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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98편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본분을 해야 사람의 모양이 있다

본분을 함에 있어서 머리를 쓰지 않고 마음을 쓰지 않고 세심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되겠느냐? 무엇을 만들어도 책임감 없이 대강 해치우면 되겠느냐? 무엇을 하든 마음이 섬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너는 영원히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이렇게 본분하는 태도가 좋으냐, 나쁘냐? 이렇게 본분을 하면 아무리 해도 업무 능력이 제고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업무 능력이 제고되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좋은 점은 아마 너희가 이미 몸소 체험했을 수도 있다. 어떤 좋은 점일까?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을 필요가 없고, 또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고, 머리를 쓸 필요도 없고, 마음을 쓸 필요도 없이 수월하며, 뇌세포가 하나도 상하지 않고 힘들 일도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심적으로도 힘들지 않고, 머리도 힘들지 않고, 육체도 아무런 고생을 하지 않은 데다가 일까지 다 했으니 ‘난 농땡이 부리지 않았어. 일도 다 해 놨어. 누가 문제점을 찾을 수 있겠어? 순서대로 조리 있게 했고, 손도 놀지 않았고, 눈도 쉬지 않았으며, 입이 아플 정도로 말도 많이 했고, 다리도 가늘어질 정도로 뛰어다녔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이 어떠하냐? 너희들은 항상 협력이라는 말을 달고 있다. 누군가 “뭐 하고 있어요?”라고 물으면, “복음 전도에 협력하고 있어요!”, “복음 간증에 협력하고 있어요!”, “작곡에 협력하고 있어요!”라고 한다. 너희는 제법 ‘호흡이 잘 맞게’ 협력하고 있구나. 누구도 공을 들일 필요 없고, 누구도 마음 쓸 필요가 없다. 어떤 일 하나 때문에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 보거나 저녁에 잠들기 전에도 그렇고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어떤 걸로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생각해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누구도 그 일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으며, 함께 의논하지도 않고, 각자 자기 일만 한다. “다 했어요?” “네, 다 했어요.” “그럼 다음은 제 차례니, 주세요.”라고 하는데, 이러면 수월하지 않으냐? 이러면 정말 수월한 것 같구나.

너희 중에 작품을 하나 만들 때, 특히 대작을 하나 만들 때면, 며칠씩 밥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어떤 고생을 한 적이 있느냐? 자신의 어떠한 어려움을 극복한 적이 있느냐? 대가를 치른 적이 있느냐? “전 이 본분을 맡고 나서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했어요. 머릿속으로 계속 그 일만 생각했는데, 주체가 안 되고 생각하느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왜 잠을 설쳤을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계속 생각하기 때문이다. 잘하지 못하면 큰일인데, 잘 못하면 본분을 제대로 못한 것이 되고, 충심이 없는 것이며,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양심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밥을 먹을 때도 그 사람은 한쪽에서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지난번 그 부분에서 또 문제가 생겼어. 그건 내가 제대로 짚고 넘어갔어야 될 부분이었는데, 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이건 책망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내 책임이야.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맛있게 먹지? 난 왜 넘어가질 않지?’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정말 맛있는데, 왜 배가 안 고프죠?”라고 하니 “밥이 안 넘어가요.”라고 한다. 이틀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몸무게가 1kg 정도 줄었다. 그러면 공을 들인 것이 아니냐? 너희는 이렇게 공을 들여 본 적이 있느냐? 이것은 너희에게 다이어트를 하고, 검소하게 살라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저희에게 본분에 마음을 쓰고 책임감을 가지라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 본분하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책임감과 양심이 있는 사람은 책임감이 없이 건성으로 일하면 마음(원문: 양심)이 불안하게 된다. 그래야 충성을 다할 수 있다! 네가 책임감이 전혀 없어 일을 그르쳤거나 건성으로 했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아무런 느낌도 없다면, 무슨 충성을 논할 것이 있겠느냐? 아예 운운할 것도 없다. 지금 어떤 일을 서둘러 완성해야 한다고 하자. 그럼 너는 빨리 생각을 해야 하고, 노력을 기울이면서 생각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노력을 해야 할까? “난 공을 들였어요. 계속 이걸 보고 있었는데요! 앉아서 계속 보고 있었어요.” 누군가 “형제(자매)님이 그걸 보는 방식은 어떤 거예요? 그것을 잘하고 싶다면, 공을 들였나요? 사람들을 찾아 교통은 했었나요?” “아니요.” “그럼 아직도 공을 들이지 않았네요. 자료는 얼마나 찾아봤어요?” “자료는 아직 찾지도 않았어요. 난 그냥 보기만 했어요.” “그럼 얻은 것이 있나요?” “아직은 없어요. 아마 이틀 정도 보면 뭔가 나오겠죠.”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다 별로다. 이것은 입만 살아 있고 실천이 없는 아주 뚜렷한 표현이다. 입만 살아 있다는 건 어떤 것이냐? 바로 겉으로는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거나 들려주어 자기는 정말 고생을 하고 정말 마음을 쓰고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착각을 주거나 의식적으로 사람들이 잘못 여기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 사람이 실천으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정말 마음을 쏟고, 정말 마음을 기울이고, 정말 마음에 그 일을 담고 있다면 실천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바쁘게 보내는 것이다. 바쁘다 못해 발바닥에 불이 나서 땅에 붙어 있지 않을 정도로, 거의 날아다닐 정도라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봐야지, 책에 이런 부분이 없을까? 하나님 집의 원칙은 어떨까? 좀 더 많이 듣고 많이 봐야겠어. 혹은 누가 이 방면에서 잘 알고 뛰어난 사람인지 알아보고, 그 사람을 찾아가 물어봐야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사람 어디 있어요?”라고 물으면, “여기저기 사람 찾아다니면서 물어보느라고 바빠요.” “밥 먹을 시간인데, 그 사람은 왜 그림자도 보이지 않나요?” “아직도 바빠요. 밥 먹을 시간인데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시간이 없어서 좀 있다가 먹을 거예요.”라고 한다. 그렇게 2~3일 뒤에는, 자료도 많이 찾았고, 사람들과 교통도 많이 했으니 성과가 있다. 어떤 성과가 있을까? 대략적인 방향을 찾았다. 원칙도 웬만큼 장악했으니 착수할 일만 남았다. 그리고 3~5일이나 일주일 뒤면 초안이 나온다. 이러면 성과가 아니냐?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얼렁뚱땅하는 태도로 그 일을 한다고 해도, 2~3일이나 3~5일 뒤에는 성과가 나온다. 그런데 그 성과의 질은 어떨까? 봐줄 만하고,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걸작은 아니다. 정말 꼼꼼하게 심혈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한 것이고, 얼렁뚱땅 완성하여 내놓은 것이다.

어떤 국수가 좋은 국수이고 정성 들여 만들어진 국수겠느냐? 사람들이 다 즐겨 먹는 유명한 먹거리로 될 만한 맛있는 국수는 1시간 안에 만들어 내기 어렵다. 많은 식자재를 준비해야 하고 만드는 시간도 꽤 오래 걸리고, 품도 많이 든다. 거기에 들이는 품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손도 쓰고, 다리도 쓰고, 힘도 써야 하지 않겠느냐? 반죽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밀가루를 용기에 담고, 반죽을 해서 덩어리를 만들고, 중간에 또 여러 번 이겨 줘야 한다. 마지막에 소스를 만들어 놓고, 국수를 다 삶은 다음 그 위에 소스를 부어 줘야 하는데, 그 전반적인 과정이 1시간 안에 끝나기 어렵다. 좋은 국수 한 그릇을 먹으려면 쉬우냐? 좋은 국수를 먹으려고 하면 공을 들여야 하고, 손발이 부지런해야 하는데, 마음을 써야 하고 머리를 써야 한다. 건성으로 일을 하고 마음씨도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감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착하겠느냐?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착하지 않다! 누구에게든 다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가 있는데,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려고도 하지 않으며, 어떤 좋은 일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태도로 본분을 하면 합격되게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합격된 본분을 하는 것에 시간상의 기준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난 합격되게 본분하려면 아침 8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5시에 일을 끝내면 돼! 점심에는 2시간 쉬면 되고.”라고 한다. 그러면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느냐?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몇 시간이냐? (9시간입니다.) 거기에서 점심 휴식 시간 2시간을 빼고 또 화장실 가고 잡담하고 조는 시간, 그리고 정신을 다른 곳에 파는 시간을 빼고 나면 몇 시간 남겠느냐? (4~5시간입니다.) 그렇다면 그 4~5시간 안에서 진실로 본분을 위해 마음을 쓰고 정력을 쏟아부은 시간은 얼마나 되느냐? 너희들은 계산해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분을 하는 태도에서 너희는 자신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없느냐? 어떤 사람은 기준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기준일까? 첫째, 힘들지 말아야 하고, 둘째, 굶지 말아야 하고, 셋째는 앞장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장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뭘 말할까?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았을 때, 먼저 도착하면 안 돼. 난 첫 번째로 도착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직 가지 않았을 때에도 나는 갈 생각을 해야 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고생은 나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고생이어야 나도 할 거야. 여러 사람들이 다 하면 나도 할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안 하면 나도 안 해.’라는 것이다. 이런 기준은 어떠하냐? ‘오늘 기분이 별로라면, 난 본분도 좀 천천히 하고, 작업 시간도 좀 줄일 거야. 나에게 협력하라고 해도 난 그렇게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할 수 없어! 마음이 정리되고 나면 그때 다시 좀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할 거야.’라는 이런 기준은 어떠하냐? 그리고 ‘내가 본분할 때, 주변에서 다 잘 대해 주고, 다 내 마음에 들고 누구도 내 속을 긁지 않고, 날 건드리지도 않고 피해도 주지 않는다면 그건 괜찮아! 그럼 난 힘도 좀 쓸 건데, 한 80% 쓸 거야! 근데, 내 속을 긁거나 날 건드리거나 항상 날 아니꼽게 보거나 한 소리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난 거기에 가고 싶지도 않고 본분도 하고 싶지 않아. 난 피해 다닐 거야. 그 사람이 없으면 가겠지만 그 사람이 있으면 난 가지 않을 거야.’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또 하나 있다. ‘내가 본분을 할 때는 아무도 나한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면 안 돼! 내가 주동적이어야 해! 난 체면이 중요해. 만약 누군가 억지로 다그친다면 그건 안 돼! 억지로 힘든 일을 맡기거나 임무를 줘서도 안 돼.’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내가 본분할 때 다른 사람이 항상 하나님 집의 진리 원칙으로 내게 요구하는 건 안 돼. 난 분량이 작아서 그렇게 못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하겠지만 내가 못하는 건 날 난처하게 만들지 마. 날 난처하게 하면 난 그 일에서 손을 떼고 떠날 거야. 언제 난처하게 하지 않으면 그때 다시 올 거야.’ 이 원칙은 어떠하냐? 다 좋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보아하니, 이런 것들이 좋지 않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본분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너희들은 본분을 할 때 이런 표현이 있느냐, 없느냐? 산만하고, 내키는 대로 하고, 교만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독선적이고, 건성적이다. 무슨 일을 해도 진지한 태도가 없고, 특기가 좀 있으면 폼을 잡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상을 쓰고 입을 삐쭉거리고 하기 싫어하면서 늘 나가려고 하고 늘 본분을 포기할 생각을 하는데, 너희에게는 이런 행태들이 없느냐? (있습니다.) 이런 행태가 나올 때, 너희는 함께 교통한 적이 있느냐?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는 하고 있느냐? 이런 문제가 존재한다면, 사람이 본분을 잘할 수 있겠느냐? 합격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본분을 할 수 있겠느냐 ? 그렇게 못하는 것은 매우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적이 있느냐? 길은 있느냐? 문제를 발견했으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람에게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히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오래되면 악화되기까지 한다. 어떤 것을 악화된다고 할까? 너에게 있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이 너의 정형에 영향을 주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그 문제는 네가 본분을 잘할 수 없도록 가로막게 되고,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되고, 너를 하나님 앞으로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된다. 이러면 모두 문제가 아니냐? 그 문제는 심각한 것이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더 길어지면, 사람 마음에 불평이나 오해, 불만 즉 하나님에 대한 오해, 하나님 집에 대한 오해, 사람에 대한 편견,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앙금, 이런 것들을 속에 모아 두게 되는데, 갈수록 많이 쌓이게 된다. 속에 그런 것들이 오랫동안 쌓여 있으면 좋겠느냐? 그것이 너를 진리 실제로 진입하는 길로 이끌어 줄까, 아니면 너를 악인의 길로 끌고 갈까? 그러면 사람이 가면 갈수록 좋아지겠느냐, 아니면 갈수록 나빠지겠느냐? (가면 갈수록 나빠집니다.) 어느 정도로 나빠질까? 그런 것들이 사람 속에 오랫동안 쌓이면, 사람의 믿음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게 된다. 사람에게 소위 말하는 믿음이 없어지면 열의도 없어진다. 사람의 열의가 식어 버리면 본분을 하려는 마음과 본분하는 열정도 갈수록 사그라들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마음이 굳세지지 못하고, 불평, 소극적인 것, 관념, 오해와 같은 이런 것으로 채워지게 되고, 거기에 통제받게 된다. 사람이 이런 것들 속에서 살고, 이런 것들에 휩싸이고 통제받으면, 그 사람이 본분을 하는 것은 힘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데, 억지로 버티고, 대충 때우는 것이며, 무슨 일을 해도 억제하면서 하기에 하나님의 인도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없다. 그럼 그 뒤에 어떤 것이 따라오겠느냐? 아무리 본분을 해도 원칙을 찾지 못하고, 본분을 하면 할수록 어리벙벙해지고, 하면 할수록 길이 없어진다. 그러면 본분하는 것이 힘 빠진다.

어떤 사람은 “저는 처음 본분을 할 때는 정말 감동도 있고, 깨우침도 있는 걸 느꼈고,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시는 것도 느껴져 기쁨이 있었어요. 뭘 해도 정말 쉬웠고, 어떤 일이든 간파할 수 있었어요. 근데, 일정 기간이 지나니 달라졌어요. 내면의 정형도 달라졌고 하나님도 더듬지 못하겠어요.”라고 한다. 그것은 왜 그럴까? 속에 병이 생긴 것이다. 무슨 병일까? 사람 내면에는 아주 많은 패괴 성정이 있는데, 사람이 그런 정형 속에 살면서 해결하지 않고 그런 병을 달고 본분한다면, 합격된 본분과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본분을 하기에는 매우 힘들다. 사람의 호의와 열심으로, 사람의 자제력과 의지력과 심지(心志)만 가지고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천연적인 무골호인 중에 하나님에게 진정한 좋은 사람, 진리가 있는 사람으로 보인 자가 하나라도 있느냐? 그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진정한 좋은 사람, 진리가 있는 사람으로 보일까?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 진리를 깨달은 기초에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관념과 상상, 사람들에 대한 편견, 그리고 자기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오해와 하나님에 대한 오해, 이러한 진리에 부합되지 않은 것들을 수시로 발견하고 수시로 다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안 좋은 정형이나 소극적인 정형 속에 살고 있을 때 제때에 바로잡고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언제든지 자신의 결함을 발견했으면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와 해결하면서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연약함이 있고, 패괴가 있으며, 그와 동시에 패역도 있고, 교만이나 독선적인 것 등등 여러 가지 패괴 성정의 유로도 있지만, 자신의 패괴 성정이 유로된 것을 알게 된 다음, 발견한 뒤에, 성찰한 뒤에, 제때에 해결할 수 있고 제때에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면 어떤 사람이냐? 이러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진다. 어떤 사람은 늘 자신의 낡은 관념을 안고, 자신의 편견, 오해, 소극적인 정서나 사람에 대한 견해를 완고하게 고집하는데, 틀린 줄 분명히 알면서도 ‘난 꼭 이렇게 할 거야! 난 절대로 내 자신을 내려놓지 않을 거야. 당신이 내려놓아도 난 내려놓지 않을 거야. 나는 당신을 기어코 그렇게 볼 거야. 하나님 집에서 그렇게 처리하는 것은 불공평해.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거고,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아무리 공평하다고 말해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난 당신 말을 진리로 여기지도 않을 거야.’라고 하면서 자신의 것을 고집한다. ‘나보고 본분을 건성으로 한다고 하는데, 나는 기어코 이렇게 할 거야. 어쩔 건데? 나에게 본분하는 태도가 단정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난 기어코 이렇게 할 거야! 나보고 본분을 건성으로 한다고 하는데, 그럼 건성으로 하지 않는 것은 어떤 건데? 나 정도면 괜찮은 거지, 어떤 사람은 나보다도 못한데! 난 본분을 기어코 이렇게 할 거야.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신지 공평하신지 볼 거야. 내가 본분을 이 정도로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도 불공평하신 거고, 하나님의 공의도 거짓말이야.’라고 하는 이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냐?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보면 어떨까? 하나님은 “이 귀염둥이를 봐라, 반항할 줄도 알고, 오해가 있으면 말할 줄도 아는구나.”라고 하실까? 하나님은 이렇게 보실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보겠느냐? 이러면 강퍅하고 패역한 사람이 아니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보여질까? 네게 비록 패괴가 있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너의 패괴 때문에, 네가 패괴된 사람이란 것 때문에 너를 버리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그런 것 때문에 너를 정죄하는 게 아니라 네가 진리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고의로 대적하고 고의로 거역하기 때문에, 너의 그러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상심하고, 혐오하며 반감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겠느냐? 이런 사람이 사람 눈에는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겠느냐?

하나님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다면, 너희는 두 단계로 진행하면 된다. ‘한걸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하나님에게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건 단번에 도달하기 어려워! 먼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비교적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고 공평 공의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비교적 정직한 사람으로 보여지게 하고,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자신의 패역한 정형을 발견하면 바로 돌려세우고, 자신의 패괴 성정을 발견하면 바로 다른 사람과 교통하고, 그다음 길을 찾아 실행하고 바로잡는 사람으로 보여지게 할 거야.’ ‘두 단계로 진행하려면 먼저 형제자매들이나 주변에 비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게 하고, 그다음 한 걸음씩 추구해 하나님에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해.’ 이 두 단계로 진행하면 어떠하냐? 좀 쉽지 않으냐? ‘단번에 하나님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정도는 감히 기대하지 못하겠어. 그 요구는 너무 높고, 나 또한 그럴 만한 심지도 없고, 그럴 분량도 안 되고, 믿음도 아주 작지만 그래도 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먼저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너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럼 좋은 사람을 가늠하는 기준은 어떤 것이냐? 먼저 본분을 하는 것에서 봐야 한다. 본분을 함에 있어 몇 가지 요구 기준에 도달해야 하느냐? 참답고, 책임감이 있고, 고난도 기꺼이 받고, 대가도 기꺼이 치르고, 일처리에서는 진지하고 건성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기준을 조금 더 높이면 하는 일마다 정확하게 원칙을 찾고, 그다음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하는 말이든, 설령 내가 하찮게 보는 어느 형제자매가 그 원칙을 말했다고 해도, 그 사람이 한 말이 옳고 진리에 부합된다면 다 들을 수 있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내 생각과 관점을 배반하기 위해 노력할 거야.’라는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좋습니다.) “좋다”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보다시피 “좋다”고 말하는 것은 입만 놀리면 된다. “어떠하냐?” “좋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디서부터 착수해야 하느냐?” “본분하는 것에서요.”, 이렇게 “본분하다”에 “좋다”라는 말을 더해 봤자 두 마디이니, 말하기는 너무 쉽다. 입만 열면 나온다. 하지만 실행으로 옮겨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하면 할 수 있겠느냐? 그 두 마디만 하면 할 수 있느냐? 없다. 뭔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뭔가를 버려야 하는 것들도 있다. 지불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시간을 지불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시간을 좀 더 들여야 한다. 아마 다른 사람은 이미 잠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너는 한쪽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 8분, 10분 정도 더 생각하다가 정말 졸음이 쏟아지면 그때 잔다. 하루에 다른 사람보다 10분, 심지어 20분을 더 들이면서 시간적으로 더 많이 지불해야 한다. 마음과 정력에서도 조금 더 지불해야 하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이 일이 없어 한쪽에서 쉬고 있거나 멍 때리고 있거나 졸고 있을 때, 네가 책임감을 가지고 본분을 잘하고 싶다면 너는 마음이 쉬면 안 된다. 계속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심지어 통곡하고 눈물 흘려 가면서 하나님께 깨우쳐 주고 인도해 달라고 간구해야 할 때도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쇼핑 가고, 기분 전환하러 가고, 산책 가고, 수다 떨고 있을 때 너는 한쪽에서 뭘 하느냐? 너는 손을 머리에 대고,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골똘히 생각한다. 생각하다 보면 머리카락도 몇 올 빠지는데, 그 몇 올의 머리카락이 바로 네가 치른 대가를 상징하고 대표한다. 다른 사람은 그 일이 임했을 때 밥을 두 그릇씩 먹어도 성이 차지 않아 하지만 너는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일에 눌려 먹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가가 아니냐? 이것이 바로 대가다.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지불했느냐? 10분, 20분이라는 수면 시간, 그리고 정력과 심혈은 얼마나 더 지불했느냐? 한두 시간 정도의 심혈 대가와 정력이다. 또 있느냐? 밥도 한 그릇 적게 먹었다. 이렇게 지불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것이 실제적인 대가가 아니냐? 너희들은 이렇게 대가를 치른 적이 있느냐? 대부분 자매들은 꾸미기 좋아한다. 날마다 눈썹을 그리고, 연지를 찍고 분을 바르고, 립스틱을 바르고 심지어 여러 가지 액세서리를 하고 또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꾸미는데, 하루 동안 거기에 들이는 시간은 아침에 1시간 30분, 저녁에 화장을 지우는 데 1~2시간 정도 된다. 씻고 단장하고 화장하는 일이 하루에 기본적으로 3~4시간씩 들어간다. 그 일에서 지금까지 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장은 언제나 그렇게 이쁘게 하고, 옷은 언제나 그렇게 특별하고 근사하게 입는다. 하지만 본분에서는 참답게 대한 적이 없고 어떤 공을 들인 적도 없다. “어떠한 공도 들인 적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나타날까? 바로 마음을 움직인 적이 없고, 어떤 마음도 쓴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늦게 자는 원인은, 여러 사람들이 다 그렇게 늦게 자고 밤을 새우니 자기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일이 끝나지 않아 마무리를 할 수 없으니 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 개인을 놓고 말하자면, 지금까지 그 일을 위해 그 어떠한 시간과 정력도 더 들인 적이 전혀 없으며, 어떤 대가를 더 치른 적도 없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고생을 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여러 사람들을 따라 같이 한솥밥을 먹으며, 일도 같이 시작하고 같이 끝냈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어떠하냐? 그런 태도로 본분을 하면 진리에 부합되는 부분이 있느냐? 너희는 평소에 본분을 어떻게 했느냐? 참답게 대한 적이 있느냐? 보아하니, 참답게 대한 적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젊은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거기에는 대가가 있다. 어떤 대가일까? 그 여자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지? 매운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 근데, 난 매운 걸 싫어해. 그리고 너무 맵게 먹으면 여자에게 좋지도 않은데, 그럼 어떻게 할까? 그 사람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니, 매운 요리를 배워 매운 음식을 해 줘야겠어.’라고 하면서 방법을 다해 매운 요리를 한다. 매운 요리를 할 때, 고추를 손질하거나 고추를 볶으면 본인도 매워서 기침이 나고, 손가락도 매워서 죽을 지경이다. 그것은 대가가 아니냐? 그렇다면 그 여자는 그 대가를 치를 때 고생이라고 생각하겠느냐? 그 여자는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흐뭇해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대가를 치러도 가치 있어. 불구덩이라도 서슴지 않을 거야. 어떤 고생을 해도 가치가 있어!’라고 한다. 아직 상대가 좋아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 각종 조미료를 사서 집에서 연습하기 시작하는데, 칼질하다가 손을 베기도 하지만 ‘포기 안 해! 계속 할 거야!’라고 한다. 매워서 눈도 겨우 뜨고 콧물도 줄줄 흘리고, 기침을 계속 하면서도 ‘포기 안 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이런 고생쯤은 가치가 있지!’라고 한다. 그 여자는 고생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그 남자는 아직 그 여자와 아무런 관계가 아닌데도 그 여자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저 사랑하는 마음 하나 때문에 그렇게 지불할 수 있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본분하는 일에서 이런 심지가 있느냐? 이런 표현이 있느냐? 분명히 그런 심지도 없고 그런 지불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본분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제력과 의지력으로 유지하고 있고 그런 정형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너희는 바로잡은 적이 있느냐?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방금 우선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대가에는 손발을 쓰는 것, 어떤 때 늦게 자거나 일찍 일어나는 것도 포함되는데, 이것은 육체 방면의 고생이다. 그 밖에, 마음을 많이 써야 하고, 정력을 많이 들여야 하고, 머리를 많이 쓰면서 많이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 앞으로 많이 나와 너의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고 본분에 쓰고, 너의 정력을 본분에 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력과 시간 방면의 대가이다. 이 두 방면에서 다 대가도 치르고 화비도 하고 필사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본분에서 대가를 치른 것이 아니냐?

너희가 본분하면서 고생한 것은 어느 방면이냐? (시간에서 대가를 좀 치렀습니다.) 시간에서 대가를 좀 치렀다. 그럼 부족한 것은 어느 방면이냐? (머리를 많이 쓰고, 하나님 앞으로 많이 나아가 기도하는 방면이 부족합니다.) 그 부족한 것은 어느 방면의 문제냐? 전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시간을 좀 많이 들였다는 것은 어떤 책임을 다한 것이냐? (힘을 다한 것입니다.) 힘만 다한 것이다. 그럼 아직 어느 방면을 다하지 못했느냐? 마음을 다하지 못했고, 뜻을 다하지 못했다. 목숨은 다했느냐? (다하지 못했습니다.) 주요한 이 세 가지 방면에서 다 하지 못했고 힘만 다한 것이다. 그럼 본분을 함에 있어 힘만 다했다는 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힘을 바친 것입니다.) 힘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 눈에는 무엇으로 보이느냐? (효력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효력하고 싶으냐? 너희는 효력자가 되고 싶으냐? 너희는 효력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희는 효력을 하고 있다. 그것도 지칠 줄 모르고 즐겁게 효력을 하고 있다. 너희는 바로 그런 길을 가고 있다. 효력자가 되기는 싫어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효력하고 있는데, 모순되지 않느냐? 그럼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그것은 사람이 가는 길로 인한 것인데, 네가 어떤 길을 가면 최종에 실현되는 목적도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말로 하면 ‘피는 꽃에 따라 그런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네가 효력자의 길을 가고 있고, 효력자의 길을 선택했는데, 그럼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효력하는 것이다. 네가 늘 힘만 쓰려고 하면서, 정력을 쏟으려고도 마음을 쓰려고도 하지 않고, 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에 얻는 결과는 힘만 다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힘만 다하면 그 결과는 효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모순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다 효력자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고, 효력자라는 말을 들으면 싫어서 ‘이건 날 모독하는 거잖아? 날 경멸하는 거잖아? 날 학대하는 거잖아? 이건 사람을 차별하는 게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많은 공을 들이고, 그렇게 많은 힘을 썼는데, 왜 효력자라고 하는 거야?’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많은 힘을 썼으면 영락없는 효력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힘만 쓰지 말고 마음을 다할 수 있게 방법을 찾고 그 방면으로 노력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제 본분에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바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본분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여진다. 방금 내가 말했지만 하나님 눈의 좋은 사람은 우선 무엇으로 가늠해야 하느냐?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 가늠해야 합니다.) 어떤 일에서 봐야 하느냐? 먼저 본분하는 것에서 봐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지, 하나님 눈에 좋은 사람인지를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가늠하는 방법이자 기준이다. 이러면 길이 생긴 것이 아니냐? 그럼 너희는 힘만 다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심지가 있느냐? 힘만 다하는 그 요구 기준은 너무 낮다. 이것은 품꾼과 같은 것인데, 고용한 품꾼, 노예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예의 주인이 아니다. 너희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최종에 하나님은 너희의 추구와 표현에 따라 너희에게 합당한 축복과 은혜와 약속을 줄 것이다. 너희도 어느 정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너무 낮은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려는 약속이 효력자의 약속일까?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려는 기준이 효력하라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효력자가 되면 네 자신은 속이 불편하고, 하나님은 더더욱 고통스럽고 상심되고 괴롭다. 정말 많은 힘을 들여 한 무리 효력자를 구원했다면, 그것이 영예로운 일이겠느냐? 그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얻은 상징이겠느냐?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간증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가야 할 길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간증도 아니다. ‘난 하나님을 위해 달갑게 효력할 수 있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해도 난 힘만 쓰고, 어떻게 말씀해도 노동력만 들일 거야. 어떤 식으로 힘을 쓰라고 해도 난 달갑게 할 거야. 100% 힘이 있으면서 80%만 쓰는 게 아니라 요구하는 힘만큼 다 쓸 거야! 일할 때 단지 마음을 다 쓰지 않을 뿐이야. 난 이걸로 만족해.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어?’ 이것이 진리냐?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무엇이냐? 진리는 하나님이 너에게 준 요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방면에는 어떻게 요구했느냐? 이러면 진리에 관련되고 진리의 원칙에 관련되며 실행 원칙에 관련되는 것이다. 실행 원칙은 무엇이냐? 너희 삶 속에서, 본분을 하는 가운데서 네가 해야 되는 것이고, 너의 길이고 네 인생의 방향과 목표인 것이다. 주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했느냐? 너희가 한 번 말해 보거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12:30)입니다.) 그 말씀을 빠짐없이 기억해야 한다. 마음에 새기고 일할 때 그 말씀으로 자신이 도달했는지를 가늠해야 하는데, ‘난 어떤 것에 도달했는지, 어느 방면을 하지 못했는지, 내 안의 정형은 어떤지, 패역은 없는지, 잔꾀는 부리지 않았는지, 거래는 없는지, 강퍅은 없는지, 하나님께 조건을 달지는 않았는지, 여기에 소극적인 성분은 없는지, 지체하는 성분은 없는지, 얼렁뚱땅하는 것은 없는지’를 가늠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그 말씀, 그 진리를 마음에 기억해 둬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기억해 두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 말씀을 기억해 두는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형을 규범화하고, 행위를 규범화하여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의 방향을 이끌고 가기 위한 것이다. “이 일을 또 멍청하게 했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더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하셨어! 이제 흐리멍덩하지 않아. 마음을 다해서 일해야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하는 것일까? 아참!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잖아!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과 교통해 봐야겠어.”라고 한다. 그렇게 교통하고 나서 두 사람이 또 함께 기도한다. 그럼 된 것이다. 마음도 평안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적합하다고 여기며, 마음도 다했고 최선을 다했으며 마음을 완전히 다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마음은 없는지, 성찰해 보니 자기만의 생각이나 이기적인 목적도 없다. 그럼 그렇게 해야겠다고 한다. 네가 마음을 다하려면 마음속에 늘 생각이 있어야 하고, 사람과도 하나님과도 소통하고 교류해야 한다. 이것은 마음의 일이다. 마음이 움직이고, 생각에 세부적인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현실에서 유용하게 되지 않았느냐?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라고 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이론이 아니고, 어떤 논조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에게 활용하라는 것이다. 네가 일이 닥쳤을 때 길이 없고 어떻게 할지 몰라 갈팡질팡할 때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셨지. 그럼 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묵상해야겠어.’라고 하면서 묵상하다 보면 ‘길이 생겼어! 하나님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나님의 이 말씀의 뜻에 따라, 그러니까 하나님 뜻에 따라 실행해야겠어.’라고 한다. 실행해 보니 그렇게 실행하는 것이 좋고 영 안이 평안하고 누림도 있으며 타인에게도 덕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검증이 된다. 그리고 너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깨우침을 좀 받게 되고, 경력과 체험도 좀 있게 되며, 또 깨달은 것도 있게 된다. 어떤 것을 깨닫게 될까?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 속의 원칙을 찾게 되며, 그 말씀의 근원이 무엇인지 찾게 되고,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한 의의도 알게 된다. 이러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네가 깨달은 다음 그 일을 하면 더는 허둥대지 않고, 멍청하게 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을 것이다. 겁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아느냐? 바로 그런 일이 임했을 때,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이 생겼고, 헤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이 임했을 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어. 난 원칙을 알아. 난 하나님께서 이 일에서 어떻게 요구하셨는지 알아.’라고 하는 것이 겁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일이 닥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말로 하면 ‘그런 일이 임할 때 난 대책이 있고, 방법이 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아.’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길이라고 한다. 학생들이 이과 계열을 공부하는 것과 같다. 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냐고 할 때, 이과에 강한 학생은 그런 문제를 보면 어떻게 풀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길이다. 그 길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어떤 공식과 법칙을 그대로 적용시켜 마지막에 그 문제를 풀게 된 것이고, 정확한 답이 나온 것이다. 그럼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길이란 무엇을 가리킬까?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행 원칙을 깨달은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한 것은 어떤 정형을 말씀하는지,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알려 준 것을 이해하게 됐음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냐?

방금 말했던 화제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길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봤을 때는 간단한 말씀 한 마디지만, 사실 그 말씀은 너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일이 임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런 일이 임했을 때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이고 너의 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이 닥쳤을 때, 너에게 지혜가 있게 하고, 원칙이 있게 하며, 실행의 길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네가 모든 방면에서, 즉 본분하는 방면에서나 그 외의 방면에서나 다 길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깨달았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네가 진리를 깨달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음을 뜻한다. 효력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필요 없이, 힘만 쓰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효력은 간단한 일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효력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렇게 간단한 일도 못하는데, 그런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고,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다! ‘아주 형편없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효력하는 일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므로 사람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힘쓰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해 항상 말썽을 피우고 항상 교란하고 항상 소극적이고 태만하고, 항상 달래 줘야 하고, 항상 지켜봐야 한다면 그런 사람은 합격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사람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너희는 어느 길로 나아갈 계획이냐? 어떤 사람이 될 계획을 하고 있느냐? 표준 효력자가 되려고 노력하느냐, 아니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본분을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본분을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목표가 맞다. 다 효력자가 되고 싶지 않고 힘만 쓰고 싶지 않다면, 진리 방면으로 향상해야 한다! 진리 방면으로 향상하려면 먼저 어느 말씀에 진입해야 하느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본분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 말씀은 진리가 아니냐? 네가 그 말씀을 진리로 삼아 마음에 두고 그 말씀대로 실행하고, 그 말씀대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말고 자신에게 요구해야 맞는 것이다. 그러면 출발점이 맞는 것이다. 네가 그 방면으로 향상하면 차츰차츰 성과가 보이고, 차츰차츰 사람 모양이 나오고, 점차적으로 너와 하나님은 점점 더 친밀해지고, 너와 하나님과의 사이가 갈수록 가까워지게 된다. 그렇게 될 때면 사람에게 오해가 좀 있거나 소극적인 정서가 있거나 연약함이 있더라도, 그런 것은 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 같이 자유민주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국 대륙의 형제자매들처럼 박해를 받아 본 적이 없고 그런 환경에서 고생한 적도 없는데, 삶이 너무 안일한 것도 너희에게는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너희는 진리를 추구하는 면에서 조금은 힘이 들고, 본분하면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도 조금 애를 먹는다. 자유민주제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지내려는 것이 있는데, 다 그런 결함이 있다. 다른 사람이 한 소리 해도 안 되고, 건드려도 안 되고, 사상이 비교적 자유롭고, 생각도 비교적 개방적이며, 항상 자기 공간을 요구하고 항상 자유를 요구하며, 항상 자의적이길 원하면서, 모든 방면에서 다 자기 자신과 관련되는 것들을 요구하는데, 그런 것들은 정말 문젯거리다! 그런 것들을 내려놓지 않으면, 힘만 쓰는 그런 정형과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항상 자아주의와 자기만의 공간을 강조하는데, 항상 그런 것들을 따진다면 문제가 된다. 너는 무엇을 중요시해야 할까? 진리를 중요시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중요시해야 하며, 어떤 것이 긍정적인 것인지, 어떤 것이 정확한 인생길인지를 중요시해야 한다. 자유, 민주, 독립, 자기 공간, 이런 것들은 진리가 아니다. 단지 이 어둡고 사악한 세상의 어떤 진보적인 사상과 제도일 뿐이고, 사람이 생존하기에 상대적으로 적합하고 인권이 있는 어떤 제도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진리가 아니다. 너희는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너희는 ‘난 이런 사회 제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게는 이런 권리가 있어. 난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할 거야. 그래도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 이건 나의 인권이고, 이 사회와 국가가 나에게 부여한 권리야.’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이런 것들을 지고지상한 진리로 삼는다면 위험하다. 너에게 이런 사상이 있다면 너를 심하게 망칠 것이다. 이런 사상이 있으면 너는 진리에 진입하지 못하고, 자신을 하나님을 따르는 일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원으로 진정으로 여기지 못할 것인데, 그러면 위험하다! 이것이 너희의 어려움이다. 사람에게 어떤 결함이나 어려움이나 어떤 문제들, 어떤 심각한 문제, 대표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런 것들은 아마 사회적 배경 때문일 수도 있고, 아마 어떤 생활의 배경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네가 그런 문제의 실질을 잘 알지 못하고, 그 문제의 심각성도 잘 알지 못하고 늘 그런 방식으로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대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부탁을 대한다면, 너는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지금의 현실은 어떤 것이냐? 중국 대륙의 사람들은 그런 사회적 배경에서 살다 보니 우월감이 별로 없다. 태어나서부터 길러진 습관이 있다. 바로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 하는데, 황소처럼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배경과 기초가 있다 보니 그들에게는 그런 생활 습관이나 사람됨의 원칙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국가의 사람들, 다른 제도의 국가, 자유민주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상이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단속하는 것을 싫어하고, 속박에서 벗어나고 어떤 규칙에서도 벗어나려고 하는데, 심지어 하나님 집에 왔어도 하나님 집의 행정 제도나 사역 안배나 교회의 규칙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징계도 통제도 받고 싶지 않아 하고, 누가 책망해도 안 되고, 터치해도 안 되고, 한 소리 해도 안 되고, 일이 조금 바빠도 안 되고, 일이 조금 힘들어도 안 된다. 이러면 참 문제다! 그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야 할 모습이 아니고, 그리스도 정병의 모습도 아니다.

은혜시대에 늘 성도의 품위를 강조했었는데, 지금에 가져와도 부합되지 않느냐? 적용되지 않느냐? 너무나 잘 적용된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이기에 어디에서든 다 적절하고 언제든지 다 적절하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피조물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둘째 치고, 네가 크리스천인 이상 크리스천의 품격을 갖춰야 하지 않느냐? 그것도 없다면 너는 하나님을 따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려면 피조물로 살려고 하든, 평범한 사람으로 살려고 하든, 힘을 내야 하고 분발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인정할 수 있게 하려면 겉면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 저는 이런 식으로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데,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저에게 이런 계획과 목표가 있는데, 하나님 뜻에 맞습니까?”라고 하든지 혹은 네가 하나님께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너는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다음 네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 줘야 한다. 네가 어떤 국가에서 태어났든,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태어났든, 지금 하나님을 따르고 있다면 너는 그 국가에 속하지 않고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너는 곳곳에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여겨야 할까? 하나님 집의 사람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여겨야 하며, 성도의 기준으로 자신을 가늠해야 한다. 네가 만약 자신을 가늠하는데, ‘난 한국 사람이야.’ ‘난 대만 사람이야.’ ‘난 홍콩 사람이야.’ ‘난 미국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네가 크리스천이겠느냐? 그런 관점은 틀린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이방인의 관점이고, 그런 사람은 불신파다! 네가 불신파인데, 왜 여기에 끼여 있느냐? 크리스천으로 사칭하고 싶은 것이냐? 여기서는 사칭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정말 크리스천이라면 제대로 해야 한다. 제대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제대로 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크리스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상태면 안 된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은 얼른 나가라. 우리는 그런 사람이 필요 없다. 오늘날 네가 자신을 국도의 자민(子民)으로 여긴다면 국도 자민의 기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네가 만약 ‘무슨 국도 자민이고 뭐고 있어. 난 대만 사람이라서 어디서나 인권이 있어야 하고, 대만 사람의 존엄과 권익이 있어야 해. 어떤 일을 하든 나한테는 대만 사람의 기준으로 가늠하고, 요구해야 해. 그게 아니면 말도 꺼내지 마!’라고 한다면, 빨리 나가 주길 바란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그 어떤 나라의 사람도 필요 없다. 여기는 오로지 국도의 자민만 원한다. 알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 네가 ‘난 하나님을 따르지만 기어코 사탄의 말을 듣고, 사람의 말을 듣고, 나 자신의 말을 듣고, 명인의 말을 듣고, 국가 정상의 말을 들을 거야. 난 어디서나 국가 제도와 법률에 따라 살 것이고, 언제나 국가의 제도와 법률, 우리 나라의 문화, 풍속 습관, 우리 집안의 규칙으로 날 가늠할 거야. 그걸로 가늠했을 때 합격이면 난 좋은 사람이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해도 소용없어.’라고 한다면, 미안하지만 나가라. 하나님 집에는 너 같은 사람이 없고, 그런 사람이 필요도 없다. 너는 국도 자민도 아니니, 빨리 떠나라! 그런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고 상대도 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이 본분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빨리 떠나라, 빨리 떠날수록 좋다!

어떤 사람은 ‘난 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 난 왜 어떤 전문가와 어떤 인권 단체의 사람이나 어떤 유명인이 하는 말이 무게가 있어 보이지? 하나님 집의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 가지고 국도 자민이라고? 우리 나라를 봐, 우리 나라의 대통령(직역: 정상)은 얼마나 위풍이 넘치는데? 무슨 회의를 한 번 열면 그 장면이나 카리스마, 위엄이 얼마나 대단해! 우린 너무 비교되잖아?’라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보는 것이냐? 하나님 집은 어떤 면에서도 안 되고 어떤 국가보다도 못하고, 하나님 집의 사람은 어떤 단체보다도 못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준 행정이 어떤 국가의 제도나 법률보다도 못하다고 보는데, 그럴 거면 네가 하나님 믿어서 뭘 하느냐?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보느냐? 너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그렇게 보느냐? 너는 경외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들은 불신파가 아니냐? 그런 자들은 얼른 밖으로 내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자가 나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 (내쫓아야 합니다.) 빨리 내쫓아야 한다. 똥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밖으로 쫓아 버려야 한다. 이렇게 사정을 두지 않냐고 하는데, 이렇게 사정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고 하나님이 권세를 잡고 있으며,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그런 자들은 쫓아 버려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 집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불신파가 너희 가운데 섞여 있는 것을 원하느냐?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서둘러 밖으로 쫓아 버려야 한다.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고,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밖으로 쫓아 버리며 꺼지라고 해야 한다. 알겠느냐? 이런 것은 몰인정하고 사랑이 없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너의 분량이 얼마나 되든, 진리를 추구하려는 심지가 얼마나 크든, 네가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든 없든,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ㆍ하나님은 진리, 길, 생명인 것이다. 이것은 영원불변하다. 이것은 각 사람의 마음의 반석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가장 견고한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네 마음에서 확실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이것마저도 의심한다면, 너는 하나님 집에 있을 자격이 없다. 어떤 자들은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고, 우리 인종은 고상한 인종이며, 우리 민족, 우리 풍속, 우리 문화는 고상하기 그지없고,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진리보다 더 고상하다.’라고 한다. 그런 자들은 밖으로 내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불신파의 소리가 아니냐? 그것이 불신파의 소리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밖으로 내보내고 내쫓아야 하고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들은 불신파다.

어떨 때에는 사람에게 일시적인 정형이나 생각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믿음은 진실하다. 사람이 약간 우매하거나 일을 꿰뚫어 보지 못했거나 미혹을 받거나 진리를 깨닫지 못해 일시적인 우매로 어리석은 말을 하거나 어리석은 표현이 나타날 수는 있다. 그것은 패괴 성정 때문에 그런 것이고, 우매함으로 그렇게 된 것이며, 무지함으로 그렇게 된 것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그런 부류가 아닌 사람은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교통하는 것으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불신파의 부류이다. 그러면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다. 내가 이 말을 어떤 뜻으로 하는지 아느냐? 너희에게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일들을 피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는데, 알겠느냐?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교통하는 것은 진리를 잘 추구하고 힘만 쓰지 말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통해 구원하는데,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네가 본분을 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마음으로 만족스러워하고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너희에게 많은 말씀을 해 주고 많은 심혈과 대가를 쏟아부었는데, 최종에 힘만 쓰는 자들만 한 무리 얻고, 효력자들만 한 무리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며 힘만 쓴 것이다. 비록 살아남기는 했지만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고, 진정한 피조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경영 계획의 초심도 아닌 것이다. 알았겠지?

너희는 잘 추구해야 한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어떤 나쁜 정형이나 나쁜 대인 관계에 빠지지 말라. 그런 올무에 얽매이지 말고, 온종일 대인 관계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느라 자신의 본분을 내려놓거나 본분을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은 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것이고 합당하지 못한 것이다. 아주 보잘것없는 이익을 위해 얼굴을 붉히지 말고, 아주 보잘것없는 이익을 위해 인격을 잃지 말며 사람의 품위를 잃지 말거라.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어떤 곤란이 닥치든,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든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와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절대로 싸우지 말고 입씨름하지 말라. 그것은 어린아이의 표현이고 분량이 작은 표현이다. 여럿이 함께 있다 보면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나는데, 네가 옳거니 내가 맞거니 하면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밑도 끝도 없이 뒤에서 서로 논단하고 종일 그런 것만 따지다 보니 마음이 그런 것에 묶여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하고, 그런 일에 얽매이게 된다. 너희는 그런 정형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 것들은 다 분량이 작은 표현이다. 분량이 작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작은 돌멩이 하나를 봐도 반나절씩 연구하고, 작은 개미 한 마리를 봐도 반나절씩 연구하고, 날개 하나 떨어진 곤충을 봐도 반나절씩 연구하면서, 중요한 일을 지체하게 된다. 그런 것은 어린아이들의 표현이 아니냐? 일처리를 할 때, 항상 빗나가고, 항상 문제가 생기고, 혹은 늘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모르고 무엇이 본연의 일인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성숙되지 못한 어린아이의 표현이다. 너희는 자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란다는 것은 뭘 말할까? 말하자면, 어른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인데, 어른이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모색하고 구하는 것이다. 정상 사람, 정직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지, 본연의 일에 충실한 사람은 일을 어떻게 하는지, 일하는 스타일과 방식, 원칙은 어떤 것인지 보고 너희는 그런 것을 찾고 구하며 모색할 줄 알아야 한다. 어른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고 해도 자신이 할 중요한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고 한다. 집에 불이 났다고 해도 서둘러 중요한 일을 잘 마무리하고, 지체시키지 않고 끝내려고 한다. 어린애들은 밖에 새가 울어도 가 보고, 새끼 고양이가 울어도 가 보고, 개가 싸워도 가 본다. 무슨 일이든 다 그 아이의 중요한 일을 지체시키고, 그 아이가 중요한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이것은 본연의 일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조그마한 일에도 그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게 되는데, 말 한 마디 잘못하거나 눈길 하나 잘못 주거나 농담 하나 잘못 해도 짜증을 부리면서 본분을 지체하거나 내팽개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가서 달래 줘야 하고 교통해 줘야 한다. 그런 것들은 다 성숙되지 못한 표현이 아니냐? 성숙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 눈에 들지 못하고, 존엄도 없고 인격도 없는 것이다.

너희는 진리 방면으로 중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잘못했어도 상관치 말고, 진리 방면으로 노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그 사람이 잘못했어도 너는 자신을 성찰하고, 모두가 맞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에 이런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다 진리 방면으로 중시하고, 다 진리 방면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대소(大小), 노소, 자격, 능력을 따지지 말라. 그런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고, 그런 자격을 따지지 말라. 오로지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구의 말이 진리에 맞는지, 누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해 생각하는지, 누가 하나님 집의 사역을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지, 누가 긍정적인 것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지, 누구에게 정의감이 있는지, 누가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지만 봐야 한다. 그런 사람이 사람들 가운데서 옹호받고 지지를 받아야 맞는 것이다. 바른 기풍, 진리를 추구하는 바른 기풍이 교회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 역사가 있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고 인도해 준다. 시비를 따지고, 득실을 따지고, 서로 앙심을 품고, 서로 질투하고, 서로 분쟁하는 이런 풍조가 교회에서 우위를 차지한다면, 너희에게는 틀림없이 성령 역사가 없을 것이다. 서로 겨루고, 암암리에 서로 싸우고, 서로 간계와 기만과 음모로 상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악한 풍조다! 그런 것이 교회에서 우위를 차지한다면 성령은 결코 역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말이 있는데, 주 예수가 한 말씀을 너희는 기억하느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19~20)) 그것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했으면 그대로 한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멀리한다. 그러므로 네가 늘 다른 사람의 결함만 보고 늘 다른 사람이 눈에 거슬리기만 하고, 또한 늘 다른 사람이 너를 눈에 거슬려 하는 것만 본다면, 위험하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지도 않고 인도해 주지도 않으면, 사람의 힘이나 은사나 능력만으로는 어떤 일을 해도 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지 못하는데, 아무리 해도 다 헛수고다. 이 부분을 천천히 체험해 보거라. 그러면 점차 체험하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든 동심합의해야 한다. 생각해 보아라. 어떻게 해야 동심합의할 수 있을까? 진리를 실행해야 하나로 뭉칠 수 있고 동심합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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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④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