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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편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바른 자세

사람에게 진리가 없으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앎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실한 믿음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한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사람의 생각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쉽게 관념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늘 사람의 생각과 상상으로 일하게 되어 우매한 일과 어리석은 일, 쓸모없는 일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러고도 본인은 옳다고 생각한다. 율법시대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온 다음,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셔서 그들의 생활은 괜찮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의 뜻도 몰랐기 때문에 늘 만족할 줄 몰랐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면서 남겨 두지 말고 그것을 그날까지 다 먹으라고 하였다. 내일도 내려 줄 것이니 오늘 것은 다 먹고 남겨 두지 말고 버리라고 알려 주었으나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옹졸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 늘 남겨 두었다. 결국, 다음날 만나는 다 썩어 더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훈으로 삼지 않았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먹을 것과 쓸 것, 마실 것을 제때에 베풀어 주었지만 사람은 여전히 평소처럼 자기 생각대로 먹다 남은 것을 전부 저장해 두었다. 이튿날이 되면 썩는데도 그 다음날이면 같은 방식대로 만나를 저장했다. 그런 존재에게 이성이 있느냐? 이성이 없다. 진리를 모르면 정말 큰일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해도 사람은 믿지를 않는다. 이 일을 놓고 보았을 때, 그때의 인류와 지금의 인류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별반 차이가 없다. 가련한 모습일 뿐이다.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때는 “하나님은 정말 좋아!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셨어. 홍해를 갈라 물을 벽처럼 세우고 사람들을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셨어. 하나님의 행사는 너무나도 기묘해!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말 잘해 주셔!”라고 했다. 그럴 때는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전능도 믿으며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생활 속에서 난관에 부딪히게 되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고기를 먹지 못해도 하나님을 원망했다. 악인이 나와 미혹할 때는 여전히 미혹되고, 하나님을 저버릴 때는 여전히 저버린다.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배를 불리게 되었고, 더 이상 애굽 사람들의 학대를 받지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여호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 것이냐? 사람은 왜 그럴까? 그것은 피조물이 아직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인정하지 않을까? 사람 안에 아직 진리가 갖추어지지 않아 누가 자신의 주인인지, 누가 자신의 하나님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탄에게 짓밟히고, 괴롭힘을 당하고, 유린당하고, 미혹될 때는 아주 불쌍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거니와 반항까지 하며, 하나님께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께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한다. 게다가 이기적이고 비열한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만의 욕망과 타산을 계획한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 주고, 사람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대체 누가 사람에게 잘해 주는지를 모르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는 음식을 먹고, 하나님이 주는 물을 마시고, 하나님이 주는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도, 일이 닥칠 때면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평안할 때는 자기의 사업을 하고 사탄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 너희가 말해 봐라. 사람은 대체 어떤 존재이냐? 불쌍하기도 하고 밉상이기도 하고 속상하게 하기도 하는 존재다. 이성이 없다! 그럼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귀를 기울이고, 마음으로 묵상하며, 찾고 구하며, 받아들이고 순종해야지, 머리로 연구해서는 안 되며 항상 자기만의 계획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창조주를 인정하고, 창조주가 사람에게 행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창조주의 주재와 지배, 배정을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순종하며, 창조주가 사람을 위해 배정한 모든 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피조물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고, 고통받을 일도 없으니 고통을 받지 않게 된다. 사람의 모든 고통은 다 어디에서 오느냐? 사람이 진리를 몰라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맞서고 창조주께 대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고통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여 주신 기적은 작은 것이었느냐? 사람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행사가 적었느냐? 그런데 사람은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할까? 사람은 왜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사람의 본성이 사탄에게 패괴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하면 그런 추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계명과 율법을 반포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사업, 인류를 구속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처음에 계명을 반포한 것은 먼저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시키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은 그저 사심이 조금 있거나 본능적으로 조금 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본능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먹고 싸고 잠자는 일상생활이 전부일 뿐, 그 외에 생각은 기본적으로 비어 있었다. 사람은 어떤 것이 긍정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부정적인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고,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며, 정상적인 이성 안에 갖춰져야 하는 것인지를 몰랐다. 사람에게는 기준이 없었고, 무슨 일을 하든 원칙이 없었으며 근거가 없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도덕적인 것인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아닌지, 사람이 해야 할 것인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으면 했던 것이다. 보아라. 그러면 무엇과 같으냐? 동물과 차이가 있느냐? 동물은 같이 지내면서 싸우고 싶으면 싸운다. 먹이를 빼앗을 때는 자기 몫만 챙기면 되고, 자기만 먹으면 되고, 자기가 우세를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동물은 그게 원칙이다. 이치를 따질 것도 못 되고, 이성을 논할 것도 못 된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일을 자신의 이익에 따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별다른 근거가 없이 자신의 취미와 소원에 따라 하였다. 그런 인류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겠느냐? 그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런 인류에게는 어떤 이성도 없었고, 시비를 판단하는 능력도, 양심의 최저선과 사람됨의 기준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인지, 어떤 일들이 악인이 하는 짓인지, 악인에게는 어떤 행동들이 나타나는지, 착한 사람에게는 어떤 행동들이 나타나는지, 어떤 규정과 원칙과 율령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그때 사람들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규율과 규례, 계명, 율례, 법령 같은 것들, 예를 들면 이웃 사이에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자녀는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떤 일들이 계명에 따라 처벌받는 나쁜 일인지,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인류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창조주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창기 인류의 처음의 행동 표현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 계획, 인류를 구속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인류의 행위를 규범화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규범화시켰느냐? 바로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반포한 계명과 법령, 규정들로 규범화한 것이다. 그 안에는 세부적인 내용들이 매우 많다. 먹는 것에 관해서는 병이 났을 경우, 어떤 식물(食物)을 먹어야 하고, 어떤 식물은 피해야 하는지, 계절에 따라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오늘날 양생학에서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어떤 약을 발라야 하고, 절기에 따라 어떤 약초를 채집해야 하며, 어떤 병에 어떤 식물(植物)이 이로운지 알고 있었느냐? (몰랐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계명에서 알려 주지 않았느냐? (알려 주셨습니다.) 또 계명에는 일부 세부적인 것들, 예를 들면 일가족이 어떤 곳에 머물 때, 어떤 대비책을 마련해야 도둑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까지도 다 들어 있다. 얼마나 자세하게 정했는지 보아라! 하나님은 그런 것들까지도 다 고려해서 사람들에게 당부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보셨을 때, 최초에 지음받은 인류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것도 다 그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 아니냐?

너희도 시간이 되면 그런 계명들을 다 자세히 보거라.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최초에 인류를 인솔하면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 기초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런 일들은 알기만 하면 될까? 아니다. 그런 일들을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인류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에 대해 더 분명하게 알기 위함이다. 또한 하나님이 최초에 창조한 인류를 어떻게 보셨는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초의 인류에게는 어떤 것들이 부족했는지, 하나님이 그 부족한 것들을 또 어떻게 하나하나 채워 주고, 가르쳐 주고, 가르쳐 주고, 알려 주어,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해 주셨는지 이런 것을 알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반포한 그 모든 계명에서 최초의 인류는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생활해야 하는지조차도 몰랐음을 알 수 있다. 몸 건강을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상식들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 알려 주어야 했다. 한 마디라도 적게 하면, 사람 혼자서는 수백 년, 수천 년이 흘러도 귀결할 수 없고, 모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알려 주어야 했다. 살인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그렇다. 살인은 범죄이고, 간음은 나쁜 짓이라는 것까지도 그때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것은 나쁜 짓임이 아주 명확하지 않으냐? 절도, 강탈, 간음, 살인은 모두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사람들은 몰랐다. 그럼 지금의 사람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하나님께서 계명으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맞다.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인류는 더욱 난잡했을 것이고, 지금의 법률 같은 것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교육을 받는 것에는, 가정 교육이든 사회 교육이든 모두 도덕규범이 있는데, 그 도덕규범은 그때부터 계속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은 살인은 범죄이며, 법을 어기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알고 있다. 만약 사람에게 법률의 제재가 없을 경우, 그런 일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법률 규정으로 알려 주지 않았다면, 살인은 흔히 발생하지 않았겠느냐? 마치 닭이나 개나 돼지를 죽이는 것처럼 흔히 있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법률이 엄했던 시대를 보면 형사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적었지만,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은 시대를 보면, 시대가 어지럽고 형사 사건이 많았다. 인류는 하나님이 반포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조금씩 알려 주고 타이르고 가르치고, 명백하게 고지하고, 경계를 주면서부터, 각종 부정적인 것이나 범죄하는 일이나 부도덕한 일이나 불법적인 일에 대해 처음으로 개념과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에게는 범죄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 어떤 일을 하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식이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의 기준이 있게 되었고, 경계선이 하나 있게 되었는데, “이런 일들은 하지 말아야겠구나! 이런 일을 하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하고, 나쁜 결과를 낳게 되는구나! 절대로 그 경계선을 넘지 말아야겠다. 일단 건드리게 되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이고, 어떠어떠한 처형을 당할 위험이 있구나.”라는 의식이 생긴 것이다. 반드시 그에 따르는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예를 들면, 간음죄를 지은 사람,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다. 그리하여 인류의 행위는 점점 규범적이 된 것이다. 규범적이란 어떤 것을 말하느냐? 어떤 일을 해도 비교적 이성적이고, 경계선이 있고 범위가 있으며,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이미 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곧바로 “이 일은 이런 선을 넘어서는 안 돼! 이건 건드리면 안 돼. 아니면 돌에 맞아 죽게 될 거야! 벌을 받게 될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일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럼 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제동을 건다면 사람의 행위는 규범적이지 않겠느냐?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규범적인 행위나 혹은 사람이 계명과 율례, 율령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거나 겁내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이 착실해졌음을 볼 수 있지 않으냐? 어떤 것을 착실해졌다고 할 수 있느냐? 철이 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아무 짓이나 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에 경계선이 생긴 것이다. 이런 것이 한 가지 이성적인 모습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이 사람의 마음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이 그런 이치를 깨닫고, 그런 이성을 갖출 수 있도록 알려 주셨든,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효과는 이미 이룬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최초의 인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행한 일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일은 다 긍정적인 것의 실제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악, 시비, 옳고 그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정의로운 것과 사악한 것, 무엇이 흑암이고 무엇이 광명인지, 무엇이 정확한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람이 이런 이치를 마음으로 깨닫고 알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사실상, 최초의 인류에게서 이미 이런 효과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잘못됐다는 사실, 안식일이 되면 그날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제사를 드리는 것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사실, 또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지 않고, 훔치거나 빼앗지 않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고, 점유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서 잘못되고 부조리하다는 사실, 그리고 살인은 범죄이며, 살인을 하고 싶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도록 자제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 간음은 잘못된 행위이며, 부조리하다는 사실 등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준히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한편, 하나님이 가르쳐 준 것, 그것이 생각이든, 이념이든, 의식이든, 사비와 옳고 그름, 정의와 사악 등등에 대한 것들을 끊임없이 사람에게 주입해 주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는 기초가 다져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토대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만일 그때 하나님이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인류는 어떠하겠느냐?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때보다 더 엉망진창이고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그때의 인류보다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최초에 하나님이 인류를 만드신 후부터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보여지기 시작했고 사람에게서 시행되었다. 그렇지? 그럼 하나님이 온 인류를 계속 이끌고 있고, 온 인류의 운명을 주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행사와 지혜는 무소부재하다는 말이 빈말이 되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반포한 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이 율법을 반포함으로 그때의 인류를 가르치거나 타이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인류는 없었을 것이고, 또한 소위 말하는 문명사회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문명사회란 어떤 것을 말하느냐? 사람이 도덕규범을 좀 알고, 시비를 가릴 줄 알고, 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 전체에 질서가 잡히고 어지럽지 않으며, 관리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사람마다 법의식이 있고, 공공질서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법의 단속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다 하나님이 행한 것이 아니냐? 현재의 인류가 이렇게 될 수 있게 된 것도 최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반포해 주신 율법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너희는 “율법은 먼 옛날의 이야기잖아! 나와는 상관없어. 하나님이 예전에 반포하신 율법이 나랑 무슨 관계가 있지? 보라고 해도 보지 않을 거야. 이스라엘 사람에게 반포한 거지 나한테 반포한 것도 아니잖아!”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틀렸다. 율법을 이스라엘 사람에게 반포해 준 것은 단지 대표성을 지닌 사건일 뿐, 사실은 온 인류에게 반포한 것이다. 게다가 그 계명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포하였고, 그 당시에 계명을 들은 대상이 작은 무리일지라도, 그 계명의 영향력은 후대 인류에게 계속되어 왔다. 현재 인류 사회에 지금 같은 질서가 있게 되고, 지금 같은 완전한 법률 체계가 세워져 인류를 단속할 수 있게 되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혹은 전체 사회가 안정적이고, 화목하고, 질서가 있게 된 것은 그때의 계명을 반포한 것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 기초를 정말 잘 닦은 것이다! 만일 인류에게 최초의 행위에 대한 규범화가 없었다면, 온 인류 사회는 오늘날까지 지금처럼 질서정연하게 발전되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행사의 구현이고,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의 결과이며 성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동영상에 613가지 율법을 선보이고 싶어서 종교인들이 요약한 성경 구절을 쓰려고 하는데,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요약한 내용이 원문과 차이가 있느냐? (내용 면에서 조금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2장 8절에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라고 되어 있지만, 요약한 내용에는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발생할 사고를 방지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22장 1절에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라고 되어 있지만, 요약한 내용에는 “주운 물건은 주인에게 되돌려 주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차이가 너무도 많이 난다. 첫 번째 구절이 원문에는 사람이 지붕에서 떨어지면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간다고 했는데, 그것은 법률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원래는 죄라고 표현했고, 지금의 말로는 위법이라고 한다. 요약한 내용은 정죄하는 원칙과 근거가 너무 약해졌다. 가볍게 대충 묘사하는 식으로 됐다. 발생할 사고를 막으라는 말만 하고, 법적으로 책임을 지라는 말은 생략했다. 종교인이 요약한 내용에는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멋대로 해석하고, 그릇되게 해석한 것이 아니냐? 그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것이 아니냐? 다음 구절을 보자.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라고 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실천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계명은 너무 엄격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처음에는 그것이 법을 어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아니냐?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는데, 사람의 마음에 그런 개념이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먼저 본 사람,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라는 개념이 있다. 종교인들이 “주운 물건은 주인에게 되돌려 주라”라고 요약한 말은 주운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뜻이다. 그저 그렇게 간단하다. 하지만 원뜻은 세부적인 것이 있다. 꼭 주운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게 되었거나 마주치게 되었거나 혹은 그것이 있는 위치를 알게 되었다면, 못 본 척하지 말고 잃어버린 주인에게 행방을 알려 주거나 그 물건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규정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원문에 따라야 한다. 너희는 종교인들처럼 하나님 말씀의 원문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율법과 계명을 인용할 때, 하나님 말씀의 원문대로 쓰지 않고 종교인들이 요약한 내용을 쓰려고 하는 것은 무슨 문제이냐? 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통 사람의 말처럼 여겨 제멋대로 고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신 이유와 근원, 근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어떤 목적으로 말씀했는지도 모른 채, 사람의 뜻과 상상에 따라 함부로 고치는 것이다. 그러면 고친 뒤에도 하나님의 말씀이겠느냐? 심각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탄의 말이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냐?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반포한 계명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사람은 그런 그릇된 말을 정리해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하는데, 그럴 자격이 되느냐?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냐? 그럼 이런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원문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원문대로 해야 한다. 그것이 너희가 지켜야 할 원칙이다.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원래 어떻게 말씀했는지에 중시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는지, 그런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표현은 어떤지를 보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래의 말씀을 읽어야 하고, 창조주의 언어 풍격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너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원래의 말씀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종교인들이 요약한 말을 보여 주고, 사람이 곡해한 말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너희도 종교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장황하고 종교인들이 요약한 것보다 간결하지 못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냐? “종교인들이 요약한 게 얼마나 간결해! 한마디로 핵심을 설파했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장황해.” 이런 뜻이 아니냐? 너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네가 사람의 말을 집어넣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과 사람 말을 섞어 놓거나 은근슬쩍 바꿔치기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 자체가 아주 큰 죄다. 너희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수정하는 것 자체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종교인들은 다 불신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인데, 너희가 어떻게 그들과 같은 입장, 같은 선상에 선단 말이냐? 지금은 분명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을 증거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더냐? 하나님의 원래의 말씀, 하나님의 본뜻, 하나님의 초심을 뜻한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 이 모든 말씀을 하신 본뜻, 목적과 의의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자세하게 말씀했는지를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면서도 머리로 분석하고 요약하는데, 결국엔 하나님의 원래의 말씀을 왜곡시켰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읽는 것은 다 사람의 말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사칭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요약한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사칭하여 사람들이 지키고 따르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그 말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명의 도용을 하는 것은 무슨 문제이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파의 행위이다. 일에 착수만 하면 그런 성정이 흘러나온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 항상 의견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가지며, 항상 좀 다듬고 가공하려고 하는데, 마귀의 검은 손을 뻗쳐 자기의 말로 바꾸려고 한다. 이것은 사탄의 본성인 교만함이다. 하나님이 진실한 말씀, 평이한 말씀, 인성에 근접한 말씀을 하면, 사람은 무시하고 멸시하며, 경멸의 태도로 대한다. 늘 왜곡시키려고 하고, 사람이 배운 지식과 재능, 사람의 머리로 수정하려고 들고, 방식을 바꿔 보려고 한다. 그런 행위는 역겹지 않으냐? 너희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말거라. 무슨 일을 하든 착실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말씀한 그대로 말해야 한다. 원뜻이 바뀌지 않는 기초에서 현장 교통을 문법적으로 조금 수정할 수는 있다. 일단 의미 전달에 문제가 없으면 함부로 손대지 말아야 한다. 네가 손을 대면 더 잘할 수 있느냐? 네가 진리를 아느냐? 네가 잘 고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잘 고치지 못한다면 다른 의견을 갖지 말고 착실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 원문에 있는 대로 인용하면 된다. 원문에 글자가 한 글자라도 많으면 그대로 옮겨 쓰고 함부로 손대지 말아야 한다. 그 글자에도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성경 지식을 좀 공부하고, 신학 공부를 좀 하고, 책을 좀 많이 봤다고 스스로 뭔가 할 수 있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능력이 진리냐? 하나님이 인성에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말씀을 조금 하면 사람은 항상 수긍하지 못하고 고치려고 든다. 늘 사람의 생각에 맞고, 사람의 구미에 맞고, 사람의 뜻에 맞고, 사람의 귀에 거슬리지 않고, 사람의 눈과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 방식으로 고치려고 든다. 그것은 어떤 성정이냐? 이것이 바로 교만한 성정이다. 무슨 일을 시작만 하면 늘 사탄의 방식으로 한다. 그것은 아주 심각하고 위험한 것이다!

너희는 일을 할 때, 어떤 원칙에 따라야겠느냐? 착실한 자세, 충실한 자세로 임하며, 탁상공론을 부르짖지 말고, 역겨운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견해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면 그 생각을 털어놓고 함께 교통해야지 뒤에서 남몰래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생각이나 의견이 있으면 털어놓고 교통하면 된다. 분명하게 교통을 하면서 형제자매들이 네가 말한 것에 진리가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가 있는지 분별하게 할 수 있다. 많은 일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사람의 말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일리가 진리인지, 아니면 이유나 도리인지, 아니면 이론인지는 분별을 해 봐야 한다. 계명의 원문을 보고, “이 말씀들은 너무 장황해요. 한마디로 할 수 있는 말씀을 두세 마디로 길게 써 놨네요. 좀 더 간결하고 간명하게, 문법에도 맞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 한마디로 알아들을 수 있게 해야겠어요. 들어도 장황하지 않고 바로 이해되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더 잘 증거하고 더 영화롭게 하는 게 아니겠어요?”라고 말한다. 그런 말은 어찌 보면 아주 그럴듯하다. 마치 하나님을 위해 생각하고 하나님의 위신을 생각하는 것 같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욕되게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진리에 부합되느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럼 그것은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이냐? 어디가 잘못된 것이냐? (원칙이 없이 자기 뜻대로 했습니다.) 간결하게 말하는 것이 더 좋고, 효과가 있으며, 사람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네가 어떻게 아느냐? 너와 하나님 중에서 누가 더 잘 판단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분명하지? 그럼 너는 그 말을 정말 진리로 삼았느냐?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유익하고 사람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그 원칙이야 하나님이 잘 파악하고 계시죠. 사람이야 사람을 알 수 없으니까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요.”라고 하지만 실제로 본분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간결하게 만들고 싶고, 좀 더 바꾸려고 하는데,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이냐? 그럼 방금 했던 말들은 무엇이 되느냐? 너에게는 진리가 아니라 글귀일 뿐이다. 네가 ‘하나님은 사람을 파악하시지. 사람의 필요를 알고 계시니 어떻게 말해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지를 알고 계시잖아!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고, 알려 주는 말씀을 사람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구조를 잘 알고 계시니, 사람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잖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 말이 너의 마음에서 진리로 자리 잡으면, 네가 깨닫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셨구나. 한 가지 일을 몇 마디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일리가 있어! 헛되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한 마디라도 더 많이 하시면 사람에게는 더 많은 유익이 되는 거야. 한 마디라도 적게 말씀하면, 꼬투리 잡는 사람이 생기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생기겠구나. 정말 좋은 말씀이야. 내가 함부로 손대서는 안 돼.’라고 느낄 것이다. 사람은 다 마비되고 바보 같아 한마디라도 적게 말하면 안 된다. 어느 방면을 말해 주지 않으면 그 방면은 모른다. 설령 너는 알아도 다른 사람이 모를 수 있고, 너희는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다. 아무튼 모르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 혼자만을 대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말씀한 것이다. 귀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다 하나님이 말씀해 줄 대상이다. 너는 안목이 좁은 것이지? 사람은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난 이 말씀을 다 알아들었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상세하게 말씀하실까?’라고 한다. 너는 알아들었을지 모르지만 아직 못 알아들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부류의 사람을 위해 몇 마디를 더 하게 된다. 그런데 네가 그런 것에 불만을 품는다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너의 그 불만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그것은 사탄의 교만한 성정이 아니냐?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너의 생각에 맞지 않는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를 조금이라도 유로하여, 사람을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관심을 가져 주고, 사람을 헤아려 주고, 전면적으로 보살펴 주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장황하고, 군더더기 같고, 주절주절해 보이며,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의 관념 속에는 그런 생각이 있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인상, 이러한 앎,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다 정확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장 잘 아십니다.”라고 했던 말은 글귀가 아니겠느냐? 너에게서 그 말은 글귀에 지나지 않으며, 너의 앎은 하나님이 유로한 것과 맞아 떨어지지 않고, 결합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너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상상, 교만한 성정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한 것이다. 그러면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맞느냐?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을 대하면서, 네가 판단하고 원망하고 추측하고 의심하고 부인하고 반항하며 선택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를 그런 자세로 대하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그런 자세로 대한다면, 그런 사람은 진리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을 대할 때는 진리의 방식으로 대해야지, 분석하지 말고, 연구하지 말며, 잔꾀를 부리지 말고, 의심하거나 잔머리를 굴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식이다. 절대 ‘난 지식 있는 현대인이야! 난 학벌이 좋아! 난 문법을 잘 알아! 난 어떠어떠한 전공을 했어! 난 어떤 기술과 업무 능력이 탁월해! 난 그걸 잘 알아. 하지만 하나님은 잘 모르시지. 하나님은 전 인류에 관해서는 잘 아시지만 진리를 빼고는 아무것도 모르셔! 업무도 잘 모르고 특히 잘하는 것도 없고, 진리밖에 몰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의 말이 맞다.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하고 만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너의 운명도 주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을 대할 때 사람은 어떤 자세가 있어야 하겠느냐? 착실하게 말을 잘 듣고, 순종하고 받아들이며, 지켜 행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어야 할 자세이다. 절대 연구하지 말라. 내가 한 말들이 너희에게서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태반인데, 너희는 갖은 이유와 변명을 찾아 늘 바꾸려고 한다. 너희가 수정을 잘할 수 있고, 원문의 뜻이 변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수정해도 된다. 하지만 원문의 뜻이 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다면 나는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너희는 항상 이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려고 한다. 너희의 사고 방식이 사역에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된다면 너희에게 여지를 주겠다. 또한 너희가 배운 것과 익힌 기술과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기회도 주겠다. 하지만 너희가 하는 일이 원칙에서 벗어난다면 내가 타협을 해야겠느냐? 타협할 수 없을뿐더러 너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려 줄 것이다. 만약 너희가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나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내가 말한 대로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나는 사람을 바꿀 것이다. 나의 이 원칙은 어떠냐? (좋습니다.) 너희가 잘 알지 못할 때, 나는 모든 주의 사항과 너희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알려 주고, 또한 너희에게 메모도 시키고 질문도 받아 준다. 그다음 너희는 이해한 대로, 들은 대로 할 수 있는데까지 하면 된다. 너희는 어떤 일들을 삼가야 하겠느냐? 원칙에 어긋나는 일임을 분명히 알고 있고, 물어봐도 너의 생각대로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물어보는 것이다. 너는 어떤 의미로 그렇게 묻는 것이겠느냐? 내가 말한 대로 하지 않고 너의 뜻대로 하고 싶기 때문이다. 너희는 절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알겠지? 너희가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최대한 기회와 공간을 줄 것이다. 그것이 너희의 본분이고 직책의 범위이다. 어떤 경우는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너희의 결과물이 모든 면에서 좋아 보이면 내가 찬성하고 칭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애를 썼고 원칙대로 했으며 너희의 직책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작은 흠이 있다고 내가 트집을 잡겠느냐? 내가 봤을 때, 작은 흠은 있을지라도 너희가 배운 것과 익힌 능력으로는 그게 최선이고, 또한 머지않아 너희의 각 방면의 업무 능력이 향상되겠지만 단시일 내에 그 정도 수준밖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에는 나도 너희를 난감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도 매우 잘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너희의 완성품이 나의 기대치보다 더 잘했다면 나의 마음은 기쁠 것이다. 난 이 사람들은 진보가 있으며, 뒤에서 많은 노력을 들였고, 그 진보는 치른 대가와 들인 노력에 따른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또한 이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말하며 격려해 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어떤 부분에서 해낼 수 있고 어떤 부분에서 아직 미흡한지 너희가 한 사역을 보면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지금이 한창 배울 때라 힘을 실어 주지 않고, 부담을 더해 주지 않는다면 자유분방해진다. 그러면 이 몇 년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된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업무 방면과 생명 진입의 각 방면에서도 진보가 더딜 것이다. 너희에게 이런 임무를 주는 것은 바로 너희를 각 방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너희에게 유익이 되고 득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너희가 잘되면 내가 배 아파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겠느냐? 나는 너희가 잘되고, 더더욱 잘되기를 한없이 바라고 있다. 나는 너희가 갈수록 더 잘되기만을 바라며 각 방면에서 진보가 있기를 바란다. 특히 생명 진입 방면과 진리에서 진보가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가장 관건이고 중요한 것이다. 몇 년이 지나도 진보도, 변화도 없이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는 게 아니라 발전이 있어야 한다! 나의 원칙에 대해서 잘 알겠느냐? (잘 알겠습니다.) 그럼 너희가 지켜야 할 원칙과 너희가 다해야 할 책임, 너희의 본분의 범위도 잘 알겠느냐? (잘 알겠습니다.) 잘 알았으면 됐다. 우리는 늘 소통을 해야 한다. 늘 소통하면 마음에 장벽이 사라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다 함께 모든 사역에서 잘 협력할 수 있다. 너희는 일정 기간마다, 한 가지 사역을 할 때마다 점진적으로 진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생명 진입에서 진보가 있어야 한다. 매번 본분을 하고 한 가지 임무를 완수한 다음, 잘 종합해 정리를 하면 깨닫는 것들이 있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어떤 과오를 범했는지, 어떤 방면에서 진보가 있는지, 아직 어떤 방면이 미흡한지를 혼자서 다 정리해 봐야 한다. 영 생활을 할 때에도 반성을 해 보고, 찾고 구하며 함께 모여 교통도 하고, 서로 장점을 취하면서 가야 한다. 그러면 갈수록 더 좋아지고, 더 좋은 변화가 있게 된다. 갈수록 좋은 변화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정상 궤도에 들어서고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는 상징이다. 사람은 바른길로 가야 한다. 바른길로 가지 않을 경우, 갈수록 나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만 더 좋아질 리는 없다. 그렇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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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이전 말씀:제115편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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