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103편 피조물의 본분을 잘해야 살아도 가치 있다

금방 찬양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그분>을 불렀는데, 어떤 느낌이 드느냐? 뭐라도 깨달은 것이 있느냐? 누구든 살다 보면 많은 고생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원인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고생을 하게 되는 근원이 무엇인지, 도대체 가치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사람이 없으며, 그런 삶의 방식이 맞는 것인지 생각해 보는 사람도 없다. 어린 시절에는 잘 입고 잘 먹을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좀 더 자라면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고 나중에 성공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재산을 쌓아 놓고 이 세상에서 한자리해 명리(名利)를 얻고, 권력도 얻어서 아무도 괴롭히지 못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위의 사람으로 되길 바라면서 절대 사람 밑의 사람, 천박한 사람이나 평민이 되려고 하지 않으며, 관직에 올라 사람을 다스리고 통제하며 타인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다 얻고 나면 앞으로 자신의 가문이 망하지 않고 후손들이 끊기지 않고 대를 이어 갈 뿐만 아니라 흥하고 번창하기를 바란다. 사람이 이렇게 시기마다 걸어온 것은 다 무엇을 위해서이냐? 사람은 왜 이렇게 생각하고 또 왜 이렇게 사느냐? 사람에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길이 없다란 무엇일까? 바로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좀 아득해 보인다. 그렇지 않으냐? 다시 말해, 사람은 일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람은 어떻게 왔다가, 또 어떻게 가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것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모르면서도 왜 지금까지 살아왔을까? 사람마다 왜 계속 앞을 향해 달리고 죽기 전까지 살다가 가는 걸까? 그것은 사람마다 소망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10대에는 10대의 소망을 가지고 있고, 20대에는 20대의 소망을 가지고 있고, 30대에는 또 30대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뛰어가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사람은 조금씩 늙어가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다 간다. 그렇게 사는 게 한 사람뿐이냐? 아니다. 사람마다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걸까? 이 세상에서 그런 소망으로 살지 않으면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존할 수가 없고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은 돈이 없을 때는 벌고 싶고, 적게 벌 때는 많이 벌고 싶고, 많이 벌게 되면 더욱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리고 벌 만큼 벌어서 유명세를 타면 또 그 재산을 지키고 싶어 자녀가 그것을 계속 이어 가 주기를 바란다. 죽기 전까지도 ‘이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자식들이 잘 지킬 수 있을까? 가산을 하루아침에 날리지는 않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라는 염려를 하는데, 다들 여한과 의혹과 아쉬움을 안고 떠나간다.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을 자세히 보며 사람은 ‘사람마다 그 일생이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유한 사람도 있으며, 평민도 있고 엘리트도 있으며, 각 계층의 사람들이 있지만, 사는 것은 매한가지이고, 다 한 가지 방식이구나. 다들 소망에 따라 가는 곳마다 겨루면서 가까스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광경을 보게 되면 사람은 ‘사람들은 왜 다 이렇게 살아갈까? 또 다른 길은 없을까? 선택의 여지는 없는 걸까? 사람은 왜 살아야 할까? 죽기 위해 살아야 한단 말인가? 죽어서는 또 어디로 가게 될까? 대대로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걸까? 이렇게 많은데도 다르게 사는 사람은 없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을 보고, 사극에 나오는 사람들을 봐도, 다른 삶의 방식은 없다. 근원은 무엇일까? 인류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한평생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 모든 것을 누가 주관하고 누가 주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한 세대 또 한 세대가 왔다가 한 세대 또 한 세대가 떠나가는데, 한 세대 한 세대씩 다 그렇게 살다가 또 다 그렇게 죽게 된다.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오고 같은 방식으로 가지만, 길은 찾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다 같은데, 모두가 이 문제 하나를 탐구하고 훗날의 인류는 어떠할지 궁금해하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주관하는 이가 누군지,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이가 계시는지, 그분이 존재하시는지 그 답을 모르고 있다. 사람은 그렇게 속절없이 살아가고 있다. 1년 12달, 1년 365일을 다 그렇게 살고 있고, 다 그렇게 하루하루 바라고 또 버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만약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길이 좀 생기지 않겠느냐?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 소망에 의지해서 살 필요도, 어떤 염원이나 호기심으로 살 필요도 없고, 그런 것들로 버티면서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인간이 왜 사는지, 또 왜 죽어야 하는지, 누가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지, 우주 만물 속에 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는 주재자 그분이 도대체 있는지, 사람이 그 답을 얻게 될 때면, 행할 길이 생기지 않겠느냐?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면 염원에 따라 소망에 따라 살지 않게 되고, 그러면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지 않을 것이고, 왜 살아야 하고 왜 또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 해탈되지 않겠느냐? 해탈된 사람은 자유를 얻고, 해방을 받는다.

이 찬양에서 너희는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하겠느냐? ‘고대인들도 집집마다 현대인들과 별반 차이 없이 그렇게 살았네! 고대인들은 현대화 생활 환경도, 현대화 조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 치고 현대인들은 그런 것을 다 갖추고도 여전히 힘들게 살고 있어! 그러고 보니 삶이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것은 어떤 길을 가느냐에 달렸구나! 인류가 왜 살고 왜 죽는지, 그리고 이 세상 만물의 주재자, 즉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이가 대체 누구인지, 어디에 계신지, 그분이 인류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을 다 깨닫는다면, 조물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물주께 어떻게 경배하고 순복해야 하는지 알게 되겠구나, 그렇다면 인류는 이처럼 괴롭고 고통스럽게 살 필요가 없겠구나.’라는 것이다. 삶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주 관건인데, 사람은 결론적으로 이런 도리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그 일생이 행복할지 슬플지가 결정된다. 사람은 이런 말을 듣고 최종에 ‘인류는 다 이런 법칙 속에서 살아가고 있구나.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그런 방식을 바꾸지 못했어. 그러면 이 인류 가운데는 주재자, 즉 전설 속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지 않을까? 만약 그 하나님, 곧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찾는다면 인류는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인류의 뿌리를 찾는 게 중요한데, 뿌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뿌리를 찾는다면 사람은 아마 새로운 세상을 살지도 몰라. 하지만 그 뿌리를 찾지 못한다면 인류는 변함없이 이런 삶의 방식을 지속하게 될 거야. 그러면 인류의 행복은 여전히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겠구나.’라는 느낌이 있게 될 것이다. 네가 이 인류가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들 또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런 무리 속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만 나쁘게 되고 너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생각한다고 해서 생각처럼 될까? 그렇게 안 된다. 네게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녀를 위해 살고 있을 때, 네가 ‘난 자녀를 위해 살고 싶지 않아.’라고 말은 할 수 있어도 그렇게 되겠느냐? 다른 사람이 돈을 위해, 명리를 위해 열심히 살 때, 네가 ‘난 그럴 필요 없어.’라고 말은 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네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너의 원대로 되지 않는다! 근원은 무엇일까? 말하자면 바로 사람 마음에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적 지주는 어떤 것이냐? 사람은 정신적 지주를 어디에 두느냐? 가족의 화목, 결혼의 행복, 또 물질적 향락, 돈, 명리, 지위, 정(情), 사업, 그리고 다음 세대, 다음 세대의 행복 등, 다 그런 일들에 둔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정도로 두고 있는 정신적 지주는 사실, 다 그런 일들밖에 없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 즉 다음 세대에 걸고, 자녀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사업과 혼인, 사회에서 차지할 자신의 자리와 명리에 둔다. 그러므로 생겨나는 삶의 방식은 다 같은 것이다. 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고 사탄의 통제하에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위해, 이익을 위해,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자신의 사업, 결혼, 가정 그리고 다음 세대와 육체의 향락 등, 그 모든 것들을 위해 분투하고 바쁘게 보내는 것이다. 그런 길이 바른길이냐?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신나게 바쁘게 보내고, 사업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더없이 행복한 가정에, 대단한 가문에, 아무리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들 바른길에 들어설 수 있느냐? 명리를 좇고, 세상을 좇고, 업적을 추구한다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라는 이 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렇지?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든, 어떤 길을 가든,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길은 어떠냐? 그것은 바른길이 아니고, 정도(正道)가 아니다. 그런 것은 어떤 길이냐? 그릇된 길이고 사악한 길이며 타락의 길이다. 그렇지? 네가 정신적 지주를 통해 만족을 얻었든 얻지 못했든, 정신적 지주를 어디에 두고 있든,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고 인생의 바른길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어떤 것이냐? 참된 신앙은 사람이 인생의 바른길을 가는 것이다. 무엇을 인생의 바른길이라고 하느냐? 갈수록 인성이 정상이 되게 하고, 선과 악,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알게 하며, 인류의 운명이란 무엇인지, 그 운명은 누가 장악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사람은 운명이 어떻게 오는지를 알게 될 때면 운명에 안배된 모든 것에 순응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조물주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된다. 이것이 바른길이 아니냐? 이것이 바른길이다.

이런 바른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조금 깨닫고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 (피조물의 본분을 잘하기 위해서입니다.) ‘난 피조물의 본분을 잘하고 싶다, 나는 이것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부탁을 완성하고 싶다.’라는 것은 주관적인 바람인데, 즉 네 자신의 차원에서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것이다.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사람이 살고 있는 이유는 다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다. 주관적인 것은 다 알게 되었고, 이제는 객관적인 면을 보자. 그런 일의 실제적인 면은 어떻게 보아야 하겠느냐? 내가 말하는 것을 너희가 깨달을 수 있는지 들어 보아라. 여기에 이러한 사실이 있다. 그 누구든 이 세상에 온 것은 모두 하나의 사명을 갖고 온 것이지, 마음대로 오거나 잘못 보내진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세상에 와서 무엇을 배우게 되고 무엇을 얻게 되든, 다 이 세상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기 위해서이다. 그 역할은 무엇일까? 바로 이 세상에서 임무를 완성하는 것인데,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게 되면, 그 사람의 역할은 무엇이냐? 먼저는 그 집에서 아이의 역할을 맡는데, 그 역할을 위해 산다. 그게 처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 세 사람이 온전한 가정을 이룬 것이다. 그다음 그 가정에서 엄마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 ‘엄마’라는 그 사명과 그 역할을 완성하기 위해 산다. 그녀는 그 가정에서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와 남편을 잘 보살피고, 가정을 잘 돌봐야 한다. 그녀는 그 역할을 맡았고 그 모든 것을 위해 산다. 만약 그 여자가 그 가정에 없다면 그 가정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그녀와 상관이 있겠느냐? 상관이 없다. 그 아이는 그 가정에서 왜 살고 있는 것이냐? 그 집은 그 아이가 생기면서 온전한 가정으로 바뀐 것이다. 그 아이는 어떤 역할을 맡은 것이냐? 한 가정의 후손으로 그 집안의 대를 이은 것이고, 그 집안에서 다음 세대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다음 세대가 생겼기 때문에 가정이 완성되고 채워진 것이다. 그것이 그 아이가 처음 맡게 되는 역할이다. 그다음 그 아이가 가족 내에서 아들이든 딸이든 그만의 사명이 있는데, 앞으로의 운명은 어떨지, 사회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지, 어디에서 일할지, 어떤 일을 할지, 하나님 집에 와서 어떤 본분을 할지, 어떤 특기를 갖추었고,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그 하나하나의 운명의 안배는 다 하나님이 계획해 놓은 것이 아니냐? 그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더냐? 그 가정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실 그의 운명의 매 걸음은 직접 택한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이 안배해 놓은 것이다. 다 하나님이 안배해 놓았다고 하면 여기에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왜 사느냐와 관련이 된다. 예를 들면, 너희는 지금 음악을 배우고 있다. 그런 조건이 되고, 그런 가정 환경이 마련되었는데, 그러면 그걸 배우게 된 것은 네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냐? (아닙니다.) 너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것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렇게 너는 이와 같은 사명을 하나 완성하게 되었고, 그런 동작 하나를 완성하게 되었다. 네가 누구를 위해 완성한 것이냐? 하나님의 명정으로 인해 완성하게 된 것이지, 네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럼 네가 그 일을 완성하게 된 것은 조물주가 배정해 놓은 결과가 아니겠느냐? 지금 와서 너는 본분을 하게 되었고 네가 배운 것과 알고 있던 것을 본분에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누가 결정한 것이냐?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지, 너의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금 너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느냐? 모든 사람은 사실 다 같다. 하나님의 주재를 위해, 하나님의 안배를 위해 사는 것이다. 사람은 바둑 알과 같은데, 하나님이 너를 어디에 두고, 너에게 무엇을 시킬지, 어디에서 얼마나 머무르게 할지, 어디로 가게 할지는 다 하나님이 배정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배정한다는 측면에 따라 본다면 사람은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느냐? 사실, 사람은 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위해 살고 있고,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았느냐? 말하자면 누구든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고 은사가 아무리 많더라도 하나님이 명정해 놓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 누구의 삶이든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고, 조물주가 사람을 위해 설정하고 안배해 놓은 운명과 일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섭리와 주재하에서 지금까지 걸어왔다. 이것은 객관적인 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 일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사람은 어느 방면의 진리를 얻어야 하느냐?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 (하나님의 주재를 알아야 하지, 운명과 겨루거나 도망가려고 하거나 스스로 바꿔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관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주재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인식하니 나름대로 괜찮구나. 말하자면 네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든, 사회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너의 소질, 머리, 생각 등의 각 방면이 어느 정도가 되든, 결론적으로 너의 운명과 너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배정에 따라 있는 것이지, 너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택해야 하는 길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어떻게 안배하고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이끌려고 하는지를 깨달으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구하면서 조물주가 너에게 배정해 주고 주관해 주는 운명의 궤적에 따라 생활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도 명분이 서고 정당하다. 반대로 겨루고, 강탈하고, 조물주의 뜻에 맞서거나 연구하거나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해 준 모든 것을 연구하고 대항해서는 안 된다. 너보고 연구하고 대항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만 사람은 살아도 명분이 서고 정당하지 않겠느냐? 그러면 사람은 왜 살아야 하고, 또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곤혹에서 벗어나게 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자들의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고통에서도 벗어나게 되는데, 이렇게 평생을 살아도 그 어떤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뿌리를 찾게 되고 사람의 운명의 내막을 알게 되면서, 사람이 하늘의 안배에 어떻게 순복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고, 조물주의 안배에 어떻게 순복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반항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면 의의가 있다. 더 이상 자신의 힘이나 은사나 자기 머리와 상상에 따라 목표 없이 분투하고 몸부림치며 쟁취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다 미련하고 완고한 행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느냐? 자신의 지금의 처지가 억울하고 재능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비록 자신에게 있는 포부도 하나님이 준 것이고 하나님의 안배로 그런 특기가 있게 된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이 정도의 본분으로는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한 것 같아서 답답하기만 하느냐? 실은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는데 지금 본분하고 있는 곳에서는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드느냐? (아닙니다.) 부정적인 것들이 없어지면 걸림돌은 대부분 제거된 것이다. 그러면 패괴 성정을 해결하고 진리를 깨닫는 것만 남았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삶의 길과 나아갈 방향은 갈수록 분명해진다. 더 이상 ‘난 왜 살고 있을까? 사람은 또 왜 죽어야 할까?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이가 대체 있긴 할까? 그분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다 알게 되면 이런 문제를 물을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 줄 것이냐? (우리는 하나님이 주재하고 명정하신 역할에 따라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그리고 명정 속에서 살고 있다고 알려 줄 것입니다.) 인류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든, 무엇을 소망하고 있든, 오직 조물주의 앞으로 돌아와 착실하게 자신이 해야 할 것,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부탁을 잘 완성해야 사는 것이 편안하고 정당한 명분이 서고 아무런 고통도 없게 된다. 그게 바로 삶의 의의와 가치이다. 어느 날 네가 조물주 앞에 왔을 때, 조물주가 “너는 평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으로 살았느냐?”라고 물을 때, “저는 음악을 배웠기 때문에, 음악이라는 재능으로 본분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분은 어떻게 잘 했느냐?” “음악 방면의 조예가 깊어졌습니다.” “그것도 좋구나, 진리는 깨달았느냐?” “진리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네가 배운 음악으로 조물주를 찬미하고 증거할 수 있겠느냐?” “아직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네가 깨달은 진리가 쓸모 있느냐?” “있습니다. 도리는 됩니다!”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은 “너는 그럼 계속해서 음악에서나 더 깊게 조예를 다지거라!”라고 할 것이다. 무슨 뜻일까? 하나님은 너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인데, 큰일이다. 너는 음악을 위해 살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 살았지, 피조물의 본분을 했던 것이 아니다. 게다가 피조물의 본분을 하는 기간에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결과는 어떠하겠느냐? 네가 본분하는 기간에 깨달은 진리로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를 증거하지 못했고, 조물주가 이 인류를 지배하는 방식을 증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분을 어떻게 했는지는 명백한 것이다.

지금 너희 각 사람이 하고 있는 본분을 놓고 볼 때, 영화로 하나님을 증거하든, 찬양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든, 이 인류에게 가치가 있지 않느냐? 어떤 가치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바른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하고, 자신이 피조물 중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다 조물주의 앞으로 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많은 곤혹이 있지 않더냐? 여전히 속절없이 살지 않더냐? 정말 공허함을 느끼지 않더냐? 그들은 삶의 정신적 지주가 없다고 느끼지 않더냐? 사는 게 정말 힘들다고 느끼지 않더냐? 그러면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그 답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있다.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본분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어 하나님께 구하고, 바른길을 찾고, 조물주를 찾아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순복하고, 깨닫도록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때서야 사람은 왜 사는지, 인생의 가치와 의의가 무엇인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본분할 때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공을 들여야 한다. 나태하거나 농땡이 피우지 말고 정성을 다하고 모이면 자주 교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인류를 지은 다음, 경영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지난 몇천 년 동안 이 인류는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어떤 막중한 책임과 부탁을 짊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서 비교적 은밀하고 간단하게 역사해 왔다. 그러나 말세에 이르러서는 다르다. 너희들의 책임은 막중하다! 어떤 면에서 막중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는 것 외에도 더 중요한 것은 모든 피조된 인류에게 조물주를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된 피조된 인류를 다 조물주의 앞으로 데려와 조물주가 왜 인류를 만들었는지를 알게 해 주고, 피조된 인류는 당연히 조물주의 앞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조물주의 앞으로 돌아와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와 배정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춤만 추고 찬양만 해서 되겠느냐? 한 방면의 사역만 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방식과 다양한 형식으로 조물주의 행사를 증거하고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를 널리 전파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을 조물주의 앞으로 데려올 수 있고, 또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순복하게 할 수 있다. 그 책임은 크지 않으냐? (큽니다.) 그러면 너희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겠느냐? 흐리멍덩하게 대하면 되겠느냐? 한 눈 질끈 감고 건성으로 하면 되겠느냐? 힘을 반정도만 쓰면 되겠느냐? 마음을 다른 데 쓰면 되겠느냐? 질질 끌고, 자기 멋대로 마구 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하는데, 사람의 에너지, 경험, 견문을 다 쏟아야 한다. 이방인들은 사람이 일생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지만, 너희는 조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본분은 가치가 있다. 어쩌면 잠시는 효과가 보이지 않고, 잠시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런 것들을 성공적으로 잘 만들었다면 인류에 대한 그 공헌은 돈으로 가늠할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귀하고 값지고 가치 있으며,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각 사람의 선행이 되고,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일생이 하나님을 믿고 바른길을 가는 것 외에는 왜 다 공허하고 기념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삶이겠느냐? 네가 설령 천지를 뒤흔들 만큼의 큰일을 해내고 하늘에 올라가 보고 달나라에 가 봤어도 부질없고, 설령 과학 연구로 성공을 거두어 인류에게 자그마한 유익을 주고 도움을 줬어도 부질없다. 그런 것들은 모조리 다 없어질 것이다. 유일하게 무엇만은 없어지지 않느냐?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증거, 조물주를 증거한 모든 산물과 간증, 사람의 선행만큼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영원히 존재할 것인데, 그런 것은 너무나도 가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걱정 말고 담대하게 진행하거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심혈을 다 기울여라. 이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 너희는 하나님, 곧 조물주를 따르면서 조물주가 맡겨 준 부탁을 받아들였는데, 때로는 어렵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때로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연단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마지막에는 무엇을 얻게 되느냐? 얻게 되는 것은 진리이고, 사람의 생존 목표이며, 사람의 생존의 가치와 길에 대한 확신과 경력, 수확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너에 대한 조물주의 인정과 신뢰를 얻는다. 하나님은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자이고 내가 기뻐하는 자다”라고 할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이,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피조물이라고 해 주기만 한다면, 너는 헛되이 살지 않았고 쓸모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의 입으로 인정해 준다면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탄을 따라간다면? 무엇을 얻게 되느냐? (멸망입니다.) 멸망되기 전에는 무엇이 되겠느냐? 귀신이 된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재능을 배우고 아무리 많은 복을 쟁취하고, 아무리 잘 누리고 아무리 애써 큰 명리를 얻고,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자리를 차지했어도, 속내는 갈수록 부도덕해지고, 갈수록 사악해지며, 갈수록 추해지고, 갈수록 패역하며, 갈수록 위선적이 되는데, 결국엔 무엇으로 변하느냐? 산 귀신으로 변하는데, 더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면 조물주에게는 어떻게 보이겠느냐? 사람이 아니라고만 하면 끝나는 것일까? 조물주는 그런 자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역겨워하고, 증오하고, 반감을 가지고, 포기하는데, 결국 저주하고 징벌을 준 다음 훼멸한다. 사람이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면, 결국 다른 결말이 있기 마련이다. 너희는 어떤 길을 택하겠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택했고, 그 길이 옳으니, 사람이 어떻게 가느냐에 달렸다. 한평생을 가치 있고 의의 있게 살고, 양심에 부끄럼 없이 살며, 진정으로 조물주의 앞으로,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오고 싶다면, 몸과 마음을 전념해야 하고 마음을 다른 데에 쓰지 말아야 한다. ‘난 이 생애에 세상에서 부자가 되거나 출세하거나 가문을 빛내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가족이 화목하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아. 그리고 애써 명예와 이익을 얻거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거나 군계일학이 되는 건 바라지 않아. 난 그런 것을 위해 힘쓰지 않고 그런 길을 가지 않을 거야! 그럼 난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단순하게 하나님을 따라가면서 나의 평생, 나의 모든 에너지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재능과 두뇌 또 얼마 되지 않는 심혈까지 다 본분에 들이고 하나님께 드릴 거야. 하나님께 드리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잘 누리지도 못하고, 육체가 고난받고, 심지어 책망도 받고, 형제자매들에게 오해를 받거나 하나님께서 연단을 주셔서 평생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외롭게 혼자 남겨지더라도, 다 수긍하고 내 몸과 내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바칠 거야!’라는 이런 심지가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이런 심지가 있으면 많은 일과 많은 고난을 다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이런 심지가 없이 그런 소망과 순간적인 열정만 가지고는 원동력이 될 수 없다. 이를테면, 본분이 바쁘다 보니 때를 좀 거르고 잠을 덜 잤다고 벌써 ‘얼굴이 왜 이래? 안 되겠어, 좀 쉬어야겠어. 아무리 바빠도 쉴 거야. 겉늙을 수는 없지. 이렇게 큰 고생은 할 수 없어, 몸을 잘 챙기는 게 먼저야.’라고 한다. 그런 생각은 어떠하냐? (좋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본분과 하나님이 맡겨 주신 부탁보다 육체를 더 중히 여기는 것이다. 육체를 너무나 아끼다 보니 조금만 고생해도 싫어한다. 조금만 고생해도 움츠린 거북이가 되거나 불평을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급해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지금 굉장히 바쁘다고 해도 ‘난 그런 것에 신경 쓸 힘이 없어. 한약까지 받아 왔는데, 몸조리에 신경써야 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없느냐? 그런 사람은 어떠냐? (안 좋습니다.) 어떻게 안 좋으냐?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자기 생각만 합니다.)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궤사하고, 꼼수를 부리고, 성실하지 못하다. 그렇지? 그래도 그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느냐? (입만 바치고 마음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궤사합니다.) 그냥 말만 했지 실제적인 일은 조금도 하지 않는데, 전혀 고난받지도 않고 전혀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과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실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해도 전혀 고난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들은 멋 부리기를 좋아해 얼굴이 조금이라도 초췌해졌다 싶으면 그만두려 하고, 머리카락이 좀 빠지거나 피부가 푸석해져도 그만두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본분을 해도 달갑지 않고, 이런 걱정 저런 걱정에 사로잡혀 끝이 없다. 그것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대가를 가늠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니 어떨 때 사람은 ‘난 마음만 드리면 돼. 그런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평소에는 여전히 하던 대로 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볼까? 하나님은 네가 어떤 염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다. 혹은 너의 염원을 보는 한편, 너의 실제 행동까지도 본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감찰한다. 이를테면, 너에게 염원도 있고 심지도 있고 그와 동시에 실제로 내놓는 것이 있고 실제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보인다고 하자. 비록 가끔은 연약해지지만 하나님은 네가 마음으로 진정 포기하지 않았고 노력을 하고 있고, 진리를 사랑하고 공평과 공의를 사랑하며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널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입에 꿀 발린 소리는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사실 그렇게 할 생각도 없으면서 입이라도 놀리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주변 사람들의 눈도 가리고 체면도 좀 서니까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실천할 때는 아예 그렇게 하지도 않거니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자신에게 유익한 대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많이 다르지 않으냐? 하나님은 그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까? 하나님은 감찰한다. 사람은 궤사해서 자신이 꼼수를 부려도 하나님이 알지도 못하고, 상관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줄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꼼수를 부리는 사람과 성실한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 하나님이 그 두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차이를 너희는 알고 있느냐? (성실한 사람에겐 축복을 주시고, 궤사한 사람에겐 축복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축복해 주느냐? 너희는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성실한 사람을 축복해 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어떤 실제적인 표현이 있느냐? (성실한 사람은 본분에 효과가 따릅니다.)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아 진리 실제에 더 잘 진입할 수 있지만, 궤사한 사람은 진리 실제 방면에서 진입도 없거니와 하나님 말씀에서 폭로하셨던 산 귀신이 되어, 드러나 도태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각기 다른 사람을 대하는 차이와 각기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성실한 사람이라 해도 우매한 일을 할 수 있고 나약할 때가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있고 하나님의 깨우침이 있으며 항상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징계나 책망, 훈계 혹은 연단을 더해 주면 그 사람에게는 변화가 있고 발전이 있다. 꼼수를 부리는 사람은 어떠할까? 하나님이 매사에 그런 자를 드러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자에게는 깨우침과 빛 비춤이 없는데, 마치 늪에 빠진 것 같고, 어둠 속에 살고 있듯이 아무리 더듬고 힘을 써도 빛을 보지 못하고 방향을 찾지 못하며, 본분을 해도 영감이 없고 인도가 없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에서 부딪히게 되는데, 심지어 어떤 일을 하게 되면서 은연중에 드러난다. 그런 사람을 드러내는 목적은 무엇일까? 형제자매들에게 그런 사람을 분별하게 하고 어떤 사람인지를 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 그 부류에 대해 분별이 생기고, 분별력이 자라면 그런 사람은 뭐가 되겠느냐? 효력품이 되는데, 일부는 도태된다. 또 일부는 사탄에게 넘겨져 본색이 드러나게 되는데, 참람한 말을 하며 마귀상을 드러낸다. 마귀상이 드러나면 사람들이 분별하고 그다음은 버려지는데, 어떤 사람은 제명되고, 어떤 사람은 집으로 보내지고, 어떤 사람은 출교된다. 하나님이 각기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지 않으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깨우침을 주며 인도하여 사람의 정형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한다. 좋은 사람은 갈수록 ‘사람은 바른길로 가야 돼! 하나님을 거역하면 안 돼. 이 일에서 하나님께 순복해야 돼.’라는 생각이 많아지면서 바른(원문: 敍暢) 정형이 있다 보니 하나님의 요구에도 부합된다. 반대로 하나님은 나쁜 사람, 악인 그리고 부정적인 인물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은 잡귀신을 보내 그 사람의 마음을 방해하게 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나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나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자기 마음처럼 되지 않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소극적인 말을 하며 이간질을 하는데, 어릿광대처럼 곳곳에서 나쁜 짓을 한다. 그게 오래가다 보면 교회에서 방해꾼이 되어 제명당하게 된다. 그게 그 자신의 뜻이겠느냐?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아 하나님이 사탄에게 넘기고 잡귀신한테 넘기면 그 사람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드러난 다음에야 생각을 해 본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방해하고 교란했다고? 난 왜 모르겠지?’ 그 사람은 모른다고 하는데, 사실 그 사람의 본성으로 보아도 별로 좋은 물건짝은 못 된다. 단지 하나님이 그 사람의 멸망 속도를 앞당기려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빨리 도태되고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일은 하나님이 친히 나서고, 어떤 일은 잡귀신이나 사탄, 악령을 시키는데, 한 방면으로는 하나님 선민을 온전케 하며 만들어 가는 것이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악인을 드러내고 도태시키는 것이다. 네가 관념으로 가늠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야. 하나님은 이런 일을 안 해.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이 배정하신 게 아니야.’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리지 않느냐? 범사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 이 말은 너희가 경력하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 항상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고, 본분을 달갑지 않아 한다. 그러고도 하나님 집에서 떠날 생각은 하지 않는데, 행여 다른 사람들이 복받을 때 자기가 빠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한쪽에서 대충 때우기 식으로 있으면서 소극적인 것들을 퍼뜨린다. 비록 교란하는 정도는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를까? (아십니다.) 사람은 알고 있을까?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저 사람 참 괜찮아요. 연약해질 때가 있고 사람들과 교제를 잘 안 해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하고, 고생도 하고 대가도 치르면서 본분해요.”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있다. 그래서 시간을 보고 있다가 그 사람이 어느 정도에 이르게 되면 때에 맞춰 질병을 준다. 그리하여 그런 사람은 질병 때문에 본분을 못하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본분하는 행렬에서 잘렸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나쁜 일입니다.) 너희는 본분을 하기 좋아하니, 너희에게는 나쁜 일이겠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어떨까? 그런 사람은 워낙 본분을 하기 싫어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기회가 왔어. 본분을 안 해도 되잖아.’라고 한다. 사실은 누구에게든 다 나쁜 일이다. 갑작스런 질병으로 본분하는 행렬에서 잘렸는데도 사람들은 상황 파악을 못한다. ‘저 사람은 본분을 참 잘했는데. 사고친 것도 없고, 교란이나 방해도 하지 않았고, 아직 본분할 수 있는 사람인데.’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원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처리한 것이다. 그렇게 내보냈더니 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 나아 버렸다. 그런 일을 통해 너는 무엇을 알게 되느냐? 그 일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본분을 안 하게 되니 글쎄 병도 나았다. 병이 나으니 그 사람은 뭐하러 갔을까? 직장을 찾고 살림을 차리더니 큰 돈벌이에 나섰다. ‘드디어 본분을 안 하게 되는구나. 저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한솥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한다. 그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나쁜 일입니다.) 어떻게 나쁜 일이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버렸다. 그것은 하늘이 무너질 만큼 큰 재앙이다! 하나님이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 사람에게 결말이 없다는 것이다. 조물주의 시선에서 사라졌으니 더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도 없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예정하기도 했고 택하기도 했었지만,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염증을 느끼는 것이다. 더 이상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고, 하나님 집에서 잘라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부류를 영원히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구원받을 기회를 잃은 것인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어떤 표현을 보이든 하나님은 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버리면 그것으로 끝날까? 그 사람의 스토리는 그것으로 끝났을까? (아닙니다.) 왜 끝나지 않았느냐? (육체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죽었습니다.) 그것은 이론이다. 육체가 살아 있고 영혼이 죽은 걸 네가 보았느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제는 하나님이 버렸다. 사람은 택함받기 전에 어디에 있었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기 전에 사람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택함을 입으면서 하나님 집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그 사람을 잘라 낼 때, 그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다시 사탄의 권세 아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는 얘기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누구에게 던져 줬느냐? 다시 사탄에게 던져 주었다. “옜다, 난 이 사람을 갖지 않겠다. 이런 나쁜 종자는 너나 갖거라.” 그럼 사탄이 넘겨 받는다. 그런 것이다. 그 사람은 사탄에게로 돌아간 것인데, 다시 말해 하나님 집에서 제거하여 다시 사탄에게 준 것이다. 다시 사탄에게 넘겨지면 사람은 무엇을 얻게 되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 알고는 있느냐?

누구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들을 얻게 되느냐?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하나는 그것이고 또 뭐가 있느냐? (진리를 얻게 됩니다.) 그런 것을 얻는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 집으로 데려올 때는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 집으로 데려오는 것인데, 사탄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사탄은 아무런 조건도 달지 못한다. 하나님이 “저 사람, 내가 가질 테니, 앞으로 건드리지 말거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하면, 사탄은 그 사람을 건드리지 못하고 얌전히 있는다. 그때부터 그 사람의 의식주와 모든 활동은 다 하나님의 보살핌 아래에서 이뤄지고 하나님의 시선에 있게 되는데,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사람을 건드리지 못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의 보살핌 아래에 살면서 어떠한 외부 세력의 침략이나 방해도 받지 않게 되는데, 하루하루의 행복, 슬픔, 고통, 기쁨은 다 하나님의 보살핌 아래에서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재앙이 닥칠 때 하나님이 피해 가라고 명하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교통 사고가 발생하게 될 때, 하나님이 ‘오늘은 가지 못하게 해야겠구나.’라고 하면 그 재앙을 피하게 된다. 이방인들이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대로 가는데, 죽어야 할 때가 되면 죽고, 재앙을 당해야 할 때가 되면 재앙을 당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홍수가 난다고 하자.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할까? 오늘 이 동네에 홍수가 날 것이니, 저 사람은 다른 데로 보내야겠다고 한다. “오늘 남쪽에 홍수가 나니 너는 북쪽으로 물건 배달을 가거라.”라고 한다. 아니면 마침 북쪽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너를 불러 그쪽으로 가게 된다. 이튿날, 너는 남쪽에 홍수가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어제 집에 없었으니 망정이지, 있었더라면 나도 물에 빠져 죽었겠구나.’라고 한다. 그렇게 재앙을 피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어떤 곳에 사고가 발생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네가 거기에 있다 보니 그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피하게 되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냐? 또 네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무엇을 먹었는데, 다른 사람은 배탈이 나고 심지어 식중독으로 죽기까지 했다. 하지만 너는 한 이틀 배탈로 고생만 하고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죽지도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당신은 큰 재난에서 죽지 않았네요. 어떻게 죽지 않을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왜 다 죽게 됐죠?”라고 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너를 죽지 않도록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했다. 전염병이라고 하면 옮는 사람마다 끝장이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때 너는 그것도 모르고 전염병이 퍼진 지역에 본분하러 갔다가 거기서 한동안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됐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전염되고, 전염병이 점점 더 많이 퍼져 간다. 너도 전염될까 봐 걱정이 되다 보니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결국 전염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 왜 그런 재앙이 너에게는 닥치지 않았겠느냐? 그게 바로 하나님이 지켜준 것이다. 사탄, 악령, 잡귀신들은 너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들이 너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금지 구역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람은 접근 금지”라는 글을 보기라도 한 듯, 하늘의 법령으로 봉인되어 있기라도 한 듯, 감히 너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렇게 너는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네가 잘 살아왔고, 모든 것이 순조롭고 순탄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인식하지도 못하고 “난 그동안 정말 잘 지내 왔어. 운이 좋았던 거야. 난 팔자가 좋고, 대단한가 봐! 사탄이나 잡귀신들이 날 건드리지 못하거든.”라고 한다. 그 입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에 보답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본분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방해하면서 나쁜 짓만 한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 지켜보다가 구원할 여지가 없겠다 싶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탄에게 던져 주기로 결정한다. 그 사람은 값이 없는 존재다 보니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내던지면 누가 가장 좋아하겠느냐? 사탄이 좋아한다. “잡귀신이 하나 더 늘었구나, 사람을 망칠 놈이 하나 더 늘었고, 나쁜 종자가 하나 더 생겼구나, 어서 와!”라고 하며 사탄이 좋아한다. 사람이 그걸 알까? 사람은 멍청하여 알지도 못하고, 흐리멍덩한 채로 사탄에게 넘겨지면서 다시 사탄의 품으로 돌아간다. 사탄은 그런 사람을 껴안고 무엇을 할까? 어떤 짓들을 하겠느냐? (짓밟고 해칩니다.) 어떻게 해치느냐? 죽일까? 바보로 만들까? 그렇게 해칠까?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은 사탄이 하는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사탄이 일을 한다고 해서 사람을 다 정신병자로 만들거나 귀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탄은 궤계와 사악에서 나오는 여러 수단들을 써 가며 너를 죄짓게 유혹하는 것이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해치고 괴롭히고 유린하는 그런 것만이 아니다. 겉으로 봤을 때, 그런 어휘는 다 악독한 수단이 맞다. 하지만 사실은 사탄이 그렇게만 하더냐? 사탄이 사람에게 하는 짓의 성질은 모두 패괴시키고, 해치고, 유혹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탄의 수단이 그런 것뿐이냐? 절대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탄에게 넘겨진 다음, 어떤 사람은 만사가 형통하고 일부 관료들도 그에게 청신호를 켜 준다. 또 갑자기 머리도 잘 굴려 수단을 그렇게 잘 쓴다. 관료들과 결탁하여 사업도 벌이고, 뇌물을 잘도 건네줘 갑자기 출세길이 열리고 목돈을 벌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나쁜 일입니다.) 사람이 봤을 땐 좋은 일인데, 왜 나쁜 일이라고 하느냐? 만사가 형통하고 승진하고 돈벌이가 잘 되다 보니, 몇 년 안에 거물이 되었는데, 돈도 지위도 명망도 있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부유한 삶을 살게 되었다. 철저히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이 생각나겠느냐? 계속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겠느냐? 마음에 하나님이 남아 있겠느냐? 그 사람은 하나님 믿는 것을 총명하다고 생각할까, 멍청하다고 생각할까?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관점이 달라지면서 하나님을 완전히 멀리하고 참 도(道)를 등졌으며, 완전히 사탄의 포로가 되어 노략당했다. 그렇게 됐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 집의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람으로 된 것이냐? 전형적인 하나님 집 밖의 사람, 즉 이방인이 된 것이다. 그 사람은 사탄에게 끌려갔고, 바른길도 가지 않으며,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의 자리가 티끌만큼도 없으며, 하나님을 믿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고 아무런 개념도 없다. 완전히 끝장난 것이다. 그 사람은 세상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점차적으로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에게 계속 하나님의 보호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는데, 어떤 상태일까? 하루하루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는데, 문을 나서면 어떤 화를 당하게 될지 몰라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고, 마음에는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하고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사악한 조류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다 보니 그것을 좇지 않을 수도 없는데,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과 축복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부유하게 살게 되었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온종일 안절부절 못하고 진정한 기쁨이 없다. 언제 잡귀신에게 농락당할지 모르고, 또 언제 나쁜 사람이나 악인의 손아귀에 빠질지 모르는데, 그런 상태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그런 느낌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왜 하나님이 버린 뒤로는 그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이 없을까? 근원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보호해 주고 인도해 주고 보살펴 줄 때,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지낸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잃게 되었을 때는 심령이 곧바로 흑암에 빠지는데, 그 느낌은 전의 느낌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곧바로 평안과 기쁨이 사라지는데,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무슨 원인으로 느끼지 못하게 되느냐?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사람 마음의 느낌은 바로 그런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살게 되는데, 더듬고 모색하면서 나아가는 걸음마다 정말 힘들고 공포스럽고 괴롭기만 하다. 그 사람은 참 고통스럽게 산다. 그 사람은 명리를 좇고, 세상을 추구하고, 안일한 나날을 보내면서 이방인의 길을 가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떠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이 없어 곧바로 어둠에 빠지는 것이다. 사람이 어둠에 빠진 첫 느낌은 평안이 사라지는 것인데,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 다 공포로 가득하고, 곳곳에 함정으로 가득하고 사기와 거짓이 가득하며, 곳곳이 위험지대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는 게 참 힘들겠지? 그런 것들이 그가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겠느냐?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달라지겠느냐? 세력이 크다고 해서 달라지겠느냐? 상관없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때, 사람은 마음이 든든하고 평안하고 기쁨이 있어서 인간답게 살며, 정상 인성의 모든 활동을 하게 되는데, 모든 것이 정상적이고 질서 있고 규칙적이다 보니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을 잃게 되는 순간, 그런 느낌이 사라지고, 그런 것들이 다 없어진다. 그때 사람은 자신의 능력, 재주, 생각, 처세 철학, 혈기로 주변의 모든 인사물에 대응한다. 주변에 어떤 인사물이 있게 될까? 나쁜 사람, 악한 사람, 크고 작은 귀신, 악령들이겠지?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도 없이 더러운 귀신이 군거하는 곳에서 살면 삶이 편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할 것이고 힘겹게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서 살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후회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것은 정말 하늘이 무너질 만큼 엄청난 재앙이다!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배정 속에서,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살아야 진정한 행복이 있고,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평안과 기쁨이다.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잃으면 사람의 고통, 걱정, 우려, 두려움, 불안감은 다 마음 깊은 곳에서 생기는 것이다. 사람에게 의지할 곳이 없으면 사람의 능력과 힘은 얼마나 되겠느냐? 혼자서 상대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냐? 각종 악령과 더러운 귀신들이다! 겉으로 보면 다양한 인사물이고, 형상이 있고,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그 인사물의 배후에서 누가 조종하고 있느냐? 사탄 그리고 각종 악령과 더러운 귀신이다.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된다고 그런 것들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평안과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느냐? 아무리 큰 인물이고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 있고 아주 악한 사람일지라도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상, 그 마음에는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혼자 조용히 있을 때, 가만히 누워서 주변의 인사물을 생각하면, 정말 힘들게 모든 일을 대응해 왔고 머리를 쥐어짜며 모든 일을 수습해 왔다. 인간의 힘과 인간의 수단으로 살면 사람은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큰 인물들은 그런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큰 인물들의 고통이 더 크다. 작은 인물들은 작은 생활 범위, 작은 바닥에서 생존하면 되지만, 큰 인물들은 더 큰 바닥에서 생존하면서 더 큰 인사물의 시련과 시달림에 직면해야 한다. 그들에게 즐거움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떠나고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면 어떤 삶을 마주하게 되겠느냐? (안절부절 못하는 삶입니다.) 맞다, 독불장군처럼 외롭게 모든 악령과 더러운 귀신을 상대해야 하는데, 결국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하는 그런 치열한 삶에 던져져 사는 것이 너무나 힘겹게 된다. 언제 상대방의 총에 죽을지, 상대방의 궤계에 빠져 죽을지 모른다. 그 사람은 지치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산다. 어떤 사람은 바보 같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늘 진리만 추구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르라는 이야기만 한다고 답답해하면서 ‘세상 사람들 봐! 얼마나 자유로워? 하나님 믿는 게 재미없어서 이젠 믿고 싶지 않아.’라고 한다. 항상 그런 궁리만 하는데, 그 결과가 어떤지를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조물주의 손에서 무궁무진한 평안과 기쁨, 축복과 보호와 보살핌을 누리게 된다. 만약 인성이 없고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무엇이 행복인지, 무엇이 기쁨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축복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늦었다. 네가 “후회돼서 그러는데,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라고 말한들, 하나님이 기회를 줄까? 네가 하나님을 버렸는데, 하나님이라고 너를 원하겠느냐? 너는 사탄을 좋아하지 않았더냐? 네가 사탄을 좋아하면서도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허락하겠느냐? 그러므로 사람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늘 하나님 앞에 와서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평안이 생기는지, 어떤 것들이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하게 여길 만한 것인지를 묵상하고, 이런 일들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네가 본연의 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수록, 긍정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은 너에게 더 많이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어 너를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보게 하는데, 그에 따라 너는 긍정적인 것에서 갈수록 더 많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게 된다. 그러면 너의 믿음은 날로 커지지 않겠느냐? 네가 만약 항상 나태하고 항상 저촉하고 진리에 반감을 가지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오려고 하지 않고 방종하며, 하나님을 멀리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살핌과 보호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강요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하나님도 분명 너를 깨우쳐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깨우쳐 주지 않으면 너는 믿음도 별로 없을 것이니, 믿다가 어느새 기운이 빠질 것이고, 계속 기운이 빠지다 보면 불평하고 원망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끝내 언젠가는 사고를 쳐 제명당하게 되는데, 거기가 종점인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탓이냐? (자기 탓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따르기를 택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길을 택하고 사탄을 추종하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을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었다. 돈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거래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도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포기할 것이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너를 포기할 것이다. 네가 그토록 좋은 일인데도 원치 않고, 게다가 정말 괴롭고 억울하다고 느끼기까지 하는데, 뭐하러 그 고생을 하려 하느냐? 다시 진흙탕으로 돌아가거라. 거기서 뒹굴고 싶은 대로 뒹굴면 된다! 하나님이 상관치 않으면, 사람의 결말도 정해진 것이다.

마음이 독한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이 하나님을 버렸는데 하나님께서 왜 저 사람을 죽이지 않지? 하나님을 안 따르면 멸하셔야 당연하지! 저주하고 징벌하고 멸해야 돼.’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일까?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일생이 어떠할지 하나님은 이미 정해 놓았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막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운명과 귀숙과 결말을 이미 정해 놓았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여전히 그 사람의 원래 운명대로 자연스럽게 살게 하다가 그를 사탄에게 넘겨주면 그만이다. 최종에 그의 일생이 끝나 결말을 정해야 할 때, 그때 가서 운명을 다시 정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의 법칙을 깨지 않는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많은 일을 함에 있어서 매우 이성적이다. 절대 사람처럼 충동적으로 ‘네가 나를 따르지 않으면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떤 성정이냐? 그것은 강도의 성정(원문: 匪性)이다. 어떤 것을 강도의 성정이라고 하느냐? 바로 산적 같고, 망나니 같은 성정인데, “나를 안 따르겠다고? 흥! 나를 안 따르면 넌 글렀어. 여기에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갈 때는 다르지. 들어왔으면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 정 나가고 싶다면 대가를 좀 치러야지. 목숨 내놓고 가!”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를 따르지 않겠다면 다시 사탄에게 돌아가거라. 네 마음대로 하거라. 어쨌든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다. 앞으로 너에게 나의 보호와 보살핌은 더 이상 없다. 이제 이 복에는 너의 몫이 없다.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거라!”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관용한다. 사탄처럼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너를 밑도 끝도 없이 통제하고 잡아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자신만의 일 처리 원칙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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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명정(命定): 명하여 정함.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④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⑤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⑥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⑦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⑧저촉(抵觸): 대립하고 저항하는 심리 상태.

⑨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처소, 본향을 뜻함.

⑩ 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