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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편 상상과 관념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일단 일종의 종교나 종파로 변해 버리면 하나님이 이를 버리기가 쉽기 때문에 아주 위험하다. 교회는 하나님께 속하지만, 종교 단체는 세상에 속한다. 하나님은 교회에 있는 사람을 구원한다. 종교 안에 있는 사람은 제약이 너무 많아서 구원받기가 어렵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 단체들은 어떤 색상이나 부호를 상징으로 삼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신들의 상징이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정 상징이나 상징적인 색을 보면 바로 어느 종교, 어느 종파인지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그 색이나 부호가 자기들의 상징임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아보게 만든 것이다. 인간은 신앙과 종교를 이렇게 이해하고, 이런 식으로 항상 규례와 의식, 특정한 격식 안에 집어넣으려고 한다. 불교의 상징적인 색은 무엇이냐? 황토색과 벽돌색, 이 두 가지가 불교의 대표 색상이다. 도교는 짙은 회색과 옅은 회색이 아니냐? 기독교를 대표하는 색은 무엇이냐? 녹색과 붉은색, 흰색이다. 녹색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생명입니다.) 붉은색은 예수의 보혈, 흰색은 성결을 뜻한다. 인간은 신앙이나 종교, 종파를 이렇게 인지한다. 색상이나 부호, 또는 일종의 의식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한 스스로를 타이르고 속박한다. 마음속에 이런 상징이 있는 경우, 인간은 매우 영광스럽게 그 종교나 종파에 소속되고 동화된다. 그 종교나 종파의 일원이 되는 것에 매우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의식, 심지어는 상징적인 부호에 지칠 줄도 모르고 열심히 몰두한다. 그 기독교인들은 공연히 십자가를 달고 다닌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서너 개씩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몰라줄까 봐 무슨 일만 생기면 입으로는 “오, 주여!”라고 외치고, 손으로 성호를 긋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이해하는 신앙이다. 신앙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느냐? (틀렸습니다.) 왜 틀렸느냐?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아주 경건하고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일종의 의식, 표면적인 행위일 뿐 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 그들이 누구를 믿고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인생에서 어떤 방향을 택했는지,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볼 수가 없다. 신앙이 형식이 된 이상, 그 안에는 순수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의식밖에 없다. 안팎으로 진정한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신앙은 인생의 길이나 방향, 사람됨의 원칙과 관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이 아무리 경건하다고 해도, 목에 십자가를 아무리 많이 걸고 다녀도, 심지어 이스라엘에 가서 예수가 배신당한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걸으며 당시 예수의 심정을 직접 체험했다고 해도, 실생활에서 그들이 사람으로서의 근본, 사람으로서의 원칙과 방향, 심지어 사람됨의 바탕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한 종파의 추종자, 혹은 한 교파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 즉, 남들처럼 돈과 출세,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보면, 그 행위에 변화가 있고 신앙도 남다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세상의 어떤 패괴된 인간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도를 보자. 불교도들은 세속적인 강호 종파 간 다툼에 관여하지 않을 것 같으냐? 그들 내부에서 주지 자리를 두고 다투지 않느냐? 똑같이 다툰다. 심지어 상대에게 독을 타기도 하고 전임 주지를 때려죽이거나 비상수단으로 상대를 처치하고 자기가 그 자리에 오른다. 누가 주지가 되든 그 뒤에는 항상 남모르는 사연들이 숨겨져 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강호에서 생기는 일이나 무림 파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들이 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세상일에 무관심하느냐? (아닙니다.) 이 파벌이라는 것이 겉으로 보면 매우 절제되고 고독한 생활에, 사찰 밖의 어떤 세계와도 접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이 그렇더냐?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종파, 종교, 신앙에도 진리가 없다. 소위 종교인들이 지켜야 할 계율이라는 것의 배후에 있는 그들의 생각이나 사람됨의 원칙, 세상에 대한 태도, 명리에 대한 태도는 결국 끊임없이 뺏고 빼앗기는 다툼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은 죽어도 깨닫지 못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세상일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태도, 생존의 태도는 어떠냐? 진리가 있느냐? 여전히 진리는 없고, 꼭두각시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 않으냐? 수행하여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 세상일에도 무관심하고, 나쁜 일도 저지르지 않고 하루 종일 불경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수행하여 득도하고 귀적하여 극락세계로 가기를 바라는 것이 바른길이냐? 그들이 지키는 계율은 인성에 갖춰야 할 것이고 필요한 것이냐?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지키는 것들이 진리가 아닐진대, 죽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음은 자명하다. 그들이 죽어서 가는 세계가 극락세계이냐? 대답은 뻔하다. 거기는 분명 극락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소망에 불과할 뿐이다.

방금 얘기한 문제가 무엇인지 좀 알아들었느냐? (하나님을 믿는 데는 규례도 없고, 정해진 것, 정해진 양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무슨 규례나 상징도 없고, 사람을 속박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킬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대체 왜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 어떤 이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공허한 것이 아니냐? 바로 이방인들이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돈도 공허하고, 가족도 공허하고, 그 어떤 지위나 명리도 공허하다. 이렇게 모든 게 공허하다면 사람은 과연 왜 사느냐? 무엇으로 사느냐? 그 이론이 과연 성립되느냐?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고, 무엇을 봐도 하찮고 무엇을 해도 다 공허한데, 이것은 진리이냐? 이것 역시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목적은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함이 아니다. 인간이 자제하고 인내하고 스스로 단속하고 통제하거나 혹은 세뇌를 통해 이런 것을 내려놓거나 잊어버리거나 기억에서 지워 버린 나머지 모든 일에 무덤덤해지고, 결국 만사를 하찮고 허무하게 여기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사대개공’이 아니냐?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않고, 물질세계의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인지나 감각, 마음, 생각이 없고,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은 무엇이냐?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이고 큰 틀이다.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내려면 사람은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 그 말은 맞지만 실제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정상 인성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을 증거하고 경배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내용이 좀 있구나. 예전에는 하나님 말씀에 현대의 예술을 좀 배우고, 정상 인성을 갖추고, 현대인의 생활 상식을 배우라고 언급했는데, 내용도 많았다. 이런 내용은 모두 긍정적 사물의 실제로 모두 긍정적이고, 정상 인성이라면 갖출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서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정상 인성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이론과 개념은 알고 있다. 실생활에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이런 것들을 살아낼 수 있느냐? 이것은 실제와 관련되고, 진리와 관련된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런 건 안 하고 저런 건 안 따지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많은 상상과 관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미술이나 예술에도 관심 없고, 긍정적인 사물이나 고급스러운 것도 잘 모르고, 하나같이 시골뜨기처럼 옷차림도 촌스럽고 먹는 것에도 관심이 없어서 그저 배만 채우면 되고, 육체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황토색 옷을 입고 항상 엄숙하고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또 그래야만 하나님을 잘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고정관념이 아니냐? 옷차림에서 옷 색깔을 놓고도 나름의 기준과 정의를 내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고정관념이 드러난다. 왜 이것을 고정관념이라고 단정할까? (사람이 자기 머리로 상상한 것이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황토색 옷을 입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율법을 제정할 때 사람들에게 일렀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모두 황토색이다. 산천, 하류, 호수, 조류, 어류, 동물, 식물 등 만물이 모두 황토색이다.”라고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봤을 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땅의 색상을 일부만 황토색으로 바꾸었다. 전부 바꾼 것이 아니다. 흰색 모래로 되어 있는 곳도 있고, 붉은 흙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고, 검은 흙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사실과 하나님이 한 말씀에 근거할 때, 사람이 상상과 관념을 드러내는 것은 죄이다. 어째서 죄인가? 하나님 말씀과 맞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한 것이 아닌 인간 스스로 상상해 낸 것으로,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 하나님이 요구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다. 사람의 상상과 관념은 진리이냐? 그것은 정죄받아 마땅하지 않으냐? 정죄받는 것이 억울하냐? 원통하냐? 우리 교회는 색상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권장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어떤 색은 가장 피해야 하고, 어떤 색은 반드시 입어야 한다고 권장하였느냐? (아닙니다.) 빨간 옷을 입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빨간 옷도 꽤 괜찮다. 나는 빨간 옷을 입는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중에 가을 나뭇잎은 온갖 붉은색을 자랑한다. 꽃들 중에도 빨간 꽃이 있지 않으냐? 꽃의 색깔은 너무나 다양하다. 무지개도 온갖 색이 다 있지 않으냐? 우리는 어떤 색상도 비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색상을 정해 우리를 상징하지도 않는다. “우리 교회를 상징하는 색은 파란색이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누가 그렇게 정한 것이냐? 이 색상을 결정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 믿은 지가 몇 년째인데, 아직도 빨간 옷을 입고 다녀요? 그럼 못써요! 하나님 집에서는 지금 빨간색을 권장하지 않아요. 파란색이 대세라고요. 그 옷은 파란색으로 염색해야 합니다.” 영이 통하지 않는 자가 아니냐?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면서 항상 외적인 일에만 열심히 매달린다. 혼자서 규례에만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려고 하고, 자기도 피곤할 뿐만 아니라 남도 피곤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자기 혼자 상상하고 규정한 것을 진리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전해 그것을 따르고 실천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믿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런 규례나 관념과 상상이 생겨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옷차림에 대해 어떻게 요구해야 할까? 바르고 단정하며 적절하고 자연스럽고 품격이 있어야 한다. 바르고 단정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셔츠의 첫 단추를 반드시 채우고 소매 단추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왜 채워야 하는가? 속살이 비치지 않기 위함이다. 특히 이성에게 속살을 보이게 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 그 생각은 누구 머리에서 나왔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했느냐? 이것이 진리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셔츠의 단추를 몇 개 채우는 것이 진리이냐? 셔츠를 입은 사람 중에는 단추를 풀고 안에 반팔 티셔츠를 입는 경우도 있는데, 아주 캐주얼한 느낌이다. 이것이 진리이냐?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바르거나 단정하지 않은 것이냐?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다 채워야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바르고, 단정하고, 모범적이고, 빈틈없고, 깔끔해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덕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과 관점이 아니냐? 그런 생각은 잘못된 관점이다. 그것은 개인의 상상과 관념이다. 자기가 상상한 이치와 관점을 진리라고 여기고 지키려는 것인데, 이런 사람은 치우치고 고집 센 사람이 아니냐? 이것은 정상 인성이 아니다. 이런 완고한 사람은 남을 지적하기를 좋아한다. “지금 입은 그 셔츠 말인데요, 단추가 일곱 개인데 다섯 개만 채우면 안 돼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박할 것이냐? “다섯 개만 채우는 건 진리가 아니라면, 몇 개를 채워야 진리인가요?” 이렇게 묻는다면 상대가 대답할 수 있을까?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진리 여부를 떠나서 단추를 다 채우는 것이 단정하고 바르잖아요. 바른 것은 적어도 진리에 부합되고 진리와 관련이 있어요.” 그렇다면 이것이 바른 것이냐? 이것은 진리와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그 기준과 원칙은 무엇이냐? 적절하면 되는 것이다. 적절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아래 단추 다섯 개를 채우고 위의 두 개를 풀면 시원하기도 하고 남들이 보기에 정상적이다. 일곱 개를 목 끝까지 다 채우면 어떠냐? (비정상적입니다.)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유별난 것을 말한다. 무엇을 받아들일 때 치우치고 그릇되며 터무니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의견을 듣고 그의 관점대로 일을 하다 보면, 정상 인성의 길이 아니고, 비정상적이라고 느껴진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박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 사람이 너에게 규례를 지키게 하면 그걸 다하고 난 뒤 느낌이 불편하고 정상 인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볍게 말하면, 그 사람은 너무나 치우치고 그릇되다. 무슨 일을 받아들일 때 치우치고 그릇되며 순수하지 못해 무슨 일이든 관념과 상상을 동원한다. 이 일에 관해 진리를 구하지 않고 늘 멋대로 상상하고 치우치고 그릇되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 인간은 사악하다. 어떤 것이든 남들 생각과는 다르고, 정상 인성대로 생각하지 못한다. 생각이 이상하고 사상이나 관점, 방법, 생각, 사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모두 순수하지 못하고, 그 무엇도 진리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치마를 입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맞는 말이냐? 먼저, 이 말은 진리일까? 이론적으로 보면, 이 말은 진리가 아닌 것이 명확하다. 그러면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느냐? 이 방면의 원칙은 무엇일까?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느냐? 날씨가 40도를 웃돌 만큼 더울 때 치마를 입으면 시원하다. 본분을 할 때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 상황이 적합하거나 기온이 알맞을 때 물론 입을 수 있다. 이것이 원칙이다. 사람이 말한 그 말의 원칙은 무엇이냐? 그 말에는 원칙이 없다. 해서는 안 되고, 허용하지 않고, 할 수 없고, 하면 안 되고,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치마를 입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어떤 범위 안에 정해 놓은 것이냐? (치마를 입지 않는 사람에 정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이냐? 치마를 입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바지를 입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 그릇된 이론에서 얻어 낸 결론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를 외관상으로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외관상으로만 사람을 단속하고 규례를 지키게 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접했을 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항상 고민하며 말한다. “어떡해야 되지? 이렇게 해도 잘못된 거고 저렇게 해도 잘못된 거라면, 어떻게 해야 맞는지 모르겠어!” 그런 사람을 따르면 너는 항상 재수가 없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따르면 규례를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원칙이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치마를 입는 일은 원칙에 따라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이 말한다. “저는 치마를  좋아해서 영하 20도인 한겨울에도 치마를 입어요.”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냐? (안 됩니다.) 왜 안 되는 것이냐? 또 하나의 규례가 되었구나. 겨울에 집 안 온도가 25도일 때, 건강한 여성들은 치마를 입어도 괜찮으냐? 온도를 그렇게 높이 올려놓았으니 겨울에 치마를 입어도 되는 것인데, 무엇을 근거로 안 된다고 하는 것이냐? 너는 추워해도 다른 사람은 추워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겨울에는 치마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진리이냐? 또 하나의 규례가 정해진 것이다. 마음씨가 그렇게 못된 것이다. 일에 직면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규례만 지키게 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옷을 입는 이 일에서도 영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이 통하지 않으면 비웃음을 당하고 규례를 지키는 일이 쉽게 나타난다. 규례를 지키고 흠집을 찾고 사소한 문제에 끝까지 매달리는 것은 비웃음을 당할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이 기준은 무엇이냐? 적절하고 자연스러우면 되는 것이다. 보았을 때 문제가 없고 단정하며 옷이 깔끔하면 된다. 또 자신의 조건, 나이, 키에 따라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적합하면 되는 것이다. 치우치지 말고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야말로 정상 인성인 것이다. 그 어떠한 규례도 없고 원칙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모든 일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이며, 원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너는 분별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너에게 어떤 일에 대해 말할 때 규례를 지키게 했다면, 너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설득하고 “이것은 진리가 아니고 규례니, 당신 말을 안 듣겠습니다.”라고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 중 대부분이 항상 규례를 지킨다. 자신이 규례를 지키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 규례를 지키게 한다. 이것은 사람을 해치는 행동이 아니냐?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람이 항상 규례를 지킨다면 아무리 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규례를 지키는 사람은 겉면으로 하기 좋아한다. 즉, 방법을 중시하고 시간, 견해, 생각, 상상, 어떠한 방법을 지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잘 지키고 나서 그는 ‘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얻었고 진리를 깨달았어. 하나님 뜻에도 맞고, 온전케 되었어.’라고 생각한다. 보아라. 아무것도 아닌데도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가련하냐!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무엇을 깨닫는 데에 신경 써야 하느냐?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갖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런 측면의 실행 원칙을 먼저 찾아야 한다. 실행 원칙을 많이 깨닫게 되면, 다양한 내적 상태와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여기에서 천천히 다시 진리를 찾고 구하면 진리를 얻게 된다.

오늘날 각 부류의 사람이 진리와 참 말씀, 창조주의 음성을 대할 때, 다양한 목소리와 다양한 관점이 모두 폭로된다. 생각과 관점이 치우치고 그릇되며 독선적이고 교만한 자들, 그리고 구습에 얽매이고 낡아빠지고 융통성이 없으며 전통문화를 따르는 자들, 또 일부 무지하고 적대시하는 자들은 미친 개처럼 긍정적인 것이면 마구 물어뜯는다. 그들은 긍정적 사물의 음성과 긍정적 사물의 발표이면 마구 물어뜯는다. 그들은 짐승에 속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 각종 관점이 모두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온 인류의 편협하고 완고하며 강퍅하고 교만한 사탄 추태가 모두 폭로되고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분별하여 그 속에서 식견을 넓혀야 하며, 또 그 속에서 진리를 조금 찾고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것들이 흘러나온다. 그렇다면 너희에게는 이런 것들이 드러나느냐? 어떤 경우에는 드러나는 것이 다르고 말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사실상 그 성품은 너에게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 예수를 받아들인 후에는 온 세상에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전부 비천한 인류라고 생각한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구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은 상층 인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모든 사람을 멸시한다. 이런 성품은 좋은 것이냐? 그는 이런 측면에 대하여 식견이 없고 편협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패괴 성품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지만, 자신도 이런 측면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너희에게는 이런 것들이 나타나느냐? 분명 그렇다. 온 인류의 성품은 동일하다. 단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 혹은 하나님 사역의 필요, 하나님의 정하심으로 인해 각 부류의 사람의 본성과 본질, 추구, 소망에 차이가 날 뿐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도 없고 영도 없다. 죽은 사람이고 짐승이어서 신앙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온 인류 중에 가장 비천한 사람이며, 인류로 간주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나머지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은 깨달은 진리가 더 많고, 식견과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더 높으며, 이론과 관점의 측면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한 단계 더 높다. 한 예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여호와를 믿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보다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더 높고, 창조주의 창조와 역사에 대한 식견이 더 높다. 3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은 기독교인보다 더 높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역사의 진리가 한 단계씩 높아지면, 거기에 맞춰 사람이 깨닫게 되는 진리도 분명 점차적으로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기 전에, 혹은 받아들이고 나서 현재까지 드러낸 패괴 성품, 본성과 본질은 실질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인들과 비교했을 때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너희는 이 단계 사역을 조금 더 일찍 받아들였고 많은 진리를 듣고 깨달았으며,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성과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많이 생겼을 뿐이다.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통해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다시 보면, 그들이 너희보다 더 나쁘다고 느끼게 된다. 그것은 네가 똑똑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너희보다 나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함께 놓고 보면,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모두 동일하다. 모두 생각과 상상에 의해, 자신의 취향에 의해 일을 하고 하나님을 대하는데, 패괴 성품도 동일한 것이다. 그들이 일단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고 이런 말씀을 듣고 이런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람과 사람간의 차이는 결국 비슷해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 일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이런 말씀과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이런 진리들은 어떠한 일부 사람들이나 어떠한 인종에 속한 사람, 어떠한 부류에 속한 사람, 어떠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필요한 구원이다. 온 인류는 현재 피부색, 인종, 전통문화, 성장 배경, 사회 제도가 다르거나 먹는 음식이 다르고, 혹은 문화적 배경에 다소 차이가 있고, 교육 방식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표면적인 현상이다. 온 인류는 한 사탄에게 패괴되었으므로, 패괴된 본성과 본질은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런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이런 사역은 어떠한 민족이나 어떠한 부류의 사람을 상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상대로 하는 것이다. 두 민족 문화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며 교육 방식이 다르다 할지라도 패괴 성품은 동일하다. 하나님이 보기에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할 때, 비록 점에서 면으로 확대되는 방식으로 한 지역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고 온 인류에게 공급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큰 붉은 용의 자손이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은 맞지 않네요.”라고 하는데, 이것이 맞는 말일까? ‘큰 붉은 용의 자손’은 단지 한 인종에 속하는 인류를 부르는 호칭일 뿐이지, 이 호칭을 가진 사람의 패괴 본질이 이 호칭을 가지지 않은 인류의 본질과 다르다는 것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사실, 동일한 것이다. 온 인류는 그 악한 자의 손아귀에 있다. 즉, 한 사탄에게 패괴되었으므로, 패괴된 본성과 본질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오늘날 중국 사람이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을 듣고 난 후 거역하고 대적하며 이의가 생기고 상상하는 이런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런 말씀들을 다른 인종에 속하는 인류에게 말하게 되면, 그들이 보이는 태도 역시 상상과 이의를 품고 거역하며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심지어 대적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동일한 것이다. 온 인류의 태도는 어떤 인종이든, 어떤 문화적 배경이 있든, 하나님이 폭로한 인류의 그러한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온 인류의 패괴는 공통된 것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 구원하는 자는 어떤 민족이나 어떤 무리의 사람이 아니라 온 인류인 것이다. 이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이 인류 중에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고 남다르거나 다른 부류에 속하며 하나님이 주재하는 대상이 아닌 사람이 있느냐? 내가 하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이 온 인류를 주재하고, 온 인류는 한 분의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인종이나 어떠한 인류에 속한 사람이 더 고급스럽고 능력이 더 크다고 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달라 보이고 더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가 동일하다. 인류가 하나님의 눈에서는 같은 존재인 것이다. 어떤 일에서 이를 볼 수 있느냐? 능력의 우열은 표면적인 모습이다. 패괴 성품과 본질이 같은 것이야말로 실상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이러한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는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효과를 볼 수 있고, 모두 이러한 패괴 성품을 겨냥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의 모든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류에게 공급하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임을 볼 수 있다. 이 일은 명확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도리이냐, 아니면 실제로 본 것이냐? (오늘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은 각국각계를 향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반응은 어떠냐? (다양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내고 드러내는 인류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류의 본성과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을 보았고, 그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의 반응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았다. 진리에 반감을 가지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상상과 이의로 가득 차 있다. 바로 허무맹랑한 생각 속에 사는 것이다.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인류의 첫 번째 반응이나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본성과 본질 속의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통된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인 소리와 관점은 이 인류를 대표하지 않느냐? 이 인류를 대표할 수 있다. 그들의 상상은 그 당시에 예수님이 왔을 때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들의 상상과 동일한 것으로서 변하지 않았다. 십자가를 2천 년 동안 지고 다녔음에도 그 꼬락서니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하면 사람이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들이나 천성에서 나오는 것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성경 지식을 깨닫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천 년 전, 바리새인은 그렇게 예수를 대적하였다. 지금의 ‘바리새인’은 동일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들에게 잡히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잡혔더라면 아마 10번도 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고, 또한 절대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본성과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았을 때 너희 마음속에 어떠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당히 무서운 것이 아니냐?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느냐? 이는 상당히 무서운 일인 것이다! 성경과 십자가를 들고 율법에 근거해 바리새인의 옷이나 제사장 옷을 입고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정죄한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저지른 일이 아니냐? 하나님을 정죄한 사람,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먼 곳을 볼 필요가 없다. 바로 우리 곁에 있지 않으냐. 저 사람일 수도 있고 너 자신일 수도 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진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알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면 진리를 얻을 수 없고 하나님과 영원히 적이 되어 합할 수 없게 된다. 네 마음속에 ‘나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원치 않아.’라는 주관적인 바람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바람은 소용없다. 억제해도 소용없다. 이는 사람의 본성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진리가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실제를 갖추기를 추구하여 하나님과 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른길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어느 측면에서 착수하고,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어떤 관점으로 본분을 대하고 주변 사람들과 일어나는 일들을 대하고 각 부류의 사물을 대해야 하는지를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며,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깨닫는 것이 규례나 관례이고, 너를 속박하고 규정하는 것이고, 관념과 상상이라면 깨달은 것이 맞느냐?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항상 무언가를 정의하고 항상 무언가를 규정하여 자신을 힘들게 만들면 그 깨달은 것들은 잘못된 것이다. 깨달은 것은 반드시 진리에 부합되어야 하고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러면 네가 깨달은 것이 정확한 것이고 성령의 깨우침이자 순수한 터득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어떤 경우에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묵상하고, 기도하고, 찾고 구하며, 교통해야 합니다.) 맞다. 깨닫지 못해도 괜찮다. 형제자매에게 자주 찾아가 교통하고 더 많이 찾고 구하면 된다. 우리는 근거가 있고 방법이 있다. 그 어떤 일도 공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근거를 찾아 각 측면의 의견과 원칙을 결합하여 마지막에 이 일을 정확하게 마무리 짓는다면 깨닫게 되지 않겠느냐? 공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너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된 것이 아니다. 공기를 향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자신의 공허한 상상에 의지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관념에 따라 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가장 큰 착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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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모든 유형(有形)의 사물은 공허한 것이며, 공허한 것은 유형의 사물과 다르지 않다.

②사대개공(四大皆空): 세상의 모든 현상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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