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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편 늘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면 불신파다

너희에 대한 요구를 높여야 너희가 진보할 수 있다. 요구를 높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고, 난제를 내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 그 목적은 너희에게 업무 방면의 지식과 상식을 더 많이 장악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속으로 원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좋은 것들을 많이 배웠는데도, 하나님은 그걸 전혀 언급하지 않고, 쓰지 못하게 하시네. 그러니까 우리도 이렇게 언급하지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거잖아. 만약 썼다가 또 빼버리면 어떡해? 혼나면 어떡해?’ 지금 내가 먼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그것들을 대담하게 쓰거라. 대담하게 쓰되, 여러 형제자매들에게 보여 주어 평가를 받아야지, 독선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 하나님께서도 대담하게 쓰라고 말씀하셨으니, 대담하게 쓸 거야.”라고 하지 말라. 대담하게 한다는 것은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건방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대담하게 하는 것에도 범위가 있어야 하고, 원칙에 부합되어야 하며, 형제자매들이 보고 누림이 있어야 한다. 만약 누군가 “이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면, 다시 바꾸어야 하지 않겠느냐? 끝까지 고집부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안 된다. 너는 들어야 한다. 듣고 나서 “정말 그러네, 그럼 고쳐야지.” 하면서 고치니, 누군가 “이젠 좀 괜찮네요. 보니까 느낌도 좋고 큰 문제도 없어요. 이렇게 해도 됩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으냐! 이렇게 되면 한 방면으로는 너희가 업무적인 면에서 점차적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숙련되고 능숙해질 수 있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 하나, 공과를 배우게 되는 것도 있다. 일에 부딪혔을 때 독선적이면 안 된다. ‘내 말대로 해야 돼, 다들 말할 자격이 없어. 난 원칙을 알고 있는데, 다들 아무것도 모르잖아. 난 잘 알아!’라고 생각한다면 독선적인 것이다. 독선적인 것은 사탄의 패괴 성정이고, 정상 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독선적이지 않겠느냐?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고, 다 같이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봤을 때 다 찬성해서 통과시킨다면, 그것은 참 잘한 것이다. 누군가 혹은 일부분 사람들이 이의가 있다면, 그 업무 방면에서 꼼꼼하고 착실하게 대해야지, 듣고도 못 들은 척 지나가 버리면 안 된다. ‘누구라고? 뭘 제기했다고? 뭐하자는 거야? 네가 알겠어, 내가 알겠어? 내가 아는 게 너보다 적겠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넌 몰라!’ 그러면 성정이 나쁜 것이다, 그렇지? 아마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잘 모르거나 아마추어일 수도 있고, 또 네가 한 것이 일리가 있고 옳을 수도 있겠지만, 너의 그 성정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이고, 원칙에 부합되고. 진리에 부합되는 것일까? “네? 누가 제안했다고요? 문제 있다고요? 그럼, 우리 같이 봅시다. 저 혼자만 보지 말고, 다 같이 봐요. 이 방면에 대해 이의가 있거나, 이 방면에서 발견한 것이 있거나 경험이 있는 분들은 다 같이 보고 토론해 봐요.” 만약 여러 사람들이 보기에 진짜 그렇게 하면 안 좋고, 그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한두 번 봤을 때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어도, 세 번, 네 번 보면 볼수록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그것은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말 문제가 있으니 우리는 이 일에서 바로잡고 개선해야 하는데,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냐 아니면 나쁜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이러면 문제점을 고친 것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면서 교통을 하니 성령이 또 깨우쳐 준다. 그리고 그대로 하였더니 다들 “맞아요, 원래보다 훨씬 좋네요!”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냐? 얼마나 좋은 일이냐! 네가 이렇게 자신의 상상과 생각을 내려놓고 진리를 실행하며, 자세를 낮추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면서 독선적으로 하지 않으니 어떻게 되었느냐? 성령 역사의 기회를 얻어 성령의 깨우침을 받았다. 성령이 깨우쳐 주니 어떻게 되었느냐? 업무 방면에서 또 하나를 배웠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

너는 그 일을 겪고 나서 ‘일이 임하면 독선적으로 해서는 안 돼, 독선적으로 하면 다들 싫어해!’라고 한다. 다들 싫어하는데, 하나님은 혐오하지 않겠느냐? (혐오합니다.) 공과를 배웠다, 그렇지? 네가 늘 이렇게 실행하면, 한 방면으로는 너의 본분과 관련된 업무 방면에서 진보가 있게 되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축복을 얻는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네가 진리 방면에서, 진리를 실행하는 방면에서 길이 있게 된다. 너는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차츰차츰 원칙을 알게 되고 길을 찾게 된다. 너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는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거들떠보지 않고 혐오하는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는지를 알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과 깨우침을 받는다면, 마음이 즐겁겠느냐 아니면 괴롭겠느냐? 즐거울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자신도 즐거울 것이다. ‘이 일, 잘했어.’ 하면서 마음속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 평안과 기쁨이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준 느낌이고, 성령이 너에게 준 감동이다. 네가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것을 고집했다고 하자. ‘누구 말도 안 들을 거야, 듣는 척만 할 거야, 안 고치고 이대로 할 거야. 내가 한 거 틀리지 않아, 충분히 일리가 있어.’ 그래, 어쩌면 네가 한 것에 일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문제도 없고, 그 부분에 잘못된 것도 없으며, 업무 방면에서도 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알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너의 그런 표현과 실행을 보고는 “이 사람은 성정이 좋지 않아! 일이 임했을 때, 다른 사람의 말이 맞든 틀리든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 고집만 부리면서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아.”라고 말할 것이다. 다들 알게 된 것이다, 그렇지? 사람들은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들도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너의 그런 표현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너무나 잘 보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를 감찰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일언일행을 관찰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다 보았다. 하나님은 보았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넌 참 강퍅한 사람이구나,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러더니, 잘못한 상황에서도 여전하구나. 어떤 상황에서든 네가 유로(역주: 흘러나옴)하고 표현하는 것은 다 반박하고 대항하는 것이고, 어느 누구의 의견이나 제안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속으로 완전히 저항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거절하니 너는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말한다. 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것은 네가 표현한 것이 어떤 방식상의 잘못이나 어떤 행위적인 잘못이 아니라 성정을 유로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성정을 유로한 것일까? 바로 네가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적대시한 것이다. ‘적대시한다’라고 정의가 내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은 위험하다고 본다. 다들 기껏해야 “이 사람은 성정이 좋지 않아, 고집만 부리고 교만해! 그리고 어울리기도 힘들어. 이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전혀 받아들이지도 않아.”라고 말할 것이다. 기껏해야 너에게 이런 평가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너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느냐? 사람이 너에게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는 너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는 동시에 사람의 일언일행을 살펴보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에게 “너는 진리를 적대시한다.”라는 정의를 내렸다면, “너는 패괴 성정이 좀 있구나, 말을 잘 안 듣는구나.”라는 정의가 아니라 “너는 진리를 적대시한다.”라는 정의를 내렸다면, 이것은 큰일일까 아니면 작은 일일까? (큰일입니다.) 이러면 위험하지 않겠느냐? (위험합니다.) 어떻게 위험하겠느냐? 위험하다는 것은 사람이 너를 어떻게 보거나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리를 적대시하는 너의 그 패괴 성정을 어떻게 보는지에 달렸다. 그럼 네가 진리를 적대시하는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볼까? 하나님은 어떻게 대할까?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이 사람은 진리를 적대시하고, 진리를 싫어한다.”, 이렇게만 말하고 평가할까? 진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진리는 누구를 대표하느냐?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이 어떻게 볼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진리를 적대시하는 것을 어떻게 볼까? (하나님과 적대되고,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으로 보십니다.) 심각하지 않느냐? 진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적대시한다고 할까? 사람이 하나님을 욕했느냐? 욕하지 않았다. 면전에서 반항했느냐? 아니다. 뒤에서 무엇을 말했느냐?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성정을 유로한 것이 하나님을 적대시한 것으로 되느냐? 이것은 좀 부풀리는 것이 아니냐? 여기에는 뭔가 있다, 그렇지? 무엇일까, 알고 있느냐? 그런 성정을 갖고 있기에 언제 어디서나 그런 성정을 유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살아가며, 그런 삶의 방식과 행위적인 수법을 전혀 포기하지 않고 저버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런 것에 의해 살아가고, 그런 성정에 의해 살아간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너에게 하나님을 적대시한다고 한다면, 네가 수긍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너는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일이 있을 때, 너에게 그런 성정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유로하지 않겠느냐? (유로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성정이냐?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진리를 적대시하는 성정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든 너는 듣고 나서 물음표를 달고, 해부해 보고, 분석해 보고, 일부분만 골라 받아들이는데, 이런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즉,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내가 보기엔 진리가 아니야, 다 맞는 거 같지도 않아!’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정을 유로한 것이 아니냐? 네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순복할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순복하지 못한다. 네가 순복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여전히 너의 하나님이겠느냐? 아니다. 그럼 하나님을 무엇으로 대한 것일까? 연구할 대상, 의혹의 대상으로 대하고, 심지어 평범한 사람으로, 사람과 똑같이 패괴 성정이 있는 사람으로 대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패괴 성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람이 이 지경까지 되어 하나님과 이런 관계일 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어떨까? (적대 관계입니다.) 적대되고 대립하는 관계이다. 그렇지?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지 못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너를 원수로 여기지 않지만, 네가 하나님을 대립면으로 여기면서 그분이 너의 진리이고 길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일이 임했을 때 먼저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잘 모르겠어, 확실하지 않아.’라고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그것을 확실히 밝히는 것이 첫째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를 보는 것이 첫째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찾지 못하겠고, 또 어떤 진리와 관계되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너는 원칙을 찾아야 한다. 어떤 원칙일까? 그것은 바로 먼저 순복하는 것이다. 먼저 순복하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기다려야 하는데,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갖지 말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잘 모를 때는 이렇게 한다. 깨달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들면 누군가 의견을 제기했을 때, 이젠 그것을 대하기 쉽지 않겠느냐? 그 일을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될지 쉬워졌지? 이것은 한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하면 진리에 부합되겠느냐? 바로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견을 듣고는 “무슨 일이에요? 문제가 좀 있다고요? 그럼 다 같이 봅시다!”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너의 본분과 관련되는 것이니, 너는 반드시 진지하게 대해야지, 본체만체해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가 올바르고, 정형도 올바르다. 정형이 올바른데,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을 유로하겠느냐? (유로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적대시하는 성정을 유로하지 않는다. 이렇게 실행하면 사람의 패괴 성정을 대체하게 되는데, 그러면 진리를 실행한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실행하면 어떤 효과에 도달하겠느냐? (성령의 인도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가 있는 것은 한 방면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 진리를 실행한 것이다. 어떤 때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네가 그 일에 대해 듣고 나서 아주 쉽게 이해하고, 머리로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어서 고치면 끝나는 일이다. 이것은 작은 일이다. 그럼 큰일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네가 이렇게 실행하면, 하나님은 너를 진리를 실행하고 사랑하는 사람, 진리를 싫어하거나 적대시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의 마음을 보게 된 동시에 너의 성정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큰일이다. 그렇지?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살아내고 유로하는 것, 하나하나의 일을 하는 태도와 마음과 정형 등 이런 표현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을 함에 있어 늘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에 빠진다. 인ㆍ사ㆍ물에 빠지는 것은 큰 결함이다. 항상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다른 사람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고 고의로 난처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혹은 그 사람이 이래서 저래서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 맞느냐? (틀립니다.) 왜 틀렸다고 하느냐? 늘 인ㆍ사ㆍ물에 빠지는 것은 틀림없이 옳지 않다. 그런 사람은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고, 늘 사람 앞에서 혹은 사람들 가운데서 체면을 찾고 도리를 따지려고 하고, 늘 사람의 방법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이것은 생명 진입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다. 네가 이렇게 하고, 이렇게 실행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영원히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네가 항상 하나님 앞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이 너에게 배치해 준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방법대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너의 마음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너의 모든 생각과 마음, 정형이 여태껏 하나님 앞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인ㆍ사ㆍ물에 빠지는 사람을 하나님은 이렇게 본다. 따라서 말재주가 좋고, 사유가 빠른 사람이 ‘말주변이 좋아서 사람들이 다 날 부러워하고 감탄해, 다 날 우러러보고, 날 인정해.’라고 하는 것들이 소용 있겠느냐? 네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위신을 세웠겠지만, 하나님 앞에 있으면 하나님은 너를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불신파라고 하고 진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팔방미인이고 어떤 사람이든 다 잘 다루고, 일을 아주 잘 처리하고, 누구와도 다 잘 어울릴 수 있겠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평가 한마디에 너는 끝이 난다. 너는 결말이 없는 것으로 규정된다. 하나님은 “이 사람은 불신파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복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진리를 적대시하고 전혀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라고 한다. 이런 평가가 어떠냐? 너희들이 바라는 평가이냐? (아닙니다.) 틀림없이 너희가 바라는 평가가 아닐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는데 뭐. 지금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주위 사람들과 잘 지내는 거야. 이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같이 지내겠어? 같이 어울리기 힘들 거야. 적어도 이 사람들과 익숙해지고 잘 다뤄야 돼.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이것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고, 매사에 하나님 앞에 와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이 “너는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고 열납하는 사람이구나. 하나님은 너의 마음을 보았고, 너의 행동도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평가는 어떠하냐? 보호막 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

너희는 평소에 이런 것을 중시하였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외부적인 본분을 하든 아니면 하나님 집의 여러 방면의 사역이나 업무와 관련이 있거나 그것에 가까운 본분을 하든, 어떤 본분을 하든 늘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곧 불신파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확하느냐? 너희는 이런 것을 체험할 수 있느냐? 지금 어떤 사람들은 환경이 허락되지 않아 본분을 하지 못하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늘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알고 있느냐? (그것은 늘 하나님 앞에 오기 때문입니다.) 맞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 안의 정형이 어떠한지를 결정한다. 만약 네가 늘 하나님을 더듬을 수 없고 늘 연약하고 소극적이거나 방탕하고, 혹은 마음에 아무런 부담이 없고 본분을 해도 아무런 부담이 없고 마음이 늘 흐리멍덩하다면, 이것은 좋은 정형이냐 아니면 나쁜 정형이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정형이냐 아니면 전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 정형이냐?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 정형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지 스스로 가늠해 보거라. 이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냐 아니면 극소수이냐? (극소수입니다.) 그렇다면 위험하다. 춤을 추는 사람이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든, 글을 쓰는 사람이든, 촬영을 하는 사람이든, 마음에 늘 본연의 일이 없고 방탕하고 단속을 받지 않고, 일이 임하면 늘 어리둥절해지고, 어떤 일이 어느 방면의 진리에 관련되는지 모르고, 일을 해도 효과가 있는지 모르고, 또 온종일 일을 해도 어떤 일에서 하나님께 득죄했는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열납하고 어떤 일을 증오하는지 모른 채 그저 흐리멍덩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이런 정형이 어떠냐? 이런 정형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일을 함에 원칙이 있을 수 있겠느냐? 이지 있게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본분하면서 ‘난 단속을 좀 받아야겠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충심으로 잘해야겠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충심 있게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면, 너희가 이렇게 본분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 (힘만 쓰는 것입니다.) 정말 힘만 쓰는 것이다! 제대로 말했구나, 그저 힘만 쓰는 것이다. 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숙식을 제공받고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다. 비록 돈은 벌지 않지만 숙식이 해결되니, 괜찮다. 그런데 진리를 얻었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정말 큰 손해를 봤다. 정말 바보스럽구나! ‘멍청한 노루’라는 동북 지역어가 있다. ‘멍청한 노루’란 무슨 뜻일까? 누가 해석해 보거라. (융통성이 없고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좀 모자라고 아이큐가 높지 않은데, 생각, 사유, 아이큐가 다 부족하다. 그렇지? 너희는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은 햇수도 짧지 않고, 하루 이틀 믿은 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으면서도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무엇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를 모른다. 지금은 좀 알았느냐? (네.) 무엇을 알았느냐? 말해 보거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진짜냐 가짜냐? (진짜입니다.) 진짜는 틀림없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아직 그것을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정도까지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는 <욥기>를 읽어 본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욥기>를 읽을 때, 너희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느냐?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았구나. 그럼 너희는 욥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그런 정형과 마음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었느냐? 반나절? 이틀? 일주일? 아니면 한두 달? 아니면 1~2년? (2~3일입니다.) 3일이라고? 3일 지나면 그만이고, 없던 일로 된다. 그렇게 되면 계속 봐야 한다. 그런데 보고 나서 또 3일을 지속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너는 그 책을 보고 감동을 받았을 때, 기도해야 하고 또한 조용히 심지(心志)를 세워야 한다. 너도 욥과 같은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너에게 역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또 너를 인도해 주고, 너에게 환경을 배치해 주고, 힘을 더해 주고 그런 환경 속에서 굳게 서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게 보호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너는 늘 이 목표를 위해, 마음속으로 도달하려는 것을 위해 간청하고, 간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너의 진실한 마음을 보게 되면,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욥에게 했던 것처럼 너의 온몸에 악창이 나게 하고,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분량에 따라 너에게 점차적으로 더해 줄 것이다. 너는 진심으로 간청해야 한다. 오늘 읽고 나서 감동을 받았다가 이틀 간청하고는 그만이고, 돌아서면 없던 일이 되어 버리면 안 된다. 누군가 “욥이 누구예요?”라고 물었을 때, “누구요? 욥? 욥이 누구예요? 저는 왜 모르죠? 들어 본 것 같기도 하네요.”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느냐? 3일 안 보면 다 잊어버리고 마음에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 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그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늘 그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묵상해야 하며, 또 책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보고, 욥에 관한 글이나 하나님 말씀을 읽어 보면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또 그런 인식이나 체험이 있는 사람, 혹은 그런 심지가 있는 사람과 교통을 해야 한다. 너는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노력해야 하겠느냐? 보기만 하는 것은 진짜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 일에서 공을 들여야 한다. 기도해야 하고, 실행에 옮겨야 하며, 동시에 고생할 심지가 있어야 하고,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 역사해 달라고 간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리 열정이 있어도 소용없다. 너의 그 열정은 헛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할까? 하나님은 너의 분량에 따라 안배해 주고 배치해 준다. 예를 들어 네가 대학 시험을 본다고 하자. 만약 칭화대학에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너는 그것을 위해 공을 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배운 것을 복습하고,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고, 강사도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네가 부모에게 말하면, 부모는 “우리 애가 의욕이 있구나. 학업에 충실하고 포부도 있어, 머저리는 아니야.”라고 할 것이다. 그럼 부모는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 너를 위해 돈을 마련할 것이다. 한편으로 등록금을 마련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 너에게 강사를 붙여 주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너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또 데려올 것이다. 그 기간에는 너를 피곤하게 하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하고 영양이 부족하지 않게 하고, 마음이 분산되지 않게 하고, 편안하게 해 줄 것이다. 또 너의 생활 방면이나 학업 방면이나 하루 일과를 안배해 주고, 혹은 너 대신 외부의 일을 해결하고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이렇게 잘해 줄 것이다. 이렇게 너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복습하고 예습할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 너의 꿈을 이루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네가 어떤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지, 너에게 어떤 심지가 있는지를 하나님에게 말해야 하고, 이것을 오랫동안 기도하고 간구해야 한다! 간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가끔 두어 번 기도하고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니 ‘됐어, 그만하자. 될 대로 되라지 뭐, 순리에 맡기자. 아무튼 일이 임하는 대로 가지 뭐.’라고 하면 안 된다. 너의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다. 냄비 열정인데 하나님이 역사하겠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환경을 배치하겠느냐?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의 간절한 마음을 본다. 너의 그 간절한 마음과 의지력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지, 너의 마음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를 본다. 또한 하나님은 기다릴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기도와 간구, 너의 심지와 소망은 들었지만, 아직 고생을 견디겠다는 심지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말은 던져 놓고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이 역사할 리가 있겠느냐? 절대로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많이 간구하고 기도해야 하고, 이 일에 공을 들이고, 이것을 묵상하고, 또 하나님이 너에게 배치해 준 환경을 세심하게 느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조금씩 너에게 임할 것이고,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네가 “욥이 너무 부러워요, 베드로도 너무 부러워요.”라고 하는데, 부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리 부러워해도 너는 욥이나 베드로가 아니고, 아무리 부러워해도 하나님은 너에게 똑같이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네가 그들과 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너는 그들과 같은 심지와 인성을 갖추지 않았고, 그들처럼 진리를 추구하거나 사모하는 마음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이런 것들을 갖추게 될 때에야, 하나님은 너에게 많은 것을 더해 준다. 알았겠지? (네.)

지금 너희 대부분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어 최종에 온전케 될 심지가 있느냐? (있습니다.) 그 심지가 얼마나 크냐?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느냐? 알고 있느냐? (정형이 좋을 때는 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와 자신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임하거나 속으로 연단받거나 어려운 점이 있을 때는 믿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소극적인 정형에 빠지게 되고, 처음에 세웠던 심지도 조금씩 작아집니다.) 그러면 안 된다, 너무 연약하다. 네게 어떤 환경이 임하든 심지가 변하지 않을 수 있어야 진심인 것이고,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참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이다. 일이 좀 생기거나 난이도가 좀 있으면 움츠러들고, 소극적이 되고, 가라앉고, 자신의 심지를 포기한다면 안 된다. 너는 목숨까지 내놓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이 임하든, 설사 저한테 죽으라고 해도 저는 이 심지를 포기하지 않고, 이 목표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너를 막아설 것이 없고, 하나님은 역사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일이 임하면 너는 ‘어떤 일이 임하든, 그건 내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 중의 한 부분이고, 하나님이 하신 거야. 연약하긴 하지만 소극적이 되지는 않을 거야.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리고, 또 이런 환경을 배치해 주심에 감사드려. 포기하면 안 돼. 포기하면 사탄과 타협하는 거고, 나 자신을 망치는 거야. 나의 소망과 심지를 포기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거야.’라는 이런 견해와 인식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 어떤 작은 일이 임하든 다 생명 성장 과정에서의 한 가지 작은 에피소드인데, 그것으로 네가 가는 길과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가로막히면 안 된다. 네가 정지해도 되고, 한곳에 머물러 있어도 되지만, 방향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네가 잠깐 쉬거나 잠깐 멈추는 것은 괜찮지만, 절대로 발걸음을 멈추지 말라. 너는 그런 심지와 결심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다른 사람이 어떻든,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너는 심지가 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난 너를 포기한다.”라고 하니, 네가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셨으니, 저도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등신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너는 너무 깊이 패괴됐다. 나는 너를 혐오한다.”라고 하니, 네가 ‘하나님이 나를 혐오하시는데, 더 살아서 뭐해? 밧줄로 목 매 죽어 버려야지.’라고 한다면, 등신이 아니겠느냐? 이러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지금 너희 분량으로는 하나님에게 시련을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하나님, 저를 시련해 주세요.’라고 할 분량이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무엇일까?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 저를 인도해 주시고, 깨우쳐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의지력을 갖고 나아가도록 해 주세요. 제가 의지력을 갖고 저의 소망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제가 어떤 고통을 받든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시고, 보호해 주세요. 제가 비록 연약하고 분량이 작지만,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시고, 저를 보호해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늘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시시덕거리고 방종할 때 너는 이 일을 갖고 기도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놀 때 너는 이 일을 갖고 기도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소극적일 때도 너는 이 일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단잠에 빠져 있거나 늦잠을 자고 있을 때 너는 일어나 이 일을 갖고 기도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쫓아가고 육체의 안일을 누릴 때, 혹은 세상 조류를 따를 때, 너는 이 일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보아라, 네가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고, 자신을 단속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유지하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은 다 보게 된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을 볼 때,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배치하여 손으로 너의 마음을 만진다(원문: 觸摸). 왜 이렇게 말할까? 말하자면, 하나님이 너에게 환경을 배치할 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이 이 일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지, 혐오하는지, 좋아하는지, 순복하는지, 조용히 기다리는지, 아니면 진리를 찾고 구하는지, 또 너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고, 어떤 방향을 향해 가는지를 본다는 것이다. 네 마음속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이 너에게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배치했을 때 네 마음속의 하나하나의 생각과 뜻, 하나하나의 견해, 하나하나의 심경의 변화까지도 하나님은 다 느낄 수 있다. 비록 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그저 혼자 마음속으로, 자신의 세계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고, 한눈에 꿰뚫어 본다. 보아라, 사람은 눈으로 너를 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으로 너의 마음을 만진다. 너와 이렇게 가깝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감찰을 느낄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네가 만약 그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서 산다면, 너는 위험하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며, 너와 하나님 사이는 멀리 떨어져 있지, 마음과 마음이 맞닿은 것처럼 가깝고 친근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도 하나님은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은 너무나 잘 느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려는 심지와 목표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려는 심지가 있고, 항상 이것을 놓고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면,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해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으며, 하나님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저 자신은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 하나님은 아시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너 자신만 분명하게 알고 있고, 하나님이 아는지를 모른다면, 너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알아들었느냐? 그럼 왜 관계가 없다고 할까? 네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고 있는지, 너를 인도해 주는지, 너를 보호해 주는지, 네가 일을 잘못했을 때 책망하는지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다 느끼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네가 혼자 생각하고 혼자 도취되어 있다면, 그건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겠느냐? 무엇으로 유지하겠느냐? 마음의 간구와 기도와 소통으로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관계는 너로 하여금 늘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한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아주 안정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늘 겉면에서 하고 겉면의 사무에 바쁜데, 1~2일 영 생활을 안 해도 마음에 아무런 느낌도 없고, 3~5일 영 생활을 안 해도 아무런 느낌도 없고, 1~2개월 영 생활을 안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이것은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구하지도 않았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영적인 소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구한다는 것은 너에게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알 수 있도록,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네가,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고, 인도해 주고, 공급해 주고, 깨우쳐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도 같은 경우는 범주가 상대적으로 넓다. 어떤 때는 마음속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께 말하고, 소극적이거나 연약해지면 하나님께 마음속 말을 하고, 또 자신에게 패역이 있을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혹은 날마다 임하는 일에서 자신이 꿰뚫어 봤든 못 봤든 다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기도다. 기도의 범주는 기본적으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인데, 어떤 때는 정해진 시간에 하고 어떤 때는 정해진 시간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한다. 영적인 소통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할 말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이것이 영적인 소통이다. 할 말이 있을 때는 한 가지 일을 놓고 하나님께 말하면서 기도한다. 일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실까?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염려하실까?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책망하실까? 하나님, 제가 일을 잘못한 거 같습니다. 정말로 잘못한 게 맞다면 제가 알 수 있도록 저를 책망해 주세요.’ 이런 것이 언제 어디서나 영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어떤 때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마음이 아주 괴롭다고 하자. 그때는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고 눈을 감을 필요도 없이 마음속으로 바로 하나님께 말하면 된다. ‘하나님, 이 일에서 저를 인도해 주세요. 제가 연약해서 이겨 내지 못하겠습니다.’ 그냥 몇 마디 간단한 말이지만 너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하나님은 안다. 어떤 때는 집 생각이 나서 말한다. “하나님, 집이 너무 그리워요…” 집이 그립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울해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다. 네가 다른 사람과 말한다면 그 사람이 너보다 집을 더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 영향을 받아 더욱 그리워하게 되는데, 너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네가 하나님께 말하면 하나님이 너를 위로해 줄 것이고 즐거워지게 할 것이고, 그 난관을 넘기게 할 것이고, 그 작은 고비를 넘기게 할 것이다. 그럼 너는 그 고비, 그 작은 돌멩이에 넘어지지 않을 것이고, 구속받지 않을 것이고, 또 본분에 영향받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다. 어떤 때는 여러 사람과 얘기를 하다가 혹은 교통을 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게 되거나 불편해지면 얼른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다. 별로 간구할 것이 없거나 하나님께 역사하고 깨우쳐 달라고 할 것이 없어도 너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말을 하고 대화하면 되는 것이다. 네가 항상 어떤 느낌을 갖고 있어야 할까? 즉, ‘하나님은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옆에 계시면서 한 번도 날 떠난 적이 없으셔. 난 느낄 수 있어. 내가 어디에 있든, 쉬고 잠을 자든, 밥을 먹든, 혹은 예배를 드리든, 혹은 본분을 하면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든, 난 하나님이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시고, 날 떠나신 적이 없다는 걸 알아.’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최근 몇 년간 한 달 한 달 지나온 것을 생각해 보면, 자신의 분량이 자랐다는 것이 느껴지고 하나님이 인도해 주고 있고, 하나님이 사랑으로 계속 지켜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생각되면 ‘하나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를 인도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처럼 이렇게 너무 연약하고, 나약하고, 패괴 성정이 깊은 사람이 오늘날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영적인 소통이 아니냐? 만약 이렇게 한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할 말이 아주 많지 않겠느냐? 며칠 동안 하나님과 할 말이 한 마디도 없는 그런 상황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다면, 너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을 하나님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의 가장 가까운 분이 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분으로, 제일 가까운 친구로, 가장 의지하고 신뢰하고 믿을 수 있고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가까운 가족으로 되게 한다면 너는 하나님과 할 말이 없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과 늘 할 말이 있다면, 늘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늘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면, 너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인도해 주는지, 어떻게 보호해 주는지, 어떻게 보살펴 주는지, 또 어떻게 너의 평안과 기쁨이 되어 너를 축복해 주고 깨우쳐 주는지, 또 어떻게 너를 질책하고 징계하고 채찍질하고 심판하고 형벌하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 너는 마음속으로 아주 확실하고 뚜렷하게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흐리멍덩하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있고 본분도 하고 있어요. 예배도 드리고요. 또 매일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죠.”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다 거치지만, 겉면의 행위는 아닐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 다 알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만약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을 가장 친하고 가장 가깝고 가장 믿을 만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나 지심인(知心人)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다. 여기까지 교통하자, 너희는 내가 말한 대로 한동안 실행한 다음, 마음속 정형에 변화가 생겼는지 보거라. 내가 말한 대로 실행하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정상적인 상태가 있게 되고, 정상적인 정형이 있게 될 것임을 반드시 보장할 수 있다. 사람의 정형이 정상적이 돼야 각 단계에서 혹은 서로 다른 인ㆍ사ㆍ물이나 환경에서 사람이 표현하는 것과 유로하는 것이 정상적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은 생명이 자라고 조금씩 조금씩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알겠느냐?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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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③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④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⑤칭화대학: 중국 명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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