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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편 범사에 진리 방면으로 깨달아야 진보가 있다

어떤 일에서든 공과를 배워야 한다. 그러면 사람에게 진보가 있게 된다. 어떤 일이든 그저 그것을 일로만 처리하고, 일이 임해도 공과를 배울 줄 모르고 성찰할 줄 모르고 반성할 줄 모르며, 진리로 그 문제를 대할 줄 몰라 궁극적으로 진리로 해결할 줄 모른다면 결과적으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일을 겪었을지라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도 못하게 된다. 영리한 사람, 이해력이 있는 사람들은 30~40년 살면 정말 많은 인생의 철리(哲理)를 깨닫는다. 생활 면에서도 보건이나 보양 쪽으로 많은 상식을 알고 있고, 의식주에 관해서도 많은 상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실수를 많이 피할 수 있고 치우치게 가는 것을 많이 피할 수 있으며, 사람을 대하고 일 처리하는 방면에서도 적지 않은 경험이나 교훈을 총결해 낸다. 멍청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50~60년을 살아도 흐리멍덩하다. “어떻게 살아야 건강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흐리멍덩하여 “몰라요.”라고 한다. “사람이 뭘 먹어야 몸이 상하지 않습니까?”, “몰라요, 아무튼 하루 세끼 굶지 않고 배불리 먹으면 되죠!”, “사람은 어떤 것을 먹어야 몸이 건강하고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몰라요.”,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인류가 어떠하다고 생각됩니까?”, “다 별로죠, 뭐! 좋은 사람이 적고 나쁜 사람이 많지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일이 있으세요?”, “큰일, 작은 일, 다 많죠.”, “그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총결한 게 있어요? 이 세상에 주재자가 있나요?”, “몰라요. 어쨌든 전 하늘을 믿어요. 바람 불고 비 오는 거야 하늘이 하는 거죠.”, 이렇게 어떤 일에 대해서도 다 흐리멍덩하다. 이런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냐? (맞습니다.) 너희 대부분은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느냐? 무지몽매하게 살고 있느냐? 아니면 마음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느냐? 너희를 영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습니다.) 영리한 사람도 사리에 밝은 사람도 아니라고? 그렇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습니다.) 왜 아니라고 하느냐? 지금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좀 있느냐? 다들 없느냐? 생활상의 일에 대해 깨달은 것이 좀 없느냐? 아직 없구나. 거기까지 아직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 그렇다면 너희의 소질이 문제가 된다! 너희의 머리로 일을 생각할 때, 보통 몇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 몇 가지 방면까지 내다볼 수 있느냐?

나는 어떤 형제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바깥일에 대해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했을까? “저는 몇 년째 신문도 잘 안 보고 뉴스도 잘 안 봅니다.”라고 했다. 자기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숨은 뜻은 ‘당신이 그런 얘기들을 하시는 걸 보니, 그런 바깥일에 참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당신은 항상 신문도 보고 뉴스도 보시나 봐요.’라는 것이다. 그런 일들에 대해 알려면 항상 잡지를 보고, 신문도 보고, 날마다 오는 신문을 빠짐없이 보거나 뉴스를 매일 찾아가며 확인할 필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 사람은 ‘바깥일들을 얘기하시는 걸 보니까, 당신은 신문이나 뉴스를 적지 않게 봤군요.’라는 생각을 한다. 나도 신문을 전혀 보지 않는다. 가끔 헤드라인을 한 번 보거나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누다 보면, 그 속에서 들은 이야기로 요즘의 일들을 알게 되는 것이고, 혹은 가끔 뉴스를 좀 봐도 요즘 일은 알 수 있다. 날마다 보거나 읽지 않아도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신문은 보지 않고, 시사 뉴스도 보지 않고, 그런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아. 그러니 우리는 그런 일들은 얘기하지도 않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만 신경 쓰면 돼.’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을 믿고서 진리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간파했는지, 사람을 간파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사람을 봐도 간파하지 못하고, 주변에서 늘 접촉하는 사람도 간파하지 못한다. 이것은 참 ‘영적’이다, 그렇지? 내가 너희들 다수에게서 발견한 것이 있다. 무엇을 발견했을까? 너희는 틀림없이 모를 것이다. 너희 대다수는 하나님을 믿은 후 바깥세상과 단절된 것같이 보인다. 바깥일에는 관심을 갖지도 않고 바깥일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주 많다. 마치 세상의 트렌드나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일들과는 다 무관한 것 같다. 그렇게 무관한 모습은 겉면으로 보면 하나님 집의 사람 같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의 일원인 것 같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같다. 만약 이것 하나에만 따라 추리해 본다면 너희는 아마 매우 영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의 지금 상황에 비추어 보면 어떨까?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저마다 본분을 하고 있지만 전문 분야에 관련되고, 본분에 관련된 여러 가지 진리에서는 다 막혀 있다! 한 방면으로는 막혀 있고 한 방면으로는 너희들이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다수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 방면으로 힘쓰지 않는데, 그럼 그 힘은 어디에다 쓴 걸까?’라는 생각을 해 봤다. 바로 영적인 척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고 힘을 쓴 것이다. 영적인 척하는 쪽으로 힘을 쓴다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봐라, 너희들은 바깥세상의 세속적인 그런 일들과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해, 하나님을 믿는 각 방면의 진리에 관해 너희들은 흐리멍덩하게 대하면서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그렇지? (네.) 너희에게 어느 방면이나 다 알아야 하고, 범사에 어느 방면의 본분에 대한 원칙이든 전부 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너희들은 하는 본업에서, 너희들의 범위 내에 있는 일, 본분 내에 있는 일,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을 마땅히 장악해야 하지 않느냐? 그럼 너희들은 장악했느냐?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너희들은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분을 하는 기간에 다 무엇을 추구하느냐? 대부분의 경우, 추구하는 것을 보면 그 출발점이나 추구하는 방식이 맞는 것이냐? 중시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이냐? (틀린 것입니다.)

너희도 성경의 비밀을 밝히는 영화를 보지 않았느냐? 여러 번 보지 않았더라도 다들 한 번쯤은 보지 않았느냐? (네.) 그런데도 왜 너희들은 성경을 여전히 막연하게 숭배하고 있는 것이냐? 너희들은 숭배하는 동시에 성경에 관한 영화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느냐? ‘나는 성경을 숭배하는 면이 없는가? 만약 내가 성경을 손에 들고 있다면 성경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을까? 내 마음에는 성경의 지위가 있을까? 내 마음에도 성경의 지위가 있다면 그건 진리에 안 맞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해부해 본 적이 있느냐? 대조해 본 적이 있느냐?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후 대조해 봤습니다.) 지난번에 대조해 보기만 하고 말았구나. 그럼 너희가 전에는 그런 일 앞에서 왜 마음을 살펴보며 ‘왜 이 영화를 찍은 걸까? 왜 이걸 밝히는 것일까?’라며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그것은 교계를 겨냥한 것이냐? 사실 영화마다 뚜렷하게 겨냥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겨냥하는 대상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교계의 사람들을 겨냥한 것도 아니다. 바리새인을 드러내는 것은 바리새인을 겨냥한 것이냐? 너희에게는 바리새인의 유로와 표현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드러낸 시점에서, 너희들이 보게 된 이 시점에서, 너희는 자신에게 대조해 볼 수 있느냐?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행동과 추구 방식들을 드러냈는데, 그런 것이 자신에게도 있는 것 같고 자신도 그렇게 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만 하면 끝나는데, 너희는 계속 더 생각해 봤느냐? 더 깊이 파헤쳐 보았느냐? 대조해 보았느냐? (겉면으로 대조해 볼 때가 많았고 정말 더 깊이 파헤쳐 보아야 할 때에는 멈춰 버렸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항상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 방면에서 부족하다. 대조되기는 하지만 대조되는 것에서 끝내 버리고 더 깊이 파헤쳐 보지 않는다. 더 깊이 파헤치면서 삶 속의 세부적인 것에 관련되는 것을 보게 되면, 너는 성정에 관한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네가 성정에 관련된 문제를 발견하게 될 때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그 성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성정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때, 길이 생길 때면, 너희는 자신의 일거일동, 생각마다, 행동마다 그 속에 있는 성분이 어떤 것인지, 패괴 성정이 맞는지에 주의하게 될 것이고, 하는 방식에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면의 일이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이나 생각이나 속셈 같은 것, 그런 것에 관련이 된다. 그런 것에 관련이 될 때면 너희는 자신의 패괴 성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고, 점차적으로 자신에게 있는 패괴 성정을 인정하게 되는데, 교만, 궤사, 강퍅 등에 대조되게 된다. 그게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다. 그래서 너희들이 평소에 말을 할 때, 그러니까 교통하거나 일에 대해 말할 때는 대부분 표면적인 말에 머물러 있고 글귀 도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런 단계에만 머물러 있게 되는 원인은 결론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더 깊이 깨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쪽으로 파헤쳐 보지 않으면 너희는 그것을 패괴 성정이라고 인정하지 않게 되고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 단계까지 의식하지 못하여 다만 ‘내게도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있고, 나도 그래.’라는 인식에서만 끝난다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기에 ‘여기에 성정 문제가 있으니 진리로 해결해야 해! 그럼 이 성정은 언제 유로되지? 겉면의 어떤 방식이 이런 성정으로 초래된 것임을 알 수 있을까?’라고 하지 못한다. 너희들은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이 일을 되새겨 본 적도 없다. 그렇지? (맞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많은 말씀을 들었을지라도,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든, 어떤 내용을 들었든, 결국 너희에게서는 두세 마디로 끝나 버리고, 간단하고 총괄적이고 규례적인 도리로 변해 버린다. 늘 도리를 말하면서도 사람은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럼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너희는 무엇이라도 깨달은 것이 좀 없느냐? (진리 면에서 많이 묵상해야 하고, 일이 임하면 대조해 보는 데에서만 끝내지 말고, 더 깊이 더 세부적으로 묵상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실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더 깊은 본성을 파헤쳐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본성을 파헤치는 목적은 무엇이냐? (패괴 성정을 인식하고, 그다음 그것에 알맞은 진리로 해결받기 위한 것입니다.) 맞다. 그래야만 너희는 진리의 실제적인 면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왜 진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묵상하지 않고 단지 도리 방면에 공을 들이고 떠들어댄다면 하나님의 그 말씀이 너에게는 영원히 도리일 뿐이다. 도리란 무엇이냐? 도리가 생명이냐? (아닙니다.) 도리를 말하는 것은 경을 읽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그것에는 차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사실 너희가 늘 도리를 말하는 것은 마치 불교 신자들과 같다. 그들은 한쪽 손을 내밀고 무엇을 외우느냐? (대비주나 나무아미타불 같은 주문을 외웁니다.) 아미타불을 외친다. 툭하면 아미타불 아미타불한다. 이런 것과 너희가 도리를 말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불교 신자들을 보면 항상 하는 말이 “부처님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게 7층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는 것뿐이다. 불교 신자들은 다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 그러나 정작 사람을 구해야 할 때가 되면 그들은 구해 주느냐? 다 구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목숨과 관련되지 않거나 자신이 별로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될 때에는 구해 주지만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과 관련되고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될 때면 그들은 아마 구해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말이 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경문일 뿐이다. 그렇지? 그럼 너희들이 늘 말하는 도리는 그들이 늘 외우는 경문과 차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이방인들이 “뭐하러 가? 또 경 읽으러 가는 거야?”라고 말하지 않더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느냐? (있습니다.) 네가 예배하러 가는데, 사람들이 “뭐하러 가? 또 경 읽으러 가는 거야?”라고 비웃으면 너희는 화가 나지 않느냐? (화가 납니다.)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나느냐? (제가 하나님을 믿는데, 경을 읽으러 간다고 하니 왠지 부처를 믿는 느낌을 받고,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어 화가 납니다.) 그저 모욕당한 느낌이 들고 불쾌한 것밖에 없다, 그렇지? 그럼 너희는 왜 ‘내가 이렇게 하는 건 경을 읽는 것이 아닌가? 경을 읽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라고 대조해 보지 않고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너희는 경을 읽어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날마다 글귀 도리를 말하는 것은 경을 읽는 것이 아니냐? (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고? (네.) 사실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말하면 경을 읽는 것이다. 거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단지 표현법을 바꾸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글귀 도리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글귀 도리를 너희의 실제로 바꿀 수 있을까? 그 길을 찾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면서 그 말씀 속에 내포된 뜻을 묵상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가 되어야만 그 구절에서 의미하는 내용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체험할 줄 아느냐? (체험하는 것이 비교적 얕고, 깨닫는 것도 비교적 얕아 더 깊은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과 대조하면서 자신의 그 방면의 패괴 성정이 어떤 성질에 해당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너희들 스스로 천천히 깨달아야 한다. 내가 너희들을 도와 지금의 정도까지 짚어 주면 너희는 좀 알아들을 수 있지 않으냐? (네.) ‘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좀 알아들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네.’라는 것은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방향이 보이고 길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지? (네.) 옳지,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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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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