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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편 패괴 성정을 해결하는 길

어떤 일을 하든지 진리를 찾고 구하며 진리에 순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진리에 따라 한 것이라면 당연히 맞는 것이다. 설령 어린아이가 한 말이고, 가장 보잘것없는 어린 형제나 자매가 한 말일지라도, 진리에 부합되기만 한다면, 그 일의 결과는 당연히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것이다. 단지 그 일을 통해 너의 출발점이 무엇이고, 그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 원칙이 인위적인 것, 즉 사람의 사상이나 관념, 상상, 정감,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너는 그 일을 잘못 처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너의 관점이 진리 원칙에 근거한 것이고 네가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면, 그 일을 틀림없이 옳게 처리한 것이다. 때로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그 당시에는 관념이 있거나 마음이 편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실증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좋아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나 사람의 뜻에 따라 인위적으로 한 일은 그 결과가 가면 갈수록 좋지 않다는 것이 실증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의 것은 따르고 누구의 것은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지 말고 규정하지 말라. 우선 찾고 구하고, 기도하고, 모색하며 다 함께 교통해야 한다. 교통하는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확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조금 거창할 수도 있겠지만, 진리의 원칙에 따라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좀 더 현실적이지 않겠느냐? 이것에 도달하면 된 것이다.

어떤 일이 임하면 논쟁하지 말고, 우선 자신의 관념, 상상, 규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야 할 이성(理性)이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까지 해 본 적이 없는 어떤 일에 대해서, 그런 일에 대해서는 네가 능숙하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자신을 문외한이라고 여기고 너에게 자문을 구해야 한다. 자문을 얻고 나면 기본적인 개념은 있게 될 것이다. 그다음 내가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너의 말을 그대로 다 들어서도 안 되고, 또한 완전히 나 자신의 상상대로 해서도 안 된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집의 사역에 유리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을지를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적이다. 내가 이렇게 찾고 구하고 너에게 자문도 구했는데, 만약 너에게 ‘형제(자매)가 나한테 자문받은 상황이고 내가 전문가인데 당연히 내 것이 맞지. 나는 실정을 잘 아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있고, 형제(자매)는 모르고 있는 게 뻔하니 당연히 내 말대로 해야 돼.’라는 관점이 있다면, 너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마땅히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며 무모하게 진행할 것이다. 이런 방법은 어떠하냐? (교만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교만한 성정이고, 무조건 어떻게 하도록 만들겠다는 마음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정해 놓은 것을 알려 주는 것은 다 교만한 성정이다. 너는 “이 일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부분을 말씀드렸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지식이나 전문 분야, 또는 업무적인 것이기에 진리와 관련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씀드릴 순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으니 그대로 하지 말고 참고만 하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자세한 건 하나님의 뜻을 더듬어 보세요.”라고 말하는 이러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너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네 자신이 정말 잘 안다고 여기지 말라. 그것이 바로 교만한 성정이다. 교만한 성정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자문한 탓이냐? (아닙니다. 본성의 것입니다.) 왜 그 본성이 너에게 그런 반응과 표현이 있게 한 것일까? 어떻게 유로된 것일까? 너는 그런 일이 임하기만 하면 바로 이성과 정상 인성을 잃어 버리고, 판단력이 없어진다. ‘역시 사람을 알아보는군. 난 당연히 알고도 남지! 내가 자주 접하는 일이니까 나한텐 식은 죽 먹기야. 별것 아니지.’ 너에게 이런 생각이 있다면 이성이 정상적이겠느냐? 패괴 성정이 유로될 때는 다 정상적이지 않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어떤 일로 너에게 자문을 구하든 너는 높은 자세로 대하지 말고 정상적으로 대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적이냐? 너는 ‘형제(자매)가 내게 물어보는구나. 내가 아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건방 떨지 말고 정상 인성이 있는 모습으로 대답하고 해결해야겠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럴 때는 생각도 해 보고 묵상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묵상하기 시작하면 너는 영 안으로 돌아오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러면 정상적인 이성의 표현이 있게 된다. 정상적인 이성의 표현이 있게 되면 어떤 때는 의기양양해하다가도 마음으로는 좀 단속받게 되는 것이다. 단속을 받으면 유로되는 패괴 성정이 반은 감소되고,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도 훨씬 줄어든다. 하지만 네가 교만한 성정으로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 “제 말을 들으면 틀림없어요. 바로 그거예요.”라고 말한 것을 상대방이 얼떨결에 따랐을 경우, 네가 말한 것이 옳은 길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잘못된 길이라면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만한 사소한 일이라면 한 사람만 곤경에 빠뜨리고 말겠지만, 교회 사역에 관련되는 큰일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만일 더 큰 일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께 득죄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에 관련된 일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된다. 그러면 매우 심각하지 않겠느냐? (심각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일을 하면 한 가지 방면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패괴 성정이 유로되거나 한 가지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을 단순히 하나의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너는 반드시 정상적인 이성으로 찾고 구하며 묵상해야 한다. 묵상하게 되면 일을 함에 있어 상상으로 규정하지 않게 된다. 그런 것의 통제가 없이 일하면 훨씬 정확해진다. 네가 영 안으로 돌아와 기다리며 찾고 구하고 묵상할 줄 알게 될수록, 너의 이성은 점점 정상이 되는데, 이성이 정상으로 될수록 더 규범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규범적이란 무엇이겠느냐? 정상 인성의 기준과 양심의 기준에 부합되게 일을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과 진리 원칙에 부합되게 일을 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일시적인 충동 때문에 묵상하지도 않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두 팔을 휘두르며 “그렇게 하세요. 괜찮아요!”라고 지휘한다면, 그것은 정상 인성의 이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정상 인성의 표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모두 정상 인성에 갖춰야 할 표현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임하든 너는 먼저 차분히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와 영적으로 안정한 다음,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하냐? 아니다. 정상 인성에 이런 것들, 즉 이성이 갖추어져 있기에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단속할 수 있으므로 가능한 일인데, 사람이 그렇게 실행하기를 원하느냐에 달렸다. 네가 만약 매사에서 항상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고, 높은 위치에 서려고 하고,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상이 되려고 하고, 늘 사람 마음속에 자신의 형상을 세운다면, 너는 무모하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면 너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올 수 없고 영 안으로 돌아올 수 없다. 너는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한 다음 늘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고, 큰일도 했으니 스스로 능력이 있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것은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항상 안정되어야 한다. 일이 임하면 조급해하거나 허둥대거나 급히 서두르지 말고 안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이지 말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 도달해야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칭찬을 두어 마디 해 주면 우쭐거리는데, 우쭐거리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듣기 싫은 말을 두어 마디 해 주면 네 속에서 ‘내가 얼마나 능력 있는데 왜 그런 말 들어야 돼? 다른 데 가면 그런 천대는 안 받을 걸!’이라고 반응한다. 너에게 뭐라고 좀 하면 어떠냐? 별것 아니지 않으냐? 최근에 무슨 일을 하든 다 순조롭고, 다들 잘한다고 칭찬해 주며 책망 훈계하는 사람도 없으면 신나서 펄펄 날아다니는데, 정신이 이상해 보인다. 반대로 한동안 무엇을 해도 순조롭지 않아 축 처져 있을 땐 기분이 늘 안 좋다. 기분이 좋을 땐 뭐라도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기분이 안 좋으면 누가 말을 걸든 힘을 내지 못하고 풀이 죽어 있다. 이런 게 인성이 미숙하고 정상적이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정상이 되고 나면 일에서 좌절하거나 책망을 받아도 소극적이 되지 않고 본분하는 데도 영향받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큰 일을 해냈거나 많은 고생을 했더라도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어떤 상을 받아야 한다거나 사람들이 우러러보거나 뒤에서 대단하다고 칭찬해 줘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이런 생각이 없으면 사람은 안정되고 성숙한 것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거나 좌로나 우로나 어느 한쪽으로 쉽게 치우치는 이것은 미숙한 표현이다. 너희들은 지금 이런 정형이 많지 않으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어떻게 해도 다 좋아한다. 기쁘니까 흥이 나서 ‘난 효력품이 되어도 좋아. 그래도 죽기까지 충성할 거야.’라고 한다. 하지만 며칠 지나 소극적이 되면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게 되고 ‘이번엔 끝장이야. 또 못난 모습을 보였네. 이젠 가망이 없어. 난 왜 소질이 전혀 제고되지 않지? 인성도 왜 전혀 좋아지지 않는 거지? 언제면 변화될 수 있을까?’라고 한다. 이래저래 정상적이 되지 못한다. 너의 양심, 이성, 판단력 그리고 자신의 정형에 대한 장악 정도가 모두 불안정하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여러 정형이 정상적인지 볼 줄 모르고 컨트롤할 줄 모르며, 좌절과 실패를 당하거나 혹은 어떤 일에 부딪히면 무슨 공과를 배워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찾고 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위축되어 진보보다 후퇴를 더 많이 한다. 다들 이런 정형이다. 그래서 진보가 느리다. 연약해지든 소극적이 되든 혹은 최근 들어 비교적 순조로웠든 영 안의 정형이 모두 방해를 받고 너를 통제해 정상적으로 진입할 수 없게 한다. 왜 적극적인 정형인데도 정상적으로 진입할 수 없다고 말할까? 지위를 누리고 다른 사람의 칭찬을 누리게 되고 ‘이 일을 잘했다, 저 일도 잘했다, 인솔자로 적격이니 다음 선거 때도 뽑아 주겠다.’라는 말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받아 온통 그 생각뿐이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빠져나오지 못하니 스스로 ‘나는 왜 이런 것들을 벗어 버릴 수 없을까? 나는 왜 늘 이 속에 살면서 지위의 복을 누리는 걸까?’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은근히 누리고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정형이 속에서 얽히고설켜 있어 갈등하고 싸운다. 그렇게 한동안 겪다 보면 그런 것도 예사로워져 칭찬을 받아도 별 영향을 받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실패하면 또 ‘나는 정말 최악이야. 구제불능이야.’라고 여기는데, 늘 극단적이다. 언젠가 너희가 어떤 본분을 하든, 어떤 일이 임하든 모두 그 일에서 공과를 배우고 실행하고 깨달아야 할 진리를 찾을 수 있다면 너희가 성장한 것이다. 그러면 너희를 이끌고 가거나 잡아끌지 않아도 되는데, 너희가 지팡이에서 벗어난 것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교통하고 여러 가지 일을 경력(역주: 체험)하고 또 하나님이 배정한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이 도대체 너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그리고 그런 일과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인지, 어떤 방면에서 분별이 자라라고 하는 것인지, 어느 방면에서 식견을 얻으라고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고, 매번 그런 경력에서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성장한 것이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거나 아니면 때리거나 걷어차야만 앞으로 나아가고, 아니면 무작정 멈춰 있거나 너무 빨리 뛰거나 하는 극과 극을 오고 간다. 이런 것은 다 분량이 작은 표현이다. 분량이 작은 사람은 교통을 듣거나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게 되면 자신이 깨달아야 할 진리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사람이 앞에서 길을 이끌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완전히 치우친 길을 가게 된다.

분량이 아주 작은 것은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있다. 어떤 일이 임하면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중요한 본분이든,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접하는 것에 관련되든 육체적인 정감이나 상상, 혈기로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만은 기억해야 한다. 관념과 상상은 어떤 것은 가정 교육에서 온 것이고, 어떤 것은 사회에서 들은 것이고, 어떤 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배운 나쁜 버릇과 습관이다. 정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편견은 정감에 속하느냐? 예를 들어, 누가 너에게 너와 관계가 아주 좋은 한 사람이 몰래 나쁜 일을 했다고 말하니, 네가 “그분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요. 그분은 정말 추구한단 말이에요.”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어떠하냐? 공정하냐? 이것이 바로 정에 치우쳐 일을 하는 것이다. 만약 너와 그 사람 사이에 그전부터 어떤 일로 불쾌해 사이가 별로 좋지 않고 거리가 있다고 하자.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어떤 일에 관한 말을 하는데, 맞는 말이고 일리가 있으며 원칙에도 부합되지만 네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어떤 문제이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 네가 속으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으면서도 듣고 싶지 않는 거라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이 바로 개인주의 색채가 강해 정감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으니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난 듣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모를까. 혹시라도 그가 이 말을 다른 사람을 통해 내게 전달해 준다면 꼭 들어야지.’ 이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냐? (아닙니다.)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냐? 너희 둘 사이에 장벽이 있어 서로가 불쾌한 사이이다 보니, 이 방면의 정감이 너를 가로막은 탓에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너는 진리를 1순위로 하지 않고 개인적인 관계와 개인 간의 갈등을 1순위로 하였다. 이렇게 정감이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가로막음이 된 것이다. 그러니 정감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 둘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좋든 나쁘든 혹은 너희 둘이 전혀 만난 적이 없고 서로 초면일 경우, 말소리가 크고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리 있게 말하고 맞는 말을 한다면 듣겠다는 그런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교통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되고 경력도 있어 보이긴 하지만, 너무 나대니까 눈에 거슬리고 불쾌해서 맞는 말이라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그래도 내가 교회에서 그 사람보다 지위가 높고 명망도 더 있으니까 말이야.’ 이것은 무엇이냐?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도 정감이다. 자신의 취향과 욕망에 따라 사람을 대하고 일을 대하는 것은 다 정감이다. 다 정감에 속하는 것이다. 너는 가족과 친구에게만 정감이 있고, 남들과는 정감이 없다고 여기느냐? 다 있다. 가깝거나 멀거나 사람 간에 있는 것을 다 정감이라고 한다.

다시 관념과 상상에 대해 말해 보자. 누군가 이곳의 전압이 몇 볼트냐고 물으면, 너는 “그건 다 220이잖아요?”라고 말하게 된다. 이 말은 어떻게 온 것이냐? 근거가 있느냐? 왜 220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확인해 봤느냐? “어디나 다 220이잖아요. 220 아니면 불이 켜지겠어요?”라고 하는 것은 상상이 아니냐? 공교롭게도 이곳은 220볼트가 아니어서 네가 틀리게 됐다. 네가 한 그 말은 다름 아닌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는지 틀린지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한 가지 성정이 있다. 어떤 성정이냐? 상황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상상대로 함부로 말하는 것을 또 어떻게 표현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멋대로 지껄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아주 잘 사용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은 한 가지 성정이다. 사람이 상상에 따라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처리하고 인ㆍ사ㆍ물을 대하는 것은 어떤 성정이냐? 교만한 면이 있고 강퍅한 면도 있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느냐? 책임감이 없고 이성이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네가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는 생각이나 상상 그리고 너의 행동이나 네가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다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너는 자신과 비춰 볼 줄 알아야 한다. 비춰 봐야 할 때마다 멍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안 된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다. 진리로 무엇을 하는 것이냐?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합니다.) 어떻게 해결하느냐?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실제 상황에 비추어 봐야 하고, 그다음 자신의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방금 상상에 관련해 말하게 되었는데, 성정과 연관되었다, 그렇지?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냐? 너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정답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상상에 근거해 함부로 말하는데, 자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 나만 아니까 먼저 대답해야지. 난 말도 잘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 니들은 둔한 데다가 입놀림도 떨어지고 반응 속도도 따라오지 못해. 난 달변가라서 ‘220’ 바로바로 나오지. 220볼트 몰랐지?’ 이것이 바로 말하고자 하는 뜻이고, 이런 것이 내면에 깊이 숨겨져 있다. 그렇지 않으냐?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너에게 이 일을 처리하는 데 돈을 얼마나 써야 하는지 물었다고 하자. 너는 돈을 얼마나 써야 하는지 실제 상황을 아예 알아보지도 않았고 물어본 적도 없었으며 조사도 확인도 하지 않았고 입증할 수 있는 정확한 증거도 없다. 그런데 너는 상상으로 입을 열기만 하면 “그건 10만 위안 정도 들어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그건 내가 잘 알아요.”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런 성정이다. 이런 성정을 유로하자, 그 사람이 네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 10만 위안 정도면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어 일을 추진하지 않게 되었다면 이것은 일을 지체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네가 한 이 일은 어떤 성질이냐? 교만한 성정을 유로한 것이다. 교만한 성정의 지배가 있었기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멋대로 지껄이게 되고, 상상한 대로 입을 열기만 하면 말하고, 전혀 생각없이 아주 무책임하게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 방면의 성정을 발견했느냐? (자신이 아주 교만하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은 본성 실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본성 실질은 뿌리이다. 지금 뿌리를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겠느냐? 예를 들어, 큰 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려면 곧바로 뿌리부터 뽑겠느냐, 아니면 나뭇가지와 기둥을 차례로 조금씩 조금씩 제거한 후 나중에 뿌리만 남았을 때 한꺼번에 확 뽑아 버리겠느냐? 어떤 것이 쉽겠느냐? (먼저 나뭇가지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선 작은 나뭇가지들을 먼저 해결하듯이 여러 가지 정형을 해결하는 것이다. 너는 교만한 성정에서 살고 있는 그 정형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먼저 스스로 그것을 알고 마음으로 ‘내 상상에 불과한 것을 말하는 건 옳지 않아. 교만한 성정이 또 폭발하려는 거잖아. 이런 말은 하면 안 되겠어. 근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모른다고 하면 망신만 당하잖아. 아니야, 이것도 교만한 성정이야.’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형이 있다. 첫 번째, 함부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 한 가지 정형이다. 두 번째, ‘함부로 말하지는 않더라도 무슨 의견은 있어야겠는데.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무시당하니까 뭐라도 짜내야겠어.’ 또 하나의 정형이다. 함부로 말하려거나 거짓말을 하려는 것은 다 문제가 된다. 교만한 성정이 아니면 간사함이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을 다 성찰해야 한다. 이런 경우, 패괴 성정이 유로하려는 것 같으면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 입만 꼭 다물고 있는 식으로 자제하면 맞느냐? (틀립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리 원칙에 맞느냐? 이것은 실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아는 것만큼 말하는 것입니다.) 맞다. 모르면 “제가 알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면 된다. 책망받을까 봐 걱정되니 또 머리를 굴려 ‘이것으로 책망받으면 안 돼. 그럼 질문을 피해서 말할까? 아니면 핑계라도 대 볼까?’, 이런 궁리를 한다면 어떠냐?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면 됩니다.) 맞다. 궁극적으로, 네가 머리를 얼마나 굴렸든 나중에 한 말에 거짓이 없고 교만이 없으면 그 문제는 해결된 것이고, 진리를 실행한 것이다. 네가 머리를 굴렸든 굴리지 않았든 상관없이 네가 말하고 한 일이 진리에 부합되지 않고, 교만한 성정을 유로하고 궤사를 부리며 대항하고 거짓말을 꾸며 대고, 그런 다음 또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사실의 진상을 덮어 감추고 자신을 포장한다면, 자신이 교만한 성정이 유로된 줄 뻔히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길까 봐 또 궤사를 부리고 갖은 방법을 다하여 이런 것을 은폐하려고 한다면, 이런 것은 다 패괴 성정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지 말고, 이런 방법을 다 내버려야 한다. 결국 가장 간단한 하나의 실행이라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당연히 해야 할 것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 5:37)라고 말씀한 것처럼 성실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실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냐? 성실한 사람으로 살려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기만하지 않고 말할 때 수분을 섞지 않는 것입니다.) 맞다. 여기에는 세부적인 것이 있다. 수분을 섞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말속에 거짓이 없고 속이고자 하는 속셈과 목적도 없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속셈과 목적이 있으면 겉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속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표현되는 말에도 불순물이 없고 거짓말이 한 마디도 없게 된다. 그러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라고 한 것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면 교만하고 궤사한 것을 다 해결한 것이 아니냐?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 그런 것을 다 해결하였다. 복잡하냐? 복잡하지 않다. 너의 내면에 얼마나 많은 정형과 패괴 성정이 있든지 간에 이 한 가지 진리로 다 해결된다. 거짓말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진리에 따라 실행한다면, 떳떳하고 하나님 앞에 살게 되고 빛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늘 돌려서 말하는 사람은 꼭 도둑놈과 같이 어딜 가면 제일 구석진 곳을 찾아서 앉고, 항상 광명정대하게 행동하지 않는 무리 속에 섞이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내면에 꿍꿍이가 너무 많고, 기만하는 것이나 떳떳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으면 늘 사람을 속이고 숨기고 감싸고 포장하게 된다. 그것은 빛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현재 너희들은 성실한 사람으로 살기를 실행하고 있느냐? 각 방면에서 다 성실한 사람으로 살고 있느냐? (어떤 때는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아직도 의식적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원래 의식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이 의식은 마음속의 일이기에 너는 항상 마음속으로 이 진리를 하나의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자신의 형상, 겉모습, 사람 마음속에서의 지위,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다 그다음으로 두어야 한다. 너희들은 성실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정상 인성과 정상 이지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고상한 형상으로, 사람들이 존중할 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소중한 형상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을 귀히 여겨야 한다. 네가 마음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두 이미지와 두 기준에 기울인 정도에 따라 그 두 기준을 가늠하는 가치도 다르게 되고 따라서 너의 행위와 일 처리하는 원칙 그리고 마음가짐도 다르게 된다. 네가 만약 성실한 사람이나 솔직한 말을 하는 사람을 얕잡아 보고, 공손하게 옳은 말과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얕잡아 보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나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사람, 성심성의껏 하는 사람,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얕잡아 본다면, 자연히 그런 사람으로 되기를 싫어한다.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을 보면 업신여기고, 도박꾼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을 무시한다. 정상 사람은 정상 인성의 필요가 있기에 매우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하고, 올바르게 생활한다. 그런 사람은 도박하고 술 담배도 하며 올바르게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정상 사람의 생활 방식은 도박꾼의 생활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다. 이것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달렸다. 네가 언제나 진리를 추구하며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사람과 비교적 성실한 사람을 경멸하고, 언변이 좋고 수단을 부릴 줄 알고 감언이설로 사람을 속이며 높은 지위에 서서 설교할 줄 아는 그런 사람만 항상 우러러본다면 좋은 길로 갈 수 있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지향하면 무엇을 추구하게 된다.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지향하느냐? 세상에 저버림당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사람들 눈에 바보 같고 사리에 어두운 사람으로 보여질지라도 좋은 사람으로 살기를 지향하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런 지향이 있다면 희망이 있겠지만, 그런 지향조차도 없다면 곤란하다. 좋은 사람, 성실한 사람, 성심성의껏 하는 사람, 고난을 받으며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사람을 얕잡아 보는 사람은 곤란하다. 진리에 기꺼이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르며, 말을 함에 있어 성실하고, 일 처리함에 있어 책임지고 진지하게 이행하며, 직책에 충실한 사람을 보면 마음으로 부러워하고 그런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얻고 싶어서 가까이 한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마음속으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지향하지도 동경하지도 않으며 그러한 요구가 없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다.

지금까지 정감과 상상에 대해 말했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느냐? 혈기가 있다. 어떤 것이 혈기인지 알고 있느냐? 혈기에 정감의 요소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표현이 혈기이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은 혈기가 아니냐? 자신에게 모질게 군 사람을 공정하지 않게 대하는 것은 혈기가 아니냐? 당한 대로 똑같이 대갚음하는 것은 혈기가 아니냐?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혈기이다. 너희들은 일할 때 혈기를 부리는 그런 표현이 자주 있지 않으냐? 심한 말을 한 마디 들으면 열 마디 퍼붓는데, 입으로 말하지 못하면 속으로 하고, 속에서는 심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하며 꿈에조차 심한 말을 한다. 그것은 혈기가 아니냐? 혈기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지위에 서서 말하고 사람을 훈계하는 것도 혈기입니다.) 유리한 조건인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이 하기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훈계하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이것도 혈기이다. 사실 많은 경우에 다 혈기를 유로한다. 진리에 근거해 하지 않은 일은, 대부분의 경우 다 사람의 원한, 사심, 분노, 불평에서 비롯된 것이고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런 것은 다 혈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혈기는 복수만을 위한 것이냐? 아니다. 혈기는 미치는 면이 아주 많다. 심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똑같이 해 주고 싶은 그런 것만이 혈기가 아니다. 예를 들면, 사건 하나가 터졌는데 심한 말을 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너는 다짜고짜 좀 심한 말을 퍼부었다. 하지만 한 소리를 하고 난 다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이건 옳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심한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혈기가 아니냐? 왜 혈기라고 하느냐? (이것은 타고난 본성의 자연적인 유로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자연적인 유로이고 틀림없이 육체에 속한 것이고 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르게 부르지 않고 굳이 혈기라고 부를까?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은 혈기가 아니냐? (혈기입니다.) 은혜를 원한으로 갚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노기충천하는 것은? 일이 닥치면 피가 거꾸로 솟아 이지(理智)를 상실하고 ‘자초지종이야 어떻든 분풀이부터 해야겠어. 결과야 어떻게 되든, 원칙이 무엇이든 그 사람이 누구든 난 먼저 시원하게 한 소리 해야겠어.’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혈기이다. 혈기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냐? 이성이 있느냐? 정상 인성에 부합되느냐? 구속력이 있느냐? 진리에 부합되느냐?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혈기란 사람의 야성인데, 정상 인성이 없고 이성이 없는 것이다. 이성이 없는 표현은 어떤 것이냐? 제정신이 아니고, 변태적이고, 자제를 못하고, 스스로 단속이 안 돼 폭발해 버리는 것인데,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많지 않으냐?

성정 변화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우선 자신이 유로한 여러 가지 성정이 어떤 방면의 것인지, 마음의 어떤 생각으로 그 성정을 유로하게 되었는지, 자신의 정형이 어떤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사람의 여러 가지 정형은 한 가지 성정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한 가지 성정에서 많은 정형이 유발된다. 너는 그런 것을 다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분별하고 나면 그만이냐? 분별한 다음 자신을 인식할 줄만 알아서는 안 된다. 해부하고 자신의 어느 방면의 문제인지 비추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어느 방면으로 실행하고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안다면 실행할 수 있느냐? 실행하지는 못한다. 환경을 통해, 기도를 통해, 책망과 훈계, 좌절과 심판 형벌을 통해, 그리고 또 스스로 자신을 자제하고 단속해야만 조금씩 실행할 수 있다. 조금씩 실행하게 되면 성정이 변화된 것이냐? 아직도 변화된 것이 아니다. 그 방면의 성정에서 유발되는 여러 가지 정형은 그래도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너희들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이 정형은 이 성정에서 생긴 것이고, 이 정형은 옳지 않다. 그럼 옳지 않은 정형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어떻게 하면 될까? 나에게 왜 이런 정형이 생기는 걸까? 하나님께서 이 정형을 어떻게 보실까?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옳은 정형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까?’ 잘못된 정형을 바로잡아 옳은 정형으로 돌렸다 하더라도 끝난 게 아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정형은 알게 되었는데, 네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왜 그 사람에 대해 불공평했었는지에 관해서는 세부적인 사항이 있지 않으냐? ‘저 사람, 나보다 못하니깐 얕보게 돼. 공평하게 대하고 싶지도 않고 밟아 버리고 싶어.’ 이것은 무엇이냐? 교만한 성정이다. 교만한 성정이 있기에 너의 안에 그런 정형이 생기게 되었다. 그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싶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싶지 않고, 공정하게 평가하고 싶지 않고, 어떤 본분이 있어도 그를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여하튼 너는 그 사람을 깔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형을 장악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너의 관점을 쉽게 돌릴 수 있겠느냐? 쉽지는 않다. 그리하여 한 방면의 성정이 많은 정형을 유발하고, 그러한 정형이 너의 안에서 네가 말하거나 일하는 것을 통제하고, 너의 관점이나 네가 사람을 대하는 것까지도 통제하게 되는데, 그렇게 너의 온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 자그마한 정형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성정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실은 그 성정이 너를 통제하고 있는 것이지, 어느 한 방면의 정형이 너를 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방면의 성정이 자그마한 정형을 유발하였고, 그 자그마한 정형으로 인해 너는 그런 나쁜 일들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로 너의 정형을 해결하거나 돌려세우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그런 정형 속에서 살게 되고 따라서 영원히 그 성정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느냐? 여기에는 길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고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징계와 훈계를 구하면서 검증을 받고 깨닫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동시에 너에게 협력하려는 마음과 자신을 배반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안 해. 저 사람, 소질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정상적으로 대할 것이고, 적합한 본분을 하게 할 거야. 나와 사이가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적합하지 않으면 안 쓰고 저 사람을 쓸 거야.’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정형을 바로잡게 된 것이 아니냐? 네가 그런 행위를 바로잡음으로써 너의 정형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결과를 돌려세우고 바꾼 것이다. 이것이 한 방면의 실행이 아니냐? 그런 실행은 어떻게 해서 있게 된 것이냐? 네가 협력하지 않고 네 자신의 주관적인 뜻을 전혀 배반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느냐? 절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협력이 아주 관건이다. 너는 절대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할 수 있고, 진리에 순복하는 태도와 진리에 순복하려는 결심이 있어야만 주관적인 뜻과 정형을 배반할 수 있다. 그래야 정형이 차츰차츰 돌아서게 된다. 그 사람을 깔보는 것은 너의 정형이지만, 그 정형에 따라 살지 않으면서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에서는 그 사람을 쓰고 공평하게 대하여라. 그러면 언제든지 그 사람 얘기가 나와도 너의 양심은 편하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다 보면 차츰차츰 그 사람에 대한 관점도 바뀌게 된다. 이런 것은 누가 한 것이냐? 하나님이 해 준 것이다. 진리가 너의 안에서 조금씩 작용하면서 너의 그 정형을 변화시키고 바로잡아 준 것이다. 처음에는 괴롭다. 그 사람을 쓰면 네 인격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다. 그 사람을 쓰긴 썼지만 그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말을 하고 싶지도 않고, 속에는 여전히 그 사람을 깔보게 되고 정형이 완전히 돌아선 게 아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패괴 성정의 뿌리이다. 뿌리가 있는 것이다! 자그마한 정형 하나가 너를 이만큼이나 고생시킬 수 있는데, 이것은 성정의 문제가 아니겠느냐? 이게 바로 사람 본성의 실질 문제이다. 너는 조금씩 돌아서야 한다. 그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교통도 많이 해서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간다면 그 사람의 장점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본분에 정말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차츰 자신의 비열함과 수치스러움을 인식하게 되고, 아울러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한 것과 그렇게 대한 것이 공정하고 진리에 맞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똑같은 일이 다시 임한다면 너는 그 사람을 대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정형이나 다른 환경과 인ㆍ사ㆍ물로 네가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와 네가 자신의 패괴 성정과 자신의 뜻을 배반하겠다는 결심을 시험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련이다. 어느 때에 이르러 너와 사이가 좋든 나쁘든, 너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든 멀리하는 사람이든, 너에게 아부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리고 상대가 어떤 소질이든 상관없이 네가 모두 공평하고 정확하게 대할 수만 있다면 너의 그 정형이 철저히 바뀐 것이다. 네가 자신의 상상과 정감 그리고 혈기에 따라 대하지 않았다면 그 방면의 진리를 얻은 것이다. 지금은 아직 안 된다. 네 안의 여러 가지 정형이 여전히 너의 행위와 사상, 생각을 통제하고 있고 그런 것이 네 안의 생명이 된 것이다. 아직은 진리가 너의 생명이 된 것이 아니고 너에게 좋은 행위가 좀 있을 뿐인데, 그 좋은 행위의 배후에 네가 유로하고 있는 것과 마음속의 여러 가지 정형과 생각은 다 너의 패괴 성정에서 생긴 것이어서 진리에 맞지 않다. 언제쯤 너의 정형과 너의 모든 생각이 다 이성적이고 원칙에 맞고 진리에 부합되어 그 패괴 성정이 너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면 너의 성정이 정말로 변화된 것이다. 너는 자신을 배반하거나 통제할 필요 없이 바로 원칙과 진리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사람들이 “패괴 성정을 배반했나요?”라고 하면 “아직 못했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일을 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나요?”, “전혀요.”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너의 생명이다. 지금 너희들은 아직 안 된다.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고 또 설교나 찬양을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의 격려를 받아야 하며, 너에게 힘을 더해 주고 방패가 되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이것은 진리가 아직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삶은 고달프고 가련하고 슬프기만 하고 또 갖은 추태를 보이고 있다. 패괴 성정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냐? 고통과 증오와 원망이고, 소극적이 되거나 의기소침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고 기만하고 교만하고 독선적이 되게 하며, 때로는 자포자기하거나 궤변을 하거나 대항하게 하고 그러다가 또 자신이 가여워서 “의지할 데가 없는 저를 보면 정말 가련해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얼빠진 소리를 한다. 왜 의지할 데가 없다는 거냐? 가장 든든하게 믿고 의지할 분이 있어도, 네가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얻은 만큼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네가 진리를 조금도 얻지 못하고 진리를 조금도 모른다면 하나님은 너와 아주 멀리 있게 된다. 네가 진리를 알고 실행하며 진리가 네 안에서 생명이 되었다면 하나님은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얻지도 못하여 진리를 실행할 수도 없다면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너의 안에 없는 것이다. 진리가 너의 왕이 되어 너의 모든 것을 주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너의 모든 것을 주관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고 너는 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패괴 성정이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이지, 진리가 주권 잡은 것이 아니다. 어느 때에 너의 말과 행동, 생각과 마음 그리고 하루하루 먹고 입고 사는 것, 사람 됨됨이와 일 처리하는 것, 본분하는 것, 사람을 대하는 이 모든 것을 네가 어떻게 할 것인지 머리를 쥐어짤 필요 없이 자유자재로 원칙에 따라 일 처리할 수 있고, 원칙에 따라 이성에 따라 생각하고 대응할 수 있고, 그리 어렵거나 고통스럽지 않게 또는 화를 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실행하고 도달할 수 있다면, 너는 자유로워진 것이고 정말 진리를 얻은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늘 흐리멍덩하다. 설교를 듣고 깨달은 것이 이틀도 못가서 다시 흐려지는데, 어떻게 실행할지 몰라 또다시 소극적이 되고 길을 잃는다. 지금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꿈꾸는 사람은 적어졌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복받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적을 것이다. 다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실행해야 성정 변화에 도달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도리는 아마 다 알고 있고, 다만 어떻게 실행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지, 그 길을 아직 잘 몰라 분명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글귀 도리를 말하지 않게 되는지 알고 있느냐? 그 길을 알고 있느냐? 욥과 바울, 둘 중에서 누가 글귀 도리에 능한지 말해 보아라. (바울입니다.) 무엇 때문이냐? (바울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글귀 도리를 해결하려면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 진리를 실행할수록, 진리에 공을 들일수록, 실행에 공을 들일수록 글귀 도리가 적어진다. 실제는 어떻게 온 것이냐? 사람이 실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체험과 정형이 생기게 되고, 그 여러 가지 정형에서 어떻게 해결하고 대응하며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사람에게는 변화되고 돌아서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다 실제이다. 만약 너에게 그런 과정이 없이 단지 글귀와 도리상에서 알고 이해하고 분석하거나 느낀 것이라면 모두가 다 도리이다. 네가 글귀에서 알게 된 것과 직접 체험한 것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도리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실행하지 않고 글귀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전해 듣기도 하면서 거기에 해석을 더하여 도리가 생긴 것이다. 도리가 실제로 될 수 있느냐? 진리란 네가 실행하기 전에는 영원히 너에게 도리이다. 진리를 실행하고 경력하고 느끼고 체험하여 생긴 인식과 마음, 생각, 체험이 바로 실제인 것이다. 실제는 실행에서 온 것이다. 실행하지 않으면 영원히 실제가 없다. 실행하지 않고도 실제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느냐? 그건 어디까지나 도리이다. 말에 실제가 좀 있고 다른 사람이 듣기에 길이 있고 실제적인 느낌이 있다 해도 여전히 도리이다. 네가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네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정형이 있다면 너는 해결할 줄 모르게 되고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많이 실행하면 원칙을 장악하게 된다. 혹시 어느 방면의 경력이 없다 하더라도 알고 있는 그 방면의 진리 원칙을 상대방에게 말해 줄 수만 있어도 실제적인 것이다. 진리 실행은 공부하는 것과 다르다. 공부는 글귀에 공을 들여 쓰고 암기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면 된다. 진리 실행은 그것과 정반대된다. 이젠 알겠느냐!

(저는 일이 많을 때 다 잘해야 되고 성공해야 된다는 마음이 앞서서 서둘러 하느라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는 그런 정형이 있습니다.) 일할 때 전심으로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고 원칙대로 처리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는 것도 마음을 안정한 것이다. 일 처리 한다고 해서 마음을 안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어떤 일을 처리하면서 다른 일을 생각한다면 그때는 마음을 안정하였다고 할 수 없다. 오늘 처리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생각도 해 보고 여럿이 모여서 교통도 해 봐야 한다. 교통할 만한 사람이 없다면 혼자서 묵상하고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지 찾고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마음을 안정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마음을 안정한 것이겠느냐? (많은 경우에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바로 다른 일이 있게 되어 진리 원칙을 찾고 구할 때가 적습니다.) 그럴 때는 일을 하면서 묵상해야 할 상황인데, 마음속에 기다리는 태도와 어떻게 처리하면 될 일인지 찾고 구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일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어서 다른 사람을 찾아 물어보거나 알아봐야 한다고 하자. 알아보는 동안 너는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겠느냐? 사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는지 찾고 구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사는 네 안에 조명을 비춰 주듯 불현듯 밝아져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한 사람이 너에게 힌트를 주거나 한 가지 일이 너에게 힌트가 되게 해 깨닫게 하는 것이다. 찾고 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무조건 진지하게 무릎을 꿇는 것만이 아니다. 두세 시간씩 꿇고 기다리다가는 모든 것이 다 지체된다. 때로는 길을 가며 그 일에 대해 생각해도 되고, 때로는 일이 임했을 때 여럿이 모여 즉시 교통해도 되고, 때로는 상면에 물어보거나 혼자 하나님 말씀을 찾아봐도 되고, 급한 일일 경우는 상황이 어떤지 일단 빨리 현장에 나가서 먼저 장악하고 있는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한편, 마음으로 기도해도 된다. 이렇게 일해야 노련한 것이다! 임한 일에서 당황해 하면 안 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찾고 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바쁠 때는 바쁜 상황에 맞게 찾고 구하고, 여유로울 때는 여유로운 상황에 맞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찾고 구해야 하는데, 방식이 다 다르다. 시간적 제한이 없고 미룰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다면 좀 기다려도 좋다. 큰일에서 조급해하면 안 된다. 괜히 서둘렀다가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가 있을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결과, 가장 좋은 성적, 가장 좋은 성과를 이루려면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 요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보거나, 내막을 아는 사람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으니, 이런 것도 다 방식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깨우치는 것은 한 가지 방식만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에서만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이 가르치게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에 대해 네가 문외한이고 전혀 접한 적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깨우쳐 주겠느냐? 다른 사람을 통해서 깨우쳐 준다. 그 방면 업무에 대해 누가 알고 있으면 빨리 그 사람을 찾아가 실마리를 풀 방법을 좀 얻고 나서 원칙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인도하게 된다. 하지만 그 방면의 업무나 전문 분야에 대해 개념적으로라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기초상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를 깨우쳐 줄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은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계획해 볼 수도 있고, 기획할 수도 있고, 자문을 구할 수도 있는데, 여러 방면으로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다 하나님께 달렸다. 이게 바로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이 원칙으로 행사한다. 네 마음에는 모든 일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법칙이 있어야 하고, 그걸 인지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 경우, 한 가지 일을 할 때 강행한다면 일을 빨리 마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효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럴 땐 먼저 하지 말아야 한다. 기다려도 되는 일이라면 며칠 더 미루고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급하다고 기다리지 않는다면 해 놓고도 그렇게 한 것이 맞는지, 결과가 어떠할지 알 수 없어 안절부절하게 되고 확신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한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너는 기다려야 한다. 마음에 계속 뭔가 모르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면 며칠 더 기다려 봐야 한다. 어떻게 기다려야겠느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만 말고 여러모로 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다리라고 했지만 사람이 알아보고 협력해야 할 부분은 해야 한다. 알아보다 보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나 한 가지 일을 통해 너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줄 수 있다. 만약 알아보지 않는다면 이런 사실을 알 수도 없기 때문에 마음에 의혹이 풀리지 않고 불안하여 사실의 진상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하지만 알아보았기 때문에 돌파구가 생겨 마음이 갑자기 밝아지며 하나님의 인도라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해야겠어. 이렇게 해야 사리에 맞아.’라는 생각이 든다. 입증을 얻으면 마음의 느낌이 다르고, 해 보면 역시 나쁘지 않고 효과가 좋다. 하나님의 행사는 실제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은 인ㆍ사ㆍ물을 통하여 너를 인도하고 깨우쳐 주고, 인ㆍ사ㆍ물의 법칙에서 혹은 그 과정에서 너를 인도하여 한 가지 일을 깨닫게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끌어 준다. 하나님은 근거 없이 너에게 말씀 한 마디를 주거나 한 가지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문을 구하면 그 당시 왜 그렇게 생각했었는지, 왜 그런 느낌이 생기게 되었는지 알게 되고 진상이 밝혀진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역사하고 이렇게 사람을 인도하는데, 기묘하기도 하고 실제적이며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다. 게으른 사람은 늘 초자연적인 것만 원한다. 한 마디로 정확하게 어떻게 하는지만 알려 달라고 하면서 협력할 생각보다 하나님이 하게 하고 자기는 쉬운 길로 가고 조금도 협력하지 않으려 한다. 경건한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매사를 하나님 앞에 가져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안정하여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하나님께 여쭤봐야겠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께 찾고 구해야 돼.’라고 한다. 이렇게 찾고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일에서 인도해 준다. 마지막에 결과가 나오면 사람은 하나님의 손이 지배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는 말이 역시 빈말이 아니란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서 경력하다 보면 사람은 하나님은 전설도 아니고, 허구적이지도 않고, 공허하지도 않고, 바로 사람의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와 인도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손이 안배하고 배치하는 것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이 진실하고 실제적이라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된다. 반대로, 네가 이렇게 경력할 줄 모르면 영원히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나요? 어디에 계시나요? 다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었어도 왜 보지 못하나요? 다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들의 몸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해 주셨다고 하는데, 저는 왜 느낌이 없나요?” 느껴본 적이 없으니 미심쩍을 수 밖에 없다. 네 자신이 직접 느껴 봐야만 다른 사람이 말한 것과 경력한 것이 하나님이 한 것임을 실증할 수 있다. 하나님의 행사는 기묘 난측하지만 실제적이다. 이 두 가지를 장악해야 한다. 기묘 난측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한 모든 일에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분과 실질이 결정한다. 다른 한 방면도 있는데, 하나님은 실제적이라는 것이다. 실제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바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사유, 두뇌, 생각, 아이큐 그리고 사람이 구비한 본능과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인데, 초자연적이지 않고 공허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제이다. 하나님은 네가 맞게 하면 맞게 했다는 것을 알도록 실증해 주고, 네가 틀리게 했다면 그 방면에서 네가 틀리게 했고 패괴 성정을 유로한 것이라고 점차적으로 알게 하면서 깨우쳐 준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질 것이다. 이것이 실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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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④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⑤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⑥수분(水分): 거짓되거나 과장된 것, 또는 불순물을 비유함.

⑦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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