떤 차이를 보이느냐? 그 차이를 판별할 수 있을까? 롯과 아브라함의 차이를 아느냐? 롯과 아브라함은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따랐지만 롯은 육체의 안락을 추구하여 늘 성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이익만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육체가 편하고 생활이 평탄할지에 대해서만 궁리했다. 살 곳과 생활 방식,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선택할 때에도 오로지 육체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육체의 이익, 자신의 일상만 생각했다. 육체의 편안함과 즐거움, 개인적인 취향, 롯이 추구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롯은 어디서 살기로 했느냐? (소돔입니다.) 소돔은 어떤 곳이냐? 도시냐, 시골이냐? (도시입니다.) 그곳은 조용한가, 소란한가? 육체적 생활이 편안한가, 불편한가? 고독한가? 고독하지 않다. 그곳은 소란스럽고 번화하고 고기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고 실컷 놀고 춤출 수 있는 곳이다. 일상이 재미있고 적막하지 않은 곳이었다. 원 없이 즐기고 볼 수 있는 번화한 곳이었다. 롯은 그런 생활을 택했다. 사람들이 볼 때 그 선택이 잘못되었느냐? 아니다. 자유롭다. “아무 데서나 살면 어때,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되지. 나는 매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제때에 제물도 적당히 바치고 있어. 일이 생기면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고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아.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이런 일들은 겉으로 볼 때 잘못된 것이 없다. 좋은 삶을 택한 것 역시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롯이 얻은 것이 많으냐, 적으냐? (하나님 앞에서는 얻은 것이 적습니다.) 무엇이 적으냐? 지내는 것도 괜찮고 생활에 부족함도 없으니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냐? 사람들은 어떤 것을 얻게 되느냐? 롯은 육체가 편안한 삶, 화려한 세상, 성 안의 삶을 선택하고 육체의 안일을 누렸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오는 시간은 줄어들고, 하나님이 롯에게 나타나 롯을 감동시키고 각 방면의 진리를 깨우쳐 주는 일 역시 뜸해졌다. 이런 일들이 줄어들면 롯이 영적으로 늘 평안하고 기쁘고 광명이 넘치겠느냐? (아닙니다. 영적으로 가라앉습니다.) 설령 그렇게 가라앉지 않더라도, 경외심을 지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 느끼는 평안과 기쁨, 충족을 영적으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육체가 편안한 생활을 하면서 의식주에 문제가 없이 잘 먹고 잘 입고 즐긴다면, 영의 깊은 곳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크겠느냐? 크지 않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냐?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육체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탐하고, 먹고 노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느라 결국 하나님의 행사를 목격하는 시간이 적어지고 영 안의 감동도 줄어들고 영 안의 평안과 기쁨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 그리고 징계도 줄어들고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져 영 안이 마비된 것이었다. 머릿속에는 늘 이웃들에 관한 일, 먹고 노는 일에 관한 생각만 가득하게 된다. 마음속으로 늘 ‘하나님을 멀리하면 안 돼.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해야 돼.’라고 예민하게 느낀다 해도,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느냐? 이것은 양심의 깨달음이다. 이런 깨달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즉, 네가 화려하고 왁자지껄한 생활만 추구하고 한평생 부족함 없이 온갖 좋은 것을 다 경험하고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이 네게 하려는 사역, 하나님이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려던 많은 기회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런 것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볼 기회조차 없기 때문에 영적으로 이 모든 것을 얻지 못한다. 얻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되겠느냐?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을 10점 만점이라고 할 때, 네가 육체의 안일을 도모하고 항상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고, 이것들을 위해 살고 그 안에 얽혀 산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1, 2점만 나와도 다행이다. 그 정도에 그치는 것도 어떤 상황에서 가능하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내적 상태는 어떤 것이냐? 하나님과 의절하지 않고,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도와주소서. 저를 떠나지 마소서. 죽음이 두렵습니다. 당신이라면 저를 살려줄 수 있사오니 제 목숨은 당신 손에 있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운명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네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저 약간의 믿음이 있는 정도다.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을 1, 2년만 믿어도 가능한 일인데 이것을 어떻게 믿음이라고 하겠느냐? 불신자보다는 나으므로 불신파라고는 할 수 없는 정도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까?”라는 질문에 “인정합니다.”라고 대답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물으면 생각 끝에 “내가 어떻게 압니까? 어쨌든 하나님은 계십니다.”라고 대답하는 수준이다. 그만큼 너는 경험도, 증거도, 간증도 없고, 약간의 믿음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 사람의 결말이나 귀착지를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아브라함을 다시 살펴보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관점은 어떤 것이냐? 롯이 하나님을 믿는 관점과 무엇이 다르냐? 하나님을 믿는 일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느냐?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활과 거주 환경, 의식주 등에서 스스로에게 어떻게 요구하였느냐? (자신의 육체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을지만 고민했습니다.) 그런 말은 빈말이 아니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까지 생각했을까? 아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야. 만약 도시에 살면 생활하는 것도 낫고 교통도 편하고 먹고 놀기도 편하고 떠들썩하고 적막하지 않지만, 내 마음이 너무 어지럽지 않을까? 조용히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사람이 세상을 이기고 조류를 거스를 수는 없어!” 타락한 사회와 세계,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지내더라도, 이런 환경은 너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늘 마음을 어지럽게 해 하나님 앞에 참으로 안정할 수 없게 합니다.) 그렇다. 환경은 너의 행동과 사람됨의 방향, 삶의 목표를 바꿀 수는 없으나 너를 어지럽게 할 것이다. 방해를 받은 너는 어떻게 될까? 쉽게 하나님과 멀어진다. 사람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고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열 가지 깨우침을 주면 너는 몇 가지를 얻을 수 있느냐? 아마 채 하나도 제대로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아홉 가지는 하나님의 헛된 수고가 되고, 너는 얻을 수가 없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이 얼마나 더 커질 수 있느냐? 5, 60년 혹은 100년의 일생 동안,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이 얼마나 더 커질까? 어느 정도에 이를 수 있을까? 하나님을 진실로 인식하는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고, 아는 수준에서 출발하여 경험과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 진실로 하나님의 확실한 존재를 체험하고, 느끼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주관하심 등 이 모든 것을 느낀 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려면 어떤 환경을 경험해야 할까? 평범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자신의 길을 택하거나 자신이 살아갈 환경을 택하려면 이런 측면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아브라함은 롯과 같은 생활 환경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시골에 남기로 하고 소돔성에 가지 않았다. 그가 생각이 없는 것이냐? 어리석은 것이냐? 아니면 나이가 많아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생각이 보수적이라 도시의 삶을 쫓아갈 수 없는 것이냐? 이런 객관적인 이유 때문이냐? 그게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차지하는 무게가 다르고, 생명 진입과 각 방면의 환경에 대한 그의 선택이나 요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시골에서 양을 치는 평범한 삶을 택했고,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자주 그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이 자주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그와 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자를 통해 아브라함이 할 일이나 하나님이 하려는 일을 알렸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같은 생활 환경에서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처한 환경은 그에게 너무 잘 맞았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일을 하고 하나님을 따르기에 너무나 알맞은 환경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생명 진입이 빨라지지 않았느냐?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보는 일이 롯보다 많지 않았느냐? 그 두 사람 중 누가 인생 경험의 4, 50년 동안, 더 많이 얻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믿음이 더 크냐? (아브라함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러하다. 네가 가는 길, 너의 선택, 네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저는 완벽함을 추구합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목적이냐? 어떤 사람은 “저는 아브라함을 따라 머리에는 천을 두르고 몸에는 두루마기를 걸쳤습니다. 아브라함은 시골에 살면서 양을 길렀는데, 저도 시골에서 양을 치며 자동차도 TV도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아브라함처럼 생활합니다. 매일 양젖을 짜고 들판에서 양을 치고 현대인들과는 접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똑같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제가 이런 생활 환경을 택했으니까요.”이렇게 하면 되느냐? 겉모습만 흉내내서는 안 된다. 선지자 옷을 입는다고 해서 네가 선지자인 것은 아니다. 네 이름이 아브라함이라고 해서 네가 아브라함은 아니다. 겉으로 따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길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따르느냐? 그 말은 큰 틀이고 이론일 뿐, 실행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네가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 생활 속에서 진리에 관계된 모든 일은 네가 추구하는 목표와 결부시켜야 한다. 네가 하는 일은 모두 네가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실제를 살아내는, 실제가 있는 길이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에게 본분이 주어졌는데, 힘들고 위험 부담도 있는데다 제대로 못하면 책망을 받고, 잘못될 경우 심판과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일이 임했을 때 네가 하는 선택은 네가 추구하는 방향과 관련된다. 너는 고민할 것이다. ‘일이 주어졌는데 피하자니 너무 잔머리를 굴리는 거 같고, 안 하자니 명백히 회피하고 충성심이 없는 것인데, 이러면 유다가 아닌가? 만약 하면 힘들기도 하고 상면의 형제님도 내가 한 걸 몰라줄 거야. 잘해도 칭찬해 줄 사람 없고 잘못해서 상면에 알려져도 좋을 게 없고 책망이나 받겠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번에는 관두고 다음에 보자.’ 여러 가지 생각이 든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 네가 추구하는 목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치우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바른길을 가지 않는 사람, 정의감이 없는 사람, 진리를 좋아하지 사람,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길로 빠지기 쉬우냐? (비뚤어진 길입니다.) 비뚤어진 길이란 어떤 것이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비뚤어진 길이냐?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런 쪽으로 치우치고 애쓰는 것을 사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평소에 틈만 나면 “우리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야 합니다.”라고 한다. 기도만 하면 열정에 불타고, 감동받아 통곡의 눈물을 흘린다. 자신은 한평생 헛살지 않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요 영광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이 높여 주셨다고 여긴다. 기도가 끝나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느껴져서 너무나 만족하고 행복해한다. 하지만 1초도 채 되지 않아, 일이 닥치면 바로 돌변한다. 방금 전 기도는 어디로 갔는지 전부 빈말이 돼 버린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하고,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이루려면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또한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는 것이 좋다. 자기 이익에 관련된 일일지라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노력을 과연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꾸 사심을 품으니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일은 나한테 이득이 안 돼.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도 못 들을 테니 그냥 이렇게 하자.’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설령 악한 행위는 아니지만 진리를 실행한 것도 아니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긍정적인 사물도 좋아하지 않으니 자신의 이익에 관계된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한 가지 일을 진리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과오이다. 두 가지 일을 진리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즉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여러 가지를 보전하기 위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많은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면 그 결말은 어떨지 너무나 뻔하다. 네가 저지른 모든 과오와 너의 선택, 추구, 주관적인 바람, 그리고 네가 일을 할 때 선택한 방향과 길 등을 모두 합치면 결국 너는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작은 일이냐? 모든 과오를 합치면 그것이 바로 악행이 된다. 일이 닥쳤을 때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민은커녕 기도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추구 혹은 선택이 치우치거나 진리에 위배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오지 않고 강퍅한 마음으로 대하며 회피하려 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사람들 눈도 속였는데, 하나님도 못 보실 거야. 하나님이 아시든 모르시든 상관없어. 어쨌든 내 이익만 챙기면 돼. 무엇보다 내 이익이 우선이야.’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자기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쪽을 택하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오가 아니냐? 명백한 과오이다.

너희는 일반적으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집의 이익을 택하거나 진리를 실행하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으냐, 적으냐? (자기 체면이나 이익에 관련될 경우, 이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 이에 관한 말씀을 먹고 마시고, 의식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하고, 계속해서 여기에 관한 기도를 드리면 이익이나 체면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멀어지면 안 됩니다.) 육체를 배반하기도 쉽지 않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여기에는 방해가 따른다. 평소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조용히 있는 시간이 하루에 어느 정도이냐? 며칠 하나님 말씀을 안 읽으면 내면이 메마르느냐? (저는 하루만 안 읽어도 안 됩니다. 아침에 꼭 한 문단을 읽고 그 의미를 곰곰이 곱씹어 보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듭니다. 일이 바빠서 기도를 많이 못하는 날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분량이 아주 작은 기분입니다. 이럴 때는 의식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실행 방식에 해당한다. 소극적인 태도는 좋지 않다. 소극적인 자세가 되면, 내면이 어둡고 하나님을 더듬을 수 없을 때 급하게 말씀을 찾아 먹고 마시려고 해도 어떤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완전히 메마르고 어두워지고 마비되면 그때는 하나님과 너무 멀어지게 된다! 매일 기본적이고 정상적인 영 생활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조금씩 쌓아 나가야 한다. 분량이 그렇게 크지 않거나 진리를 많이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정상정인 큐티도 하지 않는다면 분량이 자라기가 쉽지 않다. 자라지 못한다. 분량이 자라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어떤 상황이 나타날까? (제가 체험한 가장 심각한 상황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늘어나고, 자기 상상에 의해 일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속 멀어지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도 표면적인 것에 그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서 언급한 많은 내적 상태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런 상태와 관련해 기도드리고 하나님께 이를 드러내 달라고 합니다. 얼마 후 저에게도 이런 상태가 있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맞춰지면 불평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항상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 진리와 네가 추구하는 목표를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평소 일상생활에서 네가 실천하는 것들이 네가 추구하는 것에 부합돼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누구나 건강, 젊음, 질병 없는 삶을 추구한다. 그러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일과 휴식에 균형을 유지하고,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먹지 말고, 안 좋은 음식은 피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생활 속 실천들이 이 목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면 점차 효과를 볼 수 있다. 3, 5년만 지나면 건강이 좋아지는 등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 어떻게 이런 효과가 생기느냐? 너의 행동이 네가 추구하는 목표에 부합되고, 너의 실천이 너의 이론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 성품이 변화되는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어떤 일이 닥치든 네가 추구하는 목표, 진리와 결부시켜야 한다.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살고 싶어. 건강이 최고야.”라고 하는 사람이 온갖 핑계를 대서 고기나 기름진 음식을 먹고, 매일같이 닭다리나 콜라, 맥주를 즐기면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론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입에 달고 다니는데, 정작 행동과 실제 추구하는 삶은 그 이론과는 동떨어진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몇 년 후 병원에 갔더니 고혈압에 고지혈증 그리고 골다공증까지 생기고 말았다. 그동안 건강을 최고로 여기며 살았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병만 얻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의 행동은 건강을 실천한 증거나 생활이 아니며, 스스로에게 죄를 정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너에게 네 글자로 뭐라고 하겠느냐? (자업자득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고, 한 만큼 돌려받는 법이다. 다 자업자득이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네가 어떤 이론을 내세우고 어떤 목표를 추구하든 하나님의 말씀에서 요구하는 것, 이를테면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것이면 모두 진리의 방향과 목표이다. 그리고 그 방향과 목표 다음에 오는 것이 실행의 길이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길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것이냐?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 (있습니다.) 너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본 대로 말하는 것, 이것이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먼저,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에 해당하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르침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길이다. 하나님의 길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것에 해당하느냐?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네가 만약 진솔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네가 본 것과 속으로 생각한 것이 입에서 나온 말과 다르게 된다. 누군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집의 사역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아주 괜찮은 사람입니다. 저보다 책임감이 있고 자질도 저보다 낫고 인성도 좋고 성숙합니다.”라고 대답하는데 마음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사실 속으로는 그가 자질은 괜찮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마음 한구석에 품은 진심인데, 말할 때는 눈을 깜빡이고 머리를 굴리며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입으로 뱉는 말 중에 참말은 하나도 없고 죄다 거짓말, 꾸며낸 말뿐이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냐? (아닙니다.) 행한 것은 어떤 길인가? 사탄의 길, 마귀의 길이다. 하나님의 길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것,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 앞에서 하는 말이고,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사실 하나님이 듣고 계시고,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계신다. 사람이 감찰할 수 있느냐? 사람은 기껏해야 네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만 간파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네가 한 말이나 겉모습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너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신다. 너의 생각과 궁리, 네가 품고 있는 잔꾀, 여러 가지 생각을 오직 하나님만 다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네가 한 말이 진실이 아님을 안다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점수, 평가가 어떻겠느냐? 너는 그 일에서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대로 사실을 말해야 한다. 사실대로 “그 사람은 자질은 괜찮지만,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네 평가가 객관적이고 옳고 정확한지를 떠나 그 말이 네 진심이기 때문에 그대로 말해야 한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다. 너는 하나님의 길을 따랐느냐? 마음속에 있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하나님을 흡족게 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하나님이 보는 게 네가 외치는 구호더냐? 네가 뭐라고 외치고 얼마나 힘차게 외치는지를 보느냐? 네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느냐? 네가 몇 번 외치는지를 보느냐? 하나님이 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지를 보고, 일이 닥치면 어떻게 실행하고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본다. 어떤 일 앞에서 네가 선택한 것이 인간관계, 자기의 이익, 자기의 체면, 육체의 편안함 등 전부 자신을 챙기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일이 생기면 너의 관점이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보답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구나.” 그런 후 너에게 점수를 주고 너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네가 외친 말은 무엇이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냐? 물론 너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자 했을 것이다. 심지어 스스로의 바람과 의지에 크게 감동받아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네가 외친 말도 전부 진심이다. 하지만 그 말이 실행을 뜻하느냐? 그 말이 간증이냐? 바리새인들은 너보다 훨씬 많이 외쳤다. 큰 거리 어귀에서 “위대하신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 “존귀하신 하나님”을 외쳐댔다. 함성 소리가 너보다 크지 않으냐? 하지만 몇 년을 외쳤다고 해서 하나님이 칭찬했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뭐라고 했느냐? (외식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정죄했느냐? 하나님은 그들에게 꼬리표와 호칭을 붙였다. ‘외식한다’고만 하지 않고 ‘바리새인’이라고도 불렀다. 바리새인은 과거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처럼 일종의 직함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일종의 꼬리표가 되었느냐? 바로 한 부류 사람의 대표인 것이다. 바리새인이 상징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냐? 구호만 외치고, 거짓과 포장, 위장에 능하다. 자신을 아주 고상하고 성결하고 올바르고 광명정대한 사람으로 가장하지만, 결국 진리는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하나님께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행동을 하고 뒤에서는 제물을 훔쳐 먹는다. 예수는 이들을 가리켜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모두 겉으로만 좋게 보이는 행동이라는 말이다. 광명정대하게 소리 높여 외치고 고상한 이론을 떠들며 듣기 좋은 말만 하지만 정작 하는 짓은 엉망이다. 온통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뿐이고, 위선적인 행위와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인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을 미워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미워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공의와 공평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느냐?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예수께서 오셔서 천국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정죄했습니다.) 그들이 정죄하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겠느냐? 예수가 오기 전에는 무엇을 보고 그들이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느냐?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들의 행위를 보면 온통 가식적이다. 이런 가식적인 행위로 사람들을 속여 신임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속임수이고 궤사가 아니냐? 이렇게 궤사한 사람이 진리를 좋아할 수 있겠느냐? 이런 가식적인 행위 뒤에 숨은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을 미혹하고 농락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상까지 받으려 한다. 이 얼마나 커다란 기만책이고 기막힌 수작이냐? 그런 사람들이 공평과 공의를 좋아할까?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지위, 명리 그리고 포상이다. 사람들에게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실행하느냐? 실행하지 않고, 그중 단 하나도 살아내지 못한다. 그저 가장하고 포장하여 사람들을 기만하고 농락하고, 자신의 지위와 명망을 공고히 할 뿐이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여 자격을 만들고 밥그릇을 얻는다. 이것이 비열하지 않으냐? 이런 행위에서 볼 수 있는 저들의 본질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전혀 진리를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알 수 있느냐? 바로 예수가 왔을 때이다. 예수가 와서 한 말씀은 모두 옳은 말이고, 진리인데 그들은 어떻게 하였느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이 틀렸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이지 않았느냐, 아니면 옳은 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느냐? (옳은 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왜 그러냐? 사악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은 모두 옳다. 어느 하나 틀린 데가 없고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며 약점을 들춰내려 했다. 그러다가 결국 약점을 찾지 못하자 예수를 정죄하려 하였다. 결국 상의 끝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자. 그를 살리면 우리가 죽으니, 우리가 살고 그를 없애야 하느니라.”라고 결론을 내렸다.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당시 일반 사람들은 예수가 주님인 걸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좋은 사람이고 법을 어긴 것도 율법을 범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왜 예수를 정죄하려고 했을까? 왜 예수를 그렇게 대했을까? 그걸 보면 그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악독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너무나 악한 자들이다! 바리새인들이 드러낸 사악한 몰골은 그들이 겉으로 꾸며낸 선량한 모습과 너무 거리가 멀다. 많은 사람이 그 진면목과 가면을 판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의 사역으로 그들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났다. 바리새인들이 평소에는 좋은 사람인 척하고 겉으로는 너무나 선량해 보이기 때문에 만약 사실로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진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현대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냐? 그들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고,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경계해야 하느냐? 일상생활에서 바리새인의 교훈에 빗대어 거짓과 속임수를 판단할 수 있는 자신의 상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바리새인의 몇 가지 특징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은 첫째로 명예와 이익을 추구한다. 그래서 자신을 잘 포장하고 바리새인의 옷을 입고 성경을 들고 다니며 그 안에 들어 있는 유명한 장절들, 그러니까 비교적 권위 있는 말들을 거꾸로도 줄줄 외운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전도하고 설교하면서 사람들에게 환심을 산다. 지금도 이런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경우인지 말해 보거라. (저는 형제자매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과 진리를 교통하지만, 사실 저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더 심각할 수도 있다고 먼저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고, 또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사람들과 진리를 교통하고 구호만 외칩니다.) 그것이 다 거짓된 모습의 일부분이다. 거짓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자신을 위장하고 포장하려는 것입니다.) 자신을 좋게 포장하려는 목적은 무엇이냐? 위장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들이 우러러보도록 하려는 것이다. 자신을 미화시키고 사람들 마음속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이런 일을 피할 수 있느냐? 어떻게 실행해야 이런 상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땅히 실행해야 할 것이 아니냐? (제게 이런 현상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가끔 형제자매들에게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실제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책망을 받으면 저는 남들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저 역시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럴듯하게 보여 체면을 지키고 싶고,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습니다.) 상태는 이미 인식을 했으니 이제 상태 인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상태 인식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최종 목적은 무엇이냐? 바로 이 상태를 해결하는 것이다. 상태가 조금씩 해결되면 성품에도 변화가 생긴다. 각각의 성품은 각각의 상황에서 표현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들을 종합한 것이 바로 성품이다. 여러 가지 환경이나 여러 가지 사건에서 인•사•물을 마주할 때 네가 표현하는 그런 상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면 그 방면의 성품이 변화된다. (제 경험상 솔직히 밝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겉모습과 좋은 행위로 스스로를 꾸미려고 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 솔직히 말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더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좋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형제자매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솔직히 말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고 의지도 있어야 한다. 특히 스스로 입을 떼기가 어렵고 남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경우라면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넘어가지 뭐. 나중에 누군가 알게 되면 그때 다시 보자. 다들 알게 되면 그때 말을 꺼내도 될 거야.’ 그러려면 사전에 준비가 필요하다. 마라톤을 뛸 때처럼 먼저 몸을 풀어야 한다.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한 다음 단숨에 말을 쏟아내고, 말하고 난 후 마음이 편안해지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을 때도 있고, 상태를 겨우 인식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해결하고 싶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기도 한다. 이익과 체면, 사람들 마음속에 자신이 차지한 지위가 도전을 받게 되면 내면이 상처를 받아 괴롭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전쟁이 시작된다. ‘말을 할까 말까? 한다면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나?’ 가끔씩 가벼운 정도로 말을 한다.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 할 말을 다 쏟아내지는 않는 것이다. ‘체면을 생각해서 너무 심하게 말하지는 말자. 스스로를 너무 모질게 대하지는 말아야지.’ 말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마치 빚을 진 기분이 든다. ‘완전히 다 말한 건 아니니 실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하지만 그런 일에서 진리를 추구할수록 실행하는 수준도 점차 나아지고 깊어진다. 실행하겠다는 의지가 강할수록 실행의 효과가 확연히 느껴지고 만족과 즐거움을 느낀다. 다음에 실행할 때는 자신감도 커지고 체면이나 이익, 사람들 마음속에서의 지위, 남들의 시선을 덜 의식하고, 그런 것이 가치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남들의 시선이 무슨 소용이냐? 성격이나 능력은 어차피 그대로이다. 중요한 것은 진리 실행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진리의 실행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너의 관점도 변하고 육체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가정 출신, 체면, 지위, 학력, 개인적인 재능, 소질, 사람들 마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내세우려 하고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일이 닥쳤을 때 내면은 늘 싸우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못한다. 싸움 끝에 어떻게 될까? 몇 년을 싸워도 진리를 얻지도 실행하지도 못한 채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할 최고의 시간들을 지체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점차 해이해지고 모호해지게 된다. 처음에 믿음이 가장 클 때는 성령도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하지만 3, 5년 지나도 이를 전혀 실행하지 않고 일이 닥칠 때마다 피하기 급급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성령도 더 이상 네가 변변치 못하다고 여겨 결국 포기하고 역사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준 최고의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일을 장난처럼 여기고 하나님을 속이고, 그런 상태로 3, 5년이 흐르면 실행하는 것에 흥미가 없어진다. 아무리 실행을 하고 싶어도 처음의 의지나 바람이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제껏 진리를 실행한 후 성품 변화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실행한 적이 없고, 그로 인한 달콤함도 맛보지 못했다. 지위나 명예와 이익, 물질적인 향유, 세상, 조류, 인간관계, 감정과 같은 것들을 너는 줄곧 간파하지 못했고 간파하지도 못한다. 간파하지 못하면 포기할 수 없고, 간파한 만큼 포기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간파할 수 있느냐? 실행하고 체험하면 간파할 수 있다. 네가 실행하면 실행한 만큼 간증이 있고, 그만큼 기쁨을 경험하고, 그만큼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이런 진리를 마치 마르크스-레닌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인간들이 숭배하는 일종의 바람이나 이론처럼 요원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실행하여 성품이 변화되면 영 안이 충만하고 삶이 아름다워지고 편안해진다는 사실이 너에게는 일종의 이론에 불과하다. 너는 한 번도 시도하려 하지 않기에 이러한 것들은 결국 너에게서 실현되지 못한다. 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공허해질 때가 있고 이방인처럼 여행이나 다니고 소소한 일상에 만족하면서 소시민적인 삶을 즐기고 이에 만족한다. 불신파의 관점이 드러나고 그런 것에 점점 잠식당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생활하면서 네가 마주하는 일이나 사람, 하나님이 부탁한 일을 네가 깨달은 진리로써 맞추어 보고 그렇게 한다면, 너의 실행 방식이나 이론 근거, 생존 바탕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느냐? 바로 하나님 말씀이다. 너에게 본분이 맡겨졌다고 하자. 이 본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와 관련하여 너에게 실행의 길이 있지 않느냐? 우선 진리에 대한 이론의 기초가 있지 않느냐? 어떻게 본분을 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느냐? (대충 눈속임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눈속임으로 대충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소극적인 면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예를 들어 너에게 설거지라는 본분이 주어졌고, 너는 이를 받아들였다. 물로 한번 헹구고 난 뒤 다 끝냈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리를 실행한 것이냐? 너는 스스로 실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릇을 씻고 깨끗이 헹구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설거지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 “별 생각 없이 그릇을 닦고 깨끗이 씻은 뒤 설거지를 마쳤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설거지를 한 원칙은 무엇이냐? 어떤 원칙에 따라서 그 일을 하는지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너에게 주어진 임무인 본분을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냐? 원칙이 있지 않느냐? 이 원칙이 바로 이론 기초이다. 무엇보다도 눈속임으로 대충 넘어가지 않는 것, 먼저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느냐?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몇 가지 단계가 있다. 먼저 그릇 상태를 확인한다. 표면에 음식 찌꺼기가 있어서 더럽다. 균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세정제를 이용하여 살균해야 한다. 그냥 헹궈 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여러 번 물로 씻어 낸다. 그런 다음 안팎을 꼼꼼히 살피고 테두리도 한번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눈속임으로 대충 하지 않는 것이다. 머릿속에 이 원칙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일을 할 때는 이를 잘 지켜야 한다. 한번 쓱 보고 씻어 낸다고 끝이 아니다. 기름기, 세균이 있거나 말거나 ‘시키니까 하고 하기만 하면, 대충 하는 게 아니지.’라는 생각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힘만 쓰는 것, 노동하는 것이다! 일을 다 마쳤는데 어째서 진리를 실행한 것이 아닐까? 어째서 힘만 쓴 게 될까? 원칙대로 하지 않은 일은 진리 실행이 아니다. 일을 할 때 진리 원칙에 따라 하지 않고 마음속에 원칙도 없이 자신의 소망, 감정, 기분, 상상, 관점에 따라 일을 했기 때문이다. “씻어 내기만 하면 되지 무슨 세정제야! 기름기니 세균이니, 왜 내 눈에는 안 보이지? 세균이 어딨어? 괜찮아. 그냥 써도 돼.” 이것은 너의 관점이 아니냐? 자신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 관점대로 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 원칙에 따라 하려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대충 해서는 안 돼. 세정과 살균이라는 원칙에 따라 살균하고 깨끗이 세척해야 안전하고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이것이 원칙이다. 모든 행위는 원칙이 바탕이 되어야만 대충 처리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또한 마음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것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본분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실행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본분을 잘하는 것이다.

평소에 일을 할 때 이런 경우가 있느냐? 가끔 있지 않느냐? 별로 심오하지 않은 일이나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관해서는 성찰하고 주의할 수 있지만, 복잡한 일은 이해도 못 하고 어리둥절할 뿐만 아니라 실행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지금 사람들이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각각의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 너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요? 그럼 제가 평소에 얘기하는 그것들, 평소에 듣는 그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리다. 왜 도리라고 할까? 그 말은 네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도 너는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리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훈계와 책망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이론은 다 알아요. 하나님을 믿은 지가 벌써 얼마나 됐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배울 만큼 배워서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이것은 진리와 관련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진리를 구하고 순종한 다음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일을 할 때 어째서 원칙을 찾지 못하느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진리를 깨달은 상태에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도 큰 어려움인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합니까?”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너는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다. 깨달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와 관련된 간단한 실행은,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할 수 있지 않느냐? 물론 모든 일에서 다 실행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너무 큰 문제나 자신의 앞날, 운명, 혹은 체면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래도 실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배탈이 난 상황에서 누군가 원인을 물으면 너는 솔직히 대답할 것이다. “출출해서 고기를 많이 먹었는데, 그게 잘못되었는지 배탈이 났어요.” 식욕이 강하다고 놀리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숨길 필요가 없다. 네 생각에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다들 이해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므로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약간 창피할 수는 있겠지만,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할 필요도 못 느끼고, 모두에게 솔직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너의 선택이다. 너의 자존심이나 인격과 크게 상관없고, 이것들이 크게 손상 받지 않을 거라고 여길 때 너는 솔직히 말하고 실행할 수 있다. 이 정도까지는 실행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창피하고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은 말하기가 부끄러울 것이다. 특히 네가 저지른 일의 당사자에게는 더더욱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에게 큰 다이아 반지가 있었는데, 너는 그 반지가 너무나 부러웠다.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은데 차마 빌려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너는 그 일을 항상 맘에 담고 있었다. ‘한평생 다이아 반지라고는 구경도 못 해 봤는데, 어떤 느낌인지 한번 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지금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허영심이 있지 않느냐?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한 허영심, 무지, 미성숙, 유치함 때문에 사람은 쉽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어느 날 반지 주인이 손을 씻느라 반지를 빼 놓고 잊어버렸는데 마침 그 자리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너는 ‘와, 너무 예쁘다. 정말 눈이 부시네! 한번 껴 봐도 될까?’ 하면서 반지를 꼈다. 너무나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다. 너는 얼른 다시 반지를 빼고 모른 척했다. 어쨌든 다이아 반지를 한 번이라도 껴 봤으니 근사한 기분이 들고 허영심도 채워졌다. 만약 너에게 예전에 저질렀던 어리석은 일이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을 솔직히 말해 보라고 하면,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난 일은 말할 수 있지만 남의 반지를 몰래 꼈던 일은 죽어도 말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들이 깔볼 것 같은 일, 자존심과 체면에 관계된 일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쯤 말할 용기가 생길까? 나이가 들어 자신이 변변치 못하다고 느껴지고, 사람들이 때리고 욕해도 괜찮고, 비위도 좀 좋아지면 그때는 말할 수 있다. 아직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남들의 비웃음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여기에 선택이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선택은 어떻게 한 것이냐? 어떤 판단에 근거하여 나온 원칙이냐? 진리에 근거한 것이냐? (아닙니다. 자신의 체면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체면의 근거는 무엇이냐? 일종의 성품에 지배받은 것이다. 어떤 성품이냐? (허영입니다.) 허영이라는 성품은 어떻게 생겨나느냐? 사람들은 자신이 괜찮고 잘 생기고 존엄도 있고 인격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잘난 척함, 존엄, 인격, 지위, 존귀함, ‘나는 신분이 있다’는 태도,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느냐? 교만한 성품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무슨 인격이 있고 무슨 존엄이 있느냐? 진리를 실행하지도, 진리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사건건 하나님께 대적하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긍정적 사물도 좋아하지 않고 정의감도 없고 공평 공의도 좋아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존엄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말하는 존엄은 어디서 오느냐? 교만한 성품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네가 진리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어떤 일은 그렇게 판단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남몰래 그런 비열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즉, 몰래 남의 물건을 이것저것 걸쳐 보는 일도, 남의 물건에 눈독 들이는 일도 없다.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즉, 물질적인 것, 입고 먹는 것과 같은 겉면의 일은 크게 개의치 않으므로 이런 일들로 인해 방해받거나 속박받거나 통제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받는 일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누가 너에게 “당신은 생긴 것도 평범하고 자질도 별로예요. 유명한 대학은 나왔지만 참 어리석고 견문도 부족하네요.”라고 한다면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너에게는 남들의 평가가 목숨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말할까? 바로 네가 스스로를 꽤 훌륭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진리를 많이 깨달아 사람의 여러 측면의 타락된 성품의 본질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나면,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어 자신이 지식과 교양, 지위가 있고 남보다 존귀하다고 귀중히 여기는 것들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런 것을 소중히 여기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했는지를 깨닫고 그런 것을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너는 “형제님은 대학도 졸업했고 저보다 훌륭하네요.”라는 말에 “뭐가 훌륭합니까? 자매님은 간증문도 쓰시지만, 저는 못 해요. 하나님 믿은 지 몇 년이 돼도 잘 못 씁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 말은 진심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 말씀의 진리의 양육과 목양 덕분에 사람은 각종 사물의 진면목과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진리가 기준이 되고 진리를 최고로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외모와 지위, 출생 및 가정 배경, 그리고 재능, 은사, 학력 등은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진리만이 중요하고 나머지는 더 이상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지금 누가 너에게 “왜 이렇게 둔해요? 글도 제대로 쓸 줄 몰라요?”라고 할 때 “못하긴 누가 못해요? 학교에서 저는 공부도 잘 했고, 제가 작문한 것도 자주 실렸어요. 수학, 물리, 화학도 선두였어요. 하나님 안 믿었으면 벌써 석박사에다 과학원에 들어가 과학자가 됐을 거예요. 저는 인재라고요! 하나님 집에서 저를 몰라주는 건 저를 모욕하는 겁니다! 하나님 집에서 항상 진리를 강조해서 그렇지, 만약 진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제 재능은 계속 빛을 발했을 겁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냐? 교만한 성품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그런 추한 모습은 영원히 변화되지 못하고 떨쳐낼 수 없다.

너희는 지금 이방인을 마주하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나님을 믿기 전 이방인을 마주했을 때와 다른 느낌은 없느냐? 한번 말해 보거라. (권세와 지위를 숭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별력이 생겼기에 허황된 겉면의 행위를 보면 염증을 느낄 것입니다.) 느낌이 달라졌구나. 그런 이방인들을 보면 전혀 사람 같지 않다. 자신을 뽐내고 공을 자랑하고 허풍을 떤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혐오스럽고 역겹기 이를 데 없다! 단지 행위만 그러할까? 아니다. 문제는 성품이다. 그들이 말을 할 때 드러내는 표정과 성격에서 마귀의 몰골을 볼 수 있다. 자기에게 거슬리는 말만 들어도 당장 태도가 돌변해 너에게 욕설을 퍼붓고 험한 말을 쏟아낸다. 그러고는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악독하지 않은가? 이것이 타락된 인간들의 공통점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항상 진리를 교통하는데,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교통한다. 보통 사람들은 책망 훈계를 받으면 내키지는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형제자매요, 진정한 하나님 집 사람들이다. 특히 인솔자나 상면의 형제님의 책망 앞에서 대다수는 속으로 약간 억울하고 괴로울지라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한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 않으냐?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들은 이방인과 관점이 같지 않은가? 그렇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이들은 다가갈 수 없고 훈계도 거부하고 책망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억울해하고 심지어는 노발대발하는 자도 있다. 그러면 곤란하게 된다. 진리를 실행하면서 진리를 얻으려면, 사람이 어떤 태도로 진리를 대해야 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너는 스스로를 참하고 예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인대회에 나가면 얼마든지 우승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모든 면을 매우 좋게 본다. 그런데 만약 너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네가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이기 싫을 것입니다.) 왜 싫으냐? 너에 대한 다른 사람의 정확한 평가가 네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모습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느끼는 차이인데, 저마다의 사상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실이란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싫을 때가 있다. 이것이 성품 때문이 아니냐? 이런 성품은 변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너는 키가 작은데, 누가 “당신처럼 키가 작은 사람은…”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럼 너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키가 작아요? 키 작은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니에요. 다른 얘기도 아니고 나보고 키가 작다고 하니 상당히 불쾌하군요.” 사실상 무슨 얘기를 해도 소용없고, 말을 못 꺼내게 한 것이다. 말을 못하게 한 것은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일종의 성품 때문이다. 너에게 그런 성품이 있다면 우선 그 일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하든 안 하든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런 일에서도 진리를 구하고 변화되기를 구해야 한다. 변화되기를 구하는 것은 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정확한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느 특정한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일을 개의치 말고 거기에 속박받거나 통제되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평가하고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평가가 정확한 경우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평가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애써 설명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다. 변명은 때에 따라서 필요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런 일들에서 한편으로는 사람의 본성을 인식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이 닥쳤을 때 이성적이어야 한다. 이성적으로 대하고 이성적으로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많은 경우, 이 이성은 진리 원칙이 된다. 진리 원칙을 잘 이해하고, 타락된 성품에 따라 처리하거나 혈기에 따라 처리하지 않는다면, 많은 경우 그런 일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안정할 수 있고 홀가분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일들을 간파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면 자주 방해받게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이 적어질 것이다. 누가 한 말에 자극받아 괴로워하며 이겨내지 못하고 간파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면 마음이 너무 혼란스럽다. 이런 상태가 며칠 지속되면서 예배를 드려도 자꾸 생각나고, 밤에 잠을 잘 때도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왜 이겨 내지 못하는 것인가? 진리를 너무 적게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느냐? 이런저런 일에만 사로잡혀 있다. 계속 고민하면서 며칠이 지나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닷새나 열흘이 지나도 여전히 그 일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한번 사로잡히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좋은 광경도 없어진다. 하나님이 깨우쳐 준 빛도, 하나님이 너에게 하도록 이끌어 준 일도 모두 사라지고, 어떠한 책임감도 사라진다. 그 한동안이 그렇게 헛되이 흘러갔는데, 손해가 아니냐? 사람이 타락된 성품에 사로잡히면 사탄이나 잡귀신에게 사로잡힌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되는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런 타락된 성품은 해결할 수 없다. 너에게 닥친 그 일들 앞에서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면 빠져나갈 방법을 찾을 수 없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자니 어떻게 진리 원칙에 따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어느새 잡귀신에게 잡히고 사소한 일에 얽매여 결국은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작은 일도 그렇고 큰일도 그렇다. 예를 들어 네가 인솔자로 뽑혀서 인솔자 역할을 잘했는데, 다음 투표에서 떨어져서 인솔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하자. 지위가 없어지니 아무도 네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어디에서도 우월함을 느낄 수가 없다. 이런 상태는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벗어날 수 있느냐? 어떤 진리를 갖추어야 빠져나올 수 있느냐?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정상적으로 본분을 할 수 있고, 그런 일에 통제받지 않고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대할 수 있느냐? 그리고 올바르게 자신을 대하고 원망이나 불만 없이 착실하게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느냐? 이런 경험이 있느냐? (소조장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두 달쯤인가 지나서야 헤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벗어났느냐? (처음에는 무척 괴로웠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인식과 형제자매들의 평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괴로워하다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마련하셨고, 저에 대한 형제자매들의 평가도 분명 이유가 있는데 제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냉정을 되찾고 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하나님께서 칭찬하지 않으시는 부분은 무엇인지, 형제자매들이 말해 준 저의 그런 상태와 행동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제 자신에 대한 평가가 틀렸고, 제가 형제자매들이 지적한 결점과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니 그렇게 괴롭지 않았습니다.) 반발심이 없고 맞서지 않으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 그때의 인식이 지금 도움이 되지 않느냐? 그때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더욱 잘 인식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닥치면 이러한 상태가 심해지겠느냐, 아니면 약해지겠느냐? 또 다시 그런 상태에 들어가더라도 같은 방법으로 빠져나오지 않겠느냐? (빠져나오는 시간이 빨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이다. 사람은 이렇게 경험해야 한다. 시간이 빨라진다는 것은 발전했다는 뜻이다. 앞서 경험한 것이 본보기로 작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화다. 더 이상 집착하거나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더 이상 거역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순종하게 되고 원망도 품지 않게 된다. 진리를 깨닫는 것이 역시 중요하다. 경험을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일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도 중요하다. 만약 진리를 구한다면 그 일을 경험한 것이 헛되지 않고,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그런 상황을 마련해 준 목적은 사실 역경을 통해 너를 성장시키고 그런 상황에서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네가 진리를 찾지 않고 사람의 이치를 계속 따지고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해 준 상황에 대항한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무엇보다 하나님께 불만을 품게 된다. ‘다들 하나님은 좋은 일만 하시고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고 하던데, 하나님이 하신 일도 별로 좋지 않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전부 빈말이야. 내 눈에는 하나님 사랑이 보이지 않으니까.’ 너는 그 일이 너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상처만 받았다고 생각하며 억울해한다. 하나님이 너를 이해하지 못하고 너를 돌보지도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해 준 상황도 아무 도움이 안 되고 그 안에는 진리도, 하나님의 사랑도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너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 이 모든 것은 다 좋고,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하다는 말은 다 빈말 같아. 적어도 이론으로만 그런 거야. 난 하나도 못 느끼겠으니까.” 네가 느끼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주재는 너에게 영원히 빈말에 불과하고 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은 커질까, 작아질까? (작아집니다.) 막연한 상태에서 진실로 인식하고 실제로 인식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막연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렇지 않은가?

진리를 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네가 진리를 구하면 반드시 진리를 얻는다. 하지만 진리를 구하지 않고 사람의 이치만 따진다면 결국 하나님에 대한 오해만 생기게 될 것이다. 너는 자꾸 자신의 이치를 강조한다. “저는 사역도 하고 나쁜 일은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왜 제 체면도 살려 주지 않고 저를 쓰지 않으십니까? 칭찬이나 상을 내리지 않으시는 것은 그렇다 쳐도, 저를 심하게 책망하시고, 또 심판하려 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 연단하겠다 하시니 좋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왜 제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원망이 터져 나온다. 항상 이런 기분이라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얻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면 너는 방향을 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사상 관점, 자신의 궤변이나 편향된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께 자꾸 대항하다 결국 하나님도 너를 포기하고 너 역시 하나님을 포기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너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한가득 품고 하나님의 주재를 부인하고 정죄하며,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거부한다. 또한 하나님의 안배에도 순종하지 않으려 한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가 옳으며,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그 결과다. 그러나 네가 만약 진리를 구한다면,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요, 사랑이라는 사실을 실증하게 되고, 나아가 하나님이 한 것이 옳고, 하나님이 사람을 연단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 타락된 성품이 있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행위와 성품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걱정하고 염려한 나머지 사람에게 상황을 마련하여 친히 사람을 연단한다. 그런 상황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리를 갖추게 하고 진리를 얻게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진실하고 너무나 신실함을 너는 체험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타락했을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의 지위와 명리를 꾀하며 결국 어떻게든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불러 모으고 자기 앞으로 데려오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가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그런 사태를 제때에 막은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은 너무나 좋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고 심판하지만 동시에 구원한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이다. 네가 이 단계까지 체험했다면 여기에 해당하는 진리는 얻은 것이 아니냐? 사람이 여기까지 체험하고 인식하여 그 진리를 깨달았다면 하나님께 원망을 품겠느냐? 그럴 수 없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탄복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그런 일이 닥치면 빨리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모두 옳고 사람은 분명 옳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패역이 있고 진리가 없습니다.” 이런 순종은 연단을 수도 없이 겪은 후 도달한 것이다! 베드로는 왜 연단을 수백 번 겪었는가? 베드로가 연단을 수백 차례 겪고 나서 온전케 되고,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다고 얘기를 하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수백 번이라니 얼마나 큰 숫자입니까? 천문학적인 수입니다! 수백 번씩이나 연단을 받으면 아마 다들 연단을 받다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이 수백이라는 수가 많으냐? (많지 않습니다.) 일을 하나하나 겪으면서 경험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나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행사는 모두 인간을 구원하시는 거라는 사실을 실증할 수 있다. 너는 이런 말씀들을 실증할수록 하나님을 진실로 증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리를 체험하는 과정과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은 사실 사람이 자신의 타락된 성품과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고, 타락된 본성과 전쟁을 치루는 과정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타락된 성품을 알고, 끊임없이 자신을 알고 드러내고, 자신의 타락된 성품을 인정하고 증오하고, 동시에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신을 증오하고, 그다음 진리를 깨닫기로 결심하고, 진리에 따라 실행하는 전 과정이 바로 전쟁의 과정이다. 자신과 전쟁을 치르는 과정이다. 끝까지 전쟁을 치른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든 관점을 표시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태도이냐? 바로 순종이다. “아직까지 진리를 잘 깨닫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행사가 옳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을까?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다. 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말했다. 왜 이렇게 긍정적인가? 바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하는 하나님의 행사는 결국 이것이다. 너에게 주었다가 도로 가져가고, 심하게 때리고 다시 달래고 위로해 준다. 그러면 너도 마음이 편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심판하는 것은 모두 옳은 일이며,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옳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사람은 순종하게 되고, 요구나 패역도 사라진다. 아직도 공리공론만 늘어놓으려 하느냐? 이론을 따지지 말라. 이 한마디면 족하다. “실행하고 순종하라.” 사람은 무엇이냐? “사람은 사탄, 마귀요, 사람이 한 것은 다 옳지 않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타락된 것이다.” 사람의 유일한 본분과 책임은 무엇이냐? (순종입니다.) 맞다. 네가 이 수준까지 경험한다면 더 이상 연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지금 이 정도까지 경험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연단을 달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연단한 후 너에게 인증을 준다. 바로 하나님이 그 일을 했다는 것을 너에게 알리는 것이다. 너 역시 그것은 사람이 배치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사람이 상황을 꾸며 놓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사람이 상황을 배치할 수 있느냐? 인•사•물을 배치할 수 있느냐? 겉으로는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네 마음으로 볼 때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배치한 일이다. 그 일이 생긴 데는 원인과 근원이 있으며, 그것이 사람이 배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핑계를 대거나 원망하지 말고 이유를 찾지 말고 그저 순종해야 한다. 순종만 하면 되느냐? 그 안에서 진리를 구해야 한다! 마땅히 실행해야 할 진리를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행해야 할지,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며칠 동안 찾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육체에 남아 있는 타락된 성품 때문에 지장을 받아 단번에 철저하게 실행하기 힘들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 상황을 마련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람의 육체는 고통과 좌절을 좀 겪어야 한다. 좌절과 실패를 겪고 드러나게 되면 너는 철저히 엎드리게 될 것이다. “저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옵소서. 저는 나서지 않겠습니다. 제가 나서는 것은 마귀가 나서는 것이고, 타락된 성품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하소서. 저는 선택 없이 순종하겠나이다.” 이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 보고 “이 사람은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있고, 진리를 좋아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할 때 더 이상 어렵지 않고, 아무런 방해 없이 순조롭게 행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칭찬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모두 이렇게 되도록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온전케 하고 무엇을 깨우치고 인도하고 성취하려 하는데, 너는 그때마다 타락된 성품을 드러내며 가로막고, 사사건건 원망하고 오해한다. 또한 자신의 바람, 이익, 속셈, 관념과 상상을 줄줄이 들이밀고 앞세운다. 그러면 하나님은 네가 마귀고, 걸림돌이라서 쓸모없다고 하면서 한쪽으로 제쳐 둔다. 너에게 개인적인 바람과 속셈, 상상, 관념, 그리고 타락된 성품이 있어도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진리를 찾고 진리에 순종하면서 진리를 깨달은 만큼 조금씩 실행한다. 하나님이 책망하면 조금 괴로워도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나서 본분을 계속하며 포기하지 않는다.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훌륭하다고 칭찬한다. 이런 사람은 결국 온전케 되고 철저하게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너희는 이런 의지가 있느냐? 그런 의지가 얼마나 강하냐? 그것은 네가 깨달은 진리의 범위에서 얼마나 행할 수 있는지, 또 이해한 만큼 실행하는지에 달렸다. 이것이 가장 실제적이다. 네가 깨닫지 못한 진리는 열심히 구하면 된다.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곰곰이 생각하고,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점을 볼까? 진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본다. 하나님은 진리를 좋아하는 정도를 어떻게 판단할까?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실행하는지를 본다. 그 일은 어렵고 곳곳에 산재해 있는 난관이 너를 가로막고 네 발목을 잡는다. 하나님은 네가 어떻게 하는지,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본다. 예를 들어, 두 가지 본분이 있는데 너는 그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하나는 체면도 서고 몸도 편한 비교적 가벼운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좀 어렵고 힘들고 괜히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 못 듣고 책망만 받는 일이다. 너는 잠시 생각한 끝에 어떤 것이 쉽고 편한 본분인지를 살핀다. “저 일은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는 못 듣는 일이야. 하지만 진리를 많이 얻을 수 있고, 하나님 집을 위해 부담을 덜어 주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일이야. 이 일은 비록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해도 힘들지 않아. 이걸 택해야겠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은 뭐라고 할까? 아마 네게 ‘교활’이라는 두 글자를 선사할 것이다. 어떠냐? ‘교활’이라니, 괜찮고 딱 어울리는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종종 하나님을 오해한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공의와 같은 온갖 좋은 말들을 하나님께 갖다 붙이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그 일에 써먹는다. 매우 솔깃한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의 관념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앞서 했던 좋은 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스스로 쳐 놓은 덫에 걸려 괴로워한다. 얼마나 괴로울까? 2, 30년씩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무엇이 진리인지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방법 또한 알지 못한다. 급기야는 ‘하나님을 믿는 동안 대체 하나님께 뭘 받았고, 귀착지는 어디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너를 ‘교활한 사람’이라고 칭한 사실을 알고 이렇게 원망할 것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칭호군. 내가 어쩌다가 이런 칭호를 얻었지?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많은 것을 바쳤는데 말이야.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시구나.”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은 것이냐, 아니면 사람이 경우가 없는 것이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옹졸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측하고 종종 하나님을 오해하고 판단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판단하면서 진리도 얻지 못하고, 스스로 덫에 걸려 괴로워하며 자신을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그것은 정말 몰상식하지 않으냐?

결국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네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닫든 중요한 것은 실행과 진입이다. 네가 깨달은 진리를 실행과 진입의 길로 생각하고, 그 진리가 너의 실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탁상공론은 필요 없다. 노트에 받아 적는 것이 무슨 소용이고 컴퓨터에 저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신경 써서 많이 듣고 그것을 마음에 기록하고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써야 한다. 너무 많이 기억하고 새길 필요는 없다. 들은 것이 많으면 정작 사용해야 할 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사용하지? 하나님 말씀에 좋은 귀착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내가 지금 지위를 위해 추구하며 이렇게 뛰어다니고 행하면 되겠지. 포기하고 헌신하면 분명 좋은 귀착지를 얻게 될 거야.” 이것저것 기억하려고 하다가 결국 한 마디만 기억하는데, 이것은 진리를 터득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 많이 듣고 기억하는 것을 떠나 궁극적인 목적은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 사람의 생각과 관점, 관념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각종 오해와 불만, 거역, 대적, 원망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일이 닥쳤을 때 온갖 좋지 않은 관점, 잘못된 관점, 이성적이지 않은 것들이 변화되면 사람의 성품도 바뀌게 된다. 항상 강조하는 것은 성품의 변화이고, 이것이 바로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다.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성품의 변화를 중심으로 실행한다면,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삶에서의 행동과 됨됨이, 처세 방식, 사람에 대한 관점, 일이 닥쳤을 때의 관점과 처리 방식 등이 모두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전 말씀:제117편 상상과 관념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다음 말씀:제119편 진리를 구해야만 하나님의 행사를 알게 된다

추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