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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편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참으로 행복하다

오늘은 <진솔한 사람 되니 참 행복하네>라는 찬송에 대해 교통해 보도록 하자. 첫 소절부터 보자. “진리 깨달아 영이 해방되니 행복한 사람”, 이런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왜 복 있는 사람과 연결했을까? 왜 복과 연관지었을까? 이것은 사람에게 어떤 것을 복이 있다고 하고, 어떤 것을 행복하다고 하는지를 알려 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 어떤 것이 행복이냐? (진리를 깨달아 영이 해방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인해 영이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삶이 기쁘고, 행복하고, 평안과 희락이 생기게 되었느냐?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맞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사람 안에는 흑암이 없고 육체의 얽매임이 없고 관념이 없으며, 어떤 속박도 받지 않게 되기에 내면이 전부 해방되어 자유로운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길을 찾게 되고,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애쓰는 마음도 알게 되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았고 앞날이 광명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삶에 그 어떤 어려움이나 그 어떤 고통도 없으며 본분을 할 때 그 어떤 속박도 받지 않고 모든 것이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곧 행복이다. 행복한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이런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누가 “당신의 삶은 영적으로 해방을 받았습니까? 당신은 진리를 깨달았습니까? 해방되어 자유롭습니까?”라고 물을 때, 네가 “저는 해방되어 자유롭고 또 진리도 깨닫고 하나님의 뜻도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데, 네가 행복한 사람이라면, 복 있는 사람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잘 먹고 잘 입으며 좋은 집에 살지만 불면증에 시달리고 입맛이 없으며 항상 마음이 심란하여 우거지상이다.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겠느냐? 어쩌면 그런 사람이 부러워서 “저 사람, 정말 복이 있네요. 먹고 입는 데 부족함이 없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어디를 가든 특별 대접을 받기 바쁘고, 다들 비위도 잘 맞춰 주잖아요.”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실정을 알고 있기에 “무슨 복이 있다고 그러세요? 그 사람은 걱정거리가 하도 많아 얼굴이 칙칙하잖아요. 그건 복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진정한 복은 마음이 행복한 것이다. 돈이나 물질, 지위, 명리가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와 마음 세계가 행복하고 해방되어 자유로워야 행복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을 복이 있다고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깨달아야 할 부분이다. 노랫말로 자주 부르다 보면 사람들은 ‘복이 있는 것’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것이다. 이 방면은 깨달았겠지?

두 번째 소절을 보자. “하나님 말씀에 확신 있고 의심치 않네”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 의심하지 않게 되었느냐? (이상(異象)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것이 이상에 속하느냐? (하나님 역사에 대한 인식입니다.) (심판 형벌이 사람에게 임해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또 있느냐? (하나님 성육신에 관한 진리입니다.) 이것이 한 방면이다. (왜 하나님은 말세에 심판 형벌의 사역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방면의 이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관한 것도 있으니, 여기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이상들이 있는데, 이런 이상 방면의 진리를 분명하게 알면 사람 안에 토대가 세워진다. 이상 방면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과 인류를 구원하는 방식에 대해 다 분명하게 알게 되고,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을 버리게 된다. 그러면 토대가 있고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을 명확하게 깨닫는 데서 비롯된 결과이고, 곧 사람이 거두게 되는 성과이다. 만일 하나님의 역사를 늘 의심하고, 늘 꿰뚫어 보지 못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고, 마음속에 늘 의문을 가지거나 늘 흐리멍덩하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이상을 분명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3~5년간 믿었으면 여러 이상 방면의 진리는 장비되었을 것이니, 더는 의심치 말고 마땅히 큰 걸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세 번째 소절에서 “소극적이지 않고 자포자기 않으며 후퇴 없네”라고 했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냐? 어떻게 하면 소극적이 되지 않고 후퇴하지 않을 수 있느냐? 어려움에 부딪혀 때론 실패하고 연약해질지라도 소극적이 되지 않고 자포자기하지는 않는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사람이 소극적으로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주로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고 훈계 책망이 임하거나 실패했을 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소극적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에 늘 어려움이 있고 도무지 해결할 수 없으니 늘 소극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과 관련된다. 어떤 사람은 소극적이 되어서 교통해 주면, “다 아니까 교통하지 말아요.”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과연 다 아는 것일까? 다 알고 있다면 소극적일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도리를 알고 글귀를 아는 것이지, 사실 진리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도리는 받아들이는데, 진리는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된 일이냐? (체험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찾고 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패괴 성정에 비추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다. 그런 도리를 알고도 사용하지 않고 입에 담아 전파만 할 뿐, 본인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소극적인 정형, 연약, 패역, 오해, 원망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병에 걸리면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고 의사의 처방과 치료 과정을 거쳐야 병이 완쾌될 수 있다. 그러니 네가 “이 병이 왜 온 건지 저는 알아요. 자꾸 찬 음식을 먹어서 한기로 인해 결국 이런 병에 걸렸어요.”라는 이론을 말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냉을 없애 드릴게요.”라고 하는데, 네가 “됐어요, 그런 도리는 다 알고 있으니까 안 해도 돼요.”라고 한다면 그 병이 나을 수 있겠느냐?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병이 나을 수 있느냐? (치료를 받고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극적이 되어 뒷걸음질 치는 것과 자포자기하는 것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기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이 말은 하기는 쉽지만 진입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리인지를 진실로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알고 있는 것 같아도 자신의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 소절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달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알려 주고 있는데, 숨은 뜻은 무엇이냐? 도리를 아는 기초 위에서 그것을 진리로 여겨 자신에게 비추어 보고 실행하면 어려움이 해결되기 때문에, 너는 소극적이고 연약함이 있어도 두려울 것이 없고, 자포자기하지 않을 것이며, 제자리에 멈추어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길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럼 이 소절은 깨닫게 되었지?

네 번째 소절은 “마음 다해 본분 지키니 육체 염려 없네”이다. 이것은 어떤 정형이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하냐? 양심이 있지 않으냐? 피조물의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 보답하고 있지 않느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빈둥거리거나 대충대충 하거나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태도가 단정하고, 정형이 정상이고, 마음의 자세가 올바르고, 양심이 있고, 이성적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지키고, 꾀를 부리지 않고, 발뺌하지 않으며, 농땡이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 염려 없네”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육체 염려 없네”, 이 내용에도 일부 정형이 들어 있다. 크게 보면 자신의 육체와 앞날을 위해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안배하도록 하여 본분을 잘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장래와 앞날을 계획하지 않는 것이다. 즉, 자신이 늙으면 어떻게 할지, 부양해 줄 사람은 있을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본분을 잘하는 것을 우선 순위에 두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육체에 대한 염려가 없다는 것에는 이렇게 여러 방면이 있다.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잘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면이 있지 않으냐? 그러면 사람이 최소한 갖춰야 할 모습이 있는 것이다. 최소한 본분을 잘해야 하고 충성심이 있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한다. 무엇을 “본분을 지킨다”라고 하느냐? 내팽개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하는 것을 ‘지킨다’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일할 때 감시하는 사람이 없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다고 하자. 그럴 경우에는 네가 어떻게 해야 본분을 지켰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 것도 진리의 한 방면인데, 원칙을 실행하는 데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마음과 뜻을 다할 수 있는가?”라는 방면이 있다. 본분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이 늘 감시하고 지키거나 감독할 필요가 없으며, 훈계 책망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내 일처럼 생각하고 해야지. 나에게 맡겨 주었고 원칙도 듣고 장악하게 되었으니까 별 문제 없으면 내가 알아서 꾸준히 해야지. 그만하라고 하지 않는 이상 절대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해야겠어.’ 이것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갖추어야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느냐? 우선 양심이 있어야 한다.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양심이 있어야 하고 그 밖에 충성심도 있어야 한다. 양심은 최저 기준이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으면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일편단심으로 충성해야지 딴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빈둥거리고 취향이나 기분에 따라 일 처리하면 안 되는데, 그것을 충성심이라고 하지 않는다. 충성심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기분이나 환경 그리고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부탁을 받은 거야. 하나님이 맡겨 주신 거야.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니 내 일처럼 생각하고 해야지. 좋아지는 쪽으로 하고 효과가 좋은 쪽으로 해야겠어.’라는 것이다. 너에게 이런 정형이 있다면 그것은 양심의 지배를 받은 것일 뿐이겠느냐? 여기에는 충성심도 있어야 한다. 충성심은 없고 다만 양심적으로만 ‘잘 처리하면 돼.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힘을 다해 처리하자.’라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양심의 기준일 뿐이다. 충성심이란 기준을 가지고 가늠하면 요구 기준이 더 높아지게 된다. 양심의 기준보다 높기 때문에 힘을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야 되는 것이다. 본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늘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부담을 가지기에 약간의 착오가 생기거나 조금이라도 대충대충 해서 속이려는 정형이 있으면 가책을 받는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는데, 이렇게 처신하면 안 돼. 이렇게 하면 충성심이 없는 거야. 지켜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내 일처럼 해야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보시든 안 보시든, 어떠한 요구를 하시든 안 하시든 그런 것과 상관 없으니까 나 스스로에게 엄격히 요구해야지.’ 이것을 충성심이라고 하는데, 양심의 기준보다 높지 않으냐? 양심의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에 외부의 영향을 받게 되거나 혹은 그저 힘만 다할 뿐, 순결도가 그리 높지 않다. 충성심을 놓고 볼 때, 본분에서 충성을 다하려면 보다 높은 순결도를 요구하는 말이기에 그저 힘만 쓰면 되는 것이 아니고 너의 본분을 위해 온 마음과 뜻 그리고 몸과 마음을 다 몰입할 것이 필요하다. 때로는 육체가 고통을 받아야 하고 마음을 다 본분에 써야 하는데, 여러 가지 상황이 닥쳤을 때, 그런 일에 영향이나 속박을 받지 않고 그런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사적인 일과 사사로운 일은 뒤로 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 정감, 육체적 누림, 안일을 내려놓아야 하고, 심지어 청춘, 결혼, 앞날도 내려놓아야 하는 등,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면 충성심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사람다운 삶”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양심이 있어 양심의 기준으로 본분을 가늠할 뿐만 아니라 충성심 방면의 진리로 가늠하고 요구하며 이 목표를 향해 실행한다. 이 세상에서 이제는 이런 사람은 보기 드물지 않으냐? 이런 사람의 삶은 가치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네 집에 돈이 많다고 하자. 네가 집 안팎살림을 다 맡길 집사를 구해야 된다면 어떤 사람을 구하고 싶으냐? (저와 한마음인 사람입니다.) 너와 한마음인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 말로 어떻게 표현하느냐? (동심합의하는 사람입니다.) 너와 동심합의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너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찾고 싶지 않겠느냐? 감언이설을 하는 사람을 찾겠느냐? 일을 처리할 때 힘만 쓰고 마음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찾겠느냐? 당부한 일들만 하고 당부하지 않은 부분에서 생긴 일들은 본체만체하는 그런 사람을 찾겠느냐? (아닙니다.) 양심이 좀 있는 사람은 어떠냐? 써도 된다. 양심적인 사람이 있다면, 최소한 그런 사람을 써야 한다. 양심적일 뿐만 아니라 너에게 마음과 뜻을 다할 수 있고 절대적으로 충성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이다. 최대한 찾아보고 구하지 못했을 때 마지막에야 “그냥 양심적인 사람을 찾는 게 저의 최저 기준이에요.”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어느 날 네가 양심도 있고 충성심도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단 그 사람이 너무 진지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사교성이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장점과 특기를 놓고 볼 때 그 사람에게 집안일을 맡기기만 하면 절대적인 충성을 할 수 있다. 너의 재산과 집 안팎살림을 다 맡겨도 마음을 푹 놓을 수 있고 죽을 때, 네 가족을 그에게 맡겨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너의 돈 한 푼도 탐하지 않고 네가 맡겨 놓은 모든 일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잘 처리해 줄 것이다. 게다가 너를 위해 가산을 지키고 네 자녀나 후손을 부양하여 나중에 너의 재산과 가업을 계승하게 해 주고 그 자신은 절대로 강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네가 쓰지 않겠느냐? (씁니다.) 누가 먼저 그 사람을 가로채려고 한다면 어떡하겠느냐? 너는 온갖 방법을 다해 그런 사람을 꼭 잡고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왜 너는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그런 사람을 꼭 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냐? (찾기 어려운 사람이고, 또한 신뢰할 만하고 일을 맡길 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성격도 괴팍하고 사교성도 없고 너무 진지한 것은 괜찮으냐? 네가 한 일이 지나치고 품격이 떨어지면 너를 한바탕 꾸짖기까지 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그런 것은 다 큰일이 아니다. 관건은 그런 인품의 사람은 정말 귀하기에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희귀 동물 판다보다도 적다! 무엇 때문에 지금 여자들은 시집가지 않느냐? 무엇 때문에 지금 노총각, 노처녀들이 이렇게 많으냐? 정말로 배우자를 찾지 못해서이냐? 지금 사람들 중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나 신뢰할 만한 사람, 일생을 맡길 만한 사람이나 행복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는 장가갈 엄두를 못 내고 여자는 시집갈 엄두를 못 낸다. 이것이 걸림돌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므로 사람의 양심은 정상 인성에 반드시 갖춰져야 하는 것이지만 충성심, 즉 사람이 일편단심으로 충성할 수 있는 것은 보통 정상 인성에 갖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키고 육체를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하느냐?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모습의 기준을 이렇게 정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하느냐?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키고 육체를 고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 양심적으로 살고 맡겨진 부탁과 본분에 충성심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사람다운 사람인 것이다. 결혼을 하든, 취직을 하든, 구인을 하든, 가정 집사를 구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지금 세상에는 선호하는 사람이 없다. 세상의 사악한 조류는 무엇을 선호하느냐? “우윳빛처럼 뽀얗고 아름다운 여자(원문: 白富美)”, “훤칠한 조각미남(원문: 高富帥)”, 말만 들어도 역겹다! 우윳빛처럼 뽀얗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가치가 있느냐? 조금만 살아 보면 지겹고 역겨워질 것이다. 사악하고,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고, 악독하고, 간사하고, 가식적이고, 정상인과는 아예 맞지 않는다. 훤칠한 조각미남은 또 어떠냐? 바람기가 많고, 사악하고, 가식적이고, 건방지고, 방탕한 데다가 잘난 척하고, 저속하고, 뻔뻔스럽고, 염치가 없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지는 털끝 만큼도 없이 그냥 돈 자랑할 줄 밖에 모른다. 정상인과는 아예 맞지 않는데 정상 인성의 표현이 눈곱 만큼도 없다. 그들이 입으로 내뱉는 그런 말들과 관심사들 그리고 속에 숨어 있는 것들에는 더러움, 사악, 비열, 후안무치, 악독, 간사, 포악, 방자, 천박, 옹졸 등등이 가득한데, 정상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과 살 수 있겠느냐? 살 수 없다. 그렇지? 그런 사람에게는 사람다운 모습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러므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 인성이 너무나 중요하다! 지금 사람들은 무엇을 중요시하느냐? (돈, 권세, 명예, 지위, 외모입니다.) 지위, 외모 이런 것들이다. 네가 “제가 이 얼굴에 키 180cm이면 딱 봐도 스타가 될 감인데, 여자들이 왜 저를 좋아하지 않을까요?”라고 하니, 여자는 “당신, 돈 많아요? 가진 게 없는데 뭐가 좋겠어요? 당신이 쇠똥구리처럼 생겼어도 돈만 많으면 다 쫓아다닐 거예요.”라고 한다. 좌절을 맛본 것이 아니냐? 네가 잘생겨도 소용 있느냐? 너에게 특기가 있어도 소용 있느냐? 네가 “나는 정의감이 많아요.”라고 해도 상대는 “정의감이 있어도 소용 없어요. 돈이 없는 게 문제잖아요. 돈만 있으면 당신이 악에 빠진 사람이라 해도 내가 쫓아다닐 거예요.”라고 한다. 세상이 바로 그렇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지금 사람들의 인성이다. 이것을 인성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다 마귀 성정이지 인성이 어디 있느냐! 그러므로 진정한 사람을 보기 전에는 절대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만나지 말라. 사람을 만나려고 했다가 결국 귀신을 만나 집으로 데려간다면 무슨 행복한 날이 있겠느냐? 절대 없다. 어떤 사람은 당시에는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죽어도 변치 않겠다고 굳게 맹세해도 정말로 큰 어려움이 닥쳐 너에게 돈이 없게 되면 그 즉시 너를 걷어찰 것인데, 그러면 좋을 날이 없다. 사회에는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니 아마 이 자리의 어떤 사람은 체험했을 것이다. 사악한 조류는 바로 이런 것이다.

다음 소절을 보자. “소질은 부족하나 진솔한 마음 있네”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절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느냐? 기분이 좋아지는 동시에 너희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 어떤 요구이냐? (소질이 부족한 것은 괜찮지만 진솔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맞다.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마음이 진솔한 표현은 무엇이냐? 그러니까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데, 진솔한 말을 하고, 진솔하게 일 처리하고, 본분을 지키고, 마음과 뜻을 다할 수 있고, 충성심이 있고, 꾀를 부리지 않고, 궤사한 사람, 교활한 사람, 간사한 사람이 되지 않고, 암투를 벌이지 않고,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절은 무슨 뜻이겠느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소질이 낮아 늘 본분을 잘하지 못하고 아무리 해도 불합격이라고 여긴다. 비록 마음과 뜻을 다해 일하지만 효과가 여전히 좋지 않아 결국에는 소질이 부족하다고 결론지으면서 소극적이 된다. 그런데 소질이 부족하면 길이 없더냐? 소질이 부족한 것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고 죽을 병도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소질이 부족하니 죽어라”라고 말씀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진솔한 사람입니다.) 이전에 “진솔하지만 우매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했었는데, 우매는 무엇을 가리키느냐? 대부분의 경우 소질이 부족하면 우매하다. 그런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단지 도리나 규례, 글귀를 조금 알았다는 것이다. 소질이 부족해 진리를 깨달은 것이 얕고 깊지 않으며, 구체적이 못하고,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늘 겉면에 머물러 있고, 늘 글귀나 규례에 머물러 있는데, 이것은 소질이 부족하여 초래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소질이 부족한 사람을 버리더냐? 아니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길과 가리켜 준 방향은 무엇이냐?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진솔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고 진솔한 말만 하면 끝이냐? (아닙니다.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진솔한 사람의 표현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 맞다. 또 무엇이 있느냐? (범사에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관건이다. 네가 스스로 아주 진솔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늘 뒷전에 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그것이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냐? 네가 “저는 소질은 많이 부족하지만 마음은 진솔해요.”라고 해도 본분을 주면 ‘이 본분은 고생할 게 뻔하니 다른 사람을 추천해야지.’라고 머리를 굴린다. 이것이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냐? 아니다. 또 너는 “저는 소질이 너무 부족해요. 하지만 마음은 아주 진솔해요.”라고 해도 본분이 임하면 잘할 자신이 없으니 핑계를 대고 거절하는데, 이것이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냐?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면 진솔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받아들이고 순복해야 하며, 그다음 충성을 다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해 힘써 추구해야 한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 여기에 몇 가지 방면의 표현이 있다. 한 방면은, 진솔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 딴마음을 품지 않는 것인데, 이런 것이 진솔한 표현이다. 다른 한 방면은,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이다.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지.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런 것들이니 이런 것을 다 활용해 하나님께 다 바칠 거야.’ 이것이 진솔한 표현이 아니냐? 너에게 있는 것과 네가 할 줄 아는 것을 다 바치는 것이 바로 진솔한 표현이다. 네가 갖고 있는 것을 바치기 싫어 요리조리 숨기고 농간을 부리며, 핑계로 거절하고, 잘하지 못할까 봐 혹은 결과를 책임지게 될까 봐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데, 이것이 진솔한 것이냐? 그러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진솔하게 사는 것은 그저 “마음을 드릴게요.”라고 말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임했을 때 실행하지 않으면 진솔한 것이 아니다. 일이 임했을 때 실제적인 표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솔한 사람의 표현이고 진솔한 마음이 있는 표현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에 대해 말하면 “솔직하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진솔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정도의 작은 범위일까? 분명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맡겨야 한다. 이런 태도가 진솔한 사람에게 있어야 할 태도이다. 그러므로 진솔한 마음이 아주 귀하다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그 마음이 사람의 행위와 정형을 지배할 수 있으니 그 마음이 아주 귀하다는 것이다. 네게 그런 마음이 있으면 너는 당연히 그런 정형 속에서 살게 되고 그런 행동과 행위가 있게 되며 그런 대가를 치르게 되므로 진솔한 마음이 아주 귀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묵상하고 되새겨 보면 어느 한 소절도 글자 표면의 뜻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여섯 번째 소절은 “매사에 충심 다해 하나님 마음 만족게 하리”라고 했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늘 어려움이 있다. 이 일을 맡기면 할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저 일에서 어려움이 있고 또 이 일에서 툭하면 소극적이 되거나 저 일에 부딪히면 주저앉기 바쁘다. 그 사람에게 “충성은 다했느냐?”라고 묻는다면 “제가 고충이 좀 있어서 아직 충성하지 못하고 있어요. 본분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라고 한다. 그러면 되겠느냐? 그런 사람은 실행의 길이 있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매사’에는 다 어떤 일들이 있느냐? 범위가 있느냐? 말하자면, 그것이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일이든, 형제자매들이 너에게 맡긴 일이든, 어떤 일이든 상관없이, 너의 직책 내의 일이고 네가 할 수 있고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너는 충성을 다하여 네가 해야 할 것을 하고 해야 할 책임과 본분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이 원칙은 듣기에는 범위가 좀 큰 것 같다. 그럼 범위를 좁혀서 말하면 바로 갖가지 진리가 아니겠느냐? 갖가지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였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매사에 충심 다해 하나님 마음 만족게 하리” 이것을 실행하기란 쉬울까? 네가 관심을 갖는 일에서는 네가 힘을 들이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좀 들일 수 있고, 더 나아가 의무적으로도 좀 할 수 있는데, 그런 일은 괜찮다. 예를 들어 너희에게 자신이 관심이 있고 능히 잘할 수 있는 노래를 하라고 하면 마음에 들어 행복하고 쾌감이 있기에 즐겁고 시원하게 부를 수 있다. 이것은 너희들이 하기 좋아하는 것이어서 충성을 다할 수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너희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나 전혀 한 적이 없었던 일을 하게 된다면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느냐? 그때는 너희가 진리를 실행하는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하고 있는 이 본분은 자랑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능숙하고 또 자신의 관심 범위에 있고 즐겨하는 일이기에 달갑게 할 수 있다. 만일 너에게 난이도가 좀 있는 어떤 본분을 맡긴다면,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순복할 수 있겠느냐? 너는 고민하다가 “저는 노래를 잘해요.”라고 말한다. 무슨 뜻이겠느냐? 가기 싫다는 뜻이다. 분명히 그 뜻인데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한사코 “제가 노래를 정말 잘해요.”라고 말한다. 그래도 상대가 “복음 전도 훈련하면서 시야를 넓히는 건 어때요? 그리고 복음 전도에 관한 각 방면의 진리를 알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라고 하니, 너는 “저는 춤도 잘 춰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아무튼 복음 전하는 건 싫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왜 싫겠느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다고 복음 전하기 싫다면, 이것은 무슨 잘못을 범한 것이냐? 개인의 취향대로 입맛대로 선택한 것이고 순복이 없는 것이다. 순복이 없으면 위험하다. 이 일에서 어떻게 해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느냐? 그때는 그 방면의 진리를 묵상하고 교통해야 한다.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싶다면 한 방면에서 혹은 한 가지 본분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긴 부탁은 어떤 것이라도 다 받아들여 ‘나의 입맛에 맞는 것이든, 나의 취미 내에 있는 것이든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 것이나 내가 전혀 해 본 적이 없고 난이도가 있는 것이라도 나는 다 받아들이고 순복해야 한다.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배우며 진입할 것이다. 설령 고생하고 체면이 서지 않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나는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너는 그 일을 본분으로 여기고 해야지 자신의 사업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본분이란 개념은 무엇이냐? 바로 창조주인 하나님이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을 맡겨 준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본분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 준 임무,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 준 부탁, 이것이 바로 너의 본분이다. 네가 이것을 목표로 삼고 실행한다면 거절할 수 있겠느냐? (거절하지 않습니다.) 거절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거절하면 안 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실행의 길은 무엇이냐? (매사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충심 다해 하나님 마음 만족게 하리”, 여기 중점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매사’에 있다. 매사라고 하면 꼭 네가 좋아하는 것이나 잘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더욱이 네가 익숙하거나 능숙하게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잘하지 못할 때도 있고 배워야 할 때도 있으며 난이도가 있거나 고통받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것이라면 너는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자신의 본분으로 여기고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데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실행의 길’이란 무엇이냐? 바로 네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비로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하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다음 소절은 “진리 실행하여 순복하는 진솔한 사람 되네”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총체적 요구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지만 모든 영웅호걸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얼마나 많든, 재주가 얼마나 많든, 식견이 얼마나 넓든,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든, 무엇을 잘하든, 진리를 실행하거나 하나님께 순복하거나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에 대해 말하면 사람은 그만 풀이 죽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길이 없다. 왜 길이 없을까?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진리를 실행하려니 힘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깨닫지 못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럼 깨달은 진리는 실행할 수 있느냐? 깨달은 것도 실행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도 힘들어하고 진솔하게 사는 것도 힘들어한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나이를 밝히기 싫어한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으면 “스물 대여섯이에요.”라고 답한다. “이건 확실한 대답이 아니잖아요. 도대체 스물 몇이에요?” “곧 스물다섯이고 이제 스물여섯이 돼요.” “대체 스물다섯이에요, 아니면 스물여섯이에요?” “맞춰 봐요. 어떤 사람들은 제가 스무살로 보인대요.” 보아라. 솔직한 말 한 마디 하는 것이 이처럼 힘들다. 진솔하게 사는 걸 이렇게 힘들어한다. 그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어떠냐? 네가 무골호인이라고 해 보자. 일이 터졌을 때, 사람들이 “이 일은 누구의 책임입니까?”라고 물으면 너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라고 답한다. 실은 누구의 책임인지 뻔한데도 너는 말하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을까? 그 사람의 미움을 받게 되면 앞으로 사이가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은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도 “누가 한 것입니까?”라고 따지고 물으면 “저희가 한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저희’는 누구누구입니까?” “그냥 저희 몇 사람입니다.” “그 몇 사람은 다 누구입니까?” “지금 보이는 저희 몇몇입니다.” “모두 몇 명입니까?” “아마 예닐곱 명, 거의 10명 정도 됩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이처럼 힘들고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이처럼 힘들다. 무골호인이나 중재인 노릇만 하는 것이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라고 말한다면 너는 순복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이란 걸 알고 있어요.”라고 말은 할 수 있다. 그럼 불평하지 않을 수는 있느냐? 그건 좀 힘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원망하지 않을 수는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으면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자백하고 회개할 수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원망이 있고 소극적인 정형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바로잡을 수 있느냐? 이런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과 관련되지 않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이란 건 알지만 순복하고 싶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지 않네요.”라고 한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이처럼 힘들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패괴 성정을 인식하며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 진리를 실행하는 것,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을 놓고 보면 어떤 것이 요구가 높으냐?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일이 임할 때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 처리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며, 진솔하게 살고, 진솔하게 말하고, 참되게 일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도달할 수 있겠느냐? 도달하기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높기 때문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초창기, 내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언급했을 때, 그때는 오래된 종교인들이 아주 많았다. 철이 들어서부터 주님을 믿기 시작해 평생을 믿은 사람도 있었고, 지방교회에서 온 50~60세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니까 그 사람들이 기뻐했는지, 실망했는지 아니면 어떠했는지 너희들이 맞춰 보아라. (너무 간단해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면서 안중에 두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무슨 성정이냐? 건방지고 기고만장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이렇게 오래 믿은 나에게 진솔한 사람으로 살라고 요구하는 건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이건 나를 어린애 취급하며 놀리는 게 아닌가?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이긴 자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란 말인가? 이렇게 쉬운 거란 말인가? 더 높은 도를 말씀하세요.’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이 도가 높지 않고, 그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그들을 얕보고 폄하하고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을 진리로 대하지 않았고 아무도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라”라는 이 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주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믿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나서 그런 표현을 보인 것이다. 그런 표현이 정상이냐, 아니면 비정상이냐? 그래서 나는 늘 어떤 사람들은 성정이 나쁠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이상하다고 했던 것이다.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흔히 하는 말로 하면 착실한 사람, 분수를 지키는 사람, 근본이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은 이 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다. 비록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고 아무리 여러 해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착실한 사람이 되었느냐? 근본이 있는 사람이 되었느냐? 왜 먼저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내가 행했는가? 사람은 이런 실제를 갖췄는가? 이 실제에 진입했는가? 이 실제에 도달했는가?’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그들은 생각해 보지는 않고 이 말씀을 보고 나서 바로 책상에 던지며 ‘흥, 진솔한 사람으로 살라는 건 너무 낮은 요구잖아. 진솔하게 사는 건 정상 인성에도 못 미치는데, 어떻게 훌륭한 인성이라고 할 수 있겠어? 우리는 지금 다 인성이 훌륭해지려고 진입하고 있는데, 어느 때라고 아직도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걸 논해?’라고 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드러냈는데, 정신이 이상해 보이지 않느냐? 사람의 패괴 성정이 너무 심각하여 이성을 잃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다. 그들은 ‘정상’이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계속 ‘더더욱 훌륭한’ 차원을 향해 애쓰는데, 헛된 것만 골라서 애쓴다. 결국 그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그 사람들은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았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글귀 도리만 좋아하고 공리공론만 늘어놓기 좋아하고 겉으로만 하기 좋아했는데, 그들이 간 길이 이러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진솔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길과 실행의 세부 사항마저도 모르게 되었는데, 이렇게 가련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면서 자신이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기에 자본이 있고 명망이 있고 연륜이 있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도태시킨다면 불공평하다고 여긴다. 이런 사람들이 공평을 논하다니, 그럴 만한 자격이 되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긴 적이 없고, 하나님의 대립면에 서서 연구하고 분석하였다. 그렇게 연구하고 분석하다 보니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실행의 길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정말 눈이 멀었다! 하나님의 요구는 비록 높지 않지만 공리공론을 늘어놓고 허풍 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비록 말씀이 간단하고 평범하고 소박해 보이나 모두 가장 실제적인 것이고, 모두 패괴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고 패괴된 인류가 진입해야 할 것이며, 빈말이 조금도 없다. 공리공론을 늘어놓고 허풍을 치는 것은 오로지 사탄이다.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들,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 바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늘 허풍을 치고, 높은 이론을 좋아하고, 공리공론을 늘어놓기 좋아하고, 도리를 말하기 좋아한다. 그들은 실제를 전혀 말하지 않고 진입과 실행도 말하지 않으며 담론하는 것만 좋아하고 진입하는 것은 싫어한다. 어떤 사람들은 탁상공론이나 글귀 도리를 좀 말하고는 흥분되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다 천국의 언어이고 셋째 하늘의 언어입니다. 그러니 일반인은 알 수도 없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거죠. 그래도 우리 분량이 대단한 겁니다. 그 사람들은 아직도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이 너무 따분해서 안 한 지도 이미 오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이런 셋째 하늘의 언어는 일반인이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다 어떤 사람입니까? 다 범속한 사람들이죠. 반대로 우리는 육체를 초월하고 세상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줄임말로 ‘초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죠!”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냐? (역겹고 무지합니다.) 역겹기만 한 것이 아니다. 보통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이런 일만 하고 이런 말만 하며 터무니없고 밑도 끝도 없다. 그들은 늘 공중에 있고 싶어 하기에 내려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려오세요. 진공 속에서 살지 말고 땅에서 고분고분 사람으로 살아요.”라고 말해도 듣지 않고 기어코 공중에 있겠다고 한다. 공중은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이냐? 그곳은 사탄 마귀가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을 믿는 이 일에서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고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을 놓고 볼때 인성 방면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믿고 진입해야 할 각 방면의 진리는 어느 방면이든 다 그토록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가 이것을 깨달았다면 하나님을 믿는 의의와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라고 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사람은 늘 헛된 꿈을 꾸는데, 늘 비현실적인 것들, 허무맹랑한 것들, 존재하지 않는 것들, 그리고 신선, 전설, 신화 이야기, 이런 터무니없는 것들만 생각한다. 그런 것은 어떤 것이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은 사탄의 것인데, 교만한 성정에서 초래된 것이다. 사람이 그 길로 간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사람다운 모습이 있겠느냐? 사람다운 모습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가는 길이 옳지 않고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가 옳지 않으며 언제나 실속 있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어떤 사람들은 온종일 허풍만 치고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모습이 있을까?’ 이런 것을 추구하지 않고 쓸데없이 늘 공리공론을 늘어놓으려고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위해 밤낮으로 보고 듣는 데에 공을 들인다. 옆에 있는 가족들은 ‘이 사람이 집에 있기만 하면 왜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늘 불안하지?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왜 다른 사람과 다른 거지?’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 사람을 따르면 마음에 평안이라곤 없다. 이것이 바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늘 안정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 안정하여 늘 기도하며, 차분하게 사람들과 지낼 뿐만 아니라 사람다우며, 말하고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늘 양보하고 포용하는데, 싸우지도 다투지도 않고 뒷걸음치지도 않으며 늘 하나님 앞에서 산다. 사람들에게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고 겸손하다는 느낌을 준다. 실속이 있고 말을 솔직하게 하고 일을 실제적으로 하는데, 어떤 경우에 표현은 하지 않아도 일은 진솔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늘 큰소리치며 호언장담을 해도 돌아서면 자취를 감추어 실제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되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 다 좋지 않다. “그 사람은 사기꾼이에요. 큰소리만 치고 실제적인 일은 하지 않아요. 일 처리 하는 걸 보면 언제나 용두사미예요. 일을 망치면 다른 사람이 책임지게 하고, 일이 잘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상을 받아요.”라고 할 정도로, 인품이 바르지 않아 사람들이 다 싫어한다. 체면이 서는 일이 생기면 앞다투어 나서고, 훈계받을 일이 생기면 뒤로 물러나 다른 사람을 내세우며, 문제없을 때는 누구보다도 큰소리 떵떵 치다가 문제가 있으면 달팽이 눈처럼 움츠러들어 잠자코 있는데 일이 지나가면 또 튀어나온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것이 정상 인성에 있어야 할 표현이냐? 이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누림이 없다! 어떤 사람은 설치고 다니며 문제를 일삼기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시비를 일으키거나 이간질하거나 아니면 작당하기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생각 없이 함부로 지껄인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좋아하지 않는다. 금방 만났을 때는 다들 하나님을 믿고 있어서 다 형제자매이고, 다 한 분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뜻을 같이 하여 본분에 힘쓰니 서로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오래되다 보면 사람의 인성, 인품, 추구, 인격 그리고 각 방면의 패괴 성정이 유로(역주: 흘러나옴)되고, 사람에 대한 관점, 본분에 대한 관점, 갖가지 일에 대한 관점이 각 방면에서 드러나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다들 싫어하는 사람, 다들 좋아하는 사람, 박수받는 사람, 반감과 혐오를 받게 되는 사람으로 나뉘게 된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을 혐오하거나 좋아하느냐? (그 사람의 평소 행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맞다. 너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너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일방적으로 너에게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포장하고 서로 싫은 소리 안 하며 잘 지낸다. 그러나 오래되면 익숙해지니까 이미지 관리로만 유지되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반드시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께 순복하고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나중에 다 인정받을 수 있다.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나는 인품이 좋고 예절이 바르거든요. 나는 말을 잘 하니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어요. 처세에 능하고 잔꾀가 많아요.”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넘어진다. 이런 것은 다 근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다 정확한 평가를 하기 마련이다. 네가 이런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할 것이고 다 탄복하고 찬성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볼까? 네가 하나님의 기준과 요구에 도달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는데, 너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분명 없다. 그렇지?

다른 사람은 제쳐놓고 지금 사람들이 자주 들어 본 욥에 대해 말해 보자. 너희가 제한된 기록을 통해 알게 된 욥의 일들에서 볼 때 욥은 어떤 사람으로 생각되느냐? (의인이고, 온전한 사람입니다.) 빈말은 하지 말라. 욥이 좋은 사람이 맞느냐? (맞습니다.)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다. 그럼 욥에게서 좋다고 할 만한 표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우선 욥은 정에 치우치지 않았다. 자녀나 가족을 대함에 원칙이 있기에 역성을 들거나 잘못을 두둔하지 않았다. “역성을 들다”라는 말은 다들 잘 알고 있다. 누구나 역성을 드는 경우가 있는데 꼭 자녀에게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은 자신이나 가족이나 부모 그리고 자신에게 꽤 좋은 인상을 남긴 사람이나 친한 사람의 역성도 들 수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역성을 드는 것이다. 이것을 원칙이 없다고 한다. 원칙이 없는 것은 좋은 사람에게 있어야 할 표현이냐? (아닙니다.) 아마 네가 욥 같은 사람과 함께 지낼 때 처음에는 ‘이 사람 너무 진지하고 너무 고지식하고 원칙을 너무 지나치게 고집해 입만 열면 상처를 주네.’라고 느끼겠지만, 시간이 오래되면 그래도 그런 사람이 가장 믿음직하고 가장 신뢰할 만하고 그런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든 너를 대함에 있어 원칙을 지키면서 사실을 왜곡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잘한 건 잘했다고 하지 절대 네가 한 가지 나쁜 일을 한 적이 있거나 다른 사람이 네가 나쁘다고 말한다 해서 덩달아 너를 나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실을 왜곡하여 사람을 모함하지 않을 것이고, 정에 치우쳐 말하지 않을 것이며, 취향이나 기분에 따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 지내다 보면 너는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네요. 저희 같은 경우 무슨 일이 닥치면 본분을 팽개치는데, 저 사람은 아무리 큰 일이 생겨도 하나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네요.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이유가 다 있었네요. 옆에 저런 친구 하나 있으면 제가 살든, 죽든, 아프든, 환난이 임하든 모두 변함없이 저를 도와주고, 돌봐 주고, 잘 대해 주고, 잘 보살펴 주고, 관용으로 포용해 줄 텐데, 저런 사람은 너무 좋죠. 주변에 저런 사람 한 명만 있다면 설령 가끔씩 눈에 거슬리거나 잘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귀 사탄을 곁에 두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죠!”라고 한다. 마귀 사탄은 평소에 말로는 “네가 너무 좋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생각해 주는데.”라고 하다가도 일단 어려움이 닥치면 보는 척도 안 하고 너를 사탄에게 넘겨준다. 그때서야 너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 ‘신뢰할 만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라야 진짜 좋은 사람이구나. 좋은 사람은 참 귀해. 내 주변에 욥 같은 사람이 10명 정도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한 명도 없어!’ 그때면 너는 좋은 사람이 너무 귀하고 또 누구나 다 그런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본인이 나쁘다 해도 신뢰할 만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의인이나 선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또한 마음이 착하고 일함에 원칙과 정의감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나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너에게 환난이 임하고 네가 아프거나 가장 고통스러울 때 곁에 어떤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느냐? 감언이설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느냐?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가장 원하겠느냐? (위로해 주고 자상하게 보살펴 주며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너의 어려움을 알아주고 너를 위로해 줄 수 있으며 너의 고통을 들어줄 수 있고 또 네가 소극적이고 나약할 때 고통 속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사람을 가장 원할 것이다. 너를 비웃거나 너의 어려움을 못 본 척하거나 낙정하석(落井下石)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필요하다. 다시 말해, 너에게는 그런 사람의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너에게 어려움과 나약함과 속사정이 있을 때 털어놓아도 뒤에서 퍼뜨리지 않고, 너의 일을 망치지 않고, 너를 조롱하지도 비웃지도 않으며, 너의 어려움이나 나약함이나 소극적인 면이나 인성의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대할 수 있다. 정확히 대하는 것은 원칙이 아니냐? 이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의 그 ‘좋은’ 표현이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은 너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하고 보호할 수 있으며, 또한 돌봐 주고 공급해 줄 수 있으며, 고통과 나약함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데, 너에게 아주 큰 도움을 준다. 그런 사람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런 사람이라야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너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너를 비웃고 외면하고 비꼬는 사람, 네가 마음속 말을 하려다가 ‘관두자. 말했다가 뒤탈이 생길 것 같아. 이 사람에게 말하면 아무에게나 퍼뜨려서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지도 몰라. 뒤에서 또 어떤 루머를 퍼뜨리고 훼방할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감히 말을 꺼내겠느냐? 그런 사람은 늑대이다. 그런 사람은 너를 도와주거나 돌봐 주기는커녕 너의 일을 망칠 수 있고 너를 속이고 해칠 수 있는데, 감히 그런 자에게 마음속 말을 하겠느냐? 그때면 너는 깨닫고 “관건은 사람이 좋아야 하네요. 좋은 사람은 너무나 가치 있고 소중하네요. 어떤 사람으로 살든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는 가치가 없네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의 부모조차도 네가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너의 어려움과 필요를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도 자녀를 위로할 줄 모른다. 어떤 자녀들은 밖에서 죽을힘을 다해 일하는데, 특히 딸들의 경우에는 사장과 가까운 관계를 가져야 하고, 때로는 몸까지 팔아야 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집에 돈을 내놓지 않는 거니? 다른 집 자식들은 명절 때마다 부모한테 이것저것 사 오고 집이나 차까지 선물하더라.”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는 자녀에게 돈 버는 게 힘들지 않느냐, 돈 버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위로해 줄 줄은 모른다. 돈을 적게 주면 오히려 싫어하고 남들과 비교하기까지 한다. 그럴 때 자녀의 기분은 어떠하겠느냐? (속이 쓰리고 아프고 마음이 상합니다.) 마음이 상하고 세상이 너무나 어둡다고 생각한다. 부모마저 이러고 있으니 사람에게 살길이 있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러므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곁에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럼 좋은 사람은 어떻게 생기는 거냐?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느냐? 그럴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 앞에 와야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토대나 조건이 있게 된다. 사람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 필요한데 하나님도 필요하지 않겠느냐?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좋은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도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 네가 이런 일을 알게 되면 어떤 효과를 가져오겠느냐? 좋은 사람이 되려는 심지(心志)와 소망을 품고 힘써 추구할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 해도 그런 심지가 있어야 하고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필요하구나. 내 옆에도 좋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돕고 돌봐 주어서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을 더 많이 얻으시도록 해야지.’라고 한다면 올바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전혀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아무도 좋은 사람으로 살지 않으면서 왜 나한테만 기대해요? 나도 싫어요.”라고 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 문제다. 노력하는 자가 먼저 얻고 안 하면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어느 지경에까지 패괴되었는지 보아라. 좋은 사람만 부족한 것이다.

<욥기>에 기록된 욥이 행한 그 몇 가지 일은 사건 내용이 아주 짧고 간단하며 그렇게 많은 일들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이 행한 그 몇 가지 일에서라도 마땅히 실마리를 찾고, 그 실마리에서 욥이 좋은 사람으로 살았던 원칙과 실행의 길을 찾아야 한다. 우선 욥은 자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떤 원칙으로 대했느냐? 정에 치우치지 않고 원칙을 지킨 것인데, 그런 일로 인해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았다. 이것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한 첫 번째 기준이다. 욥은 집에서부터, 자기의 가족을 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다음, 재산을 대하는 것이었다. 비록 재산은 몸 이외의 것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고 베풀어 준 것이니, 마땅히 알뜰하게 잘 관리하고 잘 지켜야 한다. 잘 지킨다는 것은 욕심을 부려 차지하거나 탐욕스럽게 누리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 손의 지배와 하나님의 주재를 보고 그런 일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좋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네가 사람에게는 다 원칙을 지키면서 하나님께는 순복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좋은 사람이겠느냐? 진짜 좋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배를 대하는 방면이 있다. 하나님의 지배에는 하나님이 거두어가는 것과 하나님이 시련하는 것이 있는데, 때로는 거두어가고 때로는 시련을 준다. 시련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간혹 아프게 되거나 가정에 어떤 상황이 생기거나 본분에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고, 책망과 훈계가 임하거나 하나님의 채찍과 징계, 그리고 심판과 형벌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너는 그런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그리고 또 본분을 대함에 있어 충성심이 있어야 하고 충성을 다해야 하는 방면이 있다. 충성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자신의 모든 것과 전부를 다 바치는 것이다. 이것을 충성심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좋은 사람의 기준이다. 너희 중에 지금 욥 같은 사람이 많이도 필요 없고 딱 한 명만 있어도 너희에게 기둥이 생긴 것이다. 어떤 일이 생기든, 그 사람이 앞에서 언제든지 본보기가 되어 주고 너희도 그 사람이 하는 대로 본받아 한다면 다들 행위에서, 사상에서, 그리고 진리 실행을 찾고 구하는 것까지 점점 더 좋아지고 정형이 날로 좋아져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일곱 번째 소절은 “진리 실행하여 순복하는 진솔한 사람 되네”라고 했다.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여기에서는 사람에게 곤혹을 느끼지 말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많은 진리를 발표하고 각 방면의 교통(원문: 道)을 하였지만 사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하나님이 무엇을 얘기하고 사람에게 무엇을 말해 주었든 하나님의 요구는 다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라는 것뿐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이것이 바로 요구가 높지 않다는 뜻이다.

여덟 번째 소절은 “간사함 없이 당당하게 광명 속에서 사네”라고 했다. 이 길은 누가 준 것이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거리끼는 일이 없이 당당하다는 것은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서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과 영이 모두 하나님께 열려 있어 숨길 것이 없고 회피할 것이 없다. 마음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께 털어놓은 것인데, 하나님께 전인을 다 드린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나쁘다고 해도 “네.”라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교만하고 독선적이라고 해도 “네.”라며 다 받아들인다. “네.”라고 대답만 하면 끝이겠느냐? 변화되어야 한다. 변화되다 보면 어느새 사람에게 궤사, 사악, 교활, 건성, 기만이 없어지고, 갈수록 광명정대하게 살고 갈수록 진솔한 사람의 기준에 맞게 산다. 그러면 광명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사람이 광명 속에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이므로 사람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사람이 광명 속에서 산다는 것은 갖가지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할 줄 알게 되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아직 완전히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봤을 때 사람다운 모습이 있고 소처럼 떠받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저버리는 위험이 없는 것이다. 비록 진리에 대한 깊은 인식은 없지만 순종하고, 한 가지 임무를 맡거나 본분을 하면 마음과 뜻을 다해, 최선을 다해 할 수 있어 신뢰할 만하여 하나님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광명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광명 속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 마음을 감추겠느냐? 딴짓하겠느냐? 비밀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완전히 활짝 열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고 말하기 쑥스러울 일도 없고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되는 일도 없이 다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정도에 도달한다면 삶이 홀가분해지고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

아홉 번째 소절은 “진솔한 자여 어서 와 마음 나누세”라고 했다. 왜 진솔한 사람과 마음 나누기를 좋아하겠느냐? (진솔한 사람은 누굴 해치지 않기에 믿을 만하고 함께 지내도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보통 어떤 사람과 마음을 나누느냐? 궤사한 사람과 나누느냐? 그런 사람은 “계속 얘기해 보세요. 어제 어떻게 생각했었어요?”라며 넌지시 말을 유도한다. 그리하여 너에게 ‘이 사람, 자기는 나한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서 자꾸 내 마음을 떠보려고 하네. 내 마음을 알고 나면 비아냥거릴 것 같아. 뭐라도 캐내서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려는 수작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 사람에게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 (말하지 못합니다.) 진솔한 사람, 마음씨가 곱고 착하며 너를 포용해 줄 뿐만 아니라 참되기까지 한 그런 사람을 찾아 마음을 나누게 되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유익을 얻고 도움과 이해를 얻게 됩니다.) 가끔씩 너는 감정이 좀 생겨 ‘내 안에 쌓인 감정이 해소되게 누가 내 말을 좀 들어주고 내 마음속 고충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다. 사실 별다른 요구가 없이 그냥 참된 사람이 들어주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가끔씩 ‘내 마음이 좀 고장난 것 같아. 그렇다고 마음속 말을 아무에게나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떤 사람을 찾아볼까? 나 혼자 아무리 기도해도 잘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또 맞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참된 사람과 얘기해 봐야겠어. 그런 사람에게 말하면 도움을 받아서 내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참된 사람인 데다가 체험이 있고 뭘 좀 아는 사람에게 말해 보면, 그런 사람이 해 주는 말은 귀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도움이 되고 너의 구미에 맞다. 그가 너에게 길을 짚어 주면 마음이 트이고 유익을 얻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진솔한 사람으로 사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함께 지낼 때는 마음이 맞는 사람이나 진솔한 사람을 찾고 싶어 한다. 궤사한 사람, 간사한 사람,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찾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누가 진솔한 사람을 싫어하겠나”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열 번째 소절은 “하나님 사랑하는 자여 우리 모두 친구 하세”라고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궤사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궤사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너는 그런 사람과 사귀기 좋아하느냐?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다들 궤사한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싫어하고, 멀리하고, 내버리고, 마음속에서 미워한다. 그렇지? 누구든 그런 사람과 사귀기 싫어한다. 궤사한 사람에게 의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 실속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느냐? 친구를 정말로 친구로 대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궤사한 사람은 어떤 원칙으로 친구를 사귀겠느냐? 이용하는 것뿐이다. “자, 우리 의형제 맺자. 우리 친구 하자.”라고 하는데, 무슨 뜻이겠느냐? 네가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 사귀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의형제나 친구도 아니니까 차버린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도 그런 사람과 친해지기 어렵다. 아무나 다 이용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하는데, 이용할 때는 친구이고 의형제지만 이용할 가치가 없으면 남남이 된다. 그런 뜻이다.

열한 번째 소절은 “진리 사랑하는자 우리 모두 형제자매”라고 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집의 사람이고 진짜 형제자매다. 너는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다 형제자매라고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들이 형제자매가 아니냐?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추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는 자, 악인, 나쁜 사람 그리고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다. 심지어 겉보기에 인성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처세철학에 아주 능한 사람들이 있는데 수단을 잘 쓰고, 사람을 잘 이용하고 구슬리고 기만하며, 진리를 교통하면 관심이 없고 싫어하며 귀담아듣지 않고 재미없다며 앉아 있지를 못한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런 사람은 이방인이다. 그런 사람을 절대 형제자매로 여기지 말라. 아마 너의 마음을 사려고 너에게 맛있는 것을 주거나 작은 선심을 쓸 수도 있겠지만 네가 진리를 교통하기만 하면 그는 잡담을 늘어놓는다. “요즘 어떻게 보냈는지 교통을 할까요?”라며 진리를 교통하려고 하면 그는 육체의 일, 직장의 일, 세속의 일, 이방에서 유행되는 일, 정에 관한 일, 가정의 일, 이런 외부의 일들만 잔뜩 늘어놓는다. 진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관련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방인, 불신파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하는 사람들이다. 본분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보면 조용히 일만 하고 언제 한 번이라도 진리를 교통할 때가 없고 교통을 위해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으며, 예배를 드려도 기도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형제자매겠느냐? 그런 사람은 형제자매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 집에 있는 것을 괴로워한다. ‘왜 맨날 진리만 교통하고, 맨날 진리를 실행하라, 하나님께 순복하라, 충성을 다하라, 본분에 전력을 다하라는 교통만 하는 거야?’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이런 교통을 듣고는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왜 맨날 같은 얘기만 하지? 왜 같은 얘기를 끝도 없이 하지? 언제까지 들어야 해? 언제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복 받으려나?’ 그러면서 재미없다고 듣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일이 닥치면 길이 있을까? (없습니다.) 길이 없다. 겉보기에는 괜찮게 사는 것 같지만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이냐? 그런 자들에게는 사람의 방법들이 있는데, 사람의 방법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전혀 하나님 앞으로 오지도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궤계로, 사람의 방법으로, 처세 철학과 사람의 논리와 수단으로 일 처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힘들게 산다. 그런 사람은 아주 간단한 일마저 요리조리 덮어 감추고 이러니저러니 변명을 한다.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들지 않아요? 한 마디만 하면 됐지, 무슨 쓸데없는 말을 그리 많이 해요.”라고 할 정도이다. 그 사람은 사는 게 힘들다. 생각이 복잡한 데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유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체면이나 한 마디 말 때문에 논쟁하고 해명하고 변명하는데, 며칠 되어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사람만 만나면 말하는데 정신병자 같고 머리가 돈 것 같다. 그런 사람은 힘들게 살고 있다. 그 사람은 가정 내에서 일어난 한 가지 일이나 믿지 않는 이방인과 있었던 일에도 며칠씩 묶여 있다. 왜 그럴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니와 실행하지도 않고, 일이 닥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시비만 따지는데 이방인, 믿지 않는 가족, 동료, 친구 심지어 형제자매들과도 이방인의 수단으로 처리하고 시비의 관점으로 판가름을 내려고 한다. 그 사람은 누구의 입장이 틀렸느니, 누구누구는 한 통속이니, 누구누구는 한편이니 하면서 늘 이런 것으로 주변의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 자신의 인간 관계를 처리한다. 그래서 힘들게 사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대활약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고충은 그 본인만이 안다. 그런 사람을 보는 네가 더 힘들 정도이다. 그런 사람은 명리에 관한 일이나 체면과 관계되는 일 때문에 무조건 옥석을 가려야 하고, 누가 맞니 틀리니, 옳고 그르니, 더 잘했느니 못했느니, 누가 앞장섰니, 누구의 뜻이니 하면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 빠짐없이 정확하게 말하는데, 사람들은 듣지 않고 그저 “진솔한 사람으로 살면 되잖아요, 그렇게 시시콜콜 따져서 뭐해요?”라고 말해 준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힘들게 산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까? 왜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 (진리로 해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진리로 해결하지 않을까?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속에 진리가 없는 것이다. 일이 닥치면 무엇으로 하느냐? (처세 철학과 자신의 방법입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하는데, 하기만 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추태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온종일 하는 일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다 명리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다. 그런 올무 속에서 살면서 그런 일들을 위해 변명하고 해명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할 뿐 하나님 앞에 와서 진리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그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고 생각이 너무 복잡한 데다가 논리에도 맞지 않으며, 머릿속 생각은 뒤엉켜 뒤죽박죽이다. 시비만 따지더니 결국은 어떠냐? 무엇을 얻었느냐?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체면은 세웠고 옳고 그름에서 판가름은 났지만 결과는 어떠하냐? 모두가 그 사람을 간파하여 싫어하고 “저 사람은 진리를 손톱만큼도 실행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상면에서 책망하거나 형제자매들이 책망한 한 마디 말 때문에 불쾌해서 무엇 때문이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며 양씨의 셋째 딸처럼 고소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이치를 따질 곳이 없단 말인가? 나는 반드시 이 일을 밝히고 분명히 얘기해야겠어.’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그는 자꾸 도리를 따지려고 한다. 진리를 받아들이면 되고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인데, 그렇게 힘들게 살려고 한다. 그러니 지쳐 죽어도 싸다! 그것은 자초한 것이니 쌤통이다! 사람에게 있는 많은 어려움은 사실 다 자초한 것이고 다 쓸데없이 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이방인이다. 교통을 아무리 많이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보고 하나님을 믿은 지 아무리 오래돼도 진리 실행이란 무엇인지 모르고, 뭘 하든 사람의 방법과 수단으로 대처하면서 힘들고 가엾게 살아간다. “진리 사랑하는 자 우리 모두 형제자매”라고 했는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 진리를 싫어하는 자, 진리를 저버리는 자는 형제자매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닌 이방인이니 형제자매로 여기면 안 된다. 그 사람이 힘들고 가엾게 산다 한들 불쌍히 여길 가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쌤통’이란 이 두 글자를 선물해 주자. “그렇게 하더니만 쌤통이네요!” 이것이 바로 그런 사람에게 주는 가장 좋은 대답이고 가장 좋은 선물이다.

다음 소절은 “행복한 자 우리 함께 춤추며 찬양하세”라고 했다. 드디어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참으로 행복하다”라는 주제로 돌아왔다. 이 소절은 사람들에게 좌우명을 선물한 것과 같으니 천천히 체험하고 천천히 음미해 보아라. “진솔한 사람으로 살아야 참으로 행복하다”에 숨어 있는 그 뜻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궤사한 사람 혹은 교활한 사람으로 살거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면, 진정한 즐거움이 없고 참 행복이 없으며 영원히 즐거워질 수 없고 고민거리가 끊이지 않고 고충이 많다는 뜻이다. 다시 한 번 ‘쌤통’이란 이 두 글자를 선물하겠다. 너는 그렇게 살아도 당연하다. 네가 원했던 것이 아니냐? 네가 그런 것을 좋아한다면 결국 너에게는 행복과 즐거움이 없고 고통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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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⑤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⑥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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