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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편 성정을 아는 것이 성정이 변화되는 기초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재능이 있으면 교만해지고, 특기가 있으면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면서 자기 능력에만 의지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고 자신의 능력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성정이냐? 교만한 성정이고, 이지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에서 누군가 방안을 제시하면 일일이 받아 적으면서 대답은 잘하지만 돌아서면 뒷전에 두고 생각지도 않는다. 애초에 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태도이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해준 유용한 것도 듣지 않고 고집만 부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성정이냐? 독선적이고 교만한 성정이다. 그런 성정에는 강퍅함도 있지 않느냐? 강퍅함과 교만함은 누구에게나 다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이 정확하고 일리 있는 말을 할 경우, 그 말을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가지고 대한다면, 그 당시에는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으면 바로 실행할 수 있느냐?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이 있어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우선 자신이 갖고 있던 상상과 판단 혹은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그다음 옳은 것을 취하여 자세하게 연구하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비추어 보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태도라면 교만함이 있느냐? 없다. 그것은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태도이다. 반대로 체면 때문이든 순간 납득이 되었든, 어쨌든 그 자리에서는 잘 듣는 것 같고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돌아서서 실천에 옮길 때는 여전히 자기 계획대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들었던 얘기들은 온데간데 없다. 그런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태도이냐? 그런 태도는 사람에게 혐오받는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찬성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데, 심지어 호언장담하며 “이 일은 저에게 맡겨만 주세요. 무조건 잘해 놓을 테니까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까? 저를 믿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한다. 어쩌면 신의와 신용으로 사는 사람 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일 처리할 때가 되면 자기 뜻이 튀어 나와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렇게 해도 좋아 보이니까 내 생각대로 하자.’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당부한 것은 다 잊고 하지 않았다. 그대로 옮기지 않고 뒷전에 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태도이냐? 어떤 성정이냐? 교만하고, 패역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뜻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결정권으로 삼고, 진리의 원칙과 긍정적인 것,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히 뒷전에 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앞에서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실제로 일할 때는 ‘원칙대로 하면 너무 번거롭고 힘들 것 같아. 설명도 많이 해 줘야 하니 시간도 많이 낭비하게 돼. 이렇게 해서 쉽게 가야겠어. 다들 의견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내 말을 따라야 해. 결정권은 나에게 있어!’라고 한다. 그것은 어떤 태도이냐? 간사하고 교활한 것이다. 대답할 당시에는 태도가 아주 진지하고 충실하고 온순하고 경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 처리할 때는 그렇지 않다. 왜 변했을까? 무엇 때문일까? 육체가 고생해야 하고 번거로우니까 귀찮아서 싫어진 것이다. 그때 했던 맹세나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중요하지 않고, 진리 원칙대로 일 처리하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게 우선인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첫 자리에 놓고 하나님의 부탁은 마지막에 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냐? 신용이 있는 사람이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냐? 어떤 사람은 앞에서는 잘할 수 있다고 장담하며 일 처리 원칙까지 몇 가지를 기억해 둔다. 그러나 진행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기자 그 일을 그대로 처리하면 자신이 손해 보게 되고 체면도 깎여 무시당할 것 같고, 자신의 허영심, 체면, 지위, 존엄성이 피해를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잘 처리하려면 많은 정력과 힘을 들여서 꼬박 며칠은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해야 될 것 같다. 그래도 ‘노력해 보자. 이를 악물고 힘내면서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돼. 체면과 명예는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집의 이익부터 고려해야지.’라고 한다. 이틀이 지나 우연히 거울을 보게 되었다. ‘내 얼굴 꺼칠해졌네. 요즘 좀 힘들게 했더니 많이 핼쑥해졌네. 이렇게 하면 안 되겠어. 너무 손해 보잖아. 지름길을 찾아야겠어. 얼버무리면서 해도 끝낼 수 있고, 고생을 안 해도 티가 안 나는 방법을 찾아야겠어. 그렇게 하는 거야!’라고 한다. 그 후로는 힘을 들이지도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해 보지 않도록 노력하지도 않는다. ‘순리에 맡기자. 되는 대로 하지 뭐. 나만 손해 안 보면 돼.’ 보아라, 태도가 변하지 않았느냐? 이제는 충성심이 있느냐? 없다. 그러면 마음을 다할 수 있겠느냐? 힘은 다할 수 있겠느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고 자신의 이익이 위협받게 되니 거부한다. 진리가 아무리 맞다 해도 육체가 고생 안 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고, 어떤 것이든 자신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 자신에게 피해를 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일은 무조건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최고 준칙이다. 이것이 책임감이 있는 태도이냐? 이것은 나쁜 길을 가고, 나쁜 짓을 하려는 조짐이 아니냐? 사람이 보기에는 그 사람이 일을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하면서 아주 잘 끝낸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볼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행위를 기억할까? 하나님은 사람의 그런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무엇을 감찰했을까? 하나님은 사람이 앞뒤를 재는 것을 보았고, 사람의 마음이 궤사하고 사악하며, 본분에서는 육체의 이익을 꾀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혐오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그런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느냐? (느끼지 못합니다.) 왜 느끼지 못하느냐? 사람이 사탄의 패괴 성정으로 살고 있고, 사람의 실질이 바로 사탄의 실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런 것에 의존해 살기에 자신의 체면과 지위, 존엄과 육체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본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일을 처리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하거나,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르며,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의 요구 기준대로 하라고 하면 사람은 매우 힘들어하고 버거워한다.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사람에게는 취할 부분이 없다. 그러므로 일이 임할 때 사람은 아주 빈궁하고 가련하다. 다시 말해 너무 가난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죄를 이길 능력도 없고, 자신의 육체를 배반할 능력도 없으며, 진리를 실행할 원동력도 없고, 자신의 관점을 바꿀 각오도 없으며,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려는 심지(心志)도 없다. 빈궁하고 가련하고 보잘것없는 눈먼 존재이다. 제멋대로 하고 자기 뜻대로 하는 일에서는 힘이 넘치지만,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고 진리 원칙대로 하는 일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땀을 빼는지 모른다. 겉모습을 보면 다들 언변도 있고, 지식이 많고 또한 특기와 은사도 있다. 그런데 왜 빈궁하고 가련하다는 것일까? 어떻게 가늠해야 하느냐? 사람의 학력과 지식, 특기나 은사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깨닫는 데에 도움이 되느냐?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데에 원동력이나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느냐? 못한다. 그래서 일이 임할 때면, 사람은 다 자신의 애호와 욕망, 관념과 생각대로만 일을 처리하게 되지, 하나님께 어떻게 순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리 원칙을 찾고 구해야 하는지에는 한계를 느낀다. 사람이 은사와 지식, 호의와 애호에 따라 일할 때는 다들 능력 있고 꾀가 많고 재능이 있어 기운이 넘쳐 보인다. 하지만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하면, 아무리 큰 인물이라도 속수무책이다.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을 찾고 구하는 일에서는 다 바보처럼 되는데,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왜 허풍을 떨고 또 잘난척하며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까? 무슨 원인일까?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 방면이다. 주요한 원인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빈궁하고 가련하기 때문이다. 진리 앞에서 사람은 빈껍데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일부 사람들과 접촉한 적이 있는데,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마비되어 어리석고 빈궁하고 가련한 모습을 보았다. 세상 일을 언급하면 조금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관점을 들어 보면 좌로 치우치지 않으면 우로 치우쳐 있거나 아예 관점도 없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시간도 오래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보았고, 교통도 많이 들었고, 날마다 영 생활까지 하는데, 왜 그렇게도 마비되고 어리석고, 빈궁하고 가련한 것일까? 어떤 일이 임하면 왜 정확한 관점을 가지지 못할까? 설교 교통도 많이 들었는데도 남은 건 도리뿐이고, 말씀도 많이 보았지만 남은 건 역시 도리뿐이며, 예배도 많이 드렸지만 얻은 것은 글귀 도리와 규례적인 것뿐이다. 그것은 무엇과 연관되느냐? 왜 얻은 것은 그런 것뿐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해 주는 것은 진리이고 생명이고 진리 실제이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맺은 열매는 왜 그런 것이냐?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이것은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겨서 자신의 실제로 만들어야 하고, 정형을 돌려세울 수 있어야 하는데, 일을 처리하거나 삶 속에서 임하는 모든 일에서 다 정확한 관점과 태도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실행해야 할 길이 아니냐? 이것이 찾고 구해야 할 방향이 아니냐? 어떻게 하면 그 길에 진입하고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라.

내가 실례를 가지고 말하겠으니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고 너희에게도 존재하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지 한번 분석해 보거라. 예를 들어, 나와 어느 정도 접촉하며 지낸 사람이 있었다고 하자. 처음에 그 사람은 뭘 하게 되든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곤 한다. “어떤 뜻입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하면서 태도가 아주 공손하고 시키는 대로 참답게 했다. 그 사람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선이 있었던 것이다. ‘선을 넘지 말아야지. 노하시게 하지 말아야지. 말씀하시면 잘 듣고, 뭘 시키면 그대로 해야지.’ 그래서인지 별 문제 없이 지냈다. 그때는 서먹할 때이다. 함께 지내면서 교통도 어느 정도 하다 보니, 그 사람은 내가 말하는 방식이나 어조, 목소리나 겉모습에 대해 더 이상 서먹하지 않게 된다. 나를 처음 볼 때는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하고 말을 하면 연구하기도 하면서 ‘방금 하신 말은 무슨 뜻일까? 못 들어 본 신선한 단어를 쓰시네. 모습이 이러하시구나. 걸음걸이는 저러하시구나. 주로 저런 컬러의 옷을 많이 입으시는구나.’라고 했지만, 익숙해진 뒤에 같이 일 처리할 땐 ‘우린 동등하지 않고 신분과 지위도 다르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말도 건넬 수 있는 사이니 우물쭈물 숨길 필요 없어.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돼.’라고 생각한다. 좀 더 지나니 그 정도의 선도 깨져 버렸다. ‘하나님은 어떤 성격이고 어떤 분이신지 이젠 잘 알겠어. 어떤 일을 하면 화내지 않고 책망하지 않는지 파악했어. 책망받을 일은 아예 피하거나 하지 말고, 한다고 해도 하나님 눈에 띄지 않게 모르게 해야지.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 주변 사람들에게는 입도 뻥끗하지 말아야겠어. 그러면 모르시겠지? 모르셔야 책망받을 일이 없잖아. 그러면 고생할 일도 없고 눈물 흘릴 일도 없게 되는 거잖아. 그러면 얼마나 좋아! 그 밖에 시키는 일에서 예전처럼 말을 듣는다면 순복한 거야. 아무튼 난 나름대로의 자유는 있어야겠어.’ 문제점이 드러났지? 궤사하지 않느냐? 사람은 사람 앞에서든 하나님 앞에서든 밝히고 싶지 않은 일들을 늘 속에 감추고 싶어 한다. 그러한 심리 상태와 성정이 바로 궤사한 것이다. 그런 성정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성정, 교만함이 있다. 어떤 부분에서 교만함이 표현되느냐? ‘하나님도 그냥 우리처럼 말씀하시네 뭐. 말씀을 대단하게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말씀 밖에 하실 줄 모르네. 우리가 좀 더 익숙한 사이가 되면, 내가 말을 더 멋있게 하고, 더 잘할 수 있겠어. 많아 봤자 나보다 진리가 더 있겠지. 시간도 오래 되고 더 익숙해지면 나도 막힘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 틀린 말은 절대 안 해. 어쩜 저런 옷만 입으실까? 얼굴을 보나 차림새를 보나 내가 더 낫네. 나랑 비교도 안 되지.’ 이런 것이 교만함이 아니냐? 지금까지 두 가지 성정이 나왔다.

또 감추어진 성정이 하나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거나 궤사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마음 깊은 곳에 느낌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있을 때 사람은 어떻게 대하느냐? 자제하고 단속하느냐? 스스로 다스리고 변화시키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것은 어떤 성정이냐? 그것을 강퍅이라고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서 부린 수작이든, 아니면 스스로 표현하거나 유로한 것이든,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태도와 성정은 모두 강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진공 속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모두 하나님의 감찰하에 있다.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거나 그런 것을 유로하게 되면 스스로도 미세하게 느끼게 되지만 전혀 뉘우치는 법을 모르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도 변화하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교통하지도 않으며, 또한 진리를 찾고 구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바로 강퍅이다. 겉면으로 봤을 때 ‘강퍅’에서 ‘강(원문: 剛)’이라고 하면 아주 단단하고 완고한 것을 말하고 ‘퍅(원문: 硬)’은 사람이 건드리기 어려운 것을 말하는데, 건드리는 사람이 아픈 것은 물론 그 자체도 아픔을 느낄 것이다. 통상적으로 사람은 단단한 것을 접촉하기 좋아하느냐, 아니면 부드러운 것을 만지기 좋아하느냐? 부드러운 물건은 질감으로 사람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고 기분도 좋게 한다. 그러나 단단한 것은 그와 정반대이다. 강퍅함은 사람의 한 가지 성정으로,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태도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일이 임하게 되면 비록 한 가지 느낌이나 의식, 혹은 올바르지 않은 태도란 생각이 미세하게 들지만, 자기 성정의 지배로 ‘뭐 어때? 난 원래부터 이렇단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태도이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고 사탄에게서 온 것이며 사탄 성정이 유로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는지,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느끼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이 문제의 심각성이다. 강퍅함, 이 성정은 어떠냐? 사탄의 성정에 속한 것은 좋은 것이 없다.

이상 3가지 성정을 말했다. 궤사, 교만, 그리고 강퍅, 이 3가지는 모두 치명적인 것이다. 교만하고 궤사하고 강퍅한 성정으로 사람을 대하면 성정이 나쁘거나 인성이 나쁜 것에 불과하겠지만, 교만하고 궤사하고 강퍅한 성정으로 하나님을 대하면, 쉽게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된다. 그러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도태될 것이다. 네가 사람들 앞에서 유로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언젠가 네가 하나님 앞에 왔을 때, 그런 성정들이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거나 자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대로 흘러나오게 될 것인데, 그것도 더 심하게 더 적나라하게 흘러나올 것이다. 그것은 사탄 본성의 지배를 받기에 사람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의 그런 표현에 또 어떤 성정이 있느냐? (진리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어떤 일에서 알 수 있느냐? 겉으로 보면, 그래도 진리를 매우 사랑하고, 하나님이 요구한 일과 자신의 본분, 하나님 집 사역 범위 내의 일은 모두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진리를 싫어한다고 할까? 구체적으로 그의 어떤 표현에서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상충될 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합니다.) 그런 것이 세부적인 부분이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할 수 있느냐? 내가 사람들과 접촉하는 시간이 좀 길어질 경우, 내가 무엇을 하라고 하거나 어떻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이상, 최종 결과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마다 리더가 되고 내가 ‘졸병’이 되는데, 그것은 왜 그럴까?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접촉한 지 오래되니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기며,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면 자신도 생각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 방면이긴 하나,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은 주로 어디에서 가장 잘 나타나느냐? 바로 긍정적인 사물을 대함에 있어 진리로 가늠하지 않고, 사탄의 방식과 원칙으로 가늠하는 것인데, 그 일을 멋지게 했는지, 형식은 어떠한지, 기세가 어떠한지를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일을 함에 있어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으며, 일 처리하는 출발점은 다 자신의 상상과 관점, 처세 철학과 지식인데, 진리를 한쪽으로 제쳐 놓고 사람의 관점과 사탄의 논리로 가늠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늠하다 보니 그의 눈에 다른 사람은 다 자신보다 못해 보이고, 자기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진리를 알 수 있겠느냐? 알 수 없다. “진리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라는 말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을 볼품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옷차림새가 볼품없고 언행도 볼품이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오랜 시간 접촉하다 보면 ‘상상한 것만큼 존귀하거나 위엄 있거나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네. 나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나서기만 하면, 누가 보더라도 큰 인물 같은 기품이 나잖아. 난 목소리도 쩌렁쩌렁한데, 하나님의 톤은 나와 비교가 안 돼. 말씀도 나긋하게 하시는 것이 아무리 들어도 하나님이란 느낌이 들지 않고,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란 느낌이 없어. 맨날 진리 얘기, 실제에 진입하는 얘기만 하신단 말이야. 왜 심오한 비밀은 밝히지 않으실까? 왜 셋째 하늘의 말씀을 하지 않으실까?’라고 한다. 그런 것은 어떤 생각이냐? 무슨 관점이냐? 그것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는 내가 그런 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느냐? (그런 사람들을 증오하고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틀렸다. 그것과 정반대이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오히려 가까이 하여 정상적으로 교통하고, 공급할 수 있으면 공급도 하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움도 준다. 또한 상대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매우 완고하다면 나는 그와 정상적으로 지낼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일에서도 되도록 그와 상의한다. “이렇게 처리하면 어떨까요? 이 몇 가지 방식 가운데서 여러분이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이 있다면 그대로 하고, 다 합당하지 않다면 여러분 스스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상대가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길수록 나는 더욱 이렇게 대해 주는데, 누구와 지내든 절대 도도한 자세로 대하지 않는다. 높은 의자와 낮은 의자를 두고 앉아야 하는 상황에도 누가 나를 하나님 같지 않다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 같다는 그 사람을 높은 의자에 앉게 하고 나는 낮은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눌 것이다. 최종에 그 사람은 자신이 진리가 없고 빈궁하고 가련하며 마비되어 어리석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런 방식이 어떠냐? 내가 사람을 아예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좋겠느냐? 사실 안 될 것도 없지만, 그 사람에게 유익할 것이 없다. 그래도 올바른 마음이 있고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어 구원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 언젠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때는 낮은 의자를 택하고 거만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외면해 버린다면 그는 영원히 그렇게 무지하고 우둔하고, 미련한 말이나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이며, 끝까지 어리석어 빈궁하고 가련할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추태이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것을 무시하고 깔보고 멸시하며, 진솔하고 사랑이 있으며 늘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며, 그런 사람을 무능하고 발전성이 없다고 여기면서 오히려 자기는 총명해 계산이 빠르며, 음모나 궤계나 수단에 능하고 은사가 있는 데다가 일도 잘하고 말주변도 좋다고 느끼는데, 자기 같은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반대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대상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다.

어떤 사람은 나와 오래 접촉하다 보니 관계가 가까워졌다. 비록 동네 친구처럼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절제도 없으며 간도 점점 커져 마음에 선이 없다. 그래서 “난 단 것을 좋아해요. 당신도 단 것을 드세요. 왜 안 드셔요? 드세요!”라고 한다. 그것은 어떤 성정이냐? 만약 네가 좀 드센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이 항상 너를 구속하고 간섭하려고 한다면 너는 그 사람이 착하게 느껴지겠느냐, 흉악하게 느껴지겠느냐? (흉악하게 느껴집니다.) 너는 두려움이 생길 것이고 ‘저 사람이 계속 날 통제하려고 드니 멀리해야겠다. 만약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날 죽일지도 몰라. 뒤에서 날 해칠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의 흉악한 성정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네, 느낍니다.)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 (다른 사람에게 항상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에게 시킨 것이 설마 잘못된 것이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뭔가를 요구하면 잘못된 것이 되느냐? 그런 논리는 옳은 것이냐? 그것이 진리이냐? 어떤 것이 너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겠느냐? 그 사람의 행위 때문이냐, 아니면 성정 때문이냐? 그의 성정이 너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인데, 너는 그 성정이 사탄에게서 왔고 진리에 부합되지도 않거니와 너에게 교란이 되고 통제와 속박을 주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너에게 불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두려움까지 준다. ‘내가 저 사람 말을 따라 주지 않는다면 나를 죽일지도 몰라. 성정이 너무 거칠어!’ 그 사람은 그냥 말만 뱉는 것이 아니라 너를 통제하려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강력하게 너에게 무엇을 시키거나 어떻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에는 한 가지 성정이 있다. 단지 너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너의 전부를 통제하고 싶은 것인데, 너란 사람을 완전히 통제하여 자기의 꼭두각시나 장난감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너의 애호부터 무엇을 하거나 그에 따른 방식까지 전부 자기 말에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기뻐한다. 그에게서 그런 성정을 느꼈을 때, 너는 편하겠느냐? (불편하고 두려울 것입니다.) 네가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라면, 그런 성정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겠느냐? 그 성정은 책임감이 있고 착한 것이냐, 아니면 흉악한 것이냐? (흉악한 것입니다.) 네가 누군가의 성정을 흉악하다고 느끼게 될 때면, 너의 느낌은 기쁨이겠느냐, 아니면 증오와 반감과 두려움이겠느냐? (반감과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런 안 좋은 느낌이 오는 것이다. 네가 반감을 가지게 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해방받아 자유로운 느낌이 들겠느냐, 아니면 결박된 느낌이 들겠느냐? (결박당한 느낌입니다.) 그런 느낌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느낌은 어떤 것이겠느냐? (해방되어 자유로운 느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해방감에 아주 자유로움을 느낀다. 설령 책망 훈계와 징계 혹은 심판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어떤 기분,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죄송하고 후회되며,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다음 다시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고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합니다.) 맞다. 도달하게 되는 효과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사탄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 어떤 효과를 보게 하느냐? 속박받게 한다. 찝찝하고 종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들고 손발이 묶여 무엇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뭘 하려고 하면, 계속 ‘저 사람이 보고 있지 않을까? 날 혼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너에게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흉악한 성정이 있어 늘 사람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란 어떤 것이냐? 단지 다른 사람에게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냐?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 틀림없이 아니다. 말 한 마디나 눈빛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성정은 흉악한 것이다. ‘흉악’이라는 두 글자를 놓고 봐도, 그런 성정이 유로되면 사람은 어떤 일들을 벌일 수 있느냐? 우선,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든다. 어떤 것을 지배라고 하느냐? 너에게 규칙을 정해 주면 너는 지켜야 되는데, 그러지 않으면 그는 화를 낸다. 그는 너를 지배하려 하는데, 그가 동쪽을 가리키면 너는 동쪽으로 가야 하고, 서쪽을 가리키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배라고 한다. 지배란 누군가의 운명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 사람의 삶과 마음 그리고 행동과 취향을 통제하여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 취향과 소망까지 전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말과 자기 뜻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비위가 약해 쉽게 배탈이 날 수 있기 때문에 기름진 것을 싫어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기름진 음식은 영양가가 높아요. 먹어야 돼요. 먹지 않으면 힘이 없고 비쩍 말라요.”라고 하더니, 곧장 기름 한 그릇을 들고 와서 마시라고 한다. 너는 사정하면서 “못 마시겠어요. 마시면 설사해요. 제발 안 마시면 안 될까요? 반만 마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내일 마시면 안 될까요? 야채 수프같은 거에 곁들어 먹으면 안 될까요?”라고 한다. “안 돼요. 그대로 마셔야 해요. 내 말대로 해요. 무조건 마셔야 해요! 안 마시면 제가 강제로 먹게 할 거예요.” 그러더니 너의 입에 들이붓는다. 그러고는 “봐요, 다 마셨잖아요? 별일 없잖아요 설사 안 하죠? 나도 그렇게 마시니 형제(자매)도 이렇게 마시면 돼요.”라고 한다. 마신 다음 결과가 어떠하든 너는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너는 좌지우지되고, 우롱당하고 통제당한 느낌이 들것이다. 그렇지? 그것이 사탄의 행위가 아니겠느냐? 사탄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우롱하고 통제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늘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드는 사탄 성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에 관계없이 그런 성정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을 어떤 성정이라고 하느냐? (흉악한 성정이라고 합니다.) 왜 흉악이라고 하느냐? 그 단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무슨 뜻이냐? (악독하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단어의 뜻을 해석했지, 그 성정에 어떤 실질적인 유로가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강압적인 뜻이 있지 않느냐? 다시 말해, 네가 듣든 말든, 너의 느낌이 어떠하든, 누림이 있든 없든, 이해하든 못하든, 무조건 그의 말대로 따르라고 강요하며 너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자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흉’이다. ‘악’은 무엇이냐? 강압적으로 주입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너를 자기 나름대로 통제하는 효과를 보면 흡족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악’이다. 그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허락하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순리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데, 진리를 깨달아 조금씩 순리대로 성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통제하려고 들기 때문에, 사람에게 진리를 찾고 구하지 못하게 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하며,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지 않는다. 반대로 사람을 다 자기 앞으로 끌어다 자기 말을 듣게 하려 하는데, 자기가 진리이고 만물의 중심이며, 자기 말이면 다 정확하기라도 한 듯 옳고 그름을 분석하지 못하게 한다. 강제적이고 포악한 성질을 띠고 사람의 행위와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성정을 흉악이라고 한다.

흉악한 성정은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지 않느냐? 너희는 그런 성정을 접했을 때, 그것이 바로 흉악한 성정의 유로라는 걸 느낄 수 있느냐? 누군가 너에게 그렇게 하거나 그러한 성정을 보여 주면 너희는 느낌이 있을 것인데, 그럴 경우엔 아마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하고, 자신에게서 그런 성정이 흘러나온다면 인지할 수 있느냐? ‘이런 성정은 흉악한 거야. 진리를 찾고 구해야지, 이렇게 하면 안 돼. 늘 사람을 강제로 점유하고 강압적으로 통제하려는 욕망과 야심이 있는 것은 잘못된 거야. 이것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사탄 성정이야. 방식을 바꿔야겠어. 진리에 부합되는 방식을 찾고 구해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교제해야겠어.’라는 생각들이 있느냐? 만일 그런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그런 성정을 드러낸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겠느냐? (형제자매들은 같이 어울리려고 하지 않고, 외면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없다. 마치 온역 같아서 사람들은 크게 반감을 가지는데, 아무도 그에게 통제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다가오면 피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지 사탄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늘 사람을 통제하려고 들면, 사람들이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우선 그런 사람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늘 외면당하고 미움을 사게 된다. 만일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아마 본분을 잘할 수도 없거니와 오래 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들과 조화로운 협력을 할 수 없으니 본분을 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물러가야 한다. 또 어떤 결과가 있겠느냐? (교회 생활에 방해가 됩니다.) 그것도 한 방면이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는데, 교회 생활을 교란하는 것이다. 본인은 어떤 손해를 보느냐? (생명이 영원히 자라지 못합니다.)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생명이 자라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느냐?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늘 외면당하고, 생명은 계속 자라지 못하고, 계속 사람을 통제하려고 들고, 계속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려고 들며 생명 진입이 없다 보니 결국, 외톨이 신세를 자초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변화되려고 하지도 않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그런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정의를 내리겠느냐? 하나님은 비인류라는 정의를 내릴 것이고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결말은 정해진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은 가망이 없게 됐으니 살아 있는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너무나 가련하다!

책임감이 없는 것은 어떤 성정이냐? 교활한 것이다. 처세 철학에서 가장 큰 한 가지가 바로 교활한 것이다. 사람은 교활하지 않으면 쉽게 밉보일 수 있고,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교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에게도 밉보이지 말고, 아무도 건드리지도 말고,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말아야만, 자신을 지키고, 생계 걱정을 안 할 수 있고, 입지를 굳힐 수 있다는 원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있을 때는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은 하나님 집에 있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하는 것일까? 문제가 보여도 말하지 않는데, 말할 사람이 따로 있으니, 밉보이기도 싫고, 모난 돌이 되고 싶지도 않아서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책임감이 없고 교활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미덥지 못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람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느냐? (원칙에 따라 하면 됩니다.) 원칙에 따라 한다는 말은 얼마나 간단하고 짧으냐? 그러나 일 처리할 때가 되면 사람은 그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절충시키고 두리뭉실하게 한다. 두리뭉실하게 하는 것은 어떤 태도이냐? 그는 자신의 체면과 인격,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돈을 주워도 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고, 살신성인하고 어떤 위험도 무릅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진리와 정의를 지켜야 할 때는 그런 모습이 온데간데 없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 어떻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한 가지 성정이 있는데,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왜 진리를 싫어한다고 하겠느냐? 일단 긍정적인 것과 관련되는 일이 생기면 사람은 도망가고 회피하며 언급을 못하게 한다. 미세하게 양심의 가책을 받아도 ‘난 절대 바보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혹은 ‘별 것도 아닌데, 나중에 보지 뭐.’라며 어떻게 하든 눌러 버리려고 한다. 긍정적인 일을 지켜야 할 상황이 오면, 회피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보고도 못 본 체하면서 참답게 대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진리를 싫어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문제는 어떻게 고칠 수 있느냐? 어떤 원칙이 있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과 관련되고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연관되면, 자신의 이익을 대하는 것처럼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말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며,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태도이다. 만일 너희에게 이런 태도가 없이 그저 ‘내 본분 범위의 일은 해도 내 본분 범위를 벗어난 일은 내버려 두겠어. 나한테 물어보더라도 기분이 좋으면 모를까, 기분이 별로이면 대답 안 할 거야! 내 태도는 그래.’라면서 대충 넘긴다면, 그것도 성정 문제이다. 그런 성정이 있으면 오로지 자신의 지위와 명예와 체면을 지키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들만 지키는데, 그것이 정의로운 일을 지키는 것이냐? 긍정적인 것을 지키는 것이냐? 그런 이기심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다. 너희 대다수에게 흔히 보이는 태도인데, 하나님 집의 이익과 관련되면 “못 봤는데요.”, “모르겠는데요.”, “처음 듣는 얘긴데요.”라는 말들로 발뺌하면서 넘어가려고 한다. 정말로 모르든, 모르는 척하든, 결론은 거기에도 한 가지 성정이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느냐? 왜 그것을 한 가지 성정이라고 하느냐? 성정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은 연관이 있느냐? 성정은 그저 일시적인 표현이냐? 어떤 것을 성정이라고 하느냐? 너희가 요약해 보아라. (성정이란 사람 안에 가장 깊이 뿌리박혀 있는 사탄의 패괴 성정입니다. 사람은 그것으로 살고 있어도 스스로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성정은 높은 잠재성을 지니고 있어 매우 은밀하다. 그래서 너는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자신의 생각에 지배받는 것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성정이라는 것이 속에 있으면 그것이 너를 이끌어 가고 제어하여 너에게 많은 행동 표현들이 나타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정이다. 그러면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은 흔히 사람에게 어떤 행위나 생각, 어떤 관점이나 태도가 나타나게 하느냐? 그 성정으로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주된 특징은 긍정적인 사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긍정적인 행위에 관련되는 것이면 힘이 나지 않는데, 거기에 공을 들일 생각이 없고 노력할 생각이 없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런 것을 무시한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는데, 들으면 깨닫게 될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건강을 중시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늘 말하고 있는 건강 상식 중 하나는 육류를 적게 먹고 야채나 과일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튀긴 음식은 적게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화제로 사람의 건강과 섭생에 있어 긍정적인 방향이다. 사람은 무엇을 많이 먹어야 하고, 무엇을 적게 먹어야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면 그것은 이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냐, 아니면 실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냐?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인데, 바로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너의 판단력으로 분별하는 것인데, “육류를 적게 먹고 야채나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라는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너는 논증을 했느냐? 입증된 근거가 있느냐? 없다. 너는 체험한 것도 없고, 또 어떤 사실로 입증한 것도 없고, 더더욱 참작할 만한 어떤 전례를 본 적도 없고, 아무런 실례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관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론적으로 받아들였든 아니면 실제적으로 받아들였든, 우선 그 말은 옳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 바로 사람이 삶 속에서 그 말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말을 어떻게 적용시키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네가 그 말을 도리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실생활에서는 그 말을 완전히 어기거나 그 말을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네가 그 말을 좋아하는 것이냐, 아니면 싫어하는 것이냐? 식탁에서 너는 야채를 보게 되었을 때, ‘야채가 사람 건강에 좋긴 한데 맛이 없어. 그래도 고기가 맛있으니 고기를 많이 먹자. 고기부터 먹어야지.’라고 생각한다. 잠깐 사이에 고기 한 접시를 다 먹고 나니 배도 불렀다. 그리고 다시 야채 반찬을 보면 ‘먹고 싶지 않아. 배도 불렀으니 먹을 필요가 없어. 다음에 먹자.’라고 한다. 다음 끼니가 되니 ‘평생 야채는 정말 많이 먹었지만 별로 좋다는 느낌이 없어. 지금 내 몸이 그렇게 건강한 것 같지도 않아! 그리고 자주 고기 먹는 사람들은 날마다 맛있게 먹어도 건강이 안 좋은 걸 보지 못했어! 계속 안 먹으면 손해잖아? 그러니까 고기를 먹자!’라고 한다. 어떠냐? 성정이 유로되었지? 여기에서 어떤 성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냐? “야채를 많이 먹고 고기를 적게 먹어야 한다”라는 말에서 얻어진 인식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그 말의 정확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거나 믿지 않거나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미 반발심이 생기고 반감을 가진 것이다. 그런 것은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고기를 한두 끼 먹을 때는 조금 느낌이 있지만 세 끼를 먹을 때면 아주 맛있게 느껴지고, 매우 만족하면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네 번째, 다섯 번째가 될 때면, 그 말을 한쪽에 제쳐 놓게 된다. 그 말을 옳다고 인정은 하나 본인은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말은 또 그렇게 한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그 말은 인상 속에 이론으로만 남게 되어 본인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 속으로는 분명 자기가 하는 것이 잘못됐고 그 말대로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쨌든 난 손해 본 거 없어. 그래도 이득을 본 거야! 그리고 건강에 안 좋다고 생각되지도 않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탐욕과 욕망으로 그 사람은 자기가 마음 깊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던 방식을 선택하게 되고, 계속 옳은 그 말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생활을 계속 그런 성정으로 마주하거나 처리하고, 그런 성정으로 그 말을 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말을 아무리 옳은 도리로 여기고 있어도 실천하지 못하고 그의 실제로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말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의 성정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냐? 그런 것이 바로 성정에서 온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정의 표현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그런 행위이다.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은 태도이지만, 사실은 성정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어떤 성정의 지배를 받는 것이냐?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다. 그런 성정은 사람이 발견하기가 정말 어렵다. 바로 긍정적인 것을 사람 마음 깊은 곳에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것을 진리로 실행하고 활용하고 실생활에 적용시켜 사람의 생각과 행위, 일을 처리하는 관점과 마음가짐에 결부시켜 사람의 생명으로 바꾸기가 매우 어렵고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다.

사람들은 다 이런 일을 겪었다. 어렸을 적, 네가 이마에 땀을 흘린 채로 밖에 나가려고 할 경우, 엄마가 “이마의 땀부터 닦아. 땀 식히고 나가야지, 아니면 감기 걸려.”라고 한다. 그러면 널 생각해서 그러는 엄마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느낄 수 있지 않느냐? 느낄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 하지만 대다수는 그 말을 어떻게 대하느냐? (귓등으로 흘려보냅니다.) 그런 태도는 어떤 성정 때문에 생긴 것이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귀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옮기지도 못하고, 여전히 땀범벅이 된 채로 외출한다. 심지어는 그렇게 나갔다가 정말 감기에 걸린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감기가 다 나은 뒤에도 여전히 듣지 않는다. 다음 번이면 또 그 말을 어긴다. 분명 맞는 말이고 너에게 유익한 말인 줄을 알고, 엄마가 말을 하는 출발점과 속마음도 다 너를 위한 것인 줄도 알지만, 여전히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듣지 않는다. 그것이 성정이 아니냐? 만일 너에게 그런 성정이 없다면 어떻게 선택했겠느냐? 너는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된다. 너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너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를 알기에 너는 그 말의 뜻을 받아들이고 깊이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 말을 듣고 땀이 식은 다음 나간다. 부모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네가 그 말을 잘 지켜 자신의 실제로 만든다면 너는 성정이 변화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다수 사람은 철이 들어서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그 말을 귀에 못 박힐 정도로 들었지만 여전히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고, 그대로 옮긴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엄마의 사랑과 고심을 느낄 수 있음에도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하는 것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해도, 입이 닳도록 말해 주고, 위로하면서 말해 주고, 깨우쳐 주면서 말해 주고, 매를 들면서 말해 주고, 어떤 식으로 말해 줘도 사람의 마음을 불러 깨우지 못하는데, 사람은 말씀대로 옮기지 않고, 들어도 다 귓등으로 흘려보낸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한 가지 성정인데, 강퍅한 성정이고,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이 너에게 당부하고 맡겨 준 일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하지 못한다면, 너의 성정은 변화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인정하고 아멘 할지라도,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진리라고 찬미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의 실제가 되지 못했고, 너의 생명이 되지 않았다면, 너의 성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궤사한 사람에게 말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조금 쉽게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변화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과 강퍅한 성정이다.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말씀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태도로 경고하고, 일깨워 주고, 권면하고, 입이 닳도록 말해 주고, 사실을 가지고 일리를 말해 줘도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문제인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을 알기란 쉽지 않지?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성정이 있는데, 그런 성정으로 인해 사람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태도를 보인다. 말을 들었다고 하자니 그대로 옮기지 않았고, 듣지 않았다고 하자니 한가하게 보내지 않고 계속 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했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성정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냐? 사탄도 성정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이 좋은 일이나 긍정적인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탄은 그것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류에게 유익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탄은 나쁜 쪽으로만 일을 하는데, 인류를 짓밟고 해치며 패괴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땅 1묘(역주: 토지 면적의 단위)에서 150~250kg 양의 농작물을 거두게 정하셨는데, 이는 사람이 배부르기에 충분한 양이고, 게다가 그걸 먹으면 건강해지고, 정상적인 신진대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은 유전자 변형으로 1묘에서 400kg 이상을 생산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 그걸 먹게 된 사람은 신진대사가 느려지고 내분비와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겨, 결국 각종 합병증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성정이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었을 때, 사탄이 무어라 대답하였느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욥 1:7]) 하나님께서 다시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으실 때, 사탄은 또 무어라 대답하였느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욥 2:2]) 사탄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뭐라고 물어보든, 솔직한 대답은 한 마디도 없었는데, 사탄은 있는 그대로 말하기를 싫어한다. 그것이 성정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아이도 쉽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직접적이며 복잡하지 않다. 정상적인 사고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 설마 사탄은 알아들을 수 없었을까? 그런데 사탄은 왜 하나님이 묻는 말씀에 있는 그대로 대답하지 않는 걸까? 사탄에게는 성정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영원히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사악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탄은 모든 부정적인 것과 사악한 것의 상징이자 근원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솔한 사람으로 살면 좋다고 말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진솔한 사람으로 살면서 마음을 열고 털어놓는 솔직한 모습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이 그런 사람으로 되는 것은 힘들어하는데, 이것도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말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절대 실천하지 않는데, 그런 것을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한다. 진리를 싫어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가 매우 어렵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에는 가장 심각한 성정이 들어 있다. 바로 긍정적인 것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마음속 깊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심지어 혹자는 하나님께서 요구한 기준과 원칙을 자주 멸시하고, 긍정적인 것에 반감을 느끼는데, 속으로 계속 반발하고 대항하며 멸시하는 마음이 있다. 이런 것이 그런 성정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한번 잘 살펴보고 스스로 돌이켜 보아라. 긍정적인 것이나 긍정적인 일과 관련되는 일이 올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간과해 버리는 반면, 부정적인 것, 사악한 것과 마주할 때는 오히려 힘이 넘치고 관심을 보인다면, 그것도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일단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겉면으로 헌신하고 제멋대로 하면서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일이면 힘이 남아돌다가도,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되면 기운이 빠지고, 또 지위가 없어 자기 자신을 과시할 기회가 없으면 거들먹거리지 못하게 되고, 별로 이득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힘도 사라지고 소침해진다. 그런 것은 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탄의 패괴 성정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면 사람은 늘 방향을 잃어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게 되고, 늘 방향을 잃게 되어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게 된다. 그런 성정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나아가 그런 성정이 변화되기는 더더욱 어려운데, 사람은 여전히 육체를 따르게 되고 사탄의 패괴 성정을 따르게 된다. 즉, 사람은 여전히 사탄을 따른다는 뜻이다. 사실 사람이 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사탄을 위해 힘쓰는 것이며 사탄을 섬기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은 쉽게 변화될 수 있느냐? 진리가 무엇인지, 긍정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런 성정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명확한 목표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 맞는지도 모르고, 눈앞에 올바른 길이 없어 선택을 할 수 없으니까요.” 만약 눈앞에 올바른 길이 놓여 있다면 쉽게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수월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겠느냐? (어떤 것이 긍정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원칙인지 알았다면, 본분을 할 때 원칙과 기준으로 가늠해야 합니다. 만약 원칙에 어긋나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말고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싫어하는 정형이 있을 때면 하나님은 본분과 원칙에 관련된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고 깨우쳐 주시는데, 그럴 때 육체를 배반하고 원칙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맞다, 길이 있구나. 그 목표가 명확하다면 길 또한 명확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어떤 성정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유로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안다면 좀 더 쉽게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느냐? 위에서 말했던 예제들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느냐? 다시 보면, 사람의 다양한 성격, 생각 혹은 태도는 다 무엇과 연관되느냐? 사람의 여러 가지 성격이나 사상 혹은 태도는 다 어디에 관련되느냐? 만약 사람이 각종 성정의 지배나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잘못된 생각은 쉽게 고쳐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엄마가 땀을 닦고 나가라고 했다. 네가 엄마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고 효심 깊은 아이라면,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한편, 그 말의 정확성과 이해득실을 알 수 있고, 그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패괴 성정의 농간과 방해가 없다면, 너는 아주 쉽게 그 말대로 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사실, 그 말은 매우 간단하고 아주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싫어하는 강퍅한 성정 때문에 뻔히 알면서도 하지 않고,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고, 엄마를 걱정시키고 괴롭게 할 수 있다. 그런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것은,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긍정적인 것을 어떻게 대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패괴 성정과 끊임없이 싸우는지에 달렸다. 그런 것이 구원받기를 추구하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너에게 패괴 성정을 변화시키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만들어 사람답게 살겠다는 각오와 바람이 있다면, 분명 변화될 수 있다. 각오와 변화는 정비례한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로 무엇을 말하느냐? 성정 변화를 뜻한다. 성정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성정이 변화되면, 사람은 희망이 있고 사람의 모습이 있게 된다. 성정이 변화된 사람은 어쩌면 외모가 못 생겼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은사가 부족하거나 뛰어난 재주도 없고 말주변 또한 없을지도 모르며, 또 어쩌면 잘 꾸밀 줄도 몰라 겉으로는 아주 범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일을 하나 맡기게 되면, 그의 장점이 드러나게 된다. 주변에서 그 사람은 성정이 안정적인 사람, 어떤 일이 임해도 하나님 앞에 안정하여 찾고 구하며, 어리석고 미련하게 일하지 않고, 게다가 착실한 태도가 있으며,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고 매우 진솔한 사람이어서, 마음을 다해 자신의 본분을 하고, 언행에서 절제가 있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과 나타나는 성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원칙 있게 일을 하며 제멋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고 성정 변화를 추구하여 최종에 얻게 되는 효과이다. 그 사람은 말을 해도 논리 정연하고 정확하게 하며, 함부로 말하지 않고, 어떤 일을 맡기면 마음을 놓을 수 있고 신뢰가 간다. 또한 하나님께 순복하는 실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악을 멀리하는 실제도 있다. 그 사람에게서는 그런 모든 표현들을 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고 성정이 변화된 사람이다. 그런 특징들은 억지로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성정은 사람의 생명이다. 어떤 성정이 지배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정해지는 것이다. 일관적으로 나타내는 것, 일상생활패턴을 지배하는 것은 성격이 아니라 성정이다. 성정을 알 수 있고 또한 다양한 성정의 유로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성정이 변화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생명 진입을 추구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서 자신의 언행, 행위, 마음, 생각을 성찰해야 하고, 자신의 정형을 파악해야 한다. 그다음 말씀과 맞춰 보면서 진리를 찾고 구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서 진리 실제로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 실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형을 파악하고 하나님 앞에 와서 늘 기도하고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항상 마음을 열고 교통해야 하며 진리 실제로 진입하는 실제적인 길을 찾고 구해야 하고 진리 원칙을 찾고 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자신이 날마다 어떤 성정을 유로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인지, 자신이 실행한 길이 정확한 것인지, 스스로 성찰을 통해 알게 된 정형을 말씀에 맞추었는지, 정확하게 대조했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정형대로 살고 있는지, 정말 진입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네가 늘 그런 정형에서 살면 너는 일부 진리와 자신의 실제 정형에 대해 기본적으로 파악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그런 정형과 여러 방면의 진리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게 되면 내면은 더욱 알차고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멍청하고 마비되어 있거나 궁핍하고 가련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겉면의 일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시시비비 속에서 정확한 관점이나 그런 일에 대한 인식, 게다가 처리 방식이나 실행의 길을 제시하라고 하면, 대다수는 입을 닫고 있는데, 백지상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에요. 우린 백지상태가 아니에요. 우린 비가 내리는 것도 하나님의 주관이고, 봄에 나무가 싹트는 것도 하나님의 배정이며, 새가 둥지를 트는 시기도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요. 우린 만물의 법칙대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아침에는 일어나고 밤에는 자야 하며, 하루에는 세끼를 먹어야 하죠. 또한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생로병사의 법칙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게다가 우린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고, 오늘을 허락해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내일은 죽더라도 감사드리죠.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멍청할 정도로 마비된 사람도 아니에요!” 사람이 겨우 이런 이치를 깨달았다 하여 진정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느냐? 진정 실제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느냐? 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분량이 작을 땐,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셨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그런 걸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고 대해야 하는지도 몰랐어. 그래서 그런 일들이 발생하면 어쩔 줄 몰라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날마다 닥치는 일들, 설령 별 볼일 없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다 하나님의 안배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란 걸 알게 됐지. 이제 난 ‘하나님! 저는 당신의 주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제 생명도 당신의 손에 온전히 맡기렵니다. 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싶지 않고 당신 말씀에 따르길 원합니다. 저는 반드시 충심을 다해, 온 힘을 다해 본분을 잘하겠습니다’라는 말도 하게 됐어! 내가 이런 것을 다 깨달았는데, 내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겠어?’ 이런 것을 깨달은 것은 영적인 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왠지 하나님을 믿는 모양도 갖춘 것 같고, 성도의 품위도 있는 것 같고, 어쩌면 매우 대단한 진리나 꽤 영적인 이론을 장악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았다고 해도 턱없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에 지나지 않을 뿐, 너의 성정을 변화시키지도 못했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지도 못했으며, 더욱이 너에게 닥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 그리고 그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방향에도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그런 이론과 영적인 도리는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전혀 정상적으로 이어 주지 못하고, 네가 어떤 정형 속에 살고 있는지, 어떤 성정 속에 살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지도 못하며, 더욱이 너의 패괴 성정을 변화시켜 진리의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게 해 주지도 못한다.

현재 하나님을 믿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성정 변화입니다.) 도리가 성정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어떻게 해야 성정이 변화될 수 있느냐? 성정이 변화되면 성격이 변하는 것일까? 성정이 변화되면 과묵해지는 것일까? 성정이 변화될 때면 사람은 다 늙어 있을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정 변화란 무엇이냐? 사람이 먼저 무엇을 깨달아야 성정 변화의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느냐? 먼저 사람의 성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네 속에 어떤 속셈이 있다고 하자. 그 속셈은 어떤 것의 지배를 받아 생긴 것일까? 틀림없이 너의 성격에 지배된 것도 아니고, 가정환경의 지배를 받은 것도 아니며, 제3자의 지배를 받은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너의 속셈은 틀림없이 너의 성정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먼저 어떤 성정인지 성찰해 봐야 한다. 교만? 사악? 흉악? 강퍅? 먼저 그것이 어떤 성정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다음 그런 성정으로 어떤 정형이 나타날 수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궤사한 성정을 예로 들어 보자. 사람이 궤사를 부릴 때는 속에서 어떻게 유로되느냐? 왜 그런 성정이 유로되느냐? 그 성정의 근원은 무엇이냐? 개인의 이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일이 자신의 이익과 상충될 때,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에 궤사를 부리게 되면서 궤사한 성정을 유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익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에게 있어 이익은 생명인 것이기에 이익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하는 법, 배반하는 법, 고난받는 법, 아파도 버릴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괴로워도 참으며 조금 포기하게 된다면, 너는 조금은 홀가분하게 느껴질 것이고, 조금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이긴 것이다. 하지만 ‘난 끝까지 궤사를 부릴 거야. 하나님도 날 징벌하지 않으셨는데, 사람이 날 어찌할 수 있겠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서 죽어도 이익을 내려놓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너 자신이 될 것이다. 네가 자신의 패괴 성정을 알게 되는 것은 사실, 네가 변화되고 진입하고 발전할 기회이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감찰과 심판 형벌을 받을 기회인데, 그것은 네가 구원받을 기회이다. 네가 진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이익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구원받을 기회를 포기한 것이고, 심판과 형벌을 받을 기회를 포기한 것이다. 네가 이익을 선택한다면 최종에 네가 얻게 되는 것은 분명 이익이다. 그러나 네가 포기한 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손해를 본 것이냐, 이득을 본 것이냐? 남는 것이냐 밑지는 것이냐? 영원한 이익이란 없다. 지위도 체면도, 돈도 물질도 다 잠시적인 것이다. 사람이 그런 방면의 성정을 해결해 진리를 얻고 구원을 받았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귀히 여김 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또한, 사람이 얻은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사탄은 물론, 그 어떤 사람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했어도 반대로 진리를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 그것 역시 너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닌 너 자신을 위해 얻은 것이다. 진리 실행을 선택한 사람은 가장 명철한 사람이다. 자신을 보전하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줄 모르고 이익을 얻기 위해 진리를 포기하기로 선택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가장 기본적인 길이다.

패괴 성정은 누구에게나 다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패괴된 정도가 더 얕은 사람도 없거니와 누구보다 더 깊이 패괴되어 구제불능인 사람도 없다. 사람은 다 같다. 다 동일한 사탄의 패괴 성정에서 살고 있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 공평한 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는 기회가 다 같다는 것이고, 각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도 같다는 것이며, 각 사람에게 공급해 주는 진리와 생명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다 같다. 네가 만약 다른 사람들 앞에서 패괴 성정을 드러내어 미움받게 되었다고 자신을 구제불능으로 보고, 다른 사람보다 더 패괴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지몽매한 것이고,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예 자포자기를 한다. 그러다 보니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해도 힘이 나지 않고, 사는 것도 재미없어하는데, 뭘 해도 다 사탄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어떠하냐? 이는 성숙된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로 인해 그런 식으로 고난받는 것을 원치 않고, 사람의 그러한 태도를 기뻐하지 않는다. 진리를 찾고 구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많은 잘못된 정형을 돌려세워야 하고, 또한 진리를 추구하는 자신의 관점도 끊임없이 바로잡아야 하며, 하나님의 감찰과 인도와 깨우침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움을 줄 것이고 은혜를 베풀 것이며, 또한 크나큰 인내와 은총, 긍휼과 관용으로 각 사람을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한 방면으로는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와 광명을 지향하는 올바른 태도와 소망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방면으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인류를 긍휼과 관용으로 대하는 하나님의 실질을 의심해서도 안 된다. 너희는 반드시 이 말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뜻으로 사람에게 이런 말을 알려 주는 것일까? 바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포기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소극적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소극적이 될 때면, 너는 하나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지 않았는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준 진리와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너에게도 똑같이 주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네가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니와 그것을 느낄 수도 있다면, 왜 포기하려고 하느냐? 왜 원망의 마음을 품는 것이냐? 왜 너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진심을 의심하느냐? 사람은 우매할 수도 있고, 분량이 작을 수도 있고, 연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믿음을 잃으면 안 된다. 언젠가 너희와 다시 이야기하고 교제할 날이 온다면, 그때의 너희들은 가난하고 마비되고 멍청한 모습이 아니길 바란다. 너희들은 얻은 것이 있어야 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너희들 마음에 얼마나 채워지게 될지는 너희들의 추구에 달렸다. 추구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추구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얻지 못한다. 이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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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②본분(本分): 피조물이 수행해야 할 의무와 천직.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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