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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편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요즘 너희는 어떤 방면의 진리가 가장 듣고 싶으냐? 스스로 알고 있느냐? 우리 먼저 교류를 좀 하면서 의견을 모은 다음 교통을 하자. 너희에게 화제를 몇 가지 줄 테니 너희가 골라 보거라. 그리고 너희가 선택한 것으로 교통을 하자. 첫 번째는, ‘자신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인식하는 길은 어떤 것인가? 왜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맞습니다.) 다음 문제는, ‘사람은 그동안 무엇으로 살아왔는가? 정말 진리로 살고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 어떤 정형들이 사람이 진리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하는가?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어떤 표현들이 사람이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를 실증하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교통할 가치가 있지 않으냐?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전에 교통했었던 ‘성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지난번에 패괴 성정을 모두 몇 가지 교통했었느냐? (6가지입니다.) ‘어떤 정형이 그런 성정들의 구체적인 표현인가?’라는 것이 세 번째 문제이다. 이제 너희는 너희가 지금 가장 알고 싶기도 하고, 게다가 가장 이해가 안 되고,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선택해 보아라. 너희끼리 교통해 보아도 된다. 교통한 결과는 무엇이냐? (저희는 두 번째 문제를 택하겠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너희가 다시 한 번 읽어 보아라. (‘사람은 그동안 무엇으로 살아왔는가? 정말 진리로 살고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 어떤 정형들이 사람이 진리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하는가?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어떤 표현들이 사람이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를 실증하는가?’입니다.) 좋다, 그럼 우리 이 화제를 가지고 교통하자.

너희는 이 화제가 도대체 어떤 것에 관련되는지 묵상해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사람은 그동안 다 무엇으로 살아왔는가?”라고 물은 이 말의 핵심은 무엇이냐? 핵심은 ‘무엇’이란 이 단어인데,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다면 너희가 묵상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냐? (‘무엇으로 살아왔는가’입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왔는가’에서 ‘무엇’이란 이 단어를 묵상해야 한다. ‘무엇’의 범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것이 너희가 묵상해야 할 것이다. 이 ‘무엇’을 만약 가장 얕은 정도로 설명하면,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에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너희가 평소에 그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그러니까 그것으로 사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나 사람이 생각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무엇’은 이 범위 안에 있는 것인데, 바로 이 화제를 교통하겠다. 사람이 평소의 삶 속에서 접촉할 수 있는 것이나 너희가 배운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것, 혹은 너희 나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이나 너희의 생활 범위에서 할 수 있는 것, 혹은 너희의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을 얼마든지 다 꺼내 놓고 교통할 수 있다. 무엇이라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느냐? 지금 너희의 머릿속에 이 두 글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가 있느냐? 가장 기본적인 거라면 바로 네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인데, 너는 자신이 근거하고 있는 그것이 아주 정당하고, 아주 정의롭고 하나님이 열납하기에, 그것은 진리에 근접한 것이고 긍정적인 것의 실제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고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너는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그동안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너희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느냐?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오직 대가만 치르면 본분을 잘할 수 있고, 본분에서 효과만 있으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너의 그 관점은 너 스스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고난받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럼 고난받고 대가를 치르는 이 관점은 바울의 관점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실질은 똑같지 않으냐?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관점의 실질은 무엇이냐? 일종의 상상이다. 그동안 일종의 상상에 근거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살면서 본분을 하고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을 믿었거나 하나님을 믿는 삶에 속하는 것들을 행해 왔다. 그것은 일종의 상상이고, 사람이 근거로 하고 있는 일종의 것이다. 더 없느냐? 먼저 너는 자신이 그렇게 하는 바탕이나 근원은 옳은 것이라고 여기고 ‘이것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고 여기고 있음을 확정해야 한다. 여기에 관련되어야 이번에 교통하는 화제에 속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저는 세상에 있었을 때, 아주 고생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을 믿은 뒤에는 하나님께서 절 구원해 주셨으니 당연히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당연히 와서 본분을 하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하고, 세상은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이런 양심적인 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네가 하나님 믿으려고 추구하는 원동력이자 기초이다. 그렇지? 더 있느냐? (저는 세상의 많은 일들이 가치와 의의가 별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만이 가장 의의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떤 것에 속하느냐? 뭘 말하고 있는지 알겠느냐?

너희가 말한 것들은 대부분 비교적 감성적인 인식이지 결코 너희가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교통하려는 이 화제와 얼마나 큰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크냐? 대부분 말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신앙에 대한 이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부터 지금까지 인식한 것이 진리와 비교적 부합되는 것이든 진리와 관련 없는 것이든, 그것은 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일부 감성적인 인식과 감각적인 인식이다. 대부분이 다 그렇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것들이 이 화제와 관련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이 화제에 연관될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통해야 할 것들이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다들 이해할 수 있는 화제, 바울부터 교통해 나가자. 바울부터 얘기하여 너희에게 연관시켜 보자. 어떠냐? (좋습니다.) 좋은 것은 어떤 것이냐? 그리고 좋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부분이 좋으냐? 왜 바울에 대해 말하려고 할까? 바울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누가 바울의 대표적인 이야기나 화제에 대해 얘기해 보겠느냐? 성경에서 바울에 관한 대표적인 부분을 읽어 본 사람이 없느냐? 예를 들면, 바울이 자주 말했던 명언은 무엇인지, 혹은 바울의 특징이나 성격, 또 혹은 바울의 가장 뛰어난 것이나 특기, 이런 것들은 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교법사는 매우 유명했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아주 좋은 간판이었는데, 명문대와 같은 셈이었습니다.) 현재의 말로 하면 바울은 명문 대학을 졸업한 신학생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이것이 첫 번째다. 바울에 관한 비교적 대표성이 있는 화제라면 바울은 명문 신학원을 졸업한 신학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배경, 배움의 정도, 사회적 지위이다. 두 번째, 바울이 했던 대표적인 말은 무엇이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디모데후서 4:7~8)). 그것이 바로 바울이 뛰어다닌 원동력이었다. 현재의 말로 하면, 바울이 고난받고 대가를 치르며 사역하고,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도를 전했는데, 그의 원동력은 어떤 것이었느냐? 무엇을 위한 것이었느냐? (면류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다. 계속 하거라. (나중에 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 그것 역시 바울의 대표적인 말이다. 또 있느냐? 바울의 인성, 바울의 타고난 자질, 특기, 아이큐를 말해 보거라. 예를 들면, 바울이 말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 모르는 문제이다. 말하자면, 많은 신학생 심지어 제사장들도 모르는 문제를 바울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의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높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지식이 높았다는 것을 뜻하고, 그 방면을 말해 주고 있는 증거이다. 지금까지 3가지를 말했다. 첫 번째, 바울은 명문 신학원을 졸업한 신학생이다. 이 ‘명문’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명문’은 바울이 졸업한 학교, 즉 바울이 교육을 받은 학교는 대단히 유명하며, 그 학교를 나온 사람은 틀림없이 사회적 지위가 일반 사람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 그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 부분, 지식의 범위는 아마 일반 학교보다 더 폭넓고 깊이 있지 않겠느냐? 바울이 그런 학교를 졸업했으니, 그가 갖춘 신학 지식은 아마도 일반 사람보다 많지 않았겠느냐? 그러면 바울이 보았던 신학 방면의 서적도 일반 사람보다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바울의 학력 수준의 배경이다. 바울은 그런 학력을 배경으로 갖추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바울이 전도하고 교회를 목양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 유익이 되었느냐, 아니면 해가 되었느냐? 도움이 되는 역할은 있었느냐? 어떤 사람은 “있었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너희의 그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있었느냐, 아니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냐? 도대체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다음 것은 무엇이었느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디모데후서 4:7~8)라고 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무엇이었느냐? (바울은 그 말에 근거해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 말에 근거해 살았고, 그 말에 근거해 추구하였다. 그렇다면 그 말이 바로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고난받고 대가를 치른 속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럼 바울의 속셈은 까놓고 말해서 무엇이었느냐? (상을 받고 면류관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상을 받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뛰어다니고 대가를 치르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으로 의의 면류관을 바꾸어 오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동안 무엇으로 살았느냐? 그런 속셈으로, 그 말을 원동력으로 해서 산 것이 아니냐? 그럼 바울이 그 말을 떠났더라면? 만약 그 말을 하지 않고 반대로 “달려갈 길도 다 마쳤고 선한 싸움도 다 싸웠으니 이제 나머지는 다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런 마음 가짐이나 이런 신념이나 이상(異象)을 가졌다면, 바울이 그런 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대가를 치를 수 있었을까? 바울의 품성과 추구 그리고 바울의 속셈과 야심으로 봤을 때, 바울이 그런 대가를 치를 수 있었을까? 만약 예수가 사전에 바울에게 “내가 땅에서 사역했을 때, 너는 나를 박해했다. 너 같은 경우는 이미 징벌을 받았고 저주를 받았다. 네가 어떻게 해도 그러한 과오는 메울 수 없고 그러한 잘못은 메울 수 없다. 네가 아무리 회개해도 나는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려 주었다면, 바울은 어떤 태도였을까? (바울은 하나님을 버리고,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했을 것이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했을 것이며, 하늘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방금 말한 것은 무엇이냐? 바울은 무엇으로 살았느냐? (복을 받으려는 속셈으로 살았습니다.) 복을 받으려는 속셈, 톡 까놓고 말하면 바울이 그렇게 신나게 뛰어다녔던 것은 복을 받으려는 욕망에 지배되었던 것이다. 복을 얻으려는 욕망이 없었고, 그 한 가닥의 희망이 없었다면 바울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사역했던 것을 보자. 바울은 풍부한 종교 지식을 갖추었고, 어느 정도 명망도 있었고, 특별한 교육 배경도 있었다. 바울은 일반 사람보다 지식이 높았다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은 무엇에 근거하여 사역을 했느냐? (소질과 은사와 지식에 근거했습니다.) 소질과 특기에 근거해, 자신의 지식에 근거해 사역했다는 점을 어떻게 발견했느냐? 너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느냐? 증거가 있느냐? 성경에 바울이 예수를 그리스도이고, 주님이며, 하나님이라고 증거한 기록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누구를 증거했느냐? (자기 자신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증거했느냐? (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그 말은 다른 말로 무슨 뜻이냐?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주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며, 자기가 진정 그리스도이고 주님이고 하나님이란 뜻이다. 바울은 야심이 있었다. 바울이 그렇게 뛰어다니고 전도했던 것은 자신의 속셈과 야심에 근거한 것이다. 바울의 야심은 무엇이었느냐?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즉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이나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고, 자기가 사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한 방면이다. 바울은 자신의 욕망대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바울은 사역을 지식에 근거해 했었다. 이것에 증거가 있느냐? 바울이 했던 어떤 말이 그가 사역을 했을 때 성령의 역사, 성령의 깨우침, 진리의 실제는 교통하지 않고 지식에 근거해 사역한다는 것을 대표하느냐? 증거가 있느냐? 바울은 사역하면서 끝까지 예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예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라고 가르쳤고, 일부 실행 방면에 관한 것도 있었는데, 바울은 그것을 벗어나 사역했다. 바울의 개인적인 상황을 놓고 보면, 그가 그런 것에서 벗어나 사역을 했을 때 어떤 것들을 교통했겠느냐? 바울이 배운 신학적인 것들, 지식, 이론적인 것들이 아니겠느냐? 그럼 지식이나 이론적인 것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상상, 철학, 추리가 포함되지 않느냐?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다른 것도 많이 있다. 어쨌든, 그런 것은 다 진리가 아니고 진리에 부합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바울의 예는 이만큼만 교통하겠다.

너희는 바울의 예를 다 듣고 나서 자신을 비춰 보면, 우리가 오늘 교통하려는 화제, “사람은 그동안 무엇으로 살았는가”에 관해 어느 정도 생각되는 부분이 있지 않느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럼 너희가 생각한 것은 어떤 것이냐? (제가 생각하게 된 것은, 평생 가정을 꾸리지 않고, 평생 집에 가지 않고, 평생 하나님의 부탁을 배반하지 않고, 큰 시련이 임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저를 죽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어떤 일방적인 소원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한 방면인데, 화제에 좀 근접했고, 실제적인 정형 그리고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추구하는 한 방면에 관련된다. 이것은 일종의 관점이다. 또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힌트를 좀 주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 꽤 됐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경험으로,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상상으로, 혹은 과거에 읽었던 영적 서적에서 얻은 일부 경험과 체험과 모범적인 사례에 근거해,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면 매우 영적이거나,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실행인지에 관련된 실행 방면의 실행법들을 총결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례를 가지고 말하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하자. 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병이 나면 어떻게 실행할까? 그 사람은 ‘병이 생긴 것도 하나님께서 배정하신 일이니 난 믿음으로 살아야 해. 첫째, 약 안 먹고, 둘째, 주사 안 맞고, 셋째, 병원에도 안 가. 봐! 내 믿음이 어때?’라고 한다. 괜찮아 보이지? 믿음이 있는 것이냐?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 들어 보아라. 그러니, 너희는 이런 관점을 인정해 주고, 또 너희 스스로도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는 거구나. 그렇지? “주사도 안 맞고, 약도 안 먹고, 병원에 가지도 않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라는 것인데, 병이 났을 때, 주사를 맞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느냐?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근거로 그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느냐? 근거가 있느냐? (저는 아플 때, 약을 먹거나 처방전을 찾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배치해 주신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고, 약을 먹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배치해 주신 환경에 순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너는 그렇게 터득했구나. 그런 관점을 지키는 사람도 적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럼 도대체 그렇게 실행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냐? 근거는 무엇이냐? 검증받았느냐? 알고 있느냐?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거지? 이런 것이 바로 열매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도대체 옳은지 그른지 모르고 있다. 그럼 너희는 도대체 왜 그렇게 실행하려고 하느냐? 병이 나도 주사도 안 맞고, 약도 안 먹고, 병원에 가지도 않고, 아무런 처리도 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시간을 때우는데, 유일한 실행 방법과 해결 방법이라고는 하나님께 병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맡기는 것밖에 없다. 이런 실행법은 정확한 것이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이제 와서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냐, 아니면 전부터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냐? 아니면 아직도 도대체 어떻게 실행하면 좋을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냐? (만약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다면, 그런 실행은 겉면의 방법에 속하는 것인데, 진리에 근거해 병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외부의 힘을 빌려 병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의 뜻인즉, 하나님이 너에게 병을 주었는데, 네가 그 병을 해결하고, 그 병에서 벗어났다면, 너는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해 준 것에 순복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냐? (그런 관점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이 있다는 것이 틀릴까 봐 두려운 것이냐, 아니면 의혹스러운 것이냐,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도대체 옳은지 그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냐? 어차피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면서, 다른 의견 같은 것도 없었고, 부작용은 더 없었고, 아무런 가책도 없었으니 계속 그대로 실행했던 것이냐? (그냥 계속 그대로 했었고,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럼 그것은 느낌으로 한 것이 아니냐? 느낌으로 한 것이라면 신뢰성이 없다. 느낌으로 한 것이라면 우리는 먼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말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소한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진리에 부합된다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원칙을 지켰고, 어떤 원칙의 범위에서 했다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렇지 않겠느냐? 하지만 지금 보면,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떨 때는 자신의 어떤 상상에서 비롯되어 스스로를 단속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기준을 정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너 스스로도 하나님이 너에게 도대체 어떻게 요구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면서, 너는 자신의 의도나 본인에게 정해 놓은 경로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는데, 도대체 결과는 어떨지 너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형은 무엇으로 살고 있는 것이냐? (상상입니다.) 상상은 일종의 관념을 갖고 있지 않느냐? 그럼 그런 관념은 어떤 것이냐? (그렇게 실행하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념이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경로, 그런 터득 방식은 순수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됐다. 정의가 내려졌고 결과가 나왔다. 그러한 상상 관념으로 살면,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정형이 더 있느냐?

이제 이 화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거의 다 해 본 것 같다. 이 화제에서는 대체로 어떤 것들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겠지? 그럼 우리, 이제 몇 가지 정형을 교통해 보자. 너희는 메모할 필요 없고 자세히 들으면 된다. 들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곰곰이 생각해 보는 목적은 무엇이냐? 자신에게 맞춰 보기 위해서이다. 자신에게 맞춰 보는 목적은 무엇이냐? 자신에게 맞춰 보는 목적은 본인의 정형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런 정형과 그런 문제가 있으면 그런 정형을 해결하는 것으로 진리와 무관한 것에 근거해 살지 말고 진리에 근거해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화제에는 참 많은 내용이 있다. 먼저 은사부터 교통해 보자. 어떤 사람은 말할 때 발음이 비교적 또렷하고, 언변이 뛰어나고, 사고력이 민첩하다. 그래서 유창한 화술, 재치 있는 언변을 가지고, 누구와 대화하거나 교제할 때면 사고력이 민첩하여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면 사람 소리를 하고, 귀신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귀신 같은 소리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집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유창한 화술과 민첩한 사고력으로 본분을 한다. 물론 본분은 다양하다. 복음을 전하는 본분도 있고, 교회를 인솔하는 본분도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것도 있다. 일단 그 사람의 유창한 화술을 써먹을 곳만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특기를 다 발휘한다. 그의 특기는 무엇이냐? 그것은 그가 입담이 좋고, 말하는 법을 알다 보니 웬만한 문제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까? 그 사람은 생각이 빠른 데다가 사회 경험도 좀 있고, 식견도 좀 넓다 보니 웬만한 일은 머리를 굴려 보고, 생각을 좀 하면 방법이 나오기 때문이다. 방법이 나오면 ‘됐어! 문제 해결! 큰 문제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흐뭇해한다. 거기에다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은 어떤 일이 닥쳐도, 두세 마디면 수습이 되고, 해결되는데, 난 왜 안 될까?’라고 하면서 부러워하고, 그 사람 스스로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혓바닥, 이, 머리를 봐. 총명하고 식견도 있고, 반응도 빨라. 일이 닥쳐도 나는 어렵지도 않고, 문제가 되지도 않아. 나한테 오면 바로 해결할 수 있어.’라고 하면서 으쓱해한다. 이제 문제가 나왔다. 언변이 좋고 사고력이 민첩한 사람은 자신의 그 특기와 재능으로 본분을 했는데, 물론 본분하는 기간에 일부 문제들도 해결했고, 하나님 집을 위해 여러 가지 일도 했다. 하지만 만약 자세히 따져서 그 사람이 한 모든 일이 진리에 부합되는지, 진리의 원칙에 따라 한 것인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본다면, 거기에는 물음표를 찍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은 비록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가 많고, 또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되는지를 모를 때도 많지만 여전히 본분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본분을 어떻게 하고 있든, 그는 무엇에 의지해 본분을 하는가? 그는 무엇을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사유와 식견, 그리고 그의 유창한 화술이다. 너희 중에 그런 사람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머리로 사는 사람들, 높은 아이큐나 언변으로 사는 사람들은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이 진리 원칙에 부합되게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는 일을 할 때 원칙이 있느냐? 다른 말로, 너희는 한 가지 일을 할 때, 자신이 총명과 지혜에 근거하고, 자신의 머리에 근거해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의 어느 한 마디에 근거해 살고 있는지 스스로 알고 있느냐? 알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냐, 아니면 모르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냐? (대부분의 경우에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을 하거나 일을 할 때, 진리에 어긋나는 부분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부분을 스스로 알고 있느냐? (어떤 때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을 때 어떻게 하느냐? (일이 지나고 난 뒤에 자신의 마음가짐이 옳지 못했다는 걸 알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심지(心志)를 세웁니다.) 그럼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또 지나쳐 버리고 또 심지를 세우는 식이냐? (맞습니다.) 그런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냐? (은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사에 근거한 것이다. 은사에 근거하는 것은 겨우 이것 하나만 있느냐? 단지 생각이 빠르고 유창한 화술만 해당되느냐? 아니지? 은사에는 구체적으로 다 어떤 것들이 있느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특히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웬만해서 곡을 한두 번 들으면 기본적으로 다 부를 수 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 본분을 하자. 이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본분이야.’라고 하는데, 그 느낌은 틀림이 없고 정확한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노래를 많이 배우기도 하고 적지 않게 부르기도 했으며, 배우는 것도 빠르고, 목소리도 갈수록 좋아졌다. 그렇게 한 것은 잘못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문제가 하나 있는데, 본인도 모르고 아마 다른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잘못된 문제는 무엇일까? 갈수록 목소리도 좋아지고, 노래도 정확하게 부르고, 게다가 갈수록 더 잘 부르며, 부를수록 사람을 감동시키게 되는 것을 생명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러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의존해서 사는 것이다. 그는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 (은사입니다.) 어떤 은사냐? (노래 은사입니다.) 그럼 노래 은사가 있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말일까? 그렇게 말하면 특기가 있고 은사가 있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 아주 어렵다는 말이겠네?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매우 힘들단 말이겠네?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특기가 있고 은사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특기와 은사로 살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것은 사람이 당연히 알아야 할 문제가 아니냐? 이것을 교통해 보도록 하자.

우선 은사가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잘 구분해야 한다. 너에게 은사가 있어 다른 사람보다 반응이 좀 빠르고, 다른 사람보다 터득이 빠르거나 발음이 정확하고, 다른 사람보다 그 방면에 특기나 월등한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때, 너는 은사를 어떻게 여겼느냐? 어떻게 대했느냐?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네가 스스로 자신의 특기, 은사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거나 네가 하는 본분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일단 네가 자신의 은사로 본분하고 자신의 특기로 본분하면서 쉬지 않고 하나님 집에 있으면서 본분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은 맞는 것이냐, 틀린 것이냐? (틀린 것입니다.) 어떻게 틀린 것이 되느냐? 그렇다면 은사와 특기가 있는 사람은 죄 있는 게 아니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 특기와 은사는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어떻게 활용해야 하느냐?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너희 중에 자신이 가진 특기나 우월한 것들을 단지 도구로 삼으면서 본분을 할 때에만 사용하고, 본분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언급하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지 못한다, 그렇지? 그것이 진리로 진입하는 방면에서의 결함이다. 일단 네가 자신의 특기에 빠져 살거나 자신의 특기와 은사를 특별히 잘 발휘할 때, 너에게는 어떤 정형이 있느냐? (으쓱해하며 좋아합니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느냐? 붕 뜨지는 않았느냐?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는데, 은사, 특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어떤 것인지 너희는 아느냐? 그런 경험이나 체험이 없느냐? (가장 큰 어려움은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실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한 방면이다. 또 없느냐? (자신의 은사와 특기를 내려놓기 아주 힘들어 합니다. 일이 닥쳤을 때, 그 사람의 관점과 견해는 다 은사와 특기로부터 생긴 것이고, 진리로 일을 대하거나 진리를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자신의 자본과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기 아주 힘들어합니다.) (은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진심 어린 기도를 하기가 아주 힘들고, 자기 자신을 믿고 일을 할 것입니다.) 다들 방금 말한 데서 어느 말이 비교적 적절한지 말해 보거라! 두 번째가 비교적 적절하지 않으냐? 특기나 은사가 있는 사람의 생각이나 방식, 의식은 진리와 서로 상반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다. 그런 사람은 ‘봐! 내가 얼마나 총명해! 내 선택이 얼마나 현명해! 내가 얼마나 현명한 결단을 했다구! 당신들은 다 나보다 못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늘 자아도취, 자아 만족의 정형 속에서 살다 보니 마음을 안정시키고 하나님의 요구가 어떤 것인지, 진리란 어떤 것인지, 진리의 원칙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가 아주 힘들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진입하기도 매우 힘들고, 진리의 실행 원칙을 찾거나 파악하기도 아주 힘들며,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거나 진리의 실제를 장악하기도 아주 힘들다. 그래서 그렇게 지내다가 궁리를 하고 생각을 하다 보면, 자신의 머리로 들어가고, 자신의 사고 속으로 빠져든다. 자신의 사고에 빠져서 생각하다 보면 흐뭇해하기 시작한다. 흐뭇해하다 보면 으쓱하기 시작하고, 으쓱하다 보면 날기 시작하고, 붕 뜨기 시작한다. 이런 것은 어떤 정형이냐?

은사나 특기는 같은 방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은사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특히 기술적인 면에 능하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들은 전기 기기 같은 것을 다루기 매우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전자 제품에 비교적 능통하다. 어떤 사람의 경우 컴퓨터를 켜고 안의 개발 프로그램이나 소프트웨어를 보기만 해도 아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고, 익히는 것도 매우 빠르고, 파악하는 것도 매우 빠르며, 기억하는 것도 매우 빠르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기억하거나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난데,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것이 특기가 아니냐?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 특기다. 어느 나라의 언어를 배우든 유난히 빠른 데다가, 기억력도 남다르다. 또 어떤 것에 능통한 사람들이 있지? 노래나 춤, 문학 예술 방면에 능한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속독 능력이 유달리 뛰어나 한눈에 10줄씩 읽어 내려간다. 또 어떤 것이 있지? 특기는 아주 많지 않으냐? 이발도 특기가 아니냐? (맞습니다.) 이발, 미용, 메이크업, 감독, 연기자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연출을 아주 잘한다. 어떤 방면의 특기든, 우리가 말하는 이 화제에 관련되는 것은 주로 어떤 것을 말하느냐? 왜 사람의 특기를 파헤쳐 볼까? 왜 그것을 말할까? 이것이 묵상해야 할 문제가 아니냐? 어떤 것을 그런 것으로 산다고 할까? 왜 그런 것으로 산다고 할까? (사람이 그것을 생명과 자본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한 방면이다. 생명으로 여기고, 자본으로 여긴다. 또 무엇으로 여기느냐? 밥줄, 삶의 가치, 삶의 추구 목표와 의의로 여기고, 심지어 처세나 진리를 추구하거나 하나님을 믿는 의의로 여긴다. 그것으로 살고, 그런 것들에 의존해 사는 데다가 그것을 자기 생명의 필요 불가결의 부분으로 여긴다. 이런 것이 이 화제에 관련된다. 어떤 사람들이 은사에 의존해 사느냐? 너희는 다 어떤 방면의 은사에 의존해 사느냐? (저 같은 경우,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들과 교제도 하고 소통도 하는데, 그 사람들과 더 가깝게 지낼 수 있고, 그들도 저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합니다.) 너는 그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됐느냐? 그것이 이 화제와 관계되느냐? (저는 언어가 저의 은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본분할 때, 은사로 사람들과 교제합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냐 아니면 좋지 않은 것이냐? (하나님의 교통을 들으니, 그것이 제가 진리의 원칙을 찾고 구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이제 그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고 그들과 그런 방식으로 교제하지도 않고, 그들이 네가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지금 너는 이 화제의 포인트가 무엇인지, 너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이것으로 살면 옳지 않은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은사로 살면서 옳지 못한 부분은 패괴 성정인데, 은사로 살면 왜 좋지 않은지, 좋은 부분은 어떤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저것 얘기하다 옳은 부분도 옳지 못한 것 같고, 옳지 못한 부분도 옳지 않은 것 같고, 어떻게 해도 옳지 못한 것 같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잘 모르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이 화제의 포인트를 너희는 잘 모르고 있다. (자신의 속셈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본분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고 자아 만족을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은 요점을 짚어 냈는데, 은사로 살면 왜 옳지 못한지를 말했다. 너는 그것이 너의 자본이라고 여기고, 또 너의 무엇이라고 여겼느냐?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그 원천이 잘못된 것이고, 그 의식이 잘못된 것이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이 은사로 할 때는 자신의 본분을 잘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며, 은사는 다만 도구, 수단,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단 말이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냐?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진리를 실행하면서 그것으로 살지 않을 수 있을까? 네가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의 은사로 자기의 재간과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냐? (은사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이렇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은사로 너의 본분을 잘하고 너의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이 요구한 효과를 이루고, 또 어떤 식으로 말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나님을 더 잘 증거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려는지를 더 잘 알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너의 은사와 네가 장악하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너의 본분을 잘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냐? (그것은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맞다. 그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지 않느냐? 너희는 자신의 특기나 은사나 능력, 재간을 과시할 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본분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 앞에서 으쓱하면서 좋아하고, 상대방이 이방인인데 너도 덩달아 이방인이 되어 자기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잊어버렸던 경우가 없느냐? (있습니다.) 그럼, 그런 경우 사람 마음의 정형은 어떤지 알고 있느냐? 방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며, 자제하지 못하고 가책도 없으며, 게다가 일을 할 때면 마음에 목표도, 원칙도 없어 이미 크리스천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품격과 품위를 잃은 것이다. 어떻게 변했느냐? 재주를 부리고 인격을 판 것이 되었다. 네가 본분을 할 때, 즉 너의 특기나 은사를 발휘할 때, 이런 정형이 많이 있지 않으냐? 혹은 이런 정형이 있을 때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느냐? 바로잡을 수 있느냐? 만약 네가 바로잡을 수 있다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만약 항상 그러하고, 재삼재사 장기적으로 그렇게 나간다면 너는 완전히 은사로 사는 사람이다. 그것은 어떤 진리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고, 진리를 티끌만큼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사람의 자제력은 무엇이냐? 사람의 자제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어디에 달렸느냐? 네가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에 달렸고, 네가 사악한 것이나 부정적인 것을 증오하는 정도에 달렸다.

또 한 가지 정형이 있다. 사람에게 특기가 있든, 은사가 있든, 혹은 어떤 기술을 갖췄거나 어떤 천성을 갖췄든, 그 사람은 일만 하고 힘만 쓰는데, 힘만 쓰면서 일을 할 때 관념이나 상상에 따라 했든, 혹은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했든, 그는 오직 힘만 쓰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경우가 전혀 없고, 어떤 개념이나 마음의 필요가 있어 ‘난 진리를 실행할 거야. 난 지금 진리를 실행하고 있어. 난 지금 본분을 하고 있어.’라고 할 때가 없다. 그 사람에게 유일한 사상의 출발점은 ‘난 이 일을 잘해야 돼. 이 일을 완성해야 돼. 이 임무를 완성해야 돼.’라는 것뿐이다. 그럼 이런 사람은 완전히 은사와 능력과 재간과 특기로 사는 사람이 아니냐?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힘만 쓰려고 하고 노동력과 자신의 기술만 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많다’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다! 왜 ‘많다’고 말하느냐? 그것은 실정이냐, 아니면 너희가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이냐? 네가 본 것에 근거해 예를 들어 말해 보아라.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본분을 잘하면 정말 기뻐하고, 본분을 잘하지 못했으면 마음이 아주 괴롭고 빚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빚졌다는 느낌은 본분을 잘하지 못해 체면과 지위를 잃었기 때문인 것이지, 본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해 할 것인지를 생각해서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힘만 들이는 것입니다.) 너무 가련하여 사람을 매우 슬프게 만든다. 그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정형이다. 특히 하나님 집에서 사무적인 일을 하나 맡기면 대부분은 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하는데, 힘만 쓴다. 왜 힘만 쓴다고 할까?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닌데, 그 뜻인즉 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입을 놀리고, 어떨 때는 손을 놀리고, 어떨 때는 체력을 쓰고, 어떨 때는 눈을 사용하고, 어떨 때는 두 발로 뛰어다니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왜 진리 실행이 아니라 그것으로 산다고 할까? 여기에는 차이가 하나 있는데, 진리 실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먼저 제쳐 두자. 그 사람에게 임무를 하나 맡겼는데, 임무를 받고 나서 그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임무를 완성해서 인솔자한테 칭찬받을 수 있을까? 그래야 할 말이 있는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하는데, 아마 계획을 하나하나 내놓을 수도 있고, 참답게 대하는 태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저 일에만 치우쳐서 그 일을 완성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에만 중시한다. 혹은 그 일을 할 때, 스스로에게 기준을 정하는데, 어떻게 하면 자신이 기뻐하고 만족할 정도가 될지, 자신이 추구하는 완벽한 정도로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어떤 기준을 정했든, 진리와 무관한 것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요구하고 말씀했는지를 깨닫고 확인하기 위해 찾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한 것이고 흐리멍덩하게 한 것이라면, 그런 것은 다 힘만 쓰는 것에 속한다. 그것이 바로 일방적인 소망과 자신의 머리, 은사나 재능, 재간에 의존해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일을 하고 나면 결과는 어떤 것이냐? 어쩌면 일은 완성했고, 별다른 흠을 잡는 사람도 없고, 본인도 아주 기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고, 둘째는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뜻을 다하지 않았으며,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네가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네가 진리의 원칙과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했다면 그 일이 90%는 달성되어 진리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고, 자신이 한 것이 하나님 뜻에 맞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네가 마음을 쓰지 않고 흐리멍덩하게 했다면, 그 임무는 완성했고 그 일도 끝냈지만, 너는 그 일을 한 것이 어떤지 스스로도 모르고, 기준도 없다.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했는지 아니면 맞지 않는지, 진리에 맞게 했는지 맞지 않는지 모르는데, 본인도 모르고, 기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형을 통틀어 무엇이라고 하느냐? 통틀어 ‘힘만 쓴다’라고 한다. ‘힘만 쓴다’는 것은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지금 보니 별로 좋지 않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도 않고, 마음을 진리 쪽으로 쓰지도 않고, 오로지 머리로 기억하고, 손만 쓰고 발로 뛰어다니면서 그 임무를 완성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임무를 완성한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한 것도 아니다. 그럼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는 것에는 기준이 있지 않으냐? 기준은 무엇이냐? 주 예수가 한 말씀이 있는데, 주 예수는 어떻게 말씀했느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신 한 방면의 요구이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탁을 주어 사람이 본분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고 추구하고 따르게 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요구와 기준을 주는데,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럼 사람은 갔는데 마음은 거기에 없고, 머리로 생각도 하고 기억도 했지만 마음은 들이지 않고, 그저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그 일을 마치고 해결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떤 기준에 도달해야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한 것일까? 어떤 기준에 도달해야 본분을 잘하고, 본분에 충성한 것일까? 방금 우리가 말했던 그 몇 가지 방면이다. 방금 말했던 그 몇 가지 방면에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은 무엇이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은 어느 것이냐?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는 것이다. 힘만 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한 것에서 가장 진리에 부합되는 것은 어떤 것이냐?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본분을 부탁하든, 어떤 일이나 업무를 부탁하든, 네가 힘만 들이고 발로 뛰어다니기만 하고, 힘만 쓰고, 일만 한다면 진리에 부합되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겠느냐? 진리의 원칙에 부합되게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겠느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한다’, 말은 하기 쉽다.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기도 한데, 그럼 어떻게 마음을 다해야 할까? 어려움이 있다, 그렇지? 그 어려움은 바로 마음을 다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럼 또 어떤 사람은 “그걸 왜 몰라요? 마음을 좀 많이 쓰고, 공을 좀 많이 들이고, 생각을 많이 하면 되죠! 속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그 일만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요?”라고 한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지금은 이것을 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실행 원칙만 말해 보자. 너희가 실행할 수 있는 것들, 평소에 실행해서 할 수 있는 것이나 늘 실행하고 준수하는 원칙에 따라 말해 보아라. 마음을 다하려면 첫 번째로 먼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 실행만 말해 보자.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우선 마음을 챙겨야 하고,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저 사람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다니냐고 물어 보는데, 잃어버렸다고 한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을 해도 무성의하고, 일 처리하는 걸 보면 항상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어서, 정상같이 보이지 않는데, 항상 꿈꾸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런 것이 바로 마음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마음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지 모른다. 맞지 않느냐?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알겠느냐?

한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무엇을 통해 보아야 하느냐? (그 사람이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교적 두리뭉실한 말이다. 엄마가 자녀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떤 표현들이 있느냐? 너희가 구체적인 표현을 말해 보아라. (자녀들을 매우 살뜰하게 보살핍니다.) 두리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 보아라. 나는 구체적인 것을 제일 듣기 좋아한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기를 낳았다. 너희는 어떤 엄마가 마음이 있고 어떤 엄마가 마음이 없는지 보아라. 아기를 낳은 후 엄마가 잠이 들면 그것도 7~8시간씩 잔다. 그리고 깨어나 봤더니 ‘애가 어디 갔지?’라고 한다. 애는 바닥에 떨어져 앙앙거리며 울고 있는 지도 한참 됐는데, 애 엄마는 모르고 있었다. 이 엄마에게는 마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마음이 없다. 그것은 확실하다. 방금 태어난 아기는 보살펴야 하고, 젖을 먹여야 하고, 조심스레 아껴야 하고, 품에 안고 있어야 한다. 엄마의 잠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럼, 그때 엄마가 졸린다면, 어떻게 잠을 자야 아기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냐? 하나는 아이가 눌리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아이가 배고프게 해서도 안 된다. 또 하나는 아이가 울면 엄마는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냐? 마음이 있다면 우선 ‘난 아이를 돌봐 주고, 사랑해 주고, 보호해 줄 거야. 아이를 배고프게 해서도 안 되고, 울려도 안 되고, 바닥에 떨어지게 해서도 안 돼. 난 아이를 보호해야 해. 내 생명으로 보호해야 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엄마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에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잠이 아니다. 마음이 있는 엄마가 졸려서 자고 싶다면, 어떻게 자야 하겠느냐? (아기 곁에서 잘 것입니다.) 그럼 아이를 어디에 놓아야 하느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가 어떻게 자느냐가 아니라, 아이를 어디에 놓느냐 하는 것이다. (품에 안아야 합니다.) 품에 안거나 아이를 안쪽에 두어야 한다. 벽과 침대로 둘러싸고, 사방이 다 막혀 있으면 늑대도 물어가지 못하고, 돼지도 물어가지 못하고, 게다가 바닥에 떨어질 일도 없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안전한 것이다. 아이가 자는 공간도 충분히 큰 데다가 편하게 잘 수 있고, 애가 울기라도 하면 엄마는 언제든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엄마가 가장자리에서 막고 있으니, 늑대나 개나 돼지, 혹은 다른 사람이 들어와 아이를 안고 가려고 해도 안고 갈 수 없다. 데려가려면 반드시 엄마를 거쳐야 한다. 그 엄마는 세심하게 생각하지 않았느냐? 그 세심함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마음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럼 그 엄마는 어떻게 자야 할까? 우선 그 엄마는 바깥쪽에 자고, 아기는 안쪽에 재워야 한다. 그리고 아기가 깊이 잠든 틈을 타 얼른 눈을 붙여야 한다. 잠깐 눈을 붙일 때에도 마음으로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 있으면 표현이 있어야지, 입만 놀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표현이 있겠느냐? ‘애가 마침 자고 있고, 나도 너무 졸리니, 얼른 자야겠어.’라고 하면서 아이를 내려놓고, 잘 싸 주고,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얼른 눈을 붙인다. 10분, 20분 자다가 놀라서 갑자기 깨어났다. 깜짝 놀라서 보니 “휴, 애가 있네.”라고 한다. 눈을 뜨자마자 아기부터 봐야 한다. 애가 울지는 않았나? 잘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자고 있으니, 놀라게 하지 말고, 아이가 깊이 잠든 사이에 나도 얼른 눈을 붙여야겠어.’라고 한다. 눈을 붙이는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기운을 차리고 체력을 회복해 아기를 더 잘 보살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 엄마가 자거나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마음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 엄마는 이미 마음을 다한 것이다. 그 엄마에게 마음이 있는 표현에 세부적인 것이 있지 않느냐? 그 세부적인 것들은 어떤 것이냐? 사랑해 주고, 보살펴 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마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부분의 내용이 있다. 어찌 ‘나한테 애가 있으니 기쁘다’라고 하는 마음뿐이겠느냐? 그런 마음은 쓸데없다. 그럼 가장 중요한 마음은 어떤 것이냐?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고,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에 내용이 있어야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내용이 없으면 아기가 바닥에 떨어질 수 있다. 애를 낳고는 침대 가장 자리에 ‘툭’ 내려놓고는 ‘됐어! 널 낳아 줬으니, 내 임무는 완성이야. 네가 먹든지, 마시든지, 자든지 나랑 상관없어. 난 너무 졸려서 먼저 자야겠어. 그리고 널 끝에 둘 테니까, 네가 날 방해하면 바닥에 떨어질 거야. 네가 날 잘 자게 하면 내가 깨어나서 젖을 주겠지만 날 제대로 못 자게 하면, 널 버릴 거야!’라고 한다면, 어떤 엄마냐? 차라리 어미 늑대보다 못하다! 그런 엄마에게 마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런 엄마는 좋으냐? (나쁩니다.) 그런 엄마가 왜 나쁘냐?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다. 먼저 그런 엄마는 일에 책임감이 없고,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없다. 또 무엇이 없느냐? 자식을 보호하는 마음도 없다. 그런 엄마에게 마음이 없으니 그런 세부적인 것들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두고 걱정하며 보호하고 게다가 아끼고 보살피는 그런 내용들이 없는 것이다.

본분을 하면서 어떤 것을 마음이 있다고 하는지에 대해 방금 말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예를 통해 깨달았겠지? 자세하게 말해, 마음을 다한다고 하면 먼저 무엇부터 생각해야 하겠느냐? 이런 것은 입을 열면 바로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 (책임입니다.) 먼저 책임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내 책임이니 내가 짊어져야 해. 전투를 앞두고 도망갈 순 없어’, 또 그리고 ‘나는 이걸 잘해서 하나님께 제대로 된 걸 드려야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기초는 있게 되었다. 그럼 이론적인 기초가 있는 것만으로 마음을 다한 것이 될까? 아직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마음을 다하는 실행 방면의 하나님 요구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럼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지 말해 보아라. 이런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겠느냐? 너희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마음은 다 있고 심장도 달려 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의 ‘마음’은 있느냐?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할 수 있겠느냐? 마음을 다하려면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내가 이 본분을 받아들이고 이 본분을 하는데,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가? 누구에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먼저 이 부분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누가 내게 부탁했지? 어떤 사람인가? 어떤 단체인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너에게 부탁한 것이냐?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매번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선 ‘이 일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거야. 난 하나님을 마주해 본분을 하고 있는 거야. 나 자신에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 해 주는 것도 아니라, 내가 해야 할 피조물의 본분을 하는 거야. 이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부탁이야.’라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 준 것은 맞는데,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부탁했을까? 그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에 관련되지 않겠느냐? 먼저 진리부터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진리를 찾고 구하되,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그 본분에 대한 요구는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기준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원칙은 어떤 것인지, 하나님 말씀에서는 어떻게 말씀했는지 하는 것들을 찾고 구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말씀해 놓은 것이 있고 네가 마음을 다할 수도 있다면, 그때 너는 마음으로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하겠느냐? 어떤 방향으로 실행해야 하겠느냐? 그것에 표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 그럴 때, 너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마땅히 먼저 그 방면에 관한 하나님의 요구를 찾아야 한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면, 마음을 다해 하고, 진행하는 과정에는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그리고 진리를 좀 깨달은 사람과 교통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또 있느냐?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너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구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지만, 일이 임했을 때 그 일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나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다른 부분이 있고, 차이 나는 부분이 생긴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다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을 보면 그런 일이 왔을 때, ‘그런 걸 신경 써서 뭐해? 아무튼 나한테 맡겼잖아, 나한테 맡겼으면 책임도 나한테 있고, 주도권도 나한테 있어. 나한테 맡겼으면 내 의사대로 결정해야 돼. 내 의사대로 한다고 해도 마음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네가 내 결함을 찾아낼 수 있겠어? 나한테 맡겼으면, 전권은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거야.’라고 한다. 그러고는 자기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궁리하면서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 비록 나중에 일은 완성했지만, 그런 실행법, 그런 정형은 옳은 것이냐? 하나님이 마음을 다하라고 했으면, 그 마음을 어떻게 다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다해야 마음을 다하는 원칙에 맞게 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내가 마음을 다하려면 주도권은 내 손에 있는 거야.’라고 한다면, 그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냐? 그것이 어떤 착오를 범한 것인지 알고 있느냐? 교만하여 독단전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분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것도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람의 경영을 하는 것이지, 본분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뜻대로 자신이 만족하는 일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이 화제를 이만큼 교통하면 거의 다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교통하면 너희들이 따라올 수 있느냐? (네.) 따라올 수 있구나. 너희는 주로 어떤 것을 들었느냐? 진리와 연관시킬 수 있느냐? 이해할 수 있느냐?

방금 특기와 은사에 대해 말했는데, 특기와 은사에 지식이 포함되느냐? (포함됩니다.) 관념은 포함되느냐? (포함되지 않습니다.) 지식은 특기와 차이가 있느냐? 특기는 한 가지 남다른 재간인데, 아마 남보다 뛰어난 부분일 수도 있고, 아마 너의 재간이나 너의 소질에서 비교적 두드러지는 부분일 수도 있고, 네가 가장 잘하는 것이나 네가 확실하고 완벽하게 익힌 어떤 기술일 수도 있다. 그런 걸 다 특기나 은사라고 한다. 너희들이 방금 지식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했는데, 지식이 이 범주에 속하느냐? 지식을 더 광범위하고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떤 것이냐? 만일 한 사람이 지식인이라고 하자, 그에게 특기가 있느냐? 너는 모르고 있다. 그 사람은 무엇에 가장 능하냐? 너는 그것도 모른다. 그럼 지식은 도대체 뭘 가리킬까? 내가 너희에게 지식은 은사와 특기에 포함되냐고 물었을 때, 너희는 ‘그렇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방금 내가 물은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만약 어떤 지식인이 있는데, 지식이 정말 많고, 공부도 많이 했고, 많은 명저도 읽어 봤으며, 어떤 분야나 어떤 지식에 대해 특별히 연구하여 성과도 있고, 매우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다고 하자. 이러면 특기와 은사와 상관이 있느냐? 우리가 방금 말했던 특기와 은사는 주로 뭘 말하느냐? (어떤 남다른 재간입니다.) 두드러지는 것은 남다른 재간, 능력, 기술면이다. 그럼 지금 보면 지식이 특기 범위에 들어갈 수 있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특기로 사역한다고 하자. 아마 그 사람은 지식도 별로 없는 배우지 못한 농부이고, 학교도 많이 다니지 못했고, 어떤 명저도 읽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성경의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지식이 없는 사람이다. 즉, 그 사람은 학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머리가 유달리 좋고, 소질이 좀 뛰어나고, 화술이 유창해 죽은 것도 산 것처럼 만들 수 있는 좋은 언변이 있다. 그것은 특기가 아니냐? 그 사람에게 지식은 없지만 그런 특기가 있다. 그럼 지식을 특기라고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식은 도대체 뭘 가리킬까? 정의를 내려 보자.

우리 이렇게 말해 보자. 그럼 이 화제에 대해 아마 더 알기 쉬울 것이다. 만약 배운 사람이 있는데, 교육 분야를 전공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교육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추지 않았겠느냐? 아동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청소년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식을 어떻게 전수해 줘야 하는지, 어떤 지식들을 전수해 줄 것인지, 이런 방면의 지식을 갖췄다면, 그 사람은 그 방면의 지식인이 아니겠느냐? 그럼, 그 사람은 그 지식 방면의 인재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네.) 그럼 이것으로 예를 들어 보자. 그 사람이 교육계에서 몸담았던 지식인이었을 경우, 그런 사람이 사역을 하거나 교회를 인솔한다면 통상적으로 어떻게 할까? 관용적인 방식은 어떤 것일까? 누구와 말을 해도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 같고, 선생님이 학생에게 말하는 것 같지 않겠느냐? 말투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수해 주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런 지식을 갖췄고, 그런 지식 속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었기에, 그런 지식이 기본적으로 그 사람 생명의 일부분이 되었고, 심지어 그 사람의 처세나 삶의 모든 곳에서 그런 분야의 지식이 갖춰져 있다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사람이 살아낸 것에 그 사람이 배운 지식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흔히 보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사역을 하면 늘 무엇으로 할까? 배운 지식으로 한다. 그렇지? 예를 들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보는 법을 알려 준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저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있어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줄 모르는데, 진리가 뭔지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나님의 말씀도 볼 줄 모르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라고 하자, 그 사람이 나서서 “자! 제가 알아요. 제가 지식이 있으니 도와 드리죠. 이 말씀을 펼쳐요, 이 말씀은 모두 네 단락으로 나뉘네요. 보통 서술문일 경우는 육하원칙에 따르죠. 어떤 6가지일까요? 시간, 장소, 인물, 사건 원인, 전개 과정, 결과예요. 이 말씀을 보세요. 시간을 보면, 앞에는 없고, 끝에는 2011년 10월이라고 있는데, 구체적인 날짜는 없네요. 이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발표하신 시간이에요. 이게 첫 번째 요소예요. 인물은, 하나님 말씀에 ‘나’라고 하셨으니, 그럼 첫 번째 인물은 바로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또 ‘너희들’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럼 이건 우리죠.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사람의 정형을 좀 지적하셨네요. 일부 사람들을 패역하고 교만하다고 지적하셨는데, 그건 바로 그런 교만하고 패역한 사람, 실제 사역을 하지 않는 사람, 말썽을 부리는 사람, 나쁜 사람, 악인들을 가리키는 거죠. 전개 과정은 바로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거죠.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은 기타 부분이에요.”라고 말한다. 이런 사역 방식은 어떻느냐? 그 사람이 사랑으로 타인을 도와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사람은 다 어디에 근거해서 한 것이냐? (지식입니다.) 당연히 내가 든 이런 예는 아마 없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볼 때 시간, 장소, 인물, 사건의 원인과 과정, 결과에 따라 봐야 한다고 알려 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말을 하겠느냐? 이렇게 말하면 사람은 지식이 어떤 것인지를 더 똑똑히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볼 줄 모른다. 하지만 공부를 한 사람이다. 아마 학창 시절에 문과 계열을 잘 배웠을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을 한 편 보고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발표를 너무 잘하셨어! 첫 단락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단도직입적으로 하셨네.”라고 한다. 이것 보아라, 지식이 등장하지 않았느냐? “두 번째 단락은 말씀에 위엄과 진노를 띠셨어. 세 번째 단락에서는 구체적이고 명백하게 드러내셨어.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지. 네 번째 단락은 사람에게 실행의 길을 요약해 주고 총결해 주셨어. 하나님 말씀은 완벽하고도 아름다워!”라고 한다. 이런 것은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니겠느냐? 비록 내가 든 이 예처럼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수도 있고, 좀 규례적인 것 같지만, 이것을 통해 너희들에게 뭘 알려 주는 것일까? 바로 사람이 지식을 응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추태가 너무도 역겹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지식으로 보는데, 일은 진리로 할 수 있겠느냐? 절대로 하지 못한다. 그럼 그런 사람이 일을 하는 특징은 어떤 것일까? 먼저 그 사람의 우월한 부분으로 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의 우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사람은 지식이 있고 학식이 있고 지식 분야에서 종사한 적이 있는 지식인이다. 지식인들이 일을 하면 지식인의 품위와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일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스타일을 가진다. ‘스타일’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풍격을 말합니다.) 어떤 풍격, 어떤 모습, 혹은 어떤 패턴이나 자세? 어쨌든 어떤 폼을 잡는 것이 있다. 스타들을 보면, 어딜 가나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고, 선글라스를 쓰고, 뭘 하든 다 그렇게 과장하고, 말투마저도 거만하다. 지식인들은 어떠하냐? 겉모습은 문약해 보이지만 속은 그렇게 문약하지 않다. 어떤 일에서든 항상 본인만의 관점이 있다. 녹음설비 하나를 봐도 ‘어? 이걸로 녹음을 할 수 있다고? 어떻게 하는 거지? 연구해 보자. 인터넷 검색도 하고 책도 뒤져 보자. 내가 그동안 공부를 얼마나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모르는 게 알려지면 안 되지. 내가 공부한 걸 바탕으로 이거 하나 배우는 거야 쉽지. 이 물건 본 적 있어. 어느 잡지에 실린 적도 있고, 어느 교재에도 있어. 이런 건 다 쉽지.’라고 한다. 보아라, 그 사람은 어떤 일에서든 다 자신을 과시한 다음 잔머리를 굴려 가면서 지식의 관점과 태도와 사고 패턴으로 그 일을 분석하고 대하려고 한다. 진리가 그 사람에게는 그냥 부차적인 것이고, 매우 부가적인 것이고, 진입하기 매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진리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할까?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떨까? 가져다 먼저 분석한다. 무엇을 근거로 분석할까? 바로 지식이다.

우리, 영화 감독을 예로 들어 보자, 그것은 한 가지 학문이다. 그럼 영화 감독을 전공한 사람은 영화 감독 분야의 지식을 갖추었겠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 방면의 지식이지 그것을 상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네가 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있거나 실제로 배웠거나 그런 분야에서 일을 했었다고 하자. 어찌 되었든, 네가 그 부분의 지식을 장악했다면, 너는 그 부분의 지식을 갖춘 사람이다. 그럼 그 부분의 지식을 갖춘 사람이면 하나님 집의 영화 사역을 무조건 잘할 수 있을까? 이것 봐라, 현실적인 문제가 나왔다. 우리, 그냥 이 살아 있는 예로 이야기를 해 보자. 여기에는 비판이 없고 오로지 정형과 문제를 상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알기 위한 것이다. 감독을 배운 사람은 감독 분야의 지식을 배웠는데, 배운 지식이 깊든 얕든, 이방인 가운데서 영화감독을 한다면, 배운 분야의 지식이나 감독의 경험이 매우 유용하고, 매우 가치가 있을 것이다. 거기다 그 분야에서 터득력이 있고, 그 부분에서 특기가 있는 사람이면, 좋은 감독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이방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다. 배운 지식은 종사하는 분야를 놓고 말하면 유익무해하다. 왜냐하면 그 방면의 지식은 그 사람이 종사하는 일을 규범화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일을 더 잘하고, 더 세련되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감독이라는 분야에 어긋나는 일이나 작업은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네가 만약 그 방면의 지식을 갖추었다면 하나님 집의 영화 사역을 꼭 잘할 수 있느냐?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들 고개를 젓는데,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보아하니 너희도 그 방면에서 체험이 좀 있는 것 같구나. 그럼 여기에 존재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네가 그 방면의 지식을 갖추었다고 하나님 집에서 요구하는 영화 촬영의 원칙과 요구 기준이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를 이루려는 것과 꼭 일치하게 할 수 있느냐? 모를 일이지? 네가 하나님 집의 영화를 촬영할 때, 책에서는 영화감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감독 분야의 지식에서는 어떻게 규정하고 있고, 어떻게 요구했다는 것만 한결같이 강조한다고 하자. 그런 것만 계속 강조하면 너는 그 본분을 잘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 조정시켜야 할까? 그럴 때, 어떻게 조정시켜야 할까? 뭘 가지고 조정이 잘 되게 할 수 있을까? 네가 감독의 일을 규범화도 할 수 있고, 네가 감독한 영상들을 봤을 때에도 네가 그 일에서는 전문가라는 인상을 주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 집의 사람들이 보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으로 봤을 때에도 그 영상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지, 감독의 업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고 감독의 지식으로 본분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잘 조정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어떻게 잘 조정시킬지가 문제 아니냐? 상충하는 부분이 있지 않으냐? 진리의 원칙과 그 방면의 지식이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그럼 상충하는 부분을 너는 무엇으로 해결했느냐? 최종적으로 너는 너의 지식이 진리 원칙을 이기게 만들었느냐, 진리의 원칙이 너의 지식을 이기게 만들었느냐? 최종에 어느 쪽이 남게 되었느냐? 너희는 너희가 촬영한 장면 하나, 컷 하나, 제작한 모든 작품에 너희 개인의 지식적인 요소가 섞여 있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섞여 있고, 완전히 하나님 집의 요구 기준대로 했거나, 또는 그 부분의 지식과 상충하거나 부합되지 않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다음, 하나님 집의 요구 기준에 따라 했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이런 상황이 틀림없이 많았을 텐데, 너희는 어떻게 처리했느냐? 실제 체험이 있느냐? 생각해 보거라.

너희가 생각하는 동안, 우리, 이런 문제도 생각해 보자. 지식은 도대체 뭐가 나쁠까? 도대체 어떤 지식이 진리에 어긋날까? 이것을 알고 있느냐? 지식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이런 힌트를 주겠다. 사람은 배운 지식이 많을수록 더 경건해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더 많아지느냐, 아니면 더 거만해지느냐? (더욱 거만해집니다.) 지식을 많이 배우면 사람은 복잡해지고 교조적이고 거만해진다. 하지만 또 한 가지가 있는데, 사람은 아마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 지식을 많이 장악하게 되면 내면이 어지러워지는데, 뒤죽박죽, 엉망진창에 원칙이 없게 된다. 네가 많이 장악할수록 엉망이 된다.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인생의 가치와 의의에 대한 답을 지식에서 찾을 수 있느냐? 사람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결론을 지식에서 찾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영원히 있을 수 없다. 지식이 네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너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였다는 것을 알려 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그렇지? 그럼 지식으로 연구하는 것이나 너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들이냐?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무신론에 속한 것,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지식은 사람에게 어떤 것들을 주입하느냐? 우선은 사상과 머리에 속한 것들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대답이다. 즉, 어떤 일이든 다 머리의 상상에서 온다는 것인데, ‘전구는 어디서 왔을까?’ 이렇게 상상하며 연구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볼 수 있는 한 가지 지식인 것이다. 지식이 너에게 주입하는 것은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철학과 기술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상식입니다.) 또 무엇이 있느냐?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럼 천둥 번개는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아는 사람이 있느냐? 지금 기후의 변화나 이상 현상에 대한 것을 지식이 알려 준 적이 있느냐?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지식은 만물의 근원적인 문제를 너에게 알려 주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은 해결할 수 없다고 한다. 지식은 너에게 사계절이 왜 바뀌는지 알려 준 적이 없다. 그렇지? 사람이 왜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꿈을 꾸면서 몽유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상적인 현상인데, 그것도 알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이 죽었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났을까?’라고 하는데, 지식이 알려 주었느냐? (알려 주지 못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에게 또 무엇을 알려 주었느냐? 지식은 사람에게 아주 많은 규칙과 규례를 알려 주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그 지식은 어떻게 왔느냐? 전통문화로 교육받은 것이다. 그렇지? 공경하는 것도 한 방면의 지식이다. 그럼 이런 지식들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냐? (멍에입니다.) 멍에는 확실한 것이다. 지식의 실질은 무엇이냐? 큰길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마다 다 지식이 있다. 특히 이 세상의 정말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책, 명저들을 읽어 보았는데, 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다. 혹은 어떤 전문 지식 분야에 종사했거나 그것을 공부했거나 전공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길에서 방향이나 목표가 있느냐? 사람됨의 최저선과 원칙이 있느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 경배하는 법을 아느냐? (모릅니다.) 좀 더 나아가, 그들은 어떤 진리든 하나라도 깨닫고 있느냐? (모릅니다.) 그럼 지식이란 무엇일까? 지식은 사람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주었느냐?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에게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이 말로 네가 한 말을 반박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지식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어떤 것이냐? 이런 식으로 말해 보자.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지식이 없었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순했었느냐, 아니면 사람에게 지식이 있게 된 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순해졌느냐? 너희가 말해 보거라. (지식이 없었을 때입니다.) 그럼 그것은 어떤 문제를 설명하고 있느냐? (지식은 사람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지식은 사람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지식은 사람의 정상 인성을 더욱 결핍되게 만든다. 지식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럼 그 결과는 어떤 것이냐? 사람은 지식을 배울수록 하나님과 더 멀어지고, 진리를 더 부인하게 되며, 갈수록 더 극단적이고 완고해지며 더 그릇되게 된다.

조금 전에 우리 어디까지 교통했느냐? (‘지식과 진리의 원칙이 상충할 때, 어떻게 잘 조정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 문제는 어떤 것에 관련되었느냐? 우리는 감독을 놓고 구체적으로 예를 들었다. 네가 알고 있는 감독 방면의 지식과 진리의 원칙이 상충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은 “그야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면 되죠. 어려울 게 뭐 있어요? 내려놓지 못할 게 뭐 있어요?”라고 도리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어떨 때, 만약 사람이 머리로 분석하거나 이치를 따지거나 시비곡절을 따지고, 혹은 그 사람이 매우 완고할 경우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도리적으로는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면 되죠. 그게 뭐가 어려워서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진리 원칙은 옳은 것이고 지식은 틀림없이 진리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고, 그 둘이 상충할 때는 반드시 먼저 진리 원칙에 따라 하면서 지식은 포기해야 한다는 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할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실행할 때 어려운 점은 어떤 것이 있느냐? 어떻게 실행해야만 진리 원칙에 따라 일 처리를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냐?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먼저는 순복해야 하지 않겠느냐? 어떨 때는 사람에게 패괴 성정이 있다 보니 ‘나보고 순복하라고? 이게 바늘구멍에 코끼리 몰아넣는 거 아니야? 그렇게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는데? 난 순복하지 못해.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도 적합하지 않잖아. 내 제안이 뭐가 안 좋아서? 내가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데?’라고 한다. 순복이 안 되지?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패역 성정이 꿈틀거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가 있다. 기도를 하고 나면 좀 나아지긴 한다. 태도도 좀 좋아지고, 마음 상태도 좀 좋아지고, 정형도 조금 바로잡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방면의 원칙을 철저히 깨닫지 못하고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너의 순복은 아마 형식적인 것일 뿐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인데, 그 방면의 진리를 찾고 구하면서 이렇게 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지, 하나님 집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것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너는 이런 것을 터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네가 본분을 하면서 어떻게 하든, 어떤 본분을 하든,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것과 본분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1순위인데, 언제든 소홀히 하지 말고, 여지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이럴 때 네가 여지를 남긴다면, 진정으로 본분하는 것이겠느냐? 그렇게 되면 그 본분은 뭐가 되었느냐? (악행을 한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렇게 큰 딱지를 붙일 수 없다. (원칙이 없는 것입니다.) 원칙이 없는 것은 한 방면이다. 그것은 본분을 하는 게 아니고 진리를 실행하는 게 아닌 것이 되었다. 더 심각하면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것은 네가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인데, 자신의 일을 한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너의 본분을 하여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준 본분을 완성하려면,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있어야 할 것, 사람이 실행해야 할 진리와 알아야 할 진리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하는 것이다. 너에게는 이런 이상(異象)이 있어야 한다. 네가 그 일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네 자신의 경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네 자신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을 증거하거나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자신의 명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목표는 이것이 아니다. 그러면 너희는 이런 일이 임했을 때, 이렇게 실행할 때가 많으냐? 그 고비를 쉽게 넘어갈 수 있느냐? 쉽지 않다. 그렇지? 그럼 여기에서 ‘쉽지 않다’, ‘못한다’는 것은 완전히 전혀 못한다는 것이냐, 아니면 상대적으로 그래도 조금은 가능성이 있고, 개인의 뜻은 조금 섞여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더 변화되고 상황이 갈수록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냐? 어떤 상황이냐? (두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점차적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변화되는 과정에서 갈수록 좋아졌다고 느끼느냐, 아니면 계속 이 같은 상황이라고 느끼느냐? 계속 절반은 자기 뜻대로 하고, 나머지는 진리 원칙에 따라 좀 절충시키고 마는 식으로, 반반으로 하는 것이냐? 조금이나마 발전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계산해 본 적이 없느냐? 자세한 내용이 없느냐? 보아하니, 너희들은 이 방면의 진입에서 아주 흐리멍덩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 그것은 네가 그런 일을 할 때, 네 속의 정형 그리고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길에서 더 깊고 더 진실한 체험은 없고, 그냥 계속 조정시켜 가면서, 절충하고 자신을 양보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 결코 완전히 순복하여 절대적으로 진리 원칙에 따라 일 처리하는 쪽으로 자신에게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일까? 위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느냐? (존재합니다.) 어떤 위험이 존재하느냐? (자신의 지식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일을 하면 위험한 것이냐? 그런데 난 지금까지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지식으로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일을 해 왔어도 어떤 위험이 있는지 보지 못했다. 보아하니, 너희는 아직까지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위험이 존재하는지 깨닫지 못했구나. 거기에는 결과가 있는데, 그 결과가 사람에게 위험을 가져다준다. 어떤 위험인지 알고 있느냐? 너희들이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너희는 지금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는 것과 이방 세계에서 돈벌이를 하거나 사업을 벌이는 것과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느냐? 마음속에서 분명히 의식하고 있느냐? 이 문제에 대해 자주 고려하거나 묵상한 적이 있느냐? 가장 큰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는 것은 진리를 얻고 사탄의 패괴 성정이 변화되기 위해서이고, 세상에서 돈벌이를 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입니다.) 거의 가깝게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면 진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로 사는 의의는 무엇이냐? 사람 편에서는 성정이 변화되어 마지막에 구원받게 된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이 너를 얻게 되는 것인데, 너라는 피조물을 얻게 되고, 너를 하나님이 지은 자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 세계에서 돈벌이를 하면 이것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거기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느냐? (사탄의 철학으로 삽니다.) 사탄 철학으로 사는 것을 통칭하여 사탄의 패괴 성정으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 네가 명리를 위해서든, 지위를 위해서든, 돈을 위해서든, 생계 유지를 위해서든, 다 패괴 성정으로 사는 것이다. 이득을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써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너는 다른 사람보다 잘살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모자라면 너는 다른 사람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경쟁, 싸움, 강탈, 악독, 흉악, 사살하는 것으로 산다. 이런 것들에 의지한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것 중에 네가 본분을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독하고 사납고 뛰어난 언변 능력과 은사가 있고 지식 수준이 높거나 나이가 많고 자본이 있거나 잘 생기고, 연기력이 좋다 하여 버틴 사람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차이점이다.

방금 또 다른 한 방면, 지식에 근거하는 방면에 대해 교통했다. 지식으로 살 때 사람은 어떤 정형에 있는지 아느냐? 가장 절실한 체험은 어떤 것이 있느냐? 지식인이 세상에서 살면서 개인의 이해득실만 따진다는 느낌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 살면 어떠냐? 그런 느낌이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어느 한 방면의 지식을 배우게 되면, 너는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데, 지식이 너를 잡아 두고, 너를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보아라, 네가 그런 것들을 접하지 않을 때는 그나마 괜찮은데, 일단 네가 배운 그런 지식들을 접하게 될 때, 그 환경이 임하게 되면 너의 그런 지식들이 바로 나오는데, 그런 것들이 이미 네 안에 주입된 것이다. 철근 콘크리트처럼 한데 굳어져서 떼려야 뗄 수가 없고, 철근을 뽑아내도 흔적이 남아 있고, 지울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 것을 배웠더니 더 나쁘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우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그러니까, 어떤 방면의 지식은 배우지 않기보다 못하다는 것인데, 배우고 나면 바로 짐이 되고 폐가 된다. 방금도 말했다시피, 지식에는 여러 방면이 포함되는데, 교육 방면의 것, 과학 방면의 것, 물질 방면의 것, 그리고 철학, 논리학, 법률 이런 무형의 것들, 게다가 수학, 생물학 방면의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식, 사람들이 늘 말하는 지식은 무엇이냐? 바로 상대적으로 사람의 사상을 침식시키고, 사람의 사상을 부식시키고, 사람의 사상을 변질시킬 수 있는 이런 것들이다. 예를 들면, 사람에게 어떤 교육을 시키는 것인데, 대를 이어야 한다든지,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든지, 가문을 빛내야 한다든지 등의 이런 것은 다 전통문화 교육이다. 이런 지식 이외에 신학 이론 지식들도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목사로 지냈거나 설교자로 지냈거나 신학을 나왔는데, 그런 지식을 배움으로 하여 그에게는 무엇이 되었느냐? 복이 되었느냐, 화가 되었느냐? (화입니다.) 어떻게 화가 될 수 있느냐? 그가 입을 열지 않으면 괜찮을 텐데, 입만 열면 종교 도리이고 항상 바리새인의 방식을 강의하려고 하고, 항상 남에게 바리새인의 방식을 주입시켜서 진리를 알지 못하게 만들려고 한다. 신학 지식 방면은 주로 어디에 핵심을 두고 강의하느냐? 신학 이론이다. 그렇지? 신학 이론에서 두드러지는 지식은 어떤 것이냐? 바로 네가 매우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너에게 주입시키는 것인데, 너는 이번 단계 사역과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듣고도 아마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것이 옳다고 여기게 되고, 그것이 바리새인이 이론적인 강의로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임을 분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너희들이 만약 지식으로 살면서 지식이 있는 그런 정형 속에 살고 있다면, 지식에 근거해 살면서 본분하거나 일을 하고 처세할 것이고, 심지어 사람과 교통하거나 가끔 좋은 마음으로 어떤 소극적인 사람과 연약한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을 도와주게 될 것이다. 네가 지식에 근거해 이런 일들을 하고 있을 때, 본인은 알고 있느냐? 의식할 수 있느냐? 느낌이 있느냐? 네 안에 정형이 어떤지 스스로 분명하게 알고 있느냐?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형인지, 어떤 생각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예를 들면, 다른 사람과 교통할 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의존해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형제자매가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거나 다른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할 때, 저는 중용의 길을 택하는 방법으로 서로를 화해시켜 주고, 어떤 때는 마음을 넓게 먹으라고 권하거나 스스로 총결해 낸 경험과 규례 같은 것을 다른 사람의 체험에 맞춰서 그렇게 하라고 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서 제가 한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되는지는 찾고 구해 보지 않았고, 상대방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려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효과를 보았느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식 방면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 몇 가지 방면을 교통했지? 두 가지 방면, 은사와 지식 방면을 교통했다.

또 한 방면을 말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부터 지금까지 무엇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인지, 무엇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모르고 있다. 그 사람은 계속 집착하고 있는 어떤 것이나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존해 지키고 또 그렇게 해 왔는데, 그런 식으로 마지막까지 견지하면 살아남을 것이고, 살아남으면 바로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그것을 위해 고생도 할 수 있고, 가정도, 사업도 버릴 수 있다. 직장을 포기하고 가정을 포기하고 자녀를 포기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한 다음, 자기 스스로 일부 규례들을 총결하여 진리로 삼아 실행한다. 예를 들면, 누구에게 어려움이 있거나 누구의 집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을 보게 되면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어려움을 묻고 관심을 베풀고 배려해 준다. 또 어디에 더러운 일이 있든, 힘든 일이 있든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데, 더러운 티도, 힘든 티도 내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과 지내면서도 다투지 않고, 최대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 평화롭고 화목하게 지내면서 따지지도 않으며, 사람을 선대하고 양보하면서 자신과 접촉했던 사람들이 다 자기를 좋은 사람이고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한다. 하나님을 대하는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고, 가라는 대로 가고, 반항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으로 살고 있는 것이냐? (열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열심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맞다고 생각하는 신념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순복이란 무엇인지, 진리 실행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진리의 원칙이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모르고 있다. 심지어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살면서, 이렇게 하고, 계속 따르면서, 어떤 말씀을 교통해 주시든 난 나만의 이 방식을 고수할 거야. 하나님께서 날 어떻게 대하시든 포기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어떤 본분을 맡겨도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교통도 적지 않게 들었지만, 어떤 방면의 진리도 깨달은 것이 없고, 순복에 관한 진리도 실행할 줄 모르고, 인식조차도 하지 못했고, 진솔한 사람이 되는 진리도 깨닫지 못했으며, 충심으로 본분하는 진리도 깨닫지 못했고, 대충대충 한다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도 깨닫지 못했고, 자신에게 거짓말이 있는지도 모르고, 본인이 궤사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있다.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그럼 너희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이 많으냐?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다고? 그럼 큰일 났구나! 순복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 그저 적자지심(赤子之心)으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적(赤)’은 적색, 붉은색이다. 붉은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러니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진솔하다는 것이냐? 하늘과 땅이 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너는 모르고 볼 수 없어도 하나님이 알고 있고, 하늘이 알고 있고, 땅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정도로 붉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평범한 인간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순결’하다는 것이다. 왜 적자지심이라고 할까? 그 사람에게 어떤 정서가 있고, 어떤 감정이 있는데, 그 사람 혼자만의 감정이나 일방적인 소원으로 크리스천이 해야 할 것을 이해하고, 본분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또 그런 감정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끼워 맞춰서 적용시킨다. 그런 사람은 ‘사실, 하나님은 사람이 뭘 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으셔. 혹은 사람이 얼마나 큰 능력을 갖고 있거나 진리를 많이 깨닫는 것을 원치 않으셔. 적자지심 하나만 있으면 돼.’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게 얼마나 간단해. 한결같이 이렇게 하면 돼.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끊임없이 패역이 나오고, 끊임없이 배반하며, 끊임없이 저항하고, 관념도 많아. 난 어떻게 해도 다 돼!’라고 생각한다. 결국 어떤 것이냐면, ‘내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아무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라놓을 수 없고,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내 사랑을 단념시킬 수 없어. 그리고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내 충성심에 영향을 줄 수는 없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심리냐? 아주 터무니없지 않으냐? 아주 황당하고 그릇되고 가련하다. 이런 사람은 영 안에 어떤 정형이 있는데, 메마르고, 빈궁하고 가련한 것이다. 왜 메마르다고 할까? 그러니까, 아주 단순한 일이 임해서 거짓말을 했는데, 본인은 알지도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하고, 가책도 없고, 아무런 느낌도 없다. 지금까지 따라오면서 어떤 일을 하든 가늠하는 원칙이 하나도 없고,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궤사한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진솔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복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가련하지 않으냐? 그 정도로 가련하다. 그런 사람은 그 정도로 가련하기 때문에 영 안이 메말라 있는 것이다. 왜 영 안이 메말랐다고 할까? 방금 말한 것처럼 본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자신은 왜 하나님을 믿는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어떤 일들을 하면 이지 없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어떤 일들을 하면 진리의 원칙을 어긴 것인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악인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좋은 사람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고, 어떤 사람과 교제하고 어떤 사람과 가깝게 지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본인은 소극적이 되고도 어떤 정형에 빠졌는지 모른다. 다 모른다. 이러면 메마른 것이 아니냐? (네.) 너희도 이러하느냐? (네.) 너희들이 ‘네.’라고 하니, 정말 괴롭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이냐? 그렇다면 너희들은 이런 정형이고, 항상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감정적이다’를 예로 들어 말해 보자.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매우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말세에 태어나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을 받아들여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직접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에 가장 영광스럽고 더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적자지심을 표현하려고 한다. 어떻게 표현할까?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어떤 감정일까? 뜨거운 피가 끓어오른다. 그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추태가 나오려고 하고 시인의 모양새를 풍기려는 것이다. 전에 중국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는 압박감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꼬리’를 따돌려야 했고, 집을 나가서는 항상 주위를 살펴봐야 했고, 그리고 어디에 가든 항상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화장을 해야 하다 보니, 사는 게 너무 압박감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때 들끓는 열혈에 힘입어 큰소리로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려고 해도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어느 찬양에도 있지 않으냐? 뭐라고 했었지? (‘큰소리로 외치고 싶을 때가 얼마였던가, 하지만 허락된 땅이 없도다.’입니다.) 중국에서는 외칠 엄두도 못 낸다. 그 마음과 감정은 가득하지만 외칠 장소가 없다. 왜? 환경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이다. 외치지 않아도 너를 체포하려고 하는데, 외치면 제 발로 찾아가는 게 아니겠느냐? 그러면 더 빨리 잡혀가기 때문에 외칠 수 없었다. 이제는 외국에 나왔으니, 드디어 그 열혈을 뿜어낼 곳이 있게 되었고, 드디어 적자지심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표현하고 싶은 그 심정은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국에는 그럴 장소가 있다. 신앙 자유가 있으니 그 마음을 표현해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거리에 나가 사람이 비교적 적은 곳을 찾아서 외치려고 한다. 그런데, 외치기 전에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지면서 나지막하게 ‘전능하신 하나님…’ 하고 외치고는 주위를 살핀다. ‘안 돼, 외치지 못하겠어.’ 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소리가 나가지 않으니 어떤 생각이 들까? ‘안 되겠어. 적자지심이 아직은 부족해.’라는 생각이 든다. 왜 부족하다는 것일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부족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며, 집에 가자마자 눈물을 보인다. 그러면서 ‘하나님, 환경이 허용되지 않을 때는 감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외치지 못했는데, 막상 환경이 허용됐는데도 그럴 자신이 없네요. 소리 내서 외치지 못하겠습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분량도 너무 작고, 믿음도 너무 작고, 생명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뒤로는 그것만 놓고 기도하면서, 예비하고 공을 들이고 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기 시작한다. 말씀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려 가면서 속으로는 그 감정과 열정을 모으고 쌓는다. 그렇게 계속 쌓아 간다. 그렇게 쌓아 가다 어느 날, 오늘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광장을 찾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정을 가득 담아 외칠 수 있을 것 같고, 외칠 때가 되었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광장에 도착하는 순간 ‘어이구, 사람이 이렇게 많아? 북적북적하네. 외치지 뭐! 준비 다 했잖아? 내게 적자지심이 있잖아!’라고 한다. 외칠 수 있을까? 외쳤는데 여전히 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외치는 순간 목소리가 움츠러든다, 속에만 있다. 이유가 뭘까? ‘분량이 없어!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분히 크지 못해서야! 돌아가자!’라고 한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외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가 외쳤든, 외치지 못했든 그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것을 외친들 소용 있느냐? 그렇게 외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은 왜 기어코 한번 외치려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그 사람 마음에 한번 외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는 어떤 실제적인 사역보다도 중요하고 참되며 힘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릇된 사람입니다.) 적자지심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릇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정죄하기 어렵다, 그렇지? 그러한 감정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정상 인성의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라고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이나 사람이 본분하는 정서를 더 고조시키기 위한 것일까?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럴까?

너희도 가끔씩 혹은 늘 그러한 감정이 있지는 않으냐? 그런 감정이 생길 때, 너희는 그런 감정이 아주 갑작스럽게 찾아오거나 비정상이거나 억제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느냐? 비록 억제하기 어렵더라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냐? 어쨌든, 그것은 단지 어떤 감정일 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여 나타나는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비정상적인 정형이다. 그러면 그런 비정상적인 정형은 치우치고 고집스러운 것에 나열할 수 있느냐? 그것은 상황에 따라야 한다.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은 치우치고 고집스러운 것에 속하게 되고, 어떤 것은 사악한 것으로 변하게 된다. 사람에게 간혹 그러고 싶은 마음이 좀 있는 것은 정상이다. 비정상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만 위해 사는데, 날마다 그걸 위해 뛰어다니고, 하나님 말씀 보는 것도 그것을 위한 것이고, 복음 전도 역시 그것을 위한 것이고, 어떤 본분을 하는 것도 그것을 위한 것이고, 모든 것이 다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생존이나 삶의 가치와 의의가 된 것이다. 그러면 참 곤란하다. 목표와 방향이 치우친 것이다. 적자지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추한 모습들이 어느 정도 있고, 집요한 것들이 어느 정도 있으며, 비정상적인 감정도 어느 정도 있다. 그러면 그런 것들로 사는 사람은 항상 어떤 감정에 빠져 살거나 항상 그런 정형에서 사는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교통을 들을 때 어떤 것에 따라 들을까? 하나님 말씀은 어떤 것에 따라 볼까? 알고 있느냐? 그런 방식으로 추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진리 실행을 근거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진리 추구를 근거로 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했는지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그 사람은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도 않는데, 하나님을 믿는 데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산다. 자기 가슴이 아직 뛰고 있고, 자신이 아직 일을 할 수 있으며, 아직 힘을 쓰고 있으면 된다. 그렇게 간단하다.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고 구원받는 일들에 대해서는 모른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는 일에 관련된 것을 곰곰이 생각은 해 보는데, 자기 감정이 어느 정도 고조될 때면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럴 정도가 되면 정말 곤란하다! 이것이 한 방면, 비교적 심각한 것이다. 시종일관 그것 하나뿐인 방식이다. 그런 방식으로 추구하고 그런 마음 상태와 태도로 추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난 진리를 깨달을 필요도 없고 자신을 성찰할 필요도 없어.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서 죄를 자백하며 회개할 필요도 없고, 어떤 심판 형벌을 받아들일 필요는 더욱 없고, 어떤 훈계 책망이나 그 어떤 사람의 질책과 비판은 더더욱 필요 없어.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아. 내겐 적자지심이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믿는 원칙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나 혼자 참 괜찮다고 생각되기만 하면 돼. 나는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해. 내가 기뻐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거야. 그럼 됐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어.’라고 하게 되는데, 이것은 약간 바보와 같은 자들의 논리가 아니겠느냐? 그러면 너희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던 초기에는 그런 정형이 있지 않았느냐?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마 없겠지? 아니면 지금도 그런 감정이나 그런 정형을 지속하고 있느냐? 너희가 시종일관 그런 정형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없거나 조금이라도 돌이킬 수 없다면, 너희는 바로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고, 진리가 너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너희는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목적과 의의를 모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까닭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종교를 믿는 것 그리고 신앙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여기느냐? 어떤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 모든 사람의 관념 속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겠느냐? 종교를 믿었다는 것은 아마도 살길이 막막하거나 가정에 어쩌면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혹은 의지할 곳이나 정신적 지주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고, 선행을 잘 베풀고, 타인을 돕고,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착한 일을 많이 해 덕을 쌓고, 사람을 죽이거나 불을 지르지 말고, 나쁜 사람이 하는 짓을 하지 말고,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고, 절도나 강도짓을 하지 말며, 속이거나 사기치지 말면서 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 머릿속의 ‘종교를 믿는다’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면 너희의 마음에는 종교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존재하고 있느냐? 너희는 너희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를 믿는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느냐? 이 속의 정형에는 차이가 있느냐? 종교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다른 점이 무엇이냐? 아마 네가 초신자였을 때에는 ‘난 종교를 믿고 있어. 하나님을 믿고 있어. 다 같은 거야.’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면서 하나님을 5년 이상 믿게 되었는데, 너희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종교를 믿는 것과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느냐? (크게 납니다.) 어떤 부분이 차이가 큰 것이냐? 종교를 믿는 것은 어떤 의식을 지키는 것인데, 정신적 쾌락과 위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느냐에는 관련되지 않고, 사람이 어떤 방식에 따라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 삶의 방식에는 관련되지 않는 것이다. 너의 심령 세계와 내면 세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고 너는 여전히 원래의 너 자신인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너의 인성과 심령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외부에서 오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단지 좋은 일들을 어느 정도 하거나 의식이나 규례를 조금 지키며, 종교를 믿는 방면의 활동을 했을 뿐이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삶의 방식이 바뀌었고, 생존의 가치와 일생 동안 살아갈 목표에 이미 변화가 온 것을 말한다. 네가 원래는 가문을 빛내고, 남보다 뛰어나고, 잘살고, 명리를 다투는 등등, 이런 것들을 위해 살았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포기했고, 하나님을 따라가고 사탄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네가 사탄을 내버리고 이 사악한 조류를 내버리면서 사악한 조류에 역행하고 역류하고 있다는 것이며,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고, 진리 추구의 길로 가고 있으며, 너의 인생 방향이 철저히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는 방식이 달라졌고, 삶의 방식이 바뀌어졌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를 따라가고, 창조주의 안배에 순복하고,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구원을 받아들여서 진정한 피조물이 되기 위해 살면, 이것은 삶의 방식이 다 바뀐 게 아니냐? 너의 원래의 삶의 방식과 추구, 그리고 모든 일을 하는 동기와 의의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전혀 다른 것이다. 신앙과 하나님을 믿는 것의 차이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적자지심’, 이 정형에 너희는 거의 어느 정도 맞추어 볼 수 있지? 그럼 지금 너희는 대부분의 시간을 적자지심에 따라서 보내고 있느냐, 아니면 이런 정형이 간혹 있는 것이냐? 이런 정형이 간혹 있는 것이라면, 너희는 이미 그런 정형에서 벗어났으며, 이미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그 상태에서 나오기 시작했음을 증명한다. 만일 대부분의 시간을 여전히 그런 것들에 의해 보내면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그런 정형에서 나와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여전히 적자지심에 따라 살고 감정에 따라 살며, 아직까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고,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크지 않으냐? 가끔 생기는 감정, 가끔 그런 정형이 있다면 그것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추구하고 살아가는 데다 진리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위험하다. 차이가 있지? 차이가 있으면 구별해 대해야 한다. 간혹 그런 정형이 있으면 너는 그 정형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형이 어떻게 온 것인지,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일시적인 감정이 너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주는지, 그렇게 하면 어떤 폐단이 있는지, 네가 그렇게 하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더 증가되는지 하는 것을 해부해 봐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몸소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 방금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다 말했다. 나머지는 너희가 스스로 맞추어 보면 된다.

또 한 가지 정형이 있는데, 적자지심의 정형에 근접하지만 그 정도에 비해 조금 얕다.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패괴 성정 문제이지, 추구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추구하는 것이 근원적인 부분에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 성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은 아주 감정적이고 아주 제멋대로이고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이다. 기분이 좋으면 일을 아주 잘하는데, 착실하고 반듯하게 하여 누가 봐도 마음에 든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하나님을 만족게 했으니,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고, 날 열납하셨어. 난 진리를 실행했어.’라고 하면서 그날은 참 기쁘다. 감정적으로도 괜찮고, 기분도 좋아서 누구와도 아주 잘 지내며 아주 조화롭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본분이 또 어떤 게 있어요? 최근의 제 태도를 보면 어떤 거 같아요?”라며 물어본다. 아주 자발적이다. 그럴 때는 본분에도 아주 적극적이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상대적으로 충성심이 있고 책임감 있는 태도이다. 그것은 정형이 좋을 때이다. 그 사람이 정형이 좋은 것에도 아마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아마 일을 잘해서 칭찬을 들었거나 주변에서 높이 평가해 주고, 여러 사람들이 인정해 줬거나, 그 사람이 만든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공기가 가득 들어 있는 풍선이다. 즉, 칠수록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예전과 마찬가지로 본분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더듬지 않고 자신의 경험으로 일을 하는데, 경험으로 하면 어떻게 될까? 경험으로 하다 보니 일을 그르친다. 본분을 잘하지 못해서 책망을 받고, 주변에서 다 만족스러워하지 않으며, 다들 뭐라고 한다. 그랬더니 소극적이 되어 ‘나 이 본분 안 해. 잘할 방법이 없어. 당신들 중에 할 수 있는 사람이 해, 난 못하겠어! 난 당신들을 못 맞춰 주겠어. 그래, 당신들이 나보다 낫겠지. 나는 해도 안 되니까 하고 싶은 사람이 하라지.’라고 한다. 누군가 그 사람에게 진리를 교통해 주면, 귀에 들어갈까? 알아듣지 못한다. “뭔 일인데요? 이거 가지고 교통할 게 뭐 있어요? 무슨 진리고 뭐고 할 게 있어요. 기분 좋으면 하고 안 좋으면 안 하면 되지, 뭐가 그리 복잡해요? 난 안 할 거예요. 기분 풀리면 그때 할게요.”라고 한다. 이런 것은 어떻느냐? 그 사람은 일관적으로 그렇다. 본분을 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보거나 교통을 듣고, 예배하고,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 등등, 그 사람 삶과 관련된 모든 방면에서 그 사람이 유로하는 것은 바로 한동안은 흐렸다가 한동안은 개이고, 한동안은 올라갔다가 한동안은 푹 가라앉고, 한동안은 차갑다가 한동안은 뜨거워지고, 한동안은 소극적이다가 한동안은 적극적인데, 결론적으로 좋을 때든 나쁠 때든 너무 두드러지다 보니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 끈기가 없고 성미에 따라 제멋대로 한다. 기분이 좋으면 좀 잘하고 기분이 나쁘면 잘하지 않고, 심지어 하지도 않고 일을 내팽개치는데, 어떤 일을 해도 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자신의 요구에 따라서 해야 한다. 또 자기 스타일대로 해야 하는데, 고생하려는 어떤 심지도 없고 절제도 없으며, 거기에 아무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건드리면 바로 날카로워지거나 노발대발하는데, 기분이 상하고, 다운되고, 소극적이 된다. 그 밖에 어떤 일을 하든 또 자신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 ‘이 일은 내가 좋아하는 거라서 할 거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면 이번에는 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도 하지 않을 거고, 내일도 하지 않을 거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야. 당신들 중에 하고 싶은 사람이 해, 나와는 상관없어.’라는 식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기분이 좋고 정형이 좋으면, 형언 못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눈물 흘리는 거 보면 모든 사람을 다 잠기게 할 정도이다. 감격했다 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 그런데 괴로우면? 마찬가지로 하염없이 눈물 흘리고 누가 달래도 소용없다. 얼마나 과하냐, 무슨 눈물이 그렇게도 많으냐?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물어본다, “나이가 얼마인데요?” “어리지도 않아요, 4~50대랍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그 성정, 표현, 유로를 보면, 아직도 20살짜리 어린애인 줄로 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정에 비추어 보면, 삶의 방식이나 행위는 바로 영원히 제멋대로인 것이다. 어떤 일을 해도 끈기가 없고, 충성심이 없으며, 책임감이 없고, 부담도 없다. 언제나 고생을 하지 않고 어떤 책임도 떠맡기 싫어한다. 자기 기분이 좋을 때는 어떻게 해도 다 되는데, 고생을 좀 해도 되고, 자기가 손해를 조금 봐도 된다. 만약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자기가 이득을 봐도 안 되고 그래도 하지 않는다. 이러면 어떤 사람이냐? 너희는 이러한 정형이 없느냐? 이런 정형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아라. 적지 않구나! 이런 것은 좋지 않다. 그렇지? 왜 좋지 않을까?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찌 정상이 아닌 그런 문제만 있겠느냐,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내키는 대로 하는 원인은 무엇이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성정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나이도 너무 어리며 고생도 너무 적게 했기 때문이죠. 그 사람을 한 8년 정도 옥살이 시켜 보세요! 얌전해지지 않는지. 그러면 그런 성깔이 나오겠습니까? 옥살이 8년만 하면 어떤 성깔도 다 죽어 반들반들한 자갈처럼 될 텐데, 그가 고분고분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기봉 한번 맞으면 다 얌전해져요.”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성정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중요한 본분을 해도 그 사람은 본분을 지체시키는데, 사역 진도를 지체시켜서 하나님 집에 손해를 주고, 일반적인 본분을 해도 어떨 때는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일을 지체시키는데,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 그리고 하나님 집 사역에도 유익되는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일을 하거나 얼마 되지 않는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 집에 이익이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부분은 그 사람이 소극적이 되어 지체시키거나 일을 내팽개침으로 사역이 지체되는 것보다 크지 못한 것이다. 너희도 다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으냐? 사람에게는 이런 성정이 다 있다. 그러면 말해 보자. 이건 어떤 성정이냐? 약하게 말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무슨 진리고 뭐고 할 게 있어! 내 기분이 중요하고 내 만족감이 중요하지. 내가 기분이 별로일 땐 누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진리가 다 뭔데? 하나님이 다 뭔데? 내가 제일이고, 내가 왕이야!’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증오하고 싫어하는 것은 확실하다. 교만 자대한 성분이 없느냐? 강퍅한 성분은 없느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심각한 것이 있다. 그 사람이 적극적이고 기분이 좋을 때는, 그 사람이 어떤지 분별이 안 간다. 너는 그 사람이 꽤 괜찮아 보이고 순복도 잘하고 대가도 치르려고 하고, 진리도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보였는데, 그 사람이 일을 내팽개칠 때면 흉악한 몰골이 나오기 시작한다. 누가 말해도 안 통한다. ‘진리는 무슨! 나만 좋고 나만 편안하면 돼.’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흉악한 성정입니다.) 흉악하기까지 하다! 그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지르지 않은 것은 아직 그 사람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그 사람을 건드리면 그는 너를 물 것이고, 좀 더 심하면 쥐어뜯을 것이다. 대단하지 않으냐? 누가 감히 그 사람을 건드리겠느냐?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은 사람의 성격이나 나이 어린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내키는 대로 한다면 그것은 깊이 뿌리박힌 성정이 속에 감추어져 있고, 성정이 속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인데, 나이 어린 문제겠느냐? 나이가 있으면 내키는 대로 하지 않느냐?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사리 밝고 이성적이겠느냐? 아니지? 그런 사람은 그것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것으로 살 때면, 순복이 있겠느냐? 진리를 찾고 구하겠느냐? 인내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진리를 사랑하는 성분은 있느냐? 다 없다.

방금 말한 그 성정이 너희에게도 다 있느냐? (있습니다.) 만일 교통하지 않았다면 너희는 문제라고 생각하겠느냐? (생각합니다.) 교통하지 않아도 너희는 문제라고 생각했느냐, 아니면 교통을 한 뒤에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느냐? (교통을 하시게 된 다음 그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교통을 하고 나니 좀 심각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렇지? 걸핏하면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은 객관적인 원인 때문이 아니라 성정의 문제이다. 성정의 문제들은 유로하거나 일을 하고 나면 뒤에는 안 좋은 결과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객관적인 원인으로 지금 견디기 힘들 정도로 위가 아프다고 하자. 괴로워서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밥 먹을 기운도 없고, 물 마실 기운도 없고, 말할 기운은 더욱 없다. 그저 좀 눕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위가 너무 아프다 보니 다른 사람과 말을 해도 말투가 썩 좋지 못하다. 그러고는 누가 찾아와 말을 건네면 귀찮아져서 딱딱한 말투가 좀 유로된다. 이런 것은 성정의 문제일까? 때론 성정 문제가 아니라 아파서 괴롭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을 건넨 사람이 배려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는데도 거기에다 뭘 물어보겠느냐? 좀 기다렸다가 아픔이 가신 뒤에 물어보면 얼마나 좋겠느냐? 만약 그 사람이 평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고, 아픈 경우가 없는데도 말을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정 문제겠지만 지금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데, 왜 사람을 배려해 주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것은 정상적인 현상으로 아주 객관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는 그 사람이 말을 그렇게 하거나 행동을 그렇게 취하는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고, 합리적이고 인지상정이며, 정상 인성의 표현이고 유로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엄마가 죽었을 때 네가 울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니냐? (정상입니다.) 그런데, 자기 엄마가 죽었는데도 울지 않으면 정상이냐? 그러면 정상이 아니다. 어쩌면 억지로 참으며 울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뒤에 가서는 울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상이다. 그런데 어떤 그릇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엄마가 죽었는데도, 저 사람은 동정심이 눈곱만큼도 없어. 어쩌면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려, 저 녀석 독하네!’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어떠냐? 객관적이냐? 그리고 어떤 사람이 엄마가 죽어서 우는 모습을 보면 또 ‘저 사람이 정에 얼마나 얽매어 있는지 봐!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어.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못 내려놓고 울고 앉았어! 울긴 왜 울어? 나 같으면 안 울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자기 엄마가 죽자 남들보다 더 크게 운다. 자신에게 일이 닥치니 어떠냐? 남들보다 못하다, 그렇지 않으냐?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은 객관적인 원인이 있는 것인데, 정상 인성의 표현이고 유로이다. 너는 어떤 것이 정상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인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는데, 상황을 봐야 하는 것이다. 방금 어디까지 말했지? 감정적인 것에 대해 얘기했다. 감정적인 것은 상당히 좋지 않다. 그렇지? 어떤 것으로 사느냐에 대한 문제는 하나는 성정, 하나는 사람의 추구법, 가는 길에 관련되는 것이지 어떤 성미나 성격 혹은 어떤 겉면의 행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 사람이 추구하는 길의 문제, 관점의 문제, 그리고 사람 성정의 문제이다. 방금 말했던 이런 것은 성정에 관련되는 것이다, 그렇지?

하나 더,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온 동안,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면서 사람마다 주변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지내는 무리가 있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떻게 버텼을까? 어떻게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고, 화목하게 어울리고, 평화롭게 지내 왔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상책이 있다. 누구든지 그 사람을 평가하면 ‘괜찮다, 그 정도면 된다, 보통이다, 나쁘지 않다.’라는 것들이다. 그 사람에게는 상책이 있는데, 어떤 상책일까? 그것은 바로 ‘지고지상한 처세 철학’이다. 보아라, ‘지고지상’에 ‘처세 철학’을 더하니 어떤 사람은 우스워한다. 이 두 단어는 본래 같이 조합해서는 안 되는데, 희한한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고지상’을 왜 여기에다 사용했을까? 일반적으로 처세 철학이 있는 사람, 그러니까 사람들과의 일 처리와 처세에 매우 능한 사람에게 있는 생존의 원칙, 기반, 근본이나 노하우, 비결은 어떤 것일까? 바로 어떤 사람과 지내도 철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최고의 신조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지내는 것조차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 세상에서 밥 안 먹고 사는 사람은 없어.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거지? 너는 원칙을 지키겠다, 이거지? 너는 진리를 깨달았다, 이거지? 좋아, 난 처세 철학으로 너를 상대하겠어. 진지하게 나온다, 이거지? 진리의 원칙을 강조한다, 이거지? 그래 난 진리 원칙을 몰라. 그래도 네가 나한테 호감을 가지게 만들 수 있어.’라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이 아니냐? ‘그렇다 해도 난 너를 잘 구슬릴 수 있어. 그럼 넌 날 중심으로 맴돌 것이고, 날 좋다고 말할 것이고, 뒤에 가서 내 험담을 할 수도 없어. 심지어 내가 뒤에서 네가 별로라고 말해도 넌 여전히 모를 것이고, 내가 뒤에서 수작을 부리고, 널 배반해도 모를 거야.’ 이것은 무엇이냐? 처세 철학이다. 이 처세 철학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 음모, 궤계, 수법이 있고, 또 방식과 방법이 있다. 말을 하는 방식,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쓸모 있어 보이거나 지위가 있는 것을 보면 매우 공손하게 말을 한다. 말 한 마디에 고개를 세 번씩 끄덕여 주는데, 마치 용수철 같다. 그런데 자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능력이 좀 부족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말을 하는 경우에는 늘 높은 자리에 서서 내려다본다. 그럼 상대는 그 사람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우러러보게 된다. 그 사람의 내면 세계에는 사람을 농락하고 우롱하는 수법이 있는데, 어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이 있는 것이다. 사람과 접촉하면 한눈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상대방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눈치챈다. 머릿속에 곧바로 대책이 생기는데, 성숙하고 노련하며 침착하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그런 처세 철학을 써먹고 처세 철학을 활용하는 것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없고, 구상을 할 필요가 없으며, 누가 가르쳐 줄 필요는 더 없고, 다른 사람에게 배울 필요도 없다. 어떤 것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고, 어떤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고 본 것이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알려 주지도 않았지만 그 사람은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 것을 바로 배운다. 그런 처세 철학, 수법, 방식과 방법, 음모, 노림수를 배운다. 이런 것들로 사는 사람에게 진리가 있느냐? 진리에 근거해 살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진리에 따라 살 수 없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사람들은 늘 그에게 속게 되고 사기당하는 것이다. 또 있느냐? (이용당합니다.) 그것도 있다. 맞는 말이다. 더 없느냐? 아직도 많이 있다. 그런 것들은 어느 한 사람만의 특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 것이다. 너는 사람을 이용하지 않느냐? 사람을 우롱하지 않느냐? 또 하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달콤하게 할 줄 아는데, 듣는 사람이 기분 좋고, 만족스럽고, 듣기 좋고, 거슬리지 않으며, 속이 편하게 한다. 이런 경우가 있지 않으냐? 네가 그 집에 놀러 갔는데, 밥을 먹이지는 않고 너를 3리 밖까지 배웅해 주는 것이다. 밥 먹을 시간이 되니 “아이구, 벌써 갈 시간이 다 됐네요. 식사도 대접 못해 드리고, 어떡해요! 아니면 여기서 식사하세요!”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계속 밖으로 밀어내 1리 정도까지 간다. 거기서 “아니면 식사하고 가요. 어쩌다 한 번 왔는데 집에서 밥도 못 드시고 참, 뭘 자꾸 간다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또 2리까지 배웅을 해 준다. 어떤 물건짝이냐? 감언이설로 말을 정말 듣기 좋게 하지만 실제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많지 않으냐? 너희도 할 수 있느냐? 말을 정말 듣기 좋게 하면서 실제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사람을 농락한다고 한다.

혹시 너희에게 이렇게 할 때가 없는지 보아라, 상면에서 너희를 불러 예배를 드리거나 너희가 상황을 보고해야 할 때, 너희는 몇 가지 문제를 준비한 것이 있다. 솔직히 그 문제를 너는 질문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서 물어보는 경우는 없느냐? 어떤 목적을 위해서일까? ‘난 상면에서 내가 참답고 책임 있게 사역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야 되니까 문제를 좀 제기해야겠어. 내가 어떤 문제도 언급하지 않으면 상면에서는 내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어떤 질문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 이런 상황이 존재하니까 형식적으로라도 꼭 문제를 몇 가지 물어봐서 내가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사역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상면에 전달하고, 상면에서 나를 잊지 않게 할 거야.’ 이런 목적이 없느냐? 너희는 이런 때가 없느냐? (있습니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기만입니다.) 기만하는 것이다. 그것은 처세 철학의 수법이 아니냐? 예를 들면, 두 사람이 협력을 하는데, 오늘 가야 할 곳이 있다. 그런데, 그곳은 음식도 별로고, 장소가 작은 데다가 더럽고 난잡하며 또 위험성도 있다. 치안이 그렇게 좋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갈 거냐고 물으면 그 사람은 뭐라고 말할까? “오늘은 형제(자매)님이 가요. 내가 가면, 그 사람들도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내가 가기만 하면 그 사람들은 계속 구속받는데 어떡하겠어요? 그 사람들은 그래도 형제(자매)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형제(자매)님이 가면 그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되고, 사역에도 유리하니까 형제(자매)님이 가요! 만약 제가 가면 그들도 영향을 받고, 형제(자매)도 속박받고 그들도 속박받게 되잖아요. 하나님 집 사역이 더 잘되고, 형제자매들의 생명 성장에 유익하도록 전 안 가는 게 좋겠어요. 망신스럽게 그러지 말고, 이런 좋은 일은 형제(자매)님한테 양보할게요.”라고 한다. 상대방이 듣고는 ‘참 실제적인 말이야.’라고 한다. 속았다. 그래서 갔다. 속은 사람의 상황이 어떻든, 그대로 믿었든, 믿지 않았든, 부득이하게 갔든, 본인이 원해서 갔든, 결론적으로 속인 사람은 어떤 물건짝이냐? 그 사람이 말한 이유는 아주 근사해 보이는 이유이고 성립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진리를 실행한 것이냐? 정말 형제자매들에게 유익한 게 있을까? 없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철학은 어떤 것이냐? 감언이설, 듣기 좋은 말,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듯한 말로 그 고생을 하러 가지 않고 거기에 가고 싶지 않은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것은 수법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기도 했고, 그것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것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너는 그런 철학 수법에 통제되고 결박되었고, 거기에서 발을 내딛지 못했으니 그것은 사탄의 패괴 성정 속에 살고 있는 것이고, 또한 사탄의 결박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면? 너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다시 곰곰이 고려해 보니 ‘아니야,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나쁘고 비열한 거야. 내가 뱉은 말을 빨리 거둬들여야겠어. 저 형제(자매)에게 “제가 패괴를 유로했네요, 거짓말을 했어요. 사과할게요.”라고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사과할 거야. 난 오늘 무조건 그곳에 갈 거야. 거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갈 거야.’라고 하면 된다. 사실 안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느냐? 바로 그것을 배반하려는 그런 심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무엇으로 살게 되느냐? 이래야 진리로 사는 것이다!

두 사람이 협력한다고 하자. 서로 책임을 떠안을까 봐 두려워서 둘이 싸운다. “이건 형제(자매)님이 처리하세요”, “그래도 형제(자매)님이 처리하세요, 제가 소질이 형제(자매)님보다 못하잖아요.”라고 한다. 사실 속으로는 ‘나서는 사람은 끝장이야. 이 일은 잘 처리해도 칭찬도 못 받는데, 괜히 잘못 처리했다가 책망이나 더 받을 거야. 난 안 가, 난 어리석진 않아! 나보고 가라고 꼬드겨? 내가 바보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까, 날 꼬드기지 마.’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래저래 싸우다 보니 어떻게 되느냐? 누구도 가지 않아서 사역을 지체시킨다. 비열하지 않으냐? 최종적인 결과는 사역을 지체시킨 것이다. 그렇게 하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좋지 않다. 그러면 그 두 사람은 다 무엇으로 사느냐? (철학으로 삽니다.) 처세 철학 그리고 자신의 계략에 사로잡히고, 통제되고 결박되어 진리를 실행하지 못했다. 그것이 간증이냐? (아닙니다.) 실패한 것이다. 이것이 한 방면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협력하는데, 서로 논쟁은 하지 않는다. 둘 중에서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해도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는데, 무엇이든 다 그 사람 혼자 결정을 한다. 그래서 나머지 한 명은 ‘그 사람이 잘하잖아, 뭐든 그를 찾게 하면 돼! 안 좋은 일도 그를 찾게 하고, 훈계 책망받는 것도 그가 맡게 하면 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래서 난 나서지 않을 거야. 안 그래도 난 소질도 낮은 데다가 신경 쓰는 것도 안 좋아하잖아. 잘된 거지 뭐, 이 일은 그 사람한테 떠넘겨야지. 그 사람이 원래 나서기 좋아하잖아? 원래 솔선수범하기 좋아하잖아? 자기가 잘났다고 하잖아? 마침 잘된 거 아닌가? 이 일을 그 사람보고 처리하게 놔둬야지! 대단하니까 됐네. 잘 되면 공로도 그 사람이 챙기고, 훈계 책망을 받게 될 때도 그 사람일 거잖아? 난 한시름 덜었네!’라고 하면서, 늘 무골호인이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사람으로 살면,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본분은 어떻게 할까? 시종일관 그 속에서 살면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냐? (처세 철학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생각이 하나 더 있는데 ‘내가 주제넘게 나서면 저 사람이 나한테 심술 부리지 않을까? 나중에 우리 둘 협력이 잘되지 않고, 우리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같이 지내기 어려운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원칙을 견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처세 철학이냐, 아니냐? 그런 처세 철학은 그 사람을 하루하루 곤경에 빠뜨리고, 하루하루 결박시킨다. 사는 게 피곤하지 않을까? (피곤합니다.) 피곤하지 않다. 뭐가 피곤하겠느냐? 피곤하다면 그렇게 살겠느냐? 그렇게 살면 편하고 책임질 필요가 없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사람들 앞에 나설 필요도 없고, 무슨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고, 무슨 일이 생겨도 미리 생각할 필요 없고, 총대 멜 사람도 있으니 그 사람은 피곤하지 않은 것이다. 너희는 피곤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희가 진정으로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곤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다 차려준 걸 먹는 것도 피곤하면, 일하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것은 피곤하지 않다. 본인이 원하는 것이다. 그것을 처세 철학이라고 한다. 진리에 따라 살지 않고 원칙을 견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협력이 아니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왜 협력이 아니라고 말할까? 바로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조차도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냐? 처세 철학으로 사는 것이지,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예가 많지 않으냐?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는데, 흔히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본분하는 과정에서 어떤 나쁜 짓을 하여 하나님 집에 손해를 끼쳤는데, 네가 봤다고 하자. ‘저 일은 별로 잘하지 못했어.’라고 하면서, 속으로 생각해 본다. ‘나랑 상관없어. 어차피 나한테 손해 준 것도 없는데. 그리고 책망받을 때는 내가 책망받을 것도 아닌데.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내 손을 거친 것이 아닌데 뭐. 내가 상관해서 뭐하게. 나랑 상관없는 일은 신경 쓰지 않겠어. 다른 사람보고 상관하라 그러지 뭐. 상관하고 싶은 사람이 하겠지. 난 상관하지 않겠어. 난 내 일만 잘 지키면 끝나는 거야. 무슨 일이 생겨도 나랑은 상관없어. 분명히 알고 있어도 잠자코 있을 거야. 그냥 손해를 보라 그러고, 치우친 길로 가라 그러지 뭐. 상관 안 할 거야!’ 이것이 처세 철학이 아니냐? 마음씨가 좋으냐? (나쁩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한 가지 일에서 그렇게 하고, 극히 드문 일에서 이런 성정을 유로하고 이런 식으로 하지만, 어떤 사람은 늘 모든 일에서 다 그렇게 하면서 전혀 진리에 따라 실행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서 다 그렇게 하고 그렇게 살았든, 어떤 일들에서만 그렇게 했든 다 무엇에 관련되느냐? 다 처세 철학에 관련되고 다 패괴 성정에 관련된다. 이것은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항상 겪게 되는 것과 보게 되는 처세 철학은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항상 접촉하고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말해 보아라. (저에게 가장 뚜렷한 처세 철학은 형제자매들과 지내면서 쉽게 작은 선심이나 자잘한 뇌물로 마음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지지해 주고 좋아해 주며 저를 높이 보게 만듭니다. 저 또한 다른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춥니다.) 그것은 일종의 수단이다. 다른 사람의 취미를 맞춰 주고,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 주는데, 일종의 처세 철학이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보았을 때, 둘 사이의 관계가 나빠질 것이 두려워 직설적으로 말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봐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돌려서 말하고, 늘 듣기 좋은 말,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고 원칙에 관련되지도 않고 실제 문제에 관련되지 않는 말을 골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것도 한 방면이다. 역시 처세 철학이다. (때론 문제점들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말을 꺼내면 제 관점을 상대가 수용하지 않을까 봐 걱정합니다. 그래서 말하기 싫어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진실한 생각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지키려고 또 자주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라 말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처세 철학이다. 어느 방면에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사람이 살아내는 것은 바로 그런 추한 몰골들이다. 하나하나 다 사탄의 귀신상인데, 어떤 자는 아주 음험하고, 어떤 자는 아주 간교하고, 어떤 자는 아주 비열하고, 어떤 자는 아주 옹졸하고, 어떤 자는 아주 천박하며 또 어떤 자는 가련하다. 늘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자는 천성적으로 등이 굽은 것처럼 항상 굽신거린다. 또 어떤 자는 천성적으로 항상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늘 다른 사람을 음해하려고 하는데, 간사하다. 또 어떤 사람은 어디를 가나 팔방미인이 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거기에 맞는 말을 하는데, 눈치가 굉장히 빠르다. 상대를 보고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파악하면 그 분야의 말을 하는데, 만나자마자 그 부류의 사람을 보면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고 나면, 상대방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안다. 얼마나 대단하냐! 그런 사람은 어떠냐? 너무나 교활하다. 그래서 진리에 따라 살지 못한다. 더 말해 보자. 무골호인, 간사한 자, 교활한 자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면 사람 소리를 하고, 귀신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귀신 같은 소리를 하는 자, 그런 자들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교활하다고 한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때론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하면 그제야 그 문제를 꺼냅니다. 자기가 말을 잘못해서 책임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대세의 흐름을 따르는데, 법불책중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그것은 어떤 문제이냐? 어떤 성정이냐? 교활하지 않으냐? 교활하다. 늘 무골호인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늘 뒤처지기는 싫어한다. ‘다들 얘기를 꺼낸 다음 나도 말을 꺼낼 거야. 다들 말이 없으면 입 다물고 있을 거야. 괜히 말을 잘못 했다가 어찌려고?’라는 생각에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둔다. 꿍꿍이가 참 많다! 그것은 사탄이 사람에게 남겨 준 것이고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이다. 너희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느냐? 누가 인솔자로 당선되면 아첨하고, 누가 해임되면 무시하면서 본체만체하는 그런 재능들이 없느냐? 누가 당선되든 인솔자면 그냥 다 좋다는 것이다. “어머, 얼굴도 참 예쁘고 키도 표준이네요. 목소리도 너무 좋아서 아나운서 같은데요. 말할 때면 종달새 같아요, 노래하는 줄 알겠어요.”라고 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환심을 사는데, 인솔자의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오게 하고 책망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기회를 봐 가면서 아부하고 작은 선심을 베푼다. 몸에 좋은 영양탕을 끓여 주거나 소소한 선물을 주면서, 인솔자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눈치 보다가 어떻게 해서든 해 주려고 하고, 좋아하는 음식도 어떻게 해서든 마련해 주려고 한다. 이런 수법들이 없느냐? (위의 인솔자 일꾼의 문제점과 부족한 점을 보고도 대담하게 말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인솔자가 별거 다 신경 쓴다고 말할까 봐서이고, 또 저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될까 봐 걱정해서입니다.) 원칙이 없다, 그렇지? 그러면 너는 네가 하려는 말이 옳은지, 사역에 유익이 되는지 속으로 모르느냐? (조금 압니다.) 자기가 하려는 것이 옳다는 것을 확정하고도 담대하게 원칙을 견지하지 못하면 자기가 하려는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형제자매들이 분별할 수 있게 자신에게 있는 견해와 생각을 꺼내 놓을 수는 없느냐? 때로는 생각해 보다가 ‘형제자매들에게 분별하게 하라고? 언제 그런 걸 다 상관하겠어. 난 말 안 할래. 괜히 말했다가 날 어떤 식으로 책망할지도 모르는데.’라고 한다. 이럴 때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러한 철학과 수단들이 다 참 대단하구나! 다들 머리는 작은데, 만만치 않구나!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거나 하나님을 믿으면서 본분할 때, 평소에 머리나 마음에 이런 것들로 가득하고, 이런 것들에 점유되어 있는데, 네가 진리를 들은 다음에도 의식적으로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실행하지 않고, 너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느냐? 물음표를 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게 매우 느리고, 진리의 발전 방면이나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방면에서 진도가 아주 느리다고 하는 것이다. 그 원인이 바로 이런 것들이 가로막고 있고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 살아내고 살아가는 것은 무엇에 의존하는 것일까? 바로 육체의 패괴 성정, 관념, 상상, 처세 철학, 은사 이런 것들이다. 사람이 이런 것으로 살면 하나님 앞에 오기 매우 어렵다. 원인이 무엇일까? 짐이 너무 많고, 멍에가 너무 무겁고, 사람이 의존해 살아가는 것이 진리와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진리 실행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진리 실행을 가로막으면 그 뒤의 안 좋은 결과는 어떤 것이냐? 바로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해질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고, 너무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사람이 어떤 것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해 위에서 몇 가지 큰 방면을 교통했는데, 성정에 관련되는 것, 관점에 관련되는 것을 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욕망으로 살아간다. 그럼 욕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사역하려는 욕망,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 자신을 자랑하려는 욕망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지위를 너무 좋아한다. 그 사람은 지위가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지위가 없으면 무엇을 해도 하고 싶지 않아하고, 하나님을 믿는 삶이 재미없다고 느끼며, 하루하루 그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또 어떤 일을 하든 다른 것을 위하는 게 없이 오로지 지위를 위한 것인데, 자신의 지위를 수호하고, 지위를 공고히 하며, 그 지위의 통치 범위를 넓혀 가며, 모든 면에서 다 그 욕망을 위해 일을 한다. 그것은 무엇에 의한 것이냐? 욕망에 의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정말 불쌍하게 사는데, 온순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며 가정 여건도 좋지 못하고, 사회적 배경에도 별로 바탕이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어 외롭고 쓸쓸해하다가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 믿으면 그래도 든든한 지주를 찾은 셈이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에게는 염원이 하나 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믿어 오게 된 것도 그 염원에 힘입은 것인데, 그 염원은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었으니 됐다. 하나님 믿으면 품위 있게 살고, 출세할 수 있고, 체면도 세울 수 있어. 하나님을 믿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잘살 수 있고, 패기 있게 살 수 있어. 하나님을 믿어서 천국 가면 한을 풀 수 있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냐? 염원과 소망으로, 아주 허황되고 아주 막연한 염원으로 사는 것이다. 그 사람은 가정 여건이나 다른 원인으로 자신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가련하게 살았지만, 하나님 집에서 살면 의지할 곳이 생겨서 더 이상 가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도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으니 더 이상 불쌍한 사람이 되지도 않으며, 믿을 구석도 생겼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그 사람이 얻고자 하는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은 죽은 뒤에나 금생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얻는 것이다. 드디어 기를 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표는 바로 그것이다. 그 사람은 기를 펴겠다는 그 염원으로 살면서 곳곳에서, 모든 일에서 그 생각과 소망을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에 의해 사는 것일까? 진리로 살기 매우 어렵다. 너무 가련하게 산다! 욕망과 염원에 의해 사는 것 외에 또 뭐가 있느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거나 과시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 무리 속에서 사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사람들 속에서 지내며 이것저것 좀 하여 자신을 높이 보게 해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킨다. ‘인솔자가 되지 못해도 본분만 하면서 사람들 가운데서 내 특기를 발휘하여 내가 사람들 가운데서 빛나고 광환(光環)을 두르게 된다면 하나님을 믿어도 가치가 있어! 이걸 위해 살자. 그러면 세상에 있는 것보다 못하진 않으니까.’라고 하면서 그 후부터는 이것을 위해 산다. 날마다, 해마다 그렇게 살면서 초심을 바꾸지 않는다. 이것이 진리로 사는 것이냐? 이러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매우 어렵고, 진리로 살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은 의식 방면의 것인데, 바로 사람이 왜 이런 것들로 사는지에 대한 근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색(姿色)으로 산다. ‘봐! 난 예쁘니까(난 멋지니까) 어딜 가나 좋아해 주고, 높이 보고 웃는 얼굴로 대하고, 칭찬해 주고 지지해 주잖아.’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어딜 가나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어딜 가나 웃는 얼굴로 대해 주니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그렇게 사는 것에 매우 자신감을 가진다. 그래서 그렇게 살면 자본이 있고 매우 가치 있다고 여기면서, 최소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한다. 자색으로 사는 것이다. 남자들도 자색으로 사는 것에 관련되지 않느냐? 예를 들어, 네가 아주 멋지게 생겼다고 하자. 자매들 가운데서 말을 아주 유머적이고, 아주 젠틀하고, 아주 로맨틱하게 하면, 다들 너를 아주 높이 보고, 너를 중심으로 돌게 되는데, 너는 득의양양해진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거야. 진리 실행만 하면 얼마나 융튱성이 없어. 난 이렇게 살아야 돼. 누구하고도 연애하지 않고 난 이렇게 살 거야. 아주 좋아!’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본으로 사는데 어떤 자본이냐? ‘자본’이라고 하면 당연히 실제적인 것들이 좀 있어야 하는데, 어떤 실제적인 것이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자본이 크지 않으냐? 5살까지 살았다면 자본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지금 50살까지 살았으니 자본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50여 년 믿은 것은 자본이다. 형제자매들을 만나 “하나님 믿은 지 몇 년 됐어요?”라고 묻자 “5년이요.”라고 하면, 몇 배 차이 나느냐? 10배 차이 난다. ‘당신이 하나님 믿은 햇수가 나만큼 많아? 꼬마 친구 같으니라구! 까불지 마.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이것이 자본으로 사는 것이다. 또 어떤 자본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각급 인솔자를 해 본 적이 있다 보니 인솔자 일꾼에 관련해 경험이 조금 풍부해졌는데, 조금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다시 말해, 풍부한 경험이 있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타지에서 사역하면서 뛰어다니고 교회를 돌아다니다 보니 경험이 아주 많아 상면의 사역안배와 교회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법이나 각 방면의 사역에 대해 잘 아는 편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난 자본이 있어! 어떤 자본이냐면 사역을 오래 해 온 거야. 오래된 일꾼, 오래된 인솔자지. 당신들이 뭘 알겠어? 애송이지. 사역을 며칠이나 해 봤어? 못 해 봤지? 이제 막 올라와서 너무 여려, 안 돼. 아무것도 모르니까, 각 부류 사람의 정형도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 내가 얘기해 줄 테니, 들어 봐.’라고 한다. 말을 정작 시작하고 보니 아무것도 없고 전부 글귀 도리뿐이다. 생각해 보더니 “오늘 기분이 별로라서요. 방해하고 교란하는 적그리스도가 있어서 영향 좀 받고 있어요. 다음에 잘 얘기해 줄게요.”라고 한다. 속보인다, 그렇지? 자본으로 살면서도 득의양양해하는데 역겹고 징그럽다. 이것이 하나의 자본이다. 자본으로 사는 것에 표현들이 좀 더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옥살이를 한 적이 있거나 특별한 경험들을 했거나 특수한 본분을 하면서 고생을 좀 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하나의 자본이 된다. 왜 그것이 자본이 되면 그런 것으로 산다고 할까?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 사람은 그 자본을 생명으로 여기면서 그 자본 속에서 늘 자아도취되고, 그다음 그 자본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자신을 자랑하며, 또 본인도 그런 자본을 바탕으로 진리를 좀 추구하거나 선행이 좀 있거나 본분을 조금 잘하거나 하면 아마 바울처럼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살아남을 것이고, 틀림없이 좋은 귀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런 것으로 사는데, 항상 으쓱하고 득의양양해하고 자만자족하는 정형에서 살며 하나님이 자신의 그 자본을 열납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그런 자본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기뻐하고 자신을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해 줄 것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자본으로 사는 것이 아니냐? 그는 어디서나 그런 생각을 유로한다. 아마 본인은 믿은 지 얼마나 됐고 상대방을 어떠어떠하다고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사람이 유로하는 것, 의존해 살아가는 것,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에서 그 사람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살핌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 받았으니 스스로를 특별하고 독특하다고 여기고 자신은 남다르고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긴다. ‘봐,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처음에는 은혜를 좀 주면서 달래 주시다가, 당신들이 천천히 깨닫게 된 뒤에는 시련,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을 주시잖아. 그런데 난 달라. 난 다양한 체험이 있고 특별한 체험이 있지. 그래서 내가 월등한 부분이 있다고 하는 거야. 월등한 부분이 뭐냐면 특별한 체험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은 내게 특별한 은총을 주셨는데, 그 특별한 은총이 바로 내 자본이야, 바로 내가 의존해 살아가야 할 것이지. 내가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그런 것들이 바로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증거고 입장권이야.’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되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아도 되며, 심판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정형이 있는 사람들의 범위는 어떤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이상을 보았다거나, 어떤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거나, 큰 재난에서 살아남았다거나,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거나, 또 일부 특별한 간증이나 체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것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근거로 여기며, 그런 것으로 진리 실행을 대체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구원받는 신호나 징표로 여기는데, 그런 것이 바로 자본이다. 너희에게는 이런 것이 없느냐? 너희는 아마 이런 특별한 체험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너희가 어떤 위치에 있다면, 예를 들어 감독 본분을 장기적으로 하면서 훌륭한 작품 몇 개를 만들게 되면, 자본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금은 네가 작품을 만들지 못했거나 자본을 가질 만한 위치에 앉을 더 유력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마 자본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 ‘난 아직 자본과 자격을 따지기에 부족해. 아직 이것으로 자본을 삼기엔 부족해.’ 그래서 너는 매우 신중하게 하고, 조심스럽게 하고, 겸손히 낮추면서 감히 그 일을 소홀히 하지도 못하고, 더욱이 제멋대로 하거나 겉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우쭐대는 마음을 늘 속에 숨기면서 ‘전에 영화 한 편을 찍었었는데(전에 영화 두 편 촬영했었는데), 괜찮았어. 그만하면 봐 줄 만해.’라고 한다. 속으로는 만족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감히 자본으로 삼지는 못한다. 이런 것이 사람이 의존해 살아가는 것이다.

또 뭐가 있지? 너희들 가운데 혹시 이런 사람은 없느냐? 그 사람은 사나운데, 어디를 가나 주먹을 비긴다. 만나면 “어디서 왔어요? 서북에서 왔어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요? 서남쪽에서 왔어요. 자세한 지방은 말 안 할게요. 우리 쪽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걸 먹고 성질머리가 난폭한 편이라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죠. 그렇긴 해도 웬만한 사람들이 업신여길 엄두도 못 내요. 이게 특징이에요.”라고 한다. 그 뜻은 ‘어디 붙어 볼 수 있겠어요? 붙어 볼 용기가 있으면 해 보던지?’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주먹으로, 자신의 악독한 성정이나 포악한 것으로 사는데, 자기가 그러는 게 능력이고, 그것으로 살면 사람들이 업신여길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있지 않으냐? 그 사람은 사람들 무리에서 발을 붙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사람은 반드시 자립하고, 자강(自强)하며, 주먹이 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사람의 삶의 신조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붙이려고,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도 업신여길 엄두를 못 내게 하고, 아무도 우롱할 엄두를 못 내게 하거나 아무도 속일 엄두를 못 내게 하고, 아무도 이용할 엄두를 못 내게 하려고 스스로 이런 조항을 총결해 냈다. ‘난 싸워야 돼, 어딜 가나 사람들이 업신여길 엄두를 못 내게 천하무적이 되도록 싸워야 돼!’ 그 결과 살아온 10~20년, 30~40년 동안, 드디어 성과가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 속에 가서도 탁 앉아 폼을 잡고 눈을 부릅뜨기만 하면 아무도 말조차 감히 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고, 개들도 보고는 짖지 못한다. 이러면 악귀가 환생한 게 아니냐? 이런 자들은 주먹으로 산다. 주먹으로 사는 것은 무슨 성정이냐? 흉악한 성정이다. 어딜 가나 먼저 사람을 휘어잡고 이용하여 사람을 통제하고 굴복시키게 된다. ‘누가 나한테 무례하면 방법을 대서라도 그 사람한테 본때를 보여 줘야지. 누가 나에게 톡톡 쏘아 대고 말에 화약 냄새가 풍기면 ‘내 주먹이 얼마나 센지 맛 볼래? 한번 해보고 싶지 않아?’라고 할 거야.’ 대놓고 이렇게 말하진 않지만 속에 두고 있으면서 ‘시간 봐서 저 사람을 혼내 줘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걸로 살면 악독하지 않으냐? (악독합니다.) 그동안 살면서 그 사람의 악독한 본성은 성공했고 성과를 거두었으며 효과를 보았고 그를 만족게 했겠지만, 그것은 무슨 성정이냐? 이런 사람이 진리로 살 수 있겠느냐? 혈기와 악독한 성정으로 살면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은 처세 철학으로 너를 달래고 너의 비위를 맞추며, 너의 의중을 헤아리거나 너희들에게 그 사람을 중심으로 맴돌며 좋은 말을 해 달라고 달래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은 명성이 나빠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한 명성을 얻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이게 그 사람의 원칙이다. 됐다, 효과는 봤다. 효과를 본 뒤에는 어떠냐? ‘이제는 하나님 집에 발붙일 수 있어. 이 무리 속에서 자리를 잡았어. 누구나 다 두려워하고 보기만 해도 공손해지고 아무도 감히 날 건드리지 못해.’ 그 사람은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들이 건드릴 엄두를 못 내는 것일까? 사실 건드릴 엄두를 못 내는 것은 외적인 것이고, 마음 깊은 곳에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싫어하고, 멀리하고, 피하고, 증오하고, 역겨워한다. 그렇지? 그런 사람과 왕래하고 싶어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 사람은 항상 주먹으로 너를 쥐어박고 항상 어떻게 괴롭힐지를 고민하는데,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그 사람도 어떨 때에는 주먹을 쓰지 않는다. 주먹을 쓰지 않고 사람을 혼내 주는 수법도 많다. “너, 나한테 불만 있지? 있어, 없어? 솔직히 말해! 말을 못 하겠어? 그 사람이 다 말해 줬어. 너 말할래, 안 할래? 말 안 하겠다는 거지? 좋아, 그 사람보고 말하게 하지 뭐, 그 사람이 너를 고발하게 할 거야.”라고 한다. 그래서 너는 말하게 된다. 네가 말한 다음에 그 사람은 “앞으로도 또 이럴래?”라고 한다. 그럼 너는 용서를 빌고 사탄에게 항복한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좋아, 말만으론 안 되지, 종이 가져다가 손가락 깨물어서 혈서 써. 어디 다시 한 번 그래 봐!” 너희는 이런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용서를 빌고, 할아버지로 인정하고 손자가 된 셈이다. 그 사람이 주먹으로 쥐어박았느냐? 그냥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 무서워하고 움츠린다. 네가 멀리하려면 그 사람이 봐 줄까? 너희는 그런 악인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적발하겠습니다.) 맞다. 그 사람을 상대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어디에다 적발해야겠느냐? (상면에 적발해야 합니다.) 상면에 적발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그런 자를 두려워해야겠느냐?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무섭다. 무서워 죽을 지경이다. 믿음이 너무나 작고 너무 가련하다! 사실은 덩치나 주먹으로 따지면 너희도 그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을 무서워하느냐? 겉으로는 사람들이 다 악귀를 무서워하는 것 같다. 악귀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악귀를 무서워하지 않는 정상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은 귀신을 보면 다 움츠러들고 무서워한다. 그것은 귀신이지, 그렇게 악한 게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외부적인 것이다. 사실은 어떤 것이냐? 네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너는 그 사람이 너를 장악하고 너희 운명을 통제한다고 여기면, 끝나는 것이다. 아무런 간증도 없고 너무 못나고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이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자신의 잔머리로 산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겠고, 이 일을 상면에서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괜히 적발했다가 저 사람이 알기라도 하면 나를 더 힘들게 할 텐데? 그럼 난 더 끝장이잖아?’ 생각할수록 더 무섭고, 생각할수록 더 움츠러들어서 서서히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데, 그러고도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지킬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나약하지? 너희 다수가 다 이렇다. 얼마 전에 적그리스도가 일부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았느냐? 이렇게 물러 터져 억눌리고 통제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당하는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억눌림을 당할 때 보면 나쁜 일 같아 보이고, 억울함을 당하긴 했는데, 나중에 보면 그래도 좋은 일이지.”라고 하는데, 그것은 부득이한 견해이다, 방법이 없다. 꼭 그 사람에게 당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가 반항하지 않았잖느냐! 그 사람의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이냐? 이럴 때 싸다고 한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그런 자에게 통제를 받는다는 것은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고 믿음이 너무 가련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줄을 모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인권과 사람에게 준 권리로 적그리스도와 악인과 싸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너희가 사탄과 싸울 줄 모르면 사탄을 이기지 못한다. 그 사람은 분명히 악을 저지르는 자이고 부정 세력이고 사탄 마귀고 악령이고 더러운 귀신인데, 그 사람에게 당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했다. 가련하지 않으냐? 너희에게 다시 그런 일이 임하면 일어나 싸울 수 있겠느냐? (있습니다.) 너희들이 지금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정말 일이 닥쳤을 때는 테이블 밑에 기어 들어가 있어서 또 내가 끌어내야 할 것이다. 말은 쉽지만 그것을 행동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 사람이 진리를 몰라 일이 닥쳤을 때의 그 가련한 상과 비참한 상은 보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한다! 너무나 가련하다! 그 지경까지 억눌리고 통제당하고도 말을 안 하고, 뒤에 가서도 공포의 잔상이 있는데, 너무 가련하다. 잘 간파하지 못한다. 악인조차도 간파하지 못하면 사람의 분량이 얼마나 되고 진리를 얼마나 아는 것이겠느냐? 가련하지 않으냐?

악인은 무엇으로 사느냐? 악인은 일종의 악독한 본성으로 살고 주먹과 흉악한 성정으로 산다. 그 사람은 바로 그런 부류이다. 하지만 이런 부류는 아닐지라도 너희에게 이런 것으로 사는 정형이 없느냐? 누구하고 협력해도 ‘넌 어리니까 뭘 몰라. 내가 널 뭐라고 해도, 설사 대놓고 뭐라 해도 넌 날 어쩌지 못할 거잖아. 난 너보다 강하니까 우세하지. 내가 덩치도 너보다 크고 주먹도 너보다 세니까 널 괴롭힐 수 있어. 널 괴롭힐 수 있는데 왜 안 하겠어? 난 꼭 널 괴롭힐 거야.’ 이것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냐? (흉악한 성정입니다.) 주먹으로 살고, 사악한 성정과 흉악한 성정으로 살아가고, 일을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럴 때가 없느냐? 누가 온순해 보이고, 누가 둔해 보이고, 누가 구질구질해 보이면 ‘좋아, 먼저 저 사람하고 지내자.’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목적이 있다. 이것을 수법이라고 하지 않느냐? 이걸 수법이라고 한다. 이런 것으로 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얼마나 됐든, 너희가 언제 믿었든, 너희에게 사탄의 패괴 성정이 있고, 너희가 일종의 진리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살기만 하면, 그런 것들이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혹은 너희가 의식하는 것이든 혹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든, 혹은 외적인 것이든, 어디에서 얻어 온 것이든, 혹은 성정이든 자신의 고질적인 것이든, 결론적으로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닌데, 사람이 그런 것으로 살면 도대체 어떤 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일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 아니다. 또 뭐가 있느냐? 더 생각해 보고, 묵상해 보아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피조물의 본분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피조물의 본분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하긴 했다. 그럼 이 본분은 충성되게 한 것일까? 충성되게 할 때가 많지 않은데, 그것은 진리와 상관이 없을 때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 너희들이 잘 생각해 보아라.

이런 다양한 방면으로 정형을 교통하면 너희는 자신이 본분을 할 때나 일상생활에서 진리로 살 때가 많은지 가늠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럴 때가 많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와 교통하면서 계속 너희의 치부를 드러내니 너희는 사는 게 영예롭지 못해 삶의 자신감을 잃고, 사는 게 찬란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의 일도 많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복을 받거나 좋은 귀숙을 갖기에도 정당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좋은 일이 맞느냐? (맞습니다.) 그럼 치부를 드러내는 목적이 무엇일까? (저희에게 변화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도대체 어떤 정형에서 살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어떠한 정형에서 살고 있는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삶의 방식이 어떠한지, 어떤 잘못된 것들이 있는지, 어떤 비정상적인 것들이 있는지, 어떤 부당한 것들이 있는지, 더 나아가 네가 지금처럼 살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 앞으로 올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는 “저는 이렇게 사는 게 마음 편해요. 평안하지 못한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불쾌감을 느껴 본 적도 없고요. 공허함도 느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떨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인생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너에게 가르쳐 준 인생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방적인 소망 같은 그런 상상을 하면서 어떤 길을 찾아 하는 것이다. 비록 바쁘게 보내고, 비록 많이 뛰어다녔겠지만 최종의 결말과 목표가 하나님이 네게 정해 주신 것이 아니면, 너는 영원히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될 텐데, 그러면 너는 끝난 것이고, 실패한 것이다. 그럼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실패로 막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 믿는 길에서 실패는 무엇을 뜻하느냐? (결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말이 없다.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은 무엇이냐?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네가 진리를 얻으면 곧 결말이 있는 것이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도 다 부질없다. 네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너무 합리적이야. 난 이렇게 살아도 정말 자신감이 넘치고 마음에는 정말 충실감을 느끼고, 충만감에 풍족감을 느껴.’라고 할지라도 그게 소용 있겠느냐? 네가 어떻게 가든, 어떻게 살든, 무엇으로 살든 결과를 봐야 한다. 결과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면 네가 간 길은 옳은 것이지만, 결과가 하나님이 요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 준 길이 아니면 네가 가는 길은 틀린 것이다. 이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말이다. 네가 그렇게 사는 삶이 얼마나 근거가 있고, 얼마나 정의롭든, 너의 동력이 얼마나 대단하든 그것은 다 관건적인 게 아니다. 네가 ‘난 이렇게 살고, 이렇게 실행하면 정말 누림이 있어. 정말 행복감이 있고, 정말 영광스러워. 실증도 있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중에 누군가 “자매(형제)님은 진솔한 사람이 되기를 시작했나요? 어떤 상황에서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게 어려웠었나요? 체험이 있으면 얘기해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간증이 있나요? 하나님을 사랑한 체험이 있나요? 하나님께 순복한 체험이 있나요?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 뒤에 정형이 바뀐 체험이 있나요? 생명이 자라는 길에서 끊임없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게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자매(형제)님에게 정해 주신 목표와 하나님이 요구하신 목표에 가까이 가게 해 준 특별한 체험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이런 것에 대해 다 깜깜하고 모른다면, 너희가 가는 길은 틀린 것이다. 이것은 매우 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교통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일부 세부적인 방면의 것들도 기본적으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의지력으로, 좋은 마음으로, 고난받으려는 심지로, 관념 등등으로 하게 되는 일들은 모두 진리로 사는 게 아니다. 결론적으로 다 사람의 일방적인 소망으로, 사람의 패괴 성정으로, 인위적인 좋은 것으로, 사탄의 철학으로 사는 것인데, 그런 것들은 다 사람의 머리에서 온 것이다. 더 진일보로 말하면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으로 살면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을지라도 쓸모없고, 아무리 좋을지라도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결과다. 거기에 대한 답이 나왔다. 네가 ‘내가 이걸 실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좀 있어. 생각으로는 그렇게 실행하는 게 아닌데.’라고 한다. 네가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꼭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넌 어떻게 할 것이냐? 너는 돌려세워야 한다. 관념을 돌려세우고, 관념을 포기하고, 자신의 그릇된 부분, 치우친 부분을 알아야 한다. 돌려세운 뒤에는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찾고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너희는 점차 그쪽으로 실행하면서 정확한 길을 가게 된다. 그래야 너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너에게 준 목표에 닿을 수 있는 가망이 있다. 네가 하나님이 요구한 이 길에 따라 실행하지 않고 진입하지도 않고 ‘난 그냥 이렇게 할 거야. 어쨌든 난 한가하게 보내진 않았어. 계속 본분을 하고 있는 걸! 그래도 피조물로 살겠다고 결단했고, 창조주도 확실하게 인정했어.’라고 한들 소용 있겠느냐? 소용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고, 그것은 강퍅한 것이다! 지금은 인생길을 가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한 길로 갈 수 있는지가 가장 관건이다. 첫째, 사람의 상상으로 하면 안 된다. 둘째, 사람의 뜻으로 하면 안 된다. 셋째, 사람의 취향으로 하면 안 된다. 넷째, 사람의 감정으로 하면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패괴 성정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전부 벗어 버려야 한다. 너에게 어떤 자본이 있든지 여기에서는 모두 값진 것이 아니다. 다 쓸데없는 것들이니 버려야 한다. 계속 내던지고 계속 포기하고 계속 버리고 계속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준 표준과 요구 범위를 갈수록 더 많이 알게 되고, 그 범위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네가 늘 자기 것을 고집하면서 ‘내가 이걸 배우느라고 걸린 시간이 몇 년인데. 부모님이 나한테 들인 노력이 얼마고, 들인 돈이 얼마고 쏟아 부은 대가가 얼마인데. 그건 내가 수년을 밤낮으로 공부하며 배운 거야. 그걸 어떻게 쉽게 해부해서 정죄할 수 있겠어? 이건 큰일이고, 목숨이 달린 거야! 그게 없으면 난 뭘 가지고 살아?’라고 한다면, 너는 바보다. 그것으로 살면 너는 곧 지옥으로 가게 된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서 삶의 방식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원래의 것을 깨끗이 없애야 한다. 너는 그것을 분석하고, 그것을 인식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드러내어 형제자매들이 알게 하고, 분별하게 해야 한다. 털어놓다 보면 너는 어느새 그런 것들을 혐오하게 된다. 네가 보배롭게 여겼던 것을 혐오하게 되고, 네가 의존해 살았던 것, 네가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고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던 것을 혐오하게 된다. 이래야 그런 것들과 완전히 멀어지고 단절할 수 있으며, 참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로 갈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복잡하거나 간고한 과정이고,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너에게 병이 있으니 반드시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 수술대에 올라 칼을 대어 해부하고 종양을 제거하고 그 병을 치유하는 고통을 받지 않으면 너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람을 바보로 보느냐? ‘저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 있어? 진솔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고 정말 진솔한 사람이 되고 있네. 저 사람, 바보 아니야? 진솔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여지는 좀 남겨야 하지 않겠어. 있는 대로 다 말하면 안 되잖아!’라고 하면서 말씀대로 하는 사람을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냐? 그런 사람이 가장 똑똑한 것이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 거야. 하나님께서 가리키시는 대로 갈 거야. 난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할 거야. 순복하라고 하면 바보처럼 순복할지라도 그렇게 할 거야. 사람들이 다 나를 바보라고 하지만 그러든 말든 하나님만 나를 바보라고 하지 않으시면 돼.’ 보아라, 이런 사람이 가장 총명한 사람이 아니냐? 그 사람은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꼼수를 부리면서 ‘설마? 뭐든 다 순복한다면 바보잖아? 그럼 자주권도 없는 거잖아? 자아도 없는 사람에게 인간의 존엄이 존재하겠어? 아무리 어째도 나중에 존엄은 좀 남겨야잖아? 완전히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과 순복하는 것에서 얼마를 깎아 내렸느냐? (80% 깎아 내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나은 편이라서 50%까지는 간다. 반반, 중용의 길이니까,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태도를 혐오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항상 진리를 의심하고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 늘 의문스러워하거나 늘 냉대하고 멸시하고 마음 자세가 바르지 않은 것을 혐오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태도를 혐오한다. 사람에게 이런 태도가 있으면, 즉 하나님을 의심하고 의혹하며 의문을 가지고 분석하고 오해하고 늘 해부하면서 항상 머리로 판단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향해 숨을 것이다. 하나님이 숨는다면 네가 진리를 얻을 수 있을까? 네가 ‘난 얻을 수 있어!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받쳐 들고 보고, 계속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마다 설교 교통을 들을 거야! 그다음엔 날마다 튼튼히 다지고, 복습하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한다면 성령의 역사가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고 소용 있겠느냐? 그런 형식들은 가장 관건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네가 반드시 갖춰야 할 삶의 방식이긴 하지만 가장 관건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사람이 옳고 마음이 옳아야 하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을 향해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를 향해 얼굴을 가리지 않고 항상 널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고 진리를 얻게 해 준다면, 너는 너무나 큰 이득을 얻게 된다. 하지만 네가 마음이 옳지 못하고 늘 너의 잔머리나 관점, 지식이나 철학으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시험한다면, 그것은 위험하다. 어떤 사람은 경계하고 시험하고 의심하고 오해하는 것 외에 또 뭘 하느냐? 저항한다. 그것은 더욱 위험하다. 하나님과 대립 관계가 되고 사탄이 된 것이다. 네가 도리를 알았고, 진리의 글귀를 알았다고 진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 큰일이다. 알겠지?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영역이 있는데, 게다가 거듭 강조하면서 알려 줘도 그런 사람은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신 차리지도 않고 각성하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난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손에 들고 계속 보고 들으면서 지내고, 본분도 해마다 하다 보면 돼. 밭에 씨를 뿌려 놓고 김을 매지 않고 물을 주지 않아도 자연비에 젖으면서 천천히 자라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협력하는 성분과 협력하는 방식, 사람의 마음,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관건이다. 그게 가장 관건이고,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알겠지? 이런 것도 네가 무엇으로 사는지에 관련되지 않느냐? 네가 늘 자신의 그런 것들로 살면서 항상 하나님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를 상대하지 않는데, 네가 믿어 봤자 어쩌겠느냐? 창조주가 너에게 무관심하다면 너는 창조주의 피조물이 아닌 것이고, 창조주는 너를 마귀 사탄으로 대할 것이다. 그럼 네가 하나님 앞으로 올 수 있겠느냐? 그래 가지고 네가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되겠느냐? 그렇게 되면 네가 구원받을 가망이 있겠느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너의 소질이 어떻든, 네가 어떤 본분을 하고 있든, 네가 이전에 어떤 과오를 범했든, 너에게 얼마나 큰 은사가 있든, 혹은 네가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하든, 어떤 역할을 하든, 너의 가정 환경이 어떻든, 너의 지금 정형이 어떻든, 생명이 성장한 정도가 어떻든, 분량이 얼마나 되든, 지금 보면 이런 것들은 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너와 하나님과 관계가 어떤지, 네가 시종일관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거나 연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네 마음이 옳은지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매우 관건이다.

그럼 사람은 이런 관건적인 것들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늘 성찰해야지, 흐리멍덩하게 이방인과 같으면 안 된다. 그 사람들이 한가해서 동영상을 보거나 놀거나 떠들어대거나 장난친다고, 너도 덩달아 같이 놀고 떠들어대고 장난치면서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하면 안 된다. 네가 오지 않으면 하나님도 사정하지 않고, 너를 찾아가지도 않는다. 너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이것이 본업이다! 이것을 부업으로 삼거나 여가 취미로 삼지 마라. 그러면 큰일이다! 지금 이 시점까지 오면서 들은 교통만 해도 얼마나 많으냐?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 믿는 일을 종교를 믿는 것으로 여기고, 여가 취미로 삼고 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믿는 일을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느냐! 지금의 이 시점까지 왔는데도 아직까지 그런 관점을 갖고 있다.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이루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런 자를 자신을 따르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구원받을 가망이 있겠느냐?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일은 아주 중요하다! 어떤 일이지?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상 관계는 어떤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하느냐? (사람의 협력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이 협력하려면 어떤 관점을 돌려세워야 할까? 사람에게 어떤 입장과 관점이 있어야 할까? 어떤 정형이 있어야 할까? 어떤 마음이 있어야 할까? 그럼 너는 진리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 의심? 거부? 연구? 의혹? 어떤 관점이냐? 이런 것들이 있으면 옳은 마음일까? 그럼 어떤 태도가 있어야 옳은 것일까? 어떤 태도가 있어야 옳은 마음이고 옳은 사람이겠느냐? (믿고 받아들이고 순복하는 것입니다.) 믿고 받아들이고 순복하는 것인데,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바로 절대적으로 도달할 수 있겠느냐?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너는 진입을 시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네게 병이 있다.”라고 했을 때, 네가 “전 병 없어요. 병이 없는데도, 계속 병이 있다고 하시네요.”라고 한다고 하자. 그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네가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네 병이 매우 심각하니 약을 좀 먹어야겠구나.”라고 할 때 네가 “전 병이 없는데요. 근데 약을 먹으라고 하셨으니 먹을게요. 어쨌든 나쁠 건 없으니까요. 정말 병이 있다면 약 먹고 나을 수도 있겠네요. 그럼 먹을 게요!”라고 하면서 먹다 보니 ‘몸이 이전하고 좀 다른데. 그럼 좀 더 먹어 보자.’라고 하게 된다. 그렇게 갈수록 더 많이 먹으면서 끼니마다 정량대로 먹다 보면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 몸 상태가 갈수록 달라진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이 말씀한 병이 아마 진짜였나 보다고 믿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어떤 성과가 있게 되느냐? 결과는 무엇일까? 네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복했으므로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게 된 것이다. 네가 처음에 먹을 때는 정말 조금 먹고 정량대로 먹지 않았다. 하나님이 알려 준 대로 하지 않고 여지를 좀 두고 의심도 좀 하면서 좀 달갑지도 않고 내키지도 않았지만 결국에는 그 말씀을 듣고 약을 먹었다. 그랬더니 효과가 괜찮아 보여서 계속 먹었는데, 갈수록 자신감이 커지고,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고 믿게 되며, 갈수록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지 말아야 했었고 자기가 틀렸으며 하나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중에 네가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약을 다 먹어서 정말 건강하게 되었다면, 그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더 진실되지 않겠느냐? 그럼 너는 하나님 말씀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난 하나님께 100% 순복해야 돼. 하나님 말씀을 100% 실행해야 돼.’라고 하게 된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예를 들었을까? 너는 실패가 두렵느냐? 네가 ‘난 완벽해야 해.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순복하라고 하셨으니, 여지를 두면서 실행하면 안 돼.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실행해야 돼. 이번에 절대적으로 안 되면 다음으로 미루고 이번엔 아예 실행하지 않을 거야. 이번엔 제외야.’라고 한다면 어떻느냐?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에는 과정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물론, 들춰낼 때는 “너를 보아라. 여지를 두었다. 순복하지 않았다. 거역하고 있다.”라고 한다. 맞다, 사람에게 그런 정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들춰내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여지를 두는 면을 점점 적어지게 하고, 점점 줄어들게 하고, 실행이 갈수록 순수해지고, 완벽에 가까워지고 절대적이 될 수 있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런 목적이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것을 들춰내는 기간에 너를 징벌했었느냐? (징벌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에게 책망과 훈계와 시련을 주면서 그저 징계를 주는데, 뺨을 한 대 때리고, 한 대 차 놓는다, 아플까? 아프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 목숨을 거두어 갔느냐?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목숨을 거두지 않았고, 너를 사탄에게 넘겨주지도 않았다. 이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조금만 고난받아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은 날 좋아하지 않으셔. 난 끝났어.’라고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오해한다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네가 연약하든, 굳세든, 정형이 좋든, 혹은 좋지 않든, 생명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든 먼저 상관하지 말고 하나님이 한 말씀을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도전해 보는 식으로라도 실행하면 좋은데,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고 협력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한 정형에 들어가 하나님이 말씀한 그 진리를 실행하면 어떤 느낌인지 한번 체험해 보아야 한다. 그럼 자기가 유익을 얻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해도 좋지 않으냐? 이런 걸 경로라고 한다. 사람은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을 모르면서 항상 첫술에 배불리려고 하면서 늘 ‘절대적인 순복을 하지 못하면 순복하지 않을 거야.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있을 때 가서야 순복할 거야. 낯 두꺼운 사람으로 살지 않을 거야. 이러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 패기도 있어 보이고, 인격도 있어 보이고, 품위도 있어 보이잖아!’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을 무슨 패기라고 하겠느냐? 이런 것은 패역이라고 하고 강퍅이라고 한다!

두 번째 문제에 소제목이 모두 4개 있었는데, 너희가 스스로 돌이켜 보아라. 오늘 4가지에 대해 다 교통하지 않았느냐? 그럼, 알아들었거나 받아들이고 터득할 수 있는 것들이 잘 맞춰질 수 있는지 되새겨 보거라. 이전에 이런 화제를 교통한 적이 있느냐? 아마 특별한 정형이나 어떤 정형은 사람들이 다 장악하고 있고,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 실행에는 관련되지 않고 오늘 우리가 교통한 이 문제에도 관련되지 않는다. 오늘은 이 주제로 교통했는데, 이 각도에서 교통한 이런 정형은 진리 실행이나 진리대로 사는 것에 더욱 근접한다. 문제가 하나 더 있는데, 너희가 메모해 두었다가 우리 앞으로 천천히 교통해 보자. 그 문제는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런 것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이다. 오늘은 이것을 교통하지 않겠다, 너희가 적어 두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부정적인 정형만 들춰냈지, 그런 부정적인 정형에 비추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교통하지 않았다. 교통하지 않으면 너희는 그 정형이 어디가 잘못됐는지,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어떤 성정인지, 진리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그런 정형이 생겼을 때, 그런 일이 임했을 때, 너에게 그런 행위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진리로 대체해야 하는지, 어떤 진리들을 실행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느냐? 지금 중요하고 기초적인 것은 네가 이런 정형들을 먼저 파악하고 자신을 해부해야 하는 것이다. 너는 자기가 그런 정형에서 살고 있을 때, 최소한 마음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야 다음 절차에서 돌려세울 수 있다. 네가 돌려세우고 싶은데, 어디가 잘못됐는지,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돌려세울 수 있겠느냐? 돌려세울 필요가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그렇지? 그래서 우선적으로 그 정형이 옳은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어야 그 뒤에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형들이 유로될 때, 그런 것으로 살고 있을 때, 사람은 어떤 진리로 대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거의 교통하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는 너희 스스로 묵상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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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②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④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⑤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⑥법불책중(法不責众): 많은 사람이 잘못하면 처벌하기 힘들다는 중국 속담

⑦지방: 성(省), 한국의 행정구역인 도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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