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찾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색상

테마

폰트

크기

줄 간격

페이지 너비

검색결과 0개

관련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

제112편 건성으로 본분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본분에서 맡은 일을 너무 대충대충, 대강대강 한다. 어떤 일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이냐? 가볍게 말하면 껄렁거리는 태도가 있어서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하든 참답지 못하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며, 장난치는 성질, 말썽 부리는 성질, 건성으로 하는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인데, 안정적이지 못하고 마음은 늘 본분에 있지 않다. 가볍게 말해서 껄렁거리는 태도가 있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하면 교만한 성정인 것이다! 일을 야무지게 하지도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건 쉬워! 별거 아니야. 내가 할 줄 아니까 다른 사람이 보지 않아도 돼! 내가 결정하면 돼.’라고 생각하는데, 언제나 그런 태도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마음을 놓지 못한다. 이 방면은 변화되어야 하고 극복해야 한다! 네가 뭘 하거나 본분을 하나 맡았을 때, 이러한 정형이 있으면 성찰하고 절제해야 하며, 하나님께 징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늘 어지간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잘하고자 하면 3~5분 혹은 10분 정도 더 들이면 될 일이다. 하지만 농땡이를 좀 피우면 그만한 시간을 들이지 않게 된다. 그러고는 혼자 빈둥거리며 한쪽에서 시간을 때우는데, 결과적으로 네가 한 본분은 불합격이고, 아무런 역할도 못하게 된다. 그러면 훗날 영원한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면, 그것이 참답게 책임을 진 태도이냐? 너는 자신이 하는 본분이 어느 정도의 효과를 내고,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지 아무렇게나 넘어가서는 안 된다. 너는 그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좋은 의사라고 하면 주로 어떤 모습이 있느냐? 좋은 의사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가늠하느냐? 좋은 의사는 의술에 달려 있지 않다. 이방인들의 말로 하면 의사로서의 도덕 수양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의사로서의 도덕을 지닌 사람은 의술이 평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가 증상을 말할 때, 자세히 귀담아듣고 신경을 써서 분석한다. 환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면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어떤 약이면 그 병을 고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환자가 돈이 없으면 조금 싼 약으로 바꿔 주어서라도 빨리 치료해 고통을 덜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면 도덕적인 사람이다.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은 환자가 말을 할 때, 자세히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대충 약을 3~5첩 지어 주고 돈만 챙기면 그만이다. 환자가 약을 먹고 병이 나을 수 있을지, 혹시 다른 증상은 생기지 않을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어떻게 하면 약을 많이 쓸지, 비싼 약을 쓸지만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도덕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부도덕하지 않느냐? 부도덕하면 다 천벌을 받게 된다!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이 있어야 하고,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한다. 그런 것이 덕(德)이다. 마음이 바르지 않고 선의도 없는 데다가 양심과 도덕의 제한선도 없다면 부도덕하게 된다. 부도덕하면 어떤 일도 잘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이고, 사람 앞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다. 덕과 인품이 있고 책임감이 있고 양심이 있으면, 너는 정인군자(正人君子)이고 좋은 사람이며 올바른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 책임을 지고 잘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타인에게 도움이 되도록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외모에 달려 있지 않으며, 재주나 재능, 특기나 은사의 크기에 달려 있지 않다. 능력도 안 되고, 재간도 없는 데다가 사람 됨됨이마저 나쁘다면 부도덕한 사람이다. 덕을 잃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려면 몇 가지 기준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양심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올바르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너희는 무엇을 하거나 본분을 할 때, 자신의 행위와 마음가짐을 자주 성찰하느냐? 만약 성찰하는 경우가 적다면 일을 쉽게 그르칠 수 있는데, 그러면 너희의 분량은 아직 부족한 것이다. 늘 성찰하지 않거나 아예 성찰해 본 적도 없다면, 그런 사람은 이방인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만약 종종 성찰을 한다면 그나마 하나님을 믿는다는 면이 조금 있다. 많이 성찰해야 한다. 자신의 정형을 성찰해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지, 마음가짐은 단정한지, 일을 하는 동기와 근원은 하나님의 검증에서 통과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였는지 매사에서 성찰해야 한다. 어떨 때는 ‘이건 대충 해도 되겠지, 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이 두 번의 ‘되겠지’를 놓고 말하면, 그것은 한 가지 정형이다. 이것은 일을 하거나 일을 대하는 태도이며 본분을 대하는 마음 상태이다. 그 마음 상태가 바로 한 가지 정형이다. 그런 정형이 본분을 책임감 없이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냐? 너희는 아직 성찰할 줄 몰라 이것을 아주 자연적인 유로라고 생각하고, 인성의 정상적인 행위이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주 그런 정형과 상태에 처해 있다면 이면에는 한 가지 성정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찰해야 할 필요성과 진지하게 대할 필요성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의 속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어떤 본분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더 잘하려고 애쓰는 자세로 하면 점점 더 잘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참답게 대하지 않는다면 배운 것마저도 써먹지 못한다. 그리고 써먹는 것마저도 참답게 대하지 않는 데다가 잘 아는 사람의 지도가 없다면 늘 발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배운 것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배우든 이론을 배우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면 이론을 실천으로 승화시키고, 실천의 기초에서 성공으로 승화시키고, 자신의 특기를 더 잘 발휘하거나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에 적용하여 성과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많이 배워야 한다. 다방면으로 꾸준히 배우고, 찾고 구하고, 절장보단하며,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만한 것과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 주면, 그 방면에서 터득하려고 노력하고, 신경을 써야 한다. 너에게 알려도 주었고, 그 당시에는 너도 그렇게 하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받아들이고 인정도 했었지만 지나서 생각해 보다가 “얼추 하면 됐어.”라고 한다면, 그런 태도는 어떠하냐? 업무를 대하는 면에서나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면에서나, 그러한 태도는 좋지 않다. 그게 바로 건성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만한 것이고,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강퍅한 것이다. 너희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느냐? (있습니다.) 너희가 아주 진실하게 인정하는 것을 보니 성실한 마음이 있구나. 하지만 인정만 해서는 안 된다. 인정만 한다고 변화되지는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변할 수 있느냐? 교만한 본성, 교만한 성정이 유로될 때, 건성건성, 어물쩍 넘기려는 태도, 태만한 태도로 대하려는 생각이 나올 때면, 얼른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께 책망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동시에 하나님의 징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 방면의 성정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어떻게 하면 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 하는 목적은 변화받기 위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변화될 수 있느냐? 무엇부터 해야 하느냐? 기도부터 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감찰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다음,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어떻게 협력해야 하느냐? 본분을 하다가 마음에 ‘웬만하면 됐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안 돼! 잘못된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라고 바로잡아야 한다. 죄악의 손, 교만한 성정의 손이 나가려고 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하면서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의 책망과 채찍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마음에 느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들 때, 얼른 바로잡고 세심히 살펴야 한다. ‘방금은 잘못된 거야. 또 사탄의 패괴 성정을 유로할 뻔했어! 또 사탄에게 권세를 내줄 뻔했고, 사탄 성정의 지배를 받을 뻔했어. 또 건성으로 할 뻔했으니 정말 맞아야 해. 뺨을 때려야지’ 그 순간, 이 생각이 패괴 성정을 유로하는 너를 책망하고 있음을 느꼈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바로 돌아서야 한다. 그럼 죄를 어떻게 자백해야 하느냐?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절하듯 엎드려서 기도할 필요는 없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또 건성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저를 지켜봐 주세요. 패괴 성정이 저의 모든 것을 주관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걸 주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협력하고 진리대로 실행하기를 원하니 하나님, 저를 감찰해 주세요.”라고 고백하면 된다. 그렇게 기도하면 마음의 정형이 바뀌게 된다. 정형을 돌려세우는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네가 순조롭게 돌아설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충심을 다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는 책망과 징계에 절대적으로 다 순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너는 돌아서게 된다. 네가 또 건성으로 대충 넘어가려고 하고, 너의 본분을 태만한 태도로 대하려고 했다가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책망으로 말미암아 제때에 돌아서게 되었다면, 잘못을 한 번 만회한 것이 되지 않느냐? 너의 과오를 한 번 만회한 것이 아니냐? 그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업무를 마치고 나면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세심하게 살펴보고, 따져 보면 확실히 문제가 보인다. 그럴 땐 고쳐야 한다. 고치고 나면 마음이 놓인다. 찜찜하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니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본분을 참답게 대하고 책임지는 태도이다. 다시 말해, 공을 많이 들이고 세세하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참답게 대하고, 책임을 지며,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면 사역을 잘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그렇게 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뻔히 보이는 잘못인데도 찾아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한다. 만약 그런 마음이 있다면 성령이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면 너는 문제점을 보게 되고,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네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성령이 깨우쳐 주고 인도해 준들, 잘못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느냐? 사람의 협력, 사람의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하고, 뜻과 생각을 어느 쪽으로 많이 기울이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에 무엇을 품었는지, 마음을 얼마나 쓰고 있는지, 노력을 얼마나 쏟는지는 하나님이 감찰한다. 하나님은 다 볼 수 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사람이 협력하는 부분도 아주 중요하다. 마무리한 본분과 완성한 일에 대해 나중에 후회가 없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지금은 마음을 다하지 않고 힘을 다하지 않다가 나중에 일단 문제가 발생하여 악결과를 낳게 되면, 그때는 후회해도 늦지 않겠느냐? 영원한 죄책감을 남기게 되면 그것은 오점이다! 오점은 사람이 본분을 하는 과정에 남긴 과오이다. 자신의 본분 내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건성으로 대하지 않으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한다면, 네가 그 기간에 했던 본분은 기억될 것이다. 기억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남는다. 기억되지 못할 일은 무엇으로 남느냐? (과오와 악행이 됩니다.) 과오로 남는다. 지금 악행이라고 말하면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여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때면, 너는 그것이 단순히 행위적인 과오만이 아니라 악행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게 될 때면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잘할 걸! 그때 좀 더 신경 쓰고, 좀 더 공을 들였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영원한 오점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죄책감으로 남아 버린다면 그것은 큰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역에서, 맡은 일의 모든 부탁에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자기 양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억되고, 선행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지, 건성으로 어물쩍 넘기지 말아야 한다. 여한으로 남으면 다시 메울 수 없고, 과오로 남겨지면 나중에는 항상 죄책감, 빚진 마음이 들 것이고, 양심의 가책이 들 것이다. 어떤 길이 좋으냐? 어떤 길로 가는 것이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이냐? 본분에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선행을 예비하는 길, 자신의 선행을 쌓아 어떠한 아쉬움도 남기지 않는 길이다. 그렇지 않으냐? 과오를 쌓지 말고 여한을 남기지 말며, 빚진 마음을 남기지 말고 빚진 마음이 생기게 하지 말라. 사람에게 과오가 너무 많으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알고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되는 것이다! 너의 과오가 많을수록 너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점점 더 많이 쌓는 것인데, 종국에는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외적으로는 별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교란이나 방해를 하지 않았고, 악인이 하는 짓을 하지도 않았고, 적그리스도의 길로 가지도 않았으며, 크게 잘못한 것도 없어 보이고, 원칙적인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게 되었다. 왜 그런 것일까? 사람은 문제를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므로 문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되었는데도 그 사람은 계속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계속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뭘 하기만 하면 항상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와 건성으로 하는 태도, 그리고 산만한 태도로 했다는 것이다.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마음을 다하는 것은 언급할 것도 못 되고, 그나마 힘을 좀 쓴 것도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힘을 다했다고도 논할 수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은 과오가 끊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건성으로 하는 태도를 바꾸는 모습과 회개하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손으로 행한 악에서 떠나지 않았고, 악을 버리며 회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회개하는 태도를 보지 못했으며, 또한 태도를 돌려세우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은 계속 그런 태도와 방식으로 자신의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대한 것인데, 그런 끈질기고 강퍅한 성정이 좀처럼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하나님께 빚진 마음을 느껴 본 적이 없고, 자기가 건성으로 대하는 것을 과오와 악행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빚진 마음도, 죄책감도, 자책감도 없으며, 양심의 가책은 더더욱 없는 것이다. 그러한 모습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이 사람은 구제불능이구나.”라고 하신 것이다. 아무리 많은 교통(원문: 道)을 들었어도, 그 사람의 태도는 바뀌지 않고 돌아서지 않았으며,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을 하든, 본인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든,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마음에 감동을 받지 못하고, 마음 상태가 바뀌지 않고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본 하나님은 “이 사람은 가망이 없구나. 아무리 말해도 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고, 이 사람을 돌려세울 수 없구나.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구나, 그러니 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본분할 자격이 없고 나의 집에서 효력할 자격도 없다.”라고 말씀한다. 무엇 때문일까? 그 사람이 본분을 하고 사역을 하는 과정에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관용과 인내를 베풀어 주었어도 효과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에게 변화를 줄 수 없고, 더 잘하게 할 수 없고, 그 사람을 진정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가도록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구제불능인 것이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구제불능이라고 확정하고도 그 사람을 꽉 잡고 놓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손을 놓는다. 어떤 사람은 늘 “하나님, 저를 놔주세요. 이 고생을 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저를 징계하지 말아 주세요. 좀 자유롭게 해 주세요! 제게 선택의 자유를 좀 주세요! 제가 대충 하게 좀 두세요! 좀 쉬게 두세요! 제가 긴장을 풀게 좀 두세요. 제가 방탕하게 좀 두세요!”라고 요구를 하는데, 그 사람은 단속받기 싫은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네가 바른길로 가고 싶지 않다면 손을 놓고 너를 놔주겠다. 네 멋대로 하도록 놔둘 테니, 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너는 구제불능이니 구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한다. 구제불능인 사람에게 양심의 감각이 있겠느냐? 빚진 마음이 들겠느냐? 양심의 가책이 있겠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책망, 징계, 채찍, 심판을 느낄 수 있겠느냐? 느끼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큰일이다. 사람이 그 정도까지 갔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장담하기 어렵다, 물음표를 쳐야 한다. 그러면 큰일이다. 너희는 어떻게 하고 어떤 길로 가야 그렇게 되는 길을 피할 수 있고, 그러한 상황을 방지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느냐? 우선 길을 잘 택해야 한다. 지금 가장 현실적인 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본분을 잘하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대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잘 구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거나 맡겼을 때, 혹은 임무를 하나 주었을 때, 그것을 대하는 너의 태도이다. 가장 직관적인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인데,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이다. 너희가 이런 것을 잘 파악하고 있고, 알고 있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정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임무를 하나 맡기거나 본분을 하나 주었을 때, 네가 가벼운 태도로 소홀히 하고 성의 없이 대한다면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요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본분을 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고, 선택하는 방식과 길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본분을 건성으로 하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대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결과는 네가 잘할 수 있는 본분도 잘하지 못해 합격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본분을 하는 너의 그런 태도를 아주 못마땅해하는 것이다. 원래는 네가 정상적으로 찾고 구하고, 협력하고, 심혈을 쏟고, 전심전력으로 모든 정력을 다 쏟아부으며 한동안 그 일을 위해 신경 쓰고, 마음 쓰고, 생각하고, 자료를 찾으며 몸과 마음을 거기에 바친다면, 하나님은 앞에서 너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며 “자, 결과가 여기에 있다.”라고 알려 줄 것이다. 즉, 네가 전력을 다해 협력할 때, 하나님이 이미 다 안배해 놓았기 때문에 네가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잔꾀를 부리고 중도에 바르지 못한 마음이 생겨 외딴길로 빠진다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그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는 안 되겠다. 드러났으니 한쪽에 가서 쉬거라. 너는 게으름을 피우기 좋아하지 않았느냐? 너는 잔머리로 이득을 취하기 좋아하지 않았느냐? 너는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는 쉬거라.”라고 말씀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때 준비한 은총과 기회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준다. 너희들이 말해 보거라. 그것은 손해를 본 것이냐, 이득을 본 것이냐? 그 손해는 너무 큰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환경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데, 그가 온전게 하려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온전케 한다. 너에게 다양한 환경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체험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더 나아가 진리를 얻도록 해 준다. 그러면 너는 성정 변화가 생기고 진리도 얻게 되고 생명도 얻게 되는 것이다. 보아라, 너는 많은 것을 얻게 되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대가를 조금 치르는 것이 대수이냐? 그것으로 무엇을 얻게 되느냐? 사람은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느냐? 생명과 진리를 얻기 위함이 아니냐? 그런데 그런 것들을 체험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절대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임해도 다 똑같이 회피하는 태도, 즉 꼼수를 부리려 하거나 거절하려 하고,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에 따르려 하지 않고, 진리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 하며, 항상 자기가 지배하고 자기 뜻대로 하려 하며, 자신의 패괴 성정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움직이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분명히 한쪽에 내버려둘 것이다.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지금은 몰라서 그럴 수 있지만 깨달은 다음에는 반드시 뉘우치고 하나님이 지배하고 주관하는 올바른 인생길로 가야 한다. 그것이 옳은 길이다. 길이 옳고 방향도 옳으면 설령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연약해질 때도 있고, 소극적이 될 때도 있고, 낙심하거나 패괴 성정을 유로할 때가 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계속 의연하게 나아가면서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발견하면 제때에 돌려세우고 해결하면 된다. 절대 문제를 질질 끌거나 회피하지 말고 ‘이런 건 별거 아니야, 대충 해도 괜찮을 거야. 하나님은 모르실 거야. 하나님은 내가 예전에 헌신했던 걸 봐서라도 날 용서해 주실 거야. 다음에 좀 더 신경 쓰면 되지 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매번마다 다음으로 미루면 한 번 또 한 번씩 기회를 잃게 되는데, 스스로 기회를 버리거나 잃게 되는 것이다. 결국엔 네가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끊어 버린 것이다. 그럼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 네가 온종일 생각하는 것은 전부 악한 것이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이 전부 사탄이 가져다주는 고통일 것이다. 그것으로 너는 삶에 지치고, 아무런 길도, 방향도 없고, 그 어떤 희망과 빛도 보이지 않는, 해결책이 없는 환경에서 살게 된다. 사람이 올바른 인생길을 가지 못한다면 영원히 사탄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탄의 패괴 성정의 통제를 받으면서 살게 되어 아무런 희망도 보지 못한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너희는 알아들을 수 있느냐? 바로 본분이 임했을 때, 네게 어떤 일을 맡겨 주면 어려운 부분을 어떻게 피할까부터 생각하거나 어려운 것은 잠시 제쳐 두려고 하지 말고 어려움에 맞서 용감하게 나아가라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며 하나님이 계시기에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너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서 왜 일이 임하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너의 든든한 기둥이 아니고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므로 실생활에서 언제나 하나님 앞으로 와야 한다. 너희는 하루 동안 하나님 앞에 오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하루 동안 하나님 앞에 몇 번이나 오느냐? 성과가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때가 아주 적으면 영 안이 메마른다. 사람은 모두 어려움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다가 문제가 생겨야 하나님을 찾는다.

사람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않으면, 늘 사탄의 패괴 성정으로 살게 되고, 사탄의 올무 속에서 살게 되는데, 자신의 앞날, 체면, 지위와 이익을 위해 궁리하고 갖은 애를 쓴다. 네가 그런 태도를 본분에 적용하고, 진리를 찾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사용한다면 진리를 얻게 된다. 예를 들어, 네가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도 갖은 애를 쓰면서 아주 완벽하게 계획을 하고, 심지어 그 절차까지 하나하나 메모한다고 할 때, 그 마음을 진리 추구에 사용하고 본분에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그러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또한 바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왜 다른 사람에게는 잘해 주시면서 나한테는 그러지 않지? 난 왜 항상 깨우침을 받지 못하고, 늘 연약하고 다른 사람보다 못할까?’라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이 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오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네가 날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나는 물러나 있을 것이다. 네가 내게 구할 때 다시 베풀어 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간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실까? 돈일까? 안락일까? 세상일까? 명리일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 이 문제에서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이 방면의 패괴 성정이 있는데, 이기기 힘들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고, 진리의 원칙도 없습니다.” “이런 본분이 저에게 임했는데, 저는 분량이 너무 작고 부족한 것이 많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구하기를 기다린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네가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올 때, 하나님은 널 깨우쳐 줄 것이다. 사람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면 결국 그것대로 살게 되고, 그런 것을 유로하게 된다.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면 열매도 원하는 대로 맺게 된다. 사람이 항상 진리에 공을 들이며 늘 하나님 앞에 오고 늘 진리를 찾고 구한다면, 진리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럼 너는 사람의 모습이 있고, 정상 인성이 있고, 진리 실제가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네가 늘 자신의 모든 방면의 이익만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려하고 공을 들이며, 심지어 물불을 가리지도 않고 목숨까지 건다면, 사람들의 존경과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고, 체면도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진리와 비교했을 때 어떤 것이 더 중요하겠느냐? (진리입니다.) 이러한 도리는 다 알고 있지만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이익과 지위를 중시하지,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속으로도 분명하게 알고 있고, 말도 분명하게 잘 하긴 하는데, 그게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사실 사람은 멍청하고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이것을 제대로 깨달을 때면 분량도 생긴다. 그러려면 진리를 추구하면서 노력을 쏟아야지, 흐리터분하게 대하거나 대충대충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해야 할 말씀을 다 하였으니 더 이상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없고, 역사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제는 사람을 검증하겠다고 말할 때면, 재난이 떨어질 것이고 사람은 다 시련에 빠지게 될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는 반드시 도태될 것이다. 너에게 아무리 든든한 백이 있어도, 아무리 은사가 있고, 재능이 있어도, 아무리 대단한 학식이 있고, 아무리 높은 지위와 명망이 있어도 다 소용없다. 그때가 되면 너는 진리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인데,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 하나님을 얻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을 얻지 못하면 얼마나 무력하고, 가련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조금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인지하고 있고,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진리를 추구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진리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야지 그저 의식할 정도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분명하게 알 수 있겠느냐? 그것도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진리는 사람의 갖가지 어려움과 그릇된 생각, 협소한 관점과 타락된 성정, 그리고 모든 방면의 패괴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진리만을 추구하거라.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어려움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 네가 “난 하나님 말씀을 많이 볼 거야!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서 하루 24시간을 볼 거야!”라고 한다 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정의 변화가 있으려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처럼 말씀만 많이 읽고, 보고, 말씀을 많이 전파하기만 하면 성정 변화가 된다고 말씀한 적이 없다. 하나님 말씀 어디에도 그렇게 알려준 적이 없다. 하나님은 너에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바른 인생길로 들어서라고 하였다. ‘들어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착실하게 진리를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 실행과 관계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에게서 패괴 성정이 유로되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도 회피할 수 없고 피해 갈 수도 없으니 사람은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왜 이렇게 말할까? 어떤 사람은 ‘난 계속 패괴 성정이 유로되는데, 아무리 해도 변하질 않아. 어떡하지? 난 영원히 이 꼴로 살아야 하는 건가? 하나님은 날 싫어하고 혐오하시는 게 아닐까?’라고 한다. 그런 태도와 생각은 옳으냐? 사람에게 패괴 성정이 있고, 항상 패괴 성정이 유로된다고 해서 완전히 구원받을 가망이 없고 구제불능인 것이 아니다. 늘 패괴 성정이 유로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 사탄 패괴 성정의 지배를 받고 있고, 사람의 실질이 사탄의 패괴 성정, 즉 사탄의 실질이라는 증거다. 그런 사실을 증명한 것이니 사람의 본성 실질과 하나님의 본질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인정한 다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사람은 패괴 성정이 유로될 때, 패괴 성정을 유로하는 상태에서 살고 있을 때, 제때에 그것이 문제고 패괴 성정이며, 그것이 하나님께 대항하고 거역하는 것이며,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느끼고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원망하거나 소극적이 되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패괴 성정이 유로될 때 자신을 더 깊게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한 방면이다. 그 밖에, 주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와야 한다. 피동적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받아들여 자신의 정형을 제때에 돌려세우고, 진리대로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며 일을 원칙 있게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날로 정상이 되고 정형도 날로 정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패괴 성정과 패괴 실질, 사탄의 갖가지 추악한 몰골에 대해서도 갈수록 분명하게 분별이 되며, ‘사탄이 날 방해하는 거야! 사탄이 내게 생각을 주는 거야.’라는 어리석고 유치한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패괴 성정,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질, 사탄의 실질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생기면서 거기에 속박을 받지 않고 정확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패괴 성정이 조금 유로되었거나 지난날 과오가 있었거나 본분을 건성으로 했던 것 때문에, 혹은 늘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정형으로 연약해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구원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는 정형에서 살지 않고, 자신의 패괴 성정을 정확하게 대하고,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하게 되는데, 패괴 성정이 유로될 때면 제때에 돌아설 수 있게 되고 제때에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며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를 간구할 수 있게 된다. 사탄의 패괴 성정과 사탄의 실질, 여러 가지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정형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리 추구에 대해,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점점 자신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사는 것이 자유롭게 되지 않겠느냐? 그것이 바로 진리 실행이고 진리를 얻는 경로이며, 사람이 구원받는 경로이기도 하다. 패괴 성정이 사람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사탄의 실질과 본성이 사람의 생각과 행위, 마음을 통제할지라도 진리 앞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그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거니와 어려움도 아니다. 사람에게 어떤 패괴 성정이 있든, 혹은 어떤 일로 어려워하거나 속박을 받더라도, 다 길이 있고 해결할 방법이 있으며, 상응한 진리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희망이 있지 않겠느냐?

너희는 구원받는 것에 대해 믿음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이냐? 어떻게 얻은 것이냐? 그 믿음이 너희에게는 도리이냐, 아니면 실제적으로 느끼고 체험한 것이냐? 너희가 방금 “있다”고 대답하는 순간, 마음에 자신감이 있었느냐? 너희는 하나님을 몇 년 믿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구호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실제 분량이라고 생각하느냐? “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내가 구원받는 것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어! 난 체험하고 느끼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감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구호가 아니라 실제 분량이다. 또 다른 정형이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믿고 있으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 거의 확실해! 틀릴 리가 있겠어? 만약 아니라면, 이 많은 사람들도 다 잘못 가는 게 될 텐데, 얼마나 심각하겠어? 지금 믿는 사람들이 다 바보도 아닌데 말이야! 믿는 사람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니, 이 도(道)는 참 도가 맞을 거야! 게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보니,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 맞는 것 같기도 해! 최소한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하라는 거니, 다 긍정 에너지잖아. 하나님 집에서 하는 일들이 다 얼마나 위풍이 있어! 긍정적인 거잖아. 난 확신 있어!’라고 한다. 이 ‘확신 있다’는 말은 구호일까? 아니면 사람의 실제 분량일까? 그런 것이 바로 구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봐요, 요즘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가 인터넷이나 교계에서 날이 갈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어요. 상도 많이 탔잖아요. 너무 많아서 벽에 다 걸 수도 없어요. 이렇게 많은 상을 본 건 처음이에요. 누가 이렇게 많은 상을 탈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의 역사죠!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많은 상을 받고, 또 여러 국가와 단체한테 인정받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참 도가 확실해요! 참 하나님의 사역임이 틀림없어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시고 음성을 발하셨다는 말도 틀림없는 사실이 맞나 봐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해 재난에서 죽지 않게 하신다는 것도 아마 진짜일 거 같아요.”라고 한다. 이런 사람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믿음이냐? 그것이 바로 구호이다. 어떤 사람은 기세를 보고 세력만 보고 하나님 사역의 실질은 보지 않는다. 이런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세가 대단하고 사역이 갈수록 커지고 인기가 많아지는 데다 상도 많이 받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을 보고 믿음을 가진다. 누구보다도 믿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참된 믿음이겠느냐?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지 구경꾼일 뿐이다. 그런 것이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자의 말이고, 거짓된 믿음이며, 구호인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그런 허황된 믿음을 갖게 될까?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에 노력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무슨 일을 하든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고, 원칙에 따르지 않으며 애호와 상상에 따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아무리 오래 믿어도 결국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사역이 어떤 성질인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라는 말씀이 어떻게 실증되고, 어떻게 응하는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라는 말씀의 진실을 영원히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것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물만두가 맛있다고 한다. 누군가 “먹어 봤어요?”라고 묻자 “아니요.”라고 한다. “그럼 맛있는 걸 어떻게 알아요?”, “다 맛있다고 그러던데요!” “그럼 어떤 맛인데요?”라고 물으면 이론만 잔뜩 늘어놓으면서 외운 레시피를 다 말한다. 그러나 먹어 본 적은 없다. 그럼 물만두가 맛있다고 한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냐? 그럼 어떤 부류의 사람이 하는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고 실제적인 말이냐? 실제 경험이 있는 사람, 체험을 해 본 사람의 말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마다 어떤 뜻인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응하고 성취되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을 자신의 실제 경력 속에서 체험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주재하고 어떻게 이끄는지, 나아가 더 세부적인 것, 즉 한 가지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징계하는지, 사람의 느낌은 어떠한지, 사람의 실생활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하루를 어떻게 공급해 주는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매사에서 어떤 식으로 이끌어 주며 경력하게 하는지, 이런 세부적인 것들을 다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깊은 도리를 말하지 않고,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하는 모든 말은 다 실제적이고 진리에 맞는다. 즉,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본인이 직접 체험한 것이다. 실제 생활 속에서 체험한 것이므로 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상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하나님은 대체 누구인지를 물었을 때, 꼭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못해도 자기가 체험한 것으로 하나님은 왜 진리인지, 길인지를 설명할 수 있고, 실제 사실과 자기가 직접 체험한 것으로 하나님의 실질은 어떠한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를 알려 주고,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과 경력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며 하나님이 곧 진리, 길, 생명이라는 진실을 증거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주재하는지, 사람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이끌어 주는지, 매사에서 발생하는 난관을 어떤 식으로 헤쳐 나가도록 이끌어 주는지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실제가 아니냐? 그럼,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지 않겠느냐? 그 믿음은 어떤 바탕에 세워진 것이냐? 그런 사람은 눈으로 직접 보았고, 직접 체험하고 느꼈으며, 직접 귀로 들었고, 하나님의 감동과 인도하심, 나아가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를 직접 체험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체험한 것이며, 사람이 연약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으로 격려하고 권면하고 위로해 주고 인도해 주었는지,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책망하고 심판, 형벌하였는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듣게 되고, 어떤 말씀을 체험했는지를 겪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일이 닥쳐 망연자실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 앞에 와서 찾고 구하면, 그 일에 대한 실행 원칙을 깨닫기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깨우쳐 주고, 어떤 식으로 잡아 주고 인도해 주었는지를 체험한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냐? 네가 그런 것을 얻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를 갖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가 있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지금 너희들은 그런 것들을 얻었느냐? 현재 너희의 상태는 누군가 “세상에 하나님이란 없어. 그냥 물질세계야.”라고 하면, “틀렸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없어요? 난 하나님을 인정해요.”라고만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거기에서 더 말해 보라고 하면 똑부러지게 말하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증거하지는 못하는데, 하나님의 증인이 되지 못한다. 뭐가 부족할까? 바로 실제적인 경험 속에서, 그리고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의 존재를 100%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라고 100% 확신을 해도, 사실을 꺼내 놓지 못하면 그 확신은 어디까지나 구호적이고 빈말일 뿐이다. 그런 상태라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미혹될 수 있지 않느냐? 언제든지 그릇된 논리, 잘못된 관점, 그릇된 사설, 사악한 조류, 일부 사람들의 행위, 특히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영적 행위, 듣기 좋은 이론, 좋아 보이는 행동에 미혹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은 진리, 길, 생명임을 아무리 인정하고 확신할지라도 방금 내가 말한 그런 문제들을 피해 갈 수 있느냐?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문제들을 피할 수 있겠느냐? 가령 지금 바리새인 하나가 나와 성경을 두어 구절 읽어 주고 해석도 좀 해 준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는 너희가 ‘틀렸어! 하나님 말씀에 성경의 글 그대로 해석하면 바리새인이라고 하셨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간파했기에 첫 번째 검증은 통과했다. 하지만 만약 그 바리새인이 오늘날 하나님 말씀에 결부하고 또 성경 지식에도 결부하여 이것 저것 이야기하면 너희는 빠져들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구분하지 못해 ‘저 사람이 바리새인이긴 한데, 저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변화가 있는 것 같아!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하셔. 바리새인도 다 변화시켰으니 말이야.’라고 하게 된다. 어떠냐? 미혹되기 시작했지? 그 바리새인이 계속해 너희들이 모르는 내용과 웬만해서는 들어 보지 못한 영적 도리까지 더해서 연설을 하고, 게다가 좋은 행위까지 보이면 너희는 곧바로 그자를 따라가게 된다. 하나님을 따르고 믿는다는 간판을 내걸고 바리새인을 쫓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미혹된 것이 아니냐? 너희는 영적인 척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짓된 프로그램을 보았느냐? 그것을 분별할 줄 아느냐? 어떤 프로그램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보아야 하고 연기해야 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도움받을 수 있는 것인지, 어떤 프로그램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전혀 무관하고 거짓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것으로 너희의 분량이 드러났다. 왜 분별할 줄 모르느냐?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어떤 프로그램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깨달아 생명 진입을 할 수 있는 효과를 주지 못한다. 그런 프로그램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배가 고플 때, 밥과 반찬을 해 주면 배고픔이 해결된다. 하지만 해바라기씨나 사탕을 주면 소용 있느냐? 그것은 어린아이나 달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참된 경력이 없으면 생명 진입이 없고, 참된 경력이 없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이 하는 본분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유익을 주지 못한다.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본분을 해도 규례나 지키고, 건성으로 대할 뿐, 합격되게 본분을 하지 못한다. 건성으로 본분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범사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면서 건성으로 하는 본질을 간파해야 한다. 그래야 건성으로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 ※

어떤 사람은 늘 큰 도리로 자신을 규정한다. ‘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야!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와 거리가 멀어. 그러니 본분을 맡겨 주면 맡겨 준 대로 하다가 효력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돼! 그러다 효력도 못 하는 날이 와서 집으로 가라고 하면 가도 돼.’라고 생각한다. 항상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영원히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다. 너의 그 관점 자체가 옳지 않다. 네 안에 있는 피동적이고 침울한 정서가 너를 앞으로 가지 못하게 속박하고 영향을 주는 것이다. 너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맞는지를 상관하지 말고, 그렇게 규정부터 하지 말고 그 방면을 중시하지도 말라. 일이 임할 때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만 중요시하고 주동적으로 노력하여라. 어떤 일에 속박을 받아 피동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전진하면 안 된다. 네가 어떤 것의 통제를 받거나 어떤 형식의 영향을 받아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진리 추구가 자연스러운 일이 되도록 바꿔야 한다. 마치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처럼 말이다. 본분할 때,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하면서 그 사역을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고,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다해 최소한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최소한의 요구를 기준으로 삼고 기초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초에서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데, 배울수록 너는 더 성숙해지고, 배울수록 본무에 충실하게 될 것이고, 원래 나태하고 육체의 안락을 탐하고 내키는 대로 하던 것들이 서서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면 너는 무엇이 정당한 일인지를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본분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냐?

사실 많은 경우, 사람은 본연의 일을 배움에 있어, 그 환경에 적응하고 순응하며 그 환경 속에서 배운 것에 마음을 들이며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새 성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네가 빨래할 줄 아는 것은 일부러 배운 것이냐? 아니면 어떤 수업을 들었느냐? 아니면 좋은 사람이나 현모양처, 착한 여성이 되기 위해 빨래를 배운 것이냐? 혹은 다른 사람이 너를 게으르고 깨끗하지 못하다고 할까 봐 걱정되어 배운 것이냐? 다 아니다. 바로 생활 속에서 너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령기에 들어서면 스스로 빨래를 해야 되고, 혼자서도 할 줄 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래를 할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면 네가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고 미루지도 않으면서 빨래를 할 줄 알게 되고, 또한 빨래를 자신의 책임과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정도에 이르게 되었느냐? 절제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젊은 친구들은 항상 놀고 싶어 한다. 틈만 생기면 잡담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절제하기 쉬운 것일까? 만일 본분하는 환경, 이러한 정당한 일이 너를 잡고 있지 않는다면, 너의 그런 결점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너를 본분하는 환경에 두어 책임을 주고, 일을 하나 맡겨 주면서 그 책임을 짊어지게 하면 너는 알게 모르게 감당하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마음에는 중요한 일들로 가득 차 있게 되고, 너도 중요한 일들을 하려고 한다. 그렇게 점점 더 본연의 일을 하게 되고 갈수록 성숙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성장한 것이 아니냐? 너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어린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나 너의 본분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을 절제해야 한다. 그리고 본분의 범위에서 네가 해야 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늘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기다리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일단 사람을 의지하면 너의 능력이 너무 부족하게 보여진다. 하지만 네가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짊어지려고 하면서 마음을 들이면, 그 일을 잘할 수 있다. 이렇게 일을 잘해 나가면 이 방면의 진리 실제로 진입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사람은 늘 일 처리와 진리 실행을 매우 명확하게 구분한다. 일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보고 진리 실행은 아주 추상적이고 어려운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 진리 실행과 일 처리는 분리할 수 없다. 진리 실행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바로 네가 일을 어떻게 하는지, 심혈을 기울이는지,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하는 것이다. 손은 본분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 놀러 갈지, 언제 잡담을 나눌지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다. 네가 마음을 쓰면 본분을 잘할 수 있고 건성으로 하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려면 진리를 실행해야 하고 육체를 배반해야 하며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어려운 게 아니지? 사실, 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 바로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음을 기울이고, 뜻을 다하고, 신경을 좀 더 쓰고, 그다음 자신의 본분을 위해 시간 배정을 잘 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너의 모든 시간, 생활 습관, 기호, 사적인 일, 그리고 일상생활, 의ㆍ식ㆍ주ㆍ행이 다 본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은 본분이 바빠서 빨래할 시간이 없으면, 시간이 날 때 하면 된다. 만일 여유가 좀 생기면 하나님 말씀도 읽으면서 장비도 하고 자신을 충실하게 채우면 된다. 그러다 본분이 바빠져서 말씀 읽을 시간도 없으면 본분을 잘 하면 된다. 그럴 때는 잠도 조금 줄여 가면서 모든 중심을 본분을 잘하는 것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본분이 바쁘든, 바쁘지 않든, 너의 생활 계획표는 본분에 따라 조율을 해야 한다. 그것이 마음을 쓰는 것이다.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렇지? 네가 마음을 쓰면 건성건성이 어디서 생기겠느냐? 네가 건성으로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너의 모든 일, 일상생활, 모든 생활 패턴이 본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건성이 나올 데가 없다. 네가 마음을 다 바쳤고, 생활에서의 모든 일을 아주 빈틈없이 세밀하게 본본을 중심으로 짜 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기술적으로 부족할 경우도 있고, 간혹 피곤하거나 정말 너무 바빠서 본분에 실수가 생길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너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했다. 이렇게 보면 진리 실행이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느냐? 분리되어 있지 않고 아득히 멀지도 않고, 갈라놓을 수도 없다. 네가 한곳에 있는 것이 너무 답답하고, 늘 한 가지 일을 하니 너무나 재미없다고 생각되어 아침마다 어디로 놀러 갈지부터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아침에 눈을 떠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날 본분에서 해야 할 것이 몇 가지인지를 생각해 보고 서둘러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제 막 졸려서 잠이 쏟아지려고 하는데,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나 서둘러 그 일부터 처리하고 잠을 잔다면, 그것도 진리를 실행한 것이 아니냐? 그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 일이냐, 조금도 어렵지 않다. 이렇게 실행하면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성장하고 정형에도 변화가 온다. 실행하는 과정에 그 방면의 진리에 대해서도 환해지고, 그 방면의 진리에 대한 체험도 생기니, 누군가 다시 “당신은 온종일 그렇게 바쁘게 보내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충실함을 느끼고, 믿음이 있어요? 어떻게 전혀 소극적이 되지도 않아요?”라고 물으면 너는 체험을 말할 수 있고 간증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진리를 실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냐? 누구는 본분이 어렵다고 해도, 너는 어렵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너의 경력을 교통할 수도 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전이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은 최근 2년 사이에 발전이 있어. 전에는 어린아이처럼 철도 안 들고, 온통 바보같은 말만 하고, 난폭하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어른 같아. 성장했고 철이 들었어.’라고 한다면 그것이 간증이 아니겠느냐? 그것을 바로 간증이라고 한다. 철이 들고 싶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진리가 있어야 하고 진리 실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의 삶을 보고 자연스레 탄복하게 되고, 자연스레 너를 신임하게 된다. 너에게 그런 실제가 없으면 있는 척하려고 해도 못 한다. 어른의 모습은 꾸며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깊이가 없고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말만 하면 사람들이 신임하지 않는데, 들을 말이 없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발전성이 없지 않으냐?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

① 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 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 절장보단(絶長補短):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보완하다.

④ 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⑤ 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이전 말씀:제111편 진리 실제 진입에 가장 기본이 되는 실행 원칙

추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