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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편 참된 믿음에 이르려면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지금 너희들은 본분하는 열의가 다 아주 크다. 열의가 아주 크다고 믿음을 뜻할 수 있느냐? 거기에 참된 믿음의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좀 충동적이거나 순간적인 힘을 쓰는 것과 같은 정형이 있지 않으냐? 사람의 믿음은 무엇에 가장 약하냐? (사실과 시간의 검증입니다.) 맞다, 믿음은 사실이 임할 때 가장 잘 드러나고 연단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럼 어떻게 연단을 겪어야 사람에게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을까? 사람은 무엇을 갖춰야만 하나님께 참된 믿음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즉, 무엇을 갖춰야만 참된 믿음의 효과가 생기고 참된 믿음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너에게 정말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너에게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과 곤고가 임하든지, 심지어 운명과 앞날에 관련되더라도 모두 어렵지 않게 하나님의 배치에 순복할 수 있고 너에게는 어려움이 되지 않을 것인데, 무엇을 갖춰야 여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을 갖춰야 너에게 참된 믿음이 갖춰졌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하나님이 너를 검증할 때, 하나님이 너에게 환경을 배치해 줄 때, 그리고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과 연단을 줄 때, 하나님이 너에게서 거두어 갈 때, 하나님이 한 것이 너의 관념에 맞지 않을 때, 네가 어떤 것을 살아내고 어떤 것을 갖춰야 너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고 네가 참된 믿음을 갖췄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을까? 적어도 만사만물과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고, 다 하나님의 배정과 안배가 있기에, 사람이 선택하거나 타산하고 계획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깨달아야 한다. 우선 이런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은 참된 믿음의 표현 중 하나이다. 그리고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실행법이다.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이상(異象)이 있어야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것은 네가 실행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 또 어떤 것과 어떤 진리를 갖춰야 너에게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느냐? (생활 속에서 시련과 연단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이 하신 모든 것이 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정결케 하며 구원하시기 위한 좋은 일이란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한 방면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사람에게는 다 정결케 함이고 구원이며, 다 진리이고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럼 너는 이런 일을 겪었느냐? 너희들에게 지금은 이 방면의 인식만 있는 것이냐, 아니면 이미 일부분을 체험하였느냐? 네가 어느 단계까지 체험하게 되면 너의 믿음도 그만큼 갖춰지게 되는데, 네가 체험한 것만큼 믿음도 그만큼 생기게 된다. 너는 보게 된 것을 체험하게 된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을 말하면 그것이 너의 실제 체험이겠느냐? 너의 참된 믿음이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반드시 네가 직접 체험하여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주재하고 배치하시며 이와 같이 안배하십니다.”라는 것을 얻게 되고 실증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다면, 이것이 너의 실제 분량인 것이고 너의 참된 믿음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아직은 이 단계까지 체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이것은 옳은 말이야. 이것은 진리이고 도리에도 맞아.’라고 생각돼 받아들인 것이라면,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지, 아직 보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한 것인데, 그것이 너의 참된 믿음이겠느냐? 아직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일 수는 있으나 너의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지금 어느 정도에 이르렀느냐? 이런 말들을 전할 줄도 알고, 이런 말이나 이런 진리, 옳은 도리로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고 공급할 줄도 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공급하면서 이런 것이 네 자신에게도 공급이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언젠가 너에게도 같은 어려움이 닥친다면, 다시 말해 다들 잘 알고 있는 욥과 같은 어려움이라면 너는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리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느냐? (아직은 못합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사람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냐? 각 방면의 진리, 옳은 말과 도리는 다 말할 줄 알고 교통할 줄 아는데, 아직 실생활에서 그 말씀의 정확성을 체험하지 못하였다. 그 말씀 속에 어떤 진리가 있고 진리의 참뜻은 무엇이며 도대체 어떤 실제적인 면이 있는지에 대한 체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적합한 환경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적합한 환경이 있어야 하는데, 주변에 옳은 사람이 있어야 하고 너의 생명을 자라게 해 주는 적합한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네가 깨달은 것이 진리든 도리든 비로소 실증될 수 있고 네가 체험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생명이 있는 씨앗 하나가 모래밭에 떨어진 뒤 햇빛이 비춰 주지 않고 빗물이 적셔 주지 않는다면 쉽게 싹이 나겠느냐? 싹틀 수 있는 생명 있는 씨앗이 좋은 흙 속에 자리 잡았지만 햇빛의 비췸과 빗물의 적심이 부족하다면 돋아난 싹이 마르지 않겠느냐? 그래서 네가 많은 도리를 알고 많은 설교(원문: 道)를 들었을 때, 많은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들었을 때, 네가 이 길이 맞고 인생의 바른길이라고 확신했다면, 그때는 너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하나님께 너의 생명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며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을 배치해 주시기를 간구할 것이 필요하다. 그런 환경으로 인해 아마 너는 육체가 편안하지 않을 것인데, 사람의 육체가 고난받아야 하고 사람이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해야 하며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 너희들은 다 체험해 보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너희에게 가정이란 것이 없어졌으니, 남편이나 자식을 만날 수 있느냐? 연락할 수 있느냐? (안 됩니다.) 친척과 친구들은 만날 수 있느냐? (안 됩니다.) 만나지 못하고 그들의 소식도 들을 수 없다. 고요한 밤에 혼자 누워 있을 때면 가끔씩 ‘아버지는 어떻게 됐을까? 내가 떠날 때 벌써 이가 여러 대 빠지고 늙었는데 난 효도도 할 수 없게 됐구나. 어머니도 심장이 좋지 않고 혈압도 높고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일들을 걱정하게 되지 않느냐? 더 이상 자식의 역할을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는데, 사람의 생명을 놓고 말하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도 내가 효도할 형편이 못되니 불효자식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도 그만 걱정하고 하나님께 맡기자. 모든 것을 다 하나님 손에 맡겨야지.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마땅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참된 믿음을 얻고 참된 확신을 얻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해 내 안의 생명이 자라게 하고 진리를 얻고 하나님 말씀을 얻는 것이지. 그 외의 것(원문: 身外之物)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런 것을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느냐? 겉으로 보면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자발적으로 내려놓은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떠하냐? (하나님이 배정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너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이고 하나님이 배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그들을 만날 수 없도록 한 것인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주재입니다.) 더 적절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너에게서 박탈한 것이다. 이 말이 가장 실제적이지 않으냐? 너희들은 늘 하나님이 주재하고 하나님이 안배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가장 합당하냐? 하나님은 이 일에서 어떻게 주재하였느냐? 하나님은 너를 가정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들이 너의 짐과 ‘꼬리’가 되지 않도록, 너의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너만 데리고 나와 어디로 이끌었느냐? 육체의 얽매임이 없는 환경, 그들을 볼 수 없는 환경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걱정되어 네가 그들에게 힘을 보태 주고 효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도 너를 묶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은 어떻게 하였느냐? 하나님은 그들과 떼어 놓는 것으로 너에게서 이 모든 것을 박탈하였다. 네가 그들에게 효도하느라 그들을 위해 효력하고 목숨을 바치고 힘쓰고 봉헌하고 헌신하는 이런 겉면의 얽매임에서 다 떼어 놓은 것이다. 그 뜻인즉 너는 지금 외톨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니 괴로울 것 없다. 좋은 일이라고 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사하다고 말해야 한다. 사람의 인간적인 본능에 따르면 누구나 다름없이 모두 가족이 모여 살고 싶고, 옆에 부모와 처자식이 동반하고 돌보며, 가족 모두가 무사하고 건강하게 오손도손 즐겁게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날마다 이렇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쁜 점이 하나 있다. 네 일생의 정력과 심혈, 너의 청춘, 너의 아름다운 시절까지 더불어 일생에서 가장 좋은 것을 다 그들에게 바친 것인데, 육체를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가족, 자녀, 부모, 직장, 명예와 이익 그리고 각종 복잡한 관계를 위해 일생을 다 바치고 나면, 너는 멸망하고 만다. 그럼 하나님은 너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 주느냐? 하나님은 “그 진흙탕 속에서 망하면 안 된다. 네가 거기에 빠지면 죽을 힘을 다해도 나오지 못한다. 너희에게는 그런 분량과 용기가 없고 그런 믿음은 더욱 없으니 내가 해 주마. 내가 너를 건져 주마.”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너와 상의도 없이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동의하냐고 물은 적이 있느냐? 없다. 사람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하나님은 왜 사람의 의견을 묻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제일 크시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거죠. 사람은 개미와 같아 하나님 편에서는 죽이는 것도 별것 아니에요. 사람은 빈대에 불과하죠!”라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대하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뜻이 있다. 하나님이 너를 건져 낸 목적은 너를 좋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너 스스로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주관적인 염원은 오손도손 무사하게 일생을 보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주 부유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한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러한 단란한 가족과 소시민적인 삶을 누리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뜻은 헤아릴 줄 모르고 이후의 처소와 하나님의 경영 계획 같은 그런 일은 염두에 두지도 않는 것이다. 사람이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하나님은 따지지도 않고 사람에게 많은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큰 일은 하나님이 자의로 결정하고 “너와 의논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네가 너무 어려서 잘 모르니까 너와 의논해도 통하지 않을 거다.”라고 말한다. 왜 의논해도 통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계획, 이 큰일을 한두 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알아들을 수도 없으니 하나님은 자의로 결정한 뒤 바로 역사하는데, 사람은 언젠가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그런 환경에서 너를 데리고 나온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들은 이제는 이런 것을 다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일에서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고맙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이 일은 아주 좋다! 우선, 네가 그러한 가정 환경에서 나와 육체의 모든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세상의 모든 얽매임과 육체의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너를 복잡한 올무에서 데리고 나와 하나님 앞에 데려온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건져 내어 하나님 집에 데려오니 사람은 “여기가 어디예요? 낯선데요.”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곳이 어디든 상관치 말라. 여기는 조용하고 아주 좋단다. 네가 자라는 데에 적합하니 마음 놓고 크기만 하거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고 하나님의 진리가 있고 또 하나님의 구원의 뜻도 있다. 구원 사역의 중심이 여기에 있으니 너는 여기서 마음껏 크거라.”라고 한다. 하나님이 너를 이러한 환경으로 데려왔는데, 이 환경에는 가족의 위로가 없을 수도 있다. 혹시 네가 아플 때, 옆에서 보살펴 주는 자녀나 다정하게 말해 주는 사람도 없고 혹시 네가 밤에 홀로 외롭게 누웠을 때, 육체의 고통이나 육체의 어려움을 생각하다 보면 고독함을 느끼게도 된다. 왜 외로울까?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다. 이것은 한 방면의 객관적인 원인이다. 주관적인 원인은 무엇이냐?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입니다.) 맞다.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육체에 살고 있는 사람은 육체의 각종 관계와 혈육 간의 정을 바탕으로 하고 낙으로 삼기에 자신의 가족을 떠나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너는 왜 자신이 어떻게 인간 세상에 온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느냐? 무리로 왔느냐 홀로 왔느냐? 너는 홀몸으로 왔다. 하나님은 사람을 한사람 한사람씩 데리고 왔고 사실 너는 올 때도 외로웠다. 그때 너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다가 왜 지금 하나님이 너를 데리고 나오니 외로움을 느끼게 될까? 네가 동반자가 없다고, 즉 너에게 다정한 말을 해 줄 수 있는 동반자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동반자는 너의 자녀일 수도 있고 너의 부모일 수도 있고 혹은 너의 반려자인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너는 외로움을 느낀다. 네가 외로울 때 왜 하나님을 생각해 보지 않느냐? 하나님은 너의 동반자가 아닌 것이냐? 하나님은 너의 반려자가 아니냐? 네가 가장 고통스럽고 슬플 때, 누가 너의 마음을 진실로 위로해 줄 수 있느냐? 누가 너의 어려움을 진실로 해결해 줄 수 있느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어려움을 진실로 해결할 수 있다. 누군가 아플 때, 그게 이틀 정도라면 자녀들이 옆에서 보살피고 똥오줌까지 받아내며 시중들 수는 있다. 한두 달이 되면 벌써 보살펴 주는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한두 해가 되면 보살펴 주는 사람이 온데간데 없이 다 사라져 홀로 남게 된다. 그때야말로 진짜 외로운 것이다! 사실로 드러나지 않았느냐? 동반자가 사라졌다. 정말 동반자가 없을까? 실은 그렇지 않다. 실은 하나님이 계속 너와 동반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분이자 언제나 피난할 수 있는 곳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유일한 지심인(知心人)이다. 그러므로 너는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통이 임하든 어떠한 억울한 일이나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는 일이 임하든 재빨리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이 너를 위로해 줄 것이고 너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것이며 또 너의 여러 가지 문제도 해결해 줄 것이다. 그렇게 체험하다 보면 너의 외로움이 무엇으로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 말씀을 얻게 되는 근원이 되었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너는 체험하는 가운데서 차츰 ‘난 부모를 떠나도 여전히 잘살 수 있구나. 남편을 떠나도 여전히 보람되게 잘살 수 있구나. 애들을 떠나도 여전히 즐겁고 편안하고 기쁘구나. 난 더 이상 공허하지 않고 더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할 줄 알게 되었어. 나는 하나님에게서 언제든지 공급받을 수 있고 도움받을 수 있어. 비록 내가 하나님을 만지지도 보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의 곁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감동을 주실 거야.’라고 느끼게 된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이 정말 너의 하나님이 된 것인데, 그런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이다.

사람에게 좋은 생존 환경이 없고 적합한 환경이 없다면 그런 것에 도달하기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들이 있느냐? 다른 건 말고, 지금 이 시대에서 여성들이 결혼하고 나면 무엇을 가장 걱정하느냐? (제삼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여성들은 누구나 다 힘들게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정상적으로 온 노화가 아닌데 어떻게 늙은 것이냐? (걱정에 빠져 늙은 것입니다.) 종일 걱정에 빠져 늙은 것이다. 정말이지 자신의 마음을 10개로 쪼개서 쓰고 남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게 눈을 3개 갖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안 되니 첨단 기술로 그의 행적을 통제하고 뒤쫓을 궁리만 한다. 이것 때문에 적지 않은 여성들이 미용에 성형까지 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다양하게 꾸며 댄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몇십 년간 애써도 여전히 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사람 마음이란 참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에게 엉큼한 마음이나 딴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지켜도 소용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이 너무나 미덥지 못한 것이다. 여간 힘들게 사는 게 아니다! 여성이 이렇게 힘들게 산다면 남성은 어떨까? (역시 힘듭니다.) 남성들은 무엇 때문에 힘드냐? (아내가 배신할까 봐 똑같이 마음 놓지 못합니다.) 남자들도 사는 게 쉽지는 않구나! 부부 사이의 이런 일이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데, 너의 피를 마르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여성은 이런 일 때문에 자살하려고 약을 먹거나 철로에 드러눕거나 고층에서 뛰어내린다. 그 밖에 정신 이상이 오거나 우울증에 걸린 여성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살고 있느냐? 이 사악한 조류, 사악한 시대로 인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여성들은 늘 ‘불로장생할 수 없을까?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하늘이 나에게 불로장생하는 약을 주어 언제나 동안을 유지하고 내 청춘이 항상 이대로 유지되어 남편 마음을 묶어 둘 수만 있다면, 내가 단명한대도 감수할 수 있어. 평생 원이 없겠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불쌍한지 봐라. 고작 그 작디작은 소망과 그런 작은 일만 위해 살고 있다. 종일 그런 작은 일 때문에 치장하고 공을 들이면서 틈만 나면 거울을 들고 보며 다른 사람에게 수도 없이 물어본다. “제가 늙지 않았나요? 그래도 아직 젊어 보이지 않나요? 이번 성형이 어때요? 어떤 연예인을 닮지 않았어요? 이젠 제 남편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요?” 늘 이런 일만 마음에 두고 있다. 이렇게 살고 있던 사람이 어느 날 무언가 깨닫고 “난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을래. 더 이상 남편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고 그런 상태에서 나올 수 있을까? (없습니다.) 사람은 그러한 정형과 삶의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깊이 빠지면서 갈수록 더 고통스럽고 헤어나오지는 못하는데, 그 속에서 경쟁까지 한다. ‘저 여자가 내 남편을 유혹했으니 나도 다른 남자 꼬실 거야.’라고 한다.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느냐? ‘너만 꾸밀 줄 알아? 나도 만만치 않아. 화장을 좀 더 진하게 하고, 좀 더 바르면 되는 거잖아? 성형하면 되잖아? 누구는 할 줄 몰라서 안 해? 현모양처는 어려워도, 나쁜 여자로 사는 건 나도 할 수 있어.’라고 하면서 공을 들이고, 남의 남편을 꼬시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길이냐? (사악한 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복수를 하고 원한을 풀고 나면 아내로서의 존엄을 되찾은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오히려 어떠하냐?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마음은 정말 갈기갈기 찢긴 듯이 즐거울 날이 없다. 좋은 옷을 입어도 즐겁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즐겁지 않고, 잘 자도 즐겁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아부해도 즐겁지 않고, 성형해서 예뻐져도 즐겁지 않다. 늘 고민거리가 있는데 이런 고민거리는 어떻게 온 것이냐? (사탄이 해친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이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그런 고민들이 있을까? 그런 고통들이 있을까? 출가하여 삭발하면 그런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난 이제 저 사람과 살지 않을 테니 누구하고 살든 말든, 여러 명을 사귀어도 나와 상관없어. 나는 앞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경을 읽을 거야.’ 그러면 걱정거리가 있겠느냐? 없다. 신경 쓰이는 일이 없고 영향도 받지 않지만 마음에 위로가 있느냐? 이것은 도망간 것이고 자신을 마취시키고 잠시적으로 영혼을 마비시키는 것일 뿐, 적극적으로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마주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바른길이 아니다. 바른길이란 어떤 것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말을 다 할 줄 안다.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멀리하는 길을 가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큰 방향은 맞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지금 이 방향을 선택했느냐? 이 목표를 선택했느냐? 이 길에 들어섰느냐? (이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현상이고 좋은 징조다.

너희들은 지금 이 길로 가고 있으니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마음에는 전에 없었던 즐거움과 기쁨과 평안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있게 되었는데, 이런 것은 처음부터 느꼈던 것이다. 앞으로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갈 길이 많이 남았다!”라는 것은 어떤 뜻이겠느냐? 더 큰 즐거움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즐거움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너희가 실제로 살아냈을 때, 너희는 세상일을 아주 투철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사악한 조류나 인류의 생존 방식에 대해, 자신의 결혼과 가정 그리고 각종 인간 관계와 각종 인ㆍ사ㆍ물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하고 인식하고 분별하게 될 것이다. 그 정확한 인식과 평가와 분별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있고, 하나님 말씀에서 공급을 받는 것이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길은 뭐냐?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체험하며, 하나님에게서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고 사악한 조류를 인식하는 능력을 얻는 것이다. 또 어떤 중요한 것을 얻게 되느냐?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도리이다. 또 무엇을 얻게 되겠느냐? 각종 인ㆍ사ㆍ물을 겪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배정하는지, 각종 인ㆍ사ㆍ물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 하나님에게 어떤 지혜가 있는지, 하나님의 일 처리 방식과 원칙은 무엇인지,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게 된다. 너는 이런 일을 통해 창조주를 알아야 한다. 너는 지금 창조주의 앞에 오지 않았느냐? 너는 창조주와 낯익은 것 같지만 실은 창조주에 대해 인식이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네가 “저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알아요. 하나님은 야채와 무를 즐겨 드시는 걸 보니 채식을 좋아하시네요.”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런 걸까?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소와 양도 예비해 주었다. 그러더니 “알겠어요. 하나님은 양고기와 소고기를 즐기시는군요.”라고 말한다. 이런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일까? 겉면의 이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해야 한다고 늘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주재하고 있을까? 체험한 적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지난번에 위험한 일을 겪은 적이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은 다 죽었을 거야.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나도 목숨을 잃었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안 죽는 사람이 없거든.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안 죽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주재라는 걸 알게 됐어.”라고 말한다. 이런 일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장 평범한 이 한 가지 일에서 창조주의 무엇을 보았느냐? 창조주의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사람에 대한 창조주의 보호를 체험한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보호하는 데 어려움이 있느냐? (없습니다.)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체험했습니다.) 어떻게 체험한 것이냐? 여기에는 세부적인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을 통해 창조주가 그런 일을 아주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세부적인 것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세부적인 것이 있느냐? “저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차 사고 난 적이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운전했는데 차 속도가 엄청 빠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차는 멈춰지지 않았고 부딪혀서 박살났는데 신기하게 저는 다친 데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몇 년 지나서야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기묘하신 주재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차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하나님 집에 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체득에는 일부 감성적인 인식이 있는데 제대로 말하지 못할 때가 있다. 방금 형제가 말한 그 일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손은 살아 있는 것들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죽은 것들도 주관한다. 차를 제어하지 못해 차는 충돌로 박살날 수 있어도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하나님이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죽지 않고 무사하다. 차는 사람보다 더 단단하지 않으냐? 그런데 왜 차는 박살나고 사람은 다친 데가 없겠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생각으로 지휘했기 때문이다. ‘차는 박살 내더라도 저 사람은 건드리면 안 돼.’라고 하면 그 사람은 무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손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손은 보지 못했지만, 그 일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다. 사람은 다친 데가 없고 차만 박살났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중에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생명이다. 이 일에서 창조주의 어느 방면의 성품과 실질을 보았느냐? 가끔 보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만 별로 열정도 없고 별로 적극적이지도 않다. 마음으로 이 길이 맞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건성으로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을 때, 누가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 손에 있다. 이 일에서 하나님의 권병을 볼 수 있지 않느냐? 사탄이 아무 때나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뜻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것이 절대 너를 건드릴 수 없고 그 어떤 것이든 너의 목숨을 가져갈 수 없다. 너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이런 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믿음이 어느 정도로 작으냐? 어떤 사람은 ‘내가 벌써 50대에 접어들었구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고 있고, 아들딸이 곁에 있지 않구나.’라고 생각한다. 노후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젊었을 때는 이런 것을 생각지도 않았지만 나이가 드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말을 듣지 않고 골골하기만 하니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게 되고, 가끔은 작은 빨래 하나 할 힘도 없고 일상 생활에 다른 사람의 손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자연히 노후를 생각하게 된다. 노후를 생각하면 누굴 떠올리느냐? (자녀와 가족을 떠올립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안 하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한쪽에 제쳐 놓고 “당신은 도움이 안 되니 저리 좀 가세요. 내겐 아들딸이 있다고요.”라고 하면서 그쪽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면 사람의 실제 분량이 드러난 것이다. 사람은 도대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건강이 안 좋으면 본분도 할 수 없고 힘 쓰는 일도 할 수 없잖아. 그러니 하나님 집에 있으면서 형제자매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되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시중들게 하거나 귀찮게 하는 건 안 좋아. 그러면 체면이 안 서지. 난 남에게 지면 안 되고 체면도 따지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건 딱 질색인데 어떡하지? 몸을 가누지 못할 상태가 되기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출로를 생각해 놓자.’ 그러면서 아들딸에게 미리 말한다. “엄마 아직 살아 있다는 거 잊지 마. 그리고 아빠도 살아 있으니 방 한 칸만 비워 놓고 있어. 아빠 엄마가 몸을 가누지 못할 때 모실 거지?” 그러자 자녀들이 “그럼요! 왜 모시지 않겠어요? 돌아오세요!”라고 말한다. 그제야 마음을 놓는다. 그리고 ‘늙으면 그래도 아들딸을 의지하는 게 맞아. 형제자매들에게 의지하면 미안하잖아. 형제자매들은 괜찮다고 해도 내가 미안해서 안 되지. 바지에 오줌이라도 싸면 어쩌겠어? 형제자매들에게 치워 달라고 하는 건 그렇잖아? 그건 아니야. 똥을 이부자리에 싸 버리면 또 어떡하고? 그래도 아들딸을 의지하는 게 맞아. 남은 싫어해도 아들딸은 내 혈육이니까 싫어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세부적인 문제들까지 다 생각해 놓는다. 이런 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건 무슨 문제일까?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맞습니다.) 몸이 튼튼했을 때는, 하나님이 “오너라, 내 앞에 와서 피조물의 본분을 하거라.”라고 부르니, “알겠습니다. 문제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바로 나왔다. 나온 지 몇 년 지난 후 몸이 따라 주지 않자 ‘조짐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조심하기 시작하는데, 걸어도 기운이 딸리고 일해도 힘이 벅차니 자연히 노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아느냐?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있느냐?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찌 된 일이냐?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이다. 자그마한 일이 임해도 사람은 스스로 방법을 생각한다. 누군가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아요?”라고 물으면, “하나님은 큰일을 주재하시니 작은 일은 하나님께 의지 안 해도 돼요. 하나님은 작은 일을 상관하시지도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그에게 그 정도의 믿음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분량과 사람의 인성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각 방면의 믿음을 다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믿음을 원하겠느냐? 원치 않는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저를 데리고 나온 이상, 저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해요. 저의 생로병사는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까 하나님이 책임져야 하는 거예요. 일상생활을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셔야지 안 해 주시면 안 돼요. 저에게 신경을 조금이라도 써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만 같아 제가 힘들어져요.”라고 한다. 그 사람의 생각이 바르냐? (바르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도 옳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 것이냐? 우선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깨달으면 사람 안에 길이 있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 것이냐? 그런 일들을 어떻게 대해야 옳은 것이냐? 사람은 어떤 사상 관점을 갖춰야 하느냐?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니 잘못된 일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도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일이 닥치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느냐?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건 확실해. 하지만 이 일에서는 별로 공의롭게 하시지 않은 것 같아.” 그럼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말하기 곤란하다. 그렇지 않으냐? 말하기 곤란해졌다면 어떤 문제에 직면한 것이냐? 하나님께 별도의 요구를 할 것인데, 원망하면서 하나님이 너를 대신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게 될 것이다. 너는 요구가 있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복하려는 마음이 없다. 사람의 믿음이 드러났다, 그렇지?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 왜 문제라고 하겠느냐? 사람의 사상 관점이 도리를 기반으로 세워졌든, 아니면 인위적인 선의를 기반으로 세워졌든, 사람은 사실이 임했을 때 하나님과 논쟁하고 갈등이 있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께 요구하며 심지어 거역하고 반항하고 배반하게 되는데, 더 나아가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패괴 성정인데, 이런 것은 다 문제로 된다. 이런 문제는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냐? 문제라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만일 해결하지 않고 속에 두면 언젠가는 병이 된다. 병이라면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다. 어떤 약으로 치료하면 될까?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방금 말한 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을까? 얼마든지 있다. 너희들은 평소에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았느냐? 이런 문제가 임했을 때 어떻게 해결하였느냐? 눈 꼭 감고 “사라져라.”라고 말하면 사라질까? 또 나온다! 그리고 “기도하니 해결됐어요.”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결하는 것이 옳으냐?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 병은 해결되지 않았고 뿌리가 남아 있다! 그런 일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우선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먹고 마시고, 그다음 그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정형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비춰 보아야 한다. 가족을 사랑해서인지, 가족이 그리워서인지, 가족을 떠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 없거나 그들에 대한 정에 얽매어 내려놓을 수 없는 건지, 이런 것이 어느 방면의 정형이고 어느 방면의 문제인지 깨달아야 한다. 어느 방면의 문제이면 그 방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면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먹고 마시고 그 방면에 관한 설교 교통을 찾아 듣고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해결 못 할 문제가 있느냐?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해결하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발음하기는 좀 어렵지만, 그것은 실제 체험과 실제적인 일과 관계가 있다. 사람에게 어려움이 임할 때, 특히 인생의 큰일에서 육체적인 그런 고통은 제외하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의 애로사항과 고통, 정신적인 스트레스, 정신적인 고통, 다시 말해 너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고통스러운 어떤 일이 임했을 때, 네가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를 찾아도 누가 너에게 해결해 줄 수 있느냐?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냐? 엄마일 수도 있고 아버지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형제자매나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그 사람과 너의 관계가 더없이 좋다고 하자. 그에게 네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괴롭다고 말하면 그가 그것을 다 들어주고 쓰레기통이 되어 준다. “그래, 다 털어놔. 나한테는 얼마든지 다 털어놔도 돼.”라고 하면서 안아 주며 “괜찮아, 괴로워하지마. 괜찮아질 거야. 다 좋아질 거야. 자, 이젠 그만 울고 눈물 닦아. 물 좀 줄까?”라고 하면서 다독여 준다. 너의 문제는 과연 해결됐을까? 해결되지 않았다. 마음의 고통은 칼로 에이는 듯 아파 지워지지 않는데, 그 일이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남겨진다. 그것이 사람에게는 병이 된다. 하지만 만약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을 배워 하나님 앞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고 실행의 길을 찾는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네.)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너희에게는 대부분의 경우 빈말이 된다. “할 수 있어요. 하고도 남지요. 할 수 있다고 믿어요.”라고 하는 것은 다 소망이나 상상이나 염원에서 그칠 뿐,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냐? (네, 그렇습니다.) 너의 심령에 어떤 일이 임하든, 즉 인생의 방향과 목표, 선택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너를 도와 길을 가리켜 줄 수 없다. 아무도 너를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누가 도와줄 수 있느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너를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확실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너를 도와주느냐?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도록 깨우쳐 주십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는 것도 한 가지 방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는 것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다 이런 체험이 있다. 또 있느냐? (형제자매들의 교통에서도 도움받게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행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하나님이 형제자매들을 배치하여 너에게 한 마디를 하게 하거나 너와 함께 교통하게 하면 너는 거기에서 깨닫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이런 것은 사람이 흔히 보고 흔히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 방식이다. 좀 더 은밀한 것은 없느냐? 비록 경험한 적은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란 걸 의식하지 못한 것은 없느냐? (하나님께서 때로는 환경을 배치하시고, 때로는 환경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인데, 아주 은밀한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행사와 관련된다.

사람들이 지금 체험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자주 설교를 듣는 과정에 ‘나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는데, 잘 해결되지 않던 거야. 내가 이쪽으로 진입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갑자기 깨우침이 있다. 형제자매들의 교통을 들으면서도 ‘저렇게 체험하는구나. 나도 저렇게 체험해 봐야지.’라고 하는데 길을 찾게 된 것이다. 교회 인솔자의 교통이나 설교를 듣고도 길을 좀 찾게 된다. 이런 것은 다 자그마한 빛 비춤이지만 역시 하나님의 주재이고 하나님의 배치이고 하나님의 안배인 것이다. 이런 것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일부 큰 문제에서는 네가 누구를 찾아 해결하려고 해도 아무도 너에게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겉으로 좀 권고하면서 원칙적인 말이나 그럴듯한 도리로 너를 위로해 주며 너의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해 준다. 하지만 실제로는 너에게 길을 알려 주지 못하는데, 그런 경우가 많지 않으냐? (네, 그렇습니다.) 그럴 땐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아무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도로 하나님이 하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게 기도로 구할 때, 너는 하나님이 이 일을 꼭 할 수 있다고, 틀림없이 할 수 있다고, 절대적으로 할 수 있다고 진정 믿을 수 있느냐? 그런 믿음이 있느냐? 기도할 때, 20%의 믿음으로 시험 삼아 기도하느냐, 아니면 30% 정도의 믿음으로 하느냐, 아니면 50% 혹은 120%의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냐? 아니면 아예 의심하거나 추측하고 또는 시험 삼아 해 보자는 생각을 갖고 기도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형식이나 지키면서 기도만 하면 그만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는 거고, 안 하셔도 강요할 수는 없잖아.’라고 한다. 어느 정형이냐? (마지막 그 정형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형식을 지킨다. 형식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문제를 설명하느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큰 일을 하나님이 해결하실 수 있을까? 그래도 사람을 통해 해결해야지. 하나님은 틀림없이 해결할 수 없을 거야. 더군다나 하나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개인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주시겠어? 하늘과 땅, 우주 만물에 하실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언제 이런 일까지 신경 쓰시겠어?’ 비록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그리 신실하지 않고 믿음직하지 않다고 생각돼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 이런 일에서 하나님 앞에 와 기도하고 구하는 그 믿음이 얼마나 되든지 하나님은 들을까? (듣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조건 들을 수 있다고 아주 확신해야 하고 100%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할까? “그건 하나님이 해 주시는지 봐야죠.” 봐라, 순식간에 사람의 생각이 변하고 있다. 그러면 옳지 않다. 네가 하나님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은 너의 간구를 들을 것이다. 너의 간구가 정당하고 긍정적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고 하나님의 경영을 위하고 또 자신의 생명 진입을 위하고 진리를 깨닫고 창조주를 알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들을 것이다. 하나님이 들었다면 바로 하겠느냐?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바로 하지 않는다. 왜 바로 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참된 믿음을 검증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때로는 네가 진심으로 간구하는지를 검증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지켜보고, 검증하고, 검사하고, 시련한다. 이것은 한 방면이다. 또 시기가 무르익지 않고,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아 때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지 않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 안에 어떤 것들이 생기느냐?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계시는 거야?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면 왜 안 해 주시지? 게으름 피우시는 거야, 아니면 할 수 없으신 거야?’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의심하는 것은 옳으냐? 일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의심이 생겨나는 근원은 무엇이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 방식에 참된 인식이 없고, 무턱대고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만 요구한다. 사람은 머릿속에 구도를 상상해 놓고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 그런 구도가 맞느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관념을 반격하려고 하는 것이니, 너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또 기다리라고 하니 사람은 “왜 자꾸 저보고 참으라고 하세요? 왜 자꾸 저보고 기다리라고 하세요? 당신은 왜 기다리지 않으세요?”라고 말한다. 너는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너의 분량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2천년 전, 예수님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한다. 그래서 너의 분량(원문: 工程)을 검증하고, 너를 시련하고, 네게 진리를 깨닫게 해 주고, 너의 생명이 자랄 수 있게 하는 것들을 포함해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은 다 순서 있게 하나씩 진행해 나가고 있다. 하나님은 급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급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들의 분량이 아직 그 정도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해해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환경을 배치할 때, 즉 너의 주변에 인ㆍ사ㆍ물을 배정하거나 인ㆍ사ㆍ물을 일으키는 데는 다 때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 늘 그만두고 싶어 하고, 늘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볼까? 그것이 믿음인지 열정인지를 본다. 그 사람이 만약 열정으로 하나님께 “하나님, 저에게 환경을 배정하여 사표를 쓸 수 있게 해 주세요. 환경을 일으켜 이 일자리에서 얼른 벗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하나님이 할까? (안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행하지 않느냐?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분량이 작아서 오늘 사표 쓰고 내일 후회할 것이 뻔한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너에게 결코 감동을 주지 않고 네가 일에 몰두하고 계속 일하도록 놔둔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ㆍ사ㆍ물을 배정하여 너에게 이상(異象) 방면, 교회 생활 방면에 관한 많은 진리를 깨닫게 하고, 또 환경과 가정 방면에 관한 일들을 다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하여 네가 일을 그만두는 것을 위해 예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너의 분량은 하루하루 자라나게 된다. 이방인의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간파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도 기초가 있게 되면서 시기가 점차 무르익어 간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은 예비하고 있고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행하고 있고 예비하고 있느냐? 네가 하나님께 간구한 그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매우 고심하지 않느냐? 하나님은 매우 고심하지만 사람은 늘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일을 쉽게 내려놓는데 왜 나만 사표를 못 쓰게 하시지? 하나님은 편파적이고 공의롭지 않아.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아. 항의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이 생기지 않겠느냐? 사람은 순복할 줄 모르고 공과를 배울 줄 모른다. 하나님은 이런 일과 이런 환경을 예비하는 동안, 너에게 진리를 장비하게 하는 한편 또 너에게 그런 인ㆍ사ㆍ물을 꿰뚫어 보게 하여 주변의 이런 일을 잘 수습하고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믿음을 갖추게 한다. 그러다가 언젠가 네가 사표를 내게 될 때, 주변의 그런 인ㆍ사ㆍ물을 스스로 대응할 수 있는 분량이 있게 되어 마음이 변하거나 후회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너라는 어린 생명을 땅에 심은 후 비료를 주고 물을 주어 강풍이 불기 전에 튼실히 키운 다음, 강풍이 오게 하는 것이다. 묘목이 튼실히 자라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강풍을 오게 하겠느냐? 오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란 묘목이 아직 어려서 감당하지 못하니 강풍을 지배하여 미리 오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네가 각 방면의 조건을 다 갖추게 되어 분량도 있고, 믿음도 있고, 사람도 차분해져 막무가내로 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본분을 함에 있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도 알게 될 때,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난다. 회사의 책임자가 “요즘 회사 경기가 좋지 않아 월급도 제대로 못 주게 돼서 인력 감원을 해야 합니다. 권고사직 위로금으로 13개월치 월급을 드릴 테니 앞으로의 길은 스스로 해결하세요.”라고 말한다. 그 말에 너는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전에 사표 쓰려고 할 때는 회사가 부도날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사표 쓰려고 하니 회사가 부도날 정도까지 됐구나. 연금은 물 건너갔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도 해 보고 기도도 하면서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건 하나님이 행하신 거잖아.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기도하고 구했다고!’라고 깨닫는다. 때가 되니 좋은 일이 임한 것이다. 그때 네가 “후회되네요. 일을 그만두지 않을래요.”라고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된다. 하나님은 네가 필요하기에 너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다. 네가 “난 여기에 눌러앉아 가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면 되겠느냐? 안 된다. 하나님이 너를 필요로 할 때, 너는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그 모든 것을 예비해 준 것은 무엇을 위해서냐? 너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고, 너의 간절한 기도를 이루기 위해서이고, 또한 너의 본분을 위해서이다. 너에게는 사명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이냐!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다름없이 많은 사역을 하였고, 많은 대가를 치렀으며, 많은 고심을 쏟았는데, 틀린 것이 전혀 없다. 틀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이냐? 컴퓨터 부품의 오차보다 어떨까? 그것보다 더 정밀하다! 손목시계는 정밀한 기기지?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작동하면서 바늘 3개를 움직여 돌아가는 정밀한 기기다. 사람의 육안으로 작업할 수 없어 도수 높은 확대경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정밀하게 일하지 않겠느냐? 더없이 정밀하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창조주는 인류가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정도보다 훨씬 전능하고 훨씬 지혜롭다는 것이다. 너는 상상으로 창조주가 도대체 어떻게 각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지 알 수 있느냐? (없습니다.) 상상이 안 되는 것은 사람의 부족한 부분이지만 인식할 수 있는 날이 있다.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너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와서 간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하나님과 마주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워 늘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제가 있고 정상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너를 떠나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저버리지도, 떠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어느새 창조주의 뜻과 행사를 깨달을 수 있고, 창조주의 성품과 실질을 인식할 수 있고, 그의 마음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직하는 일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였느냐? 그 과정을 네가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당사자인 네가 보지는 못했어도 사실 체험은 다 하였다. 네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세심하여 늘 하나님 앞에 온다면,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너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줄 것이다. 다만 사람이 세심하지 못하여 그런 일을 다 소홀히 하고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하나님이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 그런 일들을 그렇게 살며시 흘려보낸 것이다. 지나간 시간들을 그런 식으로 헛되이 보내지 않았느냐? 지금의 이런 체험 방식대로 혹은 앞으로 더 좋은 체험 방식을 찾아 세심하게 체험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 안정할 수 있다면, 너희의 정형은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분량도 달라질 것인데, 하루하루 자라날 것이다.

지금 너희의 가장 큰 바람은 무엇이냐? 아직도 자녀가 출세하는 것이냐? 아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앞으로는 가문을 빛내길 바라느냐? 어디에 데리고 나가도 “우리 아들이에요. 키도 180이고, 잘생겼죠! 얘는 우리 며느리예요. 연구원이고 박사예요!”라고 자랑할 수 있기를 바라느냐? (아닙니다.) 이제는 마음에 그런 것들을 별로 생각지 않게 되었고 거의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할머니가 되어 “우리 손자예요. 나 닮지 않았어요?”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닮았으면 어쩌겠어요? 무슨 소용 있어요? 손자가 할머니를 대신할 수 있겠어요?”라고 할 것이다. 대신하지 못한다. 설령 손자가 노후를 책임져 준다고 한들 운명과 결말까지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해결해 주지 못한다. 다시 말해,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든,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든, 아무도 네 인생의 중대한 일들, 산전 수전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하루하루, 매 순간,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너를 대신해 겪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것을 해결해 줄 사람도 아무도 없으며, 넘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사람도 아무도 없다. 사람의 유일한 출로는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이고,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근본이다. 지금 너희는 이곳에서 마음을 잘 안정시키고, 어떤 일에도 방해나 영향을 받지 말라. 물론 육체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 형식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그 형식도 아주 중요하다. 환경으로 보면, 구석구석 사악한 조류가 스며들어 있는 이 시대에,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가기에 적합하고 조용한 환경이 있다는 것은 정말 유익하고,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괴로울 때면 지금은 큰 이득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큰 이득이라고 하니 다들 좋아하는데, 평정심을 찾은 것 같다. 항상 ‘난 남들이 얻지 못한 것을 얻었어. 다른 사람이 못 챙기는 이득을 내가 챙겼어.’라는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 한다. 과연 생각으로만 그런 것일까? 사실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그렇다. 하나님이 이토록 모든 심혈을 기울여 빈틈없이 너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이상 하나님은 너의 운명과 너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람을 털끝 하나도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이끌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사랑도 이런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지 않으면, 이런 차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영원히 체득하지도 못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살고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깨닫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고심을 깨달아야만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감사하면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 집에서 충성으로 본분을 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복을 누리는 것이다. 어떤 큰 복을 누린 것이냐? 지금의 조류를 보아라. 여자는 늘 늙는 걸 두려워한다. 늙으면 자신을 이뻐하는 사람도 없고 자녀들도 얕보기 때문이다. 남자는 늘 능력이 안 될까 봐 걱정을 하는데, 능력이 없으면 아내도 눈에 차 하지 않고 자녀도 얕보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어 보이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지금 시대는 다 아버지를 비교한다. 너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비교한다면 네가 남을 이길 수 있겠느냐? 이기지 못한다. 그것이 너의 약점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겨 내지 못한다. 너는 힘들어 죽어야 되고, 자녀에게 피가 마를 때까지 털려야 된다. 그러고도 자식에게 빚졌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은 그 정도로 우매하고 가련하다. 사람의 이러저러한 걱정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일부는 자신의 패괴 성정 때문에 생긴 것이고, 일부는 사악한 조류 속에서 생긴 것인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바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부지중에 사탄의 올무에서 살게 되고 스스로 벗어날 힘이 없다 보니 ‘다른 사람도 다 이렇게 사니까 나도 이렇게 사는 거지.’라고 운명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어느새 방향을 잃고 자아를 잃어 버린다. 어쨌든,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끝없는 고해에서 살게 된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지 않으면 고통스럽지 않으냐? 그 고통은 더 크다. 좋은 귀숙은 추구하고 싶고, 그런데 어떻게 본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육체의 짐은 내려놓지 못하겠고, 앞날과 운명도 내려놓지 못하겠고, 게다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늘 갖고 있다. 자신의 패괴 성정을 증오하고,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정도 증오하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벗어 버릴지는 모르겠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어떻게 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고통스럽지 않으냐? 정말 고통스럽다!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매일 발견하는 문제를 제때에 해결해야 하고, 마음이 섬세해야 하고, 마음을 안정시킬 줄 알아야 하며, 교만하지 말고 경솔하지 말아야 한다. 안정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진입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에 없어서는 절대 안 될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늘 형식이나 겉면의 행실, 행위, 구호, 의식에만 치우치지 말라. 항상 그런 것에 치우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이면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받지 못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인생의 바른길에 들어설 수 있겠느냐? 인생의 바른길에 들어서지 못하면, 구원받을 가망이 있겠느냐? 이런 것은 하나하나 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너희는 아직도 노후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하느냐? 늙어서 못생겨질 모습 때문에 걱정되느냐? 못생겨도 괜찮다. 하나님은 싫어하지 않는다. 늙으면 온몸이 다 아플까 봐 걱정되느냐? 늙으면 얼굴에 온통 부스럼이 나고, 검버섯이 생길까 봐 걱정되느냐? 죽어도 묻어 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그런 일도 중요하다. 누구나 직면해야 하고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다. 어떤 관점으로 대해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고 정확하며 피조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는 것입니다.) 가끔씩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에 맡긴다고 하지만 흐리멍덩한 정형과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분명하지도 않고, 정확한 실행 방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이런 정확한 실행 방향이 없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면 되죠.”라고 하다가도 일이 닥칠 때는 그 말이 무용지물로 되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지금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되느냐? 삶 속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직면하게 되고, 하루하루의 삶, 하루하루 속에서 해야 할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다 실제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어, 만터우(찐빵) 크기를 어느 정도로 빚어야 사람들이 먹기에 적당할지, 이런 문제도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냐? 만터우를 쪘는데 형제자매들이 별로 먹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냐? 너는 ‘형제자매들이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별로 먹지 않았네? 내가 찐 만터우가 맛없었나? 난 맛있던데, 이게 어떻게 맛없지? 편식하는구나! 이것도 먹기 싫어하면 난 못 맞춰 주겠어. 내일부터 만터우 안 쪄!’라고 한다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러한 것은 다 문제다. 그러므로 다 해결해야 한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정이 있다. 어떤 사람은 “패괴 성정은 해결하기 쉬워요. 패괴가 있어도 꺼내지 않고 의견이 있어도 꾹 참고 말하지 않으면 돼요.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지도 말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도 주지 않으면 돼요.”라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지 못한다. 그것은 정말 현실적인 문제이다. 사람은 일을 할 때마다 속에 정형이 있다. 그 정형이 옳은지, 진리에 부합되는지는 사람이 성찰하고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제때에 바로잡고 반성하고 인식하고, 그다음 진리 실행으로 가야 한다. 진리에 따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찐 만터우가 퍽퍽하고 시큼해서 맛없었어? 그럼 뭘 먹겠다는 거야? 빠오즈? 내가 날마다 빠오즈를 해 줘야겠어? 먹든지 말든지. 안 먹으면 앞으로 만터우도 안 쪄 줄 거야. 내일부터 그냥 굶어!’ 그런 것은 어떤 정형이냐? 본분에 충성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오늘 찐 만터우가 별로 맛없나 봐. 다들 잘 안 먹었어. 다들 힘들게 일하는데, 어떡하지? 뭘 먹고 싶은지 물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물어봤더니 다들 “뭐든 좋아요.”라고 한다. 그래도 ‘아니야. 참답게 대해야지. 내 본분이 밥하는 건데. 형제자매들의 입맛에 잘 맞게 해야 돼. 힘 쓰는 일이든 아니든 형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야. 나는 본분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 앞에서 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냐? 마음이 올바르다. 그런 사람은 일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사람 앞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다. 본분을 하면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고 일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 사람이 일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진리에 따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든 진리에 따라 실행하면 틀림없다. 그러면 원칙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 갈수록 본분을 잘할 수 있지 않겠느냐? 어느 날 누군가 “왜 맨날 국수만 해요? 밥은 안 해 줘요?”라고 트집을 잡아도 너는 “그러게요. 제가 세심하지 못해서 그렇게 됐네요. 며칠째 국수를 먹었으니, 그럼 오늘은 밥을 해 줄게요.”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한 일이 아니냐?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반대로 ‘간단한 일이라고 해도 난 생각 못했어. 어쩔 건데! 밥 먹고 싶다고? 웃기고 있네. 난 꼭 국수만 해 줄 거야. 너를 꺾을 거야. 너 하나 못 꺾으면 성을 바꾼다! 밥 먹고 싶다고 했지? “국수든 만터우든 다 돼요. 밥 안 먹어도 돼요.”라는 말을 뱉을 때까지 국수만 해 줄 거야. 그렇게 해서 나에게 두 손 들고 내 말을 듣게 만들 거야. 내 손안에 있으면 내가 하는 대로 따라야 하고 내가 결정한 대로 따라야지. 국자가 내 손에 있으니 국수 떠 주면 국수 먹고, 밥 떠 주면 밥 먹어야지, 무슨 타령이 그렇게 많아? 본분하러 와 가지고 무슨 먹타령이야? 여기선 그런 거 안 먹혀!’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성정이냐? 그런 사람은 악독하다. 그것은 패괴 성정이다. 사랑이 없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인성이 있느냐? 인성이 없다. 본분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왜 본분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진리 원칙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냐? 닥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냐?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아예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일들이지만 사람의 패괴 성정은 항상 유로되고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적인 문제이고, 해결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문제이다.

본분하는 과정에서 진리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을 하면서 사람을 배려하고 관용하며, 사람들을 인내해 주고 포용해 주며, 그와 동시에 본인도 원칙 있게 일을 할 수 있으면 평안과 기쁨이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왜 진리의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하겠느냐? 누구를 위해 본분을 하는 것이냐? 자신의 본분은 창조주의 앞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본분은 바로 그렇게 온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았다면, 너에게 본분이 있겠느냐? 그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여자는 애 낳고 남편 시중을 들 것이고, 남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할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 경영 계획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사람에게는 본분도 없다. 때문에 본분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보아라, 본분을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고 중요한 일이다! 몇 천년 동안 인류가 얻지 못했던 기회를 오늘날 너희들이 얻은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놓치지 말라! 놓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 기회를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그 일을 소홀히 대하지 말고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그저 힘을 쓰는 거잖아. 힘만 쓰면 되지 무슨 규정이 그렇게 많아?’라고 생각하지 말라. 절대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힘 쓰는 일은 패괴 성정을 유로하지 않느냐? 유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람에게 패괴 성정이 있는 한 어디서나 유로된다. 어떤 사람은 꿈에서도 “거기 서. 안 서면 죽여 버린다!”라고 하는데, 꿈에서도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사람을 억누르고 괴롭히려고 할 정도인데, 깨어났을 때는 더 악독하다. 그런 일들은 다 현실적인 문제다. 그래서 본분하는 기간에, 본분을 통해 마음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안정시키고 마음을 하나님께 보여 주어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가 너의 주변에 배치한 모든 인ㆍ사ㆍ물과 환경에서 창조주가 너의 운명을 어떻게 지배하고 너를 어떻게 이끌어 주는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이렇게 이끌어 주고 다른 사람은 또 저렇게 이끌어 준다. 그러므로 다 같이 모여서 교통하면 풍부해지는 것이다. 네가 늘 입이 뾰로통해 가지고 ‘내 눈에 거슬려서 너하고 얘기하기 싫어.’라고 한다면 되겠느냐? 형제자매 사이에 거리를 두지 말고 항상 모여서 교통해야 한다. 교통할수록 분명하게 깨닫게 되고 교통할수록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많이 얻을수록 사람의 정형도 점점 좋아진다. 네가 못생겨지거나, 아프거나, 절름발이가 되거나, 늙거나, 쓸모가 없게 되어도 하나님은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의 패괴 성정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싫어하지 않을까?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이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과 심지와 소망, 그리고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는 마음,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다. 네가 그런 것을 갖추면 하나님은 영원히 너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싫어하지 않을 것이란 무슨 뜻이냐? 그저 “난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으로 끝일까? 하나님은 너를 포기하지 않고, 너를 구원할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지 않고 너를 구원한다는데, 너에게는 크나큰 경사가 아니겠느냐? 그것은 크나큰 희소식이고, 너무도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달았으면, 그런 것들을 힘써 추구해 얻어야 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유용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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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④효력(效力): 힘쓰는 것을 뜻함.

⑤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⑥발음하기는 좀 어렵지만: 원문(拗口), 중국어로 앞말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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