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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편 하나님께 순복하는 실행 원칙

욥이 어떻게 진리를 찾고 구했는지, 어떻게 체험하여 그런 간증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을 너희는 교통해 본 적이 있느냐? 욥의 일상생활이 어떠했는지, 욥이 어떻게 살았는지, 삶 속에서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를 했었는지 말이다. 욥이 했던 모든 일을 통해 욥은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이런 것은 세부적인 것에 관련되지 않느냐? 그것은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의 세부적인 것에 관련되는데, 지금 사람들에게는 부족한 것들이다. 사람들은 지금 욥의 명언만 알고 있고, 욥의 그 명언이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 평생을 체험하여 얻게 됐다는 것만 알고 있다. 욥은 일생 동안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보았으며, 자신의 전부는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욥은 이것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만약 그런 것들이 어느 날 없어진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이 거두어 간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기에 합당하다고 했다. 욥은 그런 결론을 얻었다. 그러면 그런 결론은 어떻게 얻은 것이냐? 과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지금의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과 관련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결과를 얻고, 어떻게 하면 그런 수확을 거둘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수확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고, 3년이나 5년으로 얻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 삶 속의 세밀한 부분과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관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욥이 양을 암컷 3마리에 수컷 2마리를 키우면서 살았다고 하자. 그는 양을 산 다음 혼자 ‘일반적으로 암컷 1마리 당 1년에 새끼 3마리를 낳으니까, 3마리면 1년에 9마리를 낳을 수 있겠어, 좀 더 좋으면 10마리도 낳을 수 있겠구나.’라는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에 가서 보니 결과적으로 10마리를 넘기는커녕 10마리도 안 됐다. 그래서 ‘안 돼. 방법을 찾아야겠어. 어떤 방법이 좋을까? 어떤 사료를 먹일까? 어떤 주사를 놓을까? 10마리를 넘기고, 원래 계획을 초과할 방법을 찾아야 해.’라며 궁리하기 시작한다. 3년이 되던 해, 또 10마리를 넘지 못했고 지난해보다도 적었다. 그는 답답해한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산 양은 왜 새끼를 적게 낳는 거야? 다른 집 양들은 2년에 10마리를 잘도 낳는데, 내 것은 2년이 됐어도 왜 10마리를 넘지 못하는 거야? 왜 오히려 더 적어졌지?’라고 하면서 사람의 방법을 생각한다. 처음에는 계획하고 타산하는데, 그런 계획과 타산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의 뜻이 뒤섞여 있고 찾고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는 먼저 사람의 뜻으로 된 타산과 계획이 있고, 사람의 뜻이 뒤섞여 있다. 그다음엔 자신의 계획과 타산에 따라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하면서 자신이 정한 그런 계획의 기준과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겠느냐? 그가 사람의 방법으로 갖은 방법을 다 쓰고, 머리를 쥐어짜고, 여기저기에서 처방을 찾아보고, 해결책을 찾는다면, 최종적으로 본인이 원했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든 없든,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나타나겠느냐? (자기는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적게 얻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맞다. 어쩌면 저항하는 감정이 생길지도 모른다. ‘다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했어. 나는 하나님을 믿고 양을 3마리 키우면서 첫해에 10마리를 계획했는데도, 하나님은 내 계획대로 해 주시지 않았어. 하나님은 날 축복해 주시지 않았어! 그래도 난 하나님을 믿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날마다 제사를 드렸건만, 하나님은 왜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는 거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내가 구하고 바라는 것보다 넘쳐야 맞는데. 어떻게 아직까지도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지? 하나님이 존재하긴 하는지, 있긴 있는지 잘 모르겠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물음표를 찍게 되는데, 그것이 부작용이다. 한 방면으로 긍정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보지 못하며, 다른 한 면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오해, 반감, 거역이 생긴다. 이 두 가지 방면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찾고 구하면서도, 그런 길을 간다면 마지막에 욥이 했던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욥기 1:21) 그런 체험과 인식이 생길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생기지 못한다. 왜 생길 수 없을까? 몇 가지 방면의 문제가 있을까? 이것은 실행의 길에 관련되고, 어떻게 실행하는지에 관련되지 않느냐? 그렇다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 (그 사람이 자신의 방법으로 해결했던 부분입니다.) 그는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했는데, 사람에게는 어떤 방법이 있느냐? 과학적인 것, 민간요법, 그리고 사람의 머리, 관념, 상상의 방법들이 있다. 그런 방법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사람은 왜 머리를 쥐어짜면서 방법을 찾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사람의 방법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다 보니 사람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해 주리라는 것도 믿고, 믿음도 충만하다! 그가 계획할 때, 하나님의 뜻은 찾고 구했느냐? 그에게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가 있었느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겠어. 먼저 이렇게 계획하고 타산은 해 놓자. 양을 수컷 2마리에 암컷 3마리를 사 놓으면, 다음해에 최소한 9~10마리는 낳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냥 계획만 세우는 거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인 거고, 그렇게 안 되면 내가 눈이 멀었고, 내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거야.’라고 하는 이런 태도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계획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그것은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고 사람의 욕망이며, 하나님에 대한 무리한 요구이다. 이것이 한 방면인데, 패괴에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에게 순복하는 마음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첫해에 실패하고도 찾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그는 실패하기 전부터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스스로 달성하고 싶어 했는데, 자기 계획은 꼭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냐? (자신의 뜻입니다.)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은 어떤 성정이냐? 교만하고 패역한 성정이다. 그가 하나님이 축복해 주리라고 믿었지만 자기의 욕망과 타산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한쪽에 제쳐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교만한 성정이다. 하나님을 한쪽에 제쳐 놓았을 때, 그에게 순복이 있겠느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어떻게 안배하셨을까? 하나님은 어떻게 주재하시는 걸까? 하나님은 내게 얼마를 주실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생각했느냐?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하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할지를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떻게 하려는지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일을 통해 어떤 것을 알게 되었느냐? 그는 전혀 찾고 구하거나 순복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전혀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그는 먼저 혼자 계획하고 그다음 그 계획에 따라 자신의 방법과 상상, 관념으로 달성시키려 하고 이행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표현은 어떻게 나타났느냐? (실패한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뜻대로 했습니다.) 이런 일에서 사람은 마음에 먼저 최소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알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양한테 정상적으로 먹이면서 병이 나지 않게 하고, 춥지 않게 하고, 굶지는 않게 할 거야. 1년에 새끼를 몇 마리 낳을지 계획하지 않을 거야. 얼마를 낳을지는 난 모르지. 그건 하나님의 일이니까! 난 양을 잘 먹여서 배부르게 해 주고 살찌게 해 주고 영양 부족이 되지 않게 해 주면서 내 책임만 다할 거야! 내년에 어느 녀석이 새끼를 낳을 수 있을지, 어느 녀석이 새끼를 못 낳을지, 어느 녀석이 몇 마리를 낳을 수 있을지, 도합 몇 마리를 낳을 수 있을지는 다 하나님 손에 있어. 난 몰라. 그리고 요구하지도 않고 계획을 세우지도 않을 거야. 그런 건 다 하나님의 일이야.’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가 아니냐? 지금 이런 자세와 그전의 자세 중에 어떤 것이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고, 어떤 것이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냐? 어떤 것이 불신파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냐?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데, 너도 믿고 나도 믿고, 다 같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관점, 출발점, 근원, 목표가 다 다르고 원칙도 다르다. 이런 것에서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차이가 아니냐? (맞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 (출발점, 근원, 목표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출발점, 근원, 목표의 실질은 어떤 것이냐? 불신파의 근원과 목표는 어떤 것이냐? 다 자기의 뜻이다. 그 사람의 계획 역시 자기 뜻이었다. 그 사람에게 자기의 뜻은 어떤 것이 있었느냐? 왜 자기의 뜻이라고 말할까? 자기 혼자 어떤 식으로 타산을 해 놓았으면 그대로 이루려고 하면서 찾고 구하지 않았는데, 그는 ‘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르니까 계획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런 인식이 없었고 혼자서 먼저 계획했다. 그것이 사람의 뜻이 아니냐? 혼자서 먼저 계획하고 계획한 다음에는 어떻게 했느냐?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했는데,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계획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어떠한 대가도 아끼지 않으며 행했다. 그러면서 ‘난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거야.’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몰염치하지 않으냐? 네가 뭘 잘했다고 하나님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너를 축복해 줄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네가 규정한 대로 일을 하겠느냐? 그것은 이지 없는 생각이 아니냐? 하나님이 축복해 줄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이 너를 축복해 줄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꼭 너를 축복해 줄 것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한 것이 되느냐? 많은 사람이 이것을 혼동하는데, ‘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리라 믿어.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보호해 주시리라 믿어. 난 하나님께서 나의 이런 소원을 만족시켜 주시리라고 믿어.’라고 하면서 이런 것을 하나님에게 순복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것은 잘못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기도 하다. 패역이고, 교만 자대하는 본성이다. 그 두 가지 실행법은 확연히 다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실행법의 실질은 무엇이냐? 근원을 한 번 파헤쳐 보자. 진리를 실행하는 면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순복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느냐? 마음에 하나님의 위치가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는 없다고 말했는데, 그러면 없다는 것은 어느 방면의 표현을 말하는 것이냐? 그러려면 자신에게 비춰 보고 해부할 줄 알아야 한다. 네가 해부할 줄 알면 자신의 내면의 정형을 가늠할 수 있는데, 네가 실행하는 것들이 원칙에 부합되는지,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먼저 사람이 그 일을 계획하는 자체에 순복이 있느냐? 순복이 없다. 그렇게 하는 것에 순복이 없다면, 그럼 순복하는 실행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먼저 하나님의 뜻부터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많은 일에서 하나님은 너에게 뜻을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으며, 때로는 명확한 뜻이 보이지 않는다. 네가 양을 암컷 3마리에 수컷 2마리를 키우는데, 1년이면 새끼를 꼭 몇 마리 낳아야 하고 젖은 얼마큼 생산해야 된다고 결정해 준 사람이 있느냐? 결정해 준 사람이 없다.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해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일까? (계획하는 한편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태도가 있어야 한다. 계획하는 것은 옳으냐? 계획하는 실행법은 옳은 것이냐? 암컷 3마리에 수컷 2마리를 가지고 이듬해에 새끼를 9~10마리를 계획했는데, 그 숫자를 계획하는 것이 맞느냐? (맞지 않습니다.) 왜 맞지 않느냐?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하지 못하면서 계획을 세운다면 이지 없는 것이 아니냐? 이지 없는 것임에도 그렇게 계획한다는 것은 속에 또 다른 요구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는 ‘먼저 이렇게 계획을 해 놓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그것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잖아.’라는 생각을 한다. 그에게는 요행을 바라는 심리가 있다. 거기에다 자기가 한사코 나서기까지 한다. 한 방면으로는 요행을 바라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한사코 나서는데, 교만하기도 하고 미개하기도 하며, 욕망도 크고 야심도 크다. 계획하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사람이 실행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가 암컷 3마리와 수컷 2마리로 이듬해에 새끼 9마리나 10마리를 계획하고 있는데, 그렇게 계획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그것은 사람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양이 새끼를 낳을 수 있을지, 어떤 양이 얼마 낳을 수 있을지를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느냐? (못합니다.) 왜 못한다고 하느냐? 그 일은 하나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하는데, 그 일은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일에서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사람은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획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럼, 사람이 계획하지 말아야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옳을까? 정상적으로 물을 먹이고, 정상적으로 방목하고, 어떤 양이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게 하든지, 약을 먹이든지 하면서 잘 보살피는 것이다. 늑대가 물어 가지 못하게 하고, 개에게도 물리지 않도록 하며, 도둑맞지 않으면 된다. 그런 일들을 잘하면 된다. 누군가 “내년이면 새끼 몇 마리 낳을 거 같아요?”라고 물으면, “전 몰라요.”라고 하면 된다. “바보 아니에요? 그것도 모르다니. 양 3마리를 세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마리당 새끼 하나씩 낳는다고 쳐도, 1년이면 3마리는 낳잖아요. 그걸 왜 몰라요? 그 정도로 바보예요?”라고 할 때, 너는 “그건 바보나 똑똑이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 손에 달렸어요. 하나님께서 3마리를 낳게 해 주시면 난 3마리로 받아들이고, 5마리를 낳게 해 주시면 5마리로 받아들이면 돼요. 하나님께서 또 1년에 8~10마리 낳게 해 주실지도 모르죠. 다 좋은 일이에요. 그것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죠. 뭘 하든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봐야죠.”라고 한다면 그것은 순복하는 태도가 아니냐? 그렇게 해야 옳은 것이고, 그것이 사람이 갖춰야 할 태도이다. 한 방면으로는 어떤 타산도 하지 않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람의 책임을 다하고, 사람의 본분도 하면서 건성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또 다른 한 방면으로 만약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고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많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2년 동안 1마리도 낳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더욱 순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양을 3마리 키웠는데, 2년 사이에 새끼를 8~10마리씩 낳았어. 나도 암컷 3마리 키우고 있는데, 왜 2년 동안 한 마리도 낳지 않지? 그냥 그대로야. 그것 참 희한하네.’라고 할 수도 있지만 희한할 것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다 똑같은 부류라도 새끼를 낳고 안 낳고는 하나님 손에 있다. 모든 것은 사람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고 주재하는지에 달렸다. 때로는 많고 때로는 적으며,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재에 달린 것이다. 그 사이에 무엇을 배우게 되느냐? (순복입니다.) 순복만 배우게 되느냐? 또 없느냐? (하나님의 주재를 진정으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하게 된다. 어쩌면 네가 계획한 것은 적지만 하나님이 많이 주셨을 수도 있고, 어쩌면 네가 계획한 것은 많지만 그렇게 많이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든 사람의 생각이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가운데서 무엇을 체험하게 되겠느냐? 정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네가 계획도 잘해 놓고, 안팎으로 관리도 잘해 주고, 잘 먹이고, 잘 키워 주어 이미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겨울 혹한이 찾아오면서 갑자기 폭설이 쏟아지는 바람에 2~3개월도 채 되지 않은 갓난 어린 양들이 다 얼어 죽었다. 몇 마리가 죽었을까? 얼어 죽어도 될 녀석들은 안 죽고, 죽지 말아야 할 녀석들이 죽었다. 큰 양까지 죽어서 남은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사람의 계획에 올해는 양들이 왕년에 비해 많았는데, 어쩌다가 얼어 죽었을까?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렇게 또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느냐? 곳곳에서 너의 상상을 벗어나고 너의 계획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너는 많은 일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고, 자신의 계획이 어디에 문제가 생겼고, 어떤 일을 자신이 할 수 없는지를 느끼지도 의식하지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부지중에 너는 사람이 많은 일들을 예상할 수 없으며, 사람이 계획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때 너는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에는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지 않으면, 네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에게 주려고 한다면, 네가 좀 소홀히 한다고 해도, 예를 들어 늑대가 근처에 있어도 어린 양을 보기만 할 뿐 가서 잡아먹지 않으며, 그저 남의 양만 물어 가고 너희 집의 것만은 물어 가지 않는다. 그럼 너는 그건 정말 하나님께 달렸고, 하나님이 지켜 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쨌든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온역이 발생했을 때, 다른 집의 양들은 8마리, 10마리나 죽어 나갔다고 하자. 하지만 너희 집의 양도 죽을 것처럼 보이더니 며칠 지나 좋아지고 괜찮아졌다. 그래서 양은 그 재앙을 피하게 됐다. 그 일에서 너는 또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었느냐? 사람의 목숨도 하나님 손에 있거니와 양의 목숨도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만물의 생령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그것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너는 ‘이번 온역은 너무 무섭게 왔어! 내 양들은 예방접종도 하지 않았고, 어떤 예방조치도 하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신경 안 쓸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잖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려고 한다면 거두어 가시는 거지 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총이야. 난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려야 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네 마음에는 부지중에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정확한 보임과 인식이 있게 된다. 어떤 정확한 보임과 인식일까? 너에게 베풀어 주신 이는 하나님이지만, 네가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이 거두어 가려고 할 때는 네가 아무리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태도를 갖추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려고 한다면 거두어 간다는 것인데,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명정 속에 있으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안배에 있으니, 너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너의 계획, 너의 타산 그리고 네 자신의 목표가 마음에서 여전히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겠느냐? 그런 것들은 은연중에 사라지게 되는데, 갈수록 희미해지고 엷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것들이 대체된 것일까?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네게 왜 그것들을 거두어 갔는지 말씀해 주지는 않아도 너는 은연중에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늘 너에게 어떤 복을 베풀어 주고, 너에게 많은 재산을 축복해 주면, 너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왜 축복해 주는지 말해 주지 않아도 너는 마음에 영감과 느낌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지, 사람이 벌어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뭐가 하나 없어지거나 잃어 버리게 되어도 너는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이 가져갔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네가 이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될 때면, 네가 살아가는 하루 하루와 걷고 있는 한 걸음 한 걸음, 지나가는 한 해 한 해를 다 하나님이 이끌어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겠느냐? 다 하나님이 이끌어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너는 은연중에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며,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느낌이 들면서 날마다 새로운 인식이 있게 되고, 해마다 매우 큰 수확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한 체험도 갈수록 깊어지게 된다. 그런 체험이 깊어질수록, 네 마음에는 하나님이 거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어떤 언론이나 사람을 미혹하는 어떠한 말이나 관념, 사상들로 인해 네 마음에서 하나님이 없어지겠느냐? (아닙니다.)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될 때면, 불신파가 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네 마음에 거하면 어떤 것도 어떤 것으로도 빼앗아 가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 ‘거하게’ 했느냐?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늘 자신의 상상이나 관념 혹은 계획, 타산, 욕망 이런 것들을 주도적 위치에 두고 자신의 삶을 이끈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런 인식을 갖게 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므로 욥처럼 하나님께 순복하려면 체험하고 실행하는 길이 옳아야 한다. 실행의 길에 문제점이 있으면 믿음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욕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소용없으며, 심지(心志)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소원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소용없다. 삶 속의 많은 일들에서 사람의 실행법에는 다 문제 되는 면이 있다. 겉으로는 사람이 몹시 애를 쓰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심지도 아주 크고, 마음도 불타오르는 것 같아 보이는데, 왜 체험하다 보면 최종에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겠느냐? 왜 그런 체험과 인식을 얻지 못할까? 바로 사람의 실행법에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사람의 주관적인 의식, 사람의 관념과 상상 그리고 사람의 계획이 늘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인데, 그런 것들이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향해 숨는다. 이에 관해 하나님 말씀 중에 어떤 말씀이 있느냐? (“나는 거룩한 나라에 나타나고 더러운 곳을 향해 숨는다”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더러운 곳’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람의 여러 가지 욕망, 타산, 규정 나아가 사람의 호의까지, 사람에게는 좋아 보이는 마음 가짐, 사람에게는 옳게 여겨지는 마음 가짐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가로막아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런 것들은 네 앞을 막고 있는 장벽같아 너를 빈틈없이 막고 있어서 너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주재를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보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의 주재를 알 수 있겠느냐? 영원히 하나님의 주재를 알지 못한다.

욥은 자녀들을 대하는 일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욥의 상황을 보면, 욥은 여호와를 경배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그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건,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보면 욥에게는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관념대로라면, 욥의 그렇게 큰 가문에서 욥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자녀들이 믿지 않았다면 욥이 얼마나 체면을 잃었겠냐고 생각한다! 그 체면은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람의 혈기에서 비롯되어 ‘난 체면을 잃었어. 어떻게 해서든 애들이 믿게 해 내 체면을 회복해야겠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욥은 그렇게 했느냐? (아닙니다.)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었느냐?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며, 기도했습니다.) 욥은 단지 번제를 드리고 기도만 했다. 번제 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어떤 태도이냐? (순복하는 태도입니다.) 또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구나. 성경에 욥이 그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되었는데, 그 말에서 욥의 실행 원칙은 보지 못했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는데, 자녀들이 잔치 벌이는 것을 막았었느냐? (아닙니다.) 간섭했느냐? (아닙니다.) 욥은 참여했느냐?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욥의 태도인데, 그는 자녀들을 위해 번제만 드렸을 뿐이다. 욥이 “여호와 하나님, 저 아이들을 감동시켜 당신을 믿도록 해 주시고, 저 아이들 역시 당신의 은총을 받게 하옵시고, 저 아이들도 저처럼 당신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런 말 한 마디라도 한 것을 들어 보았느냐? 욥이 이렇게 기도했었느냐?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욥의 자세는 바로 그들을 멀리하되,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것이다. 속으로는 그들을 걱정했는데, 그들이 여호와께 득죄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욥은 그 몇 가지 방면을 중심으로 실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욥의 실행 원칙이다. 욥의 실행 원칙은 어떤 것이었느냐?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욥은 자녀들이 하나님 믿기를 바라지 않았겠느냐? (바랐습니다.)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매우 상심했다. 그것은 체면 문제가 아니다. 분명히 욥은 자신처럼 자녀들도 여호와 앞으로 나와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분명히 많이 바랐을 것이다. 수없이 바랐고, 한없이 바랐겠지만 자녀들이 그 길로 가지 않았을 때, 욥은 강요했느냐?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강요하지 않은 것이 욥의 태도이다. 그럼 욥은 어떻게 했느냐? 강제로 잡아끄는 식으로 설득했을까? 분명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가끔 몇 마디로 타일러 주었을 뿐인데, 타일러서 듣지 않으면 그만두었다. 그저 그들에게 규범을 벗어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는데, 각자의 삶을 살았다.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것도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득죄할까 염려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지, 그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올린 것은 아니다. 욥은 강요하거나 억지로 잡아끌지 않았다. 욥은 혹시 정에 휘둘려서 ‘내 자녀들이니까 무조건 믿게 만들어야겠어! 그래야 하나님께서 몇 사람이라도 더 얻을 수 있지.’라는 이런 호의가 있었느냐? 욥에게는 그러한 사람의 뜻이 없었고 그런 호의도 없었으며, 그런 계획이나 타산도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 행위이냐? 이런 것들은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네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해도 하나님은 열납하지 않는다. 그들이 믿을 것 같았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욥이 설득하는 것보다 파워가 있지 않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믿게 만들려면, 그들을 감동시키거나 어떤 일을 하나 할 것인데, 욥이 하는 것보다 쉽지 않겠느냐? 너무나 쉽다! 그래서 욥에게 이성(理性)이 있었다고 하는데, 욥은 자녀들을 억지로 잡아끌지 않고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들과 거리를 두고 선을 분명히 긋고 각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욥의 이성이고, 실행의 원칙인데, 사람의 뜻이나 호의에 따라 하나님께 득죄하는 일은 어떤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밖에 자녀들은 믿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들을 감동시키지 않았는데, 거기에서 욥은 어떤 것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뜻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뜻을 보았느냐? ‘하나님도 역사하지 않으시는데, 나도 기도하지 않겠어.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겠어. 내가 간청한다면 하나님께 득죄하는 거야.’ 이런 의미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욥은 기도하지 않았다. 욥은 절대로 자녀들이 구원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해 달라고 눈물 흘려 통곡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들을 위해 며칠씩 굶어 가며 금식하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욥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욥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세부적인 것들에서 너는 무엇을 보게 되었느냐? 욥의 순복은 진실하지 않으냐?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냐?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다. 자녀들이 그렇게 사치를 즐기면서 세상에 끌려가게 되었고, 사악한 조류를 따르면서도 하나님 앞으로 오지 않고, 참 도를 앞에 두고도 기회를 잃게 되어 멸망되고 침륜(浸淪)되게 되었는데, 보통 사람은 정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보통 사람은 이런 일에서 순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할 수 있었다. 그저 그들을 위해 한 가지 일, 즉 번제를 드리고 마음속으로 걱정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욥의 자식이었다! 그럼에도 욥은 자녀들을 위해 부질없는 일이나 하나님께 득죄하는 일은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 욥의 이 실행 원칙은 어떠하냐? 그에게는 진실한 순복이 있었다. 욥은 자녀들의 앞날에 관련되는 일에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인의(人意)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단지 하인들을 보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시켰을 뿐 본인은 가지 않았다. 욥이 가지 않은 원인의 한 가지는 물들지 않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참견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일까? 참견하면 하나님께 득죄하게 되기 때문에 욥은 그 사악한 곳을 멀리했던 것이다. 이런 원인이 있지 않으냐? 욥의 실행에는 세부적인 것이 있지 않으냐? 어떤 세부적인 것들이 있느냐? 먼저 자녀를 대하는 일을 놓고 말해 보자. 욥의 뜻(원문: 宗旨)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는 일은 자기가 절대로 나서서 하지 않고, 인의적인 타산이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따르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총체적인 원칙이었다. 그럼 세부적인 실행법은 어떠하냐? 자녀를 대함에는 몇 가지 실행법이 있었느냐? (첫째는 자녀들의 방탕함을 간섭하지 않고, 참여도 하지 않으며 멀리했습니다.) 멀리하고 그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또 뭐가 있느냐?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억지로 잡아끌지도 않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으며, 그들과 분명히 선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행 원칙이다. 그러면 세밀하게 실행한 것이 아니냐? 더 대조해 보아라, 이런 일이 임했을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실행하느냐? (하나님께 자녀들도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혼자서 억지로 끌어당기고, 두들겨 패고, 꼬집어 뜯으면서라도 자식들을 여기로 끌고 와서 숫자를 채우고, 복을 받게 하려고 한다. 만약 별로 유익이 없다면 뭐라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큰 유익을, 즉 천국으로 들어가는 이렇게 큰 복을 보고는 속으로 ‘네가 믿지 않으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잖아! 네가 안 믿으면 나도 편하게 못 믿잖아!’라고 생각하면서, 자녀가 하나님 집에 이름이라도 걸어 놓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녀가 그 복을 얻을 수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머리를 쥐어짜며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이 일을 서둘러 성사시키려고 한다. 욥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 못할까?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께 득죄할지를 고려하지 않고 먼저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감과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하고 안배하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정감, 자신의 속셈과 이익 그런 것들만 생각한다. 자녀를 대하는 일에서, 자녀가 살아 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억지로 끌어당기거나 강요하지 않는 태도였고, 또 간섭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가는 길이 다르다 보니 욥은 그들을 간섭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어떤 길을 가든 간섭하지 않았다. 욥이 자녀들에게 하나님 믿는 일에 대해 적게 말했겠느냐? 그런 말들을 틀림없이 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듣지 않았다. 욥은 어떤 태도였겠느냐? 욥은 ‘난 책임을 다 했어. 저 아이들이 어떤 길로 갈지는 하나님께 달렸고 하나님의 인도에 달렸어. 만약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고 저 아이들을 감동시키지 않으신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겠어.’라고 했다. 그리하여 욥에게는 한 가지 실행이 더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금식하거나 어떠한 고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욥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욥은 이런 행동들을 왜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는 행위가 아니며, 다 사람의 뜻에서 비롯되고 자기가 한사코 나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녀를 대하는 방면이다. 자녀들이 욥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을 때, 욥은 이런 태도를 보였다. 그럼 자녀들이 죽었을 때, 욥의 태도는 어떠했느냐? 울었느냐? 떠들어댔느냐? 슬퍼했느냐? (아닙니다.) 그럼 싸다고 말했느냐? 이런 기록들이 없다. 그렇다면 자녀들이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욥은 마음이 쓰리거나 괴로워했느냐? (네.) 뭐가 괴로웠던 것일까? 하나님을 잘 믿으라고 잘 타이르지 못해 결국 자녀들이 징벌받게 되었다고 후회했던 것이냐? 혈육의 정으로 보면 틀림없이 조금은 슬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욥은 순복했었는데, 순복한 표현은 어떤 것이었느냐? ‘이 자식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거야. 이 자식들이 하나님을 믿었든, 안 믿었든 그 목숨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어. 이 자식들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려고 한다면 곧 거두어 가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려고 한다면 곧 거두어 가시는 거야.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어. 그렇지 않고서 누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겠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기 1:21) 그러므로 자식을 대함에도 욥은 그런 태도였다. 그들이 살았든 죽었든 욥은 계속 그 태도였는데, 그의 실행법은 정확한 것이다. 그의 하나하나의 실행법, 하나하나의 일을 대하는 관점, 태도, 정형은 다 순복하고 기다리고, 그다음 인식하는 태도와 정형 안에 있었다. 이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해도 매사에서 이런 태도가 없고, 자기 뜻이 매우 강하고 자기 속셈과 이익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진실한 순복일까? 그러면 진실한 순복을 볼 수 없고, 진실한 순복을 할 수도 없다.

자기 뜻이 매우 강한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어떤 표현이 있느냐? 단정부터 짓고, 계획부터 하고, 타산부터 한다. 심지어 사람의 어떤 방법들로 면밀하게 계획하고 사전에 준비까지 한다. 그러고 나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정형일까? 절대적인 계획과 목표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하는 면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방면에서 속에 어떤 정형이 있을까? 자기 뜻이 너무 강할 때면, 사람은 하나님을 잊게 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잊게 된다. 그리고 일이 지나가고, 난관에 부딪히거나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에야 생각이 나는데, ‘아,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았네. 아직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았구나.’라고 한다. 이런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딱 봐도 마음에 하나님은 없고 다 자기가 나서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 집의 사역을 하든, 본분을 하든, 혹은 외부의 일을 처리하든 아니면 생활 속의 사적인 일을 처리하든, 네 마음에는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있어야 하고 정형이 하나 있어야 한다. 어떤 정형이어야 할까? ‘어떤 일이든, 일이 닥쳤으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해야 돼. 일이 임하기 전에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도해야 돼. 당연히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해야 돼. 모든 것에는 다 하나님의 지배가 있어. 난 이런 태도를 갖춰야지 내 계획을 가져서는 안 돼.’라는 정형이다. 사람이 계속 이렇게 체험하면서 오래 체험하다 보면 정말 많은 일에서 저도 모르게 하나님의 주재를 보게 된다. 너에게 늘 자신의 계획, 타산, 소망, 사심, 욕망이 있으면 부지중에 너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너에게 모습을 감춘다. 하나님은 ‘너는 나서기 좋아하지 않느냐? 너는 계획이 있지 않느냐? 너는 머리도 좋고 학벌도 좋고 지식도 있고 일 처리 능력도 있고 수법도 있으니, 너 혼자 처리하거라. 너는 처리할 수 있지 않느냐? 너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 하나님이 필요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네가 처리할 수 있다고 하니, 그럼 혼자 가서 처리하거라. 잘 되든 못되든 책임은 너 스스로 지거라. 난 상관하지 않겠다.”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항상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며, 항상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데, 이런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은 어떻게 되겠느냐? 각 방면에서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어떤 결과일까?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이 장기적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 어떤 관성이 형성된다. 일만 닥치면 혼자 먼저 방법을 생각하고, 자기의 목표, 속셈, 계획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부터 생각하게 되는데, 사람은 아주 관성적으로 곧장 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익이 있으면 하고, 이익이 없으면 안 해.’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움직이게 되는데,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외면하고, 내버려 둔다. 그렇게 되면 사람 편에서는 어떤 것들을 느끼게 되느냐? 하나님의 징계도 없고 책망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갈수록 방종해지는데, 심판 형벌이 없고 징계가 없고 질책도 없고, 깨우침과 빛 비춤과 인도는 더더욱 없다. 이런 것이 바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으면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가라앉고, 흑암에 빠지고, 하나님의 뜻을 더듬지 못하고, 이상(異象)이 모호해지고, 일을 해도 원칙이 없고, 지혜와 원칙은 더더욱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여러 번 체험하게 되면 ‘본분도 머리 좋은 사람이 잘하는 것이고, 은사 있는 사람이 잘하는 거야! 진리가 어디 있어! 하나님을 믿어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는다는 건 그냥 듣기 좋은 말일 뿐이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에게서 온 지혜는 무슨! 어딜 봐서 하나님이 깨우쳐 주고 빛 비춰 준 거라고 하는 거야? 분명히 사람이 생각이 빠르고 머리가 좋아 그런 거잖아. 다 사람의 방법이잖아! 어떤 사람은 나이가 좀 있어서 수완이 좋고, 생각이 좀 빠른 거고, 어떤 사람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해서 좀 뒤처지고 둔한 거네. 단지 그런 거잖아!’라고 한다. 이것은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부인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난 왜 본분을 하다가 보면 갈수록 점점 재미없고, 갈수록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까요? 왜 원동력이 없어졌을까요? 원동력은 어디 간 걸까요?”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 믿으면 믿을수록 왜 금방 믿었을 때의 믿음이 없는 것 같을까요? 막 믿었을 때는 하나님과 마주한 것 같아 정말 누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 누림이 없는 것 같을까요?”라고 한다. 그런 느낌은 어디로 갔을까?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었으니 너는 하나님을 더듬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은 가련해졌고 메말라 버렸다. 어느 정도로 메말라 버렸을까? ‘하나님께서 6천년 경영 계획을 하신 목적이 뭐였더라?’라고 하게 된다. 이상이 모호해진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께서 영광을 서방에 가져오셨던가?’라고 하면서, “서방에 가져왔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그래도 이상이 남아 있는 것일까? 이것은 내면이 메말라 버린 게 아니냐? 뒤이어 또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저 사람들은 왜 저리도 멍청하지? 전에 세상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은 고소득자이고, 어떤 사람은 화이트칼라였고, 어떤 사람은 CEO(최고 경영자)였고, 어떤 사람은 특별한 인재였는데, 왜 저렇게 바보같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할까? 하나같이 가정과 직장을 내려놓고, 돈 한푼도 벌지 않고, 큰 붉은 용의 박해까지 당해 가면서 본분하는 거지?’라고 하게 된다. 견해가 생긴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나를 봐, 얼마나 똑똑해. 난 사전에 이럴 줄 알고 정신을 차렸지. 난 바보짓 안 할 거야. 저들은 아직도 바보짓을 하고 있어! 늪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거야. 속은 거야.’라고 한다. 가련한 꼴이 나온다. 그렇지 않으냐? 이렇게 되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난 왜 이렇게 똑똑하지? 갑자기 내가 똑똑하다는 생각이 드네. 그동안 뭐하고 있었던 거지?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그저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들으면서 직장도 버리고, 결혼도 포기하고, 그렇게 좋은 직업도 포기하고, 또 그렇게 좋은 가정까지 포기하다니. 그동안 왜 그렇게 멍청했던 걸까? 그땐 속아서 그런 거야.’라는 생각에 갑자기 자신이 똑똑해졌다고 느껴진다. 사실, 똑똑해진 것이냐, 멍청해진 것이냐? (멍청해졌습니다.) 여전히 그 사람에, 그 머리에, 그 학력에, 여전히 같은 가정 환경과 가정 배경이지만 하나님이 떠나는 순간, 사람은 그렇게 멍청해지고 아무것도 없게 된다. 아무것도 없게 되니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지 않은 것 같고, 바른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른길이 아니고, 이 길은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에게 이 길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권고해도 안 된다.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렇게 못 산다. 어떻게 살면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는데, 그 길이 그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것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며, 가장 좋은 것이고 유일하게 허무하지 않은 길이다. 애정과 행복을 중요시하고, 단란함을 중요시하고, 한자리 하고 부자되는 것을 중요시하고, 가문의 영광과 벼락 출세를 중요시하고, 또 무엇이 있느냐? 스펙 쌓기를 따진다. 어떤 스펙을 쌓느냐? 학벌, 지식, 자격증 등, 각 방면으로 쌓는다. ‘빨리 능력을 쌓아야지. 하나님 집에 있으면서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갈수록 지식이 사라질 것 같고, 갈수록 하위로 떨어지고, 갈수록 발전성이 없어질 것 같아.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사회 하위층이 되어 버려. 그럼 끝이야!’라고 한다. 이런 생각이 나온다. 이러면 무용지물이 되지 않았느냐? 사람이 그 지경까지 갔으면 본분을 할 수 있겠느냐? 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이런 생각은 있지만 그래도 참된 믿음의 요소가 있어 계속 추구하고 싶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그런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네가 효력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너에게 기회를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요구가 높지 않은데, 왜일까? 패괴가 없는 사람이 있겠느냐? 사람은 다 진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패괴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누구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이 없겠느냐? 누가 하나님을 대적한 체험이 없겠느냐? 누구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정형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각종 표현들이 없겠느냐? 다 있다. 진일보로, 불신하고, 의심하고, 오해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추측하는 생각이나 견해나 그런 체험이 없는 사람이 있겠느냐? 다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따진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따진 적이 없다. 그럼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따지지 않는 동시에 또 어떻게 했느냐? (깨우쳐 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끊임없이 감동시켜 준다는 말이냐? 하나님은 각 사람을 못 가도록 끊임없이 붙잡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였느냐? 심판하고 형벌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면서 사람을 못 가도록 계속 붙잡았느냐?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을 못 가도록 어떻게 붙잡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든, 성령이 역사하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든,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한결같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목양해 주면서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공급해 준다. 진리를 깨달으라는 목적은 무엇이냐?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면, 너에게는 그러한 패역이나 패괴 성정이나 불신의 관점이나 각종 잘못된 정형을 막아 낼 수 있는 분량이 생기게 되고 미혹되지 않게 된다. 각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뜻도 알게 되는데, 그럼 한 방면으로는 피조물의 본분을 잘할 수 있게 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람의 모양으로 살게 되고, 정확한 인생의 길로 갈 수 있게 된다. 정확한 인생길을 가게 되면, 사람에게는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간증이 있게 되는데, 최종에는 사탄을 이길 수 있고, 성정의 변화가 있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순복이 있게 되고, 진실한 경외심이 있게 되면서 합격된 피조물이 된다. 그러면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최종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기간에, 사람에게 얼마나 큰 패역이 있든, 얼마나 심한 패괴 성정이 있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최저 기준은 어떤 것이냐?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은 너를 포기하고 너를 버리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이 네게 준 최저선은 무엇이냐? 네가 그 최저선에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은 너를 원하고 너를 남겨 둔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떠나지도 않고, 마음으로 계속 진리를 추구하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 최저 기준을 정확하게 더듬지 못했구나. 하나는 네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기본이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에는 실제적인 내용이 있다. “난 다 인정해요. 하늘에 신이 있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셨고,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도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인정만 하면 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최저 기준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것인데, 하나님을 시인하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최소한 자신의 본분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할 겁니다.”라고 하는데, 그가 하는 본분은 이미 교란과 방해가 되었고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남겨 둘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것은 최저 기준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교란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최저 기준이다. 네가 말로는 ‘본분하러 가요.’라고 하면서도 교란과 방해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그리스도도 본분을 한다. 하지만 교란하고 방해하고 파괴하고 악행을 저지른다. 그런 사람이 필요하겠느냐? 그것이 본분을 하는 것이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최저 기준을 넘어선 것이고 본분을 할 수 없는 것이며,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이다. 나귀처럼 연자 맷돌만 잘 돌리면, 좀 많이 먹어도 되고, 눈을 가리고 주인을 알아보지 못해도 되고, 똥오줌을 많이 싸도 되고, 좀 늦게 돌려도 되고, 농땡이를 좀 부려도 된다. 그런 것은 그나마 괜찮다. 다 봐준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되면 그 나귀에게 연자방아를 돌리지 못하게 하고 내보내야 하느냐? 나귀가 해야 할 책임과 본분을 하지 못할 때인데, 본분이 아니라 방해가 될 때이다. 그럼 연자 맷돌을 돌릴 때 어떤 상황이 나귀가 방해하는 것일까? 돌릴 때가 되면 똥을 싸는데, 똥을 싸도 바닥에 싸는 것이 아니라 꼭 맷돌 위에다 싸는 것이다. 그러면 계속 쓸 수 있겠느냐? 쓰지 못한다. 방아를 돌리라고 시키면, 좀 느려도 되고, 잘 끌지 못해도 되고, 도중에 조금 훔쳐 먹어도 되고, 혹은 주인에게 발길질을 해도 된다. 단지 맷돌을 돌려서 가루를 내기만 하면 된다. 가루가 좀 부드럽지 못해도 되고 질이 좀 떨어져도 된다. 어쨌든 사람이 먹을 정도만 되면 그 나귀는 써먹을 수 있다. 그런데 계속 맷돌에다 똥을 싸면 그 식량을 먹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면 본분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본분을 한다고 하지 못한다.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느냐?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나귀를 계속 쓸 수 있겠느냐? 그 나귀는 쫓아 버려야 한다. “됐다, 그만! 너는 안 되겠구나. 연자 방아를 돌리라고 했더니 우리가 먹지도 못하게 계속 식량에다 똥을 싸는구나.”라고 하면서 그 나귀를 바꿔야 하고 보내 버려야 한다. 이러면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 이렇지 않으냐? (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 바로 이렇다. 어떤 사람은 ‘내가 제명된 원인은 정형이 좋지 않아 항상 소극적인 것 때문인가?’라고 한다. 그렇게 제명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본분을 정지시킨 것은 가끔 본분을 잘 하지 못하고, 좀 건성으로 한 것 때문이라고 하면서 “난 가끔 그랬잖아요! 왜 내 본분을 정지시켜요?”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본분의 효과가 좋지 못해서 제명됐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느냐? 또 어떤 사람은 ‘저는 가끔 안 좋은 생각이나 사악한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제명당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경우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신하는 관념이 생긴 것 때문에 제명되거나 본분이 정지된 사람이 있느냐? 가끔 불신하는 관념이 생기면서 ‘하나님이 정말 있는 것일까? 바람 불고, 비 오고, 천둥 치고, 눈이 내리는 건 정말 하느님이 하시는 걸까?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셨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잘못된 거야! 그래도 본분은 잘 해야지.’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발견하고 ‘저 사람은 징조가 안 좋아! 계속 하느님을 의심하네! 저 사람은 제명시켜서 본분을 못하게 해야 돼.’라고 하는 경우가 생겨 제명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제명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어떤 사람들을 제명하고 분분을 정지시켰느냐? (효력을 해도 득보다 실이 많고, 교란하고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막말로 방앗돌 위에 똥을 싸는 것이다. 그러면 본분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본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견해가 있거나 자기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본분을 할 수 없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본분을 하지 않는 것이지, 그 사람에게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공평하지 않으냐? (네.) 사람의 약점을 잡지도 않고, 사소한 일을 크게 만들어 몰아 붙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혹시 극소수 어떤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억압을 받았을 수도 있다. 너희는 그런 일을 어떻게 보느냐? 그런 일이 닥치면 너희는 어떻게 겪겠느냐?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다.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어떻게 잘못된 것이냐?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적으로는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는 것이지만 사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사람은 그냥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전에 우리 사이에 문제가 좀 있었다고 계속 날 괴롭히고 억압하는 건데, 하나님은 상관하지도 않잖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할까? ‘미처 돌볼 틈이 없으니까. 워낙 바쁘시니까.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시는데, 이런 사소한 일까지 보실 겨를이 있으시겠어? 안 보이니까 어떤 때는 이 일을 그저 지나치시는 거고, 그래서 난 당하는 거야.’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 것이냐? 아주 많은 세세한 부분의 실행에서 불신파의 관점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 나타난다. 일이 임하지 않았을 때 다들 도리는 말할 줄 알아서 “하나님께서 모든 걸 주재하시고 안배하셔요. 모든 건 다 하나님 수중에 있어요. 저는 믿어요.”라고 한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도리이다. 네가 일이 닥쳤을 때는 어떻게 했느냐? 어떻게 대하였느냐? 말은 ‘나는 이 일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일 거야.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겠어.’라고 하지만 정작 일이 임하면 어떠하냐? 예를 들면, 두 사람이 협력하는 관계라고 하자.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나 안배할 때, A는 알게 하고 B는 모르게 했는데, A에게만 시키고 B에게는 안 시켰더니 B는 속에 의견이 있게 된다. ‘뭐지? 내가 눈에 거슬리나? 내가 만만해 보이나? 내가 어린 것 같아서? 아니면 우리 집이 가난해서? 왜 사람을 무시해? 왜 나한테는 그 본분을 하지 말라는 거야?’라고 한다. 그 사람은 ‘왜’라고 따지는데,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해도 자기 눈에는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도 다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관점이냐? 그런 사람이 바로 불신파다. 불신파의 관점이 어떤 것이냐면 바로 글귀 도리를 잘 말하고, 큰소리를 잘 치고, 빈말도 잘하지만 일이 닥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라고 인정했던 말을 자신에게는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항상 ‘다른 일은 다 하나님께서 주재하셔. 바람이나 비, 재난이나 국가의 운명, 인류의 운명은 다 하나님 손에 있어. 그런데 나의 이 일은 하나님의 주재가 아니야. 하나님은 이런 사소한 일을 상관하지 않아.’라는 관점이다. 이러면 진실로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 사람이냐? 이러면 아니다. 큰일에서는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작은 일에서는 믿지 않는데, 믿지 않으면 순복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순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닥친 일이 그에게는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나쁜 일이 되었는데, 그 사람을 드러낸 것이다. 좋은 일이 되게 하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선 이성적이어야 한다. ‘어떤 일들을 나한테 알려 준다는 건 그래도 내가 나쁘진 않다는 거야. 어느 정도 신뢰성도 있고 인성도 좀 있고, 비교적 미덥다는 걸 증명해. 사람이 내게 부탁한 일이라고 해도 난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한 것으로 생각할 거야! 알려 준 사람이 누구든 일단 내 본분이라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본분을 인수받을 거야. 그다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이 본분을 잘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내 책임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고 전력을 다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거야.’라고 해야 한다. 이런 것이 실행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이것이 실행해야 할 것이다. 저항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좀 전에 말한 것처럼 먼저 이성적으로 ‘이 일을 나한테 시키면 난 이렇게 대해야지. 그러나 나한테 시키지 않고 저 사람들끼리 어떤 일을 가지고 말하면서도 나한텐 알려 주지 않고 나 모르게 하는 것 같다면, 난 안 되나 보네. 하나는 아마 내 인품이 그렇게 미덥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그 사역을 맡을 정도가 되지 않아 그 방면의 본분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 난 그만한 분량이 없고 그런 실제도 없어서 그럴 수 있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을 때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하고 순복해야 한다. ‘나한테 닥치고, 나한테 부탁한 거라면 잘해야겠지만 나한테 부탁하지 않아도 나는 원망하지 않을 거야. 왜 나한테는 알려 주지 않는지, 왜 그 일을 나에게 맡기지 않는지를 성찰해야 돼. 나한테 어떤 방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것일 거야. 인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지, 인품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리를 추구하는 방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지, 소질에 문제가 있어 그 방면의 사역을 감당할 기량이 안 되다 보니 그런 건지 좀 성찰해 봐야겠어. 아마 이런 방면에 문제가 다 있을 수 있어. 그런 거라면 내가 별로인 거야! 내가 별로인데 뭘 원망할 게 있어? 원망하면 안 되지.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거야.’라고 해야 한다. 네가 감당하지 못하는 걸 억지로 너에게 맡기면 잘 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사실, 그 일이 너에게는 온전케 하는 것이고, 유익한 것이다. 너는 원망하지 말아야 하고 선택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일은 사람의 믿음을 검증하고 사람이 진실로 순복하는지를 검증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성적이지 않으냐? 너희는 보편적으로 그런 이성을 갖추었느냐?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성을 갖추지 못했으면 그런 일이 임할 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일이 지나가면 그만이냐? 인식은 좀 했느냐? 아니면 나중에 또 그런 일이 임해도 여전히 그런 식으로 속에다 늘 감추고 해부하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해결하지도 않는 것이냐? 이런 일은 자주 있지 않으냐?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너의 내면에서 병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임하든 너는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얻을 수 있다. 어떤 일이 임해도 다 자기 뜻에 따르고, 다 자기 관념에 따르고, 다 자기의 취향에 따른다면 너는 어떤 일에서도 진리를 얻지 못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게 어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는 것이겠느냐. 분명히 자신의 천연적인 것과 패괴 성정 속에 살면서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인데, 살고 싶은 대로 살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움직이면서 진리를 전혀 찾고 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떤 방면의 본분을 하면서 그 팀의 팀장으로 뽑혔다. 그러면 속으로 ‘팀장은 계급장을 단 거야. 잘해야 돼! 하나님께 충성해서 신뢰를 얻어야지. 본분을 건성으로 해선 안 돼.’라고 생각하면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본분을 한다. 그러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 훈계를 받으면 소극적이 되는데, 열의가 30% 식는다. 또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형제(자매)님은 본분 효과가 별로예요. 다른 사람으로 뽑아야겠어요.”라고 말하고 그 사람을 교체시켰다. 교체된 다음 사역하고 본분하는 열의가 또 30% 식었다. 얼마나 남았느냐? 나머지 40%는 어떤 것일까? 소극적이고, 오해하고, 원망하고, 건성으로 하고, 대충 때우고, 불쾌해하고, 감정적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기분이 좋으면 조금 하는데, ‘불쾌하면 난 안 해, 때려치울 거야.’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태도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험하고 방법이 없다. 너희는 이런 일이 닥치면 실행 길이 있느냐? 순복하는 태도가 있느냐?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고 자제하거나 자신의 취향이나 욕망을 배반할 수 있느냐? 바로잡을 수 있느냐? 어느 정도 바로잡을 수 있느냐? 바로잡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야 하느냐? (하룻밤 걸립니다.) 그것은 빠른 셈이다. 하룻밤은 길지 않은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바로잡았으면 정말 빠른 것이 아니냐? 사람은 일반적으로 소극적이 됐다고 하면 몇 개월씩 가는데, 볼 때마다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 누가 “반년은 못 본 거 같은데, 왜 이렇게 폭삭 늙었어요? 한 2~3년은 더 늙은 거 같아요.”라고 할 정도이다. 그것은 소극적이 되어 그런 것인데, 소극적이 되다 못해 얼굴에 주름까지 가득해졌다. 도저히 돌아서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진리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점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사람의 패괴 성정에 있다. 사람의 패괴 성정이 사람에게는 너무 큰 걸림돌이다. 사람에게 고난을 받으려는 심지가 전혀 없고, 자제하지 않고, 회개하는 법을 모르고, 강퍅하고, 고집스럽고, 항상 이유를 따지고, 생억지를 쓰고, 성깔을 부리고, 짜증 부리고 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너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거니와 네가 하고 있는 본분에서도 아마 힘만 쓰고 효력만 하고 있을 때가 아주 많을지도 모르며, 효력마저 마지막까지 못할지도 모른다. 효력마저 마지막까지 못하면 어떤 사람이냐? 그러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해 자주 총결하고 반성하느냐? 잘못된 부분, 치우치고 그릇된 부분이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부분을 성찰할 수 있느냐? (네.) 그럼 문제되는 부분을 찾았다면 회개하는 법은 아느냐? 바로잡을 수는 있느냐?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느냐? 예를 들면, 네가 한 바탕 훈계를 받았다고 하자. 그래서 풀이 죽었는데, 체면도 잃고 명예도 잃고, 사람들 사이에서 위신도 잃게 되어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이 본분을 해야 되나? 어떻게 하라고 하는 거야?’라고 하게 되는데, 이런 소극적이 되고 태만하고 저항하고 오해하는 정서는 얼마나 오래 가느냐? 얼마나 지속되다가 정상으로 회복되느냐? 그 일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데, 왜 책망 훈계를 받았는지, 자기가 어디에서 문제 생겼는지, 어떻게 실행해야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보통 심한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바로잡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 다시 말해, 그 방면에서 감정적인 것이 없고, 철저히 돌아서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할 수 있을 정도, 정형이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된 정도인데, 그 일로 마음은 여전히 조금 아플 수 있겠지만 영향을 받지 않고 이미 그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정도까지 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그 일에서 제대로 깨달았는지에 달렸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경우는 계속 이유를 따지는데, 툭하면 따지게 됩니다.) 계속 그렇게 따지다가 스스로 따지기도 귀찮아지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느냐? 계속 따지다가 별로 의미도 없는 것 같고, 아무도 듣지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말할 수도 없으며, 그리고 더 따져 봤자 스스로도 그렇게 하는 건 너무 무의미해 보이고 너무 시시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 따지지 않게 된다. 항상 이유를 따질 수도 없다. 계속 따지고 드는 것은 정신 상태가 비정상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 내면에 있는 속셈과 욕망, 자기의 뜻을 해결하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나 다 그렇고, 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 한다. 특히 이익과 체면, 지위와 명예에 관련될 때, 사람은 이런 것들에 통제되는데, 그것도 단단히 통제받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때 너에게 잘못된 정형이나 소극적인 정형이 있거나 바르지 못한 속셈이 있는데, 본인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하자. 만약 너에게 그것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라고 하면 마음을 터놓고 교통할 수 있겠느냐? 너는 상대를 택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을 상대로 택하느냐? (제가 말을 다 한 다음 저를 이해해 주고, 위로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택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혹시 ‘난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 내가 다 말해도 다른 사람에게 일러바치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며 함부로 말하지 않을 사람을 선택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느냐? 그런 사람을 택하는 사람은 없느냐? (그런 것을 고려하게 됩니다.) 고려한다는 것은 속궁리가 있고, 상대를 고를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내가 그 사람에게 다 말하면 그 사람은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고 나에게 유익을 얻게 해 줄 거야.’라는 것은 먼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하소연할 때 다른 사람의 위로같은 것을 원하지 않고 오로지 그 괴로움을 토로하고 쏟아내면 된다. 들어주는 사람은 쓰레기통처럼 그 사람의 쓰레기를 받아 주면 되는데, 그저 받아 주기만 하면 되지,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먼저 이런 요구가 있는데,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이런 것들을 원한다. 만약 상대가 좀 더 좋아서, 위로를 몇 마디 해 주거나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고, 그 사람과 같은 심정을 느껴 준다면 당연히 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없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사람을 다 경계하고 의심하고 간파하지 못하면,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데, 그러면 큰일이다.

너에게 진리를 찾고 구하고 싶은 생각, 자신의 속셈과 정형, 부적절한 정서 등 각 방면에서 다 변화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먼저 속을 털어놓고 교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속을 털어놓고 교통할 때, 얼마든지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 정상 사람이라면 절대로 자신이 털어놓은 다음 자신을 비웃고, 폄하하고, 빈정거리고, 단점을 잡고 거기다 낙정하석(落井下石)할 사람을 찾아 교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나 인품도 좋고 인성도 좋고 진솔하고 정직한 사람, 자기가 교통을 하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 털어놓고 교통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할 것이다. 속을 털어놓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밝히는 것인데, 그런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항상 자신을 감추거나 포장하면서 ‘나에게 이런 속셈이 있고, 이런 어려움이 있어. 난 정형이 좋지 않아 소극적이 됐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에 두고 있을 거야.’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계속 속에 두고 있으면 기도를 하다가도 기도도 하고 싶지 않아지면서 차츰차츰 정형이 갈수록 가라앉게 된다. 갈수록 가라앉게 되면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너에게 어떤 정형이 있든, 소극적이 되었든, 어려움이 있든, 혹은 어떤 속셈이나 타산이 있든, 혹은 무엇을 인식하게 되었거나 성찰하게 되었든, 마음을 열고 교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교통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한다. 성령은 어떻게 역사할까? 너에게 그 문제의 심각성을 분명히 알게 해 주고, 그 문제의 근원과 실질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준다. 네가 털어놓고 교통하는 과정에서 성령은 너에게 그런 것들을 알게 해 줄 것인데, 그러면 너는 진리를 조금씩 깨닫게 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털어놓고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 즉 진솔한 태도를 뜻한다. 거기에서 네 마음이 정말 진실하고 진솔한지, 진리를 대하는 너의 태도가 어떠한지, 너에게 진솔한 마음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진솔한 사람은 어려움이 닥치거나 소극적이 되면 늘 다른 사람을 찾아 교통을 하고, 찾고 구하면서 해결하려고 한다. 뭘 해결하려고 하는 것일까? 출로를 찾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괴로워서 하소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아 진리에 진입하려는 것인데,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그 방면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거기에서 나오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내면에 오래 감춰져 있으면 다 병이 된다! 진솔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일이 있든 없든 겉으로 항상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데, 사실, 정형은 소극적이 되어 과부하가 되었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속에 원망이나 오해가 있어도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하는데, 그 사람은 계속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속에 자기의 속셈이 있어도 포장하고 있고 감추고 있으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에 너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누군가 “그 사람, 어때요?”라고 하면 “좋아요. 본분하고 있어요!”라고 한다. “본분하는 건 어때요?” “보통이죠.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농땡이도 안 부리고 소극적이지도 않아요. 너무 앞선 것도 아니고, 뒤처지는 편도 아니에요.”라고 한다. 이러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일이 닥치면 대부분의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 찾고 구하느냐? (형제자매를 찾아 교통합니다.) 교통을 하고 나면 문제가 해결되느냐? 그저 일만 교통하느냐, 아니면 정형을 교통하면서 어떻게 성찰할 것인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찾고 구하느냐? (어떨 때는 스스로도 어디가 잘못됐는지 몰라 사람을 찾아 교통합니다. 일을 말한 다음 저에게 어떤 방면에 문제가 있는지 지적해 달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지적을 받으면 알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그런 환경을 배치해 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괴롭지 않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인식에만 머물러 있고 글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직 깊이 진입하지 못한 것이다. 괴롭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마치 사람의 속에 병이 있는데, 속에 있는 병이야 어떻든 겉면에 약을 발라서 표피가 아프지 않으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표면적인 것들이나 사람이 늘 패괴 유로라고 느낄 수 있는 것, 문제라고 의식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은 체험하는 가운데서 부지중에 조금씩 갈수록 줄어들게 된다. 그런 것들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네가 의식했을 때, 그것을 상관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만족스러워할 것인지만 생각하면 된다. 그럼 그런 것들이 은연중에 다른 것으로 대체되게 된다. 예를 들면, 너에게 어떤 우월감이 있어 ‘난 돈이 있어. 난 잘 살아! 난 먹을 줄도 알고, 꾸밀 줄도 알고, 누릴 줄도 알아.’라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것들이 적합한 환경에서 나오게 되고, 또 다른 환경에서도 나오게 되는데, 그럴 때 ‘난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런 것들로 방해받지 않을 거야. 내 본분이 무엇이면 그것에만 열중할 거야.’라고 하면 된다. 본분을 할 때에도, 그런 생각이 들거나 그런 생각의 방해를 받아도 네가 자신의 본분을 하고 있고, 그것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하면서 건성으로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을 잡고 그런 것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된다. 반대로 본분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안일함을 좀 누리거나 스스로 우월감에 도취된다 해도 괜찮은데, 그것은 별것 아니다. 좀 오래 도취돼 있다 보면 별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고도 제법 잘 지내고 있는데, 네가 혼자 어디에 가서 항상 잠깐 도취되어 있다가 본분을 한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시간이 길어지면 너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 일을 간파하게 된다. 어떤 지엽적인 일이나 사소한 일들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다른 사람의 눈길이라든가, 자질구레한 생각이라든가 혹은 가끔 혼자 꼼수를 부리거나 약은 수법도 쓰겠지만, 그런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큰 방향을 중요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교회의 사역안배, 너의 본분을 대함에 있어서 어떤 태도가 있어야 하는지를 중시해야 한다. 네가 큰 방향에서 시작하면 그런 지엽적인 일들은 무시해도 점차 사라지게 된다. (저는 저의 치명적인 부분이 육체의 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을 떠난 뒤로 계속 가족이 보고 싶은데, 그럴수록 속이 탑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집에 가 있습니다. 지금은 정형이 점차적으로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걱정하고 있느냐? 본분할 때, 방해를 받느냐? (아니요.) 그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두렵습니다. 큰 붉은 용이 가족들을 잡아 저를 위협할 때, 이겨 내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그것은 괜한 걱정이다. 너는 그런 생각이 들 때 진리로 해결해야 한다. ‘만약 큰 붉은 용이 가족을 이용해 나를 위협한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내게 배치해 주신 공과야.’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배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 공과가 내게 임한다면 난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어떻게 간증을 굳게 서야 할까? 피조물의 본분을 어떻게 다해야 할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공과인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답을 드릴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그 기간에 자라난 분량, 그 기간에 체험한 것, 하나님께서 날 양육해 주시고 목양해 주신 것에서 내가 진입한 게 얼마나 되는지를 검증하실 때, 하나님께서 나를 검증하는 일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피조물의 본분을 한 것일까?’ 이런 문제들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너는 큰 붉은 용에게 위협당할 것까지 생각하면서 진리 방면으로 어떻게 진입해야 할지는 왜 생각해 보지 않느냐? 왜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기도하긴 합니다. 어느 날 정말 그런 상황이 생기면 죽더라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요. 그런데 그건 단지 제 분량이 작아서 이겨 내지 못할까 봐 하나님께 기도로 심지를 세우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 이렇게 기도하면 어떨까? ‘하나님, 저는 분량이 작아서 이겨 내지 못할까 봐 걱정되니,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 주세요. 무서워 죽겠습니다. 저는 분량도 작고 믿음도 작으니까 제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할 때 그렇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어떠냐? (안 좋습니다.) 너는 ‘하나님, 저는 지금 분량이 작고 믿음도 작다 보니 두렵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믿지 않고 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것이니 저의 패역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안배와 배치에 순복하기 원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당신을 위해 간증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게 간증을 서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일을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 너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자신의 심지를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하는데, 그러면 너의 믿음에 기초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기도마저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네 믿음은 얼마나 되겠느냐! 너는 항상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네가 항상 그렇게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꼭 그렇게 해 준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려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고 심지를 표명하면 하나님이 열납할 것이다. 하나님이 열납하면 네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두렵지 않게 되고 그 일에 통제받지 않게 된다. ‘자녀도, 남편도, 가정도, 재산도 다 하나님 손에 있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온 세상이 다 하나님 손에 있고 전 우주가 다 하나님 손에 있는데, 그 몇 사람이라고 하나님 손에 있지 않겠어? 나도 하나님 손에 있는데,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어? 내가 그들을 제어할 수 있겠어? 사람은 결정할 수 없어. 나한테 대단한 능력이 있다 해도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어. 내가 지금 대통령이나 의장이라고 해도 그들의 운명을 장악할 수 없잖아. 다 하나님 손에 있어!’ 너는 이런 심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한다. 네가 이런 심지를 가지고 기도하고 마음을 굳게 먹으면 마음의 정형이 변한다. 뒷걱정도 사라져 근심하지 않게 되고, 무슨 일을 해도 소심해지지 않게 된다. ‘앞장 서자니 그렇고, 뒤로 물러서자니 그것도 그렇고 어쩌면 좋을까? 차라리 중간쯤에 껴 있자. 앞쪽에는 저 사람을 서게 하고 뒤쪽은 이 사람을 서게 하고 나는 그 사이에 숨어 있을래. 그래도 본분한 게 아니겠어?’ 얼마나 구질구질하냐! 하나님의 자민이 하나님 나라에서 본분을 하는 것이고,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본분을 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해야 하느냐? 왜 머뭇거리느냐? 떳떳하지 못하기라도 하느냐? 그런 정형이어서는 안 된다. 바로잡아야 한다. 네가 정형이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걱정을 한다면, 그건 통제된 것이고, 손발이 묶인 것이다. 그럼 본분을 잘할 수 없다. 네가 전심, 전의(全意), 전력으로 본분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겠느냐? 전심으로 못한다. 마음이 본분에 있지 않다. 3분의 1 정도가 와 있을까? 없다. 5분의 1은 있을까? 없다. 마음이 10분의 1이라도 거기에 있으면 괜찮은 것이다. 전력은? 전심이 없는데 전력이 어디서 오겠느냐? 전의는? 고만한 성의를 갖고 전의로 할 수 있겠느냐? 마음 자체가 거기에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래서 너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어떤 것의 통제를 받는데 그것에 손발이 묶이고, 생각과 마음이 통제되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 너는 마음만 있고 행동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또 하나는 피조물이 서야 할 각도와 위치, 자신이 갖춰야 할 심지, 갖춰야 할 태도를 알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 너에게 그런 자세가 없으면 안 된다. 왜 다른 사람은 그런 걱정이 없을까? 가족이 없어서일까? 남에게는 그런 애로가 없을 것 같으냐? 사실 걱정거리는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떠한 방식, 일정한 시간, 어떤 체험을 통해 그것을 내려놓는다. 그런 사람이라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런 사람을 지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고, 그 사람의 본분에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 사람은 헤쳐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은 30대나 40대여서 6~70세 되는 부모 부양 문제가 앞에 놓여 있다. 그럴 때 본분 때문에 집을 떠나다 보니 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고, 부모는 그 사람을 찾지도 못하는 상황일 때, 그 사람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부모님에게 어떤 어려운 점이 없을까? 위험은 없을까?’라고 생각하는데, 위험은 다 있다. 어느 집에 위험이 없겠느냐? 큰 붉은 용이 하나님 믿는 사람을 잡는 것은 돈만 노리고 가는 게 아니다. 어느 집에 돈이 있다고 해서 그 집만 찾아가는 게 아니다. 돈이 없어도 잡지 않더냐? 주로 사람을 노리는 것이다. 너희가 다 그런 것을 걱정한다면 그럼 지금 이 본분은 할 수가 없다. 성경에 그런 말이 있다. 기억하느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33)) 모든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여기에 ‘모든’은 어떤 것들을 가리키냐? 지위, 명예, 가족, 친구, 재산 … 이러한 것들을 다 포함한 모든 것이다. 그럼 ‘모든 것’ 중에서 보통 어떤 것들이 네 마음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 자녀와 부모이다. 집안 살림이 넉넉하고 돈 많은 사람은 돈과 재산이고, 세상에서 높은 지위나 월급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은 지위나 명예나 이익이다. 그런 것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것이 너를 통제할 것이고, 네가 그런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완전히 내려놓는다면 그것이 너를 통제하지 못한다. 바로 네가 그런 것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달렸다.

어떤 사람은 집을 떠나 본분을 하고 있는데, 설날이 다가오니 ‘난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 그러다가 내가 없는 것이 직장 상사에게 발견되면, 난 협회장의 자리를 잃게 될 수 있어! 난 그래도 우리 직장에서 꽤 잘 나가고 있어. 설 기간에 내가 없으면 절대 안 돼! 더군다나 우리 자식들도 꽤 잘 나가고 있는데, 내가 잡히기라도 하면 우리 집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게 될 거야.’라고 한다. 그건 어떤 믿음이냐? 그 사람은 그런 것들을 너무 중히 여기고, 제일 높게 여기다 보니 거기에 통제된 것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본분을 하지 못하게 됐다. 너희는 하나님이 어떤 시기, 어떤 단계에서 역사를 하든 다 일부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 역사에 협력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명정해 놓은 각 사람에게는 다 부탁이 있지 않느냐? 누구에게나 다 사명이 있고 책임이 있고 부탁이 있다.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을 맡겨 주었으면 너에게는 그 책임이 있지 않겠느냐? 너는 당연히 그 중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너의 본분이다. 본분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에게 준 사명이다. 사명이란 무엇이냐? (자신이 평생 다른 것이 아닌 그것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생에서 오로지 높은 자리에 오르고 큰돈을 벌고, 잘 살고, 단란한 가족 생활을 누리기를 추구하여 명리와 지위를 누리게 되고 사회적으로 지위도 갖게 되고 가문의 영광도 얻게 되며, 한 가족이 모여 평안할지라도, 하나님이 너에게 준 사명을 도외시한다면 너의 일생이 가치 있겠느냐? 죽은 뒤에 하나님에게 내놓을 것이 있겠느냐? 내놓을 게 없다면 그것은 정말 가장 큰 죄악이다. 특히 너희들 중에 지금 하고 있는 본분을 우연히 하게 된 사람이 누가 있느냐? 몇천 명을 두고 제비뽑기하듯이 얻어 걸리고, 뽑히는 대로 아무나 써 주는 식으로 뽑힌 사람이 누가 있느냐? 내가 어떤 뜻으로 이 말을 할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명정해 놓은 것이다. ‘명정해 놓았다’란 무엇이냐? 세부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전반 경영 계획 중에서 오래전부터 계획을 해 놓았다는 것이다. 네가 몇 대를 거쳐야 하는지, 세상에 몇 번 오게 되는지, 말세에는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어떤 가문에서 태어나야 하는지, 또 남자일지 여자일지 어떤 특기를 갖추게 되며 어떤 연령대가 되면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하게 될지, 하나님은 너를 위해 일찍이 안배해 놓았다. 너의 가정 여건, 너의 학벌, 너의 말재주, 너의 소질, 너의 생김새, 일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그 본분을 시작할 때는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할지에 대해 한 단계 한 단계씩 일찍이 다 정해 놓았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정해 놓았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네가 앞서 몇 세대에 왔을 때, 하나님은 이미 네가 마지막 이 단계에서 해야 할 본분을 안배해 놓았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다 명정해 놓은 것이다. 이런 것은 시시하게 볼 일이 아니다! 너의 헤어스타일, 너의 신장, 눈 크기, 건강 상태를 정해 놓았고, 어느 나이에 어떤 경험을 갖추고, 그다음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일을 맡겼을 때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런 재간을 갖추게 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은 미리 다 정해 놓았다. ‘미리 정해 놓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이 너를 쓰려고 하고, 너에게 그 부탁과 그 사명을 주기 전에 벌써 너를 예비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도망가면 되겠느냐? 전심전의로 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기대를 버리는 것이고 가장 큰 패역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본분을 배반하는 것은 가장 큰 패역이자 극악무도한 짓인 것이다. 하나님은 고심을 들여 만세 전부터 예비하여 너를 오늘날까지 오게 하고 너에게 그 사명을 주었다. 그럼 그 사명이 바로 네 책임이 아니겠느냐? 네가 평생 살아가야 할 가치가 아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에게 준 사명을 네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네가 살고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님은 너에게 그런 조건, 그런 소질, 그런 능력, 그런 재간을 주어 네가 지금의 나이에 이르러 지금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조건들을 모두 예비해 주었는데, 네가 이행하지 않고 도망가고, 늘 잘 살아 보겠다고 세상에 나가려고 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준 것으로 사탄을 거들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겠느냐? 하나님이 좋아하겠느냐? 사람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가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였느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도망간 자들을 어떻게 규정하였느냐? 멸망하게 된다고 했다. 설령 다음 생이 있고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고 해도 그런 사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런 사람에게 어떠한 것도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사명이 없으면 기회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험하다! 하나님은 ‘창조된 피조물 중에서 지금까지 ○○는 한 번 도망갔다. 나의 심판대 앞에서, 내 앞에서 도망가 버리고, 사명을 다하지 않고 부탁을 완성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여기까지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생명은 여기서 끝이다.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물음표를 달 필요 없고, 더 알아볼 필요도 없다. 마침표이다!’라고 한다. 그럼 참 비참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고, 본분을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해, 너희들 본분이 크고 작은 것에 상관 없이, 뛰어다니는 것이든, 컴퓨터를 다루는 것이든,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본분이든, 외무를 보든, 내무를 보든, 누구든지 본분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게 어디 너의 선택이겠느냐? 하나님이 이끌어 준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을 주었기에 너에게 감동이 생기고, 그런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게 되어 그 본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 주지 않았다면 너에게 그런 기회가 있겠느냐? 거리에 잘 생기고 재간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 하였더냐? 눈에 차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택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지금의 이 무리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이 무리 사람들에게 그의 경영 사역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겨 주어 서로 다른 본분을 하게 하고, 서로 다른 책임을 맡도록 해 주었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끝나고 성취된 다음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고, 얼마나 영예로운 일이겠느냐!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본분을 하면서 고난을 받고 버리기도 하고, 헌신도 하고 대가도 치르고 있으며, 세상의 지위와 명리 등, 이런 것들을 다 잃었는데, 마치 하나님이 다 빼앗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은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얻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었느냐? 사람이 본분을 잘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고 평생 동안 자신의 사명과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위해 살아야만 그 일생이 정말 가치 있는 삶인 것이고, 그렇게 해야 진정한 사람인 것이다! 왜 그런 사람을 진정한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큰 의의이고 가치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탁을 맡기고 책임을 맡길 때, 요구가 높지 않다. 네가 “저는 믿음도 작아서 이 정도의 힘 밖에 못 쓰겠어요. 이 정도만 바칠 수 있고, 이 정도의 일밖에 감당 못하겠어요.”라고 하면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 요구는 100점이다. 그러므로 네가 95점 정도로 한다고 해도 난 만족하지 않는다. 용서하지 못한다. 난 무조건 계속 감동을 주고 재촉해서라도 내가 요구하는 100점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의 분량과 너의 정력,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조금씩 네가 천천히 노력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하나님은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역사하지, 사람에게 전혀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모든 일이 다 너를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고심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관용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행해야 하고 어떻게 협력해야 할까? 사람이 협력해야 할 것은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하나님께서 100점을 요구하셨을 때, 내가 60점을 맞을 수 있는데도 30점만 맞는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난 온 힘을 다할 거야. 잔머리를 굴리거나 농땡이를 부리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이지, 사람의 상황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은 가정에, 자녀에, 직업까지 내려놓았으니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획일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의 분량, 네가 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에 대해 너는 무슨 걱정이나 압력을 느낄 필요는 없다. 너는 오로지 네가 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조금씩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된다. 어떤 애로가 있든 어떤 통제를 받든 움츠러들지 말고 영향을 받지 말라. 그러면 된다. 네가 그 일에 영향 받아 ‘하나님은 나를 못마땅해하시겠지. 조심해야겠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앞장서지 말자.’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해이다. 사람은 한 걸음씩 나아가고 체험하다 보면 갈수록 자신의 믿음이 너무 작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늘 말하는 “소인배의 속셈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라고 하는 격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의지할 엄두를 못 내고 하나님의 주재를 믿어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엄두도 못 내는데, 실로 믿음이 작다. (저는 집을 떠나 본분을 한 지 2년이 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에 매여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믿음이 아주 작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지금 너에게는 유익한 것이 있는데, 무엇일까? 너는 그것이 나약한 부분이란 것을 알고 있고, 그 부분에서 진입이 적고, 내려놓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정감이고 자신이 통제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걸 연약한 것이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데, 최소한 너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진보할 가능성이 있다.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분명 정감인데도 인정하지 않는데, 그러면 변화될 가능성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우려면 체험해야 한다. 체험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갈수록 하나님이 믿을 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너는 체험해야 하는데, 많은 일을 체험하고 다시 되돌아보면 ‘그땐 정말 위험했어. 하나님께서 저들의 눈을 가려 주셔서 우리가 잡히지 않은 거였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거야.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는 말이 정말이구나! 진짜였어!’라고 하게 된다. 그렇게 은연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진실해지고 하나님은 신실하고 믿을 만하다고 느껴진다. 마음에 이런 믿음부터 있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재하신다.’, ‘만물은 다 하나님 손에 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정작 일이 닥쳤을 때는 ‘하나님이 주재하실 수 있을까? 믿을 만할까? 차라리 사람의 힘으로 해 볼까? 안 되면 나 혼자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소롭게 느껴지고 자신이 너무 유치하고 분량이 너무나 작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나서 다시 돌아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의지해 보니 그래도 믿을 만하다. 비록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믿을 만하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운명이 있고 하나님의 명정이 있다. 아무도 타인의 운명을 장악할 수 없으니 너는 구속을 받지 말고 그런 마음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까?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가족들이 세상을 추구하고 물질적 누림과 돈을 추구하는데,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네가 본분을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면 고통스럽거나 연단받지는 않겠느냐? 같이 지내면 잘 어울릴 수 있고 같은 것을 지향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정감뿐입니다.) 정감을 제외하고 또 있느냐? 다른 것이 없다. 그럼 그 혈육간의 정은 보잘것없느냐, 아니면 두터우냐? 너는 그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는데, 그들은 너를 어떻게 대하느냐? 네 가족은 네가 없어도 잘 지내고 있는데, 너는 무엇이 걱정이냐? 그건 혼자 그리워하고 오버하는 것이다! 그들은 너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세계관, 인생관, 인생의 길 그리고 추구하는 것까지 다 다르다. 너는 자식과 떨어져 있지만 혈육 관계가 있다 보니 자꾸 가족으로 느껴지고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같이 지내다 보면, 1년이면 속에서 짜증이 날 것이다. 아마 1년까지도 필요 없고 한 달이면 질릴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관점, 사람을 대하는 방식, 처세 철학,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것, 일 처리 방식과 방법, 인생관, 가치관은 정말이지 들어줄 수 없을 정도고 너를 진저리 나게 할 것이다. 그때면 너는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 ‘나도 참 못났어. 저런데도 계속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나 하고 있었으니. 같이 지내는 게 정말 내가 고생을 사서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가 되면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너는 아직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혈육 관계가 모든 것보다 소중하고,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가장 진실하게만 느껴지는 것이고 정감의 통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그런 일들을 내려놓아라. 만약 내려놓지 못하겠다면 본분을 우선으로 하고 자신의 사명과 자신이 맡은 부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거라. 자신이 맡은 부탁과 사명, 본분을 잘 완성하기만 하면 되니, 그런 것들은 마음에 있어도 그냥 상관하지 말고 속에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부탁과 본분을 잘 완성하면 사람은 갈수록 진리를 밝히 깨닫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갈수록 정상이 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도 갈수록 커지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점점 커지게 되고, 점점 뚜렷해질 것인데, 그러면 내면의 정형이 바뀌게 된다. 그렇게 바뀌게 되는 순간, 세상 사람에 대한 관점들이나 그들과 같이 생활하던 감정들이 희미해지면서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게 된다. 무엇을 추구하게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을 살아내고, 어떻게 하면 진리가 있게 살 수 있을지를 추구하게 된다. 네가 마음을 그쪽으로 돌려 힘을 쓴다면 다른 방면은 갈수록 희미해지면서 그것이 더 이상 너를 결박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너의 그런 짐들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줄다리기 하는 것 같은데, 이쪽에서 힘을 주면 저쪽의 힘이 작아지고, 이쪽에서 힘을 들이지 않으면 저쪽에서 힘껏 당겨 너를 끌어간다. 바로 이런 것이다. (본분을 하고 있을 때는 정감의 통제를 받지 않고 틈이 좀 생기면 가족 생각이 납니다.) 틈이 날 때면, 아직 어떤 진리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지, 어떤 진리에 진입해야 되는지, 내가 그런 정형이 있는 근원은 무엇인지, 왜 틈이 나면 그들이 그리운지, 왜 그런 건지, 어떤 것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대체하면 얼마나 좋으냐! 이렇게 실행하면 진리에 빨리 진입할 수 있지 않겠느냐? (본분을 한다는 게 일만 하는 식이라 아직 잘 묵상할 줄 모릅니다.) 이제야 문제의 근원을 찾았구나, 아직 진리를 잘 묵상할 줄 모르는 구나.

진리를 묵상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한다. 진리를 묵상할수록 기초가 다져지고 묵상할수록 내면에서 진리가 형체를 갖추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속에 어떤 생각이 들면 말하고 싶어지고 다른 사람을 찾아 교통하고 싶어진다. 교통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진리를 더 깨닫고 더 실제적으로 알려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에 틈이 생길 수가 없게 되니 그들을 생각하지 않게 되고, 정형이 점점 정상이 된다. 진리를 묵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진리를 어떻게 묵상해야 할까? 일을 생각해 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아라. 예를 들어, ‘오늘 어떤 일을 했는데, 뭔가 이상해.’라고 하면서 잘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더 생각해 본다. ‘오늘 그 일은 어떤 진리와 관계되지? 어떤 방면의 원칙과 관련되지? 교통도 해 보고, 다시 생각도 해 보고 반성도 해 봐야겠어.’라고 하면서 한참 반성한다. 그러면서 원인을 찾게 되는데, 문제점을 찾은 것이다. 문제점을 찾았으면 그다음은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한 가지 방식이다. 어떤 경우는 늘 하는 말인 데도 뜻을 모를 때가 있다. 자주 말하다 보니 입버릇으로 되었지만 어떻게 실행해야 되는지를 모른다. 그러다가 오늘 문득 발견하고 “같이 교통해 볼까요? 세부적인 것을 교통해 봐요. 말은 이렇게 하는데 세부적인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이 말을 어떻게 실제로 만들고 실행의 길로 만들 수 있는지 교통해 봐요.”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실행 길이다. 가끔씩은 누군가의 정형을 보게 된다. ‘저 사람에게 왜 저런 정형이 있지? 어쩌다 저런 정형이 생겼을까? 나한테는 왜 없지? 저 사람이 한 저런 말은 어떤 정형과 마음 상태인데, 저런 마음 상태는 어떻게 생겼을까?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교통해 봐야겠어. 저건 어떤 방면의 진리와 관련될까? 나도 진리를 찾고 구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하면서 교통도 하고 찾고 구하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도 해 본다. ‘아니야, 나한테도 저런 정형이 있어.’ 문제점을 찾게 된다. ‘나에게도 있구나.’라는 것은 자신에게 맞춰진 것이 아니냐? 공을 들인 보람이 있지 않으냐? 문제점을 발견하고 함께 모여 또 교통하다 보면 결국 답을 얻게 된다. ‘이런 거였구나. 이것은 패역이구나, 이것은 궤사구나, 이것도 배반하는 마음이구나.’라고 하면서 문제점을 찾았다. 문제점을 찾으면 해결하기도 쉬운데, 발견조차 못하고 무디면 언제까지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묵상한 결과가 아니냐? 사실 마음이 차분할 때면 진리를 묵상하고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그때는 절대 감정을 나눌 때가 아니다! 너희들은 좀 쉬거나 틈만 생기면 감정을 나누고, 텔레파시를 중요시하는데, 그러면 큰일이다. 그래서 항상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너의 마음에 늘 그런 것들이 있고, 계속 걱정하고 있고, 끊어 버린 듯하면서 끊지 못하고 있으면, 절대 내려놓지 못한다. 너는 칼을 빼서 자르고 끊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 내려놓게 된다. 어떻게 자르고 끊어야 될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틈만 나면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 교통해야 하는데, 본분에 관한 교통이 아니면 말씀을 교통해야 한다. 그러면 그런 것들이 자연스레 사라진다. 이런 것들은 다 길이고 다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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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⑤명정(命定): 명하여 정함.

⑥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⑦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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