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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편 진리를 실행해야 정상 인성이 있게 된다

본분을 하면서 업무에 능숙하지 못한 것은 무슨 원인이냐? 어떤 사람은 소질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소질이 부족해서 뭘 배우지 못한다는 뜻인데, 왜 잘 배우지 못하는 것이냐? 소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흔하게 보이는 문제가 또 있다. 안하무인이고 눈에 총기가 없고 무엇을 배우든 대충 보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배웠냐고 물으면 “배웠어요.”, “다 봤어요.”, “이젠 알아요.”라고 하면서 상대방이 자세하게 물으면 듣기 싫어하기까지 한다. “알고 있는데 자꾸 말해 뭐해?”라는 태도로 뭐든 귀담아 듣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고 독선적이고 교만하다. 소질이 부족한 것만으로도 치명적인데 성정이 나쁘기까지 하다. 소질이 좋든 부족하든 사실에 직면하고 긍정적인 사물과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방식이고, 진입의 길이다. 그렇게 한다고 남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성정이 나쁘고 무식하고 교만하면 종종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무능하고 쓸모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체면이 깎이고 존엄을 잃는 것 같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사람이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세로 있으면서 배우려 하지 않고, 뭐든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식견이 없고 견해나 생각이 없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체면이 깎이고 인격과 존엄을 잃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잘하는 것 없이 수박 겉핥기에 그친다. 그런 사람은 아예 모른다고 하기엔 알고 있는 이론은 있고, 그 이론에 근거해 해 보라고 하면 완성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원칙을 장악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찌된 일이냐? 소질의 문제이냐? 아니다. 성정 문제다. 어떤 사람은 “난 소질이 부족하고 지식도 없어요. 시골 사람이니 식견이 없어 뭐 하나도 제대로 못해요. 형제자매들은 큰 도시에서 자란 요즘 세대들이라 다 잘하죠. 내가 그 형제자매들처럼 지금 시대에 태어나 지식이 많다면 형제자매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거예요.”라고 한다. 맞는 말이냐? (틀립니다.) 어디가 틀리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나이, 태어난 환경 그리고 배운 것이나 기술, 재주가 좋고 나쁨에 따라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본다. 그 태도는 사람의 성정에 관련이 있다. 사람에게 진리를 정확하게 대하는 태도, 받아들이는 태도, 겸손한 태도가 있으면 소질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깨우침으로 얻게 된다. 반대로, 소질은 좋으나 늘 교만하고 저항하며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제 것만 옳다고 우긴다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성정이 나빠 아무것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마저도 거두어 간다. 그런 것을 드러났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초라하게 사는 것이다. 분명히 이도 저도 아니고,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면서 자아도취되어 뭐든 할 수 있고, 남보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 앞에서 여태껏 자신의 약점과 결점, 부족한 면, 힘이 닿지 않는 부분과 자신의 연약함, 소극적인 부분을 꺼내지 않고 잘난 척하며 남들에게 착각을 주려 한다. 자신이 뭐든 다 잘할 수 있고, 연약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을 필요가 없고, 절장보단할 필요도 없으며, 항상 남보다 낫다고 하는데, 그런 성정은 어떤 것이냐? (교만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게 초라하다. 풍부한 사람이겠느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새로운 사물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아 메마르고 견문이 좁고 빈궁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런 사람은 어떤 일에서든 원칙을 깨닫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도 몰라 규례만 지키고 글귀에만 공을 들이기 때문에, 얻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 그런 사람은 성정이 좋지 못하다.

너희는 평소에 서로 협력하여 본분할 때,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남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완벽한 사람이 있느냐? 아무리 강하고 능력이 뛰어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사람은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사실이자 또한 사람이 자신의 각 방면의 장단점을 정확히 대함에 있어서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야 이성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성을 갖추면 자신의 장단점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장단점도 정확하게 대할 수 있기 때문에 조화로운 협력을 이룰 수 있다. 이 방면의 진리를 갖추고 나아가 이 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한다면 형제자매와 화목하게 지내고 절장보단할 수 있게 되므로, 어떤 본분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 점점 잘하게 된다. 그러나 늘 잘난 척하며 남들이 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자기가 결정하려고 한다면 위험하다. 누가 옳은 말을 해도 ‘저 말이 맞긴 한데, 바로 들으면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럼 나를 저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거잖아? 바로 들으면 안 되겠어. 어떻게 하면 저 사람 말대로 했다는 티가 안 나고 내 방식대로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을까? 내가 돋보여야 되는데.’라고 생각한다. 항상 이런 식으로 남과 지낸다면 조화로운 협력을 이룰 수 있겠느냐? 어떤 부작용이 생기게 되겠느냐? 오래가면 주변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겠느냐? 저 사람, 너무 궤사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진솔한 사람이 아니라면서 모두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반감이 생기면 그 사람은 저버림을 당하기 일쑤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 저버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 하나님도 혐오하겠지? 하나님은 왜 그런 사람을 혐오하겠느냐? 본분을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은 진솔하겠지만 방식은 어떠하냐? 떳떳하지 못한 수단과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돋보이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유로한 성정과 하나하나의 생각, 하나하나의 속셈이 하나님이 보실 때 싫은 것이고 역겹고 사악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꼭 순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 컵의 물처럼 투명해야 하고 마음가짐이 올바라야 한다. 그럼 어떤 것이 올바른 마음가짐이겠느냐? 어떤 일을 하든, 네가 생각해 낸 방법을 모두에게 교통했을 때 다들 너의 방법은 안 된다면서 또 다른 의견을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네가 “그 방법이 괜찮네요. 그렇게 합시다. 저의 방법은 안 되겠어요. 식견이 없어 뒤처졌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너의 사람됨의 원칙이 아주 투명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음에 어두운 면이 없고 진심으로 일하고 말하며, 또한 진솔한 태도로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여, 어떤 수단도 쓰지 않고 숨기는 것도 없이 아주 투명한 것이다. 이것이 한 사람이 인ㆍ사ㆍ물을 대하는 일종의 태도로, 이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성정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마음의 생각들을 다른 사람과 전혀 상의도 하지 않고 대화도 없고 마음을 열지 않고 늘 감추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그에게 어떤 견해가 있다고 하자. 그는 나름 훌륭하다고 생각될 때는 ‘일단 말하지 않을래. 내가 말해서 다른 사람이 써먹으면, 돋보일 수 있는 기회를 뺏기게 되잖아. 한 수 남겨 놓고 말하지 말아야지.’ 하며,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일에서도 역시 ‘먼저 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나보다 한 수 높은 얘기가 나오면 웃음거리가 되잖아? 내가 이 방면에 부족하다는 걸 모두가 알아 버리면 안 되지. 말하면 안 돼.’라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입장과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든 다른 사람이 자신을 간파할까 봐 두려워 늘 이런 관점과 태도로 자신의 본분과 인ㆍ사ㆍ물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교활하고 궤사하며 사악한 성정이다. 겉으로는 본인이 말해도 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다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체면과 이익에 관련되는 일은 다소 여지를 남겨 절대 말하지 않는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참 문제이다!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사람은 다들 입으로는 하나님이 안다고 하지만, 마음은 여태껏 하나님이 안다는 것을 느낀 적이 없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지,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겉으로 유로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은밀히 감찰하시니 틀림없이 알고 계실 거야. 하나님께 숨기면 안 돼. 이 일을 꼭 말해야 돼. 내 의견과 생각이 좋든 나쁘든 반드시 마음을 활짝 열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통하고 공유해야 돼. 난 비열한 사람이 될 수 없고 교활하고 궤사한 사람도 될 수 없어, 진솔한 사람이 될 거야.’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런 의식이 있어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다 잔꾀를 부릴 줄 안다. 자신의 이익과 체면, 그리고 다른 사람 마음속의 자신의 자리와 비중을 아주 소중히 여긴다. 유일하게 귀히 여기는 것이 이런 것이기에, 그것을 꽉 잡고 자신의 생명으로 간주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할지에 관해서는 아예 부차적으로 대하고 일단 상관하지 않으며, 우선 자신이 이 사람들 가운데서 대장인지, 사람들에게서 우러러보이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 말을 하면 무게가 있을지 하며 먼저 자리를 차지할 것만 고려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람들 무리에 있으면 다 이런 자리와 이런 기회를 찾는다. 능력이 크다면 당연히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능력이 평범하면 그 평범한 무리에서라도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며, 소질과 재능이 평범한 데다 사람들 무리에서 하위층이라 해도 남들에게 얕보이면 안 되고 우러러보이려고 한다. 체면과 존엄, 이것은 최후의 진지이기에 반드시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 설령 인격을 잃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거나 열납하지 않더라도 사람들 무리에서 쟁취해야 할 체면과 지위, 그리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는 것은 절대 버리려고 안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성정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마지막 체면만은 땅에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이런 것을 땅에 버려야 진정한 사람이고, 이런 것을 생명으로 지키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런 이해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한 수 남겨 두고, 무엇을 해도 자신의 체면을 수호하며 그것을 첫 번째 위치에 놓는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말하고 궤변하고 자신을 위해 그 어떤 일이든 다 한다. 명예스러운 일이라면 자신도 한 몫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앞에 얼굴을 내미는데, 사실 그 일은 그 사람과 무관하다. 하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려 하지 않고, 남들에게 얕보일까 봐 항상 걱정하고, 사람들에게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아무런 재간도 없다는 말을 들을까 봐 걱정한다. 이것은 사탄 성정이 지배한 것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사탄 성정이다.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한들 어떻고, 다 너를 숭배한다 한들 또 어떻겠느냐? 그런 것은 다 실속이 없고 진리가 아니다. 언제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그런 것에 대해 담담해져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어 체면, 허영심, 지위나 사람들의 시선이 너의 생각과 행위를 좌지우지하지 않고 더더욱 네가 본분하는 자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은 훨씬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져 진솔한 사람이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는 본분의 효과는 갈수록 좋아질 것이고 순결도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침식을 잊고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병을 무릅쓰고도 일을 견지하며 자신의 육체를 배반하고 이겨 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명예와 이익, 지위, 허영심 같은 것은 내려놓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성정이 변화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시 네가 평생 가정을 이루지 않고, 좋은 옷을 입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지도 않으며, 평생 고독하게 살면서 그런 고생은 이를 악물고 버티면 충분히 견딜 수 있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육체적 고통은 쉽게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데, 극복하기 어려운 게 무엇이냐? (성정입니다.) 패괴 성정은 사람이 극복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분을 잘하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 위해,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육체적 고통은 다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성정이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성정이 변화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런 고생을 할 수 있는 이면에 일을 하는 출발점을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마음과 동기, 일을 처리하는 원칙, 진리를 대하는 태도, 이런 몇 가지 방면으로 그 사람의 성정이 변화되었는지를 가늠해야 하는 것이다. 외적으로 볼 때, 더 이상 겉치레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고생을 할 수 있고 육체적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지만 처사나 사람됨됨이 그리고 본분하는 과정에서는 진솔하게 말할 때가 적고 진솔한 사람으로 살기 싫어한다. 또한 모든 일에서 늘 무모하게 행동하며 항상 돋보이려 하고, 하는 일마다 속궁리가 있고 갖은 방법을 다해 자신을 어필하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서 자신을 존경하고 자신의 편을 들게 한다. 심지어 무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를 찾아와 의견을 묻게 한다. 이런 것을 성정이 변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으냐? 사람마다 다 이러하다. 겉면의 그러한 규례적인 것은 다 지킬 수 있고 고생도 할 수 있으며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도 있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심지도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길에 뿌리도 내렸고 세속적인 일도 다소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으나 성정은 여전하고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것이다.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볼 수 있느냐? 일을 하면서 바르지 않은 마음이 생기게 될 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배반하지도 않으며 진리 원칙을 구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교통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음대로 하면서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데, 이런 것이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아무런 절제력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였는지, 그 방면 진리에 대해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이기지 못한다. 그렇게 하면 잘못되고 일을 방해하며 하나님이 증오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그렇게 하면서 마음에까지 ‘어차피 난 복 받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건 아니야. 난 하나님을 믿는 동안, 많은 고생을 겪었어. 일자리도 세상의 앞날도 다 버렸으니,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고생한 것을 봐서라도 기억해 주실 거야. 헛되이 고생하면 안 돼. 더구나 난 지금 본분에서도 별다른 야망 없이 잘하려는 것밖에 없잖아.’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들은 듣기에 정당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지만, 세세히 살펴보면 어느 말이 진리에 부합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냐? 자세히 분석하면 다 사람의 좋은 행위일 뿐이다. 도덕의 기준으로 사람의 행위를 가늠한다면, 그 사람은 근검절약하고 고생할 수 있고 심지어 침식을 잊으며 일하며, 어떤 사람은 주운 돈마저 탐내지 않고,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고 베풀기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고 관용을 베풀며 옥신각신하지 않고 의리를 중히 여겨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고, 일을 함에 있어 공정하고 윤리 도덕이 있는데, 전부 다 도덕 기준에 부합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적으로는 아주 좋은 사람이기에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사람인지를,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를 가늠함에 있어 이런 것으로 가늠하면 되겠느냐? 만약 이런 것들로 가늠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말씀이 다 헛된 것이 될 것이고 세상에는 진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도 사역할 필요가 없고, 사람은 구원받을 필요도 없으며, 하나님의 역사도 필요 없고, 심판 형벌도 필요 없고,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여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좋은 행위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바보라도 이런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고 영원히 진리로 될 수도 없다. 너는, 친척과 친구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을 갖게 할 수 있느냐? 그러한 좋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오게 하고 하나님 행사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없고 오해도 없게 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을 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되게 하여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완전히 순복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든,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살든 사람을 미혹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거나 나타내지 아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지 않게 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이 교만한 성정을 유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너희들은 어떤 것이 좋은 행위인지, 어떤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성정에 변화가 있는 것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성정에 변화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과 연관되느냐?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연관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고 살아가는 것과 연관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하고 살아가는 것이냐?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털어놓는 가까운 친구라고 하자. 서로가 도와준 적이 있고 서로가 다 양심적으로 사귀며, 심지어 서로에게 구조가 필요할 땐,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다. 어느 날, 둘 중의 한 친구가 강도를 만났는데, 나머지 한 친구가 알고 곧바로 달려가서 도와주었고, 두 사람 모두 안전하게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것을 진리를 실행했다고 할 수 있느냐? 이것은 진리를 실행한 것이 아니다. 그럼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그 두 사람의 이런 관계에서 어떤 일을 해야 진리를 실행한 것과 연관되느냐? 서로 어떻게 대해야 진리를 실행한 것이냐? 하나님은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돕고 관용하며 서로가 생명도 아끼지 않고 상대방을 구원하는 것, 즉 상대방을 위해 목숨도 선뜻 내놓는 것을 원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바탕으로 되어 있든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이 있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원칙을 벗어나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둘 중의 한 친구가 일을 잘못하여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폭로하고 반대할 때, 나머지 한 친구가 “이 친구가 잘못은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공격할 필요는 없잖아요. 요만한 잘못은 별거 아니에요. 잘못하면 또 어때요? 저는 친구로서 다른 사람들처럼 폭로하지 않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도울 거예요. 제가 도와주는 방식은 여러분과 달라요. 별거 아니라고 말해 주면서 달래 줘 친구가 마음 아프지 않게 할 거예요. 누가 이 친구를 더 폭로해 힘들게 한다면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뭐라 해도 우리 둘은 가장 친하고 가까운 사이이니, 전 언제든 친구 편이에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정감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마음에는 또 어떤 것이 뿌리박혀 있느냐? ‘저 친구는 나를 도와준 적이 있어. 내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다른 사람이 다 나를 멀리할 때, 저 친구만 나를 외면하지 않았어. 지금 저 친구가 힘들게 됐으니 내가 도와줘야지. 그래야 양심이 있는 거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요만한 양심조차도 없다면 사람답다고 할 수 있겠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실행한다는 것이 빈말이 되지 않겠어?’ 그는 이런 이론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듣기에 그럴듯하여 일반인들이 분별할 수 없고, 본인 스스로도 분별하지 못하며 출발점이 진리에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맞느냐, 틀리느냐? 틀린 것이다. 그런데 한 마디 한 마디 자세히 분별해 보면 어떤 말이 틀린 것 같으냐? 어떤 말이든 다 인륜, 도덕,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삼강오륜의 기준에서 보면, 그 사람은 양심 있고 정의감 있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어찌 이 ‘좋은 사람’의 그 이면의 성정이 어떤 것인지 모른단 말이냐? 우선, 일이 임했을 때, 그 친구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찾고 구하였느냐? 찾고 구하지 않았다. 진리를 한쪽에 제쳐두고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 윤리 도덕, 세속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간주하였다. 그가 진리야 어떻게 되어 있든 진리를 외면하고 멸시하는 것은 무엇이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천성적인 좋은 것과 인위적인 좋은 것으로 진리를 대체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만만하게 그것을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로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의라는 간판을 내들고 진리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의 처신에 이런 상황이 많지 않더냐? 네가 진리를 글귀 도리로 말할 때는, 진리가 아주 정의롭고 세상에 진리가 있어야만 사람의 삶에 비로소 희망이 있고 또 가치 있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너에게 일이 생기고, 자기 나름 맞다고 생각되는 이론 기초가 있을 때, 그 순간에는 진리가 네 마음과 네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는 진리가 사람 마음에서 더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를 진리로 여기지 않을 때, 네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그때 너는 하나님을 어디에 두겠느냐? 네 마음속에 더는 하나님이 없고 자신을 크게 높이며 자기의 인간 관계, 처세 철학, 양심, 도덕 기준, 삼강오륜, 이런 것이 진리의 대체물이 될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항상 억울하게 느끼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항상 억울하게 느낀다. 사실상, 사람이 억울해하는 게 도리가 있느냐? 도리가 없다. 그 사람은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듣고 진리의 글귀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든, 실행할 때가 되면 진리가 없다. 그는 진리를 원칙으로 하여 실행하거나 일하거나 모든 일을 처리하거나 주변의 인ㆍ사ㆍ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늘 자기 주장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나와 대화할 때 늘 자기 말을 들어 달라, 자기 관점을 말하게 해 달라, 자기의 관점은 무엇이고 자기의 뜻은 어떻고 자기는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한다. 네가 너의 뜻을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고 있으니 자꾸 네 뜻을 말할 필요가 없다. 너의 뜻은 진리가 아니기에 명확히 표현을 다 해도 진리가 아니다. 네 말이 진리라면 네가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네가 천성적으로 진리를 갖고 태어나 무엇이든 다 알고 책이나 세상의 처세 철학에서 진리를 알아볼 수 있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어서 뭘 하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왜 매번 당신 말만 맞다고 하고 당신의 결정에 따라야 해요? 왜 저의 말은 들어 보지도 않으려고 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웬 말이냐? 여러 해 동안, 네가 하는 말을 들어 오며 맞는 말 한 마디, 진리에 부합되는 말 한 마디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굳이 너의 말을 들어 봐야 하겠느냐? 나도 여러 의견을 들어 보고 싶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비교적 정확한 의견을 들어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나에게 들린 것은 그릇된 논리와 거역하는 말, 원망하는 말과 불평 불만 그리고 사람의 처세 철학과 중용의 길뿐인데, 내가 왜 더 들어 봐야 하겠느냐? 네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것이며 하늘에 대항하고 운명에 대항할 것이다. 네가 만약 나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다.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일이 이토록 쉽지 않다! 일부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면 나도 형제자매들이 한동안 진리에 어떤 진입이 있는지, 인ㆍ사ㆍ물을 분별하는 면이나 진리를 실행하는 면에서 다들 어떤 진보가 있는지, 정형은 어떠한지, 패괴 성정을 스스로 얼마나 발견했는지, 그런 패괴 성정의 여러 가지 정형 속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은 얼마인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감소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또 얼마나 증가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듣고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다. 없으니 말이다. 말하는 게 글귀 도리나 치우치고 그릇된 말, 극단적인 말, 원망하는 말이 아니면 자기를 뽐내고 공로를 내세워 상을 청하는 그러한 말뿐이다.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내가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겠느냐? 기분이 좋겠느냐? 사람다운 말, 진리에 대한 실제 체험이나 실제로 느낀 말,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을 하는 사람이 극히 적다. 다들 공로를 내세워 상을 청하는 말 아니면 밑도 끝도 없는 말이나 공허한 도리만 말할 뿐이다. 사람의 그런 공허한 도리를 나에게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무지한 사람들에게 말해서 그들을 미혹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나에게 말하려는 건 이지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느냐? 어떤 사람은 나와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좀 세상일을 말했더니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고,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당신은 영적이지 못하게 세상일을 말하네요. 제가 한 말들이 얼마나 영적인지 봐요. 일말의 과장도 없이 전부 진리인데, 그 얘기보다 훨씬 대단하잖아요!’라는 뜻인 것이다. 글귀와 도리를 두어 마디 배웠다고 으스대는데, 이지가 없고 무지하고 교만하다.

성정 변화를 추구하려면, 우선 성정 변화와 무관하고 성정 변화 범위에 있지 않는 일이나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한 성정 변화란 무엇을 말하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성정 변화와 하나님이 말씀한 성정 변화가 별개이고 양 갈래 길이라면, 네가 생각하는 그것은 최종에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데 도달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말씀한 성정 변화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리 원칙을 알고, 진리 원칙대로 살아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과 진실한 경배가 있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사람의 성정 방면의 변화이다. 그러나 사람이 말하는 성정 변화는 어떤 것을 가리키느냐? 행동거지가 좋아지고, 겉으로 온순해지고 침착해지며, 말하는 것이 점잖고 예의 바라지고, 장난치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양심과 도덕 기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성정 변화인데, 하나님이 말씀한 성정 변화와 구별이 있느냐, 없느냐? 구별이 있다. 사람을 대하든 일을 대하든 너의 출발점, 너의 일 처리 원칙과 가늠 기준은 모두 진리에 근거해야 하고 진리 원칙을 찾고 구해야 한다. 그래야 성정이 변화될 수 있다. 늘 행위 기준으로만 가늠한다면 성정이 변화될 수 있겠느냐? 변화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아주 점잖은 말만 하고 거친 말은 절대 입에 담지 않아 선비와 같다. 더 나아가 말재주가 뛰어나서 문학가나 연설가와 같아서 겉면의 행위 표현에서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성정에 있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느냐? 성정이 변화되었는지는 무엇으로 가늠해야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봐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가늠 기준이다. (일을 보는 관점을 봐야 합니다.) 맞다. 관건적인 것을 잡았다. 한 사람을 가늠하려면,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지는 보지 말아야 한다. 점잖게 말하든 거칠게 말하든 고위 인사들처럼 말하든, 겉모습을 보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할 때 눈을 찡긋하거나 입을 삐죽거리거나 머리를 긁적거리는 버릇이 있다. 그런 것이 성정에 관련되느냐? 그것은 단지 겉면의 행위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그 사람의 개인적 성격이나 가정교양에 관련되는 정도이지, 성정에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또 어디에서 봐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정 변화가 있는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봐야 한다. 만약 솔직한 말만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만 하고, 그 어떤 욕망과 야심이 없고, 말속에 아무런 속셈이 없고, 자신의 어려움과 연약한 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도 있고, 빛비춤과 깨우침도 다른 사람과 교통하며 나누고, 하고 싶은 일을 진실하게 말하며, 사람 전체가 투명하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니겠느냐? 그 사람의 성정에 변화가 있는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는 일단 제쳐두고, 그 사람의 그러한 유로와 표현을 봐도, 그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다음 형제자매들을 대하는 태도를 봐야 한다.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억누르지 않으며, 연약한 형제자매들을 붙들어 주고 도와주며, 다른 사람을 비웃지 않고, 본분에서도 충성을 다하고 내팽개치지 않으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한다면, 이런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의 표현이 아니냐? 그런 사람은 어떤 성정이 있느냐? 정의감이 있고 진리를 사랑한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점잖게 말하고 이상한 버릇도 없고 겉으로 보면 아주 경건하다. 그런데 말하는 내용은 온통 어떤 것이냐? “전에 저와 협력했던 어떤 인솔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발음이 좋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제가 더 많이 말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형제자매들이 저를 우러러보게 됐어요, 우러러보는 걸 막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많은 형제자매들이 다 제가 양육했던 사람들이라서 교회 대다수 사람들이 다 저와 가깝게 지내요. 저는 누가 어려운 점이 있으면 웬만하면 다 해결해 줄 수 있어요. 저에게 흠이라면 마음이 약한 게 가장 큰 흠인데, 다른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못 봐요. 누가 고생하면 제 마음이 안타까워서 그 사람 고통을 대신해 겪고 싶을 정도예요.” 이런 말들은 무슨 뜻이냐? 듣기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말을 하는 출발점에는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이 사람의 성정은 어떠하냐? (궤사합니다.) 성정이 궤사하다. 그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의 말뜻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효과를 보려고 하는데, 이것이 그의 속셈이다. 그 사람은 목적을 갖고 말한 것이다. 분별력이 없는 흐리멍덩한 사람은 듣고 ‘훌륭한 사람이구나, 참 부럽네. 어쩐지 인솔자로 된다 했어. 나 같은 건 인솔을 받아야 할 명이야. 확실히 우리보다 나아.’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흐리멍덩한 사람의 사상인데, 이런 사람은 일을 간파하지 못한다. 영리한 사람이나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말귀가 있어 ‘저 사람, 한참을 말해도 자기 자랑밖에 없네. 어떻게 고생해서 공로가 크고, 어떻게 형제자매들에게 득을 보게 하고 도움을 주어서 우러러보이게 되었단 말이구나. 말로는 우러러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마냥 좋아서 더 굳히려고 힘든 줄도 모르고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네. 저 사람, 참 교만하고 궤사해! 저 사람은 남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과 지위를 쟁탈하려고 하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미혹하는구나. 한참을 들어도 전혀 자기의 결점은 조금도 꺼내지 않는구나, 완전히 바울이 아닌가? 여지없는 마귀야! 아무런 결점도 없는 것처럼 하다니, 자신의 안 좋은 점을 말하는 것 같아도 그것마저 남들에게 부러워 감탄하게 하는구나. 저런 말은 대놓고 사람들에게 우러러보게 하고 높이 받들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어도, 가져온 효과를 보면 그래도 사람들로 하여금 높이 보게 하고 우러러보게 하는 거잖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빼앗고 흐리멍덩한 사람과 분량이 작고 우매한 사람들을 미혹하기 딱이네. 저 사람은 성정이 좋지 않아. 비열하고 심보가 고약하고 너무 사악하고 음험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부류 사람이 있는 것이다. 한 부류는 비록 말솜씨가 화려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사람이 진실돼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사람들이 숭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마음을 빼앗지 아니하며 사람의 마음에서 지위를 차지하지도 않고 사람들과 평등하게 지낼 수 있기에 사람들은 그런 사람의 속박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언행과 처신에서 어떤 야심이나 사람을 통제하려는 마음, 사람 마음에서 지위를 차지하려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그에게 그런 욕망과 야심, 그런 성정이 없는 것이다. 그래야 인성이 있는 사람이다. 사악하고 늘 사람을 통제하려는 야심이 있는 사람은 권세와 지위를 숭상할 수 있기에 항상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뚜렷한 사탄 성정인데, 그런 사람은 인성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 무리에서 별다른 특기나 능력도 없고 겉보기에도 얌전해 업악당하거나 배척당할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은 근면 성실하게 묵묵히 일만 하는데, 그렇다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들에게는 패괴 성정이 없겠느냐? 야심이 없겠느냐? 사실, 기회가 없을 뿐이다. 어느 날, 고양이 2마리와 강아지 3마리를 키우게 됐다. ‘사람의 리더로는 안 되니 동물의 리더라도 되자.’ 기회가 생겼다. 그 사람이 고양이, 강아지의 먹이를 한동안 잘 챙겨 줬더니 그것들이 사람을 잘 따르고, 호령하면 무서워하기도 한다. 그는 그것에 바로 성취감이 생겨 아주 누리면서 그것을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존재들 가운데서 사람이나 동물이 그의 말을 따르고 호령에 따르니, 그 순간 자신의 중요성을 느끼며, 문득 자신은 쓸모없는 무용지물 같은 인간이 아니고 쓸모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개나 고양이가 사람보다 훨씬 다루기 쉽네. 사람은 항상 날 특기가 없다고 하면서 업신여겼어. 사람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지 못하잖아. 그래도 고양이나 강아지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네. 내가 먹여 주고 잘해 주는 만큼 내 말을 따르잖아. 내가 마음대로 호령할 수도 있고, 설령 내가 걷어차고 때려도 날 싫어하지 않잖아.’ 이런 사람은 어떠냐? 그런 사람에게 야심이 없느냐? (있습니다.) 왜 그 부류 사람들에게도 야심이 있다고 말하느냐? (사람은 누구나 다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패괴 성정이 있으면 야심이 있다. 단지 기회를 주는 사람이 없었거나 본인도 기회를 찾지 못하고 또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야심이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일단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적합한 때가 주어지면 야심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때서야 사람들은 그런 얌전한 사람에게 야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인성이 좋은 것도 아니며, 패괴 성정이 얕거나 적은 것도 아니고, 성정이 다른 사람보다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 부분을 들춰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여전히 ‘난 좋은 사람이니 성정이 변화될 필요가 없어. 내가 옳다고 여긴 것이 곧 진리야. 당신들은 진리를 실행해야 되고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야 해. 당신들은 능력이 큰 만큼 패괴 성정도 더 깊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구실을 대는 게 너무 그릇되고 치우친 것이 아니냐? 이것도 일종의 교만함이다. 멍청이나 좀 모자라는 사람들은 교만한 성정이 없느냐? 그런 부류의 사람은 위장을 더 잘하고 사람을 더 잘 미혹한다. 한 사람을 가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사람 겉면의 행위, 특기, 교양, 교육받은 수준에 근거해야 하느냐? 무엇에 근거해야 하겠느냐? 사람의 행위와 됨됨이, 생활 속에서 유로하는 사상과 마음가짐에 근거해야 사람을 분별할 수 있고 간파할 수 있다. 겉면의 행위에 근거하면 안 된다. 말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일할 때 원칙이나 출발점이 없겠느냐? 다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좀 분별할 줄 알겠느냐? 생활 속에서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자신에게서, 접촉하는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에서 관찰하면 차츰 배울 수 있다. 네가 얼마나 습득했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고 자신에게 적용해 본인이 변화되면 가장 좋은 효과를 본 것이다. 네가 아무리 다른 사람을 잘 분별해도 네 자신이 실행하지 않으면 네가 언제 변화되겠느냐? 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젠 성정 변화의 일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지 않았느냐? 지금 알게 된 것이 너희들이 성정 변화의 길에 진입하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진리 실제의 길로 진입하게 하는 데에 충분하겠느냐? 도움은 되지만 바로 진입하지는 못할 것이다. 관건은 실행에 있고 날마다 마음속에 이런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일이 임했을 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할까? 내 속이 왜 이리 더러울까? 난 내가 솔직한 줄 알았는데, 왜 내 마음속에서는 빙빙 돌려서 하려고 할까? 왜 자꾸 이 일에서 회피하려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곧은 길도 꾸불꾸불 가는 뱀의 본성이다. 사탄 본성이 너를 지배해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니, 너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어떤 것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네가 속으로 매일 생각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성정이고, 진리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진리 원칙이 어떤 것인지, 이런 것과 연관되는 것이라면, 너는 성정이 변화될 수 있다. 반대로, 마음속에 어떻게 하면 높은 지위를 얻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주고 우러러볼까 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너는 사탄을 위해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효력만 하는 셈이다. 만약 네가 온종일 어떻게 하면 자신을 변화시켜 점점 사람다워지고 하나님 마음에 들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지만 생각하여, 모든 일을 할 때 자제력이 있고 모두 하나님의 감찰을 느끼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다면, 너의 정형은 점점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두 갈래의 길이다. 하나는, 행위만 중요시하며 자신의 야심, 욕망, 속셈, 타산을 만족시키는 길인데, 이것은 사탄 앞에서 사는 것이고 사탄의 권세하에 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며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거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본분을 잘할 것인지를 중요시하는 길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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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⑤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⑥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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