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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편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참된 사람의 모습이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을 보면 본분을 피동적으로 한다. 피동적으로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을 뜻할까? (앉아 있기만 하거나 기다리기만 하거나 의존하기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앉아 있기만 하고 기다리기만 하고 의존하기만 하는 것은 어떤 태도이냐? 그것은 무책임한 태도이다. 무엇을 맡으라고 했더니 너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두 사람이 같이 들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생각하기만 했지 실천하지는 않았다. 네가 어떻게든 한다면 그 일을 하는 방식에 시비 걸 사람은 없다. 네가 조금 힘들어서 두세 번씩 쉬어 가더라도 기다리고 있지만 않고 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어떤 태도이냐? 그것은 본분하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과 마음 상태, 정형이 앞의 경우와 다른 것인데, 책임감을 갖고 이미 실천에 옮긴 것이다.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고 말하기만 하는 것을 얼렁뚱땅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체면만 살리는 것인데, 그런 자세로는 본분을 잘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기만 하고 전혀 해 보거나 시도해 보지도 않으며 그것을 실제적인 문제로 생각하여 실행하지 않는다면, 본분하는 태도가 어떤 것이냐? 그런 자세가 있으면 안 된다. 네가 구상하는 것이 맞든 틀렸든, 성립되든 안 되든, 완숙하든 미숙하든, 구상한 대로 시도해 보고 모색해 본다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너를 원망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것이고, 다 초보자이기 때문에 원래 그렇게 모색하며 가는 것이다. 너희는 본분에서 최상의 효과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찾고 구하고, 자료를 찾아 보며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방향이 잡히면 그것을 적어 두었다가 그 바탕에서 여러 사람들과 토론해 보고, 방안이 나오면 바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지하게 책임을 다하는 태도이고 책임을 짊어진 것이다. 지금 너희에게는 아직까지 책임을 지려는 마음 자세가 부족하다. 책임지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니 일을 맡겨도 책임자의 자세가 없다. 일단 책임을 맡았다 하면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버팀목을 보면 다 무엇으로 쓰이느냐? 다 기둥으로 쓰이고 기초로 쓰인다. 성냥개비는 어디에 쓸 수 있느냐?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아무 일도 감당하지 못한다.

사람마다 무엇을 맡아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본분을 잘할 수 있다. 문제는 다그쳐야 움직이는 것인데, 잘못했다가 책망이나 훈계를 받을까 봐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그러면 일의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한 사람만 한쪽에서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협력하지 않는데, 해야 할 일이 있어도 관여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한다. 그런 사람은 본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품꾼인 것이다! 품꾼이 주인에게 일을 해 주고는 삯을 받기만 기다리는 것인데, 하루를 하면 하루의 삯을 받고 한 시간을 하면 한 시간의 삯을 받는 것이다. 일을 조금 해도 주인의 눈에 띄지 않아 상을 받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서다 보니 늘 체면 세우는 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충성심이 없는 것이다. 너희에게 어떤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물으면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이 참여했지만 속으로 그 일을 정말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 스스로 물어본 사람이 없고, 마음을 들이며 생각해 본 사람이 없는 것이다. 실은, 너희의 소질과 식견을 놓고 보면 아무것도 모를 정도는 아니다. 그것은 너희가 다 참여한 사람들이고 목격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다수가 대답을 하지 못할까? 어쩌면 그 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정말 모를 수도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그 일에 전혀 마음을 들이지 않았고, 마음을 쓴 적도 없기 때문이다. 신경을 쓰지 않고 임무로 여겨 완성하기만 한 것이다. 둘째,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면 매사에 다 관점이 있을 것이고 견해가 있기 마련이다. 관점이 없고 견해가 없다는 것은 대부분 무관심하고 무덤덤하고 책임감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의 본분에 마음을 쓰지 않고, 무책임하고, 대가를 치르기도 싫어하고, 무덤덤하고, 무시하고, 상황을 알아보기도 싫어하고,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려고 하고, 마음을 쓰기 싫어하고, 더 많은 노력을 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사장에게 일해 주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본분을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열납하지 않는다.

예전에 예수님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태복음13:12)라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느냐? 그것은 네 자신의 본분과 네가 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고 바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원래 너에게 있던 것마저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빼앗아 간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 사람이 느끼게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너의 은사와 소질로 충분히 할 수 있던 것도 하지 못하게 되고 영감이 사라져 떠오르지 않게 되는 이런 것이 하나님이 빼앗아 간 것이다. 네가 마음을 쓰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진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원래 너에게 있던 것을 빼앗아 가는데, 너의 본분할 권리를 빼앗아 그런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었어도 네가 본분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고, 마음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지도 않거니와 너에게 원래 있던 것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사를 주고, 사고력을 주고, 총명과 지혜를 주었으면, 사람은 그런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느냐? 자신의 특기와 은사, 총명과 지혜를 다 본분에 바쳐야 한다. 본분에 마음을 써야 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숙달하고 있는 것, 해낼 수 있는 것, 생각이 미치는 것을 머리를 쥐어 짜내 다 본분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축복을 받는다.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사람이 어떤 것을 느끼게 될까? (본분을 하는 데에 길이 생기고, 성령의 깨우침이 있습니다.) 성령의 깨우침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의 능력과 소질 그리고 네가 배운 것으로는 그 정도 수준을 해내기 어렵다고 보겠지만, 하나님이 역사하고 깨우쳐 줄 때는 네가 깨닫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할 수 있게 된다. 넌 ‘왠지 원래 내가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근데, 난 이걸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알고 이해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갑자기 영리하고 똑똑해진 거지?’라고 의아해할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깨우침이고 축복인데,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축복한다. 너희가 본분이나 자기가 분담한 일을 하는 기간에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이다. 항상 본분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할 게 없는 것 같고, 자신의 힘을 바치지 못하며, 항상 속이 텅 빈 것 같고, 깨우침도 받지 못하고, 별로 발휘할 만한 총명과 지혜가 없는 것 같다면, 이건 큰일이다. 그것은 네가 하는 본분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네가 정확한 궤도에 들어서지 못했으며, 가는 길이 잘못된 것이다. 너는 ‘내겐 왜 이런 것들이 없지? 왜 본분을 하는 데에 길이 없지? 분명히 내가 전공한 분야이고 또 정말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건데, 왜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본분에 쓰려고 할 때는 써먹지 못하고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라며 성찰해야 한다. 그런 것이 우연한 것이냐?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축복해 주면 그 사람은 똑똑해져서 지혜가 생기고, 영리해지기도 하고 유능해지기도 하며, 또한 예리하고 재빠르고 매우 민첩해진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요령이 생기고, 영감을 얻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그 어떤 것에도 막히지 않는데, 여기엔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힘겹고, 서툴고, 그릇되고, 감을 못 잡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이해를 못한다면, 이건 무슨 상황이냐? 하나님의 인도가 없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도 힘을 들였어요!”라고 하는데, 진리를 깨닫지 않고 어리석게 힘만 쓴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보지 못하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지 못한다면, 일을 할 때 매우 어렵다. 사람의 힘으로, 사람이 배운 얄팍한 지식과 재능으로는 매우 힘들다. 너희가 배운 것이 많아도 써먹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인 것이다. 거기에는 각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느냐에 관련된 문제가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본분하는 마음 자세는 ‘이끄는 사람이 있으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것에만 머물러 있을 뿐, 책임지거나 마음을 쓰거나 신경을 좀 더 쓰는 것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런 대가를 치르려고 하지 않는다. 힘은 쓰려고 하지만 책임은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으로 본분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들일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들일 줄도 알아야지, 늘 마음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는 증거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얻지 못한다! 왜 진리를 얻지 못한다고 할까? 그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와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지, 어떻게 마음으로 진리를 묵상하고 찾고 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이해하고 헤아려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안정시키고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떤 본분을 하든, 항상 하나님 앞에 와서 마음을 들여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찾고 구하고, 그 본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이런 정형이 있느냐?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으냐? 마음을 들여 본분하고 책임질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고난도 받고 대가도 치러야 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마음을 들이지 않고 힘만 쓰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본분을 잘할 수 없다. 자기가 어느 정도로 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형식적으로만 하고 끝낸 것이다. 마음을 들이면 점차 진리를 깨닫게 되지만, 마음을 들이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본분에 마음을 들이고 진리 추구에 마음을 들이면, 점차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점차 자신의 패괴와 단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의 여러 가지 정형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마음을 들이지 않고 겉으로 힘만 쓴다면, 속에서 생기는 다양한 정형의 변화와 다양한 환경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정형의 반응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것은 다 마음의 일이다. 그러므로 심령과 진솔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 ‘심령’이란 무엇이냐? 심령과 진솔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안정된 마음과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찾고 구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할 수 있는지, 본분에서 아직 모르는 부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속으로 늘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얻을 수 있다. 네 마음에 늘 이런 생각들이 아니라 고민거리나 외부의 일이 가득 차 있고, 심령과 진솔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무관한 일들이 차 있으며, 심령과 진솔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관련되는 것은 조금도 없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과 관계가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음에 관련되는 일이다. 이방인들이 사장에게 일해 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고, 서로 다른 두 갈래의 길이다! 이방인들이 일을 하게 되면, 일은 적게 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궁리만 하고, 힘을 적게 들이고 교묘하게 돈을 벌 방법만 늘 생각한다. 그것은 사악한 길이고, 사탄의 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길이냐? 너는 항상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하고, 내면 세계가 끊임없이 순결해져야 한다. 이방인들은 일을 하다 보면 계속 사악한 길로 가게 되는데, 갈수록 타락되고 교활해지고 궤사해지며, 갈수록 술수를 부리고 음모를 꾀하게 되고, 갈수록 마음이 사악해지고 속을 알 수 없게 된다. 사람을 농락하고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수단은 갈수록 뛰어나 아무도 간파하지 못하고, 진실한 면은 갈수록 알 수 없게 되어 진위를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그것이 이방인의 길이고, 마귀의 길이다. 하나님을 믿는 길은 그것과 정반대이다. 네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 온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점점 진솔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면, 말을 진솔하게 하고 사람이든 본분이든 진솔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네 마음이 아주 깨끗하고 언행과 일 처리가 모두 투명해서 사람들이 네가 한 일, 네가 한 말, 너의 관점, 네가 한 본분 그리고 대화 나눌 때의 진솔한 태도에서 너의 마음, 너의 성격, 너의 성정과 너의 추구 그리고 마음 깊은 곳의 지향과 목표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면 너는 좋은 사람인 것이다. 반대로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믿은 시간도 꽤 되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사람들이 너와 접촉했을 때, 네가 하는 말이 명확하지 않아 대체 어떤 관점인지 알 수 없고, 뭘해도 너의 마음을 볼 수 없고, 너의 깊은 곳에 있는 속셈과 목적을 보지 못하며, 또 네가 정말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잘 감추고, 잘 덮고, 위장도 잘하고, 포장도 잘한다면, 다시 말해 사람들이 너와 몇 년을 접촉하면서 너의 성격이 거칠다거나 느리다거나 무골호인이라거나 하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너의 마음은 확실히 알지 못하고 너의 마음을 보지 못한다면, 즉 겨우 성격만 볼 수 있고 네 마음 깊은 곳의 성정의 실질을 보기 어렵다면, 너는 아주 문제가 되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네 마음이 아직도 사탄에게 통제되어 있고, 진리를 전혀 얻지 못했으며, 패괴 성정이 조금도 정결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기가 매우 힘들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을 돌려서 할 줄 알고, 일 처리도 묘하게 하고, 언변도 좋고 똑똑해서 반응이 빨라도, 누구든 그 사람과 일을 할 때 뭔지 모르게 불안하고, 미덥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겠고, 믿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며, 아직도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느냐? 사람들과 접촉하고 교제할 때는 진솔한 태도로 임하느냐? 상대에게 너의 진솔한 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느냐? (자신의 이익에 관계될 때는 속에 있는 진실한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 싫어하고, 자신의 이익에 별로 관계되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좀 털어놓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나름대로 가늠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누구에게나 다 할 수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 둔 어떤 것은 사람을 골라 가면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여전히 자신을 포장하고 위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변화받고 정결케 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어쨌든 본분을 하는 기간에 너는 최소한 진솔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너의 진솔한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네가 “전 사람들과 장벽이 있어요! 사람들이 무시할까 봐 두려워요. 체면이 신경 쓰여요.”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천천히 변화시키면 된다. 사람마다 다 그런 패괴 성정과 어려움을 조금씩 이겨 내야 하고, 다 그런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며, 다 그 관문을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 관문을 넘어가기에 앞서 하나님을 대하는 너의 마음은 진솔하냐? 하나님께 뭘 감추거나 은폐하거나 가리거나 포장하는 것은 없느냐? 심지어 ‘내가 마음에 숨기고 있는 건 하나님도 몰랐으면 좋겠어. 난 이렇게 헌신하고 싶지 않고, 본분도 하고 싶지 않고 대가도 치르고 싶지 않아. 난 아직도 내 살길, 내 앞날을 생각하고 싶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면, 만약 네가 이런 일들을 다 하나님께 숨기고 있다면, 다시 말해 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속셈, 목적, 타산, 인생 설계, 그리고 많은 일에 대한 너의 관점, 하나님 믿는 일에 대한 관점들을 하나님께도 다 숨긴다면, 너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 감추어도 되지만, 하나님께는 절대 감추지 말아야 한다. 네가 ‘사람들이 내 실체를 알고 날 업신여길까 봐 사람들 앞에서 입을 못 열겠어. 이걸 이겨 내지 못하겠어.’라는 이런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먼저 실행하지 않고 잠시 미루어 놓아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는 해야 한다. 너는 “하나님, 제게는 아직도 이런 비열한 속셈이 있습니다. 제가 앞날과 운명을 위해 어떤 일들을 했고, 앞날과 명리를 위해 또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당신께 고백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털어놓고 하나님께는 숨기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네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 마음을 닫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만은 마음을 닫지 말고 꼭 활짝 열고 털어놓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최소한 가져야 하는 마음이다. 네가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께 닫지 않고 하나님의 감찰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사람에게는 활짝 열지 않았어도 하나님께만은 활짝 열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기에 하나님은 너를 진솔하다고 보고, 너에게 진솔한 마음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그 진솔한 마음을 귀하게 보기 때문에 틀림없이 너에게서 이루고자 하는 사역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은 너를 징계할 것인데, 너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여 얼른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며 자신의 잘못과 패역과 패괴를 인정하고, 자신의 패괴 성정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것이 네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참되게 믿는다는 증거이다.

너희는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열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오늘 거짓말을 했을 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너 또한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당신을 속인 거예요.”라고 마음을 열고 말할 용기가 없다고 하자. 하지만 적어도 너는 오늘 자기가 잘못한 일과 자기가 했던 거짓말을 성찰하고, 발견한 대로 얼른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하나님, 저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또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를 징계해 주세요.”라고 자백해야 한다. 그런 태도가 있으면 하나님은 열납할 것이고, 너의 태도를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너는 거짓말하는 결점이나 패괴 성정을 고치기가 정말 힘들고 버거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하며 네가 그런 난관을 하나하나 헤쳐 나가도록 인도해 주고 도와줄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자신이 한 거짓말을 인정하고, 자신은 진솔한 사람이 아니라 간사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왜 거짓말을 했는지, 그 속셈과 목적은 무엇이었는지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즉 네가 그런 관문을 뚫고 나가고, 사탄의 굴레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점차 빛 속에서 살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관문을 넘어가면, 사람들 속에서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일을 잘못할 수 있겠느냐? 설령 네가 또 일을 그르치게 되더라도, 설령 또 거짓말을 하게 되더라도, 설령 여전히 자기만의 속셈을 품고 사심을 품을 때가 있고, 이기적이고 비열한 행동과 생각을 가질 때가 있더라도, 너에게 정확한 실행의 길이 있어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너의 마음과 실제 정형, 패괴 성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다 털어놓으면서 바른길로 실행한다면, 네가 가는 방향은 옳은 것이고 앞날은 아름답고 밝은 것이다. 그러면 너는 정말 마음 편하게 살게 되는데, 감추거나 숨길 필요가 없고 잡귀신처럼 이것저것 피해 다닐 필요가 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 그러면 서서히 사람다운 면모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말도 광명정대하게 하고, 일도 광명정대하게 할 수 있으며, 어떤 관점이나 어떤 잘못한 점이나 또는 어떤 견해가 있어도 다 꺼내 놓고 모두가 제대로 알 수 있게 한다면, 너는 투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투명한 사람이라고 하느냐? 바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 할 거짓말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이 한 마디 하면 다들 “저 사람 말은 진짜예요.”라고 한다. 왜 진짜라고 하겠느냐? 그 사람이 진솔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잘못 말했다 할지라도 인식하게 되면 바로 사람들에게 인정하고 사과한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임하는 것이다. 설령 그가 무의식중에 거짓말을 했거나 말을 잘못했어도 다들 “그 사람은 고의로 한 게 아니에요, 조금 있으면 와서 사과하고 정정할 거예요. 그런 사람이거든요.”라며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면 투명한 사람이 아니냐? 그런 사람은 모두가 좋아하고 믿어 준다. 너희가 하나님의 신임과 사람의 신임을 얻는 정도가 되려면 쉽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최고의 존엄성이다. 그래야 존엄성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너를 신임하겠느냐? 항상 뻔뻔스레 거짓말을 하면서 살고, 일을 원칙 없이 하고, 본분에 책임감이 없고, 충성심이 없으며, 일을 좀 잘했다 싶으면 좋아하고, 득의양양해하고, 교만해지고, 자본을 거론하며, 제대로 못하면 소극적이 되고 내팽개치는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신뢰할 만하겠느냐? 너희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네가 그렇게 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 너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존엄성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실행은 무엇이냐?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다. 활짝 연다는 건 어떤 것이냐? 문을 열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사람도 분명히 볼 수 있고 하나님도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하는 말은 속에 있는 그대로이고, 어두운 면이 없고, 다른 사람이 추측할 필요도, 더 많이 캐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며, 너도 말을 빙빙 돌려서 할 필요가 없고, 아무런 속셈 없이 생각하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네가 솔직하게 말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미움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너무나 솔직해서 제게 상처를 줬어요. 난 당신의 솔직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설령 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너에게 나쁜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네가 말하는 방법에도 신경 쓰지 않는 직설적인 진솔한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따질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것을 발견하고 “죄송합니다. 제가 그것이 형제(자매)님의 연약한 부분인지 모르고 말을 지혜롭게 하지 못했네요. 상처 줘서 죄송해요.”라고 하면 상대방도 “나쁜 뜻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뭘. 다 형제자매잖아요. 저도 제 문제를 인식하고 있어요. 제가 흠을 잘 잡고 좀 시시콜콜 따지는 사람이라서요. 저 역시 옳지 못해요.”라고 하게 된다. 그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냐? 장벽이 없으면 갈등이 생기지도 않고, 문제도 정말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활짝 여는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다. 그다음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말을 진솔하게 하고, 실제적으로 하고, 마음속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존엄성 있는 사람이 되고, 인격과 인품 있는 사람, 겉치레적인 말, 거짓말, 가식적인 말을 하지 말고, 타인을 기만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마음을 들여서 본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솔한 사람의 실행과 관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분할 때 진솔한 자세가 있어 진솔한 마음으로 해 나가고 실행하며, 자신에게 맞춰 보면서 실천으로 옮겨야지 그저 말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 그저 “내 의사는 밝혔으니 당신들은 하던 대로 계속해요. 난 쉬러 갈 거예요.”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쉰다고 하면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실제는 어디에 있겠느냐? 실제가 없이 입만 놀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감찰할 때는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고 사람의 속마음도 볼 뿐만 아니라 또 사람의 행위와 사람의 실행도 본다. 네가 속으로 생각을 다 했어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겠느냐? 그것을 겉과 속이 다르게 체면만 살리고 입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치 바리새인이 성경은 정말 거꾸로 통달할 정도로 잘 알아도, 실행해야 하고 대가를 치르고 지위의 복을 내려놓아야 할 때는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어 하나님께 미움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좋은 길이 아니다! 사람이 그런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지금 너희는 하나님이 너희를 신임하는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느냐? 다시 말해, 너희는 하나님의 신임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 사람에게는 신임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둘 다 없구나. 그럼 너희는 존엄성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불쌍하게 사는 것이다! 사람의 가장 큰 비애는 바로 존엄성 없이 사는 것인데,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을 신뢰합니까? 당신에게 일을 맡기면 그 일을 잘해 줄 거라고 믿던가요?”라고 물었을 때, 너를 그 정도로 믿어 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참 슬픈 삶을 산 것 같고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네 자신은 나름대로 진실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도 사람들이 너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너를 신임할 것 같으냐? 하나님도 너를 신임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널 억울하게 만드는 것일까? 하나님이 너의 진솔한 마음을 보지 못해서 그럴까? 네가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니 내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 아시잖아! 나도 내 표현들에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하겠으니 하나님께서 날 신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러실 만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도 신임을 얻지 못했고, 사람에게도 믿을 만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어떡하겠느냐?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진리에 진입해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진입해야 한다. 처음 실행할 때 아주 어렵다고 생각되면 어떡하겠느냐? 포기하고 실행하지 말아야 할까? ‘진솔한 사람으로 살려니 너무나 어려워!’라고 하는데, 뭐가 그리 어려울까? ‘내 체면과 허영심, 명예가 계속 손상되는 것 같아 참지 못하겠어.’라는 것이 바로 너의 어려움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는데, 누가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더라도 참으면서 듣고 기도해야 하며, 마음으로 인내하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하며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체면과 허영심에 관련된 일에서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건 할 줄 몰라요. 그 일은 제게 어렵겠어요. 이건 제가 모르는 일이에요. 저건 이해를 못하겠어요.”라고 하면서 모르는 것은 절대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진솔한 태도이다. 그런 일 때문에 너를 얕보고 바보라고 말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떡하겠느냐? 너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난 바보가 맞아. 하나님 앞에서 한 푼어치의 가치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아니야. 난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는 않을 거야.’라고 하면서 허영심과 체면을 내려놓아야 한다. 네가 내려놓을 수 있으면 진솔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비웃고 무시할까 봐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 쟁론하지도, 우열을 가리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 네가 내려놓지 못하고 기어코 다른 사람이 너를 존중하게 하기 위해 모르면서도 아는 척한다면 진솔한 사람으로 살 수 없다. 이것이 실제적인 어려움이다. 예를 들어, 누가 “당신은 무슨 얼굴이 그렇게 커요? 요즘은 작은 얼굴이 대세인데, 당신은 완전 넓적한 얼굴이네요.”라고 했다고 하자. 너는 생각을 해 보다가 ‘흥, 내가 좀 넓적하긴 해도 너의 네모 얼굴보다는 나아!’라고 한다. 그런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 (자존심입니다.) 그 자존심은 어떤 상황에서 내려놓을 수 있느냐? (자기 얼굴을 넓적한 얼굴이라고 인정할 때입니다.) 맞다. 인정할 때이다. ‘그래 나는 넓적 얼굴이라서 작은 얼굴보다 이쁘진 않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넓적 얼굴을 주셨어도 나를 싫어하신 건 아니니까 난 고맙게 생각해. 더군다나 하나님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보시잖아.’라고 하면서 개의치 않는다면 내려놓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것에 구애받는 일이 없지 않겠느냐? 너의 허영심과 체면을 내려놓게 되면, 너는 그것을 이긴 것이다. 상대방이 뭐라고 하든 네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으면, 그런 것이 더 이상 너를 구속하거나 결박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결박하지 못하게 되니 너는 그 사람과 더 다툴 일도 없다. 그때면 네가 가식적으로 행동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에게 혈기를 부릴 필요도 없다. 네가 그런 것을 이길 수 있을 때면, 그것을 정확하게 대할 수 있고 마음도 편할 것이다. 가식적으로 “제 얼굴이 계란형같이 생겼잖아요. 얼굴이 남보다 별로 크지도 않고 좋아 보이잖아요.”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사실 ‘내 얼굴이 좀 크긴 하지.’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식적인 말을 하고, 자기 체면을 위해 몇 마디를 더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솔한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살면서 쓸데없는 말, 거짓말, 무지한 말, 어리석은 말, 변명의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이 체면과 허영심과 이익 때문에 하게 되지 않더냐? 네가 그런 것들을 해결하면 마음이 갈수록 진솔해진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난 상하이에 가 봤어요.”, “난 대만에 가 봤어요.”, “난 독일도 갔다 왔어요.”라고 하면서 너에게 “어디에 가 봤어요?”라고 물었다고 하자. 너는 ‘그냥 작은 시골 도시에서만 살며 아무 데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하면 안 좋겠지? 어딜 가 봤다고 해야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광저우에 갔었다고 할까? 거긴 그리 근사하지 않은데.’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순식간에 “전 홍콩에 가 봤어요.”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너는 ‘홍콩’이라는 두 글자로 자신을 팔게 되었고, 진솔하게 말하지 못했다. 네가 진솔한 사람으로 살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사실 체면 때문인데, 사람은 그걸 꿰뚫어 보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한다. 이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체면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 뒤, 사람들이 “홍콩에서 며칠 놀았어요?”라고 물으면 “일주일이요.”라고 대답을 하는데, 또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 또 거짓말을 하게 되었느냐? (처음의 거짓말을 덮기 위해 한 것입니다.) “홍콩 어디에 갔었나요?” “몽콕에 갔었어요.” “몽콕은 어땠어요?”라고 또 물으면, 들통나면 절대 안 되니 “어쨌든 홍콩은 사람이 바글바글해요.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죠.”라고 또 거짓말을 하게 되고 말할수록 불안해진다. 거기서 더 물어보면 도망가야 할 판인데, 온통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들은 왜 하는 것이냐? 다 체면을 위한 것이다. 허세를 부리고 사람들과 비교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체면을 위해,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을 지키기 위해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체면과 인격 그리고 존엄성을 잃은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너의 모든 말은 다 거짓이고 진실이 하나도 없다. 거짓말을 해서 그 자리에서 체면을 잃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진솔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속으로 자신을 매우 멸시하고 경멸하게 되며, ‘난 왜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 거야? 솔직한 말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나? 체면을 위해서 꼭 그런 거짓말을 했어야 했나? 난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지?’라고 하게 된다. 너는 힘들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 스스로 홀가분하게 살고 자유롭게 해방받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체면을 살리고 자신의 허영심을 지키기 위한 길을 택했기 때문에 매우 힘들게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네가 거짓말로 살린 체면은 무엇이냐? 체면이 맞느냐? 그것은 공허한 것으로, 전혀 가치가 없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인격을 팔고, 존엄을 팔게 된다. 사람은 그런 거짓말로 존엄성을 잃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인격을 잃게 되며, 하나님의 염증과 증오를 사게 되는데, 가치가 있느냐? 그 길은 옳은 것이냐? 옳지 않다. 사람이 광명 속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네가 광명 속에서 살지 못하면 정말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데, 거짓말 한 마디를 살리기 위해 계속 많은 허튼소리를 해야 한다. 허튼소리를 할 때면 심장이 정말 빠르게 뛰고 혈액도 정말 빠르게 흐르는데, 머리를 짜내느라 얼마나 많은 뇌세포를 죽이며 자신을 괴롭혀야 하겠느냐. 생각 끝에 ‘앞으로는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야. 입을 봉하거나 말을 적게 할 거야.’라고 하게 된다. 그러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럴까? 그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기에 거짓말로 해결하고 거짓말로 그런 것들을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너는 거짓말로 그런 것들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도 지켜 내지 못한다. 너는 거짓말로 인격과 존엄성을 지키지도 못했거니와 더 중요한 진리를 실행할 기회조차 잃었다. 그것이 사람에게 가장 큰 손실이다. 네가 체면과 명예는 지켰을지 몰라도 진리를 버렸고, 진리를 실행할 기회를 잃었으며, 진솔한 사람으로 살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손실이다.

이제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데에 길이 생겼느냐? 그러려면 삶 속에서 성찰하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실행하는지도 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자마자 의식하게 되어 ‘오늘 또 거짓말을 했네. 고쳐야겠어. 이렇게 말하는 건 옳지 않아. 정확하지도 않잖아. 이 말은 정확하지 않아.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말해야겠어.’라고 하며 그때그때 바로 고쳐야 한다. 계속 그렇게 고쳐 나가면서 너에게 그런 실행이 습관화된다면 언젠가 또 거짓말을 하고도 고치지 않았을 때는 마음이 괴로울 것인데, 하나님이 너를 이끌어 줄 것이다. 그렇게 실행해 나가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말에 거품도 줄어들고, 일을 하는 데에 불순물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순결해지지 않겠느냐? 갈수록 순결도가 높아지는데, 그러면 정결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진솔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조금씩 점차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갈수록 더 좋아지고, 변화될수록 말을 진솔하게 하고, 궤사한 말을 할 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게 된다면, 그것은 옳은 정형이다.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하고, 사실대로 말할 줄도 모른다. 그러므로 가르쳐야 하고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괴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어떤 아이는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으면, “엄마, 나 열이 나는 거 같아. 이마 좀 만져 봐.”라고 한다. 엄마가 만져 보고 “열은 없는데!”라고 하면, 아이는 “근데, 몸이 왜 이렇게 뜨거운 것 같지? 몸에 열이 나니까 감기 걸린 거잖아. 나 감기 걸렸으니까 엄마, 나한테 오렌지 주스 타 줘야 해.”라고 한다. 아이가 그런 수법을 쓰는 것 좀 봐라.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 아이는 “오늘은 오렌지 주스 마시고 싶어요. 엄마 한 잔 타 줄래요?”라고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하며 어떤 방식이나 수법으로 속이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 ‘우리 애는 정말 영리해.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어도 바로 말하지 않고 열이 난다고 말하네. 열 나면 오렌지 주스 타 준다는 걸 아니까 말을 저렇게 하는 것 좀 봐. 얘는 정말 영리해!’라고 하지, 그 아이가 정말 간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어떤 부모는 “저 집 애는 저런 식으로 오렌지 주스 달라고 하는데, 넌 그냥 달라고만 하네. 돌려서 말할 줄 몰라? 저 집 애가 얼마나 똑똑한지 봐. 넌 그렇게 머리도 굴릴 줄 몰라? 네 머리는 어디에 쓰겠니?”라고 한다. 부모는 아이가 말을 돌려서 하지 못한다고 꾸짖는데, 진솔하게 말한 것이 도리어 죄가 되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람은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사람을 바보로 생각하고 영리하지 못하고 아둔하다고 한다. 꾀가 없고, 머리를 굴릴 줄 모르고, 말을 직설적으로 하고, 숨기거나 감출 줄 모르며, 너무 투명하다 못해 다른 사람과 어느 정도 접촉하면 그 속내까지 다른 사람에게 다 보여 준다고 생각되어 ‘저 사람은 정말 융통성이 없어. 너무나 아둔하고 어리석어. 이 사회는 저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난 저런 사람과 사귀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그런 사람을 멸시하는 경향이 없느냐? 그런 관점이 없느냐?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그런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정말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느냐? (하나님께서 이 방면을 교통해 주시니, 단순하고 진솔하게 산다면 그렇게 큰 부담이 되는 것도 없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지게 되고 언젠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살면 화를 입는다! 이런 것은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방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고, 정상 인성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지긋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저 사람 얼마나 똑똑해! 넌 멍청한 거야. 사람이 너무 직설적이면 안 돼.’라고 한다면, 정상 사람이 아니다. ‘똑같이 하루 24시간에 하루 세끼를 먹고 사는데, 저 사람은 즐겁게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가니 부담이 되는 것도 없어 보이고, 마음도 해방받아 자유롭구나. 뭔가 부족한 것도 없는 것 같고 편안한 삶을 사는구나.’라며 보여지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삶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맨날 저렇게 솔직하게 말하니까 책망이나 받잖아, 싸다 싸! 우릴 봐! 속에 감추고 말하지 않으니까 들키지도 않고 책망받는 일도 없잖아. 손해 보는 게 없어!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할 일도 없고, 이게 얼마나 좋아! 속에다 숨기고 있으면 아무도 내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잖아! 이게 사는 법을 아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정상 인성이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게 많은 도(道)를 들어도 이런 생각을 한다면 정상 인성이 없는 것이다. 궤사를 일삼고, 술수를 부리며, 늘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무에게도 진솔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뛰어나고 삶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멍청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직 삶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진정한 수확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진정 삶을 깨달은 사람은 사악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른길을 간다.

바른길을 가려면 최소한 존엄성 있게 살고 사람답게 살아야 하며, 사람들이 너를 믿어 주고 인정하게끔 해야 하며, 인품이나 인격이 뛰어나 언행이 일치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너는 말을 하면 그대로 하는 사람이고, 약속을 했으면 꼭 지키는 사람이며, 부탁받은 일은 마음과 책임을 다해 완수하고 정말 만족스럽게 해 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은 존엄성이 있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을 보면, 아무도 그에게 일을 맡기지 못한다. 사람이 없을 경우에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인데, 그것도 보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키고 있을 사람을 하나 보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존엄성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한 마디 하면 너는 분석하고 연구하고 추측해야 하고, 또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고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 한 마디 하거나 어떤 일에 대해 말해도 신뢰감은 거의 제로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과장하거나 축소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일을 지어냈을지도 모른다. 왜 지어낼까? 그에게는 자신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마다 불쾌해하고 경멸하고 싫어하며, 심지어 그런 사람과는 교제하거나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은 너무나 가치가 없다. 신임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그 정도가 되면 존엄성이 있는 것이냐? 그에게는 일을 맡기는 사람도 없고, 그를 신임해 주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그와 마음을 나누는 사람도 없으며, 그가 하는 말은 다 지나가는 말로 흘려버릴 뿐 믿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사람이 이번만큼은 진짜라고 해도 믿어 주는 사람이 없거니와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다. 그 사람은 “내 말이 다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라고 해도 사람들은 “당신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분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당신이 하는 말은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들어야 하니 힘들어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거나 찬송을 한 곡 더 배우겠어요. 제가 당신 말을 분석해서 뭐하겠어요? 누구에게 하든 제게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말하고 싶은 사람을 찾아서 하든지, 듣고 싶어하는 사람을 찾아서 하세요. 당신에게는 진실한 말이 전혀 없어서 당신과 말하기 싫네요.”라고 한다. 그러면 인격이 땅에 떨어진 게 아니냐?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무가치한 면이다. 아무도 그 사람을 상대하거나 그 사람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데, 그와 마음을 나누거나 친구로 사귄다는 것은 더욱 말할 여지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인격과 존엄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싫어하는데, 위신이 서지 않는다. 말을 하거나 일을 해도 인품이나 인격에 신뢰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은 어떠한 위신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은사가 있고 능력이 있다고 한들 사람들이 좋아하겠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무엇을 보고 사귀느냐? 인품, 인격, 품격을 보고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사귄다. 존엄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과 성격이 좀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진솔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사람들의 높은 평판을 받는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진솔하며, 존엄성과 인격이 있고,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일이 없으며, 인품이 있고,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인정받으며, 양심과 이지를 갖추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제멋대로 남을 논단하지 않으며, 누구를 거론하거나 평가할 때도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없는 말을 보태거나 과장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은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고 증빙이 될 수 있으며, 참고로 할 수 있다. 인품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나 일은 가치가 있고 믿음이 간다. 그것을 존엄성이라고 한다. 인품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과 일은 중시하는 사람이 없고, 상대하는 사람도 없으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없고, 신임하는 사람도 없다. 왜 그럴까? 거짓말만 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말은 너무 적고 거짓말이 너무 많아 누구와 교제를 하든 진솔한 마음이 없고, 누구에게 일을 해 줄지라도 진솔한 마음이 없고 인격이 없으니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너희는 현재 너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을 찾았느냐? 자신은 타인의 신뢰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누가 너에게 그 사람이 어떠냐고 물어봤다고 하자. 그럼 너는 “잘 물어봤어요. 저는 절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논단하지 않아요. 제가 아는 건 절대 숨기지 않고, 모르는 건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아요. 저는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말해도, 추측하거나 혼자 상상한 걸 보태거나 과장해서 말하지는 않아요. 관찰자 입장에서 본 것은 꼭 ‘제가 볼 때는’, ‘제가 관찰하고 지켜본 결과로는’ 이같이 전제 조건을 달아 주어 제 말을 듣는 상대방에게 저의 성심과 태도를 느끼게 하여 저를 신임할 수 있게 할 수 있어요.”라고 할 정도의 자신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너희가 사람을 진솔하게 대하지 못했고, 일을 하거나 처신함에 진솔한 마음이 없었으며, 진솔한 태도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 사람이 너에게 “당신의 말은 믿겠으니 그 사람이 어떤지 말해 주세요.”라고 하자, “괜찮아요.”라고 한다. 그가 또 “자세하게 말해 봐요.”라고 하니 “사람이 온순하고, 헌신적이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요.”라고 한다. 이 말에 실제적인 증거가 되거나 충분한 증언이 될 만한 것이 있느냐? 조금도 없다. 그런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 세 마디는 다 얼버무리는 말이고 모두 무책임한 말이다. 자세한 내용이 없다. 네가 처음 접촉했을 때는 겉면만 보고 다 “그 정도면 됐어요”, “좋아요”, “괜찮아요”라고 한다. 그러나 좀 오래 접촉했을 때는 마음 깊은 곳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 즉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있을 텐데, 상대방은 그것을 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적이고 관건적이고 핵심적인 말이 하나도 없다면, 사람들이 널 신임할 수 있겠느냐?

친구를 사귀려면 마음을 나눠야 한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서로 맞지 않거나 가정 환경, 배경, 경제 여건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고, 어떤 일에서나 서로 진실하게 소통할 수 있으며,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마음을 상대방에게 보여 줄 수 있다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려움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너를 찾아올 것이다. “당신이 날 욕하더라도 전 당신이 진심으로 절 대한다는 걸 알아요. 전 당신이 진솔한 사람이란 걸 알고, 당신 마음이 진심이고 정말 절 생각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라고 한다. 너희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느냐? 너희는 그런 사람이 맞느냐? (아닙니다.) 그럼 진솔한 사람이 아니다. 너는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 먼저 상대방에게 너의 진심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거나 일을 하거나 어울리면서 다 얼버무리는 말, 겉치레적인 말, 듣기 좋은 말, 아부하는 말, 무책임한 말, 상상에서 나온 말, 혹은 순전히 상대방에게 기분 좋으라고, 그리고 잘 보이려고 하는 말만 한다면, 그것은 실제가 손톱만큼도 없고 진솔한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누구와 어울리든 다 그런 식이고 그런 방법으로 지낸다면, 진솔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진솔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결함에 대해 정말 진심으로 “왜 저는 소극적이 될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제게 얘기 좀 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너는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말해 주지는 않고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 소극적이에요. 늘 그래요.”라고 한다. 어쩌면 그 몇 마디 말에 상대방이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당신뿐만이 아니라 다들 소극적이에요. 우리 같이 소극적이 됩시다!” 하지만 너의 태도에 진정성이 있는 것이냐? 아니다. 너는 상대방을 무성의하게 대한 것이다. 상대방이 마음을 편하게 먹고 안심하게 해 주는 차원에서, 상대방이 너와 아무런 간격도 갈등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차원에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너는 상대방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다. 너의 진실된 마음으로 상대방이 소극적인 것에서 나올 수 있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너는 진솔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진솔한 사람으로 살지 못한 것이다. 진솔한 사람으로 살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네 마음에 느낀 것,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을 말해 줘야 한다. “전 이렇게 보았어요. 저도 그렇게 체험했었고요. 제 말이 맞는지 보세요. 들어 보고 아니면 받아들이지 말고, 맞다면 받아들이길 바래요. 도와주고 싶어서 말하는 거니까 기분 상하게 들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세요. 그 일을 교통해 볼까요? 지금 상황을 보면, 형제(자매)님은 분명히 자신의 체면이 깎여서 그런 거예요. 다른 사람이 형제(자매)님 체면을 안 봐주니 멸시를 당한 것 같아서 상처를 받은 거죠. 아직 그런 서러움을 당해 본 적이 없다 보니 견디기 어려워 소극적이 된 거죠. 이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 맞죠?”라고 했더니 그 사람도 들어 보고는 그 원인이 맞다고 생각한다. 너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네가 진솔한 사람으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저도 늘 소극적이에요.”라고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상대방도 그 말에 ‘다들 소극적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런 것을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네가 진솔한 사람으로 살면서 진솔한 태도로, 진솔한 마음으로 도와준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에는 여러 방면이 있다. 많은 일들이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과 관련되는데, 앞에서 몇 가지를 말했느냐? 한 방면에만 관련되었느냐? 누가 너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나이가 45살이면서도 39살이라고 대답한 그런 간단한 문제에만 관련되겠느냐? 일문일답, 혹은 “그렇다, 아니다”라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네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되든, 하나님이 너에게 직접 부탁한 것이든 아니면 사람이 너에게 해야 할 본분이라고 알려 준 것이든, 사람 됨됨이든 처사든 다 진솔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진솔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생각한 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겉치레적인 말, 듣기 좋은 말, 비위를 맞추는 말, 허위적인 말, 거짓된 말을 하지 말고 마음속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진실한 생각과 관점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진솔한 것이고, 진짜 진솔한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언제나 표현하지 않고 언제든 티를 내지 않으며, 입과 마음이 영원히 불일치한다면 그것은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 아니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자. 누가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너는 너희가 본분을 잘하려고 했으나 어떠어떠한 많은 이유가 있어 못했다고 한다. 사실 너 자신은 스스로 마음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책임을 기피하거나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 사실을 덮어 버렸다. 그것은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냐? 네가 그렇게 말해서 그 순간을 넘기게 되었고 그 일은 지나갔다. 하지만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영원히 감추고 있으면 병이 된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너는 사실대로 “요즘 본분에 좀 태만했어요. 본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네요, 신경을 쓰다가도 소홀히 대할 때도 있고 그랬어요. 기분이 좋을 때는 좀 노력하기도 했지만, 기분이 불쾌할 때는 해이해지고 대가도 치르지 않으며 게을러지고 육체가 편해지는 것을 탐했어요. 그래서 본분에 효과가 별로 없었어요. 며칠 째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이제부터 잘해서 효율도 높이고 속도도 끌어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어떤 말이 솔직한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앞의 말은 그냥 들어 봐도 책망받을까 봐, 흠이 잡힐까 봐, 책임을 추궁받을까 봐 먼저 선수친 것이다. 책망받지 않으려고 먼저 원인을 찾아서 덮어 버리고, 상대방의 입을 막아 버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것이 거짓말을 하는 근원이다. 뒤의 말은 실정을 말했기에 책망도 받고 책임을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실정이다. 그런 것이 사람의 정상적인 정형인데, 네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너는 입을 봉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고, 변명하고 변호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택했는데, 그것은 무엇을 실증하느냐? 그것은 네가 강퍅하거나 완고하게 자신의 정형을 고집하며 사실을 은폐하고 숨기고 기만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진솔한 태도가 있고 네가 변화되기를 추구한다는 것을 실증한다. 어떤 길이 맞느냐? 어떤 실행법이 진솔한 사람의 실행법이냐? 마음을 열어 솔직한 말을 하고, 실제 정형과 실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솔한 사람의 실행법이고, 옳은 실행법이다.

사실 사람은 생각 하나 차이로 진솔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게 되고, 거짓말을 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는데, 거짓말을 잔뜩 늘어놓다 보니 결국 마음이 불안해진다. 불안해져도 돌려세우기 어렵고, 게다가 잘못을 고백하여 거짓말했다는 것을 시인할 용기도 없다. 그리하여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항상 큰 바위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지난번에 또 거짓말을 했어. 언제 기회가 되면 분명하게 밝혀야겠어. 분명하게 말해서 잘못도 인정하고 회개해야겠어.’라고 생각하지만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제 본분하는 것으로 보상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계속 그렇게 만회하려고 해 보지만 아무리 해도 그때 했던 거짓말을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은 별개의 일이다! 너에게 양심이 있다면 느낄 것이다. 기만과 솔직한 말을 하는 것은 두 가지 길이다. 네가 진솔한 사람이 되고자 실행한다면, 가끔 체면을 잃고 책망을 받고 심지어 꾸지람도 듣겠지만 마음은 오히려 후련하고 평안하다. ‘내가 책망을 받든, 교체되든 마음만은 편해. 난 진솔한 사람이 될 거야. 내가 한 말은 다 실제 사정이야. 난 당연히 책망을 받아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해.’ 이런 정형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기만하면 결과는 어떻겠느냐? 기만하고 나면 마음에 어떤 느낌이 드느냐? 계속 자기 속은 깨끗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고, 편치 않으며 늘 자괴감이 든다. ‘어떻게 기만할 수 있지? 어쩌다 또 거짓말을 했지? 난 왜 이럴까?’라며 얼굴을 들지 못하겠고 하나님을 마주할 면목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과 관용을 받을 때면 하나님을 기만했던 행위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더 많이 느끼게 되고, 죄책감도 더 심하게 느껴지며, 평안과 기쁨은 아예 없다. 그것은 어떤 문제를 실증하느냐? 사람이 기만하는 것은 바른길이 아니고,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할 성정의 실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기만하면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네가 속이고 나면 자기 나름대로는 수단이 뛰어나고,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돌려서 아주 잘 말했고 언변이 훌륭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밀려드는 심령의 죄책감은 어쩌면 한평생 너를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네가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여 속였어도 그 일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때면 그것이 가시처럼 마음을 찌를 것인데, 너는 계속 복구할 기회를 찾는다. 복구는 일반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많이 하느냐? 천에 구멍이 나지 않으면 복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온전한 천은 복구할 필요가 없다. 오래 쓰다 보니 닳아서 구멍이 생겨 보기 안 좋을 때 복구가 필요하다. 그럼 덧대어 꿰매서 복구하면 온전했을 때만큼 보기 좋겠느냐? 그것은 흉터다. 낙인이 찍혀 있을 것이고, 흔적이 남는다. 피부가 찢어졌다가 아물면 원래 피부와 같겠느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으냐? 그 자리는 다른 곳의 피부색과 다르다. 그것이 낙인이고 흉터다. 사람이 양심이 없어 양심적으로 산 적도 없고, 인성도 전혀 없고, 품격이나 인격을 따지지 않고 살면 모를까, 사람이 기만했다가 양심적으로 깨닫게 될 때, 결국에는 병으로 남게 된다. 언젠가는 병으로 남게 되어 있다! 너에게 조금이나마 인격과 존엄성이 있고, 양심의 지각이 조금 있어 그걸 의식하게 될 때는 자신의 거짓 행위가 수치스럽고, 떳떳하지 못하며, 비천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경멸하고 혐오하게 될 것인데, 그 길은 좋은 길이 아니다. 사탄에게는 정상 인성의 양심이나 이지나 선(善)에 대한 느낌이 없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단지 사탄에게 패괴되어 패괴 성정이 있고, 사탄 패괴 성정의 실질이 있으며, 그런 유로가 있을 뿐이지, 완전한 사탄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의 지각이 있고, 정상 인성의 필요가 있으며, 선(善)과 정의,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본능과 필요가 있다. 사탄은 완전히 사악한 것이다. 사탄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의 본성 실질은 전부 사악한 것이고 어두운 것이며, 전부 패괴된 것이고 악독한 것이다. 사탄에게는 인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상 인성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양심적 느낌도 없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었다. 사람에게는 양심의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기만하고 다른 사람을 기만하면 양심의 가책과 참소를 느낄 수 있는데, 그 참소와 가책의 느낌은 고통스럽다. 사람이 그런 고통, 그런 참소와 가책을 느끼게 될 때면 양심에서부터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혹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며, 그런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지금 너희는 거짓말로 속이고 나면 가책이 드느냐? (듭니다.) 가책이 든다면 그나마 좋은 것이고, 가책이 없다면 큰일이다. 그럼 회개는 하느냐? 목을 곧게 하고 계속 강퍅하게 나아가느냐, 아니면 마음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아. 난 회개해야겠어.’라고 하느냐? 마음에 그런 분별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좋구나. 그것은 구원할 수 있는 사람,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최소한 갖추어져 있어야 할 지각이고 표현이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지각조차 없다면 구제 불능이다. 이제는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겠지? 정상 인성을 필요로 하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알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고 사악을 증오하며, 양심의 지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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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④심령과 진솔함으로: (한글 성경) 신령과 진정으로

⑤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⑥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⑦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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