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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편 하나님 말씀을 실행해야 성정이 변화될 수 있다

지금 너희들의 생명 경력은 어느 단계에 있느냐? 너희들의 지금 분량은 어느 단계에 있느냐? (저는 늘 교만한 성정을 유로하는데, 그러면 자신을 끝장이라고 규정하게 되고, 효력자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효력하는 존재라고 말하면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분량이 아주 작고 성숙되지 못한 표현이다. 분량이 아주 작다는 것은 판단 능력이 없고 문제에 대한 정상적인 사고 능력이 없으며, 생각이 어른스럽지 못하고, 어른의 마음이 없으며, 앞날과 운명의 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어떤 면이 있느냐? (본분을 순조롭게 할 때는 정형이 좋다가도 약간의 문제가 좀 생기거나 난관에 부딪히면 속으로 ‘이젠 이 본분도 마지막인 거 아닌지? 하나님은 본분을 통해 나에게 진리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소극적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을 추측하기도 하고 경계하기도 합니다.) 드러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도리적으로는 좋은 일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닥치면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걱정합니다.) 그럼 걱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아니면 도태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주로 도태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도태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어떤 것의 지배를 받은 것이냐? 왜 그렇게 된 것이냐? 도태되면 어떠하겠느냐? 네가 생각하는 도태는 어떤 경우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도태는 너에게 그 본분을 못하게 하거나 그 일로 네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처리할 대상으로 보거나 너를 어떤 식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냐? 확정할 수 있느냐? 정상적인 상황에서 모든 일에 능한 사람은 없다. ‘만물박사’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가 아무리 발달하고 식견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해를 못하고 알지 못하는 구석이 있고, 모르는 분야나 기술이 있다. 그러니까, 다양한 분야나 다양한 업무 중에서 어딘가는 네가 모르는 사각지대가 있고, 한계를 느끼고 하지 못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평가한다. 바로 한 사람을 쓰거나 무엇을 시킨다면 하나님에게는 틀림없이 그 사람에 대한 기준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36가지로 변신하고 72가지로 변신하고, 108가지로 변신하는 손오공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정상 사람으로 대한다. 다시 말해, 너의 정상 인성, 네가 갖춘 그런 지식들, 너의 소질, 너의 생활 환경, 네가 가지고 있는 식견, 너의 나이와 경험으로 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에게는 가장 정확하고 정당한 판단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어떤 것일까? 바로 네가 일을 하는 마음 가짐과 원칙 그리고 목표가 어떤 것인지, 진리에 부합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 일을 그 분야나 업계의 기준으로 가늠할 때, 어쩌면 100점이 되지 않고 턱걸이로 합격할 정도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가늠할까? 하나님은 100점을 기준으로 가늠하지 않는다. 60점이 합격이라면, 하나님이 가늠하는 기준은 기껏해야 65점이다. 65점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바로 네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인데, 너의 전력을 다하고, 너의 충심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이다. 하지만 너의 생명이 자라는 기간에 네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60점밖에 되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 편에서 봤을 때 너는 기준치에 도달했을까? 그 기간에 너는 기준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높지 않다. 그렇지?

때로는 하나님이 어떤 일로 너를 드러내기도 하고 징계도 하는데, 그것은 도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너의 마지막 날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람이 늘 도태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늘 ‘난 우리 엄마가 주워 온 게 아닐까? 내가 친자식 맞을까?’라고 의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이가 어른의 심리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왜 그런 일을 가지고 아프게 때리는지, 왜 심하게 꾸짖으며 한바탕 혼내는지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어른이 “저수지에 가서 수영하지 말거라!”라고 알려 주었다고 하자. 어쩌면 어른은 저수지에서 수영했을 경우 안 좋은 결과가 어떤 것일지 알려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들은 얘기가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애들이 어른 몰래 수영하러 갔다가 익사했다는 이야기, 그런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 있다. 그런데 너는 말을 듣지도 않고, 다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몰래 물에 가서 놀았다. 가서 놀았지만 빠져 죽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대단해! 엄마 아빠도 모르잖아. 꾸짖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았어.’라고 하며 으쓱해지기까지 했다. 부모들은 너를 꾸짖거나 때리지도 않았지만 “저녁도 먹지 말고, 자지도 말고, 벽 보고 반성해!”라고 한다. 너는 벽을 향해 서 있는데, 밤새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하고, 갈증도 나고, 속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수영 좀 하고 물놀이 좀 한 것밖에 더 있어? 죽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주워 온 것이 아닐까? 엄마 아빠는 저렇게 쿨쿨 자고 또 밥도 먹고 따뜻한 이불 속에 있으면서 나 혼자 벽 보고 반성하라 그러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라고 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모른다. 그다음엔 ‘우리 엄마는 무조건 날 버리려는 걸 거야.’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만 맴돈다. 사실 부모는 어떤 마음이냐? 바로 명심하라는 것이다. 부모는 그렇게 해서 결론적으로 어떤 효과를 보려는 것이냐? 명심하게만 하면 그만일까? 그걸로 명심하는 것이 결론적으로 원하는 효과가 아니다. 명심하라는 목적은 부모의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행하고, 그 말대로 살면서 부모를 거역하는 일을 하지 말고, 걱정시키거나 애타게 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효과를 보려는 것이다. 네가 부모의 말을 듣게 된다면 진보가 있는 것이 아니냐? 부모는 근심을 덜지 않겠느냐? 부모가 근심을 덜게 되면 너에게 만족하지 않겠느냐? 또 그렇게 벌을 줄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사람의 걱정은 자신의 이익에서 비롯된 것인데, 큰 방면으로는 앞으로 결말이 없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칫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날 드러내시면 도태될 거야. 하나님께서 날 드러내시고 버리신다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버린다고 하면 버려지는 거지 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고, 너의 일방적인 생각이다. 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는 뜻은 도태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 밖에, 네가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것은 드러난 게 아니다. 대부분 경우는 소질이 떨어지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교만한 성정이 있고 과시하기 좋아하고 패역 성정이 있어 마음을 들이지 않고 건성으로 대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보니, 결과적으로 사역을 잘하지 못하게 되고 본분을 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알려 준 원칙을 귀담아듣지 않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는 혼자서 제멋대로 했고, 일을 하면서도 많은 사람과 교통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하다 보니, 결과가 효과적이지 못하고 원칙도 어긴 경우이다. 그렇다면 징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일은 정확하게 대해야 한다. 정확하게 대하는 길은 어떤 것이냐? 바로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일에서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이다. 찾고 구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그저 도리만 깨닫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 집에서 그런 방면의 사역을 하는 원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원칙은 무엇일까? 원칙은 도리가 아니다. 원칙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는데, 너는 그런 유형의 일을 사역안배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규정했는지, 그런 유형의 사역에 대해 상면에서는 어떻게 알려 줬는지, 그런 본분을 하는 방면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찾고 구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겠느냐?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큰 방향으로는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사역을 중시하는 것이고, 작은 방향으로는 모든 면에서 큰 문제가 없어 보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보여지면 된다. 그런 원칙을 다 파악하게 되면, 사람의 그런 걱정들은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 오해도 풀리지 않겠느냐? 네가 그런 오해를 풀고 하나님에 대해 사리에 맞지 않는 생각들이 없어지고, 그런 소극적인 것들이 서서히 네 마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면, 너는 정확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찾고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늘 소극적이고 피동적이거나 저촉하고 오해하는 정형 속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분량이 아주 작은 표현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본분을 잘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고 늘 말하는데, 그 말을 자세하게 분석해 보지 않고 들어보면 ‘저 사람은 항상 본분을 잘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데, 그래도 충심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준다. 사실 그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본분을 잘하지 못하면 날 도태시킬 수 있어. 그럼 난 귀숙이 없어지는 거야.’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저는 항상 효력자가 될까 봐 걱정돼요.”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효력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자민이 되고 싶다는 얘기인데, 자민이 되고 싶으면 본분을 잘해야 하잖아. 좋은 사람이네!’라고 하게 된다.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사람 속마음은 ‘내가 효력자가 된다면 결국에는 멸망되잖아. 그럼 귀숙도 없어지고 천국의 자민도 아닌 거잖아.’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런 뜻이다. 여전히 귀숙과 운명을 위해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누군가 “당신은 효력자예요.”라고 하면 본분하는 열정은 30% 감소되고, “당신은 자민이에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에요. 본분을 잘했어요.”라고 하면 본분하는 열정은 30% 증가된다. 그것은 무슨 문제일까? 그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본분하면서 정형과 기분이 항상 귀숙에 좌우되는데, 그 사람은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혼자서 계속 해결하지 못해 올무에 갇혀 있게 되는데, 항상 발이 걸려 나오지 못하며, 늘 자기가 생각하는 게 맞다고 본다. 어떨 때는 책망을 한 번 받고는 ‘날 책망하던 말이 정말 심하던데. 난 가망이 없어! 이대로 끝나는 거야! 할 수 있는 데까지나 하자.’라고 생각하는데, 일종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며 타락된 사상을 가지고 저촉하고 대항하면서 본분을 한다. 그럼 본분을 잘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계속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본분을 잘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교통해 주었는데, 그 사람은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느냐? ‘그냥 이대로 끝나는 거야! 될 대로 되라지 뭐! 어떻게 해도 다 되는 거잖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저촉하고, 대항하고, 소극적이고, 원망하고, 마지못해 하고 있는데, 마음에 벽이 있다. 그렇게 마지못해 하는 상태로 누군가 앞에서 잡아당기고 뒤에서 닥달해야 간다.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한 발을 내딛기도 정말 어려운데, 사는 게 고통스럽다.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바로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늘 오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대해 줘도 늘 ‘하나님께서 날 버리시는 게 아닐까? 도대체 날 구원하긴 하실까? 나 같은 사람이 계속 진리를 추구해 봤자 소용이 있긴 할까? 국도에 들어갈 수 있긴 할까?’라고 의심한다. 항상 이렇게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며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본분을 잘하는 데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사람마다 살아가면서 체면, 허영심, 지위, 명리, 명예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데, 그 외에 더 많은 것들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 기간에 바로 그런 것들 속에서 계속 몸부림치고 온갖 시련을 다 겪게 되는 것이다. 그 기간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다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허영심과 체면, 사람의 욕망과 속셈, 하나님에 대한 오해, 자신의 선택,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궤사한 성정, 그런 것들과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바로 너희가 깨달은 진리와 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네가 장악한 진리 실제와 진리 원칙으로 끊임없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게 되면 내면에 점차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마다 다 있다. 어떤 사람은 “전 천성적으로 세심하지 못하고 덤벙대요! 체면이나 명예 때문에 다툰 적이 없어요. 전 너그럽고 도량이 넓은 사람이라, 작은 이익을 가지고 시시콜콜 따져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내 앞길을 막는 사람이 있다면 칼을 뽑을 거예요.”라고 말하는데, 이익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 없고 명예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다 그런 것들을 위해 사는데, 단지 사람의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유로되는 방식도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은 그걸 말로 표출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표출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뚜렷하게 유로하고, 어떤 사람은 감추고 있는다. 그런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덮어 감추면서 유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간파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이 간파하지 못하게 하고 덮어 감춘다고 하나님이 모를 것 같으냐? 너에게는 패괴 성정이 없을 것 같으냐? 사람마다 다 똑같다. 다른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들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입에는 쓰지만 몸에 좋은 약을 대하듯 가져다 마신다. 그것으로 속에 있는 결함을 치료하고, 속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일 처리하고, 처신하고, 본분하고,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것, 인생의 방향 목표까지 다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고,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 삶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들은 만큼 실행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하자,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성실한 사람이 될까?’라고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성실한 사람이 되려면 성실한 말을 하고 마음을 열고 교통하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야 한다는 몇 가지의 원칙이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은 실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실행하는 기간에 좌로 치우칠 때도 있고, 우로 치우칠 때도 있으며, 실행이 도를 넘을 때도 있고, 약간 그릇되게 실행할 때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 방향을 향해 비뚤비뚤 가다가 서서히 점차적으로 더 좋아지는 것이다. 갈수록 더 사람 모양이 있게 살고, 갈수록 하나님의 동행과 하나님의 축복을 느끼며 살게 된다. 이것이 한 부류의 사람이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이 “저는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욕망이 있고, 속셈이 있으며, 일을 하면 과시하기 좋아하고, 지위심이 있다 보니 명리를 잘 다툽니다.”라고 말할 때, 그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다. 그런데, 교통을 들은 다음에는 그런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기가 행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 사람도 마음을 열어 교통하고, 훈계와 책망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징계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받아들인 뒤에는 도리로 여긴다. 어떻게 하길래 도리로 여긴다고 할까? 사람과 사물을 대하고, 본분하고, 일 처리, 됨됨이 그리고 자신의 패괴 정형과 패괴 실질을 맞추어 보는 것들을 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다 자기가 종합해 낸 일 처리 원칙과 방식이나 방법에 근거한다. 그다음 하나님 말씀의 글귀와 알맞게 조합하는데, 그러고도 ‘나도 본분을 잘하는 사람이야. 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야. 나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야.’라고 하며 으쓱해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겉으로 대가를 치르거나 힘을 쓴 것이 있고, 게다가 자신에게 재간이나 특기가 좀 있으면,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으로 본다. 그런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열심히 메모하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외우며, 심지어 시간까지 들여서 묵상도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목적은 무엇이냐?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해 주려는 것이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한 방면이다. 또 있느냐? 거기에는 여러 가지 정형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규례로 지키는데, 글자 표면의 뜻을 지키는 것으로 끝낸다. 다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교통하자, 그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 되는 부분이라면 저도 교통할 줄 알아요.”라고 한다. 그 사람이 교통하자, 사람들은 “형제(자매)님, 실제적인 것을 좀 교통해 볼래요?”라고 한다. 그럼 “노트를 좀 볼게요”라고 하는데, 그 자리에서 찾아본다. 그 사람에게는 실제 경력이 없다. 실제 경력이 있다면 바로 교통할 수 있지 않겠느냐? 자신의 경력이라면 어떻게 노트에 적은 대로 읽을 수 있겠느냐? 메모한 대로 읽는 것은 좀 아니다. 또 어떤 정형이 있느냐? (영적인 도리를 갖추고는 스스로 진리 실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통을 들은 걸로 자신에게는 실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알아들었으면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니냐? 그 사람은 ‘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어. 난 영이 통해. 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어. 내가 들은 교통은 다 깨달을 수 있어. 그럼 난 진리 실제가 있는 거야.’라고 한다. 그 사람은 그 말씀들을 실행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에게 있는 애로 사항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역할 때, 일반적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에게는 그런 경력이 없느냐? 하나님 말씀을 진리 원칙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은 다음에도 자기가 거역할 때면 ‘내가 이러는 게 거역하는 건가? 그럴 만한 거잖아! 다들 이렇게 생각하잖아! 그냥 생각인데 거역이라고 할 순 없어. 다음에 이렇게 생각 안 하면 돼. 순복하지 뭐.’라고 한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보다가 ‘난 순복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야.’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그 상황을 넘기는 것이다. 그 사람은 절대 ‘난 왜 거역하는 걸까? 이번 거역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됐어. 이번에 거역한 표현으로 내 실질이 어떤 건지, 내가 왜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됐어. 순복이야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지만, 그래도 해부를 해 보고 이 일에서 좀 인식해야겠어. 이런 일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되지. 내 본성 실질을 좀 인식하고, 사람은 왜 하나님을 거역하는지, 왜 거역할 수 있는지, 하나님은 왜 이 일을 통해 사람을 심판하고 훈계하고 책망하시는지 인식해야겠어.’라고 해부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공과가 아니냐? 이것은 진리에 연결되지 않느냐? 그런 것들을 성찰하지 않고 그런 실행도 없이 ‘순복하면 되지 뭐.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뭐.’라고 한다면 그것이 실제일까? (아닙니다.) 그런 것은 무엇이냐? 그것을 규례라고 한다. 그러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교통을 10여 년씩, 20여 년씩 들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더 오래 들었다. 그래서 글귀 도리는 한가득 말할 수 있고, 심지어 참 실제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내면에 변화가 없을까? 결국 문제가 드러나는데, 그 사람은 “나한테 말하지 마요. 난 다 알아요. 어떤 도리든 다 알고 있어요.”라고 한다. 그 말을 하는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별의별 도리도 다 알고 있고 별의별 교통도 들었으며, 자기는 다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이 얘기해 줄 필요도 없다고 하는데, 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왜 그럴까? 그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의사가 있는데, 늘 다른 사람을 진찰해 주고 약을 처방해 주거나 수술을 해 준다. 도리적인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암에 걸렸을 때, 뭐라고 할까?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라고 한다. 누군가 “약물 치료 하셔야 돼요.”라고 하면, “알아요.”라고 말하고, “수술을 하셔야 돼요.”라고 하면, “그것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말해 줄 필요가 없어요. 난 다 알고 있거든요.”라고 말한다. 그 의사는 뭐든 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수술받으라고 해도 받지 않고, 약물 치료 받으라고 해도 받지 않는데, 병이 좋아질 수 있겠느냐? 의사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런 경우는 몇 번째 부류이냐? (두 번째 부류입니다.) 그런 사람은 겉보기에는 훈계와 책망을 받아들이고, 설교도 열심히 듣고, 사역도 열심히 하고, 본분도 열심히 하고, 심지어 열심으로 힘을 쓰고, 고난받고, 화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안 좋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바로 들었던 교통이나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실행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실질적인 문제는 무엇이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냐? (본성이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는 데는 틀림없이 원인이 있다. 그 사람은 진리를 진리로 대하지 않는데, 그 사람의 관점으로는 진리를 좋은 도리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 신자들이 항상 ‘목숨 하나를 구하는 것은 7층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거지가 다가오면 만터우(소가 없는 진빵)를 두 개 주고는 ‘목숨 하나를 구하는 것은 7층 불탑을 쌓은 것보다 낫다’라고 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고 돈을 몇 푼 던져 주거나 밀가루 한 포대, 쌀 두 포대를 주고는 ‘목숨 하나를 구하는 것은 7층 불탑을 쌓은 것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늘 그런 말을 하다 보니 그 사람은 ‘난 목숨 하나를 구했으니 7층 불탑을 쌓은 것보다 잘한 거야! 난 진정한 불교 신자야. 난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했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사람이 큰 거래를 하게 되었는데, 거래처에서 많은 물품을 보내왔다. 그 사람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 물품들이 지금 내 손에 있어. 이 돈을 가지면 난 평생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이 없어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다음 함정을 파서 상대를 속인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많은 돈을 벌었다. 상대방은 부도가 났다. 그렇게 되었을 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돈 몇 푼, 쌀 한 포대, 만터우 두 개를 던져 줄 때는 ‘목숨 하나를 구하는 것은 7층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을 실행하면서 좋은 불교 신자로 살지만, 큰 이익에 관련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진정한 불교 신자이겠느냐? 정말로 착한 사람이겠느냐? 그런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하느냐? (위선자입니다.) 진정으로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더욱 분개하게 하는 것은 뭐가 있을까? 그렇게 번 돈으로 복지 활동을 하는데, 취학 못하는 아동을 후원해 주거나 독거 노인들을 후원해 준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왜 그런 일을 하겠느냐? 주변 사람들은 다 “정말 착한 사람이야!”라고 한다. 왜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할까? 정말 많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인데, 이 사람을 구제해 주고 저 사람을 구제해 주다 보니, 명성이 전해진 것이다. 동네 주변에서 그 사람을 아는 사람은 다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돈이 어디에서 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하겠느냐?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은 돈이 생겼으니 명성까지 사려는 것인데, ‘정말 착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사면,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 사람이 나쁘지 않으냐? 나쁜 면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느냐? 겉으로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겉으로 자그마한 좋은 일을 하거나 대가를 조금 치르거나 뭘 바치거나 가끔 어떤 말을 듣고 겉으로 순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진리 실행의 기준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네가 진리를 실행했다고 어떻게 가늠하고 정의할 것이냐?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실행했는지 안 했는지를 어떻게 가늠할까?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맞는지를 어떤 식으로 볼까?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교통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기간에, 너의 정형과 하나님에 대한 거역 그리고 각 방면의 패괴 성정의 실질에 변화가 생겼는지, 진리로 대체되었는지, 너의 변화는 겉면의 행위와 방식에만 있는지, 아니면 마음 깊은 곳의 패괴 성정 실질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가늠한다.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교통도 들어왔고,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도 먹고 마셨는데, 너의 변화는 겉면의 것이냐, 아니면 실질적인 것이냐? 성정에 변화가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거역,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 준 부탁과 너의 본분을 대하는 방면에서 변화가 있느냐? 하나님을 거역하는 면은 줄었느냐? 어떤 일에서 거역하고 나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느냐? 순복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맡겨 준 부탁과 본분에 충심이 더해지긴 했느냐? 더 순수해졌느냐? 자신의 속셈, 야심, 욕망, 타산 같은 것들이 교통을 듣는 기간에 정결케 되었느냐? 그리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면에서 여전히 원래의 관점과 막연한 상상과 규정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느냐? 불평이나 많은 소극적인 정서가 아직도 있지는 않느냐? 이런 것들이 변화되었느냐? 이런 것들이 가늠하는 기준이 아니냐? 이런 것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너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것은 사실을 하나 증명하는데,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씨앗 하나를 땅에 뿌리고 물도 주고 비료도 주었는데, 아무리 지나도 싹이 나지 않는다면 그 씨앗은 생명이 있는 것일까? 생명이 없다. 그러면 실증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한동안 경력하고 나면 사람에게 있는 여러 가지 정형에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너는 처음에 왜 하나님을 믿었느냐? 어떤 사람은 “세상에 있었을 때, 저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괴롭힘을 당하고 배척도 당했고 사람들에게 업신여김도 당했죠. 그래서 기를 펴려고 하나님을 믿었어요.”라고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어느 정도 믿었는데도 그 속셈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속셈을 가지고 본분하고 하나님 집에서 화비하고 있다 보니, 화비할수록 더 힘이 나고 화비할수록 자신의 소원이 곧 실현될 것 같아 보인다. ‘교회 인솔자가 됐어. 이제 됐어. 기를 펴게 됐어. 드디어 처음으로 체면을 세우게 됐어.’라고 한다. 계속 믿다가 소구역 인솔자까지 되었다. ‘이게 정말 기를 편 거잖아!’라고 하는데, 그 속셈은 해결되지 않았다. 소구역 인솔자가 된 후에 생각해 보다가 ‘이제 더 큰 인솔자가 돼야겠어! 역시 하나님 믿는 건 좋은 거야. 그렇지!’라고 하면서 하나님 집에서 지위를 다투기 시작한다. 오로지 기를 펴기 위한 것인데, 그 속셈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수년간 사역하고 교통을 듣고 말씀을 먹고 마셨는데도, 그만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동안 본 말씀들은 다 꿀꺽 삼켜 버린 걸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셨다면 정형은 다 변화가 있는 것이다! 사람 생명에 변화가 있어야 참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었다고 한다. 너희 속에 있는 그런 것들에 변화가 없고, 시종일관 한 가지 정형, 한 가지 태도, 한 가지 관점을 유지하면서 계속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바로 분량이 없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이 각기 다른 정도로 서로 다른 단계에서 점차적으로 해결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너에게서 효과를 보았고 성과가 있으며 너의 생명이 되기 시작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 두 부류의 사람을 말했는데, 첫 번째 부류 사람에게는 어떤 표현이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간단하게 바로 실행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류는 어떠하냐? 완전히 실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관점으로는 자기도 실행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도 가정과 직업을 버렸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평생을 하나님께 바쳤다. 결혼도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고도 하지 않고, 다 바쳤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정형은 언제나 변화되지 않는데,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오해, 관념과 상상, 그리고 교만한 성정, 일을 하는 것이 경솔하고 주관적이며 독단전행하는 그런 것들이 언제나 변하지 않고, 항상 같은 방식이다. 바로 이방인들이 늘 말하는 것처럼 새사람이 되지 못하는데, 늘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무엇으로 여긴 것이냐? 좋은 도리로 여긴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 말씀도 진리로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 도리이다. 도리적이고, 좋고, 비교적 괜찮은 것들이다. 그 사람은 일부분을 실행하긴 했지만, 생명의 정형, 영 안의 정형은 전혀 바뀌지 않았고,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느냐? 그 부류는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이 도는 옳은 거야.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셨어. 좋은 분이시지, 괜찮은 분이야. 하나님 집의 인솔자도 괜찮고. 하나님 집 사람들은 다 괜찮아. 여긴 좋은 곳이야. 여기는 억압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곤고함도 없고, 고통도 없어, 정말 안식처이고 피난처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온화하고 누굴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서로 불화가 있어도 마음을 털어놓고 교통할 수 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이야. 상면의 설교 교통도 다 좋은 말씀이고, 다 긍정 에너지야. 여기는 바른 기풍이 충만하고, 긍정 에너지가 충만해. 하나님의 말씀은 다 긍정적인 사물이야. 이런 말씀을 들으면 심령이 정말 윤택해지고, 정신적으로 위안도 받잖아. 하나님 집에 있으니까 불안하지 않고 너무 안정되고 평온해 지상 낙원에 있는 것 같아. 이런 게 아마도 아담과 하와가 지냈다던 전설의 에덴 동산이나 아름다운 가나안 땅인가 봐. 이런 사람들과 같이 살면 재미 있고 희망 있어. 하나님 집에서 큰일까지 이룬다면 더 좋을 텐데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그런 도(道)와 하나님 말씀을 명인이나 위인들의 긍정적인 이론이나 학설 혹은 좋은 도리처럼 여긴다. 그런 것으로 여기면서 실행은 할까? (실행하지 않습니다.) 왜 실행하지 않느냐? 한 방면으로는 실행하려니 애로가 있다. 실행하려면 고난도 받고 대가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이런 말씀들을 조금 나누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처럼 하나님 믿는 것은 여가 시간에 할 일이고, 힘을 좀 쓰거나 사람들과 교회 친구로 지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성실한 사람은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이라고 해야 하며, 절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사람은 ‘사람이 어떻게 거짓말 안 하고 살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관문을 넘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다 남김없이 털어놓으면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해야 된다고? 그런 건 멍청한 거 아닌가?’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멍청한 것이고, 그렇게 처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씀은 다 맞다고 인정은 하지만, 그 사람은 완전히 그렇게 실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부류 사람의 실행은 바로 절충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 노동력이 필요할 때, 그 사람은 정말 적극적으로 손을 든다. 손을 들어 힘을 쓰겠다는 뜻을 표현하는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면 이득을 볼 수도 있고, 뭐라도 얻을지 몰라. 하나님 믿으면 축복을 누리고 은혜를 받는다고 늘 말하잖아.’라고 하는 이런 기대가 있고, 고만한 신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있어 연구할 대상이고, 여가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대상일 뿐, 전혀 진리로 삼지 않고 생명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냐? 바로 불신파다. 불신파는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에게는 죄가 있고, 죄를 사함받는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진공 속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 그런 거지 뭐. 사람은 동물과 별로 차이가 없어. 인간은 고등 동물이고 동물은 하등 동물이야. 하나님 말씀은 좋은 교리일 뿐이야. 진리라고 할 수도 없고 진리인지 아닌지도 말하기 어려워. 하나님께서 경영 계획의 3단계 사역으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데, 그건 모를 일이야.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지도 몰라. 하나님이 사람을 어느 정도로 구원하실 수 있을지, 앞으로 사람의 결말과 귀숙이 도대체 어떨지도 잘 몰라.’라고 한다. 그 사람은 이런 일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흥미를 갖지 않고, 사람이 심판과 형벌을 받아 구원받는 것에도 흥미를 갖지 않는다. 또한 어떻게 진리의 실제에 진입해야 하는지, 더 세부적으로 어떻게 해야 성실한 사람이 되는지, 본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 흥미를 갖지 않는다. 특히 사람은 순복해야 하고, 그것도 절대적으로 순복해야 한다고 하면 더 반감을 가진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할 거면 머리가 왜 필요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계속 하나님께 순복하면 다 노예가 되잖아!’라고 하는데, 불신파의 관점이 나온다. 그렇지? 그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보는데, 그것은 격을 잃는 일이고, 품위를 잃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고, 그렇게 받아들여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도(道)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은혜를 얻거나 좋은 일을 하고, 좋은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런 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베드로가 수백 번의 시련을 받고 온전케 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잖아!’라고 하며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가고, 구원하는 방식을 사람이 사람을 갖고 노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권력자가 약자를 갖고 놀고, 주인이 노예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연결시키는데, 그런 자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교회에 그런 자들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스스로 교회를 떠나겠느냐? (떠나지 않습니다.) 왜 떠나지 않느냐? 요행의 심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바깥 세상은 너무 어두워. 그리고 정말 사악하다고 하잖아. 그리고 내가 이 나이 먹고 바깥 세상에서 버티기도 힘들잖아. 어디서 버틴들 같지 않겠어. 그냥 여기서 버티자. 여기서 끝까지 못 버텨도 별로 손해 볼 것도 없잖아. 여기는 먹을 걱정 입을 걱정도 없고 사람들도 다 괜찮잖아. 날 괴롭히는 사람도 없는데다 화비하고 본분하고 대가를 치르면 축복도 받는다는데, 이건 거래가 되잖아. 밑지는 장사가 아니잖아!’라고 하면서 여러 모로 생각해 봐도 가치가 있어 보인다. 만약 어느 날엔가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고, 인내심이 바닥나서 여기가 재미없고 별로 득 될 것이 없다고 여기게 되면, 발을 빼려고 한다. ‘어차피 난 별로 손해 본 것도 없어. 내가 전심전력으로 대가를 치른 것도 아닌데 뭐! 난 기술도 있고, 업무도 익숙하고, 학력도 좋으니까 세상에 나가서도 잘살 수 있어. 부자도 돼 보고 대통령 자리도 앉아 보면, 얼마나 좋겠어!’라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한 말씀과 발표한 진리가 이 부류의 눈에는 심지어 어떤 대통령의 연설보다도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멸시하면서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기꺼이 효력하고 있고 하나님 집에 머물러 있는데, 잠시나마 하나님 집에서 버텨 볼지언정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관망하는 것이다. 잘 풀리면 복도 받고 하나님 나라도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안 돼도 난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인데, 그런 관망하는 관점으로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조물주로 여기며 경배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속에 어떤 정형들이 생길 수 있느냐? 늘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면 먼저 평가하고 탐구하고 연구할 것인데, 그다음 ‘이건 하나님께서 하신 것 같지 않아. 제발 아니길 바라.’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속에 저촉하고, 연구하고, 판정하고, 관망하는 것들이 있다. 또 무엇이 있느냐? 그것을 패역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정상 인성의 패괴나 패역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패괴 성정이 유로되어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패역 성정이라고 하고, 하나님에 대해 패역한 실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뭐라고 할까? 사탄을 상대로, 하나님은 사탄이 패역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뭐라고 하겠느냐? 원수라고, 대립면에 섰다고, 완전히 대항한다고 한다. 그런 자들은 어떤 정형들을 품고 하나님 앞에 오느냐? 연구하고, 저촉하고, 대항하고, 원망하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관망과 증오가 있습니다.) 네가 진리를 중시할수록 염증을 느끼고, 네가 진리를 교통할수록 염증을 느끼며, 순복해야 한다고 교통할수록 염증을 느끼고,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구원받고 온전케 될 수 있다고 교통할수록 염증을 느끼고 듣기 싫어한다. 그런 내용을 교통하기만 하면 그들은 앉아 있지 못한다. 이방인들 속담에 “가시 방석에 앉아 있다” “뜨거운 솥 위의 개미”라는 말이 있는데, 누가 뜨겁게 달구기라도 한 것처럼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면서 짜증스러워한다! 만약 클럽이나 술집에 가라고 하면 짜증내지도 않고 기뻐한다. 지금 너희에게 클럽이나 술집 같은 곳에 가라고 하면 가겠느냐? (안 갑니다.) 술집이나 클럽 같은 곳에 앉아 있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곳에 가는 것이 죽기보다 못하다. 그렇지?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런 곳에 있고 싶어 하는데 ‘여기 있으면 자유롭고 즐겁잖아. 인생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정말 가치 있을 텐데. 계속 진리만 들으니까 짜증나 죽겠어. 듣기 싫어.’라고 생각한다. 진리를 듣기조차 싫어하는데,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정형은 다 어떤 것들이었지? (소극적이고 저촉하고 증오하고 관망하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항상 연구하고 관망한다. 뭘 연구할까?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지 연구합니다.) 늘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데, 그것은 분량이 작은 문제가 아니라, 그런 부류 사람인 것이다! 그 부류의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부류가 ‘하나님이 날 버리신 거 아닐까?’라고 하면서 어떤 정서와 오해를 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부류 사람들은 늘 앞날과 운명이 없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항상 자신을 부인하고 규정하지만, 그런 부류 사람은 시종일관 하나님과 대립하는 면에 서서 연구하고 관망하고 저촉하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저 바보들 봐! 집도 버리고 부모에게 효도하지도 않고, 하나하나 다 거지 같이 아무것도 없잖아. 이방인들 봐, 스타일이 얼마나 좋아! 저거 옷 입은 거 봐라! 흥! 난 너희들처럼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라고 하며 조용히 추이를 지켜본다.

하나님 집 사역을 금방 시작할 때는 인원수도 적었고, 나와서 본분하는 사람도 적었다. 나중에 하나님 집의 사역이 확장되고, 사역에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본분하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는데, 어떤 사람은 형세를 보고 얼굴도 내밀 수 있고 자기 재능도 과시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덩달아 본분을 하러 왔다. 그래서 내가 “이상하네? 사역에 자리를 다 잡아 놓으니까 본분하겠다고 나온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졌지? 이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은 다 어디에 숨어 있었지?”라고 하자, 어떤 사람은 “그 사람들, 준비는 다 돼 있었죠. ‘하나님 집 사역이 크게 되면 나갈 거고 성공하지 않으면 절대 안 간다. 절대 당신을 위해 힘쓰지 않겠다’라는 거죠.”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런 자들은 기회주의자들이다. 기회주의자는 다 불신파다. 그런 자는 덩달아 나온 것이다. 하나님 집 사역이 겉보기에는 사람이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이끌고 인도하고 있으며, 성령이 하고 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한다. 이렇게 큰 사역을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하지 못한다. 이것은 다 하나님 말씀의 권병으로, 하나님의 권병으로 이룬 효과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걸 꿰뚫어 보지 못하고 ‘하나님 집의 세력이 대단해진 것에는 나도 한몫 있어. 나중에 공적 기록부에 내 이름 넣는 것도 잊으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데, 말하다 보니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이방인들이 하는 말이 어떤 게 있지? ‘저 독한 것 좀 보소.’라고 하는데, 그들은 속셈이 음험하다! 물론,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처음에 그런 속셈이나 관점이 있고, 혹은 믿음이 너무 작아도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는다. 사람의 그런 관점이나 태도를 폭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확한 인생길을 가고, 정상 궤도에 들어서게 하려는 것이다. 관망하지 말고 연구하지 말라. 하나님은 네가 연구해서 알 수 있는 분도 아니고, 네가 망원경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이 사실은 네가 어떤 근거로 연구해 낸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인정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믿는 사람이 있든 없든, 따르는 사람이 있든 없든, 하나님이 이 사역을 하는 사실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일은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고, 아무도 바꿀 수 없다. 사람은 이 사실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방금 세 번째 부류 사람에 대해 말하게 됐는데, 그 부류는 관망하고 기회를 틈타고 연구하다가, 마지막에 낌새가 안 좋으면 얼른 도망간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언제든 잽싸게 도망갈 수 있게 준비까지 해 놓았다. 그런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런 정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제라도 돌려세운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의 그런 결함과 문제를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끝까지 그렇게 관망하고 강퍅하게 있으면서, 계속 하나님께 대항한다면 문제로 된다. 사람의 실질로 보면 사람은 원래 한 줌의 흙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너를 사람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 영의 기운이 있고 피와 살이 있는 산 사람으로 만들어, 너를 살게 해준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쓰기 전에(네가 본분을 하기 전에)도 네게 먹고 입을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었는데, 너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를 쓰려고 할 때, 네가 멀리 도망가 버리고, 항상 하나님과 맞서고 대항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쓰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한쪽에 내버려 둘 것이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할 때나 율법시대, 은혜시대, 지금 말세 때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말씀을 했는데, 사람에게 묵시한 말씀이든, 직접 마주하여 하신 말씀이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한 목적은 무엇일까?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궁극적으로 그 말씀들을 얻게 되면 성정이 변화되고 구원받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하여 그 말씀들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이런 것이다. 사람으로 그 말씀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각종 역사 방식을 받아들이게 하여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이루려는 효과는 사람이 중도에서 하나님께 도태되지 않고 버림받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징계하든, 책망하든, 드러내든 혹은 어떤 때 너를 버리든, 시련을 주든, 심지어 눈치를 주든,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그 말씀들을 하는 마음, 하나님의 고심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 그러므로 사람은 시시콜콜 따지지 말고, 항상 소인배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가늠하며 하나님을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네가 원래 어떤 잘못된 관점을 고수하고 있었든, 어떤 정형을 품고 있었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너의 생명으로 만들고, 너의 실행 원칙으로 삼고, 네가 나아갈 방향과 목표로 삼을 수 있다면, 너는 꼭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걱정이라면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도리나 규례, 글귀나 구호로 대하며, 심지어 하나님 말씀을 연구 대상으로 보고, 하나님을 연구 대상으로 보고, 대립 상대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큰일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이 아닌데, 하나님은 널 구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널 구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고, 이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이 끝까지 가고 성정이 변화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언제든지 이 말을 잊지 말라. 이 말은 항상 네 귓가에서 네 귀에 달고 살아야 한다. 너는 그 말을 생각해야 하고 되새기고 묵상해야 하는데, 일이 닥치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돼. 이 일은 하나님 말씀으로 비춰 보고 하나님 말씀으로 해결해야 돼.’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고, 정확한 인생길에 들어선 것이고, 방향이 생긴 것이다. 무슨 일이든 항상 머리로 분석하고 연구하고 자기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 길은 통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이다. 네가 그런 방식으로 실행하면서 하나님과 합하고 성정이 변화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고, 영원히 될 수 없으며, 그 길은 틀린 것이다. 네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루려고 한다면, 설령 너의 그 방식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고, 네가 뿌듯해하고, 하나님도 너에게 아무런 질책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궁극적으로 너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다. 이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분명하게 알았겠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해야지,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연구하지 말라. 저촉하고 대항하는 정서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일단 그런 정형이 생기면 스스로 얼른 성찰하고 해결해야 한다. 병이 났다 하면 해결해야 한다. 너의 작은 결함들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또 끊임없이 해결되면서 조금씩 아물어 가고, 작은 결함이 갈수록 줄어들다 보면, 최종에 성과가 있을 것인데, 너는 ‘내가 이런 작은 문제들을 끊임없이 해결하다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갈수록 정상이 되고, 갈수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갈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는구나. 본분을 해도 순결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갈수록 마음을 다할 수 있게 되는구나. 이제 건성으로 하지 않고, 얼렁뚱땅하지 않게 되는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본분을 대하는 태도도 점점 바르게 되고, 내 마음도 점점 진실해져 이젠 형식적으로 하지 않게 되는구나.’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네가 이방인처럼 일을 대충대충 하지 않고, 태도가 좋아지고, 정형이 변화되고, 진심으로 바뀌어진다면 그 길은 맞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말씀을 제대로 먹어 네 안에서 작용하고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에 너는 결과를 하나 보게 될 것인데, 계속 그런 작은 결함들을 해결함으로 만회할 수 없는 큰 악결과를 빚어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네가 ‘난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방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도 하지 않고, 사탄의 끄나풀 역할도 하지 않을 거야. 난 하나님 집에서 악인이 아니고, 출교되거나 제명될 대상, 도태될 대상도 아니야. 이제는 내가 확실히 하나님께 구원받을 대상이고, 가는 길이 맞다는 걸 확정할 수 있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신 참 하나님이야. 난 믿어 의심치 않아.’라고 할 때가 되면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럼 너는 정말로 피난처에 들어온 것이다. 더 이상 ‘난 도태된 거 아니야? 난 효력자가 아니야? 난 끝장난 거 아니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날 드러내고 버리려고 하시나?’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그런 걱정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너무 많고, 깨달은 진리도 너무 적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늘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늘 오해하다 보면 늘 걱정하게 되고, 마음이 편치 않고, 늘 마음이 편치 않다 보면 오해하게 된다. 오해가 있으면 어떨 때는 저촉하는 정서가 생기고, 저촉하는 정서가 생기면 점차적으로 작은 실수가 끊이지 않게 되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큰 잘못을 하나 저지르게 되면 정말 도태되는 것이다.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작은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도태되거나 제명되거나 출교되거나 성령 역사가 조금도 없는데, 그렇게 된 데는 근원이 있지 않겠느냐? 틀림없이 근원이 있다. 가는 길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계속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길을 가지 않고, 그 길과 반대되는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과 야심에 따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자신의 지위와 명예, 체면과 욕망을 수호하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 사람도 대가를 치렀고, 화비도 했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였지만 결국 어떤 결과를 빚은 것이냐? 그 사람이 한 일들은 하나님 눈에 악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도태된 것이다. 그럼 또 기회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너무 엄중한 것이다! 사람 영 안의 문제는 바로 그렇게 생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도태되는 것은 본성 실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성적으로 적그리스도인데, 바울과 같은 부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순전히 어떤 길을 가고,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하나님은 성의를 다해 애쓰는데, 위로해 주고 권면해 주고 지적해 주고 경고하면서 여러 가지 방면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다 말씀해 주었다. 하지만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마이동풍으로 흘려듣고는 실행하지 않고, 변함없이 자신의 속셈과 욕망에 따라 자신의 지위와 체면과 허영심을 지키며 곳곳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자기 체면과 앞날을 위해 계획하고 움직이고 심혈을 기울이면서 대가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있으니 나를 위해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의 말까지 나온다! 사실, 그 사람은 자기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께 정죄받았는데도 모르고 있다. 결국 언젠가 큰 화를 초래하게 되면, 한탄을 할까? 회개하는 법을 알까? 그때도 여전히 대항할 것이다! 어떻게 대항할까? “내가 그렇게 고생해 가며 많은 성과를 올렸잖아요. 공로는 없다고 해도 수고는 했잖아요, 수고는 아니라도 고생은 했잖아요.”라고 할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이 한 일들은 가치가 없다. 왜일까? 그게 선행이냐? 본분을 한 것이냐? 진리를 실행한 것이냐? 뭘 한 것일까? 개인의 경영을 한 것이다. 자신의 무엇을 경영한 것일까? 부자 되려고? 살림에 보탤 돈벌이? 키 크려고? (자신의 명리와 지위를 경영했습니다.) 그동안 그 사람은 심오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글귀와 도리를 전면적으로 장비했는데, 말도 잘하고 교통도 잘하고 뛰어다니기도 잘하고 뭐든 하긴 하지만, 실제 사역은 하나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모으고 잘 속여 넘겨 무리를 지어 왕이 되고 지위는 차지했다. 하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지위는 없다. 그것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냐? 진리를 조금도 실행하지 않았는데, 최종 결론은 어떤 것이겠느냐?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이다. 그런 형편에서도 면류관을 바라고 있는데, 낯짝이 얼마나 두꺼우냐! 그런 것을 후안무치라고 한다! 그래 가지고도 이치를 따진다. 왜 그런 부류 사람은 최종에 도태될 때까지도 이치를 따질 수 있을까? 하나님의 경영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하나님 집에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왜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고 거기에 당당하기까지 할 수 있을까? 근원이 무엇일까? 그렇게 하는 것은 이성이 있는 것이냐? (없습니다.) 왜 그런 사람에게는 이성이 없을까? 정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큼 들었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이 한 일이 자기 관념에 부합되든 안 되든, 최소한 어떤 진리나 어떤 신조를 지키겠느냐?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맞다는 것입니다.) 그 말 한 마디에 사람은 단속받지 않겠느냐? 왜 단속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한 것이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그 사람은 그 한 마디 말의 단속을 받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는데, 마음이 얼마나 괴롭든, 패역이 있든 없든, 문제가 해결됐든 안 됐든, 하나님과 대립되는 쪽에 서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쪽 부류의 사람은 왜 하나님과 대립되는 쪽에 설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원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하고, 즐겁게 뛰어다녔든, 무엇을 바치고, 어떤 대가를 치렀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이런 식으로 처리해도 견해를 가지고, 저런 식으로 처리해도 불복하는 것이다. 이지(理智)가 있는 것이냐? 피조물의 어떠한 이지도 갖추지 않았다. 그것으로 사실을 하나 증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적도, 따른 적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동안 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그 정도로 기고만장하여 하나님의 안배나 하나님의 처분에 대항하는 정서는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심기가 불편하고 언짢을 정도일 것이다. 패괴된 인류에게는 모두 정상적인 연약이 있지만, 몇 가지 기준치에는 도달해야 한다. 하나는 본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인데,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임무는 내가 잘하든 못하든 능력이 닿는 데까지 할 거야. 설사 하나님께서 날 기뻐하지 않으시거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신대도 내게 주신 임무를 받고 잘 완성할 거야.’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지인데, 본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날 어떻게 처분하시든, 즉 나를 발로 차고 때리고 욕하시고, 나에게 쌍욕을 퍼붓거나 침을 뱉거나 목숨을 거두신다고 해도 하나님의 지위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인간인 내 지위도 변하지 않는 거야. 하나님은 영원히 나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실질과 신분은 변하지 않는 거야. 난 영원히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거야.’라고 하는 이런 이지가 있어야 한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어떻게 처벌하시든 하나님께 순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소한 있어야 할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최저선도 있어야 한다. ‘난 하나님의 뜻도 이해 못하겠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도 모르겠고, 억울하기도 하고 할 말도 있어. 그래도 하지 않을 거야. 왜냐고? 난 피조물이니까 하나님께 순복하는 게 당연한 거야. 이건 피조물인 내가 해야 할 본분이야. 지금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지 않으셨고, 나도 아직은 어리벙벙해 어떻게 실행해야 되는지, 어떻게 진리를 찾고 구해야 되는지도 몰라. 그래도 순복해야 돼.’라고 해야 한다. 이런 것이 이지가 아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떤 표현이 있을까? 첫째, “날 버리시겠다는 거죠? 난 운명도 없어졌고, 복도 받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게 됐어요. 차라리 나도 이젠 안 따를 거예요! 이제 와서 본분을 하라고 찾아요? 전에는 뭘 하셨어요? 이제야 눈에 보이시나요? 저를 차고 때리셨잖아요. 그런 태도로 대하시고도 당신을 위해 본분을 하라고요? 허, 꿈이나 꾸세요!”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태도이냐? 어떤 위치에 선 것이냐?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다. 대립하는 뒤에 숨겨진 속생각은 어떤 것일까? 여전히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겠느냐? ‘흥! 하나님이라고? 내가 볼 땐 분명히 사람이야. 세상에 하나님이 있어? 당신들 다 바보야. 다들 그러잖아. “믿으면 있고 안 믿으면 없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어디 있어? 사람 마음에 있는 거니까 마음으로 믿으면 존재하는 거야. 내가 안 믿으면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하나님도 아닌 거지.’라는 것이다. 관점이 드러났지? 그동안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 그걸 제대로 먹고, 받아들였다면 그런 관점이 생길 수 있을까? 더 심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선동하고 슬슬 움직일 것이다. “아직도 믿어요? 왜 그렇게 멍청해요? 재난이 온다고 한 지가 언제인데요? 온 적이 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멸한다면서요? 어딜 멸했어요? 화산도 폭발한다고 했잖아요? 폭발했어요? 실컷 기다려 봐요! 어유, 바보네요, 큰 손해를 보는 거예요. 믿지 마요, 믿긴 뭘 믿어요? 제가 얼마나 총명한가 봐요. 지금은 한 달에 2~3천 위안씩 벌고 있어요. 형제(자매)님은 버는 게 있어요? 뭘 먹고 살아요? 요즘 트렌드가 뭔지 좀 봐요. 옷차림이 그게 뭐예요? 촌스러워 죽겠네요. 저를 봐요, 위아래가 다 브랜드예요.” 이렇게 사람을 유혹하고 미혹하기 시작한다. 그런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는 게 지나친 것이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태도로 본분을 할까? ‘할 수 있으면 하고, 안 되면 안 하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는 거야.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지, 무슨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사람 마음이 몇 개씩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내 일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 집 일에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야 그게 제대로 하는 거고 그게 진리인 거야. 하나님 집을 위해 일을 하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는데, 무슨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그렇게 많이 해서 무슨 소용 있어? 좀 뛰어 주고 입 좀 놀려 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라는 관점이다. 그 사람은 본분에서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은 멍청하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다 드러난 것이 아니냐?

지금 너희들이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미혹되거나 좀 영향받겠느냐? 그런 자가 너의 두 다리는 움직이지 못할 수 있다. 네가(직역: 네가 두 다리를) 반석에 뿌리를 내리다 보니, 그런 자는 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네 마음에서는 생각이 움직이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다, 맞지? 예를 들어, 네 남편이 이쁜 여인을 데리고 왔다고 하자. 너는 ‘또 다른 여자를 데려와? 날 어떻게 보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조강지처잖아. 흥! 이쁘면 뭐해?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뽑겠어? 뭐라 해도 넌 뒤에 들어온 첩이야. 내가 본처라고!’라고 생각하게 된다. 시험에 빠지게 됐지? 이겨 내지 못한다. 언제면 이겨 낼 수 있을까? 분량이 있어야 한다. 분량이 갖춰졌다면 너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들고 일시적으로 연약해지긴 해도 네 본분은 내려놓지 않을 것이고, 본분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떠날 거야. 떠나고 싶어. 다른 길을 택하고 싶어.’라고 말할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보다 좋은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런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로 네가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네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뿐더러 빠른 속도로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고 어떤 통제도 받지 않으며 머릿속으로 어떤 것도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까? ‘드디어 상대를 찾았구나. 안 찾고 있었으면 내가 오히려 미안했을 텐데! 그래도 나보다 이쁜 여자를 찾았으니, 이젠 마음을 완전히 접어야겠어. 마음 놓고 하나님 앞에서 본분 잘해야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배정하신 환경이야. 하나님께 정말 감사 드려.’라고 생각할 것인데, 이러면 분량이 있는 것이 아니냐? 이건 분량이지, 너그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정감에 관련되는 방면은 사람이 가장 넘기 어려워하는 관문이다. 네가 상대를 버리는 건 괜찮아도 상대가 애인을 데리고 와서 너에게 보여 준다면 괴로워한다. ‘저 인간이 우위를 차지하게 할 순 없지. 그러면 내가 버림당한 꼴이잖아?’라고 하면서 그 정도 하찮은 일에도 기본적으로 8~10일씩 방해받는다. ‘저 두 사람을 내가 갈라놔야지. 내가 같이 안 살아도 다른 사람 찾는 꼴은 못 봐.’라고 한다. 얼마나 나쁜지 봐라! 그런 일을 이겨 내지 못해 그러는 게 아니냐? 그냥 남으로 생각하고 ‘누굴 찾든 말든, 8~10명씩 찾는다고 해도 나랑 상관 없어. 어차피 난 저 사람이랑 같은 길을 안 갈 거니까. 난 변함없이 피조물의 본분을 할 거야.’라고 하면서 그 사람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 된다. 상대가 애인을 구했을 때 네가 오히려 본분에 더 적극적이고 더 충성할 수 있다면 그것을 분량이라고 한다. 그런 분량은 일시적인 기분으로 인한 것일까? 절대 아니다. 그것은 확실히 어느 정도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너는 그 기반을 모래 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운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아무도 너를 당겨 가지 못하고, 어떤 일도 네 믿음을 흔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건 신념과 다르다. 다시 말해, 그런 일들을 너는 충분히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했을까? 머리로 분석하고 앞뒤를 재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그런 일들을 점차 내려놓은 것이다. 이미 경력했으니 별것 아닌 걸로 된 것이다. 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데, 너에게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믿음,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마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인생의 올바른 길을 가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웬만한 일은 너를 흔들지 못한다.

결혼에 관해 너는 충분히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도 기껏해야 눈물 두어 방울 흘리고 자고 일어나면 지나간 일로 넘기고, 그런 일에 영향받지 않는다. 여전히 눈앞에 있는 본분을 마음에 두고 해 나간다. 이것은 결혼 방면이다. 그럼 직업과 진로 방면은? 사람이 이생에서 앞날과 운명이 어떠하든, 사는 것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어떻게 살든 다 한 번의 생애가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평생 치고 박고 훔치고 온통 나쁜 짓만 하는데, 그런 일생은 어떠냐? 그들에게 닥친 처지는 어떤 것이냐? 항상 도망 다녀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어제 잡혔다가 오늘 풀려나고, 풀려나면 또 훔치고 빼앗다가 내일 가서 또 판결받는다. 평생 그렇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살 만할까? (아니요.) 왜 그러지 못할까? 종일 권모술수로 살다 보니 지쳐서 대머리가 다 됐다. 그 삶도 괴롭다. 비즈니스를 하고 장사하는 쪽의 사람은 어떨까? 한 푼 두 푼의 이익 때문에 매일 머리로 계산하며 숫자와 싸우고 이익과 싸우는데, 그것도 참 힘들다. 평생 돈을 벌었지만 나중에 먹는 것을 보면 여전히 일상 메뉴다. 기껏해야 남들이 좀 높이 봐주는 게 다다. 대부분이 다 정상적인 일상을 보낸다. 정상적인 일상에는 어떤 일이 있느냐? 행복이 있느냐? 부부가 결혼해서 3~5년은 알콩달콩 꿀이 떨어지게 행복하게 지내면서 영원을 약속했는데, 3년 뒤에 남자가 외도하거나 여자가 딴마음을 품으면 5년만에 뿔뿔이 흩어진다. 아이는 아빠나 엄마에게,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다 그저 그런 일들일 뿐, 역시 행복을 논할 수 없다. 또 예를 들어, 잘 지내고 있는 부부가 있는데, 여자는 현모양처고 남자는 모범적인 남편이고 자녀들도 많다고 하자. 그 일생은 어떨까? 보기에는 화목한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어떻게 행복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느냐? 20대들은 아직 평생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하거나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 삶이 별로 관성적인 삶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아직 지겹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40대가 되면 그런 삶이 지겹다고 생각한다. 특히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알람이 울려야 기상하고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마지못해 출근하는데, 빨리 주말이 오기만을 바란다. 5일간 근무하고 겨우 주말을 맞이해 늦잠을 자게 되는데, 10시에 해가 엉덩이를 비출 때까지 쭉 잔다. 그리고 그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소파에 누워 뒹굴기만 해도 가장 좋은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날도 8~10년 쯤 지나면 차츰 지겹다. ‘사람의 일생이 고작 이렇단 말인가?’라고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50대가 된다. 다시 본연의 일에 좀 더 신경쓰려고 해도 이제는 기력이 딸린다. 일생 동안 뭘 했지?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저 돈 버는 기계, 살림하는 로봇에 불과했다. 여자는 부엌에서 돌지 않으면 아이나 남편 곁을 맴돌고, 남자는 밖에서 일로 분주하게 도는데, 목적은 집에다 돈을 많이 쌓아놓기 위해서이다. 세월이 흘러 눈 깜짝 할 사이에 60대가 되는데, 그때는 크게 바랄 것도 더 없다. 본연의 일을 좀 하려니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을까? 힘을 쓰면서 인력거를 몰아 손님을 태우려고 해도 그럴 만한 기운이 있을까? 그것이 제대로 된 일로 보이지도 않는다. 노인들과 장기 두는 것은 본연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원로 간부나 퇴직 간부들과 만나서 옛이야기를 좀 나눠 보기도 하는데, 오래되면 그것마저도 재미없다. 현재 국가 정치나 형세에 대해, 세계 형세에 대해 말해 보고, 그다음은 역사에 대해서도 풀어 보다가 말하던 사이에 깜빡 잠이 들어버린다. 노인들끼리 모여 앉았는데 생기가 하나도 없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는데, 생기 있는 사람이 없다. 일생은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탄식만 한다. 그것이 평범한 서민들의 삶이다. 바로 그러하다.

평생에서 빛났던 적이 있었든, 아니면 많이 파란만장했든, 네가 어떤 나날들을 보냈든, 생활이 가난했든 부유했든, 다 그냥 그랬었다. 하는 것이 다 먹고 마시고 놀거나 가정의 소소한 일들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일생 동안의 심혈과 정력을 다 그런 일들에 쏟아붓는다면, 죽을 때까지 그래 봤자 의미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없느냐? 무엇과 비교해 의미가 없다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한평생 음악을 하면서 성과가 있었다. 악단 지휘를 했는데, 매번 지휘를 하고 나면 자신이 지휘한 악장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인류에게 가장 좋은 작품을 남겼으니, 자신의 가치는 그 무대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인생의 다양한 장면이나 각종 인생을 그렸다. 그 사람은 자신의 일생의 가치가 그 화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생에서 적지 않은 미술 작품을 후세에게 남겼는데, 그 사람이 가져온 건 무엇이냐? 고작 그 그림들이다.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죽으면 그 그림은 가치가 오른다. 그러면 갤러리의 가격을 조절하는 사장들이 이득을 챙기고 목돈을 벌게 된다. 화가가 생전에 거리에서 그림을 팔 때는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죽자마자 그 그림들의 가격이 한순간에 폭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몇십 만 위안씩 들여서 진본을 하나 사는데, 사온 뒤에는 어디에 두느냐? ‘쾅’ 수집실에 넣어 두고 문을 잠근다. 그림은 햇빛도 들지 않는 수집실에 놓여져 있는데, 가치가 어디 있겠느냐? 네가 한평생 어떤 사업을 하고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든 나중에는 다 없어진다. 바로 이런 일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지? 정치 위인, 경제 위인, 다양한 분야의 명인,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들, 성경에 나오는 예언가인 이사야나 다니엘 등, 그 사람들은 다 어땠느냐? 그들이 행했던 일들과 그 사람 자체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보다 쓸모가 있고 가치가 있느냐? (없습니다.) 왜 없느냐? (그들의 말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맞다. 그럼 사람은 뭘 얻어야 가장 가치가 있겠느냐? (진리입니다.) 사람이 한평생 어떤 큰일을 한다고 하자. 예를 들면, 네가 컴퓨터를 다룬다고 하면, 컴퓨터가 너에게 있어 어떤 가치가 있느냐? (본분하는 도구입니다.) 그 도구로 본분을 하는데, 네가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는 데에 그 도구가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 물건은 가치가 있다. 하지만 기념할 만한 가치는 없다. 그렇지? 만약 네가 컴퓨터 기술이 뛰어나 요즘의 최신 소프트웨어를 다룰 줄 알지만 본분하는 데에 쓰지 않았다면, 너의 기술이 그래도 가치가 있겠느냐? 그건 쓸모없는 것이고 허무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만물은 없어져도 유일하게 뭐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지? 유일하게 하나님 말씀만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물은 어떤 것들을 포함하고 있느냐?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어쩌면 이 지구는 마지막에 다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럼 어떤 사람은 지구가 없어지면 우린 어디에 머무냐고 물어 본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도 두려운 것이냐?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너희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너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만 믿으면 된다. 하나님이 너를 어디에 두면 그곳에 있게 될 텐데, 틀림없이 지구에 있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다. 좋은 곳이 많고도 많은데, 네가 뭔 걱정이냐! 말하자면 이 인류의 어떠한 공헌도, 어떠한 제작물도, 높은 빌딩도, 도시도 혹은 다양한 물질적인 것도, 값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다 없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해를 못하고 “만물이 다 없어진다고요, 왜 없어지는 거예요? 헛 만든 거예요? 인류를 위해 효력 안 해요? 사람이 다스리게 하지 않을 건가요?”라고 한다. (만물을 다 새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맞다, 다 새롭게 할 것이다. 그럼 왜 이 시대를 폐하고 이 만물을 없애야 하겠느냐? 그런 것들은 이 인류에게 아무런 가치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 중에서 이 인류에게 하나님 말씀을 대체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아무리 좋고, 사람의 눈에서는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너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공허함이다. 진리가 가져다줄 수 있는 것과 진리가 가져다줄 수 있는 가치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사람은 살아도 무엇이겠느냐? 살아도 허울일 뿐이다. 가치가 없다. 그렇지? 사람이 어느 정도의 재간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어떤 존재일까? 컴퓨터처럼 그냥 도구인 것이다. 컴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행하게 된다면, 그냥 기계가 아니다. 기계보다 낫고, 너는 존재하는 가치가 있게 된다.

하나님 말씀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만물은 다 없어져도 하나님 말씀만은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한 이 말씀은 사람에게 힌트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뭘 말할까? 진리와 하나님 말씀은 언제든지 다 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진리와 말씀이 인류에 대한 가치와 의의는 물론이고, 그 말씀의 내적 함의, 실정도 언제든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다 말씀 그대로이지 다른 걸로 변하지 않는다. 그 실질은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진리가 맞느냐? (네.) 그럼 그 말씀은 언젠가 없어질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왜 없어지지 않느냐? 사람에게 성실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실질은 성실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에게는 성실하고 신실한 면이 있는데, 하나님의 이 실질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며 바뀌지 않는 것이다. 시대나 지리나 공간의 변천에 따라 바뀌지 않고 그 실질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럼 그 실질이 영원히 존재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긍정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조물주가 갖춘 실질이기 때문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물주가 갖춘 그런 실질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진리다. 조물주가 너에게 베풀어 준 진리들을 네가 마음에 실제화시키고, 그 말씀을 제대로 먹고 마시고 실행해 내고 살아낸다면, 사람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겠느냐? 가치 있게 살지 않겠느냐? 그럼 너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지 않겠느냐? 그것이 너의 살길이 아니겠느냐? 살길을 찾은 것이다. 그렇지? 하지만 네가 로봇처럼 이 진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떨까? 언젠가는 다 폐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말씀이 사람에게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바로 네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다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너에게 생명이 될 수 있지 않으냐? 그 생명은 뭘 말할까? 알고 있느냐? 네가 살 수 있게 되었고, 네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네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말씀들을 깨닫고, 이 말씀대로 실행한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산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궤사한 사람이라면, 하나님 눈에 어떤 사람으로 보이겠느냐? 산송장이고 죽은 자이다. 죽은 자는 없어져야 되지 않겠느냐? 만물과 다름없이 다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없는 것, 진리와 관련이 없는 것은 다 없어질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나 비물질적인 것도 다 없어질 것인데, 하나님이 시대를 바꿀 때, 세상을 새롭게 할 때 다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관련 있는 모든 것들만 다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냐? 이렇게 중요한데, 너희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해야 할 중요성을 알고 있다 해도 진입하려면 길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중시해야 한다. 만약 네가 늘 걱정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데, 바로 패괴 성정이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안에서 흘러넘치게 내버려둬야 할까? 그것이 유로되게 해야 할까? 그것대로 살아내야 할까? 너는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 ‘난 왜 늘 이런 생각을 할까? 왜 자꾸 걱정할까? 이 정형은 잘못된 거야. 해결해야겠어.’라고 해야 한다. 네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발전이 아니겠느냐?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면 어떤 사람이겠느냐? 마비되고 멍청하고 패역하고 강퍅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그게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해결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구만 뭐! 왜 해결해야 돼? 내가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손해 보는 거야.’라고 하는데, 그러면 강퍅한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마비되었다. 자신에게 그런 정형이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을 모른다. 그런 사람은 ‘사람은 이렇게 문제를 생각해야 되는 게 아닌가? 사람 마음은 원래 이렇게 움직이는 게 아닌가? 생각하다 보니 이런 것까지 생각하게 됐는데, 이건 아주 정상이 아닌가? 이건 물이 흐르면 도랑이 생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고 결함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몸이 불편하자 감기에 걸릴 것 같아 얼른 약을 찾아 먹는데, 어떤 사람은 무디다. 속에서 염증이 생기고 곪아 터지는데도 모르고 계속 사람들과 “이틀째 불편하네요.”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그게 감기의 조짐인 걸 모르고 해결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감기 걸리면 걸렸지, 그런다고 어쩌겠어?’라고 하면서 물을 마셔야 하는 데도 마시지 않고 그냥 버틴다. 사람은 자신의 여러 가지 정형을 대하는 것이 자신의 질병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제때에 해결하고 어떤 사람은 해결하지 않는다. 해결하지 않고 강퍅한 사람은 어떤 사람에 해당할까? 철부지 아기와 같다. 2~3개월, 3~5개월이나 1살짜리 어린애가 어떤 때는 자기가 똥 싼 것도 모르고 그냥 똥 위에 앉아 끈적끈적하고 뜨끈뜨끈해도 아주 잘 노는 것과 같다. 아이는 그 어떤 곳에 앉아 있는 것보다도 더 편해하는데, 어른이 아이의 바지를 벗기고 깨끗하게 씻겨 주려고 하면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그것은 어떤 표현이냐? 그것이 바로 분량이 아주 작은 표현이다. 조금 크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형제(자매)님, 소극적이신데, 좋아 보이지 않네요.”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전 그냥 소극적일래요, 그냥 소극적일래요.”라고 한다. 어떤 것일까? 그게 바로 똥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모르고,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진리를 실행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기 속의 정형을 성찰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 속셈, 적대적인 정형, 패역한 정형이나, 각종 성정의 유로를 다 파악해야 한다. 그다음 자신을 증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정의를 지향하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그러한 실행의 길을 갖추지 못했다면 진리 실행이라고 하지 못한다. 사람이 패괴 성정에서 살면서도 자아도취하고 그것을 누리고 만족스러워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가 똥 위에 앉아 있으면서 향기와 구린내를 구분 못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대학을 나와 학벌도 좋은데, 이런 사람이 다 똑똑한 것 같으냐? 사람은 진리 앞에서 다 바보인 것이다, 모른다. 똥 위에 앉아 있는 아이와 똑같다. 지적해 줘도 듣지 않는다. 사람은 분량이 어느 정도 자라서 심지도 있게 되고 거기에 적합한 환경도 있고 점차적으로 실행해야 믿음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기 시작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도 갈수록 줄어들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갈수록 줄어든다.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이나 오해가 줄어들고 적어질수록 사람의 믿음은 커지는데, 일이 닥쳐도 의심하지 않게 되고, 소극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이 줄어들고, 적극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들이 많아진다. 그러면 굳세진 것이 아니냐? 굳세다는 것은 뭘 말할까? 바로 사람에게 죄를 이기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인데, 패괴 성정과 싸워 이기고, 주변의 옳지 못한 인사물과 싸워 이기고 주변의 인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강해지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이 커지며,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고난받으려는 심지도 커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도 생기고, 자신이 구원받아 온전케 되겠다는 결심과 심지도 커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갈수록 좋아진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너에게 소극적인 정서나 소극적인 정형이 있거나 간혹 어려움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는 지금 어떤 정형에 놓여 있느냐? (어떨 때, 어려움에 부딪히면 좀 소극적이 되긴 하지만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마음이 좀 괴롭긴 하지만 향상할 수 있고 이겨 내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자발적으로 그걸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분량이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며, 일종의 소극적인 정형에서 피동적으로 전진하고 본분을 대충대충 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일반적이고 흔히 볼 수 있는 정형이다. 그리고 가장 최악인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정형인지도 모르는데, 정형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틀린지도 모르며, 소극적인지 적극적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런 경우가 가장 문제다. 그런 것들을 전혀 모르면 그 사람은 어떤 방향으로 실행할까? 그건 더 모른다. 이것이 분량이 가장 작은 표현이다. 그저 열심밖에 없으며,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분별력도 없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간증인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분량이 작은 표현이다. 누군가 그 사람에게 본분을 충성스럽게 하고 있느냐고 물어 보면 “충성심이 있죠.”라고 하고, 얼렁뚱땅하는 것은 없느냐고 물어 보면 “없는데요.”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뭐든 다 잘하고, 뭐든 다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다른 사람이 연약해지면 “어떻게 연약해질 수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해야죠.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걸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권고한다. 실제라고는 별로 없고, 생명 성정이 변화되는 정상적인 정형과 과정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저 그 몇 마디로 끼워 맞추는데, “어느 땐데 아직도 연약하고, 가족까지 챙겨요?”라고 한다. 항상 그 몇 마디로 다른 사람을 채찍질하고, 다른 사람을 교육하는데, 실제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분량이 아주 작은 표현이다. 너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느냐? 중간 단계이냐, 아니면 상대적으로 좀 좋은 편이냐, 아니면 분량이 아주 작은 쪽이냐? (아직은 소극적일 때가 좀 더 많습니다.) 적극적인 면이 많아질 때면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분량이 있어 짐도 짊어질 수 있고, 어떤 일이 너에게 어려움이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찾고 구할 줄 알 때면 너는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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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저촉(抵觸): 대립하고 저항하는 심리 상태.

④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뜻함.

⑤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⑥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⑦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⑧독단전행(獨斷專行): 자기 혼자만의 판단으로 제멋대로 행동함.

⑨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⑩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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