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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편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진리를 얻는 기본 공과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생명 진입은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네가 패괴를 유로했거나 견식이 없는 일들을 했거나 하나님이 혐오하고 상심하는 일들을 하게 되었다면, 그런 일이 있은 뒤에 너는 반성을 해야 한다! 어떻게 반성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일까?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은 ‘이런 일이 임하면서 내가 드러났어. 나는 아직도 패괴가 있구나.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것에 순복해야지. 하나님은 정말 잘 드러내신 거야. 정말 시기적절했어! 겉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확실히 아무도 나와 교통하지 않았고, 내 결함을 보고도 지적해 주지 않았어. 그 사람들은 무골호인일 수도 있고, 내게 밉보일까 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건 그 사람들의 일이니까.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요구에 맞을까? 어떻게 해야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일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이런 것을 진리를 실행하는 태도,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 진리를 사랑하는 태도라고 하고, 올바른 길로 가는 태도라고 한다. 그럼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은 어떨까? 일이 닥치면 겉면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 사람이 틀린 거야. 그 사람이 나쁜 거야. 그 사람이 믿은 시간이 짧아서 그런 거야. 나에게 선입견을 갖고 있어서 그런 거야. 그 사람이 날 신경 쓰지도 않고, 날 배려해 주지도 않은 거야. 난 원래부터 세심하지 못한 편이고, 고지식하고, 남한테 당하기만 하는 사람인가 봐.’라고 하면서 별의별 원인이 다 나온다. 네가 그런 원인들을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진리 실행을 대체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느냐? 대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에게 어떤 이유가 있든, 정말 크게 억울함을 당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진리 실행에 관련될 때 하나님은 너의 태도를 보려고 한다. 그런데, 네가 원망한다고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100년 동안 원망해 봤자, 네가 억울한 생각으로 꽉 차 있어 봤자, 너의 이유가 어떤 법관을 찾아가도 100% 승소한다고 해봤자, 또 어떠하겠느냐? 너는 진리를 얻었느냐? 하나님 앞에서 칭찬이라도 받았느냐? 하나님이 “썩 물러가거라.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빨리 썩 물러가거라. 나는 네가 싫다.”라고 하게 된다면, 끝장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나는 네가 싫다.”라고 한 마디를 하는 순간, 너는 드러나 규정되는 것이겠지? 하나님은 왜 너를 규정하겠느냐?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배치와 주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겉면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너를 사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는데, 혈기와 천연적인 것이 너무 많고 성정이 너무 교만하여 교훈으로 바로잡지 못할 사람이라고 본다. 그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는데, 어디에 사용하는 것이냐? 진리는 너에게 외치라고 있는 것이냐? 진리가 구호이냐? 진리는 단지 너의 행위를 규범화시키거나 구호만 외치라고 있거나 너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너에게 일이 닥쳤을 때, 그 진리로 살라는 것이고, 너에게 실행의 길을 주는 것이고,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하는 게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천연적인 것에 따라, 패괴에 따라, 사탄이 가르쳐 주고 알려 준 것들에 따라 실행하지 않게 되고, 사탄의 논리와 처세 철학에 따라 살지 않게 되고, 반대로 네가 깨달은 진리에 따라 살게 된다. 그렇게 ‘사는 것’을 진리 실행이라고 하는데, 그래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진리에 순복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맞다, 먼저 그런 태도가 있어야 한다. 너는 “전 정말 아는 게 없어서요. 전 정말 우매해서요. 전 분량이 너무 작아서요. 전 믿은 시간이 너무 짧아서요.”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네 말이 맞다. 그것은 객관적인 이유다. 그러나 네가 진리를 듣지 못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들었습니다.” “그럼 너는 어떤 것이 순복인지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네가 알고 있는 이상, 너를 정죄할 수 있다.” “너는 어떤 것이 진리에 순복하는 태도인지 모르느냐? 어떤 것을 진리에 순복하는 것이라고 하는지 모르느냐? 어떻게 진리에 순복해야 하는지 모르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배치에 순복해야 하는지 모르느냐? 어떤 것이 네가 보여야 할 태도인지 모르느냐?” “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 된 것일까? 네가 알고 있다면 실행해야 하고, 일이 닥칠 때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활용하지 않는다면 진리겠느냐? 네가 활용하지 않게 되면 그것은 도리이고 구호인 것이다. 네가 활용해야 진리이고 네 생명이 될 수 있다. 일이 임하게 될 때면 너는 천연적인 것을 드러내며 ‘이건 틀렸어, 저건 잘못됐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다 잘못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너에게는 정말 잘못도 없고, 패괴도 없는 것일까? 패괴가 심각한 것이냐, 아니면 잘못이 심각한 것이냐? 패괴가 더 심각한 것이다.

그럼 패괴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패괴를 해결하는 첫 관문은 네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네게 배정해 준 다양한 환경에 순복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어떨 때는 네 관념에 부합되고, 네 입장에서 할 말이 없는 문제이니 당연히 순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어떨 때는 예상치 못한 경우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가 신나게 일하면서 기뻐서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봐,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봐.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 늦게까지 많은 고생을 했잖아.’라고 하며 으쓱해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뺨을 두 대 맞거나 책망을 받게 되면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진리를 실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행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나도 내 이유가 있고 내 생각이 있지만, 먼저 말하지 말고 들어야겠어. 먼저 받아들이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겠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입을 가리는 것이다. 분명하게 알지 못한 상황에서는 먼저 들어 본다. 다 듣고 난 뒤에는 자기 관념에 좀 맞지 않는 것 같고, 받아들이기도 매우 어렵겠지만 ‘피조물로서 어떤 이지가 있어야 되지?’라고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바로 진리에 순복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에 순복하고, 상면의 안배와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복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하라고 했을까? 예를 들어 ‘난 파란색을 좋아하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하필 녹색으로 하라고 해. 어떤 걸로 해야 되지?’라는 경우에는? (하나님 집의 요구대로 해야 합니다.) 왜? 그것을 실행의 원칙이라고 한다. 실행의 원칙은 어떤 것이냐? 먼저 순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어떨까? “녹색으로 하라고요? 난 파란색으로 만들었단 말이에요. 당신이 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네요. 먼저 내가 어떤 원칙과 일리에 근거해서 파란색으로 했는지부터 들어 보세요.” 이런 것은 어떠냐? (그것은 순복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복하지 못하는 원인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에게 자신만의 이유와 핑계와 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가 있으면 순복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유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부인하지 못하겠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우선 제 것은 한쪽에 둘게요. 제 것은 두 번째 자리에 두고 형제(자매)님의 것을 첫 자리에 놓겠습니다. 먼저 형제(자매)님의 것대로 해 보겠습니다. 한동안 그것대로 실행하다가 확실히 제 것보다 좋으면 완전히 당신의 것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순복하면 갈수록 순결해지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소처럼 떠받으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패역이다. 순전히 혈기이고, 천연적인 것이고, 패괴 성정이다.

순복의 공과는 가장 어렵기도 하지만 가장 쉽기도 하다. 어렵다면 어떤 부분이 어려운 것일까? (자기 생각이 있는 것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이 있고, 독선적이고, 교만하다. 생각이 있는 것이 어려움은 아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누구나 다 머리가 있고, 마음도 있으며, 공부도 하다 보니, 생각은 다 있다. 어려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려움은 패괴 성정이다. 패괴 성정이 없다면 아무리 다른 생각이 있다고 해도 순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난 모든 일에서 다 순복할 수 있고 이유를 따지지 않을 수 있어. 내 생각을 주장하지 않을 거야.’ 혹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규정하지 않을 거야. 이 일을 단정짓지 않고 이유를 따지지 않겠어.’라는 이런 이지를 갖춘다면, 순복하기도 쉽다. 규정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독선적이지 않은 표현이고, 고집하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 이지가 있는 표현인데, 거기에 순복까지 할 수 있다면 진리를 실행한 것이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첫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규정하거나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규정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 것이 바로 순복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면 순복하기도 쉬운데, 진리를 실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순복하기 전에 너는 두 가지를 예비하고 있어야 하고, 미리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고, 무엇을 해야 진리를 실행하는 태도가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어렵다고 하자니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어렵지 않다고 말하자니 또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닌데, 그러면 어디가 어려운 것일까? 바로 패괴 성정 부분이다. 그러므로 네가 순복할 때, 어떤 심리 상태였든, 어떤 정형이었든, 문제는 다 패괴 성정에 있는 것이다. 만일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패역하고, 그릇되고, 극단적이고 고집스럽거나 강퍅한 등등, 이 몇 가지 패괴 성정을 해결한다면, 순복하는 것도 쉽다. 그러면 이 몇 가지 패괴 성정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너에게 그러한 생각들이 들 때 기도해야 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뭘까?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안배에 순복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거야! 절대 내가 나서는 것이 아니고, 나 혼자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방법을 생각하고 규정하는 게 아니야.’라고 해야 한다. 네가 이 두 가지를 지키면서 일을 할 때, 이 두 가지로 가늠한다면, 너의 이성이 정상인 것이다. 혹은 책망받을 때 너는 ‘내가 해야 할 것은 규정하거나 결정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 거야. 내가 이유를 따지는 순간 고집하는 게 되는 거야.’라고 해야 한다. 고집한다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 바로 소처럼 떠받는 것인데, ‘네가 하나라고 하면, 난 무조건 둘이라고 할 거야.’라는 것이다. 이것이 순복하는 표현일까?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다른 사람이 말하기도 전에 다 규정해 버리는 것은 어떤 성정이냐? 그것은 교만한 성정이다. 네가 ‘내가 정말 자신 있게 규정할 수 있을까? 내가 제대로 본 걸까? 내가 제대로 본 거라고 해도 규정짓지 않을 거야. 계속해서 더 찾고 구해 볼 거야.’라고 하면서 규정하기 전에 찾고 구하다 보면 자신이 규정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책망도 받게 되면, 규정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 너의 태도는 훨씬 온화해지고 유순해지고 소처럼 떠받지 않을 것인데, 그 방면의 패괴 성정이 해결되어 유로되지 않는 것이다. 네가 속에서 그것을 소멸시켜 스스로 소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아주 쉽게 순복할 수 있게 되고, 힘이 들지 않으며, 별로 어렵지 않은 것이다. 설령 어려운 부분이 조금 있다 해도 스스로 속에서 이미 소화시켰고 해결한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널 보고 “형제(자매)님은 훈계와 책망을 받았는데, 어떻게 울지도 떠들어 대지도 않고, 소극적이 되지도 않고, 해야 될 일을 할 수 있는 거죠?”라고 한다. 그럼 너는 “난 해결했어요.”라고 답하게 된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해결한 건가요?”라고 묻게 되면, 너는 “길이 있어요.”라고 답할 수 있는데, 어떤 길일까? 바로 위에 있는 몇 가지이다. 너는 어느 방면의 패괴 성정을 대상으로 놓고 해결한 것이다. 어떤 일에서든 항상 자기가 결정하려고 하고, 항상 이유를 따지려고 들고, 항상 고집하려고 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네가 이 몇 가지를 고집하는 순간, 어떤 것이든 한 방면의 패괴 성정을 유로하게 만든다. 패괴 성정을 유로하게 되면 진리를 찾고 구할 수 있겠느냐? 그때는 진리를 찾고 구한다고 해도 형식적인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찾게 된 진리와 네가 규정했던 것이 상충되면,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쉽사리 진리에 순복할 수 있겠느냐? 그때 너는 순복하기가 아주 힘들 것이다. 네게 순복하라고 할 때 순복하지 못하면 거역하게 될 것이고 또 이유를 따지게 될 것이며 ‘분명히 내가 맞는데도 나보고 순복하라고 하네.’라고 할 것이다. 너는 순복하지 못할 뿐더러 맞서기까지 할 것인데, 그럼 문제가 크지 않으냐? 그러면 심각한 것이다.

순복이란 이렇게 간단한 공과인데도, 사람은 순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 한잔 줘.’ 했더니 차를 주지 않았고, ‘차 한잔 줘.’ 했더니, 술을 주지 않았으며, ‘술 한잔 줘.’ 했더니 식초를 주지 않은 것을 ‘난 순복했어. 이렇게 간단한 거야.’라고 생각한다. 순복이 그런 것일까? 순복에는 많은 세부적인 정형 문제가 있다. 사람에게 많은 어려움, 관념, 상상이 있다 보니, 거기다 고학력인 수재에 사회적으로 지위도 있고 돈도 있는 등 다양한 우월성적인 자신의 자본이 더해지면, 참 곤란해진다. 고슴도치처럼 되는데, 가시를 뻗치면 아주 커 보이나 실제로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뭘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일이 임할 때마다 많은 어려움이 생기고, 관념과 상상이 생기고,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이유를 따지고, 오해를 가지며, 심지어 책망을 받거나 스스로 좌절을 좀 겪으면 소극적이 된다. 거기다가 주변에서 부정적인 소리를 하면, 현혹되거나 미혹되며, 불신파가 하는 소리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런 것들은 다 어려움이다. 그런 어려움들을 해결하게 되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쉬워진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얻는 것도 아주 순조롭게 질서가 잡힌다. 그러므로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해야 하는 것이 첫 관문이다. 그럼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될까? 하나님이 주변에서 일으키는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이다. 주변의 인ㆍ사ㆍ물이 네게 책망으로 올 때도 있고, 시험으로 올 때도 있으며, 시련으로 올 때도 있고, 방해로 올 때도 있으며, 소극적인 것을 퍼뜨리려고 올 때도 있는데, 네가 이런 것들을 다 해결하면, 너에게는 면역력이 생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진리를 얻는 길의 첫걸음은 무엇이냐? 순복하는 공과부터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와서 각 방면의 진리를 얻게 되는 과정의 가장 기본적인 공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방금 내가 한 가지를 말했는데, 하나님이 주변에서 일으키는 환경, 인ㆍ사ㆍ물이라고 했다. 환경이 닥쳐오면 너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원망하고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따지고 트집 잡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진리의 각도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먼저 순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말했지만 결국엔 순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 너는 먼저 순복해야 한다. 이런 이치와 저런 원인을 따지면서 누구의 잘못인지 추측하지 말아야 한다. 늘 ‘누가 맞지? 누가 잘못했지? 누구의 잘못이 더 크지? 누구의 착오가 더 작지?’라고 분석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일까? 순복하는 태도일까?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가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첫 번째 방면의 실행 원칙이다. 첫 번째 방면은 어떤 것이냐? 보통 내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 내용이 좀 많아지면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머릿속에 먼저 질서가 잡혀야 하고, 청결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각 방면의 진리의 관계를 잘 모르게 되고, 진리 실행이란 무엇인지 모르게 되는데,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각 방면의 진리는 논리가 아니라, 모든 방면이 다 관계가 있는 것이다.

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었느냐? 바로 하나님이 주변에서 일으킨 인ㆍ사ㆍ물에 대해 네가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 (순복하고, 찾고 구하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하나 더 있었는데, 무엇이냐? 그 사이에 잊어버렸구나. 그게 바로 진리가 사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않은 것이다. 왜 뿌리를 내리지 않았을까? (사람 안에 본래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맞다, 그런 것이다. 너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이고 진리가 아직 너희의 생명이 되지 않았으며, 아직 네 안에서 뿌리가 내려지지 않은 것이다. 네가 그런 말들이나 용어만 기억하려고 한다면, 기억하기 어렵다. 그것이 너의 실제가 될 때, ‘오늘 내게 임한 일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겠어. 난 이렇게 실행할 거야.’라면서 그대로 실행해서 수확이 있게 되면 그 일이 너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데, 그럼 너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라는 말을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용어가 아니라 실제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실행했고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주변의 인ㆍ사ㆍ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입니다.)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옳고 그름을 분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에 대해 내가 세부적인 사항을 몇 가지로 말했지? (맞든 틀렸든 이유를 따지지 말고 먼저 순복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석하지 않는 것, 이치를 따지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트집을 잡지 않는 것, 인ㆍ사ㆍ물에 빠지지 않는 것, 객관적 원인을 분석하지도 않으며, 그 일을 사람의 머리로 분석하지 않고 연구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순복부터 하는 것이다. 순복한다는 것을 쉽게 말하면 어떻게 표현할까? 이방인들은 “이런 일이 있어도 화부터 내지 말고, 진정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도 용어가 하나 있는데, 무엇이라고 하느냐? 이방인들은 ‘우선 무시하고 나중에 보자’라고 한다. ‘우선 무시하고 나중에 보자’라는 것은 처세 원칙이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의 표현법이고, 실행을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찾고 구해야 한다. 그러면 실행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 당신께서 제게 이런 환경을 안배해 주셨습니다”, 이 한 마디는 무엇을 뜻하느냐? 마음에 그렇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있는 것인데, 그 환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배치해 준 것이고, 자신의 패괴 성정을 상대로 배치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오늘 제게 이런 환경이 임했는데,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게, 거역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하고, 패괴 성정을 유로하지 않고,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기도를 마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앉아서 ‘그날 장 형제가 뭐라고 했더라? 김 형제는 눈길이 썩 좋지 않았어. 왕 자매도 말투가 많이 딱딱했었는데...’라는 생각만 하는 이런 태도는 어떠냐? 또 인ㆍ사ㆍ물에 빠지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으면, 두 번째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교통을 들어 본다. 그러다가 ‘이 일이 임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뭘까? 아니야, 장 형제의 눈길이 썩 좋지 않았어.’라고 하면서 그 일에서 맴돌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항상 반복되는데, 왜 그럴까? 사람 내면에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그것을 무시하면 된다고 하는데, 무시하면 되는 것일까? (아닙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찾고, 자신의 문제를 찾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찾아야 한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은 맞아. 그런데, 어떤 문제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하나님 말씀도 보고 교통도 좀 들어 봐야겠어.’라고 하면서 3~5일, 8~10일 그 방면에 관련된 설교, 교통, 하나님 말씀, 찬양, 동영상을 찾아보는데, 그 문제를 중심으로 그런 유형의 환경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였는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보면서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날마다 그 일 때문에 고민하고 생각하게 되고, 마음이 늘 그 일로 꽉 차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형제자매를 만나게 되어 상대방이 정말 많은 말을 하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핵심적인 것을 잡게 되는 것이다. 듣는 순간 ‘그 일이 임한 것은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신 게 아니겠어? 나한테는 그런 치명상이 있었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근원을 찾게 된 것이다. 그다음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신 것이 맞고, 근원도 찾았고, 하나님의 뜻은 알긴 했는데, 어떻게 실행해야 되지?’ 생각해 보지만, 모르겠다. 확실히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확정했다. 이 이상(異象)은 이미 바탕으로 깔려 있고, 아주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도 알았고, 하나님께서 시련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긴 했다. 그럼에도 다시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날 시련한다고? 아닌데, 장 형제 말투는 확실히 잘못된 거였어!’라며 또 패괴 성정이 나오고, 또 인ㆍ사ㆍ물에 빠지려고 하는데, 여전히 순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시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결점을 찾고 문제를 잡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헤어나오고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이다. 패괴 성정은 바이러스 같아서 그것을 깨끗하게 없애지 못하면 항상 밖으로 번지고,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전 정말 너무 내키는 대로 하고, 정말 교만하고, 육체를 너무 아끼고, 정말 패역합니다. 절 징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징계해 달라고 했더니, 속으로 걱정이 좀 생긴다. ‘하나님께서 정말 징계하시면 어떡하지?’, ‘아니야, 기도하면서 심지(心志)도 세우고 하나님께 징계해 달라고 해야겠어. 징계가 온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 정말 질병을 주시거나 죽게 하신다고 해도 순복해야지.’라고 하면서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이 굳세진다. 느낌이 다르다. 어떤 느낌이 들까?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시련을 느끼고, 하나님의 손길이 내게 임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너무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가까이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 주시고, 친히 나에게 이런 시련을 안배하셔서 날 훈련시키고, 순수하게 만들어 가시고, 이 속에서 공과를 배워 진리를 얻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은 정말 날 사랑하시는구나!’라고 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깨우쳐 주고 빛 비춰 준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될 때는 분량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런 것을 알게 되니까 너무 편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날 시련하시는 것이라면 난 어떤 자세를 갖춰야 될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면서 아주 빨리 순복하게 되고 이유를 따지지 않게 된다. ‘내가 순복하지 않고, 계속 이유를 따지고, 계속 다른 사람이나 객관적인 환경에서 원인을 찾고, 트집을 잡고, 잘잘못을 분석한다면, 난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야. 개 돼지만도 못한 거야.’ 속에 가책을 받고, 편한 느낌이 들지 않게 된다. ‘빨리 하나님께 순복해야지.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시잖아. 하나님께서 날 이렇게 이끌어 주셨잖아. 예전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라고 늘 말했었는데, 원래 이런 거였구나. 오늘에야 직접 체험하게 되었어. 하나님은 날 너무나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은 나보고 인ㆍ사ㆍ물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공과를 배우라는 것이고 변화받으라는 거였어. 이것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심판 형벌이고, 또한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과 인도야.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 사랑은 참으로 진실해.’ 감동을 받았다. 왜 감동을 받았을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어찌 열정만으로 깨달은 것뿐이겠느냐. 그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찾고 구해서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걸 느끼게 되면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을까? 그래도 거역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생각이 살아 있고,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뿌리가 있다!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날 시련하신다면 죽게 만들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정말 징계하실 때는 심각한 질병을 주시는 건 아닐까? 무섭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두려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믿지 않고, 하나님이 그렇게 안배하길 원치 않는 것에서 온 것이다. ‘내가 정말 죽으면 어떡하지? 잘 모르겠어!’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100% 안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그런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얼마나 될까? 제로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100% 하나님을 배반할 것이다. 그 정도까지 되었음에도 사람은 계속해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 ‘난 순복할 수 있어! 감동도 좀 받았어, 하나님의 은총도 느꼈고, 하나님의 배려도 느꼈어. 이러면 돼, 나는 만족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계속 찾고 구해야 한다. ‘욥의 믿음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욥은 어느 정도까지 순복할 수 있었더라? 내 두려움은 어디서 생긴 걸까? 난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내가 뭘 두려워하는 걸까? 내 두려움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였어. 난 하나님 손에 있는 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안전하다는 걸 믿지 않고 하나님이 내 피난처라는 걸 믿지 않았던 거야! 난 궤사하고 사악하구나! 하나님 말씀에서 분명히 나에게 시련을 주신 거라고, 시련은 내 생명을 앗아가려는 게 아니고, 날 짓밟는 것도 아니고, 날 패괴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시련으로 내 패괴 성정을 깨끗하게 하려는 거라고 다 밝혀 주셨잖아. 이 정도까지 인식을 하고도 하나님을 참되게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날 하나님 손에 맡기지도 못하고 있으니, 난 정말 사악하고, 극악무도한 존재구나! 난 정말 하나님께서 이렇게 생각해 주실 자격도, 보살펴 주실 자격도 없는 존재야!’라고 느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기도로 자신의 두려움을 대처하고, 하나님께 거역한 자신을 대처해야 한다. 진리를 그 정도까지 깨달았는데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하나님 손에 맡길 용기가 없다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겠느냐? 그것을 배반이라고 한다. 궤사하니까, 교만하니까, 의심하니까, 사악하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바로 그렇게 오게 된 것이다. 두려움이란 무슨 뜻일까? 바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하시면 날 어디로 데려가실까? 날 지옥으로 데려가시는 건 아닐까? 내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데, 요절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두려워하는데, 두려움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계속 진리를 장비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꼈고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으며, 하나님이 주신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이미 든든함을 느끼긴 했어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 손에 맡기지 못하고, 계속 두려워한다. 그것이 패역이 아니겠느냐? 그런 패역에는 어떤 것들이 뒤섞여 있느냐? 그런 패역은 어떤 것에 좌우되는 것이냐? (궤사와 교만입니다.) 궤사와 교만이다. 그것은 귀신의 성질을 띠고 있지 않으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여전히 진리를 장비해야 한다. 계속 전진하고 계속 찾고 구해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합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알고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순복을 검증할 때, 어느 정도까지 순복해야 너를 미덥다고 할 수 있고, 너의 분량(원문: 工程)이 검증에서 통과되고 합격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말하고 있는 문제는 환경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달갑게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미덥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 하나님께 의지할 용기는 없고 도리어 두려워하는 상황을 말한다. 이 정도가 되었을 때 어떤 진리를 더 장비해야 할까? 또 어떻게 가야 하고, 어느 정도까지 가야 정결케 되고 완전하게 순복할 수 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갈 수 있을까? 알고 있느냐? 이것은 순복하는 진리에 관련된다. 이럴 때, 사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지만, 일정한 분량을 갖추어야 하고, 일정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네 안에 어떤 진리와 어떤 이상이 있어야 최종적인 그 정도까지 순복할 수 있게 될까? 이것이 바로 방금 말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는 어떤 진리를 장비해야 하나님을 100% 의심하거나 추측하지 않고 오해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어떠한 진리를 장비해야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절대 불순물이 없고, 자신의 요구나 선택이 없이 절대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은 기분도 좋고 최근에는 설교 교통도 많이 듣다 보니 일이 닥쳤을 때 순복할 수 있는데, 그런 순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 너를 양육해 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어떤 진리를 장비하고, 어떤 분량을 갖추고,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너희가 마음속으로 아직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냐? 더 생각을 해 보아라. 뒤에 오는 실행에서 어떤 것을 갖추어야 갈수록 정결해지고, 갈수록 절대적인 순복을 할 수 있을까? 진리를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진리가 진짜 너의 분량이고 그 진리는 네가 순복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바탕이 된다. 네가 그 진리를 의지하고 그 진리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알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한 방면이다. 그리고 스스로 협력도 하고 실행도 해야 한다. 베드로가 했던 말이 있는데, 기억하느냐?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배하셔도...) 너희는 원래의 말 그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정도까지 체험한 사람이 매우 적은 것 같구나. 너희는 그 말을 체험해 보아라. 그럼 서서히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너희에게 이 단계까지 체험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다. 배반하는 걸 해결하기 어렵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해결하기도 어려운데, 어떤 진리를 장비해야 할까? 방금 한 가지를 말했는데, 베드로가 했던 말이 무엇이냐? (“설령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으로 삼아 가지고 논다고 한들,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나이까?”입니다.) 그것은 순복에 관련된다. 너는 무엇부터 추구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보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와 진리에 순복하는 태도를 갖추려고 추구해야 한다. 스스로 이런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데, 먼저 하나님이 너를 어떤 눈길로 보는지,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어떤 어조로 말씀하는지, 너를 싫어하는 건 아닌지, 너를 드러내려고 하는 건 아닌지를 상관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애로사항과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했던 그런 말에 보통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있을까?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정도가 되고, 어떤 진리를 갖추었고, 어떤 것들을 체험하고 나서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느냐?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 다 사랑이라고 믿게 된 다음부터입니다.) 그 말에 그런 이야기가 없지 않으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설령 우리를 노리개로 삼으실지라도’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노리개’라고 말했다. 너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람으로 여긴 것이고 피조물로 여긴 것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한 사람으로,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간주한 것이다. 차이가 있지 않으냐? 그것에는 차이가 있다! 노리개와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노리개는 어떤 물건이냐? 노리개는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가치가 없다. 짐승이라고 해도 되고 장난감이라고 말해도 되는 그런 존재다. 사람은? 사람이라면 사상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말을 할 줄 알고, 언어가 있고, 사지가 있고, 일을 성사시킬 수 있고, 또 정상인의 활동을 할 수 있다. 사람과 노리개를 서로 비교하면 가치와 지위에는 차이가 있지 않으냐? 네가 자신을 노리개가 아니라 사람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에게 너를 어떻게 대해 달라는 요구가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요구 기준은 무엇이겠느냐? (저를 사람 대접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대우를 받아야 너를 사람 대접해 준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높게 봐주시는 겁니다.) ‘높이 본다’는 것은 조금 막연하고 실제적이지 못하다. 적어도 어떻게 해야 할까? 네가 밖에서 들어오자마자 내가 발로 걷어찼다면 ‘당신은 날 사람 대접하지 않는군요!’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를 발로 차지 않았을 경우에 만나게 되면 나에게 어떤 요구가 있겠느냐? 적어도 ‘왔어?’라고 안부를 묻고 너와 대화도 좀 해 줘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너와 말을 섞지 않는다면 어떨까? 내가 너를 개 취급한다면? 너는 불쾌하지 않겠느냐? 너는 ‘당신은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군요. 어떻게 날 개 취급할 수 있어요?’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이 차이가 아니냐? 너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과 노리개로 대하는 것, 이 두 가지에는 태도와 대우에서 차이가 있다. 너를 사람으로 대한다면 어떤 대우를 요구하겠느냐? 너를 존중해 주고, 말을 해도 의논하는 식으로 해야 되고, 너의 기분을 맞춰 주고, 충분한 공간과 자유를 주며 너의 품위와 체면을 지켜 주고, 사람들 앞에서 널 사람답게 대해 주고, 사람들 앞에서나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모든 면에서 너에게 일정한 권리를 주고, 자율성을 허락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대우들이 아니겠느냐? 이래야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람 대우를 하는 것이다. 노리개는 어떤 대우를 할까? (사람 대우를 해 주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이리저리 발로 찹니다.) (필요하면 좀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립니다.) 그러면 대비된다. 이 두 가지 대우에는 차이가 있지 않으냐? 그럼 노리개를 대하는 면에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네가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는 어떤 대우법들이 있느냐? 전혀 존중해 주지 않고, 그것의 권리를 지켜 줄 필요도 없으며, 그것에게 어떤 권리도 주지 않고, 어떤 자율성도 주지 않는 것이다. 뭘 할 때 그것과 의논할 필요가 있느냐? 의논할 필요도 없다. 뭘 해도 그것의 체면을 생각해 줄 필요가 있겠느냐?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권리에 관련되는데, 그것은 긍정적인 방면이다. 또 소극적인 방면이 있는데, 기쁘면 좀 잘 대해 주고, 기분이 안 좋으면 발로 찬다. 이것이 바로 노리개를 대하는 태도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을 노리개로 대한다면, 사람은 어떤 느낌이겠느냐?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떤 진리를 갖추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지만, 베드로가 그 정도까지 깨닫게 되었을 때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하신다고 해도 난 순복해야 돼.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리개로 삼으신다고 해도 내가 어찌 흔쾌히 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었다. 베드로는 흔쾌히 원했는데, 흔쾌히 원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하나님의 지배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배에 따른다는 것은 무엇이냐? (절대적인 순복입니다.) 그것이 순복의 진리이다.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은 노리개를 대하는 처사가 아니냐? 싫다면 싫다고 하는 것인데, 너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이 시험하게 하고 조롱하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어떤 태도였느냐? 불평을 했었느냐? 하나님을 원망했었느냐? 하나님을 모욕했었느냐? 사탄에게 빌붙었었느냐? (아닙니다.) 그것을 순복이라고 한다. 불평도 없었고 그런 표현들이 없었다. 그럼 패괴는 해결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과 완전히 합한 것이다. 배반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 어디에 두시든,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있어. 하나님께서 날 어디에 두시든 난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야. 설령 멸하여 재가 되게 하신다고 해도 난 하나님의 사람이야. 사탄에게는 빌붙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정도가 된 것이다. 말은 하기가 쉽지 않으냐? 그러나 실천하기는 어렵다. 실천하려면 많은 진리 실제를 장비해야 한다. 끊임없이 장비해서 진리를 갖출 때까지 장비하면 되는데,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너는 그런 순복만 있으면 충분하다. 네가 하나님께 ‘절 어떠어떠한 식으로 대해 주세요. 저한테 기준을 하나 주고, 합리적인 설명을 주세요. 그 설명도 절대적으로 진리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이고, 창조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요구하지 않고 ‘저는 그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으실 대로 저를 대하시면 됩니다. 제 머리채를 잡아당기셔도 되고, 제 발을 밟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은 절 어떤 식으로 대하셔도 됩니다. 절 사탄에게 넘겨주고 버린다고 하셔도 당신은 저의 하나님이시고, 저 또한 당신의 피조물입니다. 전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설령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으로 삼아 가지고 논다고 한들,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나이까?”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이 말이 너희에게는 얼마나 중요하냐? 정말 중요한 것이다! 네가 이 말을 항상 되새겨 이 말에 대한 참된 인식과 체험을 갖게 된다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지금 사람에게 이지(理智)가 없다고 하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 이런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별로 한 것도 없고, 별로 효력한 것도 없을 때는 ‘난 아직 자본이 없어.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거나 맞설 자격도 없고, 은총이나 축복을 요구할 자격도 없고, 처소를 요구할 자격도 없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을 조금 했거나 힘을 조금 들였으면 ‘난 자본이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진리를 갖추지 않고 되겠느냐? 진리는 갖추지 않고 종일 ‘난 하나님께 순복할 거야. 난 피조물이야. 이건 내가 당연히 갖춰야 할 이지야.’라며 구호는 대단하게 외쳐 대고 막힘없이 외치지만, 결국 일이 닥쳤을 때는 분명 하나님이 안배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복하지 못한다. 무슨 영문일까? 사람에게 패역이 있고 패괴 성정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100%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이것이 실정이다. 충분한 진리를 장비하지 못하면 사람은 사는 것이 그렇게 가련한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란 말이냐? 하나님에 대해 믿는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게 실정이 아니냐?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은 인ㆍ사ㆍ물에 잘 빠지고 독선적이고 교만해요. 일이 닥치면 계속 소처럼 떠받고, 항상 이유를 캐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믿지 못해요.”라고 말한다. 그럼 반대로, 그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로 믿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정결케 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얻으라고 설정해 준 환경으로 믿는다고 하는 경우라면 순복할 수 있을까? 정말 배반하지 않을까? 정말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까? 그럼 정말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일까?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왜 하지 못할까? 사람에게 그 방면의 진리가 없기 때문이고, 그런 진리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방면에 대한 진리는 많이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너희의 분량이 정말 작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너희에게 시련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에게 시련을 주는 순간 너희는 예민해질 것이다. 너희가 구호는 잘 외치고, 다른 사람의 문제는 정말 분명하게 잘 보는데, 자신의 속은 어떤 상태인지 아직 모르고 있고, 희미한 상태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이 직면한 가장 큰 공과이자, 또한 가장 기본적인 공과이기도 한데, 네가 이 방면의 진리에 진입한 만큼 분량도 그만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어느 정도로 순복할 수 있으면, 너의 분량과 네가 장비한 진리도 그만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순복을 하려면 어떤 진리를 장비해야 할까? 방금 무엇이라고 했었지?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이 글귀라면 계속 생각해 봐야 하고, 자신의 실제 체험이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입만 열면 나오게 된다. 생각해 보거라. 절대적인 순복을 하려면 어떤 진리를 갖추어야 하겠느냐?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한 가지 진리이다. 하지만 이 진리를 너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바로 네가 하나님께 요구가 생길 때, 너는 이 진리로 가늠해야 한다. ‘나에게 어떤 요구가 있을까? 그런 요구가 진리에 부합될까, 이지가 있는 것일까? 그런 것들은 어떻게 온 것일까? 상상에서 온 것일까, 아니면 사탄이 생각을 주는 것일까?’ 사실 다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패괴 성정에서 생긴 것이다. 너는 그것을 해부해야 하고, 하나님께 드러내 달라고 해야 하는데, 너의 그런 무리한 요구를 드러내 달라고 해야 하고, 베드로처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노리개로 삼아 사탄에게 넘기실지라도”라는 말을 했는데,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하나님께서 언제 사람을 노리개로 여겼었지? 하나님은 나를 아주 잘 대해 주셨어. 은총도 베풀어 주셨어.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야.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해 주시기도 부족할 판인데, 어떻게 사람을 노리개로 여기시겠어? 그 말은 진리가 아니야, 허튼 소리이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게 아니야. 그럼 베드로의 그 말은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자신의 요구, 타산, 욕망을 전부 다 내려놓았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자기 생각이 없었으며, 자신을 완전히 맡겼던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옵소서. 제게 시련을 주셔도 되고 채찍질하셔도 되며, 심판 형벌하셔도 되나이다. 당신이 환경을 일으켜 저를 훈계하고 책망하셔도 되고 저를 단련하셔도 되고, 저를 사자 굴에 넣으셔도 되고, 늑대 굴에 넣으셔도 되나이다. 당신은 어떻게 하셔도 다 맞사오니, 순복하겠나이다. 저는 다 순복할 수 있나이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다 진리이니, 저는 불평하지도 않고, 선택하지도 않겠나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절대적이지 않으냐? 그럼 사람들은 ‘다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전부 진리라고 하던데, 이번에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에서 난 왜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지? 진리에 부합되지 않을 때도 있나 봐. 하나님도 틀린 면이 있으시구나! 그래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니까 순복하자!’ 이렇게 생각할 때도 있지 않으냐? 여기에는 절대적인 것이 있느냐? 이런 것은 어떤 순복일까? 이것은 순복이 아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하나님이 사람을 노리개로 여긴다고 해도 순복할 수 있다고 한 말과 많이 차이 난다. 너를 노리개로 생각하면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고, 합리적일 필요도 없다. 노리개로 보는데 무슨 이유를 설명할 것이 있겠느냐? 꼭 너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일은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 사실을 들어 이론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해 주어야 하고 너의 동의를 받은 다음 그렇게 진행할 수 있어야 되겠느냐? 그것이 노리개로 취급하는 것이냐? 그것은 충분한 인권의 자유를 주는 것이고, 충분히 존중해 주는 것이며, 또 사람 대접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노리개가 아니다. 노리개란 어떤 것이냐? (주도권이 없고, 일정한 권리도 없는 것입니다.) 권리만 없는 것일까? 너희는 이 말을 어디에 적용시켜야 할까? 어떤 일을 네가 한참 찾고 구했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거나 네가 20여 년을 믿었어도 그 일에 대해 파악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을 때, 그러한 상황에서 너는 순복할 수 있겠느냐? 순복해야 하겠느냐? 그래도 순복해야 한다. 그렇게 순복하는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베드로가 했던 그 말이다. 네가 항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옳은 거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진리에 부합되는 거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사람에게 유익한 거야.’라는 것을 추구한다면, 이런 말은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이 말은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이 말이 맞춰지지 않는 경우에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순복하지 않을 것이냐? 그럴 때는 어떤 진리를 실행해야 할까? 사람은 피조물의 위치에 서야 하는 것이다. 어느 때든, 하나님이 네게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하나님이 숨든 나타나든, 네가 하나님을 느낄 수 있든 느낄 수 없든, 너의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지, 너의 본분은 무엇인지, 이런 것에 관련되지 않겠느냐? 네가 ‘난 이 일이 진리에 부합되는지 확실해지면 순복하겠어. 그런데 확실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를 경우엔 기다리고 볼 거야! 하나님께서 오시면 그때 가서 순복할 거야.’라고 한다면, 그것이 순복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러면 피조물의 본분에 관련되지 않느냐? 피조물의 본분은 무엇이냐?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원을 찾은 것이다. 그럼 문제도 해결된 것이 아니냐?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창조주, 너의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가장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너는 많은 진리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뜻을 더듬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어떤 예언은 알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너는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냐? ‘난 부인하면 안 돼. 이런 말씀은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이야. 여기에는 진리가 있어. 내가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이야.’라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일까? 진리가 아닌 것일까?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불순물이 섞였을 수도 있어.’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또 거역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이성(理性)이 있어야 한다. 이성이란 무엇이냐? 이성이 있다는 근거는 어떤 것이냐?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창조주 너의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다시 순복을 말하자.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지, 하나님이 너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는지에 근거할 필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무엇에 근거해야 하느냐? 순복하는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순복하는 진리는 어떤 것이냐?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창조주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복하는 진리이다. 그렇다면 굳이 잘잘못을 분석할 필요가 있겠느냐? 예를 들어, 개 한 마리를 사는 것은 맞는 것이냐? 개 두 마리를 산다면 맞는 것이냐? 개는 한 마리도 사지 않고 양만 한 무리를 샀다면 맞는 것이냐?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다 맞는 것이다. 너의 책임과 의무는 무엇일까? 양을 지키러 가야 하는 것이고, 양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네가 ‘개를 샀으면, 개가 양을 지키면 되니까, 난 양을 먹이고 개를 먹이면 돼. 그게 내 본분이야. 그런데 개는 사지 않고 양만 한 무리 샀어. 그럼 양은 누가 지켜야 할까?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았어. 그러면 그것도 내 본분이니, 내가 양을 지키러 가야지.’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고 원망하면서 ‘양은 한 무리를 사 놓고, 목양견은 왜 사지 않으신 거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건 잘못됐어. 미처 생각을 못하신 거야. 계산을 잘못 하신 거야.’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실행하는 자세는 어떤 것일까? 자신의 본분을 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양을 한 무리 사놓았는데 목양견은 사놓지 않고, 아무 말도 없다면 너의 본분은 무엇일까? (양을 지키고 방목하는 것입니다.) 양을 방목하러 가는 것이 자신의 위치를 찾은 것이다. 이치를 따져야 할까? 양을 방목하면 비바람도 맞아야 하고, 늑대도 있다. 그래서 무서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 늑대에게 잡혀 먹힐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늑대의 밥이 되더라도 본분을 잘할 거야.’라는 것이 본분을 지킨 것이 아니냐? 어떻게 해야 본분을 지킬 수 있느냐? 순복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본분을 잘할 수 있고 본분을 지킬 수 있다. 본분을 지키고 절대적으로 순복하려면 하나님이 한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느냐? 거기에 관련된 진리를 하나님이 너에게 확실하고, 분명하고, 뚜렷하게 설명해 줘야만 순복할 수 있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너는 단지 순복하는 진리를 실행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억지를 부리는데 문제가 많다. ‘하나님은 진리가 아니신가요?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신가요? 전 왜 그분이 하시는 어떤 일들은 간파하지 못하죠? 하나님은 왜 저에게 분명하게 알려 주지 않으시죠? 분명하게 알려 주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실행하죠? 제가 순복하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죠. 납득이 안 되면 순복하는 것도 기운이 빠져요!’라고 한다. 그것은 패역이 아니냐? 패역이 또 나온 것이다. 왜 기운이 빠질까? 순복하는 데에 기운이 필요할까? 필요없다. 그저 간단하게 이성만 있으면 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면 난 순복할 거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순복하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거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듣지 않을 거야.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이야.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인간의 말로 바뀌지는 않아. 난 순복할 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그분은 영원히 나의 하나님이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면 피조물의 본래 자리에 선 것이다. 네가 이런 이성을 갖추고 이런 진리를 갖추었다면, 하나님에게 인간이 노리개나 개미에 불과한 존재로 보여진다는 것을 느낄 때, 괴로워하겠느냐? 열등감을 가지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지금은 열등감이 생기겠느냐? (아닙니다.) 지금은 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은 날 사람으로 대하시니까 난 하나님 앞에서 지위가 있어. 영광스러워. 하나님께서 날 높여주셨어.’라는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갖지 않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높여주지 않고 항상 폄하한다면 어떻게 할까? 너는 기분이 언짢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제다. 꼭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대부분의 경우에 기분이 언짢은 것은 속에 어려움이 너무 많고, 항상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날 사람으로 대해 줘야 돼. 나를 존중해 줘야 돼. 나를 높이 평가해 줘야 돼. 날 생각해 줘야 돼. 내 연약함을 이해해 줘야 돼. 날 관용해 줘야 돼. 난 분량이 작고 식견이 짧아. 이 사역을 해본 적이 없어.’라며 이유가 한가득이다. 오늘 순복하는 진리를 교통하고 보니, 그런 이유들이 이유가 될 만하냐? 그 어떤 이유도 이유가 될 수 없다. 너의 책임, 너의 의무, 너의 본분은 바로 순복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어려움이 임하면 순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해도 순복이 안 될 때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진리로 그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체험해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높여주심을 입고 아주 고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데에서, 비천하고 하나님 안중에서 아무 쓸모없는 노리개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고 해도 개의치 않고, 별다른 느낌도 없고, 계속해서 순복할 수 있으며, 그것도 아주 기쁘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체험한 햇수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건 네가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달렸고, 네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달린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모여서 교통을 듣고 있다고 하자. 그럴 때, 안쪽 방에 들어가 눈에 확 띄는 자리에 앉고, 불빛이 비춰지면 ‘나도 축에 드는구나.’라는 생각에 으쓱해진다. 그런데 바깥쪽에 앉아서 듣게 되면 기분이 언짢아진다. ‘이건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니야? 이건 청강생이나 다름없잖아? 이건 사람으로 대접 안 하는 거잖아? 내가 왜 이류 계층이란 말이야?’라는 생각에 계속 기분이 언짢아진다. 어디에 앉든 똑같이 진리를 얻을 수 있지 않으냐? 항상 기분이 언짢고, 항상 그 관문을 넘지 못한다. 그러면 단련을 받아야 한다!

베드로가 수백 번의 시련을 겼었으면 너희도 수백 번의 시련을 겪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지금은 얼마나 겪었느냐? 수백 번은 말하지 말고, 백 번은 되느냐? (안 됩니다.) 그럼 아직 멀었다! 그저 다른 사람이 시련을 수백 번 겪어 온전케 된 것만 보았다. 너희가 아직 한 번도 겪지 않았거나 아직 백 번이 되지 않았다면 온전케 되는 것과 아직 거리가 먼 것이다! 이것을 예비도 하고 공도 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어떻게 공을 들여야 할까? 흐리멍덩하거나 히히덕거리지 말며 온종일 일로만 바쁘게 보내지 말고 진리 실제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일이 바빠도 걱정할 것 없다. 일이 많으면 바쁘기 마련이다. 한가하게 보내서는 안 되고 어쨌든 누군가 바쁘게 보내야 한다. 하지만 바쁘게 보낼 때에도 너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깨달으려고 하면서 하나님께 달라고 구해야 한다. 어떻게 달라고 할까? 날마다 마음으로 그것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묵묵히 간구하며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하나님 앞에 안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한 번 잘못했다고 완전히 부정적으로 볼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3살짜리 아이에게 20살짜리가 질 짐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는 속에 그런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너는 하나님께 구해야 하고, 그런 소망과 심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은 역사한다. 네가 항상 두려워하고, 항상 피하며, 계속 그런 것을 언급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도 끝까지 역사하지 않는다. 마치 네 아이가 너에게 “아빠, 엄마, 일하러 가세요. 저 혼자 집에 있을게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럼 너는 속으로 ‘5살짜리가 집을 지킬 수 있겠어? 마음이 안 놓여. 누구한테 유괴라도 당하면 어떡해?’라며 걱정하게 된다. 그래도 아이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 것에 아주 감동을 받고 마음이 흐뭇해지는데, ‘우리 애는 착한 아이야, 바른 아이야.’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위안이 된다. 자녀가 13~14살쯤 되었을 때, “아빠, 엄마, 일하러 가세요. 제가 알아서 닭도 먹이고, 강아지도 챙길게요.”라고 말한다면 너는 마음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동시에 그 책임을 좀 맡기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밭일까지 시킬 수 있겠느냐? 너는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인데, 자칫하면 농작물의 새싹도 뽑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16~17살 쯤 되었을 때, “아빠 엄마, 점심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제가 해 드릴게요.”라고 한다면 심정이 어떻겠느냐? ‘내 새끼 다 컸구나. 철들었어.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속으로 정말 기쁠 것이다. 그럼 아이가 밥도 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나가서 일해, 엄마한테 하루에 200~300위안씩만 벌어다 줘라.”라고 할 수 있겠느냐? 자식이 걱정스럽지 않겠느냐? (걱정스러워할 것입니다.) 아이는 하지도 못하고, 너도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분량에 근거하여 너에게 역사한다. 그러므로 너는 걱정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간구하면 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너를 죽을 정도로 들볶지 않을 것이고, 죽을 정도로 힘들게 하지 않을 것이며, 네 분량을 초과하는 짊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며, 합격된 피조물이 되려면, 심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심지가 있어야 할까?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심지와 진리가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심지가 있어야 한다. 너에게 이런 심지가 없고 그저 ‘난 바쁘게 보내고 있잖아. 이 사역은 내가 책임지고 있잖아. 난 효력하고 있고, 설교 교통도 듣고 있고, 어디를 가나 다 잘 알아줘.’라고 하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너는 끝인 것이고, 지지리도 못난 것이다. 너는 진리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진리를 이야기하거나 교통하고 설교를 하기만 하면 앉아서 졸다가도, 바깥일이나 힘 쓰는 일을 이야기하면 눈이 초롱초롱해진다면, 그런 사람은 바로 효력하는 자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눈이 반짝인다. ‘빨리 메모해야지. 이건 나한테 부족한 거야. 저것도 나한테 부족한 거야. 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었어! 난 속이 너무 더럽고 분량도 너무 작아. 난 너무 연약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도 너무 많아. 하나님께서 날 만족해하지 않으시는 것도 당연해. 난 너무나도 부족해.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아직 하나님을 오해하는 면도 정말 많아. 언제면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데, 본분을 하고 있어도 이런 일들을 생각하는 것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다. 늘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제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를 얻어서 당신을 알 수 있도록 시련을 주시고, 드러내 주시옵소서. 저를 징계하시고 심판 형벌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묵도하며, 그런 것에 대해 부담이 있고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다. 그렇게 마음에 두고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하는데, 하나님이 역사하면 그 사람은 덤으로 얻게 되지 않겠느냐? 베드로는 왜 수백 번의 시련이 있었겠느냐? 그것은 베드로가 추구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시련하는 것은 사람을 정결케 하는 거라고 믿었고, 그 길은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정말 바른길이라는 것을 믿었다. 베드로는 그것을 위해 간구도 하고, 실행도 했으며, 그것을 위해 봉헌도 하고, 헌신도 했었다. 그랬기에 하나님도 역사한 것이다. 설마 하나님이 베드로를 잡고 놓지 않았겠느냐? 베드로만 마음에 들어했을까? 하나님이 누구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에는 목표가 있지 않겠느냐? 원칙이 있지 않겠느냐? (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그 사람도 추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왜 수백 번의 시련을 얻지 못했겠느냐? 그걸 추구하지 않았고, 구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고, 간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것을 위해 간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두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피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강제로 더해 주겠느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뵙는 건 큰일 나는 거야. 내가 계속 그리스도를 대면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내 결함을 발견하고, 계속 책망 훈계하시면 어떡해? 그래서 난 좀 피해 다녀야겠어! 내가 항상 그리스도와 같이 지내다가 그분이 날 간파하시고 나면 난 끝장나는 게 아니겠어? 그럼 난 더 이상 감출 수도 없잖아. 심판 형벌이 임하게 되면 난 귀숙도 없어지지 않겠어? 난 좀 피해 다녀야겠어.’라고 한다. 이방인들이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보인다’라는 말을 하듯이 그 사람은 ‘내가 계속 피해 다니고,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분의 심중에 난 항상 완벽하고, 믿음도 크고, 적극적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기억될 텐데. 괜히 그분 앞에 있다가 어느 날 나를 싫어하시고 혐오하시게 되면, 난 끝이 아니겠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것일까? 어떤 사람은 속에 이런 걸 품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강요할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네가 추구하는 것과 너의 심지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만큼 성사시켜 주는 것이다. 만약 추구하지도 않고, 피해 다니고, 멀리하고, 하나님에게 속을 감춘다면 어떨까? 하나님 말씀에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한다고 했느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복음 7:6)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피하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집착할 것 같으냐? 하나님은 그런 부류의 사람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오로지 사람이 베드로처럼, 욥처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인생의 바른길을 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길을 가서 최종에 진리를 얻어 온전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얻기 바란다. 그러나 네가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강요하실까? 하나님은 전혀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계속 너에게 감동을 주고, 너를 잡고 놓지 않고, 온전케 하려 하면서, 온전케 될 때까지 그만두지 않고, 네가 도망가지도 못하게 잡아 두는 일은 없다. 솔직히 말해 주는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이다. 하나님은 그저 바라고, 소망할 뿐이다. 그런 바람이 있을 뿐인데, 욥이나 베드로나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고, 나중에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얼마나 될지는 순리에 따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역사의 실제적인 면이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10명, 20명, 100명, 2000명, 만 명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실제적으로 역사하는데, 실제적으로 사람들 가운데 다니며 이렇게 말씀하고, 이렇게 역사한다. 진리에 관련된 각 방면의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유익한 사역을 하고, 한결같이 그렇게 역사하는데, 옳은 사람 마음에 역사한다. 최종에 어떤 사람에게 심지가 있고, 진리를 추구해서 온전케 된다면, 그런 사람은 복이 있는 것이고, 얻은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다. 말세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예정하여 택한 것은 하나님이 한 것이다. 가족을 예정해 주고, 언제 태어날지도 예정해 주고, 성장 환경도 예정해 주고, 은사도, 재능도, 소질도, 생존 환경도 예정해 주었다. 그런 것들을 다 예정해 놓았지만, 최종에 사람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가장 공의로운 면은 어떤 것일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였지만 마지막에 귀숙을 얻고 살아남게 되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추구한 것이고, 사람이 간 길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냐?

성육신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은 사람마다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공평하고 합리하게 각 사람을 대하는데, 너도 보았고 나도 보았다. 바로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고 관념이 생기는데, ‘겉모습이 정말 보잘것없고 평범해. 난 안 믿을래. 믿을 수가 없어.’라고 하거나 의심하면서 그런대로 믿는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실제적이셔. 아무리 실제적이고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이셔. 난 그분을 하나님으로 대할 거야. 그래서 난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진리로, 창조주의 말씀으로 대하면서 실행하고 받아들일 거야. 나는 그분을 따를 거야.’라고 하는데, 최종에는 온전케 되고 진리를 얻게 된다. 최종에 진리를 얻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진리를 추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든 이렇게 균등하게 양육해 주고 공급해 주며 역사한다. 성령도 감동을 주고, 나도 말을 하고 교통해 주고 공급해 주는데, 자주 너희와 모임을 가진다. 다 똑같지 않으냐? 별도로 어떤 사람을 계속 독촉하고, 그 사람에게 특별한 환경을 주어 별도로 성령의 빛 비춤과 깨우침을 더 주거나 그 사람에게 표적과 기사를 보여 주는 일은 없다. 그런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사해 주고 사람이 회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정말 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냈었지만, 이번 단계는 전부 진리를 공급하는 것이다. 네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든 궁극적으로 진리를 얻게 되면, 온전케 되는 사람이고 살아남는 사람이고, 궁극적으로 진리를 얻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이유를 대도 소용없다. 네가 만약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아 난 믿을 수 없어.’ ‘하나님께서 믿을 만한 바탕을 너무 적게 주셔서 난 믿을 수 없어.’ ‘하나님은 너무 실제적이고, 너무 보잘것없어서 난 믿을 수 없어.’라고 한다고 하자. 진리는 다 똑같이 공급해 주었는데, 왜 다른 사람은 온전케 되고, 넌 도태될까? 너는 왜 얻지 못할까? 이것이 바로 너에게는 심판이 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래서 마지막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말씀 사역만 한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실제적으로 말씀으로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는다. 네가 표적과 기사를 보고 싶다면 2천년 전으로 돌아가 예수 그 시대에서 나타냈던 표적과 기사를 보면 된다. 그리고 이 단계에는 믿지 말라. 이 단계를 믿는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합리적이지 않으냐? 공평하고 합리하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는다.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효력하기만을 추구하면서 마지막까지 효력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살아남게 해 줄 것이고, 은총을 얻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효력하지 못한다면 도태되는 것이다. 도태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멸망이다! 매우 합리적이다. 사람을 차별한다 안 한다는 말은 없다. 전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에 근거한다.

지금 보면, 사람이 가는 길이 매우 중요하지 않으냐? 네가 어떤 길을 추구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지, 어떻게 추구하는지, 너의 소원은 무엇인지, 네가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지, 이런 것들은 매우 중요하다.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느냐? 예를 들면, 네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하나님이 너를 구해 주었다고 하자. 그것으로 네가 온전케 될 수 있느냐? (아닙니다.) 네가 한 번 죽었다가 부활했다면, 그것으로 온전케 될 수 있느냐? 심지어 네가 20시간 넘게 자면서 천국에 갔던 적이 있다면, 그것으로 온전케 될 수 있느냐? 그런 것은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 이 단계에 하나님 경영 사역이 끝날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고, 말씀으로 사람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으로 온전케 되어 살아남는다면 아무도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원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공급해 주었는데, 마지막에 네가 얻지 못한다면, 누구를 탓해야 하겠느냐? 사람이 간 길을 탓해야 한다, 그렇지? 이제 알겠지? 사람이 가는 길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어떤 부분이 중요하냐? 사람의 귀숙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계속 ‘예언이 이루어질까?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을까? 하나님은 대체 언제 땅을 떠나실까? 하나님께서 땅을 떠나시는 모습을 내가 볼 수 있을까?’라는 것들을 연구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연구해도 소용없다. 너의 귀숙이나 네가 온전케 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럼 무엇이 너와 관련이 있겠느냐? 네가 가는 길이 네가 온전케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온전케 됨에 있어서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는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너는 평생을 다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각 방면의 진리를 방금 다 말하지 않았느냐? 왜 평생을 다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추구해야 할까?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추구하는 과정은 뭘 해결하는 과정이냐? 바로 패괴 성정의 근원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왜 패괴 성정을 해결해야 하느냐? 패괴 성정은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고, 사탄의 패괴 성정이며, 사탄의 실질인데, 그 실질이 사탄이고 마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필요한 것이다! 너의 패괴 성정이 하루라도 제거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은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너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면에 서 있는 것이고, 바로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한다. 너의 패괴 성정이 해결되는 만큼 하나님께 순복하게 될 것인데, 패괴 성정이 몇 퍼센트 해결되면 너의 순복도 몇 퍼센트 되는 것이다.

우리 이번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네가 패괴 성정을 해결하고 온전케 되는 것을 추구하여 하나님께 순복하게 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만 추구한다면 그 공과는 매우 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통하지 않았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실행과 삶, 사람의 추구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고, 사람이 가는 길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화제다. 너는 패괴 성정을 해결하려고 추구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고,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지 않겠느냐? 너는 하나님에 대해 일부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순복해 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해서 순복할 수 있게 되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지, 그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 속에 인식이 어느 정도 있지 않겠느냐? 그것은 겸하여 얻는 것이고, 점차적인 것이고,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네가 단순히 하나님 알기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렵다.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종일 하나님 알기만을 추구할 거야. 꽃은 어떻게 생긴 거지? 하나님께서 만드신 거야. 그럼 꽃의 유전자는 어떤 것일까? 어떤 비타민이 들어 있을까? 어떤 아미노산이 들어 있을까?’라고 하면,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부질없는 것이고 막연하다. 네가 ‘새끼 양은 왜 다리를 굽히고 젖을 먹을까? 송아지는 왜 굽히지 않고 먹을까? 난 이걸 연구해야겠어! 이것으로 하나님을 알아가야겠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안들 쓸모 없다. 그런 것들은 정말 얄팍한 인식이다.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정말 기묘하다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냐? 근본적인 문제는 진리를 추구해 패괴 성정을 해결하여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추구하는 과정에 많은 지엽적인 문제들은 사실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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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궁극적으로: (직역) 궁극적으로 귀결하여.

②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⑤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⑥오시면: (직역)오시는 것이 보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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