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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편 무엇을 진리를 실행한다고 하는가

사람은 자주 설교를 듣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어떤 방면의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들은 데에서만 그치는데, 공심채와 같다. 자신이 구체적으로 추구한 것이 어떤지,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자신이 본분한 것이 어떤지 등 이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른다. 이것은 마음속으로 진리에 대해 여전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진리의 각 방면이나 각 조목의 진리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면, 일이 임했을 때, 먼저 전에 들었던 하나님 말씀 진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이 진리에서 실제가 있을까? 진입했을까? 이 진리가 생활 속의 어느 부분이나 어떤 대목의 일을 가리키는 걸까? 어떤 환경에서의 일을 가리키는 걸까? 어떤 배경을 가리키는 걸까?’ 시간이 되면 앉아서 묵상해야 하는데, 마음에 두어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으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면서 하나님 앞에 와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 쓰겠느냐? (일하는 데에 쓰는 것 같습니다.) 맞다, 겉면의 업무적인 부분에, 즉 일에 마음을 쓴다. 사람들 무리 속에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잘못을 따지는 등 이런 일에만 빠져 있고 진리 방면에서는 늘 파고들어 가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파고들어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일에만 묶여 있고 파묻혀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오직 하나님 집에서 일을 하거나, 본분을 하면서 뛰어다니거나, 바쁘게 보내거나, 공을 들이고 고생을 하면, 진리를 실행한 거야.’라고 한다. 사실은 틀렸다.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좀 억울해할 것이다. 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까? 네가 진리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설사 그렇게 했을지라도 좀 맹목적으로 한 것이고, 그 일을 매우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거나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채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한 것이고, 또한 어떻게 해야 맞고 어떻게 하면 틀리는지, 이런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대부분 일에서 다 일만 하는 것이다. 그 일을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진리에 부합되는지, 진리 원칙에 부합되는지를 모른다. 너 스스로도 모르는데,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확정할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확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진리를 실행했어요?”라고 진지하게 물으면 “실행했습니다.”라고 한다. “뭘 했는데요?” “그저께 다른 곳에 가서 하나님 집 일을 처리했어요.” 그것은 일을 한 것이다. 본분을 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힘을 들이는 본분이기에 진리와 연관시켜 보면, 그저 진리의 겉면만 지킨 것이다. 너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했다는 이런 세부적인 것이 없다. ‘이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거지, 내 자신의 의지력이나 좋은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다른 목적으로 하거나 맹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한 거야.’라고 하는 것들이 없다. 이런 사람은 일을 할 때, 대부분 정확하지 못하고 목표성이 없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네가 한 가지 일을 할 때는 한 가지 임무를 완성하거나 한 가지 본분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일을 놓고 말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은 것이고 진리와 무관한 것일까? 그러니까 본분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진리와는 크게 연관되지 않고 그저 좋은 행위에 불과하기에 선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지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는데,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 너는 그 일을 할 때, 하나의 범위나 규례를 지킨 것이다. 즉, 하나는 하나님 집 이익에 손해를 주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잘 지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보다 두어 번 더 뛰어다니고, 제때에 끼니도 챙겨 먹지 못하면서 고생도 좀 했다.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너는 너의 본분과 관련된 그 방면의 진리에서는 아마 합격되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가 더 있다. 네가 그 일을 할 때, 속에 어떤 패괴 성정이 있었는지, 즉 그 일이 임했을 때, 네가 어떤 생각들을 했었는지, 하나님이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하는 것을 네가 파내고 발견했는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네가 본분을 하거나 일을 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인식했는지, 여기에서 진리를 찾아냈는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가 아주 드물다, 그렇지? (아주 드뭅니다. 가끔 아주 얕게 인식하면서 “난 교만해.” 하고는 끝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대부분의 경우에 공식적으로만 인식하고, 더 깊은 것은 없다는 것이구나. (없습니다. 가끔은 본분을 하다가 순간 순간 가만히 생각해 볼 때면, 속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일은 했는데, 왜 텅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격한 요구가 아니라면, 너는 그 일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큰 원칙도 어기지 않았으며, 자발적으로 나쁜 일도 하지 않았고, 또 자발적으로 누구를 속이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면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하지 않았다고 해서 진리에 부합되게 했다는 것일까?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리에 부합된다는 것과 다르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도 다르다. 그것은 거리가 있고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럼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원칙 방면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방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떤 패괴를 유로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적게 묵상했고, 더 깊이 인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쁘게 보내고 나면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맞다, 바쁘게 보내다 보면 일만 하게 되고, 힘만 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다가 보면 ‘처음에는 이렇게 믿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왜 믿으면서 힘만 들이는 사람이 되었을까?’라고 한다. ‘힘만 들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효력하는 사람이 되었고,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할까? 왜 효력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너는 이렇게 효력만 하고 싶으냐? 너는 금방 믿기 시작했을 때는 효력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잘 믿고 진리를 깨달아 나중에 천국 가야지. 적어도 죽지는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믿어 오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지, 하나님께 순복해야지.’라고 했지만, 왜 자기도 모르게 힘만 들이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것은 네가 하나님이 배치해 준 환경에서 본분을 하는 기간에 항상 진리에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에 항상 진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기간에 그저 힘만 들이는 것으로 본분하는 것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본분을 하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본다. ‘최근에 뭘 얻었지?’ 생각을 해 보다가 ‘두번 멀리 외출했다가 하마터면 일이 생길 뻔했는데,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어. 하나님께 감사드려!’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지켜 주셨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것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건 어떤 진리에 속하는 거지? 하나님에 대한 경력이 좀 있는 것일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좀 있는 것일까? 이런 일들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데.’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과 확신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촉동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네가 자신에 대해, 자신의 본성과 실질, 인성 품질에 대해, 자신의 분량에 대해 더욱 정확하고 깊은 인식과 평가가 있도록 너를 촉동하지 못한다. 너는 자신이 한 일들을 돌이켜 보아라. 지금까지 진보가 있었는지, 진리와 진리 실제에서 진보가 있었는지 돌이켜 보아라. 만약 돌이켜 보고 ‘그동안에 일은 많이 했지만 얻은 게 너무 적구나.’라고 한다면, 그동안 너에게 진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그동안 진리를 실행했다면 진보가 있지 않을까? (많든 적든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분명 진보가 있다. 만약 “적극적인 방면에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너무나 깊어 아직 이르지 못했습니다 . 이 공과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극적인 방면에서는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폭로하신 패괴 성정, 사람의 실질, 하나님과 적대되고 맞서는 실질, 사람의 사악한 본성과 궤사, 그리고 하나님이 드러내신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원래는 자신과 대조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발견했고, 대조도 됩니다.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자그마한 느낌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진보이다. 너에게 이런 느낌이 있다면,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세히 묵상하고 생각해 볼 때 ‘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깊이 뿌리박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하나님께서 사람을 폭로하신 게 틀리지 않아. 하나님 말씀에 정말 아멘이야, 하나님 말씀은 참으로 진리야, 너무나 정확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해도 난 안 그래,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도 난 안 그래.’라고 하지만, 한 가지 일이나 하나의 생각을 통해 문득 ‘내겐 자신할 만한 게 하나도 없구나.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가 있어야겠구나. 사람에게 정말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으면 안 돼. 사람이 오늘까지 오게 된 건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고 긍휼이야. 사람은 칭찬할 만한 게 없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느낌은 경력으로 얻은 것이다. 그럼 그런 경력은 입으로 말해 내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주입해 넣은 것일까? (자신이 경력한 것입니다.) 너 자신이 마음으로 느낀 것이고 체험한 것인데, 이것이 세부적인 것이다. 이 세부적인 것, 가장 깊은 것은 하나님을 믿는 너의 생애에서 너로 하여금 그 기초에서 점점 더 깊게 진입하게 하는 것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고, 네가 얻어 낸 것이다. 이런 것은 깊은 것이다. 매우 깊다. 그럼 이런 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해야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죠.”라는 빈말과 큰 도리보다 진실하지 않으냐? 너에게 이런 경력이 있고 마음에 이런 체험이 있다면, 너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진리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일깨움을 받아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게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다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네가 빈말만 하고 규례만 지킨다면, 하나님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가까워지지 못할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향상되지 않고 개선되지 않고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생명이 자라지 않았고 정형이 좋아지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한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한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임하는 일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인지, 자신에 대해 정확하거나 깊이 인식하고 가늠할 수 있는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일이 임했을 때, 항상 글귀를 말하고, 큰 틀만 말한다면 그런 사람은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이다. 진리 실제가 없는 사람은 일이 임했을 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실행하지 못한다. 아마 그런 사람은 “일이 임했으니 하나님께 순복해야죠.”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일에서 왜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하느냐? 원칙은 맞는데, 네가 하는 행위는 아마도 마음 깊은 곳에서 네가 그 일을 대하는 어떤 방식에 순복하는 행위일 수도 있고, 너 스스로 가늠하고 규정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 순복해야지.’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속으로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항상 오해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틀려. 그래도 순복해야지, 순복해야 돼.’ 그러면서 계속 ‘순복’만 한다. 네가 순복은 했지만, 성정은 변화되지 않았다. 너는 규례를 지킨 것이지, 진리를 실행한 것이 아니다. 너는 자신의 패괴 성정으로 인한 그 정형을 돌려세워야 한다. ‘이 일을 분명히 알게 됐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했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알겠어. 내가 고통받고, 연약해지고, 좌절당하고, 일어나지 못하고, 괴롭고, 눈물을 흘릴지라도 하나님께 순복할 거야. 하나님이 하시는 건 다 좋은 거라는 걸 아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건 다 맞아. 하나님은 일을 틀리게 하실 리가 없어.’ 보아라, 입으로만 “순복해야죠.”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순복’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속은 부글부글 끓고 오해와 원망이 가득하다! 그 일이 그 사람에게는 사실 감춰져 있는 부스럼인 것이다. 겉면은 좋아 보이지만 속은 병들어 있어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다. 이런 ‘순복’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이 순복했든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고, 참된 이해도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즉, 네가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그렇게 순복한다면, 아무리 많이 순복해도 단지 규례일 뿐이어서 너의 패괴 성정이 변화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한 일에서 자신의 패괴 성정에 대해 인식하고, 하나님이 한 것에 대해 이해하고 인식하고 헤아려서 진실로 순복하는 것, 즉 기꺼이 순복하는 것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에 도달해야만이 참으로 성정이 변화된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솔을 사오거라.”라고 했다고 하자. 네가 “어떤 걸로 사 올까요?”라고 물으니 하나님이 “양털로 만든 것을 사오거라.”라고 했다. 너는 생각해 보더니 “알겠습니다. 사오겠습니다.”라고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양털 솔을 어디서 팔지? 양털 솔은 이제 안 나오는데, 굳이 그걸 사야 하나? 양털 솔을 사오라고 하셨으니까 사오지 뭐.’라고 한다. 왜 양털 솔을 사오라고 하는지 모른다. ‘사오라고 했으니 사지 뭐. 어쨌든 여기저기 찾아보자. 순복해야지.’ 한참 찾아다녔지만 돼지털 솔이나 야자수 솔, 플라스틱 솔, 철사 솔은 보았는데, 양털 솔만은 안 보인다. 그래서 ‘양털 솔을 사라고 하셨는데 없잖아! 다 털로 만든 솔이니 돼지털 솔로 사고 말자. 어쨌든 털로 만든 거잖아.’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사 갔다. 이것도 순복한 것이냐? 사 오라고 하니 사 갔다. 과정을 거쳤고, 물건도 샀다. 비록 이름은 같지 않아도 말이다. 하나는 양털이고, 하나는 돼지털이다. 양털 솔은 사오지 못했다. 파는 데가 없어서 돼지털 솔을 사온 것이다. 왜 양털 솔을 사오라고 하는지 찾고 구해 봐야 한다. 이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 시장에 양털 솔은 안 파는 것 같아. 그걸 사지 못한다면 돼지털 솔을 사도 될까? 돼지털 솔도 사지 못하면 플라스틱 솔을 사도 될까? 플라스틱 솔을 사지 못하면 다 마찬가지로 동물 털이니까 닭털 솔을 사도 될까?’ 이렇게 먼저 찾고 구해 봐야 한다. 이런 것이 마음을 기울이고,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뭘 살까요?” “양털 솔을 사오거라.” 하니, 그저 그런 마음이 없이 ‘어디 가면 양털 솔을 살 수 있을까?’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패괴 성정이다. 겉으로는 순복하고 그대로 했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고 그 어떤 의심도 없지만, 마음으로는 저촉하고 의심한다.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찾고 구해 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패역 성정인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찾고 구하면 된다. 하나님이 찾고 구하지 말라고 했느냐? 아니지?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는 다 공개되고 뚜렷하게 알려진 것이지, 조금도 숨긴 것이 없다고 말씀하였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너에게 공급할 수 있으므로 너는 물어보지 못할 것이 없고, 또한 하나님도 너에게 숨길 것이 없다. 그러니 찾고 구하면 된다. 그런데 왜 찾고 구하지 않는 것이냐? 뭐 중얼거릴 게 있느냐? 그것이 패괴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것은 패괴 성정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너는 먼저 ‘내가 이 일에서 생각한 것이 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맞지 않을까? 난 왜 이해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봐야 한다. 모르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것도 정상이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도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물어봐야지.’ 이렇게 물어보면 순복하는 태도가 있지 않으냐? 일단은 순복하는 태도가 있게 되었다. ‘잘 모르겠고 이해되지도 않지만, 그래도 반항하지 않고 속으로 규정하지 않을 거야. 다른 방법으로 때워 대충 넘길 거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어. 물어봐야지.’ 하면서 물어봐야 한다. 그럼 태도가 맞고 마음도 올바른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네가 그 일에서 마음을 기울였고 마음을 들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네가 하나님이 너에게 준 부탁과 맡긴 일에 마음을 썼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그것을 모를까? (아십니다.)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너를 성실하다고 한다. 성실한 표현이 어떤 것일까? 네가 모를 때, 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찾고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주장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체하지 않고, 몰래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체하지도 않으며, 찾고 구하는 태도와 마음, 충성심을 갖고, 참다운 태도로 하나님의 부탁과 하나님이 맡긴 일을 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양털 솔로 물건을 솔질하면 보통 정전기가 생기지 않지만, 플라스틱 솔로 솔질하면 정전기가 생긴다. 양털은 부드러운 편이어서 부드러운 물건이나 양모 옷이나 다른 곳을 솔질하면 그런 것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 돼지털 솔은 너무 뻣뻣하고, 플라스틱 솔은 정전기가 생겨 양모 옷에 손상을 준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 그런 거였네요. 그럼 꼭 양털 솔을 사야겠습니다. 없으면 일단은 안 사고, 나중에 보이면 그때 살게요. 계속 찾아보다가 보이면 얼른 사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만약 하나님이 “된다.”라고 하면 네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하나님이 “안 된다.”라고 하면 넌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는 계속 찾고 구해야 한다. “만약 정말로 없으면,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하면 하나님이 너에게 답을 주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너에게 원칙을 줄 것이고, 절대로 너에게 추측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지금 없으면, 살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찾아보거라. 찾게 되면 그때 가서 사면 된다. 지금부터 계속 찾아보거라!”라고 알려 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해 주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한 말씀은 모두 네가 실행해야 할 길이다. 네게 길을 주었으니, 너는 모색하거나 추측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첫째, 왜 양털 솔을 사야 하는지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것은 네가 찾고 구해서 알게 된 것이고, 네가 마음을 기울여 찾고 구하고 물어서 얻게 된 결과이다. 너는 답을 알게 되었고,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둘째, 만약 사지 못했다면 또 사야 할지에 대해 계속 찾고 구해 본다. 만약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지금 살 수 없으면 기다려도 된다. 네가 여러 곳을 돌면서 여기저기 보다가 만약 어디에서 발견하게 되면 그때 사도 된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너는 또 깨닫게 되었고 실행의 길이 하나 더 있게 된 것이다. 우선, 너는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의 원뜻과 출발점, 목적이 무엇인지를 마음속으로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그 물건을 언제 사와야 하는지, 만약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시간을 기다릴 수도 있는지 하는 등등 하나님의 뜻을 네가 더듬어 낸 것이다. 이 두 가지로 너는 충분히 하나님의 뜻에 진실하고 정확하게 순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 밖에 만약 네가 마음을 더 들일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 만약 아주 어렵게 솔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질이 안 좋다면 살까요, 사지 말까요?”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네가 찾고 구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하나님이 “질이 안 좋아도 괜찮아, 돼지털 솔보다도 낫고 플라스틱 솔보다도 나아. 최소한 그건 그래도 양털이니깐.”이라고 말씀한다. 넌 또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해 낸 것이 아니냐? 네가 여기까지 찾고 구하면서 계속 마음을 기울인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은 모두 마음을 기울여 묵상해 얻은 것이 아니냐? 네가 만약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떨까? “가서 양털 솔을 사오거라.” 하면 “네! 가서 사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일어나 간다. 생각 없이 가 보니 양털 솔이 없어서 ‘돼지털 솔을 사 드리면 그만이야.’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대충대충 하는 성정입니다.) 대충대충 해서 하나님을 거역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의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체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짐작한다. 나중에는 또 무엇이라고 하느냐? ‘흥, 돼지털 솔 사왔더니 싫어하시네. 꼭 양털 솔을 원하시니, 정말 시중들기 까다롭네! 내가 사 드렸는데도 하나님은 또......왜 이렇게 시중들기 까다로우실까?’라고 한다. 나중에 하나님이 너에게 순복이 없다고 말씀하자, 너는 속으로 내키지 않아 한다. ‘왜 순복하지 않았다고 하실까? 이번에 다니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여기저기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데도 이해해 주시지 못하시네!’ 누가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그것은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일을 받아들이고도, 걸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에 확신이 없다면 너는 마치 바보 같고 마치 생각 없는 동물 같아 그렇게 맹목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고는 나중에 가서 “저는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다 했습니다. 사람의 뜻도 섞지 않고 하라고 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제가 말도 참 잘 듣고 착하기도 하죠. 저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건성으로 대해 속이지도 않았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다 했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네가 어디에서 순복했느냐?”라고 한다. 너에게는 이런 구체적인 표현들이 없다, 그렇지?

이제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알았겠지? 하나님께 순복한다는 이 일만 놓고 말하면, 무엇을 진리를 실행한다고 할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저의 관념에 맞지 않을 때, 일단 제 입장에 서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지?”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듬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더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맞다, 이런 실제에 진입해야만 하나님께 순복하는 실제가 있게 되는 것이지, 한 마디 말씀을 듣고 그냥 그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세부적인 것이 없으면, 그것은 규례이고 단지 행위일 뿐이다. 네가 듣고 나서 할 수 있다면, 너의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서 규범적인 편이라고는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규범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보기에 규범적인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다르고 진리의 실제가 있는 것과는 다르다. 바로 이런 차이점이 있다. 사람은 이런 세부적인 부분이 부족하고 이런 구체적인 것이 없는 것이 아니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용어, 글귀, 이론, 이 몇 방면에만 머물러 있다. 그다음 한동안 뭘 다루고 주로 무엇을 잘 말하면 그것을 따라서 말하고는 그만인데,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겠느냐?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실제는 사람이 살아낸 것으로, 진리를 살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낸 것이다. 그런 것을 하나님 말씀의 실제라고 한다. 너에게 세부적인 것이 있고 살아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진리의 실제가 있는 것이다. 네가 진리의 실제를 살아내야 진리를 실행한다고 할 수 있고, 살아내지 못하면 진리를 실행한다고 할 수 없다. 요리사를 말하자면, 기다란 모자를 쓰고 요리사 옷을 입었다고 다 요리사라고 할 수 있느냐? 요리사 학교를 다닌 사람은 다 요리사가 되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람을 요리사라고 하느냐? (진짜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맛있는 요리는 굳이 음식점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도 맛있는 요리나 유명한 요리를 한상 가득 만들 수 있으면, 그런 사람도 요리사라고 한다. 그렇지? 요리사라고 하면 사람이 정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요리사인 것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요리사는 기다란 흰 모자를 쓰고,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그다음 큰 팬을 돌릴 줄 알고, 불길을 조절할 줄 알며, 칼질을 잘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해 낸 것이 아니다. 그렇지? 어떤 사람이 요리사인지 정의하지 말자. 긴 모자도 안 쓰고, 요리사 옷도 안 입었어도, 그 사람이 고기, 쌀, 가루, 야채, 갖가지 과일로 풍성한 밥상을 만든 다음, 먹고 싶어 하는 사람과 배고픈 사람들에게 보기만 해도 입맛이 당기게 하고, 그들이 먹고 난 뒤에 누구나 다 ‘맛있게 했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다,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것은 요리사가 만든 것이다, 요리사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요리사인 것이다! 요리사는 정의해 낸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스스로 정의해 낸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에서 너의 진입이 있는지를 본다. 그다음 네 자신이 진입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체험이 있고, 어떤 경력이 있으며, 어떤 인식이 있게 되었는지를 본다. 너는 자신이 매우 인식이 있고 경력이 있으면 진리의 실제가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검증하는 기준이 하나 있다. 즉, 네가 하나님을 믿은 그동안, 그러니까 지금까지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인 것이냐? 바로 가장 큰 환난이나 시련이 임했을 때,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진실한지 아니면 거짓인지, 검증을 이겨 낼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이 한 가지로도 너를 검증할 수 있는데, 다른 것이 더 필요하겠느냐? 필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과 확신을 검증함에 있어 이것만 검증하면 되고, 다른 것은 검증할 필요가 없다. “마음속으로 누구를 가장 그리워하느냐?”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우리 엄마요.”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 아들이요.”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 마누라요.”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 집 강아지요.”라고 한다. 만약 하나님이 환경을 배치하여 네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아끼고, 가장 마음을 주고,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 가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네가 알아차린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느냐? 입으로만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당신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몇 마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숨이 끊어지려 하는데, 네가 그 몇 마디 말로 통과될 수 있겠느냐? 통과될 수 없다. 너의 마음은 너무나 괴롭다! ‘그가 죽으면 나도 안 살래.’ “그럼 하나님을 안 믿겠어요?” “그가 죽으면 저도 하나님을 안 믿을래요.”라고 한다면 끝인 것이다. ‘그가 죽으면 나는 안 살래. 나도 같이 죽을래. 난 그가 없으면 안 돼!’라고 한다면 끝이다. 그러면 너는 철저히 드러난 것이다. 너는 어떤 믿음이냐? 그가 죽으면 너도 살지 않겠다고 하면서 하나님마저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겠느냐? 알고 보니, 너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있구나. 너는 사람만 필요하지,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구나! 이것은 검증으로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냐? 그럼 네가 평소에 했던 그런 말은 어디에 있느냐? 실제는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너의 분량이 되지 못했기에 너에게 일이 임할 때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을 주도하지 못한다. 이런 일에서 그동안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은 말뿐이었고, 마음에는 없었으며,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 검증으로 드러났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도리든 다 알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참된 믿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 없을까? 네가 하나님을 믿어 온 동안, 네가 들은 것, 얻은 것, 본 것, 경력한 것이 너의 실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커지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도 없으며, 또한 너에게는 하나님이 확실히 존재하고,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이런 이상(異象)마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상이 없으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임할 때 작은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고, 작은 바람이 불어도 비틀거린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진실한 믿음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경력해서 생긴 것입니다.) 경력해서 생긴 것이다. 어떻게 경력해서 생긴 것이냐? (매번 이런 작은 일들이 임할 때마다 찾고 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그다음 점차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경력이 많아져 점차 쌓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됩니다. 입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한 걸음씩 이렇게 경력해서 생긴 것입니다.) 바로 네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그 하나님이 네 마음속에 계셔서, 다른 사람이 가져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욥과 같다. 그의 친구들이 “너는 죄를 범했으니 하나님께 득죄했다. 얼른 여호와 하나님께 사해 달라고 구하여라.”라고 했을 때 욥은 어떻게 말했느냐? 그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왜 그렇게 여기지 않았느냐? 몇십 년의 인생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은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해 주시고, 사람에게 긍휼만 베푸시는 하나님이셔서 사람에게 있는 것을 전혀 빼앗지 않으신다.”라는 이런 인식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있는 것을 빼앗을 수도 있고, 사람에게 베풀어 줄 수도 있고, 그와 동시에 심판, 형벌할 때도 있고 책망하고 징계하고 채찍질하고 징벌할 때도 있다는 것을 경력하였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것은 사람의 머리나 사유, 상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몇십 년의 삶 속에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총결하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은 하나님이 한 것이고, 나쁜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사탄이 감히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설사 사탄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사탄이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사탄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해도 따져보면 역시 하나님이 주재한 것이다. 욥은 이 정도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원망이 없었다. 흔히 하는 말로 무엇이라 하느냐? 세상의 각종 요괴와 악마, 이런저런 영, 천사 따위는 다 하나님이 아니다. 누가 만유를 주재하느냐? 누가 인류를 주재하고, 모든 것을 주재하느냐? 하나님이다. 흔히 하는 말로, 하나님이 가장 큰 것이다. 즉, 사람이 가난하든 부유하든, 안일하게 지내든, 고통스럽게 지내든, 어떻게 생활하든, 한평생의 수명이 길든 짧든, 가정이 어떻든, 다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이다. 욥은 이 방면을 아주 깊이 체험했다. 왜 그가 아주 깊이 체험할 수 있었을까? 그는 한평생 임한 일에서 이 방면을 한두 번 체험한 것이 아니고, 아주 깊이 체험한 것이다. 즉, 그가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매번 이런 일이 임할 때마다 마음에 깊이 새겼고, 이런 일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뜻에서 온 것도 아니고 사탄에게서 온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니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고 느꼈던 것이다.

원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일이 임했을 때, 최소한 먼저 순복해야 합니다. 욥을 놓고 말하면, 비록 하나님이 배치하신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은 몰랐지만, 그에게는 순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욥이 그전의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통스럽고 연단도 아주 많이 받았지만 그에게는 순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즉, 그는 논단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받아들이는 동시에 찾고 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떤 것을 체험했느냐? “하나님은 지고지상하고 지혜롭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설사 네가 하나님이 이전에 이와 같은 일을 한 적이 있음을 알고 있을지라도, 이번에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논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면 너는 그저 찾고 구하고 기다리고, 그다음 순복하여라. 이것이 가장 좋은 실행 방법과 실행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너는 부끄러움에 수치까지 당하게 될 것이다.” 욥은 이런 일들을 아주 깊이 체험했다. 네가 만약 늘 하나님을 오해한다면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하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네가 늘 오해하면 틀림없이 하나님과 멀어지고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 이해하지 못하면 진실한 순복이 없고, 진실한 순복이 없으면 영원히 참으로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역사하는 것도, 너에게 어떤 방식으로 심혈과 대가를 쏟아붓는 것도, 너에게 어떤 환경을 배치해 주는 것도, 결국은 너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고 정상적이 된다. 하나님은 까닭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할 일 없어 아무나 데려다가 심심풀이 상대로 삼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기든 혹은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에게는 잘못이 없다. 이 말은 어떻게 온 것이냐? (베드로도 경력 가운데서 깨달은 것입니다. 욥의 인식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의 뜻은 다 좋은 것입니다.) 어떤 때 이렇게 좋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다려야 하고 인식해야 한다. 보아라, 비록 그들이 서로 다른 시기와 배경에서 말하고 경력한 일이 다르고, 한 말과 언어가 좀 다르지만, 그들의 실행 길과 실행 방식은 같고,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을 대하는 정형은 같은 것이다. 다만 서로 다른 언어로 그 뜻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 후세 사람에게 보게 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순복을 실행해야 맞는 것이고, 순복을 실행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주는 뜻을 찾고 구하고 기다려야지 조급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선 이런 정형과 태도가 있어야 맞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일이 임하기만 하면 몹시 초조해하고 펄펄 뛰고 가슴을 치면서 “이 일은 정말 하나님이 잘못하신 거야. 난 이해가 안 돼! 이 일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셨어. 난 정말 순복할 수 없어. 이치에도 안 맞고 경우에도 어긋나!”라고 한다면, 사람의 생각과 관념, 상상이 다 나온 것이 아니냐? 그럼 너는 하나님께 인도해 달라고 할 자격이 있느냐? 순복이라는 것은 입만 놀리거나 교통만 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고, 심지(心志)를 좀 표하거나 억제하면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면, 나중에 네가 얻는 결과와 수확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대해 이해와 진실한 체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떤 마음이냐? 하나님의 고심,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그런 마음이다. 하나님은 네가 패괴 성정에서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너를 패괴 성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듯 너를 심판 형벌하고, 책망 훈계하고, 질책하고, 징계하는 방식을 택했다. 심지어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것이 인지상정에 어긋나고 너를 우롱하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할 때, 이런 일을 할 때, 네가 하나님의 그 고심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럼 너는 진실한 순복이 있는 것이다.

보아라, 욥은 이 일을 어떻게 이해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던 것을 도로 거두어 가려 하시는구나.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거두어 가시고 싶으면 거두어 가시는 거야. 아무튼 내게 있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온 거야. 그분이 나에게 주고 싶지 않으시다면, 거두어 가실 권리가 있어.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런 권리가 있으셔. 나는 안 된다고 할 자격이나 거부할 자격이 전혀 없어. 내가 갖고 있는 건 다 하나님에게서 온 거니까.’ 보아라, 욥은 이렇게 인식했고, 또한 이렇게 행했으며, 이렇게 경력했다. 그는 당시에 이렇게 인식했는데, 무엇을 결심했느냐? “나는 하나님을 이해해야 하고, 이지(理智) 있는 일을 하고 이지 있는 사람이 돼야 해.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이니, 하나님이 언제 가져가실지는 하나님 마음대로야. 따지면 안 돼. 따지면, 그것은 거역하는 거고, 거부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는 거야. 그러면 참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고, 진정한 피조물이 아니야.” 그 결과, 어떠했느냐? 욥은 당시 그렇게 실행했는데, 어떤 역할을 한 것이 되었고 어떤 성과를 가져다주었느냐? 사실, 참된 성과는 더 부유해진 것이 아니다. 우양이 예전보다 더 많아지거나 자녀들이 예전보다 더 예뻐진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욥에게 덤으로 준 은혜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진정으로 얻게 한 것은 바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더 이해하게 한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게 한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더 가까워지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또 어떤 일을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고, 패역하고 망령된 말을 하지 않고, 참람한 말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은 패괴 성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냐? 이러면 철저히 변화된 것이다. (본성 안에 있는 것들에 통제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통제받지 않게 된 것이다. 욥은 그런 것에 단속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관할을 받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욥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보아라, 당시 욥에게 이런 정형과 태도가 있었고, 게다가 이렇게 했고 이런 실제에 진입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날 때, 그에게 앞모습을 보였든 뒷모습을 보였든,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인식이 깊어졌느냐, 아니면 얕아졌느냐? (깊어졌습니다.) 틀림없이 깊어졌다. 뒤처질 리는 없다. 그럼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즉, 원래는 전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고, “그럴 듯하다” “그런가?” 이런 어렴풋한 심리를 갖고 있던 데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정하고 확인하게 되었을 때, 어떤 것이 사람에게 더욱 축복이냐?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 더욱 축복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늘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셨고,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고, 나를 높이 평가해 주셨고, 뭇사람 가운데서 나를 발탁해 주셨어. 하나님의 축복으로 온 가족이 행복하고 즐겁고 평안해졌어. 그리고 어디를 가든 설교를 잘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 다 부러워하고 탄복해……’ 이런 것들을 얻었지만, 사람은 무엇이 참된 것인지 모르고, 무엇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고 더해 주려고 하는 것인지를 모르며, 이런 겉면의 것만 구한다. 늘 이런 것만 구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얻지 못하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렇게 가까울 리가 없다. 그렇지?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은 사실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고, 패괴 성정을 벗어 버리는 과정이며, 또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여 교제하고 일 처리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것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했는데,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겠느냐?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왜 가까워지지 못하겠느냐? 너는 날마다 중얼대며 늘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기도하는데, 그럼 이 기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느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는 느낌이 들었느냐? 너는 그동안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많아졌고, 원망과 오해와 패역이 적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느냐? 그런 느낌이 없는 것 같고 아직도 원래 그대로라면, 너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은 것이다. (일정한 기간마다 이렇게 반성해야 합니다. 이 기간에 도대체 이런 변화가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나 마음속의 깨달음이 있는지를 가늠해 봐야 합니다. 없다면 이 기간에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었음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허송세월한 것이고, 힘만 쓴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어떤 본분을 하든 다 효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의 선택이고, 네가 가는 길이 바로 그런 길인 것이다. 누가 너에게 효력하고 힘만 쓰라고 한 것도 아니고, 누가 너에게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너 자신의 선택이다. 네가 가는 길이 바로 그런 길인 것이다. 사람이 다니는 문으로 다니지 않고, 너는 기어코 개구멍으로 다니려고 한다. 네가 개구멍에서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는 개구나.”라고 하니 “날 욕하네!”라고 한다. 개구멍으로 다니니 당연히 개지. 개구멍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개가 다니는 곳이다. 사람이 다니는 문으로 다니지 않고, 기어코 개구멍으로 다니니, 네가 거기서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를 개라고 한 것인데, 그럼 어쩌겠냐? 이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냐?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효력자의 일원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 다들 손을 잡고 공동으로 효력하며, 분발 노력하고, 자력갱생하는 것이다!

보아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이처럼 힘들다. 가다가 보니 효력하게 된 것이다. 간신히 성과와 수확이 조금 있게 되었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또 치우치게 된 것이다. 치우치다 보니 또 효력하게 된 것이다. 효력하면서도 자신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일정한 기간마다 반성해야 한다. 자세히 성찰한 다음 다른 사람은 요즘 뭘 얻었고 자신은 요즘 뭘 얻었는지 서로 함께 교통해야 한다. “제 안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아직 적지 않아요. 아직 해결한 것이 얼마 안 돼요.”라고 하니, 그가 “저는 요즘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한 것 같아요.”라고 한다. “어떻게 이해했어요?”라고 물으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생하라고 하시는 것은 좋은 일이죠. 예전에 저는 고생을 두려워했었어요. 고생하라고 하면 온몸이 다 떨리면서 두려워 피하고 싶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었어요. 근데 지금은 고생을 하고 나면 사람이 좀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하나님 앞에 안정할 수 있으면 웬만해서는 겉면에 떠 있지 않게 되지요. 고생하는 건 좋은 일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늘 사람에게 고난받도록 환경을 배치해 주시는데, 하나님의 애쓰시는 마음과 목적을 조금은 이해하고 느끼게 된 것 같아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 다 좋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렇게 교통해야 한다. 교통하다 보면 수확이 있게 된다. 몇 사람이 모여 툭하면 “누구누구는 또 잘 믿지 않고, 누구누구는 요즘 정형이 괜찮던데요.”라고 교통하는데, 이런 것을 교통해서 뭘 얻을 수 있겠느냐?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일,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 말다툼을 일으키기 쉬운 일, 이런 일들을 얘기하고 나니 다들 요즘 헛되이 보내지 않은 것 같고, 요즘 아주 충실한 것 같으며, 하나님 믿는 일과 하나님 집의 일을 얘기한 것 같기도 한데, ‘왜 마음이 편안하지 않지?’라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 진리 쪽으로 교통하고, 진리 쪽으로 깨닫고, 진리 쪽으로 노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노력하게 되면 성령이 역사하고 깨우쳐 준다. 생명 진입 방면에서 부족한 점이나 혹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부담으로 여겨 마음에 두고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한다. 어디 갔다가 장씨를 만났는데, 네가 보기에 장씨가 좀 알 것 같으면 그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 같이 이 일을 얘기해 봅시다.”라고 해야 한다. 이러면 네가 얻는 것이 많아지지 않겠느냐? 너는 계속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툭하면 다른 사람과 일상사를 가지고 떠드는데, 떠든 후에 뭘 좀 얻었느냐? “뭘 얻든 말든 상관없어, 아무튼 요즘 빈둥거리지만 않았으면 돼!”라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저희는 사역을 상의한다는 것이 일만 가지고 말합니다. 다 같이 토론하고, 토론이 끝나면 그만입니다. 생명 진입 같은 것은 교통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대부분의 경우에 교통할 줄 모른다. 사실 사역을 상의할 때도 생명 진입에 대해 교통할 수 있다. “그때 사역할 때, 이렇게 유로했어요. 저는 그때 당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방면에 경험이 없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해 말하지 않고 잔꾀를 부렸던 거예요. 이건 궤사한 것이고 사역에 책임감이 없는 거잖아요. 저는 이걸 알게 됐는데, 앞으로 고쳐야겠어요.”라고 하니, 그는 “이렇게 교통할 줄 몰랐네요. 저도 당신처럼 제 자신을 털어놓아야겠어요.”라고 한다. 보아라, 그도 말한다. 그는 “저는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이 맞으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 말 안 들으면 누구 말 듣겠냐고 말이죠! 당신이 나보다 못하니, 당연히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건 제 교만이에요!”라고 한다. 이것이 교통하는 것이 아니냐? 사역을 교통해도 생명 진입을 교통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너희는 어떤 일들을 경력하고 나서, 그런 일들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인식했고, 자신 안에 어떤 경력과 인식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기록하거라. 기록한 후, 할 일이 없을 때 혼자서 생각하고 반복적으로 묵상해 보아라. 어떤 때는 그 기록 가운데서 하나님의 깨우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깨우침의 기초에서 또 묵상하여라. 너는 영적 수양을 기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정식적인 글로 써야지, 두서가 없이 생각나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글이 되게 해야 하고, 스스로 자신의 글을 다듬을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언어를 규범화하고, 문법이나 격식이 다 정식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점차적으로 짧은 일기가 쌓이고 쌓여서 갈수록 글이 되고, 갈수록 글이 되면 점차 너는 긴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글을 쓸 줄 모르면, 말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글을 쓸 줄 모르면, 사고할 줄 모르고 묵상할 줄 모르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글을 쓸 때, 사람은 마음을 쓰고 시간을 들여 한 마디 말을 쓸 때, 문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고 사고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들이고 생각을 들여 세부적으로 이런 일을 대한다. 말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말할 때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고, 마음속으로 생각나는 대로 말하며, 머리를 한번 거쳐 말이 되면 되지, 요구가 엄격하지 않다. 그러나 글은 요구가 엄격하다. 구조, 논리, 사상, 문법에 대한 요구가 다 엄격하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서 훈련하면 할수록 더욱 진보가 있게 된다. 훈련하면 할수록 더욱 진보가 있게 된다. 짧은 글부터 시작해 쓰게 되면 점차적으로 긴 글을 쓸 줄 알게 되고, 점차적으로 대본도 쓸 줄 알게 된다. 지식이 있고 그런 기초가 있고, 글쓰기를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은 다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을 쓰느냐 안 쓰느냐에 달렸다. 이 방면에 힘쓰지 않으면 수확이 없고 공백이 된다. 마치 밥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이 밥하는 것을 배울 때 다 토마토 계란 볶음부터 시작하는데, 그것이 가장 만들기 쉽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기름이 끓기 시작할 때, 계란을 깨서 넣자 툭툭 튄다. 다 익어서 맛을 보니 싱거워서 소금을 좀 넣는다. 다음에는 계란을 깰 때 소금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다. 차츰 네가 할 줄 아는 것은 토마토 계란 볶음만이 아니다. 대파 계란 볶음, 계란 두부 볶음, 할 줄 아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점차 야채도 볶을 줄 알게 된다. 그것은 연습하기에 달렸다. 공을 좀 들이면, 1~2년이면 수확이 있게 된다.

글쓰기는 사실 어렵지 않다. 무엇 때문일까? 네가 만약 꽃을 수놓는 것처럼 글을 쓴다면, 그것은 글이 아니다. 우선 너의 출발점부터 틀린 것이다. 너는 먼저 글 쓰는 것은 마음속 말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속에 할 말이 있는데, 누구에게 말할지 몰라서 노트에 써 놓는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하나 노트에 써 놓는 것이다. 그다음 스스로 보고 ‘이 말은 맞지 않구나. 앞뒤가 바뀌었네, 뒤에 놓아야겠어. 이 말도 안 맞네. 앞에 놓아야지.’라고 한다. 순서가 갈수록 점점 매끄러워진다. 글의 언어 구조와 언어 풍격은 바로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 시작할 때 가장 간단한 것은 솔직한 말을 노트에 써 놓는 것이다. 이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사람은 늘 글 쓰는 것을 마치 무슨 첨단 기술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비밀 같은 것도 없다. 네가 자주 쓰고, 서면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되면, 갈수록 너의 구어도 점점 강해지고 세련되어지며, 점점 더 논리성과 철리(哲理)가 있게 된다. 그러면 네가 말할 때, 마음속과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들을 서면 형식의 방식으로 표현해 낼 수 있고, 구두어가 되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듣기에도 분명하고 명료해진다. 글 쓰는 솜씨가 먼저 통과돼야 한다. 어떤 방면이든 공을 들여야 한다. 공을 들이지 않으면 수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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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공심채(空心菜): 동남아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줄기 속이 비어 있는 야채.

②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⑥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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